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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7 14:35:17 조회 : 2553         
Re..함평-베드로전후서강의 녹취13번 이름 : 한윤범(IP:)
파일 번호는 13번이고, 강의는 12강 입니다.


2006 함평겨울수련회-베드로전후서 12강
한윤범 2006-02-07 11:09:35, 조회 : 1, 추천 : 0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13번


열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밤에 제가 약간 잠을 설쳤는데요. 잠을 설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어제 우리 서경수 목사님 방에서 이야기 가운데서 제가 약간 쇼크를 받았어요. 어떤 쇼크를 받았느냐 하면 첫 번째 강의 있잖습니까? 서경수 목사님이 첫 번째 강의가 철학적이라서 잘 이해가 안 된다 할 때 그때 약간 멈칫 흔들렸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저는 모든 것을 계속 허물고 모든 것을 다시 세우는 그것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작업인 줄 알았는데 일장이 만약에 어렵게 되면 일장에서 한 이야기가 모든 것을 지금 다시 허물어도 괜찮습니다. 하는 쪽으로 제가 이야기했거든요. 모든 것이 허물어도. 이상원 목사님은 일번을 못 들어서 그런데.

예수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 뭐 우리가 공부하는 것, 베드로전후서가 어떠니, 창조가 어떠니, 부활이 어떠니, 십자가가 어떠니, 이런 것을 만약에 우리가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져도 외부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채워주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제 이야기의 취지였어요.

그러면 지난 날 믿었던 예수, 지난 날 믿었던 십자가를 오늘까지 붙들고 있다면 이것은 한 마디로 뭐냐 하면 안정성 확보입니다. 안전성을 확보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안전성을 확보해버리면 계속해서 이걸 고수하게 됩니다. 이걸 고수하게 돼버리면 무엇을 믿지 않느냐 하면은 어제 주님 말고 오늘의 주님을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셈이 돼버려요.

그래서 저는 첫 번째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들은 다 복음을 알고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 정도는 지금도 그렇게 사시고 들 있지요. 라는 투로 이야기했는데 어렵다고 이야기하시니까 그렇게 안 사시는가? 뭔가 언어라는 개념, 신학 개념 이걸 붙들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뭔가 쌓는 식으로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참, 차라리 잘됐다, 다시 한번 다 다시 부셔버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전후서에 여러분들이 강의에 참석 했지만 베드로전후서의 본문에 느끼는 감정은 뭐냐 하면 베드로가 논쟁적이에요. 논쟁적입니다. 논쟁적이라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저기에서 이런 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보지 말고 나는 공격하겠다. 라는 투가 베드로전후서로 나왔어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체계가 있습니다. 딱딱 기초가 있어요. 아아, 어어,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떻습니까? 어어, 오오, 딱 맞네. 딱딱 떨어져요.

그런데 베드로전후서는 들쑥날쑥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몰라요. 이것은 바로 적이 있었어요. 적을 의식하고 적을 겨냥하면서 적어도 적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습니다. 라는 투로 베드로전후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들을 의식해서 적들과 가상적인 논쟁을 벌이는 책이 베드로전후서입니다. 그러면 논쟁하면 이기면 될 것 아닙니까? 이기는 것이 아니고 고난 받게 되어 있지요. 안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 받게 되어 있다는 것도 베드로전후서에 나옵니다. 논쟁적이죠. 그런데 어떤 분은 성격상 논쟁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공자님이 그런 분인데 공자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원수를 적을 두지 말라. 사람에게 적을 두면 본인에게 피곤해진다 이 말이죠. 이게 원효대사의 화쟁의 원리, 이론하고 비슷하지요. 적을 만들지 말라, 자꾸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 말라. 그러면 네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 실용적인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후서는 자꾸 시비 걸어요. 자꾸 시비 건다고요. 왜 시비 거는가를 나중에 베드로전서는 몰랐고, 후서 이렇게 할 때는 몰랐는데 오늘 본문에 할 3장에 오면 아하, 안전성이구나, 안전성. 사람들은 자꾸 안전성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구나. 그것이 비로소 드디어 베드로후서 맨 마지막에 와서 비로소 그게 밝혀집니다. 마치 이야기, 드라마의 끝이 마지막 시간에 다 밝혀지듯이. 아아,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그딴 게 뭐가 소용이 있어. 예수, 내 주먹을 믿는다, 나는. 예수 안 믿는다. 라고 그렇게 큰 소리 치는데 그걸 베드로가 공격하면서 여러분, 저렇게 주장할 때는 저렇게 공격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딱 오니까 사람들은 결국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대자연의 안전성을 담보로 해서 거기에 의지하면서 미래까지 설계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구나 하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우리는 주님의 적이 아닌데요. 우리는 주님과 한편인데요. 라고 이야기 할 사람도 있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전후서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내용이 하나님의 집, 그러니까 교회 내에서 먼저 이 논쟁을 근거로 심판을 감행하고 계시는 분이 지금 우리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 편이니까 우릴 건드리지 말고, 불교신자를 건드리세요. 라는 것이 용납이 안 돼요. 너도 마찬가지로 뭔가 안전성을 확보해 가지고 느긋하게 즐기고자 하는 심보가 있지 않느냐 하고 따지고 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베드로전후서를 공부하면서 제일 첫 강의를 한번 지워보자. 지워볼 때까지 한번 지워보자. 예수고, 십자가고, 뭐 복음이고, 우리가 알았던 모든 신학적인 것을 삼위일체고 다 지워보자. 다 지우고 난 뒤에 여러분 마음에 뭐가 남아 있느냐 라고 제가 물었던 겁니다. 첫 강의에서. 그렇게 물었던 거예요.

