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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21:23:00 조회 : 962         
사무엘상 24강(꿈), 마태복음 86강(자리) 17032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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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7-05-02 22:24 
꿈 (삼상 7: 3-5)                                                                                                            대전-24강 



 이근호  






2017년 3월 28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7장 3-5절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 7: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삼상 7:5)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사무엘 상 7장 3절 부터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할 때는 그만한 권리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할 권리가 무엇이죠? 뭘 해줬다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자격을 가지고 명령하느냐를 우리가 모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하면 우리가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요.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그만한 권리를 깔고 명령하시거든요.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지시와 명령을 할 때 그것만 보지 말고 무슨 자격으로 지시와 명령을 하느냐? 하나님과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나에게 잔소리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지시와 명령을 그냥 따르기만 하게 되면 항상 틱! 틱! 거리게 되지요. “뭘 해줬다고? 꼴랑 인생 이렇게 만들라고!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해 놓고 양심도 없나? 뭐 잘했다고 이렇게 나에게 이거하라 저거하라 명령하느냐” 말이죠.






지시와 명령을 할 수 있는 권한부터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증오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증오라 하는 것은 미운 것, 밉다는 겁니다. 증오의 하나님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선 많이 들어 봤지만 증오하는 하나님에 대해선 처음 듣지요? 증오를 내용으로 갖고 있지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굴복하는 하나님입니다. 원래 얘들 키울 때 엄마가 애들에게 굴복하잖아요. 애들은 그냘 밥 달라! 젖 달라!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 어디 커서 보자!해도 해 줄건 다 해주지만, 하나님의 증오는 심판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심판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나 성당이나 옛날부터 오늘 날도 마찬가지지만 뭘 로 쳤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다는 말을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이건 잘못된 거에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다는 것은 없는 데서 만들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라는 권리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장 9-10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없앨 수 있는 거에요.






어떤 경우에? 원래 창조 했던 취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없애버리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애들, 차가운 물속에서 200여명이 죽었는데 얼마든지 하나님이 죽이실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죽여도 감사해야 되지요. 나의 애를 죽이심으로 비로소 얼마든지 하나님이 죽이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이제야 알게 되었음을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요. 끝까지 원망하고 있어요. 그 부모뿐만 아니고 온 국민이 나서서 원망하고 있어요.






교회도 나서서 원망하고 있어요. 전부 다 책임을 하나님이라고, 애꿎은 머리 올리고 다듬던 박근혜만 당했지 실제 책임자는 누굽니까? 하나님이 책임자이지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네 얘도 한번 죽어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하는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였어요. 그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동안 도대체 뭘 믿고 있었어요? 교회에 가서 뭘 믿었어요? 자기 아들도 버리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될 게 아닙니까? 나의 얘를 챙겨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교회를 뭐로 보냐 하면 절간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기도해주고 기도 대행금 받는 거에요. 기도 처소 만들어 놓고 기도 대행금 받는 곳이에요. 아무 상관도 없어요.






하나님이여! 지시와 명령은 나에게 하지 마라! 나도 당신처럼 신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쉬울 때만 도와줘! 이거에요. 딱 이거에요. 내 것, 내가 원하는 것은 건드리지 마라에요.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랑에 보탬이 돼 이것을 저해라는 요소로 등장하면 당신을 믿지 않겠소! 라는 것이 밑에 깔려 있는 데 그게 바로 악마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악마가 예수님과 적이 되는 이유가 너만 신이냐? 나도 너처럼 신의 대우를 받아야 되겠다는 거에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신처럼 높아지겠다는 것처럼 창세기 3장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 전체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을 할 때 녹아져 있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든 증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사랑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일반 인간들은 이미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 마음 씀씀이가 악마가 갖고 있는 마음 씀씀이를 그대로 이전 받은 겁니다. 악마의 마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건들지 마라에요. 선악과 따먹은 이유가 나도 신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겁니다. 신의 특징은 뭐냐? 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거에요.






5월 6일 날 우리 교회에서 젊은 부부가 소박하게 결혼식을 하는데 주례 설교를 벌써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주례를 부탁하길 래 왜 결혼을 하려고 하느냐? 혼자 살지 왜 하느냐? 제가 묻는 이유는 인간은 항상 홀로 신이 되는 거에요. 홀로 신인데 결혼을 한다는 말은 두 개의 신이 서로 만나는 것이거든요. 두 신이 만나서 살아야 나오는 게 뭐겠어요? 티격태격 싸우는 일 밖에 뭐가 있겠어요?






원래 날 때부터 신이고 악마인데, 결국 결혼하는 이유는 무지에서 오는 거에요.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결혼하는 거에요. 착각해서, 나는 홀로 신인데 아마 네가 내게 굴복하게 될껄! 이런 착각으로 하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하지 말라고,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 주제 파악을 위해서 결혼케 하는 데 결혼을 해봐야 정말 마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마귀구나! 알게 되는데,






결혼을 하면 무엇을 챙겨야 하면 되냐 하면 이것을 알아야 되요. 고통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요구 할 권리가 아닌 반대로 남의 요구에 의해서 내가 고통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해요. 네가 없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고통을 너로 인해 고통이 생겼을 때 고통을 감래 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면 처음부터 오해의 연속이 될 뿐이라는 거죠. 이미 결혼 한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하게 어쩔 수 없고 모든 관심을 자식에게 돌리지만.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에게 부모가 기대를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식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거지요. 내가 여기 있다면 남편이 옆에 있고 자식이 있다면 그들이 내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로 인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고통이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을 그냥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 고통이라고 표현 했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저주, 땅이 저주 받았다는 것.






우리가 사는 땅이 빼도 박도 못하게 매일 새로운 고통을, 저주를 숙제 받듯 부여 받게 된 겁니다. 그 저주는 우리를 향한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오야봉인 사탄에게 주는 겁니다. 힘들고 어렵게 되면 사탄은 하나님께 회개할까요? 그대로 반항하고 저주를 퍼부을까요? 저주를 퍼붓겠지요. 그 중간 과정에 인간들이 악마가 시키는 대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인생을 망치게 하고 내 자식을 3년 동안 물에 담가 놓느냐? 이런 식으로,






“보상금 4억 6천이 다냐? 교실 하나 비워라!” 그렇게 못 받은 사람들도 있는데 정치적인 조직이 되고 말았어요. 민주당은 그것을 이용하고 전부 박근혜가 머리 손질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현실로 오늘 날 정치 상황으로 얼마나 잘 반영해주고 있습니까? 감정 이입이 돼서 “나는 나라에 대들꺼야!” 그 사람이 나라에 대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지금 모르고 있어요.






사람들이 나라에 대해서 감사할 때는 산길을 좋은 차를 타고 가다가 아스팔트길이 아니고 자갈길이 나올 때 10m정도 나오다가 다시 아스팔트길이 나올 때 뭐가 고마움이 나오냐 하면 역시 대한민국이 잘 살긴 하는구나! 이런 산길에 아스팔트길을 놓았으니까 그때 고마워해요. 그냥 쭉 아스팔트길이면 고마운 줄 모르는데 아스팔트에서 자갈길 나오다가 다시 아스팔트길 나올 때, 이것이 국가 간접 기간 시설이거든요.






