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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9 21:56:16 조회 : 912         
사무엘상 20강(대질구조), 마태복음 82강(수모받는 복음) 16112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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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6-12-29 19:23 
대질 구조 (삼상 5:1-3)                                                                                        대전-20강 

이근호 

 


2016년 11월 29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5장 1-3절




(삼상 5: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라


(삼상 5: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삼상 5: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삼상 5:4)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사무엘 상 5장 3절부터 4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대목은 신과 신의 충돌을 보여 줍니다. 신의 충돌이라는 것은 근원의 충돌이에요. 인간들은 개별적 사고방식 외에는 못해요. 자기 일 밖에 모른다고요. 자기 인생 밖에 모르고 그래서 넓은 대해(大海)는 볼 줄 모르고 그냥 물에 동동 떠가는 인생이고 떠가다가 늙어 죽으면, 물속에 뽀로록 빠져 죽으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그냥 살다 죽었다고 되지요.


그럴 때 방금 죽은 사람은 근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이 아니에요. 핵심에서 파편화된, 핵심에 의해서 파생된 거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인생을 살면서 진리가 어떠니 이렇게 이야기들 하지만 진리는 신이 나타나야 되지 인간이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모르니까 무엇을 진리라고 주장하냐 하면 자신의 지심을 진리 대용으로 사용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것이 진리입니까? 진심은 진리가 아니에요.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 할 테니 봐달라?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봐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할테니 용서해 주세요.” 용서는 죄가 있을 때만 용서가 되요. 솔직한 것은 용서가 안됩니다. “솔직하게 하나님!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용서가 안되요. 용서란 죄가 성립되는 곳에만 용서가 되기 때문에 진정한 용서를 말려면 죄로 다가가야 되요.


죄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냐하면 근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 지었다 죄지었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작은 파편을 죄라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우기는 거에요. 나는 죄지었다. 그 말은 이건 죄 지었고 다른 건 아닐꺼야라는 것을 전제로 하거든요.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고것만 미안하고 나머지는 미안 안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자기가 죄 지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면 그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까? 그것이 진심이고 솔직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것은 진리를 경유하지 않았잖아요. 죄의 문제는 진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진리를 통해 죄가 안 나오고 자기의 진심에서 죄가 나와 버리면 이건 뭐가 되냐하면 ‘반성’이 되어 버립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반성이라는 것은 뭐를 노리는 것이야 하면 반성 그 이후에 깨끗해진 자아상을 노리고 하는 겁니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상당히 나쁜 심보에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되지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이에요. 어릴 때 엄마가 때리려 하면 무조건 이유도 없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하잖아요. 네가 뭐를 잘못했는데 물으면 모르지요. 그냥 매만 피해 보겠다는 거에요.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그저 아픈 건 싫다는 거에요. 그게 진심이거든요. 진심은 뭐로 통하냐 하면 본심과 통하고 본심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아담에게서 나오는데


어떤 아담인가 하면 망가진 아담에서 나오는 거에요. 문제 있는 아담. 죽어 마땅한 아담. 죽어 마땅한 아담의 반복이 용서를 구한다? 그러면 그 용서를 구하는 인간은 죽어 마땅합니다. 이 논리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그냥 일괄된 논리입니다. 죽어 마땅한 것이 용서를 구하고 있어요. 살고 싶어서 그러면 죽어 마땅한 인간의 용서인데 최후에 노리는 것이 뭐냐하면 용서 받아 어디를 가려 한다? 천국에 가려한다.


그래서 인간이 천국 가겠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 짓이에요. 이건 지옥가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 것을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천국 다 버려 놓을 일 있어요? 얘들이 진흙탕에서 놀다가 더럽혀진 시커먼 옷하고 손에 다 묻히고 집에 와서 고구마 있다고 덥석 집으려 하면 어느 부모가 안 말리겠어요? 떼찌! 떼찌! 하고 어디를 먼저 가게 합니까? 화장실에 가서 손 씻게 하지요. 그런 상태로 못 먹는 다는 거에요.


용서라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의 값이 되려면 먼저 내가 죄인이다라는 쪽을 먼저 들려야 되겠지요. 어느 정도 죄인이야 하면 용서를 구할 권리도 없는 죄인이다는 곳을 들려야 되요. 만약에 용서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인 것과 상관없고 중간에 가다가 만 거에요. 가다가 자기 이기주의 때문에 만 거에요. 이것을 종교(심)라 하고 이렇게 종교를 언급한 이유가 있어요.


이것이 신과 신의 충돌입니다. 신=전체성 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것은 한 바구니에 담아 놓은 테두리를 신이라 해요. 그러니까 저쪽 다곤 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만났다는 것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은 거에요. 옛날 고대의 전쟁이 그랬잖아요. 그 쪽 대빵 나와! 이 쪽 대빵 나와서 대빵 끼리 붙어서 이긴 쪽이 다 먹기! 도박 할 때 마지막엔 몰빵 한다 하지요. 마누라까지, 자기 자존심 때문에 다 갖다 바친다 하지요.


그런데 도박도 그렇고 로또 사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무엇과 연관되어 있냐 하면 나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과시해요. 이렇게 싸운다는 것은, 경쟁 한다는 것은 밑바닥까지 나는 아직 안 죽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에겐 진심이 되고 본심이 되지요. 인간의 본심은 어디와 연관된다고 했습니까? 망가진 아담과 되어 있지요.


망가진 아담에서 뭐가 나온다? 종교(심)이 된다는 거에요. 우상이라는 것은 나를 대신하는 전체성이거든요. 나는 그런 신이라면 내가 기꺼이 그 신에게 내가 하나의 개별자로 포함 되겠다. 그리고 내가 싸울 것을 신이 대신 싸워서 이겨 준다면 그 결과로 얻어진 운명이라면 수용 하겠다. 수용할 용의가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예수님이란 분이 우리의 자존심입니까? 어떻습니까? 우리의 자존심과 연관된 예수가 되어 버리면 그건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다곤 신이 되지요. 우상이 되지요. 제 말이 어렵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동교라는 것이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교회나 성당이 뭐냐하면 다니는 종교를 내가 선택 했다는 말이죠. 내가 선택해서 다닌다는 말은 그 교회의 문제는 내 자존심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요.


다른 교회가 다 망했는데 우리 교회가 부흥된다면 괜히 기분 좋은 거 있지요. 이게 자존심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내가 밀었던 당이 잘고 내가 반대 했던 당이 안되면 살맛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단이아고 하는 것은 뭐라고 규정하나 하면 이단이란 자기의 문제 있음에 기준이 없는 것을 이단이라고 했어요. 한번 적어 볼께요.


이단이란 내가 문제 있음을 지적할 그 어떤 기준도 갖고 있지 않는 것. 내가 문제 잇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최종적인 기준을 본인이 안 갖고 있는 거에요. 이것이 이단이라면 복음은 딱 이 반대에요. 복음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항상 예수님 앞에서 나는 문제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존재와 존재로 만난 것 같으면 문제없어요. 잘해보자 둘이서 악수하면 되는 데, 예수님이 피를 흘렸잖아요.


그래서 이단 교회의 특징이 뭐냐하면 예수의 피를 항상 피해서 설교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피해서 설교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온 사람이 이 교회에서 자존감이 높아지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왔을 것 아닙니까? 역시 이 교회를 선택하길 잘했어! 이 교회 다니고 사업이 잘 되었어! 이렇게 교회를 선택하든 종교를 선택하든 선택할 떼 이 교회에서 전하는 예수 덕분에 내가 잘 됐다는 것.


