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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2 15:21:34 조회 : 2436         
Re..함평-베드로전후서강의 녹취10번 이름 : 한윤범(IP:)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10번


몇 번째 입니까? 열 번째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단숨에 왔는데 제가 주장하는 이론이 뭐냐 하면은 이 베드로전서의 모든 하라하는 명령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우리는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이 명령은 만약에 우리가 하려고 한다면 내용을 곡해해서 시도하기 때문에 열심히 해봤자 본래의 성경에서 요구하는 그 내용과는 서로 디 아니쌔, 서로 맞지를 않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전혀 못하는구나, 우리 자체적인 능력, 잠재적인 능력 가지고는 성경을 천 번을 봐도 그 하나라도 우리가 지울 수 없구나. 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성경이다. 라는 것이 지금까지 오늘 이번에 강의하면서 줄기차게 주장했던 제 이론입니다. 맞는지 안 맞는지 여러분들이 판단을 열심히 하고 있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킬 것 같으면 이 말씀을 만약에 지킬 능력도 없고 못 지키고 지킨다면 곡해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이 성경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그냥 안 봐도 되고, 관심 두지 않아도 될 책이 아니냐? 이론이, 논리에 따르면 그래, 하나님 잘해보소. 던져놓고 나는 돈 벌고 살기에 바쁘니까 이렇게 신경 안 써도 봐도 못 지키는 것, 뭣 때문에 보느냐 말이에요. 봐도 안 되는 걸.

이중에서 리투아니아 언어라든지 러시아 언어하시는 분, 계십니까?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러시아 책을 쭉 나눠주면 러시아 언어도 모르는데 책을 왜 주느냐 말이죠. 그러면 팽개쳐 버리고 간식이나 까먹지. 귤이나 까먹고. 그러면 되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이라는 것은 거룩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순종하세요. 아무리 얘기해도 내던져도 무방한 책이 아니냐는 그런 논리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제 이론이 맞는지 베드로후서로 한 번 넘어가 봅시다.

1장 2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능력입니다. 외부능력. 제 말이 맞지요. 지금 고린도전서. 베드로전서.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나오는 이 이야기, 그러니까 베드로전서에서 쭉 줄기차게 달리면서 이 책은 우리가 못 지키며 줘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강조했는데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에게는 기이한 능력이 외부에서 주어지게 돼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이한, 이상한 능력이, 그냥 능력이 아니고 생명의 능력이,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우리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단 말이지요.

이것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능력입니다. 외부에서 능력이 주어진다는 말은 우리 자체에서 능력으로 이 성경말씀을 지켰다고 우기는 사람 같으면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올시다. 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신기한 능력.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길에 갈 때에 당신 예수 믿습니까? 죽으면 천국 갑니까? 예, 갑니다. 어떻게 갑니까? 신기한 생명의 능력을 외부에서 주입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서슴없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의 자체적인 선한 능력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아니 성경을 보잖아요. 지킬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의지만 있으면 지키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지키고 싶어도 신기한 생명의 능력이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 말씀은 내 속에서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의 능력을 너무 자포자기하는 것 아니오. 너무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 그림으로 그리면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무대가 이렇게 있고 관객들이 있다면 베드로전후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솜씨를 보이는 무대의 장입니다. 짠짜자아안. 해서 이 베드로전후서에 나오는 신기한 능력이 어떻게 성도의 신체가 하나의 말씀이 발현되는 나타나는 무대로 사용되는가? 그 솜씨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짠짜자아안.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의 무대가 돼있지요. 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러한 무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예상치도 못한 기이한 정말 기이한 그런 능력들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 쉬운 예를 들면 여기 9절에 보면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이" 자꾸 제가 눈이 어두워서 신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이죠.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절에 보면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니까 아까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당나귀가 말을 한다, 홍해가 갈라진다, 천지에 노아홍수가 있었다. 노아홍수가 있었다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아무리 과학적인, 고고학적인 흔적을 찾아도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합니다. 옛날 고대 전설에 이런 게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증거가 안돼요. 과학적으로 증거하면 빙하시대가 있었다는 것이 나오지 홍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증거가 되지 않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관객들, 세상적인 악한 세상들 앞에서 이러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다, 잘 있어라, 뭐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런 이야기가 이들 앞에는 낯설기 짝이 없어요. 저 사람이, 저 배웠다는 사람이 왜 저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성경 그것도 믿을 만 하다고 믿나, 바보 아냐? 라고 조롱할지라도 그 사람은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열리는 무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부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라고 되어 있지요. 이걸 봐서 이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이미 익히 알고 잇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편지를 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에 대해선 더 이상 깊이 있게 설명을 해나가지를 않지요. 그리고 이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라는 이것도 외부에서 주어진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의 의인데.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만 예수님의 의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잠시 설명이 되어야 그 다음에 4절, 5절, 6절이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의 의가 뭐냐? 예수님의 의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낯선 의입니다. 굉장히 낯선 의로움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의 의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근접할 수 있는 의가 아닙니다. 낯선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이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은 사람들이 그 의로움은 무가치하다고 갔다버린 그것이 의입니다. 그런 의는 필요 없어. 그런 의로움 같으면 나는 그런 의로움을 안 따라 갈 거야. 그런 의는 수입 안할 거야. 그런 의로움은 관심 안 둘 거야. 라고 내팽개친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제가 전번 전번에 이야기했지만 이 의로움은 예수님 본인, 제일 신기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의로운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그 의로운 행동을 한 나에게만 해당되는 의가 되는데 예수님의 의는 얼마나 신기한지 의로운 행동은 예수님이 했는데 그 파급효과는 그런 행동을 안 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의가 확산되는 의로움이 예수님의 의로움입니다. 이거는 정말 신기합니다. 이건 참으로 신기한 겁니다.

