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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7 21:27:18 조회 : 1073         
해외 가을 특강 2019년 9월 23일-25일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소모용 인생 


음성          동영상


민수기 속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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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은행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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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1.42) 19-12-08 09:09 
201909 해외가을특강 : 소모품인생 - 이 근호목사

톡취: 오용익 목사
마태복음에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 봅시다.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상당히 길게 말씀 읽었지요. 그 스토리가 있잖아요. 길게 이야기해도 그 흐름이 뭐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열 개, 다섯 개, 한 개, 각각 줬는데 열 개는 열 개 남겼고, 다섯 개는 다섯 개 남겼고, 하나는 있는 하나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되돌려 줬는데 주인이 버럭 화를 내면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바로 천국 이야기입니다. 이상하지요? 천국이라면 살기 좋은 곳으로 이야기해야 납득하기 쉬운데 천국 이야기가 살기 좋은 곳이 아니고 이 땅에서 두 패로 나눕니다. 하나는 악함, 악하게 등장하고 다른 한쪽은 충성되게 등장하지요. 그러면 이 악한 사람과 충성된 사람 다 해서 세 사람이 나오지요.

세 사람 나오는데 그림을 이렇게(칸을 지워서) 그렸지만 (칸을 없애서) 이렇게 그려봅시다. 이러면 세 사람 되잖아요. 세 사람이 되기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천국 이야기, 달란트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이걸 모른다고 치면 세 사람은 동등하지요. 등등해서 차이가 없어요. 이 사람, 이 사람, 이 사람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없는데 천국 이야기가 개입되는 순간 이 세 사람은 두 패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충성된 칭찬받는 쪽, 또 한쪽은 졸지에 뭐가 되었지요? 지금 이 대목에서는 충성된 사람 몇 명입니까 두 명이고 악한 사람은 한명으로 되었지요. 이게 분류거든요. 선함과 악함이 분류되었잖아요. 이게 뭐냐?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라 천국은 이 땅에서 일을 이미 시작하게 되면 뭐가 발생된다? 분류가 발생돼요.

어느 나라가 있는데 죽어서 가면 되겠지, 가 아니라 천국은 나중에 죽고 나서 어떤 거기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이 이 인간세계에 개입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을 벌입니까? 무슨 일을 벌인다고 되어 있지요? 사람과 사람사이를 분류를 시키는 겁니다. 분류를 시키는데 어떤 분류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충성된 자와 악한자가 분류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이 충성된 자와 악한 자가 분류될 때 어떤 자는 충성된 자고 어떤 자가 악한 자냐? 지금 우리가 이게 궁금한 거지요. 그래서 어떤 자가 충성된 자고 어떤 자가 악한자인지 결론부분이 굉장히 궁금해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이게(분류) 없을 때는 모든 인간이 동등합니다. 고만고만해요. 살아가는 것이.

돈 벌고, 돈 쓰고, 그냥 끝나는 거예요. 그냥 똑같아요.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해도 믿지 맙시다. 왜?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인정하지 맙시다. 옆 사람이 다른 옆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인정하지 마세요. 왜? 그 평가가 하나님이 아니니까. ‘죽어서 좋은데 간다는 그것은 네 생각이고 나는 네 생각과 달라. 네가 어떻게 나를 평가해?’ 그것은 건방진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하나님이야?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평가해요? 그 평가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귀담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면 되는 거예요.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 간섭할 자격도 없고 권한도 권리도 없습니다. 몰라요. 권세가 대단한 사람이면 아부라도 하는데 권세라는 것도 한 때 권세 아닙니까? 권세 없어버리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또 갈아타기 합니다.

다른 권세자를 찾아다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평할 최종적인 위치에 있지 않는 거예요. ‘바르게 살면 천당 가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 천국이 여기에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 천국은 죽으면 가는 나라에요. 그런데 예수님말씀은 뭐냐? 천국이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이렇게 평범하게 서로 뭉쳐져 있는 여기에 천국이 찾아오게 되면…….

몇 번 물었는데 다시 물어봅니다. 여기 무엇이 일어났다 했습니까? 분류가 일어나요. 분류가 뭐냐? 충성된 종과 악한 종. 악한 종은 악하니까 어디에 가겠어요? 지옥에 가고 충성된 종은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충성된 자고 무엇이 악한자인가, 그것이 결론적으로 궁금한 겁니다. 그 궁금한 것을 제가 미리 말씀드릴게요.

논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충성된 자, 이것은 뭐냐 하면, 몰살하는 거예요. 이 달란트 비유에서. 몰살이라는 뜻은 뭐냐 하면, ‘자기파괴’입니다. 자기파괴. 그러면 반면에 악하다고 하는 것은, 이쪽은 천국 가는 쪽인데 이쪽이 반대쪽이니까 이쪽은 ‘자기지킴’이지요. 내 인생 내가 지키면서 살겠다는 이것이 악함에 해당되는 거예요.

자, 천국의 개입이 없을 때는 세상은 다 고만고만해서 차이점을 몰랐는데 막상 천국이 개입하다 보니까 사람은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한 종류는 자기파괴, 자기몰살, 자기말살,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는 쪽이 충성된 자고, 끝까지 내가 내 것을 지키겠다는 쪽이 악함에 해당되어 버리는 겁니다.

제가 결론부터 내렸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는 어떻게 그런 논리가 나오는지를 잘 모르겠지요. 그래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미국 간 삼촌이 20대 조카보고 ……, 요새 한국에서는 조카가 좀 유명해요. 5촌 조카지요. 여러분 잘 모르지요. 미국 간 삼촌이 20대 5촌 조카보고 10억을 남기고 갔는데 가면서 그 10억을 다 말아먹고 3년 내에 미국으로 오라는 숙제를 냈어요. 그 십억을 다 말아먹고 오라는.

그러면 그 20대 조카가 한국에서 해야 될 일은 뭡니까? 미국에서 삼촌과 합류하기 위해서는 남겨진 10억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재산을 다 뭐하면 돼요? 말아먹으면 되지요. 이것을 소멸, 말살, 다 같은 뜻인데 소멸로 합시다. 소멸하는 일을 해야지요. 그 일을 할 때 돈 10억을 다 날리는 거예요. 유흥업소에 가든 어쨌든 돈 10억을 3년 내에 다 날리는 겁니다.

그게 자기에게 준 숙제라면 그 조카가 3년 후에 재산 다 날리고 미국의 삼촌을 만날 때 미국에 있는 삼촌이 칭찬할 조건이 뭡니까? “너 내가 준 돈 어딨어?” “다 날렸습니다.” “잘했다 이 충성된 종아. 참 잘했다 충성된 종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잘했다, 충성된 종이냐 하면 그 조카는 자기 것을 따로 남기지를 않았어요.

부부라 합시다. 부부는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로 되어 있지요. 이 남자가 부부생활 하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내 아내를 행복하게 하고 다정하게 해서 ‘참 나에게 시집 잘 왔다.’ 라는 것을 남기고 싶어서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준다면 그것은 충성된 종입니까, 악한 종입니까? 악한 종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내를 주신 것은 그 아내와 더불어서 인생 말아먹으라는 거예요. 인생 말아먹으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악한 남편은 뭐냐 하면, 내 아내를 내가 너무나 사랑해서 훌륭하게 키웠다는 자기 의로움이 남겠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 뜻에 위반되는 거예요. 여러분, 진짜 하나님이 상상이 안 되지요.

자, 가짜 하나님은 뭐냐 하면, 가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누가 잘된다? 하나님을 잘 섬겼더니 나에게 이런 혜택을 줬다고 하나님을 우회했어요. 우회라는 말은 아시지요. 여기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을 우회해서 어디에 소환하느냐 하면, 내가 이정도 괜찮은 존재임을 소환시키는 것, 구약에서 이게 바알신이고 이게 우상이에요.

인간이라면 다 이런 신이에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누가 잘된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빛이 나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신을 믿는 것, 그걸 두자로 해서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거든요. 종교란 뭐냐 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는 나를 사랑해요. 그래서 성경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라요. 다른 민족은 종교를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본인이 소멸되어야 돼요.

아까 10억 받은 무슨 입장? 조카 입장이 되는 거예요. 10억 받은 조카 입장인데 이스라엘은 그걸 못했어요. 왜? 본인이 너무 아까워서. 그런데 그걸 해낸 분이 계십니다.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아버지의 뜻을 받고 아버지의 뜻은,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소멸되는 거예요. 몰살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서 자기가 말살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자기파괴에요. 오늘 이 강의 제목을 대라면 ‘소멸’이라고 해도 괜찮고 더 정확하게 하라면 ‘자기파괴’라고 하면 돼요. 제목은 자기파괴. 아까 조카 이야기 다 시 해봅시다.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카에게 10억이 자기 돈입니까, 삼촌 돈 입니까? 삼촌 돈이지요.

삼촌 돈을 받은 것은 이걸 종자돈 삼아가지고 20억 30억 더 불리라는 것이 아니에요. 달란트 비유를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어떻게 해왔습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과 정 반대로 하지요. “열 달란트 줬으니 열 달란트 남기세요. 두 달란트 줬으니까 두 달란트 남기세요.” 그런데 한 달란트는 남기지를 못했으니 지옥가고 봉사하고 충성해서 교회에 남긴 사람은 어디 간다? 천당 간다.

교회에서 이렇게 정반대로 가르쳤는데 정반대로 가르치는 이유가 모든 인간들은 신이 무슨 신이냐 하면, 참된 하나님이 아니고 바알신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가 있기 때문에 주님해석을 반대로 하는 거예요. 충성된 자라 하는 것은 주께서 남기신 것을 내가 많이 불리면 하나님에게 칭찬받겠지,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이 괜찮아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이고요. 이것은 악한 종들이고 천국 가는 사람은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있었다, 없었다? 없었지요. 내 돈 10억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전부 다 삼촌 돈이라니까. 아까 그 예 다시 들어볼까요? 남편이 아내에게 잘해줬다. 그래서 나는 무슨 남편 된다? 훌륭한 남편 된다. 이 의식, 이 사고방식이 지옥 갈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부부가 결혼해서 아내를 왜 만났는가? 나는 말살당해도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리 아내에게 해줘봤자 아내는 이 무슨 괴물인지 만족할 줄을 모르네요. 그런 것 느끼십니까? 아무리 최선을 다해봤자 이 괴물은 들어가기만 하지 나오는 것은 없어요. 뭔가 바닥이 없는 것 같아요. 계속 집어넣어도 끝이 없어요. 이거 해주면 저거 해 달라. 저거 해주면 이거 해 달라. 신도 아니고 말이지요. 남자가 무슨 신입니까? 로봇 입니까? 인공지능입니까?

도대체 고맙다는 말이 없고 만족도 없어요. 남편은 죽을 판 살판 하는데. 바닥이 없어요. 바닥없는 우물은 아무리 뭘 던져도 소리가 안나요. 풍덩이라도 소리가 나야 되는데 나지를 않아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왜 자꾸 반대로 생각합니까? 모든 교회가 그런 소리를 하고 모든 사람들이 교회는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본인이 자기파괴하고, 몰살하고, 소멸하는 이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모든 고민과 근심이 어디서 나옵니까? 버티는데서 나오는 거예요. 지옥 가서도 버티려고 해요. 지옥 가서 버티는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자기 잘난 사람들 다 모여 있어요. 인생은 왜 사느냐? 소모하라고 하는 거예요. 10억을 소모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키울 생각하지 말고. 말아먹는다는 제목이 제일 적당하네요. 내 인생 내가 말아먹어야 돼요. 한 90 사십니까? 90년 말아먹으세요. 한 80 사십니까? 80년 동안 말아먹고. 지금 이 달란트 비유를 길게 이야기했는데 그 길게 이야기 한 것 하나하나 설명하면 시간이 많이 가지만 핵심은 이겁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 한 달란트를 계속 남겨두었다는 것이 문제에요. 땅 속에 남겨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주인님 것이니 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남겨둔 거예요. 주인님은 남겨두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남겨두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달란트란 옛날 돈을 이야기하는데 그 돈을 주신 분이 직원입니까, 주인입니까? 직원들에게 열 개 주고, 다섯 개 주고, 한 개 주고 자기는 먼 타국에 가버렸거든요.

공장이라 합시다. 그러면 그 공장의 주인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누군가가 혹시 이거 하나 빌려줄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없다는 말은, 눈에 안 보인다는 뜻이거든요. 눈에 안 보이는 것. 사람이 눈에 안 보이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지요. 그러면 어디에 신경 쓰느냐?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 쓰지요. 눈에 보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있다. 또는 ‘여기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원장님, 그 의자에 누가 있어요? 누가 눈에 보입니까? 지금 그 의자에 누가 있는 거예요? 본인이 있지요. 있는데 오늘 이 강의에 의하면 이 있음을 소모를 시켜 놔야 돼요. 누가 소모를 잘 하고 있느냐를 하나님께서 지금 묻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 영원토록 보존하고 간직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없는데서 생겼잖아요.

“당신 생일이 언제입니까?” 하면 “1천 구백 몇 년도……”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1천 8백년 도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천 1천 9백 몇 년도에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없는데서 태어나서 지금 있지요. 그러면, 있으려면 이 있음을 어디로 바꿔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없음으로 바꿔줘야 돼요.

이게 뭐냐? 소모하라고 준 인생이에요. 10억을 줘서 돈 더 벌라고 준 것이 아니고. “아이고 조카야. 10억 줬으니까 20억으로 불려라.” 지금 삼촌이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걸 원래 자리……, 원래 자리는 내가 없던 자리에요. 내가 없던 자리에요. 내가 없는 자리가 내 자리라니까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이게 있다는 이것이 신기하지요. 그러면 없는 게 있으면 여기 누가 있어야 되지요? 보이지 않는 분이 작용해서 없던 내가 있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합류한다는 것은 있는 나를 없앰으로서 다시 없음으로 합류하면 되겠지요. 그 기능을 오늘 본문에서 달란트가 하는 거예요. 주인은 떠나도 뭘 남겼다?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남겼지요.

그러면 그 달란트 가지고 용도가 뭐냐 하면? ‘내 것이 있다’가 아니라 아무리 벌어도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로 달란트를 써야 돼요. 그래서 열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자기 것으로 했습니까, 주인에게 돌려줬습니까? 돌려주는 거예요. 천국은 뭐냐? 돌아갈 곳입니다. 우리가. 있는데 없음이 되면서 돌아가는 거예요.

목사님, 죽으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분류되는 거예요. 내 소속이 어디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는 나를 없애려면 나는 뭐 하면 돼요? 있는 나를 소모하면 돼요. 소모하는 겁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돼요.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고 3이 치는 시험을 수능이라 하지 않고 SACT라고 한다는데 그 SACT, 그 시험을 치러야 할 때 엄마가 자기 일을 포기하고 그 뒷바라지를 합니다. 그러면 엄마의 자기 일이 없어지지요. 없어지니까 그 순간 있음에서 뭐가 되었습니까? 없음이 되고 자식을 위해서 자기 것을 소모한 것이 되지요.

그 모습을 이 주인의 직원들이 보여줘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사실은 가만있어도 소모해요. 늙어죽으니까. 그러나 가만있어도 소모되는 것은 결국은 소모되면서 무엇이 아까우냐 하면, 세월 가는 것이 아까워요. 이것이 악한 종이 돼요.

왜? 자기 자신에 계속 미련이 있으니까. ‘평생 40, 50 되도록 나는 뭐 했지? 미국 가서 고생만 되게 하고. 대체 미국 가서 뭐했나?’ 이걸 네 자로, 여러분이 다 아는 용어인데, 이걸 자기연민이라 해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이걸 두자로 줄이면 이것을 교만이라고 해요. 이게 바로 악함입니다. 자기연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불쌍히 여기고 가련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가련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를 소모하고 버리겠다는 뜻입니까, 끝까지 지키겠다는 뜻입니까? 끝까지 지키는 곳이 어디냐? 이게 바로 지옥이거든요. 지옥은 주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세계에 본인이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버티는 모습입니다. ‘한 달란트 준 것이 주인이라면 그것은 내 것 아니야. 이것은 주인 것이니까 나중에 주인이 다시 오게 되면 주인 것 당신 것으로 돌려주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이 말은 당신 것과 내 것 사이에 넘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당신 것 돌려줄 테니 당신은 내 것 건드리면 안 돼.’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없는 존재에서 있는 존재가 되었잖아요. 있는 존재가 되었다면 어떻게 없는 존재에서 있는 존재가 되었는가? 과학은 설명할 수 없지요. 과학은 dna를 기초로 하니까. 과학은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와요. 왜냐하면 과학은 왓슨과 클릭이 1953년도에 발견한 dna구조가 있어요.

