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기타강의
2006-02-02 15:17:47 조회 : 2438         
Re..함평-베드로전후서강의 녹취 8번 이름 : 한윤범(IP:)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8번


퇴보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을 많은 학자들이 자본주의가 왜 그렇게 되는가를 법칙을 지금도 연구하고 있어요. 왜 자본주의는 환경 살리기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선을 겸하여 할 수 없는가를 연구해 보니까 그 자본주의의 밑바탕에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 때문에 욕망이 경쟁을 낳고, 경쟁이 한 쪽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도태를 낳고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경쟁이 파급이 되면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경제 전쟁에 뛰어들 에너지 전쟁에 뛰어들 판이기 때문에 환경에 대해서 뭐 감시한다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그것에 대해서 반대한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WTO나 이런데 반대하는 그린필드라든지 그런 단체에 가입해야 돼요. 아니 그린피스에 가입하든지 안 그러면 홍콩에 농민시위하든지 그렇게 해야 돼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반대할 수밖에 없어요.

세계의 시스템이 한시라도 돈을 생산하는 데와 이탈되는 경우는 한 경우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옛날에는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을 초등학교 때 압축해서 배워서 그들로 하여금 경제발전의 전사로, 투사로 빨리 국가에서 키우지 아니하면 국가경쟁에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알았던 모든 것을 초등학교 때 다 알아야 되는 거예요. 심지어 대학교 때 아는 피임법을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다 알아버려야 돼요. 어른들이 어떻게 사고하는 걸 다 알아버려야 돼요.

소비층이 점점 30대에서 20대, 20대에서 10대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X시대라고 하잖아요. 묻지마 시대로 내려가야 돼요. 광고는 이미 그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광고의 시스템이 이미 모든 것이 지식을 압축파일에 담듯이 담아서 빠른 시간 내에 이미 확보된 기술을 빨리빨리 제공해야 되는 겁니다.

옛날에 한국하고 일본하고 지식이 10년 차이 났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10년 차이 났으니까 10년 있으면 따라붙으면 되겠다, 하지만 옛날에 10년 차이 난 것이 요새 3년 차이 나는 것보다 더 큰 아니 더 적은 격차에요. 이런 차이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5년 떨어졌다 하면 이것은 옛날 20년 떨어진 것보다 더 떨어진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 것이 수일 내에 한국에 오고 배아줄기세포가 저쪽에서 논문 발표하면 온 전 세계에 다 퍼져버리고 수만 군데에서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고 막대한 투자하고 나노산업에 투자하고 있는 시대에 이것은 하나의 국가구성원들이 점점 압축된 정보를 수많은 정보들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빠른 시간에 해야 되고 옛날의 중고등부 배웠던 교과 스케줄을, 시스템을 압축해서 초등부 애들 다 가르쳐야 돼요. 가르쳐야 중고등부 올라가면 대학교 때 배웠던 것을 미리 앞당겨 하게 되면 거기에서 기술의 발전에 의한 이득이 그만큼 많아 남죠. 소득이 많이 올라가니까.

만 불 시대에 교회 나왔던 사람들 반으로 줄고 2만 불에서 만약에 3만 불쯤 되면 거의 교회는 관광, 이벤트, 관광 컨셉으로 이 마을에 이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 번 둘러보시고 입장료 1500원내세요. 이것이 보수비용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옛날엔 남자가 벌고 여자는 가정생활하고 이런 시대는 아닙니다. 둘이 벌지 않으면 국민소득 만 불을 못 채웁니다. 사모는 심방하고 목사는 기도하고 안 됩니다.

이것이 현실이에요. 이 현실을 제가 지난번 시간에 이것을 가지고 힘이 집약되는 땅의 원리라고 했습니다. 그 땅의 원리라 하는 것은 항상 진보하는 것인데 축적된 힘에서 시행착오를 거쳐서 다시 올라가고 또 거기서 시행착오, 올라가고 포프라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모든 과학이라든지 모든 학문은 항상 윤리도덕도 진보하고, 또 진보하고 국가민주주의 체제도 항상 그 체제가 그것을 해보고 안 맞으면 그 모자라는 부분을 개선해서 더 나은 수준으로 수정하고 그래서 옛날 것은 구닥다리 그런 패션에서 벗어나 점점 더 나은 유행 그런 하나의 새로운 틀로 가는 이 마당에서 십자가라는 것은 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여기 오늘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채찍으로 맞음으로 하는 이러한 이것을 무시간적이죠. 무시간적이고 초시간적인 이런 내용은 시간적인 발전진보 위주의 진화 위주의 이런 시간개념과 이것이 섞일 수가 없어요. 없기 때문에 중간에 끊고 들어와야 돼요. 부활의 능력이.