마태복음 8장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마치고 내려오는데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는 산상설교에 의하면 절대로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눈에 있는 티를 뽑을 사람도 아니고, 오른손이 범죄한다고 잘라버릴 사람도 아니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 대줄 사람도 아니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걸 생각하는 사람이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그 나라 의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요, 아무것도 의로울 것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의로움 때문에 공짜로 거저, 성경에는 거저로 되어 있는데 공짜로 의인으로 되어서 저주가 풀립니다. 신의 저주가 풀려버립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중심에서 제일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어떻게 개인적으로 하는 그 의로움이 어떻게 타인에게 그대로 고스란히 거저 전이되느냐, 그게 이전될 수 있는 메커니즘, 그 과정이 뭐냐가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기독론을 하는데 이게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엉터리 같은 옛날 신학자들 주장을 한번 들어봅시다. 말은 엉터리 같이 했지만 사실 여기는 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 같은 잘 나가는 사람들 다 들어있지요. 이 사람들 313년, 325년 이후에 소위 삼위일체라는 것이 있어요. 삼위일체 들어봤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들어봤습니다. 삼위일체 영어, 삼위일체 수학.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은, 지금 관건이 뭐냐 하면은 어떻게 아무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라는 어떤 분의 행위가 아무것도 안 한 나에게도 동일한 효과를 줄 수 있느냐? 만약 이것만 가능하다면 예수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믿고 예수를 위해서 내 목숨을 내놓겠다. 정말 논리적으로 딱딱 맞는다면.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정말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선물이다. 이것은 보통 선물이 아니다. 케이크 몇 개 주는 것 이 정도가 아니다. 산타클로스... 최고의 선물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그저 의인이 되는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없고 이것이 바로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다 여기고 여기에 교회 교리의 사활을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아이디어가 뭐냐? 지금 제가 소개하는 것은 성경적 잘못 된 것을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은 그 점을 미리 예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너무나 먼 거리가 있는데 하나님은 너무 고귀하시고, 인간은 비천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먼 거리를 이어줄 가교, 브릿지, 다리 같은 것을 설치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런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괜찮게 미끄러지지요, 가지요. 지금 괜찮지요. 사실 괜찮은 게 아닙니다. 방금 한 이야기에 문제가 많아요. 문제가 많은 데 얼른 듣기에는 아주 건전한 신학처럼 보이지요.

