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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8 21:44:02 조회 : 689         
사무엘상 23강( 덮개), 마태복음 85강( 죄에 갇힌 혈육) , 17202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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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개 (삼상 7: 1- 4)                                                                                                          대전-23강  

 

이근호  

 

 

2017년 2월 28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7장1절-4

 


(삼상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삼상 7:2)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삼상 7: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 7: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사무엘 상 7장입니다. 구약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와 다른 점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언약궤가 있다라는 것. 언약궤라는 것은 하나의 나무 상자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상대로 하면 될터인데 사람을 상대로 하지 않고 언약궤와 상대해서 일을 벌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궤가 있는 나라와 언약궤가 없는 나라와 싸움을 붙여요. 그 상자의 이름을 방금 뭐라고 했지요? 언약궤이지요.

 


언약(궤)에 궤를 괄호를 치면 앞에 남는 게 있어요. 언약이지요,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만드신 이유는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하나님이기 때문에 만약에 언약이 감추어지면 하나님도 같이 감추어져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반드시 언약을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이 없는 하나님을 구분하기 위해서 언약의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하고 다른 이방 민족은 신이라고 하지요.

 


야곱의 이름이 바꾸지요. 바뀐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름이 바뀐 의미가 인간이 신과 대하여 싸운다는 거죠. 그래서 신과 여호와는 싸움합니다. 구약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특징은 이 세상의 모든 신들과의 싸움을 벌이시는 거에요. 이 모든 신을 두자로 하면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이스라엘 입장입니다. 그런데 다른 민족 입장에서는 너희도 신을 믿고 우리도 신을 믿으니까 (우리의)신도 (너희의 신과)동등하게 대우해 달라는 겁니다.

 


같은 종교니까 종교를 서로 존중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12절에 보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했고 동등이라든지 존중이라든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관계이기 때문이에요. 좋게 지내는 관계가 아니고 한 쪽을 죽이는 관계에요. 한 쪽을 없애는 관계입니다.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래서 기독교와 불교가 친하게 지내고 천주교와 기독교도 친하게 지내고 이슬람도 친하게 지낼 수가 있어요. 오늘 날은 다 종교이니까. 하지만 복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오늘은 심지어 복음과/기독교가 싸움을 벌여야 됩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은 신이에요. 신이라 함은 삼위일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존재란 뜻이에요.


복음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것은 삼위일체를 전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를 전하잖아요. 십자가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발적이고 우연적이에요. 바람 같은 거지요. 사건이라는 것은. 내 쪽에서 사건을 장악 할 수 없어요.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는 턱하니 있기 때문에 내가 뭘 같다 바치면 흐믓해 하시는 대상자가 되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신이라는 대치 구조가 신약에 와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을 갖는다고 해요. 소유지요. 종교를 갖고 신을 갖는다는 말은 옛날 조선 시대에 할머니들이 안방에 뭘 모셔놓기도 하고 지금은 성당에도 마리아상 세워 놓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차에 십자가 걸어 놓고 하듯이,

 


뭔가 턱하니 존재로 있는 거에요. 왜 그렇게 하냐 하면 본인이 존재이기 때문에 나와 그리고 하나님, 너를 늘 상대 할 수 있는 관계로써 맺어 줄 때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심적인 안정성을 얻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발과 우연에는 안정성이 없어요. 잡으려 하면 도망가고 가만히 있으면 찾아오고 이런, 안정성이 없지 않습니까? 꼭 예전의 개장수 남편 같아요. 지가 오고 싶으면 불쑥 집에 와서 한 이틀 자고 다음 날 다시 개 팔러 만주고 가버리고,

 


집에 오랜만에 몇 달 만에 와가지고 동침하고 애 놓고 지는 가버리고 올 때 마다 얘는 하나 씩 늘어가요. 그러다 와서 얘는 잘 크나? 그만 자자! 하고 또 가버리고 그렇게 옛날 여자들은 당연한 줄 알고 맨날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이런 것이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에 나오잖아요.

 


사사기 17장에 보면 미가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미가는 여호와 하나님을 즉, 언약 사건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을 만들어버려요. 우상으로 만들고 거기에 전문 종교인을 세웁니다. 미가의 제사장으로, 소년 레위 인을 세우고 연봉으로 계산해줘요. 일 년에 연봉 얼마에 옷 한 벌 주고 시키는 일이 뭐냐하면 여호와를 우리 집에 모셨으니까 축복을 계속 해달라는 거에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은 축복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양면성을 갖고 있어요. 저주를 계속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가 가정은 저주는 없고 축복만 계속 원하는 거지요. 제사장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인으로 보는 겁니다. 중재인으로 봐서 당신이 알아서 신에게 잘 보여서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에게 복이 오도록 조치를 좀 해 달라! 그러면 당신에게 연봉과 생활 여건을 조성해 주겠다. 이게 사사기에 나와요.

 


그런데 사사기에 제일 끝에 보면 그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아니다로 끝나는 것 같으면 조용할 텐데 구약이 아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겁니다. 전쟁을 벌이는 거에요.

 


가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전쟁을 계속 벌이게 하는 겁니다. 여기서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이건 기본적으로 아신다고 치고 깊이 있게 들어가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언약이 있지요. 그 내용을 지상에, 역사 속에 성취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가짜를 유발시키십니다. 이게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래의 하나님의 뜻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가짜를 유발시키십니다. 조용하게 되면 그 믿는 게 믿는 것처럼 되는데 예상 못할 사건이 오게 되면 기존에 있는 믿음을 가지고 처리해 보려고 끙끙 대다가 나중에는 하나님도 소용없네! 이렇게 되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는 말은 그동안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믿었다는 것이 그만 발각이 되고 들통나게 되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무엘상 4장에서 봤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고 언약궤는 빼앗기는 그 이야기입니다. 언약궤로 이방 나라인 블레셋을 쳐서 이겨보고자 했는데 오히려 대패 했지요. 그리고 언약궤 마저 포로로 잡혀서 블레셋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블레셋을 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를 빼앗긴 게 되요.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쏙빠져 저쪽의 하나님으로 가버렸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지금 누가 적인지 분간이 안되지? 그런 뜻이에요. 그들은(이스라엘은) 블레셋이 적 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블레셋은 적입니다라고 고자질하는 본인이 여호와의 적이에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스라엘 편에 속한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 언약을 지키기 위한 전쟁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들을 지켜 주실 줄로 아는 거에요.

 


아까 말한 미가의 가정이 제사장으로 여호와를 믿으니 우리 가정이 복 받을 줄로 생각하는 거에요. 이제 종교라는 기독교가 어떤 점에서 종교가 되는 지 아시겠지요?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믿는 가정이 복을 받는 다는 것은 사사기 17장의 미가가 말한 것과 동일한 것이고 사무엘상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을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귀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가 귀해서 그런 거에요.

 


여호와를 섬기고 순종하는 척 하지만 화살이 부메랑처럼 다시 휙휙 돌아서 나에게 귀착 되는 거에요.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교회에서 옆에 있는 집사하고 비교하는 거에요. 누가누가 더 잘하나에 대해서 그렇게 보상을 누가 획득했는가? 보상 획득한 것으로 믿음이 좋다 나쁘다를 측정 할 수 있는 계기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에선 그것을 부추기지요. 어떤 장로는 그 동네에서 부자 됐는데 너희들은 뭐하노? 이런 식으로,

 


어느 권사는 새벽마다 기도 했는데 기도의 제단을 쌓아서 자식들마다 다 출세했는데 너희들은 뭐했노?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세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수상한 거에요.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양적으로 측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도외시(상관하지 않거나 무시하는)합니다. 돈 잘 벌면 복이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렇게 여기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돈 번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다지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장6절에 보면 나오지요. 입는 것 먹는 것을 족한 줄 아는 마음이 복된 건데 “김 집사 봐라! 저 아들 이번에 복 받았어! 먹는 것, 입은 것으로 족한 줄 알잖아!” 이런 것을 광고 시간에 하는 목사는 없잖아요. “거봐! 좁은 길로 가잖아요. 여러분! 다들 본을 받읍시다!” 거지 나사로 보세요. 죽을 때도 고난 받는 것 보세요. 이런 것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수상한 겁니까? 복음과는 싸움상태, 전쟁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공부해야 될 내용은 이렇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언약중심으로 할 때 그냥 언약 중심으로 하면 되는데 왜 언약궤 중심으로 가느냐? 도대체 이 궤라는 것, 영어로 하면 BOX 거든요. 아카시아 나무 상자, 언약과 상자라는 물질성에서 언약이 어떻게 함축해서 담길 수 있느냐는 겁니다. 구약에서입니다. 신약은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에 물질성이 없어요. 십자가 목걸이 백개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복음 아는 게 아니에요.