노벨생리학상 받았어요. 제가 이 숫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제가 그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이 영국학자들이거든요. 이 dna 때문에 25년 된 미제의 범죄가 해결되었어요. 한국의 화성 연쇄살인사건. 모든 의학이 이 dna 아닙니까? dna를 편집하고 잘라서 새로운 인종을 만들겠다고, 그게 돈 된다고 하잖아요.

인간의 모든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dna가 자기 확장을 추구해서 그게 자손이 된다는 이론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나왔잖아요. 이렇게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와요. 그러면 dna이전에는 뭐냐? 그냥 계속 dna에요. 그 이전은 몰라요. 그냥 모른다고요.

성경에서는 없는데서 나왔다는 말도 되지만, 이것은 구약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나왔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피조물이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 천국은 누구의 세계입니까? 인간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나라니까 하나님의 세계지요. 하나님의 세계에 우리가 합류하는 거예요. 합류할 때는 무엇이 방해되느냐 하면, 내 것이 방해돼요.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을 계속 사수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 60년, 70년 계속 왜 사느냐? 소모하라는 말이지요. 내 것이라 여기는 것을 소모하는 거예요. 없애버리라는 말이지요.

아까 자식 공부하는 것도 예를 들었고 또 열심히 무슨 일을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아까 한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고 했지요. 고만고만해요.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 하는 말도 들을 필요도 없고요. 왜 남이 나에게 무슨 권리로 이렇다 저렇다 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똑같아요.

너는 네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가면 돼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이 있다면 각자 너는 네길 가. 너는 네 길로 가고. 너도 네 길로 가고. 그러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인간이 인간에게 주눅들 필요가 없어요. 주눅이라는 말 아시지요? 인간이 인간에게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요. 한 때 돈 벌수도 있고 또 망할 수도 있고요. 망하다가 계속 망할 수도 있고 잘되는데 계속 잘 될 수도 있고.

이것은 누굴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각자 개성 있는 자기 인생을 살면 그만이에요.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 내일에 토 달지 말라. 너는 네 일이나 하라.” 이렇게 살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빨강, 노랑, 파랑, 이 셋 중에서 파란색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는 거예요. 교회를 다니면 빨간색이나 노란색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우~, 하겠지요.

네가 교회 가서 결국 기도하는 목적이 뭐냐? 이쪽이 5억이고 이쪽이 3억 가지고 있는데 교회 가서 기도해서 3억이 뭐로 바뀐다? 7억이나 8억으로 바뀌면 그것으로 네가 나 이기려고 하지. 이쪽이 위너가 되지요. 갑자기 한쪽이 위너가 되면서 졸지에 상대방이 뭐가 됩니까? 루저가 되어버려요. 졸지에 패자가 되지요.

인생이라 하는 것을 한 번 따져보세요. 간단한 겁니다. 승자와 무엇의 구분이다?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지요.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게임판이라고 합니다. 이 게임판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 또는 현실입니다. 사업하시지요? 왜 하십니까? 패자가 되려고 합니까, 승자가 되려고 합니까?

승자가 뭐냐 하면, 승자가 오래 살아남는 것이 승자에요. 일찍 말아먹고 자살해서 죽는 것이 패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학문적으로 따져도 간단하게 조립하고 정리하면 딱 이겁니다. 게임이에요. 게임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여성보다 남성들이 민감해요. 왜냐하면 못 먹어도 허세 같은 것이 있어서 나는 안 졌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술 먹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낮에 패배한 것을 밤중에 ……, 뭔가 패배한 것을 술잔 앞에서 자기는 패자 아니라고 애써서 감추기 위한 허세 같은 것으로 술을 먹어요. 술 먹으면 더 플러스 되는 기운 같은 것이 올라와서 큰소리칠 수 있거든요. 승자는 큰 소리 치는 자고 패자는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게임판이고 무조건 따지지 말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뭐가 되어야 된다? 승자가 웃는 자고 이 웃는 자를 사람들은 행복한 자로 보는 겁니다. 인생관이 어떠니 따지지 마세요. 제가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면 세상은 게임이고 사람은 나름대로 패자보다 승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예쁜 아내 만나는 그것도 못난 아내보다 승자가 되는 거지요.

내가 남자로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어야 예쁜 아내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자식들 잘 먹인다고요. 자식들 잘 먹이기만 하면 됩니까? 이왕이면 패자보다 뭐가 되게 하고 싶어요? 승자가 되게 하고 싶지요. 여기에 기운이 좀 빠졌다. 그러면 이 파란 여자가 어디로 간다고 했습니까? 교회로 가요. 왜 갑니까?

뭐가 되기 위해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 이게 바로 종교, 또는 종교생활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지옥 가는 방법인줄 아시겠지요. 이 교회에서 무슨 용어 이야기합니까? 많이 들었지요. 주 이야기하지요. 성령 이야기하지요. 예수 이야기하지요. 삼위일체 이야기하지요. 자, 이 용어는 무엇에 필요한 겁니까? 나로 하여금 게임판에서 뭐 되게 하기 위한 용어? 승자가 되게 하기 위한 용어, 핑계에 변명에 지나지 않아요.

이 교회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지옥이에요? 얼마나 무서운 단체입니까? 천국을 가로 막잖아요. 여기는 승자가 되고 싶은 사람, 또는 승자가 못돼서 한이 맺힌 사람, 또는 승자를 기약하는 사람, 또는 승자가 되었다고 으스대는 사람, 또는 승자되지도 못했으면서도 있는 척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요. 그 교회 가서 “하나님 저 말살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 봤어요?

“하나님, 빨리 소멸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 봤습니까? 아니지요. 오래 살되 건강하고 부자 되게 해달라고 하잖아요. 심지어 아까 여자 쪽에서 교회 간다고 했는데 남편은 왜 여자가 교회 가는 것을 방치하느냐? 네 확신은 안 믿지만 혹시 네가 기도해서, 혹시, 혹시라도, 그런 일은 없지만, 혹시라도 네게 승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제공한다면 아내덕분에 내가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누가 세웠게요? 마귀가 세운 거지요. 십자가 걸고 마귀가 세운 겁니다. 그걸 설교시간에 이렇게 했어요. 주술적이라고 했어요. 주술적이 무슨 뜻이겠어요? 같은 단어를 반복하면 신께서 기적이나 효과를 줄 것 같은 기대감, 이게 주술적이에요. 옛날 주술적인 것들은 좀 촌스럽지요.

부적, 또는 점치는 것, 토정비결. 이게 주술적인 거예요. 이제는 용어가 바뀌었어요. 옛날에는 좀 촌스러웠지만 교회 가서 보면 서양식이기도 하고, 또 찬양 선교, 뭔가 상당히 멋있어 보이지요. 성만찬도 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주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 목적이 이 게임판에서 패자가 아니고 졸지에 행운 얻어서 승자가 되기 위하기에 그렇습니다.

좋은 가정 이루고, 화목한 가정 이루고, 착하면 뭐 받고? 복 받고. 승자가 되잖아요. 착하면 복 받아서 이 복이 나를 이 게임판에서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패자가 되지 않고. 그래서 남자에게 제일 싫은 것이 뭐냐? 네가 졌다는 것. 이것은 초등학교 애들부터 지기 싫어서 벌써 주먹 쥐고 싸우려 들지요. 이게 커서 어른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무슨 차타고 다녀?” ‘음매 기죽어.’ 또 ‘음매 기 살아.’ 하잖아요. 무슨 차, 어느 아파트. 모든 것이 다 게임에서 내가 최고가 되겠다는 그 본성은 달라지는 일이 없어요.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세 사람이 있어요. 세 사람이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봅니다. 1. 나는 쟤보다 아니지만 얘보다는 이겼다. 2. 나는 이중에서 제일 못났다. 3. 나는 저 사람들보다 제일 낫다. 이 때 제가 물을게요.

이 평가가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이것은 틀렸지요. 왜냐하면 일방적이에요. 이 사람이 보는 것과 이 사람이 보는 것이 다 다르지요. 가위 낸 사람, 보 낸 사람, 가위 바위 보, 각자 내는 사람들이 다 다르듯이 어떤 하나가 진리가 아니거든요. 서로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전부 일방적이에요. 그런 식으로 전부 뭉쳐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누가 뭐래도 나는 멀쩡하다.’ 하는 이런 기본자세가 되어 있지요.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소박하나마 나는 이 돈 가지고 살 거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아무리 돈 없고, 힘없고, 남들이 나를 실패자라 할지라도 나는 나를 절대로 그런 식으로 패자로 보지 않아.’ 이게 네 자로 뭐라고 했어요. 자기연민이지요. 내가 나를 안 챙겨주면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챙겨주겠어요?

남자들 술 먹으면서 하는 소리잖아요.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멀쩡하다고 하면서 ‘나는 옳다. 나는 정당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은 ‘아이고, 죽어보면 있는지 없는지 그 때가서 확인할 것인데 미리 알 것이 뭐가 있어?’ 했는데 예수님은 미리 천국은 이렇다고 여기 와버렸다는 말이지요.

분류를 해버렸지요. 분류를 해보니까 한쪽은 충성된 종이라고 했지요. 또 한쪽은 뭐냐? 악하다고 했지요. 그 이유는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충성된 자가 스스로 충성되면 악합니까, 악하지 않습니까? 이 충성된 자, 주님이 충성되었다고 이야기한 그 자가 스스로 나는 충성된 자가 맞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할까요, 선할까요? 악합니다.

뭐가 붙었느냐 하면, ‘충성되다’는 것이, 있는 분이 우리를 이렇게 규정을 해줘야 되는데 본인은 소모용이잖아요. 없어질 인간이 마치 ‘나는……’ 이라고 이걸 집어넣으면 충성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계속 살아 있어야 될 모순에 빠지는 거예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는데 맨해튼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가 있어요. 중앙파크에 보면 그 빌딩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에요. 그 아파트에서 나이 50된 어떤 전직 모델이 자살을 했는데 자살을 한 이유가 뭐냐? 내가 옛날처럼 예쁘지 않기 때문에 자살했거든요. 그거 잘 기억하세요. 예쁘다 할 때 앞에 뭐가 붙어요. 누가 예쁘지요? 내가 예쁘지요. 남들이 예쁘다 하면 돼요. 문제는 남들이 예쁘다 하는 것에 사람들이 멈추지 않고 남들이 뭐라 하니까 ‘내가 예쁘다’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어느 단계냐? 예수님말씀 없이 인간들끼리 살 때는 이게 돼요. 내가 예쁜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 빨강, 파랑, 얘들이 나를 예쁘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예쁜데 그 다음 언젠가부터 안 팔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모델인데 안 팔려요. 내가 분명히 예쁜데 남들이 안 알아주지요. 그러면 남들 보기에 ‘예쁘지 않다’가 되지요.

한때 예뻤지요. 예쁘지 않을 때는 내가 있을 이유가 없지요. 나는 예쁜데 예쁘지 않은 나는 내가 용서가 안돼요. 그러면 그 여자는 얼추 살만한데도 불구하고 뭘 선택했느냐 하면,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이 말은 곧 뭐냐? 남들이 주는 평가가 곧 내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 평가가 나를 좋게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참 중요한 거예요. “충성된 종아” 할 때 앞에 뭘 붙이면 돼요, 안돼요? “내가 충성되다”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나는 믿는다.” 이게 신자에요, 신자 아니에요? 신자 아니지요. 믿는다는 말을 앞에 붙이면 안돼요. 나는 소모용이니까. “나는 믿지 않는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는다고 하지 않아요. “믿씁니다!” 해요. “믿씁니다!” 할 때 누가 잘났어요? 믿는 내가 잘났지요. 그러니까 기존교회에서 믿는 이 사람들이 지옥 가는 이유가 자기 자신을 너무나 믿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그 교회에서 승자가 되기 때문에 아까워서도 소모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스스로 말살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10억을 빨리 허비를 해야 되는데 내 인생이 너무 찬란하고 너무 멋있어서 소모가 안 돼. 목숨 걸고 지키고 싶어. 이것은 정신병이에요. 왜 정신병이냐 하면, 이 빨강인 내가 아무리 지켜도 옆에 있는 노랑, 항상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요. 백 평짜리 아파트 사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 15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있어요.

현대 차 몰고 왔는데 벤츠 몰고 온 사람이 있어요. 재산 한 40억 되는데 동창생이 60억 가지고 나타났어요. 자기는 백억 자산가인데 천 억짜리 재벌 되어서 왔어요. 내가 나를 지키려 하니 스스로 본인이 지옥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와서 뭐라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 것이라고 하면서 도로 줘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것 따로 놀고, ‘내가 잘난 맛에 사는 나는 내가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거예요.

자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성도를 이렇게 보면 돼요. 자, 진짜 어려운 것인데요. ‘성도 = 말씀의 운동장’이에요. 또는 말씀의 통, 믹서기라고 보면 돼요. 성도는 껍데기인데 안에 말씀이 있는 것을 성도라 해요. 이 말씀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충성된 자도 있지요? 앞에 나를 붙이면 안 됩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충성된 자라고 하죠. 그 다음에 또 악한 자가 있지요.

그러면 성도라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겠습니까, 아니면 악한 요소가 없고 충성된 요소만 있겠습니까? 성도는? 어느 쪽입니까? 성도는 충성된 것만 있겠어요, 악한 것과 함께 둘 다 있겠어요? 둘 다 있어요. 이게 정답입니다. 성도가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성도는 천사가 아니에요.

성도는 본인이 얼마나 허접하고, 얼마나 믿음 없고, 얼마나 돈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성도가 아닌 사람은 감추는데, 성도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절대로 내 힘으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거예요. 주께서 아무리 소모하라고 해도 나는 내 것 따로 챙기고 싶어요.

‘주님, 이것은 누가 뭐래 해도 내가 투자했잖아요. 애 네 명 이거 내가 키웠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해지는 것은 교만이고 성도라 하는 것은 완전할 수 없음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죽는 것은 내 죄 값으로 당연한 조치임을 아는 거예요. 충성된 자, 악한 자, 이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말씀에 들어 있으면 이 말씀의 완성이 뭘까요? 말씀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데 누가 죽었다? 예수님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공의 결과가 성도라는 이 빈 깡통 속에 들어옴으로서 성도는 그 말씀의 운반체지요. 주님의 말씀의 운반하다 보니까 어디 갔다? 천국 가는 거예요.

못났는데, 악한일 선한일이 다 들었는데 그 다 들어 있음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거든요. 예수님의 죽었다는 사실과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만나서 함께 가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의 삶은 하루를 살고 일 년을 더 살면 죄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죄가 늘어나지요. 죄를 더 지었단 말이 아니고 몰랐던 죄가 발견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이 강의하는 이것도 죄가 되고. 아까 빨강, 파랑 노랑, 이 사람 세 명이 다 성도라면, 지금 우리들처럼 ……, 갑자기 뭐가 좀, 어쨌든 우리들처럼 했다면 서로 뭘 내놓겠어요? 나는 못난이. 나는 잘난 것이 없습니다. 말만 해도 잘했어요. 나는 내가 잘한 것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잘난 것이 없습니다.

잘난 것 없으면 누구만 자랑하겠어요? 못난 자를 못났다고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님은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앞장세워서 하는 거예요. 진짜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죽으실 때 십자가가 몇 개 있습니까? 세 개 있잖아요. 한쪽 강도는 자기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한동안 예수가 구원자라고 유명했거든요.

