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대전강의
2016-09-27 22:04:21 조회 : 1189         
사무엘상 18강(자기파악), 마태복음 80강(단절) 16092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주향(IP:211.♡.24.139) 16-10-25 23:44 
자기 파악 (사무엘상 4:12-22)                                                                                      대전-(사무엘상 18강)

  

이근호

 

2016년 9월 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4: 12-22

  

 

(삼상4: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삼상4: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삼상4: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삼상4:15) 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삼상4: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삼상4: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삼상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4: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삼상4: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삼상4: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삼상4: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사무엘 상 4장 12절부터 하겠습니다. 구약은 이야기 줄거리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할 필요는 없어요.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에 한 구절 한 구절 다 하는 게 아니에요. 구약은 문제지입니다. 문제를 제시하는 거에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런 일이 났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이고 자! 구약이 문제지라면 해답은 어디에 나오겠어요? 해답은 신약이지요. 신약은 촘촘하다고 보면 되요.

 

신약 하나하나가 해답 덩어리에요. 신약에서 문제를 끄집어내게 되면 그것이 문제와 해답이 안 맞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구약이 문제이고 신약이 해답이라면 신약에 관한 내용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구약부터 시작해야 되요. 구약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성급해서 신약의 성경 구절이 나오니까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나오니까

 

“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구나!” 이렇게 그냥 자기 편리한데로 끄집어내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는데 구약이 왜 있겠어요? 구약은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신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할 때 그 세상은 뭐를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해 놓고 이 세상에는 질고와 악과 고통과 죽음이 이렇게 범람했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은 어디서 얻냐 하면 문제가 되는 구약부터 출발해야 되요.

 

구약부터 출발하지 않고 신약을 보고 세상을 이렇게 사랑한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선 처음부터 인간을 사랑하시는구나! 이렇게 오해하시면 큰일 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사랑할 것 같았으면 아예 지옥을 만들지 말아야 되지요. 지옥이 뭡니까? 불구덩이 속에서 고생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스스로 만족한다? (웃음) 하나님의 멘탈이 어떤 멘탈인지?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해놓고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지옥가서 영원히 멸망하고 고생하는 것을 보고서도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언급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여호와증인이 나온 거에요. 여호와증인은 지옥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겁주려고 지옥을 언급했지만 실은 겁주고 지옥 빼내준다 이런 식으로 아예 없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급하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성경을 자기 욕망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벌어지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1장15절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을 오늘날의 현대 시간론으로 보면 안 맞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즉, 자기보다 늦게 태어나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 계시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자기 뒤에 오면 어디까지나 뒤에 와야지요.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런데 자기보다 앞선다면 예수님이 앞선 영역은 어디이며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영역은 이 세상, 이 역사의 (어디인지) 내 (세례요한)뒤에 출생하셨거든요. 예수님이 세례요한보다 6개월 뒤에 출생했는데 그러면 뒤에 출생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보이는 이 세상은 순차적으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있고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고 정해진 것 말고

 

이 순서가 뒤 바뀌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역 말고 인간만이 있는 또 그 영역은 왜 있느냐 그러면 여기서 또 인간들이 사는 세계는 결국 갇혀있다는 거에요. 어디에? 인간마의 세계 그 외부의 세계에 의해서 강제로 갇혀있는 세계입니다. 갇혀있다는 말은 여러 가지 말로 더 발전된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는데 뭐냐하면 갇혀있기 때문에 뭐를 모른다?

 

진리 모른다. 미래 모른다. 나의 운명도 모른다. 나의 시작 모른다. 나의 끝도 모른다. 다 합치면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겁니다. 갇혀 있기 때문에, 해답은 외부에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에요. 세 살 때 태어나서 사고로 죽었다. 아무 것도 모른 체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른 체 세 살 때 죽은 거에요. 세 살 뿐 아니라 20살 때도 마찬가지고 90이 되도 아무것도 모른 체 태어나서 90년 살아서 아무것도 모른 체 그냥 90세에 죽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체 인생을 살았다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빡세게, 자식 키우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애썼던 그 모든 수고가 어떤 수고가 되겠습니까? 헛수고이지요. 그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한, 쉽게 말해서 인간은 왜 사냐? “아이고! 인간아! 너는 왜 사냐?” 아무것도 모르고 왜 살아? 심지어 그것이 대부분이라는 거에요.

 

이 세상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금 제가 언급한 요한복음의 신약입니다. 신약은 뭐라고 했습니까? 신약은 해답이다. 해답 덩어리, 문제는 우리부터 신약까지 접근하면 안돼요. 반드시 뭐를 거처야 되냐 하면 구약이라는 문제를 거쳐서 신약에 접근해야 됩니다. 그동안 쪽 복음이라 해가지고 신약 성경을 달달 외우면 뭐 영생이나 받고 천당 갈 줄 알았는데 구약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구약을 통해서,

 

학습에 심화 학습이라는 게 있지요. 학교에서 심화 학습 하듯이 구약 이스라엘 사람으로 우리가 잠입해 보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르고 모르고가 아니라 알고 알고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뭐가 있냐 하면 창세기가 있지요. 창세기는 시작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시작이 어떻게 되는 가? 시작에 대해서 언급하니까 결국 이것은 이렇게 이렇게 행하면 뭐 준다 이 논리가 아니고 너가 행하면 뭐 줄게 이런 논리가 아니에요.

  

뭐냐하면 내가 행하게 되면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시작이 아니고 내가 행함부터 시작 되니까 나의 시작이 되겠지요. 나의 시작은 성경에서 용납하지 못합니다. 나의 시작은 없어요. 그러면 시작은 누구의 시작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시작 밖에 없어요. 그러면 설교 할 때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것 하세요. 저것 하세요라고 하면 되요 안돼요? 안 되지요. 어떤 의미의 시작을 인간이 자기부터 개시합니까? 말이 안돼요.

  

그러면 성경에선 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부터 이렇게 퍼주고 계십니다. 만약에 강아지가 있는데 신문 기자가 와서 “강아지야 네가 산다고 애쓰지?” 그러면 “예,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사료 먹고 물 먹고 애 먹습니다.” 이러면 누가 웃기겠어요? 주인은 한 게 없게 되잖아요? 강아지는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이 집에 사는 것도 다 주인 덕이고 시작은 제가 시작한 것이 아니고 시작은 우리 주인님이 시작했습니다.”이렇게 돼야지요.

  

그렇지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속에 잠입해야 될 이유가 됩니다. 현대인들의 시작을 우리가 현대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더 정확하게 근대인이에요. 근대인이라는 것은 신분 제도에서 벗어난 겁니다. 전 세계 220여 개국의 나라가, 대부분의 나라가 근대 국가에요. 근대 국가라는 말은 그 전에 어떤 국가였다? 신분 나라였어요. 우리나라의 조선도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호부호형의 신분 제도거든요. 어디서 서자 출신이 출세하고자 합니까? 신분이 낮으면 궁녀도 되지 못해요. 신분제도가 근대국가로 바뀌면서 뭐도 날아가 버리냐 하면 신분제도였던 개념이 근대 국가적 종교개념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뭐라고 하냐하면 예수님을 왕이라 하거든요. 왕이라는 개념이 신분제도의 국가에 있는 거에요? 아니면 근대 국가에 있는 겁니까? 신분제도가 있던 것입니다.

 

왕이라는 말은 나의 존재의 실존에 모든 최종 운명의 결정은 왕 당신에게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근대 국가이지만 다시 신분제도 세계로 들어가 보면 내가 죽고 살고 먹고 마시고 영생하고 천국가고 지옥 가는 모든 것은 누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까? 왕의 의사에 의해서 우리의 의지에 상관없이 왕에게 속한 백성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백성이 됐다면 백성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왕과 관계가 성립되겠지요.

 

관계가 성립되면 왕은 어떤 책임이 있냐 하면 자기의 백성을 먹여 살릴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그 책임자 됨을 누가 인정해야 되요? 백성이 인정하게 되면 백성과 왕은 관계가 성립됐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오 라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나의 기름 부은 자요.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주이시요라는 말은 내 인생, 운명, 팔자는 이미 주님이 결정하셨잖아요. 라는 고백이란 말이죠.

