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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3:39:09 조회 : 1239         
사무엘상 19강( 두 노선), 마태복음 81강( 최적화) 161025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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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6-11-20 10:47 
두 노선(사무엘상 4:18 -22)                                                                                       대전-(사무엘상 19강)

  

이근호

 

2016년 10월 25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4: 18-22

  

 

 

 

(삼상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4: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삼상4: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삼상4: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삼상4: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사무엘상 4장18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난 뒤에 그 당시의 엘리 제사장 가문이 파탄 나는 대목입니다. 며느리가 하필 그 때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애기를 낳았어요. 애기를 낳았는데 애기 이름이 상당히 저주스럽습니다. ‘영광이 없다’ 영광이 없다는 말은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다는 말은 인간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두 노선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천국의 노선이 있고 또 하나는 지옥의 노선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노선 외는 없어요. 다른 제3의 경로는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인데 인간을 미래가 없는 곳으로, 영광이 없는 곳으로, 천국 노선과 지옥 노선에서 지옥 노선으로 가고 있는 집안이 바로 엘리 제사장 집안이다.

 

그런데 이 엘리 가문이 지옥 노선으로 확정되고 그것이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냐 하면 언약궤와 헤어졌기 때문에 언약궤와 이별 할 경우에 지옥 노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리 가문의 자리가 언약궤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엘리 가문의 자리에 언약궤를 놓으면 언약궤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천국 노선도 나오고 지옥 노선도 나오는 겁니다.                              

 

언약+궤(상자) 이지요. 언약을 보여주는 상자가 되는 겁니다. 상자니까 이것은 물질, 물체가 되겠지요. 또는 사물이 되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언약이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준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미래를 현재로 모아보면 언약 안에 천국과 지옥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보시면 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을 알기 쉽게 이야기 하면 상자 안에 천국과 지옥이 들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자는 일종의 환등기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환등기 같은 역할을 하는데 환등기+ 필름 이 필요 하겠지요. 필름을 집어넣어야 화면이 나오니까 필름 역할을 엘리 제사장이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 또는 인간의 가문이 (역할)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과 접속(Contact , Connection)을 하므로서 언약의 내용의 본질이 미래까지 미래의 모습이 현재의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언약의 본질이 바깥으로 비쳐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인간의 역할은 뭡니까? 주도적인 역할이 되지 못하고 언약을 보여주는 도구나 수단이 되고 장치가 되겠지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는 말은 인간은 주체적으로 주도적인 역할로 선택이나 결정을 못한다는 뜻이거든요. 이것은 개인 구원이란 없다. 개인이 선택해서 천당가고 지옥 가지 못한다. 골라~골라~ 골라~잡아! 그런 입장에 있질 않습니다.

인간은 그 시대에 주어진 언약과 어떤 식으로 접속(Contact)하게 되어 있다. 접속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언약을 만약에 모른다고 한다면 그 개인은 어떻게 살아 가냐 하면 내 선택에 의해서 내가 결정 하겠다고 나오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제시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 땅에선 고생 많이 했는데 죽어서는 호강해야지요. 여러분의 믿음이라는 선택에 의해서 여러분의 장래는 풀립니다.” 이게 바로 구원파에요. 이 구원파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기존의 교회에서 다 나온 거에요.

 

구원파, 신천지. 모든 것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욕망과 결부된 상품을 교회가 제시하고 돈을 받아 챙기면서 교회 조직의 영업이 되는 거에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주고 일종의 보험 회사 같은 보험 회사에서 수수료(Commission) 받듯이 챙기는 거에요.

 

교회가 천국의 하청 업체 역할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하청 업체 역할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으로 거부 할 수 없는 게 천국은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가시적으로 보이는 단체를 찾게 되는 겁니다. 성도와 교회를 찾게 되지요.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 때 빵 하나 얻어먹기 위해서 교회 다닌 적이 있어서 자기 인생을 살면서 안 풀렸다 교회 다니는 것을 너무 쉬어서 벌 받고 있구나!

 

이제는 중 장년 되었으니까 교회 다녀서 갱년기도 오는데 슬슬 죽을 준비 해야지! 그래서 교회가서 시키는 데로 하겠습니다. 유혹 하는 거죠. 당신이 선택 잘하면 천국가고 또는 지옥 갑니다. 사무엘상에 의하면 그런 건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대해서 어떤 주도권을 가질 자격도 없고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제 6일 째 만들어 졌기 때문에 마지막에 만들어 졌어요. 심지어 악마와 천사보다 뒤늦게 만들어 졌기 때문에 타락 천사인 뱀인 악마에 의해서, 모르고 무식하니까 유혹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천국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렇다면 지옥과 인간의 중보자는 누구지요? 사단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왔을 때 사단이 이미 세상 권세를 다 쥐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보면 세상 권세를 쥐고 있으니까 사단이 뭐로 위장 하냐하면 천사로 위장해서 메시야와 잘 아는 사이다고 하지요.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뛰어 드니까 악마와 귀신의 대장이 되죠. 귀신의 우두머리 취급을 받는 거에요. 바알세불이라 하지요. 개구리 모습 같은 악마의 모습이, 바알세불이 그런 뜻이에요.

 

흉측한 양서류에 해당되는, 이스라엘에서는 육지면 육지, 하늘이면 하늘, 물이면 물, 자기 정체성을 자기가 사는 영토에 맞는 그런 음식만 먹게 되어 있어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날개가 있으면서도 땅에 기어 다니는 이런 것은 먹지 말라고 되어 있거든요. 레위기 20장25절, 11장에 보면 먹을 음식과 먹지 못할 짐승을 구별할 때 어떤 동물을 먹을 때는 동물이 소속 되어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일치되는 음식만 먹어야 된다.

 

(레 20:25) 너희는 짐승이 정하고 부정함과 새가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것들로 너희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

 

(레 11: 46)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레 11:47)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때 나의 위치는 율법이 지정한 위치가 곧 나의 위치이고 나의 소속입니다라는 뜻에서, 먹는 것까지도 관여 하시는 주님의 율법에 대응하고 반응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언약의 율법이니까 (모세 언약) 거룩한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다 아시겠지만 거룩이라는 말은 홀로서는 거룩이 안돼요. 홀로는 안 되고 짝을 이뤄야 되요. 동양에도 그런 것이 있지요. 음양이 서로 짝을 이룬다. 장갑은 하날 사면 소용없어요. 양말도 하나 사면 소용없고 신발도 짝이 있어야 되듯이 거룩이라는 것은 짝을 이루면서 거룩이 나와요. 단독 거룩은 없습니다.

 

네가 거룩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속되냐를 물어요. 오염되었느냐? 더러워 졌느냐? 하나님의 거룩은 어디서 피어나냐 하면 단독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더러운 가운데서 분리 되었을 때 거룩이라 해요. 그러니까 성도 주위에는 항상 뭐가 비 성도로 휘감겨 있는 양상이 성도의 삶입니다. 혼자 지리산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냥 시장 바닥에 같이 사는 것이 거룩이에요.