예전에 일본에선 이것을 쫙 다했잖아요. 국민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돈 빌려 가지고 소득을 증가시키고 소득이 증가되면 시장에 소비가 활성화하게 되고 기업이 투자를 하게 되고 계속해서 자금의 회전이 되면 이것이 자본주의 운영 방식이에요. 신 케인즈 경제정책(New Keynsian Economic Policy)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아쉬울 때는 나라에 고마움을 표현하더니만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의료보험 적용이 되면 나라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북한에 가서 살던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중심이에요. 자기중심이라고 표현 할 때는 분명 마귀 중심을 염두에 두는데 사람들은 악마 자체를 인정을 안해요. 왜냐하면 자기중심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거든요.






악마는 자기중심을 숨기는 겁니다. 악마는 언제 나타나냐 하면 숨어 있던 메시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같이 안 나타나요. 왜냐하면 악마의 최후의 적수는 메시야에요. 하나님이 아니고 메시야라니까요. 그러면 메세야가 아닌 다른 것이 나타나면 악마는 웃는다고요. 왜냐하면 다 자기가 부리는 종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에선 뭐가 나오냐 하면 신이 나오고 천사도 악마도 나오겠지요. 이런 것이 다 자기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악마는 웃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다 가짜거든요. (자기중심에서 나온) 신 또는 삼위일체, 메세야, 복음, 성령, 악마 그리고 교회도 마찬가지로 웃습니다. 진짜 예수가 나타났을 때 이제 악마가 긴장하며 왜 때도 아닌데 일찍 오셨습니까? 하지요. 진짜 메세야가 나타나면 악마는 긴장을 하는 데 그 와중에 내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 아닌 상태에서 메시야가 일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 버리면 악마는 비상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오지요. 베드로가 “그러실 수 없습니다. 주님과 우린 한 편이잖아요.” 하니까 네가 나를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자기를 어떻게 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이것이 자기중심이 아니잖아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교회도 교회 중심으로 갈 때는 마귀는 그냥 나둬요. 왜? 어차피 마귀의 전당이니까,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마귀 나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아요.






(마 16:24)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5)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런데 어느 날 그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 한다면 악마가 가만있지 않지요. 그의 하수인인 목사를 통해 전하는 사람을 쫓아내라고 관섭하겠지요. 결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말이 복음적인 것이 맞지만 교회가 와해되잖아요. 복음은 맞는데 교회가 깨지면 안 되잖아요 그 말이잖아요. 십자가 복음은 맞는데 우리 집안이 힘들면 안 되고 분열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라는 거에요.






만약에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의 병을 고쳐준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십자가 복음을 전했어요. 그래서 만약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병 고쳐진다는 의미 자체가 없어져요. 왜냐하면 병이 나에게 생겼다는 것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최적화된 사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하면 감사히 받아들여야 되지요. 병을 안수해서 고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병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교회에서 병을 고치는 전문 권사나 이런 사람들이 생계유지가 안 되지요. 돈 생길 구석이 없으니까 삐지고 난리 나겠지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증오하고 파멸 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지시와 명령을 한시는 겁니다. 뭐라고 지시 하셨습니까? 너희는 아스다롯 이방 신들을 섬기지 마라 이렇게 명령하신 거에요. 이 명령에 담긴 취지는 오늘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애굽에 히브리인들이 있어요.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히브리 종족이에요. 히브리인에서 이스라엘이 되려면 인간의 힘으론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야 돼요.






어린 양의 피를 발라야 되고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그것도 밤 중에 건너 오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히브리인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모세가 가나안 따에 살다가 넘어 왔잖아요. 여기서 오늘 강의 중 제일 중요한 부분이 뭐냐하면 잘 들으세요. 모세가 애굽으로 갔다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 순간 이 가나안 땅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예전에 있었을 때는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양치기 할 때는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그러나 약속의 민족이 나타나서 가나안 땅을 밟아 버리면 그 순간 가나안 땅은 옛날로 중립적인 속성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 이스라엘이 오든 안 오든 나무나 숲과 들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한번 약속의 땅에 오게 되면 이 땅에서는 저주 아니면 축복, 둘 중 하나뿐이지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선희 노래처럼 ‘아! 옛날이여!’ 다시 못 돌아가요.






그래서 만약에 복음을 들었잖아요. 듣고 귀를 씻으며 난 안 들은 것으로 할래 해도 이미 들은 이상은 지옥 아니면 천국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이 반발을 하던 호응을 하던 더 듣고 보자, 그것은 상관없어요. 이미 복음을 들었으면 그 다음은 빼도 박도 못합니다. 이게 구약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지우개의 역할이 지우기 위함이듯 지우개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 저주 아니면 축복, 축복 아니면 저주, 사랑 아니면 증오, 증오 아니면 사랑, 이미 새로운 규칙이 덮쳐 버렸어요. 덮쳐진 것을 ‘아! 옛날이여!’ 해서 옛날로 돌아가자 해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민족 입장에선 이스라엘 민족이 안 올 때가 더 좋았어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오는 순간 그들은 ‘다 죽었어!’가 되듯 이것을 이스라엘을 통한 심판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이다라고 하는 거에요.






가나안 민족이 어떤 신을 섬기던 아스다롯은 여신인데 바알의 아내이고 바알의 어머니는 아세라입니다. 여기서 바알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지도 상 좌측에) 지중해가 있고 현재의 아라비아, 이라크 있고 터키, 이란이 있잖아요. 이곳은 사막인데 산맥이 있고 숲도 있고 사막에서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가나안 땅에 옆에 사해가 있고 헐몬산이 있는데 여기에 뜨거운 바람이 와서 비가 안와요. 완전히 메말라 버려요.






3월에서 10월 까지 건기입니다. 농토건 뭐건 싹 말라 버려요. 그러면 못 살잖아요. 그런데 바람이 그렇게 불다가 다시 10월에서 3월까지는 지중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오니까 비가 오는 거에요. 그러면 아휴~ 살았다! 에요. 이런 비를 이른 비라 하고 늦은 비라 하는 거에요. 늦은 비는 여호수아서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을 늦은 비라 이야기해요. 늦은 비라는 말은 온다는 거에요. 우리에게 물어보고 오는 게 아니고 무조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고 무조건으로 온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과 바알과 무슨 관계가 있냐? 이렇게 바람이 불 때 가나안 사람이 이겨내면 살고 못 이겨내면 죽기 때문에 신을 섬겨야 된다는 거에요. 어떤 신이냐 이쪽에서 부르게 하는 신이 (바다의 신)인 얌인데 바알이 얌 신과 싸워서 이기게 되면 적당량의 비가 오게 되면 바알이 최고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바알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 이것이 ‘주’(主)라는 뜻인데 ‘엘’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모든 신의 아들이 바알이에요. 주인 또는 남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구약에 계속 나와요. 농사짓는 사람들이 하늘에 따라서 농사가 잘되고 안 되고 잘되면 살고 안 되면 굶어 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신에게 아부해야 되고 뇌물도 바쳐야 되지요. 바알 종교는 신앙심이 극심해요.






어떻게 극심하게 섬기냐 하면 자기의 아들을 신에게 뇌물로 바칠 정도입니다. 시체를 벽에 도배를 해서 이 정도로 우리는 신에게 전적으로 맡겼으니 우리를 살게 해 달라! 아들은 죽이고 자긴 살고 남는 장사가 아니지 않냐 하지만 가나안 사람들에겐 종족이 더 중요해요. 아들은 또 낳으면 되지만 우리 가문, 우리 씨족은 자식 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목숨 하나 바쳐서 집안을 지키는 것이 후손 된 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유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런데 바알이 저쪽 신에게 져서 가뭄이 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바알은 풍요와 비, 바람을 불게하고 폭풍이 오게 하는 풍족의 신이고 가축이 질병 없이 잘 자라게 하는 신인데 건기 때는 전쟁에서 패배 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바알)패배하면 죽었다고 보는 거에요. 남편이 죽었으니 아내는 어떻게 해야 되요? 가만있으면 안되고 아내인 아스다롯이 죽음의 신을 사후 세계로 찾아가요. 끈질기게 찾아가요.