이 예수님은, 계속하겠습니다. 쓸데없이 말 안 하고. 이 예수님은 안에 편리하게 두 개의 서로 배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신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인성을 갖고 있는데 왜 두 개의 서로 다른 배타적인 속성을 두 개 가지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진 신성 파트는 하나님을 담당하고 예수님의 인성 파트는 인간을 담당해서 자기 안에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속성이 두 개가 있다고 본 겁니다. 이영표가 담당하는 것은 앙리를 담당하고, 전담 마크맨이죠. 또 누구 수비수는 어떤 공격수를 담당해서 전담 마크맨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오셔야 하나님 쪽에선 자기 나름대로 처리하고 인성은 인성대로 처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어야 한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활을 걸면서 여기에서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신은 신이지만, 여호와증인 같은 것은 하나님을 신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피조물로 천사의 한 종류로 보거든요. 그런데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은 신 맞는데 이게 하급신이다. 신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 약간 떨어진 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그 사람 대단한 신학자입니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주장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기독교라 하는 것은 구약성경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은 그것이 지금도 유효해야 되죠. 지금도 하나인데 아, 잘못이다. 세 명이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니까 일관성 있게 여전히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런데 그 한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신은 역시 한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렇다면 최고의 신이 있다는 말은 그보다 단계가 낮은 신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누구냐? 예수님이다. 이렇게 아리우스는 주장했습니다. 왜 아리우스가 예수님을 최고신보다 한 단계 낮은 신으로 봤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아들로 봤거든요.

여러분, 아버지가 높습니까, 아들이 높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높지요. 재벌 총수가 높습니까, 재벌 2세가 높아요? 그건 뭐래도 재벌 총수가 높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무시해서 낮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나는 아버지보다 못하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마지막 때는 아들의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 했으니까 아아, 그게 예수님은 넘버 2구나. 넘버 1은 성부 하나님. 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따라서 낮지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전 교회가 반발하고 나섰지요. 아타나시우스부터 해가지고 나섰는데 왜 나섰느냐 하면 만약에 예수님이 하급신이라면 어떤 논리가 성립되느냐 하면 구원 받은 인간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속성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만약에 예수님이 한 단계 낮은 하급 신이라면 이 하급 신에서 또 다른 신에게까지 넘어가는 또 다른 다리가 또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구원을 두 번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합니다. 니케아회의에 보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면 인간은 완전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되고, 완전한 인간이어야 돼요. 왜 또 완전한 인간이어야 되느냐? 만약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만약에 예수님이 가짜 인간이라면 진짜 인간의 죄를 속죄 위해서는 여기에 진짜 인간이 있고 그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 사이에 또 다리를 또 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의 단번의 구원에 해당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양이 죄를 지었으면 양을 잡고, 돼지가 죄를 지으면 돼지를 잡는 거예요. 같은 동급의 같은 동급을 대신 바칠 때 그 먼저 동급이 지은 죄가 동급에 의해서 상쇄가 되는 것이 이게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귤이 상해서 상인보고 아저씨, 귤이 상했는데 귤 바꿔주세요. 이거는 되는데 한 동급이니까. 귤이 상했는데 와가지고 수박 달라. 이거는 같은 동급이 아니잖아요.

뭐 먹고 뭐 내논다고 오리발 내논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 죄 지었으면 그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속죄제물은 완벽한 인간이어야 돼요. 완벽한 인간이어야 되는데 가짜 인간 돼서는 안 된다 말이죠. 어느 인간이 마네킹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마네킹하고 자식 낳을 것도 아니고 말이 안 되잖아요. 마네킹 말고 진짜가 오란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매개체로서 인간, 신성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면 이거는 초등학교 3학년 수준으로 쉽지요. 여기서 복잡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죄를 어디서 지었습니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데 육체에서 주로 죄를 짓지요. 제가 아까 인간의 연약한 것은 신체 때문에 욕심을 내서 죄를 짓지요. 인간의 영혼은 어디서 주어지느냐 하면은 이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겁니다. 이 신체 때문에 영혼이 물들어서 영혼도 죄를 짓는 겁니다.