그렇게 되면 나를 대체할 수 있는 나를 대신해 줘서 내 자존심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큰 덩어리, 큰 덩치에 나는 당신에게 복종 할 용의가 준비되어 있습 니다. 일종의 거래이지요. 이게 바로 종교라는 거에요. 그동안 종교나 교회에 왜 갔지요? 주여! 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을 알려고 간 거에요? 아니면 지금 보다 더 하이, 지금 보다 더 업!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하고 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더 잘 되길 원해서 갔지요.


십자가는 충돌입니다. 바로 십자가는 우리가 선택할 신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게 잘 해주고 나에게 잘해 준다는 희망을 제공한다면 그런 비전, 마지막은 천국 구원이겠지요. 나를 잘 살게 해 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 종교를 선택하겠습니다. 오직 나 하나 밖에 없기에 내가 마지막 궁극적으로 나를 포함시킬 전체성도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가 망가지기 위해서, 제가 망가지는 옳습니다는 것을 확인 하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 밖에 없는 데 둘이 나타났습니다. 둘이 뭐냐? 예수? 아니고 하나님? 아니고 그럼 삼위일체? 아닙니다. 그냥 둘이라는 것은 신이 있고 또 다른 신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아는 신이 있고 우리는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 온갖 좋은 이름 다 붙이는데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하고 삼위일체라고 하고 있지요.


여기에 새로운 신이 등장 할 때 여기는 경계선으로 등장해요. 어떤 경계선이냐? 바로 충돌의 경계로 나타나는 이것이 내가 믿던 예수, 삼위일체가 우상이라는 사실을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이것을 지적해 주는 기준으로 내 안에 이미 들어 온 게 돼야 되요. “야! 열심히 믿자!” 왜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나와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자! 왜 그게 내 죄의 본심이기 때문에.


잘 한 만큼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실 줄 아는 하나님, 기특한 하나님, 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는 그 하나님을 미쓉니다. 그냥 보통으로 믿습니다하면 태도 불량하다고 해서 복을 안 줄 수가 있어요. 미쓉니다! 미쓉~니다 스스로에게 교육이 가능하지요. 가짜 신은 되풀이 하면 그렇게 되는 느낌을 줘요. 기도 잘 안 되는 사람도 새벽 기도 나가서 자꾸 연습하면 어느 날 대표 기도도 두렵지 않습니다.


연습 얼마나 했겠어요. 안 되는 게 어딨어요. 뭐든지 열심히 하다 보면 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목사가 할 일은 다른 게 아니에요. 새로 온 교인이 기존 교인을 모방하게 시키면 되요. 닮아라! 기도 잘하는 봐라! 할 수 있다! 헌금도 아낌없이 할 수 있지 봐라! 나중엔 내다보면 안 아깝지! 자꾸 이렇게 양육을 시키는 거에요. 최고의 교육자가 누굽니까? 최고의 교육자는 목사가 되고 결국 모델이, 멘토가 누가 되겠어요? 목사 본인이 되는 거에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게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목사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 하면서 여러분! 저도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고난 주일 날 티 낸다고 나처럼 고난 받으세요. 모델로 내세우기 위해 하는 수도 있겠지만 신부들이 그런 소리 잘해요. 부족합니다~ 이렇게 하지만 그 부족하다는 사람에게 욕 해보세요. 성질 팍 내지요. 부족하다는 교양을 보여 주는 거지요.


이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스킬, 종교적 기술을 보여주는 겁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똑 같아요. 천주교나 불교나 기독교나 보면 하는 행세가 똑 같아요. 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는 거에요. 교육을 제대로 받으려면 교회라는 것은 단절이겠어요? 연속성이겠어요. 이러져 있겠습니까? 끊어져 있겠습니까? 교육이 되려면 이어져 있어야 되겠지요.


이러진다는 것은 끊어짐이 없습니다. “뭐 해봐도 소용없는 것을” 이게 아니고 악바리 근성을 유도 해 낼 수가 있어요. “여기서 무너지면 안돼! 7번 넘어져도 의인은 8번 째 일어난다. 내가 오기가 있지! 여기서 좌절하면 안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지가 되요.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신앙생활 했습니까? 더 높은 곳을 향하였습니까? 제 주제를 알게 하옵소서! 였습니까?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주어진 주제조차 다 감당이 안되는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인 것을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데 그것을 알게 해달라는 거에요. 그것을 해서 믿음이 더 증가 되는 게 아니고 이미 놓여져 있는 상태에 있는 미진한 더 주께 감사를 드리게 해 달라는 거에요. 찬양하면 하나 더 주고 찬양하면 하나 더 주고 개에게 먹이 주듯이 더 주는 게 아니고 이미 넘치도록 있어야 될 감사와 감격과 고마움에 대해서 보다 많이 그 깊이와 높이와 사랑의 넓이를 만끽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누구의 사랑 말입니까? 자기가 주님을 섬기는 사랑 말고 자기가 좋아서 찬양하는 거 말고 섬기던 안 섬기던 이미 와 버린 이미 그 안에 놓여 있는 주의 거저 주시는 용서에 대해서 감사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죄라는 것은 근원과 매치가 돼야 되겠지요? 근원은 용서거든요. 죄를 알려면 죄를 알고 용서를 받는 게 아니고 뭐부터 알아야 되요? 근원인 용서부터 알아야 되지요.


그러면 용서가 뭐냐하면 유월절 어린 양,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를 알고 이젠 됐다가 아니라 십자가를 알고 그 용서의 깊이와 넓이가 점점 더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를 더 알아가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몫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었으니 됐고 이젠 부활로 나아가자! 이게 아니고 알았으니까 앞으로 더 전진해서 한 코스 더 나아가야지! 이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있는 자만이 십자가의 깊이를 더욱 감격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 밖에 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십자가 안에 안 들어 가봤기 때문에 십자가를 관람하고 구경하지요. 여행가서 “자! 여러분 여기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이고 빨라 빨리 봤으면 다음 장소로 가자! 여기는 부활하신 곳이고 빨리빨리 보고 점심 먹자! 점심에 잡채 나온 단다!” 이런 수학여행 가듯이 그냥 훑어가는 거에요. 인생을, 자기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내가 아는 범위에서만 감사하는 겁니다.


개별성은 녹아지지 않았어요. 용광로 속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같이 자기가 녹아져야 되는데, 심판에 녹아져야 되는데 십자가가 주는 심판에 녹아지는 것은 자존감, 자존심 이런 것들이 죄와 잘난 나에서 죄인으로 녹아져요. 내가 잘난 체 했을 때 죄와 의 그런 판단이 아닙니다. 내가 죄와 의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고 나는 잘났고를 전제로 하고 이건 악, 이건 선, 이렇게 선악 체제로 이야기를 하지만


십자가 안에 들어가 버리면 나에게선 선이 있을래야 있을 수 가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용서 사건이 먼저 터져 버렸으니까, 용서 사전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죄인으로서 내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그러면 누가 푹 쑤시면 누구만 자랑하겠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게 갈라디아 6장에 나옵니다.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니 또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에요. 6장 14절에 십자가 ‘~외‘라는 말을 쓸까요? ‘외’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이것도 자랑해야 되고 저것도 자랑해야 된다는 것은 십자가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자랑하고 부활도 자랑하고 이게 안 된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승천도 자랑하고 예수님의 재림도 자랑할거야가 안되요.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의 존재도 자랑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나는 십자가 말고 성부 하나님을 자랑할거야 이것도 안돼요. 성부 하나님마저 십자가 자랑하라고 언급하기 때문에 두 개를 놓으면 안돼요. 하나 뿐 이에요. 삼위일체는 세 개라서 문제가 되요. 성부를 존경하면 성자가 삐지고 이러면 안되고 인간의 생각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항상 의식이 하나에만 몰입하게 되어 있어요. 두 개를 자랑한다는 것은 사실은 본인 모르게 본인이 거짓말 하고 있는 거에요.