신약은 물질성이 아니라 사건인데 물론 이 사건은 우리 자신, 성도의 변화로 이어져요. 오늘 할 내용은 바로 물질성으로 표현된 언약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도의 변화된 사건으로서의 약속이 신약이니까 새 언약, 즉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구약은 인간의 행함을 요청하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의 행함으로 다 완료되었기 때문에 성도에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뭘 하느냐 성도는 변화의 대상이 되요. 내가 나에게 어떤 행위를 가미해서 내가 원하는데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예상 못하는 쪽으로 변할 때, 다른 말로 하면 예상한데로 절대로 변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도둑이 오면 우리 집에 개 있다. 도둑 오기만 해봐라! 우리 개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렇게 우리가 예상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막상 도둑이 왔는데 개 짖지도 않아 주인이 겁먹고 있는데 도둑이 그 순간 심장병이 있었는지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면 이건 예상 못한 거잖아요.

항상 뭔가 준비된 내 신앙으로 남들을 이기리라 했는데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나의 준비된 신앙으론 절대로 내가 구원 받지 않는다는 것. 구원이라는 것은 준비된 신앙마저도 재껴 버리고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기도를 얼마나 했는데, 요번엔 어려움이 왔을 때 내 기도빨을 한번 시험해 봐야 겠다고 그런 식으로 예상하겠지만 실제로 우리의 변화는 그런 기도가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방해만 되는 쪽으로 인도 하십니다.

 


왜 그러냐하면 사람이 뭔가 기대하게 되면 거기서 갈망이 일어나요. 갈망은 마귀의 무기입니다. 나는 뭐를 갈망한다, 그때부터 모든 상황이 좁혀져요. 그것을 단편적이라고 하는데 아주 사고방식이 좁아져요. 좁아지면 뭐를 놓치게 되냐 하면 데살로니가 전서 5장16절을 놓치게 되요. 범사에 감사함을 놓치게 됩니다. 요것,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면 그때 감사할께요. 범사에 감사가 안되고 얼마나 단편적으로 되냐하면.

 


이렇게 감사꺼리가 많이 널렸는데 감사치 않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상당히 짜증나는 거에요. 아침에 엄마가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반찬을 열 가지를 했는데 식탁에 앉아서 전부 다 숟가락 빨면서 먹을 것 없네! 할 때 “뭐가 먹을 게 없어!” 전부 채소이고 후랑크 소시지 없네! 하고 “그건 몸에 해롭다. 그런건 먹으면 안돼! 트렌스 지방이 많아서 안돼!” 하면 난 엄마가 하는 것보다 마트에서 파는 게 더 맛있다! 이러면 짜증난다는 거에요. 성의를 무시하면.

 


주께서 감사할 것을 주~욱 늘어 놨는데 숟가락 들고 먹을 것 없네 하면 “치워라! 먹지마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엄마! 김 그건 치우지 말지!” 하잖아요. 처음부터 김이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반찬이 많을 때는 원래 감사가 안 나오고 반찬이 달랑 하나 밖에 없을 때는 감사가 나와요. 그럴 땐 교육을 좀 시키세요. 반찬 투정하면 보란 듯이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김치 한 가지만 놓고 먹게, 그렇게 해야 다음부턴 성질 고치지 자꾸 해줘 버릇하면 끝도 없어요나중에 관절염 걸려요. 밥해주다가, 정안되면 네가 해 먹어라!해요.

 


언약 = 상자입니다. 언약 = 궤 이지요. 언약궤가 뭐로 되어 있냐하면 외부에서 볼 때엔 상자, 이 상자를 볼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있어요. 사람들이 이 상자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들어 있는 안의 내용물입니다. 상자 그 자체에 주목하지 않아요. 뭔가 담는 것이거든요. 무엇을 담았을까? 하나님에 언약을 담았다고 하니까 언약은 언어거든요. 물질이 아니에요. 언어 또는 기호 또는 상징이니까 이건 비 실체에요. 실체가 없는 거에요.

 


비실체인데 상자에 담아 놓으니까 언약궤는 언약을 담는 상자니까 상자를 떼버리면 렁약이라는 것이 여기 어딨지? 상자 빼놓고 사람들은 언약을 비 물질화의 언약이 실제로 물질화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우상처럼 섬기게 되어 버려요. 이것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특징이 뭐냐? 어떤 것으로도 형상화 시킬 수 없습니다.

 


형상화 시킬 수 없다는 말을 누가 오해하느냐 하면 AD. 600년경의 무슬람 마호메트는 형상화 될 수 없다는 말을 뭘로 이해했냐하면 물건인 형태로 만들지 말라로 오해해서 무슬람 성지에 기호로 표시하면 형상화 안 한 것으로 착각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형상으로 만들지 마라고 한 것은 움직이는 것, 다시 말해서 사건이라는 거에요. 인간이 지금 존재로서의 신을 믿잖아요. 심지어 여호와라 해놓고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신을 자기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하나님의 언약이 끼어들게 되면 자기는 문제가 없고 언약과 마주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복을 받고 구원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고 중간에 개입이 되면 신을 섬기는 우리의 변화 득, 우리 자신의 존재감도 언약으로 인해 달라진다는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미처 생각 못한 거에요.

 


잘난 내가 잘난 예수를 믿어주니 “하나님이여! 이 대견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겨서 죽어서는 천당 보내주고 이 땅에서는 복 주시옵소서!” 그러면 주께서 “네게 그런 권리가 있어?” 이렇게 하지요. “제가 얼마나 착한데요.” 이렇게 나온 다구요. 그런데 중간에 누굴 보냈습니까? 예수님을 보내지요. 예수님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한번 비교해보라는 거에요.

 


비교해 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누구를 섬기냐 하면 여호와를 섬기는 거에요. 본인들이, 어떤 본인들이냐 하면 율법에 정통한 본인들이, 울법이라는 것은 그들이 모세 언약을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을 철두철미하게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자없지?” 묻고 하자없어! 하면 OK! 그 정도로 완벽에 완벽을 기한 것.


안식일을 지키자에 대해서 그것에 대한 세칙까지 준비해서 안식일을 지키자는 모호한 포괄적 개념을 추상적으로 치밀하게 해서 안식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날 하지 않아야 될 조항을 수십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그 마음을 서로가 안다면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그 순수한 마음을 안 보시겠어요? 그렇게 보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얼마나 교회에서 많이 들었던 거에요?

 


마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을 보시는데 그 마음이 썩었다고 보시는 거지요. 그런데 마음을 봐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진보가 있으니까 그 진보한 폭 만큼 좀 알아달라는 거에요. 내신 성적 올라가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이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모델로 삼는 거에요. 라이벌로 삼는 겁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 하시면 자긴 초짜이니까 한 이틀 하다가 점점 늘여서 40일 넘으면 건방지다고 할까봐 39일에서 멈추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 따라잡기 할 때 신앙적 포만감이 어떻겠어요? 그 포만감이 어느 정도냐 하면 라면 끓일 때 100 〬 되면 뚜껑이 들썩들썩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선 자기를 당할 자가 없어요. 교회가 완전 무림의 고수 판이에요. 누가 더 기도를 오래 하느냐? 누가 헌금을 목돈 많이 내느냐? 그것의 경쟁 장이 되고 말았어요. 이미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다 했던 것 들 이에요.

 


그런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당했는데 그 살해당한 결과에서 나온 사건을 되풀이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안해도 되는데 왜 하느냐! 인간들아! 안해도 되는데 그냥 살아도 구원 되는데 자꾸 하고 싶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니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이다. 복음에 대한 반 복음,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 다른 성령, 악마가 있기에 그리스도 앞을 팔 벌려 자꾸 가리는 거에요. 십자가도, 십자가는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으로 보려면 저를 보세요.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스페인이나 서유럽에서는 순교자를 그렇게 추앙하는 겁니다. 남들이 할 수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 성을 거의 근접했던 사람들의 모델들이 그들의 일 년의 달력이 되요. 순교 날이 휴일이 돼서 덕분에 유학 간 아이들이 실컷 놀 수 있는 거에요. 한국에선 노는 날 별로 없다가 독일에 가면 노는 날이 실컷 있어서 맨 날 놀고 또 논데요. 성 세바스찬 날이라고 놀고 부활절이라고 놀고 크리스마스라고 놀고 종려주일이라고 논데요.

 


시간의 스케줄에 의한 반복적인 교육을 통해서 대대로 신앙적인 교육을 시키게 되면 자기 민족은 독일 민족이나 서유럽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민족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시각적인 것으로 이게 바로 인간의 한계이고 우리가 지금 인간의 한계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상자+언약을 성사 시켰다는 거에요. 이 안에 뭐가 들었느냐? 이 안엔 물론 돌 판이 들어 있어요. 나중엔 두 가지가 더 추가 되지요.

