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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9 14:12:22 조회 : 2338         
Re..함평-베드로전후서강의 녹취 2번 이름 : 한윤범(IP:)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2번


지난 시간에 중요한 것 하나했는데 그게 뭐냐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하는 그 내용까지 인간의 이성으로도 믿음을 언제든지 유발할 수 있다.라는 정도까지 사람들은 지금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야하는 현상까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가능한 인간적인 종교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큐티하고 이러면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까지 인간들이 제조할 수 있고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그걸 만들 수 있으려면 성경에서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가, 그 근원을, 그 정보를 미리 파악해 놓으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대행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할 수 있다.라는 거기에 희망을 품고 하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이 뭐냐면 만약에 인간에게 성경 말씀을 이렇게 지킬 능력이 없다면 미쳤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줬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우리가 그 동안 생활에 돈 벌기 위해서 바빠서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우리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그걸 깔짝깔짝 건드리면 성령으로 헷가닥 거듭날 수 있는 모자이크 같은 바탕 같은 것은 우리 속에 내장돼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 가능성이 있단 말입니다. 가능성이 있는데 성령으로 거듭나서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이 엿 먹이고 약 올리는 것밖에 안된다 말입니다.

여자들만 모여 있는데 여기 근육 세 사람 누구 이렇게 나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되잖아요. 여자들이 무슨 근육이 있습니까? 남자들이 알통 나오지. 여자들은 알통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여자들이 있는데 알통 자랑한다는 것은 뭐냐, 아무리 해도 안 되지? 약 올리는 것밖에 안되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엿 먹이려고 약 올리려고 줬겠느냐 우리 가운데서 말씀 듣고, 예를 들어서 '알통 자랑하세요.' 요정도하면 나올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있습니다.라는 그 말을 빙 둘러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서 제가 수련회를 위해서 따로 만든 교재가 있습니다. A4용지 60장인데 [성화론의 허구성]이라고. 여기에 보면 성화라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가 거룩하라' 이 거룩하라 했으니까 거룩해야 된다, 거룩할 수 있다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을 전제로 깔고 하는 말이니까, 우리는 거룩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된다는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거룩하라는 명령 자체는 우리 보고 너는 거룩될 수 있어.라는 말의 다른 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안되는 놈을 보고 거룩하라는 것은 그 말 의미 자체가 무의미하니까 그 명령이 의미있으려면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주고받고 주고받고하는 하나의 대상이 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화론에 나서는 이유가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지 아니하면 거룩이 생겨날 수 없다.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다면 결코 거룩은 없다.라는 논리예요.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다면 우리에게 거룩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 줄 알아라. 이놈들아. 이거예요.

두 번째는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으면 거룩이 없으니까 거룩 단계가 빠져버리면 구원이 성사 안 됨.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는 어떤 인간도 구원은 물 건너간다, 구원 받을 생각하지 말라. 이게 성화론이죠.

세 번째. 여기서 나온 연결된 논리이죠. 추가적 행위가 없으면 거룩이 없으니까 거룩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은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쪽에서.

그 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하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의 문제점에 나와 있습니다. 불가능한 속성을 가능한 속성으로 취급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믿는 자는 뭐도 있느냐하면 성화론 말고, 거룩이라 합시다. 거룩된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고, 이 가능성을 제대로 발휘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내가 불가능한 일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니고, 믿는 자에게는 거룩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그 가능성이 어디서 나왔냐하면 믿는 자에게 나왔거든요. 믿음이 주어졌다는 이 말은 인간의 가능성이 새롭게 발생되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면 좋겠는데 그렇게 끝날 수 없는 이유가 뭐냐하면 믿는다는 것이 사물이 아닙니다. 여기 아미노, 물, 시계, 떡 사물이 아니고 믿는다는 것이 뭐냐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어떤 액션, 어떤 마음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믿는다고 허거든요.

