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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3 22:00:48 조회 : 1212         
사무엘상 17강(언약궤), 마태복음 79강( 시장과 포도원) 16082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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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6-09-12 11:10 
언약궤 (사무엘상 4: 5- 11 )                                                                                          대전-(사무엘17강)

  

 

이근호

 



2016년 8월23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4:5-11

  

 

(삼상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삼상4: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삼상4: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삼상4: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 인을 친 신들이니라

(삼상4: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삼상4: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삼상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4장5절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당시 블레셋이 공격을 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름대로 믿는 게 있어요. 뭐냐하면 아무리 너희들이 우리를 공격해도 우리에겐 언약궤가 있으니까 승리할 것이다. 그렇게 자부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언약궤가 뭔지 정리해 봅시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믿고 블레셋이 덤벼도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고 생각 했으니까

 

언약궤를 모세의 지팡이 같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세를 하나님이 보냈다. 그냥 보낸 게 아니죠. 지팡이를 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가 부리는 묘술에 대해서 애굽 전체가 이겨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지팡이가 했다고 보질 않지요. 지팡이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다는 표시로서 모세의 지팡이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았다고 하면 모세의 지팡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겠지요? 그런데 그들에게 모세의 지팡이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 모세의 지팡이는 큰일을 했지요. 광야에서 40년간 지나고 약속의 땅에 무사히 들어가게 된 것은 모세의 지팡이 덕분이거든요. 그런데 지팡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언약궤로 바뀝니다.

 

                                                      지팡이 → 언약궤

                                                               ↑

                                                 ⇙      율법(제사법)

                                      거룩(민족)

                                        ⇕

                                   분리=다르다

 

지팡이가 언약궤로 바뀔 때 무엇이 개입돼서 바뀌냐 하면 하나의 율법이 개입되서 바뀌는데 율법 안에는 제사법이 있어요. 지팡이가 이스라엘을 특별대우 해주고 다른 민족과 차이나게 했다면 그것을 광야에서 모세는 뭐라고 했냐하면 거룩, 거룩한 민족이라고 한 겁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고 분리되었다.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

 

성도란 거룩한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의 뜻은 깨끗한 사람이 아니고 (남과)다른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다르게 이끄시는 사람들, 그것이 성도입니다. 내가 나를 다르다고 하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도에겐 모델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른 것, 그렇다면 우리가 성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면 성도이겠지요.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말은 예수님의 일이 우리에게로 전환될 때 그것이 같이 일어난다고 증거 할 것이 뭐냐하면 바로 말씀입니다. 전에는 말씀이 그냥 지식에 지나지 않았는데 살아보니까 말씀 속에 내가 말씀의 뜻을 발산하고 말씀의 진위를 드러내는 쪽으로 내 인생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사람은 예수님께 적용되었던 말씀이 자기에게도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좁은 길로 가라’ 이 소리를 들으면 우리가 좁은 길로 어려운 길로 가겠다고 했는데 성령이 와서 좁은 길로 가게 되면 이건 내가 원치 않은 길인데 가보니까 그게 좁은 길이에요. 좁은 길이라는 말도 고생길이 아니고 (좁은 길 = 남이 가지 않는 길)이에요. 남이 가지 않는 길이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나를 달리 대하는 것이 티가 나는 겁니다.

 

처음에는 성도 아닌 사람하고도 통하다가 살아 보니까 나중엔 점점 더 살아가는 세계관도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다보니까 점점 더 의견이 통하지 않아요. 소통이 안되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수련회 때 논두렁 밭두렁 이야길 했지요? 처음엔 서로가 같은 위치에 있어서 통했는데 점점 한쪽은 다른 방향으로 가서 각도가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중엔 고함을 질러야 들리는 거리가 되었는데 점점 더 고함질러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어요.

 

이렇게 성도가 가다보면 친구도 떠나고 일가친척도 떠나고 그러니까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에 너의 원수가 집안 식구니라 한 말씀이 맞아요. 그럴 때 본인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 중요합니다. 본인이 영생 얻으려고 그런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니고 가다 보니까, 상대성이거든요. 나는 가만있는데 저쪽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고 저쪽도 마찬가지에요. 친구인데 얘기 하다 보니까 점점 더 아스라이 멀어지는 거에요.

 

서로의 관심사도 달라져요. 친구끼리 모여서 가방 자랑하고 보석 자랑하다가 그런 것이 재미있는데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불쑥 하는 게 물론 성령에 의해서겠지만 “그런 거 다 의미 없다!” 이렇게 한 마디 했더니 사람들의 분위기 싸~해져 가지고 그럴 때 우리는 “네 속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성령이니라.” 성령께서는 말씀만 내뱉으니까 무심코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 다시 전화 안 하겠지요.

 

좁은 길이라는 영생의 길은 우리가 못 갑니다. 가도록 해 주셔야 돼요. 슬슬 가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른 쓸쓸한 길이죠. 그런데 이럴 때 우리가 너무 서러워하거나 자기 인생을 탓하지 마시고 이럴 때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어떤 길을 갔는가를 자신과 한번 비교해 보라고 하죠. 아직도 우린 친구가 너무 많아요. 아직도 세상 정에 너무 많이 정들었어요.

 

예수님과 사도에 비하면 아직까지 세상에 미련이 너무 많습니다. 나그네 길로 가라고 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 길로 같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길로 갈까봐 겁내고 있다라는 것은 사실 합류하지 못해서 안절부절하는 마음이 아직도 우리에게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지금 언약궤가 뭐냐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도대체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뭐라고 그렇게 그들은 블레셋 군대에게 포위 됐음에도 불구하고 언약궤가 있으니까, 언약궤가 만능의 최고의 무기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오해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를 살펴봐야 오늘 본문이 이해가 되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는 증거로써 언약궤가 있다고 본겁니다. 언약궤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제사에 둘러 쌓이지요. 제사법 안의 중심에 언약궤가 있는 겁니다. 미리 말씀 드리면 언약궤가 뭐냐하면 (하나님의 거주지 + 하나님의 이름 =언약궤)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어떤 분이 계시다는 거에요. 이름이 있다는 말은 분명히 있다라는 뜻이에요. 없는데 이름을 붙이는 게 의미가 없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데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만약에 강아지가 저 방에 있다면 주인이 이름을 부르면 다른 손님들은 저 방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주인은 “ 아니에요, 저 방에 분명히 있어요.” 있으니까 이름을 부른 거잖아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 이름을 부르라는 것은 세상 사람이 보기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름을 부르라는 말은 내가 이름을 부르는 그들과 함께 있다는 거에요. 신약의 성도들은 누구의 이름을 부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러면 주위 친구들은 미친 사람처럼 생각한다고요.

 

식사할 때도 기도하면 “넌 누구한테 기도하냐?” 하는데 이제 8개월짜리 아기를 붙들고 엄마가 기도를 시킵니다. “아버지! 귀한 이유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기가 눈 꼭 감고 손 모으고 하거든요, 알고 하는지 엄마 흉내 내는지 모르겠는데 그 손녀에게 묻고 싶어요. 지금 네가 기도하는 대상이 현존하는지 아닌지 묻고 싶어요. 그냥 엄마만 있지, 엄마가 시키니까 따라 했을 뿐이지요.

 

애가 눈 감는 건 얼마나 우스운지, 눈 감으면 주님이 더 잘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어요. 눈을 감는다고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제사를 드려야지요. 언약궤가 활성화되고 주님이 요구하는 게 있으면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제사에는 뭐가 필히 들어가야 하냐 하면 죽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죽음 사건이 일어나요. 물론 이스라엘이 죽는 게 아니고 누군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지요. 그것은 흠 없는 짐승, 제물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 안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신다. 고민을 부분만을 가지고 보고 거기에 인생을 걸고 승부를 하다보니까 맨 날 울고불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따지고 주님 앞에 대들고 해요.