이 강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이 능력이 있거든 나를 당장 이 죽는데서 빼내주면 믿지 말래도 믿어줄게.”라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 강도의 말이 굉장히 이성적이지요. 이성적이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무나 우리 맘속 바탕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리의 욕구에요. 예수님이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두 종류의 강도를 다 둔 거예요.

“당신에 나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하도록 하면 믿지 말래도 믿을게 자진해서 헌금할게. 자진해서 새벽기도 나올게.” 당신이 먼저 나에게 해주면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거예요. 일종의 사업 거래하듯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한쪽의 강도는 말하기를, “내가 강도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왜? 내가 지킬만한 가치가 없이 소모용이니까.

아까 이야기한대로 한국에 있는 조카가 가진 10억짜리 재산을 무사히 이 강도는 다 소모를 한 겁니다. 아, 이런 발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어요. 내 인생은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소모하기 위함이다. 소모하고 결국은 내가 죽을걸. 결국 내가 죽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소모하면서 어느 정도로 나는 악하고, 어느 정도로 나는 내 중심적이고, 어느 정도로 나는 남들도 모르고 나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처절하게 절감하는 기간, 그게 내 인생, 내 인생은 바로 그 인생이다.

일부러 칼 들고 설칠 필요는 없고요. 그냥 곱게 살아도 나 중심이에요. 강도 둘 다 나 중심이에요. 여기서 뭔가 벗어날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인생 찾지 마세요. 도 닦을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다니나 안다니나, 하나님 믿나 안 믿나 인간은 나중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쪽은 그걸 안다는 것과 한쪽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아는 사람은 뭘 받았다? 성령 받은 사람이고 모르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고 뭐고 항상 옆의 사람만 쳐다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야? 나 지적할 사람 없지? 나는 옆 사람 보고 버틸 거야.’ 하는 사람,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분류하십니다. 죽어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이미 분류해요.

‘죽어서 천당 간다. 가봐야 알지.’가 아니라 이미 살아 있을 때 난데없이 멀쩡한 인생을 가지고 “너 보기에는 잘나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더럽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다른 사람보고는 몰랐는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대신 희생한 것을 보면서 내 죄 때문에 저분이 저렇게 피 흘려 죽었구나.” 하는 연관성을 가질 때, 연결성을 가질 때 그 연결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 성령이거든요, 그 십자가와 나와 연결성을 가질 때, 내가 돈 좀 있지만 나는 자랑하는 것이 뭐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인 겁니다. 충성되고.

주님 보시기에 자기 모습을 십자가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니까 충성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요.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님의 개입을, 일찍 오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어서 만날 수도 있는데 일찍 와서 나대신 피를 흘려주시고, 걱정하지 말라, 다 이루었다고 해주신 그 뜻과 그 의미를 저희들이 이제 모르지 않고, 눈치 채고, 알아채는 살아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미아(IP:122.♡.171.42) 19-12-08 09:10 
20190924 해외가을특강 : 민수기 속의 사랑A -이근호 목사-

 

사람이 하지 않으면 후회될 일을 해야 돼요. 하지 않았으면 후회될 일을. 뒤에 가서 ‘할 걸’이라는 생각을 하지마세요. 하지 않으면 후회된다고 할 때에, 여기서 뭐가 잘라나가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뭘 해야 되느냐, 에요. 지금. 지금 미래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미래라는 것은. 미래라는 것은 현재에 와서 a쪽이냐, b쪽이냐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건 미완료거든요. 이건 없는 거예요. 미래는 없는 거니까, 지금 뭐 할 거냐? 뭐 할 거냐? 라고 할 때에 생각해보는 거예요. ‘안 했으면 크게 후회할 거 같아.’ 그 일을 하시면 돼요. ‘안 했으면 크게 후회할 것 같아.’

 

그러면 미래는 있느냐? 미래는 없어요. 현재에 와서 현재로 이어가는 겁니다. 또 현재가 현재로 이어가죠. 그러면 이거는 해야 될 거, 안 하면 후회할 거니까, 해야 될 거. 그 다음에 내일되면 내일 해야 될 거, 그 다음에 내일되면 또 해야 될 거, 미래가 어디에 있어요? 없잖아요. 계속 해야 될 거만 있죠. 그러면 이렇게 되면 어떤 점이 좋은가 하면은 시간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시간이라는 것은 없고 뭐만 있느냐 하면은, 해야 될 게 있어요. 해야 될 게. 시간은 없고 해야 될 것만 있습니다.

 

시간은 없고 해야 될 게 있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누가 있다는 말이냐 하면은 내가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되죠. 꼭 내 일이 있어야 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있으면 되잖아요. 내일이 되면 또 거기에 내가 있으면 되고. 모레 되면 거기에 내가 있으면 되고. 근데 사람들은 내가 여기에 있으면 되는데, 자꾸 어떤 미래를 생각하는 이것이 왜 그러느냐 하면은 남을 의식해서 그래요. 남들이 한 5년 뒤의 내 모습을 어떻게 볼까? 괜찮게 볼까? 이렇게 보니까 지금 해야 될 것을 놓치고, 해야 될 것은 안 하고, 5년 뒤의 멋있게 된 내 모습을 보고 남들이 이렇게 칭찬한다면 나는 얼마나 잘나 보이겠는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잘못인거예요. 그러면 그 자체가 이미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이 오늘인데 자꾸 뭘 생각하느냐, 5년 후를 생각하는 거예요. 5년 후를 생각해버리면 지금 현재는 마음이 안 든다는 이야기거든요. 마음이 안 드는 걸 왜 삽니까? 지금 내 할 것만 하면 되는데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잘못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될 것을 하지 않으면 후회한다는 것만 이야기해버리면, 내가 하지 않으면 후회된다는 일을 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후회가 있다, 없다? 후회가 없다, 에요. 지금. 지금 내가 하는 일,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후회가 없어야 돼요.

 

그럼 후회는 언제 생기느냐 하면은 내일되면 생긴다고요. ‘아, 그때 주스 이거 말고 딴 거 먹을 걸.’ 그걸 왜 미리 땡겨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 말이죠. 내일은 없는데. 내일이 없다는 말을 여러분들은 잘 못 듣던 이야기에요. 그렇죠. 내일은 없는 거예요. 애를 넷 키우잖아요. 애들이 커서 19살 때 20살 때를 생각하는데, 3년 뒤에 5년 뒤에 애가 있을지 없을지 그거는 내가 걱정할 문제도 아니고 내가 신경 쓸 문제도 아니고, 지금 눈앞에 애가 있으면 지금 뭐 할 거냐, 지금 후회 없도록 애 키우면 끝나는 거예요. 내일은 내일에 맡기고. 지금.

 

그래서 하루하루가 후회가 없으면 내일 되도 후회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내일 되도 후회가 없죠. 왜냐하면 내일되면 그날에 할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어제에 내일 뭐 할 거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할 필요 없죠. 그러니까 하루하루가, 제가 민수기 8장을 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시간은 없고 뭐만 있다? 사람만 있다. 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시간은 없고 사람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떤가 하면은 내가 있고 또 뭐도 있다? 내가 있고 시간도 있다. 이렇게 되겠죠. 세상 사람들은 둘 다가 되겠죠. 내일은 뭐하고 모레는 뭐하고, 이렇게 되니까 시간도 있고 나도 있잖아요.

 

그러면 이 둘이 사이좋게 지내겠어요? 아니면 시간이 나를 힘들게 하겠어요? 시간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왜 힘든 친구와 같이 동행합니까? 이걸 치워버려야죠. 이걸 치워버리는 거예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내가 지금 사라져도 여한이 없는 그 일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지 않으면 후회될 일을 하면서 살라’고 했죠. 그러면 이것의 반대가 되는 일이 뭐냐 하면은 ‘어제 일을 후회함’, 이게 반대가 되겠죠. 여러분들 머리가 좋으니까 이정도의 논리는 따라올 수가 있죠.

 

후회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오늘에 비해서 지금 반대가 뭐냐 하면은 어제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거예요. 애 셋만 낳을 것을 괜히 넷 낳았다. 어제 일을 후회하게 되죠. 그러니까 여기서 어제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후회하지 않는 일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쓸데없는 생각인데. 이걸, 후회하지 않는 일을 공격하는 거예요. 어제 일을 후회함,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일 안함’이 돼요. 일 안함.

 

후회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일 안하는 것이 일 하고 있는 것을 지금 훼방질하고, 반대하고, 공격하고, 일을 못하게 만들어요. 공부를 하는데, ‘어제 잘 할 걸!’ 이것이 지금 책을 보는데 책이 들어오지를 않아요. 머리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왜? 후회하는데 지금 시간과 정력을 소비해가지고 지금 해야 될 일이 없는 거예요. 인간들이 참 어리석죠. 똑똑하다고 하지만 참 어리석어요. 없는 일을 가지고 지금 자기가 공격을 받고 있으니까. 없는데, 없잖아요. 없는데 지금 공격을 받고 있으니까,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공격하는 셈이 된다고요.

 

그걸 누구 탓합니까? 엄마 탓, 아빠 탓, 누구 탓해요? “본인이 거기에 있잖아. 니가 지금 후회하지 않을 일을 니가 몸 가지고 하면 돼.”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남들 보기에 나는 우습게 보이겠지. 그러면 진즉에 어제, 3년 전에, 5년 전에 제대로 할 걸. 지금 이게 무슨 되도 않는 상상입니까? 현실에서 뚝 떨어지는, 전혀 현실감이 없는 그런 망상 속에 빠지는 거예요. 망상 속에. 이건 일 안함이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후회하지 않는 일을 하려면 이걸, 어제 일을 후회함, 다른 말로 일 안 함을 지워버리면 되겠죠. 이게 없도록 싹 지워버리는 겁니다. 지워버릴 때, 이걸 지워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은 지금 할 일만 남습니다. 일만 남으면 여기서 어제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내가 일 한다’가 돼버리면, 이거는 내 안에 뭐가 묻어져 나와 버리느냐 하면은, 과거에 대한 후회가 나라는 것에 묻혀서 나와요. 먼지처럼 묻혀서 온다고요. 해야 될 일이 있는데, 예를 들면 해야 될 일이 지금 공부라면 ‘과거에 내가 공부를 잘할 걸.’ ‘수학의 기초라도 좀 닦아놓을 걸.’ 과거의 후회가 지금 일하는 것에 방해가 되죠. 그러면 내가 일에 방해가 되는 겁니다. 그때는 ‘내가’를 잘라버리죠. ‘내가’를 잘라내면 되겠죠.

 

잘라낼 때 방법은 뭐냐, 방법이 이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이건 좀 어려운데요,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는 사건이 있다. 사건을 집어넣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사건이 있다. 지금부터 이제 성경의 민수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인간을 상대를 안 합니다. 인간은 없는 존재로 봐요. 인간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을 한 해주고, “니가 거기에 있는 사건을 내가 일으켰다.”라고 보는 거예요. 내가 이것을, 주스를 주문했다고 보지를 않고, 지금 이 주스가 내 앞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내 할 일은 뭐냐 이것을 마시는 일만 하면 후회가 없죠. 내가 먹고 싶은데 마시는 일만 하면 후회가 없죠. 이걸 마시면 되거든요. 여기에 무슨 과거가 들어가고 미래가 들어갑니까? 후회할 일이 없는 거예요. 지금 나는 어떤 사건에 의해서 여기에 있다 이 말이죠. 사건에 의해서. 자, 사건의 주인공이, 내가 빠졌으니까 여기에 있는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겠죠. 사건의 주인공이 아닌 거예요. 그럼 사건의 주인공은? 모르죠. 알 수가 없죠.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나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것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당신이 거기에 가자고 했잖아.”라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은 좀 생각을 많이 해야 돼요. 내가 왜 여기에 있고, 저기에 없고 여기에 있는지의 그 결정을 내 맘대로 하지를 못합니다. 제가 아침에 호텔에 갔을 때에 호텔 앞에 장날이 섰거든요. 장날이니까 시장이 열렸다 이 말이죠. 그 시장을 내가 열었습니까? 아니죠. 사건이다 이 말이죠. “어! 시장이 있네. 구경을 해보자.” 어떤 마주치는 일에 대해서, 그 시장구경을 하지 않으면 내가 후회할 것 같은.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가는 거예요. 뭐, 내일을 생각하고 어제를 생각할 것이 없어요. 지금 마주치는 일이 내가 후회 안 하는 결정을 하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마주치는 일이, 내가 시장을 열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누가 열었습니까? 아무도 아니죠. 그냥 놓여진 거죠. 그렇죠. 그게 사건 속에 우리가 하나의 점으로서 놓여있는 겁니다. 사건 속에. 내가 ‘아, 여기 길거리에 아무도 없는데 시장 한번 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냥 마주침이에요. 마주침.

 

사건은 어떻게 만난다? 그냥 마주침이죠. 마주침. 혹시 이 단어를 아시는 분이 있으면 이야기해보세요. 플래시 몹(flash mob, 서로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인터넷과 전자 메일, 휴대전화 등의 연락을 통하여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모여, 짧은 시간 동안 주어진 놀이나 행동을 취하고는 금세 제각기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 알아요?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잘 안 쓰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젊은 사람들은 알아요. 그냥 아무런 계획 없이 자기들끼리는 약속했지만, 아무런 계획이 없이 광장에서 딴 일을 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음악소리가 나오면 한쪽에서 다리 흔들면서 춤추고 나오고 또 저쪽에서 나오고, 그래서 음악소리에 맞춰서 갑자기 하나의 군무, 춤을 추는 거예요. 춤을 추다가 음악소리가 딱 끝나면 각자 자기의 볼일 보러 다 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하나의 이벤트죠.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래 생각하지 말고, 과거생각하지 말고, 지금 우리는 뭘 하느냐 하면은 매일같이 ‘플래시 몹’을 하고 있는 거예요. 누굴 만날지, 내가 누굴 만날지, 내가 오늘 10시부터 11시까지 뭘 할지, 이건 예상도 없는 일인데 장날의 마주침처럼 그냥 마주쳐서,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건이 마주쳤기 때문에 그 탓을 내 탓으로 돌릴까요? 안 돌릴까요?

 

중요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이 나왔어요. 첫 번째 내 탓으로 돌릴까요? 안 돌릴까요? 내 탓으로 안 돌리죠. 안 돌리면 이게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은 정신병자가 안 돼요. 정신병자의 특징은 뭐다? 다 남 탓이고 그 다음에 더 나가서 누구 탓이다? 내 탓이다. 이게 정신병이에요. 이 정신병은 이사야 수련회 참석한 사람은 압니다. 세 번째 강의가 보편적 정신병이라고 했죠. 정신병의 특징은 미흡한 것에 대해서 불편해하는 것. ‘아, 맞아. 그거 내가 하는 건데.’ ‘에이, 이게 뭐야 더 채우지.’ 뭔가 더 채우고 싶은 것을 마저 못해서 두고두고 마음에 불편해하는 것이 마음의 정신병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 앞에다가 뭘 붙였느냐 하면은 보편적정신병이라고 했거든요. 보편적. 보편적이라는 말을 아시죠? 모든 인간이 다 정신병자에요. 모든 인간이 다. 태어나면서부터. 첫째 남 탓하고, 남 탓하다가 그 다음에 누구 탓하고? 내 탓하고. 보편적 정신병자들입니다. 그래가지고 세월 보내고 나중에 70, 80, 나중에 90이 됐다. 90되면 뭐하겠어요? 방금 말한 대로 90되면 뭐하죠? 남 탓하고 그 다음에 내 탓하고 그 다음에 자식 탓하고. 95가 됐다. 남 탓하고 내 탓하고 자식 탓하고. 그래가지고 그날 오후에 숨을 거둔다. 거둘 때까지 뭐하겠어요? 남 탓하고 내 탓하고 자식 탓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정신병자로 사는 거예요. 그래놓고 죽게 되면 어디에 가냐? 관속에 가겠죠. 관속에 가게 되면 식구들 모여가지고 장례식 하는 것을 관 빼꼼히 열고서 보는 거예요. 큰아들이 왔는가하고. 빼꼼히 열고 보는 거예요.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남 탓하고 내 탓하고. 내일되면 남 탓하고 내 탓하고. 모레 되면 남 탓하고 내 탓하고. 그거 왜 살아요? 사는 이유가 뭐가 있어요? 아무 이유도 없어요.