내가 누굴 믿습니다하는 것은 뭘 하나 보고 이게 손수건이지, 믿습니다, 이게 아니잖아요. 손수건입니다, 이렇게 할 땐 이야기가 되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다가 ‘믿습니다’ 글자 써가지고 던지죠. 이건 아니란 말이지요. 던질 필요 없이 안 던져도 ‘믿습니다’ 이렇게 할 때는 누가 믿는데요. 제가 믿습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속에 ‘믿습니다’하는 것은 우리가 행동을 결정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믿습니다’ 이 믿음이 어떤 가능성, 믿음이 성화될 거룩될 가능성이 이미 있는데 그 가능성이 죽은 가능성인데 성령이 역사하니깐 불가능한 가운데에서 이미 잠자고 있던 죽은 가능성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는 식이 된다 이 말이죠.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어려워요. 이해 안 되면 이해 안 되는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밀어 붙일랍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여러분 아시겠지요. 인간의 추가적 행위를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까 너희도 거룩하라'했단 말입니다. 만약 추가적 행위가 없다면 그 사람은 거룩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백날 믿어도 소용없어요. 왜 추가적 행위, 거룩한 행위가 없으니 그 사람은 구원, 거룩한 단계, 성화 단계가 빠져있기 때문에 성화 단계가 빠진 상태에서 천당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성화론에 의하면.

따라서 성화단계를 거쳐야 구원이 성사되기 때문에 추가적 행위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추가적 행위를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느냐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추가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믿는 자는 네가 알아서 해. 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너에게 가능성을 줬기 때문에 네가 알아서 해 도움 받지 말고.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서 성화된다면 그것은 주체자가 누구냐하면, 성령님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님의 성화론이 된다고요. 그런데 성령님은 원래 성화론이 필요 없잖습니까? 왜냐하면 성령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점차점차 거룩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성화론이 되려면 성령님을 빼고 이야기해야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 목사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쟁반에 떡이 있는데 전 목사님은 팔이 이상해서 떡을 못 들어요. 그래서 성령님 대신 제가 손가락을 줘 가지고, 줘도 할 수 없어. 당겨주어야 돼요. 그래도 못 잡사요. 입에 집어 넣어줘야 해요. 하나 먹었습니다. 누가 떡을 먹게 했습니까? 전 목사님이 아무리 떡을 먹어도 제가 떡을 먹게 했지요. 그러면 요 행동을 떡 먹는 행동이 아니고, 착한 행동이라고 봅시다. 누가 착한 일했습니까? 성령님이 착한 일했지요.

