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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7 22:05:00 조회 : 867         
사무엘상 21강(언약궤의 폭주), 마태복음 83강( 미련한 능력) 16122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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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8.127) 16-12-30 19:35 
언약궤의 폭주(삼상5장8절-6장9절) 20161227대전강의21강-이 근호

 

자, 사무엘상 5장을 해봅시다. 사무엘상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배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이 자기를 위한 전쟁이 아닌데,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못한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줄 그런 하나님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근데 인간들이 그 계획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자기 계획이 너무 심해서, 자기 계획이 너무 강렬해서 그래요.

 

이것은 무슨 문제냐 하면 자기가 사는 토대문제거든요. 자기 토대를 자기가 닦는다든지, 자기가 세워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마태복음 7장 마지막 절에 나오죠. 이 토대문제가. 모래위에 세운 집, 반석 위에 지은 집. 남이야 집을 어떻게 짓든, 왜 하나님이 간섭합니까? 모래 위에 지을 수도 있고 반석 위에 지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하나님이 홍수를 주관한다는 거예요. 홍수를 주관할 때, 집 짓는 것은 지 맘대로 인데, 그 자기마음대로 집 짓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127:1)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일을 노골적인 불신자들이 막는 것이 아니에요.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내뱉는 그 사람이 수상해요. 하나님을 믿으려는 이유가 불분명해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불분명하다고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수상하다고요. 성경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거든요.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구축하는 내 토대위에서, 평생 구축하는 나라는 성과물을 읽고 싶지 않다. 다치기 싫다. 이 성과물의 대표적인 것이 가정이겠죠. 가정. 그리고 목사한테는 교회가 되겠죠. 교회나 가정, 또는 국가, 일가친척이 다 포함됩니다. 가정에는 자식들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자식을 놓으면 그 자식이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식이라는 토대위에 하나님이 들어갈 일이 없어요. 내 새끼 내 것이라는 겁니다.

 

그걸 성경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뭐 자식이 멀리 있는 사람은 상관없겠습니다만. 자식이나, 그럼 바꿔야 돼요. 강아지나 내게 합당치 않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없어요. 심지어 불교 신자도 신을 믿는데, 계속 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시는 것이 아니고 그 발 딛는 토대를 계속 주목하는 거예요. 시작을 뭐로부터 출발했느냐, 시작을. 너로부터 출발했잖아?

 

근데 너로부터 출발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인정하지 않는 증거가 뭐냐 하면 오늘 사무엘상 5장이에요. 4장, 5장.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빽을 믿고, 심지어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언약궤를 믿고, “적들아! 나오너라! 우리 하나님이 승리케 해주신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은 맞아요. 근데 누굴 위해서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착오를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거고, 신약에서는 시키는 대로 살아라, 이 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살아라. 시키는 대로 살라고 한다면, 뭐가 밝혀지느냐 하면 인간들의 고집들이 밝혀져요.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그 수상한 의도들이 밝혀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공격한 저기 있는 것이 적이 아니고,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내 거니까 내 것을 포기 못하겠다는 나와 맹렬하게 전쟁을 벌입니다. 가정이나 교회 내에서. 누굴 상대로? 하나님을 상대로 맹렬하게 전쟁을 벌이죠.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원수 된 자다. 교회 잘 다녔는데 하나님의 원수 된 자다. 가정주부로서 잘 사는데 하나님의 원수 된 자에요. 그릇을 깨서가 아니라, 세제를 너무 많이 써서 설거지를 해서가 아니라, 해독주스를 남편한테 안 갈아줘서 문제가 아니라, 이 모든 일을 하는 행위가 나를 위해서 나 좋아라고 하는, 내 것을 포기 못하겠다는 그 강력한 자기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는 그 개념자체를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행동하고 일하면 할수록 기대를 더 크게 하게 되고, 기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그 강도가 더 세지죠. 차라리 어린애 같았으면, 자기 선택도 없고, 자기 선택의 의지도 없고, 주는 대로 사는 어린애 같았으면 차라리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할 텐데, 이 어른들이 문제에요. 누가 높으냐고 하는 어른들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사무엘상 5장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자기가 패배한 것이 하나님께 패배했다는 생각을 안 하고 블레셋이라는 이방민족에게 패배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가 하나님이 없는 나라한테 패배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교회 있고 앞에 절이 있는데 교회는 번개 맞아 불타버리고 절은 멀쩡하게 잘됐을 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겠죠. 앞에 보살 집은 만날 웃음이 넘치는데, 이쪽 교회 다니는 집은 만날 싸울 때,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이해가 사무엘상 5장, 그 다음에 6장, 7장까지 계속 죽 이어집니다. 5장, 6장, 7장은 한방에 싹 다 줄거리를 그릴 수가 있어요.

 

과연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느냐? 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블레셋도 착각하고 이스라엘도 착각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집단과 인간집단의 싸움이에요. 근데 인간끼리 싸워서 과연 이 승리라는 것이 인간에게 해당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너는 지고 네가 승리했다고 하는 이것을 부여받을 권리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권리자가 없어요. 둘 다에서 승리를 뺏어가 버립니다. 양쪽 다 승리를 뺏어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했는데, 만약 이웃을 사랑하는 현상이 일어났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어났다면 누가 승리자가 되느냐 하면 이웃을 사랑한 자가 승리자가 되고, 사랑받는 자는 그 사랑한 자에게 일종의 종속이 돼야 되죠.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을 준 것은 어느 누구도 사랑했습니다, 라고 나설 위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준 거예요.

 

하나님이 결국 그 말씀을 줬잖아요. 줬으므로 함께 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돌판을 들고 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함께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돌판을 들고 내려왔으니까.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면 다 타 죽어요. 다 타 죽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중보자로 내세웁니다. 말씀을 중보자로 내세워서 이 말씀을 들을 때 사람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라 이 말입니다.

 

근데 그 말씀을 주셨을 때에, 사람들은 그 말씀을 주게 되면 복을 받는다는 인센티브가 주어져요. 복을 받는다는. 그리고 못 지킬 경우에는 저주받는 거예요. 이게 축복받고 저주받는다는 것은 완전히 결정된 사항이 아니죠. 그렇잖아요? 지킬 경우에만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기 때문에. 결국 말씀을 줬다는 것은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선택권 자체를 원초적으로 박탈시키는 겁니다. “나 축복받고 싶다.”라는 말을 함부로 입으로 발설하지 말라는 겁니다. 축복 안 받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하지만 축복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이 내세운 기준에 의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미리 짐작하거나 다짐할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를. ‘나 이렇게 해서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살아야지.’ 하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어요.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 하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뭘 해야 하느냐, 말씀을 줬을 때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도 이걸 알아야 되는데, 나중에 아는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때 몰랐어요. 몰랐으니까 이스라엘이 망했죠.

 

말씀이 우리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 내가 누구냐를 하나님 앞에 건의한다든지, “저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할 때, 우리 입을 막아버리는 거예요. 셧 업Shut up! 어려운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 “Shut up! 입 다물어! 이거 처리해! 서류 던지듯이. 십계명 던지면서 잘하면 축복이고 못하면 저주야.” 이랬다 이 말이죠. 근데 십계명은 우리가 요청한 적이 없어요. 요청한 적이 없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덮쳤다는 말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주도권이 이미 이스라엘은 주님에게 넘어 간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승리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어요. 끝까지 주님의 승리가 되어야 돼요. 그럼 자기들이 패배했다는 말도 말이 안 돼요. 자기들이 블레셋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한테 패배한 거예요. 이거만 알면 결코 블레셋이 승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이제 우리가 당한 것을 너희도 이제 한 번 당해봐라.” 이런 식으로 지켜봐야 될 입장에 있지, “아이고, 좋겠다. 우리 언약궤 뺏어가서?” 이런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을 때,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을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잠시 이스라엘과 헤어지고, 이스라엘을 쳤던 블레셋과 함께 있음으로써, 그걸 주변에서 지켜봄으로써,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이 전에 우리와 함께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겁나는 분이. 근데 우리도 우리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존경하지 않았죠. 특히 엘리 제사장 같은 경우도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존중했잖아요. 그래서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도 마땅하고, 언약궤 뺏기는 것도 마땅하고, 그들에게 패배당해서 많은 군사가 죽은 것도 사실은 당연한 겁니다.

 

그냥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내 토대, 내 모든 것,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업적들이 다 깨어진다 하더라도, 성도의 기쁨이 뭐겠습니까? 성도의 기쁨이라는 것은? 절대 규범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 인생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상관없이 예수님이 주관한다는 이 사실만, 이게 확보되었다면 환난, 곤고, 핍박,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계란 값이 오른다 할지라도, 그거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신앙생활 기쁨이 딴 게 아니에요. 그거에요. 천지가 개벽하고 나라가 아무리 어지러워도 진리는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 확정되었어요.