모트(Mot)라는 죽음의 신을 찾아가서 싸워 승리하고 보니까 자기 남편이 죽어 있거든요. 그 죽은 남편을 되 살려 올 때 부활하는데 3월에 새싹 날 때 땅에서 죽은 씨가 올라오는 것처럼 이 때는 큰 잔치를 여는 겁니다. 다시 혼인 잔치를 여는 거에요. 매년 혼인 하지요. 바알과 아스다롯이 혼인 할 때는 기를 부어줘야 되고 힘을 부어 줘야되잖아요. 힘을 부어주기 위해서 신이 하는 행동을 똑같이 신전에서 남자와 여자 제사장들이 고객인 신도들과 더불어 성 파티를 여는 겁니다.






왜? 힘을 북돋아줘야 신도 용기를 가지고 결혼을 해서 비를 많이 내리기 때문에 참 희안하지요. 희안한 이야기가 바로 구약에 나오는 바알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주변의 관계성입니다. 이 주변의 관계성이 오늘 무엇과 관련이 있냐 하면 꿈과 관련 있어요. 주일 낮 설교에서 했던 ‘I have a dream.’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꿈은 현실에서 잠시 안식하며 잠자다가 꿈을 꾼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주도권이 현실에 있겠어요? 꿈에 있겠어요? 현실에 있겠지요. 그러나 정신 분석학에선 그렇게 보질 않습니다. 늘 꿈꾸다가 꿈이 힘들 때 잠시 현실로 온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꿈의 주 내용이 뭐냐하면 현실에서 마음에 안드는 상황이 꿈에 나타납니다. 가게를 차렸는데 손님이 하나도 안 올 때 이러면 안돼! 하고 식은 땀 닦으며 깨어보면 다시 현실로 아휴~ 한시름 놓았다고 하지요.






정신분석학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맞는 이유가 사람은 가혹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가혹함을 잊기 위해 더 큰 범주의 꿈을 염두에 두고 현실을 이겨내려 합니다.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지만 나중엔 자식이 크게 될 거에요. 큰 일꾼이 돼서 어머니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할 꺼야! 부모가 특히 엄마들의 꿈은 뭡니까? 자식의 성공이다는 말이죠. 나는 너만 잘되면 된다는 말은 부담이 되는 말이에요. “나중에 잘 되서 입 싹 닦기만 해봐라!” 이건 협박 같이 들리거든요.






항상 꿈이 잘되기 위해서 몸을 사리는 것, 이게 바로 교회 다니기에요. 교회 나올 때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어요. 그 꿈을 사실 은근히 숨긴 채 힘든 현실 속에서도 이렇게 빳빳한 돈으로 십일조 갖고 왔습니다. 받으시고 음! 그 다음에 말 안해요. 하나님이니까 다 아시죠? 음! 제가 뭐라 하는 지 눈치 차리셨지요? 이게 뭐냐하면 바알이에요. 바알이 요새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습니다가 바알 믿습니다로 되었습니다.






꿈이 인간을 인도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누가 인도하느냐? 현실이 내 인생을 인도하는 게 아니에요. 꿈이 나를 인도하는 거에요. 그래서 꿈이 없으면 수 백 억을 가지고도 자살을 해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밥 주고 옷 줄 테니 군대에 갈래? 하면 뭐라 해요? 될 수 있으면 빠지고 싶어 하지요. “우리 아버지는 빽도 없어! 날 빼 주지도 못하고” 원망하지요. 왜 군대 가는 것을 싫어할까요?






그것은 군대에 가는 것이 내 꿈이 아니기 때문에 군대에서 월급 주고 입을 것 주고 안 때리고 할 테니 군대에 갈래? 해도 안가려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돈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꿈을, 자기가 사랑하는 꿈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거든요. 내가 꿈을 꾸지만 나중에는 그 꿈이 나를 조정하고 나를 다른 인간으로 바꿔버립니다. 그 꿈속에는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 지은 본색이 나타나요.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꿈입니다. 이 꿈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에요. 자기사랑이지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좋게 말해서 어떤 것도 이겨 낼 수 있고 그런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서 사랑이 떠나가 버리면 어떤 경우라도 꿈을 접고 자진해서 자기를 파멸시켜 버려요. 이럴 수 없다는 거에요. 이별하고 난 뒤 돌아오면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는 거에요.






얼마나 충격 받았으면 너무 쇼크 받아서 어떻게 나에게 이별이라는 말을 하느냐 내가 얼마나 믿었는데 심지어 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도 했거든요.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할껄! 이런 식으로 이야기 했는데 그러니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해놓고 어떻게 나를 떠날 수 있는가? 그 노래가 ‘이별의 끝은 어디 인가요?’ 나중에 한 번 들어 보세요.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게 이별의 끝이에요.






만약 그게 여자라면 화나면 뭐를 하겠어요? 립스틱 쫙 바르겠지요. 그게 ‘립스틱 짙게 바르고’에요. 이별은 이별이고 나는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모든 대중가요가 뭐가 깨졌어요? 현실이 깨진 것이 아니고 꿈이 깨졌어요. 그래도 밥 먹고 있고 집에 가면 강아지가 꼬리 흔들고 있고, 마~ 발로 팍! 차 뿌릴까! 어디서 꼬리를 흔들고 있어! 주인이 힘든지도 모르고!






바알 종교에서 우리는 한 번도 벗어 난 적이 없어요. 그것이 기독교든 천주교이든 상관없어요. 모든 인간은 구약에서 바알 종교를 언급한 이유는 꿈이 그의 희망이고 꿈이 그의 미래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이고 천주교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간단한 겁니다. 그 꿈을 조져 놓는 것, 그 꿈을 박살내는 거에요. 동시에 교회도 박살나는 거지요. 빳빳한 돈으로 십일조 낼 이유가 없지요!






“으음~아시죠? 이거 뇌물로 받으시고 30배, 60배, 100배로..”이런 계산, 작전 벌일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지금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돈 내라고 장소 제공하고 자기 꿈을 달성하게 되면 자기 90%먹고 교회가 10%먹고 그것이 십일조라는 거에요. 받아 챙기고 내는 것도 있고, 주식에서도 선물 매매하는 것이 있거든요. 주식 오를 줄 알고 미리 당기는 것. 이게 더 큰 믿음이라는 것.






그래서 장차 복 줄줄 믿고 뇌물을 바치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 장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탓 하지 말고 무엇을 깨야 됩니까? 자기 꿈을 깨야 되는데 꿈을 깨면 사람은 자살을 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집어넣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과 아스다롯을 마주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내부 전쟁으로 이들을 의도적으로 깔아 놓으신 거에요.






우리는(이스라엘) 하나님 편이고 저쪽은 악마 편이 아니라 그 악마 쪽을 너희가 얼마나 좋아하고 친근하게 느끼는지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산 속에서 혼자 기도를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산 속에 들어 가 있더라도 한 번씩 5일 장에 가야 됩니다. 5일장에 나와서 신발 살 때는 좀 깎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 되요. “천원 만 깎아 주소!” 깎고 오다가 붕어빵 사가지고 오든지 하는 투쟁을 해야 되요. 사람은 싸워야 되는 거에요.