 

그래서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있다는 말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니고 그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패배를 모르잖아요.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패배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연히 이기지요. 그리고 이기게 되면 헤헤헤 거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대신 이겨주고 자기들은 혜택만 본다. 그런 생각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 있어요. 뭘 오해 했냐하면 흠 없는 제물이 죽었다고 방금 제가 얘기 했는데 그 죽음에 사실은 뭐가 딸려 가야 하냐하면 흠 있는 자들이 흠 없는죽음 안에 같이 포함되어 있어야 되요. 자기가 올림픽 경기를 보는 관람객이 아닙니다. 유도 선수가 땀 흘려 유도 할 때 관객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며 보기만 하면 되지만 이스라엘은 (입장이) 그게 아니에요.

  

어린 양이 죽을 때 (동시에) 자기의 죽음으로 공감해야 되고 (어린양의) 죽음에 비춰봐야 되요. 거기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그게 안되는 거에요. 그것이 안되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할 때 우리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탈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게 맞아요. 마태복음 1장에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그냥 함께 있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그 우리가 바로 죄 있는 자기 백성과 함께 있다는 것이지 그 당시 유대인들과 함께 있다는 게 아니에요. 유대인들이 뭘 오해 했냐하면 자기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왜 그러냐 하면 육적으로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육적으로 행해서 지켰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하면 자동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여겨 주겠지라고 생각 하는 데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건 자기 생각이에요.

  

오늘 날도 교회 가서 성만찬 하고 세례 받으면 자동적으로 주의 백성인양 그렇게 오해들을 하세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조건들을 모은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로써 살아가는 것이 백성이에요. 언약의 결과로써 쉽게 말씀드리면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본인이 아는 것, 이게 성도란 말입니다.

 

그러면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수동적이지요. 수동적이다라는 말은 능동적으로 내 인생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지요. 멀리 있는 자식이 전화로 하는 말이 “엄마, 난 오늘도 주의 은혜로 살고 있어.” 한다면 성도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거에요. 성도 맞는 거에요.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요. 왜냐하면 본인은 수동적 입장에 있으니까, 주체가 누구이다?

 

예수님이 주체이고 자기는 예수님의 결과물로 배치되는 고백을 하는데 성령이 아니면 누가 이런 고백을 하게 하겠어요? 성령이 하시니까 이런 고백을 하지요. 그 엄마는 상당히 고맙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라의 은혜로 그러면 곤란하고 부처님의 은혜로 그러면 참 곤란한거에요.

 

제 이론이 맞는다면 언약이라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보면 언약은 무엇을 지우냐 하면 나의 ‘나’ 됨을 지우는 거에요. 죽음이라는 것도 그렇잖아요. 나는 내가 있음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계시기에 내가 있다는 거에요. 그 분이 언약적으로 계심에 나는 언약의 사람으로서 언약의 힘 때문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언약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쳐다봅니다. 이게 성도에요. 이미 주도권은 언약궤에 가 있습니다. 자 그 다음이 중요한데 그 다음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언약궤가 싸우는 적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했어요. 이스라엘을 포위한 블레셋이 적 인줄 알았어요. 지금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다고 안심하고 있고 그 주위엔 블레셋이 (팔레스타인)포위를 했으니까 블레셋 민족은 아프리카 북쪽에 있는 해양 민족이에요. 해적들이에요.

 

(블레셋:함의 자손) 해적들이 와서 자리 잡으려고 B.C 13세기 경{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이후, 그리스 에게 문명의 원류에 뿌리를 두고 발생한 해양민족으로 기원전 1220년경 지중해의 그레데(갑돌) 섬에서 가나안 평야에 상륙했다. (렘 47:4)}부터 가나안 땅에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에요.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하나에 장치를 해 두신 거에요.

 

블레셋이 오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을 혈족으로 본 겁니다. 우리의 혈족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다면 우리도 자동적으로 손자의 손자의 손자인 자손이므로 복의 근원이 되므로 감히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나? 요즘 말로 모태 신앙이다, 보통 집안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목사이고 이런 식이다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혈육적으로 보고 블레셋을 적으로 보니까 이렇게 본다는 자체가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언약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들은 혈육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자기들이 관련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블레셋)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고 이스라엘 안에 언약궤가 있으니까 적으로 누굴 생각하냐 하면 자기들 빼놓고 공격하는 전부를 적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떻습니까? 오늘 날 기독교의 국수주의하고 비슷하지요? 어디 감히 우리 기독교를 공격해? 하나님 믿는 나라 건드리면 다 죽는다.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그러면 하나님 믿는 한국과 하나님 믿는 미국하고 축구하면 하나님께서 누굴 이기게 하시겠는 가? 기도하는 숫자에 양에 따라서 결정하는 겁니까?

 

그러면 이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이란(시아파)과 이라크(수니파)하고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니까 틀리다보면 같은 수니파인 사우디와 쿠웨이트와 이라크가 축구경기를 하면 알라신은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지 굉장히 곤란하겠지요. 이것은 사고방식 자체가, 종교라는 자체가 육 중심이에요. 어느 종교를 선택 할까요? 너나 잘하세요. 니가 누구인줄을 모르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를 볼 때 우리 아버지는 누구시고 심지어 마태복음 13:55 절에서는 예수님을 보고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래서 사고방식 자체가 혈육적인 관점 외에는 볼 줄을 몰라요. 이게 바로 적이에요. 어떻게 육이 영과 동행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여기 계신 하나님이 육과 동행하되 조건이 있어요. 육을 죽인다는 조건하에 동행합니다. 왜? 육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흠 없는 양이 나오지요. 그 (흠 없는) 양과 같이 영적인 분과 계약 맺는 것이 언약이라는 말이죠. 그게 유월절 어린 양이거든요. 양의 피를 발라서 살려 주는 것은 피를 바른 수고 때문에 살려 준 게 아니고

 

어린 양과 장차 오실 영적인 분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들 눈에는 양을 잡아서 피 흘린 것 밖에는 안 보인다는 것이죠. (그 연결을 알아야 되고). 언약궤의 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까지 포함시켜야 되요. 아까 말한 임마누엘이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고 그 앞에 있는 구절이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1:21절에요.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이 어디에 필요하다고요?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오시죠?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죄가 내 손으로 해결이 된다? 안 된다? 해결이 안 되지요. 그러면 고민을 왜 하십니까? 인생 사는 고민을 왜 해요? 자식이 어떠니, 남편이 어떠니 아내가 어떠니 이런 고민을 왜 합니까? 그리고 그 고민을 하는 것보다  웃기는 게 그 고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달려들어요.

  

주님이 왜 오셨는데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 때문에 오신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죄 없는데 이런 어려움이 있으니까 해결해달라는 거에요. “그게 바로 죄야!” 나는 죄 없는데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으니까 해결해 달라는 거에요. 주님은 그것을 해결하는 분이 아닙니다. 환경 문제나 사드 문제나 북한의 핵 문제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교회 부흥이나 개척 교회 성공하는 거 이런 거 해결하는 분이 아닙니다.

 

미국 강의 가는 데 편히 잘 다녀오십시오 하는 데 주님은 편히? 그런 거 없어요. 주님은 사시는 동안 편하게 사신 적이 없는데 제가 왜 편하게 살아야 되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미국에 가든 어딜 가든 거기에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에요. 미국에 가든 캐나다에 가든 거기에 있는 죄 문제 해결하시고 동행하시는 분이지 편하게 잘 살피시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어디부터 할지 너무나 엉터리니까.