이 성화론은 하나님이 원래부터 그렇게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러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은 해당이 안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저는 비껴나 버려야 돼요. 떡 먹는 솜씨를 본인이 와서 보여야 됩니다. 떡을 집을 때 어떻게 집었지요? 요렇게 집었다고요. 안 되는데요. 할 수 있어. 가능성이 있는 분이야. 내가 가능성을 주었어. 그 다음에 어떻게 된다고요. 이것은 성령님께서는 직접 그 사람 속에 계시지 않을뿐더러, 그 사람 생각을 지배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리고 도와주지도 않을 뿐더러 언제 도와주느냐 하면은 와서 물을 때 팔장끼고 있다가 기도를 안 하면 도와주지도 않고, 언제 도와주느냐 하면 진심으로 '하나님 도와주세요' 빌면 그때 도와주고, 기도 끝나면 그 다음엔 또 안 도와주고 답답하면 다시 기도하면 그때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잠시 방법만 일러 주고 본인이 와서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함 봅시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기도를 한 시간했습니다. 요 한 시간 내용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오늘 오전 12시까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성령님께 기도하니까 성령님께서 알려주기를 알려 줬는지 안 줬는지 모르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거지요. 12시까지 이렇게 하라고 해서 이렇게 살면 이게 바른 거룩된 삶이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언제까지 유효되냐 하면 12시까지만 유효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12시까지 내용을 8시부터 9시까지 한 시간 동안 기도해서 자길 챙기겠다고 했는데 12시 10분에 친구가 찾아와서 기도할 시간을 놓쳐버렸어요. 친구하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3시간 보내버렸네. 친구 가고 난 다음에 허겁지겁 기도해가지고 4시에 기도했는데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밤 12시까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인도 받기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24시간 가운데 뭐가 빠졌습니까? 12시부터 4시까지의 삶은 거룩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인도함을 받지 못했어요. 왜 친구 때문에. 친구가 찾아와서. 늘 인도를 받아야 될 텐데. 늘 인도 받는 것이 뭡니까? 뒤에 팔짱 끼고 계시는 성령님께 뭘 물어야 될 것 아닙니까? 물어야 되는데 물으려 갈 시간에 친구가 찾아왔다든지, 갑자기 배달이 났다든지 이래 가지고 기도할 시간을 놓쳐 버렸다, 그러면 그 시간은 기도 인도받지 못하고 자기 평소에 한 행세대로 행동을 해 버렸으니까 그 시간만큼은 거룩되지 못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것이 못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라했는데 그만 쉬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 1월 9일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누락한 것이 되어버리고 지난날 과거에 대해선 해결책이 없지요. 그렇다면 그 만큼 누락이 되었으니까 다음날 곱배기로 해야 됩니까? 그런 겁니까? 그렇다면 이 가능성이란 것이 뭐예요? 결국 가능성이란 것은 내 쪽에서 성령에게 자문을 구하는 그런 가능성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것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자기가 성경을 편집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생각대로 하나님의 계시라고 확정지을 때 그것을 칸트는 ‘실천이성’이라고 해요. 기독교에서 그렇게 믿음으로 산다, 성화롭게 산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칸트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이성에 불과하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실천이성은 이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살인하지 말라는 성경책의 말씀 때문에 살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나쁘다는 것이 다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이거는 살인하지 말라는 분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타고난 것이니까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하면 ‘종합명제’라고 합니다. 종합명제는 분석명제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딱 보면 딱인 줄 아는 것이 종합명제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업에 실패했다. 나 개처럼 살래. 나 인간 안 될래.하고 소주 열댓 병 사다가 냉장고에 시원하게 넣어 가지고 마구 퍼마시는 겁니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말리지 마. 나 개처럼 살래. 그런데 옆에 있던 개가 들어보니까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지금 방금 아버지가 말하는 개처럼 살래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뭐처럼 살아가나, 돈처럼 살래 이렇게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개는 짐승이고 양심도 없고,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항상 딴 집에 가라해도 개는 자기 집에 와요. 너 이제부터 우리 집에 오지 말고 저 옆집에 가라. 거기서 밥 먹고 살아라. 그러면 이건 뭘 뜻합니까? 개 속에도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돌멩이와 다른 뭔가 자기 나름대로의 뚜렷한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지요. 개 같다는 것은 개같이 나쁜 존재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개 입장에서 자기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되이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는 그런 요소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에 해당되는 어떤 원리 같은 것이 있더란 말입니다. 그 원리가 있다면 아무리 인간이 개처럼 살고, 돈처럼 살고, 소주병 먹고 스스로 방탕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서도 인간이기에 이것은 개야, 이것은 짐승 같은 짓이야, 이건 나쁜 짓이야. 이것은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는 짓이야라고 느끼는 그 최종의 느낌은 본인의 가능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집어 넣어준 거예요. 그러면 인간답다는 것은 뭐냐 하면 착하게 사는 게 인간다운 것이 아니라, 나쁜 짓 했을 때 이유 없이 그것은 나쁜 짓이라고 느끼는 그것은 본인이 어떻게 거역할 수 없는, 본인이 어떻게 주저할 수 없는 기본적인 양심으로써 이것은 신께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거예요. 지가 소주 먹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런 짓을 하는 것 조차도 그 순간에도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정신 차려야지.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게 한 것은 주인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인간의 실천이성, 인간의 도덕적인 이성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말하기를 어떤 조항을 택하지 말라. 왜 그 조항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핑계이기 때문에 조항을 지키는 것은 합법성인데 합법성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합법성이 아니라 이것은 내 속에 있는 진실된 도덕적인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신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유 없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해야 한다는 칸트가 주장하는 실천이성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나오는 거룩과 어떤 차이점이 어디 있느냐를 따지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칸트는 말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다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어떤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도덕을 양심대로 사는데 그건 잘못된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는 사고방식이라는. 하나님이 있는 사고방식은 이것이 비록 나한테 손해가 올지라도 신의 명령이 내 속에서 작용한다면 그 신의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좋은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나쁜 짓하면서도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노숙자로 가족을 팽게 치면서도 애가 물에 빠지면 물에서 건져주는 측은지심,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은 비록 자기 자신은 포기했지만 옆에 어떤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본능적으로 집어 당기는 것은 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인간다움의 기본이라는 것이죠. 인간다움이라 하는 것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라 하는 것은 도대체 내 속에 신이 어떤 양심을 부어주었는가를 늘상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진정한 인간다움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칸트의 실천이성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말하는 이것 지키면 복 받습니다. 이것 지키면 돈 법니다. 그러한 노림수, 미끼, 축복이라는 미끼를 던져서 더 선한 행동을 유도하는 그런 사기술보다 월등하게 차원이 높은 진정한 거룩이 아니고 뭡니까? 네 속에 신이 어떻게 소리를 외치느냐?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칸트는 이야기했어요. 절대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참으로 인간답다. 만약에 완벽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신이지요. 인간은 완벽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디 개가 알겠어요, 소가 알겠어요. 오직 인간만이 내가 완벽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며 그것이 진정한 신이 주신 참된 인간의 자유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칸트의 도덕율입니다.