 

성도가 비 성도에 둘러쌓임으로서 성도와 비 성도의 차이점을 보게 하는 겁니다. 비 성도는 자기 힘으로 혼자 경정해서 살기 때문에 비 언약이고 언약궤와 상관없이 염두에 두지 않고 단독적으로 독자적으로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언약에서 나온 성도는 나의 나됨은 나보다 먼저 된 언약이 (선재),

  

나 보다 먼저 계신 분에 의해서 그 분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오지요. 선재하신 하나님께서 인자를 만나지요. 인자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인생은, 다니엘은 물론 천국 노선이죠. 천국 노선에서 다니엘의 인생이란 것은 없어요. 전부 다 누가 유발 시켰는가? 장차 오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분위기를 미리 앞서 만들어 가는 거에요.

  

보통 사람은 사람하고 상대하잖아요. 다니엘은 누구하고 상대하냐 하면 짐승하고 상대해요. 그런데 그 짐승은 땅에선 찾을 수 없는 짐승이에요. 분명히 땅으로 기어올라 왔는데 출생지가 땅이 아니에요.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 짐승이에요. 그런데 바다의 짐승은 그냥 바다에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스물~스물 땅으로 올라온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냐하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훼손되고 이제는 땅에 있는 것이 바다에서 온 것으로 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땅에 누가 있을까요? 바로 언약이 있었거든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언약과 관련된 배치물들이 거기 있는 겁니다. 그것을 그동안 인간들이, 이스라엘이 관리했지요. 성전과 배치물들을 관리 했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가면서 바벨론의 정체가 그들이 같이 땅에서 머물렀던 족속이 아니고

 

땅이 아닌 땅보다 먼저 있게 한 배후(다른 존재)에 의해서 언약을 무산시키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무산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바다의 짐승을 땅으로 올라오게 해서 이스라엘을 점령하도록 그렇게 조치했다라는 것. 그 사실 만 다니엘이 알려 줄 뿐입니다. 그렇게 한 뒤에 다니엘이 보여 준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이 마지막 때라는 것. 마지 막 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까 한 노선을 다시 한번 봅시다.

 *두 개의 노선                                                              

 

천국 가는 노선은 마지 막 때의 노선이에요. 그러나 지옥으로 가는 노선의 사람은 과거 현재의 노선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는 가봐야 알지요. 누가 죽어서 지옥 가본 사람이 있나요? 지옥 갔다가 살아 온 사람이 없잖아요. 가 봐야 안다는 거에요. 심지어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에요.

 

하늘나라를 어떻게 하면 갈 수 있겠냐고 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는 방법으로 자기 미래에 반복시키겠다는 겁니다. 천국은 나중 문제인데 예수님께서 다기 태어나야 한다 하니까 나중에 천국가기 위해서 과거의 했던 것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주는 선물이 있어요. 마지막 때에 메시야가 마지막으로 종결지었다는 이미 모든 것을 끝냈다는 증표가 있어요. 그것이 성령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령은 마지막 때의 영이에요. 성령이 오면 무조건 마지막 때라고 봐라! 미래가 현재로 와버렸을 경우에 어떤 반복이 있냐 하면

 

마지막 때라는 사실 만 계속 반복시키기 때문에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에 반복이 되지요. 아까 강의 시작하기 전에 사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들을 했지요. 사는 게 힘든 다는 것도 마지막 때의 징표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살기 참 힘들다고 주께 함께 있겠는 마음 드는 것은 축하드릴 일인데 문제는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 “아이고! 더 살아야지!” 이런 생각이 들 때는 축하하기 곤란합니다.

 

반복이니까, 반복이라는 말은 늘 상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늘 세상 적이잖아요. 그럴 때 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반복해서 “마지막 때야! 다 이루었어! 네가 고민 할 게 아무것도 없어! 그동안은 네가 주인공이 되어서 네가 네 인생을 질질질 끌고 갔지만 지금은 마지막 때이니까 마지막에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는 내가 허락 할 때 까지는 죽기 싫게 계속 살아야 돼!”

 

계속 살면서 주님의 천국 노선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여기서 잘 이해 하셨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자리가 있지만 사실은 배후에 붜가 있다고 했습니까? 언약이 있지요. 구약 때는 상자가 왔으니까 언약궤라고 하면 되고 언약궤와의 관계에 있어서 엘리 제사장은 언약궤를 빼앗겨 버렸어요.

 

빼앗겨 버렸을 때 엘리 제사장의 모습은 천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옥을 보여주는 것이 되요. 지옥이라는 것은 4장21절에 보면 태어난 아기 이름을 이가봇이라 했지요. 이가봇이란 뜻은 ‘영광이 없다’ 이고 영광이라는 것은 미래의 광채, 하늘나라의 광채, 휘양찰난한 사도 바울이 봤던 삼층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이걸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영광이 없다의 가장 쉬운 표현은 악취가 난다. 아주 독한 냄새, 똥 냄새가 날 때 는 가까이 가기 싫찮아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달 동안 목욕 안하고 머리 안 감고하면 가까이 하기 싫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이 세상 자체에서 지옥의 악취가 나고 냄새가 나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상령 받은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목사 설교하는데 도저히 못 들어요. 악취가 나고 더러워서,

  

아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인애성도 좋지, 그걸 어떻게 참고 있는지. 참으면서 이렇게 하면 복 온다고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요. 악취가 나면 같이 사귈 수가 없지요. 그러면 친구나 동창도 다 떨어져요. 대화 상대가 안 됩니다. 가까이 하고 싶어도 세상에 찌들은 냄새가 나서,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린도 후서 이야기에요. 고린도 후서에 내가 전하는 말은 구원 얻은 사람에게는 향기이고 지옥 갈 사람에게는 악취라고 되어 있어요.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런데 일단은 복음을 전해 봐야 되지요. 복음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언약을 전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는 언약궤가 이동을 했는데 지금은 성도 자신이 언약궤의 역할을 하면서 성도의 육체가 뭐지요? 사물이지요? 물체잖아요? 늙어 가든 말든 복음이 쏟아져 나온다면 그 육체는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눈에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언약궤의 역할을 하게 된 거지요. 물론 그 당시에 언약궤도 있지만 사람도 있지요.

 

아까 이야기 한 죽었던 사람이 18절에 나오지요. 앞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죽게 된 이유가 자기 하나님의 말씀 보다 자기 아들들을 중히 여겨서 가문까지 죽게 되어 있어요. 사무엘상 2장 29절 이하부터 그에 대한 저주가 나오거든요. 저주가 아주 무서운 저주에요. 32-33절에 그리고 난 뒤에 35절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새로운 사람을 네 뒤를 이어서 세울 것이다.

 

(삼상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 2: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삼상 2: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삼상 2: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삼상 2: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네 뒤에 나올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이에요. 왜냐하면 사무엘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에요. 변변치 안습니다. (8장에) 하나님 말씀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엘리 제사장이 왜 죽었느냐 하나님을 멸시해서 죽었다. 왜 멸시 했는가 상대적으로 자기 아들을 더 존중히, 귀하게 여겨서 그렇다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거는요 핑계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말을 안 들었거든요. 그리고 자식보다 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길 사람이 있겠어요? 없지요. 지금 천국이라는게 가족 관계가 다 찢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못 가요. 천국에 갈 때는 모든 자식이나 가족 관계가 끊어져야 되요. 심지어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누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에 예수님의 가족인 동생들과 어머니가 왔더니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죠. 가족보다 새로운 구성을 원하시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어떤 사람들은 그럼 가족을 버리고 교회에서 주치고 살면 천국 가느냐고 하지요. 가족을 언급하시면서 그 칼이 어디까지 쑤시고 들어가냐 하면 너 자신을 미워하고 부인하라까지 도달하는 거에요.