따라서 이 죄지은 육과 영에 대해서 죄지은 육에 대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에 속하는 그러니까 그들은 이야기하기를 영혼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이라고 하는데 이 영혼을 가지고 그들은 뭐라고 하냐면 이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지요. 그 형상이 뭐냐 하면 이거는 짐승에 없는 요소가 들어갔다고 보는 겁니다. 그 짐승에 없는 요소가 뭐냐 인간의 영혼이라는 거지요.

따라서 이 세상에 살면서 힘들여 밥 먹고 산다고 이렇게 애쓰다 보니까 뭐가 다치나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다치고 많이 피곤하고 죄를 많이 짓게 되는 거지요.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육체의 감각적인 욕심을 줄임으로써 이 영혼을 순수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영혼과 육체를 순수하게 유지하는데 예수님께서 옛날 오병이어처럼 맨 날 예수님께서 오토바이 타고 배달하면서 나, 예수님인데 북경반점에서 왔는데 짜장면 필요하지? 배달해 주고, 이렇게 맨 날 돈 대주고, 짜장면 사주고, 이렇게 옷 사주고, 밴드스타킹 나눠주고 맛나 처럼 그렇게 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껏 해결한다는 것이 하늘에서 돈다발 내주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베드로전서에서 봤지요. 욕심을 내지 마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먹는 게 있는 걸 족하느니라.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 맨 날 영혼에 관한 호소다. 영혼에 관한.

예를 들어서 성경 볼 때마다 만 원짜리 하나 끼워가지고 하나님, 베드로후서 떼었습니다. 어, 웬 만원. 줍고. 하나님, 요한일서도. 어, 수표.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후서를 보든, 요한일서를 보든 나오는 것은 거짓말 하지 말고, 바르게 살고,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맨 날 어디다가 집중, 집중해서 호소하냐 하면 우리 육의 만족이 아니라 영적인 요소의 정화에 대해서 깨끗함에 대해서 호소를 하니까 결국은 어떻게 하냐 하면 육의 감각보다 영적인 것에 호소를 하는 거예요. 호소를 하다보면 뭘 느끼느냐 하면 스스로 영적인 정화를 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체력이 필요하듯이 영적인 체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영적인 체력을 보강해 주면 우리는 육을 조절하고 영적으로 정화가 되면서 되는데 이것은 어떤 경우에 그러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자범죄라 하는데 스스로 범죄하는 것에 해당되는데 인간이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 성깔, 그 성질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원죄라고 합니다. 많이 들어봤지요.

인간은 뭣과 뭐로 결합되었느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보유하게 되는 원죄가 있고 그 다음에 원죄에 기초해서 세상 밥 먹고 살기 힘들어서 고의적으로 짓는 자범죄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씻어주는 죄는 원죄를 일단 씻어주고 자범죄에 대해서는 거기에다가 은사의 능력대로 자범죄를 씻을 수 있는 능력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원죄는 다 씻음 받는데 자범죄가 좀 서투른 사람은 상급이 적어서 부끄러운 구원받고 이 원죄 받은 능력을 많이 스스로 개발해서 영성훈련해서 활용한 사람은 나중에 그냥 남하고 똑같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가도 좋은 자리 그러니까 이코노믹클래스가 아니라 비지니스나 더 특상급 비행기 타고 천국가고, 천국 가서도 이미 거기에서 격차가 난다는 거지요. 격차가. 한 쪽은 부끄러운 빤스바람으로 벌벌 떨며 천국가도 한 쪽은 주여~ 이렇게 예수님 보좌하면서 높은 자리에 상급에 차등이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한 번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가지고 등급이 같은 등급이 아니고 내신 성적에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러면 원죄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원죄는 육으로서 해결 안 되니까 원죄 이것을 다 수용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영혼과 육체의 완벽한 인간으로 갖추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당겨가지고 자신의 영과 육속으로 들어오게 하지요. 육으로 지은 자범죄나 영혼의 기본 범죄나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가 됩니다.

