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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21:59:51 조회 : 1299         
사무엘상 16강 (전체성) , 마태복음 78강(전치사 인생) 16072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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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6-08-12 13:02 
전체성 (사무엘상 4: 1-11 )                                                                                               대전-(사무엘16강)

  

 

이근호

 



2016년 7월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4:1-11

  

 

 

(삼상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삼상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삼상4:3)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삼상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삼상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삼상4: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삼상4: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삼상4: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 인을 친 신들이니라

 

(삼상4: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삼상4: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삼상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4장하겠습니다. 지난 사무엘상 3장은 교체하는 장면이에요. 엘리 제사장에서 어린 사무엘로 교체가 돼야 되는데 아직 사무엘은 어려서 교체가 안 되어 있고 다만 하나님이 교체하겠다는 방침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체하는 것이 성경에서 난해 하다면 난해한 것 중 하나가 어린 사무엘 같은 경우의 아이디어는 전혀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거에요.

 

엘리 제사장 시대에는 왕이 없었어요. 왕은 사울이 처음 이었고 왕이 없을 때는 누가 통제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통제하고 제사장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냐하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많은 백성들과 관계가 나오는데 이 관계는 목적이 있어요. 거룩한 백성 또는 거룩한 나라, 이 관계 수립에 모든 게 모아집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백성들하고 관계는 거룩한 관계가 될 경우에만 생존이 됩니다. 이스라엘 말고 다른 나라는 양식만 있으면 살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되요. 오늘날 성도들이 목표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되요.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데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그거 하고는 관계없고 “죽어도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살았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거에요. 먹고 어떻게 몇 년 살고 이거는 전혀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유대인의 기도나 이방인의 기도를 치신 거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방식으로 살고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방식으로 살면서 이 기도들은 어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딱 하나 뿐이에요. 시편 84편에 나오지요.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고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함께 있는 것.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 함께 사는 것, 이것을 신약에서는 연합이라고 하고 (연합=세례) 결합 된 것,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에 대해 세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들은 물, 불, 성령에 대해 관심이 있는데 사실은 세례 자체에 관심을 둬야 됩니다. 세례 자체가 연합이에요. 누구하고의 연합이야?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움직이는 데로 같이 움직인다는 거에요. 만약에 벌통이 있는 곳에 설탕을 가져가면 벌들이 어떻게 합니까? 맛있다고 우르르 따라 가지요. 바로 이 모습, 그 장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어린 양이 가는 곳에 정결한 양들이 졸졸 따라 가지요. 함께 하는 거에요.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요한복음 14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이유가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처럼 너희와 함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함께 있는 것보다 단독적으로 사는 것, 나 혼자 살아남는 것, 이게 다급한 문제이고 시급한 문제라 이것 때문에 아웅다웅하고 신경쓰고 그럽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거룩한 분과 어떻게 함께 사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에게서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어요. 이 점이 어려운데 엘리 제사장이 있어요. 엘리 제사장이 지배하니까 이걸 전체라 하면 되요. 전부를 엘리 제사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틈이 없어요. 꽉 짜여져 있어요. 전부 엘리 제사장 통치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구멍이 나버리지요. 구멍이 나면서 어린 아이 사무엘이 툭 튀어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찢어지냐 하면 한 부분만 찢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가 또는 ‘전체성’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아요. 열왕기 상, 하, 역대 상, 하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남북 왕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방법과 같아요.

 

하나님이 구멍을 내서 전체성에서 톡 튀어 나오니까 엘리 제사장은 포기를 했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바꿔치기 하시는 모양이구나! 하는데 열왕기, 역대기 때 왕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냐 하면 밟아 버려요. 밟으시니까 여기에 뭐가 튀냐 하면 피가 나옵니다. 사가랴의 피, 즉 선지자의 피에요.

 

헤롯이 아기 예수님 때 어떻게 했습니까?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했지요. 바로 이것이 ‘특이성’인데 성도는 바로 이 특이성에 주목하는 거에요.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기도를 한다, 생존에 유리하다, 이것을 하는 게 아니고 다들 아는 이야기, KBS, MBC,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 핵 문제, 사드 문제등 아는 이야기 말고 특이한 것,

 

남에게 이야기해도 이게 뭐야? 라고 모를 정도의 특이성을 뽑아내야 되요. 특이성이 나와야 되요. 그 특이성이 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의 어떤 힘이 복음이라는 특이성을 얼마나 짓밟고 등장하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는 지! 그 특이성을 발굴하고 찾아낼 줄 아는 것이 성도입니다. 복음의 현장을 알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구박을 받고 핍박 받는지를 알 때 고린도후서

 

(고후 4:4 )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활동한다는 그 말씀 자체가 현실적으로 실감나는 거에요. 그냥 책 속에 묵혀있는 말씀이 아니고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으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흐리게 한다, 가린다고 글자로 써 있는데 단순히 글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고 현재를 이야기 한다는 거지요.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난중일기에 있어도 그건 옛날이야기에요. 이순신 장군은 이미 돌아가신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그 말은 옛날 역사 속에서 멈춰서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책 속에 유물로서 있을 뿐이지요. 그래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 할 수 있어요. 옛날 그 때 그 장군을, 하지만 지금 이순신 장군은 없어요. 이순신 장군 집안사람은 있겠지만 이순신 장군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히브리서 4장에 살아 있다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할 게 없다’ 이겁니다. 만약에 내가 할 것이 있다면 내가 살아 있음이 주님 살아 있음을 가로 막아 버려요. 내가 살아 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 막는 다는 이 말이 한국 교회에서 동의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히4: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도 살아 있으면 같이 협력해서 하늘나라를 확장하면 되지 그게 왜 가로막는 게 되냐? 말씀은 살아있고 살아있는 말씀을 목사가 알아서 사람들에게 지시하면 그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람의 지시에 따라서 많은 영광과 성령의 열매를 듬뿍 풍성하게 맺으면 그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이 땅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지상 천국에 대한 취지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뭘 모르냐 하면 오늘 본문의 엘리 제사장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에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 보겠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뭐로 통치한다고 했습니까? 세자로 하면 전체성이라 했지요? 기억납니까? 전체성으로 하지요. 전체성이 뭡니까? 하나님과 제사장이 유일한 통로에요. 그 당시에 왕이 없던 시절에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로로 삼는다. 그러면 통로를 하는 목적이 뭡니까?

 

복습 들어갑니다. 거룩한 백성 만드는 방식은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그 당시의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장이 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가 손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주께서 세워 줬잖아요. 세워 졌으면 자기가 전체성으로 통제를 해야 되지요. 여기에 자기가 구멍이 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겠지요. 예상 못해요. 전체성 통치라는 것은 어떤 미흡한 구멍을 절대 용납해서는 안돼요.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왕 노릇’이라고 합니다. 왕 노릇이라는 것은 권력의 누수가 생기면 왕이 아니에요. 완전하게 덮어서 통치가 돼야 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에 구멍을 뚫어 버렸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 이런 제사장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뭐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이 일을 따로 하시겠지!”라고 미리 구멍 날 것을 알고 예상하는 제사장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왜 말이 안되냐 하면 미리 구멍을 예상해 버리면 나머지가 되잖아요.

 

(전체성+⍺=전체성) 되요. 이건 온전한 통치가 아니에요. 이렇게 되면 어린 사무엘의 말에 놀라지 않습니다. “난 예상했었는데 뭐!” 그래서 깨어질 때 예상했기 때문에 깨어짐이 별로 와르르 무너지지 않아요. 보통 초콜릿이 칸막이로 되어 있잖아요. 그중 한 조각을 딱 떼면 나머지는 그대로 있지요? 칸막이 한 부분만 떨어지지요.