 

옛날에, 한 50대, 60대는 다 알잖아요. 옛날 아이스케키를. 막대 아이스케키 있죠. 팥 아이스케키. 돌려가지고 찍으면 두 개 주고 세 개 주고 막 하는 것. 두 개짜리 밑에 철판 깔아가지고 야바위꾼들이 하는 것. 아이스케키 특징이 뭐냐 하면 끝까지, 다 먹을 때까지 막대를 못 놓는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아이스케키라고 할까? 요즘에는 막대하드죠. 아이스케키 그거는 끝까지, 다 먹을 때까지 막대를 못 놓아요. 창세전부터 예정된 성도는 자기 인생 다가도록 그 중앙에 막대기가 나를 이렇게 끌고 왔다는 것. 그게 갈수록 점점 더 드러나죠. 녹아내리니까. 팥 얼음이 막대에 꽂혀 있더라도 녹아내리잖아요. 그래서 아낀다고 하다가 햇빛에 다 녹아가지고 먹지도 못하죠. 먹을 때 빨리 먹어치워야지 안 그러면 다 녹아서 손에 다 묻고 그러죠.

 

우리 인생은 이처럼 빛 앞에서 녹아내리는 양초와 같습니다. 본색이 드러나요. 근데 그게 녹아내릴 때마다 왜 기쁘냐 하면 그동안은 내 인생을 내가 가꾸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스트레스 받았습니까? 이 눈치 봐야 되고 저 눈치 봐야 되고, 심지어는 몸 아픈 언니 눈치 봐야 되고, 다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실은 막대기를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밖에는 안 돼요. 최선을 다해서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약화되고 이걸 찾을 길이 없어요. 왜? 자기가 너무 잘났으니까. 자기가 너무 위대하니까. 자기의 행동거지가 너무 완벽하니까. 진짜 거지같은 인생이에요. 너무 완벽하니까. 남한테 꿇리지 않을 정도로 한 성화했으니까.

 

이게 바로 주님의 일을 점점 더 욕되게 하는 거예요. 이건 뭐 겸손 티를 내면서 모든 게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뭐 말은 잘해. 차라리 말이나 못했으면.....,“은혜입니다. 다 주의 은혜입니다.” 해놓고 실제로는 건드리면 와락 하고 달려들어요. 강아지보다 더해. 와락 달려들죠. 내 의로움을 왜 건드리냐고 하면서. “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런 것처럼.

 

남한테 모욕 받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갑니까? 이거는 결코 성도의 자유가 아닙니다. 뭔가 윤리적으로 승리하고 싶은 의도가 강렬해요. 평소에 자기밖에 모르는 그 성질을 교회에 가서라도, 나는 교회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절에 가서라도, 교회라는 이름의 절에 가서라도 그게 그대로 바뀔 생각이 없어요.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 그걸 유대인들이 했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수치를 줘버려요. 심지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살맛이 없이, 하나님 믿더니 꼬락서니 좋다. 이렇게 만들어버려요. 자기가 믿는 하나님한테 자기가 버림받게 만들어버려요.

 

온 민족들이 얼마나 씹을 겁니까? “니가 믿는 하나님은 별 효과도 없네? 차라리 미신 믿어라. 다곤 신 믿어라. 우리가 승리했잖아.” 실제로 아하스 같은 경우에는 앗수르 신이 자기 신보다 더 세다고 생각해가지고 그쪽 신이 있는 신전을 그대로 벤치마킹해서, 자기 나라에 신전 그대로 만들고 그 식대로 제사를 드리게 했어요. 정성이 지극하면 신의 감동도 크다고 해서, 심지어 자기 아들까지 불에 태우고 하는 그런 것을 진두지휘하면서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갑바위 있는데, 갑바위에 절하는 사람들 한 번 보세요. 얼마나 나름 경건한지. 나름대로 경건해요. 저 같으면 거기에 있는 동전 다 줍고 싶지만 절도행위에 해당돼서 법적으로 곤란해요. 동전 다 넣어가지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쳐들어가지고 절하고, 내려오면서 절에서 비빔밥 한 그릇 먹고 내려오죠. 그런 식으로.

 

사무엘상 4장, 5장, 이 모습은 어느 성경을 봐도 예외가 없습니다마는, 오늘날 우리 현주소를 그대로 적나라하게 다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블레셋이 승리한 게 아니다. 왜? 블레셋은 신의 승리로 봤거든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한테 고마운 것은, 아이스케키가 이렇게 있으면 우리가 강조하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나는 누구한테 꿇리지 않는다는 그 대목에 대해서 내가 실패작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들추어내는, 주께서 공격하는 지점이 되는 겁니다. 폭격지점이 그거에요. 이것 때문에 나는 사는 보람이 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 놓고 사는 보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 가정이 이삭을 놓고 사는 보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 겁니까? 그 사랑하는 90, 100살 되어 낳은 이삭 때문에 살죠. 그게 보람이었어요. 얼마나 기쁨이었겠어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뭘 내놓으라고 합니까? 아들을 내놓으라. 그 아들을. 한껏 키워놓고, 기쁨과 보람을 다 주고, 내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기존 교회에서 주일 낮 설교 시간에 이런 설교를 한다면 벌써 이쪽, 저쪽에서 설교 듣지도 않고 나갑니다.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슬슬 나가기 시작해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복 받아 지키기 위해서 왔는데, 내 것 하나님께서 공격한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잖아요.

 

가만히 있어보자, 내가 내 놓을 게 뭐가 있을까? 지난 토요일이 곗돈 받은 것 있는데, 그거 도둑맞는 것은 아닌지, 자기 귀한 것을 하나님께서 공격한다고 하니까 그저 겁이 나는 거예요. 차라리 그 설교를 안 듣고 말지. 그 설교를 끝까지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요. 이만큼 교회 다니려고 온 것도 노동인데, 노동했으면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대가는커녕 완전히 다 박살날 판인데 그 공포심을 어떻게 견딥니까? 슬슬 털고 나가죠. 또 용기 있는 사람은 한 번 째려보고 나가죠. 그런 경우가 한두 번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 듣고 나가지, 벌써 중간에 나갑니다. 얼마나 교회가 절입니까? 절간이 아니고 점집이에요. 점집. 플라스틱으로 만든 대나무를 달아야 해요. 십자가를 달지 않고 대나무를 달아야 돼요. 바람이 흔들리도록. 점집이에요. 무당집이에요.

 

근데 무당집인지 알면서 왜 다니느냐, 그래도 혹시나 백 개 중에서 한 개라도 행운이 올지 모르니까, 한 개 보고 계속 다니는 거예요. 교인들도 교회가 이렇게 점집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용감하게 또 어려운 가운데서 말을 하겠죠. 주의 종이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도저히 못 참아서 하게 되면 목사가 어떻게 나옵니까? 버럭 화를 내죠. 버락 오바마에요. 버럭 화를 내죠. “니 같은 것이 아는 체하고 교회를 어지럽힌다고.” 빨리 가서 장부를 조사해봐야 해요. 십일조 얼마 내는 사람인지, 잘라야 하는 사람인지, 그냥 돈도 안 내고 절밥만 먹고 가는 사람인지, 보내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의 팁Tip을 드릴게요. 목사한테 장사 안 되게 방해하지 마시고 그냥 딱 하나만 하라고요.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공개했어요. 돈만 내면 돼요. 결국 그만 못 두는 이유는 그동안 낸 돈이 아까워서 그래요. 돈이. 그러니까 비난할 것 없어요. 목사나 교인이나 똑같아요.

 

이 블레셋에 대해서, 여기에 언약궤가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보겠는데, 지중해가 있고 이쪽에 사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데, 이 간격이 한 100킬로미터가 안 돼요. 일단 100킬로미터 잡고, 사해 옆으로 예루살렘 있고 그 밑에 베들레헴이 있어요. 예루살렘 위에 벧엘이 있고, 벧엘 옆으로 길갈이 있고, 길갈이라는 것은 처음에 요단에서 건너왔을 때 열두 돌을 세운 곳. 에벤에셀에서 언약궤가 빼앗겼습니다. 블레셋이 이만큼 쳐들어왔습니다. 블레셋이 지중해쪽으로, 팔레스타인거든요. 처음에 실로에 있다가, 실로에서, 에벤에셀로 빼앗겨가지고 블레셋으로 이동해요. 이게 한 25킬로미터가 됩니다.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아스돗이 사실은 블레셋의 본부, 아지트라고 보면 됩니다. 이게 한 45킬로미터. 그 다음에 가드로 갑니다.

