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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22:01:38 조회 : 822         
사무엘상 26(언약과의 동행), 마태복음 88강( 시간의 중첩) 17052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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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3.206) 17-06-04 08:43 
대전-26강 사무엘상 7장 12절(언약과의 동행)20170529-이 근호 목사

 

오늘은 사무엘상 7장 1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2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여기 에벤에셀이 어디쯤 되느냐 하면 여기가 지중해고, 그 밑으로 애굽, 이집트가 있고, 그 위에는 시나이반도, 보통 이스라엘 지도 그릴 때는 사해, 요단강, 갈릴리 호수 또는 바다. 이 사이에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공격할 때는 요단강 건너서 침투해 들어가죠. 그래서 여기에 있는 원주민들을 다 추방하고 여기서 약속의 땅을 삼았습니다.

 

이게 약속의 땅이 된 이유가, 옛날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미 이곳을 자기 후손의 땅으로 먼저 예약을 해놨습니다. 여기에 B.C.2000년 경 쯤 아브라함이 등장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혼자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힘, 권력을 이렇게 대동하고 온 거예요.

 

어떤 권력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힘을 대동하고 왔다. 뭐 대동이라는 말을 해도 되고, 이걸 동행이라는 말을 해도 되고요. 언약의 힘을. 언약의 힘이라는 것이 구체화된 것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니까,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투입됨으로 말미암아 이 동네가 시범케이스가 되는 겁니다. 어떤 시범케이스냐 하면 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이냐를 시범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그 전까지 사람들은 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가를 아브라함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잘 되면 복이고, 자기가 못되면 저주라고 본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죠. 한국교회가 다 그러니까. 뭐 교회는 절하고 같다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절이고 교회고 간에 형식, 제도 그 안에 중심은 뭐냐 하면 내가 잘 되면 그만이니까. 내 가정과 내가 잘 되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무슨 수단도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된다면. 말을 달리 한다면 자기가 뒤떨어지고 남보다 좀 못 된다 싶으면 빨리 원상회복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부리죠. 자기에게 철저합니다. 짐승이 그렇고 모든 생물이 그래요.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러죠.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을까요?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만드셨을까요? 그럴 리가 없죠. 그럼 또 질문해보겠습니다. 자기만 챙기는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들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해서 자기만 챙기는 인간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요? 아니죠.

 

그 두 가지 경우를 봐서라도 교회가 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저 비는 것, 무당한테 빌다가 절에 가서 비는 것. 그 비는 목적이 뭐냐, 자기 자신을 위해서. 1월1일 신정 때나 정월대보름 때나 높은 산이나 바닷가에 왜 갑니까? 해 뜨는 것 구경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죠. 그냥 해 뜨는 것 보고 떡국 한 그릇 먹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손바닥 비비면서 비는 거죠.

 

그럼 여기서 KBS, MBC에서 마이크 들이댑니다. “올해는 뭘 빌었습니까?” “그저 우리 가족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남편 사업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누구한테? 신에게. 무슨 신이 그런 신이 다 있어요? 이미 이 자체가 신은 인간이 상상해서 지어낸 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잖아요. 그래서 불교에서 공부 좀 한 사람은 신이 없다고 하고. 불교에서 신이 없다고 하면 장사가 안 되니까 칠성신은 있다고 해서 점 치는 것으로 절은 유지가 되고. 교회는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있으니까 갖다 붙이면 되는 거고.

 

지금까지 한 말을 정리해보면 교회는 언약이 궁금해서 환장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잘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철야니, 성경쓰기라든지, 새벽기도라든지, 십일조 내기, 어떤 것도 거침없이, 금식이고 굶식이고 간에 뭐든지 할 수 있는 인간들이 교회를 이렇게 크게 키운 겁니다.

 

만약에 그런 교회에다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목숨 거세요.”라고 하면 아무도 안 오죠. 아무도 안 옵니다. 물론 오긴 오겠죠. 우선 자기에게 다급한 일부터 하다가 너무 심심하고 바쁜 일이 없어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생신도 아니고, 누구 아픈 것도 아니고, 바쁜 일이 없어가지고, 집에서 낮잠 이래 자도 저래 자도 재미없을 때는, 가볼까? 하고 이래서 오는 경우는 있지만, 언약을 알기 위해서 오지는 않거든요.

 

근데 천국은 뭐냐 하면 여기에 반드시, 항상 이 요소가 있어야 돼요. ‘미리’ ‘진작’ 미리 예수님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이 천국이에요. 미리미리,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생활 한다는 자체가 누구하고의 싸움이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냐, 내 중심이냐가 치열하게 자기의 삶속에서 싸우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섬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은 아들의 나라니까.

 

이걸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면서도 자기 삶속에서 치열하게 싸운 거예요. 그 싸울 때 그냥 싸운 것이 아니고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싸운 겁니다. 아브라함이냐 아브람이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냐 아브람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자식으로 결정되는 거예요.