두 개를 자랑할 수 없어요. 얘들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물을 때 그 말은 맞는 말이에요. “나는 아빠 엄마 다 좋아!” 그렇게 말하는 애는 천잽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순서가 있어요. 먼저 좋은 것이 있어요. 나는 자식이 열이 있어도 다 이쁘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더 좋은 자식이 있고 미운 자식이 따로 있어요.


강의 다시 해 보겠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전체성이라고 했지요. 전부를 대표하는 겁니다. 신과 신이 충돌을 일으켰다. 신들의 전쟁이지요. 신들의 전쟁에선 누가 빠지겠어요? 애들은 가라!에요. 인간들은 빠져야 되요.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중요한 대목인데 네게 성령이 임하고 네가 구원을 받은 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이것은 마귀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여자의 후손이 이긴 효과가 바로 성령이 예수님에게 속한 자에게만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가 그런 뜻이에요. 성령은 선물이거든요. 그것을 은사라고 해요.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선물을 주셨으니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것에 대해서 제가 해석을 해 드렸습니다. 믿음을 까보면 껍데기, 포장지는 믿음인데 속을 보면 사랑이 들었고 껍데기는 소망인데 꺼보면 사랑이 들었고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끌려가는 거에요. 어느 쪽으로 사랑 하나로 믿음 가진 사람도 “믿음 가졌다!” 가 아니고 믿음이 사랑 쪽에 통합되라고 끌고 가는 거에요.


“나 믿음 있으니까 됐습니다.” 하면 그 자리 아니고 믿음의 내용이 사랑이라는 중심으로 끌고가고 소망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서 잘되고 자식 잘되는 소망을 가졌다가도 십자가만 소망이지 다른 것들은 자랑거지가 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쪽으로 성령의 선물로 이끌리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자랑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거에요. 그 당사자는 부담이 되요. “너는 가문의 영광이다.”하면 자식들이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겠어요. 속으로 “그건 아버지 생각이고요.” 또는 자식이 “저는 결혼해도 엄마, 아빠만 섬길께요.”하면 어마, 아빠는 속으로 네가 아직 여자를 안 만나서 그렇지! 여자 생기면 경제권까지 다 줄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엄마, 아빠 모시는 것도 자기 아내 눈치 봐야 하는데 아직 철이 없어 모르는 거지!


사람을 믿지 말라 했거든요. 성경에 네가 군대를 믿지 말고 병거, 말을 믿지 말고 무기를 믿지 말고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여호와 이름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개입되는 전쟁은 없어요. 이 세상은 감옥과 같아서 잘되든 못 되든 관계없이 철장 안에 있어요. 여기서는 잘하든 못 하든 죄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어차피 죄 밖으로 못 나가면 아무리 자기가 잘났다 으스대도 결국 그 자체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지옥에서 동냥하고 국회의원 했다고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필요 없어요. 자랑하려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옥에서 벗어 난 입장에서 이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어떻게 전쟁해도 이길 수 없었는데 주님께서 악마와 전쟁해서 승리한 덕분으로 내가 승자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자랑을 하면 되는 겁니다.


아까 다곤 신과 여호와의 만남에서 제가 꼭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바로 경계선으로 나타난다는 것. 왜냐하면 사람들은 내가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 선택 하는 것이 아니에요. 부처나 예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건 전부 다 부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 해도 예수님의 존재와 나 사이에 나의 선택성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했다는 거에요.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선택 했다는 거에요.


혹시 내가 잘될까 싶어서 믿어 믿기를 잘했다. 이렇게 되어 버려요. 자기 선택의 가치가 있어요. 그러면 마치 우리가 친구를 선택하는 것과 똑같이 되어 버려요. “나는 저 동창생 중에 저 친구를 사귀길 참 잘했어!” 정말 평생 친구야!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선택한 친구를 자랑하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구 자랑하는 거에요? 자기 자랑하는 겁니다.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나오고 교회에서 학습 받고 물뿌리고 자꾸 성만찬 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랑할 것을 더! 더! 더! 계속 모으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게 성립이 안되고 이것도 자랑하고 저것도 자랑하고 이렇게 되어 버려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곤 시과 여호와 신의 만남에서 충돌이라고 했는데 여러분이 언약궤와 다곤 신이 만났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왜냐하면 언약궤는 그냥 상자이고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도 무시하고 블레셋 사람도 무시했어요. 무시했는데 어? 상자 앞에서 다곤 신상이 무너졌잖아요. 다곤 신상은 마치 모습이 인어 공주 같아요. 상체는 인간이고 아래는 꼬리와 비늘이 있어요. 저 깊은 바다의 전설 속 인어 공주 드라마 있잖아요. 푸른 바다의 전설인지 있어요.


그런데 언약궤가 참 신기하네! 이러면 안된다니까요. 언약궤를 신성시 해버리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 언약궤를 어떻게 하십니까? 자진해서 불태워 버려요. 언약궤를, 영화 레이더스에 보면 언약궤가 숨겨져 있다 해서 독일군들이 찾으려하는 주인공이 헤리슨 포드이고 1~4부까지인가 있어요. 성궤를 열 때 빛이 나와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해골이 되는 그래픽 처리된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나거든요. 무섭긴 무서워요. 죽은 웃사를 묘사했는데 상자는 그냥 상자일뿐입니다.


언약궤가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건 언약궤가 효과가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이 효과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신비적인 것을 대입시키는 우상성을 아직도 대입시키고 있어요. 이건 블레셋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에 자꾸 신비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을 뜻하냐 하면 이건 어떤 물체거든요. 물체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 자신의 신체에 신기한 효험같은 것, 신기한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은 우상적 사고방식입니다.


기도를 할 때 손을 이렇게 모아야 합니까? 아니면 손을 요렇게 모아야 합니까? 예전에 버스를 타게 되면 ‘오늘도 무사히’가 써 있는 옥색 드레스를 입은 서양 소녀가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림 붙어 있는 거 봤지요? 만약에 그 드레스가 옥색이 아니고 자색이었으면 효과가 있겠습니까?


신체라는 (물질성)에다가 + 신기함(영혼성) = 인간 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체는 흙이 되고 영혼은 하늘로 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를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는 위에서 성령이 오면 성령에 포집되면 포함이 되어 버리는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분명히 나와 있잖아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왜 하늘나라를 자꾸 우주선 쏘아 올리듯 발사 된 로켓 부분 떨어지고 캡슐만 우주 궤도로 올려 지듯 생각하는 거에요. 신기한 기적을,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래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믿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교회 10년 다니면 남들은 기도하면 병 낫는다는데 왜 나는 안 되나? 매일 교육 받고 양육 받고 있는 거에요. 자기의 몸을 뭔가 강하게, 힘들게 하고 짜릿하게 만들면 뜨거움이 생긴다? 그건 심리적으로 가능하지요. 매 한번 맞아 보세요. 뜨겁지. 우리의 신경 조직은 정신적으로 집중하게 되면 거기서 열이 나게 되어 있어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河事不成)말이 있잖아요. 정신을 하나로 모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이종에 자기 최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거하고 성령하고는 관계없어요. 성령은 반드시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다시 말해서 언약의 내용을 고지하고 알려주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는 것이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허경영이에게 배우고 있어요.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바라봐!~ 자기 눈을 바라보면 공중에 뜬다는 거에요. 허경영이 찍어 줄 걸 그랬나? (웃음) 최면술 거는, 대통령 후보 허경영(웃음). 이러한 언약에서는 뭐가 나오냐 하면 역사가 나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서사 구조라 해요. 서사( Story )가 나옵니다. 각 신마다 스토리가 나와요. 이것을 수요 예배에서 예를 들었는데 두루마리 화장지라고 했습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고양이나 아기가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면 줄줄 풀리지요. 신은 그 자체의 스토리를 뱉어 내게 되어 있어요. 실을 뽑아내듯이, 어떤 특정 물체를 만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아! 언약궤가 하나님이다!” 언약궤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궤 다음에 뭐가 나오냐? 연이어서 이스라엘 역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언약궤와 다돈 신이 만남으로 다곤 신이 부서졌다. 끝이 아니에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서사 구조가 이어 지듯이 십자가 사건이 끝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으로 반복해서 몰아세우는 새로운 서사 구조가,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언약의 역사이지요. 거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잖아요.