싸우는 과정에서 내가 꿈에 놀아났다는 것, 내가 원했던 꿈이 아니고 이미 저주 받을 꿈이 나를 점령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점령군을 누가 쫒아 냅니까? 주님이 아니면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낼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약속의 땅을 뭐로 보냐 하면 우리의 고향으로 봅니다. 고향은 뭐냐하면 출생지에요. “집사님 출생지가 어디이지요?” 대전. “예, 역시 땅이군요!” 땅에서 이미 죽었고, 출생지가 어디에 나오냐 하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출생지가 십자가입니다. 흙에서 태어난 인간의 출생지는 흙이지만 예수님의 새 언약에 의해서 새 언약을 내용으로 새로 만들어진 사람의 출생지는 십자가에요. 요한 계시록엔 어린 양의 제단이에요. 하늘나라의 보좌입니다. 그 보좌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죽기 전에 유언이 뭐냐하면 자기 시체를 애굽에 묻지 말고 고향에 묻어 달라는 거에요. 그게 막벨라 굴이에요. 그 막벨라 굴이 무슨 굴이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굴입니다. 그 지역 자체가,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어느 곳을 여행하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듯 지평선이 있는 곳, 같은 땅, 같은 평지에서 평지로 이동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약속의 사람들은 땅세서 출발 했는데 활주로 같이 비행기가 땅에서 가다가 활주로에서 공중으로 떠 버려요. 그러면 그렇게 먼저 시도한 비행기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다니다가 분명히 십자가로 곤두박질 한 것 같은 데 사흘 만에 부활해 버렸다구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이 뭐냐? 예수님이 죽는 그 지점이 복음이다. 십자가가 왜? 그 십자가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부활에 참여함이 없기 때문에 빌립보서 3장에 나옵니다. 내가 부활에 참여하여 십자가로 간다. 그것을 고향 찾기, 고향이라 하는 것은 낯선 곳이 아니고 우리가 태어난 곳이에요.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서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몰라요. 너무나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져 육신의 욕망과 욕구에 시달려 왔으니까 그 십자가를 요한복음 장에선 내 살과 내 피가 아니면 영생이 없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디에서 나오는 가? 새 언약에서 나와요. 새 언약이란 아버지와 아들이 확정한 이미 확정된 거에요. 확정된 것을 완료, 모든 게 완료 된 거에요.






완료된 것에서 계속 찍어 내는 겁니다. 살과 피로 찍어 내듯 영생을 찍어 내는 거에요. 영생을 찍어 낸다는 말은 영생의 운반체를 계속 찍어낸다는 거에요. 바로 그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계속 찍어 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에 의해서,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풍선 이야기를 했지요. 그 풍선이야기의 테마를 어디서 끄집어 냈냐하면 MBC 라디오에서 4시에 하는 게 있어요. 전에는 조영남, 최유라가 했던 방송을 라디오 시대라고 다음에 정선희, 문천식이 했지요.






거기서 나오는 ‘참 우스워요!“ 라는 내용 중 하나에요. 풍선 두 개 이야기. 세상에는 자기가 살아온 해냄 풍선 하나 밖에 안되거든요. 해냄 풍선 하나 밖에 없는데 여기에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난 자아가 있으니까 풍선을 두 개 가지고 있어요. 버리면 안돼요. 우리 마음대로 버릴 수 없어요. 비교해 봐야 되요. 나의 옛 사람과 나의 새사람이 어떤 차이가 나는 지를 그리고 예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나에게 꿈을 요구하고 있어요.






꿈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인간 대우를 받으려면 꿈을 크게 키워야 돼! 지난 번 우리 목사님 말씀 들어 봤지? 시편에서 입을 벌리면, 아가리를 크게 버리면 그만큼 꿈이 주어지지 아가리를 작게 벌리면 꿈도 작게 된다. 무조건 Boys, be ambitious! 야망을 가져라! 아가리를 크게 벌려야 조금이라도 얻게 된다는 그런 식으로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 의식. 된다! 된다! 하면 교인 5천명이 된다는 거에요. 되지요! 마귀가 도와주니까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기존의 풍선을 계속 키워나가는 거에요. 훅! 불어서~그런 것은 바늘로 찌르면 한 순간에 가 터져 버립니다. 악마의 꿈이지요. 악마의 꿈과 비슷한 꿈이 거위의 꿈이 있지요. 그게 악마의 꿈이에요. 또 비슷한 노래가 마법의 성이라고 있어요. 가사가 산 넘고 물 건너 너를 구하러 갈테니까, 기다려라! 저기 보인다. 미래가 아름답고 찬란한 천국이 보인다. 전부 현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주어지는 그런 것을 제가 요번 수련회 때 언급을 했습니다.






연속되어 있다. 현재의 나와 연속된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단절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갈라디아서 3장 6절에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천국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니까. 폴 워시인가? 하는 목사, 맥아더인가? 하는 말을 제가 들어 봤거든요. 완전히 이단이에요. 그게 그렇게 인기가 있어요? 그들이 주장하는 게 뭔지 압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까 여러분 알아서 주를 영접하면 천국 갑니다. 그 이야기에요.






성경에 그런 내용 없어요. 왜? 우리는 중립이 아니니까 내가 생각한 천국과 지옥은 다 누구 중심이다? 아까 했지요! 내 중심이죠. 그게 바로 마귀가 만든 천국과 지옥이고 마귀가 전파하는 복음인거에요. 예수를 영접하세요? 예수가 무슨 ~입니까?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달리 이야기 합니다. 네가 걸림돌에 넘어져라! (롬 9: ) 넘어져야 되요. 심지어 사람에게 버림받은 거에요. 버림받은 돌이 성전 모퉁이 돌이지 버림받지 않은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자기가 알아서 버리는 것은 자기 낮춤이에요. 비우고 또 비우는 건데 그런 건 몽골 선교사 보고 잘하라고 하세요. 복음이 없어요. 혹시나 싶어 들어 봤는데 뭐 이런 게 다 있어요! 여러분! 지옥 가지 말고 천국 가는 게 남는 장사입니다. 이게 뭐에요? 사기꾼이지요. 그런 천국 누가 가겠어요? 그런 천국에 가면 뭐가 있겠습니까? 나 예수 믿었다 그게 남아 있을 게 아닙니까?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아요.






이스라엘은 하나의 지우개라니까요. 본인이 구원 받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죠. 본인이 구원받으려고 껄떡대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께선 지우개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내부를 바깥에 있는 언약을 내부로 집어넣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냐 마음의 할례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신의 할례는 뭐냐하면 생식기의 끝을 잘라내는 겁니다. 왜 생식기 끝을 도려 내냐 하면 남성의 생식기가 자식을 낳게 되는 표징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낸다는 것이 그런 상태에서 자식을 낳게 되면 육의 자식이 아니라 약속의 자식을 낳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할례 자체가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를 낳아야지 육의 자녀를 낳으면 안된다. 이방인 같이 자녀를 낳으면 안된다는 것이 할례이고 이것을 어디까지 확장 시키냐 하면 마음의 할례 까지 에요. 마음의 할례는 마음을 도려내는 겁니다. 마음을 도려낸다는 말은 마음속에서의 꿈, 환상이 나오는 거에요.






환상은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 민족들처럼 너무 살기 힘드니까, 왜 살기 힘들다고 했어요? 창세기 3장에 주께서 일부러 아담의 후손을 저주 받게 했기 때문에 반항하듯 신에게 대드는 거에요. 이런 것을 도려내는 거에요. 마음을 도려냈다는 말은 완전히 바보 등신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빈 그릇처럼 되겠지요. 도려낸 분의 하실 일, 앞으로 하실 일로 채워 주시겠지요. 그 작업이 그동안 꿈으로 채웠던 그 마음을 도려내라는 말이죠.