 

아브람이 난 자식은 이스마엘이고, 아브라함에서 난 자식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이미 자기가 죽은 데서 태어난 것이 이삭이고, 이스마엘은 멀쩡히 자기가 살아있는데서 태어난 것이고. 자식이 아버지를 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믿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 자손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올 건데, 자손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자손이 바로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 선조 된 아브라함이 비로소 천국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합니다. 죄가 사라지고 의인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신 그 효과로 의인되는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이 그걸 느끼는 겁니다. 이것은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야곱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경우도, 야곱의 이름이 바뀌면 뭐가 되죠? 이스라엘. 맹렬한 투쟁을 하죠. 야곱은 형에게 갈 재산을 자기가 뺏어서 그 재산 안에서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면 내가 십일조 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은 자기 행복을 위한 자기 수단이 되는 겁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빼앗는 자.

 

하나님이 주신 그 아버지의 축복을 자기가 속여서 빼앗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빼앗아 갖고 있는 야곱 자체를 주께서 빼앗아버려요. 야곱 자체를. 실컷 챙겨놓은 것을 무용지물로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기도해서 복 많이 얻어놨는데, 그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아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가진 그것, 내가 기도해서 얻은 그 모든 것이, 내가 자식 키운 모든 공로가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국에 방해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식을 버리고 돈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가지되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산물로 주어진 아파트고, 자식이고, 강아지고, 뭐 그거다 이 말이죠. 부산물로.

 

그래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다는 말은, 내가 옛사람 같으면 그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날마다 새록새록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교회에서 복음 전하는 것은 쉬워요. 교회는 뭐 부수고 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 교회 있죠? 이거 아무 소용없습니다. 교회보다도 예수님이 더 중요해요. 그거만 설교하면 교회가 진짜 교회죠. 진짜 교회다 이 말이죠. 두 명 있어도, 세 명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만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순간에 새롭게 만들어진, 주께서 발생시킨 교회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아브라함 자손이 이스라엘 국가로 되는데, 이스라엘 국가에 있어서는 백성들의 있음이 중요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있음이 더 중요해요.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 우주에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거예요.

 

존재적으로 하나님이 어디나 다 계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구체적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를 통해서 주체적으로, 모호한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이런 원칙을 가지고 자기나라 이스라엘을 꾸리고 인도해 나오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아는 겁니다.

 

그 구체적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고 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나를 봤다는 말은 인물을 보라는 말이 아니고 기능으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기능과 일들, 말씀, 그게 아버지의 일이다 이 말이죠. 그것이 예수님의 영,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 하나 하나가 보여주는 모든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어제 주일 낮 설교에서는 성도 자체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물이라고 했죠.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하는 자, 그것이 본인이 구원받으라고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증거물로서 시장에 장보러 가든지 아니면 여행을 가든지, 어떤 지점에 가든지 그것은 그 자리에 확보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이렇게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움직이는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똑같이 마찬가지에요.

 

다시 한 번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약속의 땅은 누가 옴으로써, 아브라함이 개입됨으로써 약속이 다시 약속의 땅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오지 않으면 그냥 땅이죠. 그냥 땅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저주의 땅입니다. 저주의 땅이 아브라함이 옴으로써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복이라고 했습니까? 언약을 대동하는 것. “주님과 함께 있어. 나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거야.” 이게 복이라고 했죠. 그게 복입니다. 근데 아브라함이 옴으로써 축복과 저주가 구분되어 있죠.

 

복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것 말고 이 지상에 구체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고 복이고. 그럼 저주는 뭐냐, 저주는 아주 간단해요. 그냥 있는 것. 그냥 사는 것. 그냥 아무 일없이 살고, 내무부장관 되고, 국무총리 되고, 그냥 일어난 모든 것이 저주에요. 저주의 증거들입니다. 촛불 집회할 때 언약 살리라고 촛불집회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죠. 그럼 촛불집회는 저주의 집회에요. 태극기도 마찬가지고. 그냥 사는 게 저주에요.

 

그래서 성도는 이미 주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께서 아들이면서 저주의 땅에 오셨잖아요. 성도도 똑같아요. 이미 구원받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아버지라 부르는 성령 받아 백성 된 입장에서 이 저주받은 땅을 예수님처럼 그냥 거니는 겁니다. 유유자적하면서 거니는 거예요.

 

오늘은 취직했는데 며칠 만에 잘렸는가,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오늘도 요양사가 되어서 어느 노인 집에 가서 싸우고 한 달 되어가지고 다음은 어느 집에 가서 싸울까, 아주 유유자적하게. 나그네 삶. 집착이 없죠.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두지 않죠. 집착과 미련이 돼버리면 자기의 증거자로서 인생을 사는 것이지, 동행자를 증거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그 이스라엘을 그냥 보지 마시고, 이스라엘 너희들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를 봐야 돼요. 이스라엘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만드신 나라기 때문에 언약에 따라서 이끄십니다.

 

그럼 언약이 작용하게 되면 특별한 이벤트, 사건들이 일어나요. 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명이 붙습니다. 그게 에벤에셀인데, 여기 하나 사건 터지고 이름을 붙이죠. 12절에 보면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이라는 뜻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도왔다.