 


광야를 지나면서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가 들어가고 그 다음엔 모세에게 고라 자손이 대들다가 땅이 갑자기 쫘악 갈라져서 파 묻혀 버렸지요. 파묻히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다 죽이려 하니까 모세가 나서서 “그들을 다 죽이면 안되시잖아요! 백성이니까 저를 봐서 봐주세요!” 그렇다면 아까처럼 하나님은 변화시키시니까 이스라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고 모세 언약 체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론의 지팡이만 살구나무의 싹이 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에 그 지팡이가 들어갑니다. 먼저 들어 있는 돌 판은 그냥 돌 판이 아니고 깨진 돌판, 무언가를 대변 해주듯 그렇게 깨어졌다, 원망했다, 불평했다는 결국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뭡니까? 인간에 대한 부정성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자! 하나님! 우리는 팔짱끼고 볼테니 멋진 솜씨를 좀 보여주세요!” 이게 아니고 우리 앞에서 멋진 솜씨를 보여주면 우리는 박수치며 믿어 드리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놀라운 신기한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깜놀! 깜짝 놀라면서 세상에! 이렇게 신기하게, 하나님이 이렇게 전지전능 하실 줄 몰랐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관람하듯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급습을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것 이라는 존재는 경련이 일어나겠지요. 급습한다는 것은 예상 못할 때 방어체계가 안되 있는 데 갑자기 쳐들어와서 흔들어 버리지요. 급습한다고 하니까 나에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되는데라고 하지만 급습이라는 말을 공격적으로 쓸 수밖에 없지만 결과에 대해선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어느 날 그녀가 내 눈에 들어 왔다. 이것이 선보는 자리에서 선본지 일주일 만에 결혼했어요. 이런 경우가 생기거든요. 이건 뭐냐하면 둘이 마주치자마자 불꽃이 번쩍 튈 때 이것이 급습 아닙니까? 아름다움의 급습. 사랑의 급습, 사랑의 침투. 다들 그런 경험은 없으시겠지만 해라! 해라해서 억지로 한번 보고 별다른 남자 없을 것 같고, 그러니까 결혼 하고도 아직도 급습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마치 일본 아줌마들이 배용준을 찾아오듯이, 돌진해서 그냥 들어오는 겁니다.


급습해 버리지요. 이렇게 급습하는 자체는 본 내용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뚜껑, 주목해야 될 것은 뚜껑에 주목해야 되요. 덮는 것, 덮음. 이 뚜껑을 속죄소라고 하지요. 은폐이지요. 덮는다는 겁니다. 덮는 뚜껑을 보면 어디를 봐도 언약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뚜껑이라는 자체가 원망과 만나서 고유적 위치, 고유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고유 위상, 고유 위치를 계속해서 우리 인생 속에 되풀이하고 반복시키는 거에요. 이게 바로 새 언약이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계속해서 용서해 주는 거에요. 끊임없이 덮어주는 겁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출타하고 난 뒤에는 혼자 있을 때 제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제 경험 상 누룽지탕이에요. 일단 값이 싸요. 마트에 가면 2,360원합니다. 이게 두 끼 분량 정도입니다. 여기에 반찬은 김만 있으면 되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냐하면 요리하는데 이건 요리도 아니지만 누룽지탕의 특징이 있어요. 가스 불에 물 올려놓고 얼마나 쉬운지 물 부으면 얼마 안 가서 들썩들썩 거려요.

 


그러면 자꾸 귀찮게 할래! 짜증내면서 뚜껑을 열어 주다가 그런데 뚜껑 열어주면 빨리 안 익을것 같아서 내 생각에 다시 덮어요. 또 들썩들썩 거려요. 이게 바로 반복성이라는 거에요. 내 생각에는 뚜껑을 닫아서 빨리 익혀서 먹고 싶은데 이것을 존재의 완결성. 지금 나다움을 유지하고 싶어요. 자랑하고 싶어요. 난 이렇게 믿음 좋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난 이렇게 살았습니다. 참 착하지요? 이뻐해 주세요. 쓰담쓰담. 해줬으면 좋은데 자꾸 뚜껑이 열려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내가 완결성이 아니라 미완결성이에요.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면 갑자기 성질 나오고 신자도 아닌 것 같고 뭘 믿었어요? 특히 돈에 관한 문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한 것을 알면서도 기차표 예매 할 때는 더 싼 것 없나? 한 달 전부터 예매하려고 하고 요세는 예매도 안되요. 예매 하려고 알람까지 맞춰 놓고 있다가 해요. 이 천원 아끼려고 틈새시장 엿보고,

 


마트에 가서도 1+1 하면 더 사고 싶고 이게 뭐냐하면 결국,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게 아니고 돈을 사랑함이 되지요.(웃음) 신앙생활이라는 게 이게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기도 자주하고 헌금 자주하는 게 아니고 신앙생활 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늘 뚜껑 열리도록 조치하신다는 것을 감사히 받는 거에요. 인생이라는 것이 내게 속한 게 아니라는 거에요. 내가 내 인생을 예상해서 예상한대로 목표 세워서 나가는 게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내일은 이렇게 할래! 그런 예상하지 마세요. 내일은 무슨 사건이 날 지 알 수 없습니다. 내일 비가 100ml 정도 왔으면 좋겠어요. 대모 하는 거 꼴 보기 싫어서. 덮는다는 것, 은폐한다는 것,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너희 수준에서 노출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너희가 말하는 삼위일체 신학이나 2000년 기독교 교리로는 절대 하나님은 노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는 이성이거든요. 합리적이다는 말이죠.

 


왜 자꾸 합리적으로 이성을 따집니까? 이성적인 그물망에 하나님을 가둬두려고 하는 거에요. 삼위일체에다 자기를 가둬두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안다는 거에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예수님이 맞지요? 그리스도라는 것은 중보자란 뜻이고 왕이라는 뜻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 맞지요? 제가 알지요? 구원해 주세요!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렇게 안다는 것, 안다는 것이 아무 씨잘대기 없는 것이라는 상황이 올 거에요.

 


백 날 알아봤자 그 앎이 후에 눈물로 쏟아질 날이 올 거에요. 내가 수 십년 성경 공부 한 게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거에요. 그것이 합리적인 이성은 매끈한 표면이다라고 들뢰즈라는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사람은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깔끔하게 매끈하게 정리 정돈 하려하고 대패로 쫙쫙 밀어 나무의 결을 낼 때 속이 시원하잖아요. 그것처럼 또는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면 매끈매끈 하지요. 그것을 좋아하는 거에요.

 


내 안에 자갈 밭 같은 것이 없기를 바라는 거에요. 포장을 하고 싶어 해요.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했던 거에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가식하는 거에요.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울퉁불퉁한 것을 바깥에서 콘크리트 쳐서 바깥층을 매끈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을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는 거에요. 울퉁불퉁을 매끈하게 만드다는 말은 사실은 많은 요소가 여기서 빠져 나갔다는 뜻입니다. 빠져 나갈 때 어떤 것이 빠져 나가겠어요?

 


어떻게 작용하느냐? 자기 선별, 자기 선택성이 여기에 가동 되요. 이건 내 마음에 안 들어! 이런 것을 공리주의라 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만 채택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 일가친척 중에서도 나에게 유리한 사람에겐 아부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화도 안하고 하는 자기 선택성이에요. 과학에서 특히 생물학의 기본적 원리가 이겁니다. 인간의 자기 선택성이에요. 이것을 다윈은 자연 선택(설) 이라하고 신의 작용이라 하지요.

 


그들도 신을 안 믿는 게 아니에요. 신을 이야기 할 때 자연 선택에 의해 한다는 겁니다. 그럼 자연 선택설의 내용은 뭐냐? 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을 하기 싫고 과학자니까 자연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겁니다. 이런 건 이야기 하나마나에요. 왜 그렇게 된 건데? 하면 “알아서 그렇게 된 거지 난 몰라!” 이거와 똑같은 거에요. 너는 왜 그리 얼굴이 이뻐? 하면 “뭐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네!” 너는 왜 갑자기 이뻐졌는데? 하면 손 좀 댔어! 코에, 이건 자연 선택이 아니잖아요.


과학자들이 너무 비겁한 사람들이에요. 모르겠다고 하면 될 것을 자연 선택이라는 말을 하고 모든 것을 여기에 다 집어넣는 거에요. 과학적이고 합리적 이성으로서 그들은 율법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고치고 메시야가 오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꾸준히 하고 콘크리트 다지기를 해 온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선 그것을 보며 오시는 게 아니고 뒤로 오실 줄은 꿈도 못 꾼 게에요. 예상도 못했어요. 뒤엔 누가 있느냐 하면 요렇게 되지 못한 세리와 창기가 있어요. 거지들, 저주 받은 사람들, 저주 받은 사람이란 소경과 귀신들린 자, 벙어리 된 자, 중풍병자 들. 이미 합리적인 법으로, 법과 질서 체제라는 것은 모든 것을 매끈하게 만드는 거에요. 법과 질서의 그물망에 있어서 매끈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법과 질서를 만든 사람들의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겁니다.