 

겹겹이 엉터리니까 뭐부터 운을 땔지 모르겠어요. 실컷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진리 말고 마귀 이야길 하면 알아듣겠어요? 그럴 순 없는 거 아니겠어요? 마귀 이야기 하면 알아들어요. 하지만 진리를 이야기 해야죠. 예수님은 죄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러 왔습니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죄가 뭐냐? 말씀을 봐야 알지요. 나쁜 짓하면 죄고 착한 일 하면 죄가 아닌 줄 알아요. 성경의 말씀을 봐야 죄가 드러나 압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 상 4장 보면 나오잖아요. 언약궤가 있다고 승리할 줄 아는 것, 이게 바로 죄인 거에요. 도대체 이것이 왜 죄이냐? 언약궤가 있으니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동행하는 쪽을 도와주겠지, 도와주겠지가 죄가 되는 겁니다.

 

내가 교회 나가서 예수님 믿으니까 절에 가는 것보다 형편이 낫겠지? 그게 죄가 되는 거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의 계통이 나이고 영의 계통입니다. 육으로 실패 한 것을 심어 놓았어요.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삭이라고요? 아닙니다. 죽은 이삭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보고 네 자식을 제물로 바쳐라고 한 겁니다. 육으로 죽었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난 자가 이삭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봐도 몰라요? 멀쩡한 아들을 왜 죽이느 냐? 왜 바치라 하냐? 왜 죽음 속에 넣어서 나에게 바치라는 이야길 왜 합니까? 네가 네 자신을 볼 때 육으로 보는지 영으로 보는지 한번 보시겠다는 거에요. 이 말은 살아 있다고 해서 의가 되는 게 아니고 살아 있다는 게 죄로써 저주로써 살아 있다는 것인지 복으로 살아 있다는 것인지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제분들 살아 있지요? 복으로 살아 있는지 저주로 살아있는지 검토해봐야 되요. 지난 낮 설교에서 그랬잖아요. 죽고 사는 게 진리가 아니라고 축복으로이냐 저주로이냐 중요하지 “잘 있냐?” 잘 있어요. 잘 있어도 지옥 가는 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야기 할 게 이렇게 많이 나와요. 간단한 이야기인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맏이를 축복하려 했는데 하나님께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둘째인 야곱을 장자의 복을 줬잖아요. 이것은 이삭 너에게 문제 있다는 거에요. 네가 좋아하는 애는 저주 받는다는 거에요. 좋아하는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아버지의 심정을 네가 헤아려 보라는 거에요. 내가 너무나 자식을 사랑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내가 좋아하는 자식에게 저주를 퍼부어 보세요. 그 심정이 그 심정일거에요.

 

자식이 네 자식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식이라는 것을 왜 평소에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냐는 말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제일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같은 형제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잖아요. 야곱한테는 사랑하는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주일 오후에 제사장들은 중앙이 비어 있다고 했잖아요.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자식이 없어요. 죽었으니까. 없는 채로 세월 보냈습니다.

 

없다고 생각한 아들은 애굽에서 멀쩡한 채 살아 있지만 그 사실을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에 사랑했던 자식은 이미 죽었어요. 아주 극적입니다. 드라마틱해요. 감격도 이런 감격이 없습니다. 상상해 보면 되요. 이라크 전쟁이나 이란 전쟁에서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도 제일 사랑했던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가슴이 찢어졌는데 한 25년 만에 그 자식이 아버지 제가 국무총리가 돼서 돌아왔습니다라고 할 때 그 아버지가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래서 나온 노래가 ‘잃어버린 세월’을 어떻게 한꺼번에 보상 받겠습니까? 잃어버렸던 자식을 찾은 그 심정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99마리 양을 놔두고 탕자의 1마리 양을 찾는 그 기쁨이기 때문에 잔치를 벌이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인 숫자가 필요 없어요. 딱 1명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면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기의, 잃어 버렸었는데, 소인지 개인지도 모르고 지 마음대로 살았는데 덥석 천사가 와서 “너 아버지에게 가야지, 이러고 있으면 안돼!”하고 얼굴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할 때 그게 직업이 강도인지 거지인지 세리인지 묻지도 않아요. 자기 자식인데 자기 자식이 직업을 무엇을 했든 탓하는 아버지는 아니지요. 자식 찾고 보니 거지더라 “에잇 거지? 그럼 안 볼란다,”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아들이 거지든 강도든 살인강도든 교도소를 10번 왔다 갔다 하든 중요한 것은 너를 내 자식이다라고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했다라는 선택한 사실이 중요하지 네가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묻거나 따지지를 안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그 마음을 알아서 내 인생에 대해서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휴! 지난주에 옆집 아주머니에게 그런 말은 해서는 안되었는데 내가 못 됐어.” 자기 자신을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원래 못 됐어요. 성질나서 한 마디 한거였는데 본인이 거기서 자책하면 안 됩니다. “아휴!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어!” 잘 키운 자식이 어딨습니까? 잘 키운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부모가 잘 키워서 훌륭하게 된 자식 없어요. 하나님이 잘 키워서 천국가지 부모가 잘 키워서 천국에 간 자식 없습니다. 부모 된 도리를 못했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의 걱정과 염려하면서 세월 보내지 마시고 감사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영으로 통해서 나온 축복은 야곱의 12자손들에게 준 것 맞아요.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이 된 게 맞는데 여기서 축복이라는 것은 혈육적인 축복이 아니고 야곱의 언약 과정 가운데서 아버지로부터 경험했던 그 경험을 그대로 적용받는 집단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바뀐 이름이 뭡니까? 이스라엘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가 있어요. 언약궤가 하나님의 (거주지+이름)라 했지요? 이 이름이 구체화되게 되면 처음에는 그냥 나는 나다 보통 여기서 I am that I am 내가 곧 이런 뜻인데 이 표현 보다는 I am myself 적절해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런 스스로 있다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스스로 있는 게 이름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하나의 고정된 변하지 않는 대상을 부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이름이 기능화가 되요. 어떤 벌어진 일로 이야기 한다고요. 그러면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뀌냐 하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은 사람이지요. 하나님과 야곱니 사다리에서 언약을 맺었지요. 언약 맺을 때 지명 이름이 벧엘이지요. 하나님의 집이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집이 언약궤라니까요. 이게 이동을 해요.

  

이동을 하면 집이 어느 집이 어느 집이지 모르잖아요. 한 곳을 정해 놔야 알지만 거주지가 하나님의 기능과 더불어 이동한다는 말이죠. 이게 로마서14장에도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 성령 안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공간 개념으로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에요. 하늘나라는 어디 있다가 아니고 너희 안에 있는 거에요.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누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누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사도 바울이 죽어 간 곳인 하늘나라는 사람들이 따라 갈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공간적 제한을 받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갑니까? 버스를 타고 갑니까? 사도 바울은 죽음 자체가 하늘나라이고 엘리야와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산이 졸지에 하나님의 나라로 변했지요? 변하기 전에 예수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가 얼마 안 있어 너희 제자들 가운데 하늘나라를 볼 자가 있느니라하고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제자들 가운데 세 명인 야고보, 요한 베드로가 변화산 꼭대기에서 변화된 예수님을 봤잖아요.

(막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러면 하늘나라가 변화산입니까? 주소지를 그 곳으로 할까요? 아니지요. 베드로도 오해해서 지정된 지점인 줄 알고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팬션 셋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지역적인 게 아니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한 것은 육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블레셋으로 둘러 쌓이고 포위된 것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궤에서 새롭게 기능적으로 제조돼야 되고 생산돼야 되고 만들어져야 되요.

 

그래야 이스라엘이 있고 언약궤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이다라고 되는 거지요.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주님이 먼저 주어 자리에 있고 예수님이 먼저 있고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오늘도 살아가는 술어 또는 목적어 자리에 우리가 있는 겁니다. 주님의 은혜로 오늘도 살고 있어요. 엄마! 걱정 하지마!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나는 살아가고 있어! 이게 바로 하늘나라의 기능입니다.