십자가 현장에는 강도 둘만 있었어요.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종결 된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죽었고 그 옆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거 아니에요. 십자가는 십자가 사건이 살아 있는 거에요. 십자가 사건이 본체라면 거기서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사건이 풀려 나오는 데 그리고 난 후 몇 년 뒤에 예수님이 들이 닥치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이 새롭게 없는 데서 새로 생겨 버립니다.


새로운 시· 공간이 생기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도 생겨 버려요. 첫째 날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 여섯 째 날에 아담이 생기잖아요. 시·공간이 먼저 있고 나오듯이 예수님 십자가 중심의 새로운 시· 공간이, 성령 안이 있고 난 뒤에 그 공간을 채울 하나님의 백성들, 천국 백성들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성령은 창조에요. 옛날의 창조는 없는 데서 만들어 졌지만


지금 새 언약의 창조는 죽은 죄인을 의인으로 부활시키는 창조. 내 안에 누가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래서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애서 복음은 신이 만든 내가 되지만 종교는 신을 가진 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든 내가 누구의 것이 되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했잖아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의 것인데 신을 가져 버리면 신과 동업자가 되어 버려요. 동업자가 되면서 신을 내 뜻대로 다루려고 해요. 그야말로 신을 시다바리로 여겨요.


신 앞에서 자기가 갑질 하려고 설쳐대는 것과 같은 겁니다. 자! 서사 구조를 이야기 했는데 언약궤 앞에 다곤 신상이 있지요. 여기서 각각 역사가 나오지요. 그러면 이 역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이 블레셋을 이겼다를 증명해줄, 확인 해줄 역사가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둘 사이에 역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둘 사이가 티격태격 충돌될 전쟁의 역사가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다곤 신은 보이지만 상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보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우상성을 갖고 있는가를 오히려 들추어 내기위한 일종의 덫 같은 거에요. 언약궤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홉니와 비느하스 같이 착각하는 거에요. 언약궤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묻지 마시고 언약궤 앞에서 블레셋이 어떠한 식으로 태도를 보이는가 한번 보라는 거지요.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 역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본인이 블레셋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본인이 나서서 알아서 챙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가는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만든 이유는 인간들이 왜 안 되는 지? 아담은 왜 안 되는지? 왜 인간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전쟁인 것을,


왜 천국이나 지옥 가는 것은 본인의 결정이나 결심에 의해서 운명이 확정되지 않는가를 계속해서 우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무슨 구조냐 하면 대질 구조라 합니다. 항상 성도가 성도다운 것은 내가 예수 믿습니다라고 해서 성도가 아니라 복음 안다고 까불어서 가만히 보면 이단이다. 십자가 만이라고 우기는데 가만히 보면 이단이다. 십자가를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노림수가 있어요.


십자가 덕분에 천당 가겠다는 노림수 그것은 이단입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강조 한 것이 있지요. 성경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 않는 것을 강조했지요. 나에게 영생 안 줍니다. 그런 성경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 줄 자는 주님이 따로 만들어요. 따로 만들어 놓고 그게 우리인데 독자적인 우리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 만들어요.


나에게 영생 주지 않고 영생 줄 사람은 주님이 알아서 만들어 놓고 계속 영생을 주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전에는 “나 영생 얻어야지! 예수 믿고 영생 얻어야지!”라는 것은 발길로 차입니다. 그 발길질에 동원된 자가 있었으니 그것이 누구인가 하면 악마, 마귀지요. 마귀는 항상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영생 얻을 놈이 그런 짓해서 되겠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우리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게 하지요.


말씀을 가지고 “꼴좋다! 성도란 것이 이런 취급을 당하니, 이게 성도야?” 하면 “ 그래 정신 차리고 성화해야지!” 이럴 때 적당한 말씀이 있지요. 바로 로마서 8장에 누가 너를 정죄 하리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되고 하는 것은 이것을 알아야 되요 언약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항상 과정을 거쳐요. 죄인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피. 이것을 거쳐야 해요.


우리가 단독적으로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묻는 사람이 잘못된 거에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이지 딱 집어서 나에게 너 뭐야? 하고 물으면 안되요. 우리는 내가 ~뭐야?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를 성도는 그렇게 물어야 되지요. 너는 앞으로 뭘 할거야? 그리스도를 증거할거야! 이렇게 되야지 “너 뭐야” 나 아무것도 아니야 나 박스야! 언약 박스야!


언약 박스면 효과 있겠네? 아니야 불태워 져야 돼! 주께서 날마다 나를 죽여 버려! 사람이 물체가 되어 버리면 나름대로 서사 주조가 나로부터 나와야 되요. 나는 일곱 살 때 유아 세례 받았고 10살 때 뭐했고 스무 살 때 뭘 결심했고 나의 스토리가 나와 버려요. 제가 문학가를 안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 스토리를 남에게 왜 이야기 하냐 말이죠. 정신 상태가 싫은 거에요. 물론 술 담배 하는 것도 싫지만 담배 물어야 뭐야 작품이 되는 줄 알고 하는데


담배피면 몸에 해로와요. 소설가라고 해서 몸에 좋은 거 아니에요. 멋있어 보이는데 복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대질 구조가 형성이 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의 원수를 항상 마주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세요. 주의 원수가 뭐냐 하면 단독적으로 자기 가치와 자존감을 내세워서 찾아온다. 다곤 신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같이 어울리고 너무 마음에 들어 합니다.


하지만 짧은 어느 순간에 갈 길이 달랐다. 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7-01-06 22:32 
수모받는 복음 (마 22:13-21)                                                                                    대전-82강 

 이근호  

 

2016년 11월 29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2:13-21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들어 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마태목음 22장 13절입니다. 시작이 원래 이 사람들이 혼인 잔치에 가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고 혼인 잔치는 일방적으로 임금이 만들었어요. 초대받은 본인들이 가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길에 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참석하라고 했는데 길에서 데려오는데 처음에 예복 입으라는 조건이 없었어요. 그래서 참석해서 밥이나 먹을까하고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냐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니까, 그러면 다시 길로 내 보내면 되잖아요.

 

“나가! 나가! 다시 길거리로 나가! 너 초대한 것 무효.” 그러면 될 것을 새로운 조건을 내세워서 이 사람들을 작살내 놨어요. 결박해서 어두운 데로 내던진 겁니다, 차라리 길에서 놀 때가 좋았어요. 그냥 놀면 결박당할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괜히 불러서 호강 시켜 주는 척 하면서 사전에 없던 약속을 들이대서 결박해버리면 도대체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하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는 말은 우리가 모르는 조건들이 따로 주님에게 있는데 그 조건을 언제 아느냐? 너희가 혼나봐야 안다는 거에요. 아니면 최종점에서 안다. 그러나 안 경우에는 이미 모든 것이 판정이 끝난 상태겠지요. 안 다음에 후닥닥 살 궁리를 찾을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완결된 상태에서 천국의 내막이 밝혀 진 거에요.