 

그런데 만약에 유리창이라면 한 군데 깨면 다 깨지겠지요? 어린 사무엘의 등장은 그렇게 유리창을 노리고 등장한 겁니다. 다 깨어지는 거에요. “아이고! 사무엘아~ 네가 똑똑한 걸 사전에 알아봤어!” 이런 것은 없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나는 요만큼 착한데 요만큼 못됐다라고 할 때 못된 부분을 예수님이 메워 주시면 더불어 나는 전체가 착하다. 이렇게 해서 예수 믿는 것,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나는 온전히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것이지 일부는 괜찮은데 일부 “선은 못해”! 하는 그 대목만 과외 교사처럼 주께서 오셔서 “이건 괜찮은데 요건 부족하구나! 이렇게 더 보태라!” 이렇게 보태서 구원 받는 법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하나의 연못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십자가가 퐁당! 던져지면 연못 끝까지 다 죄인이 돼버려요. 몽땅 다 죄인 되요.

 

지금 까지 살아 온 것과 앞으로 살아갈 것까지 몽땅 다 죄가 되는 것이지 괜찮은 것 따로 주께서 봐주고 나쁜 것만 골라서 용서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일괄적으로 나빴고 일괄적으로 용서 되요. 그래서 십자가를 알고 그 다음에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행할 수 있고 남아 있는 대목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18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새 언약에 관한 대목인데요.

  

(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 없느니라에서 ᷰ에 뭘 집어넣어 보겠습니다.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 예배 ] 드릴 것이 없느니라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맞지요. 이것이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알고 답변 하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합니다. 그 사람들이 “성령 받았으니 본격적으로 예배 드려야지! 왜 예배마저 드릴 것이 없다고 하니 그럼 예배를 안 드린다는 말이야?” 이렇게 나와요.

 

교회는 예배 때문에 운영이 되요. 모든 돈은 예배라는 명목으로 내는 겁니다. 예배를 위해서 목사나 전도사, 부목사들이 모든 것이 예배를 위해서 있는데 예배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해 버리면 그럼 집구석에서 혼자 예배드리면 되겠네! 이런 논리로 돼서 집구석에서 혼자 예배드리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에요. 집구석에서 혼자 예배드리면 예배당 유지 할 근거가 없어지면 자기 집에 있는 통장의 돈을 예배당까지 가져 올 이유가 없게 되요. 근원, 바탕 자체가 사라져 버려요.

 

“구원 받았으니까 그럼 집에 있지 말고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려야지요~” 이유가 뭔데? 뭐 딱히 이유가 없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 모이기를 힘쓰라 이런 게 있어요. 그럼 집에 모이면 되잖아! 초대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는데 돌아가면서 모였잖아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 대목을 하기 전에 쉽게 하기위해서 예를 들테니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중학교 학생이 오늘 버스를 타고 오는데 저희 집에서 동대구역 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데 학생 둘이서 이야기를 해요. 한 아이가 짜증을 내며 방학 숙제를 내줬는데 선생님이 방법을 이야기 안 해줬다는 거에요. 얼마나 복음적인지! 진짜 복음적이에요. 애가 짜증내는 거에요. 선생님께서 숙제를 이 만큼 내줬는데 숙제를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방법을 빼고 해오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아이가 친구하고 얘기 하면서 화를 막 내는 거에요. 방법도 이야기 안 해주고 숙제 내줬다고 그 소릴 딱 들으니까 “야~ 복음을 설명하는데 저것보다 더 확실 한 게 없구나!” 천국 이야기 하시면서 뭐를 이야기 안 하겠어요? 예수님께서, 천국 가는 방법을 이야기 안 해 주시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히브리서가 구약입니까? 신약입니까? 신약이죠. 지금 우리가 하는 구약 이야기 하는 겁니다. 구약도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를 하니까 그것을 뭐로 봤냐 하면 지시와 명령 이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뭐로 생각하냐 하면 이것을 방법으로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방법으로 생각하는 순간 뭘 놓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을 자격 없음’ 이 사실이 가리워져 버립니다. 이게 감추어져버려요. 내가 여기 있다, 신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단지 방법만 이야기해시고 그 방법에 따라서 충실히 순종 할테니까 여기 있는 나를 사슬로 묶던지 하늘로 당겨 주옵소서!라는 의식 자체가 뭐가 문제 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에요.

 

내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성경에 안 나와요. 성경은 창세기 3장부터 애초에 없애버렸습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요. 에덴동산에 돌아갈 자격이 없어요. 추방되었고 거기에 오지 말라는 의지로 용역까지 두고 경비원까지 세워나서 에덴동산으로 오는 동쪽 길을 아주 차단시키고 말았습니다. 없습니다.

 

아까 그 선생님이 훌륭한 선생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임의대로 그 분을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치고 방법을 이야기해주지 않고 방학 숙제를 내준 선생님을 변호해 보겠습니다. 그 숙제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서 방법을 찾는 것이 그것이 바로 방학 숙제에요.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 찾아가는 것, 방법을 찾는 거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원과 천국을 이야기하시는 것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방법을 정면으로 충돌되는 숨겨진 이미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생각과 같은 거에요. 나 여기 있으니까 데려 가시오, 맡겨 놓은 적 있습니까? 천국과 구원을, 인간을 천국 보내려면 애초부터 쫓아내질 말던지, 애초부터 그런 선악과 같은 위험스러운 나무를 에덴동산에 둘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철없이 어릴 때 조카를 보라고 하니까 상위의 고추장을 치웠어야 했는데 안 치우고 그냥 나뒀어요. 그랬더니 숙모가 와서는 조카 왜 고추장을 안 치웁니까? 먹어보면 지가 매워서 안 먹겠지 해서 제가 욕을 얼마나 얻어먹었었다고요.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봐도 출발점 자체가 이미 다른 데서 출발해요. 주께서는 출발하실 때 공백에서 출발해요. 공백 또는 공허, 이걸 한자로 하면 ‘無’ 이것을 신약에선 ‘죽음’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어디로 가느냐? 원래 우리 자리로 가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그게 연합이고 세례에요.

 

(롬 6: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래서 원래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원래 자리로는 못 찾아 가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먼저 그 자리로 가셨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께 저주받아 버림받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사실은 죄 없는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고 죄 있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대우, 그 처벌을 받아야 되요.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구원받으려고 설치고 다니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자기 자신을 아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내 대신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에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시는 거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버리듯이, 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버린다는 말로 하지 않고 내어준다고 해요.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저리 가!” 하고 던져 버리는 거에요. “죄의 세상에서 살아!” 내치는 거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갖고 있으나 그것을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느니라, 자꾸 어느 자리를 찾아가요. 누가 가라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가요.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누가 죽이는 게 아니에요. 본인이 아버지가 지정하신 지정된 자리로 아버지의 뜻이 마감되고 이루어지는 자리.

 

(요 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에요. 거기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고 난 뒤의 말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스스로 가시는 십자가의 자리,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가 진다? 본인이 지시는 거에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 이번 수련에서 나올수도 있어요.

  

(마 16: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스스로 앞장서서 가시는 거에요. 졸졸 따라가면 되요. 어떻게? 너희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면 되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특이성이에요. 엘리가 통치하는 전체성 속에서 작은 어린 사무엘인데 역사는 엘리 쪽으로 가는 게 아니고 어느 쪽으로 가느냐? 어린 사무엘을 가지고 이미 시작됩니다. 어린 사무엘이 뭘 알겠어요? 어린 사무엘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미 주변이 꿈틀거립니다. 움찔움찔 꿈틀꿈틀, 그런데 꿈틀거리는 대목이 본문 사무엘상 2절 누가 읽어보세요. 몇 명 죽었어요? 이스라엘 죽은 군사가 세상에! 거룩한 백성이 사천 명입니다. 주변국은 여호와도 안 믿어요. 여러 우상들을 섬겨요. 블레셋은 다곤신, 그런데 그 쪽이 승리하고 누가 죽어요? 알토란같은 이쪽 사천 명이 죽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지요?

 

(삼상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참고> 블레셋 족속은 세 개의 신을 숭배했다.