따라서 왜 신께서 인간에게 도덕을 주었는가? 여기서 칸트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뭐냐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높은 우리가 완벽하게 지키지도 못하는 것들을 인간에게 담아 두었다는 겁니다. 누가요? 임마누엘 칸트가. 시계처럼 산책을 했던 그 철학자가, 18세기에.

그러면 죄를 깨닫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가?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첫째는 자유, 그 다음에 영혼불멸,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신의 존재. 이 세 가지는 과학적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인간은 이 세 가지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왜 영혼불멸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계속해서 죄를 깨달아야 되기 때문에 깨닫는 주체의 영혼은 있어야 되고, 왜 자유가 있어야 되는가? 자유가 있어야 책임을 느끼니까? 어떤 행동을 할 때 책임을 느껴 그건 제가 잘못된 겁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신의 뜻이야. 이것은 성경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이게 아니고, 저것은 날씨 때문에 그랬습니다, 저것은 내가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인생을 조져났습니다, 이건 마누라를 잘못 만나서 그런 겁니다, 이러지 말고 누굴 만났든 제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저한테 불찰이 있습니다, 제 허물입니다라고 책임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이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자유의지와 영혼불멸과 신은 인간이 되는 기본적인 실천의지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그러한 꿈이다, 그렇게 본 겁니다. 누가요? 신학자가, 목사님이 아니에요. 칸트가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제가 칸트를 이야기한 것은 바로 오늘날 신학자들의 윤리관, 성화론이 이런 철학자 하나보다 못하다, 이런 철학자 생각보다 더 못해요.

그러면 이것이 성경적입니까? 반복음적입니다.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절대 이런 사고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 칸트의 이러한 주장의 비복음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이고, 악마적인 내용은 기존의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 가지고는 이 헛점을 파헤치지 못합니다. 그저 옆에서 박수나 칠뿐이죠. 내 생각하고 똑같네, 나보다 더 뛰어나다 그 정도 밖에 호응할 뿐이지, 여기에 헛점을 밝혀내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이 칸트가 헛점 없이 지내왔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칸트의 윤리관, 도덕관을 후대의 신학자들이 부순 것이 아니고, 후대의 철학자들이 부수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완벽한 윤리관. 어느 누구도 윤리관에 대해서 못 건들일 정도로 인간의 이상적으로 보여준 완벽한 그것을 후대 철학자들이 와르르 달려들어서 다 깨버렸습니다. 어떻게 깼는가? 그 솜씨를 한번 보고 싶습니까? 이렇게 깨졌습니다.

사람이 어떤 떡을 먹는 행동을 할 때 왜 여기 떡이 있으며, 나는 왜 팔이 안 아프고, 아직도 건강해서 떡을 집을 수 있느냐? 나는 왜 떡이 맛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가? 왜 이 떡은 손으로 집지 않고 이쑤시개로 집어야 되는 교양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구한테 배웠는가? 그런 교양 있는 행동을 가르쳐주는 부모는 교양 있는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안다, 이걸 따지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칸트가 이야기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그런 행동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인과관계, 원인과 결과에 그런 연쇄 고리와 연쇄 고리로서 되어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길에서 돈이 떨어져 있는데 주어서 지구대에 가져다주었는데 상 받았다, 착한 일 했느냐? 천만의 말씀, 착한 일 한 것이 아니고 누구라도 나라도 거기에 갔으면 그렇게 갖다 줄 수 있습니다. 하필이면 그때 그 시간에, 일본말로 아다리지요. 딱 우연히 마주쳤지요.