  

만약에 현대 국가에선 안돼요. 현대 국가에선 임금이 시원치 않으면 누가 반란을 일으키고 누가 쿠테타를 일으킵니까? “임금 똑바로 해!” 하고 백성들, 자기들이 행동을 개시해서 “야! 임금 바꾸자! 대통령 바꾸자!” 이렇게 하는 의식이 무슨 의식이냐? 근대 시민 의식이에요. 근대 시민 의식은 신분 제도가 아니고 무슨 제도냐 하면 소유에 기초한 제도에요. 이건 교양적인 것이라 알아 두시면 좋아요.

  

신분제도에서 근대 국가로 바뀔 때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하나? 자본이라는 것이 있어야 되요. 자본주의 제도가 성립돼야 바뀌게 됩니다. 자본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돈이지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왜 그러냐? 왕과 국가의 관료는 내가 너에게 복종하려고 왕이 있고 국회가 있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왕이나 대통령이나 국회는 뭘 책임져야 하냐하면 우리의 돈을 지켜줘야 할 책임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부를 증가시키고 부자로 불릴 수 있게 해주는 조건하에 투표해서 나는 당신을 한시적으로 나의 통치자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 근대 국가의 모토(신조)잖아요.

 

그런데 신분세계는 어떻습니까? 신분은 태어난 것 자체가 애기에게 “너 어떤 신분 할래?”라고 묻는 게 아니에요. 이미 태어 난 것 자체가 쌍놈으로 태어날 놈은 쌍놈이 되는 것이고 종으로 태어난 놈은 종의 자식이 되는 것이고 양반으로 태어났으면 무조건 한 수 먹고 들어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단순히 신분제도가 아니라 특이한 나라에요. 어떤 특이함이냐하면 아까 세례요한 이야기 했잖아요?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할 때 두 개의 시간 영역이라 이야기했지요? 현재 인간들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항상 순차적으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 형이 되는 시간이 적용되는 현실이 있는 반면에, 사실 우리는 이게 전부라고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게 아니고 이런 순서에 전혀 저촉되지 않고 구애받지 않는 또 다른 영역이 있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나중 온자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주님으로 통치하는 그러한 영역이 따로 있는 겁니다. 이 두 개의 영역이 공존하는 최초의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이냐 묻기 전에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가 아닙니까라고 묻는 게 옳아요.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가 아니냐 하면 혈통에 의한 나라가 아닙니다. 혈통에 의한 나라가 아니라면 이 세상 모든 인간치고 아버지와 엄마 없이 태어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모든 인간은 어디에 예속된다? 타고난 혈통에 예속되지요. 그런데 혈통에 의한 국가가 아니라고 한다며 이건 생뚱맞고 전부다 천사들이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원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야곱에게서 나왔고

 

야곱은 누굴 만나냐 하면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 역할을 하는 천사들의 집단과 만나게 되요. 창세기 32장 2절에서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군대에요. 이것은 천사의 역할을 현실화 시키는 나라, 천사가 움직이고 있는 그 움직임을 가시화하기 위해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보는 거에요.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천사는 누구의 지시를 받고 따르지요? 하나님이지요. 그렇다며 이스라엘은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되지요? 바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른다면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현실화 시키고 구체화 시킨 모든 움직임과 행위는 누구의 본질을 나타내겠습니까? 바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을 뭐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하나님의 무늬 또는 결이라고 하지요. 땅에 디자인 되어 있는 땅에 숨겨진 어떤 세계가 있는데 그 숨겨진 것이 지상에 얼룩덜룩한 무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디서만 찾아야 된다? 그것은 단군의 자손에게서가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서 찾아져야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얼룩덜룩한 무늬가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지닙니까라고 여러분이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예, 구체적인 형태를 지닙니다라고 답변할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어떤 모습으로 완결되고 완성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제사장의 모습으로 누구하나 희생하는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구약은 문제지고 신약은 해답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에 의해서 죽는 그러한 일이 일찍이 이스라엘 내부에 발현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강의 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게 되면 다른 나라들은 혈통적인 힘으로 일을 전진해 가는 것이 보통의 나라들이라면 이스라엘은 희생의 힘으로, 누구의 희생? 사람의 희생? 아니지요. 천사의 희생? 아니지요.

 

누구의 희생? 하나님 자신의 희생의 대가로 성사되고 존재하는 나라.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 하나님의 희생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나라, 하나님이 약속한 나라입니다. 그 약속을 구체화 한 것이 약속이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라고 하지요. 약속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뉘앙스가 강하다면 언약은 같이 지켜야 될 상대자가 있다라는 의미를 제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상대자가 있다라는 거지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상대자가 누구겠어요? 같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자기가 추진하는 일의 상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시작하는 모든 일의 최종 목적으로 등장하는 분도 누구이다?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그 일이 뭐냐하면 숨겨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 배제되지요?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돼야 하고 빠져야 됩니다. 인간이 빠져야 하는데 자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끼여 넣기 위해 인간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세력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뱀의 후손이라고 하지요. 뱀의 후손은 같은 혈통적 의미에서 뱀이 아니라 뱀의 후손이 앞에 있는 뱀을 규정하기 때문에 뱀이 하는 짓이 나중에 마지막 때 나타날 실체를 뱀의 기능으로 미리 보여주는 게 뱀의 후손과 뱀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상대자가 누굽니까? 여자의 후손이지요. 여자의 후손이니까 모든 인간들은 혈통으로 난다면 누구의 이름으로 태어나지요? 여자의 이름입니까? 남자의 이름입니까? 아버지의 자식이 되는 거에요? 어머니의 자식이 되는 거에요? 아버지의 자식이죠. 그런데 그 분만은 아버지가 없는 혈통과 상관없이 태어났다 해서 여자의 후손이 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유일하게 대립된 관계로 표출되는 영역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지금 사무엘상을 하는데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가 살펴보고 있습니다. 뭘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남기신 무늬를 발견하기 위해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우리가 미리 결론 내린 것처럼 거기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등장했지요. 자 그러면 다음 진도 나가 보겠습니다. 제가 방금 희생이라는 말을 썼지요? 희생이라는 말은 썼다는 것은 그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말입니까? 뭔가 삐걱거린다는 뜻이에요?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일이 정상이다라는 쪽으로 몰아가겠어요? 정상이 아니다라는 쪽으로 몰아가겠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곡해하고 오해해서 정상이 아닌 모습으로 등장한다면 우리가 사무엘상이나 구약을 알아야 할 것은 왜 그들이 하나님~하나님하고 섬기면서도 왜 그들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행동을 보이는 요인과 조건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반드시 알아야겠지요. 왜 어차피 희생이라는 것이 성립돼야 하니까. 그것도 누구의 희생? 하나님 본인이 희생이 되겠죠. 잘못은 피조물이 했는데 희생은 누가 했다?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할 때 그저 피조물이 고맙다고 입 닦을 게 아니고 뭘 해야 되요? “도대체 제가 어디가 문제입니까?”라고 자기를 항상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다라고 볼 수 있지요.

 

해답되는 신약의 마태복음9장13절에 말씀이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게 해답입니다. 그러면 해답에 대한 질문지는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구약에서 찾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어디서 찾냐 하면 자기가 스스로 반성해서 찾는 거에요. “야~하! 가만있어 보자! 과거에 내가 죄인 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였는가? 전에 친정 갈 때 과속했구나! 내가 욕을 했었구나! 자식에게 심하게 했었구나! 남편에게 잔소리가 많았구나!” 또는 아내 몰래 딴 짓 했구나!

  

자꾸 이런 것을 끄집어내서 주여!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너는 구약을 거쳐서 와라! 그냥 오지 말고 구약 거쳐서 와! 어디서 새치기 하려고! 네가 말하는 죄는 네가 죄라고 하는 그것이 죄다!” 죄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그게 죄다 죄가 되는 거에요. 구약에서의 죄는 어떤 것이냐하면 바로 하나님을 자기의 야망과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것이에요.