우리들 어려운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정리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성도에게만 해당되는데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해당 안 되고. 성도에게는 갈등이 있는데 어떤 갈등이냐 하면 선과 악이 선해야 된다는 것, 악하면 안 된다는 것. 이것은 뒤따라 선하면 어떤 보상이 주어지고 악하면 어떤 식으로라도 징벌이 주어진다, 심지어 어떤 물질적이고 반드시 돈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선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든지, 뿌듯하다든지, 정신적으로 높아져 고양된다든지, 여유만만하다든지 그런 것을 느끼는 내가 참 보람된 일을 했구나. 하는 자부심이라든지 그런 것도 보상이 될 수 있거든요. 기쁨 같은 것.

그에 비해서 악을 행할 때에는 꼭 이렇게 돈을 더 버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불로소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했을 때 양심에 가책이 된다든지 이런 것이 반드시 뒤따른다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기분상 선을 추구하고 악을 거부하는 쪽으로 나가는데 문제는 선과 악을 결정하는 자아가 주체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비현실적이고 거짓말이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자아가 주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미끄러지게 되어 있다. 미끄러진다. 이것을 적응하기라 하는데 뭐냐 하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환경 따라서 자기 변명조로 그때그때 따라 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라고 바뀌는 거예요.

바뀌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가 자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신체에 있는 거예요. 연세가 많은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는데 아직 팔팔한 사람은 이것을 이해 못합니다. 60이 넘고 70이 넘어가면 모든 두뇌 기능부터 해서 모든 호르몬이라든지 모든 기능이 젊을 때 28살 때 기분은 그 기분인데 몸이 안 따라줍니다. 그러니까 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신체가 안 따라주니까 여기서 실수가 많이 있지요. 실수가 있고, 오류가 있고, 거기에다가 만약에 어떤 아픔이 되면 본의 아니게 자식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겁니다. 짐이 되면 자기가 젊을 때 28살 때라든지 30살 때 알고 있었던 선악개념에 의하면 자기는 본의 아니게 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돈을 날마다 주는 그런 선한 사람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신체가 오히려 남한테 짐이 되고 남한테 들어붙어야 유지가 되는 그런 입장이라면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이 사회에 악으로 존재하는 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악하다고 자기가 스스로 이야기하게 될까요? 자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20살 자아는 이렇게 하더라도 이미 60이 넘은 자아는 손쉽게 아주 급하게 변신을 꾀하게 됩니다. 어떻게 변신을 꾀하느냐 하면 예를 듭니다. 비록 지금은 남한테 짐이 된다 할지라도 젊을 때는 이 사회와 국가에 기여한 바가 많다. 그러한 나다. 아시겠습니까? 그러한 나라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알더라도 꼭 외부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여전히 나는 아직도 나라고 외칠만한 가치 있는 존재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쪽으로 자아를 재구성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만약에 70살이다. 그러면 십년을 더 살아봅시다. 80 되어 봅시다. 참, 온 집안에 배설물 토해내고 식구들이 공기정화기가지 달아 줘도 냄새를 푹푹 풍기고 자식하나 섬기려 하는 사람 아무도 없고 그냥 젊은 유산이나 바라다 유산 다 쓰고 난 뒤에 오고갈 데 없고 아들한테 버림받고 아들한테 버림받습니까? 보통 며느리한테 버림받죠. 사위한테 배신당하고 나중에 그렇게 하니까 손자한테 교육에 도움 안 된다고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손자들이 자기 자식들이 거부하니까 할아버지 우리 집에 오지 마, 오지 마 이러니까 안 가고 혼자 떠돌아 살지요.