 

그러면 최종적으로 결판이 난 이것이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의’라면 여기 오기까지 모든 과정은 뭐가 되겠습니까? 악이 되겠지요. 바로 죄가 되는 거에요. 이번 강의에서 이것을 설명하려고 해요. 뭐냐하면 왜 하나님은 악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는가? 어거스트라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사람들이 묻기를 왜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세상은 악한 자들이 활개를 치고 나쁜 군주가 설치게 하냐고 하니까

 

어거스트가 말하기를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이 된다. 그러면 악은 뭐냐? 악은 있는 게 아니고 (마이너스)선이 악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선, (+)선 이 선이고 (-)선이 악이다라는 말은 악은 선이 미흡한 것, 선이 모자라는 것이 악이다. 이렇게 말한 거에요. 선이 모자라는 것이 악이 된다면 여기에 뭐가 생기냐 하면 연속성 또는 영속성이 마련되어 버립니다.

 

악한데서 조금씩, 조금씩 자기 변화가 일어나면 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라는 거에요. 악을 떨어내게 되면, 일종의 표백 작용이라는 거에요. 세탁기로 한번 돌리는 것보다 두 번 돌리는 것이 더 하에 지듯이 조금씩, 조금씩 표백작용 한다는 거에요. 그러려면 내 안에 선이 있어서 선이 악에게 둘려 쌓여서 숨이 막혀 있는데 악을 조금씩 끌어내게 되면 선의 범주가 악이 차지하던 영토를 넓혀 버리면 그 사람은 갈수록 성인군자가 되지요.

 

성자가 될 수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겁니다. 이것은 도덕人 또는 착한 사람, 이런 식으로 여러 분들이 성경을 보고 있어요. 이렇게 보려면 내 속의 악이 무엇이며 선이 무엇인가를 내가 구분해야 되고 악은 멀리 해야 되고 선은 가까이 해야 되겠지요. 거기에 성경 말씀을 다 동원시켜야 되요. 예를 들어 누가 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오지요. 너도 가서이와같이 하라해서 자비를 베풀어라 할 때 자비를 베풀어야 되요.

 

자비를 베푸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하루에 몇 시간을 베푸느냐? 그리고 그 대상이 이웃인데 이웃이 자기 주변에서 몇 미터까지를 이웃이라 보느냐? 바리새인이 질문한 것처럼 똑같이 해야 되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을 또 다시 해야 되요. 이웃이 있으면 그 다음엔 사랑하면 되니까. 자비를 베풀면 되니까.

 

그런데 자비를 베풀고 난 뒤엔 자기 반성에 들어가요. 그게 자비일까? 70% 자비일까? 80% 자비일까? 자기가 베푼 자비를 측정에 나섰습니다. 이런 것이 다 양적 개념을 동원 할 수밖에 없어요. 이만큼? 이만큼? 더 많이? 이렇게 양적 개념이니까 나중엔 악한 일을 하게 되면 돈의 액수로 자기의 미흡한 것을 채우려는 유혹을 받게 되지요. 나쁜 짓 한 만큼 돈으로 때우려 한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헌금을 갑자기 헌금을 많이 하는 이유는 자기 양심에 걸리는 것이, 처리 못한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거에요. 미납금이 많은 거에요. 그것을 한꺼번에 밀려 놨다가 외상 처리 했다가 한꺼번에 돈 많이 벌어서 “주님!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하면 만족 하시겠어요? 내가 이 정도에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청년이 천원 내면서 나 이 정도에요라고 안 하지요.

 

그런데 삼성이나 재벌 정도 되는 사람이 1억 내 놓으면서 나 이 정도에요 하며 낼 수 있겠지요. 이것은 천국과 관계없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천국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저 멀리의 먹구름을 내가 Come on, Come on 한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시커멓게 몰려오잖아요. 그렇게 천국은 몰려와요. UFO가 떼로 오는 것같이 비행접시 한 편대가 오듯이 그냥 와서 폭격을 해버리는 겁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때, 우산도 없는데 소나기가 오면 하늘 탓을 합니까? 자기 탓을 합니까? 자기 탓을 해요. “아휴! 오늘 일기예보 보고 나올 껄! 우산 챙기는 걸 잊어 바보같이 아이고!” 자기 탓을 하잖아요. 이것은 천재지면에 관여를 못함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요. 천국은 그와 같은 거에요. 내가 천국 잔치에 왔다가 쫓겨 나갈 때도 임금을 탓해선 안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천국을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아까 제가 먹구름 이야기 했지요. 먹구름처럼 몰려온다면 만약에 먹구름이 오듯 50대에 위암이나 갑상선 암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받아 들여야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위암 걸리고 천국가는 거에요. 신이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면 지옥가는 거에요. 왜 천국은 이렇게 악을 용납 하느냐 하면 선악 구조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혀 있어요. 끊어져 있어요.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선악구조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산악 구조의 모양새로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선과 악하고는 전혀 모양새가 다른, 구조가 완전히 달라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이 따로 있어요. 섞이질 않습니다. 선한 쪽으로 서면 점점 선해지고 악한 쪽으로 가면 점점 악해집니다. 그런데 천국의 생명나무는 선악 구조에서 악의 모습으로 등장해 버려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미 그 전제를 인간이 아는 악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선의 모습으로 나와 버립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럴 수 없느니라’는 반발을 유도하는 식으로 천국이 와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들은 “그건 아니지요!” 어떻게 용서가 무차별이냐는 말이죠? 하늘에서 눈이 내릴 때 눈이 막 내려오다가 “저 인간 더러워서 안 되겠다. 피해 가아지!” 이렇게 하는 것 봤어요? 이 땅에 어떤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함박눈이 내리잖아요. 그렇게 용서란 무차별이에요. 인간을 보고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용서 받은 자를 잡고 아무리 따져 봐도 둘 사이에 차이는 없습니다. 용서 받을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요. 그것을 오늘 천국 비유에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함박눈 맞았느냐?”하면 그런 조건 없었잖아요? “눈 안 맞았구나! 그럼 지옥 보내야 돼!” 이런 거거든요. 하나님께서 무차별로 준 것에 대해서 우리 같았으면 “아휴! 그 때 예복 입을 껄!”

 

그런데 예복 입을 껄이라는 조건이 성립이 안되요. “그 때 예수 믿을 껄!” 이것이 성립이 안 된다고요. 왜? 믿을 만한 것 같았으면 왜 안 믿었겠습니까? 입을 만 했으면 왜 안 입었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입을 이유가 하나님 쪽에선 있겠지만 인간 쪽에선 이유가 없어요. 민수기 21장에 보면 놋 뱀을 들었다고 했잖아요. 하필 왜 뱀 지팡이냐는 말이죠.

 

놋으로 뱀을 만든 이유가 뭐냐하면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들리는 모습이 인간들이 전부 싫어하는 멸시하는 그 모습인거에요. 놋뱀의 모습이, 불평하던 사람들을 물었던 불 뱀은 사실은 하나님의 전령들이었습니다. “쉬익! 물어라!” 주님이 키운 새퍼트였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놋뱀을 쳐다 본 사람도 있고 안 쳐다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안 쳐다 본 사람들에게 “ 넌 왜 안 쳐다보냐?”고 시비 걸지 마시고

 

쳐다본 사람에게 왜 쳐다보냐고 물어봐야 되요. “저는 뱀에 물려도 마땅합니다.” 이런 자만 챠다 보는데 이런 마음이 기적이잖아요. 주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면 쳐다볼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 흘렸다. 예수님 믿어라! 믿는 사람이 이상하죠. 왜 십자가 피 앞에서 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이 돼버리거든요.