 

그 예가 사무엘상 4장에 보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용했습니까? 뭐를 앞장세워 전쟁에서 이기려 했습니까? 언약궤지요. 언약궤는 상자입니다. 물질적으로 상자지요. 언약궤를 이동하려면 자체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누가 들어 움직여 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궤의 장소 이동은 인간에게 종속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자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언약궤를 사무엘상 5장 1-3절에 보면 언약궤를 어디에 빼앗기지요? 블레셋에게 빼앗기지요. 블레셋이 좋아하고 승리했다고 그 언약궤를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 곁에 둔거에요. 다곤 신상을 딱 세워 놓고 대리 만족하는 거에요. 우리가 믿는 다곤 신상이 저 까부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 언약궤를 내려다보면서 포로가 된 신을 우리의 신이 포로로 잡았다고 생각하고 딱 둔겁니다.

 

그런데 하룻밤이 지났어요. 뭔가 그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이튿날도) 배틀(battle)이 있었는지 한 판 결투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침이 되어 다곤 신상에게 가보니까 5장4절에 보면 누가 이긴 거에요? 언약궤가 이겼지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이길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전쟁이 있을 때 왜 이기지 못했을까?

 

(삼상5: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시했다거나 존중하지 않은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요즘 말로 주여! 믿~쉽니다하고 의지하고~ 의지하세 찬송 부르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지하면서 이번 전쟁을 승리케 하옵소서라고 할 때는 안 도와주시다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기고 독자적으로 언약궤가 있을 때 (오히려) 다곤 신상이 무너지고 나중에 5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도무지 감당이 안 됩니다. 자진해서 반납합니다. 삼킬 수 없는 것을 토해내듯이,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포즈한다고 케잌 속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숨겨 놓고 먹으라 했는데 여자가 먹다가 뭔가 씹히더란 말이죠. 꺼내 보니까 반지인거죠. 다이아 반지는 좋지만 그것을 준 남자가 결혼 할 마음에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욱! 토하겠지요. 자 여기서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왜 신약에서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 도덕으로 매치가 안 되느냐?

 

어디를 거치라고 했습니까? 구약을 경유해라, 구약을 경유하게 되면 “설마! 이런 것도 죄일까?” 하는 것까지 죄다 죄로 들추어집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지키고자 하는 게 있어요. 그게 오늘 날 근대 국가의 근간이 되는 건데 소유(성),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는 거에요. 이스라엘이 누구의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라면 누가 그 나라를 운영합니까? 하나님께서 운영하시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운영하시겠지요.

 

거기에 백성은 배제된다고 했는데 백성은 뭐냐 말이죠.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한 일에 대한 결실물 또는 열매로써 그들은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 끝에는 뭐가 열리다? 포도 열매가 맺히지요.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러한 이야기가 구약에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에스겔에 나왔던 주요 테마였어요. 나는 포도나무를 심었다든지 나는 단 포도를 심었는데 왜 신 포도가 열리냐 이렇게 예레미야에도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서 한다는 게 뭐냐하면 너희가 열매로 존재 할 때만 영생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거에요. 열매로서만,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렘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그러면 열매로만 존재한다는 말이 뭐냐하면 모든 시작은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고 시작하는 분이 따로 계시다고 그 분을 증언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근대인들은 뭐가 시작인지 모른다 했지요. 그러니까 평생을 살아도 헛수고 한 거에요.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면서 자기 딴엔 그때그때마다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자랑 질하는데 그 자랑 질로 내놓는 게 뭡니까? 소유입니다.

 

소유라는 것은 돈의 소유만 있는 게 아니고 건강, “너는 늘 아프지? 나는 건강하다.” 건강, 돈 “나는 현미 먹고 30Kg 빠졌다” 이런 거 있잖아요. 자식 공부 잘한다. 우리 교회는 교인 많다, 헌금 많이 나온다, 우리 목사님 박사 학위있다. 미국에서 캐냐다까지 거쳐서 왔다. 이런 자랑 질들. 이게 뭐냐하면 인간의 존재는 테두리에 불가하고 존재 안엔 자기가 그동안 자랑 질하고 싶어 했던 것들이 집합으로 모아 놓은 바구니 같은 것이 인간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란에 들어 있는 것이 뭐로 이루어져 있냐하면 I (나) 의 가치로 되어 있어요. 그 바깥의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다.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죄가 우상숭배인 이유가 모든 죄가 나로부터 의미가 시작될 때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전부 우상 숭배자에 해당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상숭배자라 해놓고 이스라엘을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너희가 어쩔 수 없다라는 거에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바로 혈통에서 나온 거에요. 아버지 엄마가 그래서 나도 그런 거에요. 아버지 엄마는 왜 그래요?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서 그런 거에요. 이것을 해답인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한꺼번에 해답을 내놓는 거에요.

 

신약을 바라보게 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다 하니까 사람들이 구약을 안 거치니까 어떻게 되냐하면 “제가 왜 죄인입니까? 저는 선약과 구경도 못했어요. 뭔가 선악과 구경하고 따먹을까 말까? 따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따먹었을 때 죄인이라고 하는 건 인정하겠는데 나는 선악과 근처도 안 갔거든요.” (혹시) 본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사과 나무였어요? 귤 나무였습니까? 선악과가? 이게 근대인들이 성경을 볼 때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근대인들의 시작은 뭐로부터 시작된다? 의미가? 나로부터 시작되지요. 나쁜 짓하는 것만 나에게 죄라고 규정하라고 타인에게 요구하는 겁니다. 이게 근대인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신분제도 때는 어땠습니까? 나는 쌍놈집안이다. 왜? 이건 이유가 없어요. 태어난 집구석이 쌍놈집안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에요.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하면 천국가냐 지옥가냐를 저요! 저 보내 주세요 라고 손 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을 근원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 오해가 어디서 나왔냐 하면 제일 먼저 이야기 했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의 사랑의 개념을 바로 구약을 거치지도 않고 자신의 타고난 희망에서 찾는 거에요. 나 이뻐해줘요라는 근본적인 욕망에서부터 끄집어내서 뭐를 거론하느냐 주의 사랑을 거론합니다.

  

이 세상사는 거 힘들어 죽겠습니다. 저요, 큰 맘 먹고 교회 나왔고 큰 맘 먹고 하나님 섬기려 작심했는데 전에는 절에 다녔는데 이제는 종교까지 바꾸는 대 결단을 하고 교회에 왔으니깐 이러한 나의 성심, 성의를 봐 주셔서라도 주여! 나 좀 튀게 해달라고 보람상조에 가입하듯, 보험 들듯이 이게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숨겨놓은 죄가 되는 겁니다.

 

너를 위한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귀가 조작해놓은 것이다.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만약에 교회에 가면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오신다면 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런 하나님은 인간이 조작한 배후에 악마가 조작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이야기하지요. 그 교회에 교인 몇 명이나 오겠습니까? 없지요. 바로 그 방법을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거에요.

 

따라오지 말라고 (육으로)소유를 얻고자 하는 자는, 그런데 그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가 뭡니까? 임금으로 삼으려고, 그러면 임금을 삼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의 소유물로 삼으려고, (예수님은) 가세요!하고 일부러 어려운 말을 했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니까 그들의 귀엔 뭐가 들리겠어요? 마지막 말씀인 영생이 없다라는 말만 딱! 들리겠지요.

 

영생 때문에 왔는데 천당 가려고 왔는데 없다 하니까 너희들의 안목으론 없는 거에요. 천국은 너희의 인식이라면 그 안엔 없다는 거에요. 천국은 예수님의 인식 안에 있지 너희들의 인식 안엔 없는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 쪽에서 어디를 넘어 와야 되요? 예수님 쪽으로 넘어 오지 않는 한 그들에겐 영원히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을 아무리 믿어도, 그래서 그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영생의 말씀이 어디 있다고요? 주께 있다는 거에요.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다. 그러다면 그 교회 목사가 설교를 이렇게 해야 되지요. “여러분 다 가세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죽어서 천당가려고 하는 사람은 다 가세요! 그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겁니다,”라고 하면 전부다 갈 거잖아요?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러면 잠깐만~~ 혹시 여기 아버지가 보낸 자가 계십니까? 이렇게 물어봐야 된다니까요. “혹시 아버지께서 보낸 자 되십니까? 나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몰아세운 분 계십니까? 나는 그 분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죠.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선 설교 때 마다 반드시 가세요! 란 말이 항상 나와야 되요. 오늘도 형제 자매님 잘 오셨습니다. 웰~컴 이렇게 하지 말고 가세요! (제발~~)

  

혹시 아버지께서 보낸 분계십니까? 지난주까지 안 왔다가 이번 주 오신 분 있으면 가세요. 계속 이런 이야기해야 되는데 물론 노골적으로 하면 안되고 설교 내용 자체에 담겨 있어야 되요. 담겨 있어서 “내가 교회 왔으니까 이번 주는 복 받을꺼야!” 하는 사람은 뿔따구 나도록 더러워서 이 교회 아니면 다른 교회가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설교를 해줘야 되요.