그렇다면 자기 신체가 이러니까 결국 갈수록 식구들에게 짐이 될 때에 그때 이 노인은 어떻게 주장 하냐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렇게 대하면 섭하지, 나.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본인의 이미 지나간 모든 현실성을 지금의 현실이란 말 자체가 지금이란 뜻인데 과거에 있던 것을 억지로도 잡아 당겨서 현재 자기의 가치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법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행동 태도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그 다음차례 젊은 사람이 또 연세가 많으면 그 코스를 밟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어느 누구도 십자가라는 구멍에 풍덩 안 빠지려는 거예요. 비록 그 안에 영생이 있더라도 자기를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하고 싶지, 십자가라는 구덩이에 풍덩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다 잊어버리는데 잊어버렸다고 해서 제가 또 그냥 안 넘어가지요. 다시 봅시다. 십자가가 뭐라 했던가요? 십자가가 두 가지 있다 했지요. 첫 번째는 뭐라 했습니까? 나는 속죄되어야 될 죄인이지요. 속죄되어야 될 죄인인데 그러면 이 80 먹은 노인, 70 먹은 노인네가 속죄되어야 될 건데 이분은 십자가가 앞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나는 과거 젊을 때 사회에 기여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정당화하는 거죠. 가치 있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속죄돼야 될 그것이 아니잖아요. 십자가가 속죄되지 않다고 우겨버리면 그렇다면 예수님이 채찍 맞은 것은 뭐가 됩니까? 쓸데없는 짓을 한 거에요. 누가? 하나님이. 그런 것은 나쁜 것, 나쁜 놈들 앞에서 채찍해야 죄송하지, 나같이 건전한 인간에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했습니까? 예수님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거예요. 그 채찍 맞아서 죄 용서 받아, 이렇게 건전한데 80 너머까지 건전한데 왜 채찍 맞아야 돼. 나같이 훌륭한 사람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구멍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계속 버티는 겁니다.

그러면 속죄되어야 될 죄가 뭐냐 하면 결국은 자아를 항상 재구성한다는 거예요.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이것은 칸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한계가 되면 핑계를 대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내 몸이 이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하냐면 이것은 내가 10년 젊었어도 이런 짓 안했습니다. 지금 하나님 때문에 늙어가는 몸을 받아서 그래서 신체가 잘못돼서 내가 고집을 피우고 그러지만 10년만 젊었어도 내 이러지 않습니다. 이러거든요.

그것이 바로 죄를 모르는 거예요. 왜냐? 이 두 가지 사회만 알지 또 하나의 이미 우리는 구멍 속에서 어둠 속에서 빠져야 될 그러한 자아를 챙길 필요도 없는 부활의 속죄의 그러한 자아와 이 자아 사이를 그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이것만 밑에 것만 자꾸 죽을 때까지 고집하는 겁니다.