그 담음에 뭐로 채우냐? 바로 너 같은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앞으로 나올 거에요. 그러면 그들이 그 고통에 참여 하는데 5절에 보면 금식하면서 미스바에서 기도 하는 것, 죽어도 좋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마음. 나는 꿈을 꾸는 재미로 살았는데 바로 이것이 꿈을 꾼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꿈을 유지하기하고 고수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젠 죽이던 살리던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맡기니까 기적적으로 블레셋을 이기고 승리하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7-05-15 22:29 
자리 (마 23:1-23 )                                                                                        대전-86강 



 이근호  






2017년 3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3장 1-23절









(마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마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 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마 23: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태복음 23장1절부터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어느 구절로 유명 한가하면 23절‘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이 대목이 유명합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십일조를 꼭 하라고 예수님께서 법으로 계속해서 시켰으니까 믿음도 챙겨야 되고 십일조도 해야 된다. 그래서 십일조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반 토막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온전히 하려면 예수님 말씀도, 예수님도, 십자가 복음도 믿고 십일조도 필히 해야 된다라는 근거로 제시된 것이 마태복음 23장23절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마태복음 강해서 작은 권력이라는 책을 보면 나옵니다. 번역이 이런 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반대로 되어 있어요.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의와 신과 인으로 이미 십일조에 관해 완료되었기 때문에 완료된 것을 모르고 있는 인간들은 계속해서 10%를 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십일조 완성한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십일조) 내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정 반대라니까요.






십일조를 내겠다는 말은 십일조를 어떻게 완성하느냐를 내가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무시 했다는 말이죠. 그건 그것이고 나는 십일조를 내겠습니다라는 자체가 이미 완성된 십일조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하시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쉽게 말해서 “십일조 하기만 해봐라! 내가 저주 할테니!” 이런 뜻이란 말이죠. 완전히 (우리가 아는 것과)반대이지요.






그러니까 교인들 가운데 공부 좀 해서 율법이 온 것은 우리 입을 막고 저주하러 오심이고 이젠 율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원 받는다고 로마서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왜 목사님은 다른 율법은 지키지 말라고 해놓고 왜 십일조는 지키라고 합니까? 라고 하면 그 논리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목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건 내가 알바 아니고 성경대로 한번 보라! 말이지요. 할 말 없지요!” 이런다고요. “성경대로 할 뿐이야!”






그것으로 유명한 구절로 (예수님이)누구에게 욕하고 있냐하면 바리새인을 향해 하고 계신 거에요. 23장이 1절부터 바리새인을 욕하는 구절입니다. 심지어 욕의 끝이 어느 것이냐 하면 33절 읽어 보세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바리새인보다 그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되어 있는데 바리새인보다 그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을 들으면 “야! 바리새인들은 좋겠네!” 얼추 따라 잡았다고 생각하잖아요.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것이 아니고 바리새인 노선 자체가 다른 호남선과 경부선처럼 노선 자체가 다르듯이 그 쪽 노선에서는 최고 오야봉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다 따라가는 거에요. 바리새인 법에, 주의 말씀을 들으라! 듣고 순종하는 이것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법을 주신 이유가 뭐냐 못 지켜서 주는 게 아니고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지킬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율법 주신 것을 우리가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리새인의 주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뭐냐하면 구약의 율법과 지시와 명령들은 우리가 어디서 잘못 됐는가를 이미 구원이 확보된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은 자로 그리스도의 의로 새로이 산 사람으로서 율법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제가 이번 주 주일 낮 설교에서 다시 합니다.






23장은 1절부터 바리새인을 욕하는 겁니다. 욕 할 만하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악마의 자식,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했으니 성경에서의 독사는 가장 최악의 나쁜 동물로 비유하고 점잖은 표현은 개, 수로보니게의 여인처럼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위치, 자리의 중요성. 개가 되었든 벌레가 되었든 내가 현재 있는 위치가 부스러기라도 떨어지는 위치에 있으니 생명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자리가 중요하다는 말은 현재 내가 귀신 들렸다라든지 아픈 것이 문제젯거리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10명의 문둥병자가 주님께 왔는데 그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해서 고침을 줬어요. 그런데 9명은 그냥 가버렸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중심에 있지 자기 자리가 뭔지를 몰라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자리만 확보했지 이런 사람들은 내가 문둥병 때문에 사람의 대우를 못 받는 것이지 병만 아니면 나도 너 못지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은 내가 문둥병에 걸려도 쌉니다. 내 자리가 문둥병 보다 더한 벌과 저주를 주신다 할지라도 이 자리가 주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자리라면 문둥병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거에요. 주님이 나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임을 알려 주시고 또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병 고침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해서 왔다는 죄 사함이 적용되어 병 고침으로 나았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자리의 중요성을 말하는 겁니다. 23장의 마태복음을 해석 하면서 이것만 알면 해석 다 되는 거에요. 과연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지 않잖 요. 있지 않을 경우에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 어떠한 모양을, 실천과 준수를 보이느냐? 이것을 보면 되요. 그리스도와 대립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순종, 전도도 나오지만 15절을 읽어 보세요.



(마 23: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가며 하잖아요. 선교로 자기 몸을 드렸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준비하신 자리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그저 세력 확장, 또는 하늘나라의 확장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뭐로 겸손하게 포장하냐 하면 당신의 나라의 확장이라고 하며 교회 플랭카드로 만들어 걸어 놓지요. 우리가 동업자이니까 도와달라는 말이죠.



우리는 교회 자체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교회를 키우려 하는 것이 뭐가 흠이냐는 겁니다. 이 참에 하늘나라 확장에 참여해서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광고 할 수 있는 근거로서 그대로 계속해서 땅 끝까지 내 제자를 삼아라는 마태복음 마지막에 말처럼 하는데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태복음 23장 8-10절을 봅시다. 23장 8-10절 읽어 보세요,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선교단체 간사들을 참! 수직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권위가 생기지 않아요. 정치학이나 행정학에서, 무조건 무조건이어야 되요. 명령이라 상부에서 하달 된 대로 해야 질서가 잡혀요. 조직을 운영하려면 상부 하달이 원활하게 돼야지 안 그러면 힘의 누수가 많거든요. 무조건 복종해야 되요. 그것이 A.D 300년 전에 생긴 수도원과 같습니다. 수도원 제도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로마의 군단 진영에서 나왔어요.






로마의 군대 진영에서 나온 체제를 수도원에서 그대로 활용한 겁니다. 지금도 수도원 또는 수녀원에서는 위에서 이야기 하는 것에 일체 토를 달면 안돼요. 토달려하면 수녀 복 벗고 밖으로 나가야 되요. 추방시켜 버려요. 무조건 지켜야 되요. 군대도 그런 군대가 없어요. 그러면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으냐? 참 사람의 심리가 그래요. 기분 나쁘지만 자주 그렇게 명령을 받게 되면 길들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젠 그게 편해요.






이것이 뭐냐 하면 학교 교사의 3월 달 분위기와 같습니다. 3월에 분위기 잡아놔야 편하지 그렇게 안하면 1년 동안 힘들어져요. 분위기 꽉 잡아야지! 그렇게 하면 얘들도 편하고 선생도 편하고 나중에 다 편해요. 이런 것을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하고 있고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면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이게 뭐가 나쁜데? 하늘나라, 당신의 나라도 확장되고 일사분란하게 능률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좋지 뭐가 나쁘냐?”