① 가사와 아스돗 사람들이 숭배했던 다곤 신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물고기 모양 )

② 아스글론 사람들이 숭배한 풍요와 다산의 여신 아스다롯.

③ 에그론 사람들이 숭배했던 파리 모양의 우상 바알세붑 (왕하1:1-6)

 

뭔가 조짐이 있지요? 징후가 있지요? 징조가 있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엘리의 통치가 먹히더라? 안 먹히더라? 안 먹히는 역사로 주께서 드디어 역사의 노선을 바꾼 거에요. 영화 부산 행처럼 기차 안에 좀비가 탔든 뭐가 탔든, 관객 수가 900만이 넘었다는데, 기차의 방향을 틀어요. 뭐가 없습니까? 제사장이 무용지물이에요. 소용없어요. 그러나 뭐는 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있어요.



“내 백성을 반드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리라”그리고 모세에게 준 율법도 있잖아요. 다 있고 제사장이 율법대로 제사도 드리고 다 했다는 말이죠. 했는데 왜 사천 명이 죽느냐? 뭔가 기차가 이상한 기차가 되었어요. 고장 났는지 뭔가 문제 있어요. 자! 숙제가 뭐냐 하면 사천 명 죽는 거에요. 그럼 사천 명이나 죽으니까 이 나라야~ 똑바로 한번 살아봐라!라고 엘리에게 내놓을 때,

 

엘리가 그 숙제를 하는 데 방법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매사가 이런 식이에요. 엘리 제사장에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전체성의 속성 때문에 그래요. 다시 해보면 전체성이란 말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몽땅 다 바람하나 들어 올 것 없이 비닐로 꽁꽁 맨 것같이 이럴 때 전체성이라 해요. 그것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들에겐 언약궤가 있습니다. 계속 진도 나가보면 3절 누가 읽어 보세요.

  

(삼상4:3)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전체성에 있는 그들은 언약궤가 있는 한 민수기 10장의 말씀처럼 절대로 우리가 패배할 일이 없다. 우리 군대가 죽는 일은 없다. 비록 사천 명이 죽었지만 다시 언약궤로 밀어 붙이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언약궤가 어떻게 됩니까? 빼앗기죠. 야! 이거 구멍이 생겼는데요. 어쩌면 좋겠어요? 언약궤를 빼앗겼어요. 사무엘은 아직 어리고 대책이 없어요.

 

이미 패배 자체가 구원의 성사입니다. 이 특이성을 알아야 되요. 패배 자체가 이미 구원이 시작된 거에요. 패배 자체가 계시가 된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뭘 믿었다? 전체성을 그들은 철썩 같이 믿은 겁니다. 전체성이 허리케인 같은 바람에 뚜껑이 날라 갈 판이에요. 가발을 쓴 아저씨가 가발이 날라 가면 좀 민망하잖아요. 꼭꼭 눌러서 안 들키도록 해야 되는데 바람에 날아가면 뭐가 되는가? 민머리.

  

가렸던 뚜껑을, 가면을 확! 재껴버립니다. 그러면 수치를 당하겠지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으로” 복음을 아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심판 하실 때 그동안 자기를 가렸던 모든 것을 전부 다 두꺼운 것들을 벗겨 버리는 거에요. 오늘 아침에 해외토픽을 보니까 어떤 여자들이 화장을 했는데 백 겹을 하는 게 나왔어요. 두꺼워서 얼굴이 괴물이 되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산들아~(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합니다. 주께선 다 제껴버려요. 큰 교회건 작은 교회 건, 세례 받았다, 학습 받았다, 예배 드렸다, 전부 다 벗겨 버려요. 민머리 같이 자기 속내를 다 드러내는 그 작업이 바로 이미 구원이 시작된 작업이에요. 페인트 칠 할 때 녹이 슨 것을 그대로 하면 안되요. 녹을 빼빠로 밀어서 깨끗하게 원 재질이 나오고 난 뒤에 페인트칠을 해야 되잖아요.

 

(계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첫 유월절이 지나고 다음 유월절을 지킬 때 할례를 다하고 난 뒤에 어린 양을 잡아야 되요. 어린 양을 잡고 피낸 제사를 드려야 되요. 할례란 말은 쉽게 이야기해서 뜯어내는 거에요.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행태 이런 것들, 뚜껑들, 면상들, 위선적인 것들 전부 다 두두둑! 뜯어내는 거에요. 뜯어 낼 때는 아파요. 정말 아픕니다. 왜냐하면 30년, 40년 교회에서 장로, 목사 되었으니까 뜯어 낼 때 얼마나 아프겠어요?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뜯어내고 집사대로 뜯어내고 권사는 권사대로 다 뜯어내는데요. 그래서 이건 이런 겁니다. 전체성 속에서 뭘 찾아라? 구멍을 찾는 거에요. 이 구멍은 전체 속에 있는 하나의 구멍이 아니고 이 전체성이 씨잘데기 없다, 무용지물이다라는 것을 고발할 수 있는 구멍, 특이성을 찾는 것이고 그것이 어린 사무엘입니다.

  

어린 사무엘의 특징이 뭐냐하면 이번 수련회의 제목입니다. 어린 사무엘의 특징이 ‘지극히 작은 권력’입니다. 이미 교재가 나왔지요. 교재 한번 읽어 보셨나요? 십자가 마을에 올려 져 있습니다. 서울 가서 읽어 봤냐고 물었더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해요. 지극히 작은 권력 시편 8편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를 통해서 원수들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시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은 ‘내가 했다’가 완전히 삭제 돼야 되요. 젖먹이란 나서 8개월에서 일 년 정도인데 아기가 뭘 할 줄 압니까?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약간 발전하면 웃을 줄은 아는데 젖먹이를 보고 뭘 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요. 이게 바로 구멍의 특징입니다. 이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 이 소자가 뭐냐? 작은 자가 뭡니까? 형제들이 뭐에요? 젖먹이라고 통합 할 수 있는 자에요.

 

성도는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도 젖먹이에요. 왜요 본인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데 이미 결과부터 숙제부터 받았거든요. 그러면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노력 했던가 한번 찾아봐라는 거지요. 찾아보면 볼수록 “한 게 없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평생 주어진 숙제입니다. “주여! 천국 가는 데 평생토록 헌금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목사가 시키는 데로 다 했는데 그것이 전혀 상관없군요!”

 

그리고 하던 것들을 통해서 구약이나 신약 때 받았던 비난이 (나도 같은) 행함을 통해서 그대로 반복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바리새인들을 줄기차게 욕했는데 바리새인들의 주장과 그 태도와 주께 영광 돌리겠다고 하는 내 태도와 똑같아요.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사도 바울이잖아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 율법에 ᷰ 없다, 이것을 세 자로 줄이면 율법이 전체가 배설물이 되는 거에요. 똥, 오줌이 되는 거에요.

 

(빌 3: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 3: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나는 내가 나에게 똥, 오줌이다. 나의 의가 더러운 두 번 다시 냄새나서 보기 싫어 저리가! 저리가! 그런 더러운 것, 이게 바로 자기 의이고 자기 의를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 뭘 했습니까? 말씀에 성실하게 순종하는 것, 교회는 분뇨 저장소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조치를 했을 때

 

그 주어진 모든 통로의 모든 일은 일방적으로 누가 하시는 거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하시고 구약 때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전부 다 해요. 그것 때문에 동행하시는 거에요. 함께 하시고 동행 하시는 이유가 우리가 우리 힘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언급해주기 위해서 동행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이 동행하시는 이유를 자꾸 오해하는 거에요. 오해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래! 나는 구원받아 마땅하기에 주께서 나를 찾아 오셨어!” 여러분은 이 점에 동의 안 하지요? 동의 안 하는데 이것을 근사하게 말을 바꾸면 동의 안 할 수가 없어요. 뭐냐하면 창세전에 예정 된 자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구원 해야돼! 이건 잘못된 말이에요.