물론 성도라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것이 없는지. 다 죽을 때까지 가요. 2초. 문제는 2초. 2초 동안에. 손자들 앞에서 다시 따라해 보세요. 내가 네놈들 키우는데 얼마나 해왔는데 나를 박대해, 이 나쁜 놈들아! 하지만 종용히 십자가 앞에 서면서 주님이여,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습니다. 주여, 어서 데려가 주옵소서. 살아봤자 이러한 똥고집밖에 피우지 않고 자식들에게 짐 되는 거, 차라리 일찍 데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응답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하지 왜 나에게 하노?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이것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것은 부패의 코스에요. 음식 맛보고 시금치 뜨고 코스 듯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마지막 그 식혜까지 떠 담는 우리 길이 이런 길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이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이것 자기 자신의 정당함만 우기는데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가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여성분들이나 노약자들은 차마 보지 못하는 말이 나옵니다. 얘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어서 그래서 이 분문에 대해서 남성들이 속으론 좋으면서 좋은 표시를 낼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어떤 대목이냐 하면 옛날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가지고 주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주님이라고 이야기했다. 요새 같으면 자기, 누구 아빠 이렇게 하지만 사라는 자기 아브라함을 주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주님에 합당한 순복을 해서 복종을 해서 많은 거룩한 부녀자들의 표준적인 모델로 이렇게 살았으니 아내들이여, 남편을 아브라함처럼 섬기세요.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차마 눈뜨고 못 볼 대못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가지고 5월초 가정의 날 설교할 때에 설교하면은 나이 많은 연세 많은 연로 장로들은 좋아가지고 목사 설교 잘한다, 옛날이 그립구나. 이렇게 하고. 그런 설교들은 젊은 집사들은 오늘도 우리 아버지 얼마나 기가 살겠노. 하늘의 뜻대로 산다고 이렇게 했는데 둘 다 아닙니다. 이 대목은 아무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사라조차도, 아브라함조차도 이 대목은 지킬 수 없었던 대목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경유해서 튀어나온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인 내가 존재하고 신체가 있고, 신체란 말이 아까 빠져버렸는데, 사람이 신체가 왜 인간에게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하면 아무리 내가 착하고 싶어도 신체가 망하는 이유가 이 신체는 생물학적 세포, 60조에서 100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 이 세포는 나름대로의 에너지를 보장해 달라고 함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질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이것은 생물학적인, 기본적인 본성인데 이것을 가지고 욕구라고 합니다. 보통 욕구라고 해요. 우리가 원하는 욕구와 거기에 회로 사이에 그 갭을 욕망으로 나온다. 라캉이 이런 공식을 해놨는데, 이것을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아무리 도덕군자라도 배고프면 거지된다, 이 말이에요. 사람은 다른 것은 다 속일 수 있어도 내 배의 꼬르륵하는 그것은 속일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인자한 모습을 해도 설사나면 급하게 가야 돼요. 교양이고 뭐 에티켓이고 급하면 휴지 찢어가지고 화장실에 들어가야 돼요.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신체에 따라서 이웃사랑의 강도가 달라지지요. 신체가 좋을 때에는 입가에 함박웃음을 띠면서 미소를 띠면서 상대방한테 호감을 주지만 신체가 좋지 않을 때는 방금 쌍꺼풀 수술을 방금했다든지 이런 거요. 이거 안 웃네. 큰일 났네. 눈에 뭔가 벌건 들어가 있으면 이때는 그것을 가지고 요새는 유행하는 이런 걸 비호감이라 하지요. 아무리 미소를 띠어도 약간 일그러진 인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웃사랑을 해볼 기회조차 용납치 않아요. 같은, 야, 이거 안 웃네. 심각하네. 무슨 뜻이냐 하면 기본 얼굴 바탕이 호남이고, 미남이고, 미녀 같으면 이웃사랑을 조금만 맛보기로 보여줘도 주위를 감동시킵니다. 그런데 흉한 얼굴 가진 사람이 이웃 사랑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오버한다고 합니다. 너는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왜 싸 다니냐.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데 예쁜 선생님하고 못난 선생님이 있는데 예쁜 선생님은 2명에 시작해서 10명 모으고, 못난 선생님은 10명 줘가지고 2명 데려다 놨을 때에 목사님께서 말하기를 세상 끝 날까지 전도를 하는 것이 주의 뜻이고 전도를 막는 것은 사탄의 역사라고 강조를 하고 고함지르고 하고 있을 때에 누가 기죽겠습니까? 열심히 하고 있는 이 사람이 비호감적인 얼굴이기 때문에 10명이 2명 되고 이 사람은 졸지에 사탄의 아들, 사탄의 자식이 돼버렸어요. 전도를 막는 거예요. 이쪽은 그냥 온갖 것, 세상 것, 다 즐기고 교회 와서 생글생글 웃기만 해도 벌써 10명 와 버린 거예요. 이것은 뭐 주의 종이에요.

이처럼 인간은 자기가 뭘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생물학적으로, 이것을 자연법이라 하는데 칸트에서는 자연적인 법으로 인간은 이미 한계 된 조건하에 어쩔 수 없는 주어진 조건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이란 말이지요. 그럼 자아는 뭐냐 그 조건을 최대로 활용해서 그래도 나는 살아갈 가치 있다고 변명조로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자아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말씀에 오늘 베드로전서 3장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칭했단 이 대목은 모든 여성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해석을 잘 해야 되겠지요. 거부감이 있는데다가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것을 또 어떤 교회에서는 성경대로 실천시킨다고 가만있는 남편, 아내 붙잡고 주라고 한 번 실천해보라고 강요해 가지고 주라고 억지로 해 가지고 돌아가서 부부싸움 만들고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아브라함조차 사라조차 자기 남편을 주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순간에 사라가 사라졌기 때문에 사라가 날아가 버렸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면 자아의 자존심이 날아가는 순간입니다. 몇 초요? 2초. 아이, 24시간 가운데 2초 동안에 빈 말하고 남편 보고 주라고 하고, 아휴. 방금 뭐라 했는데? 지나갔다. 지나갔다. 끝났다. 끝났다. 두 번 다시없다. 2초 지나갔다. 끝나버렸다.