 

자, 도왔다 할 때, 만약에 목사가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마다하고 “안 도와주셔도 돼요. 싫어요.”라고 이렇게 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죠. 사실은 사정을 알고 보면, ‘아휴,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라고 할 거예요. 오늘 본문만 제대로 알아도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를 알아요.

 

왜냐하면 도와줌, 하나님의 에벤에셀이 되려면 그들이 망해야 됩니다. 현재 있는 것을 더 추가적으로 도와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망하게 하는 거예요. 망하게 해놓고 극한 지점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럼 “어찌할꼬?”가 되겠죠. “이제 나는 끝났어!” 그러면서 뭘 포기하느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죠.

 

제가 주일 낮에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면서, 천국이 안식의 나라라고 한다면, 지상에는 천국 가기 전에 먼저 법이 있는데, 그 법은 안식법이라고 했죠. 안식법의 기본은 뭐라고 했습니까? 노동을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노동의 금지를 로마서 4장에서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이, 노동의 금지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 인간들의 관행, 세상 살아왔던 그 관행에 의하면 아무리 천국이 귀하고 좋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이렇게 되거든요. 아니, 거지까지 되면서 천국가고 싶은 것에 손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 같으면 몰라도. 거지인데 천국 간다, 여기에 실험대상을 찾는다고 하면 아무도 신청 안 합니다. 슬슬 밀죠. 믿은 좋은 니가 하세요. 권사님 믿음 좋은데 권사님부터 하시고, 목사님 그렇게 믿음 좋은데 목사님부터 하시죠. 자기는 뒤로 빠지는 거예요. 사실은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어요.

 

할 사람이 없을 때는,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시키되 자진해서 안 내놓으니까 강제로 뺏어가 버려요. 그게 바로 열두 제자들입니다. 강제로 뺏어가 버립니다. 그들이 평소에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고 얼마나 빈말을 자주 반복했습니까? 실은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예수님 사랑하지도 않고 자기 가진 것을 사랑하는데, 내가 가진 자식과 내 부동산과 내 미래, 은행의 통장 잔고, 연금, 자기가 투자한 교회, 이런 것을 사랑하거든요.

 

이런 것을 사랑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제로 모든 것을 뺏어버리면 자기의 노선이, 원래 인간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누적입니다. 현재란 과거의 누적이에요. 심지어 현재라는 이미지도 과거의 기억의 중첩입니다. 내가 현재 나는 누구다, 하는 것을 쪼개보면 과거에 내가 경험한 것들 중에서 괜찮을 것을 편집한 것이 누적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남이 나를 보는 것과 나한테 원수 진 사람이 나를 생각하는 것과 다 달라요. 자기는 좋은 이미지만 관리하고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임의대로 잘라서 나쁜 이미지는 전부 다 갖다 버리고, 좋은 이미지만 골라서 된 거예요. 나를 모른다는 것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가짜다 이 말입니다. 가짜죠.

 

현재 내가 누구인줄 모르고 과거에 경험한 것, 체험한 것만 가지고 왔다. 그럼 여기서 강제로 미래에 대해서 또 예측을 해요. 그러면 이 힘은 현재의 힘도 아니고, 미래를 이끄는 힘은 현재의 힘도 아니고 과거의 힘이 속도를 자제 못해서 쭉 그냥 밀어버리죠. 이걸 가지고 관행, 더 쉬운 말로 하던 대로, 별나게 살지 않고 평생 하던 대로 살아. 이겁니다. 관성의 법칙이죠. 한 번 이렇게 시작한 것은 중간에 강제로 막지 않는 이상 줄곧 그 길로 가는 겁니다.

 

절에 다녔다가 교회에 왔다. 교회 와서 뭐 바꾸죠. 찬불가에서 찬송가로 바꿔도 그 마음은 그냥 하던 대로 해요. 줄곧 쭉 가던 대로 간다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럼 이 노선을, 천국 가려면 이 노선에서 뭐로 바꿉니까? 천국 노선으로 바꿔야 되겠죠. 내가 나의 과거에 집착해버리면 천국은 없는 거예요. 교회가 있든 말든 나는 절에 가기 때문에 교회하고는 상관없다. 나는 극락과 상관있지, 천국하고는 상관없다. 이래되겠죠. 나는 염라대왕과 상관있지, 예수님하고 상관없다. 이래 되겠죠.

 

근데 어느 순간 성령이 와서 노선을 바꿔버리면 그 석가모니라는 것, 부처라는 것이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전에 예비 된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처를 믿던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등장인물이 되겠죠. 노선이 바뀌면. 그러면 이거는 내가 사는 것이 점선이었는데, 그동안 없었으니까, 성령을 받아버리면 이 점선이 실선이 되고 내가 살아온 것은 착각이었다는 말이죠.