 

항상 내가 주인공이 되어 있으면 온갖 괜찮은 것은 다 끌어당깁니다.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라 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은 이 이야기를 잔소리처럼 들었지만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이 없었고 몰랐어요. 방법을 몰라도 되요, 없어도 되요. 왜냐하면 주께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베드로가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예수님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어슬렁 거렸습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장작 패는 이야기 했지요. 장작 팰 때 어디 안에서 팬다고 했습니까? 타이어 안에 장작을 집어넣고 패버리면 장작을 때려도 타이어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쪼개지잖아요. 타이어의 역할을 미리 몰라요. 나중에 일 끝나고 난 뒤에 작살나고 난 뒤에 타이어의 존재를 알게 되요.

 

처음부터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사후적으로 돌아보면 구원 안에서 한 발 자국도 벗어 난 적이 없어요. 어떤 짓거리를 하고 어떤 욕설을 하고 어떻게 교도소를 들락거렸든지 어떤 짓을 해도 구원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어떤 경우에만? 그 와중에서도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그것마저 주의 일이라는 사실.

  

상당히 위험한 명제가 될 수 있지만 과속해 놓고 주께서 과속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아저씨! 주께서 과속하라 했어요.” 그러면 경찰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걸린 것도 주께서 하신 거니 벌금내세요.” 이게 옳은 지혜지요. 남에게 나쁜 짓을 했다. “주여! 교도소에 안 가게 하옵소서! 거기 가면 내 명예가 훼손되고 소금과 빛이 돼야 될 내가 주님의 영광을 가리면 안 되지요. 그럼 주님 손해잖아요.” 하면 주변에서 뭐라 합니까?

 

제발 좀 교도소에 가라! 그것 때문에 이번 일도 일으켰어!. 제발 좀 가서 교도소에 가도 천국은 가는구나! 교도소에 가서 네가 좀 익혀라! 그게 이미 계시된 주의 일이다. 그겁니다. 선지자들이 교도소 가는 일들을 겪었어요. 얼마나 인간들이 이기주의인지! 선지자들이 고난의 길은 가다고 백날 이야기해도 자기는 명예에 훼손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점 보듯이 자꾸 성경을 그런 식으로 보는 거에요. 레위기 23:27절 한번 읽어 보세요.

 

(레 23:27)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 23: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자! 보세요. 지금 하나님의 뜻이 뭐냐하면 오늘 대전이 몇 도인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대구는 34˚ 까지 올라갔어요. 덥지요? 괴롭지요? 괴로우라는 거에요. 하나님!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 믿는데 사는 게 왜 힘듭니까? 주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어이가 없네!” 이 세상이 고생하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 고생에 누가 뛰어 들었습니까? 전혀 고생 안해야 될 분이 뛰어 드신 거에요. 이 진흙탕에 같이 뛰어 드신 거에요. 그러니까 서산 머드 축제에 같이 뛰어 드신 거에요. 주님도 온 천지에 진흙 범벅이고 우리는 이미 죄로 범벅이 됐고 하나님의 뜻이 뭐냐하면 네 원래의 자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생 아니고 고~생 고~생이에요. 고생의 낙이 있는 게 아니고 끝까지 고생과 고생의 사슬고리에요.

 

희망? 희망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땅에 무슨 희망이 있어요? 전에 설교 중에 예를 든 게 있는 데 빠삐용 예를 들었습니다. (영화) 빠삐용 마지막 장면에 보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주인공이 (섬에서) 탈출을 시도 하지요. 탈출 할 때 바닷물이 여섯 번째 나가고 일곱 번 째 들어오잖아요. 썰물 들어 올 때 있다가 밀물이 나갈 때 같이 쓸려 나가야 되는 거에요. 그 썰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붙잡고 (세상에서) 나갈 때 같이 빠져 나가야 천국까지 가는 거에요. 그야말로 자유입니다. 주인공 나비(Papillon)가 창공을 날 듯 빠져 나가는 거에요. 성경 뭐 있어? 이거 에요. 예수님이 썰물처럼 훅 들어오셨을 때 주님 붙들고 훅 나가면 되는 거에요. 썰물이 들어 올 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죄인의 모습이었어요. 우리의 원형입니다.

 

 

아담은 죽으면서도 마치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자기의 가면을 껍데기를 씌워 났어요. 아담의 위선 덩어리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주께선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위선된 가면을 벗겨내요. 벗기는 방법은 그들이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는 말씀을 줘버려요. 말씀이 주어지면 그들은 야! 만나처럼 떨어지는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콘크리트로 도배 하듯 해요.

  

백 겹의 화장을 하듯이 메이크업 하듯이, 덕지덕지 계속 세 겹, 네 겹, 계속 하는 거에요. 마치 팔이 부러졌을 때 깁스를 하지요. 인간 전체가 통째로 깁스 한 체로 교회에 나옵니다. 목사는 물론 교회 안의 교인 온 천지가 그렇지요.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깁스를 하고 이게 바로 전체성이에요.

 

그 기브스에 구멍 뚫어 주면 여름철엔 시원합니다. 구멍 뚫어주면 바람 들어오고 시원하잖아요. 복음에 십자가가 우리를 시원~하게 해요. 위선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고 암의 원인이 되는지 몰라요. 우린 가면을 안 쓸 수가 없어요. 죄인입니다하고 돌아다니면 미친 사람 취급하죠. 죄인이어도 아닌 척 해야

 

성회라는 말은 네 주제 파악하고 원래의 자리가 괴로워해야 하는 마땅한 자리인데 제사 드렸다고 해서 구원받고 제사 드렸다고 해서 용서받고 이런 것은 없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이 없어요. 그 방식은 예를 들어서 ‘속죄죄를 드려라’는 명령이잖아요. 명령하게 되면 우리 안에 왜? 우리는 처음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가?

 

용이 꿈틀 거리듯 법을 지키고 싶어도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법에 엉터리 결론을 내놓으면 그것과 주께서 주시는 속죄죄를 주신 것과 마주치게 만들어요. 바라보게 하면서 “아하! 나는 아니요 주님의 방식이구나!” 이걸 알게 만드는 겁니다. 이걸 평생토록 공유하고 있어야 되요.

 

그래야 예수 믿어라 하면 “나는 죄인이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자 다시 사무엘상을 보면 천천히 한다고 해도 후딱가고 있어요. 전재에서 사천 명 가량이 죽었지요? 죽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본색이 나오지요? 걱정 하지마! 우리에겐 언약궤가 있잖아! 이구동성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오기로 동의 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아직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구멍 역할이지만 아직 대기 상태로 있어요.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서 4장 18-19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누구의 가문이 날라갑니까? 엘리는 언약궤가 빼앗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그의 며느리도 그 소식들을 듣고 갑자기 몸이 아파 해산을 하고 그 아기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이가봇이란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생각하는 전체성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였었다. 이유가 뭐냐? 너희들이 이스라엘이라 하니까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요?” 동행이 되잖아요.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하나님 안에 덩어리 이스라엘이 씨앗처럼 같이 있는 거에요. 이거는 아니고 씨앗처럼 새로움이 나오면서 이쪽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과 교체하는 작업을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서서히 완성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드디어 방향 잡아서 가는 거에요. 모든 공로는 동행 하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첫째 시간을 마치면서 시편 8편을 안 읽어 볼 수가 없어요.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6-08-12 13:04 
전치사 인생 ( 마 21: 21- 32)                                                                                                        대전- 78강



이근호

 



2016년 7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1:21-32

  

 