그것 뭐 어떤 분들은 복음을 아는 사람은 아이고,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주님께서 활동하셔서 여전히 똑같은 십자가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것 내가 과거에 알았던 것 지워버린들 주님 주시면 그만 아닙니까? 라고 하신다면 고맙지요. 저는 고맙지요. 바로 그거다, 바로 그거라. 교회 몇 년 다녔는가, 나는 직분이 목사다, 이런 것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저는 이 대자연을 안 믿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만 한다면 제가 꼭 고마워 할 이유는 없지만 주님께서 고마워하고, 이 성경대로 베드로가 고마워하고 다 고마워하지요. 그것이 샛별이 떠오른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음껏 지워도 되잖아요. 정말 그렇다면 이젠 안심 푹 놓고 마음껏 지워 나가도 상관없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확정될 수가 있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3장의 내용은 이 지구가 멸망한다는 겁니다. 무슨 이런 악취미가 다 있습니까? 제가 첫 번째 강의하면서 얼른 지나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툭 던졌지요. 그 손학규 지사는 황우석 교수를 속을 때까지 속아보겠다. 라고 했지요. 그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제가 얼른 툭 던졌는데. 바로 그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말이에요.

세상의 모든, 그렇다면 만약에 주님이여, 제가 손학규 지사인데 저는 황우석 교수가 아니고 저는 속을 때까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아이고, 장하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래? 그럼 네가 딛고 있는 지구를 한번 멸망시켜봐? 라고 나오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베드로는 너희들한테 안 속아 넘겠다는 거예요. 뭐 믿습니다. 하나님. 할렐루야 해도 안 속아 넘어가겠다는 거예요. 정말 네가 딛고 있는 최후의 보루, 이 지구마저 사그리 불살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뭔가 믿고 있느냐를 확인하겠다는 것이 베드로전후서의 특징입니다.

그 사람이 지난번에 약간 등장했던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롯이었고요, 노아의 여덟 식구였습니다. 두 사람의 특징은 외로웠다는 겁니다. 두 사람의 특징은 쓸쓸했다는 겁니다.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인내심을 가지고 경건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마음껏 지워볼 랍니다. 마음껏 지워보기 위해서 이 대자연의 안전성에 대해서 이게 왜 무너져야 하는가를 지금부터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보면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만물은 처음 창조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등산해 보면 알아요. 산에 높은 등산해 보고 발밑에 허연 구름인지 안개인지 저쪽 세상과 산 위의 세상을 구분 지을 때 그때 우리는 도를 닦은 그런 고승은 아니더라도 저절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대자연 앞에서 나는 한 점의 점이구나. 하나의 흙이고, 먼지에 불과하구나. 그래 대자연은 안정되지만 나는 사라지구나.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그래, 죽자. 이 대자연에 몸을 내던지리라. 이런 식으로 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진짜 시 나오면 뭐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시 같지도 않는 거예요. 그렇게 운을 떼고 와서는 이제 세상 나가는 버스타고 올라가지요.

대자연은 어머니 같아요. 우리의 보호막입니다. 인생은 짧아도 자연은 길고 예술은 길다. 예술가들은 예술 작품은 하나의 자기 목숨 바쳐서 하는 작품이에요. 자기를 죽이고 예술 작품을 통해서 다시 거듭나기 위해서 예술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술하는 사람들의 그 복장이 아주 특이한 복장들이 많지요. 예술하는 사람은 기존의 모든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개성에 몰두하면서 수염을 이렇게 기른다든지, 개량 한복을 입는다든지,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 생명 운동하는 사람들, 유기 농법하는 사람들, 딱 보면 특징이 있어요. 수염 기르고, 개량한복입고, 바지 이런 것 있어요. 흙담집에 살고, 그런 식으로 자연에 살고 자연에 죽겠다는데,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그 자연이 불탄다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들 또 어디다가 피신할라 합니까? 피신할 데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 자연의 안정성에 대해서 과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한번 물어봅니다. 자연이 왜 안정되어야 됩니까? 그것 한번 스스로 자문해 본적 있습니까? 해가 떴다가 집니다. 해가 지다가 떴다가 뚝 떨어지면 어떤데요. 그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옛날 고대 사람들은 자연은 해가 떴다가, 그래서 고대 사람들이 제일 신기한 게 뭔가 하면은 자연은 해가 떴다가 지는 것이 신기했어요. 왜냐 하면은 왜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느냐 말이지요. 우리가 시키지도 않는데 집안의 개는 먹어, 짖어 이러면 말을 듣는데 저 태양은 우리 인간의 말을 안 듣는데 제 자리를 찾거든요.