 

그래서 자진해서 자기 본색을 드러내야 되고 나도 가고 싶은데 분명히 아버지의 뜻이 있어서 오게 하셨다. 내가 오고 가는 게 내 뜻이 아니고 내가 배제된 상태에서 강제로 끌고 오게 하셨다. 말씀 앞에 서게 하셨다는 사람들만 남게 하는 설교가 돼야 되겠죠. 그 설교가 바로 구약부터 쭉 이어집니다.

 

자! 그렇다면 사무엘상 4장에서 추상적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언약궤를 이용했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게 뭐가 나쁩니까? 자! 지금 언약궤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안 들어줬지요? 안 들어줬다는 말은 뜻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든 본래의 뜻과 하나님의 무늬로 형성돼야 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뜻과 합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합치되지 않는다면 두 가지 뜻을 다 알아야 본문이 진도가 나갈 수 있어요. 그냥 이랬구나하고 넘어가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해답부터 먼저 말씀드릴께요. 언약궤 앞에 다곤 신상이 어떻게 됐지요? 손모가지, 발보가지, 모가지란 모가지는 다 부러졌지요? 왜 이스라엘은 진작에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자세가 그러지 못했냐는 말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해가 뭐냐하면 언약궤를 이용할 생각만 했지 언약궤 자체를 빛낼 생각을 못한거에요. 언약궤의 혜택 입을 생각만 했지, 주님 덕분에 나도 빛 좀 내자! 나도 잘 먹고 잘살다 죽어서 천당에나 가자! 이런 생각만 했지 주여! 저를 지옥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만 주님으로 영광 올릴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부러져 장애자로 살아도 괜찮아요. 그런 자세로 언약궤 앞에 섯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언약궤의 진면목이 이스라엘 속에선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빼앗겼을 때 이스라엘의 적인 블레셋에서 언약궤의 진면목이 나왔으니 결국은 이스라엘과 언약궤의 동행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원수와의 동행을 의미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지요. 만일 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 버리라고 했지요? 제가 마태복음 수련회 때 뭐라고 했습니까?

 

오른 눈 제대로 박혀있을 사람이 있을는지? 진짜 오른 눈으로 한 번도 범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던지 이 눈을 가지고 한 번도 간음 한 적도 없고 남을 미워한 적도 없는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개무시 한 사람인지? 그 오른 눈 왜 안 빼요? 왜 안 뺍니까? 빼면 뭐가 되지 때문에 장애자가 되기 때문이죠. 장애자라 함은 자기의 근간이나 소유가 날아가지요?

 

인간의 존재는 뭐로 뭉쳐져 있다? 내가 원하는 욕망의 소유물로 욕망의 덩어리이지요? 자기 소유의 덩어리이지요? 그런데 자기 오른 눈을 빼게 되면 남에게 무시당하겠죠? 그러면 뭐가 날아가요? 자기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자존감도 날아가 버려요. 자신의 긍지, 부모의 기대, 주변의 눈총, 시선에 대한 나의 가치, 의미 다 날아가지요? 그까짓 죄가 뭐기에 내가 죄 앞에 훼손돼야 하나? 이렇게 버티겠지요?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네가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너는 정말 나를 알았더라면 “주여! 오른 눈 빠져 장애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머지 가지고 지옥 안 가게 된다면 그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자세를 초라한 나사렛 청년이 누구인지를 진작 알았더라면 주께서 나를 묵사발로 만드셔도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찬양의 소리가 나와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네가 구약을 보면서도 그 관계를 목 찾는다면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는 바로 것을 보여 주는 거에요. 그렇게 동행했어도 그들은 계속 되풀이해서 죄를 반복하는 거에요. 우상숭배의 죄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버티고 있는 게 뭐냐하면 나는 나를 못 버리겠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자기에 대한 집착과 애착.

 

선악과 따먹은 그 성질이 있어서 내가 누구한테 꿇어? 신이여! 내 앞에 꿇으라는 그 악마적인 근성을 우리가 무슨 수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오늘 강의의 주제는 이거에요. 우리는 지금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러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면 누가 했겠어요? 누가 우리를 천국으로 몰아가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능력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면 분명히 이것을 확립해 가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꼽아 봐야 되겠지요? 그리고 그 할 수 있다라는 것이 결국 우리를 망치게 되게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이번 시간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니 마음대로 사세요. 결론은 이거에요. 자꾸 자기를 조절하려고하면 이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할 수 있는 일의 범주에 계속 들어가는 겁니다. 무슨 토를 달면서? 이것은 못 할 일인데 주께서 하게 하셨네요? 이것도 하나 내 작품으로 집어넣고, 자기 의를 쌓고 또 쌓고 “세상에! 신앙생활 요렇게 재미있네! 아이고 안 되는데 주께서 은혜 주셔서 또 하게 하시네! 아이고! 고마워라!” 이렇게 되면 결국 주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그 행위의 주체자는 누가 됩니까? ‘나’가 되겠지요?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갈수록 자기 부인을 수단으로 해서 자기 긍정이 날이면 날마다 자꾸 쌓이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어디서 탄로 나는가 하면 누가 작대기로 나를 쑤셔 되면 우리는 새파트(개)가 따로 없어요. 왕! 하고 물어버리죠. “어디서 믿음 좋은 나를 건드려?” 그 짓을 누가 했냐 하면 바리새인이 했어요. “나는 부족합니다!” 부족함이 쌓여서 잘났습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잘난 존재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끝까지 우리는 주께서 밟으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참회합시다. 끝까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시켜 주세요. 잘난 체 하지 말고, 인간 한 평생 별거 없어요. 그냥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질대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내 성질을 믿음으로 커버해봐야 그건 바람 불면 다 날아가요. 다시 본 알맹이는 그대로 노출합니다. 그 성질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데로 그대로 나타나요.

 

백날 견뎌봐야 욱! 하고 성질 다 뽀롱나요. 그러나 이 모습 그대로 주 앞에 내 놓기를 바랍니다. 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원은 주께서 하셨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 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6-10-26 00:01 
단절 (마 21: 42-46)                                                                                                                   대전- 80강

 

이근호

 

2016년 9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1: 42-46

  

 

 

(마 21: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 2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 21: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마태복음 21장 42절부터 봅시다. 여기에서 흔히 말하는 주권사상이 깨어집니다. 아~이게 한국교회 교계에서 주권 사상이 최고의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주권사상이라는 것이 왜 마귀적인 것이고 왜 복음이 아닌가는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신께서 또는 삼위일체라는 것을 삼위일체는 성경에 이런 게 안 나와요. 신께서 또는 주께서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보면 굉장히 믿음 좋아 보이잖아요. 성경의 12사도가 전부 이것을 이야기 한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한국의 모든 개혁주의 신학이 특히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이 이것을 이야기 했어요. 주권사상이 아니면 이단이라고 큰 소리 치면서 계속해서 영업하고 있어요. 주권사상은 뭐와 반대되는 사상이냐 하면 십자가 복음을 반대하는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주권사상입니까? 십자가입니까? 십자가이지요.

 

고린도 전서 2장에 너희가 하나님의 주권을 알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한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되어 있어요. 굉장히 강조 한 것이 두 번씩이나 강조법이 두 번 들어간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얘들아! 십자가를 알아라 이게 아니고 이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이중 부정이 들어가요.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 말은 기존의 주권사상도 알고 옵션으로 십자가도 덧붙이고 옵션으로 성령의 열매도 덧붙이고 옵션으로 예수님 재림도 덧붙이고 성경에 나온다하는 주제를 다 붙이면 그게 성도다 이게 아니고 십자가 빼놓고 전부다 잘라 내야 된다는 말이죠. 이런 것들이 덧붙여지면 무엇이 숨 막이냐 하면 십자가가가 숨 막혀요.