 (마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마21: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21: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21: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21: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1장 21절 할 차례인데 그 앞에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 할 때 제자들이 깜짝 놀라지요. 무화과나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저주 받았으니까 아까 첫 시간에도 말했지만 주님은 우리의 본래의 자리를 찾아 주려 하는데 자꾸 자기 자리로 안 가려는 거에요. 우리는 구원받아 마땅한 자리가 내 자리이지 하지만 無(없음)에서 창조한다고 백날 이야기해도, 죽음에서 창조한다고 같은 이야기를 해도 無하고 죽음하고 자기하고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해석을 하려면 무화과나무와 권세 이것부터 알아야 되요. 내가 주님하고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성과는 관계의 조건개선, 조건이 먼저 개선 돼야 됩니다. 양쪽 다 구성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구원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결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일방적으로 내가 해달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조건이 되려면 우리 자신이 주님이 하시는 일에 납득이 안 된다면 주님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뭔가 구원이 나와야 될 성과가 나와야 될 조건에 충족하지 못할 엉뚱한 자리에 우리가 놓여 있다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조건은 예수님이 알아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드실 때 자기 의를 성사시켜서 (죄인→ 의인)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서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거룩하기 때문에 죄 있는 인간은 거룩한 주님과 만날 수 없어요. 동행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자기 의를 추구하는 자리는 예수님이 알고 있는데 우리는 엉뚱한 자리에 가 있으면서 무조건 주님보고 자기를 데리러 오라고, 구원하라고 자꾸 떼를 쓴다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조건을 이동을 시켜야 돼야 되요. 이동 시키려면 우리 인간들이 납득이 안되는 일들을 자꾸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납득이 안되면 “이상하다?” 그래서 본문에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참!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니까 예수님이 거기에 설득시키는 게 아니에요. 더더욱 그 도를 넘어 강렬하게 만들어 버려요. 마태복음 21장 21절에 보면

 

(마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산을 던져서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그렇게 될 것이요라고 언급하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아무 연고 없이, 우리 보기엔 때가 안되서 열매를 못 맺었는데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 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같은 영역에나 통하는 이야기이다라는 말입니다. (너희가)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것이 이해가 안되지? 그렇다면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것이 이해가 될 날이 온다면 그 날이 어떤 날이냐?

 

저 산보고 “산아! 들려서 바다에 빠져!” 봐 빠지는 거봐! 그게 되거든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이유가 납득이 되는 같은 영역인줄 알아라 그 말이에요. “네가 진짜 믿는다면 다른 종류가 아닌 같은 종류의 말이라는 거에요.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것이나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는 것이 같은 의미라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는 말은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은 것 역시 너희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주께서 믿음을 이야기 했어요. 믿음을 이야기 할 때 두 종류의 믿음이 있다고 했어요. 내 쪽에서 주님께 향하는 믿음이 있는 반면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믿음이 따로 있어요. 믿음을 선물로 줄때는 그냥 주지 않고 성령의 열매로 오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의)열매, 은사 자체가 선물이니까, 예를 들어 성령이 손발이 있다면 성령께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쏘옥 집어넣는 거에요.

 

“자! 선물이야!” 하고 택배 오듯이 선물로 주는 거에요. 선물을 받으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아하!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아도 할 말이 없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질 수 있어! 뭐 그럴 수 있지!” 그게 되는 거에요. 그런 믿음의 경지가 되려면 어떤 경지까지 될까? 궁금하지요.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인가 유령 이야기가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실 때 유령의 모습이죠.

 

그런데 거기서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유령이다 해놓고 물위로 걷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실 때 놀랬지만 더 놀란 것은 자기와 같은 인간이 물 위를 걸을 때 다른 제자들이 놀라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강의의 어려운 대목이 나오는데 굴뚝 청소를 할 때 두 사람이 들어가서 청소를 했습니다. 하다가 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게 나오고 한 사람은 깨끗하게 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나왔을 때 나와서 세수 할 사람은 누굽니까?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세수를 하겠지요. 왜냐하면 상대방 얼굴을 보니까 나도 시커먼 줄 알고 하지요. 이게 굴뚝 청소부의 사례인데 인간은 자기 자신은 타인을 통해서 확인하는 거에요. 같은 공간의 굴뚝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까 저 사람하고 같겠지! 이 말은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하기 전까지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거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동료들이 놀랍니다. 예수님 보고 한번 놀라고 베드로를 보고 두 번 놀라고 있어요. 그럴 때 당사자 베드로는 동료들이 놀라는 것을 보지요. “재들이 왜 놀라지?”하고 보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고 놀라는 거에요. “이건 미쳤지! 물위를 내가 왜 걸어야 돼!” 한번 다시 적어 볼께요. 내가 왜 물 위를 걸어야 합니까? 주님! 이렇게 묻는 것하고 이것의 반대말은 내가 물위를 안 걷는다가 반대말이 아니고 “나는 물 위를 걸었다!” 이게 반대말이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관계성, 그래서 내가 ~뭘 했다라는 것은 빨리 쳐 내야 되요. 이건 제거해야 되요. 주님이 계신다, 존재한다, 이것도 쳐 내야 되요. 주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이 형성되어 있는가? 이것에 주목해야 되요.

 

그런데 나는 물 위를 걸었다!가 되어 버리면 또는 나는 물위를 걸은 것을 내가 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뭐가 살아나 버려요? 관계는 가리워지고 결과적으로 ‘내가’ 그랬다가 돼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물 위를 걸었다!와 나는 물 위를 걸으면 안돼! 양쪽 다 관계에 주목 안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예를 들면 십일조를 목사님! 할까요? 말까요? 교회에 예배를 참석 할까요? 말까요? 이 질문 자체가 지금 성립이 안되냐 하면 십일조를 하나, 안하나 해도 누가 했고? 내가 했고 안해도 누가 안하고? 내가 안했다가 되는 거에요. 자기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안는다는 점에서는 예수님이 추구하는 그 자리와는 별개 문제에요. 그러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에요.

 

‘나’라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 쪽으로 방향이 돌아와요. 그러나 주님의 피조물들은 주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가요. 그런데 이 방향성이 주님으로 향하는 다리가 있으면 다리를 타고 주께 가겠는데 다리를 자기 쪽에서 주님에게 근사하게 설치해 놓으면 다리 끝에선 유턴을 해서 자기 자리로 도로 돌아오게 되요.

 

“하나님 제가 자식 잘 키웠습니다.” 자식 잘 키우면 천국갑니까? 자식 잘 키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대신할 수 있어요? 자식 잘 키우면 하나님의 의가 없어도 천국에 넣어줍니까? 안 넣어주거든요. 하나님의 의로 가는 것이지 자식 잘 키운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라고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면 “오늘 온 강사는 자식 잘 키울 필요 없데” 이런 소문이 퍼져요.

 

왜냐하면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왔기 때문에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 귀담아 들으려 왔는데 전혀 그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주께서는 어떤 다리를 설치하셨는가?에 주목 하라고 하니까, 자꾸 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께선 “넌 죽어야해, 넌 널 미워해야 돼!” 이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러면 그 이야기도 소용없어요. 나를 미워하라하면 그 다음에 내가 나를 미워하는 방식을 내 쪽에서 만들어요. 백날 자기를 미워하는 방법을 해 놓고 결국엔 나는 나를 미워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이건 부처이고 불자이지요. “부족합니다.” 책도 그런 책이 있어요. ‘내려놓음’ 그 다음에 나온 책은 ‘더 내려놓음’ 그럼 세 번째는 더더더 내려놓음? 이게 아무리 설명해도 자기 방법론으로 와 버릴 때, 그렇다고 이야길 안 할 수 없어요.

 

이걸 들추어내려고 복음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제자들이 이런 경험을 하잖아요. 이런 경험이 제자들에겐 얼마나 유익한지요. 왜? 자기들이 그렇게 배신하고 도망쳐 놓고 나중에 성령이 오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자기들이 한 행세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를 다 합니다. 당신들이나 나나 똑같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한 것, 이미 우리도 다 해본 겁니다.

