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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9 11:56:33 조회 : 591         
2020제주특강 요한계시록 20091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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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96) 20-09-23 12:34 
20200917a 제주특강 : 요한계시록-사라질 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요한계시록 하겠습니다. 네 시간에 걸쳐서 할 예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특이한 점은 기존의 역사가 그대로 있는 바탕 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덮쳐버렸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돼요. 한 마디로 하면, “영문도 모르게” 영문도 모른 채 성도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최곱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것에 휩쓸려나갈 때 계시라는 홍수에 말려들어가는 게 돼요. 매 삶이 영문도 몰라야 돼요. 사실은 영문도 모르고 살아야 됩니다.

영문도 모른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같은 말로 해석불가, 더 심하게 말해서 해석포기. 나라는 인생을 내가 해석하는 걸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걸 고상하게 말해서 외부적인 상황이에요. 외부적 상황은 어떤 통찰에 의하면 덮침을 당하는 것. 같은 말로 ‘영문도 모르게’가 덮침을 당하는 거고, 이건 해석불가하고. 불가하면 해석을 해야지, 그러잖아요. 그러면 안 되고 해석을 포기해야 되고 외부적 상황이 돼야 되고요.

그러면 이 반대말은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모른다고 친다면 이게 없다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생각하겠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이겁니다.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있다.” 왜 인생이 힘들고 불행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있고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자꾸 내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 이렇게 되고 싶어. 난 이랬으면 좋겠어.” 자꾸 이런 게 생겨나는 거예요.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있어요. 내가 요구하는 바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계속해서 발생이 됩니다. 내가 어쩔 수 없어요. 내가 매일같이 요구하는 바가 어쩔 수 없지요.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내가 여기 있고 내 안에 발생하는 것과 무엇과의 겹침이냐 하면, 영문도 모르는 것과의 대비가 되는 거죠. 이 두 겹침을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현실상황이에요. 성도는 영문을 모르는 게 있고, 성도 아닌 사람은 이것밖에 없어요. 내 안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데 뭔가 자꾸 요구하는 바가 발생되는 거예요. 나를 굉장히 힘들게 해요. 인생이란 것은.

내가 요구하는 바가 있으니까 본인에게 발생된 것, 자기로부터 출발했으니까 어떡하든 우리 운명은 발생된 것과 엮이고 싶지 않더라도 엮여야 돼요. 발생된 게 결핍이거든요. 모자람이에요. 요구란 게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욕구, 더 나가면 욕망. 욕구, 욕망, 요구란 게 결국 뭐냐 하면, 모자람이 자꾸 새롭게 생산되고 있다.

이게 남의 일로 여기면 편하겠는데 내 안에서 발생되니까 내가 도망칠 수가 없어요. 내 요구에 대해서 내 욕구에 대해서 내가 도망칠 수 없어요. 이민 가도 안 돼요. 유럽에 놀러가도 안 돼요. 유럽에 놀러가도 집에 가스 불 걱정될 수 있어요. 애 놔두고 멀리 와도 이 시간 애가 뭐하는지 걱정될 수 가 있지요.

나는 나 자신을 기존의 나로부터 도피하고 싶은데 요구하는 게 내 안에 발생되기 때문에 어딜 도망쳐도 꼭꼭 숨어도 요구하는 바가 그 현장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만족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계속 결핍이 일어나는 거예요. 모자람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너, 이것 모자라잖아. 이것마저 채워야 행복한 거야. 인생의 숙제야.” 자꾸 무거운 짐, 숙제를 계속 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어떤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들, 지식들, 공부한 것, 새로운 발생 앞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왜? 계속 결핍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산해내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히 철저하게 방어를 한다할지라도 그것은 새로운 발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죠. 적이 밖에 있으면 우리가 도망치거나 대처하면 되는데 내 적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내 안에 있다면 그것도 기존에 나를 무시하고 새로운 숙제와 요구를 나한테 요청한다면 그 숙제 앞에서 우리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어떻게 이걸 해소하느냐, 사도 요한에게 어떻게 해소하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나’ 나가 있기 때문에 요구가 생기고 그게 발생되고 하잖아요. 이 나를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이걸 없애버립니다. 나를 없애버려요.

전에 썼던 [생명의 신호] 26페이지에 보면 동그라미 두 개가 있어요. 여기에 보면 앞에 동그라미 하나는 ‘주체역사’ 뒤에는 ‘환상’이라고 돼있거든요. 이건 여러분들이 아시니까 지우겠습니다. 영문도 모르게, 해석불가. 해석불가하면 해석할 필요 없으니까 해석포기, 외부적 상황, 덮침을 당하여. 이런 개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날 따라오는 것, 계속해서 어딜 가도 따라붙어서 나에게 짐을 지우고 개편을 유발시키는 그러한 나,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는 이 점을 성도에게 어떻게 해소하는가? 이렇게 해소하게 돼있어요. 주체역사라고 해놓고 뒤에 실선으로 해서 이걸 환상이라고 한 겁니다.

요한계시록 첫째 시간에 제일 먼저 중요한 것에 도달했어요. 그게 환상이죠. 역사라 했는데 앞에 주체가 있지요. 역사면 역사지 앞에 주체가 붙느냐 하면, 역사라는 것은 나의 해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먼저 있는 이상은 필히 역사관이 성립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그냥 역사가 아리고 주체역사에요.

그러면 내가 먼저 있고 역사 있으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역사가 또 있는 거예요. 같은가? 같지 않습니다. 왜 같지 않느냐 하면 사람은 역사 속에 세상을 보는 해석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아요. 그래서 그걸 무슨 역사냐? 주체역사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픔이 있는 사람과 아픔이 없는 사람과의 역사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달라요.

어떤 고색창연한 담쟁이넝쿨이 있는 옛날 건물 근처에 살던 아픔이 있는 사람이 그 건물을 십오 년 만에 만난 것과 그 건물 앞을 그냥 지나가는 사람과는 역사관이 달라요. 갑자기 그 건물 보게 되면 과거에 아팠던 것이 한꺼번에 떠오르지요. 프로스트가 지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면 마들렌이라는 흔한 프랑스과자를 먹는 순간 그 냄새와 어릴 때 자기가 살던 동네에 등장인물들 기억나고 확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로 자기가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주체역사가 되고 타인은 그 주체역사에 관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관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환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환상이란 게 없어요. 살아온 그것이 오직 이것뿐이에요. 이게 전부에요. 내가 살아온 내 해석한 역사가 자기의 유일한 현실이 되는 겁니다. 다른 현실은 없어요. 물론 일방적이지만. 유일한 현실입니다. 이게 유일한 현실이라면 다른 현실은 없겠지요.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는 현실의 전부입니다. 전부란 말은 추가적인 현실은 남아있지 않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경험한 그 현실이 유일한 현실이고 다른 현실은 없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 땅에 임진왜란에 있었다, 합시다. 그러면 오늘날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현실이냐고 물어요. 우리는 이렇게 해요. 현실에 넣어줄게, 이렇게 돼요. 현실에 넣어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내가 방금 들었으니까 또는 내가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그것은 현실에 넣어주되, 결국 넣어준다는 말은 뭐냐? 내가 이순신은 아니지만 나의 무슨 역사? 나의 주체역사를 이루는데 일부로 넣어줄게, 라고 돼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는 환상일까요, 현실일까요? 현실이죠. 왜냐하면 내 주체역사에 내가 결정해서 내가 넣어줬으니까. 요새 안중근이 유명한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환상일까요, 실제 현실일까요? 현실이죠.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내 현실에 넣어주는 거예요.

주체역사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들었던 내가 공부하고 여러 가지 있잖아요. 시즈가 어떠니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있잖아요. 그런 걸 다 현재 나를 구성하는 보따리로서 넣어주는 거예요. 이건 환상이 아니고 현실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넣어주고 말고를 누가 결정한단 말입니까?

그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의 보조품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기에 그런 현실도 현실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중요한 의미는 뭡니까? 내가 여기 있다가 바로 현실의 핵심이 되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그걸 주체역사라 하는 거예요. 모든 역사는 주체역사라니까요.

자, 천국이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현실입니까, 현실 아닙니까? 현실이요. 왜냐? 예수 믿으니까 죽어서 간다는 천국이 현실이죠.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간다. 그게 현실이죠. 왜? 성경에서 누가복음 16장에 봤으니까. 봤지만 그 현실은 누굴 위한 현실이에요? 주체역사, 내가 죽고 난 뒤에 갈 세계 현실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 외에 다른 천국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왜? 내가 구성한 현실만이 유일하니까. 이 말 이해 못하면 오늘 강의 못해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유일하니까요.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있다고, 내가 있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 안중근, 미국독립선언, 예수님, 천국, 전부 다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있다, 만이 나에게 유일한 현실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다, 끝. 그거에요. 체험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니까, 내가 느끼지 않는 것은 전부 다 추상이니까 다 배제하고 오직 나는 추상이고 뭐고 다 싫고 현실만 나는 믿습니다, 라고 우리는 매일같이 다짐에 다짐을 하는 거예요. 현실만 믿습니다.

결국은 이 그림에서 환상은 뒤에 가리지요. 주체역사 있고 환상은 뒤에 가리는데 뒤쪽에 있는 환상을 우리는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왜? 환상은 없으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만 독했다는 사람이 있다는데 만 독을 해도 그 사람에게 요한계시록의 세계는 없고요, 내가 아는 요한계시록만 있을 뿐이에요. 결국 이 사람은 남의 현실과 자기 현실이 다르게 되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무슨 현실을 바꾸느냐 하면 주체역사를 없다고 여기는 환상이 와서 바꿔버립니다. 주체역사를 주님의 역사로 바꿔버려요. 아까 조금 전에 누가 있던 자리에요? 내가 있던 자리가 주님의 역사로 바꿔버리죠. 그러면 나는 어디 갔습니까? 나는 없는 거예요. 내가 여기 없는 겁니다.

내가 없으니까 나의 현실도 내가 있어야 현실이 있는데 내가 아는 현실은 뭐가 되느냐 하면 환상이 돼요. 환상은 허망함이 돼요. 쉽게 말해서 거짓이 되고 진실이 아닌 게 되고 가짜가 되고 마치 허망한 꿈같은 게 돼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내가 살아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냐고 하는데 당신 나이가 지금 99.99세로 내일모레 죽는다고 생각해보자.

19일에 만약에 죽는다면 9월 20일에 어디 있습니까? 20일에 내가 있어요, 없어요? 19일에 죽는다면 내가 없지요. 그때는 죽었으니까 없을 것 아닙니까. 없다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는 뜨고 지고 달은 하늘에 별은 빛나고 제주도는 그대로 있고, 이것 누구의 현실입니까, 나는 없다면? 주님의 현실이죠. 그동안 나의 현실이 주님의 현실을 철저하게 가린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뭐냐 하면, 십자가 이후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다루기, 이미 너는 나와 함께 네가 아는 현실을 끝냈고 마감했고 주님과 함께 있는 현실의 입장에서 옛날에 살던 너 같은 인간들이 집결된 그 세계에 다시 한 번 우리로 하여금 그걸 보게 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홀로 있지요. 홀로 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이미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 관계에서 홀로 남은 사람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뜻이고요, 아무도 찾지 않으면 이 인간세계에서 이미 빛이 끊어져버린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존재입니다.

그 사라져버린 존재의 표본으로 모델로 견본으로 사도 요한을 외로움 속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이미 살아 있음에도 사실은 죽은 자로 간주해서 집어넣는 겁니다. 이 세상과 별개의 인물로 사도 요한을 딱 지목한 거예요. 네가 이 세상에 있더라도 너는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별개의 인물로 그러한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겁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영문도 모르는 내용이에요. 영문을 안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해석 가능자, 해석 주체가가 누굽니까? 해석을 내가 하죠.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모든 의미가. 그런데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면 해석에서 안에 뭐가 생겨납니까? 계속해서 결핍이, 내가 해석해놓으면 또 결핍이 올라오고, 내가 해석해놓으면 또 욕구가 올라오고.

그래서 네가 너다울 수 있겠어,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못 살게 구는 거예요. 시어머니 죽으면 시집살이 편하겠다? 시어머니보다 더 독한, 내가 나한테 더 독한 시어머니에요. 시어머니야 죽거나 떨어져 살면 되지만 나는 유럽에 가도 미국 가도 북극에 가도 도대체 나를 놔주질 않아. 미치겠어. 새벽 세 시에도 안 놔주질 않고 건강해도 몸 아파도 도대체 내가 나를 놔주질 않아요. 계속 닦달해요.

지난 번 행동은 너답지 못했잖아. 맨날 너답지 못했데. 아이고, 칠칠맞게. 손 씻으면서 바지 다 적셔놓고. 칠칠맞게 행동하는 것 봐, 이런 식으로 남이 날 지적하기 전에 한 시도 나는 나한테 눈길을 뗀 적이 없어요. 늘 관리대상으로 삼고 감시를 하지요. 게슈타포도 이런 게슈타포가 없고요. 진짜 아이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로마병정보다 더 심하게 우리가 행동 하나 숨 쉬는 것까지 전부 다 간섭하고 간여합니다. 살아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그것이 바로 환상이다. 너는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왜냐? 네가 보는 네 시선만 아느냐?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보는 시선은 왜 네가 모르느냐? 그것은 이미 너는 죽어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죽은 게 돼요. 이걸 달리 표현하게 되면 내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안 나오게 되면 약속이 안 나오면 그거는 이미 죽은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세상이 그를 찾지 않고 그도 세상을 찾지 아니하면 있어도 그는 죽은 거예요. 마찬가지로 천국 나라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 같으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천국 바깥은 제대로 죽음이죠. 지옥이죠. 죽은 자의 세계, 요한계시록에 20장에 의하면 둘째 사망에 해당되는 사람, 둘째 사망이라 했는데 ‘둘째’를 빼버리면 그냥 사망의 세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우리가 대하는 태도는 내가 이 땅에 태어나는 것도 영문도 몰랐고, 손자가 돌을 맞이했지만 본인은 영문도 모르고 잔치를 받는 거예요. 영문도 모르고 어느 것 하나 쥐라고 강요받고 하지요. 본인은 영문도 몰라요. 주위에서 같이 죽을 자들끼리 으샤으샤해서 하루하루 그렇게 해서 지금껏 오십 년, 육십 년 살아온 거예요.

이건 내 건 없고 주위의 시선들의 따갑게 그걸 우리한테 요청했어. 우린 거기에 맞춰준다고 피곤해 죽겠어요. 젊을 땐 맞춰주지요. 몸 아프면 몸 아프다고 닦달 내네. 주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누구 장단에 행진을 해왔습니까? 세상은 뒤에서 앞에서 계속 이야기합니다. 행~진, 행~진하는데 도대체 누가 그 노랠 불러요? 행~진, 행~진하는 거야, 이런다고요. 도대체 어디로부터 어디로 행진하는 데요? 하는 거야, 뭐 어디로 가는 데? 나도 날고 싶다는 거예요. 세상을 쭈그려 앉아있지 말고 나는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거예요. 날개 타고 비상하고 싶다는. 세상에 내가 같이 휩싸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휩싸이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따로 떼어놓지요. 네가 죽은 존재로써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라. 네가 믿는 주님이 세상을 포괄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전개시키는지 네가 보라. 그 모든 것은 바로 쉽게 말해서 나, 예수님의 바디, 배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배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세상=예수님 몸의 속성’이 되는 겁니다. 세상 또는 현실은 몸의 속성이에요.

예수님의 몸에는 어떤 속성이 있느냐 하면,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율법에는 속성이 두 가지 있지요. 뭡니까? 하나는 복, 하나는 저주. 이것은 바로 율법이 인물화된 것이 누구죠? 예수님. 율법이 언약이니까 예수님에게서 뭐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복을 줄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저주 내리시는 권한도 가지시고. 예수님은 복의 나랄 만들 권한도 있고 저주의 나랄 만들 권한도 있고. 그런데 저주라 하는 것은 복의 나라의 그림자로서 복의 나라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주의 나라가 있는 거예요. 저주받으면 복이 임한 줄 알아라, 이 말이에요.

요한계시록 한 구절, 한 구절 하면 시간관계상 못하기 때문에 포괄적인 걸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2장 봅시다. 2장 19절, 누가 읽어볼까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피와 불과 연기로다. 피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포도주 틀을 밟아버리면 붉은 포도주즙이 튀어나오지요. 진노하고 있다는 징조를 남기고, 불과 연기도 마찬가지지요.

이런 걸 생각해보세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내 생각 말고 현상 생각하지 말고 성경만 생각합시다. 노아 때 전부 다 물 심판됐지요. 우리 이 세상은 노아 이후의 세계입니다. 노아 이후의 세계라는 것은 세상은 안 달라졌어요. 그대로 악합니다. 날 때부터 악하니까. 창세기 8장에 나오지요. 악한 데 굉장히 평온해보이지요. 평화롭게 보이지요.