따라와 보려면 따라와 봐라는 거지요. “우리 같이 똑똑하고 우리같이 영민하고 우리같이 현명하지 않으면 이런 격조 높은 윤리와 도덕을 감히 너희 백성들이 해낼 수 있겠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으로선 할 수 있는 건 다했다는 거에요. 더는 없는 거에요. 최고의 경지를 다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 하셨잖아요. 마 5장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그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이것이 유대인들의 종교 체제에요.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날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최고로 믿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교회에서 주장하고 강조하고 주목하는 법에 대해서 위반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위반이 없는 사람이지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돈 벌어 보세요. 위반 안 할 수 있어요? 남이 주는 밥을 먹을 때는 손에 물 묻을 일이 없고 그냥 먹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요리하는 사람은 손을 칼에 베이고 양파로 눈물 흘리고 하잖아요. 일반 사람들이 돈을 번다는 것은 결국 뭘 한다는 말입니까? 경쟁한다는 말이잖아요. 경쟁한다는 말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요? 없어요? 무슨 사랑이에요? 사랑한다는 말도 굉장히 위험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그 말 안했으면 좋겠어요. 이들이 양심을 팔아서 얻은 잉여 생산물을 종교인들은 거저 먹으면서 자기의 착함에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학교를 기존 학교로 안 보냈다. 그러면 나쁜 짓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겠지요. 집에서 홈스쿨링을 한다든지 대안 학교에 간다든지 아빠 엄마가 계속 가르치면 되니까 어떤 엄마가 자기 집 앞뒤로 친정 부모님과 시댁 부모님을 사이에 두고 손자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 쪽에선 영어를 한 쪽에선 수학을 가르킨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지난 주 수요일에 했던 영재 발굴단에서 나왔는데 학교도 안 보내요.

 


학교를 안 보내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이 패역한 세대에서 부모로써 차마 지옥 구덩이에다가 더러운 것 묻으라고 모르면 몰랐기 안 이상 남을 패는 건 괜찮은데 얻어맞고 왔을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진화론을 배울 수도 있고 하나님 없는 사고방식으로 배울 때 부모로서 자식에게 미안해서 신앙인으로서, 자식이 이해한다면 이해한다는 조건하에 가르치는 부모의 돈독한 정이 커서도 계속 부모에게 효도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을 보고 하는 거에요.

 


그리고 홈스쿨링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은 태초에 학교는 없었다는 것, 학교는 편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교육은 부모가 책임지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것은 농경시대의 이야기고 농경시대의 고급 기술자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고 할아버지 였어요. 왜냐하면 노동 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에 인구가 집약해야 되요.

 


그래서 세계의 역사를 말하지요. 농업혁명이 있고 난 뒤에 공간은 좁아졌고 시간은 늘어났다. 역사가 만드는 거에요. 시간은 옛날 수렵시대에는 먹고 그냥 끝내고 죽던 말던 관계없었는데 공간은 좁아졌고 시간은 늘어 난 거에요. 나중에는 공간도 늘어 날 수 있어요. 유목하면 그렇게도 되요.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평탄한 율법적, 합리적인 것으로 말고 들어와 버리십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메세야를 마중 나오기 위해서 선봉장에서 뒤를 통해 와버렸을 때 사람들은 뭘 생각하냐 하면 갑자기 이들의 직업이 부러워지는 거에요. “아휴! 나도 청기 될껄! 세리 될껄!” M런 뜻이 아니에요. 아까 언약궤에서 은폐 했다는 말은 덮는다는 말이 뭐냐하면 뭐를 생산하란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생산된 죄를 알아서 처리를 했고 세리와 창기는 자기들이 밥 먹고 살겠다고 나오는 모든 비리에 대해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요. 밥은 먹고 살아야 되겠고 죄 안 짓고는 못 살겠고 “어찌~합니까?” 임재범 처럼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어찌 할 수 없는 거에요. 바로 그런 탕자를 하나님께서는 지금 만들고 그런 것을 보고 싶으신 거에요. 특정 직업이 구원해 주는 게 아니에요.

 


이게 바로 언약궤가 갖고 있는 비밀입니다. 시작을 분명히 나로부터 시작하는데 시작하는 지점을 너는 찾지 말아라! 그러면 시작점이 없습니까? 네가 감당 못할 너를 현 시대에서 시작점으로 간주하면 되요. 못난 내가 복음의 시작이에요. 만약에 십자가로 시작을 해버리면 십자가를 모델화 시켜서 예수님처럼 고난 받으려고 설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할 때도 자기를 자학하고 때리고 헌금도 목돈내고 “ 난 돈 없이 산다”를 과시하고 나는 이렇게 돈을 초월 했다를 보여주고 싶고 나는 아프카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 가서 청춘을 바치려하고 이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을 관람하며 매료되요. 자기가 자기에게 매료되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버리는 겁니다. 자기의 조치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를 설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마 주께서 기뻐하시겠지!” 그러나 그렇게 설정해 버리면 설정한 것이 주님이 존재가 되어서 사건을 가로 막는 게 되요. 그래서 언약궤는 뭐냐 어떤 존재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사건을 유발하는 상자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어떤 상자이냐? 언약궤에 들어 이T는 내용물이 있지요? 이 내용물을 현실화 시키는 사건이 유발됩니다.


언약궤 안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원망과 불평과 짜증이 있지요. 그것을 그 뒤에 반복해서 조치를 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마음씨가 나쁘고 믿음이 없어서 짜증내고 불평한 것이 아니고 이건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수정 할 수 없는 아담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아담의 죄 성, 악마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짜증내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런 것을 주께서 기다리신 거에요.

 


짜증내고 불평하는 순간 성경 말씀을 한번 보세요. 어느 말씀도 우리가 지켰다고 나 설 수 있는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어떠한 권면이나 구약의 십계명부터 어떤 것도 지켰다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성경 해석을 언약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십자가의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을 언약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이렇게 되어 버려요.


다섯 명의 처녀와 다섯 명의 처녀가 있다. 신랑이 와 버렸다. 오자마자 열 처녀가 둘로 갈라져 균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열 처녀가 한 묶음인데 오심으로 구분되었어요. 그럴 때 다섯 처녀가 구원받은 다섯 처녀를 보고 부러워하면 안돼요. “ 진작에 기름 준비할 껄!”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되요. 구원 받은 다섯 처녀가 “그봐! 진작에 기름 단디 준비하라고 했잖아!”

 


미리 사전에 준비해야지!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전혀 구원받은 처녀의 마음씨가 아닙니다. 인간이 뭘 준비하는 게 아니에요. 왜? 두 부류, 열 명 다 졸았습니다. 안 졸라고 성냥개비 눈에 꽂아도 소용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원인으로 우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기름 준비를 다섯 명이 했는데 네 명이 준비했고 한 명이 아직 준비 못했고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면 주님은 오시지 않았어요. 이 말은 다섯과 다섯을 구분하는 모든 권한은 다섯 명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일방적으로 있습니다. 와서 다섯 명과 구분 할 수 있는 조건을 주께서 만들어 내시는 거에요. 기름이 있다 없다는 일방적인 조건입니다.


만약에 기름 준비 한 것이 세 명과 일곱 명이라면 다섯 명이 자 준비 될 때까지 오시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의 근거가 어디 있냐 하면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진정성 있게 이야기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재림 하시지 않는 거에요. 내가 내 구원의 원인으로서 개입했다는 것이 주의 뜻과 어긋납니다라는 고백. 이것이 언약궤에 담긴 내용입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7-03-24 19:49 
죄에 갇힌 혈육 (마 22:41-46)                                                                                             대전-85강  

 

이근호

 


2017년 2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2:41-46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태복음 22장 41절부터 보겠습니다. 41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거에요. 지금까진 바리새인 쪽에서 먼저 질문을 했어요. 질문을 한다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사람 대 사람을 만나잖아요. 보통 거리에서 만나면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안부를 묻잖아요. 사람들이 만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사람 대 사람이 만나는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만나는 사람들의 주변에 뭐가 있나 하면 그 사람마다 살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이 있어요. 그 사람ㅇ리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단어 하나를 끄집어 낼 때 단어 씀씀이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살아온 환경, 촌사람인지 도시 사람인지 다 나와요.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단어 선정에서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 이야기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기 전에 네가 내 사람으로 포섭 될것인지 말 것인지 계속 견주는 거에요.

 


내 밑에 오게 되면 당신이 우리 일에 협조 할 용의가 되어 있다고 생각 하겠지만 우리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우리가 세운 유대인들의 정치적 질서를 위해 당신을 제거 할 수밖에 없다. 이미 대세는 촛불 집회로 기울었기 때문에 당신 편은 없다는 거에요. 실제로도 예수님 편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목사님! 12제자들 있잖아요?” 그들도 다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지느니라” 그렇게 해 놓고 말씀에 응하게 하였다고 했어요.