 

이 말은 우리 자신의 개념과 평소의 태도가 나 자신을 감추는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어디에 감추느냐 하면 1차적으로 가족에게 자아를 숨겨 놓고 가족을 위한답시고 살아가요. 그리고 나와 가족 사이에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그러니까 결국 자식이 누구의 이상형이에요? 나의 확대지요. 나의 이미지가 확대 된 것이 자식이고 가족인 거에요.

 

그래서 주님은 비계 덩어리를 해체하시는 거에요. 쪼개면 그 안에 누가 들어 있어요? 내가 들어 있는 거에요. 애라서 예쁜 게 아니고 내 애라서 예쁜 거에요. 남자라고 좋은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남지이기 때문에 남편이 좋은 겁니다. 아내라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조건하에 아내를 사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전에 설교를 했지요.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은 제가 뭐라 했던가요? 헤어지라는 거죠. 이혼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벌써 마음으론 이혼해 놓고 붙어 있는 척하고 주의 말씀 지킨다고 붙어살려고 해요. 그래서 이혼의 핑계가 좋지요? 상대가 복음 가지고 시비 걸거든 후닥닥 헤어져 버리세요.(웃음) 고린도 전서 7장에 복음에 대해서 시비 걸거든 헤어져 버려요.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니까 유대인이나 제자들이 그러면 이렇게 일반적인 가족 사랑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하니까 결혼 안하는 게 아무나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 한 사람을 보고 굉장히 불쌍히 여겼어요. “아이고!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저렇게 한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려고 할 수 없지 뭐! 자기 업보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상당히 측은 하다는 듯이 아이고! 인생을 저렇게 힘들게 사나! 결혼을 고생이나 고난으로 보는 거에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면 전에는 나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냐 저주이냐의 판가름이 이제는 나로 인해 가정이 축복이냐 저주이냐를 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를 주는 데 이 결과는 결국 피해지요. 갖고 있는 죄가 가족에게 파급이 되요.

 

만약에 결혼을 안 했으면 혼자 감당했을 손실을 나 때문에 억울하게 가족이 떠안게 되는 계기로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필히 결혼을 해야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결혼 안했으면좋겠는데 내가 얼마나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내 존재 자체가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알려면 결혼 해야지요. 이미 한 사람은 할 필요 없고 이미 다 드러난거라

 

그래서 이런 노래도 있어요. 들국화의 전인권 씨가 불렀던 노래인데 ‘사노라면’이란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에 보면 사노라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결혼식에 축가로 부르게 되면 멋지죠. 지지리 못난 인간끼리 만나서 맞지도 안는데 억지로 맞추느냐 힘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사노라면 있을 것이다. 가사에 흐린 날도 갠 아침이 온다는 거에요. 얼마나 서글픈 노래에요.

  

아예 부정적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에요. 결혼식 축가론 최고 인 듯싶어요. “아이고! 고생하는 거 그렇다고 너무 절망 하지마!” 사노라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 가문은 엘리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정이 파탄나고 특별히 이가봇 이라는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야 되요.

 

왜냐하면 본인이 개인적으로 행복하냐? 저주스러우냐? 아무상관 없이 저주마저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기여히 임신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은 모든 언약이 투입된 현장을 축복이 아닌 저주 마당으로 규정해서 언약을 위해서 새로운 언약의 깊은 내용이 추가적인 역사가 계속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저주가 뭐로 바뀌냐 하면 축복으로 바뀌는데,

 

여기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희생자가 필요하고 희생자가 바로 사무엘 노선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보면 축복의 노선은 결국 희생자의 노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홀로 살면 안 되고 지옥 갈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죄 때문에 희생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감래 해야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벨이지요.

 

아벨 노선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줄줄이 사탕 꿰듯이 나오는 신앙인들이 있지요. 전부다 희생자들입니다. 모세 같은 경우엔 바로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여기서 고난이란 성도가 받는 고난은 어떤 경우이냐 하면 생계의 어려움이 아니고 그건 고생이고 복음 때문에 세상과 격리 조치를 당하고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고난이에요.

  

이것은 언약이 완성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 하십니까? 세상과 격리 조치를 유발하는 상태로 성령이 찾아오게 되지요. 성령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게 아니고 복음적인 기능을 하는 거에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구원이 된 것이고 성령이 왔다는 것이 ‘다 이루었다’가 함께 하기 때문에 성령이 왔다는 것보다 ‘다 이루었음’이 온 거에요.

  

‘다 이루었음’이 오면 내 소유가 아니고 내 육체의 주인이 나인 것은 내 손에서 떠났고 이제는 죽을 때 까지 계속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 격리를 아까 ‘거룩’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거룩한 성도되게 하시는, 거룩은 무엇과 병행한다? 비 거룩과 하고 비 거룩과 거룩의 차이는 어떻게 구분한다고요? 거룩은 다 이루었음, 비 거룩은 열심히 해보자 쪽으로 나가지요. 이것이 행함이죠. 열심히 해보자.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을 때까지, 빛의 자녀가 될 때 까지 한번 열심히 해보자는 거에요. 본인은 빛의 자녀가 그 수준이 어디까지 인지 몰라요. 그냥 갈 때 까지 가보겠다는 거에요. 강남 스타일도 이에요. (웃음) 아까 이야기 했지만 인간들이 자기의 노선에서 지금까지 이 만큼 해 왔으니까 현재는 이 정도 수준까지 되니까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을 ‘예기’라고 해요. 미리 기대 하는 것.

 

미리 기대하기 때문에 ‘예기’는 어디서 누가 결정 하는 거에요? 현재에서 결정하는 거에요. 현재의 내가 결정하는 거지요. 현재에서 내가 결정 했으니까 천국이라는 것은 항상 나의 이상형이 될 뿐이에요. 그러니 이 천국은 누구의 나라에요? 본인의 나라이지 주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그래서 천국이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미 앞당겨 와 버렸어요. 로마서 14장 1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셨는지 한 가지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선교지가 아마존이에요. 온도가 40˚~50˚가 넘으니까 사람들이 힘들데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육체가 버틸 수가 없어요. 모기와 습기가 많고 그런데 온도가 높아도 습기가 없는 쪽이 있어요. 아라비아 그런 곳은 살만 해요. 그늘은 시원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마존은 강 유역에 있기 때문에 습기 많고 온도가 높으니까 오는 사람들이 일주일도 안돼서 다 가버리는 거에요. 온도가 높고 너무 힘드니까 그런데 그 아마존에서 선교를 한다고 합시다. 선교를 하면서 뭘 생각하겠어요? 이 선교가 잘돼야 될 것이 걱정이 되겠지요? 그것이 뭐냐하면 바로 예기(미리 기대하는 것)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뭐에요? 아마존이든 알라스카든 상관없지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까 이것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거에요. 지금 이게 아마존이든 낙동강이든 관계없어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주께서 나를 여기 있게 하신 거에요. 어떤 모습으로? 다 이루었다는 모습으로 그래서 장래에 대해 내가 걱정 할 게 없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죽은 자가 미래를 걱정한다는 것은 아직 덜 죽었다는 뜻인데 덜 죽었다고 이야기 하면 안되잖아요. 물론 육신이 있는 한 미래를 걱정하기 마련입니다만은 전에 이야기 했지만 성령이 그때 그때마다 이쪽 노선을 확인시켜 주면 짧은 시간동안 만큼은 “아! 인생의 실패라는 게 아예 처음부터 없었구나!” 뭘 보여주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실패했다 성공했다를 내가 측정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공했나? 실패했나?를 따지는 것은 자기를 바라보는 제 3의 자리를, 특별한 자리를 자기가 따로 만들어 놓고 자기가 자기를 관찰하는 모습이 있어요. 관찰하는 자리가 왜 있어야 되는지? 이건 없는 거에요. 망상의 자리에요. 내가 그 안에 들어가야지요. 그 안에 들어가면 성공이냐 실패냐는 나와 관련되어 있는 언약이 성공했으면 나도 성공한 것이고 십자가가 실패했으면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가 그대로 있다면 나는 뭘 해도 실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 고린도 전서 15장에 나와 있어요.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여러분 자신이 평가를 내리거나 관찰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망상의 자리이고 마귀가 자꾸 힘들게 하는 자리에요.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사무엘상 5장으로 넘어 갑시다. 이렇게 해서 엘리 제사장은 사나 죽으나 언약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살았던 겁니다. 그러면 엘리 제사장은 지옥 갔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옥의 면을 보여줬지만 지옥갔다 안갔다는 판정은 우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허장강이 나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지옥갔다고 하면 안되는 것처럼 자기의 역할을 한 거에요. 달중이가 못된 짓 했다고 드라마 ‘여로’에서 달중이가 지옥 갔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참고> 1972년도 연속극 ‘여로’에 나왔던 악역 이름 (달중: 불량배)으로 그 당시 최고의 욕이 달중이 같은 놈일 정도 였다고 한다.