 

그동안 내 인생이 이런 인생이라고 착각했는데, 이 착각이 실선 되기 위해서는 이 실선에서 뭐가 뿜어져 나오느냐 하면 마트에 가서 채소 파는데 가면 시원한 김이 나오죠. 이렇게 말씀이 쏟아지게 되면, 과거에 내 기억된 인생 속에 말씀이 결합이 되게 되면 인생 살아온 것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전부 다 착각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살아왔던, 이 노선이 생각했던 나의 미래상도 결국 죄가 되는 거예요. 어제도 죄짓고 오늘도 죄짓고 내일도 죄짓는 겁니다. 줄곧 그리 가는 거예요. 근데 이게 죄로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미 성령 안에서 천국에 속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미 십자가에 속했다. 십자가는 뭐냐 하면 약속의 완성이거든요. 나는 이미 약속의 완성이기 때문에 더 보탤 것이 없어요.

 

약속이 완성됐기 때문에 예수님 관점에서 지나온 인생도 보고 나도 보고. 나도 보니까 전에는 나는 뭐 박사다,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국회의원이다, 뭐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 관점으로 보니까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는 거예요. 국회의원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박사증 찢으라는 말이 아니고, 찢으면 좋겠지만 막상 찢으려고 하면 아까워서 그게 잘 안 찢어져요. 그냥 죄인으로서 박사 되었고, 죄인으로서 국회의원 된 거죠.

 

그래서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이렇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작업을, 이런 고백을 끄집어내는 것이 주님이 벌이시는, 대동하는 주님이 벌이시는 전도가 되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계속 짓게 만들고 자기가 알아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럴 능력은 없어요.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은혜 안의 십자가 중심에서 흘러나온, 마트 채소에 뿌려주는 김처럼, 아주 시원한 사이다 같은 그런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그 순간순간마다 나는 죄인인데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나는 죄인이고, 주님보시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고. 언약 안에서. 내 안에서는 죄인이고 주님 안에서는 의인되고.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니가 누구냐 하면 죄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니는 뭐야 하면 나는 의인이다. 그럼 그리스도 빼면 나는 죄인이고.

 

그래서 이걸 구체적으로 하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분에서 나는 죄인이고, 보이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라면 죄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도 역시 나는 죄인이고, 죄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그 분만이 의롭다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더 나가면 죄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행한 것은 죄일까요? 의일까요? 죄가 되죠. 그러면 헌금 한 것도 죄가 되고, 교회 나온 것도 죄가 되고, 성경공부 한 것도 죄가 되고, 뭘 하는 것도 죄가 되죠.

 

그래서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간음하지 않는 죄를 지으시고, 토색하지 않는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간음하지 않는 것을 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가세요. 간음 안 하는 죄, 헌금하는 죄, 아마 다음다음 주 낮 설교에 헌금하는 이야기 나올 거예요. 아마 충격적일 겁니다. 제가 지금 벼르고 있어요.

 

자, 다시 들어가 봅시다.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 빼앗기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해요. “이렇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이렇게 주님께서 빼앗지 아니하면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속아 넘어가지 않아요. “이게 정신을 못 차렸구나.”하고 확 빼앗아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상 4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 되 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길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라고 되어 있죠. 4장부터 7장 끝까지 땅 빼앗겼다가 겨우 7장 마지막에서 회복했어요. 확 뺏어버렸어요. 왜?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왜? 그 땅은 약속의 땅이니까.

 

약속의 땅은 뭐냐, 뭐가 복이고 뭐가 저주인지,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것이 복이고 저주는 그냥 편하게 사는 것이 저주에요. 그냥 편하게 사는 것. 금슬 좋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저주입니다. 애들 공부 잘하는 것이 저주고. 본인이 잘하는데 누굴 믿어요? 본인이 잘하는데? 필요할 때 예수를 이용하면 되지, 여기 주인공은 나에요. 내가 주인공이고 예수님은 보조에요. 보조를 시다라고 하죠. 시다발이 아닙니까?

 

램프 이렇게 문지르는 이유가 뭡니까? 평소에 램프한테 푹 빠진 것이 아니에요. 그 알라딘 램프를 문지르는 이유가 뭡니까? 문지르면 누가 나와요? 모자 이상하게 쓰고 뿅~! 하고 등장하는 노예가 나와 가지고 주인님 뭘 도와드릴까요? 하면서 나오잖아요. 근데 그 사람이 평소에 램프한테 바라는 것 없어요. 아쉬울 때나 문지르면 되는 거예요. 아쉬울 때나. 새벽기도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언제? 아쉬울 때. 그럼 새벽기도 그만둘 때는 언제냐? 해결될 때 그만두죠. 해결됐는데 나올 필요가 없잖아요. 잠자야죠. 새벽잠이 얼마나 달콤한데요.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기도를 언제까지 해야 됩니까?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점치러 언제까지 가야 돼요? 점이 맞을 때까지 계속 가야 돼요.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 종교라는 게 왜 악마가 만든 최후의 발명품인지를 아시겠죠? 인간이 자기한테 환장하고 결국은 해답 못 얻고 미지의 상태에로,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면서 끌려가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악마의 노예입니다. 악마의 노예인데, 우리를 주인공 삼아버린 거예요. 주인공인데 이상하게 기분 나쁜 주인공이에요. 주인공이면 내 인생을 어떻게 좌지우지해야 되는데, 돌아가는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이상하게 기분 나쁘게 말려든 느낌.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 다섯 번, 여섯 번 떨어지고 5년째 해가지고 합격되었을 때, 그 5년째 목표가 뭐냐 하면 공무원시험 합격이죠.