그럼 저 태양은 누구 말을 듣느냐 말이죠. 그 누구 말을 듣느냐 에서 나온 것이 유신론이 나옵니다. 신이 있다고 가정해야 그 신의 일관성이 있는 지시를 받아서 태양은 제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대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시인입니다.

시인들은 세상의 모든 우주를 상징으로 전환시켜 버려요. 상징으로 전환시켜 버리면 여기서 뭐가 떨어져 나오느냐 하면은 이성이 떨어져 나와 버려요. 또 어려운 철학적 이야기가 나와 죄송합니다만 좀 참으세요. 이 이성을 가지고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 정확한 이치, 앞뒤가 맞는, 논리가 딱 떨어지는, 이런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오는 이런 이성에서 벗어나서 시인들은 상징으로 나와 버리고, 이 상징을 극대화한 것이 바로 신화입니다. 신화.

그리스의 초창기에는 신화의 시기에요. 시인들의 시대입니다. 이걸 뮤토스라고 하는데 시인들의 시대에요. 그걸 반대하고 이 세상은 실제 어떤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최초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냉철한 논리를 가지고 따지는 그 자체를 하나의 철학으로 정립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누구한테 대화해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나중에 그 사람을 할 말을 잃게 만들어버립니다.

진리라 하는 것은 그렇게 상징으로, 신화로 그렇게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진리, 결국 마지막에 상대방이 나는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그럼 모르겠다. 하는 모르면서 왜 아는 척 했느냐? 말이죠. 그래서 니 꼬라지를 알라, 네 자신을 알라. 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잖아요. 이제는 이러한 아주 전설, 신화 이런 시대를 벗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벗어나고 정확한 로고스를 찾는, 정확한 이치를 찾는 시대로 들어가야 된다고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했고, 그것을 이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 제자가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이어받았습니다.

이 플라톤이라는 사람은, 플라톤의 이야기가 여기 나와요. 이 교재에 나오는데 그 대목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기 2페이지에 보면 2페이지에 위에서 열 번째 줄에, "숫자 1을 여러 번 그려보게 하자." 1111111111 열 번을 그려보게 하자. 이 열 개 중에서 어느 것이 1이냐? 어느 것이 1입니까? 열 개 주에서 다 다른데 삐뚤빼뚤하고 높낮이가 다른데 어느 게 1이냐 말이죠. 그럼 1이 없습니까? 인간 머리 속에 로고스 속에 1이 있어요. 1이 있는데 그 표현을 할 때는 열이면 열 다 다르냐? 그것은 진짜 1의 진짜 형상, 진짜 본질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 이데아 세계, 가상의 세계에 있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가상체로서, 모방체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예가 그 밑에 나오죠. 아내를 사랑한다, 아내를 사랑한다, 아내를 사랑한다를 열 번 했다면 그 열 번 중에서 어떤 경우가 아내를 사랑한 것입니까? 열 번 다입니까? 종잡을 수 없잖아요. 좀더 나아가면 개가 있다. 개라는 것이 없어요. 스누피가 있고, 삽살개가 있고 발발이가 있지. 개가 없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조합해서 개라는 관념은 없는데도 개라는 관념을 소통하고 있잖아요. 이것은 딴 세계에 있다 이 말이지요. 사람은 없는 거예요. 다만 철수가 있고, 영희가 있을 뿐이에요. 철수, 영희를 하나의 개념으로 하나의 종으로 묶어낼 때 그걸 뭐라고 표현하나? 그건 사람이라고 표현하자. 그럼 사람은 어디 있느냐? 사람은 딴 세계에 있고 그 사람의 다양한 세계가 다양하게 분파된 것이 분류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렇게 보통 개별자, 개개 인간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아이디어가, 그 소리를 들어보면 맞지만 그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하느냐?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체를 안정되게 가져가자 이 말입니다. 이것이 핵심이에요. 아침에 잠 와서 뭐가 핵심인지 모르지요. 지금.