 

이렇게 이동하는 것은, 블레셋이 사실은 이게 너무나 위험한 상자가 되어가지고 “엄마야! 엄마야!” 겁내가지고 이동하다가 나중에는 돌려주는 방향이, 자기 쪽, 블레셋으로 갔다가 다시 이스라엘 쪽으로 돌려주는 방향이 돼요. 아스돗에서 가드가 15킬로미터, 가드에서 에글론까지 5킬로미터, 에글론에서 여기 유명한 벧세메스, 6장 9절에 보면 있죠. 에글론에서 벧세메스가 10킬로미터, 벧세메스에서 암소 잡고 그 다음에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까지 15킬로미터, 여기에 다윗이 올 때까지 있는 겁니다. 실로에서 에벤에셀, 에벤에셀에서 아스돗, 아스돗에서 가드, 가드에서 에글론, 에글론에서 벧세메스,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까지, 이렇게 이동합니다. 이동하면서 블레셋 점령지역을 완전히, 이걸 열차로 이야기하면 폭주하는 거예요. 브레이크 없는 고장 난 열차. 막 달려버립니다.

 

누가요? 언약궤가 자체적으로. 이걸 달린다고 하니까 언약궤가 바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바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감당을. 그러니까 블레셋이 감당을 못해가지고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장갑도 없이 쥐려고 하다가 “아이구 뜨거워라!” 해가지고 남한테 인계하니까 “이걸 나한테 왜 줘?” 또 인계하고, “이 무서운 것을 왜 나한테 줘?” 이렇게 되는 거예요. 5장 1절에 봅시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실로에 있던 이 언약궤가 빼앗겨서 에벤에셀에 있다가 아스돗으로 이동하는 거예요. 아스돗에서 다곤 신상의 손모가지가 다 날아가잖아요. 다곤 신이 하체는 물고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뜨거운 쇳덩어리를 감당을 못해서 떠넘기는 것처럼, “엄마야! 엄마야!” 하면서 떠넘기는 겁니다. 그 무서운 언약궤가 전에 어디에 있었어요?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죠. 왜, 이스라엘은 고요했을까요? 왜, 이러한 무서움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감당할만한 그러한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그것이 니가 괜찮아서 언약궤가 지금 벌을 안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말고 블레셋을 이렇게, 종합병원에서 의사들이 회진하듯이 한 바퀴 획 돌아오니까, “저렇게 무서운 언약궤를 우리는 그냥 곱게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면 뭐지? 이런 혜택은?” 이걸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켜보면, 십자가의 은혜로 죄인을 용서해준다는 말이 굉장히 간단한 문장이에요. 센텐스sentence,문장으로서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무슨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꼭 등신 같아요. 죄져도 히히 웃는 바보. 바보처럼 느껴진다고요. 바보처럼. 죄져도 “나 안 봤다. 까꿍!” 이런 것.

 

인간들은 자기 주제를 모르는 거예요. 아이스케키가 너무 두꺼워요. 이게 좀 녹아줘야, 막대기에는 피가 묻어있거든요. 피가 묻어있다고 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 아이스케키, 죽음을 지고 나를 따르라, 이래야 되는데, 이 죽음을 우리는 자꾸 기피해요. 죽음은 재수 없다고. 공동묘지 생각나서 재수 없다고. 우리는 그냥 즐겁게 사는 삶이 충만한 모습을 띠는 곳에 계속 가고자 하는 거예요. 이십대 애들은 젊음으로 충만해서 클럽에 가잖아요. 막 흔들고 뛰고. 아줌마들이 주로 사는 맛이 어디냐 하면 미장원. 남자들은 노래방, 술집. 어떻게 하면 죽음이 주는 이 살벌함과 저 멀리 떨어져 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크리스마스 때 늘 회자되는, 늘 거론되는 성냥팔이 소녀가 있잖아요. 그 성냥팔이 소녀가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케이크 앞에 놓고 가족들이 다 둘러앉아서 있는 그 모습, 자기는 엄마도 없잖아요. 죽었으니까. 그 성에 낀 창문을 입김으로 불어서 그 안에 있는 행복한 모습을 볼 때에, 과연 어느 쪽이 행복하냐 이 말입니다. 마지막 성냥 세 개를 가지고 추워서 하나 피우고 또 하나 피우고, 세 번째 피웠는데 꺼지고 난 뒤에 하늘나라에서 엄마를 만나는 것이 끝 장면이잖아요. 아침에 보니까 그 소녀는 죽어 있고.

 

세상 행복이란 그런 가식에 우리가 스스로 말려들면 안 돼요. 그쪽으로 발걸음을 한다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되어가지고 상대적으로 무엇과 멀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눈물, 피, 이것과 점점 더 아스라이 멀어져요. ‘그냥 내가 편하면 되지. 이렇게 편하게 살다 부르실 때 가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평소에 이 편안함과 이 행복이 어떤 아픔과 신음소리의 토대위에서 공짜로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이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 이 대가를 내가 누구한테 빼앗기기 싫다. 이렇게 돼버려요. 이 빼앗기기 싫다가 뭐냐, 자기 의로 이게 마일리지가 쌓이는 겁니다.

 

자, 좀 더 구체적으로 해봅시다. 길갈 건너와서 실로에서 언약궤 있으니까 제사를 드렸어요. 아직 성전이 있을 때가 아니고, 예루살렘도 그때는 다른 민족이 있었으니까. 실로, 에벤에셀, 아스돗, 가드, 에글론, 벧세메스, 기럇여아림. 예루살렘은 점령당했다가, 안 당했다가 왔다 갔다 했으니까. 이렇게 해서 중간에 뭘 유발시켰느냐 하면 재앙을 내리는데 이 재앙이 저주입니다. 재앙이 저주에요. 그래서 여기는 우리가 좀 더 어렵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분명히 이스라엘은 말씀을 안 지키면 저주받죠. 그죠? 그런데 언약궤가 이방나라에 갔을 때는 그냥 저주에요.

 

왜냐하면 이방나라는 십계명이 없어요. 율법도 없어요. 율법도 받은 적이 없고 제사법도 모르는데, 그 모르는 데에 언약궤가 합류가 되니까, 그냥 저주라. 그냥 저주에요. 이거는 요한복음 3장을 보게 되면 제가 하는 말의 취지를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 한 번 봅시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했죠.

 

그럼 이 기준이 뭡니까? 아들을 믿는 자가 기준이 되겠죠. 그러면 청문회를 보면서 그 동네가 전부 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주가 어디에 있어요? 그쪽에 있는 거예요. 만약에 선을 보는데 저쪽 집안에서 의사가 나왔다, 우리 딸은 복음을 안다, 그럼 이것은 선보는 자리가 아니고 무엇과 무엇의 만남의 자리에요? 저주 아래 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길을 가면 갈수록 저주가 따라가는 거예요. 저주를 머리에 쓰고 사는 사람과 영생을 머리에 쓰고 사는 사람과 선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쪽은 복음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키가 186에다 성격 너무 좋아 보이고 인물 너무 좋아서 2세까지 완전히 보장되고, DNA가 괜찮으니까, 특히 집안이 배운 집안이고 나중에 자기아들한테 병원 하나는 차려줄 수 있는 여력이 되고. 특히 중요한 것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 유산은 완전히 독식하게 되어 있고. 그리고 사돈도 가만히 보니까 곧 죽을 것 같아. 살날도 날짜가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단지 있다면, “나는 결혼해도 예수 안 믿겠습니다. 종교는 안 믿겠습니다.” 이것 외에는 딴 것은 없다.