예를 들면 방금 로또복권 당첨되어 10억 들고 오는데 길에서 10만원이 떨어져 있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10만원 줍겠습니까? 안 줍지요. 10억이 있는데 10만원 그거 푼돈이잖아요. 얼른 지구대가서 칭찬도 받고, 훌륭한 시민상 받고 좋아했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로또복권 했는데 떨어져가지고 지금 배가 고파 쫄쫄하고 있는데 그때 10만원 주웠을 때 뭐라 그러겠습니까? 오, 신께서 내게 빵 사먹으라고 주는구나.라고 하는데 칸트가 이야기하는 실천이성,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짐승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갖고 있는 것 뭡니까? 이걸 주워서 사용하면 이걸 떨어드린 사람이 자기가 애써 모은 공납금일수도 있고, 곗돈일 수도 있고, 이것이 자기의 병든 어머니의 수술비일 수도 있는데 내가 배고프다고 이걸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아주 거룩하고 고상한 생각을 주신 분이 누구냐 하면 훌륭한 어머니의 DNA이거든요, 아버지의 DNA, 유전인자. 성격이 너무나 착하고 고운 성격은 그런 DNA을 부모한테 받았고 그런 착한 DNA의 유수한 그룹의 태생이죠. 왜냐하면 그 어머니라면 그 집안의 비슷한 성격이거든요. 형 착하면 동생도 착해요. 형 엉망이면 동생도 엉망이고 다 그런 건데 다 착하니까 당연히 돈 떨어진 것을 주우면 갖다 주는 것이 전통이라. 그러면 그 집안의 전통이라 하는 것은 자기는 그 전통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거기는 '기투', 던져진, 인간의 존재는 자기가 원치 않는 가정에서 원치 않는 운명을 지니고 그냥 던져진 운명으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하이데거, 실존주의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던져진 존재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자유롭게 하는 자유가 없고, 그때 우연하게 이벤트, 사건이 유발되어서 벌어진 행위였다 이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유는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데 그러면서도 자유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자유가 없을 때 인간은 왠지 속박되었다고 느끼는 거예요. 자유가 없을 때 자유를 찾게 되는 거예요. 이걸 결핍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렵다, 어렵다 정말 어려운 거예요. 사람은 없는 것을 찾게 되지요.

교회 교인이 백명되는데 99명이 믿음있다고 할렐루야하고 있는데 혼자 뻘줌하니 서 있으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때 기도하는 거예요. 주여, 저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사람은 뭘 느낄 때 욕망합니까? 사람은 결핍을 느낄 때만 욕망해요. 백화점에 20만 원짜리 옷 입고 가는데 백화점에 쇼윈도우에 100만 원짜리가 있더란 말이지요. 그런데 100만원 코트를 안 봤으면 자기에게는 코트 달라는 기도를 안 할 뻔 했는데 마침 우연한 기회에 10만 원짜리 돈 줍다가 우연히 비춘 것처럼 100만 원짜리 코트가 비췄단 말이지요. 돈 줍는 것도 우연이지만 코트 본 것도 우연이지요. 인간에겐 자유가 없다 했지요. 100만 원짜리 본 순간 그때부터 자기의 20만 원짜리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어떤 더러운 팔자로 태어나서 20만 원짜리밖에 못 입는가? 그 다음부터는 자기에 대해서 자학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에 대해서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왜 어떤 여자는 저 100만 원짜리를 입는데 나는 무슨 더러운 팔자로 태어나서 집안 잘못 만나가지고 20만 원짜리 가지고 그동안 병신같이 자족하고 있었느냐? 나는 100만원 입으면 탈나는 인간이냐? 나도 돈 벌어가지고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하겠다. 그때부터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 의욕이죠. 의욕이 생기고,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비전이 생기고 꿈이 생기는 겁니다. 이 꿈과 비전은 무엇에 있느냐 하면 뭔가 결여, 뭔가 결핍, 뭔가 모자라는데 있단 말입니다. 뭔가 모자라고 빠져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이 자기가 의욕으로서, 욕망으로서, 기도란 형태로서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할 수 있다고 할 때 자유를 처음 느끼죠. 그러면 자유는 어디서 생기는 거예요. 자유가 없는데 누가 자유를 만들어요? 나지요. 내가 만들잖아요.

그래서 칸트는 공격하면서 칸트는 자유라는 것이 신이 내렸다고 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후대 철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주체자,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자유라고 본 것입니다. 그럼 자유는 언제 느끼느냐? 내가 갖고 싶은데 못 가졌을 때 왜 나는 저걸 갖고 싶을 자유가 없느냐? 나에게 자유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비로소 그 찰나에만 자유를 느끼는. 이게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이해도 안 되는 소리가 벌써 지금 나오기 시작하는데 난, 나에게는 왜 자유가 없을까 할 때 그 순간 비로소만 자유를 느낀다니까.