플라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여러 가지 변화를 겪더라도 이것 때문에 마음 졸이지 말고 우리 몸이 죽으면 우리 육체가 벗어보면 우리 속에 알맹이처럼 발가벗은 영혼이 나오는데 그 영혼이 우리의 본질 되는 진짜 본질 되는 온전한 형상되는 신의 세계로 들어가니까 이 땅은 나그네 삶이니까 이 땅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거나 그렇게 하지 말고 이 땅의 자기 영혼을 승화시켜서 갈고 닦아서 신을 만나는 준비를 합시다. 라는 것이 플라톤 철학이에요. 그게 플라톤 신학이라니까.

이게 플라톤이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아마 플라톤 들어본 사람은 안 믿을 거예요. 그것 교회 목사님이 이야기하던데, 이렇게 해요. 교회 목사님이 플라톤주의자라니까 플라톤주의자니까 그게. 도대체 한국교회에서 이걸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없어요. 이걸 이야기하면 교회에서 쫓겨나고 노회에서 쫓겨나죠. 우리 노회니까 안 쫓겨나지.

그게 플라톤주의에요. 이 땅의 삶은 우연적이고, 지나가는 것이 일시적이고, 나그네 삶이고, 죽어서 우리의 영혼의 고향되신 주인 되신 신을 찾아가면 합일하면 된다. 따라서 이 땅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잘 안되고 꼬이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이게 플라톤주의라니까. 이게 기독교가 그리스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3,40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에요. 그것을 더 발달시킨 것이 나중에 스토아학파, 또 같은 차원인 에피쿠로스학파가 또 나와요.

성경에 보면 철학은 배설물, 똥, 오줌과 같아서 철학으로서는 안 되고 오직 이제는 예수님을 안 이상은 고상한 지식을 알았으니 이제는 그런 철학 같은 것은 난 배설물로 버린다. 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어요. 버린다 하니까 이제는 전부 다 버릴 것도 없으면서 버려요. 뭘 알아야 버리지. 다른 사람은 집에 쓰레기 있어서 쓰레기 버리는데 옆 사람은 쓰레기도 없으면서 같이 이래 가지고 뭔데 없어. 없는데 뭘 버려요.

실제로 가만 보니까 맨 나는 그리스도만 알고 다른 걸 버린다고 해놓고 가만 보니까 플라톤 철학하고 있어요. 사도 바울 같으면 다 갖다 버린 것을 가지고 거기서는 복음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고요. 특히 5월초에 가정의 달되면 완전히 유교가 덩어리로 한국교회 전체가 유교가 덩어리에요. 부모한테 효도하면 복 받는다. 이것이 완전히 유교인데, 실용철학이에요. 실용철학인데. 안 버렸어요. 안 버렸어요. 안 버리니까 제가 이렇게 한국교회에 대해서 공격하고 그것이 거짓이고, 비 복음이라고 지옥 가는 이야기라고 공격하는 겁니다. 버리질 않았어요.

그럼 왜 안 버리는가? 안전성이거든요. 안정성. 무슨 안정성? 교단의 안정성, 목사는 직업의 안정성, 전문직업 됐다는 안정성, 이만큼 복음 알았으면 나는 복음 위에 서면 구원받는다는 안정성, 이 안정성 확보가 돼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뭐 필요치 않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마슬로우라는 심리학자가 밝힌 것에 의하면 인간의 열 가지의 욕망 가운데서 기본적인 욕망이 뭐냐 하면 소속의 욕망, 안정성의 욕망이 있습니다. 최고의 욕망은 자아를 실현하는 욕망. 그 마슬로우의 욕구설이 우리 한국의 엘지, 삼성, 현대, 모든 기업체의 인사관리라든지 경영학에 다 들어가 있어요. 경영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영심리, 마슬로우의 욕구설을 반드시 학교에서 공부하게 돼있어요. 저도 대학교 때 그걸 공부했어요. 제가 일부러 선택해서 경영학을 했습니다. 해보니까 인간의 심리를 통해서 인간의 자질을 역량을 극대화시키는 이것이 바로 진짜 경영학의 모체라는 것을 그 교수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경영학의 모체가 되는 그 기본철학이 뭐냐 그건 마슬로우의 욕구설, 인간은 기본 본능,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 욕구를 하나하나 충족하면 그 사람의 지갑을 열고 돈이 나오게 되어있다 말이죠. 그리고 경영자는 그 밑의 부하직원을 꽉 쥘 수 있단 이 말이지요. 그 제일 밑바닥이 뭐냐 하면, 제일 밑바닥은 사실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욕구고, 그 다음의 욕구가 뭐냐? 어떤 소속에 안정되어 있으면 하는 그런 욕구가 있어요. 그러니까 공기업이라든지 공무원 이 직장이 요새 선호되는 거예요. 모든 시대가 불완전하니까. 그래서 어떤 사기업에서는 아무도 승진 안하려 해요. 승진하면 나가라는 소리로 들리니까. 그러한 경우가 생기는데.