이렇게 되면 자리가 다른 자리에요. 다른 자리에 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가를 봐야죠. 앞서 말한 것을 우리가 안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이 회사이던 학교이던 할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하면서도 이게 바로 죄라는 것을 알면 되요. 또 이것을 안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게 아니에요. 어쩔 수 없어요.






사람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인간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에요. 인간은 누구에게 잘해 준다는 게 없어요. 만약에 두 사람이 있을 때 그 한 사람이 어떤 수를 써도 (상대방에게)영향력이 제로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 영향을 줄 수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아이고! 선생님이 아니였으면 내가 다른 길로 갈 뻔 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개과천선해서 술, 담배도 끊고 나쁜 길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이용하는 거에요.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고 나에게 이익 되는 것이 뭐냐? 본인의 결정입니다. 본인의 선택 사항이지 선생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든지 부모 잘 만나서이다. 이런 것은 제대로 현실을 몰라서 그래요.






실제로는 남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도 남을 이용 안하고 그냥 지나치는 인간은 없습니다. 전부 이용합니다. 강아지까지도 주인을 이용해요. 사람은 타고 났어요. 남을 이용하는 것을, 그래서 이 정도로 끝내야지 그러니까 은혜를 잊으면 안돼!라고 하면 도망칩니다. 부담돼서,






그래서 랍비나 바리새인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는가? 이게 악마의 힘이에요. 경찰이 군대의 힘을 동원했구나! 아니에요. 동의를 받은 거에요. 왜? 모든 인간은 아까 이야기 했듯이 꿈이 있기 때문에 자진해서 협력해요. 이것을 정치적 용어로 마스터라고 해요. 식당에선 쉐프라고 하고 쉐프는 지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명령이 얼마 가지 못해요.






조직에서 얼마 안갑니다. 존경을 받아야 돼요. 또 존경 받는다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는 말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용하기 좋은 분이다. 저 사람의 기술은 내가 계속 배워야지! 이것이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본인에게 좋으라고 하는 거에요. 순종하면서 (기술을) 빼먹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빼먹을 것이 없으면 그 관계도 끝이에요.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뭐 빼 먹을 것이 없나 해서 어무이! 하고 뭘 들고 찾아오지요. 나중에 그 부모가 아프고 힘없어져 봐요. 기저귀차고 있으면 귀신은 뭐하노? 하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꿈이 있고 그 꿈을 다른 말로 상상계라고 하는데 상상, 환상, 또는 관념, 희망, 희구, 여망이 있어요. 어떤 영웅이 찾아와서 큰 바위 얼굴처럼 이것을 채워주기를 바랄 때 그 사람을 강제로 마스터로 옹위를 해버려요. 옹립을 해 버립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 때 열왕기 상.하를 할 거에요. 거기에 르호보암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의 신하들이 새로 왕이 된 김정은 이에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백성들의 말을 들으면 오래 갈 것이고 백성들의 말을 안 들으면 오래 못 갑니다. 그런데 김정은은 같은 동기들이 아버지 때보다 더 조져야 됩니다해서 듣잖아요. 르호보암 말이 맞아요. 신하들의 말이 틀렸어요. 왜냐하면 역사라는 것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갈 때는 점점 죄 질이 악화되는 겁니다. 이런 중요한 점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데요. 사실 이건 듣고 보면 상식이고 맞는 말인데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어서 1년 4개월 된 애기가 있다고 칩시다. 걔가 알아서 빨간 색, 파란 색을 알아서 들고 썼다고 합시다. 쓸 때 “야! 영특하다. 그 나이에 벌써 색깔을 알아서 구분하네!” 할 게 아니고 그 아인에겐 계속해서 숙제가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거에요.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거든요. 아홉 살 된 얘가 색깔 구분한다고 천재는 아니잖아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잘한고 해봐야 2학년 되면 과제가 또 있고 나중에 중학교 가면 배울 게 또 있고,






이게 뭐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짊이 인생을 살면 살수록 계속 주어져요. 그러니까 인생 자체가 늪에 빠졌어요. 어쩔 수 없어요. 15-17살 얘들이 어떤 생각을 하냐 하면 나는 저 아파트에 살 수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다든지 나는 저 회사에 취직만 하면 아무 수원이 없습니다. 신입 사원들이 면접 볼 때 뭐라 합니까? 저를 입사만 시켜주신다면 뼈를 깎는 각오로 몸을 바치겠습니다. 6개월도 안돼서 대모 합니다. 노조에 들어서.






어떤 목표나 꿈 자체는 좋은 거에요. 그러나 꿈이 현실이 되면서 생각지 못했던 꿈이 새롭게 뿜어져 나와요. 그 꿈으로 인해 결핍이 생기면서 하나의 고통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9급 공무원만 되면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평생을 보내겠습니다. 막상 되면 “저는 5급으로 들어오고 나는 9급으로 들어와서 대우가 다르네!”하고 대번 주둥이가 나옵니다. “나에게만 일을 다 시키고 저는 군수 아들하고 놀고 쉬고 나는 야근까지 시키네!”라고 하는 거에요.






나만 만만히 보고 나에게만 부려먹고! 온갖 그 시점에서 그 날짜에 도달했기 때문에 아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남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함부로 덤벼들지 마세요. 그 상처는 그 사람에게 꼭 적합한 거에요. 주님께선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선 더 큰 상처라 할지라도 구원받는 데는 아무 상관없고 무관함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게 죄 사함이에요.






자! 본격적으로 마태복음 23장을 해 봅시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욕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도 같이 욕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자리가 같아야 되지요. 예수님께 용서 받은 사람이 바리새인을 같이 욕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왜냐 본인이 바리새인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철저하게 예수님이 욕하는 욕을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본인은 내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고 해요. 그러기에 욕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저쪽에선 뭐라고 합니까? 배신자라고 하지요.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해요. 그것이 요한복음에선 사랑이라고 하거든요. 사랑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세상이 주는 증오에서만, 연못에서만 연꽃이 피듯이 그렇게 나와요. 증오 없이는 사랑이 뭔지 몰라요. 증오 없는 사랑은 내가 마땅히 사랑 받을 만 해서 받은 줄 알고 착각을 한다니까요.






신데렐라가 언제 기뻐합니까? 신데렐라가 자기 집에서 환대 받을 때가 기뻐요? 아니면 천시 받을 때가 기쁩니까?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누구에게 구박받아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동화가 빛이 나는 겁니다. 증오 속에서 왕자의 사랑이 돋보이는 거에요. 미녀와 야수도 마찬가지고.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이야기를 할 때 “너 똑바로 들으란 말이야!” 하실 때 손가락 방향을 누구에게 향해야 됩니까? ☞나에게 향해야지요. 왜? 풍선 두 개를 들고 있으니까, 내가 두 개의 풍선을 들고 있다고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풍선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바리새인이 아닌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바리새인을 욕한다고요.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봐야지 왜 행함으로 바라보냐고 이렇게 한다고요.






그런데 풍선을 들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믿음이라는 게 행함이다. 그렇게 보면 바리새인들이 절대로 행함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이야기 하지요.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그대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그들이 혹독한 자기 파괴, 자기 낮춤, 자기 부인에 매진했어요. 그것이 금식입니다. 바리새인이 금식 할 때 예수님은 뭐 했지요? 제자들하고 술 드시고 계셨어요.