여러분들 평소에 떡 먹을 때 자유를 느낍니까? 자유를 느끼지 않아요. 떡 먹으면 되지, 자유라는 고상한 이야기가 왜 필요합니까? 자유는 갇혀 있을 때 자유를 느낍니다.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자유를 느낍니다. 유치장을 나오고 나면 자유를 안 느껴요. 왜냐하면 그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자유를 안 느낀다니까.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나는 인과관계 때문에 움직인다, 이런 게 없어요. 전혀. 그런데 흔들림이 없는데 붙잡더란 말이죠. 놓아라, 그럼 놓아라. 이것이 뭐냐? 자유가 그립다, 이 말이거든요. 붙잡을 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인들이 갈 때 붙잡지 마세요. 붙잡으면 탈출하고 싶은 자유가 생겨 가지고 더 반발이 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주체자가 내가 아니라, 자유가 됐든, 무엇이 됐든 주체자가 따로 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주체자가 되어가지고,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습니다가 아니라 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사고방식이.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제가 노력해서 오겠습니다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가라하면 가게 돼있고, 오라하면 오게 돼있는 그런 관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네 부하 어디 있느냐 내가 갈까? 오실 필요 없습니다. 왜 오십니까? 왜 오시지 말라했습니까? 여기서 말씀만 하면 내 똘마니가 집에 있더라도 병이 낫습니다. 마찬가지 관계가 지금 주님과 백부장의 관계죠. 세상에 이 똘아이가, 이런 똘아이. 이거 완전히 똘아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자유, 영혼불멸, 신의 존재 인간의 거룩한 가능성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칸트의 이런 윤리관이 없어요. 주님하고 나 사이는 어떤 관계냐 하면 주님이 당기면 당기고, 가면 가고 그런 관계입니다. 그게 무슨 관계냐 하면 말씀이 응한 관계, 주님께서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고, 그 성취 대상자 가운데 하나가 나니까 주께서 나름대로 성취해 주옵소서, 성취해 주옵소서가 아니라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백부장의 입장에서 베드로전후서를 해석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이 이미 그 사람한테는 실현된 성취된 단계입니다. 적용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 주께서 거룩케 하시는구나, 나를 대상으로, 상대로, 나 이제 죽었다. 이제 거룩케 하시는 작업의 대상으로 내가 뽑혔구나, 간택되었구나, 선택되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보면 초반부터 선택에 대해서 나옵니다. 1장 2절 봅시다. 참 성경 1장 2절 나가는데 이렇게 되어서야 다 하겠나 모르겠습니다.

1절부터 읽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전부다 터키 지역입니다. 갈라디아는 터키의 중심지고, 갑바도기아는 동쪽이고, 비두니아는 저 흑해 해변가. 그림으로. 이탈리아, 그 다음에 마케도니아, 터키, 여기 안디옥, 예루살렘, 이집트, 카르타고, 리비아. 반도, 터키에 갈라디아, 여기 흑해. 본도, 비두니아. 여기에 초대교회 일곱 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에베소 여기 있고, 고린도가 있고, 아테네는 여기 있고. 이 동네가 헬라 철학이 유명한 밀레토스라는 여기에 처음으로 탈레스가 세상의 근원은 물이라고 이야기했던 밀레토스학파.

이 동네 이야기인데 이 동네에 있는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신에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택한 자에게만 내가 하는 이 말을 알아먹도록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택한 자에게만 이 편지를 알아먹지 다른 사람은 못 알아먹는다는 말입니다.

그게 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베드로후서 1장 19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여기 샛별이 떠오르지 아니하면 예언을 풀 수 없는데 그 샛별이 뭐냐 하면은 바로 17절에 보면 예수님의 영광 중에 우리가 보았던 그 예수님의 동일한 영광이 이제는 우리 마음속에 떠오른 자에 한해서 이 베드로전후서 뿐만 아니고 사도 바울의 신약성경, 성경 전체를 제대로 풀이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차단이죠. 이건 절단시키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과 해석법으로 가능한 것들을 모두 차단시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좀더 허락하신다면 인간의 언어해석법이 현재 어디까지 발달했는가, 그 발달과정을 제가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말씀 안 드립니다만 상당히 난해하거든요. 소쉬르, 엘룸, 슬레어, 벤베니스트, 리꾀르, 가다머, 하이데거 이런 사람들이 현대 해석을 말씀이나 성경이든, 어떤 문장이든 어떤 전설이든 해석하는 해석법이 있습니다. 데리다 이런 사람들. 그 해석법을 보면, 훔볼트 이런 사람들, 굉장히 심오하고 놀라운 해석법으로 해서 진리를 합리적으로 파헤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해석법도 샛별이 떠오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에 샛별 떠오르는 방법은 이미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야기했어요. 그걸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뒷부분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야기합니다. 지금도 시내산 가면 아이스크림 먹다 남은 것처럼 흰 눈이 덮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이야기할 때 주의할 것은, 40일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특히 잠자지도 않고 버텼습니다. 완전히 지율 스님이에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여기까지 버티는데 40일 동안 잠 안 자 보세요. 환장합니다. 이게 왜 그러냐하면 이게 그 장, 영역이 달라서, 필드가 달라서 그래요. 어떤 영역이냐면 이게 영적 영역이기 때문에.