 


이 상황도 예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던 겁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예언을 믿는 거에요. 말씀을 믿는 거에요. 주님이 알아서 하실거에요. 걱정 안해도 되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자기들의 세력권 속에 들어오느냐 마느냐 였는데 마태복음 22장 4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을 던진다는 말은 예수님의 세계가 먼저 바리새인을 공격한 게 되지요.

 


여기에서 마주침이 형성되요. 충돌, 부딪힘이지요. 부딪힘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서로가 도저히 공통성이 제로라는 것, 전혀 공통성이 없다는 거에요. 공통성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단절’이에요. 연결 다리가 끊어진 거에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 올 수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어갈 수 없는 거에요. 부딪힘이에요. 부딪힘을 분명히 하면서 드디어 서서히 십자가로 다이렉트로, 지름길로 가시는 겁니다.

 


마태복음을 이야기 하는데 처음엔 예수님이 평탄이 가시다가 공고다 언덕으로 급속히 가시는 겁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어요. 오병이어 때도 그렇고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십자가에 가까이 가니까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이) 예수님은 훌륭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다 떨어져 버려요.

 


교회에서도 전도 할 때 십자가이야기 안 하지요. 복 받은 이야기를 간증 집회로 했다가 나중에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끄집어내기가 참 난감해요. 심지어 복 준다고 해서 1~2년 다니는데 거기다가 십자가가 실은 고난이야기하면 “진작 이야기하지!” 도로 다 집으로 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교회운영비는 어디서 나옵니까?

 


어떤 당회에서 오죽했으면 십자가 컨퍼런스를 열겠느냐고요. 얼마나 설교 시간에 십자가를 이야기 안 했으면 따로 십자가를 이야기 하겠느냐고요. “뭐 관심 있으면 오시던지, 시간 있으면” 이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참 비겁하지요. 돈은 돈대로 챙기고 복음은 복음대로 전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가짜들이 그런 짓들을 하지요.

 


그렇게 공격을 하면 부딪히게 되지요. 예수님이 말씀으로 공격을 하게 되면 그들 안에 감추어진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이성적으로 포장된 안쪽에 있는 것들이 파괴되겠지요. 들통 나겠지요. 이것이 함축된 주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바로 우리에게 찾아ㄴ오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해요. 그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자식 10명 하루아침에 다 죽어버리지요. 재산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속에서 불이 나지요. 왜 쟤들은 가만두고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러십니까? 하다가 나중에는 입을 다물었지요. “고난을 주던 뭐를 주던 참 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자유가 있는데 저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실은 저만 생각했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이어져요. 욥에게 찾아온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실 때는 우리도 모르는 가장 원초적인 것을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주님 말씀의 창끝이, 그러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느냐? 이 문제거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을 아는 것에 자신이 없어요. 왜? 무슨 일을 할 때 무슨 마귀 짓이 나올지 장담을 못합니다. 좋을 때나 좋지 자존심과 마지막 남은 명예와 체면에 대해 시비 걸고 나오면 자식이고 가족이고 소용없어요. 무슨 욕설이 나올지 상상도 안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우울증에 걸이고 스트레스 받고 힘들게 사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터트릴 자리가 없어서에요. 교회에 가서 욕을 하겠습니까? 옆에 사람이 듣는데, 교회에 가서 내 남편 XX 이다라고 해봐야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냐 하면 그 집사가 지금 남편에게 욕을 하는 것 같지만 우회해서 누굴 욕하는 거에요? 하나님 자신에게 욕한다는 것을 뻔히 다 아십니다. 저도 알겠는데 주님이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십일조 하면서 “자! 먹고 꺼져라!” 그렇게 하고 내는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돈 밝히기는 아이고! 자~ 1/10, 이렇게 해놓고 벌주기만 해봐라! 그렇게 돈을 좋아하다니” (본인이) 이상한 교회에 가 놓고 자기가 30배, 60배. 100배 노리면서 줘놓고 성경에 십일조 내라는 그런 것 없다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예수님의 공격인 창끝을 한번 보라고요. 그것은 내가 모르는 나를 내 속까지 친히 가이드로 인도해줘요. “ 네 속에 이런 것 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의 속에는 육이 있었던 겁니다. 육을 번역하면 나는 ○○의 자식이다. 육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혈육이에요. 인간은 혈육에서 못 벗어납니다. 아무리 부모가 나빠도 누가 내 부모의 욕을 하며 그 인간은 용서가 안되고 내 자식이 아무리 욕을 먹여도 누가 내 자식을 나 말고 다름 사람이 손 지검을 하고 대신 나무라면 그 인간의 멱살을 쥐고 흔들 겁니다. “네가 뭔데? 내 자식을?”

 


심지어 남편이라 할지라도 내 자식을 건드리면 용서가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편 입장에선 황당한 거에요. 자식을 하나 나았는데 DNA 50% 주었다고 내 자식이라고 하면 안되지요. 가위, 바위, 보를 하던지 몰아주기를 하던지 이렇게 해야지요. 그래서 4주 조정기간 이후에 법원에 가잖아요. 자식은 누가 키울 것인지, 냉각기간 거쳐서, 자식은 누구 것이냐 말이에요. 이런 문제에서 자식은 무구 것이냐? 이러면 나중에는 그 부모 문제만 아니에요.

 


자식을 밀어주는 친정 쪽과 시댁 쪽, 집안끼리의 싸움이 된다고요. 혈육을 다른 말로 하면 뭐가 되겠어요? ‘집안’이에요. 인간은 그 집안이라는 범위를 못 벗어나는 거에요. 자기 선택 자기자유, 마음대로 했지만 사실은 혈육 안에서의 찻잔 속의 풍랑이에요. 커피 잔 속의 풍랑이에요. 잔물결, 뛰어봤자 우물 안 의 개구리에요.

 


“너 같은 자식을 둔적 없다, 나가라!” 해놓고 그 자식이 감옥에 가면 보석금은 누가 냅니까? 부모가 사채라도 빌려서 내고 데리고 나올 때 등짝 한번 때려 주지요. “너는 부보 아니면 벌써 죽었어! 부모의 중요함을 이제 알았지?” 등짝 맞고 애는 또 그러고 (웃음) 혈육입니다. 혈육에서 어떤 인간도 못 벗어납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혈육에서는 못 벗어나는데 만약에 벗어났다고 칩시다. 혈육에서 벗어 난 것을 보고 뭐라고 하냐하면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늘 주 번째 강의 제목입니다. ‘죽음’입니다. 혈육에서 벗어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내가 죽는 게 아니고 혈육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죽는 게 왜 죽음이 아닙니까? 자식이 제사를 드려주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래서 옛날 선조들이 딸을 그렇게 싫어 한 거에요. 기어이 씨받이를 부르던지 해서 아들을 낳아야 되요. 왜? 아들을 낳아야 제사를 지내지요. 부모가 재산이 좀 있고, 재산이 있다는 말은 부동산 좀 갖고 있고 4층 정도의 건물이 있고 본인은 치매 직전에 있을 때 자식들을 호출합니다. 자식 서너 명이 마음 단단히 먹고 부인들을 데려 오지요. “마지막 유언이다.” 전신 있을 때, 정신이 있다는 말은 자기 힘으로 주소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주소를 안 적으면 유언장이 안 되거든요. 주민등록 번호하고 쓸 여력이 있을 때 합니다. 그럴 때 "제사 누가 가져갈래? 제사 네가 가져갈래? 그럼 4층짜리는 네 것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유언장이 제일 효력이 있어요. 1/n 이 안되요. 주님등록 번호 적고 주소 적힌 게 최고지요. 치매 걸이기 직전에 해야 되요. 병원 의사까지 동원해서 지금은 치매 안 걸렸습니다라는 보증서까지 해서 도잘 찍고 해야 되요.

 


그래서 죽더라도 안 죽는 거에요. 영원히, 자식이 있으면 영원한 겁니다. 그런데 둘째가 와서 “제가 제사 드리겠습니다.” 해서 둘째가 제사를 가져갔습니다. (막상)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 두 달도 안되서 “도로 형님이 (제사)가져 가세요.” 제사 탁구 대회가 벌어집니다. 강 스파이크로, 제사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가 툭탁툭탁, 제사를 가져간다고 재산을 다 받아놓고도 입 싹 닦고 “형님이 가져 가이소” 이렇게 되는 것.