자기를 부인하라 해놓고 막상 자기를 부인 안해. 뭐가 중요하냐 하면 금식이나 회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누구와 함께 하는 지의 자리가 중요한 겁니다. 너는 누구와 함께 있는 거야? 예수님 앞에 서면 항상 낮아질 수밖에 없어요. 왜? 워낙 고생하셨으니까 그 앞에서 무슨 몸이 아프니, 힘드니 그런 소릴 할 수 없어요.






다시 2절 봅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자리가 나오잖아요. 3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그들의 말은 본받으라는 거에요. 이거 설명을 잘 들으세요. 성경의 언어(단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단어 그대로 썼어요. 사랑이라든지 천국, 빛, 용서 이러 것을 썼다고 합시다.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이 (위의) 글을 봅니다. 오늘 제가 십자가 마을에 글 올린거와 같아요. 사랑, 천국, 빛, 용서, 이 개념을 모세의 율법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성경대로 나에게 퍼부은 신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 방향이 말씀이 우리가 건드릴 때 움직이는 게 아니고 그것과 관계없이 온 우주가 말씀이 겹겹이, 층층이 쌓여서 굉장히 바쁘게 활동하고 있음을 느끼는 거에요. 발에 체이는 게 말씀이에요.






그런 반면에 성경 말씀은 성경책 안에 가두어져 있고 내가 성경책을 펼쳐서 큐티하고 묵상해서 “주님이여! 이 말씀을 내가 지키겠나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니 오늘은 꼭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뭔가 창고에서 끄집어내듯이 할 때 영향력이 있고 실효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이것을 대구 강의에서 성경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살금살금 성경에 다가가요. 성경을 펼칩니다. 왜 펼치느냐? 성경에서 내가 이익이 되는 게 있을까? 하고 찾는 사람과 이런 경우엔 뭐가 드러나냐 하면 나는 성경을 외면하지 않았다라는 자기 의가 생기겠지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하지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성경 자체에서 날아오는 성경 자체를 완성하신 분의 마음을, 영이라 하지요. 예수님의 영이 먼저 와 버리면 이 사람은 졸지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가 되냐하면 죄인이 되어 버려요. 성령에 의해 죄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왜 죄인인가의 이유가 온 성경 전체에서 나와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 성경책이 있는데 성경을 완성 하신 분이 성경을 가지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니 나는 갑자기 죄인이 되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쪽에서 왔기 때문에 넘어 온 것은 우리가 요청해서 온 것입니까? 요청 없이 그냥 온 것입니까? 그냥 온 것이기 때문에 그 관계는 끊어질까요? 안 끊어질까요? 안 끊어지지요. 끊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성경대로 환란과 핍박이 옵니다. 비 바람이 불겠지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 오기 전에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했는데 이런 게 오니까 정말 사랑하시는 게 맞구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 온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본인이 결과적으로 믿어지게 되요. 왜냐하면 환란이 와도 내 쪽에서 참아내야지! 이렇게 되어 버려요. 내 쪽에서 다가가는 것으로 되어 버려요.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귀하다고 주님이 알아서 주변에 있는 보조 음향까지 넣어서 하니까 아하! 이 바닥이 이런 바닥이구나!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 피는 취소 않되 게 끈질기구나! 라고 깨닫게 되겠지요. 환란과 핍박 중에도 감사가 나와요. 이것은 예상 못한 겁니다. 환란과 핍박이 왔을 때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어서 환란과 핍박이 지나가기를 원하겠어요? 그냥 지나가는 것을 원하겠지요. 그러나 오히려 환란과 핍박이 왔을 때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환란과 핍박이라는 것은 힘들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힘들다, 어렵다, 너무 괴롭다를 분석해 보면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주님의 요청에서 하늘나라에서 건너 온 거지요. 그러면 여기서 250억 돈 다발. 15만평 땅 값 백배 오르기, 주식 산 거 10배 오르기, 또 수석, 또 취직, 군대에 갔는데 도로 집에 가라는 것, 미국 아이비리그에서의 초청장,






10군데 지원 한 곳에서 다 오라하고 MIT이냐 하버드냐 예일이냐 콜롬비아 대학이냐 다 오라하는데 장학금까지 주고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원치 안은 거잖아요. 그러면 요청하지 않은 거니까 이게 어디에 속한 것이냐 하면 이것을 두자로 환란이라고 하는 거에요. 십자가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2천명이 넘는 것, 우리 교회 교인이 2백 명 되는 것. 환란입니다.






그러니까 환란은 타이밍이 중요한데 타이밍은 우리가 요청하는 데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은 항상 우리가 요청하고 기도하게 만들고 그 기도의 응답이 안 되도록, 안 들어 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빡세게 기도하게 만들어요. 반드시 절대로 내 뜻을 펴서 이런 것들을 줘요. 이런 것들을 주시면서 “네가 네 인생을 꾸려 나갈 존재가 아니다, 그런 것은 벌써 탈락이야! 이미 너는 구원 되었어!”






그러니까 요청하지도 안았던 로또, 대박 이런 것이 나오는 거에요. 로또 복권을 본인이 산 것도 아니고 바람에 날려서 두 바퀴 돌다가 뺨에 붙었는데 버리기는 뭐하고 다음 일요일에 버려야지! 했다가 토요일에 되는 그런 거 있잖아요. 갑자기 남편이 고개 푹 숙이고 사랑한다고 하는 현상, “앞으로 뭐든 당신 뜻대로 할께!” 라고 하는 어떤 환란들, “나는 엄마 없이 못살아!” 하며 순종하는 이런 환란. 이것이 정도가 얼마나 괴롭냐 그렇지 않냐가 아니고 예상 못한 것들은 다 환란이 됩니다.






그래서 환란 가운데 기뻐하라! 무엇을? 십자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거에요. 야소보서에 그런 말씀이 있어요. 못 되거든 기도하고 잘되거든 찬양하라! 왜냐하면 오래 안 간다는 거에요. 찬양 억지로 해봐야 환란이 또 오게 되어 있어요. 환란이 왔을 때 그 때서야 우리는 십자가 은혜를 알지요. 풍선 두 개가 있잖아요. 새로운 풍선이 주어져도 육신에서 육신으로 가버리면 동질화 되요. 나는 ~이렇다가 되어 버려요.






결국 뭐냐하면 몇 시간도 안되서 자기 자랑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했대, 그러니 나를 건드리면 넌 죽어!” 이젠 이것을 행함이라 하지 않고 사건이라 하는데 성경에선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엘리야 시대 때 7천 명이 있는데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 그러면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남을 것 같으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도 노선을 따라 가야 되요? 안 따라 가야 되요? 따라 갈 수밖에 없어요.






뭐든지 해놓고 그것이 행함이 아니고 은혜였다는 겁니다. 은혜는 원인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결과 편에 서 있지요.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아니가 이렇게 공부를 잘합니다. 이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결과가 아니고 뭡니까?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은혜가 아니고 지금은 그것을 은혜라고 하지만 행함이 되어 버립니다. 이번에 금식해서 내 믿음이 생겼습니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행함이 되지요.






진짜로 은혜 받을 때는 찬양이 절로 나와요.(Softly and tenderly Jesus is calling,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찬양을 영어로 부르는데 참 예뻐요. 처음 은혜 받을 때는 찬양이 절로 나와요. 그런데 42~45초 지나면 행함으로 바꾸어요. 그게 풍선을 두 개 갖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소원이 없어지겠지요. 이 풍선을 짜증나는 풍선을 얼른 터트려 주옵소서! 이게 사도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빨리 죽게 하옵소서!