 

그렇게 해서 6년째 되었다 칩시다. 행복해요? 아니거든요. 짧은 순간뿐이에요. 지금 뭔가 누구한테 속고 있어요. 이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행복이 아니고, 저것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니고, 뭔가 이상해요. 뭔가 말려든 것 같아요. 거짓말하는 세력에. 그럼 진실은? 진실은 없죠.

 

15절을 한 번 봅시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사무엘은 40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절,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벧엘과 길길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아까 여기 사해 있고 요단강 있고 갈릴리바다 있다고 했죠. 이 동네를 순회합니다.

 

에벤에셀은 이 동네에 있어요. 이 옆에 아벡이라는 곳이 있고. 이 동네가 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의 땅인데, 블레셋이 지중해 옆에 있잖아요. 다 빼앗긴 거예요. 다 빼앗겼는데 하나님께서 다 찾게 해가지고, 딱 여기까지만, 옛날 그 상태까지만 회복시켜주신 거예요. 여기에다가 에벤에셀, 도움의 돌을 세운 거죠. 여기까지 도왔다. 다 빼앗기고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순회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바로 에벤에셀 전쟁에 대해서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전해야죠. 그 당시에는 책으로 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제사장에게 선지자들에게 들은 것을 가정의 목회자인 아버지가 후손들에게 전달, 전달하는 겁니다. 무엇을 전달했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럼 자식들은 뭐라고 합니까? “에이, 그건 알죠. 우리는 신이 만들었고 신이 함께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있는데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원칙, 그걸 언약이라고 하죠. 언약인 자기 원칙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계속 적용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잘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기 원칙을 강제적으로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정신 차려라! 만약에 니가 삐딱하게 하나님 원칙을 모른다면 너는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다른 이방민족들에게 항시 침범의 공격이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공격해 와가지고, 그들이 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 없어 할까요? 그만큼 살만하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가진 것 가지고도, 하나님은 연금의 하나님이라, 연금 빼먹어도 구십은 살겠다, 대책 다 해놨거든요. 그 대책 자식 하나 부도나버리면 다 날라 갈 수가 있지만. 그렇게 단도리 한다고 했는데도 뭐.....,

 

이렇게 자기가 잘 되는 것, 자기중심으로 하는 이 모든 것이, 그냥 아무 일 없이 편하게 살더라도 이게 저주에요. 그래서 주께서 저주를 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충실한 셰퍼드들을 주변에 쫙 깔아놓았습니다. 여차하면 물어! 물어! 해가지고 물게 하죠. 물어버려도,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안 믿어요.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고 뇌물 갖다 바치고 곡물 갖다 바치고.

 

그러나 우리끼리 절대로 침범하지 말자고 도장 찍고 백날해도 결국은 거덜 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게 되어 있죠. 빼앗기고 난 뒤에, 다 털려가지고 그때는 누구를 찾느냐 하면,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하면서 찾죠. 그럼 하나님께서는 뭐냐, “니 원래 살아있어.”

 

살려주세요, 원래 살아있어, 라는 이런 개념자체도 옆에 있는 블레셋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사니까 우리도 그게 부러워서 저 사람들처럼 살아야지. 미국이 잘 사니까 미국처럼 살아야지. 뭐 일본이 잘 사니까 일본처럼 살아야지. 뭐 이런 식으로 해서는 그 사람은 이방민족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것 밖에 안 돼요.

 

성도냐, 성도 아니냐 하는 것은 산다는 개념부터가 이미 달라져야 하고 특이해야 됩니다. 사는 게 뭐냐? 뭐가 사는 거냐? 내가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에요. 무조건 이거는 앞에 내가 붙으면 저주입니다. 죽음입니다. 뭐냐 하면 주님이 내 안에 살 때, 그걸 생명이라고 이야기해요. 그 말은 이거는 내가 살아도 생명이 아니고 사망이 되는 겁니다.

 

사망에 생명이 올라타게 되면 그게 바로 생명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사는 것을 생명인줄 알고 자기 목숨을 내놓으니까, 주님께서는 니 목숨 내놓아도 니 처소 없어. 생명이 없다. 길이 없다. 진리가 없다. 이 말은 곧 천국에 니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전에 가락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니 자리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자진해서 그런 사고방식이 생길리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주께서 말씀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 지금 하나님의 이름, 다른 말로 언약의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용으로, 증거물로서만 너는 그 관계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났고, 죽어서는 그 언약의 하나님과 합류하는 그런 자들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보통 신분자가 아닙니다. 이거는 돈 주고서도 살 수 없는 신분자입니다. 아주 특이한 피조물이에요. 이런 인간이니까 북한에 살아도 괜찮고, 남한에 살아도 괜찮고, 북한에서 탈북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함께 있는데 왜 탈북을 합니까? 주님이 남쪽에 와서 무슨 볼 일을 보겠다고.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무슨 볼 일을 보겠다고. 그래서 뭐 강제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뭐 일이 있어서 나오는 것은 나쁜 짓은 아니에요.