그러면 이 안정성이 어디서 나왔는가? 제가 두 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적으로 인간은 왜 안정성을 찾게 되었는가? 성경적으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신학적으로, 복음적이 아니고, 신학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 안정성을 어떻게 사람들은 그걸 옹호했던가? 지금 이 두 가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실은 한 가지 더 있는데 동양철학을 제가 여기서 동양철학을 설명해서 불교와 유교와 도가 이런 걸 설명해서 왜 동양철학은 안정성을 무극, 장동건의 영화 무극, 무극에서 음양설이 나와서 이게 전부 다 무극을 안정되게 하는 여러 가지 변화가 결국 다시 하나의 안정으로 돌아가거든요. 이런 철학이 발전된 것은 중국대륙이 넓기 때문에 큰 평원을 차지하기 때문에 하나의 일찍부터 제국이 성립돼요. 이렇게 땅이 좁으면 제국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땐 도시국가가 생겨요. 땅이 좁기 때문에 그 중에서 자기 성, 자기 성, 자기 성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중국 같은 경우는 큰 대륙이기 때문에 전부 다 천자, 하나의 오야가 될 때까지 서로 분투 싸우는 거예요. 삼국지 같은데 나오지요. 하나 되기 위한 하나로 되기 위한 줄서기 또는 질서잡기.

이것이 큰, 그걸 어떤 역사가가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모든 역사는 사실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후와 지리적 조건이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했는데 아주 유명한 역사학자에요. 지금까지 역사는 인간이 자기의 의욕으로 욕망으로 일구어간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기후와 환경과 지정학적인 요인이 역사를 거기서 거기에 적응되는 그에 적합한 역사를 만들어낸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동양철학이란 뭐냐? 심오한 게 아니고 사실은 땅 따먹기를 하기 위한 정당성, 나는 이 땅을 차지해야 되는 정당성을 뒤에 확보하기 위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런 철학과 사상을 또 만들어내는 거예요. 또 ( ) 만들어내고. 이런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인간은 왜 어떻게 안정성을 찾는가? 그걸 이야기보자. 성경적으로 보면 이게 창세기 8,9장인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을 통해서 안정성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베드로후서에서 왜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하는가? 그것은 진짜 성도는 지구가 멸망해도 상관없이 다른 곳에 안정성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인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주님을 안정성으로 보지 않고 이 대자연을 안정성으로 보느냐, 그것이 창세기 8,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무지개언약이 나와요.

이 무지개언약이 무엇을 보장해 주는 언약이냐 하면은 내가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을 뿐더러 또 한 가지 땅이 있을 동안에 8장 마지막에 보면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낮과 밤이 쉬지 않고, 해가 자기 노선을 이탈하지 않는 그것만 알지 그 배후에 노아가 드린 희생제물은 사람들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뭔가 특별한 혜택을 받아서 안정된 자연세계 속에서 안정된 농사를 진다. 라는 생각은 안하고 특별한 혜택이라는 것은 빼버리고 저 자연은 왜 있지? 그 뭐 내 알바 아니지. 그럼 나는 뭐냐? 저 자연은 이젠 아무리 봐도 영원토록 계속되니까 그럼 이제부터는 그 안에서 내 챙길 것만 챙기면 그만이지.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땅과 하늘조차도 이게 어떤 계기에 의해서 안정성이, 받침대가 있느냐? 라는 그 받침대를 생각해야 되는데 그 받침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이것은 기본이고 이건 당연히 신이 있다면 당연히 주는 사랑이고 여기서 내가 어떻게 잘 되느냐 거기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더라 이 말이에요. 그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일함이요, 안정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 혜택도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야. 오히려 이 세상이 안정되고 심음과 거둠이 반복되는 것은 너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인 것을 주님께서 아시고 특별히 베풀어 주는 하나의 은혜라는 차원에서 노동의 보상이 아니라 훌륭하구나, 복 줄께. 훌륭하면 복주는 차원이 아니라 아이고, 더러운데 봐준다, 내가. 내가 참는다. 하는 식으로 지금 태양은 우리 머리가로 휘익휘익 지나가고 있어요.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나가면서 봐준다, 오늘. 내일 봐줄게. 이런 식으로 햇빛과 비 내림이 하나의 전부 다 은혜로서 은혜를 퍼부으면서 지나가는데 그 은혜가 퍼 분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네가 그런 은혜를 받을 값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물들입니다.

밤이 왜 있느냐? 잠자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밤에 깨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이 얼마나 욕심이 많아요. 밤이 있거든 고마운 줄 알고 푹 주무시라 이 말이죠.