하나가 죽어야 하나를 건지지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나사로를 죽였잖아요. 나사로는 재대해서 편히 사는데 믿음 없는 누이동생 둘 때문에 다시 부대 복귀했어요. 터졌던 풍선 다시 쥐고 사는 거에요. 이 말은 항상 말씀을 들어야 된다는 거에요.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건 뭐냐하면 우리 죄를,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옵소서!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 사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은 우리의 죄는 절대로 우리가 해결 할 수 없다. 자! 23장 보시면서 먼저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뭡니까? 기준은 지금까지의 강의에 의하면 예수님의 완성이지요. 완성이 기준이지요. 이 말은 내가 옳고 그름을 판정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나처람 되면 옳고 나처럼 안되면 그르다는 말을 해버리면 그것은 자기 행함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잘못된 거에요.






나처럼 깨져야 된다. 이건 맞아요. 나처럼 죄인이라 해야 돼! 이건 기준이 되요. 나처럼 죄인이라 해야 된다는 말은 늘 나를 죄인 되게 하는 예수님의 기준이 그런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예수님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이 나타나요. “너는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해? 네 옆에 누가 있어? 지난 설교에서 밤에는 모든 암소가 까맣게 보인다고 했지요. 얼룩소도 별 수 없어요. 전부 까매요.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까매요. 어리석은 타조 이야기도 있잖아요. 뒤에서 다른 짐승이 막 쫓아오니까 모래밭에 자기 머리만 파묻으면 갑자기 밤이 된 줄 알고 몸통은 다 내 놓고 머리만 박고 있으면 됩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의 기준만으로 덮여 있어요. 삼층천이고 대기권이건 모든 것이 십자가 기준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것을 눈 감고 아웅 하듯이 안 들을란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복음대로 일 안하고 하시지 않거든요.






많은 목사님들이 개척 교회를 하거나 목회를 하는데 제가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이 맞는데 그러면 목회가 안된다는 거에요. 그것은 어리석은 타조와 똑같은 거에요. 목회가 되든 안되는 간에 지금 무엇이 일어났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지금 교회에서 생계비를 더 받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주의 목사로써 더 사느냐, 살아있는 주의 종이기 때문에 내가 설교하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모였다!






그것을 통해서 남에게 주의 목사인 것을 과시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남이 망했다고 하고 당신은 목사도 아니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런 것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은 주님을 안 믿으니까 남을 의식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주님께서 믿게 하도록 하시지 왜 그렇게 합니까라고 한다면 계속 환란을 주는 거에요.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계속 붙여줘서 정말 내가 이런 것을 이겨서 구원받았는지! 아니면 아무 상관없이 공짜로 구원을 주셨는지!






따져 보니 아하! 이게 흔들기구나! 이런 것이 흔들기에요. 바둑을 두는 사람을 프로 기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프로 기사들이 제일 즐거워 할 때가 있는데 바둑을 두면 두 사람의 형편이 서로 다릅니다. 바둑을 끝낸 뒤 다시 어디가 잘못 되었었는지 보는 것을 복기라고 해요. 아마 바둑 는 사람이라면 아마 5단 정도만 되도 바둑 든 것을 다 없애도 강아지가 갑자가 와서 흩으러 놔도 200수 정도는 다시 놀 수 있어요.






복기를 할 때 한 쪽은 행복에 겨워 할 때가 있어요. 이기면 되요. 한 쪽은 복기를 힘들게 하는 거에요. 왜? 졌기 때문에 그래서 단 한번만 이기면 되요. 인생에서 단 한번만 이기면 되요. 내가 이긴 게 아닙니다. 주께서 이기는 자리에 우리를 넣어 주면 저쪽 이긴 편에 서서 90이 됐든 100세가 되든 모르겠는데 자식들이 좀 애를 먹여도 괜찮아요. 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 하시고






지난 낮 설교 때 했잖아요. 이미 죄를 이겼기 때문에 마음껏 욕 실컷 먹고 온갖 서러움 받아도 복기잖아요. 욕 얻어먹어도 욕 하지 마세요. 왜? 따지고 보면 욕먹을 짓을 했어요. 남에게도, 그럴 필요 없는데 성경을 들여다보면 바리세인들이 한 짓이 평소에 우리가 하고 있어요. 여기 5절을 봅시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사람에게 보이고저 행위를 한다는 거에요.






집구석에 혼자 있을 때의 행동하고 밖에 나가서의 행동하고 마땅히 다르지요. 같을 리가 있어요? 다르지요. 다를 수밖에 없지요.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사회생활 하는 데의 예의니까! 그런데 예의에서 더 나아가면 예의를 자리는 당사자가 누구다? ‘나’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거에요. 나는 당신에게 별로 나쁜 짓 한 게 없다라고 할 때 뭐가 앞에 붙습니까? ‘나’가 붙지요.






이별의 끝은 어디 인가요?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왜 당신이 떠났는데 내가 괴로우냐는 가사가 나와요. 내가 왜 힘이드느냐 말이죠. 예수님의 기준에 의하면 어떻게 답변해야 합니까? “네가 뭔데? 힘 안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자! 금요일에 철야 기도를 합니다.” 우리 가정이 박살났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주여! 주님의 응답은 간단해요. “네가 뭔데?” 왜 힘 안 들어야 하는 지 근거를 나에게 말해봐라!“






다음에 금요일에 기도 하러 올 때는 나는 왜 힘 안 들어야 하는 이유를 갖고 오너라! 응답은 감사로 끝나야 돼요. 모든 응답은 범사에 감사로 끝나야 됩니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지요. 주님과 비하면 힘든 것도 아니지요. 그 다음 5절에 그들은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자! 이 욕을 바리새인에게 하셨는데 이 욕을 하층민들에게는 할까요? 안 할까요?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겐 안 하는 이유가 하층민의 소망이 그 사람들 바리새인이기 때문이에요. 한 통속이에요. 지금 대표로 욕을 얻어먹는 거에요. 삼성 그룹의 이재용씨가 지금 구속되어 있지요. 그런데 일반 서민들은 그것이 가슴 아프지 않아요. 나도 돈은 있고 구속 될 수도 있었는데 소망이 삼성 그룹 정도이기 때문에,






지금 구속된 순간부터 이재용씨의 재산은 하루에 10억씩 늘어납니다. 왜요 주식 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엎어져도 올라가는 거에요. 사람들의 부러움에 대상이 되는 거에요. 한 한 달간 구속 되지 않을래? 한 10조 재산 가질래? 바리새인을 욕하지만 바리새인의 이미지 요소가 우리에게도 가득 차 있어요. 그리고 7절에 보면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고 하는 것은 똑똑한 사람을 말합니다. 바보가 아니라 똑똑한 사람, 배울 것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배울 게 있다는 건 정신적으로 갑이라는 뜻이에요. 갑이 되면 남부러울 게 없어요. 장기나 바둑에서 수가 높으면 벌벌 떨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못 두는 사람은 속으로 벌벌 떨어요. “이거 내가 잘못 주는 게 아닌가? 대마 죽는 게 아닌가?” 특히 돈 애기 할 때 이러다 돈 다 날리는 게 아닌가? 부인이 “기원에 가서 얼마나 잃었나?” 하지요.






사람이 세상을 모르게 되면 자진해서 벌벌 떨어요. 심지어 돈이 많더라도 떨고 자식이 잘 되도 떨어요. 자우가 없어요. 예수님의 기준, 그것이 우리에게 넘어오면 그것보다 귀한 보물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주께서 흔들어 주실 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십자가 영생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날마다 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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