 


이게 뭐냐하면 모든 사람의 내부에 있는 악마적 요소에요. 이런 제사를 교회에서는 뭐로 바꿨나하면 추도 예배로 바꿨어요. 계속 살고 싶어서 목사 불러 놓고 구천에 떠도는 영혼 천당에 보내 달라고 그렇게 하는 거에요. 추도 예배보다 더 노골적인 것이 있어요. 천주교에서 하는 것인데 뭐냐하면 미사가 있어요. 이것은 추도 예배 정도가 아닙니다. 안 믿고 죽은 부모라도 미사(면죄부) 드리면 연옥에서 빼줄 수가 있어요.

 


성당에서 누가 빼내주나 하면 천국의 천사가 아닙니다. 천국의 예수님 옆에 누가 있나 하면 마이라가 있고요 마리아는 예수님 엄마니까 대선 실세거든요. 최순실처럼 (웃음) 실세니까 빼내 주듯이 마리아 옆에는 12제자도 있어요. 12제자가 성자가 돼서 밑에서 올라오게 되면 마리아에게 압력을 가해서 지옥에 간 사람들을 빼줄 수 있습니다. 돈은 성당에서 챙기고, 이런 것을 (교회의) 중보기도라고 볼 수 있어요.

(질문) 목사님! 어떤 사람은 제사를 지내도 된데요. 우리가 갖고 있는 의미만 틀리면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술도 먹어도 된다는데요?

제가 방금 이여기 한 것은 하라! 하지 마라! 의 이야기가 아니고 추도 예배를 안 드리고 미사를 안 드려도 우리는 늘 그렇게 하고 싶어 해요.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육을 이길 수가 없다고 “나는 교회에 다니면서 추도 예배는 금했습니다.”라고 해도 우리 마음은 예수님보다 나의 미래가 사랑스럽고 걱정되고 소중한 거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까 언약을 이야기 했지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죄 되게 하시는 겁니다. 창끝이,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 말씀이 창이라면 한번 보라는 이야기이지요. 창끝을 보게 되면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고 이미 저질러 진 일에 우리가 그 늪에서 빠져 아무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뭘 해도 늪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남 욕 할거 없어요. 추도 예배는 안 드린다고 하지만 우린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자식들이 나를 좀 기념해 주고 나를 위해 모임도 하고 은근히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인이 나를 대신해 주는 겁니다.

 


광주 강의에서 한 예를 다시 들어야겠네요. 귤을 여러 개 놓고 그 중에서 샘플을 하나 뽑는다고 합시다. 샘플이란 말은 그 나머지와 동급이라는 뜻이에요. (샘플이)유별난 게 아니에요. 그 중 샘플 뽑아서 천국에 보내면 결국 간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다 똑같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겁니다. 행함이 아니고.

 


구원을 받는데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육 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그러면 육이 뭐냐? 죄인 됨이에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여는 부흥회에서는 자꾸 회개하라고 하는 데 그건 우리가 기억나는 것만 하지 평소에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는 아무리 끄집어내려 해도 다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주님은 기억 난 죄만 용서해 주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육 자체에 대해서 이미 용서해 주신 거에요.

 


이건 뭐냐 하면 갇혀있다. 죄에 갇혀 있는 거에요.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는 것, 뭐 하는 것, 전부다 우리가 갖고 있는 육의 죄성을 폭로해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박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내 이름으로 구원 받지 않습니다.

 


이근호 “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내 이름은 죽은 이름이에요. “네가 믿음도 모르면서 믿는다 했구나!: 그러니 내 이름으로 구원해 줄게 ”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쳤지요? 그들이 올 때도 알아서 주님을 찾아왔습니까? 하나 둘 씩? “선생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죽은 거 보니까 후회스럽습니다.


드라마, 요새 하는 역적이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아무개가 노비인데 얻어맞아서 형편없을 때 아들이 홍길동인데 그제서야 깡패들을 다 불러 모으지요. “선생님! 이제야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드라마 보셨지요? 이처럼 우리가 알아서 나온 게 아니라 주께서 알아서 찾아오시는데 찾아오셨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도권을 예수님께 넘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잖아요.”

 


사랑은 급습이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냥 내 속에 뛰어 들어오는 거에요. 팍 찌르면서 오는 거에요. 예상했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말을 못하게 만드시는 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줘요. 우리는 세상으로 향해있는데 사랑해줘 버리면 완전히 목덜미를 잡고 어딜가? 당겨 버리지요.

 


제가 주일 학교 설교를 하는데 (자료) 그림에 양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이 아주 잘 그려져 있어요. 예수님은 어디에 있나하면 그 뒤에 있어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간다 하거든요. 주님께서는 그 쪽으로 가면 안돼! 그 쪽으로 가면 이리가 있어!라고 뒤에서 조정을, 운전을 해 주시는 겁니다. 어디로 가도록? 채찍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너 때문에 내가 채찍에 맞았다는 것이 들리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제 갈 길로 늘 가는 것을 알아야 돼요.

 


살면 살수록 점점 우리가 짐승이고 동물에 불가하다는 거에요. 정신이 있을 때 인간이지 정신 줄 놓으면 개 보다 더 못해요. 우리들이, 개는요 상황 판단이나 되지요. 주제도 파악 못하면서 까불기는 혼자 까불고 그래요. 여러분 사람이 죄 짓고 싶어서 죄 짓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죄 안 지은 것은 죄를 안 짓도록 상황이 그렇게 유도됐기 때문에 죄를 안 지었을 뿐이지 우리가 그러한 상황이 되면 온갖 나쁜 짓을 다 할 거에요.

 


자기가 답답한데 술 맛보고 마십니까? 술 아니면 도저히 못 견디니까 마시지요. 10년 째 술 끊어 놓고 속상하면 술 먹고 시집 간 딸이 이혼하고 오면 아이고! 괜찮다 해놓고 돌아서서 담배피고 담배 끊은 지 2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새벽 기도하고 그 어떤 정당성이란 없습니다. 그동안 딸이 참 잘살았던 거에요. 말씀에 때가 되매 이혼한 거에요. 범사에 뭐하라고 했습니까? 감사하라! 참 말은 쉽다만 감사하고 안 하고를 네가 선별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잖아요. 로마서 8장에.

 


주께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육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이렇게 질문하지요. 바리새인들아! 육이라는 게 과거에서 현재로의 육이 되느냐 아니면 미래에서 현재로의 육이 되도록 했느냐 그 질문을 하신 겁니다. 어려운 질문이지요. 여기 46절을 읽어 보세요. 이게 뭐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완벽한 진리 체제를 갖추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리였기 때문에 너도 진리일 것이다. 라고 대드는 겁니다.

(마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 중 하나의 예가 뭐냐?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린 여자를 데려와서 이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돌로 칠까요? 한 거에요. 유대인들은 신명기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대목을 보면서 ‘돌로 치라’고 만 봤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칠 수 있다는 그 앞에 붙어 있는 그 본래의 의미를 빼먹은 거에요.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심판은 율법을 주신 분이 심판하게 되어 있지 율법을 받은 자가 심판을 하면 안돼요.

 


시험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 해답을 갖고 있지 머리 똑똑해서 100점 맞았다고 까불면 안돼요. 예를 들어서 주간 식으로 임진왜란 때 했던 전쟁 중 마지막으로 승리케 한 사람은 누굽니까? 라고 선생님이 내면 얘들이 말하기를 이순신 장군이요.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얘들 50명이 다 백점 맞은 거에요. 선생님이 약이 올라서 전부 빵점을 만든 거에요. “이순신 장군 맞잖아요?” 아니 이~순신 장군 요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하면“내가 수업 시간에 분명히 말했는데”

 


이게 바로 플라톤의 삼각형이에요. 변이 세 개다. 그런데 삼각형을 10명에게 그리게 해보세요. 다 다르지요. 그 원형은 하늘나라에 있다. 이게 플라톤이 말한 겁니다. 그것들은 다 복사본이고 다 가짜이고 진짜 원형은 이데아 세계에 있다. 천국 세계에 있다고 본 겁니다. 주님이 율법을 주신 분이 해답을 갖고 있어요.

 


그 해답이 뭐냐하면 죄 없는 자만이 칠 수 있다는 거에요. 그 여자가 죄 없다가 아니지요. 죄가 있는 건 맞는데 죄라고 규정 할 수 있는 건 누구 밖에 없다? 예수님 본인 밖에 없는 거에요. 그 여인을 잘 데리고 온 거에요. 사실은 질질 끌고 잘 온 거에요. 이 여자가 (간음)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처분 할까요? 하니 “처분은 내 마음대로 한다. 여자여! 내가 용서 할 께!” 이건 주님 마음대로에요. 우리가 그런 용서를 십자가를 통해 받은 거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피 흘리신 거잖아요. 피를 흘렸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기를 내 죄는 내가 회개하면 된다는 그런 범위 안에 갇혀 있는데 주님께서는 오바 하듯 내가 죽지 아니하면 용서가 없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남은 할 일은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내가 죽는다고 용서가 안되고 꼭 주님이 죽어야 용서가 됩니까를 알아 가는데 우리를 평생을 보내게 하십니다.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누가 죽인다하면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생명을 두려워해야 되요.