 

자, 문제 나갑니다. 결혼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해야 됩니다. 딩동댕~전국노래자랑 딩동댕~당연히 해야 되죠. 해야 내 쪽 아이스케키 묻은 것이 좀 빨리 녹죠. 막대기를 너무 감추고 있었어요. 막대기를. 저쪽을 해가지고 좀 녹아내려야 돼요. 결혼 해야된다가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죠. 결혼 할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을 걸요. 예수 믿는 사람끼리 한다는 것은, 그거는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 그게 12월 25일에 예수 믿었더라도 26일에 안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 안 믿었던 의사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안다는 그 부인이 안 믿는, 역전될 가능성도 거의 완전히 50대 50이에요. 50:50 아직 애를 안 낳아봤으니까. 애 낳고는 완전히 예수고 뭐고 애한테 환장하는 그럴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재앙을 유발시켰습니다. 재앙을 유발시켰을 때, 이것은 이유 없는 재앙이에요. 그들이 잘못 한 것이 아니에요. 이유 없는 재앙.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여기 5장, 6장, 7장, 죽 보게 되면 거기서 뭐가 드러나게 되느냐 하면 우상의 본질이 다 드러나요. 자, 재앙이 왔을 때 그들은 평소에 그들이 했던 매뉴얼대로 해요. 자기 나라에 재앙이 왔을 때 다곤 신에게는 어떻게 했는지, 그것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언약궤로 말미암아 재앙이 왔다는 것을, 그것은 알았거든요. 기껏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식으로 커버하는 거예요. 빨리 냄새나는 수채 구멍을 막아야 하니까. 어떻게 그걸 빨리 일처리하려고 나오는데, 그 나오는 양상들이 이스라엘이 여호와 섬기면서 했던 양상들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앞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할 때, 그 다곤 신을 섬겼던 블레셋 사람들과 똑같은 인식과 의식을 가지고 여호와를 위해서 제사를 드린 일종의 점집이 되죠. 제사 드린 것이 판명 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궤 때문에 블레셋이 망했다면 이스라엘도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의식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제사를 드려도 블레셋 꼴이 난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앞으로 각오를 해야 될 거예요. 각오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여기서 뭘 생각해야 돼요? 저렇게 기관차가 폭주하듯이 하는데, 블레셋이 여기에 온 정성을 다하죠.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됐는데, 왜 언약궤가 우리한테는 그동안 평온했던가? 저렇게 위험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축복과 저주의 권한은 인간의 하기 나름이 아니고, 언약궤 하기 나름이에요. 언약궤가 나름 목적이 있었어요. 언약궤의 나름 목적이.

 

그걸 제가 첫 시간 강의하면서 제일 먼저 이야기했어요. 제일 초반에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초청된 거죠. 근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교회 나오고 이렇게 하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이제 성경말씀을 통해서 바꾸어주는 거예요. 바꾸어준다는 이야기해도, 초반에 그런 이야기만 해도 벌써 몇 명 나간다고 했죠?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하는데, 초반에 “여러분의 귀한 것을 주께서는 다 뺏어버립니다.” 안 빼앗기려고, 그 소리 안 들으면 안 빼앗깁니까? 그 소리 안 들으면 괜찮은 거예요?

 

타조가 저쪽에 있는데, 짐승이 오는데도 타조는 도망갈 생각 안하고 땅을 파가지고 지 얼굴만 땅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안 봤다~ 영구 없다~ 자기가 저쪽을 응시했잖아요. 그럼 자기 응시를 자기가 없애버리면, 자기 응시, 자기화면 속에는 자기를 잡아먹을 짐승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적들이 없으니까 그걸 현실로 보는 거예요. 궁뎅이(엉덩이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를 확 밀어 버릴까보다. 그래서 복음이야기를 이래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도망칠 준비부터 해요. 수련회 하면 도망칠 준비부터 한다고요. 돈 십 만 원이 아깝다느니, 뭐 어쨌다느니, 할 것 다하고 지 먹을 것 다 사먹으면서. 그러지 말고 수련회를 위해 한 달에 만원씩 저축하는 성의를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람이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심어준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변동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변동 없는 기준을, 규범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은 집에 불이 나도 괜찮아요. 세상에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흔들릴 이유가 없다고요. 주께서 하는 일이 분명하기 때문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될 문제지,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여 뜻이 무엇입니까? 만날 주의 뜻을 이야기해도 아직도 주의 뜻을 못 받았어. 그저 이 여자만 주신다면 신이시여 뭐든지 하겠습니다.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뭐 어떻게 하라고? 지가 지 맘대로 해놓고 이 여자만 주신다면 뭐든지 제가 다 해드리겠다고 해요. 임재범이가 고해에서 그런 노래 불렀어요. 꿇어 앉아가지고.

 

자, 5장, 6장, 후딱 다 지나가버렸어요.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5장 8절에 보면, “어찌할꼬” 가 나와요. 감당이 안 돼요. 임재범 노래에도 어찌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여호와의 궤를 우리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보내느냐, 보내는 것을 확정해도 어떻게 보내느냐, 그래서 6장 4절에 보면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쥐가 왜 들어가요? 쥐가? 왜냐하면 이 방법이 재앙이 왔으니까 재앙을 제공하는 매개자가 아마 쥐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쥐와 더불어서 언약궤에 실어서 보내는 겁니다. 마치 AI조류독감 인플루엔자가 같으면 병든 새를 살처분 해서 보내는 것처럼.

 

이 사고방식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멸망의 사고방식인데, 이 블레셋이 먼저 보여줍니다. 원래 이 공동체는 자칭 깨끗한 거예요. 깨끗하다. 근데 여기에 재앙이 왔다면, 깨끗한데 재앙이 왔으니까 제일 먼저 혐의를 둘 사람이 누굽니까? 뭔가 새롭게 뛰어든, 뭔가 이질적인 것이죠. 어떤 괜찮은 재벌집안이 있는데, 갑자기 재앙이 오고 사업이 안 된다. 그러면 한 달 전에 결혼한 며느리에게 혐의를 두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유다가 큰 아들 죽고 둘째 아들 죽으니까 그 혐의를 누구한테 둡니까? 다말이라는 며느리한테 두잖아요. 그 며느리한테 셋째 아들이 장성해도 안 주잖아요. 왜? 주면 또 죽을 것 같으니까.

 

이게 제일 처음에 이야기한, 내 것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 것. 하나님이고 뭐고 내 것이 중요하지, 하나님은 뒷전이에요. 나중이에요.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게 불신자의 특징인데, 신자는 뭡니까? 내 것 보다도 주께서 주신 확고하게 있는 규범, 확정된 것, 예수를,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영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께서는 어떤 사태와 상황들로 몰아세웠다는 사실. 흔들림이 없는 것. 그런 사람에게는 아까 예를 들었던 안 믿는 의사하고 결혼을 해도 오히려 감사하게 받으시면 됩니다. 결혼 하죠. 뭐? 그럼 교회는? 교회는 나중에 다니면 되고. 믿음은 성령 오시면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그것은 나중문제니까 빨리 혼사나 치릅시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빨리 날 잡고 초스피드로, 폭주하듯이, 빼앗기면 안 되니까, 해치워버려야 해요. 이건 신랑이 이런 방법을 쓰는 거예요.

 

그 다음에 6장 6절 봅시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아,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가지고 실제적으로 설교를 하셨네요. 뭐냐 하면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곱게 안 나오고 저쪽을 어떻게 했다? 강퍅케 했다 이 말입니다. 누가요? 바로 왕이 강퍅한 사람이 아니에요. 인간성이 참 좋아요. 근데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인 은총을 더 크게 부각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가만히 있는 점잖은 양반인데, 계속해서 강퍅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발한 거예요. 재앙유발해서 그 다음에 성격을 악하게 유발시킨 겁니다.

 

그래서 명절에 복음 전하면 집안의 점잖은 친척들 전부 다 악한 성격으로 다 유발돼요. 먼저 입 떼지 마세요. 먼저 입 떼면 “처음부터 네가 집안 분위가 깨려고 노렸지?” 이렇게 돼요. 가만히 있다가 성령께서 건드리거든, 뭐, 교회가 어떠니 하면서 건드리거든, “그거 점집이거든요.” 이래 시작해가지고 그렇게 하면 돼요. 먼저 건드렸으니까. “참, 우리 교회는 전부 태극기에다가 번쩍 번쩍 달아가지고 박근혜 물러가라! 장로들이 권사들이 데모했다.”고 하면 “그거 다 점집이거든요.” 한 번 툭하고 던지는 거예요.

 

이거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6장 9절에 봅시다.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그가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냈던 그 소문난 여호와가 진짜 마음먹고 노리고 우리를 치기 위해서 재앙 내렸는지 아닌지는, 벧세메스로 암소 잡아가지고 올라가서, 사람 손은 안 되고 암소에 의해서, 그걸 자율차라고 합니다. 자율로, 운전대 없이 벧세메스로 가게 되면, 그거는 우리가 저쪽 이스라엘 하나님한테 된 통으로, 다이렉트로 당했다. “아, 그 출애굽의 그 이야기가 이게 현실이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전도를 누가 해요? 하나님 본인이 전도하지, 우리가 전도하거나 우리가 필리핀에 간다고 선교되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이 대전바닥이 선교지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88.127) 16-12-30 19:36 
미련한 능력(마태복음22장23절)20161227대전강의83강-이 근호

 

두 번째 시간 마태복음 22장 23절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부활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이렇게 부활이 있게 되었을 경우의 불합리함, 따라서 부활이 있다면 이런 불합리함이 있기 때문에 부활은 없어야 된다, 라고 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사두개인들이죠. 원래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만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아요.