 

성경은 말합니다. 니가 태어난 것도 사건이고, 죽는 것도 사건이고, 살아온 것도 사건이다. 플래시 몹이에요. 하나의 사건이었어요. 사건. 사건인데, 사건이라고 보지 않고 누굴 집어넣었습니까?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내가 결정 잘못해서 이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사건인데. 그 결정을 할 때에 내가 관여 못합니다.

 

예를 들면 이쪽에 어떤 총각이 결혼을 하는데 선을 열 번 봤다. 아가씨를 열 번 보고 그 중에 맘에 들은 한 사람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본인이 결정을 했습니까? 사건입니까? 사건이죠. 왜, 백 명은 왜 안 봐요? 왜, 276명은 왜 안 보는 거예요? 기껏 일어난 플래시 몹, 사건은 열 명만 만나고 결정한 거예요. 그럼 열 명만 만나고서 결정해놓고, 아이고 잘못 만났다고 한다면? 왜? 7246명을 만나지? 왜 그렇게 못 만났어요? 그럼 7246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게 또 미흡하다면 9000명은 왜 못 만나죠? 누굴 만난다는 것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있다 보니까 그걸 사건으로 안 보고 나의 결정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결정해버리면, 내가 이 사건 자리에 내가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후회가 생겨요. 후회가. ‘그때 결정 똑바로 할 걸. 바르게 할 걸.’ 맨날 내가 있기 때문에 후회를 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요? 어제도 후회하고 오늘도 후회하고. 나이 36살 때도 후회하고 96살 때도 후회하고. 죽기 직전에도 후회하고. 한평생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후회만 하다가 볼일 다보고. 남 탓하고. 남 탓이 후회거든요.

 

자,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했던가요? 이렇게 말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건이라고 했죠. 사건은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에 생겨난다. 성경은 내가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겨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거예요. 발생. 발생이라는 이 단어만 알아도 인생을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발생만 알아도. 발생의 반대말이 뭐겠어요? 내가 여기 있다. 있는 것이 아니고 뭐한다? 발생한다. 발생한다는 것을 쉽게 하면 생겨났다. 누가? 내가. 내가 여기 생겨났다.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말한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있어봤자 나중에 늙어죽으면 뭐가 됩니까? 죽죠.

 

그냥 곱게 죽는 것이 아니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후회하면서 죽죠. 못 들었으니까 다시 할게요. 성경에서는 내가 여기 있다고 하지 않고 내가 여기 생겨났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생겨났다. 오늘 며칠이죠? 9월 24일에 내가 생겨난 거예요. 내가 생겨나고, 저쪽에 어떤 아저씨가 걸어오면 그 아저씨도 있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생겨나죠. 그 아저씨하고 내가 만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의 전부 다 점, 점, 점이죠. 점, 점, 점, 점...., 이 점들의 만남의 주가 전부 다 뭐가 되느냐 하면은, 점들이 있고, 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점이니까, 여기에 뭡니까? 사건과 사건으로 얽혀있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있어요. 매트릭스에요. 형제가 감독이 돼서 만든 영화, 매트릭스에요.

 

매트릭스는 모든 게 사건이에요. 만남과 헤어짐과 모든 게 사건이에요. 매트릭스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그러나 이미 이 매트릭스 영화이야기는 전도서에 나옵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만날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그 다음에 헤어질 때가 있고. 모든 게 사건이에요. 왜 책임을 내가 집니까? 아, 인간 정말!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아, 잘할 걸.’ 아니에요. 한계가 있어요. 내가 열 명 밖에 못 만났어요. 그때 열 명만 만나고 결혼한 거예요.

 

그러니까 잘 할 걸이라는 것은 지나온 것을 앞에서 보면 그것은 후회할 일이 아니에요. 7246명을 못 만났다고요. 시간관계상. 그것 하려고 하면 커피 값이 얼마나 많이 나가는데. 기껏 열 명만 만나놓고 결정 잘못했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 결정은 내가 한 게 아니고 생겨난 거예요. 니는 그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정황 속에 니가 거기에 몰려간, 그렇게 몰입된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하게 내 결정을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그러니까 구석으로 몰아넣는다는 말이 있죠. 몰아넣은 거예요.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후회하지 마세요. 정신병에 걸립니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 뜻도 모르니까, 같은 인간들보고 있으니까, 맨날 너무 잘났다, 나는 못났다고 자꾸 이렇게 비교하는데요. 그것은 내가 발생된 것이 아니고 내가 있다고 하니까, 있는 것을 안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성경에 보면 오늘의 걱정은 오늘로 털어버려라. 그리고 내일되거든 또 내일 것을 줄 테니까 미리 땡겨서 하지 말고, 오늘은 오늘 밤에 잘 때 털어버리고 내일 되면 또 털어버려라. 이걸 가지고 뭐냐, 발생이에요. 발생. 내일되면 또 어떤 만남이 있을 거예요. 어떤 사건이 있을 거예요. 어떤 식당에 갔는데 예상외로 밥맛이 맛있다는 것도 사건이거든요. 예상 못한 거거든요. 우발적이고. 플래시 몹이니까. 모였다가 흩어지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을 믿으면 안 돼요. 왜냐 하면은 사람은 모였다가 그 다음에 뭐한다고요? 흩어지는 사건이 있어요. 엄마, 아빠 믿다가... 믿지 마세요. 흩어져요. 전부 다. 아빠도 흩어지고 엄마도 흩어지고 자식도 흩어지고 전부 다 흩어져요. 그런데 어떻든지 같이 모였다면 뭐가 됩니까? 사건이니까, 여기서는 후회대신 뭐가 나오느냐? 후회대신 고맙습니다. 감사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으니까 내가 이쯤해서 해야 할 일은 후회하지 않는 일만 하면 돼요. 후회하지 않는 일. 내일 걱정하지 말고.

 

자, 그러면 후회의 반대말이 있어야 되겠죠. 후회의 반대말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성경과 관련되어 있어서 계속하는 거예요. 후회의 반대말은 성과주의입니다. 오늘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일 이런 성과를 거두겠다고 하는 성과주의는 아까 제가 한 시간요소가 나를 휘감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방금 무엇이 휘감고 있다고 했어요? 시간이죠. 시간. 이 시간이 뭐하게 만들어요? 항상 후회하게 만들죠. 이건 발생이 아니고 천하없어도 내 존재를 잊지 않겠다는 자기중심주의로 나가버리면 남들을 괴롭히게 돼요.

 

성과주의, 이거 없습니다. 성과라는 것이 없어요. 몇몇 사람은 잘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성과에요. 어떤 아는 사람한테는 좋지만, 우리 편한테는 좋지만 우리 편이 아닌 사람한테는 고통을 주는 성과주의. 이래되면 그것은 전부 다 내가 그것들에게 심리적인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그리 되면 안 돼요. 오늘 아침에 보니까 폭죽이 있었어요. 무슨 날인지 몰라. 폭죽소리가 들렸거든요. 폭죽 같은 인생. 인생은 그때그때, 아까 플래시 몹, 그냥 터졌다가 사라지고, 또 터졌다가 사라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냥 그때마다 맺혀주는, 그냥 사건이기 때문에 책임질 생각하지 말고요. 내 일에 책임지지 마세요.

 

내 일에 책임을 안 지게 되면 내 일에 후회도 안 하게 돼요. 물론 걱정근심은 이건 더불어 없어요. 걱정근심은. 후회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후회하지 않을,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냥 내가 하면 되는 거예요. 성과는, 그 다음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결과가 주어집니다. 내가 손댈 수 없어요. 두고두고 고민하면서 ‘안 그럴 걸’이라고 하지 말고 지금 후회 없이 살고 결과에 대해서는 내 손을 떼면 돼요.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니까. “내가 그때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니가 무책임하구나?” “그래 무책임해.” 이래 나오라는 말이죠. “그래, 나 뻔뻔스러워. 무책임해. 니도 마찬가지야. 뭐.” 책임질 사람 아무도 없어요.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죠. ‘아휴, 내가 애를 그렇게 키우는 것이 아닌데.’ 뭘 애를 그렇게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그때 최선을 다했는데. 뭘. 뭘 지금 와서 그렇게 후회를 해요.

 

하나의 사건이 되게 되면, 그러면 어떤 사람 A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건이죠. 그러면 B라는 사람은 뭡니까? 사건 되죠. 이 사건(A)과 사건(B)사이에서, 거기에 대해서 내가 억압을 하거나 관여하거나 평가하거나 집착을 하거나 내가 그 사람을 주도하거나 할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내가. 내가 없죠. 봐요. 없잖아요. 니는 니 사건이고 나는 내 사건인데 니가 왜 나한테 간섭 하냐? 쓸데없이 간섭하는 거예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남한테 간섭하거나 요구할 권한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하면 사건이기 때문에.

 

그럼 사건과 사건이 만났을 때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은, 아까 얼른 이야기했죠. 뭐라고 했습니까? 감사. “니 오늘 만나서 감사하다. 고맙다.” 참, 우리 입에서 나오기가 힘들죠. 진짜 평생을 걸쳐서 한번 나올까 말까한 이야기. 감사하다. 고맙다. 이걸 번역하면 나는 지금 만남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일돼도 오늘 일에 대해서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감사가 나오는 거죠.

 

그러면 지금부터 할 것은 도대체 성경에 무슨 이야기가 있기에, 인간을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전부 다에요. 전부 다. 전부 다라고요. 제가 어제 이야기했죠. 기독교라는 것이 위험한 거라고. 자기 존재를 신의 힘을 빌려서 주술적으로 내가 남한테 위너winner,승리자가 되고, 패자가 되지 않고 승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빽을 얻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것, 이거는 무슨 종교라고 했습니까? 이게 바로 우상의 바알종교. 우상종교죠.

 

우상종교가 될 때 사람들이 많아요. 교회에 고객이 많아요. 손님들이 많다고요. 장사가 잘 되는 거예요. 기독교는 위험한, 불교도 위험하지만, 모든 종교는 한번 보되, 거기서 탈피해야 되는, 벗어나야 되는 거예요. 종교마저 넘어서야 돼요. 종교마저. 신을 내 소유로 갖는 것을 넘어서야 되죠. 그리고 그걸 넘어서면, 내가 뭘 가져야 됩니까? 가진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가지지 마세요. 나는 가질 필요가 없이 하나의 사건이니까. 매트릭스니까. 매트릭스 알죠. 침대 확 뜯어버리면 스프링, 매트릭스 나오죠. 그게 연관된 관계와 관계망. 관계와 관계망이에요.

 

그러니까 뭐만 있으면 돼요? 교차점만 있으면 돼요. 교차점만. 이 격자구조⌗에서 이 교차점이 있죠. 사건이.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나라는 존재에요. 그냥 사건과 사건의 만남에 의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만남에 의해서. 그러면 다시 복습해봅시다. A라는 이 사람과 B라는 나의 격자구조의 교차점에서, 만남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관계가 나오죠. 관계가 나오는데, 이 관계가 지금 제가 이야기해야 할 민수기에요. 민수기. 성경을 포함한 민수기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전제를 하고, 이렇게 서론적으로 쭉 깔고 민수기 8장을 한번 봅시다. 민수기가 어떤 구조로, 어떻게 보느냐, 민수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을 이렇게 관계적으로 보는데, 존재가 아니고 관계적으로 보는데, 어떤 내용으로 보시기에 우리가 내 존재에 대해서 책임지거나 후회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00양과 나 사이에 무슨 관계? 눈에 안 보이거든요. 존재만 보이지 눈에 안 보이거든요. 안 보이는데, 이 관계 속에 하나님께서 어떤 관계를 살리기 위해서 둘이 이 시간에 만나게 했느냐 하는 거예요. 사건이 되게 했는가 하는 거예요.

 

그 관계가 뭐냐, 그 관계를 민수기 8장에서 하겠습니다. 오늘 해야 될 것이 민수기 8장 5절에서 18절까지 할 겁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어떤 특정 단어가 나오죠. “레위인”이 나오죠. 레위인. 레위인이 나오는데, 레위인이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하는가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18절에 나옵니다. 18절을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자, 레위인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처음 난 자로 되어 있죠. 처음 난 자. 다시 하겠습니다. 왜 사람은 존재가 아니고 관계냐? 왜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켰느냐? 관계가 뭐로 구성됐느냐? 할 때에 여기 민수기 8장을 동원하면 된다고 했죠. 그럼 민수기 8장에서 방금 몇 절을 봤습니까? 5절 봤죠. 5절보고 또 몇 절을 봤어요? 18절을 봤죠. 거기에 어떤 특정 사람이 나와요? 레위인이 나오죠. 레위인.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레위입니다. 레위인이라 이 말이죠. 그 레위인이 뭐라고 설명되어 있어요? 18절에 보니까. 처음 난 자죠. 처음 난 자라는 말은 이게 태어난 거예요. 처음 태어난 거예요. 처음 태어났으니까, 레위인이 안 태어나면, 이 사람들이 안 태어나면 나머지기 열한 지파의 사람들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났다, 중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중생이라고 하면 누구 중생이라고 합니까? 나의 중생이라고 하잖아요. 이거는 아니죠. 왜냐하면 ‘나’가 또 들어가니까. 나는 하나의 사건이어야 되지, 내가 어떤 특정 존재가 돼버리면, 이거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또 후회하게 되고 결정해야 되고 책임져야 되고, 이런 지옥 같은 그러한 걱정근심을 안고 또 가야 되는 거예요. 처음 태어났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은 사건이고, 사건과 처음 태어난 분과의 관계가 거듭남이에요. 관계가.

 

아주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주스를 마셔볼게요. “어? 이런 맛 처음이네!” 이렇게 할 때에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 주스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데 이것도 한 만남의 사건이죠. 사건의 의미가 뭐냐 하면은 “너 이 맛 먹어봤어요? 한번 마셔봐.” 마셔보니까, “이 맛 처음이네.”라고 했죠. 그때 처음 이 맛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나만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이런 분인 줄 처음 맛보네. 처음 느끼네. 이게 중생이라니까요.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어제 밤부터 늘 은혜 받아서 이야기했던 그 성령, 성령이 들어오니까 나는 존재가 아니고 주님과의 뭐다? 그냥 생긴 거예요. 예수님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증거 하라고 그냥 생겨난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처음 난 거예요. 처음 난 거. 하나님이 없으면 누구는 없다? 하나님이 없이는 레위인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으면 아브라함이 없고, 하나님이 없으면 이삭이 없고, 하나님이 없으면 야곱이 없고, 야곱의 아들이 몇 명이다? 열두 명. 열두 명 중에 누구다? 레위인. 하나님이 없이는 뭐가 없다? 레위인이 없고. 레위인이 없으면 오늘날 너와 나 사이의 관계, 관계가 어떤 관계냐를 규명할 수 없는 근거가, 증거가 없는 거예요.

 

자, 제가 방금 이렇게 설명했죠. 그러면 기존의 교회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여러분 잘 돼야 되겠죠? 행복해야 되겠죠? 여러분의 모든 가정의 어려움은 여러분들이 죄지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와서 말씀 듣고 순복하고 기도하면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디서 이야기하죠? 기독교에서 이야기하죠. 교회에서 이야기하죠.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여러분들이 거듭나라고 했으니까, 여러분이 거듭나야 돼요. 여러분이 거듭나려면 빡세게 기도해야 되고 아니면 식당에서 고기 소금구이 기다리다가 오든지 뭐.” 그렇게 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내가 천당 가야 된다는 생각을 갖겠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조작한 거예요. 만들어낸 거예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주는 것이 아니고 있는 우리를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버려요. 플래시 몹 하듯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다고요. 만들어놓고 내던져버리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놓고 주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버려요. 꽉 이렇게 연결시킨다고요. 후회하지 마라.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책임질 생각하지마라. 내가 너를 거기에 있게 했다. 몇 년 도에 태어났고 몇 년 도에 죽는 거, 그거는 니 소관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게 했어.