이것은 세상에 부합된 평온이 아니고 악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하나님께서 평화와 평온의 차단막, 더울 때 치는 막이 있지요. 천막, 장막 같은 것을 덮어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선인과 악인에게 묻지도 따지지 않고 그들에게 햇빛과 공기와 단비를 주시지요. 이게 창세기 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이니까.

이러니까 이건 은혜의 담요가 덮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관계없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상관없이 은혜의 담요가 덮였는데 이제 마지막이 되면 이걸 살짝 걷어냅니다. 노아 이후에는 은혜의 담요에 덮여있다는 그 증거로 무지개를 줬지요. 제가 어느 설교나 강의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이 무지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름다워요. 더러움과 대비가 되는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담요를 세상에 덮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아까 배웠으니까 복습해봅시다. 세상의 현실이란 것은, 세상이란 것은 모든 이해가 누구 중심으로 나와요? 내 중심이죠. 나에서 나오는 그 의미와 다른 의미는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덮었다는 것이 불신자한테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은혜란 선물이니까 이거는 외부인이 필요한 거예요.

은혜는 선물이니까 내가 한 행동의 결과 말고 다른 분의 초월적인 분의 프로젝트, 계획으로 말미암아 요청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그것을 포착할 능력이 나한테 있느냐는 겁니다.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나의 존재가 방해하는 거예요. 나의 소경됨이 바른 현실관을 다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혜택은 입으면서도 바보 같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뭐 철학박사, 물리학박사도 마찬가지에요. 아무것도 몰라요. 바보 등신이에요.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은 등신들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지혜의 영이라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에. 지혜의 영을 주사 눈을 떠서. 그냥 하면 안 돼. 눈을 떠야 돼요. 그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다메섹에서 누굴 만납니까? 아나니아를 만나지요. 그때 뭔가 비늘 같은 게 떨어지는 게 있지요. 그때 사울은 눈이 장님이 되었습니다. 세례 받고 난 뒤에서 눈을 떴잖아요. 그러면 그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거예요.

누가 방해했어요? 내가 나의 존재가 방해했어요. 죽고 나면 알겠지요. 인생 잘못 살았다. 지옥 가면 알겠지요. 물이 에비앙 생수가 이렇게 비싸게 친 것을, 이렇게 내가 하찮게 본 것을 그제야 알겠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가 지옥 갔을 때 부자가 얼마나 속으로 애가 타고 답답했는지. 그때 나온 노래가 <애가 타>하는. 왜 애가 타느냐 하면 동생이 다섯 명이었어요. 형제가 다섯 명 있다고.

아까 공부한 것 봅시다. 인간은 이 땅에 관계가 없으면 죽은 존재지요. 지는 죽으려고 하는데 넷째 동생이 와서, 형님, 뭐하고 있습니까, 하면 갑자기 못 죽어요. 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청산되지 않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지요. “아무것도 안 한다.” “그럼 연탄불은?” “밤 구워먹으려고.” “창에 테이프는 왜 붙여놨습니까?” “그건 바람에 연탄불 꺼질까봐.”

이런 식으로 그냥 자식 때문에 부모 때문에 홀로 같으면 죽을 수 있는데 엮여진 것 때문에 나는 죽은 자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에 새로운 세계에 나는 못 죽는 인간, 죽고 싶어도 안 죽는 인간이 되고 살아 있는 인간이 됐어요. 같이 바보로 살아 있는 거죠, 가짜로. 형제 다섯이 있는 거예요. 걱정이 안 될 수 없지요. 그래서 거지 나사로 살려 보내면 행여나 거지 나사로 보고, “놀랍다, 기적이다.” 대한예수교감리교에 보면 기적교회 있어요. 아까 오다가 봤어요.

기적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믿지 않겠느냐. 기적을 보고 믿으면 기적이라 하는 것은, 현재 나는 다치지 않고 나는 소실되지 않고 현재 나 그대로 건사하고 유지되고 있고 플러스알파 놀라운 걸 추가하는 걸 사람들은 기적이라 해요. 그러나 진정한 기적은 뭐냐 하면, 이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 이 자체가 환상이고 이게 죽은 세상에나 통용되는 가짜라는 걸 아는 눈 뜸이 기적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눈 뜨는 게 기적이지요.

내가 있으면 시간과 공간이 나 위주로 연결돼서 시간과 공간을 감지하게 돼있어요. 오늘 며칠이고 내일 며칠이고 여기는 제주도고, 감지하는 이게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어요. 그런데 사도 요한 같이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내 시간과 내 공간이 없지요. 그러면 내 자리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아까 주체 자리에? 예수님이 주체에 들어왔으니까 예수님이 주신 시간, 예수님이 주신 공간인데 이 시간과 공간은 다 이루었다, 에요. ‘다 이루었다’를 증거하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다 이루었으니까 심심한데 이런 거나 만들고. 다 이루었잖아. 결핍 없이 만들어요. 하나하나가 결핍 없는 작품이에요. 하다가 손톱자국 나면 그것도 새로운 작품이에요. 뭐든 모자람이 없어. 내 인생에는 모자람이 없어요. 이 그대로가 주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부족할 이유가 없지요. 그걸로 교체가 되는 거예요.

사도 요한은 어떤 경우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 은혜라는 것이 노아언약 때는 물 심판 안 할게, 라는 정도의 은혜라면 이제는 사도 요한 시대의 은혜는 그냥 햇빛 주고 공기주는 정도가 아니고 모든 것이 마감 거기서 넘어버린, 이미 하늘나라에 속해버린 그 은혜 덩어리가 그대로 덮치는 거예요. 이미 죽어도 괜찮다는 것,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이제 더 이상 달라짐이 존재하지 않는 내 인생에서 달라짐이 없다.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이 육신은 점점 더 먼지가 되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이 작업조차 아름답다. 내가 죽는 것조차 아름다워요.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선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은혜의 두꺼운 천막을 요한계시록에서 무슨 은혜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용서의 은혜, 죄 씻음의 은혜.

그걸 요한계시록 7장 14절 봅시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흰 옷 입었다. 왜 옷이 흽니까? 자기 개인적인 역량을 투입해서 흰 게 아니고 유니폼이지요. 똑같이 희지요.

서둘러 흰색 되지 마세요. 서둘러 자기를 하얗게 세탁하려 하지 마세요, 인생을. 흰색 되는 그것도 탁한 흰색, 더러운 흰색이에요. 흰색이 질이 달라요. 나에게서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흰색이라고 주께선 간주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특히 예수 믿고 힘든 것은 서둘러 검은색에서 벗어나서 흰색 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보면 예수님의 피죠. 피 색깔은 무슨 색입니까? 붉은 색인데 옷은 그게 묻으니까 이게 표백이 되는지 붉은 색이 왔는데 옷이 하얗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내 인생으로 보지 않고 주님 자신의 티셔츠로 보는 거예요. 자신의 명품으로 보는 거예요. 심혈을 기울여서 주님이 스스로 입었던 옷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피 묻은 육신에 걸쳐버리는 자기 백성을 걸치듯이 움직이면 주님의 몸이 움직이고 우리는 거기에 덩달아 옷이란 이름으로 그냥 움직이는 거죠.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거죠.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이 옷 입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옷을 입었다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 우리가 예수님 옷 입은 게 성립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주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내용이 뭡니까, 물으면 이 은혜가 자기 용도가 끝났어요. 노아언약이 십자가로 다 이뤘잖아요. 이뤘으니까 이 은혜는 없어도 괜찮겠지요. 왜? 자기 백성은 다 건졌으니까. 은혜를 철거하니까 악함이 그대로 악함으로 노출되는 게 마땅하지요.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 19절에 보면 저주와 불심판과 그리고 모든 인간이 만든 것들은 다 태워지는 그 현상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가 왜 이러십니까, 너무 합니다, 이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입장이 안 되지요.

왜? 그동안 은혜로 겨우 덮어놓은 걸 거죽 데기를 치워버리니까 자기 본색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본색은 뭐냐 하면, 저주받아 마땅한 본색에다 주님의 언약으로 덧입혀진 그러한 모습, 그것을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 현실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한쪽은 피 씻음의 은혜를 받았고 흰옷 입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저쪽은 흰옷이 없지요. 하나님의 은혜의 장막이 벗겨졌으니까 그들의 실상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주체역사가 주님의 주체역사 되게 되면 그동안 가렸던 환상으로 여겼던 것이 환상이 이쪽이 들어와 버려요. 그 그림이 29페이지와 30페이지에 있는데 그걸 여기서 그려보겠습니다. 29페이지에 보면 역사가 있고 그 위에 동그라미로 환상이 있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는 환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으니까 환상이에요. 그냥 꿈이에요. 망상이죠.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망상, 또는 더 심하게 욕하면 광신도. 왜냐하면 광신도라고 그것을 결정짓는 해석하는 주체가 누굽니까? 나거든요. 내가 되기 때문에 광신도지요. 그래서 이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만 있고 요한계시록 같은 그런 내용은 다 헛된 거고 망상이다. 항상 그것부터 늘 출발을 그렇게 하세요. 첫 시작을. 괜히 믿습니다, 해봐야 내가 조작한 거니까 본인이 힘들어요. 본인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억지를 부린 게 된다고요. 오십 년 믿는 육십 년 믿든 복음 안지 사십오 년이 됐든 그것 다 잊어버리고 매일같이 잊어버리고 주님께선 항상 나밖에 없다부터 일이 시작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은혜의 경로가 살잖아요. 은혜가 와서 나에게 무슨 놀라운 일을 벌였는지 일방적인 은혜의 공로로 넘기려면 내가 서둘러서 흰색이 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나는 그냥 흰색이라고 우기는 검은색으로 사는. 이거는 빨래할 때 손빨래하고 그래도 안 되면 넣을 것 다 넣고 세제 넣고 해도 안 빠지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삶아 빨잖아요. 수건과 속옷을 부글부글 나올 때까지 삶아 빨듯이 백날 빨아도 그 흰색 안 나옵니다.

우린 아무리 자기 자신을 닦달내고 억지를 부리고 회개시키고 반성하고 나한테 발로 차고 해도 주께서 인정하는 흰색은 영원히 안 나와요. 주님께서 다녀가셔야 돼요. 다녀가시면 누가 욕을 하느냐? 내가 여기 있는데 주님의 요한계시록 봤잖아요. 우리는 요한계시록 그런 세상없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주도는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없어, 라고 반항들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실감이 나요.

왜 실감이 나느냐 하면 남이 예수님을 욕하는 게 아니고 구원받은 내가 예수님을 매일같이 욕하라고 세상을 더 살게 하는구나. 갈수록 나에 대한 집착이 몇 가지 복음 안다고 해서 떨어질 인간 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처음도 주께서 다룰 문제고 그 다음 날도 죽을 때까지 주께서 다뤄야 될 문제지 항상 잠시만 우리가 정신 차리자, 하면 남는 것은 바로 나만 달랑 남아있다는 이것만 확실해, 라는 쉽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이에요.

왜 그렇게 제가 자신 있게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 3장에 보면 일곱 교회 나오지요. 일곱 교회는 어디 있는가? 아까 배운 대로 하면 일곱 교회는 없어요. 일곱 교회 자체가 없습니다. 교회라는 어떤 예배당은 모르지만 교회라는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세계는 우린 없는 거예요. 눈에는 물론 안 보일뿐더러 그런 해석도 이 땅에서 용납을 하거나 안 하거나 있는데 용납 안 하고, 그게 아니라 아예 없어요. 요한계시록 성경의 세계는 없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라는 것은 세상이 핍박을 해줘야 나타나는 게 교회입니다. 핍박 없는 교회는 없어요. 핍박을 세상이 하느냐? 아니 교회가 교회를 핍박할 때 나타나는 거예요. 일곱 교회가. 그건 아니야. 네가 첫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봐라. 그러면 그게 사데 교회에요. 교회 자체 속에 있는 세상이 그 교회의 순수함을 공격할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교회라는 말을 끄집어낼 기회를 잡는 거예요.

현실은 네가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비로소 숨어있는 환상이란 이름의 현실이 나타난다. 주님, 왜 그렇게 됩니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예수님을 하늘로서 오신 분이 결코 아닌 것을 유대인들은 확신했지요. 유대인뿐만 아니고 헬라인 되는 본디오 빌라도도 확신했어요. 자기 마누라가 꿈자리가 사납다고 하지만 꿈자리 사나운 것과 재판이 무슨 관계있어요. 찝찝하다. 그러면 코로나 때문에 손 씻고 난 뒤에 결정해버리지요. 죽여라.

거기에 누가 합세했습니까? 그 당시 사람뿐만 아니고 현재 저와 여러분도 다 합세하는 거예요. 왜? 그 본디오 빌라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내가 해석해도 그게 옳은 결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란 인물 옆에 두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요리조리 앞뒤 돌아보고 아무리 봐도 절대로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은 아니에요.

왜냐?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그동안 내가 현실이라고 해석했던 모든 그런 수법과 기술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예수는 아니에요. 이거는 광신도에요. 그냥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 사태를 매일같이 반복함으로써 이 현실 속에서 주님의 현실을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듣고 어떤 분이 물을 수 있겠지요. 그러한 새로움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없으면 그 사람 신자 아니지요.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은 주님이 하셔야 되지 내가 흉내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모방도 오십 년 모방한다고 새로운 게 되는 게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한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지요. 양적 팽창은 질적 변화로 이어진다. 예수 오십 년 믿으면 새 사람 된다. 이런 주장이거든요. 이런 것 없어요.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성경공부 많이 해도 질적 변화는 이건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의 소관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사람들만 이 사실을 파악해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 열심히 요한계시록 달달 외우면 되겠지. 그러면 안 되지, 안 돼요. 결국은 그거에요. 서둘러 흰색 된 걸로 자족하고 끝내요. “그래, 나는 피로써 하얗게 되었어.” 그걸로 끝나지 나의 현실은 망상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96) 20-09-23 12:34 
20200917b 제주특강 : 요한계시록-사라질 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제목을 저는 ‘절망’이라고 그렇게 정해봤습니다. 절망 안 하기가 누구의 욕구냐 하면 나의 욕구에요. 누가 요구하느냐 하면 나는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나한테 요구하기 때문에. 사실은 괴물이죠. 세상이 누구 세상인데 지가 왜 절망을 안 해야 됩니까. 왜 우리는 절망 안 해야 된다는 그런 당위성을 도대체 누가 준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되기, 교회 돼야 돼, 라는 것이 절망 안 하기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지요. 절망 안 하기 위해서 교회가 돼야 된다. 거기에 대한 참고자료는 뭐냐? 성경에 풍부하다. 성경대로 말씀대로 살게 되면 우리는 절망에서 희망이 된다, 라는 짓거리를 누가 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했어요. 이미 이스라엘이 해왔단 말이죠.

십자가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절망 안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여기서 뭐가 유발된다? 십자가 사건 터진 거예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는 거예요. 나는 왜 절망 안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에 대한 해답을 우리 내부에서는 찾을 수가 발견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무조건 절망 안 해야 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예요. 우리는 속임을 당하는 대상으로서 나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교회를 누가 공격하느냐? 정답 미리 말씀드릴게요. 주님이 교회를 공격해요. 공격당해야 주님의 진 뜻, 진짜 의도가 세상이 공격당할 때는 주님의 의도 안 나타나요. 그러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공격당할 진짜 주님의 의도가 나타나요. 그게 요한계시록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3장에 빌라델비아 교회가 나오지요.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그라고 하면서 뭘 줄줄 달고 오시느냐 하면 주님이 하시는, 나는 이렇게 하시는 그이다. 자신에 대한 서술의 내용을 꽉꽉 채우는 기능들을 달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이런 서술을 갖다 붙이느냐 하면 교회를 공격하면서 비로소 교회에 가려진 진짜 교회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는 다 이루심의 내용으로 꽉꽉 채워져야 돼요. 여기 무화과과실은 꽉꽉 차있지요. 빈틈이 없지요. 무화과나무 과실 단면을 보여줘요. 단면을 잘라보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육신의 단면이에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라면 잘라보면 벌건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있단 말이죠.

그 십자가에서 가짜를 진짜로 바꾸어서 주의 나라의 백성 만들었거든요. 그 피로. 그러니까 하얀색으로 하얗게 되는 게 아니고 피로 붉은 피로 하얗게 되게 된 기능이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 계획은 그걸 그대로 그 일을 세상 끝 날까지 반복을 시키는 거예요. 그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주의 이름의 기능이다. 이렇게 지난 낮 설교에서 한 것처럼 주의 이름의 기능이에요.