 

인간은 자존감 때문에 사는데 십자가 앞에서 자존감을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그것은 나는 고유의 가치가 있다라는 뜻이거든요. 내가 너보다 못하지 않다는 그런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됩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고백 밖에 안 나온다는 말이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하는 것이 신기한 것이지 “너는 왜 나처럼 말 안해”라고 옆 사람을 다그칠 문제가 아니잖아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이런 질문은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중국집에 가서 족발 먹을래? 있지도 안는 것을 왜 시킵니까? “안 먹을래! 난 죽어 마땅해!” 이건 중국집에서 할 소리가 아니지요. “손님! 뭐 드시렵니까?” 하면 “난 죽어 마땅해요. 저는 죄인입니다.” 이건 주방장에게 할 소리가 아니잖아요.

 

남들에게 대하는 태도와 십자가 앞에서의 태도가 달라야 되요. 남은 비교 대상이 안돼요. 싸울 필요도 없어요. 왜 지옥 갈 사람들하고 비교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영적이지 싸울 필요 없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나의 진짜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에 오늘도 죄인을 이렇게 살려 주셔서 감사 하지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 구조 속에 의인 되시는 예수님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들어오시니까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선악과를 범하므로 생명 마무를 못 따벅게 되버렸지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문제없는데 어디에 문제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문제 있지요. 문제 있는 인간에게 생명나무가 들어 왔을 때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단절되야 되는 단절성이 선악 속에서 선악 구조의 모습으로 단절돼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아는 선악 주조에서 예수님의 선악은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겁니다. 이미 들어온 생명나무로 그 모습 도 생명나무의 모습으로 선악 구조의 체제 속에 주님 자신을 맡겨 버렸습니다. 너희들이 아는 선악 구조로 나를 한번 다루어 봐라! 그러면 뭐가 나오냐 너희의 선악 구조가 왜 천국에 갈 수 없는 악마적 사고방식인지를 나를 통해서 그것이 노출 될 것이다. 발각 될 것이다. 알려 질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선악 구조 자체가 악이 되는 데 오토 파지( autophagy :자가 포식)현상(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인체가 스스로 죽은 세포는 없애고 살아있는 세포는 에너지를 내도록 하는 현상 즉, 세포 내 소기관의 하나인 리소좀이 다른 단백질을 분해해 영양분으로 재이용 하는 현상 이 연구 덕분에 파킨슨이나 알츠하이머와 같은 신경 난치병과 암, 당뇨 치료에 향후 상당한 도움과 성과과 있을 것이라 예상함)라는 말을 여러분은 못 들어 보셨을 거에요.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일본의 교수(오스미 요시노리)가 주장했던 것인데 효모의 세포 안에 액포라고 있는데 액포 말고 리소좀이라고 있어요. 리소좀은 세포내의 불순물을 처리하는 청소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쓰레기(세포)를 분해하는 효소가 있는데 예전에는 리소좀이 어떻게 청소하는 지 메커니즘을 밝히지 못했어요.

 

그런데 오토파지(자기소화작용)는 세포 구성 요소의 파괴와 재활용에 질서를 제공합니다. 이 과정동안, 대상 세포질 구성 성분은 세포내이 다른 성분들과 격리되어 이중 막에 둘러싸이는데 이를 오토파고솜(자가소화포)라 한다합니다. 자가 소화포는 그 이후 라이소좀과 융합하고 내용물들은 분해되어 재활용됩니다. 이렇게 밝혀진 것이 왜 노벨 상 감이 되느냐? 이것을 그동안 왜 몰랐냐 하면,

 

외부에서 영양분이 공급되는데 세포는 영양분이 차단된 후에는 안에 있는 쓰레기(죽은 세포)를 자기가 스스로 자가 소화, 스스로 소화시켜서 영양분으로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필요한 유전자 DNA 정보에서 치매 환자에게 조정해서 쓰레기 활동을 활발히 시키면 치매 환자나 암 환자가 자체적으로 세포 내에서 청소를 한다 던지 아니면 암 세포내에 청소 기능이 없으면 청소를 해야 세포가 확장을 하는데 청소 기능을 없애 버리면 암 세포가 죽어 버리죠.

 

그러면 암 치료가 되는 거에요. 그것에 관한 이론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거에요. 이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면 쉬워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언약은 반드시 언약을 앞장세운 하나님이 언약이 완성 될 때 의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의는 언약이 완성 될 때 생긴다 했는데 누이 생각에 의 만 생기는 줄 알았더니 언약 입장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악도 같이 생겨요. 죄도 같이 발생 됩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하나님이 등장해야 거기에서 우상 다시 말해서 악마의 뱀의 정체가 드러나요. 뱀이 악마가 아니고 뱀의 후손이 악마입니다. 이건 어려운 이야기인데, 왜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인 것처럼 이브의 후손이 메시야인 것처럼 이브를 유혹했던 뱀의 후손이 바로 악마입니다. 따라서 악마를 만들어 내는 드러내는 작업이 악마도 피조물이니까 악을 만들어서 언약에서 발생되는 악을 언약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복함으로써 완성이 되고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이렇게 의가 되면 성도는 뭐가 되냐 하면 자체적인 의가 필요치 않아요. 내가 행위로 얻을 의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게 해도 죄가 되고 왜냐하면 이미 언약 안에서 발생된 새로운 의가 두 번 다시 천국에서 쫓겨 날 일이 전혀 없는 영원토록 의에 합당한 축복을 받는 주님의 의의 혜택 자가 되는 의의 생산자가 되는 겁니다. 의를 생산 하시는 분의 생산물. 생산물이 뭐냐하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들어 내는 죄가 있고 악마에 의해서 된, 그것은 언약에 의해서 밝혀지고 언약에 의해서 생산되게 되어 있어요. 그 쓰레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을 따라 뒤 따라 와서 그것을 스스로 파괴 시키는 작업을 해서 승리 하지요. 승리를 하게 되면 그 결과로 의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신 주동자인 예수님을 주체자를 영원토록 찬미하는 영역을 천국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천국은 뭐 없이 안된다? 언약 없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여호와의 뜻이 뭐냐하면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6장을 한번 봅시다. 우리가 어릴 때 하던 1234숫자 써놓고 하던 놀이 있지요? 사방치기. 먼저 뒤돌아서서 돌을 던지잖아요. 그렇듯이 언약을 먼저 던져 놓고 언약을 주우려 가는 거에요.

(출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 6:4)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언약을 던진 분과 줍는 분이 이미 창세전에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어요. 성부와 성자끼리 ‘주께서 내 주에게’ 그래서 던지는데 악마도 필요하고 선악과도 필요하고 아담도 필요하고 해와 달도 필요하고, 그런데 과학자들이 어떤 면에 무시 하냐하면 해와 달을 연구하고 달을 연구하지요. 그런데 달이 왜 있어야 되는가? 해가 왜 있는가를 몰라요. 철학자들도 몰라요.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을 놀립니다. “너희가 해를 연구하고 별을 연구하는데 달과 별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대봐라!” 모르지요. 철학자들은 놀립니다. “너희가 별을 연구하면서 별이 왜 있는가를 모르는 이유는 바로 네가 왜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너는 네가 왜 있는지 아냐?” 몰라요.

 

그래서 과학자와 철학자가 합의를 봤습니다. 이것을 학문의 통습이라고 해요. 인문계와 자연계를 합해서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의 지혜를 찾아내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된다. 통습의 원리에 의한 결론이 이렇습니다. 인간이 왜 있느냐? 이 세상이 저절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고백하라고 진화의 마지막 시점에 인간이 만들어 졌다. 이렇게 되요.