사라와 아브라함은 원래 이 사람이 뿌리가 없어요. 사라란 이름은 자기 엄마, 아빠가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자기 엄마가 지은 이름, 아빠가 지은 이름은 사래입니다. 사래. 아브라함의 이름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지은 이름은 아브람이에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짓습니다. 옛날에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 이름이 담긴 내용이 그 사람의 곧 미래의 운명이 된다는 뜻에서 이름을 줬습니다. 너는 어떤 경우라도 너에게 하나님이 붙여준 그 이름 밖으로 못 나간다, 이탈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름에 담긴 대로 너는 그 길을 그 코스를 밟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만민의 복이 된다, 그것이 어저께 부부간에 저녁 식사하다가 저희끼리 결정한 것입니까? 여보, 우리 만민의 복이 되면 어떨까? 그거 좋지. 잘했군, 잘했어. 그렇게 지어 놨습니까? 사라와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것부터 자기 의견이 아닙니다. 자기의 견해가 아닙니다. 이미 뿌리가 근거가 박탈된 상태에요. 밑천을 받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컨베이어 시스템에 실려서 갈 뿐입니다. 그것이 전에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만 그게 나그네라, 우리는 모두 나그네라, 이 땅에 뿌리가 박탈된 상태에요. 우리는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이미 뿌리박힌 채 거꾸로 사는 박쥐처럼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 )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그림으로 심판 받는 ( ) 아크로바트를 해주면 좋겠는데 그런 재주가 없기 때문에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보통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발을 대고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미 뿌리는 하늘에 있고 거꾸로 머리를 뒤로 하고 거꾸로 점점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데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땅에 있어서 어떤 바람이 불던 어떤 비가 오던 이미 뿌리는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왜냐 하면은 십자가 지신 그분이 부활로 부활 속에다 우리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부활의 원칙이 저촉 받고 부활의 원리에, 부활의 축복에 의해서 혜택 받기 때문에 부활에 의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부활을 모르고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사그라지는 거지요. 이것을 가지고 풀의 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는 이 사람들은 영원하다 이 말이죠.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도 생소한 개념입니다. 이 생소한 개념은 우리 허락받지 않고 한 2초정도 우리 속에 왔다가 사라져 나가버립니다. 설거지하다가 잠시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하고 찾아오고 버스 타다가도 잠시 내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 나는 이미 죽어 산 사람이 되었지. 내가 세상 것 때문에 왜 걱정해. 라고 잠시 뭔가 스쳐지나가듯 잠시 어어, 내가 방금 뭘 생각한 거야. 내가 왜 이래. 잊어버렸어요. 다 지나가버리고. 하나의 샛별처럼 떠오르고 샛별처럼 조용히 사라져버리고. 다시 밤 되면 샛별처럼 떠오르고.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 아브라함처럼 사라처럼 다른 외부에서 주도권을 쥐고 인도한다는 증거입니다. 제 말을 여러분들이 제일 크게 오해한 사람이 뭐냐면 24시간 이대로 살아야 합니까? 하는 사람이에요. 제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생소합니다. 하지만 그 생소한 것이 가끔은 내 인생 속에도 그런 생소함이 같이 생소한 사건이 파닥파닥 반짝이면서 툭툭 터져 나왔습니다. 라는 그러한 고백이, 그것만이 확인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확인이 안돼요.

오늘 이 본문 듣고 그 다음부터는 말씀대로 산다고 갑자기 남편에게 말 팍팍 놓다가 갑자기 이걸 보고, 주여! 하지 마. 주여! 쓰레기 좀 비어줄랍니까? 주여! 하지 말랬지. 주여! 기저귀 좀 갈아줄랍니까? 주여! 하지 말랬잖아. 이거 어디서 엉터리로 배워가지고. 이러면 부부싸움 한 번 벌어지지요. 니, 지금 나하고 장난치는 거제. 나 지금 놀린다고 그카지. 그런데 여자들은 장난삼아 하라고 해도 그런 소리 안합니다. 그건 걱정 할 필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할 때는 아브라함을 보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 속에 내 남편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하는 주님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걸 보고 자기는 거기에 동참하고자 주라고 부른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 자존심을 꺾어 부른 것이 아니고 사라와 아브라함 사이에 사라도 원래 이름이 사래아닙니까? 아브라함도 아브람이었지요, 아브람이었지 아브라함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는데. 사래와 아브람 사이에 하나님께서 양쪽 다 하나님의 하늘의 원칙, 어려운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다. 라고 하면 되는데 하나님의 맹세, 또는 약속인데 복의 근원이 된다는 하늘의 원칙이 난데없이 침투해 들어올 때 이 침투한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껏 주라고 불러줘도 오히려 그것이 더 현실적이고 올바르게 남편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고 느끼고 사래가 그렇게 부른 겁니다. 사래가 언제부터 자기 남편을 주라고 불렀는지 알 수 없어요. 처음 결혼할 때부터 불렀는지 알 수 없는데 다만 성경에서는 사래가 아브라함과 남편을 주라고 부른 이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물로 삼았다는 그 점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흉내 낼 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따라서 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다만 따라서 안 해도 어떤 낯선 계기가 오면 자연적으로 발생되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 갑자기 보너스를 천 프로 타 온다면 그때는 주여, 주여, 할렐루야, 주여. 고맙제. 고맙습니다. 주여. 언제까지 할 건데, 다음 보너스 탈 때까지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탄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상치도 않은 갑자기 교회 안 다닌 남편이 여보, 이제부터는 술 꿇고, 담배 꿇고 이제 교회 다닌다. 주여, 할렐루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물론 그 순간으로 끝났지만 다음은 없지만.