 

따라서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이렇게 주께서 하시다보니 우리가 미워한 것 마저 나의 일이 아니였고 주의 일이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의 고백을 하게 하지요. 그걸 보고 한 형제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있고 방금 이야기한 주님과 인간의 관계가 있는데 인간 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의를 거치고 경유해서 형제에게 다가가면 되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경유 할 때는 반드시 뭐가 날라가야 하냐하면 자기가 했다는 것이 날라가야 되고 주께서 나를 통해서 하게 하셨다가 돼야 되요. 이것을 전치사 인생이라고 표현하지요. 전치사 (명사, 대명사 앞에 놓여 명사, 대명사의 관계 :위치 시간 방향 소유등을 나타내는 품사) ~for, with, from, in, of 특히 ~for 경우는 ~를 위하여, ~와 함께, 이런 전치사는 자기와 예수님의 사이에서 예수님 쪽에서 제시한 의를 증거 하기위해서 하나의 피조물로서 가담이 된 상태이지요,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짜 구원의 자리입니다. 포지션인데 포지션이 먼저 있고 다음에 ‘나’가 있어요. 내가 있고 포지션이 주어지는 게 아니고 포지션이 먼저 있고 다음에 내가 있는 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이름이 먼저 있고 다음에 주의 이름의 기능이 나중에 있는 거에요. 주의 이름의 기능을 위해서 전치사로 우리 피조물이 동원되는 겁니다. 이러나 저러나 내 자리는 없는 거에요.

 

나의 자리는 없는 거에요. 성령이 임하면 나의 자리는 없는 겁니다. 당신은 왜 농사를 지었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주께서 하신 거에요. 욥, 당신은 어떻게 자식이 다 죽었습니까? 주께서 하루아침에 자식 열 명 다 죽게 하셨어요. 당신의 많은 재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루아침에 다 태풍이 날아와서 기둥이 무너져 자식죽고 재산도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도적 때가 와서 재산 다 뺏어갔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주께서 도적도 보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욥의 시대는 아브라함 시대에요. 좀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대는 율법이 국가적으로 제공되지 않은 시대에요. 그러면 율법은 뭐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위해서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거든요. 율법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원형, 율법이 없던 시절,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인이 되었는가?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앞앞에, 제각기, 앞앞에 하나님께서 전치사를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타인 앞에서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의를 경유해 보면 너는 네 전치사, 나는 내 전치사를 주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각자의 ~for, with, from, in, of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신학의 역사를 해볼까요? 최초의 신학은 철학에서 나왔습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잡으면서 질서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나와 신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신을 뭐로 바꾸느냐? ( 신→ 단일 신) 신을 단일 신으로 바꿔요. 이게 플라톤 (차원 높은 정신적인 유일신을 지향, 인간의 이성이 신을 창조했다고 했다.)철학자에요. 신학의 출발은 기독교가 아니라 헬라(다신교)부터에요. 신학 자체가 철학이기 때문에 단일신은 하나인데 다양하잖아요. 해결이 안되니까 보조 신이 두 개가 나와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게 삼신론(三神論)이 나와요. 중간에 신이 하나 나오고 인간 속에 내제하는 하급신이 있어요. 내 안에 있는 신이 있고 중간에 신이 있고, 플라톤이 말하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 있고 유일한 신이 있고, 프로티누스(신플라톤주의자)의 신도 삼신론적인 신이에요. 이렇게 해서 신화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런 토대에 유대인의 신이 등장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유일신이었지요.

 

유일신과 단일신의 차이점이 뭐냐하면 단일신은 인간과 연속이 가능한, 연결이 가능한 신이고, 유일신은 인간이 아무리 다가서려 해도 다가설 수 없는 초월적 신을 유일신이라 합니다. 나중에 유일신이 뭐로 바뀌냐 하면 모든 백성들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유일신을 단일신으로 만들어서 계급을 정해버렸어요. 제일 높은 신이 성부, 그 다음에 성자, 그 다음에 성령은 후대에 삼위일체 이론이 나와요.

 

교회에서 신학을 하는 이유가 다 있지요. 그 까짓것 성령 안 받아도 교육만 받고 예~하면 다 신자가 되는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인간 속에는 철학적인 요소가 있고 그것에 맞춰서 성경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혼돈에서 질서를 잡다 보니까 뭐가 생겼냐 하면 교회가 생겼는데 이게 중세입니다. 종교 개혁을 하게 되면 교회를 통해서 농경 시대 때 사상적으로 이데올로기가 통치가 되거든요.

 

교회가 뭘 쥐고 있냐하면 계시를 독점하고 있으니까 따라서 뭐든지 알려고 하면 교회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가 모든 권력과 통치를 갖고 있으니까 여기서 교회가 둘로 쪼개졌네요. 하나는 루터교 또 하나는 칼빈교 즉, 개신교와 천주교가 되고 말았어요. 둘 다 동통점이 있어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안 다니면 구원이 없다.

  

눈에 보이는 교회라 하는 것은 그 안에 목사나 교회 자체 법에 의해 지배나 통치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그런 점에선 같아요. 서로 권력 갈라 먹기를 하는 거에요. 갈라 먹기를 하는데 돈이 이쪽으로 들어와야 하거든요. 토지가 돈이었으니까. 그런데 슬슬 돈이 안 들어오기 시작 했어요. 상공업, 금융업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 하면서 18C, 19C 금융 자본주의, 산업 자본주의로 바뀌면서 돈을 스스로 벌고 갖는 자본가가 되어 버린 거에요.

 

자본가들이 되면서 자본가의 비유를 안 맞춰주면 성단이고 교회이고 자금이 딸려요. 그러기 위해선 그들에게 “여러분의 양심도 하나님의 진리가 됩니다.”라고 이야기해요. 여러분의 이성과 양심이, 그래서 장사가 좀 됐다? 그런데 그 이성(理性) 가지고 뭘 했냐 하면 성경을 뭐로 보냐 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을 과거의 유물로 보는 거에요. 고 문서로 보는 거에요.

 

고 문서로 연구한다는 것은 뭐냐 내용을 전부 난도질을 해버려야 되요. 이것은 Q 문서(자료)와 로기아가 (학자들은 마태오와 루가가 참조했던 분실된 자료로 초대교회 당시 통용되었다고 가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어록에 대한 명칭)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고 이것이 원형이 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이렇게 생겼다고 했는데 이런 말 처음 듣지요? 거기에 요새는 도마 복음까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오잖아요.

  

주기도문도 두 개이고 족보도 두 개가 나오니까 분명히 원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원형을 찾자! 원형을 찾는 거에요. 그것을 로기아 (로기온의 복수형) 로고스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요. 원래 있는 이치를 찾자! 이치를 왜 찾는데? 찾아서 내가 믿을 만 한지 아닌지는 나의 이성으로 판단하면 되지, 왜? 내 이성이 신의 계시니까.

 

그래서 나오는 결과가 뭐냐? 그러면 내가 지금 깨달으면 이건 신의 뜻이고 깨달으면 교인이 되고 죽으면 천국가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을 만 한 건 믿되 못 믿을 만 한 건 내가 알아서 판단하는 거에요. 이 시대가 이런 시대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자금이 유용되려면 고객 만족이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줘야 되지요. 이것은 교회뿐 아니고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요.

 

제가 가락 강의하는 데 그 옆에 원불교가 있어요. 중간에 산책하면서 원불교 앞에 가면 설교 제목이 나와 있어요. 에너지와 환경 문제, 이게 설교 제목이에요. 하아~이게 뭡니까? 이성적인 것에 대한 과학이에요. 왜 이 시대가 과학시대이기 때문에 우리 원불교에서는 여러분들의 이성을 만족시키고 우리가 열심이 연구해서 여러분들의 환경 문제와 이 세상을 원만하고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행복해서 뭐 하려고요? 이미 지옥행인데, 아까 안 것 기억납니까? 속죄일은 어떻게 하라고요? 괴롭게 하라고 했지요? 예수님도 쓴 잔 마시려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여유롭게 포도도 먹고 옥수수 먹는 것 감사해야 됩니다. 3.8선이 약간만 내려오게 되서 북한 천지가 되면 옥수수 먹을 때도 아바이 수령님에게 절하고 먹어야 되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범사에 감사해야 될 것 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요. 선인과 악인에게 해와 비를 주시듯이 주시는 겁니다. 신학이 이런 식으로 된다는 것은 결국 뭐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을 점검을 해야 되요. 믿음 점검을 뭐라고 하냐 그것을 어려운 말로 인식론에 관한 거에요. 인식론이란 내가 뭐를 아느냐? 내가 ᷰ 안다에서 뭐가 문제에요? 내가~문제지요. 이것 뭐로 바꿔야 하녀하면 전치사로 바꿔야 되요.