 


생명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생명을 대해야 됩니다. 그동안처럼 죽는 것에 너무 떨게 되면 돈 앞에 떠는 셈이 되요. 우리는 생명에 대해 두렵고 떨어야 되요. 이 말은 요새는 대통령 앞에서도 안 떨지만 높은 사람 앞에서 떨지 말고 갑질 하는 것에 떨지 말고 예수님 앞에서 떨어야 되요. 갑중에 갑은 예수님입니다. 최고의 갑질은 예수님이 하시는 거에요. 살리고 죽이고는 주님 마음대로에요.

 


우리는 그런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지요. 그 점을 설명하면 인간은 육이다.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는 것도 과거를 알아요. 과거에 우리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가 있어서 나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 묻습니다. “이 말이 맞지? 맞지?” 하는 거에요. 이렇게 인간들은 갇혀 있지요. 자기가 아는 것에 갇혀 있습니다. 맞다! 맞다! 맞다! 자! 맞다고 했으니까

 


제대로 갖추려면 미래의 천국에 들어 갈 합격을 높이는데 치중하게 될 겁니다. 확률이지요. 그것을 자기 의라고 하는데 반듯하게 살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순동 안하는 사람들 보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확률을 높이려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과거를 자꾸 되돌아 봐야 되요. 과거에 잘못 한 것은 두 번 다시 안하면 되고 술 끊고 담배도 끊고 나쁜 짓도 안 하면 되고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내가 착한 일을 못했던 것은 이젠 용기내서 과감하게 해 보는 거에요.

 


고아원에 쌀을 갖다 준다던지 전에는 기도를 30분하고 끝냈었는데 이제는 5분을 더 늘여 본다던지 전에는 성경을 두 장 정도 읽었는데 이제는 다섯 장을 읽는다던지 그렇게 해놓고 자기가 놀래요. 이렇게 장~한 신앙이? 이렇게 멋~찐 신앙이? 자기가 자기에게 놀래요. 내가 이렇게 성령에 의해 달라졌나? 막 신자가 다 된 것 같아요.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해왔던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들이 했던 것이 뭐냐? 점점 더 어려운 과제를 자기에게 내고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는 겁니다. 이왕 기도하는 것을 고통이 가미 되게 기도해 봤냐?를 묻는 거에요. 그냥 기도 하지 말고 5일 동안 굶고 기도해 봤냐?를 묻는 겁니다. 편하게 아침 11시에 기도하지 말고 새벽 4시에 와서 기도 해봤냐?를 묻는 거에요. 헌금도 천원 내지 말고 천만 원 내는 아픔을 경험해 봤냐?를 묻는 겁니다.

 


이런 것은 전부 어디에 속합니까? 과거에 속하지요?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발전이 있으면 신앙이 나아졌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을 세 자로 성화론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성화론, 장로교에서 칼빈을 언급하면서 교회에 충성하도록 매진하게 만드는 필살의 무기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해놓고 성화되지 않으면 어디에 합격하지 못한다? 믿어도 성화의 코스를 안 밟으면 천국에 탈락하거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상급이 전혀 없는, 보너스가 전혀 없는, 부끄러워서 천국에 가도 주님 근처도 못가고 저 구석에 앉아서 흑흑흑 울고 있는 “진작에 착실히 할껄! 십자가 안 믿어서~” 팬티 바람으로 구원 받는다고 상급 없이 고린도 전서 3장을 거론 하면서, 사기입니다. 이것만 사기가 아니고 다 사기이지만 대표적 사기입니다. 상급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면류관은 의로운 사람에겐 다 줘요. 의로운데 상 안 주지 않아요.

 


의로우면 다 상을 주고 죄인에겐 상이 없어요. 의인이냐 죄인이냐는 상이 있고 없고로 판단하거든요. 의인이면 다 상을 주는 데 여기서 의가 뭐냐? 율법을 지켜서가 주는 게 아니고 율법 외에 주시는 상이기 때문에 상을 받아요. 그러면 율법 외란 뭐냐? 바로 믿음으로 받는 의가 율법 외입니다. 그러면 뭘 믿느냐? 화목 제물인 것을 이미 내 죄는 처리되었음을 믿을 때 그것에 대한 상이 ‘의’의 면류관이에요.

 


면류관 앞에 ‘의’라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받았던 면류관이 이것이에요. 사도를 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의’의 면류관을 받은 거에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의의 면류관 받았으니까 이젠 사도 안하면 되겠네라고 하는데 사도는 본인이 하고 싶어서 손들고 한 게 아니고 의의 면류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사도라는 직책을 받은 것이고 우리는 그 직책을 받지 못한 것이에요.

 


우리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데 장사나 농사를 해도 괜찮아요. 그 쪽은 그 쪽 업을 해도 괜찮아요. 그 쪽은 그 쪽 일을 해서 의의 면류관을 부각시키고 사도는 사도 일로 드러내는 거에요. 물주는 자 있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누가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뭘 보시냐 하면 먼지 털 듯 털어 버리십니다. 인생 중 네가 한 것을 다 털어 버리시고 그 바닥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는 지 그것만 살펴요.

이것이 고린도 전서 3장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면 의가 되는 거에요. 의인 되는 겁니다.

(고전 3: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이것이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아무리 사람이 집을 지어도 만약에 바람이 불어 버리면 모래위에 지은 집인지 돌 위에 지은 집인지가 들통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반석이니까. 베드로를 반석이라 하지만 반석이 될 때 까지, 반석이라는 의미를 알 때까지 주님을 배신한다는 코스를 필히 밟았어야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만 배신했습니까? 우리는 매밀 같이 평생 동안 계속해서 배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기 죄에 대해서 제발! 자기가 책임지지 마세요. 책임지라는 것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당신이 예배 시간 11시인데 11시 반에 왔으니 헌금 천원 더 내야지! 저번엔 교회 출석도 안했잖아! 그러니 일찍 성가대 봉사로 때워야지!”

 


과거 어려서 크리스마스에 교회 가서 빵 얻어먹고 20대까지 안 나가다 30대부터 이제 교회 나와서 못 다한 것 채우기 위해 집사부터 시작해서 남들보다 맹렬하게 따라 잡아야지!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과거에 기억된 자기의 인생에다 미래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과거의 구닥다리 신앙의 철로에 새 철로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놓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닥다리 모든 철로가 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철로를 예수님께선 이용하시지요. “너의 죄 된 성질이 어디 가겠느냐!” 톡톡히 주께선 그렇게 활용하십니다. 십자가를 증거 하도록, 그래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지요. 또 내가 율법에는 흠이 없지만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다. 율법에 흠없이 했던 모든 것들을 뭐로 여겼다? 배설물로 여긴다. 똥, 오줌이죠.

 


집에 똥, 오줌 사진 찍어 걸어 놓고 하는 건 치매 걸린 노인이나 하는 것이지 더럽게, 상상도 하기 싫어요. 그런 것을 도배 해 놓는 게 어디 있어요! 없잖아요. 없는데 교회에선 그렇게 하고 장로나 집사들은 그렇게 한다니까요. 전도 상 받은 것, 똥, 오줌 딱 걸어 놓고 선교 회비 냈다고 감사장 해 놓은 것, 걸어 놓고 또 교회가면 역대 당회장 사진들 쭈~욱 걸어 놓고, 실제로 그걸 제가 봤어요. 안 본걸 제가 예기 안합니다.

 


그 목사님에게 제가 그랬어요. 검찰청도 아니고 왜 저런 걸 걸어 놓으냐고 (웃음). 이게 뭐냐 4대째 신앙생활, 모태 신앙, 아버지 장로에 어머니 권사, 이건 마치 상장같이 세례장 걸어 놓고 이것이 똥, 오줌을 걸어 놓은 것 하고 똑같습니다. 자기가 나쁜 짓 한 것 셀카 찍어서 걸어 놓은 거 하고 똑같은 거에요.

 


미래가 우리를 지금 결정해 놓은 겁니다. 제가 지난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지요. 현재는 미래의 조건이다. (어려운 것은 적어놓으셔도 좋아요.) 미래를 위해 지금 이렇게 돼야 마땅하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다윗에 대해 질문합니다.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선조가 되는 가를 답변해 봐라! 이 말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을 중간에 놓고 다윗의 육적인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선조가 되는 설명해 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왜 조상이 다윗의 후손으로 나와야 되는 이유를 설명을 해봐라! 그러니까 46절에 뭐라 되어 있어요? 한 마디도 답변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이 공중에 질문을 겨냥하는 게 아니고 그 인간을 겨냥하는 거에요. 인간이 진리를 가로막는 마귀 짓 하고 있음을 아울러 내용을 품어 질문하시는 거에요.