사래는 남편을 본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남편이 아니라 특수한 남편의 경우를 보고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발견하고 주라고 부른 겁니다. 따라서 이것을 흉내하거나 모방할 생각은 애초부터 마음을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런 걱정 안합니다. 할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런 걱정하지 않아요.

자, 그러면 그것을 오늘날 이 시대에는 남편을 주라고 불러야 되는가? 남편이 예수님처럼 성경의 에베소서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 된 자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가 자신의 몸을 주신 것같이 남편 된 아내를 죽도록 사랑해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처럼 남편들은 아내를 자기 목숨 받치듯이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생소한 거예요. 생소한 것은 흉내 냈다고 그게 일치되는 것 아닙니다.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그런 남편이기를.

앞에 보면 뭐냐? 아내 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마치 교회가 주님께 복종하듯이 하라" 간곡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가 새도록. 까만 머리가 흰머리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기다려 봤자 그것으로 끝나지만. 복종하지 않습니다. 왜 복종하지 않느냐? 그것은 남자나 여자나 자아에게만 복종하도록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남을 이용은 하지 복종을 하지 않아요. 복종할 흉내를 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뭔가 얻을 이익이 있다는 관계 내에서만 복종을 하지, 그것은 복종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어떤 순간에 난데없이 한 2초 동안에, 1.5초 동안에, 줄이자, 2초는 너무 길다.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주님의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 본성과 다른 거예요. 이것은 낯선 것이 침투한 거예요. 따라서 나는 굶더라도 아내는 먹여야지. 라는 것이 갑자기 등장할 때는 이것은 자기가 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신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에베소서 3장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전에 봤지요. 또 다 잊어버렸습니까?

어떤 말을 할 때에 어떤 행동을 할 때에 주님 주신 힘으로 하라. 하는 그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이 자꾸 기다려지고, 된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꿍꿍이 속이 있느냐 하면 나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더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어둠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데 필요한 말씀이라고 여길 때만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 말씀이 내가 남편한테 이런 사랑을 받고, 아내한테 이런 사랑을 받고 살면 나는 얼마나 더 보람 있느냐. 라고 할 경우에만 이 말씀을 적용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또 하나의 내 나름대로 ( ) 성경이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이 성경 말씀을 취소되지 아니하고 어떤 한 순간을 통해서 순간순간 우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침투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이 침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갑자기 남편보고 예수님 부르듯이 주님이라고 부른 마음이 들거든 이것은 여러분들의 훌륭한 신앙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남편에게 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남편 된 자들은 이제 저 여자가 나한테 부러워했구나. 이래 좋아하지 말고, 아아, 하나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내를 통해서 이렇게 황공스러운 주님이라는 호칭을 내가 받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저런 여자를 위해서 그만 둘 수 있지, 목숨을 바쳐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2초. 둘 다 2초로 끝났어요. 어어, 없었어, 없었어, 없는 거야, 없는 거야.

그것이 쉬지 않고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지금 계속 뭔가 침놓듯이 예상치도 않는 순간에 팍팍 스며든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의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아까 12시에 하고 무려 4시간동안 잠을 주무셨으면 충분히 주무셨을 텐데.

여기에 3장 4절에 보면 여자들은 이런 것은 멀리하란 거지요. 정결한 행위를 보고 너희 단장한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그러니까 쓸데없이 사치를 부리지 말고 마음이 단정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거룩한 여자로 살아서 사라가 남편에게 복종하듯이 그렇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딸이다.