 

그러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신앙인이고 북쪽에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 못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오히려 유혹이 더 많다고 보면 됩니다. 북한사람들은 자기가 지옥인 것을 알잖아요. 근데 남쪽은 자기가 지옥이면서도, 지옥을 모르니까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적어지고, 북한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하고. 사도바울의 소망이 저절로 나오는데, 물론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약속의 땅의 특징은 온전함이 없어요. 항상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자, 긴장이라는 것이 뭐냐, 그냥 대치되는, 어둠과 빛을 긴장이라고 하지 않고 한쪽이 만약 손을 놔버리면 후딱 다른 쪽으로 훅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이 긴장이에요. 긴장. 우리는 이걸 항상 대치단어로 보는데, 낑낑거리는 이걸 긴장이라고 보잖아요?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서 안 돼요.

 

긴장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한쪽이 이렇게 와버리면 갑자기 저쪽이 허약해져요. 만약에 내가 세상을 좋아하게 되면 주님은 나에게 있으나마나한 존재고 별로 생각도 안 나고 별 볼일 없는 인물이 돼버려요. 이게 긴장상태에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한 번 봅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우리의 소원은 항상 치이게 되어 있어요. 그 중에 치이는 것은 우리자신이 치이는 거예요. 분명히 많이 가졌는데 허탈해지고 허무해지고. 이게 아닌데...난 이게 행복인줄 알았는데 이게 다가 아니네. 자식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나서는 이제는 우리 둘이 편하게 살자고 하는 그것이 별로 그게 오래 안 가고.

 

빨리 손자를 놓든지. 또 자식 놓고 잘 살면 다투면 안 되는데 하고. 또 안 다투고 잘 살면 쟤들한테 좀 기대볼까? 이거 뭐 한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행복을 쫓아가는 겁니다. 근데 행복은 자전거 타고 가고 우리는 걸어가고 있고. 행복은 잡힐 듯 안 잡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요만큼 가면 저만큼 가요. 노사연의 님그림자 같아요. 저만치 앞서가는데 따라갈 수가 없어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는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하나님이니까, 전지전능한 것으로 알고 있죠. 그러나 나의 소욕에, 육체에, 성령께서 맥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물러가고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인데? 내가 못하면 강제라도 모가지 쥐어서라도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니가 욕심낼 때 내가 잠시 자리 비워줄게.”이런단 말이죠. “욕심 많이 내고, 그럴 때는 내가 빠져줄게.” 얼마나 성령이 연약한지요. 좀 강제로라도 패고 이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욕심 좀 냈다고 삐져가지고 삐짐하고 있고. 그럼 말씀도 보기 싫고 하나님도 싫고 예수님도 싫고 복음도 듣기 싫어요.

 

그런데 하는 일이 뭔가 이게 아닌데 하게 되면 벌써 성령은 두 팔 벌리고 “탕자야! 이제 돌아왔느냐?” 하여튼 탕자를 일 년에 몇 번 했는지, 들어왔다 나갔다, 또 들어왔다 나갔다가, 자동문이라도 달고 싶어요. 하도 가출했다가 들어왔다가 하니까. 아버지여! 하고 왔다가 사흘 뒤에 또 세상이 좋다고 가출했다가. “두 번 다시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다가 사흘 뒤에 또 놀러가자고 해가지고 또 놀러가서 한바탕 춤추고.

 

이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계속해서 아쉬울 때 찾고 또 도와주면 헤헤거리고. 헤헤거렸다가 다시 이방우상을 또 섬기고. 왜 이스라엘 역사가 그래야 되는가? 언약의 주인공이 되시는 우리 주님이 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나오는, 연약하심으로써 십자가 지셨거든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럼 십자가를 믿는 우리도 이 땅에서는 무진장 연약한 거예요. 큰소리치거나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은 우리한테 전혀 필요치 않아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는 권력을 가지고 사용한다면 주께서 그 권력을 빼앗아버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약에 예수 믿는데 대통령이 된다, 그럼 그 나라를 내 나라처럼 착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주님이 계셔야 되는데, 연약한 주님이 계시지 않고 강한 권력이 있어버리면 권력은 짐승과 관련되어 있어요. 악마가 관련되어 있다고요. 여러분들에게 외무부 장관시켜주고 권사님에게 대통령 출마하라고 하거든 하지 마세요. 집사님이 말리세요. 부탁합니다. 말리세요. 돈도 돈이지만 괜히 해서 위장전입 한 것 다 털려가지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면 인위적으로 조작해버린다니까요. 먼지나오는 것은 고사하고 조작을 해버린다니까요. 조작을. 그게 정치입니다. 나중에 아니면 말고 할 때면, 그때는 명예는 다 끝나는 거예요.