 

인간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에서 미래로 점점 나아가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십자가가 먼저입니까? 부활이 먼저 입니까? 십자가가 먼저이지요. 십자가 죽음 이후 사흘 만에 부활 하셨죠? 인간의 시간론에 의하면 이미 부활 시점에 와서 십자가는 이미 과거 사건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인간의 시간의 마음 밭 의식에 그대로 복사를 해 버립니다. [Ctrl+A] 복사를 해버려요.

  

그리고 “이제 나는 십자가를 알아서 내 죄는 씻어졌고~” 이제 내가 할 일은 뭐냐? “나는 부활의 영으로 이제는 거룩한 생활만 하면 되겠네!” 라는 꼼수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정보 획득 밖에 안돼요. 계속 나에게 이익이 되고 나에게 유리하다 싶은 정보는 죄다 끌어 모으는 거에요. 많이 끌어 모으는 것이 내 구원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이것을 저는 플러스 심리( +심리) 보태고~보태고 보태는 것이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진리에 가깝다. 이렇게 생각해요. 많은 숫자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 큰 교회의 의견이 작은 교회의 의견보다 더 낫다. 그런데 성경은 다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너희가 보기에 어리석게 보인다.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이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있어요. 있는데 십자가를 제시한다. 이러면 십자가가 통속화되기 때문에 이 말 쓰기가 십자가라는 말보다 어리석게 구원받아 볼래요? 이 말을 바꾸면 십자가로 구원받아 볼래요? 이것저것 믿으세요라고 하지 말고 이것 믿으면 당신에게 이익이 됩니다. 이것 믿으면 당신이 구원됩니다. 이런 것 믿으세요라고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을 한번 믿어 볼래요?라고 강단에서 설교 왜 못하지요?

 

십자가를 믿어도 죽어서 천당갑니다. 당신에게 이익입니다. 믿어 보세요. 이 이야기 보다 여러분들이 도저히 나는 못 믿겠어요 하는 것을 제가 제시해 볼까요?라고 시작하면서 십자가이야기를 십자가에서 끄집어내는 게 그 만큼 중요하지요. 오늘 날 근대에 있어서 아까 근대의 특징이 뭐가 있다고 했어요? 소유(가진 것)은 뭐 해야 된다? 마이너스가 좋아요? 플러스가 좋아요? 플러스가 좋지요.

 

플러스가 되는 것들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하지요. 교회에 갔다. 마이너스 되려고 가는 사람 없습니다. 뭐할라고? 전에는 있는 재산 가져서 부자였는데 재산은 그대로 있고 내 영혼까지 죽어서 천당가려고 플러스를 노리고 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천국 때문에 다 날아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게 날아간다면 그래도 오겠습니까? 안 오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영생 얻으려 왔다가 주님의 조건이 뭐냐? 너 한번 어리석게 되어 볼래?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너 한번 죄인 되어 볼래? 지켰다고 의인인체 하니까. 죄인 되어서 천국 가볼 생각 없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두 번 다시 왔는지는 모릅니다. 이것을 보고 부자들이 놀란 것이 아니라 더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12제자들이 다 놀랐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주님, 우리 끼리 장사 안 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주여! 이래 가지고는 아무도 구원 못 시킵니다. 어떻게 낙타가 바늘 구명을 통과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간단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자! 뭘 알아야 되요? 왜 내가 내 구원에 전혀 기여하지 못 하는 이유가 그게 뭐냐? 난 열심히 할 준비도 되어 있고 헌금 할 마음도 되어 있고 까짓것 천국 보내 준다면 아프카니스탄처럼 순교 할 마음도 되어 있는데 왜 아프카니스탄의 순교도 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고 내 목숨을 바치는 것도 근거가 될 수 없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왜 안 되는 지 이유가 뭐냐?

 

그것이 근원적으로 파악이 돼야 되는 겁니다. 심지어 내가 십자가 믿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믿는다고 해도 주님은 그것을 안 받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임해야지 내가 십자가 믿는다는 나의 결심과 결단은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철저하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이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따라서 42절을 봅시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

  

(마 21: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유대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모든 지혜의 정보를 계속해서 그것을 귀하게 여겨서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간직하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알고 있어요. 한 개인의 생각이 독단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대책이 뭐냐하면 71명을 모으는 겁니다. 그것이 산헤드린 (공회)에요. 70명을 모아요. 70명의 의원과 의장이 만장일치가 될 때 이것은 분명히 우리 가운데 성령이 임한 증거를 보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런 의견이 날 수 없기 때문에 기적 중에 기적이지요. 성경을 베껴 쓰는데 71명이 동일하게 써도 전부 성경을 번역 할 때 하자가 없다. 그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인도 한다는 확실한 남들이 납득 할 만하게 내세울 만한 기적이지요. 그렇게 해서 그들이 내린 결정이 뭡니까? 예수님을 살해하잖아요.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는 지혜 있는 것까지 다 끄집어내요. 그리고 그들이 납득 할 수 있는 최고의 납득이 뭐냐? 너희 아비는 마귀인 것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최 정점에서 가장 악마적인 모습이 또렷하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의 최 정점, 오늘 날의 과학이지요. 진화론, 창조론 둘 다 악마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될까요? 합치되지 않을까요? 이젠 답변하기 겁나지요? 뭐라해도 시비 걸까봐 겁나지요? 이게 정답이 아닙니다. 그건 마귀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창세기 1장1절에서 끄집어 낼 수 있어야 되요.

 

끄집어내는 것을 누가 끄집어내느냐? 바로 신약의 성령 받은 사도들이 그것을 끄집어냅니다. 끄집어 낸 증거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요한복음 1장1절이고 골로새서 1장16절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3장24절이에요. 또 에베소서 1장 마지막 절에 보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천지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지요. NO! NO! NO! 아니에요. 성령 받은 사도들이 이야기합니다.

 

천지창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님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기 때문에 에베소서 1장10절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권사상에는 뭐가 빠졌다? 십자가가 빠진 거에요. 다시 말해서 어리석은 요소가 없어요. 주권사상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다. 여기엔 어떤 어리석음도 없고 너무나 깔끔하게 이성적이에요.

 

이성이라는 말은 깨달음, 칸트에 ‘이성’ 나오잖아요. 인간이 정신 바짝 차리면 나올 수 있는 것. 정신 바짝 차려서 맑은 정신으로 한 것이 결국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신이 천지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마귀들이 하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으로서 자랑 질 할 만 한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지체를 내세울만한 최종 정점의 이야기가 신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것을 유신론적 철학이라고 합니다.

 

유신론에서 유신이 뭡니까?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B.C 5~6세기에 등장합니다. 헬라지역에서, 구체적인 철학의 시작이에요. 그전에 B.C 3000년, 최초의 문명은 B.C 3300년, 지금의 이라크,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입니다. 그 뒤에 이집트 문명 문명, 인더스 문명, 그 다음에 B.C 2600년경 황하문명, 이것을 4대 문명이라고 하지요.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최초의 작물 농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작물농업이 시작되면서 사회를 농민을 규합할 필요가 있지요. 규합하려면 모든 사상의 최상의 최상으로 도달해야 통념이 되고 모이게 되지요. 그때 나온 것이 신의 개념이에요. 신은 추상이 되니까 구체적으로 되려면 그 때의 지도자가 현재 북한의 신은 죽은 김일성이고 그 아들 김정일이지요. 최고의 신의 자재가 될 때 그 백성들은 왕이라는 루트를 통해서 신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불멸의 욕구를 달성할 수 있지요.