 

아가씨 열 명 보고 또는 총각 스무 명 보고 결혼했다고 해서 니가 결정했다고 생각하지 마. 그때 나를 그렇게 몰아넣었어요. 열두 명 봐야 될 것을 열 명 밖에 못 봤어. 이렇게 몰아넣었어. 후회하지 마. 그럴 수밖에 없어. 다시 태어나도 그럴 수밖에 없어. 세 번 태어나도 그럴 수밖에 없어. 왜? 너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절대로 책임지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그리고 내일 생각하지 말고, 지금 후회하지 않을 일을 주께서 맞닥뜨리게 하게 하신 거예요. 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고맙다, 감사하다를 악마는 제일 싫어해요. 악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뭐냐, 열심히 해라,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야 니 장래에 성과가 주어진다. 이게 악마가 하는 이야기에요. 심지어 그 이야기를 어디서 하느냐, 교회에서 하죠. 기도가 부족하니까 기도를 하면 얻을 수 있다.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섬기면, 착한일 하면 복 받는다. 이게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고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동조를 해요. 왜? 자기밖에 모르니까. 자기 과거가 후회스러우니까.

 

후회하니까 맨날 교회에서 기도하는 게 뭐하느냐 하면은 만회하기 또는 보상받기. 이 땅에서 만회 안 되면 죽어서 천당 가기. 이런 식으로 자기 이득과 자기 유리한 것만 챙기는 것을 가르치니, 뭐 어느 교회든 크게 지을 수밖에 없고 꽉꽉 모일 수밖에 없어요. 신종무당이니까. 자기가 평소에 원하던 욕망을 채워준다니까 안 갈 수가 없죠. 처음에는 안 간다고 버티다가 답답하면 가서 빌게 되어 있고. 빈다는 자체가 자기를 스스로 자책하는 거거든요. 자책하는 거.

 

자, 물어봅시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반성하는 것을 원할까요? 원하지 않을까요? 반성하는 거.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성하는 그 ‘나’가 대단한 존재가 되고 말아요. 니 반성 안 하지? 나 반성해. 주님께서 회개하는 것을 원할까요? 원하지 않을까요? 원하지 않습니다. 회개한 ‘나’가 회개하기 전보다 우수한 ‘나’가 돼요. 그러면 이 우수한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더 나는 내 선행에 박차를 가해야 됩니다.

 

박차를 가한다는 말은 뭐냐, 하고 싶은데 억지로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안 하면 착해지겠지. 저걸 안 하면 착해지겠지. 착해지면 뭐 받는다? 복 받겠지. 복 받으면 내 과거의 모든 손상을 만회하겠지. 보상받겠지. 이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후회할 짓을 자꾸 모으고 있는 거예요. 몇 시부터 시작했습니까? 모르겠어요. 후회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이 피곤하시면 제가 스톱할 테니까.

 

자, 레위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제 말이 아니죠. 민수기 8장 18절에 보면 ‘처음 난 자’죠. 처음 난 자. 레위인을 처음 난 자라고 하는데 이걸 가지고 모델, 또는 시범모델. 시범자. 레위인처럼 되라 이 말이에요. 레위인처럼 되라. 시범자가 되어라. 그러면 아까 8장 5절을 했죠. 그 다음에 8장 9절을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8장 9절. “레위인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자, 됐습니다. 제가 한번 쓸게요. 백성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은 레위인 앞에 가야 됩니다. 백성은 다수죠. 레위인 빼고 열한 지파라는 다수죠. 단수가 아니고 다수죠. 레위인은 무슨 지파입니까? 한(1)지파죠. 다수가 뭐로 모였습니까? 하나로 집결됐죠. 하나로 응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리를 안다는 것은 모든 변화를 하나로 응축시키는 것을 진리를 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 변화들이, 아무리 변하고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 뭐다? 하나에서 나온 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핵심 되는 하나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죠. 현대 천문학이나 물리학에서 우주의 탄생을 뭐로 봅니까? 빅뱅이라고 하죠. 빅뱅. 빅뱅 하니까 한국의 아이돌 생각하는데. 빅뱅이죠. 빅뱅은 둘이 되겠어요? 하나가 되겠어요? 최초의 하나잖아요. 하나에서 이게 소용돌이 치고 풀리게 되면 뭐가 나옵니까? 모든 우주가 나왔다고 현대물리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물리학은 이게 안 맞아요. 안 맞지만 하여튼 그 외에는 달리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언제 나왔다고 합니까? 지금으로부터 137억 년 전에 나왔다. 지구는 45억 년 전에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과학이 구라가 되는 이유는 시간을 길게 잡아서 이게 문제가 되고 수상해요. 하여튼 빅뱅이 이렇게, 최초의 창조가 이렇게 풀려나오는 거죠. 최초의 것이 풀려나오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블랙홀이라고 하는 거예요. 블랙홀. 오늘날에도 그런 현상이 있다는 거예요. 블랙홀 들어본 적이 있어요? 우주에 시커먼 구멍이 있는데 빛이고 간에 전부 다, 모든 질량을 가진 것들은 다 끌어 땡기는 거예요.

 

그러면 뭡니까? 다수에 있던 태양이나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모든 은하계는 어디로 갑니까? 다수가 어디로 간다? 하나로 응축되겠죠.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다수가,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로 모인다? 레위지파로 모이는 거예요. 어렵지 않죠? 성경이. 민수기가. 여러 가지, 나라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고 레위인으로 보내는 겁니다. 레위인으로 응축이 되면 이게 뭐냐, 대표 또는 대신하는 거예요. “내 책임, 내가 죄 짓는 거 당신이 다 가져가.”라고, 그냥 하나로 밀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로. 그리고 주께서 그걸 원하고 계세요. 우리가 무책임해서 미루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뭐냐, 니가 니 책임지지 말고 니 짐을 누구한테? 중심 되는 하나한테 모아버려라 이 말이죠. 그럼 레위인에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기다리고 있어요. 관계성이. 왜냐하면 레위인이 누굴 대표하기 때문에? 백성을 대표하거든요. 대표한다는 말을 했지만 여기서는 뭐냐, 대신한다고 되어 있어요. 민수기 8장 18절에,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그 다음에 뭡니까? “대신으로” 대신이죠. 저는 대표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대신이라고요.

 

여러분들이 이제 최초의 블랙홀에 접근한 거예요. 지금 끙끙 나 혼자 앓지 말고 맡기라 이 말이죠. 그럼 나는 존재가 되지 말고 사건이 되면 되고. 사건이 되거든요. 맡겨버리면, 레위인에게 누가 기다리고 있겠어요? 레위인과 하나님 사이에 여기 관계가 준비되어 있어요. 준비되어 있는데 이 관계가 무슨 관계냐 하면은, 11절에 봅시다.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아론은 레위인 중에서 가장 대표자죠. 우두머리죠. “레위인을 요제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로 여호와를 봉사케 하기 위함이라”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12절에 “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수송아지, 동물 나옵니다. 동물. 자, 레위인은 사람이죠. 하나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래서 안 보이니까 없다고 생각하죠. 없는데, 무엇은 있어요? 관계는 있죠. 레위인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 하나님과 관계는 있는데, 레위인이 뭘 드립니까? 짐승을 잡죠.

 

그러면 여기 인간에서 뭐로 바뀌죠? 인간에서 동물로 바뀌죠. 동물. 짐승으로 바뀌죠. 그 짐승의 운명이 어떻게 됩니까? 바치라고 했으니까, 이 짐승이 살아요? 죽어요? 하나님 앞에서 죽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취지가 그대로, 그 질서가 레위인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면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 복습해봅시다. 레위인은 블랙홀이에요. 빅뱅이에요. 빅뱅인데,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나라는 인간이 레위인이 있다면 내 책임 다 가져가라고 안수도 하고, 내 죄가 있는데 당신이 가져가라고 하고 막 안수한다고요. “이제 저 죄 없습니다. 당신이 대신 짊어지세요.” 그러면 레위인이 “알았어요. 이게 주의 뜻이니까 받겠습니다.” 받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그 사람들만 갈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가면 죽어요. 레위인만 가는데, 하나님께 뭘 바쳐요? 동물을 바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에서 뭐로 바뀌었어요? 중간 업체, 중간 택배가 갑자기 사람에서 동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누군가 나중에 와서, 그 동물은 사는 동물이 아니고 무슨 기능을 해요? 죽는 동물이죠. 죽어야 될 동물, 왜 죽느냐 하면은 죄를 짊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대신 죽어야 될 동물의 기능을 하는 사람이 장차 하나님의 약속대로 온다는 것을 레위인이 미리 보여주는 기능. 그 기능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관계에요.

 

아까 교회가 하는 짓 이야기했죠. 이거는 내가 죽어요? 안 죽어요? 미쳤어요. 내가 왜 죽어요. 내가 얼마나 귀한데 왜 죽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살아있는 내 인생 보상받고 만회하기 위해서 그냥 빌고 돈 바치고 헌금하고 십일조 하는 그 짓을 한다고 했죠. 근데 실제로 성경을 보니까 그렇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런 돈을 받는다든지 그런 일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니가 그렇게 책임질 생각 하지 말고, 나한테 알랑 떨거나 재롱 떨 생각하지 말고 맡겨라.” 맡겨라!

 

제가 아까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라고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책임지지 말라고 했죠. 책임지지 말아야 될 그 이유가 성경에 있다고 했죠. 그럼 지금 성경을 봤죠. 모든 성경에 있지만 민수기 8장을 봤죠. 8장에 보면 뭐가 있어요? 거기에 누가 우리 대신 죽는, 동물의, 제물의 기능을 해야 되는 어떤 분이, 사람이 아니고 동물로 나타나서 하나님과 우리의 대표자인 레위인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바로 민수기 초반에 나온 핵심이에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빅뱅, 우리는 플래시 몹, 만났다가 흩어지고 만났다고 흩어지는 다양성, 다수, 사건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우리 모두 다. 내가 누구를 평가할 수가 없어요. 나도 누구를 책임질 필요가 없고, 누굴 탓하거나, 니 왜 그러냐고 압박하거나,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돼! 라고 지적질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근데 기존 교회에서는 누가 지적질 합니까? 목사가 교인들보고 지적질 하죠. 그럼 교인들은 왜 그걸 받아줍니까? 그건 어제 식사하면서 잘 이야기했어요. 목사님이니까, 주의 종이니까, 성령을 받았으니까 내 책임지라고. 책임자는 동물인데요? 사람이 아니고. 책임자는 예수님 밖에 없죠. 그렇죠. 어린양이라는 게 오실 분을 미리 예표 한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1.42) 19-12-08 09:11 
20190924 해외가을특강 : 민수기 속의 사랑B -이근호 목사-

 

먼 길을 가는데 떡볶이 먹고 가는 것이 나을까요? 김밥을 먹고 가는 것이 나을까요? 먼 길을 가는데. 질문 자체가 이상하죠. 먼 길을 가는데 떡볶이가 나을까요? 김밥이 나을까요? 자, 먼 길입니다. 먼 길. 먼 길을 가는데 첫 번째는 떡볶이, 두 번째는 김밥, 세 번째는 상관없다. 자, 몇 번째입니까? 세 번째 상관없다죠. 인생을 가는데 있어서 방향이 있어요. 방향이 있는데, 인생이 떡볶이를 먹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나 김밥을 먹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나 아무런 영향이 없어요. 상관이 없어요. 그 가는 방향이 가는 쪽으로 꾸역꾸역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방향을 바라보게 되면, 지금 내가 어떤 지금이냐, 지금 내가 키가 몇 센티미터냐, 거기에 대해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게 짐이 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짐이 될 이유가. 그렇죠. 그러면 그 방향이, 문제는 떡볶이도 중요하지 않고 김밥도 중요하지 않다면, 그러면 그 먼 길이 중요하겠죠. 성경에서는 이 먼 길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걸 가지고 비밀이라고 해요. 비밀.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 보기에는 그냥 먼 길이지만, 실제로 거기에 쏙 들어가는, 만약에 최후의 도착지점이 있잖아요. 그 도달지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무도 모르죠. 모르니까 시크릿secret, 비밀이 되는 겁니다.

 

자, 비밀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아주 모른다. 두 번째, 낌새가 느껴진다. 비밀은 비밀인데 아주 모른다 하고, 낌새가 느껴진다 하고. 낌새는 고상한 말로 징후라고 하는데, 증상, 징후. 머리에 열이 날 때는 감기증상이죠. 감기는 눈에 안 보이지만 증상이 보이죠. 그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로. 컴퓨터에서는 몸체를 가지고 하드웨어라고 하고 거기에 운영되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소프트웨어라고 하거든요.

 

그럼 여러분들이 이걸 안다면 영화관은 하드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일까요? 하드웨어죠. 영화관은 건물이 있고 의자가 있으니까. 그럼 거기서 상영되는 영화는 하드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죠. 그럼 또 묻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일까요?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죠.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뭘까요?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영화를 상영하느냐 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에 해당되는 거예요.

 

비밀은 소프트웨어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은 먼 길을 갈 때 떡볶이를 먹을 것이냐, 김밥을 먹을 것이냐, 둘 다 먹고 배설하니까 그 하드웨어는 중요하지 않아요. 무슨 비밀을 간직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은 제 말에 의하면 먼 길인데 그 갈 길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낌새를 어렴풋이 느낄 때, ‘나는 방향이 이쪽 방향이야’라고 증상을 느낄 때, 그것은 비밀을 간직한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강의와 두 번째 강의의 제목을 함께 묶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제목을 미리 정했어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비밀의 단말기’ 단말기. 영어로 하면 시크릿 모니터. 모니터에서 반드시 현상이 보이게 되어 있어요. 비밀의 단말기가 뭐냐 하면은 이게 내 인생이죠. 그러면 비밀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과 나 사이는 존재와 존재가 아니고, 존재가 있더라고 두 사이에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비밀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 이게 바로 성경의 뜻입니다. 비밀이 내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 비밀이.

 

이 비밀이 중요하기 때문에 떡볶이를 먹든지 김밥을 먹든지 그거는 관계가 없어요. 비밀은 먼 길, 다른 말로 하면 갈 길. 그래서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둘이 헤어지는데, 헤어지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갈 길이 달랐다. 갈 길이 달랐어요. 갈 길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처음에는 같이 있는데 쭉쭉 갈라지는 거예요. 갈라서는 지점이 있어요. 갈라서는 지점. 갈 길이 다르기 때문에. 갈 길에 가서 갈라지지만 벌써 낌새는 갈라지기 전부터 느끼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낌새를. 그 증상을. 왜? 인간은 단말기기 때문에. 뭔가 현상이 있어요. 갑자기 tv가 잘 안 나올 때는 뭔가 전자파가 있든지, 번개가 쳤든지 뭔가 낌새가 있죠.

 

자, 우리 인생을 단말기라고 해도 되지만, 그걸 다른 쉬운 말로 이야기하면 비밀의 운반체. 비밀을 운반하는 운반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인생을. “당신은 당신의 비밀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저, 당신은 갈 길이 어느 쪽입니까?”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갑니까?” 같은 말이에요.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고 있습니까?” “몰라”라고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가 인생사는 낌새가 분명히 있는데, 머리가 아프고 증상이 있는데 “몰라”라고 하면 그 자체가 자기가 자기의 병을 모르는 셈이 돼요.