 

제가 이렇게 성경 공부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 상태가 지금 천국에 가는 상태이냐? 이게 목적이에요. 저 분들의 상태가 지금 주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도 천국 갈 수 있는 상태이냐? 그겁니다. 성경을 지적으로 깨닫고 외우고 그게 아니고 해봐야 나중에 다 잊어버려요.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정보량이 더 많아요. 지금 이 상태로 꼴가닥하고 숨 거둘 때 천국을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냐를 우리가 말씀 가운데 확인해 보자는 거에요.

 

확인해 보는데 어떻게 확인 하는가? 부정적인 요소들이 성경에 깔려 있으니까 아하! 이래서는 안 되는 거구나를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는 거에요. 언약궤가 있다고 승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니다라는 거에요. 왜? 유적으로 자기 자신을 육적인 토대, 혈육적인 집단을 ‘나’라고 본거에요. 나를 언약이 먼저 있고 다음에 언약에서 만들어진 영적인 관계로서 ‘나’가 성립되야 되는데 육적인 ‘나’가 있고,

  

대전이 온도가 37˚ 가 넘어서 놀랐는데 한 편으론 고소하기도하고 대전의 ‘나’도 얼마나 덥겠습니까? 왜 덥게 하시는 가? 여기가 지옥이니까 지옥이 주는 쾌감과 희열을 느끼라는 말이죠. “이래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차라니 낫겠다.” 평소에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심지어 18˚~21˚가 되도 그런 생각을 하란 말이죠. 여름에 덥다고 아이고~ 죽겠다고 하지요? 가을돼서 선선해지면 어디 놀러 갈까? 이렇게 되지요? 천국 가는 게 더 낫지 놀러를 가요?

  

몸의 컨디션이 좋다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언약이고 뭐고 하나님! 놀러 가는데 좋은 날씨 주시옵소서! 자기의 육이 먼저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잡아당기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세요. 전쟁하시는 이름, 이름을 부르면 전쟁을 겪어야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에요. 영적 전쟁하는데 영적 전쟁의 적이 누구이냐? 나에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오늘도 주께서 나를 이기셨구나!

 

나는 육으로 이렇게 살면 되는데 육은 지옥 가는 사람들의 상태와 똑같은 거지요. 자기만 챙기는 것. 지옥 가면 그런 사람 많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있던 앞집의 부자도 똑같은 인간들 다 모여 있어요. 부자의 행태와 발언과 사고방식을 보면 참 신기한 것이 그 사람이 지옥을 갔다기보다는 지옥에서 시작했고 살아 있을 때부터 지옥이었어요. 왜냐하면 자기의 육 밖에는 모르니까,

 

지옥 찾아보기는 쉬워요. 불신자들이 사는 세상에서의 모습이 바로 지옥이에요. 그러면 천국은 얼마나 착해야 됩니까?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제일 먼저 강의 한 것을 다 잊어버린 거에요. 성도는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고 분리된 것이라니까요. 그저 하루하루 말씀대로 사는 재미를 모으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가요.

 

왜냐하면 모은 것은 자기의 바구니이고 그 모은 것으로 착한 일을 하고 또 착한 일을 하고 또 바르게 살고 또 바르게 살면 무엇을 포기 못합니까? 착한 일은 모은 바구니를 포기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어딜 갑니까? 지옥 가는 거에요. 언약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고, 육인 사람의 특징이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닌 자기 쪽에서 움직이고 가려고 해요.

 

그러나 영의 사람은 내게 현재 이렇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이런 상태로 사는 것은 내 쪽에서가 아닌 주께서 찾아 오셔서 유발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주께서 나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한 게 있다? 없다? 내가 한 것 없습니다. 그럼 내가 착해야 되겠다?와 착하다라는 사이에는 중간 중간 착해야 되겠다로 시작해서 더 착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 좀 더 착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 좀더 더 착해야 되겠다로 되다가 착하다로 되는데,

  

그 사이 사이에는 누구의 행위로 채워야 되겠어요? 본인이 나서서 악을 쓰며 채워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백날 기도해도 누구의 힘으로 기도 한 거에요. 자기가 열의를 가지고 한 기도 밖에 더 되겠어요?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자기가 공 들인 거에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믿으니까 자기들도 믿음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언약궤는 거주지 + 이름이다. 그러면 주님이 거주지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죽음이 있지요. 그런데 이 죽음이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은 못 들어가지요. 제사장 외에는 그런데 제사장들은 왜 들어 갈 수 있나? 이미 제사장들은 죽었다고 치고 사는 사람이기에 거룩한 사람, 분리된 사람이라고 하지요. 레위인들 하곤 또 달라요. 그래서 제사장들은 경계선 사이에 있는 사람이에요.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제사장) 나중에 언약을 오해해서 한번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고 제사장직도 그렇겠지 자기들이 제사하는 기능으로 구원받으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가짜’였다. 결국 그림자였고 가짜였어요. 진짜 제사장은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어도 은혜가 안되요. 진짜 죽은 사람이 와야 되요. 인간이 제사하는 것으로 구원해 주지 못한다.

 

그러면 남아 있는 문제는 뭐냐? 언약궤가 전쟁을 할 때 언약의 전쟁은 육과의 전쟁이지요. 그러면 지금의 전쟁에는 적이 두 개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블레셋이라는 것도 적이 되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도 적이 되겠지요. 그러면 언약궤는 블레셋에게도 포착되지 않고 이스라엘에게도 포착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에 나서면서 숨겨진 언약의 기능이 새롭게 밝혀지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사무엘 상 4장~7장까지 계속 됩니다.

 

참 쉽지요? 쉬운 게 뭐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다. 이름 자체가 나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 하는데 스스로 일 할 때 우리는 생각할 때 나는 여기 있고 주께서 스스로 일 해서 나에게 되겠다 그게 아니고 스스로 일 하는 그 속에 우리가 같이 삼킴을 당해버리면 우리는 우리를 보기에 이 정도 하면 괜찮고 훌륭하고 착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는 애초에 태어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주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언약궤를 유지하기 위해서 제사장이 있어야 될 이유, 그리고 어린 양을 죽여야 될 이유가 비로소 아하! 내가 그냥 구경하는 입장이 아니고 나의 운명과 나의 주체와 관련돼서 어린 양이 죽는다는 사실을 처음에 있었던 유월절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매일 같이 지금도 대신 죽으심이 반복되는 결과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관계가 설정되고 언약의 사람이 된다면 주께서 창세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고 영생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 다음에 정리해 봅시다. 언약궤는 거주지+이름이다. 이름은 기능적으로 점점 더 나타난다. 기능을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바로 죄 인줄 모르고 까부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잠식화 시키고 역사를 삼키는 식으로 언약궤가 나서기 시작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언약궤가 나오니까 큰 외쳤어요. 우리는 승리 했다고 이 장면을 비유하자면 찜질방에 가서 불가마가 나오면 좋아서 사람들이 고함지르잖아요. 살 빼고 땀 빼려고 그것처럼 언약궤가 나오니까 승리했다~고 좋아하는 드디어 주인공을(언약궤) 강력한 원자폭탄처럼 좋아하는 거에요. 그렇게 좋아서 외치는 소리를 블레셋 진영에서도 들은 거에요. 블레셋도 이미 들어서 정보를 알고 있어요.

 

언약궤의 위력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에 나옵니다. 7-10절 말씀입니다. 10절에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갔다는 거에요. 도대체 언약궤가 등장하므로 말미암아 의도적으로 누구의 사기가 올라가 버렸습니까? 블레셋의 사기가 올라가 버리지요.

  

(삼상4: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삼상4: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 인을 친 신들이니라

(삼상4: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삼상4: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그러면 누가 승리했어요? 블레셋이 승리하고 이스라엘이 패배 한 겁니다. 결전에서 준결승이에요. 결승전은 언약궤 단독하고 블레셋의 싸움이 결승전이고 (이스라엘은) 준결승에서 이미 떨어 졌어요. 우리나라 한국하고 똑같아요. 16강에서 다 떨어졌어요. 적들이 약점을 알아 버렸어요. 다른 나라 선수들이 한국의 유도와 레슬링 선수들의 약점을 다 알았어요. 약점을 공략하니까 이미 다 들통났어요.