 

여기 사무엘상 7장 17절 마지막에 봅시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40년 동안 이스라엘 다스리면서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은 거죠.

 

그러면 사무엘이라는 존재자체가 뭐냐 하면 사무엘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눈에 보이는 사무엘이, 사무엘이, 사무엘이 어떻게 했다 하는데, 사무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무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누굴 가립니까? 지금 진짜 제대로 존재하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무엘이 가리게 되면, 하나님의 그 다음이 전략은 뻔합니다. 누굴 제거해버려요? 사무엘을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사무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 다음이야기가 뭐냐 하면 8장인데, 8장 3절을 봅시다.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죠. 보세요. 제거하잖아요. “아휴, 아버지가 선지자니까 얼마나 자식 교육을 잘 시켰을까?” 하는데, 아닙니다. 선지자가 훌륭한 메시아가 아니에요.

 

선지자는 메시아 일부를 보여주지만, 선지자가 하는 것은 내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선지자를 세우는 겁니다. 내가 이 현실에 주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너희들 앞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함께 있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하늘에 계시는 거고, 이 구체적인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 언약 자체가 이 땅의 어떤 원칙이기 때문에. 원칙 없는 땅의 역사는 없어요.

 

원칙인데, 그게 무슨 원칙이다? 언약의 원칙. 언약대로 가는 겁니다. 그 언약의 원칙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늘 긴장상태에 돌입하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83.206) 17-06-05 19:33 
대전-88강 마태복음 23장 27절(시간의 중첩)20170529-이 근호 목사

 

자, 마태복음 23장 2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죠.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만 아는 하나님 나라고,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언약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 언약에 준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되는데,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언약에 대해서 오해를 했잖아요.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본다고요. 아들이 생각하는 그 아버지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신약에서는 아들이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이 나라가 예수님의 나라가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에요.

 

예수님의 나라기 때문에 예수님이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했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했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없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없다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이 나타났으면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국을 누구한테 비교해야 돼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내용과 내가 평소에 천국 생각하는 것과 대조를 해보고 비교를 해봐야죠.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 중심으로 설교를 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비교해봐야 돼요. 예수님 중심이 아니면 누구 중심이죠? 나 중심이죠. 내가 잘되고, 내가 영원히 행복한 그런 나라하고, 예수님 중심의 나라하고 말씀을 통해서 비교를 해봐야 해요. 이 비교를 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하신지, 이 비교하는 비교의 시범조교까지 주께서는 사용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천국을 가기 위해서 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이게 27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페인트칠한 무덤 같아요. 겉으로는 어떻게 보입니까? 아름답게 보이죠. 그러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죽은 사람의 뼈가 너희들 보기에 아름답냐? 아름답지 않냐?”라고 물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니들이 하는 짓거리를 아름답게 본다는 것은 살아있는 니가 죽은 사람의 뼈다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희가 지금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저쪽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나라하고 비교를 하지 않으니까, 예수님 쪽에서 예수님 나라와 저쪽을 비교를 해버리는 거예요. 비교해버리니까 저쪽은 이미 죽은 자들이, 사망한 자들이 자기 딴에는 아름답게 꾸몄는데, 꾸미는 목적이 뭐냐 하면 천국은 이와 같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꾸미는 거예요.

 

파이프오르간에다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에다가 수 백 명의 성가대와 그리고 헌금하는 사람들까지 가운입고 매미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 하고, 심지어 주차요원까지 완장차고 돌아다니고. 그게 너희들 보기에 어떻게 보이느냐?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 니가 죽은 뼈다 이 말입니다.

 

죽은 뼈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좀비죠. 좀비의 걸음걸이를 좀 보세요. 다 뒤틀려있죠. 제대로 육사생도처럼 걷지 않습니다. 이렇게 슬로우비디오로 걷죠. 이상하게 방향감각도 없어요. 맥이 빠져서 어깨 축 처져가지고, 알죠? 좀비 교회 목사도 좀비입니다. 좀비를 감추기 위해서 가운을 걸치죠.

 

가운을 걸쳐봤자 그 설교는 좀비가 설교를 하는 거예요. 좀비가 좀비답게. 시체가 시체답게. 교회에 가서 그게 보여야 되는데. 그걸 본다면 구역질이 나겠죠. 그러면 잘 안 가게 되겠죠. 심방 온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하세요. 대심방 가면 오야붕이 좀비에다가 여자좀비 수행원이 줄줄 따라다녀요. 그들 만나면 오늘 점심은 뭘 먹나? 이것만 생각해요. 오늘 누구 집에서 먹나? 목사는 봉투 몇 장만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는 싸움이 없이는 나라가 안 나옵니다. 예수님은 혼자 싸우고 있어요. 싸웠는데 이겼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기 위한 싸움을 해버려요. 져버립니다. 이 세상의 권력과 마귀한테 져버려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에 맞서 싸워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은 반대성향을 드러냅니다.