사무엘상 5장을 봅시다. 아까 언급했는데 이스라엘의 언약의 실패가 있어줘야 언약의 성공으로 가는 곳에 미지의 것이 개입이 되고 투입이 되는 때 이것을 희생이라고 했지요. 희생이 없이는 인간은 절대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신분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아닌 다른 분의 희생 덕분에 저주에서 축복으로 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희생의 터가 깔려 있어요. 어린 양의 희생, 이게 뭡니까? 유원절의 양이지요. 이것은 아까 말했지만 반복한다고 했지요? 유월절의 반복을 두자로 하면 ‘제사’라고 합니다. 제사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인데 다시 번제를 둘로 나누면 소제와 번제가 있고 속죄제를 둘로 나누면 속건제와 속죄제가 있고 화목제는 마감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가 마감 되었으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음식은 온 백성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어요. 그것을 다수성이라고 해요. 하나, 숫자 1에서 나왔는데 누리는 것은 다수가 누리는 거에요. 하나에서 배급받는 식으로 하나님의 양식을 백성들이 같이 나누어 먹으면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양식을 나누어 먹게 되면 하나에 종속되는 관계지요.

 

그러면 다수성에 A라는 사람도 있고 B라는 사람도 있고 C,D..있다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사귈 때 둘이 다이렉트(Direct)로 사귀면 안돼요. 반드시 하나를 경유해서 사귀어야 되요. 이것을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라 즉, 하나에서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어디서 탈락인가 하면 내가 사랑한다에서 ‘나’라는 독보적인 하나가 날라가 버리지요.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주께서 너보고 이 떡 주래!

  

이 빵을 주께서 오신 분들께 주라고 하니까 나는 그냥 심부름꾼이니까 저보고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빵 정도가 아니고 성경에선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용서’. ”주께서 너를 용서하라 하래!“ 하고 휙 돌아서는 거에요. 아이고 용서 해 준다 하니 고맙습니다. 놔라! 주께서 당신을 용서하라 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용서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사기 당하므로 깨닫게 하셨다는 거에요. 이런 이야기하기 참 힘듭니다만은 내가 당신에게 사기 당하기 전 까지는 내가 당신을 용서 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을 도와 줄 수 있다고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 했는데 사기를 당하고 보니까 그 돈이 나라는 이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주의 일에 속한 주님이 나에게 주신 돈을 내가 사기 당했다고 마치 내 돈 인 양 착각했는데

 

당신이 없었다면 내가 주님을 경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뻔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난 뒤 비로소 나는 하나가 아니고 하나에 예속된 다수성에 속하고, 여러 가지 다수성 중에 하나에 불가하다는 것을 아는 거지요. 특히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이고 남녀 사이도 마찬가지이고 저 사람이 나에게 무얼 해 줄 것인가? 어떤 유용성을 가지고 따져 버리면 그 사귐은 상당히 가식적이고 위선적이죠.

 

상대를 이용하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상대를 굴복시키는 쾌감이나 희열을 느끼는 것. 특히 목사들에게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 이건 안 되거든요. 가르치는 건 성령이 하는 것이지 인간이 가르치는 게 아니거든요. 목사는 예수님을 경유해서 해야 되요. 내가 저 사람에게 배우기 위해 나는 가르치는 기능으로 잠시 사용되는구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배우기 위해서, 배움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 도리어 배움을 받기 위해 주께서 만나게 해주신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은 한 명도 전도를 못했다. 단 한명도 못했어요. 왜 I am not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체를 더욱 더 심도있게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 나보다 못난 인간들을 둠으로서 갑자기 내가 우쭐댈 수 밖에 없는 죄를 또 노출 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나 이 바보야!” 라는 마음이 드는 특히 복음을 알고 전도 하면서 전도하는 것인지 이건 정복하는 것인지 분간 안가는 사람이 많거든요.

 

“너는 나한테 걸려들었어! 너는 나한테 굴복 해 돼! 내 말빨에, 특히 대학생들 전도 할 때 꼭 남학생들이 예쁜 아가씨들한테만 하고 못난 아가씨는 아예 재껴 버리고 작업 걸듯이 하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못 난는지 너희 보다 더 못난 민족을 통해서 언약이 영광을 받습니다. 엘리 가문의 이가봇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대표 하거든요.

 

이스라엘 전체가 말만 하나님! 하나님! 했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영광이 없는 나라인데 영광을 주신 것은 언약이 독보적인 사람의 어떤 협조나 협력 없이 항상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붙여 놓고 이스라엘에게 이겼다고 좋다고 하는 블레셋 나라에서 혼자 승리를 따내 버려요. 혼자 가서 이기는 화랑 관창? 계백한테 목 베었지만 혼자서 하는 소년 다윗 같아요.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오직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로 더 이상 죄를 씻을 수 있는 다른 제사, 요즘의 예배, 어떤 예배도 우리의 죄를 씻는 예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예배를 반복 할 뿐이지 추가적인 예배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배 잘 드려서 구원 받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커튼 색깔 바꾸고 목사 가운 색깔 바꾼다고 해서 예배가 되는 게 아니에요.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하고 성전에서 잠잠할 지어다 하면서 11시 예배 때는 은혜 받고 2시에는 덜 받는 그런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자체가 움직이는 언약궤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의 만남은 비거룩과 현장에서, 처음 출발은 성도라고 하지만 비 성도와 동일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께서 다 이루었음을 제공해 줄 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면서

 

죄를 통해서 오직 지금 일 하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고 구원도 선교도 다 주님의 자기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6-12-18 10:54 
최적화 (마 22:1-14)                                                  대전-81강
  이근호
 

2016년 10월 25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2:1-14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장입니다. 마태복음 천국에 대해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초반부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를 고정된 자리로 잡고 있는 곳으로 우리가 보통 생각하거든요. 그것은 땅이 흔들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땅에서 우리가 터전을 잡았기 때문에 땅에서 바라보는 것도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도 구름 저편에 고정되어 있다. 고정되어 있는 인식이 땅에 유포되어 있지요.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 (장소적)하늘나라에 계신 분이 아니에요. 이런 것도 설명을 다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오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아버지와 함께 계셨지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오셨어요. 고정된 곳은 이 땅만 고정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오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어디 계시냐 하면 예수님의 활동과 더불어 아버지와 함께 계셔요. 이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여기 집사님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하면 갈 집을 보고 이사를 해야 되는데 집을 보러 갈 때 강아지가 어느새 따라 왔다고 하면

집사님 집에 다른 살림은 없고 달랑 강아지뿐이라고 칩시다. 지내던 아파트가 있든 말든 간에 새집으로 간 이 상은 이사를 다 한 것이 되어 버려요. 다른 살림이 없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아파트라는 개념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개념이지 사실은 그런 개념은 맞지 않아요. 그것을 예전에 병행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오게 되면 하늘나라도 동반해서 병행해서 같이 오는 거에요.