 

이스라엘의 약점이 뭐냐? 언약궤만 있으면 승리한다는 그것이 들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승리케 했습니다. 거기서 얼마나 죽었느냐하면 삼 만명이고 죽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그래서 그 소식을 엘리에게 전했지요. 엘리는 제사장이고 제사장은 언약궤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말은 그동안 엘리 제사장의 체제가 평소에 블레셋이라는 적이 오기 전에 이미 소통이 안돼고 합치될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었다는 것이 비로소 들통난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평소의 생각이 사실은 십자가와 무관한 엘리와 같은 삶을 삽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건 고맙지만 이젠 내 생각대로 살아야지! 내겐 목표가 있으니까라고 하고 우리는 또 일상적인 삶을 살거든요. 이런 점을 우리로 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돈 버는 전쟁을 하는데 참 힘드네! 돈도 안 벌리네~ 그때는 울고 불고 합니다. 못 살겠다고 하나님께 고함지르지요. 적이 이겼습니다라고 보고 하지요. 자신들이 적인데 그런 적들을 우리에게 배치하신 이유가 그런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6-09-12 11:13 
시장과 포도원 ( 마 21: 33-41 )                                                                                         대전- 79강



이근호

 



2016년 8월 23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1:33-41

  

 

 

(마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마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마21:41) 저희가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마태복음 21장 33절부터 본문을 제가 읽어 봐야 되요. 마지막에 보면 아들을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영역을 만들었다는 것, 영역을 설명한다는 것이 관심이 갑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는 우리와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영역을 만드십니다. 영역을 만든다는 것은 개인의 자질을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네가 어디에 속했나를 따지시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내가 행동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우리가 속해있는 성질을 드러내는 겁니다.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영역의 본질이 우리의 평소 행동으로 툭! 튀어 나오는 겁니다. 청춘 남녀가 선을 볼 때 엄마하고 집안 어른하고 같이 가는데 “걔 봐! 행동을 보면 집안 내력이 다 나오잖아!” 이러잖아요. 걔의 행동을 보면 걔가 사는 가정형편과 가정교육의 상태가 다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판 다 깨졌어! 이 판 깨! 저 행동하는 거, 꼬라지 봐! 저 집안하곤 안 되겠어! 저 아버지 하는 꼬라지를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 이렇게 어떤 영역, 소속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은 본인의 본질이 아니고 본인이 속해 있는 영역, 환경이나 상황의 본질을 하나의 개인이 묘사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뭐냐? ‘나’라는 없고 그 영역에 속해있는 하나의 자리를 나타내는 것이죠. 이런 자리, 자리들이 모여서 그 영역의 성질을 드러내니까, 오늘 본문을 위해서 하나의 도형을 그려보겠어요. 영역이니까 둥글게 타원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처음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타국에 가지요? 그러면 원의 경계선 바깥에 가 있습니다. 밖의 한 지점을 포인트라 하고 그 지점에서부터 원 안으로 각각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면 복음을 안다라는 것이 뭐냐하면 내가 어느 한 부분 만(타원의 영역) 아는 게 아니고 전체를 (타원과 바깥의 한 지점) 알면 복음을 아는 겁니다. 전체구조 이지요. 핵심이 되는 중심(포인트)가 바깥에 따로 있고 그것과 (타원 안에서) 각각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중심(포인트)의 자리에 예수님을 넣으면 되겠지요.

 

본문을 보면 어떤 포도원 주인이 그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는데 그 중심을 바깥에 두고 주님의 감시와 관찰 대상자로 우리가 있다고 보자는 말이죠. 이렇게 관점을 설명하니 여러분이 납득이 되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그림이 아니고 본문 마태복음 21장의 포도원 비유를 모르고 성경을 모른다고 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갑니까?

 

우리에겐 이러한 (전체의)영역 개념이 없고 각자 각자의 영역을 따로 갖고 있어요. Ⓐ라는 사람의(영역이) 있고 Ⓑ라는 사람의(영역이) 있고 Ⓒ라는 사람의(영역이) 있어요. 마치 비누방울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캡슐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각자 각자 따로 살아요. 이것들이 모인 것이 아파트잖아요.

 

우리는 마태복음 21장을 보니까 이것을 복음적으로 이해한다고 하지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경상도 말로 지즘지즘 (각자각자) 제각기 고유 권한이 있는 겁니다. 그 들어 있던 캡슐을 굴러서 사회에 나가보면 서로 부딪혀 튕기고 충돌되고 돈이 있다는 곳에 서로 가려다 부딪혀 튕겨 나가떨어지고 경기도 하남에서 주택 분양한다는 소릴 듣고 돈 들고 대구에서 각지에서 갔다가 부딪혀 떨어지고 튕겨 나가고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은 마찰하고 튕겨 나가면 돈(힘)을 적치해서 모아 놓고 돈의 힘을 가지고 다시 나가서 남하고 대결해서 얻어 내려는 이것을 ‘시장’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포도원과 같지 않고 ‘시장경제’ 원리가 통하는 거에요. 시장경제 원리는 뭐냐하면 내어 놓을 것이 있을 경우에만 다름 사람이 나를 가치 있게 보는 거에요. 이것을 ‘설정 값’이라 해요. 나에게 설정되어 있는 값, 값은 가치라는 뜻입니다.

 

내가 공부를 이 만큼 해서 박사 학위 받았고, 박사 학위가 없으면 인물이라도 좀 되든지 인물이 되면 가치가 올라가요. 에스더처럼, 어쨌든 간에 시장 바닥에서 “저를 사가세요” 하고 있으면 누군가 와서 찜해서 “얼마면 되요?” 물으면 “예~ 한 달에 250정도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팔려 나가는 거지요. 전부다 하나의 장터에서 그물 같은 망 사이사이에 앉아서 자기의 가치를 드러내는 거에요.

  

대학은 어디 나왔고 한 달 수입은 얼마이고 우리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이고 아파트는 몇 평짜리이고 차는 뭐 같고 있고 전부 이렇게 갖고 있으면 사람들이 말하길 아이고 신용있네!하고 찾아오는 거에요. 시장에서 중요한 게 신용인데 다른 말로 신뢰성입니다. 신뢰성은 고유가치에요. 남이 필요한 재주가 있어야 되고 학식이 겸비되야 되고 거기에 교양이나 윤리와 도덕까지 겸비되면 멋지지요.

 

그렇게 뽑혀 가는 것, 이것을 취직이라고도 하지요. 또 취직에는 반드시 경쟁이 있게 되고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시장에서 뽑혔다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설명하려면 먼저 포도원부터 이야기하면 안되고 현재 우리가 놓여 있는 형편부터 이야기해야 되요. 우리는 이렇게 시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대 방금 사장에서 개인을 이야기 했잖아요. 국제 사회는 국제시장이에요.

  

이것은 (북한)있고 (대한미국)있고 (일본)이 있고 전부다 시장 논리에 의해서만 현대 국가가 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장경제 원리에요.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 뛰어난 기술 개발이 발달하게 되면 미국이나 영국같은 세계 금융 투자 회사들이 여기에 투자 하게 되면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국민 소득이 확 늘어나지요. 아일랜드나 아이슬랜드라든지 홍콩이나 룩셈부르크라든지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제일 높습니다.

 

작은 나라인데도 원자재가 많다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달려듭니다. 그런데 자원이 떨어지면 투자자들도 다 빠져버립니다. 빠지면 부도 사태가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세상의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 사실은 개개인보다 국가가 더 큰 전체이면서 다른 국가와 경쟁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개인적으로 이 나라에서 살기 어렵다하면 잘 사는 나라에 가면 되요. 미국에 이민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이민가려 하면 트럼프가 반대 하겠지요. “쓸대 없이 미국으로 이민 오지 마라 우리도 못 살겠는데 왜 자꾸 기어들어 오냐?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 주면 이민법으로 다 쫓아낼 께! 이슬람이건 뭐건 다 쫓아낼께!”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화제꺼리와 관심사가 오직 하나 밖에 없어요. 내가 이 시장에서 뽑힐만한 존재이냐?