 

특히 이런 증상 같은 것은, 여기 전문가도 있지만, 한의학에서 굉장히 중요시여기잖아요. 한의학은 전례에서 내려오는 온갖 증상을 다 외우잖아요. 그거 다 외울 때 굉장히 골치 아팠죠. 모든 것을 다 외웠고 거기에 처방되는 모든 자연약재를 전부 다 연결시키잖아요. 그걸 습득하고 공부를 해야 되고 하면 힘들잖아요. 이 증상에는 이 약을 쓰는 것이 좋다. 이런 거 있잖아요. 침은 어디에 놓고. 그처럼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고, 인간에게는 어떤 증상이 있는데, 몸만 있으면 이거는 하드웨어기 때문에 뭐가 빠졌어요? 소프트웨어가 빠졌죠. 그래서 몸+뭐냐 하면은 정신이 같이 겸해서 있는 것이 이게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근데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전체(몸+정신)를 뭐라고 했습니까? 사건이라고 했고, 사건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관련성, 관계성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관계성은 나로 하여금 현재 여기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갈 길이 있는데, 도대체 내 갈 길이 어딘지? 만약에 이게 비밀의 운반체라면, 우리가 비밀의 모니터, 운반체라면 이 민수기라는 성경 내용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발산하게 되면 그 사람의 갈 길은 어디입니까? 이 말씀이 있는 세계로 가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말씀이 안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말씀과 대립이 되고 말씀과 마찰을 일으키고 이상하게 말씀에 대해서 역겹다고 할까요? 기분 더럽다고 할까요? 분노를 일으킨다고 할까요? 뭔가 딴 사람에 대해서 욕하는 것은 그냥 있는데, 말씀이야기하면 갑자기 화가 치민다고 할 때는, 그때는 그것도 하나의 낌새고 하나의 증상에요. 말씀에 대해서 대드는 어떤 존재 같은 것이 안에 장착이 되어 있어서, 그 비밀의 반대되는 그것의 운반체로서, 그 하드웨어로서 인간의 몸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하면서 성경 전체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 있기 때문에 쉬운 예를 한번 들겠어요. 예를 들게 되면 어떤 마을에 홍수가 다 났어요. 그 홍수가 난 사람들 집끼리 서로 친하게 지냈다는 그것이 홍수가 난 것을 변경시킬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서로 사랑한다. 이것으로 변경 됩니까? 안 되죠. 사랑해도 홍수를 취소 못하고, 우정도 취소 못하고, 정성도 취소 못하고, 열심도, 헌신도, 희생도, 이런 것도 홍수를 취소 못하겠죠. 그 사건이 바로 노아홍수사건입니다. 노아홍수사건이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조리 물에다 다 쓸어버린 거예요.

 

사람이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정성을 쏟고 하면 그 정성과 사랑에 대해서 굉장히 집착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착한 일했다. 하지만 그게 노아의 심판, 노아의 홍수 앞에서는 그게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홍수가 나면 그게 다 소용이 없어요.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자, 또 하나는 내가 지금 96살인데 30년 후에 죽습니다. 죽으면 내가 그동안 사랑했고 미워했고 또는 우정을 나누고 자식들에게 희생한 그것이 30년 후에 죽는 죽음을 되돌릴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되돌릴 수가 없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내 죽음을 취소 못하는데.

 

그래서 성경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이제부터 본격적입니다. 죽음이란, 바깥에 있는 심판이 개인적으로 스며드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심판이. 노아홍수 있죠. 노아 때 홍수, 그 심판이 이제는 사적으로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 그것도 하나의 낌새로, 증상으로.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람이 죽는 것은 죗값이다.

 

지난 며칠 전에 제가 주일에 설교를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나쁜 환경만 있어요. 나쁜 사람은 없어요. 사람 죽여 놓고 교도소에 간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당신 나쁩니까?” “아니요. 여기에 와보니까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이 있어요.” “왜?” “나는 한명 밖에 안 죽였지만 저 사람은 세 명 죽였으니까. 내가 더 착하죠.”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은 항상 자기 정당화를 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없어요.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어요.

 

그런데 나쁜 환경은, 노아홍수가 내려오면서 모든 인간은 이미 잘나나 못나나 전부 다 똑같은 나쁜 환경 속에 속해져 있습니다. 나쁜 환경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에게 죽음을 유발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환경이 나를 그렇게 몰아세운 거예요. 환경이. 그러면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안 죽는 겁니까?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해서 안 죽는 거예요? 미세먼지가 마음 착한 사람한테는 안 옵니까? 아니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람이 아무리 착해도 머리가 희어지거든요. 저도 염색했는데 염색한 거 벗겨지면 하얘요. 흰머리는 좋고 나쁘고 관계가 없어요. 그냥 하드웨어가 나쁜 환경의 일부기 때문에, 내가 마음씨를 아무리 곱게 먹어도 몸은 망가지게 되어 있고 치매 걸리게 되어 있고 당뇨 걸리게 되어 있고 쓰러지게 되어 있어요. 이미 우리는 나쁜 환경의 담지자, 담지자라는 말이 어려운데, 나쁜 환경의 요소를 전달하는 운반체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걸 편하게 생각하세요. 편하게. 니가 나보다 더 나쁘다. 아니야, 나보다 니가 더 나쁘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똑같아요. 도화지에다가 크레파스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 여기 한번 봅시다. 상당히 사진이 아름답죠. 근데 이걸 잉크 속에 집어넣고 끄집어내보세요. 색깔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다 시커멓겠죠. 그걸 무채색이라고 해요. 이 세상은 무채색의 세계에요. 잘나고 못나고 그런 사람이 없어요. 똑같이 다 검은 사람들이에요. 똑같이.

 

우리가 누구한테 주눅이 든 거예요? 내가 나한테 주눅이 들고 더 나아가서 내가 내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살아가는 게 내가 내 마음에 성이 안차는 거예요. 우리는 알록달록을 원하는데 세상은 나로 하여금 개무시 하게 하거든요. 세상이 나를 개무시 할 때 내 대처방법은 뭡니까? 간단해요. 내가 나를 개무시 하면 되는 겁니다. 그 쉬운 방법을 놔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남이 나를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면 남한테 화 낼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안 알아주면 돼요. 개코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살면 돼요. 얼마나 사는 게 편합니까?

 

이 편한 것을 놔두고 왜 자기는 대단한 사람인양, 내가 마치 절대로 나를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처럼, 어떤 독보적인 존재처럼, 그렇게 독자적으로 하게 되면 그거는 자꾸 남한테 역성을 내게 되어 있고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물론 화를 노골적으로 인상 찌푸리면서 내겠지만, 심지어 웃는 그 속에도 안에 뭐가 담겨있겠어요? 분노를 억제하면서 웃어요. 인간은 뻔해요. 안 봐도 뻔해요. “아이고, 예, 훌륭하십니다.”라고 해놓고는, 속으로는 ‘개코나!’ 모든 인간은 이중성이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어떤 기대를 그다지 하지마세요. 그 사람에게 나올 것은 자기변명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만남은 사기꾼과 사기꾼의 만남이에요. ‘저 사람 참 좋다.’ 좋은 사람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사람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경에 좋은 사람을 소개해드릴게요. 그런 사람도 있어요? 있어요. 누구냐 하면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 철딱서니가 하나도 없어요. 이럴 때만 좋아요. 어린아이에게서 벗어나게 되면 안 좋아요. 안 좋습니다.

 

자, 두 번째 강의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운반체. 죽음=비밀. 인간은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인간이 먼 길을 간다. 그 먼 길이 무슨 길이겠습니까? 먼 길이 바로 내가 심판받는 그 길.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심판에서 갈라지겠죠. 그 낌새가 보이니까. 종합은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민수기를 왜 줬어요? 민수기를 왜 줬느냐 하면은, 일찍, 죽음의 낌새를 일찍 담아버리자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죽는다는 말입니까? 아니, 너 대신 죽었던 분을 미리 담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민수기 8장 뒤에 보면 절기라고 해요. 절기. 자, 공식을 봅시다. 아까 공식했죠. 백성에서 어디에 모인다고 했습니까? 백성이 어디로 집결한다고 했어요? 레위인. 레위인이 누굴 만난다고 했어요? 레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만나죠. 레위인이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짐승을 죽이는 일을 하죠.

 

자, 백성에서 레위인, 다시 복습할까요? 백성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점이라고 한다면, 이 레위인과 점 사이에 뭐가 중요하다? 하나의 사건, 백성도 사건이고 레위인도 사건인데 이 관계가 중요하죠. 이 관계는 무슨 관계냐, 내 죄를 대신 가져가세요, 라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폐품처리업자, 또는 쓰레기처리업자라고 보면 돼요. 이 레위인이. 오늘 제목을 쓰레기처리업자라고 할까요? 레위인은 사건이죠. 하나님은 또 하나의 사건. 사건과 사건 사이에 누가 등장합니까? 짐승이 등장하죠. 이 짐승은, 백성들에게 인수받은 백성의 죄를 레위인이 다 어디에 집어넣는다? 짐승에게 집어넣어서 이 짐승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벌을 받는 거예요. 심판을 받는 거예요.

 

자, 거기까지 이야기했죠. 이번 시간에는 절기죠. 이걸, 이 혜택을 분배하는 거예요. 이 혜택을 분배하는 겁니다. 분배하게 되면 각 사람 하나가 사건이라면, 사건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이 비밀, 하나님이 준비한 비밀을 하나하나씩 이걸 담는 거예요. 담는데, 담는다고 하지 않고 절기에 참석한다. 이래 되는 거예요. 절기에 참석한다. 또는 호출당하는 거예요. “절기에 모여!” “뭐, 빵 주나? 떡 주나?” “아니,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분배해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도 붕어빵 파는 곳이 있어요? 붕어빵 틀에 밀가루 쭉 붓잖아요. 쭉 부어서 돌리고, 그 다음에 팥을 넣고, 그 위에 밀가루 붓고 또 돌리잖아요. 저도 해봤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사건 하나마다가 징후, 낌새, 이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간주한다. 죽은 자로.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든지 용서라든지 미움이라든지 이게 의미가 없어요. 내가 하는 희생이라든지 열심이라든지 의미가 없어요.

 

근데 죽음의 반대말이 뭐죠? 그러니까 제가 강의한 대로 한다면 이 말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말도 되지만, 정확히 말해서 죽음 사건을 우리가 할당받은 겁니다. 우리가 검사입니다. 검사가 모든 사건을 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할당받죠. 우리는 죽음 사건에 할당받은 거예요. 그러면 죽음 사건을 보여주는 낌새로서 우리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우리가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논리 전개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죽잖아요.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 성도에게는 미리 죽음의 사건이 있는데, 이 죽음 사건 속에는 뭐가 해결이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죽어도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가고. 우리가 아무리 죽어도 영생에 가고. 아무리 죄를 지어도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간다를 이미 담고 있는 그러한 하드웨어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입니다. 왜? 그들은 절기에 참석하니까.

 

절기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 안 들었는데, 절기라는 말은 뭐냐,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그런 것들이 절기에요. 절기가 되면 큰 행사가 벌어지는데 그게 뭐냐, 짐승을 잡는 큰 행사가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가운데 블랙홀로 삼고, 그 주변에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서 그 죽음을 다 쳐다보는 사건이, 쳐다보는 일이 뭐냐 바로 절기에요. 축제에요. 찜질방이 아니고 뜨거운 것 나오는 그러한 것, 사우나나 불가마 한증막, 불가마 앞에서 주변에서 사람들이 가운입고 있죠. 불가마 앞에 왜 있는 거죠? 중심에 뭐가 있기 때문에? 불길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고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를 보기 위해서 주변에 모여든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자, 이해되셨죠? 그럼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죽어있음의 반대말이 뭐죠? 이런 죽음이, 소프트웨어에 정보를 담는데, 죽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살아있음이에요. 그러니까 살아있다면, 죽음과 반대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은 어디에 갑니까? 자기가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때문에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먼 길에 햄버거를 먹고 가나 떡볶이를 먹고 가나 김밥을 먹고 가나 백날 가도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왜? 멀쩡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소프트웨어가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걸 큰소리칩니다. “날 건드리지 마라. 나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성도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이미 죽어있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어있음을. 살아있기 때문에 더 살기 위해서는 애를 쓰겠죠. 온갖 근심과 걱정과 고민과 후회와 책임감을, 이런 것 다 스스로 짊어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한 짐 다 지고 가는 겁니다. 잘 사는 것을 남한테 밉보이지 않게, 남 못지않게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다보니까, 이게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지옥 보내는 겁니다.

 

자,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많다는 겁니다. 저도 말이 많은데. 살아있는 사람은 말이 많은데, 이 말이 뭐냐 자기를 변호하고 변명하는데 말이 그렇게 많아요. 이래서 그랬다. 이거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 계속 타인에게 말을 쏘아 댑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람은 그냥 싱긋이 웃지요. 왜? 변명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기를 쓰고 니한테 지기 싫다고 할 필요도 없지요. 그냥 싱긋이 웃어요. ‘그래, 니는 니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갈란다.’ 그뿐이라고요.

 

그럼 성경에 그런 예가 있는가? 그런 예가 있습니다. 요나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소프트웨어에 신경 쓸 사람이, 선지자가 하드웨어를 신경 쓴 거예요. 하드웨어를 뭐라고 했습니까? 몸이죠. 몸을 신경 썼기 때문에 도망친 거예요. 어느 곳으로? 말씀이 없는 곳으로. 하나님의 비밀이 없는 곳으로. 일반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섞이기 위해서 도망을 쳤어요. 도망치다가 풍랑이 일어가지고 죽음이 찾아왔어요. 그렇게 되면 요나는 존재가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요나는 사건에 휘말리게 돼요. 배가 가는데 갑자기 지중해에 풍랑이 일어난 겁니다. 사건이 다시 그 인간을 도로 백back으로 해서 말씀이 있는 곳으로 몰아세웁니다. 자, 공부했습니다. 말씀 안에는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이죠. 요나는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요나가 물에 빠져서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나는 죽죠. 심청이처럼 치마 둘러쓰고 물에 빠져서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요나이야기 보니까 요나가 안 죽고 어디에 들어갔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죠. 그걸 요나에서는 죽음 속에, 음부 속에 들어갔다고 해요. 죽음 속에서 살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냥 인간은 살아있는 것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인간이 아는 지식의 전부인데, 요나는 죽음이라는 큰 알, 고기뱃속에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예수 죽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죽음,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책임이라든지, 내 죄에 대해서 묻지를 않는 거예요. 이미 죽은 사람을 또 죽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도 감사가 되죠.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의 바깥에 뭐가 쳐져 있다? “이미 나는 죽었습니다. 죽었어요. 죽었으니까 나보고 시비 걸지 마세요. 죽은 놈이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 말을 할 때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과해서 말을 해요. “당신 잘났어?” “나는 못났어.” “그런데 못났는데 왜 살아?” “내 대신 죽으신 분 때문에 살아.” 이렇게 죽음을 경유해서 하는 것, 이걸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절기라는 것이 있죠. 절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그 붕어빵, 나눠주죠. 뭘 나눠줍니까? “니 죄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됐다. 걱정하지 마!”

 

그런데 왜 죄 문제가 해결이 됐느냐 하면은, 이걸 나눠주게 되면 그 비밀이 있잖아요. 그 비밀이 뭐냐 죽음이죠. 내 대신 죽으신 그 분의 비밀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우리는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머리가 희어져서 염색해도, 떡볶이를 먹으나 김밥을 먹으나 이미 비밀은 비밀이에요. 내가 키가 작으나 크나 기침을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그거는 나를 나 되게 하는 것하고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가 결혼을 하나 안 하나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 그렇게 하는 것은 성도한테만 해당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혼자 살잖아요?”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나는 누구한테 구애받기 싫어요. 하나님도 좋지만 하나님 없이 혼자 살고 싶어요.’라는 생각이 들겠죠. 근데 아까 첫째 강의에서 사람은 혼자 살아요? 안 살아요? 사람은 사건이라니까요. 혼자 살아도 혼자 살 수가 없어요. 아이스하키나 필드하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스하키를 봅시다. 그 스틱에다가 공을 몰 때 어떻게 몹니까? 공 따로 놀고, 지는 이렇게 춤춥니까? 아니죠. 공만 보고 몰죠.

 

우리 인생은 누구에 의해서 사건으로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모든 걸 내가 결정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 그 지경에 빠지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후회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후회 안 해야 될 이유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내가 눈이 삐었지. 미쳤지.’라고 하지만, 삐지고 미쳐도 그 날이 돼보세요. 또 마찬가지의 결정을 해요. 인간은. 벌써 열 번도 넘게 이야기하는데 후회하지 말고 책임지지 말고 과거의 것 걱정하지 말고 미래의 것 미리 걱정하지 말고 지금 후회 없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이 말이죠. 지금. 내일 생각하지 말고 지금.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안 믿는 사람은 말이 많다는 것까지 왔습니다.