또 이런 예를 들 수 있어요. 나이 60 초반이 돼서 동창생 모임이 있다. 그런데 호텔에서 하니까 옷 좀 격식에 맞게 오라고 통보가 왔다고 한다면 자식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난 뒤에 집에 둘만 살 던 사람이 호텔에 둘 다 오게 되면 가정은 어디 있습니까? 바로 호텔이 가정이 되어 버려요. 왜 두 식구가 다 왔기 때문에 시집 장가 안 보낸 자식 없잖아요. 처음부터 둘이 살다가 그대로 이동 했으니까 다 온 셈이 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왔을 때 뭘 문제 삼으냐 하면 그 고정되었다는 것. 고정 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유성=소유성이거든요. 확고한 소유성. 소유성은 뭐를 자꾸 기대하게 되냐하면 불멸성을 기대하게 되요. “내 것은 절대 영원히 끌고 갈꺼야!” 내꺼니까, 이 사유성이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 개인의 영혼까지 이어져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누가 복음 12장엔가 나오지요.

부자가 농사가 잘 되어서 창고를 지어 놓고, 농사가 잘 된 게 문제에요. 넘치니까 쌓아두고 이젠 걱정 없다 하는데 그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생명은 여혼은 소유에 있지 않다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은 오히려 소유가 영혼을 왜곡시키고 오해케 하는 겁니다. 소유가 고정되어 있고 거기에 내 영혼을 결부시키려는 의도가 강렬해져요.

목사에게서 복음이 안 나온다. 그러면 목사 그만둬야 되요. 20년을 전했는데? 이건 아무 의미 없습니다. 30년 전했으니까 눌러 앉는다? 이건 잘못이에요. 그 다음 주일 날 복음이 안 나오면 그 다음 주일 날 사표내야 되요. 왜냐하면 확정된 나의 것이 있으면 안되요. 나의 라이센스(자격) 이런 게 있으면 안되요.

간호사가 25년간 주사를 잘 놓았는데 26년째는 늙어서 손을 벌벌 떨면서 주사를 엉뚱한데 놓았다. 그러면 간호사를 25년 동안 했지만 그만 둬야 되요. 왜? 사람 잡을 일 있습니까? 안 되거든요. 처음에는 본인을 위해서 소유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소유가 나를 삼켜버려요. 그 소유가 아까워서 거기에 맞도록 해버려요.

예를 들어서 양복이라는 것은 내 몸에 양복을 맞춰야 되잖아요. 그런데 누가 괜찮은 양복을 하나 줬다 그러면 그 양복에 맞춰서 어떻게 하겠어요? 살 빼기 들어가겠지요. 양복을 빛내기 위해서 내 뱃살을, 허리를 줄여야 되는 거에요. 양복이 너무 아까워서, 내 영혼이 아까운 게 아니고 양복이 아까워서, 내 소유가 아까운거에요.

지금 방금 한 것을 다시 하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은 아무리 죽음이 무섭다 할지라도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너 그렇게 하면 죽어! 하면 “죽어도 좋아!”이렇게 되는 거에요. 너 그거 주식 투자하면 망해! “하면 ”에이! 망할 때 망하더라도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해야지!“ 다 털어먹는 거에요. ”에잇! 오기다 오기“ 충동과 욕망입니다. 죽는 줄 알면서도 심지어 자살하면서 자살 할 수밖에 없는 욕망. 충동. 이것에 이미 그 사람의 모든 영혼은 소유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시작하는데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인간 땅에 왔는데 땅을 하나로 봅니다. 하나로 봐서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뭘 봤는가? 인간의 땅을 영원히 고정된, 불멸의 땅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사탄과 악마의 척을 의식하면서 주께서 오시는 거에요.

어느 강의에서 이것을 비계층이라 했는데 아주 굳어서 바늘조차 안 들어가는 완고하고 단단한 층. 그래서 인간 쪽에선 이것을 뚫고 나올 수 없어서 물려 사는 비계층. 이게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속성을 그대로 인간들이 다 분배받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소유성이라고 했습니다. 소유성은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불멸하기 때문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자기는 예술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겠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의 진짜 구원은 종교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움에 있다는 겁니다.  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이 지은 달과 6펜스라는 장편 소설이 있어요. 그 소설에 보면 미술을 하기 위해서 처자식 다 버려요. 예술가의 생애가 나옵니다. 고갱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소설화 한거에요.

 
이것을 보고 인간은 지지리 궁상이 아니고 예술이 우리를 구원하는구나!라고 하는 겁니다. 예술이 구원한다는 사람 많습니다. 박범신이나 가수들, 마약하는 전인권 같은 사람들. 마약하며 작곡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김태원이라든지, 예술이 무엇인가? 마약을 해서라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작가들.

심지어 목사들 가운데서도 설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희안한 체험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거에요. 美, 희열, 쾌락, 즐거운 쾌락도 있지만 아픔 가운데 맛보는 새로운 쾌락, 이런 것들이 심지어 동성애도 마찬가지에요. 하다 하다 온갖 짓 다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뭐로 보냐 하면 언약을 무르는 이방 민족의 풍습으로 봤어요. 애굽의 풍습이에요.

애굽의 풍습이니까 애굽은 뭘로 감싸져 있습니까? 비계층. 악마로, 사탄으로 감겨져 있지요. 사람들이 성경 말씀으로 보고 “아! 이건 지키겠는데! 이건 못 지키겠는데!” 지킨다 못 지킨다로 나오는 거에요. 성경은 원래부터 지킨다 못지킨다의 문제가 아니고, 내 주의에 마귀가 둘러 쌓여있다는 실체를 그 현장성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성경책을 준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저주 받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성경을 준겁니다.

자기한테 준 것처럼, 지킨다 못 지킨다 하는데 누가 지켰다 못 지켰다를 판정하는데요. 본인이 판정한다는 거예요. 나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성령은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오게 되어있어요. 성령을 받으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고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9절에 나오잖아요. 이것이 성령의 객관적인 것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성령 받은 사람은 줄 세워서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다양성이 아니라

성령받은 사람은 공통적으로 책망 받게 되어있습니다. 말씀으로 또다시 지적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 설교 때 말했습니다. 저에게 다른 목사님에 대해서 설교가 어떻습니까 물어봐요. 자기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은 사기꾼입니다. 100%프로 사기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전도 못해요. 성령 받은 사람의 기본입니다.