 

인간은 세상의 밀도가 강렬해져서 하나의 작은 원 세포가 되는데 그것이 수억 년 동안 진화된 결과가 인간이고 인간은 먼별을 쳐다보면서 내가 있기까지 오랜 시간 이런 과정이 있었구나!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주는 스스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진화해 왔다. 이것이 오늘날 학문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답이 만족스럽습니까? 이것이 불교 사상이지요.

 

왜 이렇게 억지스러운 논리로 결론을 내리냐 하면 창조를 비껴 가려고해요. 반드시 창조가 성립되려면 여기에 누가 있어야 되냐하면 창조주가 있어야 되요. 그러면 옛날에는 창조주가 종교와 관계없이, 예전 사람들은 조물주라 했잖아요. 그 조물주가 있다는 게 왜 그리 신경 쓰이냐는 말이죠. 그냥 있다 하면 될텐데, 문제는 창조주가 창조를 했다 해버리면 근대인과 현대인의 의식에 안 맞아요.

 

왜냐하면 근대인은 자기 밖에 모르거든요. 자기 밖에 모르는데 신이 창조했다 해버리면 굴종이 돼버리거든요. 운명아 비켜라! 이렇게 되어 버리는데 운명아 시키는 대로 할께! 이렇게 되면 역사를 부흥시키는, 역사를 더욱더 가속화시키는 에너지를 인간 내부에서 뽑아 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게 팔자인데 뭐! 이렇게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다시 구석기 시대로 퇴행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전거 패달을 밟아야 되잖아요. 앞으로 앞으로, 가 봐야 죽음인데. 어디로 갈지 모르고 계속 보이저호 날리고 목성 가보고 그 다음에 토성 가보고 그다음에 명왕성, 천왕성 가보고 또 은하계 밖에 또 가보고 가면 또 뭐할 건데요. 그 밖의 안드로메다까지 가보려면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백 날 가봐야 천국에도 못 가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진작 끝내 버리지 하나님께서 질질질 끄시느냐? 예수님께서 언약대로 와서 이놈! 하고 지옥 가거라하고 불바다 만들면 되는데 왜 질질 끄시는가? 이런 게 있어요. 수모 당한 자만이 고자질이 가능합니다. 이게 뭐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어요. 이 말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십자가의 고통에 합류한 자만 예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안다’라는 것을 어려운 말로 인식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인식은 백날 들어봐도 그것에 대해 선별 작업이 일어나 버립니다. 내 몸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선별 작업을 해서 불리한 것은 기억 안하려고 애쓰고 나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이 되냐 내가 우상이 되어 버려요. 내가 나에게 신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당하는 수모는 나로 인한 수모가 되어버리고 나는 주님의 나라에 가는 거ㅔ 아니고 나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요. 죽고 난 뒤에 나의 나라, 내 스스로 찬미 받아야 될 그 세계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저 세상까지 연속성으로 고대하게 됩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 쯤 되면 나오는 것이 여자가 마지막 엔 원수를 다 갚아요. 원수를 다 갚고 난 뒤에 남편이 위장된 차 사고로 죽었을 때 마지막 장면이 이겁니다.

 

“여보! 이젠 내가 다 용서 했어!”라고 용서로 끝나요. “기다려요 내가 그 쪽으로 갈께!” 가로수 쫙 비추면서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내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저 세상은 내가 못 다 이룬 한이 다 이루어지는 세계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터 모든 목적과 삶의 보람이라는 게 그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이 억울함을 다 풀어줄 수 있는 이것은 자기 체계입니다. 연속성이요. 중간에 십자가는 없어요.

 

착하면서 억울함을 당했는데 신데렐라처럼 이제는 이 착함이 하나님에 의해서 드디어 공개되면서 억울했던 감정을 다 풀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받아주는 그 세계를 추구하는 거에요. 이런 사람이 주로 새벽 기도에 나가요. “주께선 아시지요. 이 억울한 마음을” 해놓고 난로 가까이 가요. (웃음) 불 쬐고 또 억울합니다. 가만히 일어나며 보니 옆에 라이벌 집사는 아직도 기도해요. 그럼 또 앉아서 주여~

 

앞에 강단에 있던 목사는 속으로 “빨리들 가줘야 되는데 연료비 많이 나올 텐데!” 하지요. 벌써 두 시간이나 때서 벌써 5만원어치 날라 갔네 하고 있고, 왜 그런 드라마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냐 하면 언젠가 내게도 맺히고 맺힌 한이 있어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선 못 푼다면 하나님께선 풀어 주실거다라는 말이죠.

 

부모 나이가 90이 돼서 치매에 걸린 자기 엄마를 20년 동안이나 봉양 했는데 그 엄마는 치매 걸린 티를 내는지 마지막에 유산 남기면서 아들한테만 다 주고 딸이 다 섬겼는데, 딸이 사위 눈치 봐가며 돈 드려서 다 돌봤는데 아들에게 만 땅을 다 주니 그 맺힌 한이 새벽 기도로 이어지겠지요. “주여! 이 한은 주께서 갚아 주시옵소서!” 예! 천국 못갑니다. 아직까지 자기에게 맺힌 한이 있다면 한 번도 십자가 앞에 자기를 비춰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죄가 주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이용당한 인생을 그동안 내가 살아왔구나! 내가 이렇게 한이 맺혀야 될 이유는 십자가 때문에 이렇게 한이 맺혀야 된다는 사실, 죄가 있는 것이 오토 파지라니까요.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인간을 스스로 죄를 재료로 삼아서 용서라는 효소를 집어넣어서 하나님만이 악마를 이겼다라는 의를 생산해 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생산이에요. 수련회에서 할 것을 미리 다하네.

 

왜 죄가 있고 왜 인생을 이렇게 골골하게 사느냐 그것은 바로 악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있는 생명나무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성도가 수모 당하는 모습은 누구 이름입니까? 오직 복음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수모이지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당하는 수모와 한 맺힘을 절대 들어 주지 않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할 거에요. 예수 이름으로 당하는 수모가 어떤 수모입니까? 그것을 이제부터 말씀드릴께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이것을 큰 교회에서 얘기 했을 때 이 수모가 바로 복음의 수모입니다. 더 나가서 교회 없이도 복음만 있으면 구원 된다. 더 나가서 목사 없이도 구원 된다 해서 이럴 때 당하는 수모가 복음으로 당하는 수모에요.

 

그럼 네가 잘나서 구원 받는가? 내가 잘났어도 구원은 안 된다. 오로지 주님의 언약 때문에, 십자가의 효과 때문에, 그래서 내가 십자가 믿었다는 것을 자랑하면 안되요. 십자가만 자랑해야지 십자가 믿는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그건 자기 자랑이 되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면서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를 벌었는데 혼인잔치의 결과나 구조의 진행 과정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에요. 임금의 독단적인 조치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스런데 이런 이야기를 누가 했다? 예수님 본인이 이야기 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핍박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나가시는 겁니다. 그렇게 협박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는 영역이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 천국의 영역이에요. 이는 제자들조차 성령 받지 않으면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 못했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되돌아 봤을 때 마태복음을 썼지 그 전에 예수님을 이해했으면 배신하고 도망치지 않지요. 아무도 이해 못 할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아담에 속한 자는 어떤 누구도 아무도 이해 못한다. 그것을 우리가 하고 있으니 감사 하지요. 22장 14절을 봅시다. 다 같이 읽어봅시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청함 숫자 = 택함 이 아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어디까지 안다? 청함까지는 알아요. 택함은 누구 소관입니까? 우리는 몰라요. 알고 싶은 우리를 택함의 자리에서 청함을 늘 죽여 버립니다. 나는 청함이 아니다 그 소리까지 진짜 택함이 와 버리면 청함까지는 안다는 것도 택함에 함몰되어 버려요. 선택되었기 때문에 청함 받은 것이라고 청함과 동시에 택함도 바로 직결되도록 안 끊어지는 그러한 의식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청함인 동시에 택함이 되는 것입니다. 청해 놓고 예복입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청함과 동시에 택함이 되지요. 그 다음 15절을 봅시다. 납세의 논쟁이 나오지요. 이 대목을 제가 좀 말씀을 드려야 되겠어요. 바리새인들의 무기가 말입니다. (말 +언어, 문자)언어인데 언어라 하면 뭐까지 포함되어 있냐 하면 문자까지 포함이 되는 거에요.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그런데 문자라고 하는 것은 문자가 먼저겠어요? 말이 먼저겠어요? 말이 먼저에요. 처음에는 상형 문자 밖에 없었습니다. 돌에 새긴 다든지 하는 그림 문자 밖에 없었지요. 인간은 말을 하게 되어 있고 말을 남기기 위해서 문자화 하는데 남긴다는 말은 결국 역사에 나타날 소지가 있고 역사가 되어 버리면 여기서 권력이 생겨요. 오래된 권력에 뒷사람이 종속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집단화가 되요.