유일하게 연결돼있는 이름.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을 하나님께 다 끊어졌지만 유일하게 연결된 것은 죽은 자를 되살리시는 하나님의 일관성, 언약의 일관성이에요. 언약의 일관성이 되려면 반드시 죽은 자가 돼야 되고 죽음 없는 부활은 없어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잖아요. 주님이 되려면 반드시 죽어야 돼요. 하나님 나라에 계신다고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죽어야 돼요. 죽음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죽을 때는 죽는 이유가 있어야 죽지 그냥 죽지 않아요. 죽는 이유가 뭡니까? 흔히 아는 죄기 때문이겠지요. 그럼 죄냐, 아니냐를 누가 결정하느냐? 언약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언약과 견줄 때 죄가 되는 거예요. 비교될 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주님이 언약 완성으로 미완료에 대해서 공격하게 되면 여기서 교회의 죄가 드러나겠지요. 죄가 드러나야 교회가 부활되는 겁니다. 또는 부활됨이 확인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원리를 작용시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 3장에 잔소리가 그렇게 많지요.

그러나 이걸 잔소리로 들으면 안 돼요. 이걸 잔소리로 이해하는 것은, 그래 주님 알았어. 제가 잘 하겠습니다. 좋은 교훈 주셨기 때문에 촛대 옳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고칠 것을 고치고 유지할 것은 유지하겠습니다.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라 했으니까 그 말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교회됨을 이제는 개선하고 회개하라 했으니까 네가 떨어진 사랑이 그걸 찾으라 했으니까 찾아서 주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교회로 거듭나겠습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가짜 교회에요.

뭐가 빠졌어요? 덜 죽었어. 온전히 죽어야 되거든요. 첫째 시간 제목이 뭐라 했던가요? 절망. 제대로 절망해야 돼요. 절망하는 이유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절망 안 하고 싶은데 왜 나는 절망하기 싫은데 그 이유를 우리가 모르고 있단 말이죠. 그게 절망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왜 그런지 도대체 나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자꾸 우리는 나로부터 시작하려고 해요. 절망 안 하는 나, 구원받는 나, 천국 가는 나, 하나님의 교회라고 인정받는 그래서 기분 좋은 나. 자꾸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 자체가 뭐에 대한 기피냐 하면 십자가 없이 혹시 구원되는 방법 없어요, 하는 악마적인 제안이 되는 겁니다. 이왕 선악과 따먹은 것, 이왕 따먹었잖아요. 따먹은 상태로 어떻게 천국 갈 수 없습니까, 라는 것이 악마가 집요하게 우리를 설득시키는 대목이에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니까 죽는 시늉을 하는 거예요. 충성을 하되 죽지는 않아요. 이 정도하면 죽음 가까이 어프로치 해보는 겁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진짜 죽으면 안 되니까. 왜? 몰라요. 진짜 죽으면 왜 안 되는지 모르는데 궁극적인 방법은 죽음의 근처까지 가보는 것. 이걸 문학에서는 영웅담화라 해요.

이 세상에 모든 민속의 설화들 이만 가지를 조사한 사람의 분석에 의하면 모든 설화 거의 대부분이 영웅담화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웅담화의 대표적인 것은 <춘향전>이죠. 영웅은 고난당하면서 비로소 영웅으로 나타난다. 춘향전 또는 <심청전> 풍덩 물에 빠지고 다시 건져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영웅담화에요. 시련 없는 곳에는 성공도 없다. 모든 아침드라마가 다 그래요. 사실 모든 드라마가 다 그래요. 한 번 다녀왔습니다. 어쩌라고?

모든 영웅담화 속에는 이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겠어요? 인간은 주님을 모르는데 유일하게 주님을 아는 존재가 있어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악마입니다. 먼저 한바탕했거든요. 하늘에서 한바탕 전쟁을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태어나서 살아가는 농사를 짓는 우리에게 쑥 하고 들어온 거죠. 하늘의 전쟁이 확전된 겁니다. 전쟁이 하늘에서 끝난 게 아니고 땅까지 번지면서 그 전쟁했던 두 개의 주체가 서로 싸운 거예요.

그걸 먼저 눈치 챈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이름은 거룩한 전쟁의 만군의 하나님이에요. 자기의 군사를 갖고 있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엘리사가 게하시한테 보여준 게 뭐였어요? 눈을 뜨니까 수만의 천군천사가 있었고 야곱이 얍복강 가기 전에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라는 엄청난 많은 숫자의 천사들이 필요했지요. 그게 영적 세계잖아요. 영적 세계는 전쟁하는 세계, 영의 세계.

에베소서 5장에도 나오지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다. 인간은 빠져라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네 운명에 대해서 네가 빠져라.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손쓸 수 없는 처지인 것을 알아라. 절망해도 주께서 절망을 주시고 희망을 가져도 주께서 주시지 네가 절망한다고 네가 낙담한다고 네 문제로 넘기는 것은 전형적인 악마의 수법이고 악마가 너를 그렇게 가둬놨다. 다른 아이디어를 준 적이 없어. 악마는 뭐냐?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해. 이거거든요.

악마란 말을 썼습니다만 아침에 눈 뜨면 우리의 사고방식이 그것부터 시작하잖아요. 따뜻한 커피부터 마시고 시작하는 거나 이 모든 문제는 오늘 하루는 내 손에 달렸다. 그것부터 시작해요.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절망으로 가면 안 돼. 뭐, 벌써 인생관이 정해졌어요. 절대로 절망스러운 일은 벌어져선 안 돼. 내가 단도리 할 거야. 내가 사전에 대비할 거야. 그것밖에 없거든요.

영적 싸움이 아니에요. 혈과 육의 싸움이에요. 우린 혈과 육의 싸움 외에 다른 싸움은 환상에 속합니다. 현실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미쳤지요. 사도 바울이 미쳤으니까 우린 아예 성경을 덮어버려요. 이 미친 이야기를 왜 듣느냐 이 말이죠. 성경을 보면서도 처음부터 성경 덮기를 원하면서 성경을 펼쳐요. 또 안 봤다간 하나님께서 벌줄까 싶어서 두 장 더 보고. 보면서 빨리 덮기를 원하고 있어. 빨리 덮고 드라마 봐야 되니까. 기도 시작하면 빨리 기도 끝내기를 원하는. 요령 생기면 유튜브 보면서 온갖 짓 다하고.

그게 기초가 뭐냐 하면, 영웅담화에요. 그 영웅의 끝을 우리는 왕이라 합니다. 전부 다 실제적이에요. 영웅담화는 전부 다 실제입니다. 실제들의 연합체, 주님께서 이걸 거짓 환상이라 보는 거죠. 그런 일이 안 일어났다가 아니라 해석 자체가 엉터리 해석이다. 네가 너를 해석한 자체가 잘못된 해석이라는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 다른 대안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날 때부터 아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다시 2, 3장 통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장 1절부터 보게 되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이 가라사대 다음에 반드시 뭔가 기능을 갖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또 2장 8절에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이게 전부 다 하나에 주님의 기능이죠, 이 기능은 망상 같은 이 세상에 가려진 거예요.

그러면 이 기능을 기능답게 하려면 그냥 나다. 이렇게 하지 않고 무지개 은혜를 들춰내듯이 우리의 실상을 주께서 들춰내는 거예요. 그러면 들춰낼 때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영웅이 되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수법들도 그게 가짜로 다 드러나겠지요. 참 좋은데 와서 좋은 시간에 이런 더러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런 자극적인 예를 들 수밖에 없어요. 지금 고민되는데 너무 지저분한 예를 돼서 고민 한 5초했습니다만 고민한다는 말은 실시한다는 뜻이거든요.

사람이 옛날 어릴 때 1950년대와 60년대 걸칠 때 이와 빈대가 많았어요. 집에서 엄마가 실로 쉐타 짜주면 겨울 내내 입습니다. 붉은 실이나 검은 실로 하면 때도 안 보여서 때가 세탁했는지 안 했는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겉은 모르는데 한 번 옷 벗는다고 거꾸로 뒤집으면 거기 실올에 뭐가 묻습니까? 이나 빈대가 묻지요. 참 지저분하지요.

그처럼 주님께서 벗겨버리는 거예요. 벗기면 온갖 영웅담화로 가득 차있는 내가 이 짓해서 천당 가려는 모든 빈대 같은 짓이 다 달라붙어있어요. 달라붙어야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결국 주께서 우리 성도를 아직도 이 땅에 육신으로 살려준 이유는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기 위해서 거기에 우리가 하나의 빈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려준 거예요.

주께서 강조하는 것은 가라사대, 이것 하나뿐이에요. 가라사대, 주께서 말씀하시되. 이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사라사대와 네가 우기는 것과 차이점을 보게 하는 겁니다. 차이점이 있어야 십자가에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를 또다시 매일같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라사대가 나왔으니까 왜 가라사대를 언급하느냐?

요한계시록 5장 봅시다. 3절에,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이 책의 내용과 이 세상에 있는 소위 움직이는 어떤 것도 책의 내용에 대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은 책의 내용에 의하면 버림받아야 돼요. 내침을 당해야 될 대상이에요. 그러나 사도 요한은 어느 쪽에 있느냐 하면 책 안에 있어요. 생명책 안에 있으니까.

책은 가라사대의 덩어리잖아요. 책의 모든 내용이 주님의 사라사대의 말씀하신 말씀의 덩어리에요. 언약 책이라 할 수 있는데 나중에 언약 책이 인격화, 인물화 되지만. 이사야 40장에도 나오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풀이고 그들의 한껏 영광이라고 우기는 것도 풀에 핀 꽃에 불과하지만 바람 불면 다 떨어지고 영원한 것은 말씀밖에 없다.

그러면 이 땅은 이거에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수시로 바람 부는 지평이다. 바람 부는 대지다. 싹쓸이 쓸어버리는 바람만 말씀에서 계속해서 풀어내는 거예요. 확 다 선풍기로 해서 우릴 다 날려 보내야 되는데. 말씀의 바람이 불게 되면 구십 살았다, 백 살 살았다 해도 나중에 뒤에 가면 그 사람 산 적 있었어? 언제 날아가 버렸어. 한낱 안개 같은 거니까요. 바람 불면 안개는 그 자리에 없어요.

말씀의 바람이 주님에서 불어대는 바람이 십자가의 완성에서 쏟아지는 그 바람이 한낱 울고불고 행복했다, 슬펐다, 짜증내고 울부짖던 낙망했다고 우겼던 우리의 우울증이다, 아니다 하는 그것도 아예 현장에서 없애버려요. 우울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없는데 무슨 우울증이 있어요, 그래. 우리는 하나의 빈대고 더러운 이 같은 존재다, 이 땅에. 십자가 때문에 생겨난 존재에요. 태어난 존재에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모든 말씀의 완성인 것을 증거하라고 같은 빈대지만 십자가에 붙어있는 빈대, 고귀한 빈대지요. 그것도 십사만사천. 빈대인데 피가 묻어있기 때문에 하얗게 돼버린 하얀 빈대?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꾸 우리를 영웅으로 화하기 만드는 그러한 더러운 괴물의 힘이 우리는 예속돼있고 거기에 만날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거든요.

바람이 늘 불어줘야 돼요.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대비시키는 겁니다. 누리끼리한 흰색 될래, 진짜 흰색, 흰색이 귀하냐, 누리끼리한 흰색을 원하느냐? 이것 비교시키는 거예요. 네가 노력해서 의인 될래, 아니면 그냥 피로 의인 될래? 그것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피로 의인 되는 것은 위에서 은혜를 주셔야 되고 누리끼리한 것은 이 땅에서 내가 애를 쓰고 공을 들이고 철저한 자기 관리가 돼야 누리끼리한 흰색처럼 남들에게 날조가 되죠. 자아날조지요. 만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에요. 자아를 날조하는.

[생명의 신호] 60페이지 보면 그림들 그려놨어요. 역사 놓고 그 다음에 환상,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환상은 우리한테 있어요, 없어요? 없으니까 환상이에요. 환상이 역사와 겹치니까 십자가가 여기에 겹친 게 십자가에요.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십자가가 객관적 역사로서 들어온 거예요. 주체역사 없는데 이상하게 낯선 십자가 사건이 들어와서 여기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한 이야기를 했어요. 뭐냐? 다 이루었다. 이 말은 내가 주체가 된 내 역사만 역사고 진짜 현실이고 네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너희는 유일한 현실로 여겼다. 너희는 끝났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 봅시다. 진도 안 나가는 것처럼 진도 팍팍 나가는 겁니다. 이건 중요하니까 8절과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여기 보게 되면 이 세상을 소돔과 애굽이라고 포괄적으로 단정을 짓는데 소돔과 애굽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이게 좋은 단어가 아니고 너흰 죽었어, 하는 그런 단어거든요. 너희들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관계 끊어졌어? 이미 죽은 자라는 것, 나중에 첫째 사망이라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첫째 사망이에요. 죽음이 태어나는 거예요. 내가 태어나는 게 아니고 죽음이 태어나서 죽음이 한 살 먹고, 두 살 먹고, 세 살 먹는 거예요. 내 외손자는 벌써 네 살 됐어요. 죽음이. 난 육십이 넘게 죽음에 있었고. 결국 죽게 되는 거죠. 웃음 대목에서 안 웃고 심각한데, 갑자기.

우리가 기능이 있어요. 주님과 연결돼있으면 우리 인생이 헛수고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기능에 우리는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저는 죽은 자 맞습니다, 하는 그 기능만 해대면 돼요. 우리는 나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은 너무나 이건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고 기뻐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옥 간 부자인데 천국 가서 지옥 간 부자를 납득을 하고 해석을 해내는 거예요. 동생 다섯 명인데 다 지옥 간다. 지옥으로 다 가거라, 이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거예요.

해석이 가능해요. 해석 가능,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나에 대해서 해석 가능한 거예요. 자, 다시 해석 가능한지 해보겠습니다. 나는 왜 절망 안 하고 싶은가? 그게 바로 악마의 속성이다. 해석이 가능한 거예요. 이건 내가 아니고 악마가 그렇게 세뇌를 준 거에요. 너는 지옥 가면 안 돼. 그러나 우리는 태어난 것은 내가 어떻게 잘 될까 태어난 게 아니고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이 세상 전체가 소돔이고 애굽이기 위해서 그중에 태어난 거예요. 출생이 대구에서 태어났든 광주에서 태어났든 태어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한 평생 경험하는 것은 바로 여기 9절에 경험하면 되지요. 모든 백성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하면서 장사하면서, 거저는 십자가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잘한 짓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치하하고 상찬하는 칭찬하는 그러한 세상, 그 세상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그들의 운명과 같이 할 뻔했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냥 공통적으로 보여줄 뻔했지요.

그런데 아까 요한계시록 5장을 다시 보게 되면 5절에, “장로 중의 하나가 내게 말하되” 장로는 벌써 천국에 가있는 사람입니다. 예비군이죠. 이미 제대했어요. 제대해서 가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은 전쟁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이미 이겼다에요. 싸움하고 있는데 이긴 거예요. 이겼다는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에요. 이겼으면 여기 공간이 생기는데 주님의 공간. 주님의 시간, 공간을 두 자로, 이게 바로 교회라 하는 거예요. 주님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고 있는 그 교회.

일곱 별이 이 지상의 역사 속에 십자가로 섞여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 땅에 뭐가 생겨야 되느냐 하면 교회가 생겨줘야 돼요. 그리고 교회는 망해야 돼요. 모든 교회는 망해줘야 돼요.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망해야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래 기능이듯이 교회는 이 땅에서 망해주는 것이 기능이에요. 그래서 일곱 교회 그 지역에 가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망했어요. 칭찬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고 뭐고 다 망한 거예요.

이 교회가 망해줘야 요지부동, 변함이 없는 교회가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 교회 내용은 여기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가라사대라고 하시면서 언급된 그 모든 내용은 이미 그 안에 꽉꽉 가득 차있어요. 무화과나무 속처럼 차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로 인하여 흰옷을 입었다로 꽉 차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3장 11절에,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이러한 이야기는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역사 속에 처음 들어올 때 자꾸 명령조로 들어오지요.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할 때 믿는 자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지요. 아무도 없어요. 없으니까 믿는 자라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누가 이뤄요? 모든 언약은 언약을 주신 당사자, 예수님만 이루지 아무도 못 이룹니다. 예수님이 쏟아냈던 모든 말씀은 우리라는 개인한테 경과용이에요. 그냥 스쳐지나가면서 졸지에 우린 완성이 돼버린 것이지 내가 그 말씀 받아서 내가 실천한다고 해서 지킬 말씀이 아니에요. 똑같은 방법을 사용한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베드로고 뭐가 다 떠나버려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오늘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에요. 이기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뭔 뜻입니까? 아무도 생명의 면류관 얻을 자 없다. 없으니까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말이죠. 만약에 이 사람이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했는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 같으면 절망할 거예요. 우리도 절망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절망케 하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이미 구원받았음을 통보하는 그분이에요. 절망케 하시면서 우리에게 희망 정도가 아니고 아예 단정을 해버리지요. 너는 주님 소속이라고.