 

자, 말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을 뵙고 난 뒤에, 이사야도 그렇지만 욥기 마지막에도 보면 욥이 하나님을 뵙고 난 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런 문자를 썼어요. 유구무언이라고 했어요. 유구무언. 입이 있으나 할 말이 없습니다. 욥이 다른 사람한테는 말을 되게 잘했어요. 근데 막상 하나님 앞에 딱 섰을 때는 입을 딱 다물고, “제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이야기했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도 같은, 비슷한 이야기를 해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나쁜 게 아니고,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환경에 있죠. “내가 나쁜 사람들 중에, 그중에서 하나의 구성원입니다. 그중의 한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이사야가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사람보고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보고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보고 이야기했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누가 갈꼬?”하고서 하나님께서 슬쩍 떠봤어요. 떠보니까, 이사야가 하는 말이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거든요.

 

그럼 제가 가겠다고 하는 것은 이사야가 자기 믿음 좋은 것을 자랑하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담고 있는 비밀을 이야기하겠어요? 비밀을 이야기하겠죠. 그 비밀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변명할 거리도 안 된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 이사야가 하는 말 중에서, 40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세상의 모든 영광은 풀과 꽃같이 다 없어지지만 무엇은 남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이루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사야가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안 믿는 사람들 이야기했죠. 안 믿는 사람들은 말이 많다고 했죠. 이 부분이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여러분이 참아내야 돼요. 현실문제기 때문에 참아내야 됩니다. 수련회 때 잠깐 했는데, 여러분들한테 알리고 싶어요. 자, 안 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이 많다고 했죠. 말이 많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존재로 봅니까? 사건으로 봅니까? 존재로 보죠. 그럼 존재 여기에 차단망이 쳐져있죠. 자기를 보호하는 성채, 캐슬, 성이 있겠죠. 이거는 자기의 토치카, 방어벽이에요. 방어벽.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의 나와바리에요. 영역이에요. 이거 건드리면 죽여 버리는 거예요.

 

자 남자들 봅시다. 남자들이 몸을 건드리면 화내요? 안 내요? 화내죠. 어떤 사람이 자기 자전거를 갖고 있는데, 자기 자전거인데 누가 뒤에서 만지면 화냅니까? 안냅니까? 화납니다. “내 자전거를 왜 건드려? 발로 차버린다. 에잇! 이 옷” 건드리면 화나죠. 이걸 가지고 인간의 자아의 확장이라고 해요. 인간의 자아가 확장이 돼요. 처음에 운전 배울 때는 핸들하고 나하고 분리가 되어 있어가지고 벌벌 떨죠. 그런데 운전을 자주 하게 되면 핸들이 내 몸의 확장, 연장이 돼요. 그래서 누가 내 차를 건드리면 곧 누굴 건드린 게 돼요? 나를 건드린 거예요.

 

이게 자아의 확장이에요. 누가 내가 응원하는 농구팀을 건드렸다, 배틀 일어납니다. 내가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데 누가 방탄소년단한테 디스를 했다, 방탄소년단하고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데 내가 화를 내는 거예요. 특히 소녀들. 전 세계적으로 15억 소녀들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아주 죽이려고 저주할 거예요. 내가 속해있기 때문에 곧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그걸 지키기 위해서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은 여기에 바로 언어가 동원되는 거예요. 단어가 동원되고 말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여기에 언어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말이 많아요. 말이 많아서 이 말로 된 것이 만약에 허물어지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정신병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정신병을 고치려면 뭡니까? 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로 땜질을 해야 돼요. “나, 의사 선생님이 어디가 아프냐고 했는데 말을 못했어. 등 뒤에 여기가 아프다고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근데 집에 와서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의사선생님한테 다시 전화를 걸 때 이미 그 사람은 정신병이 나았어요. 정신병이라는 것은 내 심정을, 내 마음을 제대로 남한테 전달을 못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걸 한 맺힘 또는 답답함. “남자한테 참 좋은 건데 말을 못하겠네. 왜 좋은지 말을 못하겠네.” 답답해서 말을 좀 하라고 하면, “아, 이거 적절한 말이 없네.”

 

집사님! 사랑이 뭐예요? 사랑이란 속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에요. 자기가 일방적으로 퍼붓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주고받는 거예요. 선을 보는데, “오늘 선 봤나?” “네. 엄마. 선봤어요.” “그래, 선볼 때 아가씨하고 무슨 이야기했노?” “할 이야기가 없었어요.” 무슨 뜻이에요? 그 여자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아가씨에게도 자기하고 똑같은 방어벽이 있겠죠. 방어벽이 있는데, 아가씨가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들 중에 하나를 골라가지고 날립니다. 날리면, 내가 알고 있는 이 단어 속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휭하고 튕기겠죠. “나는 순대가 참 좋은데..” “나는 순대를 진짜 못 먹습니다.” 벌써 튕겼죠. 그 다음에 한 5분 동안 침묵하다가, “나는 배타고 여행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멀미나요.”

 

그러면 이 두 자아의 확장이, 이 자아의 확장은 언어를 통해서 바깥으로 표현되니까, 이 언어의 토치카가 서로 안 맞죠. 나중에는 뭐 애프터도 없고 짜장면 하나 먹고 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나는 영화배우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럼 나도 좋은데요.” 벌써 내가 갖고 있는 언어 중에서 아가씨의 언어와 뭐가 생겼습니까? 공통 요소가 발생되죠. 이걸 가지고 사귄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귈 때의 특징이 뭐다? 말이 통한다. 말이 통하면 뭐한다? 마음이 통하는 거예요. 마음이 통하면 마음에서 공통분모가 있어요. 이 두 개가 얽히는 거예요. 이 두 바퀴가 따로 떨어져 있다가 이렇게 합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결혼이라고 해요. 결혼. 참 쉽죠. 결혼 참 쉽죠.

 

결혼의 특징은 뭐냐, 같이 살아도 서로 이야기할 것이 통한다? 안 통한다? 통하는 겁니다. 많이 통하십니까? 서로 통할 때, 공통분모가 있을 때 결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결혼이에요. 만약에 이 남자가 다른 여자하고 더 통한다면 그 다음부터 이쪽 여자하고는 대화가 점점 줄어들게 돼요. 왜냐하면 서로의 자아확장에 있어서 불신자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행복이 전부거든요. 자기행복이라는 것은 자기가 정신병에 안 걸리면 돼요. 정신병에 안 걸리면 내 미흡함을 채워줄 어떤 단어를 갖고 있는, 나와 공통요소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사랑이란 속마음이 서로 소통하는 것. 그럼 사랑이 끊어지는 것이 뭐냐, 소통이 안 되겠죠.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서로 대화하는 단어의 공통점이 줄어든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12살까지 엄마, 엄마, 하다가 13살부터 갑자기 그 다음부터 대화를 안 해요. 문 확 닫고 게임만 해요. 자, 왜 그럴까요? 엄마를 볼 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는데 엄마가 이 분야에서는 몰라. 수학을 이야기하면 수학을 아나, 영어를 이야기하면 영어를 아나, 생물을 이야기하면 생물을 아나, 모르니까 걔는 뭐냐 하면은 친구한테 전화하고 인터넷을 하다보니까, 엄마하고의 공통요소가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결국 엄마는 “밥 먹자. 자나? 친구한테 전화하나?” 기껏 아는 것이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그런 대화밖에 안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속마음을, 속언어죠. 속단어를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이게 한때죠. 한때. 한때니까 어떻게 됩니까? 계속 이어지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사건의 더미니까. 또 다른 사건이 와서 나의 자아확장에 보탬이 될지, 아니면 나의 자아를 붕괴시킬지, 이게 계속해서 염려가 되는 거예요. 이 전체이야기를,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 자로,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다. 살아있는 인간의 특징은 자기사수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자기 지키는 것 외에는, 자기행복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내놓을 속덩어리가 그거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완벽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이 완벽을 추구하는데 새로운 사건이 오게 되면 자기방어가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단어 가지고는 제대로 방어가 안 될 때는 말을 못하죠. 적당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뭡니까? 여기에 원한이 쌓이고, 적당한 단어가 없으면 분노가 쌓이고 그냥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니 왜 가슴을 치나?” “엄마는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엄마는 몰라.” “말을 해라.” “말을 해도 몰라.” 가슴을 칠 수밖에 없어요. 하드웨어 속덩어리가 안 바뀌는 거예요. 해주면 그때뿐이에요. “그래, 스마트 폰 바꿔줄까?” “히히” 바꾸고 난 뒤에 또 가슴을 치고 이러고 있어요. “왜?” “차 사줘.” 그 다음에 친구만나서 음주운전해가지고. 열아홉 살 먹은 애한테 벤츠 사줘가지고 사고 냈잖아요. 자기 아버지가 국회의원인데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위원장 했는데 사표 냈잖아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은 가족끼리 전부 다 각자 다 살아있어요. 그러면 만약에 이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봅시다. 죽었다면 이걸 뭐로 보겠어요? 이걸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무슨 사건? 내가 얼마나 내 위주로, 내 죄가 무엇인가, 주님이 가져간 내 죄가, 덩어리진 내 죄를 죽을 때까지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사건들을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사건과 사건이 만나면 아까 원한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감사고 또 고마움이라고 했죠. 고마움. 고마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걱정한다? 걱정 안 한다? 어제의 내가 그렇게 할 걸. 내일 잘 할 걸.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 내가 후회스럽지 않게 지금 내가 할 게 뭐냐 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차피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고 오늘 죽더라도 천국이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손해 볼 것은 있다? 없다? 내가 손해 볼 게 없어요. 죽음의 운반체니까. 이미 내가 죽은 자니까. 아까 죽은 자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이 없다고 했잖아요. 말이 없다고 해서 그냥 차갑게 있는 것이 아니고 웃고 감사하고 고맙고. 기껏 말하는 것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 외에는 뭐 마땅히 할 이야기가 없죠.

 

그래서 이 절기에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절기에서 마지막 제사가 있는데 이거에요. 화목제. 마지막 제사입니다. 이 제사 외에는 다른 제사가 없어요. 로마서 3장 한번 찾아보세요.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을 세우셨다고 되어있죠.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라는 말은, 지금 떡볶이 먹을까요? 김밥 먹을까요?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먼 길을 가야되니까. 지금 내 삶이 어떠냐고 자꾸 자기를 닦달내지 말고, 자기를 힘들게 하지마세요. 이게 떡볶일 수도 있고 김밥일수도 있어요. 먼 길을 가니까. 먼 길을 가는 사람은 비밀을 담고 있어요. 그 비밀은 니 문제는 내가 이미 해결했다는 거예요. 이게 화목제물이에요.

 

모든 제사의 끝은, 화목의 뜻이 뭐예요? 니하고 내하고는 서로 속마음주고 받는 사랑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율법은 다 뭐로 이룹니까?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다 이루어졌다.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이렇게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보호해주셨는데.”라는 그 고백. 그 고백이 바로 살아있는 성도,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차라리 못난 사람으로서 뭐든지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미아(IP:122.♡.171.42) 19-12-08 09:13 
201909 해외가을특강 : 생명의 은행 - 이 근호목사

녹취: 오용익 목사

 네 번째 강의 합시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말씀이 그냥 도덕적인 교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계에서 구성할 수 없는 새로운 현실을 따로 만든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있는 곳에 들어오시면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돼요.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 따로 이 세상과는 다른 현실을 만들어서 들어와 버린다는 말이지요. 들어와 버리는 이유는, 인간 쪽에서 내가 있는 곳에 주님과 접촉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이나 그런 노력, 모든 것이 무산되는 거예요.

우리가 현실인데 주님이 들어왔다. 그러면 우리는 이 현실에 앉아 있다가 주님 만나면 그만이에요. 이것은 복잡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현실인데, 주님께서 들어왔다는데, 들어왔다는 그것이 마치 캡슐처럼 동그랗게 되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쪽에서 주님과 만나야 되는데, 내 쪽에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현실은 내 쪽의 인간세계의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이라는 말이지요.

처음 제가 강의할 때 성경말씀은 도덕적인 말씀이 아니라 했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고 했지요. 마태복음 18장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서 ‘곳’ 두 세 사람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있는 그 곳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교회 힘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못 만들지요. 못 만드는 이야기가 성경에 이렇게 있다 이 말이지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이렇게 착한 것을 하고, 바르게살기만 합시다.” 해서 대충 넘어가면 신앙이 헛방이에요. 그건 자기 정당성을 성경을 통해서 확보하려는 수작밖에 안됩니다. 하나의 수작이에요. 인간의 짓거리가 된다고요.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고 인간이 해낼 수 없는 현실 같은 것, 아까 제가 물방울이라고 했고, 비눗방울이라고 했고, 하나의 캡슐이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걸 따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 와서 아무리 기도하고 애써도 그 물방울이라는 하나님이 만든 캡슐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교회에서 충성 봉사해도 그걸 뚫을 수가 없어요. 그 내용이 성경에 있는 거예요. 그냥 이것을 모르고 넘어가자 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제 말은, 이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 그냥 우리 아는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그걸 어려운 말로 방기한다, 내버려둔다, 그런 뜻이거든요.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이걸 왜 뺍니까? 누구 좋으라고 빼요? 이걸 빼버리고 나머지 가지고 믿는다 하면 그 믿음이 정당화가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오늘 이걸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그렇게 어렵다는 이 내용이 무슨 뜻인지 그걸 대충 넘어가게 하지 말자 그 말입니다.

너는 어떤 식으로 이 현상, 다시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가 어떻게 이게 실제로 이루어지는가를 꼼꼼하게 생각을 하고 그냥 대충 넘어가지 않기로 우리가 마음을 먹읍시다. 꼼꼼하게. 어렵더라도.

본문 보면 두 세 사람이지요. 세 사람이라고 보고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했으니까 이걸 인간적으로, 교회에서 하는 식으로 시도를 한 번 해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집사님 세분이 모이는 거예요.

세분, 세 사람이니까 모였다 치고 뭐라고 주문을 외우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여기 계시옵소서.”라고 일곱 번 하든지 아니면 일곱 번의 일곱 번인 48번을 부른다 칩시다. 한 열 번 부른다 칩시다. 그렇게 부르면 뽀로롱, 짠, 하고 주님이 그 가운데 계시냐 이 말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여섯 번 해서 안 되면 일곱 번을 해야 돼요. 여덟 번 해서 안 되면 아홉 번을 해야 돼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라 했으니 일단은 두세 사람 모아놓고, 내 이름, 예수 이름이죠,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 했으니까 그 예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예를 들면 두세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같이 삼창을 하는 거지요. “쭈여~, 쭈여~, 쭈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부르면 뾰로롱~, 만화영화에 나오는 요술공주가 나타나는 것같이 “내가 여기 있노라.” 이것은 연극이지요.

이게 너무나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연극이잖아요. 자기 속임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놀라운 사실은 교회가 이 본문을 가지고 그렇게 해요. 두세 사람보다 숫자가 많아요. 수십 명, 수백 명이 모여서 제창을 해요. 주여, 삼위일체를 세 번 부릅니다. 하게 되면 갑자기 막 뜨거워지는 거예요. 여럿이 불렀으니까. 온천에 안 들어가도 뜨거워지는 거예요.

자기목청을 높이고 에너지가 집중되어서 온도가 뜨거워지니까 마치 주님께서 이 현장에 계시는 것처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걸 인정을 못하지요. 조금 전까지 그냥 우리끼리 있는데 주님께서 갑자기 뾰로롱, 나타날 일이 없다. 목사들이, 혹시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걱정이 되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믿으세요.”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또 묻지요. 확인 작업 들어갑니다.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믿으세요, 라고 했지요? 믿습니까”하고 물으면 교인들이 또 안 믿는다고 할 수가 없잖아요. 주의 종이 그러니까. “예, 믿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이게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연출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수작이 그런 수작이 다 있어요?