이것을 가지고 화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어차피 안 되는 건데, 아, 그렇게 하게 하시는가? 이렇게 알면 지 마음도 편하고 모든 게 편한데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지금 벌써 카드 긁어가지고 200만 원짜리 옷도 맞춰났는데 어떻게 무를까요? 이렇게 나온다면 뭔가 말씀을 오해하는 거예요. 200만 원짜리 옷도 긁어서 한 것은 원해 본인의 마음이니까 그렇게 하고 그것을 본인의 뜻에 의해서 변경되는 것 아닙니다. 20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낮춘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 되는 것 아니에요. 그래 나중에 200만원 옷도 하고 꼴난 이것 살라고 내가 욕심을 냈나. 앞으로 안 그래야지. 그런 마음 드신다면 주님의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200만원 날렸잖아요. 날린 것은 주님의 돈인데 뭐 할 수 있어요? 지나간 것인데. 그런 식으로 이걸 보셔야 된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3장 8절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마지막치곤 굉장히 길지요. 너희가 이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체휼이란 불쌍히 여김이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것도 누구 소관이냐면 하나님의 숙제에요. 우리 숙제가 아니고 빌라 명령이잖아요. 이 명령은 우리보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력으로 이 선을 이룰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통보해 주는 겁니다. 너는 이 말씀도 못 지키는 인간이라면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어. 라고 다시 한번 우리를 죽음 쪽으로 데려갑니다. 우리 자아를 없애버리죠. 우리 자아가 죄로 말미암아 없어져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죠. 그러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이제는 의에 되신 분께 맡기며 그분이 알아서 이 말씀대로 걸고 적용시킵니다. 2초 동안에. 그렇게 하시죠.

그러한 그러니까 도저히 예상치도 못한, 여기 우리가 그냥 넘어갔습니다만 성도라 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함이라 베드로전서 2장 보면 거기 나와요. 앞에 보면 거기 나옵니다.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기 때문에 제가 듬성듬성 띄면서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하지 말고 복을 빌어라. 이것이 인력으로 아무리 도사라도 될 수 없는 겁니다.

제가 여기 [영성의 샘]이라 해서 여기 샬롬의 집에서 창간한 건 아니고, 영성의 샘 12월호가 많이 있는 이유는 여기 있는 목사님께서 자기에 관한 기사가 나왔기 때문에 많이 갖다 놨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영성에 샘이란 이 책을 제가 다 봤습니다. 이런 대목이 있어요. 여러분 들어보면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니까.

5월 18일 금요일
혼자 방에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영에 사로잡혔다. 그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었다. 그 영에 의해서 내 영은 하늘로 비상했고 하나님 보좌에 앉았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대적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길 기세가 등등했다. 그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영에 사로잡혔는가? 하고 몸부림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엎드려 땅에서 탄식하니까 그 악한 영은 물러갔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안도의 숨을 쉬는데 또 다른 영이 와서 사로잡았다. 그 영은 나를 어떤 단상 위에 올려가지고 나를 사이비교주가 되게 했다. 도처에서 나를 환호했다. 다시 나는 아니야 이런 건 아니야 거부했더니만 그 영은 떠나갔다.

이런 내용이에요. 이것이 바로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의 솔직한 고백이지요. 바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모르고 무엇과 무엇을 고민하고 있습니까? 선과 악을 갈등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현상은 이 사람이 지금 기독교라서 그렇지 불교라든지 이슬람교 어떤 종교나 다 이런 것이 있어요. 이런 고백이 다 있다고. 악한 영이 와서, 사탄이 와서. 원효대사 이런 것 다 나옵니다. 이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철학가도 이런 고백을 하고 있어요. 괴테 작품에도 이게 나와요. 악마한테 영혼을 전당잡힌. 바로 선과 악의 이 갈등 그리고 이 선은 종교란 이름으로, 성스런 이름으로 등장할 때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 앞에 모든 악은 비 복음적인 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성향이.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죄밖에 죄만 써있어요. 그런데 가격이 얼마냐? 18,000원이에요. 얼마나 비싼지.

베드로전서 조금만 하고, 아까 몇 시부터 시작했습니까? 예, 조금만 더 해봅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하루 24시간 그리스도만 생각할 수 있습니까? 24시간이 아니라 1초라도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아까 하나님 소유로 부름 받았다 그랬잖아요. 소유이기 때문에 수시로 어떤 사건에 부딪칠 때에 그리스도가 생각나도록 주님에 대해 생각하고 누가 이야기했을 때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러한 힘을 주시지요. 그럴 때 그것이 주님께서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갈등하는 게 선과 악의 갈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느냐 못하느냐 그 갈등이죠. 나에 관한 내가 얼마나 승리할 것이냐 내가 패배할 것이냐 그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대해서 내가 고백할 것이냐 잊어버리느냐 그 문제에요. 굉장히 쉽잖아요.