 

그러면 나의 가치는 자기 나름대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신앙 좋고 착한 일 많이 하고 착한 일 한 것을 바구니에 모으고 그런데 이런 것을 시장에서 알아줍니까? 안 알아주는 거에요. 맨 날 교회 돌아다녀봐야 시장에서 안 알아 줘요. 그 짓 하지 말고 그냥 기술이나 배우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러한 입장에서 시장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시장의 구조에서 개인은 시장의 원리를 형태로 보여준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질이 아닌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영역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모든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통해 보여 준다고 했잖아요. 구체화시키는 거에요. 그러면 실제는 뭐냐 우리가 말하고 주고받는 모든 대화는 현재 경제의 구조나 시장 구조의 내막을, 본질을 보여주는 그런 대화를 보여 주는 겁니다.

 

(올림픽 금메달) 박인비(골프 선수)가 귀국 했다고 온통 난리를 피우고 그 아버지는 좋아서 울고 박인비 외치고 그런데 처음에 이 선수가 갈 때는 가지 말라고 했어요. 국내 선수로도 탈락 됐으니 후배들에게 물려주라고 했는데 나중에 용 되어 버렸어요. 손목 부상 당했을 때는 박인비 시대 끝났다고 했거든요. 손목 부상을 하고도 금메달 땄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박인비가 한국에서 치료만 받으면 된다는 거에요.

 

아픈 채로 금메달 딴 거에요. 그 말은 뭘 뭐냐 동메달이나 은메달 딴 사람이나 성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못 이긴다는 뜻이에요. 아프든 성하든 금메달 땄으면 시장 경제가 확 올라 섯고 그 바람에 한국이 11위가 아니라 8위가 된 거에요. 그러니까 국가가 갖고 있는 시장의 가치가 올라갔고 거기에 대해 해외에서 투자가 막 올라 가면서 중소기업도 덩달아 투자가 들어오고 신용도가 높아져요.

 

너희 회사 믿음직해 만약에 너희가 물건 못 대도 은행에서 손해 배상 알아서 다 해 주겠지! 왜? 국가 체제가 기업에 대해서 은행을 보고 기업에 돈을 주게 되어 있어요. 기업에 무슨 돈이 있다고, 은행에서도 이 정도 신용도면 투자하고 주문이 들어온다는 말이에요. 모든 사고방식이 24시간 가동 되는 게 뭐냐하면 시장이에요.

 

병원의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의학 공부 하는 줄 합니까? 손님 더 끄는 것만 연구하는 거에요. 이런 입장에서 결국 뭐냐하면 나의 가치를 어디서 찾느냐? 이 문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치는 본인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니에요. 어디에 있냐 하면 바깥에 있는 포도원의 주인이 어떤 식으로 투입하게 끔 해서 연결고리로 삼고 주님의 것이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 그 가치가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 가게 만듭니다.

 

강도가 됐든 거지가 됐든 상관없어요. 복음을 전한다는 게 뭐냐하면 반드시 그쪽 현재에 있는 가치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가 전제를 먼저 해야 되요. 그렇지 않고 포도원이 있었는데요~ 농부가 ~어떻게 했데요. 그럼 듣는 사람이 우리는 안 그래야지! 우리는 안 그래야지~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고 본인이 평소에 어떻게 사는 지도 모르고 우리는 안 그러겠데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21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를 보란 말이죠. 유대인 국수주의, 내가 속해있는 집단의 절대주의라고 보면 되요. 쉽게 말해서 내가 속해있는 이 집단이 절대적이다. 이것이 국수주의 인데 유대인 국수주의에요. 메시야가 오게 되면 메시야는 유대인을 뺀 모든 민족들을 처벌해서, 그들에겐 모형이 있는데 다윗 시대의 재현입니다.

 

그들의 희망은 다윗시대의 재현이에요. 모든 땅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고 다른 민족들은 조공을 바치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이 근거가 이사야와 에스겔과 예레미야에 나와요. 거기에 보면 다윗의 자손이 와요.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옛날 다윗의 영화를 완전히 보장해 준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떠한 역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경(구약) 말씀대로 반드시 그리 될 것이라 믿고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 지키고 할례 지키면서, 어서 다윗의 작손인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걷고 하니까 그 분이 그 분일 줄 알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인기 좋다는 것을 가지고 주께서 그것을 엉터리라는 거에요. 인기가 좋으니까 누가 덩달아 신이 났냐하면 12제자들이 같이 신바람 난 거에요. 그들은 이대로 가면 자기들이 성공했다는 거에요. 이제 하늘나라에서 12보좌에 앉아 통치하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누가 높습니까? 그런 질문을 한 거에요.

  

그런데 그런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버릴 줄 상상도 못했지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는 그 말씀대로 자기들이 예수님을 배반 할 줄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 말씀을 주신 거에요. 그런 국수주의에서, 그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영역을 표시했는데 포도원이다. 포도원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과실의 열매가 꿀이고 젖은 염소나 소젖이 되겠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이 살기에 풍부하다. 거기서 포도 열매가 맺히면 전부 다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하기 전에 포도원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유월절이 있고 맥추절이 있고 수장절이 있어요. 수장절은 곡식을 거두는 겁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은 이 땅은 하나님 것이다.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이 주인이에요. 주인은 누구 밖에 없어요? 하나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품꾼이지요. 품꾼이기 때문에 수장절이 지나고 난 뒤에 주인이, 주인은 농사를 져요. 농사를 지면 열매도 맺히는데 그 열매로 인해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친히 농사꾼이 되어서 된 열매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기 가족을 포함해서 모든 열매는 다 누구의 것이 되는 겁니까? 주인의 것이니까 주인에게 다 돌려주는 거에요.

 

다 주인에게 돌려주고 주인의 은혜로 몇% 받나 하면 90%를 돌려받으면 10% 빠지겠지요. 그게 바로 십일조라는 거에요. 십일조는 내 것인데 1/10드리는 게 아니고 다 돌려주고 고맙게도 90%나 주시는 거에요. 90%나 5%를 줘도 내 몸, 내 목숨, 내 자식 모든 게 이 땅에서의 주인은 주님 것이니까 품꾼이라는 것은 뭐냐 주님의 종이란 뜻이에요. 주인의 노예란 뜻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였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노예가 된 거에요. 어느 경우라도 노예가 아닌 경우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의 특징이에요. 주인님을 위해서 존재하지 주인 없는 나는 있을 수 없어요. 젊은 주부가 애기가 없다가 애기를 낳으면 자기 몸이 망가져도 괜찮아요. 아기만 있으면 나는 죽어도 좋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사랑이잖아요. 사랑의 특징은 ‘네가 있음에 나는 있으나마나 상관없다.’는 거잖아요.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만 있음에 내가 어떻게 망가지고 내가 어떻게 살다 죽는다 할지라도 전혀 그런 것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거에요. 그 관계가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된다? 저주를 받는다 했지요. 이것이 인간적으로 어떻게 성사가 됩니까? 인간적으로 성사가 안 되니까 성령이 오셔서 이미 구원받게 하시고 토하고 토하고 또 토하게 하지요. 자꾸 착한 일 찾아 담지 말고 자기 죄를 토해내야 되요.

 

맥추절이라 하는 것은 바로 중간에 밀 열매가 맺히고 이 첫 이삭을 거둘 때에요. 이것을 통해 시작해서 중간까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동네가 바로 약속의 땅이다, 천국이다. 그래서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 다니고 모든 것이 주님이 발걸음을 인도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천국은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 다 들어 있어요.