그리고 랄랄라, 하다가 헤어지면 그냥 가기 미안하잖아요. ‘주님 우리 50명 이제 헤어지니까 주님도 볼일 보세요. 우리 헤어지니 주님도 집에 가셔야지. 밤도 늦었으니 주무시러 가셔야지요.’ 그 모인 곳은 예배당이 되고. 그런 겁니까?

마태복음 18장 20절 다시 읽어볼게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이 말씀을 현실로 연출할 때 연출하는 방법이 뭐냐를 지금 언급한 거예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교회들이 하는 것 말고 다른 아이디어 있습니까? 다른 것 있으면 끄집어내 보세요.

없어요. 없다고요. 이 본문을 현실화시키는 그 방법 외에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보통 어려운 말씀이 아니지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두세 사람이 모였다 치자. 그냥 계신 것으로 치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천주교 성당에서 떡을 떼지요. 떡을 떼면서 뭐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이 떡은 예수님의 살이요.” 그 다음에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은 예수님의 피요.”

 “신부님,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믿으세요.” 믿으면 뾰로롱, 이 말은 제가 지어냈지만, 뾰로롱, 갑자기 이 떡과 포도주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믿으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화체설이라고 합니다. 화(化), 변한다. 체(體), 몸이. 떡이 몸으로 바뀐다. 그걸 화체설이라고 하고 천주교의 정통교리입니다.

그리고 그 화체설이나 오늘날 기독교 임재설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별 차이 없이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인다는 이런 식으로 또 거짓말을 해요. 믿는 사람은 느끼고, 안 믿는 사람은 못 느낀다고.

그래서 성만찬의 떡과 잔을 함부로 먹으면 병들거나 죽거나 하고, 혹시 성만찬 하기 일주일 전에 죄를 지으면 죄를 지었다고 반성하고 먹으면 병들거나 죽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먹으면 병들거나 죽는다. 이게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권면이다.

신앙이고 뭐고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이 살과 피를 제대로 먹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시적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체험을 하게 함으로서 없는 믿음을 유발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요. 어디에서? 성당에서, 교회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성만찬이나 오늘 본문 이야기나 모두 다 인간들이 조작한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자꾸 조작하려고 하느냐? 마태복음 18장 20절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딴 것은 착하게 살아라, 사랑하면서 살아라, 하면 돼요. 그런데 이것은 실체화되고 현실화 되어야 하니까 이것이 뭔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뭔가 설명이 되어야 되거든요.

실제로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 현장에 주님이 계셔야 돼요. ‘계시다고 치자’가 아니라 계셔야 된다고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그래서 이 어려운 문제라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고 이제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생각할 것은, 본문에 보면 두세 사람이라는 것이 한 사람입니까 다수입니까? 두세 사람은 다수에 해당되는 거예요. 내 이름은 다수의 이름입니까, 한 분의 이름입니까? 한 분이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다수와 하나의 만남인 동시에 그 다수가 하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두세 사람이라도, 다시 말해서 서너 사람이라도, 또는 5, 6십 명이라도 하나님은 그 전체를 뭐로 본다? 하나로 보는 겁니다. 두세 사람이 있는데, 세 사람이 여기 있는데 예수님이 합세하면 여기 총 몇 명 됩니까? 네 명이 되잖아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섯 명이 있는데 예수님 하나 더 추가되니까 여섯 명 되는 것이 아니고, 천명이 오든 만명이 오든 두세 사람이 오든 그걸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로 보는 방법은? 고급호텔에서 음식이 나올 때 쟁반이 그냥 쟁반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음식이 식거나 먼지 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서 쟁반을 덮는 동그란 통이 있지요. 투구같이 생긴 통.

그 통이 쟁반 위에 여러 음식을 담았다 할지라도, 두세 가지 요리라도 덮는 뚜껑이 하나가 되면 그 안에 폭 덮이겠지요. 하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한 분, 한 사람을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한 몸으로 덮게 하는 겁니다. 덮어버리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게 한 곳이 돼요. 참 어려워지지요. 진짜 어렵게 하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있으면 이것은 사람 숫자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장소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두세 사람이니까 사람이 몇 명이 모이나,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을 쟁반위에 있는 음식 덮개로 덮어버리면 그곳이 이 현실에는 없는 특이한 한 곳이 돼요. 그러면 그 한곳이라는 장소는 지상에 있는 어느 장소가 아니에요. 특이한 장소에요.

이것은 주님께서 덮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이상한 장소에요. 장소 위의 장소, 또는 초월적장소가 되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장소는 이렇게 탁자가 있듯이 눈에 보이지요. 그런데 이 장소를 넘어선 초월적 장소에는 눈에 보이는 장소가 아니고, “눈에 보이니까 이곳이 여기에 있네.”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시느냐로 표현하는 거예요. 주님이 계신 곳이 여러 곳이 아니고 한 곳이 되는 겁니다.

이래가지고 이해되면 그것은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거예요.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은행(bank)개념을 사용할게요. 은행개념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골로새서 3장 3절이요. 먼저 찾으신 분이 읽어볼까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나님 안에, 그 다음에 뭐지요? 감취어졌지요. 은행입니다. 은행금고, 그냥 은행이라고 합시다. 은행에는 고객 돈을 다 넣어놨어요. 그렇다면 내가 만약에 미국에 있는데, 뉴욕에 있는데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 은행은 한국에 있다. 그러면 돈 찾으러 한국에 가야 됩니까? 은행은 한국에 있더라도 전화 한통이면 뉴욕지점에서 돈을 빼낼 수가 있지요.

장소가 어디입니까? 나는 뉴욕에 있지만 내 돈이 있는 곳은 어디지요? 한국이지요. 한 곳이죠 한곳. 내 생명은 어디지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내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뉴욕에서 죽었고 그 죽은 놈이 왜 있느냐? 은행에서 계속 생명이 공급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렇게 말을 해도 너무 터무니없는 말처럼 느껴져서 이게 믿기지 않을 정도에요.

나보고 탓하지 마세요. 골로새서 3장 3절 보고 탓하세요. 우리의 한 곳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곳이에요. 내가 이 지점에 있다고 이게 내 곳이 아니에요. 곳이 달라요. 장소가 두 개입니다. 그걸 중복현실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강의할 때 중복현실이라고 했거든요. 현실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있거든요.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현실로 소속될 수 없는, 소속될 수는 없지만 포함이 되는……, 진짜 어려운 이야기에요. 속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네요. 속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것을 포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인간에게 그 손에 잡히지는 않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속했다, 포함했다. 그 용어는 너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제가 그냥 쉬운 쪽으로 할 테니 따라와 주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현실 속에 속하지 않는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되고 더 쉽게 해서 한 곳이 있어요. 한 곳, 은행이 두 개의 은행이 아니고 단 하나의 은행이라고요. 다시 마태복음 18장을 봅시다. 18장 1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라고 되어 있지요.

은행의 개념 잊지 마세요. 은행개념 생각하세요. 뉴욕의 지점 단말기에서 돈 액수를 치면 한국의 은행의 내 잔고에서 미국 뉴욕까지 돈이 보내진다니까요. 신라시대, 고려시대, 대한민국의 삼국시대는 이걸 못 믿었어요. 전산체제가 안되어서. 대한민국 조선시대는요. 사람이 한양에 있으면 한양에 있고 제주도에 있으면 제주도에 있었어요.

두 사람의 곳이 따로 있어요. 두세 사람이 한 곳에 있다는 것이 성립이 돼요 안돼요? 안 돼요. 옛날에는. 지금도 성립이 안 되지만 같은 은행의 고객이라는 점은 성립이 돼요, 안돼요? 되잖아요. 이걸 ‘믿습니다.’ 해야 됩니까? 내게 준 성령이 집사님에게 준 성령과 동일하게 한 곳에서 왔다는 것이 믿어지잖아요. 왜? 뱅크. 은행개념이니까.

오늘 강의에서 첫 번째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뭐냐? 모든 내 존재의 개념은 무슨 개념이다? 뱅크, 은행개념이에요. 제 이야기 같으면 저를 욕하세요. 하지만 이것은 골로새서 3장의 이야기니까. 골로새서 3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두 개의 현실가운데서 어디서 죽었고? 땅에서 죽었고요.

땅에서 죽었다니까 ‘왜 죽었어? 이렇게 숨 쉬고 있는데?’ 아니에요. 늙어죽어요. 조금씩 죽어요. 어제보다 우리는 이만큼 죽음에 가까이 왔고 죽음이 우리를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겨서 기어이 죽게 만들기 때문에 죽게 된다는 말은 이미 죽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성경에서. ‘아직 살았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그 때 죽는다면 살았더라도 이미 죽음 쪽으로 가기 때문에 죽은 사물로 보는 거예요.

그걸 아담은 흙이라고 봤잖아요. 성경적 개념을 가져야 돼요. 일반개념 말고. 온천에 가면 죽을 사람이 온천에 가는 거예요. 실컷 헤엄쳐야 되지요. 죽을 거니까. 맛있는 것을 먹으면 살려고 먹는 것이 아니고 죽을 인간이 맛있는 것을 먹는 거예요. 맛탕을 먹는 거예요. 왜? 곧 죽을 거 맛탕 먹지 뭐. 고구마맛탕. 애 키우세요. 왜? 살고자? 죽기 전에 애 키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라는 지점, 그 나라는 지점에서 무엇이 살아나느냐 하면, 골로새서 3장 3절이 얼굴을 내밀어요. 나는 죽었고, 내 생명은 눈에 보이는 여기 있지 않고 다른 한곳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는 겁니다.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교체를 해요. 죽일 것은 죽이되 생명은……,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고. 교체작업 하는 거예요.

들어보면 이게 진짜 어렵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죽어가는 우리를, 현실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는 거예요. 은행개념 이해하셨지요? 은행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성도는 한 곳에, 쟁반의 뚜껑 안에 주님의 자기성도는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우리는 죽는다. 끝났네.’ 그러면 이야기할 것 더 뭐있습니까? 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모이고 왜 그런가? 그게 뭐냐? 환승센터에요. 환승센터 알지요? 한 곳에서 출입이 가능한 것, ‘들어가고 나오고’가 가능해요. 환승센터, 타는 것도 가능하고 내리는 것도 가능한 곳. 그리고 차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로 갈아탈 수 있는 곳. 이게 뭔 뜻이냐?

요한복음 17장 14절, 15절, 여러분 피곤할까 싶어 제가 대신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지요. 자 뱅크, 은행 이야기해 봅시다. 은행 이야기에서 주님은 한 곳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냐 하면, ‘주님이 빨리 데려가시든지’ 그러면 이야기 끝났네요.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네요. ‘빨리 데려가시면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제가 그게 아니고 환승센터라고 했잖아요. 환승센터가 뭐냐?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어요. 할 일 끝난 사람들은 한 곳에, 천국에 갈 것이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뭐합니까?

이미 죽었고 생명이 하늘에 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할 일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할 일이 있는데 그 할 일이 뭐냐?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그 사실을 증거하는 그 일을 이 지상에서 기도라는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모여서 증거해야 되는 겁니다. 그걸 저는 환승센터라 하는 겁니다.

떠나야 될 사람은 떠나되 안 떠나야 될 사람은 이 지상에서 하늘과 연결된 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주의 하시는 일을 계속 해 나가야 된다는 그 말이에요. 그러면 왜 그걸 환승센터라고 했는가? 환승센터라 하는 것은 은행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되거든요. 환승센터를 통과하게 되면 하늘의 은행에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하늘의 은행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그걸 통해서 지상에 사명을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나서 또 일을 해야 되거든요. 그 출입구가 환승센터라고 보시면 돼요.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고 일할 사람은 나오고. 그러면 그 출입구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 신분확인 작업 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신분 세탁할 때 내 이름으로 하게 되면 이것은 하늘나라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들어가요.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지요. 그런데 우리 이름은 몇 개입니까? 다섯 명 같으면 다섯 개 열 명 같으면 열 개가 되겠지요. 그 10을 뭐로 바꿔야 돼요? 1로 바꿔야 되겠지요. 줄이는 것이 아니에요. 10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1과 10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뉴욕의 은행지점에서 한국 본사의 돈을 인출하듯이 주의 이름으로 돈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그 돈을 받을 때 주의 이름으로 그 돈을 받으면 주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에 내 이름을 위해서 쓰라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해서 써야 되겠지요. 그냥 데려가면 되는데 왜 안 데려가느냐?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이란, 주님의 그 세계가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알려줄 때, 일할 때 ‘내 이름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주께서 받은 힘으로 일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모인 사람들은 특징이 뭐냐? 각자의 일은 달라도, 모습은 달라도 전부 다 하나같이 하나님나라의 은행을 증거하는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세 번째는 뭐냐? 그렇다면 그렇게 일하는 사람과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교회에서 사람들 모아놓고 “쭈여~” 주의 이름을 불러놓고 주님이 여기 있으니까 억지로 믿으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뭐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이 땅에서 죽었지요. 죽을 때 죽는 이유가 있어요. 왜 죽느냐? 선악적인 마인드, 선악적인 사고방식, 착하면 천당 가고 악하면 지옥 간다는 이 마인드 때문에 죽어요.

그 선악은요, 악마의 사고방식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하나님께서 내가 만든 인간이 아니라고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를 죽인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뭘 죽인다는 말이냐 하면, 선과 악의 마인드를 죽여 버려요. 선과 악의 마인드를 죽인다는 것은 윤리도덕을 죽이는 거예요.

윤리도덕을 죽여 버리면, 이미 하늘나라 생명을 받았으니까 선악과 말고 생명나무 과실이 있잖아요. 생명나무 체계가 각 사람마다 주의 이름으로 분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잘했나 못했나’가 되겠어요, 아니면 이것이 주의 은혜라고 알겠습니까? 주의 시킨 일이 될까요, 아니면 ‘잘했나, 못했나?’를 내가 따질까요?

주의 시킨 일이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주께서 이 지상에 함께 있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아까 한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진짜 주님이 함께 있는 모습인지 아니면 구라, 거짓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 어떻게 분별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지요?

그들 둘이든 셋이든 다섯이든 모일 때 그들이 내 뱉는 것이 선과 악을 내보이면 그것은 가짜고,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가 모여 버리면 그것은 진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왜 하게 하셨습니까?”라고 한다면 “나는 이 지상에서 죄로 죽고 내 생명은 주님생명에 의해서 살았습니다.”를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간에 그 행동을 통해서 내가 이미 죽었고, 죽었는데 그냥 죽었다 하면 안 되지요. “선과 악을 따지기 때문에 죽은 자고, 선과 악에 관계없이 그냥 은혜로 공짜로 주께서 생명을, 뉴욕의 지점에 한국에서 공짜로 돈을 보내주듯이, 생명을 공급해주셔서 그 생명으로 삽니다.”를 증거하게 되면 그것은 주와 함께 있는 모임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주여,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저 구원받습니까?” 나온다면 그 자체가 자기의 선행으로 느껴지지요. 선행으로 느껴지거나 악행으로 느껴지게 되면 이것은 백프로 성령의 일도 아니고 주의 일도 아닌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주와 함께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정말 터무니없이 들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연출할 수가 없어요. 없는데 이상하게 모여서 이야기하다보면,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벌써 두 사람이지요. 그런데 또 한사람이 있어요.

제가 묻는 것은 ‘누가 그렇게 두 사람 세 사람을 모이게 했는가?’에요. 이미 그들 중에 쟁반위의 뚜껑을 덮듯이 주께서 하나이기 때문에 만나도 형제인 것을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생각하고 내뱉는 고백이 특이하기 때문에. 자기 잘난 척을 안 하거든요. 특이하고 이상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거저주시는 십자가의 공로만 이야기하니까 그 자체가 이미 하나가 되지요.

그러면 세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 하나 더 보태서 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체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은 지체가 되는 거지요. 바로 그 이야기를 마태복음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그 당시 사람들과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들은 ‘아, 교회라는 것은 주께서 친히 만드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은행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가 깨닫게 해주시고, 그 은행에서 오늘도 영생을 분배받아서 우리의 윤리도덕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영생을 가지고 형제로 가족이 되어서 기뻐하니 감사합니다. 이 특이한 사실을 통해서 또 하나의 천국이 있음을 남에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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