 

결국 선악과 따먹고 난 뒤 아담과 하와가 노린 게 뭐였습니까? 죽고 난 뒤에 또 사는 거에요. 불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뭘 막았습니까? 불멸의 의지와 생명나무가 다르거든요. 다르기 때문에 막아버리시는 겁니다. 불멸을 누가 노리는가? 아담과 하와가 노렸다 하지만 그 배후엔 누가 있어요? 뱀이 전쟁 할 때 나도 불멸하자고 노린 것이 바로 하늘의 전쟁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 성질이 그대로 어디에 남느냐? 인간 속에 파고 든 거에요. 어떻게 하면 불멸할 수 있습니까? 신이시여! 이게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에요. 유교, 알라신, 심지어 IS 테러 집단의 영생을 빨리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폭탄 두르고 죽으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IS 대원들에게 결혼해서 신부에게 주는 선물이 폭탄이에요. 사제 폭탄이 혼수에요.

 

“왜? 장하다! 이 여인아! 하늘나라에 네 이름이 높을 것이다. 네가 이렇게 거룩한 하늘나라의 희생자가 됨으로 하늘이 너를 귀히 볼 것이다.” 여기에 악마의 정신이 합치되니까 까짓거 뭐 그냥 폭탄 터트리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마약도 없지요. 종교 마약이 최고지요. 그래서 제가 오죽했으면 보복의 폐인이라 합니까. 폐인이에요. 맨 날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해 보려고 자꾸 성경에 머리 파고드는 거에요.

 

파고 들으려는 출발 자체가 뭡니까? 나는 잘 난거야 지요. 십자가를 알면 바뀌어야 되요. “오늘도 제가 무슨 저지레를 했습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여유있는 마음으로 오늘도 성경 말씀에 비취었을 때 무슨 저지레를 해가지고 주님께 섭섭하게 했습니까? 이렇게 성경을 봐야 하는데 오늘도 더 오차를 줄이고 여러분! 오차를 줄인다고 구원해 줍니까?

 

사다리를 몇 개를 이어야 구름에 오를 수 있어요? 이게 가당키나 하는지 별을 따려면 어느 정도 가야 합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이번에 설교가 뭔지 아십니까? 바벨탑이에요. 바벨탑 가지고 강의 할 겁니다. 자본주의 거론 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돈이 있는 게 자본주의가 아니에요. 끊임없이 돈을 추구하는 거에요. 자본주의라는 게.

  

집에 돈이 있다고 해서 자본가가 아닙니다. 계속 더! 더! 더! 를 추구하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에요. 그리고 그거 없이는 자본주의에서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을 다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것을 근대 자본주의 주체라고 하는데 경제학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 알아야 되요. 자식에게 “얘야 너는 착해야 돼!” 이건 무슨 뜻입니까? 착해서 거지 되어 보세요. 안되겠지요. 착해야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반드시 뒤에 네가 착하고 성실하면 뭐가 따른다?

 

결국은 돈이라니까요. 왜 우리가 그렇게 배워왔고 그게 우리의 생리이고 우리의 본질은 이미 그렇게 물들었어요. 스펀지에 잉크 부으면 스펀지에 스며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닙니까? 스펀지 같이 어릴 때부터 들은 풍월과 교훈과 양육 받은 모든 것이 전부다 돈과 결부된 이야기를 들어 왔는데 그러니 스펀지를 쭈욱 짜면 뭐가 나오겠어요? 돈 벌어야지! 이것 외에 뭐가 있겠어요. 없잖아요!

 

이스라엘의 대표자는 아담입니다. 왜 언약관계이기 때문에 언약의 대상자에요. 주님이 “야 도장 찍어라! 여러 사람이 올 것 없다. 하나만 와! 너만 와!” 그렇게 부름 받은 자를 택했다고 해요. 출애굽기 19장 너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리와! 드루와! 드루와! 이리 들어오고 나하고 도장 찍자!” 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 신명기 18장에 나오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에 혹해서, 축복이라는 뒷면에 저주가 있다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는 축복 아니면 저주에요. 또 천국 아니면 지옥, 나쁜 고기 아니면 좋은 고기, 양 아니면 염소, 우리 입장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입장이 이런 거에요. 언약이라고 안 순간 대충 아무데나 안돼요. 제 3의 지역이 없어요. 주님 보시기에 세상이, 우리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다른 제3의 지역을 자꾸 생각하는 거에요. 독자적인 자기 영역이지요.

  

정오에 태양이 비취면 고도가 낮아 빛이 가장 짧다고 하지요. 이건 니이체의 (짜라루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인데 위에서 정면으로 비추면 해가 짧아요. 우리가 평소의 사고방식이 24시간동안 자기의 영역밖에 몰라요. 내 새끼, 내 자식 내 직장, 내 남편, 내 아내, 이것 밖에 몰라요. 내 교회 이것 밖에 몰라요. 여기에서 무슨 천국, 지옥이 나옵니까? 자기만 천국가면 된다는 것, 이게 개인 구원의 문제점이잖아요.

  

이 자체가 마귀가 사고방식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자기를 부인하라 했는데 자기 부인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니까 반성하라는 줄 알고 오해하는 거에요. 반성 해봤자 반성했다는 것이 나에게 뭐로 돌아옵니까? “아이고! 나는 왜 이리 잘났지! 너는 반성할 줄 모르지? 나는 반성했어!” 이건 반성한 거에요? 자기가 발전한 거에요? 자기 부인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부인 한 것을 수단으로 자기 긍정을 획책한 거에요.

 

이건 꼼수에요. 속임수에요. 심지어 금요일에 철야기도 보세요. 가관도 아니라니까요. 저도 예전에 복음 모를 때 해 봤거든요.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자기를 돌아보게 되요. “자슥! 왜 이리 착하노! 벌써 세 시간 째다.” 자기가 자기를 독려하고 힘내야 돼, 힘내야 돼, 한참 잠 올 때야! 커피 한잔 먹고 하든지, 오늘 기여이 새벽 네 시를 넘긴다! 심지어 새벽 네 시까지 했어요. 코피 팡! 하고 터졌어요.

 

자기가 노는 종교 놀이에, 종교 게임에 자기 혼자 흠뻑 어떤 쾌락과 희열을 즐기고 있는 거에요. 그 재미로 자기가 스스로 위로 받고 살아요. 버린 돌, 예수님을 버림받았다는 말은 아무도 예수님을 흉내 낼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으라 하니까 자꾸 예수를 믿는 것 뿐 아니라 흉내 내고 모방하려고 하는 거에요. 나를 본받으라 하니까 토마스 아 켐피스가 지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건 그리스도가 라이벌이 돼 버렸어요. 현재 우리나라의 20대 여성들이 골프 선수를 누굴 모델로 했습니까? 박세리를 모델로 해서 ‘세리 키드’라고 하지 않습니까! 박세리를 본받으라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누굴 본받아요? 박세리를 본받듯이 예수를 모델로 삼는 겁니다. 이건 라이벌이에요. 언젠가 따라 잡을 꺼야! 누구처럼? 예수처럼 왜? 완벽하니까!

 

그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자기의 이상형을 믿는 겁니다. 자아의 이상, 인간의 상상에서 나오는 목표가 자아의 이상이고 이게 바로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되는 거에요. 이건 마귀 짓이죠. 목적. 그래서 제가 이번 미국 강의를 했지만 사람에게 목적과 목표가 있는 것을 깨야 된다. 이것이 스트레스를 줘요. 오늘은 숙제 이만큼 하겠다. 그걸 깨야되요. 모든 스트레스는 목적과 목표 때문에 나온 겁니다.

 

aim과 goal 목적과 목표의 차이점, 목표는 도달지점이고 목적은 그것을 추구하는 경향성이고 혹은 기복 신앙을 버렸다면 기복 신앙을 버린 자리에 뭐가 등장합니까? 예수처럼 되는 자아의 모습이 겹치는 중첩이 되겠지요. 그게 지금의 세속 된 나를 뭐로 변신하게 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은 것에 달성할 때까지 나는 만족 지 못하겠다. 이게 뭐에요? 혼자 하는 시체 놀이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짓을 했어요.

 

자기보다 못 난 사람을 흘낏 쳐다보면서 헉헉 거리면 “짜슥이, 아직 멀었어! 성적이 그래서 되겠어? 우리 교회에선 내가 최고야! 기도는 내가 제일 잘 하고 헌금은 내가 제일 많이 하고 봉사는 내가 제일 많이 했어! 나는 시시하게 이거 해놓고 복 받으려는 그런 기복 신앙 자는 아니야! 나는 이 자체를 즐길래!” 왜 그리스도도 이런 모습일꺼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건 기복 신앙보다 더 얍삽해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듯이.