설교는 왜하느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설교를 시킨 겁니다. 우리 십자가마을에서는 설교를 한번 맡기면 2주전부터 밥을 못 먹는다는 분도 있어요. 깜짝 놀랐어요. 사람 잡겠다 싶었어요. 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우리교회의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전부다 못하겠다는 거예요. 하는 사람도 벌벌벌 떨고. (웃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오실 때 이미 확정된, 고정된 것 그 것을 원해요. 왜나하면 사람들이 안정감 속에서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거든요. 그러니까 마귀가 얼마나 복음을 못 믿도록 하겠어요. 복음은 항상 운동이거든요. 기능으로 한다는 거예요.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바람같다고 표현했어요. 바람은 소요의 대상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바람을 어떻게 소요합니까? 펄럭이는 빨래는 내가 잡을 수 있어도, 빨래를 펄럭이는 바람은 내가 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네가 구태여 나를 잡을 필요가 없다. 나를 잡아서 구원 받겠다는 것은 거짓 믿음이에요. 제가 지난 수요일인가 기적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죠. 인간이 아는 기적은 기적이 아니에요. 소유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내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비켜가는 거예요. 내가 예상하는 기적 말고, 그냥 사건으로 와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거짓믿음이라고 지적받고 책망당할 때 이관계가 성령 받은 사람과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시원하게 고백이 되죠. 순복음 기도원에 가서 사람들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며 할 때 “안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저는 안 믿을 거에요.” 그 격리가 바로 거룩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실패를 만들어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대입이 의미가 되는 겁니다. 죄+피=의. 공식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피에서 나오는데 죄의 세계 속에 피가 투입되기 때문에 죄와 피의 만남이 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죄를 피 없이 피를 우회해서 의를 얻고자 하는 거죠. 피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피를 믿는 게 아니라 이용해서 구원받겠다 하는 시도는, 이것은 다른 것은 다 죄라도 피 믿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전면적인 죄에서 한 모퉁이를 남겨두는 거에요. 요것 까지는 손대지 마세요. 주님 이것까지 손대면 제가 주님 앞에 할 것이 없습니다. 조금은 남겨두셔야 그것 가지고 주님이 하신 복음을 제가 믿을 수 있는 그 모퉁이 자유의지만큼 남겨둬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성당이고 요새는 개신교까지 확대가 되었죠. 장사 잘되는 개신교는 개신교인지 성당인지 구별이 안되요. “여러분의 성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선 십자가까지 가셨으니까 당신은 여기서 여기까지는 당신이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요청하는 겁니다. 이모든 것이 종교놀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 과연 그런지 봅시다.

천국은 기능이라고 했죠.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드는 기능 실패를 할 때는 어떤 작용을 하냐하면 파괴 작용이 주님한테 있죠. 초대를 할 때 우리 같으면 어떻게 초대를 합니까? 날짜나 시간을 그 사람 편의를 봐서 올만할 때 해야 되는데 자기아들 혼인 잔치를 일방적으로 정해버렸어요.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니까 숫자 층 1이 되죠. 혼인 잔치에 갈 수 없는 사람이 뭐가 됩니까? 다수가 되겠지요.

자기가 일방적으로 날짜를 정해버렸어요. 그날 혼인 잔치 합니다. 그런데 1이 확정적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침 그 시간이 비네요. 제가 꼭 참석하지요.”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주님의 확정을 증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아니고! 하필 그 시간은 바쁘네요.” 이런 다수의 참석 못할 사례들을 많이 깔아 두는 쪽이 주님의 일방적 선언을 증명하겠어요? 어느 쪽이겠어요? 참석 못할 사례들을 많이 깔아둘 때 혼인 잔치 초대가 일방적인 선언으로 증명되겠지요.

그러면 혼인잔치를 두자로 말해 천국이라 합시다. 천국은 어떻게 온다? 아무도 자의에 의해서 자기의 의사에 의해서 올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다시 말해서 구원은 자의로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의 기능은 구원에서 밀어 내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의 여지를 안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는 겁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하지요. 유대인들은 본인들이 천국 백성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나와요. 천국 백성이라 하니까 천국 갈 사람들은 다 손들고 오겠지요. 오늘 강의 제목을 소낙비로 하고 싶은데 일단 후보감으로 하고 소낙비가 내릴 때 아주 재빠른 사람이 있어서 소낙비가 두 시간 동안 왔는데 이동 거리 10Km인데 그동안 소낙비가 막 쏟아 졌는데 옷이 하나도 안 젖고 온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겠어요? 비 사이로 막가.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면 거짓 말 이겠죠.

소낙비가 촘촘하게 내려 버립니다. 촘촘한 것이 또 뭐가 있냐하면 담양에 대나무 숲이 있어요. 제가 가봤어요. 대나무 숲이 너무 촘촘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거기서 보면 20대의 배., 30대의 배, 대나무 두 개 세워놓고 그 사이로 빠져 나가면 아직 20대의 배이고 못 빠져 나가면 30대의 배이고 그렇게 재미나게 해보는 게 있어요. 천국은 어떤 기능을 한다? 아무도 천국 갈 수 없음을 천국의 기능으로 보여주면서 현장성 있게 이 땅에 온 거에요.

그런데 땅의 사람들은 땅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 간다고 여긴 거에요. 이런 천국은 거짓이고 가짜였습니다. 망상이었어요. 땅에 있는 자기 자신의 불멸성의 끄트머리에 유한한 자신을 무한으로 쭈욱 늘인 거에요. 유한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에 대해서 충동과 욕망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충동과 욕망은 죽음으로도 말리지 못하지요. 나이기에 나는 영원해야되 나에대한 추구.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를 넘보는 인간들의 본색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는 치워버렸는데 이미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가 있는 것을 알아요. 저것을 따먹어야 영생 얻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의 허점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서입지요.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자기의 허점을 가려서라도 기어이 생명나무에 도전하겠다는 거에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무슨 탑이 하나 나오는데 무슨 탑입니까? 바벨탑이지요. 바벨탑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인간의 염원을 가시화시킨 겁니다. 눈에 보이게, 벽돌로 구워서, 그들이 같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가 하나이고 생각이, 의사로 결정된 것에 대해서 반대가 없어요. 무슨 일을 하던 시장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던 농사를 짓던 고기를 잡던 동해에서 오징어를 잡던 뭐를 하던 모든 인간의 다수성의 집념은 아무리 직업과 성격이 다양하더라도 하나같이 염원을 향한 마음은 동일한 겁니다.

이것을 종교성, 종교에 대한 탐욕 또는 구원 욕. 종교를 염원하다는 것이고 필요한 것은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기위한 방법론을 교회에서 제시하게 되면 그것을 따라 하는 거예요. 수단과 방법을 제시 할 때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자부하던 방법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제시했던 방법이지요. 그들이 받은 모세가 독단으로 만나 받았다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유포시킨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지킨 모델케이스로 선정한 것이 본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면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해서 자신들이 제일 선봉장에 서서 다른 사람들로 줄을 세우는 겁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그런 것이 많잖아요. 주기철, 손양원 그리고 테레사 수녀, 이런 사람들을 성녀또는 성자로 부르며 주기철 목사 기념관 함경직 목사 기념관 같은 것을 건립하잖아요. 차암~ 죄인을 기념 한다?