 

(누구)~로 인하여, (누구)~위해, (누구)~ 때문에, 이걸 바꿔야 되요. 바꾸어서 살아야 그래야 내가 주체가 아니고 주님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22절 다시 보겠습니다. 계속해서 깔짝깔짝 약을 올리는 거에요. “해! 기도해! 기도해!” 그러면 이 말씀대로라면 주의 말씀이니까 믿고 기도 하겠지요. 누가? 기도해요? 내가 기도하지요. 걸려든 거에요.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기도 자체가 전치사가 돼야 됩니다. (누구)~로 인해 생긴 기도, (누구)~때문에 일어나 해야 되는 기도가 되는 거에요. 성령으로 인하여, 그래서 기도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냐 하면 반드시 복음과 관련돼야 됩니다. 복음을 위한 기도여야 하지요. 그렇게 되면 기도 하면 이루리라가 아니라 반대가 되요. 이미 이루었기에 이룸 속에서 기도가 솔솔 나오겠지요. 이룸이 왠 땡이냐 하면서 기도가 나오겠지요. 감사의 기도가.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배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브릿지, 다리가 안테나가 펴지듯이 나오는 겁니다. 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다시한번 설명해 봅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이에서 반드시 복음을(예수님)을 경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경유하면 이것이 기도가 될 뿐 아니라 전도가 되요. 전도란 확인 작업이지 꼬시는(설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 사람이 성도일까? 안일까? 하는 작업이지 새삼스럽게 성도 아닌 사람을 꼬셔서 성도되게 하지는 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들이 전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는 확인만 했을 뿐이에요. 앉은뱅이를 낫게 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시는데 우리는 확인 차 목격할 뿐이다.

 

여러분! 저 사람이 나은 것은 지금 눈엔 보이지 않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라고 증언하는 것이지 내가 했다고 하지 않는 거에요. 이미 사도 바울이 손수건을 가지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하지만 손수건으로 시작하는 한 이미 그것은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 아닙니다. 이런 법칙이 모세에게 있었어요. 모세는 지팡이를 들은 게 아니에요. 지팡이가 모세를 갖고 가는 게에요. 모세는 주님이 옆에 계시다는 것을 지팡이를 통해서 아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 본인이 바로 앞에 나선 게 아닙니다. 자기는 그냥 전치사이고 폼이고 그냥 입만 벌릴 뿐이고 주님이 시키시는 데 “주님 뭐라고요? 알았습니다. 예~” 그냥 전한 것 뿐이에요. “예, 지팡이를 강물에 담그라고요? 예 알았습니다.” 담글 뿐이에요. 담그니까 물이 피로 되고 개구리 밥상에 올라가게 “예~예 알았습니다.” 모든 것은 그냥 시켜서 할 뿐이에요.

 

10가지 재앙을 보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뭐냐하면 재앙만 재앙이라고 생각들 하는 데 오늘 날은 그게 아니에요. 오늘 날은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자체가 재앙이에요. 시집가는 재앙, 장가가는 재앙, 먹는 재앙, 오늘 해운대 난리 났거든요. 지금 복작! 복작! 복작 “야~ 지금 파도소리 들어봐라!” 휴대폰으로 서로 찌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재앙이에요. 피서가는 재앙, 이 성경 공부하는 것도 재앙이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그것 밖에 몰라요. 자식 교육 시킬 때 자꾸 꼬실려고 하지 마시고요 눈치 봐서 복음만 이야기 하면 때가 되었으면 받아들이고 때가 안 되었으면 안 받아 들이고 그래도 할 소리는 또 하고 자꾸 눈치 보면서 자식에게 이야기하고 “엄만 누구 눈치를 자꾸 보는 데?” 하면 “그런 분이 있어, 엄만 전치사일 뿐이야!” 명사도 아니고 동사도 아닌 거에요. 그 다음에 23절 봅시다.

 

(마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나중에 제사장들이 욕을 얻어먹겠어요? 안 얻어먹겠어요? 실컷 얻어먹을 거에요. 그 욕을 예수님이 먼저 얻어먹습니다. 대 제상들이 하는 말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런 일 속에는 말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 세상에 대해 정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 정죄라는 말이 고상한 말 같지만 사실 노골적으로 이겁니다. 세상에 대해 경멸하는 겁니다.

 

IS 자살 테러 하는 것처럼 세상에 대해 경멸하는 거에요. “이것도 세상이라고?” 이런 식으로 “이게 지옥이지, 다른 게 있겠어?” 이런 거에요. 예수님께서 먼저 욕을 얻어먹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욕을 얻어먹는 것은 사실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스승을 미워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에요.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복음과 상관없는 일에 나서지 마세요.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크게 한번 써 보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요점입니다. ‘사람과 상대하지 마세요.’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네가 잘났냐?” 그러지 마세요. 위험하잖아요. 주께서도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시비 걸지 말고 피해버리세요. 피하면 “그래! 나 이겼다!” “그래! 나 졌다!” 그냥 지면서 살면 됩니다. 져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의 안에선 수치를 당하지 않기 때문에 져도 괜찮아요.

 

제일 수치를 당할 사람은 마지막을 대비 못 했을 때의 사람이죠. 우리 교회에 얼마 안 있으면 퇴직하시는 분이 있는데 식사를 같이 하다 그런 농담을 했어요. 불의한 청지기가 되셨습니까? 준비 하셔야죠. 무슨 말이냐 하면 퇴직할 때가 됐는데 챙겨야 되지 않겠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복음 16장 이야기이죠. 이게 뭐냐하면 퇴직할 때 마지막 한 몫 챙겨 퇴직 할 때 그것이 바리새인의 지혜보다 더 낫다는 이야기이죠.

 

그렇다고 진짜 한몫 챙기려 횡령하면 안 되고요. 이 말은 뭐냐 진짜 지혜자는 사람하고 상대할 필요가 없다라는 거에요. 왜 상대할 필요가 없냐하면 귀찮아서 더워서가 아니고 “그래! 나 졌다. 너 혼자 많이 이겨~ 너는 성공해! 나는 실패할 께!” 넉넉하게 실패할 수 있는, 솔직히 따져서 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실패입니다. 실패자이면서 실패자 아닌 것처럼 자꾸 때를 쓰는 이것이 자기를 힘들 게 해요.

 

“아! 요것만 잘 하면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이게 힘들 게 하지, 그냥 “그래! 난 실패자야! 내가 봐도 내가 실패자야!” 마음을 이래 잡숫고 사시면 그 어디나 천국이에요. 어떤 드라마 대사를 의미있게 들었어요. 결혼을 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통장을 줘요. 이제 당신이 관리하라고 아내가 통장을 받고 하는 말이 “당신! 월급을 이만큼 많이 받았어? 그럼 나도 과장쯤으로 진급해야 되겠네!” 라고 이야기 하거든요.