 

그러면 구약성경을 안 믿는가? 안 믿는 것이 아니고, 후대에 뒤에 나오는 성경의 두꺼운 부분은 모세오경에 대한 어떤 해석판, 설명판이라고 봐가지고 모세오경을 중요시여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건 모세가 직접 받았잖아요. 어디서? 시내 산에서. 누구 만나고? 하나님과 독대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비선실세입니다. 문고리 1인방이에요. 문고리 3인방이 아니고. 모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냈던 글은 자기 글이 아니고 하나님 그 자체죠.

 

모세오경을 통해서 누가 봐도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잖아요.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축복된 나라로 만들겠다. 나중에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보내서 만들겠다. 그걸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땅에 이상적인 나라가 건설 될 것인데, 부활될 이유가 없죠. 땅에 이상적인 나라가 생기는데. 부활이 되게 되면 땅에서 혼선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부활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죽어 다시 살아날 경우에 호적정리가 난처해진다 이 말이죠.

 

형이 결혼을 했는데 아들이 없다. 그래서 시동생하고 형수하고 결혼을 했는데 또 자식이 없다. 그렇게 둘째, 셋째, 몇 째까지 갔습니까?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다. 하여튼 여자가 문제야. 여자가 진작 죽었으면 총각들의 팔자가 그렇게 헷갈리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각각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사두개인의 말을 딱 보니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면 사두개인보고 “당신은 이래서 문제입니다.”라고 옆에서 조언을 해줄 때 뭐라고 조언을 해줘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내신 정답을 모른다고 치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들도 나름대로의 논리적이고 이성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부활이라는 것이 이 땅에 살아생전에 있는 관계, 가족관계가 그대로 동질성으로, 똑같은 관계로써 인수인계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뭐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 인간이, 제가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 동질성이라고 했는데, 이 나라는 ‘나’가 죽어도 맨 그 ‘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연속성을 가진다, 또는 동질, 같은 질을 가지고 연속성을 가진다. 그럼 뭐를 모르느냐 하면 단절됨을 모르는 거예요. 단절된다, 바꾸어준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구식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가 모든 통신체제가 바뀌면 구식 휴대폰은 못 쓰고 새로 만들어진 휴대폰이 가동이 되잖아요. 그거만 쓸 수가 있잖아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가 아니고, 내가 보여줄 세상은 이런 세상이었는데, 부활의 세상은 저런 세상이다. 세상 자체에 맞도록, 구성원이 거기에 맞는 인간이 돼요. 우리는 내가 있고 내 둘레에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어요. 보통 애기를 목욕시키면 애를 다 시키고 난 뒤에 그 더러운 물은 버리잖아요. 애는 건지고. 근데 하나님은 뭐냐, 둘 다 다 버려 버려요. 그 애는 여기에 맞는 애고, 새롭게 만든 곳에는 새롭게 애를 제조해야 돼요. 더러운 물과 함께 버리지 않는 아이는 없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애를 목욕시켰으면 애는 건지고 때는 버리는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양쪽 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심어놓은 실존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게 되면 이것과 전혀 다른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은 이 땅에서 모세율법을 시내 산에서 줬기 때문에, 이 땅에 줬기 때문에, 이 땅의 율법을 믿고 지키면 점점 더 내가 착한 인간으로, 맨 같은 인간인데 착한 인간으로 바뀌어서 그대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오늘날 모든 교인들이. 이 사두개인의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의 맹점을 제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질 생각은 안 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된 괜찮은 존재로 만드는데 예수님이 어떤 정보나 팁Tip을 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그 모델을 본받으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가는 겁니다. 가서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법 조항, 그런 시 조항, 명령 그런 것만 뽑아내서 그걸 실천에 옮겨서 숙제를 했는데, 숙제를 얼마나 잘했는지 스스로 측정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성적이 얼마나 올랐는지. 이게 바로 내신 성적입니다. 내신 성적.

 

그 내신 성적에서 제일 잘한 사람이 목사 본인이고. 그 다음에 거룩한 장로들이고. 만날 조는 장로들이고. 그 밑에 권사, 권사는 보지도 맙시다. 권사는 만날 집에 가면 장로하고 싸우기 때문에. 괜찮은 집사고. 그래서 일반교인들은 이미 수 십 년 믿은 사람이 저 정도 된다는 것을 보고 어떤 목표가 생겨요. 인생의 목표가. 잘하면 따라 잡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중심 잡은 영적 권위를 가진 목사가 어떤 말을 할 때는 말을 한다는 자체는 본인은 지키고 있다는 것처럼 하니까, 목사까지 목표를 잡으면 너무 거룩하고. 자기는 직업이 있으니까. 개인 직업이 있으면서 장로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죠. ‘저 정도야? 식사 기도하는 저 정도야? 그거는 나도 하겠다. 크리스마스 때 성가대 대원들 수고했다고 불고기 사먹으라고 돈 주고 하는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돈 몇 푼주면 되잖아요.

 

그러다 어느 날 장로가 노래방에서 유행가 부르는 것을 보면 ‘저런 것도 돼? 저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야고보서에서 분명히 지난주에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어떻게 그 설교를 듣고 장로가 노래를 불러? 그런데 그 장로가 너무 잘 살아. 아, 저거는 하나님께서 봐주는 모양이다. 노래방 가는 것은.’ 그러니까 자꾸 도전해야 될 모델이 지 편안대로 자꾸 점검이 되는 거예요. 지 편안대로.

 

제가 여기서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이 그림 하나로 깔끔하게 설명되리라 생각됩니다. 원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이 원 안에 있는 것을 중심 되는 핵, 중핵. 바깥 원 표면에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주변사람을 봐요. 교회와도 저 장로는, 저 권사는, 저 집사는, 하고 이래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활이라는 이 사태, 이 장場을 주신 것은 중심(중핵)을 경유하고 다시 의미를, 복음적 의미를 가지고 세상(바깥 원)을 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잖아요. 부활 하실 때 그냥 부활하신 것이 아니죠. 어디로 갔습니까? 세상에 감추어진 비밀로 갔어요.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은 모든 감추어진 비밀을 알려줘요. 성령은 세상의 어떤 깊은 것이라도 다 통달하시니까(고전2:10).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성경말씀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신학자들이 이천년 교회역사 가운데서 제일 어려운 것은 최종적으로 딱 하나에요. 같이 볼 수도 있지만 두 가지로 나눌 수도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상하다. 자기가 부활될 것을 그 전에 다 알면서도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 지금 연기하시나? 일부러 알면서 지금 폼 내고 계시는가? 두 번째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두 개를 사실은 십자가에 관련된 하나로 보시면 됩니다. 이걸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는 아직까지는 없어요. 조심해야 돼요. 없다고 하면 건방지다고하니까. 있을 수도 있겠는데 아직까지는 없어요. 이걸 설명해주는 사람이. 한꺼번에 풀어야 되거든요. 예수님이 그렇게 강하고 아버지의 신뢰, 아버지를 의존하는 것이 그렇게 강렬한 분이 갑자기 이 대목에서 그렇게 흔들리느냐 이 말입니다.

 

논리학에서 S와 P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S는 주격이고 P는 서술격이에요. 서술격. 나는 밥을 먹는다 할 때, 나는-S에 해당되고 밥을 먹는다-P에 해당되는 겁니다. S해놓고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안 되죠. “나는..” “뭐?? 말을 해? 뭐? 어떻다고 말을 해!” “나는...” “뭐? 아프단 말이야? 신난단 말이야? 뭐 돈을 달란 말이야? 자고 싶단 말이야?” “나는..” “그 다음이 뭔데?” 하잖아요. 이 주격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반드시 서술이 있습니다. S-P

 

이 S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아버지가 계세요. P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계십니다. 언제? 창세전에. 창세전에 아버지(S)하고 예수님(P)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와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아버지를 찾으면서 P의 자리에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은 중보자가 돼요. 그러면 P이면서도 S와 겹치는 겁니다. S와 겹치는데 십자가에 와서 S와 P를 분리해야 될 입장에 있는 거예요. 중보자가 아니라면 S와 P를 겹치지 않습니다.