실컷 절망해라. 누가 취미가 뭐냐고 하면 절망하는 게 내 취미입니다. 난 낙담하는 게 취미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다고요. 당신 어떤 식으로 낙담합니까? 성경 보고 낙담하지요. 죽도록 충성하라 했는데 죽도록 충성 못하거든요. 첫째 사랑을 잃어버렸는데 찾으라 하는데 어디서 뭐. 회개를 어떻게 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문을 두드리라 했는데 문 열어주지도 않아요. 주님 복 나가세요, 이럴 사람들이에요.

이 모든 이야기가 바로 주께서 다녀가심의 효과가 뭔지를 너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라. 너부터 시작해서 구원받지 말고 너부터 시작할 것은 말씀 보고 절망하는 것이 너의 준비된 것이고 성령이 오게 되면 절망한 우리로 하여금 바로 부활을 주시는 거예요. 구원될 수 없음을 매일같이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 뜨면 우리는 나의 스케줄만 챙기는 것은 주의 일이에요. 내 생각만 하는 것. 오늘도 단도리 잘해서 이 세상에서 생존해야지, 라고 결심하는 것, 그것도 주의 일의 시작이 된 겁니다. 아주 아름답게 시작된 것. 벌써 주께서 피 흘린 옷을 아침 아홉 시부터 누렇게 만들어놨어.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6장을 보겠습니다. 7장 보고 6장 봅시다. 7장 10절에,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아까 7장을 봤지만 이들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데 사실은 그들의 온 게 아니고 그들이 덮친 거죠. 완료된 완성된 덮쳤는데 여기 보면, 이 대목이 약간 어렵습니다. 7장 3절에 보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네가 구원받는 데는 어떠한 태풍이나 코로나도 방해가 될 수 없어요. 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겁니다. 환란 자체가 네가 받은 진짜, 복음의 진수가 까딱도 안 함을 증명하는 방법이 우리에게 환란입니다. 그 환란에 대해서 되게 땀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들이 악마에요. 악마가 얼마나 수고하는지 몰라요. 대단히 악마가 수고해요. 흔드는 작업에 죽을 둥 살 둥 일해요.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합니다.

악마의 일은 정죄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다 넘어가지요. 쉽게 말해서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그게 악마가 우리한테 하는 일이에요. 주님 보던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로 쏠리게 하는 것이 악마의 일이에요. 환란을 줘서 고통이 오게 되면 자아가 강화됩니다. 고통이 없을 때는 두루두루 경치구경하다가 갑자기 신발에 모래 들어가면 갑자기 경치구경하다 자아가 강해져요.

겨울철에 백록담 올라갈 때 올라가기 전에 상상을 해요. 눈 덮인 백록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데 막상 백록담 근처에 올라가보세요. 욕하지요. 누가 여기서 만나자고 했는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이지요. 삼손이 마지막 끝에 보면 현빈한테 얼마나 욕하는지 몰라요. 누가 여기서 만나게 해서. 백록담 풍경이 아름다운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춥다는 게 중요해요.

또 성경에 보면 삼손 같은 사람 있지요. 욥. 누가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허락하신 분은 주님이고 거기에 담당자가 누구에요? 악마지요. 어떻게 이 현실을 부정합니까. 악마가 욥에게 고통을 줍니다. 뭐에 집중하라고? 자아. 자아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절망해선 안 돼, 나는 절대로 지옥 가면 안 돼. 왜 이런 생각을 줬는지 몰라요. 지옥 가면 가는 거지 나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이 들까요? 바로 왜 인간이 악마한테 그동안 못 벗어나는지를 모델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하루하루 삶이 악마의 족쇄에서 못 벗어나는지.

그래서 여기 해하지 말라는 것은 그 악마의 세력과 권세를 이미 누가 이겼던 말입니까? 십자가로서 이겼잖아요. 이건 지식이거든요. 우린 십자가로 이겨서 악마에게 이겼다는 건 지식인데 그 지식이 현실화시키기 위해선 우리는 아직 안 죽어야 됩니다. 충분히 이걸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 육신이 무슨 미친 값을 하는지를. 육신이 있어야 이걸 체험하거든요.

그런데 내 육신보다 더 센 게 있어요. 여기 보면,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7:4) 두 번째 시간부터 어려운 게 나와서 감당해주셔야 돼요. 숫자가 구원의 사인이다. 인물이 숫자 되면 인물은 날아가 버려요. 숫자화 돼요. 그럼 숫자는 어디서 쏟아진 숫자냐? 언약에서 나온 숫자입니다. 십이라는 숫자, 곱하기 십이라는 숫자, 곱하기 천이라는 숫자가(12*12*1000) 전부 다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천이라는 숫자는 모세의 십계명에 나오지요. 천 대까지. 그리고 창세기 5장에도 처음 인류의 수명이 거의 천이라는 커트라인을 넘질 못하지요. 천은 경계선이에요. 인간의 세계와 하늘나라 경계선이 천이라는 숫자로 표현한 거예요. 백날 해봐야 구백 몇 살이라 하지만 천까진 넘어갈 순 없어요. 이 말은 천 넘어버리면 인간의 숫자 이해를 금지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숫자를 해석하는 그 해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숫자를 사용하면서 이 숫자가 지상에 와버리지요. 그래서 인간이 숫자 계산하다가 숫자 잘못 계산했단 그 빌미로 지옥 가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왜 숫자 해석에 인간적 기존에 네가 알고 있던 시간과 공간에서 통용되는 숫자를 잘못 적용시키느냐는 죄목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이왕 지옥 가는데 주께서 지옥 가는 핑계를 계속 만들어내는 거예요.

천사를 보내서 심판 해버리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심판할 경우에 고통이 오게 되면 자아는 어떻게 된다? 강화되지요. 고집 부리게 되지요. 그러니까 환란을 안 주면 고집 안 부리고 사람이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려움을 주니까 갑자기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이 되지요. “거봐. 그러니까 지옥 가잖아.”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지옥 갈 인간을 기어이 지옥 가게 만드는데 아주 하나님께서 성공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화자찬이에요. 아주 밟을 놈을 밟는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확인사살이라 해요. 두 번째 제목으로 이것 괜찮네. 제목이 살벌한데. 숫자해석이 엉터리라는 거예요. 숫자해석을 못하면서 자꾸 하는 척을 하는 거예요.

왜? 숫자는 인간의 상거래 상에 나타나거든요. 요한계시록 17장, 무역 가운데 처음으로 숫자가 언어가 나와요. 그 모든 숫자는 무역에서 이윤을 남기겠다는 자기 이익과 관련돼있단 말이죠. 그럼 하나님께서 이 숫자 해석해봐라, 하고 내놓은 게 666. 인간은 숫자해석이 안 되는데 이것 해석한다고 매달린 사람들 다 지옥 가는 겁니다.

이미 하늘에 숫자가 인격화되신 분이,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의 완성으로 인격화되신 분이 이 지상에 인간들에 통용하는 숫자로 잠입했을 때 인간들은 이게 뭔지도 모르고 천당 갈 거라고 여기면서 그 숫자해석에 몰두하는 거예요. 덤벼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지상에 왔을 때 벌어진 사건이 무슨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지금 반복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부터 계속해서 제가 하는 말이 그거에요.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지상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왜 왔습니까?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기 위해서. 그걸 왜 해야 하느냐? 그게 언약 완성이니까. 미리 언약에는 십자가는 주어졌으니까.

12라는 숫자는 어디서 통용된다? 지상에서 통용되는 거예요. 왜? 유일한 현실은 지상뿐이기 때문에. 이제 유일한 현실은 지상에 눈에 보이는 것뿐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나라는 없어요. 분명히 없어요. 없는 거예요. 있다고 여길 때는 내가 이미 나이가 백육십오 세 때 다시 말해서 벌써 죽은 지 한참 됐을 때 그때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영적 세계는 없습니다.

아무리 꼬집어봐도 있는 것은 내 몸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이 현실뿐이에요.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서 내 인생은 내가 경험한 어릴 때 먹혔던 달콤한 빵, 나만의 현실, 주체의 역사 그게 전부에요. 그게 유일한 현실이에요. 날 속이려하지 마세요. 난 안 속아 넘어갈 거예요. 이 세상뿐인 것을.

성경에 숫자 나온다. 숫자 지켜서 천당 가면 될 것 아니냐. 없는 줄 알지만 혹시나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모르는 무슨 천국 있다면 숫자 통해서 가겠다는 것, 이게 바로 자아 역사의 확장이죠. 이미 죄인이 아무것도 없이 천국에 쑥 들어가겠다는 나한테 뭔가 욕구하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했지요. 자꾸 나한테 미흡함을 유발하는 욕구가 있다고. 그 욕구 중에 하나가 내가 천국 가야 되겠다는 욕구지요. 그 천국 내 욕구의 확장이고 연장이지 천국 아니거든요. 안 죽고 들어가는 나라에요. 나는 아직 안 죽었잖아. 나이가 죽을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라는 것은 내 능력으론 그 개념을 체험할 수 없어요. 첫째 시간 제목이 절망이라니까요. 우린 천국의 입장은 절망뿐이에요.

12라는 것은 지상에 언약이 왔잖아요. 언약이 왔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하나님이 미리 앞당겨서 온 거에요. 그걸 제가 이번 룻 강의에서 실루엣이라 했지요. 우리말로 하면 그림자. 예수님의 긴 그림자가 구약에 왔다, 언약이 온 거예요. 언약이 왔는데 숫자가,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 열두 명이란 임신 못한 여자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열두 명. 잉태치 못했는데 열두 명 낳았어요.

그러면 이 자식은 근원이 뭡니까? 잉태치 못한 거예요. 임신치 못한 여인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게 우리 현실은 없어요. 제주도 시민한테 그런 게 없습니다. 이 땅에는 마리아 없어요. 임신 못한 여자는 임신 못한 여자에요. 기껏해야 시험관아기뿐이에요. 사라는 태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임신하는 이런 것은 내가 아는 한 인간의 현실 속에는 망상입니다. 그거는 허상이에요. 환상입니다. 믿고 싶어도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쓸모없다고 죽여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를 공격할 테니까 너희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가 허하노라. 허락하노라, 이 말이에요. 이 세상. 그게 영적 전쟁이거든요. 매일 아침마다 너는 나를 공격해라. 그 와중에서 십자가가 어떤 사건인 것을 오늘치 내가 알려줄게. 하루치 알려줄게. 네가 악역을 담당하고 죄인이니까. 십자가의 상대역으로 우리를 뽑아줬다는 것,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의 상대역이 됐다는 것. 그냥 여기에 역할이에요. 우리의 본질은 천국이지만 맡은 죽을 때 육신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의 역할은 불신자를 대변하는 역할이에요. 옛날에 우리 클 때 영화에 나오면 죽이고 싶은 만나면 진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허장강, 그 아들이 허준호.

그에 못지않게 그 뒤에 달중이가 있었거든요. 달중이 진짜 죽었어요. 시청률 70% 넘는 <여로>에서 그 달중이가 죽으라고 얼마나 악을 썼는지 몰라요. 저 인간 죽어야 된다. 태현실 괴롭히는 저 인간 죽어야 된다. 그 사람 진짜 죽었어요. 주인공 장욱제도 제주도 살다 죽었어요. 연예인 이야기니까 여러분 귀담아들을 필요 없고요.

그런데 우리고 달중이처럼 죽었어요. 죽었는데 죽었기 때문에 이 역할을 맡을 수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우린 매일같이 죽은 놈이 뭘 못해요. 때론 절망 역할도 맡을 수 있고 난 마귀 앞잡이 역할, 어차피 역할이니까 뭘 못해요. 아침부터 신나게 하면 돼요. 역할이니까, 역할.

그 역할이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역할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파견 근무시키는 거예요. 실컷 내가 당한 십자가 욕을 너도 한 번 당해봐라.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가 해야 될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봅시다. 11절,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 삶이거든요. 이러나저러나 결국 죽는 이유는 내가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이미 죽은 자를 또 살게 하신 이유는 피를 증거한다 했어요. 그 증거하는 어린양의 피, 예수님의 모든 행과 말씀은 어디로 쏠리게 돼있다? 십자가의 피로 쏠리게 돼있거든요. 그 십자가 피가 증거되려면 어떤 악한 역할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불신자는 역할 하는 줄도 모르고 악한 일을 하고요.

우리는 뭡니까? 피의 증인이에요. 증인하라고 하나님께서 이마에 에스겔에 보면 우리에게 인을 맡긴 거예요. 에스겔 9장 6절에,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늙은이든 젊은이든 관계없이 어린애들까지 전부 다 이마에 표를 받아라. 이것이 에스겔 마지막에 보면 성신, 하나님의 새 언약 속에는 이게 포함됐어요. 성령 받으면 성령의 그 택배 안에 이미 든 게 있어요.

그걸 고린도후서 2장인가 보면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돼있어요. 지금 제가 자꾸 잊어버려요.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인치시고,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죽은 자지만 말씀이 살아있기에 우리가 말씀을 주님의 상대역으로 하는 거예요.

열두 제자가 성령 받기 전에는 무슨 역할 했습니까? 예수님 배신하는 역할 했지요. 성령 받고 난 뒤엔 뭐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역할 하는 거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그 역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모든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악마가 흔들어대든 주님이 승리하든 그건 내 소관 아니니까. 우린 그 주어진 역할을 해나가면 되는 거예요.

아, 이래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 바로 복이구나. 주님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게 이게 바로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야 돼요. 개입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만든 현실세계에 우리가 아직도 안 떠나고 계속 있어야 될 이유는 이미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에 계속 그 일을 담당해야 되기 때문에 떠나지 않게 하는구나.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영적 전쟁에 이렇게 벌어진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나도 알고 남에게 증거하시는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미아(IP:122.♡.170.138) 20-09-24 01:21 
20200918제주특강c 사라질 자(요한계시록)-이 근호목사

오늘 이 시간에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세 번째 시간으로서. 지난 시간에 했듯이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라는 것이에요. 유일한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예요. 그러니까 뭐가 없느냐 하면은 천사 없고, 예수님 없고, 하나님 없고, 아무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인간 대 인간, 쉽게 말해서 너와 나의 세계, 이게 전부예요. 없는 거예요. 다른 현실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림을 그릴 때, 현실이라는 것을 동그랗게 이렇게 그려놓고, 어제 그린 그림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동그란 원 한 모퉁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들어가죠. 현실뿐이에요. 괜히 하나님, 천사, 예수님, 거론하지 마세요. 우리가 아는 현실은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예요.

이게 뭐냐 역사라 하지 않고, 어제 주체역사라고 했죠. 내 몸은 확실하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역사. 이것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현실. 그리고 그게 전부예요. 그게 전부기 때문에 다른 현실은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근데 역사를 보게 되면 이 현실 속에 십자가 사건이 이렇게 끼어있다 이 말이죠. 그럼 요한계시록은 뭐냐, 이 십자가가 현실을 갉아먹는 이야기예요. 한 모퉁이를 차지했던 십자가가 점차 이게 십자가 자체 내에서 나온 해석에 의해서 현실 전체를 갉아먹어버리면 현실은 뭐냐, 현실이라고 우겼던 이것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환상, 허망함, 진짜 현실을 가리고 있는 그러한 불순한 세력, 이렇게 변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그럼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뭐냐 하면은 가렸던 것을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가 다 긁어내는 거예요. 배에 녹이 쓸면 쿵쿵쿵~~ 부산 바닷가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힘든 작업을 해요. 녹을 떼 내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이 현실이라는 해석을 떼 내는 거예요. 떼 내게 되면 진짜 현실이 있겠죠. 그 현실은 십자가와 연관된 진짜 현실이 있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떼 내야 될 그러한 녹 같은 것. 그것이 두껍게 인간을 덮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거는 십자가의 의미가 소위 전부라고 여겼던 그 현실을 깎아내고 뜯어내는 그 과정이라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밥이 있죠. 밥을 냉장고에 안 넣고 오래두게 되면 밥이 쉬어버립니다. 이 쉰밥은 못 먹죠. 이게 변화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보면서 명확한 현실감을 집요하게 추적해봐야 하는데, 그 한 예가 뭐냐 하면은, 어제 비 왔잖아요. 자, 비가 온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죠. 구름 있는 데서 땅으로 비가 온다. 제주도에 비가 온다 이 말이죠. 왜 꼭 비가 와야 됩니까? 이것부터 따져봐야 되는 거예요. 비가 온다, 여러분 비가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비가 안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근데 이 질문 자체가 우리에게 성립이 될까요? 안 될까요? 갑자기 질문이 네 개가 들어가 버렸죠. 비가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안 오는 것이 정상일까요? 그 다음에 비가 왜 오는가를 묻는 것이 정상일까요? 안 묻는 것이 정상일까요? 하는 거예요.