이렇게 들어오게 되면 용서가 되는데 여기서 중요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초청할 때는 뭘로 초청 하냐면 언어로 초청하고 언어는 이성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고 부르짖을 때 그걸 듣고 마음을 낮추면 온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좀 낯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침례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까지는 예수님이 할 몫이고, 그 다음에 십자가 믿고 안 믿고는 본인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를 활용하기 나름이다 이 말이에요. 억지로 붙들어서 구원시켜주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십자가 복음을 전해놓고 아이고, 나 그게 싫습니다. 하면 지옥 가는 거예요. 아, 그럴듯하네. 믿자.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기다리고 있는 이 십자가가 와서 아이고, 착하구나. 하고 용서받고 그래서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 안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인간성과 신성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예수님 인성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 옆에 있는 예수님의 신성에도 함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그 다음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인성으로 왔다가 신성으로 빠져나가는 거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니까. 그러면 한번 이렇게 원죄에서 한번 이렇게 길을 익혀 놓은 사람은 그 다음에 자범죄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하아, 또 자범죄를 지었구나. 어디가서? 옳지, 주님한테 가서 용서 받아야지.

그러면 상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자범죄 지은 사람은 그때마다 지을 때마다 쉬지 않고 예수님께 호소해서 이 예수님 안에서 이게 씻을 수 있는 세탁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세탁기 역할해서 계속해서 참여하는데 그 참여하는 여러 가지 진급 루트가 있죠.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믿음은 기초 믿음이고, 믿음에 좀더 믿음보다 더 열심히 자범죄에서 회개한 사람은 덕이라는 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덕 가지고 멈추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사람은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다가 멈추지 않고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절제에 이르고, 절제에다 멈추지 않고 도전하면 인내에 이르고, 인내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경건에 이르고, 경건에 만족치 않는 사람은 형제 우애에 이르고, 형제 우애에 만족치 않는 사람은 사랑을 공급하여 이로서 완전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드디어 골~인.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성경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합당한 이론이란 거죠.

그러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안일에 빠지지 말고 그 다음부터 더욱더 자율학습과 그리고 보충수업에 열중해서 이제는 이 준비한 모든 덕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훌륭한 상급자가 되고 만약에 이걸 바쁘다고 소홀히 하는 사람은 천국가도 제일 밑바닥에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니까 영원히 보장되는 팔자라면 영원히 확정되는 그런 운명이라면 이왕이면 멋진 성과급을 보너스를 챙기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라는 이론이 여기 성립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금 이론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여기에 대해서 만족했을까요, 만족하지 않았을까요? 방금 제 이론이. 참, 이것 상당히 쉽게 이야기한거에요. 지금. 어린아이들도 방금 이야기한 것 이해되겠어요? 인간으로 들어왔다가 안에 변환기관이 있어 가지고 그걸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 쭉 따라가면 되니까. 쉽지요.

이것이 사람들에게 쉽게 납득이 되는데 문제는 거기서 사람의 욕심이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욕심이냐 하면 옛날이니까, 사제님, 왜요? 원죄가 진짜로, 문제는 예수님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이게 문자로 되어 있고 그냥 관념적으로 이야기 전파된다는데 사람이 그걸로 관념은 짜증 나. 눈에 보여야 돼. 기능적으로 나타나야 돼. 사제님, 내가 진짜로 원죄로부터 구원받고 이미 천국사람 되는 거 어떤 표시가 있어야 되지, 확증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냥 눈에 안 보이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것 말고 추상적인 것 말고 실제로 내가 구원받았다. 라는 것을 내가 체험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라는 그러한 요구사항이 이 이론과 더불어 많이 있어 왔어요.

그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위해서 메로빙거왕조 이후에 프랑코 유럽의 시대 이후에 암브로시우스 교회체제가 제국으로 로마제국을 대신하면서 교회체제가 세우고 난 뒤에 이러한 완벽한 진짜 손에 잡히는 장바구니, 손에 딱 잡히는 구원을 확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치가 제공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만찬입니다. 떡과 잔을, 이것은 봉사가 아닌 이상 다 보이잖아요.