지난 대구 강의를 청도에서 했는데 그때 인간이 신의 세계를 염원 할 때 그것이 과학이 됐든 철학이 됐든 전부 유한에서 무한을 원하는데 예술도 마찬가지 이고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이고 플라토닉 사랑도 육체적 사랑보다 더 짜릿한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이에요. 에로스 사랑보다 더 아가페 사랑을 추구하는 거예요. 신의 세계는 아가페적 사랑, 희생적 사랑, 내어주는 사랑,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인간은 추구하는 겁니다.

이 모든 사랑은 다 마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 지상에서 피, 희생 그리고 아픔. 누굴 위해서? 너 때문에 당한 아픔과 슬픔으로 우리에게 주게 되어 있습니다. 추상적인 이런 아가페 사랑은 다 인간의 구원의 욕구에서 나온 거에요. 그래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다가가는 방법으로 아까 말했듯 줄을 세웠으니까 인간 바벨탑이 되겠지요. 이것이 오늘 날 교회 아닙니까? 최 정점에 목사가 있고 그 다음에 장로 있고 부목사 있고 그 밑에 전도사 있고 장립집사, 권사,

그 다음에 서리집사, 평신도, 세례 교인. 완전히 이건 이방인들, 유대인들의 계급하고 똑같이 되어 버렸어요. 이런 것을 누가 원합니까? 고객들이 원해요. 그러니 고객을 만족을 시켜야 장사가 될게 아닙니까? 인간 바벨탑을 보고 싶다는 거예요. 최 정점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성스럽고 거룩하게 사는지 보고 싶다라는 겁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그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아주 사람 약을 올려요. 바리새인의 사다리. 이번에 수련회 교재를 만들면서 ‘사다리 밑에서’라는 제목을 달아 볼까 하는데 큰 제목은 복음의 생산이고 소제목이 사다리 밑에서인데 사다리이거든요. 인간이 바라는 유한에서 무한의 최 정점을 주님께선 어떻게 하시느냐 최 정점에 있는 사람들의 약을 올려요. 최 정점에 있는 사람이 못 지키는 말씀을 줘 버립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중에 베드로가 대표적인데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니까 주님께서 일곱 번에 일흔 번을 더하라 490번이 되는데 베드로가 지켜서 490번이 되면 주님이 준비하신 게 있어요. 7×70×7번. 따라 오려면 따라 해봐! 아무리 해도 못 따라 가지요. 12제자들이 다 그랬던 사람들이에요. 따라 간다고 한 거에요. 나중에는 A~C 한 사람은 자살하고 난리 났어요. 다 흩어 졌습니다. 다시 중력으로 모이듯이 내가 위대해 지겠다는 중력을 이길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실패로 만드는 작업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듭니다. 실패로 만드시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이미 예고 하셨어요. 너희가 세리와 창기처럼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를 못 간다. 또 이 밀을 곧이 듣고 전부 창기와 세리 된다고 하면 그런 뜻이 아니고 못 간다는 거에요. 세리와 창기는 감히 얼굴도 들지 못 하거든요. 그냥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이 말은 죽어 마땅합니다를 따라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어러나 저러나 인간 자체가 구원을 시도하고 받겠다는 그 자체가 악마적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하고는 관계 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고 어떻게 희생 하시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에게,

“예수님 희생하러 왔지요? 어떻게 희생하시렵니까?” 차마 이런 질문도 못 하지요. 예수님을 이용하는 셈이 되니까. 강도가 그런 이야길 했습니다. 주님! 저를 기억해 달라고 “네가 오늘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낙원에 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나신 후 강도와 함께, 그 곳은 어디냐? 그 곳은 인간들에겐 없는 거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곳에, 그 장소가 나중에는 (성령 안=처소)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지금도 구원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 성령 안에 있어요.

있는데 그 모양새는 남들 보기에는 별 볼일 없어요.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아요. 별 차이점을 못 느껴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못 느끼지만 우리가 성도이지만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면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만 깨닫고 인식 할 뿐이지 돌아서면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인식 자체도 우리가 소유 할 수 없는 겁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성도가 맞는 겁니까? 진짜 성도 맞습니까를 확정 짓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데, 결국 소유를 해도 문젯거리가 되겠지요.

그렇게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늘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해 놓고 돌아서면 찬양하리로다! 하고 마찬가지로 다음 날 되면 또 똑같아요. 나는 죄인중에 괴수다 해놓고 또 찬양하리로다! 감사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그렇게 소유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본문에 종들을 누구에게 보냈습니까? 처음에는 밭을 소유한 사람, 여기엔 간단하게 해 놨네요. 또 한사람은 장사하러 갔고 두 사람 밖에 안 나오는데 누가 복음엔 여러 사람이 나와요. 어떤 사람은 장가간 연고로 못 간다고 누가 복음에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결국 아까 말한 소낙비를 다 비껴간다고 했든 어떤 사람도 청국에 갈 만한 사람은 이 땅에서 아무도 없다. 

(누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누 14: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누 14: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또 어떤 사람은 소를 사서 관리 하러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지요. 그래서 7절에 보면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런 일들이 땅에서는 납득이 안 됩니다. 잘못은 누가 했나? 사전에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쪽이 잘못은 해놓고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요? 상대방에게 묻지요.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게 전달 돼야 되요. 죄인 아니라는 것까지 일부러 죄인 만들어 놓고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식으로 복음이 전달 돼야 되요. 그것이 뭐냐하면 이스라엘이 나온 나라가 애굽이거든요.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려 해도 자기 마음대로 못 보내게 해요. 하나님이 그를 의도적으로 강팍케 만들어서 지금 마음 같아선 보내고 싶은데 자고 일어나니까 아침에 또 보내기 싫어지는 마음이 새롭게 생겼어요.

그것도 열 번 씩이나 기어이 그의 아들이 죽고 난 뒤에 그 때야 보내잖아요. 기어이 희생이라는 것에 관여 하도록 유도하시잖아요. 그 희생이 오늘 날 십자가잖아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 하실 때 기어이 십자가 죽음에 우리가 책임 있음을 분명하게 해놓고 십자가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대인 관계에 있어 십자가를 경유하라는 말은 어떤 경유라도 모든 것을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 나는 저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과 부부가 되게 했다. 이런 자식을 낳게 했다.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나를 통해서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필요한 조치에 의해서 적법성, 최적화 작업이에요. 가장 적합한 최적화 작업에 합당하도록 십자가 증거 하도록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본문에 어떤 사람은 소를 사고 밭을 샀잖아요. 어떤 사람은 장가를 갔잖아요. 그러면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거나 흉내낼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성도라도 인생을 다 다르게 해야 디요. 그래서 간증은 위험한 거에요. 암에 걸렸다 나은 것은 네 인생이고 나는 암 안걸이는 멀쩡한 쪽으로 부자가 돼서 죽을 때도 편안이 죽어 천국가는 것도 내 인생이고 교회에 왔더니 갑자기 자식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은 것은 니 인생이고 나는 욕만 해도 공부만 잘 하더라 이건 내 인생이고 남의 인생으로 협박 공갈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간증 설교하는 것은 그건 니 인생이고 그건 네 거짓말이고 나는 내 거짓 말 따로 있다 말이죠. 자기 인생을 소유하지 마세요. 모든 과거사는 지옥가는 노선에선 소용없습니다. 주께선 우리의 과거사는 묻지도 않고 자식 자랑 소유 자랑 보지도 않고 천국 노선에선 아들(예수) 자랑, 피 자랑 밖에는 없어요. 구원 안되도 괜찮은데 구원 되었다는 횡재이고 당황스러움, 너무나 당황스러워요.