  

이만큼 많이 받았어? 놀라는 거지요. 그럴 때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봅니까? 나는 성공한 남자를 만났구나! 하고 얼마나 뿌듯해요? 이럴 때 우리는 어떠냐? 다음 노래 가사가 중요해요.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원래의 자리가, 예수님은 썰물이잖아요. 실패자로 들어오셨잖아요. 십자가로 점점 더 가까이 가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어느새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에요. 같이 십자가 마을 가실 때는 복음 생각하다가 갑자기 세상 친구 만나면 점점 더 멀어져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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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자체가 점점 잘난 척하는 곳으로 다 빠져 버려요. 흥! 치! 뿡!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하고 떠나야 되요. 무슨 권세로 그렇게 하느냐?라는 질문에 뭐라고 하시냐 하면 25절에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여기에 누가 등장 하지요? 세례 요한, 요한이 어떻게 죽었어요? 비참하게 죽었지요. 요한의 마지막을 보면 본 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어떤 드라마에서 배역을 맡았는데 배역 맡자마자 1회에 훅하고 죽는 배역이 있다면 끝을 미리 알아서 “아이 참! 이건 돈도 안되고!” 기분 나쁘지요. 세례 요한을 보면 비참하게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비참하게 죽고 세례 요한은 그 당시에 헤롯 왕의 개인적인 원한과 범죄만 밝히면서 세례 요한은 죽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역사상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인간과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의 범죄를 위함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모든 권세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이게 하는 권세이고 우리에게는 주님이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간에 그 자체가 실패자가 되게 하시는 권세입니다. 집이 세 채가 있던 땅을 15만평 가지고 있던 간에 그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고 가난한 사람 구제해 놓고 가난하게 되어서 자기를 실패자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럴 사람도 없지만 절대로 그래선 안 됩니다.

 

한껏 움켜쥐고 한 푼도 빼앗기지 않으면서 그 자체를 일괄해서 실패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정도면 실패하는 즐거움이 있지요. 인간이 비참하게 살면서 먹고 살기도 어려워하면서 그것을 실패로 보면 그건 실패에 대한 개념 자체를 깨야 되요. 넉넉하게 살면서도 그것을 실패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전치사이니까, 내 것이 아닌데 많이 있던 적게 있던 간에 왜 자기가 관리하려고 합니까? 그럴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부자이지만 세례 요한의 삶이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삶이라는 것은 오늘 날 어떤 형편에 있던 간에 각자의 처소에서 반복해야만 세례 요한과 연결되어 있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세례 요한의 특징이 뭐냐하면 그 기능이 특이한다는 거에요. 당시에 백성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있었으면 국회의원이라도 할 만한데 괜히 나서지 안 될 때 나서서 목 베어 죽죠.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헤롯이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에게) 했는데 그 딸이 나라의 반을 달라 하면 되는데 “세례 요한의 목을 주세요.” 엄마가 시켜서 한 거에요. 그녀의 엄마 헤로디아가 남편의 형과의 결혼을 옳지 안다 하니까,

  

(막 6: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막 6: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 6: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막 6: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막 6: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막 6: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그런데 세례 요한도 이상해요. 왜 남의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요. 결혼하든 말든 지옥인데 그냥 두지, 하나님이 그렇게 시킨 거에요. 세상의 표면적인 죄를 결부해서 결국 성도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대표로 보여 준겁니다. 그다음에 봅시다. 28절.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서 굉장히 주요하게 담고 있는 의미가 깊은 데 그 중에서도 왜 첫째로 태어 날 사람을 첫째로 태어나지 않게 하느냐? 천국에 가는 조건 구비는 이 세상에서의 악함 때문에 (자리가) 반대로 있다가 뒤집혀야 되요. 왜냐하면 환경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래야 악한 환경에서 네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구원은 결국은 맏이가 될 것을, 옛날 맏이에게는 전부 다 모든 상속을 합니다.

 

어차피 상속을 야곱이 받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왜? 둘째로 태어나게 하냐는 말이죠. 그게 뭐냐 이 세상 죄를 맏이가 다 보여주는 거에요. 이 세상 죄를 맏이도 보여주고 야곱도 보여주고 “나는 맏아들” 으시되는 것도 문제고 그것을 뺏으려고 야곱이 거짓말 하는 것도 죄고 그래서 야곱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이스라엘로 구원받아요.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물으신다면 야곱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가 가능합니다. 이것을 두 자로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브니엘, 내가 하나님과 만났는데 이게 웬일이야? 내가 죽어야 되는데 살아 있다니?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야곱 개인의 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12자식을 통해서 전달이 되고 12자식의 12배로해서 144,000이 돼서 이스라엘 전체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 과정 속에서 그들은 반드시 야곱이 겪었던 경험을 똑같이 반복해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뭐냐 잃어버렸다가 얻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 함이라” 잃어버림을 먼저 전제로 하고 찾는 거지요. 그것을 로마서에서 죄를 하나님의 의로 바꾸면서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의 잃어버림이 이 잃어버림을 대신해서 다 이루신겁니다.

 

잃어버림과 함께 오심으로써 아버지부터 칭찬받으면서 다시 부활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되었던 그들도 같이 주님에 의해서 이게 완료 되었거든요. 완료되었다는 증거가 완료되지 않으면 성령이, 세례가 없어요. 이방인들은 율법도 모르고 그냥 농사짓고 장사하고 사는데 갑자기 성령 세례가 오니까 의인이 되었어요. 이 의는 일방적으로 오기 때문에 나쁜 짓을 의를 차곡차곡 쌓아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의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의 선포와 선언에 의해서 의인된 거에요.

 

이것이 순회재판인데 검사 나오고 변호사 나와서 너 잘났네, 나 잘났네, 증인 세우고 복잡하게 하는데 판사는 팔짱끼고 자고 있는 거에요. “다했나? 끝났지? 판결, 의인! 재판 끝!” 저는 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했고요. 성전에 나와서 십일조 꼬박꼬박 했고요. 구제도 했습니다. 상대편은 아이쿠~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다했나? 다했어? 죄인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너는 의인이다!”하고 순회재판 끝났어!. 다음 재판하러 가자! 다른 데로 가는 거에요. 이번엔 간음하다 잡힌 여인 앞에 놓고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하고 다 보내 놓고 내가 너를 정죄할 순 있지만 정죄 할 수 있기에 정죄 안하고 너를 용서 하노라, 왜? 내 마음대로다. 주님이 자기 마음대로 선언 하지요. 이제 너는 죄로부터 자유다. 죄로 주어지는 모든 저주와 형벌로부터 너는 이제 벗어나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한번 봅시다. 자!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 데 그 뒤의 이야기는 모른다 하고 그 두 아들이 같은 라인에 있는 거에요. 출발선이 있고 한 아들은 1, 두 번 째 아들은 2, 출발점은 똑같아요. 1번 아들은 Yes, 2번 아들은 No, 둘 째 아들은 No를 보여 줬으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뭘 발견하고자 합니까? (둘째 아들의) 처음의 자리, No의 자리인거에요.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처음엔 안 가겠다고 했다가 갔다는 말이거든요. No라고 했다가 Yes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 관계를 아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사이에 이것을 집어넣는 거에요. 그런데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것을 전치사로 보질 않고 주어로 봐서 나는 둘 중 어느 자리로 할까? 구원 받는 자리로 해야지, 처음엔 안 간다고 하다가 가야지, 이런 꼼수를 부려요. 이것이 바로 이렇게 제자들이 No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능력에 예속돼 있던 사람들이에요.

 

누구나,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바로 유일한 Yes가 돼요. 그러면 제자들은 양 쪽 중 맏이에 불가 한 거에요. 그러다가 제자들이 성령이 임한 뒤에는 소급해서 “아! 그 때 내가 예수님 따르겠습니다.”고 한 것마저도 Yes가 아니고 No 였구나! “예수님에게 제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했어도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주체로 있었기 때문에 Yes가 아니고 No에 불가한 허세를, 객기를 부린 거에요. 우리는 틈만 나면 허세에요.

 

(마21: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천국에 창기가 들어갑니까? 바리새인이 들어갑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게 되면 즉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졸지에 창기가 되는데 단 조건이 있어요. 앞에 뭐가 붙어요. 천국 가게 된 창기, 천국 가게 된 세리가 되면서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지금도 활동하게 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말씀이 내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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