떡과 잔을 거기에다가 하나의 그걸 진행하는 가운 걸친 사제, 이 세 사람의 두 개의 사물과 한 사람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여기서 이벤트가 벌어지는 거예요. 사제는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이 인정한 진짜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에 의해서 용서받았다는 그 의식을 지금 이 순간 놀랍게도 되풀이해서 반복할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한 사람을 사제라고 이야기했고, 그 사제가 떡과 잔을 주는데 이 떡은 사제가 집례하는 예배일 경우에는 사제가 주는 이 떡이 물질로 받는 순간 예수님의 살로 돌변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잔은 예수님의 피로 돌변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일반 교인들이 장사하면서 바쁘고 하다가 해가지고 성도가 와서 앉아 가지고 납작한 것을 먹을 때 사람이 감각적으로 뭔가 오게 되면 감동이 오게 되어 있어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하나님, 제가 구원받았군요. 이렇게 쉬운 것을 가지고. 또 제가 이제 원죄를 구원받았으니 다음은 자범죄를 줄이겠습니다. 앞으로 이러이러한 항목들은 리스트를 내가 안하겠습니다. 하고 눈물 흘리면서 사제가 주는 떡을, 잔을 하고. 또 그래도 자범죄가 있다면 조그만 구멍 만들어 가지고 삐딱하게 서 가지고 자매님, 뭐 때문에 왔습니까? 제가 잔소리를 했습니다. 주기도문 3번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을 해서 이것은 이 사제가 떡과 잔을 유일하게 시행될 수 있는 교회 중심으로 가시적인 구원의 그런 기능을 기술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아까 제가 말한 이론과 교회가 맞아 떨어져가면서 아아, 이제는 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이 모든 말씀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가시화되고 실현되니까 이건 정말 완벽한 변함없는 확신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천주교가 16세기까지 이어왔을 때 나오던 이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완벽한 체제에 갑자기 반기를 들고 여기에 대항하면서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건 말도 안돼. 하고 외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1517년 루터입니다. 이 루터라는 사람이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의를 생각하면서 방금 이야기한 완벽한 이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 아니라고 이야기한 근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숨어 계시면서 스스로 나타내실 때만 나타나시고, 인간의 호출에 의해서 나타나지 않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교회에서 성만찬 할 때마다 하나님이 쪼르르 달려와 가지고 또 했나? 아이고, 기특한지고. 내가 내 피로 들려줄까? 라고 재롱을 떤 게 아니라 아무리 인간이 기도하고 성만찬, 아무리 열심히 주여, 주여 불러도 하나님이 자의로 나타나고 싶을 때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루터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나는 그리스도 의에다가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이고 교회적인 어떤 행위를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어떤 보탬을 했다면 십자가의 공로에다가 플러스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한 거, 전도한 거, 뭐 헌금한 거, 이런 성경공부한 거, 이런 것이 추가가 돼서 플러스알파가 추가돼서 이 추가된 것 가지고 신인 협동으로서 구원받게 돼버려요. 그런데 이것을 아무리 성경을 봐도 이건 아니다. 인간의 협동에 의해서 구원되는 거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협동에 의해서 구원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루터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는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알고 안 알고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님이 와야 비로소 십자가를 알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독적으로 폐쇄된 가운데서 예수님이 혼자 이룬 성과지요. 혼자 이룬 성과일 경우에서 아무 대가도 없는 사람에게 이것이 무상으로 전달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사랑은 사랑답게 전달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더라도 이쪽에서 그걸 눈치 채가지고 자기 공로를 대체해 버리면 이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거기에 뭐가 섞이느냐 하면은 우리가 요청했습니다. 우리도 이미 알아 눈치 챘습니다. 라는 자신의 기대감이 포함된 채 들어오기 때문에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예수님의 의 더하기 자기 의가 섞여서 본인이 구원받는 식이 돼버려요. 아이고, 힘 들어라. 하도 인간들이 엉뚱한 소리해가지고 내가 힘들어요.