 

마귀가 그런 꼼수에 놀아나겠어요? 성경은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처럼 그리스도를 이야기한 것을 왜 우리가 가로챕니까? 주여! 주여! 사방에서 부르니까 자기도 존경받고 싶어서, 밀림에서 호랑이가 최고라 하니까 토끼가 절하니까 이리나 늑대가 인사를 자기가 받는 거에요. 동물들이 절하니까 자기보고 하는 줄 알고 뒤에 호랑이 보고 하는데 자기가 인사 다 받아 챙기는 거에요.

 

그 짓 한 것이 제자들이었어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높으냐는 거에요. 처자식 다 버렸지요, 직업 다 버렸지요. 그 만한 자격이 된다고 보는 거에요. 주께서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내 쓴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다시 말해서 너희가 믿는 하나님에게 한번 버림받아 볼래? 지옥 한번 가볼래? 할 수 있겠어? 목적이 천당 가려고 온 인간이 지옥 간다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방향이 반대 방향입니다.

 

결국 죄라는 것은 뭐냐? 방향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향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이 아니고 낮은 곳으로 오셨어요. 빌립보서 2장 6~8절 하나님의 동등 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맞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지요. 우리는 자꾸 위로 올라가려고만 해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이 뭐냐하면 십자가로 향하는 마음이잖아요.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어디서 주님을 만나야 되요? 십자가에서 만나야 되지요. 십자가는 어떤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한 자리잖아요. 저주 받은 자리에요. 버림받은 자리. 쉽게 말해서 “목사님! 저는 누굽니까?” 당신은 버림받은 자입니다. 이 말에 우리는 감사해야 되요. 나는 주님께서 내 놓은 자식이다. 지옥가도 할 말이 없다. 이게 우리의 (고백이 되는) 본 모습이에요.

 

우리의 본 모습은 이미 주 앞에서 저주 받은 모습이고 그 흔적이 지연된 자살이에요. 결국 우리는 죽습니다. 왜 죽습니까? 죄 때문에 죽지요. 문제는 우리가 죄 지은 기억이 없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내가 약간의 징계 받을 죄는 인정하는데 욱! 해서 화낸 것 등, 그러나 지금 당장 목 달아날 정도의 죄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딸이 못 됐다는 건 인정하는데 세월 호에 빠져서 꽃도 못 핀 체 죽을 정도로

 

하나님이여! 내 딸을 그렇게 죽인다는 것은 정말 납득이 안 됩니다. 그렇게 납득이 안 되는 죄를 들춰내기 위해 네 딸을 죽인거야!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도 네가 정신을 못 차리지? 이번엔 내가 뭘 해야 정신 차리는지 한번 보자! 계속해서 주께서 작업을 하시는 거에요. 모퉁이의 버린 돌이 어떤 돌이냐? 모든 사람이 와서 전부 머리 박아야 되는 돌이에요. 박으면 돌이 깨지겠어요? 들이대는 사람의 머리가 깨지겠습니까?

 

머리가 깨지겠지요. 그것 하라고 있는 돌이 버린 돌이에요. 로마서 9장에 나와요. 하나님께서 시온에 버림받은 돌을 두셨고 모든 자들은 전부 다 와서 깨지란 말이죠. 자발적으로 와서 다 깨지란 말이죠. 제가 방금 머리가 깨져야 된다고 표현 했는데 로마서 9장에서는 너희가 행한 모든 행함은 십자가 앞에서 다 깨어 질 것이다. 깨어 질 때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 자가 구원받은 사람이다. 로마서 9장 봅시다.

 

(롬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해야 되요.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 다음에 감사해야 되요. 수치를 일찍 당해야 되요. 벌거벗었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세리나 창기, 강도 되었다고 부끄러운 게 아니고 진짜 부끄러움은 우리가 아직 구경도 못했어요. 십자가 앞에서 진짜 부끄러움을 당하고 “아~하!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 구나!”를 알 때 실컷, 극도의 마지막 부끄러움을 당한 자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거에요.

 

하나님의 시선이 제일 무서운 거에요. 사람들의 시선은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갖고 있다는 뜻이고 그건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되지요. 암으로 오지요. 지키려고 하니까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는 거에요. “아니되옵니다. 주여! 아니 되옵니다.” 뭘 아니 되요? 주신 하나님이 가져가겠다는 데 왜 우리가 아니 되옵니다라고 해요.

  

욥은 다 빼앗겼는데. 우리는 맨 날 주여! 주시옵소서!라는 말 속에 뭐가 들어 있냐하면 이것만은 아니되옵니다가 같이 겸해서 통촉하옵소서라고 하고 있는 거에요. 42절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기이한 것이 아까 말한 어리석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은 어리석은 거에요. 어리석으니까 어림석음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믿질 못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준 것은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을 제시하신 거에요. 이것을 두자로 하면 단절입니다. 세자로 하면 끊어짐. 이미 주님과 끊어진 상태에요. 끊어짐을 확대 시키는 겁니다. 끊어짐을 더욱 더 팽창 시키고 그 끊어짐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관계가 끊어진 사람도 있고 좋은 관계로 있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십자가 앞에서 우리 관계는 끊어진 거에요. 끊어진 관계를 주께서 회복이 아니고 회복이라는 것은 내가 해서 다시 되는 것을 말하지요. 이미 끊어진 것은 회복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끊어지고 그 다음에 주님이 우리가 죄인 된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의 주 되심으로 사용 하시는 거에요.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거든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 버리면 이미 우리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식으로 사용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회복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용 되면서 계속 바깥에 뭐가 나오냐 하면 우리의 육적인 본성 안에 들어 있던 죄가 주께 사용되니까 바깥으로 뭐가 나옵니까? 죄가 나오게 되어 있지요.

 

죄가 나온 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죄를 더 지을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죄라는 것은 우리가 짓고 싶다고 짓게 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디모데 전서 6장 8절에 보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라는 말씀이 어느 날 갑자기 의미 있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가 뭘 느낍니까?

 

아하! 우리가 주님보다 심한 부자이구나! 라는 생각을 갖고 돈에 대한 집착으로 교회에 다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에게만 나올 수 있는 이미 용서가 처리 된, 죄 씻음이 처리되고 죄가 바깥으로 나올 때 다시 함번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했다가 찬양하고 바로 돌아서서 아리고 감사합니다. 이런 죄까지도 용서하시니 감사하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뼘도 내놔라! 이건 우리가 못 지킨다고 해서 건성건성 넘어 갔던 건데 어느 날 주께서 오른 뺨 얻어맞는 일을 유발 시키셔서 복수하고 싶은 데 복수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서 억울했을 때 주님이 그 때 찾아오시지요. “내가 오른 뺨 때릴 때 왼 뺨도 내 놓으라 했잖아!” 그런데 네가 왜 속이 부글부글 끓으냐? 그 이유를 한 번 대봐라!

 

가만있다가 얻어맞았어요. 그게 억울하냐? 억울합니다. 네가 아직 살아있구나!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있었구나! 그런 일이 굉장히 많아요. 예수님을 믿는데 가족이 나를 핍박한다든지 주님을 위해 했는데 인정받지 못할 때 억울해서 미칩니다. 미국의 버지니아의 어떤 집사님은 2년 전에 저를 초청해서 그야말로 부흥회를 열어 놓고 그날 오후에 회사에서 짤렸어요. 그 분이 막대한 돈을 들여 저를 오게 해놓고 저희 내외를 다 오게 했는데

 

퇴직 당한 이유가 희한해요. 문이 저절로 잠기는 바람에 퇴직 당했어요. 뭔가 따질 일이 있어서 거가 여 직원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문이 저절로 닫혀 버린 거에요. 문이 닫히니까 밖에서 열수 없는 거에요. 밖에 마침 담당 여자 변호사가 있었어요. 그래서 뭐로 오해 했냐하면 여자를 성 추행 내지는 성 추행하기 위해서 잠갔다.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다는 거에요.