 

중보자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대리자라는 뜻입니다. 누구 대리자냐 하면 죄인의 대리자거든요. 죄인의 대리자.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는 P지만 중보자입장에서는 아버지를 대신해야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는 S자리에 계시는 거예요. 이 땅에 아버지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리고 자기 백성은 P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S자리에 있어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기도했던 그들만, S자리에서 기도하신 예수님과 관련된 P의 자리에 해당되는 진짜 자기백성, 예정된, 택한 자기백성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죠? 그 다음에 봅시다. 아버지 앞에서는 P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대신하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니까, 주의 이름으로 왔으니까 S가 되는 겁니다. 이 S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분리가 되는 거예요. 분리가 되게 되면 이제는 사람하고 관계 안 합니다. 아버지하고 관계하잖아요. 그러면 S의 자리는 아버지한테 맡기고 P의 자리에 갑니다. 근데 P의 자리는 바로 무슨 자리냐 하면 죄인의 자리에요. 죄인의 자리니까 죄인의 자리에 충실해야 돼요. 죄인이니까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죠. 죄인이니까 나무에 올려서 저주받아야 마땅한 거예요.

 

나무에 올려서 저주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지난 오후 설교에서 제가 한 기억이 나는데, 그거 들어보셨습니까? 신명기 21장 22-23절. 하필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는다. 왜 나무에 달렸느냐 하면 하늘 쪽을 향하여, 땅과 약간 거리가 있는 관계에요. 나무에 달렸다는 말은 땅에 엎어져 죽은 것이 아니고, 쳐다보듯이, 누가 보듯이 죽은 거예요. 그걸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죠. 제가 설교하면서 그 말씀을 몽땅 누가 가져간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다 가져간다고 했죠. 비빔밥으로 제가 예를 들어서 했잖아요. 두 사람이 비빔밥을 시켰는데 한 사람이 전화 받고 끊었는데 한 사람이 다 먹었다고. “내 비빔밥 어디 갔노?” “내가 다 먹었다.”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을 예수님이 다 가져갔어요. 다 가져가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무위에 올라가버립니다. 이 나무위에 올라간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요한복음 3장에서 모세가 놋뱀을 들어야 한다고 하거든요. 이 들어야 한다는 말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면서도 땅에서 표현한 하늘의 모습을 땅과 간격을 띄우면서 높이 쳐다봐야 한다. 쳐다봐야 한다는 사실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중보자가 나무위에 달려 돌아가셔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이미 아버지께서는 저주받은 자가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 전에 나무 위에 달린 자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있어도 그건 저주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버지(S)와 예수님(P)의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말씀의 완성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P의 자리에, 말씀을 완성하는 P의 자리에 충실해야 되는 겁니다. 충실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죄라는 것을,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다 보여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중보자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 서서, 그것도 구원받을 사람, 예수님S와 자기백성P의 관계에 있게 될 사람,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는 그 기도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것밖에 못해요. 모든 인간들의 한계가 그거에요.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의 극한에서는, 이 고통이 나한테 대충 왔다가 가게 해달라는 그거밖에는 못해요. 욥도 마찬가지고.

 

인간을 대신해서 다 이야기해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면서 자기가 지금 P의 자리에 있다는 외침이에요. 그리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것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성립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것뿐만 아니고, 예수님이 벌써 점선으로 된 P라는 것을 확보했다는 것이 됩니다. 확보하는데 성공했어요.

 

그 다음에 빈자리, 점선으로 된 P의 자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제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집어넣게 됩니다. 집어넣게 되면 이 집어넣은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집어넣은 사람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이 놀라운 고백이 터져 나오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죠. 성령께서.

 

이 사람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만 바라보는 이미 영생 받은 자가 되고, 축복이 머물러 있는, 그 사람이 어디를 가도, 서울 가도 서울에 축복이 가 있고, 부산 가도 부산에 축복이 가 있고, 어디를 가도 축복을 유발시키고 보여주는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교도소에 가도 축복이고. 마치 요셉처럼. 어딜 가도 주께서는 함께 하셔서 요셉으로 하여금 복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가 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왜냐하면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가 움직이니까.

 

이러한 관계를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위에 예수님처럼, 예수님도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물론 예수님을 안 믿고 핍박한 사람들이죠. 오늘날도 우리가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청와대 누구한테 전화했어요? 아무한테도 전화 안 했죠. 자기 일가친척이라든지 누가 와서 때리지 말라고 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죠. 그냥 그대로 짱돌이 날아오도록, 예수님께서 장치를 그렇게, 미장센이죠. 장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무대장치를 그렇게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그렇게 했을 때에 이 돌을 던지는 바로 옆에 사람을 다이렉트로 본 것이 아니고, 옆에 돌 던지는 사람한테 “니 죽는다. 니 지옥 간다.” 이렇게 한 게 아니고,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중심, 중핵을 경유해서 이것을 다시 주변(바깥 원)에 있는 사람들을 해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나라, 또는 천국의 나라, 라고 하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기 31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아브람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제가 지난 번 수요일에 설교를 했죠.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브람은 아브라함을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죠. 인간의 한계는 자기가 상상한 한계 바깥으로 스스로 자기가 갇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상상한 그 안이 자기의 상상한 전부가 되고, 그게 현실이 됩니다.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펜스라고 했죠. 펜스를 친 존재가 누구라고 했죠? 악마인데, 악마를 이 세상 신이라고 했죠. 이 세상 전부는 야구장처럼 악마가 펜스를 쳤다 이 말입니다. 이걸 설교할 때 아우른다 했죠.

 

그러니까 복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이고, 내일 되면 모르지. 모레 되면 모르지. 나는 알지만 저쪽 미국은 모르지.’ 이게 아니고, 복음을 안다는 것은 세상 전체를 다 아울러서 한꺼번에 다 아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전체는 다 어디에 갇혀있다고 했습니까? 펜스에 갇혀있다. 악마, 펜스, 이걸 제가 무슨 쇼라고 했습니까? 트루먼 쇼. 1998년 작품인데, 세트장이에요. 만두 찔 때 덮어주는 모양처럼, 반원모양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보면 섬이 하나 있고, 바다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트루먼을 어릴 때부터 생중계해가지고 세계 모든 사람이, 심지어 중국까지 중계가 됐다고 해요.

 

뭔가 이상한 트루먼 쇼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획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기획자입니다. 우리는 악마가 쳐놓은 펜스에서 하죠. 그럼 이 펜스에 어떤 낙서가 되어 있겠습니까? 낙서라고 하는 것은 지난, 지난 주 낮 설교에서 했는데, 이 낙서를 두 자로 뭐라고 했던가요? 이 낙서를 종교라고 했고, 이 낙서를 지난주에는 삼위일체, 신학이죠. 신학을 알면 구원된다고. 근데 신학은 마귀가 준 건데?

 

신학은 개인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학을 알면 구원받습니까?” 질문 자체의 시작이 이렇게 돼요. “이런 식으로 하면 구원받습니다. 언제, 몇 월 며칠에 구원받은 것을 알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구원파의 신학이잖아요. 칼빈주의 신학은 뭡니까? “하나님의 예정되어서 구원받습니다.” 이게 칼빈주의 신학이에요. 칼빈주의는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학끼리 싸우고 한국교회 썩었고 신천지가 이단이라고 하는데, 둘 다 이단이에요. 둘 다 십자가 복음 같으면 교회에서 다 쫓아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은 이미 악마의 능력에서 벗어난 분이 유일하게 규범으로, “오직 이것뿐이야!” 하고 제시한 것이에요.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다. 근데 이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신학이 있고, 성경공부가 있고, 큐티가 있으니까, 인간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워요. 근데 십자가는 뭡니까? 어리석은 거예요. 미련하고. 미련하고 어리석다 이 말이죠. 왜?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그럼 나는 어떻게 구원받아야 합니까?”라는 것이 나오죠. 니가 그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이 펜스 안에서 세상 악마가 우리 마음속에 그런 말이 나오도록 퍼트린 거예요. “144,000까지 전도하면 구원받습니까?” 여호와증인이나 신천지나 다 그런 것 하잖아요. 144,000을 채운다고, 자리채운다고. “일천번제하면 복 받습니까?” 이건 기존교회에서 하는 거고. “방언하면 구원받습니까?” 이건 순복음 교회나 기존교회에서 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의 계시, 허연 영감이 나타나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 받으면 구원받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세상 악마가 뭘 막기 위해서?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피 능력을 가로막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걸 누가 그렇게 시켰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시킨 이유를 지나 낮 설교 때 했습니다. “욥을 한번 봐라. 욥을.” 욥은 하나님하고 마귀하고 내기를 안 했으면 제 3의 욥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욥은 제 3의 자기가 완전한 것도 몰랐어요.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인줄 상상도 못했어요.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서 구원받는지를 내가 짐작도 못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욥 안에 욥이 구원받는다고. 동질성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중심에 중심 핵,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죠.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심지어 우리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천사가 와서 이야기해도 믿지 마세요.