그렇다면 목사님, 앞에 있는 삼위일체 장치는 어떻게 됩니까? 삼위일체 다 헛빵이에요. 그런 생각 안 해도 구원받아요.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뭐라 했습니까? 주여, 오늘밤에 저를 생각해주소서.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무슨 삼위일체 생각 하나도 안했어요. 다만 십자가에서 나온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의의 능력으로만 그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만약에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강도님,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어떤 삼위일체 이론을 가졌습니까? 어떤 구원론을 가졌습니까? 강도가 뭐라 했어요. 저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글쎄, 당신이 어떤 마음 준비를 했냐 말이죠. 전 마음 준비 안했는데요. 또 마음 준비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닌데요. 그냥 예수님이 와서 저를 생각해서 저를 사랑해서 구원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으로만 전달되기 위해서 일체 인간의 모든 것을 차단시키겠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차단시키는지 아예 숨어있는 하나님, 감추어진 하나님. 나타날 때는 뭘로 나타나요. 십자가로만 나타나서 십자가로 나타나버리면 인간들이 예수님이 쓸데없다고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을 차버린 거예요. 저리가. 저기가. 이 십자가로만 구원받으니까 넌 저리가. 까불지 마. 겸손한 체 하지 마. 얼굴 찡그리지 마. 얼굴 찡그린다고 구원해 주는 것 아니야. 어떤 종교적인 겸손과 낮아짐도 십자가를 매치하는데 연결하는데 아무 도움도 안돼. 십자가만 등장할 때 이 사람에게는 십자가만으로 라는 고스란히 예수님의 공로만이 이 사람 앞에 나올 때 그때 이 사람 마음속에는 나의 구원은 십자가의 공로로만이라는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만 은혜란 이름으로 남게 되지요. 예수님의 공로만 남아요.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을 모독한 죄였다는 것을 하나님의 원수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이렇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루터는 확실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니까 후세의 사람들은 루터는 신학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요. 아아, 참 의미있는. 캘빈은 신학이 있는데 왜 루터는 신학체계를 안 잡았대요. 신학체계를 왜 잡아야 됩니까? 그게 누구를 위한 체계인데. 라고 아마 루터는 반문했을 거예요. 그 체계 잡아서 누구 좋으라고 체계 잡느냐 말이지. 가짜만 양산할 뿐이란 말이죠.

진짜 성경의 지식이나 신약이라는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은혜라는 것을 공동으로 나누고 서로 그 고백을 교환하기 위한 신학이어야 되지 신앙도 없는 주제에 신학체계 수용해 가지고 그걸로 그걸 타고 사다리 삼아서 기어 올라가 천당 간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모독하는 짓밟는 반 복음적인 것이라고 루터는 그렇게 봤습니다. 루터의 이러한 이론은 불과 20년, 30년 안돼서 사라졌습니다. 참, 마귀가 쎕니다. 마귀가 쎄요. 사라지고 다른 것이 루터 신앙이란 이름으로 대체해 가지고 루터가 이야기한 것 말고 다른 루터신학이 루터교회를 만들고 캘빈이 등장하고 캘빈개혁주의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이렇게 막 나갑니다.

신학체계란 것은 이성에 호소하죠. 이성에 호소한다는 것은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루터가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순수하게 그 십자가의 공로만 남기는 식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시고 그 외에는 일체 일을 하지 않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그런 측면에서 베드로후서의 이런 본문, 아까 보니까 아까가 더 그럴싸해 보이고, 아까가 더 정교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데 그럼 십자가로서 베드로후서 이런 것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입니까? 경건에, 그 다음에 뭐지요?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그 다음에 사랑을 공급하게 되어있다 말이지요. 이 모든 것에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이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에 진짜 알맹이, 그 내용의 알맹이는 이미 우리가 동일한 악한 세상을 미리 앞서서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작태 속에서 이게 다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실제로 우리와 똑같은 그런 삶을 사셨는데 그 삶을 사시면서 다 갖고 있던 여러 가지들의 명령이 이 전체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사랑으로 봉합되는데 그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요. 믿음에서부터 이렇게 절차를 내려가면서 어떤 변천과정을 겪는다. 어떤 변천과정이냐 하면은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 여기까지는 개별적인 자질에 관한 것이지만 경건까지. 그 다음에 형제 우애와 사랑은 이것이 개별적에서 이웃 사랑까지 범위가 넓혀진다. 이렇게 주석에 보면, 제가 여러 가지 주석을 참고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있는데.

덕이라는 것, 지식이라는 것은 일종에 이렇게 보면 돼요.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들어올 때에 그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말을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깊은지, 넓은지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차츰차츰 알아갑니다. 알아가요. 지금 함평수련회에 어제 우리가 왔을 때에 저는 강사숙소하고 이것 밖에 몰라요. 탁구장 밖에 몰라요. 그런데 다른 시설물이 어떤 것이 있는지 또 뭐가 있는지 저는 구석구석 모릅니다. 살아가보면 점차 구석구석 박혀있는 요소들이 예수님의 다른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될 거에요.