정답은 네 번째에요. 비는 우리가 오라고해서 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이라고 하는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 의미의 그 주인공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의한 사건이잖아요. 예수님 홀로 하신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현실을 보는 사건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주체역사라고. 여기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은 나죠. 나의 현실 속에는 비가 굳이 와야 될 이유가 없어요. 내가 하늘보고 비를 주문 안 했거든요. 070-0000-0000 해가지고 비 오라고 주문 안 했어요. 쇼핑하듯이 주문 안 했다 이 말이죠. 주문 안 했는데,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는, 요청하지도 않는 비가 왔다는 것은 이 현실에 인간이 다 관여할 수 없는 요소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가 오는 것이.

인간은 주어진 그걸 현실로 보지만 이 현실 속에서, 어제를 현실1, 지금의 현실을 현실2라고 한다면, 현실1에서 현실2로 가는 데에 있어서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여기에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변화. 이 말은 맞죠.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비를 보내신 분, 비를 보내신 분을 몰라요. 그리고 보낼 때는 이유가 있어야 보내는데, 비 오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받으실 분도 없어요. 야구할 때 공 던지는 투수(피처)도 없고 포수(캐처)도 없는데 공이 이렇게 지나간다면, 이건 아주 희한한 현실이에요. 아주 이건 이상한 현실이잖아요.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이겁니다. 예수님이 발신자가 되고 예수님이 수신자가 되는 거예요. 편지를 보낼 때 예수님이 발신자가 되고 예수님이 수신자가 되는 거예요. 이걸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내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인 겁니다. 수신자 발신자가 있으면 여기에서 뭐가 생기느냐 변화가 주어지는 거예요. 이 변화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라고 인간들이 아무리 우겨도 이 변화에 대해서는 인간이 눈을 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관여하지 못합니다. 그 변화를 예수님의 십자가 해석으로 전부 다 다가가는 거예요. 이 변화가 결국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인간의 현실을 전부 다 갉아먹고, 밥으로 하여금 쉰밥이 되게 하는 거예요. 인간이 못 먹는 밥. 인간이 의지하는 것은 이 현실, 땅의 세계밖에 없잖아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땅의 세계를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로 이걸 완전히 전환시키는 겁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렇게 하니까 벌써 윤곽은 대충 잡힌 거예요. 윤곽은. 그러면 이 윤곽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현실에는 뭐만 있다? 눈에 보이는 내가 있는 것, 이게 전부라는 것을 명심을 해줘야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다.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이게 전부라고 해줘야 여기서 변화라는 퀘션 마크Question Mark가 발생이 되는 겁니다. 변화라는 것이 우리 손을 떠났다는 것, 어떤 여분의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야 십자가의 취지가 살아나요. 왜? 십자가는 우리를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공격받아야 될 이유가 있어야 돼요. 수신자도 모르고 발신자도 우리는 모르는데, 모르면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잖아요. 그거는 주제 넘는 이야기예요. 이 세상에서 수신자도 발신자도 모르면서, 공이 날아갔는데 누가 공을 던지는지도 받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야.”라고 하는 것은 못돼먹어도 보통 못돼먹은 것이 아니거든요. 이거는 맞아죽어도 싼 거예요. 지금 인간들이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이게 전부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 “우리가 뭘 알아?” 이게 아니고, 나에게서는 나의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산, 나무, 이게 전부에요. 전부. 우리가 그걸 고집해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논리와 이론과 철학과 학문에 의하면 이것이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천문학을 하던 뭘 하던 간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망원경 들고 별 조사하고 거기서 진리를 따내는 그것이 인간이 하는 전부에요. 거기에 하나의 고집이 있는 거예요. 고집. 우리는 그걸 과학이라고 하죠. 과학이라고 하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과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과학이라고 하는 이걸 가지고 복술이라고 해요. 복술. 미신행위로 보는 거예요. 미신행위. 성경에서는.

왜냐 하면은 미신행위,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와 십자가 지신 주님의 행위와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행위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입니다. 이걸 벌써 백번까지는 아니지만 여러분 했어요. 오십 번까지 했어요. 인간의 전부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이 안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요. 이게 우리 인생 사고방식의 기반이고, 그라운드고, 이게 전부예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간에 나를 살려줘야 해요.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나와 내 자식이 살아야 돼요. 전부 다. 무조건 살아야 돼요. 무조건이에요. 이거는 이유가 없어요. 모든 본성은 그것뿐이에요. 이게 전부에요.

과학을 하고 의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뭐 코로나를 대처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결국 이 세상은 안 무너져야 해요. 이거 무너지면 안돼요. 왜? 내가 무너지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이건 뭐냐 하면은 복술이에요. 미신이에요. 미신. 던지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는데 공은 날아가니까, 저 공을 인간이 중간에 가로채는 겁니다. “저 공은 우리를 위한 공이야. 그리고 그게 전부야.” 그게 전부다. 올모스트almost, 전부예요. 전부.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던가, 정동원 하고 린 이야기를 강남강의에서 했어요. 그때 그 시간에 생각이 났어요. 린이 불렀던 노래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그때 정동원이 린하고 이야기를 할 때, “아줌마! 누구세요?” “나 같은 건 몰라도 돼.”라는 그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이제 생각나는 거예요. 린이 불렀던 노래가. 유어마이데스티니“You`re my destiny~~”(별그대ost), 당신은 나의 운명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나의 운명이다. 나 당신 없이는 못 살겠다. 그런 노래가 아닙니까? 당신은 나의 운명이다. 이게 인간의 고집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목적이 이미 살기 위해서 확정된 이상은 모든 행위는 누가 하고? 내가 시작해서, 나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변화를 추구하고. 이 변화 그 다음에 뭡니까? 그 수혜자가 누구다? 혜택자가? 내가 되는 겁니다.

이걸 위해서 나라에 복종도 하고 나라에 순종도 하고 이웃 간에 협조도 하고 떡을 먹고 나누고 도와주고 하는데,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은 나를 살리기 위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니까. 이 전부 안에서 어떤 수완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고, 그 안에 있는 내가 전부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살 궁리를 찾는 것, 이게 인간이에요. 그거 뭐 성경에서 들은 대로 예수, 하나님 이야기하지만, 이거는 뭐 이 프레임을 고집하는 거예요. 이 틀을. 고집하면서 천사고 뭐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아까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면, 동그라미를 그리면 이게 현실밖에 없어요. 현실밖에 없는데 여기에 또 뭐를 그렸습니까? 생채기, 상처처럼 십자가 사건이 여기 현실 속에 들어왔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작은 부분으로서. 이순신 장군이 죽었는데, 죽어있으면 되는데 이순신 장군이 살아나서 돌아다녀보세요. 이거는 보통 재난이 아니잖아요. 십자가의 의미가 여기서부터 인간이 그렇게 사수하고 싶은 이 모든 세계를 다 갉아먹습니다. 뭐로 나타나느냐, 현실의 변화로 나타나요. 징조가 불길한 변화로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 삶에 도움이 안 되는 변화들을, 여기서 십자가에서 계속 꽂아주는 겁니다. 계속 거기서 시그널을 보내는 거죠.

보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공을 던진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걸 나는 시작이고 나는 끝이라고 되어 있죠. 끝이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보면 마감이라. 끝났어요. 이 세상 자체가 끝났어요.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은 철거대상입니다. 재개발도 안 되죠. 그냥 싹쓸이 없애버리는 거예요. 이걸 없애면서, 세상 없애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 목적이냐 하면은, 너희들이 건드리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을 건드린 그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려서 십자가가 이정도 의미가 있음을, 가치가 있음을 망하는 세계를 통해서 증거 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이 요한계시록을 쓰신 이유예요. 이유입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하나 쓰게 되면 순수는 보복하기 마련이다. 순수한 것은 반드시 뒤에 보복이 따라요. 보복이 있어줘야 순수함이 더욱더 순수함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순수함은 자체적으로만 순수해야 되지, 외부의 것이 필요치 않거든요. 근데 외부의 것을 남겨둔 순수는 순수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외부의 것은 강력한 보복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순수는 보복을 하기 마련이다, 라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보복이 있다면 그것은 순수함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뜻이에요. 보복이 있다면.

현실 속에 끼어든 이 십자가사건은 무슨 용이냐 하면은 보복용이에요.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라고 했죠. 요한계시록 1장 7절,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그 보복하시는 분. 일종에 전쟁이 확장되는 거죠. 계속해서 전쟁이 지속되는 거예요. 이 부분을 요한계시록 1장을 잠깐 한번 볼까요? 1장 13절에서 촛대 사이에 누가 등장하죠. “인자 같은 이” 인자 같은 이가 심판주가 되는 이 과정. 이 과정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인자 같은 그 분이. 인자 같은 것은 아들이죠. 옛날에 예수님이 공생애에 있을 때 자기를 뭐라고 합니까?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죠.

그게 인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결국은 심판주 라고 확정되었음을, 보복을 당하는 세상의 멸망을 통해서 확인 사살하는 그 이야기가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기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한번 당해봐라 이 말이죠. 다시 이야기할게요. 순수는 뭐하기 마련이다. 순수는 그냥 순수가 아니에요. 보복이라는 변화가 있음으로서 순수가 더욱더 그 빛이 빛나는 겁니다. 순수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진짜 현실이죠. 진짜 현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이 순수를 뭐로 표현했느냐 하면은 이 순수를 보석으로 표현해요. 열두 가지 보석으로. 아주 빛이 나요. 엄청난 킬로수가, 뭐 이천 칠백 킬로인가, 뭐 어떻게 나와요. 만 이천 스다디온인가 나오는데.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 보면. 2700킬로이고요. 그 다음에 또 측량하니까 일백사십사 규빗이에요. 이거는 400킬로 정도. 하여튼 전체 다 합쳐서 이게 크기가 일만 일천 스다디온에 400킬로 가까이 돼요. 엄청나게 크게 정방향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이거는 순수를 이야기해요. 21장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정결한 신부 같다. 거룩함. 그 거룩함은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된다? 보복이 있어야 돼요. 보복이라는 파장을 유발하지 않으면 그건 순수가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6장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만,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이게 전부예요. 비가 오는지 몰라요. 그냥 오니까 받아 챙겨서 자기 생존에 필요만 채우면 되지, 비가 왜 오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내게 필요한 현실만 현실이기 때문에. 인이라고 하는 것은 개봉하는 거예요. 개봉하는 것. 나팔이라고 하는 것은 자각시키는 것. 자각시키고 실행에 옮기는 것. 그 다음에 대접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최종 정리, 정돈하는 거예요. 일곱 인을 뗄 때마다 계속 개봉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보복당하는 세상의 현상의 그 모습이 전부 다 펼쳐져요. 안에.

상견례 마치고 난 뒤에 사돈한테 이바지 선물을 받죠. 이바지 선물을 열 때에 북으로 두두두둥~치죠. 개봉박두. 짠~하고 개봉하는 것. 그게 인 떼는 거예요. 인을 딱 뗐잖아요. 그러면 그 안에 뭐가 있고 편지 한통 있고 뭐 여러 가지 이바지 물건이 격식에 맞춘 게 딱 나온다 이 말이죠. 그걸 다 펼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포괄적으로, 대략적으로 전체의 계획이 다 보이는 거예요.

다 보이는데, 그 전체 인 중에서 우리에게 관심 끄는 것은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 해와 달이. 그 단단한 눈에 보이는 현실이,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려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죠.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하늘에 별이 무한히 떨어지죠. 그 다음 요한계시록 8장 1절에 보면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고” 그 다음에 나팔을 받고. 요한계시록 6장 12절에 보면 “여섯 째 인을 떼 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뭐 같이 된다? “피같이 되며” 피같이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것을 보고 섬뜩해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도 섬뜩한 거예요. 우리가 주문을 안 했거든요. 하늘보고 주문 안 했잖아요. 해와 달 모든 것이 전부 다 없어진다면,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하늘이 깜깜했죠. 하늘이 깜깜했다 이 말이죠. 자, 하늘이 빛을 잃는다든지, 달빛이 피가 된다든지, 이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장담하고 확신했던 그 역사는 누구한테서 나온 역사에요? 바로 우리가 나의 현실이라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는 쇼킹은 되죠. 이런 것은 예상 못한 거잖아요.

우리가 아는 현실, 현실이라고 할 때 십자가는 한구석에 조그맣게 한 남자가 사형당하는 작은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무시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는 현실은 여전하고 굳건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고 질서 있게 반복되기 때문에. 규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일곱 인을 떼자마자, 전체 설계도가 딱 나오자마자 그렇게 철석같이 안정하다고 했던 그 해와 달과 별, 천체마저 이거는 완전히 맛이 가버렸어요. 이걸 아까 제가 했잖아요. 밥이 쉬어버렸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더 이상 이 땅에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충격이다, 불안하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라고 여긴다면, 그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십자가는 안 바라보고 뭐만 바라보느냐 하면은 자기 몸의 안정을 위한, 여전히 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그걸 자꾸 의지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미신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빼놓고 성경을 해석해서 세상을 보는 것은 전부 다 미신덩어리에요. 미신덩어리. 좋게 해서 미신이고 성경에서는 이것을 우상숭배, 악마의 종, 뭐 이렇게 나오죠.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666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과 합세한 악마를 뭐로 만든다? 이걸 숫자화 만든 거예요. 숫자. 숫자화로 만든 이유는 이 세상이 멸망하면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은 숫자를 뽑아내는 거예요. 1000, 7, 144,000, 666.. 숫자화 돼버리면, 이 숫자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박스, 곽 속에 집어넣어요. 이걸 규격화, 하나님은 세상을 규격화로 정리 정돈하는 거예요. 이걸 할 때 선반이 있어요. 그 선반이 뭐냐, 일곱이에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다가 착착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규격화시켜서. 살림 잘하는 여자들 보면 서랍을 딱딱 정돈해서 그렇게 하죠.

저는 여성분들이 집에서 열심히 놀지 않고 살림을 잘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 좀 험상궂게 생긴 남자 배우 이름이 뭐죠? 김일우가 등장하고 난 뒤에는 여자는 놀고 있었다는 것, 여자는 완전히 놀았어. 브랜드까지 딱딱 맞추는 김일우. 이건 안 돼! 참을 수 없어! 그냥 김일우죠. 혼자 사는 김일우. 그러니까 혼자 살죠. 모든 각을 맞춰야 돼. 아, 이런 무질서는 참을 수 없어. 견딜 수 없어. 규격화에요. 규격화. 왜? 순수하니까. 이 김일우. 김일우가 왜 나와. 김일우는 순수하니까. 나는 순수하니까. 순수한데, 어떤 손님이 와서 어질러놓으면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순수한 것은 뭐가 주어진다? 보복.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박살 내놓아버려요.

어디 내 순수함을 더럽혀? 보석 같은 내 백성을 누가 건드려? 이거하고 마찬가지에요. 이 지저분한 땅과 하늘과 별 이런 것들을 내가 그냥 둘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나는 전부 다 그들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하늘에서 땅으로 다 떨어트릴 거야. 마치 우박이 내리듯이. 하늘에 달려 있던 것들이 다 땅으로 내려오는 거죠.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는 피뢰침 만들고 뭐 구름 현상을 연구해가지고 과학이라는 질서에다가 전부 다 집어넣었잖아요. 그 집어넣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니까. 올모스트almost, 이게 전부거든요.

전부기 때문에, 이거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종교라고 하는 그거는 취미고, 그거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중요하거든요. 내가 이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면 되고, 내 자손이 번성하면 되고, 그만이다고 이래 생각했는데, 본인이 하나의 숫자인줄을 상상도 못했죠. 숫자라고 하는 것은 납작하게 해버리면 그게 숫자가 되죠. 심지어 예루살렘도 이게 뭐냐 하면은 숫자입니다. 왜? 뭐하기 때문에? 측량대상이 되기 때문에. 에스겔 40장부터 나오는 그 성전을 측량을 해요. 측량, 숫자화 된 자기 백성을 거기에다가, 선반에다가 적재적소에 딱딱 집어넣는. 규격화시키는 그거.

숫자화 시켰다는 것은 인격, 인물로서 자격을 박탈당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누구의 원수냐 하면은 십자가의 원수인 겁니다. 따로 끄집어낼 때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인물이다, 라는 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숫자로 바꿔서 땡겨야 돼요. 숫자로 바꾸면 이 숫자가 어떻게 됩니까? 144,000이 되겠죠. 종려나무를 들고 천국에 오는데, 성경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종려나무를 들고 오는 사람을 인물로 보지 않고 144,000이 우르로 온다는 거예요. 144,000.