 

십자가 복음이 아니면 구원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해놓고 그 다음에 행함 문제로 나갑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니가 어떻게 성령으로 시작해서, S죠. 주격이 하나님인데 니가 어떻게 S자리에 들어가느냐, 니가 어떻게 S자리에서 P자리로 해서, 니가 어떻게 관리주체로 삼아서 너를 구원시키겠느냐, 이 말입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자기가 주체고 자기가 객체인 이 예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평생을 자기 인생을 자기가 꼬깃꼬깃, 매일같이 일기 쓰고, 매일같이 Q.T하고, 성경에 줄 그어놓고, 성경 보면 줄을 다 그어 놓아가지고 더 이상 줄 칠 데가 없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성경 다 베껴 쓰고, 정성이에요. 이 베껴 쓰는 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거든요. 힌두교나 불교에 보면. 티베트에 가면 불경 돌리는 것이 있잖아요. 안 가봤지만. 안 가 봐도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그램 보면 다 나와요.

 

그러니까 천주교인들은 마리아상 앞에서 머리부터 시작해서 어깨에다 미사일을 팍팍 꽂죠. 그 모든 짓거리를 마귀가, 그렇게 해야 사람이 뭔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요. 백팔번뇌라고 해서 묵주 돌리고, 이런 짓 하고 있어요. 교회 오면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 받고. 꿇어앉으면 더 은혜 받고. 박수도 잘 쳐야 되고, 손깍지 끼워서 모아야 되고, 옥색 원피스 입고 오늘도 무사히, 앞에서 주여! 하면....., 습관은 제 2의 천성이 돼요. 악마가 아예 칩을 박아놓아 버렸어요.

 

그래서 교회 오래 다니고 중직들 가정 같으면 뭐 앉았다 하면 저절로 나와요. 주~여! 주~~여! 말을 해? 뭐라고? 주~~여! 믿씁니다. 뭘 믿는데? 믿어야 할 것은 저를 믿지 말게 하옵소서. 그걸 믿어야 해요. 저의 이 행동을 주께서 쓰레기로 취급해주시옵소서. 선교회비 내는 이 행동을. 돈 내는 이 행동을. 십일조 내는 이 행동을 완전히 쓰레기로, 배추잎사귀보다 더 못하게 버려도 괜찮습니다. 그걸 믿습니다. 왜냐, 구원의 규범은 그게 아니거든요. 내가 행동을 바르게 하면 이게 성깔에 따라서 아침 다르고 오후 달라요. 아침에는 성질냈다가, 그리고 자기가 미워하는 집사가 1부 예배에 오면 자기는 2부 예배에 가고, 이래 갑니다. 꼴 보기 싫어가지고. 모르겠어요. 이번 수련회도 누구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안 나올 수도 있는데.....,

 

우리가 예배나 어떤 모임이 있다고 하면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얼마든지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환경을 못 가게 만들면 못 가는 것이고, 가게 하셔서 가게 하는 그런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 강의하고 싶다고 해서 강의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우리가 P의 서술어 자리에 있고, P의 자리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림을 다시 그리면 눈에 보이는 세상, 바깥 원이에요.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중핵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예수님이 다녀간, 공생애의 아픔을 남기고 다녀간 이 공생애를 우리가 반복해서, 되풀이해서 그 다음 기수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아브람은 절대로 아브라함을 생각 못했어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이 없는데서 불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먼저 이삭이 있죠. 이삭이 있어 버리면 노선이 바뀌어버립니다. 광주가려다가 부산으로 가버려요. 지옥가야 될 노선이 이삭을 통해서 노선이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쪽으로, 지옥으로 갈 때는 룰루랄라죠. 룰루랄라. 룰루랄라는 이걸 선형적시간관이라고 해요. 선형적시간관. 뭐냐 하면 그냥 과거, 현재, 미래가 철로처럼 직선으로 되어 있는, 선형적 시간관으로 쭉 갑니다. 내가 교회 몇 년 다닌 것, 유아세례 받고, 앞으로 내가 뭐 장로 되고.....,

 

근데 천국으로 가는 노선으로 바뀌어버리면 이게 선형적 시간이 아니고, 묵시적 시간이 돼요. 내일은 난 몰라요, 가 돼요. 내일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오늘 살았으면 오늘로 족하니라.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 이 말은 내일의 계획에 대해서는 니가 주도권이 없다는 거예요. 내일의 계획을 뭐로 채워 줄지, 그거는 주께서 S의 자리에 있으니까, 주격 자리에 있으니까 주께서 또 어디로 몰아넣을지, 또 어떻게 될지.

 

예를 들어서 1월 8일에 수련회를 하는데 1월 7일에 제가 독감에 걸리면 어떻게 돼요? 독감 걸리면? 취소죠. 취소되는 겁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독감주사를 맞았지. 그럴 줄 알고. 그래서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예정이 아니고 미래예정이에요. 주께서 마중을 나오는 예정이에요. 마중을 나온다는 말은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니가 예비하거나 준비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하등의 자격이 없어요.

 

그 확실한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소고기 사주면 집에 들어가지.” 이래 안 했거든요. “가락지 주면 아버지 얼굴 봐서 한 번 집에 들어가 주고.” 이게 아니고, 뭘 주느냐 하는 주도권은 아버지한테 있지, 자기는 그냥 고개 푹 숙이고 ‘받아만 주시옵소서. 이게 웬 횡재고?!’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런 마음. 근데 거기에 가락지 예정되어 있죠. 소 잡는 것 예정되어 있죠.

 

예정이 나를 마중 나와 버리면 거기서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되겠다, 하는 그것이 예정의 자리에서 우리는 빠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게 예정이라는 마련된 자리에서는 빠져야 되고, 구원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은 다 주님의 의해서 준비한 것이지, 내가 미리 예정해서 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내가 구원을 예정해서, 이거 예정으로 구원받은 것은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의한 예정을 날마다, 매일같이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삭은 아브람을 위해서 죽은 자가 되죠.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람은 죽은 자가 되죠. 아브람에서 이삭이 나왔잖아요. 이삭의 이름이 웃음이라 말이죠. 이 웃음은 불신앙이거든요. 사래 때. 이삭이라는 열차가 달린다면, 그 안에 자기가 있다면, 옛날 열차를 보면 석탄을 태우잖아요. 그래서 삐이익 하고 경적을 울리면서 움직이죠. 그 탄의 재료가 뭐냐 하면 아브람의 불신앙의 재료가 되어가지고 기차가 천국으로 가는 거예요. 아브람의 불신앙이 날마다 아브라함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이 벌써부터 시작된 곳, 그것이 뭐냐 하면 부활의 세계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은 적이 없죠. 아브람은 죽은 적이 있지만 아브라함은 죽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살아 있어요. 아브라함의 이름을 줄 때마다 그 이름 안에 죽어도 살아있는 내용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거든요.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 내용물로 들어간다 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고.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음이 극복된 상태에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우리의 육은 마땅히 죽어야 되고, 육이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말은 성경에 보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매일 우리의 묵은 옷을 벗기는 거예요. 물론 비듬도 떨어지고 각질도 떨어지죠. 쓰레받기로 쓸어 담아보면 그게 우리의 시체 아닙니까? 지연된 죽음. 자꾸 죽음의 흔적들을 떨어내죠. 그 사람에게서, 흙에 속한 육체에게서. 자꾸 죽습니다. 보톡스 맞아봐야, 청와대에서 맞아봐야 한 번 신경 쓰면 그 맞은 효과 다 날아가요. 소용없습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는 아브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죄 값은 사망이 되죠.