그러니까 신기한 능력으로 주님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십자가라 해도 이게 오해할 소지가 많지요. 그냥 은혜에 감사한데 그 은혜의 실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또 세월이 가면서 우리가 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 알아갈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네가 기도하라. 뭘 기도하느냐? 주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풍성한지 그 풍성함을 기도하라고 했어요. 요즘 교회에서 기도하는 내용과 좀 다르지만 상당히 추상적이죠.

그런데 베드로후서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덕과 지식, 절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겁니다. 따라서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뭡니까? 믿음까지, 덕까지 했는데 지식 안하고 죽으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구원이란 것은 이런 것을 확보한다고 구원이 아니고 구원은 예수님과 나의 관계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나와서 또 수고해 주셔야 되는데, 문 전도사님 한 번 수고해 주세요. 이것은 말로 해서는 내가 답답해. 내가 예수님이고 문 전도사님이 성도인데 제가 소개합니다. 처음 왔지요. 자, 여기가 마이크인데, 하고 벼락 떨어져 죽어버렸단 말이에요. 구원받는 것은 마이크 있는 것은 알았지, 저기 탁구장 있는 것은 몰랐는데 구원받을 수 있느냔 문제입니다. 그런데 손을 잡았잖아요. 손을. 손을 잡았다고. 이 사람은 그럼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습니까? 예수 십자가로. 마찬가지로 마이크 하나만 봐도 역시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알게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대목에서 제일 주의할 것은 내가 믿음은 되고 지식은 안 되니까 나, 위태하다고 느끼는 것, 이것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지금 뭔가 흐릿하게 놓치고 있는 사람이에요. 십자가가 얼마나 다양하고 넓은지를 알기 위해서 하는 건데 이미 어떤 내부에 있는 현장에 와 있는데 마치 이런 리스트 중에서 끊긴다고 이것 하나 빠졌다고 해서 다른 현장에 온 것처럼 그렇게 착각들 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이것까지 하고 죽더라도 여기까지 하고 죽더라도 심지어 이것은 시간적인 관념이 아니고 이런 걸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더하다가 도로 이렇게 미끄러져 가고 이리 갔다가 다시 떨어지고 많이 있어요. 그리고 여기 덕이나, 지식이나 하나하나를 시간 관계상 다 못하지만 이걸 하나하나 해보면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신학지식 그런 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있는 덕, 예수님이 갖고 있는 지식, 예수님이 갖고 있는 절제, 예수님이 갖고 있는 인내를 우리 인내로, 우리 지식으로, 우리 덕으로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지식만 해도 우리가 언제 예수님의 지식을 다 압니까?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다음 진도 나갈까요? 그것은 주님 소관이지요. 지식에다가 이걸 보여 줄 수도 있고. 이걸 보여 줄 수도 있고. 지금 신체가 문제가 있어요. 신체가 말을 안 듣네.

형제 우애도 보여 줄 수도 있고. 그러면 실례를 한번 들어봅시다. 십자가를 알았다. 형제 우애가 안 되던데 예수 믿고 난 뒤에 바로 형제 우애를 알았을 때 이 모든 은혜 누굽니까?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사 형제를 우애 있게 하게 했다 이 말이죠. 얼마나 고맙습니까? 스타킹 주고. 갑자기 형제가 우애로워 미치겠어. 갑자기 사랑이 들어가는 것 같아. 그러다 말 한번 잘못해 가지고 쭉 내려가고.

이미 우리는 공통된 영역 속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이제 어느 것을 관람할 것인가? 주께서 그 사람의 형편 따라 이러한 축복과 이러한 축복, 덕이란 축복, 지식 축복 주실 거예요. 받을 때 그걸 축복이라고 여러분들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가 따내야 될 어떤 성과급이 아니고 이것은 그냥 공짜로 우리에게 믿음만 공짜가 아니고 이 모든 것도 공짜로, 공짜로 다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5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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