1800년 중반에 파리에 처음으로 가로등에 가스등이 켜졌습니다. 그때부터 살롱이 생겨가지고 밤을 잊은 그대에게 밤을 잊고 전부 다 살롱에 앉아가지고 문학을 논하고 예술을 논했어요. 1800년 말에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었어요. 그 전구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영국에 있는 방직공장의 그 내부를 환하게 밝혔을 때 그때 13세, 14세, 15세 되는 청소년들이 하루 16시간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밤이 낮같이 되었기 때문에. 밤이 낮같이 될 때 목사들은 이사야의 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밤은 낮같이 더하더라. 밤이 낮같이 대낮같이 밝았으니까. 이 하나님의 과학의 개가. 이 과학은 주의 축복이라고 했어요.

주의 축복은 그 축복이 아니고 우리의 자연적인 안정성을 통해서 여전히 우리의 은혜를 모르는 우리 죄를 지적하는 그 지적당함, 그 자체가 축복이에요. 이래도 은혜를 모르나. 이래도 몰라. 이렇게 내가 너에게 무상으로 햇볕을 줬건만 너는 왜 네 형제에게 그 큰 죄를 용서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그치는 것이 햇빛 오고, 비 내리는, 눈, 너무 왔다마는, 눈 내리고 하는 그런 겁니다.

그게 제가 얘기하는 게 마태복음에 보면 산상설교에 나와요. 선인과 악인에게 구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시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아 너희들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자비로워서 악인도 용서한 것처럼 너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너를 미워하는 원수까지 용서해야 하나님 자녀답지 아니하냐? 그렇게 나와요. 선인과 악인에게 악한 줄 알면서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비 오면 당연한 것이고, 뭐 햇빛 하면 당연한 걸로 보는 거예요.

이 안정성이 그냥 아, 이세상은 안정돼. 푹 즐기자. 거기서 머물면 신에게 그게 도발적이지 않습니다. 안정성이 있으면 안정성에서부터 뭐가 발달 하냐면 과학이 발달됩니다. 하나님의 노아언약에 의해서 노아의 무지개약속에 의해서 안정되게 돌아가는데 뉴턴이라는 사람은 이 안정되어 돌아가는 것은 내부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중력의 힘에 의해서 세상은 안정되게 우주는 이렇게 서로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역어져 있다는 겁니다.

거리에 반비례하고 갖고 있는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는 만유인력, 맞습니까? 거리제곱에 반비례하고 그 질량 M1, M2의 곱에 비례하는 식으로 비례계수 정수가 있지만, 하는 식으로 만유인력에 꽉 붙잡혀 있다는 것이 뉴턴이 발견했어요. 뉴턴이 발견한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신의 비밀을 알은 거예요. 판도라 상자를 연 겁니다. 신만이 아는 선악과를 다 안 거예요. 그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제는 신은 뭐냐 시계만 만들어 놓고 손떼고 시계가 알아서 태엽 감는 채로 돌아가는 그것이 우리 이 시계가 지구니까 지구는 영원히 이제는 자체 내의 법칙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자동기계에 불과하니까 이제 우리가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이 딴 게 아니고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합니다. 그게 존 로크의 자연신론이 거기에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목사 설교 들을 필요 없고 과학을 아는 내가 신으로부터 직접 통하는 신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교회를 통해서 신의 계시를 받던 중간 과정을 빼버리고 나한테 양심이 있고 내가 과학적인 소양이 있다는 것은 곧 신으로부터 직접 과학을 발달시키라는 그런 사명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나 하는 일에 과학을 발달시키고 상공업을, 과학을 발달시키고 신의 숨겨져 있는 질서를 파악해 내면 그것이 바로 교회에서 성만찬 안 해도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고 찬양이 된다는 겁니다.

과학이 이렇게 나가니까 그동안 과학에 반대했던 철학이나 인류학이나 그런 여러 가지 언어학이나 이쪽도 전부 다 과학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거기 뒤에 붙습니다. 과학이라는. 인문과학이라는 말이 붙어버려요. 과학이라는 말이 붙으면서 뒤로 전부 다 모든 것도 과학적으로 따지기 시작했어요. 사람 속에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해부해 보니까 영혼이 없어요. 그때부터 인간의 신체는 동물의 대상과 실험의 대상이 되고 그 인간을 마구잡이로 파헤치죠. 마치 정육점의 고기처럼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나중엔 그것도 모자라서 인간을 창조하겠다고 나설 때에 교회가 생명윤리라는 이름으로 반대하고 나선 겁니다.