그 다음에 난해 구절이 하나 나오는데 18절부터 보면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난해구절이라 해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서 죽으사 할 때 윤리도덕 죄가 아니고 인간은 스스로 자아 분열을 극복할 수 없는 그런 한계에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선악에 매여 있는 그것을 보통 넘을 수 없는 죄를 주님께서 대신 지심으로 말미암아 그것과 상관없이 구원을 해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우리뿐만 아니고 영으로 옥에 있는, 19절에 보면 "저가 영으로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신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옥에 있는 영들이니까, 이 옥이라는 것은 지옥도 되지만 죽은 자들이 가는 사람이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 있어요. 죽은 자들에게도 소문이 파다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혜택을 입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그러한 소문이 파다하게 다 퍼진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면 빌립보서 2장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나 하늘에 있는 자나 땅 밑에 있는 자들까지라도 주라고 칭송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대목이 나와요. 예수님은 심지어 지옥 가 있는 사람들로부터라도 정말 주님답습니다. 주님,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받음으로서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 그런 관계 속에 예수님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별로 어렵지 않지요.

모든 옥의 영들에게 모든 이미 죽은 자들에게 앞으로 죽을 자들에게도 이미 복음적인 소문은 다 퍼져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앞에 이야기했지만 제가 성경에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지만 구약 성경에도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이 다 들어있으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20절에 보면 노아의 방주 예비할 동안에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릴 때에, 옛날 노아 심판 때도 이미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복음이 그들에게 다 전파됐다는 겁니다. 미리 앞당겨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된 자가 몇 명이냐? 겨우 여덟 명이라. 말이 여덟 명이지 식구가 빠지면 한 가정 밖에 안 돼요. 한 가정.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분명히 물은 H2O입니다. H2O지요. 화학구조식으로. 분명히 물은 물인데 그 물을 신약의 하늘나라 입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냥 보통 물이 아니라 그 물이 의미가 있어서 제공된 홍수 심판, 홍수의 물이다 이겁니다. 그 물은 부활하시는 표니. 그게 세례라 세례. 세례라 하니까 사람들은 교회에서 물 뿌려주는 것 있잖아요. 침례교에서는 옷 입혀 가지고 욕조에 들어갔다가 꺼내는 것, 그런 것과 연관시키는데 그렇게 연관시키는 것은 안 됩니다.

세례라고 할 때는 물에 수장되는 것을 가지고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 있죠. 요단강에 빠지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늘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있는 것들은 이미 죽음에를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 모든 있는 것들은 이 무, 죽음의 세계를 거쳐 온다는 것. 이 거쳐 온다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례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의 모든 더러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과해서 이미 거룩케 되었다는 겁니다.

자, 이 점을 쉽게 설명하고 좀 쉽시다. 뭐냐 하면, 무슨 말이냐 하면 노아가 완전합니까?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잠도 오는데, 노아가 완전합니까? 아니죠. 노아가 완벽해서 술을 안 잡쉈습니까? 포도주 안 먹습니까? 노아는 포도주 먹어 가지고 벌거벗었잖아요. 노아가 완전할 것 같으면 정결한 짐승을 제사로 드릴 필요가 없어요. 자기 잘나서 구원받았는데 뭣 때문에 대신 제사를 드립니까?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행위가 뭐냐? 깨끗한 짐승을 새를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그 제사를 흠향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했어요. 이 말은 뭘 말하느냐 하면 같이 동승한 깨끗한 짐승의 대신 죽음을 바탕으로 해서 노아는 구원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있던 방주, 방주를 필요하게 만든 물 심판, 방주와 함께 동승했던 정결한 짐승, 이 모든 것이 3종 세트, 이 한 세트가 되어 가지고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이 세상 모두가 죽음에서 삶으로 건져내는 하나님의 작용이 항상 작용되어 왔었다는 것을 증표하는 상징이 되는 겁니다.

그 혜택을 너희들은 이제는 노아처럼 입게 되었으니까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로와 피 뿌림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 땅에 대해서는 나그네 삶을 살게 되면 이 땅에 연연하고 이 땅에 집착하는 그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주님의 몫으로서 우리들에게 들이닥치는 말씀 성취가 되겠지요. 우리가 그걸 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런 방식으로 해내겠다는 겁니다.

잠깐만 쉽시다.

여덟 번째 강의였습니다.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