 

만약에 제가 수련회 할 때, 제 의식이 뭐냐 하면 불신자들이 처음 왔다, 복음을 전혀 안 믿고, “이야기하기만 해봐. 내가 너한테 욕할 거야.” 라고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 너무나 현실적인 사람들만 왔다고 치고, 그렇게 강의를 합니다. 그럼 제가 말을 던지죠. 인간은 왜 늙죠? 그렇게 공격하고 싶으면 제 질문에 답변을 해보세요. 인간은 왜 늘고 왜 죽느냐 말이죠? 여러분 살고 싶죠? 다 살고 싶죠. 다 살라고 하니까. 근데 왜 죽어요? 살고 싶으면 계속 살아야지 왜 죽습니까? 모르잖아요. 그럼 그 다음에 나오는 멘트가 뭐냐 하면 로마서 6장 23절, “죄 값으로 죽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고 죄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제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뭐냐 하면, 사람 뭐 있어? 그냥 살다가, 교회 가서 착한 일 많이 하고, 착한 일 많이 하면 천당 가겠지. 뭐 복음이고 뭐고 지가 아는 상식대로만, 교양인 같으면 교양인답게, 아는 대로, 우리도 좀 알아! 이래 하는데, 저의 질문은 그렇게 교양 있는데 왜 죽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교양이 있는데? 어쩌다보니 죽죠. 어쩌다보니 죽는 것이 아니고 죄 값으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서른 살 때까지만 짓고 그 다음에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뿡뿡 방귀를 뀌는 거예요. 죄를 계속 낳는 거예요. 계속해서. 죽음에 가까우니까 누적된 방귀가 더 많은 거예요. 각질이 더 많고. 그걸 ‘아이고, 아쉽다. 교회 가서 착할 수 있었는데?’ 하지 마시고, 그게 하나님의 조치에요. 누구나 그래요. 누구나. 복음을 알든 말든 누구나 그렇게 죽어요.

 

그러나 복음 아는 사람은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친절함으로 보여요. 하나님의 친절함으로. 고맙습니다. 또 늙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이 내려갔는데 눈을 찝을까? 올릴까? 제가 오후설교 때에 그런 이야기했죠. 인생을 살면서 가끔 고소할 때가 언제냐 하면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자기보다 더 늙어 보일 때. 갑자기 예상 못한 희열이 오는지. “아이고, 야야! 니 와 그리 늙었노?” “니도 만만치 않거든?” TV에 탤런트가 오랜 만에 나와 보세요. 굉장히 갑자기 늙어 보이죠. 이순재 나왔을 때 갑자기 늙어 보였는데, 꽃보다 청춘에 나와 가지고 괜찮아 보이잖아요.

 

사람들이 본인이 나서야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는 오해입니다. 그냥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어도 매일같이, 주님이 매일같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그게 하루에요. 하루. 매일. 매일매일 주께서는 나를 가지고, 오늘 이렇게 한 번 다듬어볼까? 오늘 이렇게 해볼까? 매일같이 우리를 조각품처럼 손댑니다. 어떻게 빨리 처치할까하고, 죄 값으로 어떻게 더 늙게 보이게 할까하고. 그래야 성경말씀과 합당하니까.

 

석가모니는 늙어죽었어요. 맞죠. 예수님은 죄 값으로 죽었어요. 그게 달라요. 석가모니는 우리하고 같은 류類인데, 예수님은 같은 류類가 아니에요. 석가모니랑 합쳐서 우리는 전부 다 아브람이라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그 악마의 펜스에서 성공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는 어떤 방식으로 오신다고 했어요? 전에 다른 강의에서 다 한 것을 하려니까 미안한데, 다 듣는 사람도 있지만 다 안 듣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주사기 방식으로 들어온다고 했죠. 쑤실 때는 분명히 들어왔는데, 조금 지나니까 들어온 구멍을 못 찾겠어요. 그러면서도 지금 이 속에, 성령은 보증이라고 했어요. 성령께서 미리 선물로, 보증의 선물로 와 있어서 우리는 세상을 볼 때에 바깥 원에서 안에 있는 중핵, 중심핵을 경유해서 다시 세상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이 육신 때문에 갖고 있는 죄를 재료로 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그 기쁨을 우리에게 계속 주죠.

 

그 기쁨이 뭐냐, 주의 일은 한결같이 이미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어요. 이것을 마태복음 22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니가 뭘 모른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설교하시잖아요. 설교 안에 이미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어요.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지어다. 사두개인은 들을 귀가 없어요. 알고 똑똑하기는 한데 들을 귀가 없어요.

 

지금 이 땅에서 있는 모든 결혼제도는 흙에 속한 인간들끼리의 결혼제도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천사와 같이 결혼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성차가 없어요. 남성, 여성 차이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남과 여가 있어요. 이거는 인간들이 의논하고 회의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정해준 거예요. 그 이유는 남자가 여자를 넘어설 수 없고 여자가 남자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성차가 있는 것을 성차가 없는 식으로 전가될 수가 없어요.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동성애가 있죠. 왜? 동성애가, 성경에 보면, 레위기고 로마서고, 구약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요. 동성애는. 동성애의 특징은 성차를, 하나님이 정해준 성차를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무시하고 있어요. 동성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욕이 과도해요. 이성으로서는 자기 성욕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부터 자극이 안 돼요. 변명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처음부터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나는 남자지만 속에는 여자가 있어서 그런다고 이렇게 변명을 해요. 변명을 하는데, 일단 그 변명에 대해서는 약간의 동의할 내용은 있어요.

 

뭐냐 하면 이게, 동성애가 가정환경 탓이 굉장히 많습니다. 가정환경 탓. 성차에 대해서, 남성, 여성의 분리됨에 대해서 환경적으로 날카롭게 그 가정이 체제가 잡혀야 되고 분별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엉망진창이고, 아버지 술주정뱅이고, 어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안 저래야 돼! 나는 안 저래야 돼!’ 나는 안 저래야 되니까, 그게 뭐가 돼버렸느냐 하면 자기 성격의 정체성이 돼버린 거예요. 아버지가 엄마를 막 때리게 되면 갑자기 엄마에게 애정이 더 가게 되가지고, 엄마하고 자기하고 정신적으로 같은 일치감을 느껴버리면 동성애 속성이 늘어나는 것이죠. 그게 뭐냐, 습성은 제2의 천성이 되니까, ‘내가 왜 이러지?’ 하다가 ‘그래! 이렇게 되는 것이 편해.’ 그럼 자기 육체의 편안대로 사는 거예요. 편안대로. 동성애의 특징이 뭐냐, 환경이고 뭐고 없어요. 지 편안대로 사는 거예요.

 

마귀 짓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기준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모독하는 거예요. 그럼 이 땅에 남녀는 왜 있는가? 그것은 제가 지난번에 설명했는데, 전에 남자가 먼저 있고 다음에 여자가 있잖아요. 남자가 여자를 만들었거든요. 만들었는데, 사실은 남자가 여자를 만든 것이 아니고, 여자도 하나님이 만들었죠. 남자가 잠잘 때 했으니까. 이 남자가 모든 것의 대표자가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난 뒤에 남는 것이 뭐냐, 생명나무, 나무에 생명이라는 것이 붙었잖아요. 이 생명을 여자 이름에 붙여버립니다. 그럼 여자가 남자를 새로 만들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인데, 여자의 후손은 아들이에요. 요한계시록 12장에. 아들 낳은 자만이 여자고, 그리고 여자에게서만이 아들이 나온다는 것은, 남자, 여자의 진정한 의미는 이 지상에 어떤 남자가, 여자가 이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여자는 이미 남자에게 복속됨으로써 남성을 바라보는 여성이 되는 거예요. 저주받아가지고. 선악과 먼저 따먹어서 저주받아서. 모든 여자의 희망은 남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는 남성이 희망이 아니고, 이거는 그 자체가 생명인데, 기존의 모든 여자는 남자처럼 되면 사회에서 성공한 여자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여자는 자기를 소모하더라도 사랑을 원해요. 뭘 주던지 사랑을 원한다니까요. 남자와 하나 되는 그 사랑을 원해요. 결합되는 것. 근데 남자는 뭘 원하느냐 하면 소유를 원해요. “나 오늘 색시하나 얻었다.” 얻었다, 소유잖아요. 근데 여자는 자기 소유를 버리고 저 사람과 나와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원하는데, 그러니까 영원한 부부사이는 의견일치가 안 됩니다. 부부의 행복을 기대하지 마세요.

 

남자는 여자를 소유로 본다니까요. 남자가 나이가 많으면 소유에 실패해요. 아내라는 소유에 실패하고 자식이라는 소유에 실패하고. 여자는 남편이 주는 사랑에 버림받고 자식의 사랑에 버림받아요. 남자는 소유에 버림받고 여자는 사랑에 버림받고. 둘 다 동상이몽이에요. 그럼 왜 못 헤어지는가? 돈 때문에 못 헤어져요.

 

그게 이 세상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주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 죄를 더 육적으로 확대시키고, 이 땅을 확대시켜서,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심판하시고, 벌써, 성령이 주신 벌써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사탄의 펜스에 갇혀있었던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저 남들처럼 되기를 얼마나 소원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쓰레기 같은, 같은 존재인 것을, 같은 죄인인 것을, 이제는 명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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