저는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생명윤리라 하는 것은 그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배아복제에서 돈 있으면 저 투자합니다. 빨리 인조생명 만들라고 채찍질하고 싶어요. 왜? 인간이 어디까지 인간의 속에 들어있는 인간의 속성이 어디까지 나오는지 빨리 보고 싶어요. 괜히 그걸 말린다고 이게 멈출 것이 아니거든요. 과학의 발전의 그동안 속도에 의하면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한번 달린 그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쉬쉬하고 하지 말라고 해도 지금도 수천 군데에서 인간복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성공 못해서 발표 못했지 성공만 했다하면 수조원의 돈이 거기에 다 몰립니다. 그동안 지켜왔던 윤리도덕은 다 날아가 버려요.

어이고, 어서 오이소. 오랜만입니다. 아까 몇 시부터 시작했어요? 조금만 더하고 쉽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사람들은 과학 하는 그 자체를 신이 주신 사명이라고 여긴 것은 그 밑바닥에 뭐가 있느냐 하면 안정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 안정성을 논하면서 한번도 너희들이 태양이 왜 자기 노선을 이탈하지 않고 있느냐를 한번이라도 물어본 적이 있느냐 이 말이죠. 그걸 안 묻지요. 왜냐? 그걸 묻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안정되게 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우리 손에 맡기지 아니하고 이젠 직접 하나님이 이 세상 경영에 나서겠다는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을 못 미더워하는 증거로서 그동안 일시적으로 안정성을 줬다는 것이 발각이 되니까 그렇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쌓아놓은 모든 과학과 위업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것이 부질없는 짓이 되잖아요. 그런 결과가 논리가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걸 묻지를 않지요. 아이고,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누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자연과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이걸 결합시키는가? 두 번째 신학적인 안정성을 어떻게 구축하는가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은혜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고 완성시킨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그 토마스 아퀴나스는 뭣을 의식했느냐 하면은 어거스틴을 의식한 거예요. 어거스틴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결국은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디스토피아라 하지요. 유토피아의 반대가 디스토피아. 아주 파괴의 그 시간대를 향하여 지금 열차가 달리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봤습니다. 어거스틴은 영혼과 이 세상은 병립될 수 없고 결합될 수 없고 따로 따로 존재한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침투하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어거스틴은 '어'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 비교해 보면, '어'는 뭐냐 하면 인간의 행동에서 죄가 나오고 그 죄가 세상에서 악을 저질러서 그래서 필연적으로 세상은 멸망에 도달한다. 이렇게 봤습니다.

'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행동을 통해서 죄를 극복하는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죄가 없다가 아니라 있는데 그 죄를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셔 가지고 한번 네가 원껏 인간되도록 행동해 봐라. 라고 죄를 극복할 기회를 부여했다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는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멀리 있는 원인이었어요. 이런 게 참 어려워요. 멀리 있는 원인이 뭐냐 하면은 이런 거예요. 개 목아지를 끈으로 묶되 바로 가까이 해 가지고 개가 할 때마다 10센티 해가지고 짧게 해가지고 이러지 마라, 이렇지 마라 이렇게 하면 개가 못 삽니다. 그런데 개 목걸이가 한 56미터, 그것도 767미터 해 놓으면 분명히 묶여져 있지요. 묶여져 있는데 개가 767미터 반경을 돌아다니면 이건 자유입니까, 자유 아닙니까? 자유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760미터 따라가 보면 묶여져 있지요. 하나님은 그만큼 인간의 자유의 폭을 반경을 많이 줘서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자범죄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지만 마지막 고리 잡고 있는 것은 누구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예정론이에요. 예정론인데 하청론이죠. 하나님께서는 직접 간섭하는 것이 아니고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책임을 묻기 위해서 공장장으로 인간에게 맡겼고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다스리고 정복하고 번성하라고 했잖아요. 그 사명을 거듭난 성도에게는 허용하기 위해서 그만큼 자유의지를 새롭게 부여해서 마음껏 이 세상이 멸망에서 개선될 여지를 줬다고 본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어거스틴은 지구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하는 모든 것은 죄다. 다만 유지된다면 그것은 아직도 은혜가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어거스틴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그 인간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죄를 극복하는 기회를 줬는데 그 극복하는 주체가 장소가 어디냐면 교회에요. 그런데 루터와 캘빈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아니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어거스틴으로부터 바로 직접 붕~ 날라서 1517년 루터는 이 어거스틴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본인이. 하고 캘빈도 거기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반대하고 캘빈주의의 도르트 회의 때 나온 5대 교리 있지요. 뭡니까? 인간은 전적타락, 전적부패라는 그런 이론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캘빈의 전적타락, 전적부패는 그것은 루터하고 달라요. 캘빈이 구원론 쪽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데. 이처럼 직접 어거스틴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도록 되어 있는가?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그때는 교회가 제국시대입니다. 교회가 국가를 유지했던 시대에요. 만약에 어거스틴처럼 돼버리면 이 세상 국가라 하는 것은 이 세상 국가는 단순히 죄를 어거하는 죄를 이렇게 억제하는 기관밖에 안돼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국가, 두 개의 국가죠. 보이지 않는 왕국을 위해서 살아야지 이 국가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왕국의 하나의 시종으로서 하나의 종으로서 죄만 억제하고 그런 역할만 하지 국가의 의미는 없다. 이게 어거스틴의 유명한 두 왕국설이 이겁니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이걸 반대하고 그게 아니다. 이 말이죠. 현재 국가는 곧 교회고, 교회가 국가다. 이렇게 본 겁니다. 국가의 말 듣지 않는 것은 주의 말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상이 국가가 제국이고 제국이 국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때는 콘스탄틴 대제의 입장에서는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교회한테 하나의 교회를 완성하라고 통일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지만 나중에는 교황이 그 황제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가지고 제국을 통일하라고 지시합니다.