이 144,000이야기는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144,000은 그걸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아는데, 그게 끝난 게 아니고 14장에 또 나와요. 1절에,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라고 되어 있죠. 자 예수님은, 인자가 뭐가 됩니까? 인자라고 하지 않고 인자 같은 이가 뭐가 돼요? 끝까지 뭐로 갑니까? 인자 같은 이, 심판주가 어린양이 되죠. 근데 어린양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순수는 뭘 낳는다? 보복을 낳는다. 니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 증거 대. 증거 대볼까? 나는 어린양이야. 너희가 죽인 어린양이야. 자, 이만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수를 해도 할 말이 없지? 이런 거예요. 인자가 어린양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 요한계시록입니다. 편지를 쓰는데,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다음에 받는 사람, 수신자가 있죠. 보낸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죠. 누가 보내고 누가 받습니까? 주님이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누가 받습니까?

주님이 받으면서 주님의 그동안 몰랐던 실체가, 복수의 권한을 가진, 그리고 누굴 구원하고 누굴 저주 보낼 온전한 권한을 가진 어린양.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만천하에, 이 멸망하는 세계에 보이면서, 세상은 침몰하죠. 침몰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옛날 한때 그냥 있고 잊어버린 그런 사건인줄 알았느냐? 절대로 주께서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 그냥 너는 따먹고 입 싹 가리면 완전범죄인 것 같지? 내가 갈굴 거야. 끝까지 내가 갈굴 거야. 이런 식으로. 그래서 하나님은 뒤끝이 있어요. 뒤끝이 있고 뒷조사하고. 멸망의 자료를 찾는데 충실하고. 이래도! 이래도! 니가 할 말이 없지.

666숫자가 짐승인데, 인간에게는,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벌써 잊어버렸겠지만, 인간세계는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죠. 그러면 짐승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짐승은 없어요. 악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시간은 영원하고 공간도 영원하고 그것뿐이에요. 근데 요한계시록을 진행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첫째 날, 둘째 날, 그 다음에 뭡니까? 이분이 일(1/2)날이 돼요. 이분의 일. 이거는 시간도 소실됩니다. 공간은 한곳으로 압축이 돼요. 오므라지는 거예요. 시간도 오므라지고 공간도 오므라지는 거예요. 오므라지는 공간에다가 악마와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유황불에. 이게 둘째 심판이죠. 다 집어넣죠.

이 세상이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너무 아쉬워할 게 아니라, 그게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뭘 촉구하느냐 하면은 도대체 그날, 예수님이 죽던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 말이죠. 이게 요한계시록 어제도 봤지만, 1장 7절에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라고 했잖아요. 도대체 그 찔림을 받은 당사자가 누구였는가? 초라해서 힘도 자기 권세도 없고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한 그분이, 그렇게 허접스러운 하나의 남성, 목수의 아들 그거였잖아. 우리의 역사 안에서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 안에서는 예수님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냥 평범한 남자일 뿐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우리는 성경에서 그게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지만, 내 일상생활에서, 청소하고 있을 때는 예수님은 선풍기를 내 대신 틀어주지 않는 분이에요. 왜? 이미 돌아가신 분이고, 젊어서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에. 지금 내 일상에, 내가 나를 살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굳이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상 알아요. 내가 믿는 예수님은 나의 일에, 내가 돈 버는 일에, 내 생활에, 내가 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숫자화 되는 거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면 안 돼요. 왜 숫자화 되느냐, 숫자화 시키는, 선반에다가 정리화 시키는 그분만 인물, 다시 말해서 인자,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만 사람이에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고난당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고난당한 자라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어야 이게 사람이다. 정말 사람대우 받고 싶어? 그러면 그분의 몸에 흐르는 피를 니가 적시게 되면 너는 흰옷을 입고 내가 만든 세계, 어린양의 세계에 비로소 참여하게 된다. 144,000으로.

인간이 평생 동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데, 갑자기 누구하나 등장했다고 그 사람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이것은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이거와 비슷한 옛날 동화이야기가 있었죠. 송창식이 그걸 보고 만든 노래가 있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그런 거 있잖아요. 그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부니까 독일 동화에서는 애들이 다 따라갔죠. 어른들은 안 따라갔죠. 그러니까 제가 어느 설교에서 니가 어린애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오라고 하는데 엉덩이가 무거워 가지를 않는 거예요. 어린애만 가는 거예요. 제자들은 다 어른이라, 누가 높고 그거만 생각해요.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은가 그거만 생각해. 순수를 잊어버렸어요. 순수를.

예수님만이, 아버지 보시기에 그분만이 진짜 인간이에요. 나머지기는 인간이 아니고 악마와 합세가 되어 있는데, 물론 인간들은 악마를 안 믿으니까 나는 나라고 우기겠죠. 하지만 이 주어지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하면 그 변화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죠. 왜? 시작도 모르고 끝도, 마감도 몰라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하나님은 시작이요 끝이요, 본인이 발신자고 수신자고 다 돼버려요. 자기가 자기한테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인자에서 어린양으로. 나머지기는 싹쓸이되는, 죽을만해서 다 죽어야 되는, 죽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이 일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은 천사한테 맡기죠. 여러분 천사한테 일을 맡긴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이런 뜻으로 생각하면 돼요. 다니엘에 보게 되면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잖아요. 꿈을 꿨는데, 느부갓네살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또 성질도 급박해요. 꿈은 본인이 꿔놓고 어젯밤에 꾼 꿈을 알아내라는 겁니다. 내가 꾼 꿈을 알아내 봐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거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까 느부갓네살이 화를 내면서 다 죽이라고 이래 돼요. 지금까지 나한테 조언했던 박사들, 점쟁이들 다 죽여라. 그거는 점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다. 내가 아는 지혜는 내가 잃어버린 꿈까지 찾아내야 그게 정말 신과 내통하고 있는 지혜자다. 다 죽여 버려라. 그렇게 해가지고 다 죽이도록 확정이 되었어요.

근데 다니엘이 좀 참고 제가 알려드리겠다고 해서 겨우 말려가지고, 진정시켜가지고 자기뿐만이 아니고 다른 동료들을 다 살렸는데. 그 꿈 이야기에서 느부갓네살이 느낀 것이 뭐였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제국이 자기 거예요. 이게 전부에요. 자기 것이에요. 근데 꿈은 뭡니까? 외부적이죠. 내부적이 아니고. 여러분, 제가 첫째시간에 한 것이 기억이 납니까? 인간의 내부에서는 뭐가 나옵니까? 결핍을 따르는 욕망이 나오죠. 외부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것이 주어지죠. 느부갓네살에게 영문도 모르는 외부가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 이 약속에 의해 천국 갈 백성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왜 피리 부는 사나이 따라서 어린애처럼 앞뒤 안 가리고 왜 예수만 따라가야 되는지를, 본인이 영문도 몰라요. 이거는 느부갓네살이 번민해서 잠을 못 잔 것처럼, 그것을 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성도는, 남들이 무시하는 천사, 하나님, 예수님 다 무시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근데 본인이 무시를 못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구약에서 언약백성이라고 합니다. 언약백성은 자기에게 덮어씌워진 언약이 찾아옴을, 영문도 모르게 찾아옴을, 영문도 모르게 찾아왔기 때문에 본인 힘으로 이걸 벗겨낼 능력이 없어요. 예수십자가를 무시할 그런 재주가 없다 이 말이죠.

이게 귀신 씐 것처럼 딱 달라붙어요. 예수 귀신 씌었다. 딱 달라붙었어요. 도망치고자 얼마나 시도를 했겠습니까? 예수는 없는 거야. 예수는 돌아가셨어. 예수는 하나의 종교야. 이 성경전체의 내용은 이게 전부 다 짜깁기 되었고, 여러 가지 그동안 있었던 J문서, D문서, 많이 배웠죠. 인간들의 지혜를 수집하고 분리한 거지. 이거는 진실이 아니야. 그 당시의 교훈집이야. 교훈집. 신학교 때 그렇게 배우거든요. 신학교 가게 되면 장사기 때문에, 인간에게 장사 안 되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전부 다 성경을 그렇게 가르친다고요. 전부 다.

소위 외국에서 박사학위 받았다고 하는 인간들이. 그래서 신학자들을 제가 불신자자라고 안 합니까? 요한계시록도 안 믿어요. 심지어 이만희도 요한계시록 안 믿는데요. 이만희도 안 믿어요. 안 믿기 때문에 그렇게 144,000을 활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 인간이 죽어서 천당 가는 것도 전부고. 내가 전부예요. 자기 자신이 전부기 때문에.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죠. 근데 요한계시록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없는 존재예요. 언약이 던져준 숫자와 연결이 될 때만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없는 존재가, 없는 데서 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뭣 때문에? 언약이 던져준 숫자에 걸려 들어가 버리면. 7, 144,000.. 전부 다 그런 숫자. 일곱 교회, 7. 전부 다 그것이, 말씀이,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고 나말 살고자 하는 인간밖에는 없어요. 누구도 짐승의 두꺼운 차단막을 못 벗어난다고 아까 이야기했죠. 인간은 어떻게 해도 나라고 인정하는 한, 우리는 신자가 아닙니다. 여기 거울 보는 그 나 있잖아요. 그게 나라고 인정하는 한, 절대로 신자가 될 수 없어요. 절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근데 기적은 뭐냐, 그 나가 그 나를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만 촐랑촐랑 따라가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다는 거예요. 이거는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내 욕망의 결핍만 맨날 채우는 거기에만 분주하지. 그래야 내가 온전한 나, 반듯한 나, 순수한 나, 그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어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나, 여론 속에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런 나. 그걸 정체성,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하잖아요. 내 정체성, 구성, 그걸 서울강의 제목 같으면 자아표준모델이죠. 이거 설정해놓고 그것뿐이에요. 이래야 나답다는 것. 매일같이 생각이 이래야 나답다. 나는 여기서 나다운 것이 없다면 나는 내가 용서를 못하리라. 이런 거요.

누굴 따라가요? 안 따라가요. 이용하지 따라가지 않아요. 이용하지 안 따라갑니다.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는 따라가는 척을 해주지 절대로 안 따라가요. 나는 나로서 종결되는 겁니다. 내가 시작이고 내가 마감이에요. 그런데 이 자체가, 내가 여기에 죄인으로 산다는 이 자체도 주님의 변화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비춰서? 주어진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이런 인간들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그것도 언약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뭐 다른 말로 할 수도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주 되심의 흔적, 징후, 그것을 개봉하고 나팔 불어서 잠자는 흔적들아! 깨어나라! 와! 그러면 모든 개념들이 깨어나요. 해가 밝은 것은 봐주기였어요. 아침에 해 뜨는 것은 봐주기였지, 해가 하늘에 떠있는 것도 봐주는 거예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들, 인간들아! 거기에 대해서 너희들은 시비를 걸지 마! 어제 무지개이야기 기억이 나십니까? 이 땅에 사계절이 있는 것은 은혜의 차단막 때문에 봐주고 있는 것이지, 그걸 뜯어내버리면, 그걸 철거해버리면 이 땅은 저주 그 자체가 본래의 모습이에요. 본래의 모습.

이 땅에 있는 것들은 본래의 모습,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오게 되면 죽이라고 준비된 악마의 군대이름이었던 거예요. 오기만 하면 죽여 버린다는 것. 왜? 전쟁이 하늘에서 시작되어서 땅으로 꺼졌으니까. 잠자는 자들아 깨어나라. 그리고 마지막 천사를 해가지고 모든 것을 정리 정돈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일곱, 123456 이래 되죠. 가면 갈수록 발목 말단 부분의 색채가 짙어져요. 색채가 갈수록. 색채가 짙어지면서 123456, 다시 123456, 그 마지막 6에서 123456, 그럼 또 있느냐? 또 있지 않아요. 요한계시록 15장에 보게 되면 이게 마지막이라고 되어 있어요. 1절에, “또 하늘에 크고 다른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그러니까 주께서 마감을 일방적으로, 임의로 마감을 하는 자격자가 예수님뿐이에요. 우리가 살고 싶어도 못 살아요. 자연의 변화도 이걸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이 땅에서 고요히 지내는 것이 아니고, 17장 17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숫자를 외우기도 쉽죠. 17,17이니까.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이게 바로 인간들이“You`re my destiny”라고 했던, 눈에 보였던 세상 전부가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을,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심판주가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짐승한테 이 나라를 잠시 맡긴 거예요. 인수인계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인수인계한 조건이 뭐냐, 해는 니 자리에서 밝게 화사하게 비추라. 그래서 유치원 애들이 해를 그릴 때는 진짜 예쁘게 그릴 수 있도록 해를 하늘에 달아놓은 거예요. 물론 유치원 애들하고 그렇게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달은 또 예쁘게 해가지고 그렇게 해놔라. 언제까지냐, 응할 때까지.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충분히 속여 넘길 때까지. 눈에 비치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가 전부다, 내가 사는 목적은 거울에 비친 내가 사는 목적이야,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야, 라고 충분히 설득시켜라. 악마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은혜로부터 보호받는 생각은 하지 말고.

이게 악마가 얼마나 고객에게 속임수를 쓰는지 몰라요. 주님의 무지개 은혜로 보호받고 있는데, 그 보호가 어디서 왔는가? 신약을 따져보면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잖아요.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작살났죠. 뭐. 처참하게 망가졌죠. 그 다음부터는 그분이 피리 부는 소년, 그 피리 부는 소년이 성령이 아닙니까? 피리 부니까 소리가 막 날아가는 거예요.

이미 다 이루었다는 거. 끝났다는 거. 이 세상은 제거대상, 철거대상, 갉아냄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왜? 이 말씀이 응했기 때문에. 이제는 인수인계한 것을 악마와 더불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준비된, 영원한 공간이죠. 어둡고 그리고 좁은 공간. 공간이 응축되니까. 시간은 개봉이 되었어요. 한때, 두 때, 세 때, 네 때가 아니라, 세 때는 날아가 버렸어요. 한때, 두 때, 그 다음은 반 때. 점점 희미해져요. 그 다음이 있다면 반의 반 때가 되겠죠. 반의 제곱, 제곱.. 그 다음에 제로.

시간과 공간은 끝났죠. 왜? 마감은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가요. 예수님에게 빨려 들어갔다면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의미를 담아내겠다는 그 목적으로, 기능으로 시간과 공간이 악마의 손에 잠시 허락이 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20-09-24 01:23 
20200918제주특강d 사라질 자(요한계시록)-이 근호목사

처음이 나중을 만나는 그 과정, 인간에게는 아예 나중은 없어요. 인간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나중은 없어요. 인간에게 나중이 있으면 사람들은 부정적인 인식을 유포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싫어해요. 영원해야 해요. 인간에게는 이 세상이 영원해야 해요. 과학이 그렇게 가르쳤고 역경이 있으면 극복해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잠재된 능력이라고 애들에게 그렇게 교육을 시켜놓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전혀 그들에게는 배타시하는 책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배타하는 방법 중의 그 하나가 요한계시록 이거는 사도요한이 쓴 게 아니고 뒤에 고난 받는 교회가 너무 어려워가지고, 흩어진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도록 위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했다. 그런 내용이다. 그러니까 뒤죽박죽이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에 요한계시록을 집어넣은 것도 초기시대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나중에 200년 뒤에 정경 형성할 때, 그때 겨우 한번 넣어주자. 시대적 상황 봐가지고, 요한계시록이 있어줘야 로마제국이 마음이 하나 된다. 그래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 고개 끄덕이고 뭐 동의한다. 모든 신학자들은 다 동의하죠.

그런데 신학자들에게는 뭐가 없기 때문에? 바로 피리소리가 없어요. 인간의 현실 속에는 성령이라는 게 없어요. 예수도 없는데 성령이 있을 리가 있어요? 피리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예요. 피리소리는 어디서 왔는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번 강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자꾸 되풀이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작은 사건이에요. 그냥 한 남자가 죽은 작은 사건이 퍼지는 겁니다. 전체를 다 갉아먹는 겁니다. 이 세상이 빛이라면 불길한 사건, 그런 부정적 사건이 빛의 세계를 다 갉아먹는다. 이래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 내용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버티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자꾸 버티려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 역사라는 것이 전부다. 이 인식을 인간은 고집스럽게 그걸 죽을 때까지 안 버리죠. 근데 요한계시록의 모든 이 말들은 이 안에서 발현, 자극받아서 깨어나는 거예요. 모든 세상이. 발현, 쉽게 말해서 이게 뭐냐 하면은 아토피 현상이에요. 피부가 벌겋게 되는 것. 두드러기라도 괜찮아요. 인정하겠습니다. 아토피. 두드러기. 내 안에서 열이 나면서 세상에 대해서 눌렀는데 그 누름을 뚫고, 이거 눌렀는데 저쪽에서 발현되고 이거 누르면 이쪽에서 발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신종코로나 같은 것도 한 종류가 되겠죠.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면 진실은  뭐냐, 순수한 진리는 뭐냐, 세상은 그동안 노아언약 또는 십자가언약에서 지금 은혜로 유지되고 있었던 거예요. 유지되고 있으니까 여기에 모든 사물들과 모든 피조세계들이 모든 은혜를 다 받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팔 불고 대접을 함으로서, “야, 이제 우리 은혜 떠난다. 너희들도 은혜 벗어버리고 너희들도 이제 할 일 끝났다.” 이렇게 하게 되면, 은혜를 벗는 순간 그동안 우리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이 자연세계가 혜택이 아니고 질고를 주고 저주를 주는 거예요.