 

어느 시점, 어느 순간도 주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마음껏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겁니다. 여기까진 주님이 하셨고 요긴 제가 했습니다라고 따로 끄집어 낼 게 없어요. 그래서 천국 생활 한다는 것은 정신 바짝 차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그냥 회개의 연속이라고 보면 되요. “아이고! 바보야~바보야~.” 자기 머리 쥐어박으면서 천국 생활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모든 게 실수 덩어리니까.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포도원과 농부들을 봅시다. 포도원은 이시야, 예레미야에 보면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둘로 나뉘지요. 북쪽의 썩어빠진 이스라엘은 망했고 남은 것은 남쪽의 유다이니까, 포도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겁니다. 맺으라는 것을 보니까 맺으라는 명령이지요. 명령이니까 열매가 없는데 네가 알아서 열매를 잘 맺어야 된다. 그런 뜻으로 들리지요.

  

좀 더 내용이 깊이 있게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열매 없는 자는 잘린다 또는 불사름을 당할 것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리고 유다 나라 멸망합니다. 이 말은 맺으라라고 할 때 이미 뭘 염두에 두었냐 하면 맺으면 좋고 안 맺어도 그만이 아니라 열매를 통해서 너희의 본질이 어떠한지 들춰내겠다는 뜻이에요. 모든 성경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6장7-10절에 보면 먹는 것, 입는 것을 족한 줄로 알라는 명령이거든요. 사도의 권면이고 이건 명령이에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부하려고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빠진다. 그 다음 말씀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다가 망하고 믿음에서 떠나 버렸다. 전부다 시장논리에 근거해서 사는 거에요. 개개인의 캡슐(영역)에 돈만 챙기는 시장을 염두해 둔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의 본질을 주께서 미리 알려 주시는 거에요. 먹는 것, 입는 것을 족한 줄로 알라는 말은 너희가 먹는 것, 입는 것을 족한 줄로 아는 인간 같으면 내가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다 그런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너는 네 자신에 대해서 모르지? 이리 이리로 와봐! 십자가 봐!” 그러면 멀뚱하니 십자가 보이나? 자~알 보입니다. 뭐고? 나무 작대기 두 개 크로스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누가 보이나? 예수님이 피 흘리고 있네요. 이게 제가 아는 다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끝. 가버리는 거에요. 십자가 알았다고,

  

“저걸 목걸이로 만들까? 목걸이로 달고 다닌다고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사도와의 권면이 평생 주어지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60이든 80이든 돈 좀 벌었으면 하는 것은 유황불에 들어가 있어도 마찬가지에요. 돈 있어서 큰 자식도 한 5억 주고 둘 째 자식도 10억 주면 잘 살겠지? 잘 못 삽니다. 시장논리에 의하면 캡슐의 든 5억 받은 큰 아들 잠 잘 못 잡니다. 화가 나서 왜 둘째는 10억 주고 자긴 5억 주느냐? 기어이 가서 뺏어 와서 7.5가 될 때까지 중간 될 때까지 하지요.

 

이런 일을 우리도 주의 해야되요. 세상이 이런 거에요. 돈이 있어서 돈을 사랑 안하는 게 아니고 세상 자체가 시장의 판 벌리고 자기 점포 벌이고 있는 거에요. 쟤 10억 주고 난 5억 주면 “아버지 내가 쟤보다 못 한 게 뭐 있습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주위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지금 주위에 가정마다 문제없는 가정이 없어요. 사실은 가정 자체가 포도원이거든요.

 

이미 이 포도원은 주인에게 작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외부엔 안 보이니까 자기들끼리 이곳을 시장터로 만들었어요. 외부에서 오면 죽여 버리고, 오면 죽여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가치, 아까 이것을 설정 값이라고 했지요. 여기 있는 나의 가치는 남들이 얼마나 처 줄 것인가? 이런 것으로 버티고 있다는 거에요. 시장터인 포도원이. 그런데 외부에서 와서 내놓으라 하니까 솜으로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내 보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 봅시다. 역사가 뭡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세상 적으로 답하면 인류의 지혜와 노력의 연결고리, 이게 역사거든요. 인간의 애씀과 좌절을 극복한 희망을 가졌던 것이지만 주님 보시기에 역사란 종을 보냈더니 죽이고 종을 보냈더니 죽이는 게 역사에요. 그러면 역사를 이야기 할 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 뭐도 같이 말해야 됩니까?

 

바깥에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 하신 그 분의 뜻을 아울러 같이 포함시켜야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 세상 관점에서 본인의 자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느 교회의 당회장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직업도 없고 자리도 없어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자리 없다고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회사에서 말썽꾸러기 직원이 안 나가면 보통은 자리를 빼든지 화장실 쪽 냄새나는 곳으로 보내든지 해서 하지요. 자리를 뺀다는 것은 이미 너는 내 쪽 사람이 아니다라는 거잖아요. 예수님께선 사도 바울의 자리를 미리 뺏어요. 따라서 로마 군인이 사도 바울을 죽이고 12제자를 죽여도 사도들은 겁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 원래 이 땅엔 자리가 없어요. 그것이 골로새서 3장에 나옵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자리는 하늘에 있어요. 이 땅에 자리가 없으니까 누가 자리를 빼서 나가라고 해도 그냥 나오면 되요. 사도 바울의 소원이 빨리 죽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죽음의 희열을 느끼라고 했잖아요. 죽어가는 쾌감을 느껴야 된다고요. 저쪽 죽는 쪽으로 달려가야 되요. 그것을 낮 설교에서 속편한 내과라고 했지요. 우리 동네에 내과 병원이 있어요.

  

살려고 하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빨리 죽음 쪽으로 가는 거에요. 그것도 우리 뜻대로 안되고 주께서 속도 조절을 해 주셔야 되요. 이것도 순서가 있어요. 이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되는데, 통째로 봐야 되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포도원에 대해서 주님께선 전체를 포도원으로 보고 그것은 내 농장이라는 거에요. 이 말은 하나님은 농사짓는 농사꾼이에요.

 

그런데 포도원은 농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농부의 가치와 자존심과 명예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지금 이 땅에 사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가치와 명예와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려면 포도원이 되면 안되고 각자의 점포를 갖고 있는 시장터가 되야 되요. 때로는 합쳐 동업하다가 때로는 그것이 깨져 독립해 나가다가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이것은 우리들의 세계이고 더 나아가 내가 살아남아야 될 기어이 버텨야 될 나의 세계에 일부로써 간주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나의 자리를 절대로 포기 못하는 식으로, 내 자리 지키는 식으로 자식에게도 양육하고 교육하고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입장이라는 거지요. 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죄는 잡범 같은 도둑질이 아니에요. 정권을 정복하는 죄가 제일 커요. 통치권의 자리를 노리는 죄. 도둑놈은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지 남의 자리를 부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제일 큰 죄는 상대방의 자리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형당할 만 해요. 주님은 그런 유대인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유의 가치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자체를 캡슐로 담아서 로마제국을 하나의 캡슐로 보고 다른 제국도 또 하나의 캡슐로 봐서 메시야만 오기만하면 너희는 다 죽었어!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을 유대교 국수주의라고 했지요.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교회에 분포해 있습니다.

 

7년 후 7년 전 환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이스라엘이 회복하는 날이 온다. 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면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때 감람산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이런 모든 사고방식이 기독교 국수주의입니다. 히틀러하고 사고방식이 같아요.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냐하면 믿음이 없어서 에요. 믿음이 없으니까 역사적으로 상황을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3차 대전이 일어나고 터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란이 공격하고 메시야가 공격할 때 시편에 83편에 곡과 마곡 (겔 38-39장, 계 20: 8) (전쟁)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으니 하는 그런 식으로 집회를 열어서 결국 돈 내라는 이야기거든요. 마지막 때에 노아 방주처럼 준비하자는 거에요.