제국을 통일하라고 지시한 방법이 뭐냐? 어떤 나라의 교회도 그 나라의 왕이 지배하지 못하고 로마의 바티칸에서, 바티칸이 된지 얼마 안 되지만, 바티칸에서 그쪽을 직접 간섭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있는 명동성당은 누가 관리합니까? 대한민국에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합니까? 로마 교황청 바티칸에서 관리하겠다는 거지요. 중국은 그걸 반대합니다. 중국은 그걸 반대해서 로마와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요. 여기 중국 땅인데 어디 로마가 간섭해. 중국 성당은 우리가 관리해.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그게 무슨 중요한 문제인데 관리하도록 놔둬버리지. 뭐 이렇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옛날 교회는 뭘 갖고 있느냐 하면은 영지를, 땅을 갖고 있어요. 부동산 투기를 한 거예요. 부동산을 갖고 있어요. 그냥 부동산이 아닙니다. 요지 땅입니다.

그리고 수도원 이런데서 자본이 형성돼요. 자본이 형성된다는 말은 이윤이 나온다는 거예요. 임금노동자가 생산되는 거예요. 이것은 국가 재정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그 돈 가지고 뭘 살 수 있는가? 전쟁할 때 용병을 살 수 있어요. 용병을. 따라서 초반에 근대 국가가 발달할 때 항상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성직자들이 귀족 반열에 최상급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아, 옛날엔 종교적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너무 아마추어들이에요. 그게 아니고 아, 땅 가졌구나. 땅. 지금의 한국의 기독교를 국가가 무시 못 합니다. 그래서 사학재단의 모든 토지가 어디서 나온 땅들이에요. 대부분이. 종교단체에서 나온 땅이잖아요. 종교단체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교인들이 기부한 땅이에요. 그 기부한 땅이 교인 나름대로 상속될 땅이 세금 한 푼 안 내고 종교단체로 전입되고 종교단체가 계속 유지되면서 세습 아닌 상속 아닌 상속이 세금 안낸 상속이 유지되면서 그 종교단체가 갖고 있는 그런 사회적인 입지와 정치적인 파워는 나중에 정치활동까지 선거운동까지 관여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어느 종교를 갖고 있느냐? 이명박이 장로다, 그러면 불교에서 들고 일어나죠. 전두환이가 불교다, 그러면 이쪽에서 들고 일어나는 거예요.

다 이게 돈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중세 때야, 중세 때가 뭐 교회가 뭐 국가가 그냥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면 사람들은 국가의 말을 듣겠습니까? 안 돼지요. 안되니까 이데올로기를 집어넣기 위해서 안정성, 교회의 안정성, 국가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그러한 신학들이 여기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토마스 아퀴나스는 뭘 모르느냐? 안정성 자체가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불실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놀라운 은혜로서 우리를 채찍질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기에 빵, 빵 하나 주세요. 이것 하고 쉽시다.

얘가 밉잖아요. 미우면 보통 때리면 되는데 때리면 아, 아버지가 날 미워서 때리는구나.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 방법은 그것이 아니고 너 왜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너 왜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너, 어. 돈 막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얘는 축복이구나, 축복. 그게 아니고 오죽 못났으면 빵을 돈 안 받고 그냥 주겠느냐 이 말이죠.

현재 세상에 있는 지구의 안정성은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안정된 것이 아니고 과학은 뭔가 창조된 게 아닙니다. 있는 것을 활용할 뿐이지 창조가 아니잖아요. 인간이 초파리 하나 못 만들어요. 유전자가 70% 동일해도 초파리 하나 못 만들어요. 활용할 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활용하게 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렇게 활용 당하도록 자기 마음을 비우시고 은혜로 낮추시는 그 낮추심이 너희들이 오죽 못났으면 내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낮추겠느냐 그런 인간관계를 가지고 다시 한번 우리의 부족을 깨달으라고 안정성을 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한이 있어요.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 복음이 되어버리면 이제는 그 시한이 마감 시간이 온다는 겁니다.

한번 좀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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