거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보면 가까운, 내가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겁니다.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다했건만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런 노래가 있잖아요. 그동안 내가 세상을 몰랐나보다.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상처를 주는 거예요. 세상이 우리를 배신하는 겁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은 나라는 인식, 세계를 보는 인식 이게 전부고, 눈에 보이는 이 자연과학의 대상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악마한테 인간의 대행자로서, 악마의 일의 대리자로서 충실하게 활용케 했던 겁니다. 악마에 속한 군병으로서, 군인으로서 인간들은 해왔던 거예요.

악마의 군대로서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를 일심으로, 한마음으로 다 모아서 살해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예수님을 죽여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선 자꾸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죽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바로 인간의 해석을 부정하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죽인 당사자가, 가까운 당사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죠. 그들의 전문이 뭐예요? 그들의 전문이 뭐였습니까? 율법해석이었잖아요. 율법해석은 진리해석이에요. 그 진리가 설 수 있을 때에야 우리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긍정이 돼요. 내가 구축한 모든 것이 그게 증거물을 확보할 수 있다고요.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말씀에 입각해서 이거는 옳은 결과라고, 말씀을 자기 태어남의 존재 자체를, 있음 자체를 보호하고 지키고 긍정하기 위한 용도로서 성경말씀을 인정한 겁니다.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죠. 나는 인간도 아니야.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예배 참석하는 것이 아니죠. 주여, 이 예배를 받아주옵소서. 제가 헌금을 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이거 왜 알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나의 존재를 그렇게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임시로 악마한테 넘겨준 나라예요. 넘겨준 나라.

자, 나라라고 하는 것은 제가 수요일에 설교를 했지만, 나라는 개인을 의미합니까? 집단을 의미합니까? 나라는 집단이죠. 집단. 집단은 모든 것을 뭐냐 하면은, 나라를 움직이는 모든 법은 개인적인 법이 아니고 그 집단이 하나 되기 위해서 본드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법을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도 유대인들은 하나의 유대사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단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죠. 교회법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독으로 오셨잖아요. 죽어버렸죠. 이제 이 악마의 세계가 하나같이 전부 다 예수님을 공격했을 때에 예수님의 하신 이야기가 인간세계 자체를 부정을 해버렸어요. 부정하는데, 그 부정하는 예수님 쪽에서 제시한 근거가 무엇이냐, 그거는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만,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게 되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구름을 타고 오는 것,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죠. 그러면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굽니까? 각인이죠.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과 예수님과의 정면대결. 배치가 딱 나오죠. 예수님 빼놓고 모든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적인 사람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주께서 이제는 은혜를 흔들기에 나서는데, 이 흔들기라고 하는 것은 덮어놓은 은혜를 회수해나간다. 철거해나간다. 이래 생각하면 돼요. 처음부터 이 땅은 저주받아야 되는 땅이잖아요. 그동안 사계절이 있고, 사계절이 있으려면 해가 제때에 뜨고 달도 제때에 달이 뜨고 해야 돼요. 모든 자연의 질서를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로 꽉 잡은 거예요. 많이 봐주고 있었던 겁니다. 때가 임할 때까지. 말씀이 응할 때까지. 완성을 볼 때까지 봐주고 있는 거예요. 그걸 뜯어버리면 그 안에 있는 인간들은 그 안에 혜택에 있다가 굉장히 괴로워하겠죠. 

그러면 여기서 괴로워한다는 뜻은 뭐냐 하면은 자기에게 은혜가 철거되게 되면 인간은 자기를 뭐로 봅니까? 거울보고 움직이니까 자기를 뭐로 봅니까? 산자로 여겼죠. 산자로 여기는 것을 주님께서는 뭐로 바꿉니까? 죽은 자로 바꾸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 주님이 주시는 환란을 해버리면 성도는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어제 봤는데 다시 보게 되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성도가 안 죽는 것이 아니고 죽어요.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다는 말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나의 전부를 다 가져갔기 때문에 나는 쭉정이,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종속당하는 거예요. 가벼운 마음으로.

왜? 나의 모든 자존심, 체면, 위신, 나의 이름, 이 전부를 주님이 탈취해갔어요. 이 탈취해갔다는 말이 어폐가 있는데, 그동안 은혜를 주신 것을 은혜 당사자가 와서 이거는 내 거야, 하고 가져간 거예요. 니 목숨은 주님 내 거야. 내가 언약을 위해서 사용할 거야. 오케이? 이래 된 거예요. 주님이 와서 달라고 하는데 드려야죠. 그게 종의 권한이 아닙니까? 처음에 “고맙습니다.” 해놓고는 달라고 하면 “내건데요.” 이러면 배신자가 되죠. 배~배신자가 되는 거죠. 좀 말을 더듬어줘야 해요. 송강호 흉내 내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다 본인도 모르게 예수님이 딱 등장하니까 배신자로 들통나버린 겁니다. 이 세상을 주님이 국가 통째로 짐승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그래요.

양도를 해줘야 선악과 따먹었다는 언약이 유효하게 되거든요. 인간이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니 내 말 안 믿지? 니 지금 농담으로 여기냐? 악마야! 와서 지배해! 지배하니까, 선악과 따먹으라고 충동질하는 그 악마와 인간이 짝짜꿍으로 한패가 된 거예요. 한패가 돼가지고 좀 따먹으면 어때,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게 아닙니까? 우리는 그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니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요. 그럼 날 사랑해보세요. 날 사랑하면 믿어줄게.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아이고, 싸가지도 없어. 싸가지도 없어.

죽어가면서도, 죽어가는 것은 죗값인데, 죄가 아예 없대. 죄가 아니면 왜 죽어요? 죽음까지는 너무 멀다. 그러면 왜 늙습니까? 화장발이 왜 안 먹히는데.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요. 지은 죄가 많아서. 신종코로나 백신 맞는다고 노력하고, 질본 서울대학교 나온 그 여자분 있잖아요. 그분은 머리가 왜 허연데요. 착한일 했는데 왜 허~해요. 죄지었죠. 뭐. 죄지어서 하얀 거예요. 늙어가는 거예요. 부모가 나를 낳은 게 아니에요. 죄가 나를 낳고 내가 또 외손녀를 낳고 한 거예요. 대를 이어서. 그게 좋다고 스마트 폰에 사진 찍어서 넣고 늘 바라보면서 이쁘다고 하고 있죠. 뭐가 죄가 이뻐? 죄가 죄를 낳은 거예요.

그러한 모든 인식을 해서,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성경에서 뭐라고 하던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게 전부고, 그게 나의 역사이어야 하고, 나는 그것을 위해서 행복과 나의 인생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 끝. 그것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본성이에요. 누가 건드리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뭐고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 있죠.

제가 전에 강의했는데 기억이 나는지 보세요. 교회를 누가 공격합니까? 일곱 교회가 공격을 해요. 왜냐하면 각자 교회가 있으니까. 이 교회 내 교회니까 교회답게 해보겠다는 거예요. 근데 그 일곱 교회가 교회를 공격한다고요. 주님은 양보 없죠. 겁박이 아닙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죠. 촛대를 옮기리라. 촛대 다 옮겨놨잖아요. 없잖아요. 없어요. 자기시대에 있다고 보지만 끝났어요. 없어요.

여러분들이 긴 드레스, 파티에 입는 고급지고 품격 있는 그런 드레스를 입고 청룡상 시상식이나 아카데미 시상식의 레드카펫을 밟았다고 생각해봅시다. 레드카펫에 기생충이 주인공이 되어 폼나게 옷 쫙 입고 작은 명품가방하나 딱 들고 이제 걸어가는데, 어떤 장난꾸러기가 카펫을 앞에서 쫙 당겨보세요. 꽈당 넘어지겠죠. 카펫을 잡아당겨본다고요. 와장창 넘어지고 품위고 위신이고 없죠. 우리는 이 폼을 잡는데 평생을 다 보내거든요.

이 시간과 공간은요, 점점 더 오므라진다니까요. 축소되고 시간은 점선이에요. 저는 이걸 이음새라고 하는데, 이 시간은 사라지고 주님의 세계와 이어지기 위한 그 이음새, 소켓을 사용하듯이 반 때에요. 반 때. 반 때가 반 때를 마중을 나온 거예요. 니가 죽인 예수가 니가 도리어 너를 살려내는 이음새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이 말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으리라고 하는 거예요. 천사를 통해서 하는 말은 복이 있으리라.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요. 근데 피리소리인데 요한계시록 2장 29절에서 보면 조건이 있어요. 성령이 너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근데 성령이 없으면 이게 피리 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알 길이 없죠.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날 때 분명히 자기는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었는데 같이 갔던 동행자는 뭐로 들었습니까? 이거 뭐 천둥을 치나? 이 근처에 비행장이 있나? 윙~~ 언어의 단절.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 다음부터 외치는 모든 이야기가 예수님이 외치는 것처럼 일반사람들에게는 의미의 단절로 주어지잖아요. 소속이 다르니까. 영역이 다르니까. 영역이 다른데 같이 중첩되어 있다 보니까 분명히 같은 인간인데 낯설게 되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분명히 사람으로 오셨잖아요. 대화해보면 안 통해요. 비유로 이야기를 했는데 비유가 더 어려워. 비유가 더 어려워요. 도대체 나에게서 마중나간 것하고 주께서 주신 것하고 이게 안 맞아요. 왜냐하면 발신자가 수신자를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수신자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요한계시록 12장 11절 말씀처럼 우리는 여기서 죽어야 돼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언약대로 주어진 환란으로 인하여 죽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한번 봅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심판하는 권세는 성도들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성도는 결국 이 땅에서 누굴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그 변화 있잖아요. 인자에서 어린양으로 가는 그 변화에 동승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 동승하는데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차표가 있어야 해요. 이마에 인을 받아야, 다 검색하고 버스에 태워줘요. 주님이 동승한 버스에 태워준다고요. 운명이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요. 이게 그들이에요. 그들은 어떤 주님이 주신 권세가 있어야죠.

요한계시록 누가 썼습니까? 성경에 보면 사도요한이 썼죠. 그러면 사도요한이 썼던 그 전의 책이 한권 있는데 그게 무슨 책이죠? 요한복음이죠. 주일학교 애들도 알겠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권세가 없으면 인간이 자기 믿음으로 버틸 수가 없어요. 나중에 치매 걸리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언약의 권세가 주어지죠. 야곱처럼. 아까 피리 부는 소년, 어떻게 주어진 소리를 내 쪽에서 철회할 수가 없어요. 나 이제 예수 안 믿겠다고 할 수가 없어요.

다시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이래 되어 있어요. 전설의 고향 같아. 얼굴은 없고 몸체만 있는.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짐승에게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 아, 이거는 내가 어떻게 나를 떠납니까? 내가 제일 귀한데. 근데 나보다 귀한 분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자기를 포기하고 그분을 따라 간다는 것. 이거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거는 힘입니다. 새로운 힘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20장 5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이다.

그러니까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은 첫째 부활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왜냐하면 사도바울처럼  마찬가지에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또는 그리스도의 권세가 산다. 내가 나에게 작용하는 힘 이상으로 주님이 내 힘의 위에 있고 주님이 주도하고 있다. 주도하고 있게 되면 나는 언약 따라서 살아가는 그게 “You`re my destiny”에요. 나의 운명. 언약이 나의 운명, 주님이 나의 운명이 돼버려요. 또 가수 린 초청해야겠네. 이미 나의 운명은 합격했어요. 그러면 이미 대학 수시 합격한 애들 뭐하고 놉니까? 여자들은 화장하는 법하고 남자들은 취미생활하고 뭐 교양 쌓는다고 하겠죠. 그 자체가 이거는 그동안 했던, 대학들어가기 전에 했던 그 일하고는 확연히 차이가 나겠죠. 유유자적함.

어떤 긴장하거나 심각한 일은 성도한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 코로나 걸리면 죽으면 그만이죠. 뭐.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언약의 수순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럼 거기에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동승하다보니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모든 사물에서 은혜가 사라지고 탈락하는 것이 니 눈에는 안 보이냐? 하고, 전도하게 됩니다. 니 눈에는. 어떤 사람이 70억 재산이 있는데, 참 내 인생 백억이 목표였는데 나이는 칠십이 되었고 삼십억이 모자라네. 내 인생 실패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70억마저도 은혜인데 눈에 안 보이냐?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전도입니다. 전도.

전도 내용이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도 세상 모든 내용을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방에 쓰레기도 있고 먼지도 있고 뭐 개털도 날리고 있죠. 그러면 청소기가지고 쭉 한번 밀어본다고요. 밀게 되면 청소기 안에 쓰레기 모아지는 곳이 있죠. 그 안을 보면 모든 잡동사니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쓰레기하고 먼지하고 다 들어가 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한 공간에 다 차지하고 있죠. 그러면 전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당신은 예수 믿으세요, 가 아니라 당신이 갖고 있는,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예수님이 도로 자기 것으로 가져가려고 합니다. 당신의 마음의 대처는? 이게 전도죠. 마음의 대처는?

그러니까 전도에서 성경말씀도 넣어야 되겠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이 되지 않은 게 없죠. 모든 먼지 다.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다 해버리니까. 스가랴에 보면, 스가랴에 나오는 천사가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스가랴에 천사의 활동이 꼭 숫자 4로 나타나요. 숫자 4는 뭐냐 하면은 동서남북 한 구석도 절대로 빼놓지 않아요. 철저하게 모든 것을 청소해버립니다. 천사는 융통성이 없는 기계와 같아가지고 감정도 없어요. 감정도. 바둑에서 인공지능 같아. 알파고 같아.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바둑이 5단인지 9단인지 묻지도 않고 그냥 바둑을 둬 나갑니다. 철저해요. 철저한 기계 같아요.

호텔 객실 청소하는, 물론 객실 청소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뭐 침 뱉고 이런 것도 있지만. 호텔 객실 청소하는 사람이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이 세상의 한 구석도 남기지 않고, 택한 백성 다 실수 없이 가져가고, 그리고 천국가지 못할 자들은 아무리 천국 가겠다고 기도해도 주께서는 거부하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의 특징은 기계같이 그렇게 움직입니다. 스가랴에서 천사가.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그 천사가 그 천사예요.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자, 계속 진도를 나가봅시다. 아까 17장부터 해보겠습니다. 17장 17절에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절,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이래 되어 있는데, 자 17장의 이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요, 17장 8절을 한번 봅시다. 이런 것을 설명하기가 좀 이렇게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 하면은, “네가 본 짐승은” 짐승이 나오죠. 짐승. 그러면 짐승이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짐승을 처리할 때 어떤 식으로 처리하느냐 하면은 바다를 없애버립니다. 왜냐 하면은 바다가 짐승의 출현지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없애버려요.

그러면 짐승은 바다에서 살다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무저갱으로 가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공간을 지배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 지배하기 때문에 공간설정도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은 예수님 마음대로에요. 바다에 살던 짐승에게 하나의 권력을 인양했던 것은 말씀이 응할 때까지예요. 예수님이 심판주 라는 사실을 알리기까지만 유효해요. 유효하고 그 외에는 짐승은 바다 자체가 날아가 버렸으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니까 바다는 없고 무저갱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거기에 악마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던 거짓선지자들부터 해가지고 옛뱀 다 들어가고 더구나 거기에 줄줄이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짐승 따라 줄줄이 가는 사람들이 누구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라고 하는데 그 사람은 죄지은 게 없어요. 죄지은 게 없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다만 이것이 지옥이라는 것을 몰랐던 그 죄 외에는 없어요.

누구나 어떤 사람이 죄지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건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은 죄지을 수 있는데, 저 사람을 봐! 저 사람은 죄 안 지었잖아.” 이게 성립이 될 때에, “봐! 저 사람처럼 죄 안 지어야 되는데 왜 죄 지었어?”라고 할 때에는 죄가 성립이 되는데,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있는 이상 굳이 죄를 지었다는 말을 어느 인간이 나서서 “너 죄지었지?”라고 할 권한 자가 누가 있습니까? 자기도 죄인주제에. 없잖아요.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지옥 불에 들어가느냐 하면은, 8절에 보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만 지옥 불에 간다는 거예요.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 그럼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어떻게 기록되느냐 하면은, 뭐 나하고 사전에 협의했습니까? “니 이름 기록해줄게.” 그런 게 있었습니까? 없어요. 뭐냐 하면은 영문도 모르게예요. 영문도 모르게. 영문도 모르게, 라는 노래한번 지을까요? 영문도 모르게. “나는 몰랐지. 이름이 있는지 몰랐지.”