 

나중에 그 여자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저절로 문이 잠겼다고 말을 해도 결정 내린 회사 측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소수 인종의 한국 사람을 잘라서 지금도 힘들게 살아요. 수입이 어려워서 힘들게 살아요. 아마 이 강의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날 부흥회 하고 공항에 바래다주고 오다가 오후에 짤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요번 캘거리 강의 할 때 했거든요.

 

캘거리 여러분들, 저를 이렇게 초청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대로 했기 때문에 저를 보내고 난 뒤에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주여! 말씀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고 뒤에 노리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뭘 노려요? 경제가 어려우니까 지금 캘거리의 경제가 반 토막이 났어요. 기름 사업이 지금 반 토막이 나서 이주민 위주로 3천 명이 짤려 버렸어요. 그 천국 같았던 캘거리의 도시가,

  

그런데 복음을 들었으니까 뭔가 경제 회복을 기대하지 않겠어요? 그럴 줄 알고 제가 그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제가 가고 난 뒤에 책임 안 집니다. 어떻게 일이 난장판 될지 난 몰라요. 나에게 묻지 마시라고 먼저 다짐을 해 놓고 왔어요. 그래야 책임 안 질 것 같아서 이기주의적 욕구 때문에 그렇게 한 거에요.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는 말은 뭐냐하면 지금 너희들은 내가 남들 앞에서 좋은 인상이 되느냐 그것에만 몰두해서 자꾸 자기가 하나님을 초청하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여! 날 좀 도와 달라는 거에요. 하나님은 네가 날 알아 달라는 거고 너희 같은 더러운 지옥 갈 인간을 위해서 내가 왜 뛰쳐 내려 왔는지를 나는 너희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통해서 너희들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려 보여 주었다.

 

자! 이제 너희에게 너희 진상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나에게 와서 너의 모든 행함은 누구 좋으라고 했는가? 자기 좋으려고 행하지요. 내가 기도하고 남이 응답받길 원치 않습니다. 기도한 나에게 그 효과가 주어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기도 하겠지요. “그 모든 행함을 기도, 전도, 십일조 한 것, 목사 섬기는 것 다 가져오너라! 내가 다 부숴 줄 테니까.” 그래서 그렇게 부숴주는 (버린 돌)분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항상 나는 내가 한 것이 나에게 구원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은근히 노리기 때문에 그 본성을 주께서 미리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깨어져서 이런 괴물을 죽게 하셨으니까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이 괴물을 주께서 성령으로 죽게 하셨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것들 때문에 죽어야 마땅 합니까를 90평생 살아가면서 100세 까지 살아가면서 마음껏 터트려 주세요.

  

막 사세요. 마음대로 사시고 멋대로 사시고 막 사세요. 진짜 구원 받지 않고 막 사는 사람들도 있고 구원 받고 막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중에 그 결과는 차이 날 겁니다. 새삼스럽게 죄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말씀에 준해서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탐내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들고 말씀이 우리 속에 오게 되면 탐심 없던 인간도 탐심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맹세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다짐에, 다짐에 맹세에, 맹세를 해 왔는가를 다시 한 번 폭로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난 뒤에 43절 봅시다.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자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나라의 기능은 이 말씀은 아주 쉬운 거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기능을 개시했다. 그러면 1차 활동이 뭐겠습니까? 천국 가려는 사람들의 천국을 빼앗는 기능을 해야지요. 오늘 본문대로잖아요. 어렵지 않는데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왔다라는 것은 무슨 뜻이다? 천국가려는 사람들을 모조리 뭐로 만든다? 지옥가야 되라고 지옥가게 하는 작업이 하늘나라의 기능이에요.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전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무도 못 가겠네?” 이렇게 되겠지요. 그 다음 작업이 뭐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그(다른)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행위는 예수님이 하시고 열매는 누가 맺고? 열매가 맺힌 백성들만 천국 간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천국의 공식입니다. 쉽지요? 이게 매일 같이 반복돼요.

 

“주님이여! 오늘도 아침에 큐티 했습니다.” 옳지! 그것 같고 나와! 큐티 하는 것과 천국 갈수 있다는 생각을 은근히 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못 속여요. 인간의 혈통이나 육신은 반드시 했음에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노리게 되어 있고 이건 본인이 안 그래야지 아무리 해도 애써 부인해도 소용없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할머니의 수레를 뒤에서 밀어 줄 때 그 날 오후는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그러고 마침 보니까 우리 딸 시험 중간고사 치루는 날이네 뭔가 여기서 점수가 향상될 것 같은 느낌이 오늘은 왠지 들잖아요. 이건 어떻게 자기를 말릴 수가 없어요. 자기 통제가 안 됩니다. 어떤 행운을 기대하는 마음씨를 무슨 수로 통제 합니까?

 

미치지 않은 이상 자기가 기도 해놓고 다른 사람이 응답받기를 원한다면 (기도로 쌓은) 마일리지는 저 사람에게 가도록 하옵소서? 이런 경우는 인간에겐 없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위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두고두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발각 당해야 하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다음 44절 봅시다.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천국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해요? 사람을 박살내는 이야기를 하지요.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리 되도 깨어지고 저리 되도 깨어지고 다 깨어지는 결국 주님의 십자가는 뭘 하기 위해였다? 우리를 깨뜨리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거기에 대한 말씀은 누가복음 2장35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누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아기 예수가 오셨는데 나중에 성인이 되어 메시야가 된다면 그 분의 활동의 핵심은 뭐냐? 칼로 우리의 가슴을 팍! 찔러서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노출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뭐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죽어도 (자기들은) 천국 가는 백성이라고 하니까 그 유대인들을 제치고 예수님에 의해서 된 백성들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천국에 집어넣는 거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무엇으로 구원 받고자 해요? 행함으로 받으려 하지요? 그들이 믿는 믿음조차 행함에 포함되는 거에요. 자기의 결단으로 믿기 때문에 자기 결심, 자기 의지, 자기의 기대로 믿는 그런 것들은 행위 책이 되고 마지막 생명책에는 “이럴 줄 몰랐습니다. 제가 왜 천국가야 되지요? 저 같이 지저분한 내가 봐도 그런데 왜 제가 천국가야 됩니까?” 이런 고백이 서슴없이 나오는 사람.

  

“주님! 저 같은 것은 신경 안 써도 되십니다. 다른 좋은 분들 많잖아요. 열심히 기도한 분 많은데 교회에 재산 바치고 십일조 바치는 분도 많은데 왜? 혹시 행정처리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장부 한번 보라 하세요.” 이 정도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와야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만 살기 위한 짓거리를 24시간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잖아요.

  

그렇게 살아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얘들아! 나 이정도 잘난 것을 알아 달라는 거잖아요. 남들이 나를 가치 있게 봐주는 데서 살아가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거에요. 안 봐주면 주님이여! 나를 좀 알아 달라! 인정해 달라! 세상에서 하던 개 버릇이 어디로 갑니까? 주님에게도 하는 주님이여! 나를 위로해 주세요. 사람에게 무시당했으니까 하나님이 진정 위로 받을 곳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여 나를 위로해 주옵소서!

 

주님께서 “어디 개 같은 행동을 하냐? 네가 뭔데 내가 너를 왜 위로해 줘야 하는데” 주님 제가 믿잖아요! 믿는 것 좋아하네! 이용했다고 해! 믿는다 하지 말고 네가 네 소중한 가치를 인정 못해 가지고 주님에게 기대해서 고스란히 유지하겠다는 유지책으로 교회 나왔잖아! 솔직하자! 우리, 누굴 속이려고 해! 귀신을 속여라! 그런 거 없어!

 

성령이 임하면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구원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구원해 주셨사오니 모든 영광과 면류관은 주께 드리는 게 마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최후의 대표적 사도로서 세운 거에요. 나 같은 인간도 구원받았다는 것. 예수를 믿는 다고 잡아 죽이던 그 인간도 포행자요, 살인자요 그런 나도 죄인 중에 괴수인 나도 구원 받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나를 구원하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로 작정하기 때문에 구원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경유한 하나님의 주 되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되어 진 것을 인정하게 해 주시고 우리가 이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