이 영적 영역에서 모세가 이렇게 버틸 수 있다는 것은 모세가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가 용납할 만큼 모세 수준으로 낮춰 준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모세처럼 되지 아니하면 성경해석 완전 제로입니다. 우린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모세 뿐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는 성경해석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적 낮춰주심을 모세보다 더 낮춰가지고 아예 우리의 더러운 육체 속에 하나님의 자신의 긍휼로 삼으셔서 성령께서 들어와 버렸어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시간에 예를 들었는데 우리교회 장 집사님한테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모독이지만 실례를 위해서 불러냈어요. 그 장병엽 집사님께서 연세에 비해서 머리가 많이 빠졌어요. 제가 이런 얘기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저보고 어떤 신체와 체인지, 바꿔쳐라 한다면 절대로 장 집사님과 안 바꾸겠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카락 대머리인데 뭐 하러 바꾸겠나? 누구하고 바꾸나? 장동건이나 배용준이랑 바꿉니다. 이왕 바꿀 것 장동건이나 배용준이랑 바꿔서 일본 가가지고 욘사마, 욘사마 그게 낫지. 신체 체인지해서 손해본다 말이죠.

우리가 누굴 골라잡을 때 내 영혼이 누구 손에 들어갈까 할 때는, 자기가 아까 인간이 욕망한다 할 때는 무엇 때문에 욕망한다? 배웠는데 잊어버렸죠? 결핍 때문에. 내가 쌍꺼풀이 없는데 쌍꺼풀이 있는 사람 없나? 이마가 좁은데 이마 넓은 사람 없나? 자기 결핍된 것을 찾아서 그걸 메우는 식으로 욕망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을 찾으면 자기보다 더 나은 신체, 훤칠한 키에다가 아주 미남에다 이런 걸 찾게 돼있는데, 성령님께서는 우리한테 오시기 전에 예수님한테 계시던 분이에요. 그 거룩한 분에 계신 거룩한 성령님께서 더러운 우리 속에 들어온 거예요.