 

(시 83:3)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시 83:4)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시 83:5)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시 83:6)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시 83:7)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시 83:8)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셀라)

 

그런데 오늘 포도원의 비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들이 죽을 때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종들을 보내니까 죽이고 보내니까 죽이잖아요. 그러면 질문하겠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의 나쁜 것이 종들을 죽이면 그 죄가 다 드러나는 겁니까? 다 안 드러나는 겁니까? 종들을 보냈을 땐 다 안 드러났어요. 결국 멀리 타국에 갔던 주인이 농부들의 뭘 노립니까? 농부 자신들도 모르는 진짜 죄는 누구와 맞닥드려야 알 수 있습니까? 주인의 아들을 보내야 되요.

 

아들을 보냈을 때 농부들이 이 사람은 아들이다를 알고 죽이죠? 알고 죽인다고요. 그렇다면 이 포도원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야기 하는 거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모든 행동은 요한복음에도 나오지만 ‘내가 바로 메시야’다 보여주는 흔적들을 많이 남긴 거에요. 그러면 유대인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메시야상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그들이 메시야를 몰랐던 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어디에 문제 있습니까? 자기들이 누군지를 본인들이 모르는 거지요. 그러면 결국 무슨 문제이냐 하면 본인의 주체 문제에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정말 쉬운 것이 뭐냐하면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기대한 메시야의 예수님입니까? 우리 때문에 죽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야 되요?

 

둘 중에 어느 겁니까? 메시야의 존재를 만나야 되요?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만나야 되요? 죽은 예수를 만나야 나를 알아요. 우리는 그냥 예수님이 오게 되면 “아이고! 기다렸습니다.”악수를 합니다. 악수를 청하는데 예수님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갔는데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보냈더니 죽였더라하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을 알라고 주신 말씀인데 자신들은 멀쩡하다는 거에요.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메시야만 오면 된다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오면 영접하고 할렐루야! 구름타고 오시면 영접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 성경을 볼 때 개인의 주체, 교회의 주체로 성경을 보니 그런 겁니다. 이 주체를 문제 삼자는 거에요. 제 이야기가 결국 오늘 강의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시키는 대로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십자가를 가지고 (성경을)보자는 거에요. 내가 정상인거 같은데 왜 (틀렸다는 건지?) (예수님이) 죽을 만 해서 죽어야 되잖아요. 죽을 만 했기에 죽은 거에요. 그 정도로 우리가 못됐어요. 참 못됐어요. 복음 알고 난 뒤에 더 못돼졌어요. 왜냐하면 남이 모르는 복음까지 알아 챙겼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감히 날 무시하지 마라고 그 정도가 심해졌어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못돼먹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은 천국은 나쁜 남자, 나쁜 여자만 들어간다는 겁니다. 나쁜 사람만 가는 거에요. 좋은 사람은 못 가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회개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제자들도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데도 마태복음에 기록한 것은 딱 성령 받기 전에 딱 주께서 우리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라서 기쁨으로 마태복음에 기록한 겁니다. (우리가) 욕 얻어먹어도 싸다. 욕하신 것에 대해서 “잘하셨습니다.”라고 그렇게 하신 것에 대해서 도리어 찬양으로 보답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토대는 시장 통이잖아요.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데 거기에다 복음까지 알면 괜찮은데다 더 +⍺ 과 되면 기독교 국수주의가 되지요. “역시 나는 괜찮아! 복음까지 알았으니까!” 이렇게 되면 통통 대며 말하는 신앙계라는 시장 통에서 누가누가 잘 났나? 튕기는 거에요. 온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이 교회가 잘났나? 저 교회가 잘났나? 누가누가 잘났나? 계시 받고 시장 통에서 자기가치를 고수하고 있네요.

  

단 한번이라도 십자가 피 흘림 앞에서 얼마나 (내가) 더러웠으면 저 깨끗한 피를 더러운 나를 위해서 흘렸겠습니까라고 고백만 해버리면 되는 것을 근심, 걱정, 진리 찾기, 진리를 왜 찾아요? 진리의 열매가 나인데 왜 진리를 찾고 있습니까? 진리는 예수님이고 나는 길이고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이 진리인데 내가 왜 진리를 찾아야 되요? 진리는 따로 있는데 진리는 영역 밖에 따로 있는데,

 

우리는 포도원의 농부와 똑같아요. 성질 더럽고 시장 통세서의 가치를 포기 못하는 인간입니다. (포도원) 바깥에 있는 분이 마태복음 21장 34절의 말씀 가지고 바깥에서 안으로 투입시켜 주시는 거에요. 너희들은 악한 농부였다. (종과 아들을) 죽였다. 마태는 말하지요. “그 말씀 참 잘하셨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그 말씀을 잘 몰랐는데 받고 보니까 딱 저에게 합당합니다. 맞습니다.

 

죄인 맞습니다. 유대인만 지옥 가야 되는 게 아니라 성령 받지 않은 자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유대인과 우리가 똑같은 입장에서 잘난 체하고 살아가기에 성령오면 구원받고 성령 못 받으면 구원 못 받는 거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인자를 거역하는 자는 용서를 받되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운명은 어디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에 달려 있어요. 성령에 달려있다라는 것은 율법의 행함과 관련 있다? 율법의 행함과 관련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엄마나 잘 지키냐 못 지키냐가 우리의 운명을 확정짓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늘 바깥과 소통이 돼야 되요. 주의 말씀과 소통할 때 말씀을 하면 지키겠다가 아니라 반드시 말씀을 십자가 피로 경유해서 받아드리고

 

우리는 십자가 피를 받으면서 말씀을 보게 되면 (딤 6: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 평생을 다해도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육적인 사람인 것을 고백하면 되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우리가 거지입니까? 왜 그런 것으로, 신발도 좀 좋은 것 신고 옷도 좋은 것 입고 싶어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시장 통에서 돈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주께서 일부러 그랬다니까요. 오늘 본문이 너는 악한 농부야~ 12제자 너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아니지요 해서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와야 되요. 성령은 뭐냐? 십자가의 영이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온 영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외부와 교통이 되지요. 연락이 된다고요. 연락이라는 것은 연결 되어 있다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평소에 행동과 행동 사이에 자기의 잘남으로 연결하지 마시고 주의 은혜와 용서로서 연결하시기 바랍니다. 공부 마치고 오늘 밤에 잠을 잘 때도 잠자자 해서 잠이 오는 게 아니고 주께서 잠을 주셔야 잠이 와요. 평소에 나는 베개를 좋은 것 벼야 잠이 온다. 베개가 좋아서 잠이 오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잠자게 하시는 겁니다. 시편 104편 봅시다. 끝으로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시 104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의 호흡을 취하신즉 그들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모든 게 성령에 의해서 동, 식물이 인간을 다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한 군데 저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4장 11절 보세요. 모든 관계는 주께서 벙어리가 되든 뭐든 간에 하나님 자기가 농사짓는 포도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먹어리나 소경된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을 탓하지 말고 자기 팔자가 왜 이래 하지 말고 외부의 성령과 소통이 되고 연결되면 되요. 사람들은 왜하느냐? 고민을 부분만을 가지고 보고 거기에 인생을 걸고 승부를 하다보니까 맨 날 울고불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따지고 주님 앞에 대들고 해요.

 

(출 4: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먹어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시장 통을 통해 내가 성공했냐 실패했냐를 결정하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천국 백성 같으면 전체가 포도원이고 우리는 악한 농부에 불가한데 십자가의 용서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되돌아보면서 이런 인간이 천국가게 됐구나! 이렇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형편이라도 부분만을 보지 말고 전체구조를 보세요. 그 중의 하나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라고 주시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 목숨 걸었습니다. 자존심을 걸었고 남에게 안 지려고 악발이가 되었습니다. 지면 살맛도 못 느끼고 심지어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다시한번 포도원 비유를 생각해서 바깥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한번 저희가 주님의 용서받은 것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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