내 이름 누가 도용할지 몰랐죠. 주님께서 보이스피싱도 아니고. 주님 마음대로 생명책에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몰랐죠. 몰랐는데 어느 날 삐리리~~ 피리소리가 들리면서 혼이 나가버린 거예요. 이게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태도로 봐서는 절대로 믿지 말아야 돼요. 아니, 믿을 건더기가 없어요. 뭘 보고 예수를 믿어요. 뭘 보고. 차라리 강감찬이나 믿지. 강감찬 믿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하고 차이점이 없어요. 둘 다 옛날 사람이니까. 옛날 사람이라고 믿어줘야 됩니까? 세종대왕 믿을까요? 존경하지.

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믿는다? 뭐? 그렇게 하면 당신이 나한테 뭐 줄 건데? 사람이 뭔가 양보를 했을 때는 반드시 얻는 것을 사전에 검토하고 난 뒤에 양보하기 마련이에요. 검토하고 난 뒤에. 그렇죠? 다 그렇지 않습니까? 검토하고 난 뒤에. 나 당신 사랑해. 그럼 사랑해주면 뭐 줄 건데? 그거는 사랑이 아니야. 개코같은 소리하고 있네. 뭐 집을 사준다든지, 차를 빼준다든지, 뭐가 있어야죠. 포르쉐를 빼준다든지, 그것도 월부로 빼준다. 뭐가 있어야 결혼을 하지. 아무것도 없는데. 뭐 줄 건데? 구라가 시작돼요. 이거 해줄게. 저거 해줄게. 참 믿고 싶지. 믿고 싶은데 소용이 없죠. 손에 물 안 묻히고 뭐 어떻게 해. 어떤 사람이 뭐 해줄게. 1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 시켜주고. 제주도도 해외인데. 아예 제주도에 살게 만들어줄게. 됐나? 뭐 이래 나오죠.

생명책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순교의 운명입니다. 따라서 그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은 차이남이에요. 지난 낮 설교인가, 차이 나는 것. 너에게 네 것이 없도록 해줄게. 니 속 알맹이 다 빼줄게. 다슬기처럼 알맹이 다 빼먹고 껍데기로 만들어줄게. 너에게 진짜 귀한 것, 이것만큼은 뺏어가지 마세요, 하는 것을 홀라당 내가 뺏어가 줄게. 됐냐? 이게 바로 니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증거예요. 니 자랑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을 읽어보세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됐습니다. 귀신들이 나에게 항복하는 것이 왜 기쁘죠? 왜 기쁩니까? 내가 예수 이름으로 병이 나가라고 해서 병이 나가면 왜 기쁩니까? 그러면 우리가 울까요? 앉은뱅이보고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까 “아! 당신 덕분에 일어나 걷게 되었어요.” 할 때에 우리는 엉엉 울까요? 이거는 아닌데, 하면서 엉엉 울까요? 왜 좋아하죠? 그 사람이 병 낫는 것이 좋을까요? 내가 신앙인 것이 확인돼서 좋을까요?

‘아, 내가 이 정도였구나!’라는 것이 뒤에 확인의 기쁨이 된다는 말은, 평소에 나는 내 기쁜 것은 내가 알아서 챙기고 싶어라, 하는 본심이 들통 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도록 권능을 준 것은 제자들의 수준이 기껏 그것밖에 안 된다. 니는 귀신 쫓아내고 나를 버릴 거야. 니 힘으로 니 능력으로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정작 너는 나를 버릴 거야. 다 버렸잖아요.

일이 잘 풀린다, 부자 된다, 갑자기 몸이 하나도 안 아프다, 주의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지금 엉뚱한데 가 있어요. 뭐 이 상태로 가주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갈 수가 있어요. 가정의 일상에 문제가 없다. 애들 시험 보면 무조건 백점이라 백점이 당연하다.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뭐 공부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자기가 알아서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래가지고 남들이 못 가는 좋은 대학 다 가고. 자기가 알아서 산에 갖다 올게 하더니 사법고시 수시합격하고.

뭐 이런 일만 생기고 있어버리면, 이건 도대체 나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다 박탈당해버려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은혜가 철거되는 모양새가 있어줘야 내가 그렇게 알고 싶던 본색이 저주일색이어야 하고, 저주받는 것이 나에게 딱 맞다는 것을, 죄로 태어났기 때문에 저주가 합당하는 것을, 그 기회를 우리가 놓치게 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이 있을까요? 없어요. 제자들보고 귀신 쫓아내라고 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게 우리 모습이지 다른 모습이 어디에 있겠어요?

어떤 잘난 사람이 으스대면서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들 이게 성도의 하나의 요령인데요. 제일 따질 것은 뭐냐, 속으로 해야지 겉으로 하면 또 계약이 파기되니까. 애들 안 맡기고 하면 곤란하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끝은 어디에요?” 지옥이죠.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들의 행동과 말속에 약속이, 언약이 안 담겨있어요. 언약이. 하나님의 아브라함언약, 야곱언약이 담겨있지 않아요. 우리는 나그네고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는 그게 전혀 담겨있지 않아요. 자기 자식자랑하고 이래 한다고요. 그게 뭐 남의 이야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걸 아시고, 자기들은 좋다고, 자기들은 이제 예수님 안 버리고 예수님과 한 나라에 가는 것이 맞다고 확신했다고 생각하죠. 왜? 그런 증거를 찾았으니까. 그 증거가 뭡니까? 그걸 우리에게 어떻게 실제적으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겠지 않습니까? 근데 귀신이 떠나고 병이 고쳐지니까, 아, 누가 뭐래도 우리는 천당 가겠다. 이런 자기 자신의 단도리 하는 그런 사건들. 근데 여기에 주님께서는 뭘 대비시킵니까? 생명책. 이거는 생뚱 맞는 이야기에요. 생명책은 주님 가신 길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내용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우주 자체, 이 세상 자체를 하나의 연극무대로 본다면 사람들이 아는 출입구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이 샛길, 아무도 가지 않는 길로 주님이 계단에 넘어지고 빠졌을 때에 남은 열두 제자가 같이 빠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못 빠져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주와 함께 합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합세한다는 것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안 돼요. 이 합세한다는 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세례에 연합한다. 합세한다. 쉽게 말하면 동승했다, 합세했다, 내 운명은 없어, 주께서 내 운명은 강제로 다 탈취해 가버렸어. 주님이 쓰시겠다고, 주님이 십자가 증거 하겠다고,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몽땅 다 가져가버렸어. 개뿔도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 없으니까 뭐까지 날아가 버렸어요? 그동안 쌓아놓았던 나의 선행과 의로움도, 내 실적 좋은, 남한테 착한 일하고, 배려한 거, 구제하고 헌금한 거, 다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없는 것을 없다고 하면 안 되고. 주일 날 설교했잖아요. 이걸 가지고 차이라고 하죠. 차이. 니는 파란색이야? 검은색이야? 아니야. 나는 중간이야. 중간이 없는데? 그 없는 게 너야. 이런 생명책이 있는 세상이야? 생명책이 없는 세상이야? 나는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책은 주님이 관련된 연관성의 주도자기 때문에 이게 내 소유라고 할 수가 없어요. 생명책에 있는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에 속한 이름이기 때문에, 여전히 주님의 관할 하에 있어요. 내 관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뭐냐 하면은 생명책에 있는 자는, 우리는 아직도 육신에 있기 때문에 생명책에 없는 이 짐승의 나라와 주님의 나라의 차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간격, 빈 공터죠. 우리가. 빈 공터입니다. 그러면 빈 공터가 아닌 게 뭘까요? 있음이겠죠. 그 있음은 어떻게 되는가? 있음은 이 세상의 나라가 한 220개가 되는데요. 그중에서 정상적으로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많은데. 다 합쳐서 220개가 된다고 합시다. 그 나라가 있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220개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볼 것이요(계1:7)라고 했으니까. 예수님 구름타고 오시는 한분, 손오공처럼 구름타고 오시는 한분 빼놓고, 나머지기는 같은 영역으로 봐가지고 이걸 하나로 봐요. 하나. 이걸 하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큰 성 바벨론. 더는 더 없는 것. 만약에 더 큰 나라가 있다면 더 생기잖아요. 최종적인 큰 나라는 통합되어야 그게 마지막 큰 나라예요. 더 큰 게 없는 최종적인 큰 나라.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게 알파요, 마감이에요. 모든 게 마감이 되면 주님은 이 세상을, 짐승의 나라를 하나로 보는 겁니다.

그 안에는 누구의 속성이 들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넘겨준, 악마에게 넘겨줬기 때문에 악마의 속성이 모든 인간에게 한 마음이 되게 하는 거예요. 누구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용없는 존재라는 것. 내가 그 현장에 있어도 죽여야 되고, 이미 죽은 분이라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다. 이것은 어떤 누가 와도 부인하지 못하는 염연한 현실이다. 비가 왜 오는지 모르겠지만, 모르는 것은 빼놓고 눈에 보이는 곡식 잘 되는 것만 인정하자. 비가 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오는지 모르겠지만. 비를 통해서 우리가 수력발전 만들고 전기 만들고 이렇게 농사 잘 지어서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 아니냐.

이것이 너무나 보편적 상식이고, 이 상식 하에서 언어가 생겼고, 언어는 그 상식을 실어 나르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이 성사된다면, 이 의사소통이 결국 모든 차이남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거예요. 통합시키는 것.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7장, 18장에는 큰 성이 하나밖에 없죠. 그만큼 모든 이 세상은 의사소통이 서로 다 통하고 있다. 따라서 음녀 바벨론을 설명할 때는 뭐로 설명해야 되는가, 뭐 요한계시록으로 설명해도 되지만, 그냥 요새 어느 프로가 참 재미있어? 이런 프로가 재미있지. 이런 이야기가 바로 하나 안에 들어있는 소통의 이야기예요.

돈보다 친구가 좋다는 노래가 있어요. 말도 안 되는 노래거든요. 그 노래가 무슨 노래냐 하면 보약 같은 친구라. 들어봤어요? 보약 같은 친구. 통하는 게 있어요. 말이 통해요. 여자들은 삐지지만 남자들은 술 한 잔 먹으면 다 끝난다고 하는데요. 물론 그것도 낭설이지만. 어쨌든 간에 아무리 원수라고 할지라도 오늘은 동지가 되잖아요. 정치판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 하나가 되기 위해서 수요설교에 했던 것을 잠깐 언급하면, 무역에 필요한 상호법제정을 만들면서 여호와 하나님 사상은, 이방나라와 무역하기 위해서 여호와 사상은 희석되고 날아가 버려요. 그들의 사상을 이스라엘에, 유다에 꽂아 넣지 아니하면 수출 자체가 막히게 돼요.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 국가의 법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는 수출에 보태는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농업정책을 농민들에게 강요하게 되겠죠. 그러면 그 농민들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땅의 기업은, 주인이 결국은 작물을 하지 못하고, 그거는 도시에 잉여농산물이 돼서 값을 안 쳐주니까, 도시에서 잘 팔리는 생산물을 농촌에서 재배해야 되니까, 그러면 그 작물을 엎어버리든지 아니면 토지를 지주한테 팔아먹어야죠. 팔아야 되죠. 도시에 가서 임금 노동자 하는 것이 수입이 나으니까. 제주도에 있어봤자 돈도 안 되는데 서울로 가면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사는 데 도움이 돼요. 이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큰 성 바벨론이야기입니까?

여기에 무슨 흉악한 게 있고, 짐승 악마의 발톱이 있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도대체 이 평범한 서울 생활이 그게 무슨 짐승이고, 참람한 이름들이 있고, 이 음녀야! 바람도 안 피웠는데 무슨 음녀, 음녀가 받을 심판이 뭐 지독하다.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이, 모든 작물과 모든 토지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자극받는 거예요. 자극받아서 아토피 현상을 일으키는 겁니다. 은혜 없을 때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적그리스도적이고,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속성이 나와 이 세상을 지금도 동일하게 덮고 있는지, 그 사실을 이렇게 일곱 대접을 통해서, 철거하는 도중에서 마지막 짙은 색깔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거 비슷한 이야기가 디모데후서에 있는데요. 디모데후서 잠시만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을 보게 되면, “니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이래 되어 있죠. 이게 결론인데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나밖에 모른다. 개인주의다. 요즘 자식 키우는 사람들은 다 알겠죠. 좀 컸다 하면 방문 안에서 잠가버리잖아요. 센 엄마는 애들 방 자물쇠를 떼버려요. 못 잠그게. 잠그고 너 이상한 거 보려고 하지? 아주 강한 엄마. 강한 엄마나 그렇지 보통 유들유들한 엄마는 아들한테 휘둘려서, 아들아! 아들아! 용어가 아들이 뭐예요? 아들아 뭐 사줄까?

이런 엄마한테는 뭐 자식은 끝났습니다. 개인주의밖에 안돼요. 못다한 한을 자기자식한테 은근히 기대해가지고,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 개인주의를 키우는 거예요. 내가 못다한 내 개인주의의 한풀이를 자식한테 미루는 거예요. 또 방금 돌을 맞이한 손자한테 은근히 기대를 해가지고 방긋 웃으라고 하면 웃고 이런 거 하죠. 도대체 대물림이 되는 거예요. 대물림. 근데 그 대물림을 시간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은 이미 갇혀있는 시간이에요. 이 세상은. 악마의 시간. 끝났어요. 이 세상은 시간도 반 때가 돼서 시간도 없어지고 공간도 없어지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만들어놨느냐, 나를 왜 만들어놨습니까? 사라지게 만드는 거예요. 나를 만드는 이유는 사라지게 만드는 거예요. 이스라엘 왜 만들었는가, 사라지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사라져서 주께 이익이 될 게 뭐 있느냐, 언약이 완성되잖아요. 그게 이익 되면 끝났지 뭐. 하나님은 그거만 완성되면 되죠. 내 약속한대로 이루어지면 끝나는 거죠. 뭐. 니 사정을 내가 고려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주여, 저를 어찌하여 생각하지 않습니까? 니가 뭔데 왜 생각하느냐?

시편 8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생각 하냐고 할 때는 조건이 있어요. 다윗의 이름이 뭡니까? 인자예요. 인자.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을 이렇게 생각하시다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나중에 천사보다 위에 있게 하시고. 이거는 예수님이 오시는 하나의 경로, 절차예요. 절차. 죄인 되게 하시고 주가 되시게 하는 그 경로를, 시편 8편에서 다윗이 미리 예언자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루엣, 그림자기 때문에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모든 세상이 예수님 자기이야기에요. 자기가 발신자고 수신자가 되고.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 18절, 19절에 보면, 내가 하는 계획에 차질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토를 다는 것은 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고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다. 18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재앙도 주님을 위한 재앙이지, 우리를 뭐 괴롭히려고 하는 재앙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 되시기 위해서 필요한 재앙이기 때문에,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재앙이 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끝내면서 이야기 드리고 싶은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숫자화 된다는 것. 그리고 숫자화 되는 이유는 규격화. 총 제목을 정하라면 임시적이지만 주님의 규격화 작업. 하여튼 규격화가 되는 거예요. 언약으로 짜임새 있게 선반위에 놓을 것을 놓고, 제자리에 있을 것은 있고, 이게 바로 창조자가 피조물을 다루시는 방법이에요. 니는 니 자리. 너는 천국으로. 너는 지옥으로. 저 보내주세요! 가만히 있어보자. 명단에 없네. 너는 지옥! 넣어주세요! 까불지 마! 이건 내 권한이다. 나 빼놓고 너는 그걸 요구할 권한이 없다. 내가 가라고 하면 가! 생명책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뭐 어떤 짓을 하던 간에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가라 이 말이에요. 

자, 정말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0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 생명책이 나오죠. 15절에. 14절을 먼저 보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선언적이죠. 이걸 선언적이라고 합니다. 변경이 안 되는 거예요. 변경이 안 되는 그 피리소리가 우리한테 행복과 기쁨이 되어야 해요.

왜? 우리는 항상 내 성질도 모르니까. 맨날 정신 차린다고 하는데 내려오고 나면 휴대폰 잊어버리고 와가지고 또 올라가고. 호텔 객실까지 또 올라가고. 우리가 나를 못 믿어요. 아니, 안 믿어야 돼요. 믿지 마세요. 껍데기를 왜 믿어요. 내 안의 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로 채워지도록,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채워져서 생명책이 없는 세상과 이 제주도와, 생명책이 있는 이 제주도와의 이 차이, 사시는 동안에나 많이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뭘 해도 약속이 안 나오는데, 우리 자신은 과연 약속이 나오는지,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게 해주시고,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십자가의 은혜덩어리로 산다면, 우리 입에서 주님의 십자가 약속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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