 

우리가 왜 모였지? 아! 처음에 계주가 대전에서 모이다가 서울로 이사 갔지! 아하! 그때 우리가 살았던 대전에 계주가 있었지! 옛날의 계주 때문에 그 모임을 계속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얘들이 써클 만들 때 고상한 이름으로 하잖아요. 코스모스파, 불광동의 공주파. 거기에는 반드시 그것을 만든 오야봉이 있어요. 오야봉은 이미 선배라 졸업했어요. 그 뒤 전통을 이어 계속 하잖아요. 그 정신을 이어 보겠다고,

 

그처럼 말이 있다 언어가 있다는 것은 집단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말이 뭐가 되냐하면 법이 되어 버려요. 그런데 사람이 법은 싫어하면서 법 없인 못 살아요. 반드시 약속 같은 것, 규정 같은 것을 마들어 놓고 해야 내 마음이 편해져요. 생활이 안정이 되고 규칙 같은 그런 게 있잖아요.

 

그래서 말로 예수를 얽어맨다는 것은 “네가 우리 공동체 안에 있을래! 안 그러면 쫓겨 나갈래!”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소통하고 있는 문법과 논조와 사고방식에 대해서 너는 동의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냐, 그럼 동의 안하면 어떻게 되요. 아까 말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법이 된다고 했지요.

 

법은 어떤 목적이 있어요. 뭐냐하면 공동체에 안정된 질서 체제를 유지해야 되요. 여러분! 법이 먼저입니까? 감정이 먼저 입니까? 법보다 주먹이 먼저라고 하는데 감정이에요. 박근혜는 법으로 나가겠다는데 촛불 집회하는 사람들은 뭡니까? 지금 당장 내려와라! 지금 당장 내려와라에요. 너 때문에 못살겠다. 법 가져오면 내가 알아서 나갈께! 아니 지금 당장 내려가라! 지금 당장 내려가! 박근혜는 뭐냐하면 헌법대로 하자는 거에요.

 

그런데 촛불 집회하는 사람들은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1조 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옳지 않아요. 그렇게 하면 뭘 인정하는 셈이 되요? 헌법 1조는 그렇더라도 그 1조를 위해서는 세부 조칙에 따라 줘야 되요. 지금 촛불 집회하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요. (헌)법은 뭐가 아니다? 진리가 아니지요. 왜 헌법을 믿습니까? 양쪽 다 잘못 된 거에요. 우리는 성령께서 인도하는 데로 살아야지 왜 헌법을 따라야 합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이 헌법을 만든 거에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실 체제에 대해서 네가 동조하지 않으면 우린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죽이겠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헌법으로만 유지되고 의롭게 될 공동체에서 의를 부숴버리고 그 의를 혼란시키는 요소로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핀셋으로 뽑아내지 아니하면 기존의 법이 혼란스럽고 그렇게 되면 누가 피해를 보냐하면 법의 혜택을 입고 법의 보호를 받는 낮은 자들이 큰 피해를 봅니다.

 

없으니까 짓밟히지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거에요. 드라마 대사 보면 나와요. 돈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는데 그 말에 속는 건 너 밖에 없다. 그 말에 너만 속아 넘어가지 다른 어떤 사람도 안 속는다. 돈이 곧 신이다. 법을 깨버리면 결국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치이냐하면 가진 자가 치게 되어 있어요. TV에 집밥 프로그램하는 사람, 백 선생이 체인점을 만드니까 시장 통에서 장사하던 할매 집 김밥이고 뭐고 전부 문을 닫게 된다 말이죠.

 

방송에 나오는 유명 인사가 시장에 가게를 내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법이 없으니까 막대한 자본금으로 하는 가게가 기존의 가게를 하며 자식 공부시키려 했는데 손님이 없어서 망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법으로 관여하게 되면 여기까지는 침범하지 말고 어느 거리까지는 범위로 띠어라! 법으로 약한 자를 보호하는 거에요.

 

만약에 예수를 설치게 놔두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강도나 살인자나 창기들이 자기 잘났다고 하겠지요. 간통하고 “나도 구원 받았당!” 그럼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법대로 예수를 처단 해버려야 하는 거에요. 교회의 목사가 설교하면서 십자가 복음을 비껴가서 바르게 사세요라는 법을 내리는 이유가 만약에 성경에 있는 아무 말씀십자가는 몇 마디 나오지도 않아요.

 

대부분 이야기 하는 것이 십계명 이야기, 착하게 살아라, 서로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라 이 말을 안 해줘버리면 교회가 개판이 된다는 거에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그것이 바로 꽁꽁 숨겨 놓은 악마의 얼굴이 바로 그겁니다. 교회가 개판되면 누가 손해냐? 누가 손해일까요? 교회에서 밥벌이 하는 목사 본인부터 노후 대책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6장 39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 목사는 누구를 안 믿어요? 예수를 전혀 안 믿지요. 교회가 개판되면 아무도 주를 안 믿는 줄 알고 있어요, 얼마나 믿음이 없는 거에요. 교회 만들어서 부지런히 총 전도주일 해서 끌어 모아야 그 중에 하나라도 건질 건 건지고 탈락되더라도 알곡은 있을 게 아니냐는 건데 전부 다 가라지인데 교회 쳐다보는 알곡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 쳐다봐야지! 그래도 숫자 한 5 백명 되면 80명 정도는 아니겠느냐인데 그건 니 생각이고,

 

목사가 복음만 전해 보세요. 천 명이면 다 싫어하지요. 그럼 다 가라지이지요. 가라지에요. 뭔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되느냐 하나님께 바치냐는 말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거에요. 너 유리 질서에 편입할래? 아니면 나갈래? 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나는 너희 동네에 안 살래! 이 멍은 그렇게 바치고 싶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바쳐라!

(마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마 22: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 22: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마 22:21)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들의 논리로 쳐 버리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아! 하나님께 바쳐라! 이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 바치고 싶으면 원대로 바쳐봐! 안 받으시죠. 지금 말장난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르는 것을 지적해 주시는 겁니다. 이 동전이 누구의 것이야? 가이사, 그럼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은 네가 하나님께 바칠 방법도 모르고 처음부터 가이사에게 네가 바치고 싶어 환장한 데로 해라! 하나님께 바치는 것도 받쳤다고 하는데 그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 밖에 안돼!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바치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 너 이 질문 잘못했어! 왜? 악마에게 갇혀있는데 나온 언어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먹구름처럼 덮쳤는데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가 날마다 경계선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과 차이점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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