 


주께서 질문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쪽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성경에서 보면 먼저 질문한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담이에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러신 거죠. 왜 숨어 있느냐를 기정사실화 하시는 거에요. 숨어 있는 아담은 내가 창조한 게 아니라는 거에요. 뭔가 탈이 났어요. 탈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어요. 개를 밖에 데리고 나왔는데 이상해! 이건 내가 키우던 그 개가 아니에요. 갖다 버리던지 안락사 시키던지 해야되요.

 


이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일이 뭐냐하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산 형태를 갖는 거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이 이런거에요. 관계가 끊어지면 죽은 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는 건 죽은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폼 잡고 있는 거에요. “거울아! 거울아!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시체가 시체와 견주는 꼴이에요. 다른 시체와 자기하고 누가 더 때깔 좋은 시체인지,

 


서서히 망가진다는 거지요. 우리 몸의 수분이 빠져 나갑니다. 온갖 것 맞지요이영애가 부러운 거에요. 나이가 50이 다 되어가도, 그런데 배추 농사짓는 아줌마하고 비교해 보세요. 수분이 다 날라가고 없어요. 한 쪽은 70대에요. 6시 내 고향 보세요. 촌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나이 소개하면 다 놀라요. 50대인데 60-70내로 보이는 사람이 많잖아요. 빠져 나갑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가슴을 치며 청춘을 돌려 달라 해도 어떻게 누가 돌려 줘요? 어떤 탈랜트가 고백을 하는데 미스 코리아 출신인데 그 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엄마가 이쁘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땐 수분이 빠졌구먼 뭐가 이뻐요? 정말 솔직하지요? 얘들 피부의 탱탱함과 엄마하고 비교해 보세요. 엄마가 이쁜 구석이 없지요.

 


그리고 지금 기억하기로 제가 십대엔 40대 아줌마 중에 이쁜 사람이 없어요. 엄마나 40대 이모가 밖에 외출한다고 화장한 것을 보면 고관이 아니에요. 급조해서 칠한다고 나중엔 가 씻어 버릴 것을 30분에서 1시간씩 붙들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모가 하는 짓을 모를꺼야!” 얘들은 못 속이잖아요. 아빠들처럼 화장 안하고 그냥 나가면 되는데 꼭 이모나 엄마들은 꾸민다고 애를 쓰고 꾸미고 나서는 꼭 물어봐요. “얼굴 괜찮지?”라고 해도 죽은 시체에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표현은 잘못된 겁니다. 마귀가 그렇게 우리에게 교육하고 세뇌시킨 거에요.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음에 갇혀 있어요. 죽음에 갇혀 있는 이유도 모르지요. 그래서 율법을 눠서 율법에 갇혀 있다고 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래서 죄에 갇혀 있다. 율법이 주어지므로 우리는 더욱 더 죄 되게 하고 주님 앞에 갇혀 있다는 말이에요. 갇혀 있다는 말은 시간 요소가 빠져 나갔다는 거에요.

 


미래를 기대하지 마세요. 이미 체육관 안에 갇혀 있다면 100년을 살던 1000년을 살아도 갇혀 있는 겁니다. 100년 살면 살수록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뿐이에요. 가요에 60대는 아직 젊다고 오지 말라고 했지요? 70대는 보세요. 90세는 알아서 가겠다고요? 와도 안 받아 줄거에요. 점점 더 자기 본색이 드러납니다. 문제는 이유를 모른다는 거에요. 교회에 가도 이유를 몰라요.

 


복음을 알아도 성경을 봐야 되는데, 말을 라는 교회에 가도 칭찬하고 격려만 받을 뿐이지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라는 말을 들을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에서 말하는 죄란 회개하면 다시 착해질 수 있습니다를 내다보고 죄라고 하니까 죄를 지어도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면 주께서 복 주셔서 죄 용서해 줍니다라는 식으로 하니까 천주교나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백 날 기도하고 백 날 헌금 목돈으로 내도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교회 보셨습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은 뭐냐하면 자기 도취하는 것이거든요. 일종의 마약이다라는 말이죠. 거울보고 도취되듯,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러 온 사람에게 거울을 깨어버리지요. 거울의 자리에 주님의 일그러진 피 흘린 모습을 내미는 것이 진정한 복음적 설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착해서 살려주신 게 아니고 그 죄를 활용하게 되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꾸역꾸역 살려 준 거에요. 어떤 짓을 도 십일조 떼 는 건 기본이고 주일 성소 안하는 것도 기본이고 남편하고 주일 날 등산가도, 등산가나 교회에 가나 늙어 죽는 속도는 같은 거에요. 등산가고 교회가서 젊음이 유지되는 그런 건 없습니다. 보습 효과 없어요. 교회가 무슨 화장품 회사입니까?

 


다만 교회에 오므로 뭘 아느냐 하면 죽는 것이 지당하고 마땅하다는 것. 내가 더 이상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것, 죽음에, 내 죄에 대해 책임 질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그 동안 너무 놀아나서 마귀에게 교회 목사, 사기꾼 에게, 너무 놀아난 거에요.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자꾸 책임지라고 하니까 헌금은 헌금대로 내고, 돈은 돈대로 바치고 나아질 것도 없고 선교 헌금 다하고 봉사하고 알뜰살뜰 교회 청소하고 할 건 다했지요.

 


무슨 비젼 센터, 교회 교육관 짓는다고 옆에 있는 목사도 불러서, 사기꾼 불러서 교육관 짓는다 해서 주식 투자 했는데 30배, 60배, 100배로 대박나서 하나님이 약속 지키실 줄 몰랐는데 헌금하고 나서야 알았다니 어떻다니,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이렇게 안되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없어서라고 이런 식으로 응답을 알아서 확인하세요. 이런 식으로 사기를 치는 이건 서로 단짝이 돼서 패키지 쇼처럼 하는 거에요.

 


드럼치고 선교단 아이들 불러서 바람잡이하고 2부 순서로 간증집회 해서 “나도 예전엔 돈 아껴썼는 데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니까 땅에서 복 받았습니다. 대대손손, 4대 손까지,이런 식으로 하니까 ”나도 그런 거 안 믿지만 찝찝하니까 한번 해보자!“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들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고 주의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이 들리고 믿어지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누가 되겠나?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게 다윗의 자손 역할이에요.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다윗 보고 네가 죄인 되고 밧세바하고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은 미필적 고의로 살인하고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의 왕이 되는 거에요.

 


왜?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왕이란 작자가 간통 죄 짓고 했다면 그 죄인 됨을 동감하는 사람이 새롭게 구원되는 새 이스라엘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십자가 피로 다 알게 된다는 거에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주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렸느냐? 이건 샘플이거든요. 우리는 간음을 안 했지만 내 옆 사람이 간음을 했다면 나도 상황이 되면 간음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아직까지 이쁜 여자가 안 나타나서 그래요. 묻지도 따지지 않고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는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나서 그런 거에요. 아직까지 이성적으로 버틸 만 해서 버티는데 나중에 나타나면 다 주고 싶어요. 공유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거에요. 아직까지 안 나타나서 그렇지, 나타나나 안 나타나나 관계없이 이미 우리는 죽은 시체라니까요. “아직까지 죄 안 지었습니다.” 무슨 죄를 안 지어요?

 


이게 간음죄든 살인죄를 졌다면 우리는 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내가 간음하고 살인 안 했더라도 이미 같이 지옥 가는 겁니다. 같이 지옥 가는 전세 버스에 옆 자리에 있는 거에요. 저는 35번이고 나는 36번이고 같이 탄 거에요. 마지막 심판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되요. 십자가의 의미는 누가 주느냐? 다윗의 자선이 줍니다. 줄 때는 그냥 주지 않고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주는 거에요.

 


이미 용서 되었어. 언제? 창세 전 부터 용서되었어. 창세 전 이라는 미래가 현재 속에 삽입됩니다. 칩처럼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는 누구와 싸우냐 하면 내 인생 내가 책임지려는 나의 육적인 것과 안 그래도 되는데 “너 그러면 마귀에게 또 놀아나는데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할래?” 하는 소리와 우리 안에서 싸우데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순환된다고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요. 순환 펌프라는 말을 했지요?

 


액체는 고체보다 강하지요. 앞에 있는 단단한 콘크리트 같은 나의 잘난 성화가 있다면 십자가의 피가 그것을 다시 덮어 줄 때 “주여! 제가 또 나를 위장했습니다. 잘난 나 뒤로 제가 몰래 숨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살아서 지금 부활 했거든요. 지금 뭐 하시겠어요? 부활해서 놀겠습니까?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죽을 때까지 십자가의 홍보용으로 사용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나를 꾀더냐고 사도 바울이 지적 한 것처럼 십자가 사건의 계속 반복해서 십자가 사건을 언급한 이유를 이제는 우리가 알게 하고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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