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거기서 일어나는 더러운 육체를 가졌으니 오죽 더러운 짓을 하겠습니까? 그 더러운 짓까지 뒤에서 다 빨아내기 위해서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내려왔을 때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 그러냐 하면은 그걸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고, 자유한대 방종하지 말자 이게 아니라, 이 자유는 누구 자유냐 하면은 성령님께서 자기 멋대로 낮아지려면 우리보다 더 낮아지고 우리보다 더 천하게 낮아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기 조절력, 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져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거룩한 말씀 앞에, 십계명 앞에 사람들이 우상, 산 밑에서 풍악을 울리고 놀았을 때 모세는 견디지 못해서 그 돌판을 깨버렸습니다. 지금 그 정도 같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보면 이 성경책, 주께서 우리 보고 다 찢어버리고 불태워 버립니다. 날마다 내 가정에 성령께서 나타나서 불로 태워버립니다. 너 같은 인간에게 성경은 아깝다고 불태웁니다. 말씀대로하면 이 말씀은 나한테 해당도 안 되고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런데 말씀이 되신 그분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가 토해내는 모든 것을 다 받아내시기 위해서 자기 자유의사대로 우리가 짓는 죄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우리를 받아내고, 우리의 더러운 신체를 자신의 신체로 간주하시고 자신의 성전 삼으사 우리로 하여금 자유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처음으로 깨닫게 하시는 일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느끼게 하시는 거예요. 말 참 재밌죠. 성경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망을 느끼고 그 절망마저 희망으로 바꾸는 주님의 자유를 느낌으로써 주님의 자유로 성령님의 자유가 곧 우리의 자유가 되도록 그렇게 자유를 비로소 느끼도록 매일 같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 성령의 세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자유를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냐?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성령님이 누구 성령님이냐 하면 어린양의 성령님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어린양의 일곱 영이 와요. 어린양이 뭐하신 분이냐 하면 이미 죄인을 더불어서 죄인과 함께 속죄양이 되신 분이거든요. 속죄양이 되신 분이 성령님의 활동에 충실한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자기 백성을 용서 안할 죄가 없지요. 그것은 누구 때문에, 성령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수 받아서 십자가의 용서를 그대로 적용시키기 위해서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날마다 책망하고 용서하고, 책망하고 용서하는 일을 되풀이 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 거룩을 우리 안에 심어놓고 거룩이 뭔지를 우리에게 표출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거듭남이라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그러니까 베드로전후서를 보면서 느껴야 될 것은, 뭐가 없느냐, 시간적인 순서나 논리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완결된 상태에서 여기에 해당자다 통보하는 것이 베드로전후서입니다. 극장 안에 들어왔으면 어느 자리에 앉든 간에 극장 안입니다. F 뭐 H2를 앉든, A7번 석을 앉든 어디 앉아도 극장 안입니다. 다 똑같이 어둠에 적용받고 스크린이 다 보이게 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베드로전후서의 내용은 우리보고 새삼스럽게 지켜내란 말이 아니고 이미 네가 온 곳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이리저리 쑤셔보는 거예요. 덕에 절제를, 절제에 경건을 더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예상 못한 새로운 사건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한꺼번에 많이 하면 체하지요. 식사시간도 아까운데 조금만 말씀하고 두 번째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했듯이 칸트는 인간의 잠재돼 있는 가능성을 놀리지 말고 발휘하십시다, 이게 칸트고. 발휘하는데 어떤 혜택이나 이것하면 복 받는다든지 이것하면 장래가 희망이 보인다든지 그건 쾌락주의인데 그 쾌락주의는, 행복주의는 사기성 있는 도덕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이 주신 도덕이 아니고, 왜 내가 저 사람을 도와야 되는가? 도와주라는 명령이 있기에 비록 그 사람이 못 도와주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기에 인간은 못 지키는 데 대한 책임감이라든지 자책감이란 것이 생기고, 그 자체가 바로 신이 주신 자유의사라고 본 겁니다. 그것이 바로 칸트는 인간을 하나의 책임있는 주체자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 우리한테 허락도 안 받고 누가 십자가 지라 했습니까, 예수님 혼자 십자가지시고, 십자가지시면서 뭐라 하냐면 나는 속죄양인데, 어린양인데 해놓고 다 이루었다, 어린양이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라는 애드벌룬, 풍선을 타고 역사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모든 죄들까지 다 건사하면서 거두어내시며 용서해 주시는 그걸 적용시키면서 그러니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용서받았잖아. 이미 거룩하잖아. 절제 모르지? 절제 돼 줄께. 이번에 잡채 먹어봤냐, 맛있다. 탕수육도 먹어봤어? 맛있는 거야, 하는 것처럼 경건 먹어봐, 한 번 내가 먹여 줄게. 네가 절제 먹어봐, 네가 이웃사랑 그것도 안 먹어봤지. 네가 잡채에다 탕수육을 더하고 뭐 더하고, 더하고 더하고가 바로 베드로후서에 나오는데 한 번 봅시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려 하셨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신 자가 누구입니까? 택한 자에 해당되고 성령님이 그렇게 하셨잖아요. 하기 때문에 너희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 말을 바꾸세요.

김밥에 잡채를, 잡채에 탕수육을, 탕수육에 자장면을,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에요. 이미 준비된 거예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안든 준비된 거예요. 우리가 맛보면서 우리가 용서받은 것이 이렇게 큰 은혜, 은총이구나 깨닫게 하는 식으로 이런 맛깔 난 음식들을 집어넣는 것이에요. 절제를, 형제우애를.

이걸 주니까 같이 교회 다니면서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은 놀라는 거예요. 아이고, 김 집사님. 왜요? 당신 절제를 할 줄 아네.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다 덕까지. 거기다 경건까지, 형제우애까지. 역시 믿음 좋으네. 믿음이 좋은 게 아니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뿐이지, 다 이게 말씀에 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여러분 저녁시간을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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