그때는 당황하지 말~고 십자가만 증거하면 되요. 내 인생이 왜 이리 됐지? 너무나 낯선 예상치 못한 너무나 당황스러운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긴긴 과거사도 사실은 내가 산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최적화 시킨 가장 합당한 꼭! 그렇게 되어야 될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반드시 뭐를 병행한다? 전면적인 심판을 깔아 버리십니다.

아스팔트 도로 공사를 할 때보면 타르를 부어 버리지요. 주께서 심판이라는 타르를 대전 바닥에 다 깔아 버리십니다. 그 곳이 어디 든 심판을 다 깔아 버리십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와 반드시 병행되는 작업입니다. 십자가가 십자가 되기 위해서 전면적인 심판으로 깔려지는 작업이 필요한 거에요. 그 작업이 바로 인류사입니다. 모든 심판으로 포장된 인류사가 성경에 나옵니다. 요한 계시록은 심판으로 도배가 되어 있거든요.

이것을 성령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여유만만하게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이 어느 노선이냐 하면 천국 노선에 요한 계시록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자기 노선으로 요한 계시록을 끌어당겨 보니까 보면서 협박 공갈 당하며 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야!야! 몸에 인 받으면 안되는데! 666되면 안되고 777되야 되는데~” 하면서 벌벌 떨고 있어요.
 
성령의 삼위일체가 되야지! 악마의 삼위일체 되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벌벌 떨고 있어요. 요한 계시록을 보면서 초반부터 끝까지 벌벌 떨고 있어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지만 실은 벌거벗고 눈 멀었도다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하니까 안약 발라야 돼! 안약 발라야 돼! (계2: 5)에 내가 네게서 촛대를 옮기리라 했더니 촛대를 꾹 쥐고 벌벌벌 떨고 있어요. 일곱 촛대 다 옮겨졌어요.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는 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요한1서 4장에 나오지요. 벌벌 떤다는 것은 지옥 가고 있는 중이에요. 매일 같이 벌벌벌 떨어요. 내가 저번 주일 빠졌으니 이번 주에 안 좋은 일 생기겠지! 이제 수능이 10밖에 안 남았으니 정신 빠짝 차려야지! 정신 빠짝 차려서 금식 기도 들어가야 되고 행동도 조신하게 해야지 건방 떨어서 행동 함부로 해서 점수 깎이게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자기가 완전 떨고 있어요. 부적 내지는 미신인양.

(요한1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심판을 다 해버립니다. 본문에 심판을 다 한 뒤에 큰 길로 나가지요. 큰 길에서 만남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가려고 했던 사람들이요? 생각도 안 한 사람입니까? 생각도 못 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그들의 인생에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지옥에 가고 있는데 천국에서 성령이 와버리니까 노선이 갑자기 바뀐 거에요.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가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 세례 후 방향이 바뀌어 지는데 바뀌는 방향이 지옥 가는 노선을 가지고 바뀌니까 천국 노선으로 가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겁니다.

내 육신의 욕망과 충동은 자꾸 지옥으로 가자하는 구나!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 하는 구나! 이런 것을 느끼죠. 이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의 욕망입니다. 이건 억지 부릴 것도 없어요. 돌아서면 다시 욕망이에요. 성경 공부 했으니까 이번 주는 복이 오겠지라는 그런 생각. 항상 원인은 주님에게 있는데, 다 이루심에 있는데 원인을 내 행함에서 찾아서 결과를 자꾸 찾아내려 해요. 그래야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소유하고 싶은 거에요.

내 믿음 있음의 체험을 내가 훈장처럼 달고 다니고 싶은 겁니다. 철렁 철렁 북한의 아바이 수령 밑에 사람들처럼 옷이 늘어질 정도로 수 놓듯이 온 천지에 믿음 좋게 해서 얻었던 성과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요. 자기의 과거사를 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교회에서 목사에게 나가라고 하니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얼마나 새벽 기도 오래하고 교인 30명을 500명으로 늘려 놨는데 이것 밖에 안주나!” 돈 뜯어내려 하고,

“내가 이 교회를 세우는데 얼마나 새벽 재단을 쌓았는데 , 이제와서 이 만큼 키워놓으니까 나보고 필요 없다고 나가라고 하느냐!” 어떻고 저떻고 한번 실수 했는데 이렇게 할 수 있나! 자기가 평소에 설교 하면서도 자기 과거를 토대로 해서 강단에서 큰 소리 치고 자기의 카리스마를 부렸다는 것이 끝날 때, 티격태격 할 때 들통이 나는 거죠. 그냥 지금이라도 내쫓는 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입니다라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되요.

처음부터 천국은 아무생각 못한 사람이 난대 없이 뒤통수 맞은 것처럼 천국에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수가 왔으니 하나로 모아야 될 게 아닙니까? 하나의 유니폼을 입어야지요. 그 유니폼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예복. 예복을 입고 와야 되는데 그냥 불러서 내가 왔다는 식이에요.

불러서 왔다면 부른 것은 하나님 쪽에서 불렀더라도 가야지!하고 결정하는 것은 누가 한다? 내가 내 자유의지로 결심해서 내가 부르심에 순종하고 헌신 했다는 거에요. 지옥갑니다.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무엇까지 완전히 나를 잠식해야 되요?

나의 어떤 의사 결정 조차도 이 혼인 잔치에서는 일체 용납하지 않는구나! 그러면 그 방법은 인간의 어떤 결심과 결정과 헌신과 순종이라도 설교며 전도 어떤 것도 죄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뭐 밖에 없습니까? 바로 그 혼인잔치에 뭐가 중심이 되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확실히 보여주는 십자가 = 새언약으로 다 이루었다

내 살과 내 피로 언약을 위해서 너희가 하나도 예외 없이 나 빼놓고 전부다 죄인이어야 하고 12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도망가야 되고 제 갈 길로 가야되요. 제 갈 길로 가야 그 십자가와 제갈 길 간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오직 화목 제물 되시는 예수님 본인의 능력으로 건짐 받아야지 본인이 알아서 와버리면 천국 오면 내가 알아서 왔습니다가 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잖아요. 내가 알아서 온 것이 포함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러면 면류관을 안 던지겠죠. 주려고 하다가 “나도 고생 했는데” 도로 써 버리죠. 내가 얼마나 애쓰고 고생했는데, 그래서 오늘 본문과 대립되는 주장이 뭐냐하면 상급 론이죠. 반대 급부론. 보상 론.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먹힙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님 앞에 성의를 보이고 믿었던 것을 제 3의 자리에서 도로 찾아와서 주님께 기쁨이 아니고 주님을 모신 자기의 선한 행동을 바라보는 자기 욕망에 충족된 그 모습이 자기가 신앙생활하고 종교 놀이 하는 보람이죠.

칭찬 받을 게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 되는 겁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우면서도 예수 믿는 이유는 내가 힘든 만큼 뭔가 상대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주어 질것이라는 기대감, 이것이 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재단을 쌓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자기의 행함을 소유하게 만드는 악마가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태어 날 때부터 이유를 몰랐는데 십자가 지신 그 모습 앞에서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만 주님으로 드러내게 만들어 주셨사오니 모든 묻어 있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떨어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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