 

“져! 져서 죽어버려!”라고 이렇게 가르치시는데, 열 두 제자 중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있습니다. 칼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칼로 쓴 자는 칼로 망한다.” “주님이 고난 받을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맨날 이런 식이라.

 

왜 교회에서 혼자서 기도 못하고 합심해서 기도하는 겁니까? 힘을 응집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힘을 응집시키기 위해서. 힘을 빼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기도를 시킨다니까요. 기도할 때 보면 시끄러워요. 쭈여! 쭈여! 쭈여도 아니고 쪄여! 쪄여! 쪄여! 믿쑵니까? 집 사쭈세요! 쌍둥이 애들 시켜서 집 사달라고 시키고 바람잡이 할머니 할아버지 있고. 시끄러워죽겠어요. 시끄러워 조용히 기도를 못해요.

 

결국 바람잡이들이에요. 전도사부터 해가지고. 전도사 지도 지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계약직이기 때문에, 얼마나 아래강단에서 강단을 두드리느냐,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계약이 되고 안 되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계약이 안 되면 신학교 공납금이 안 나오죠. 그래도 푼돈이라도 받으려면 두드려야 되거든요.

 

주님께서 이렇게 싸움을 하실 때에, 시간의 중첩입니다. 시간의 중첩이라는 어려운 말인데, 두 개의 시간 층이 이렇게 같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시간의 중첩입니다. 인간들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현재 자기 이미지는 과거가 누적이 됐기 때문에 그 과거가 그대로 유지가 돼요. 그래서 단선이에요. 선이 하나밖에 없어요. 중첩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자기 시간을 가지고 데리고 옵니다. 사람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은 사람들은 시간속의 존재에요. 시간이 강물이 흘러가면 같이 딸려서 흘러가야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아까 그 분이 자꾸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데, 그건 나훈아한테 물어보세요. 청춘을 돌려다오. 사람이 왜 늙습니까? 늙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까? 아니잖아요.

 

이 시간이 나로 하여금, 시간에 내 피부가 뜯겨나가는 거예요. 조금씩 뜯겨나가요. 물론 피부가 뜯겨나가는 것이 아니고 탄력이 빠져나가죠. 하루하루 살다보면 촉촉하지 않고 자꾸 건조해져요. 그때그때마다 보충한다고 고급스러운 화장품을 여러 가지 바르다가 나중에 트러블이 생겨서 화장품 잘못 썼다고 하는데. 시간속의 존재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임의로 내 맘대로 못해요.

 

오는 봄을 누가 막을 것이며, 떨어지는 낙엽을 누가 풀로 하나하나 갖다가 붙이겠습니까? 못 붙이잖아요? 물론 마지막 잎새 같으면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서 희망을 주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그리고 해와 달이 왜 떠있는지. 누가 뜨라고 했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저거 두 개 더 만들라고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해와 달, 풀, 혹은 민들레, 해바라기, 사슴, 다 더불어 있잖아요. 누가 이런 큰 잔치를, 파티장을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새로운 시간을, 시간과 공간을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겁니다. 인간은 시간속의, 또는 공간속의 존재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달고 오십니다.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단어와 어떤 행함이나 이런 것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인간들이 이해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겠죠. 시간과 공간이 뜯겨져나가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뜯겨져나가는 방법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뜯겨져 나가서 예수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죽음밖에 없는데 그냥 자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에 합류해야 돼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언약에 합류한다. 언약에 합류하는데 방법은 뭐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예수님이 죽을 때 생겼던 그 살과 피, 그걸 같이 공유해서 먹고 마셔야 이동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럼 살과 피를 어떻게 먹고 어떻게 마시느냐? 성만찬이냐? 아닙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의 언약을 우리에게 미리, 이게 중요합니다. 미리. 미리 우리에게 줘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미리 죽은 자가 돼요. 기존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성령 안에서는 예수님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산자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시간의 중첩이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중첩이 돼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기존의 시간은 시간이 되면 어떤 때가 오는데, 예수님의 시간은 때를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조작되고 인위적으로 정리가 되는 겁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옵니까? 새벽 두시에 옵니까? 세시에 옵니까? 네 시에 옵니까? 도둑이 오는 시간은 지가 정합니다. 지가 오고 싶을 때 오면 그게 도둑맞는 시간이에요. 예수님은 뭐와 같이 오신다고 했습니까?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죠. 예수님의 재림은 시간 맞춰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오시면 그게 재림의 시간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의 재림을 요구하거나 초청장을 못 보내죠. 그냥 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근데 기존의 시간을 가지고 스케줄 짜면 안 됩니다. 뭐 이러니까 예수님 오시고, 뭐 이스라엘이 3차 대전이 일어나가지고, 마곡 터키가 어떻게 침범해서 예루살렘에 어떻게 들어오고, 그런 스케줄을 짠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가 안 죽었다는 거예요. 안 죽었으니까 주님께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안 죽은 이유가 성령을 못 받아서 그래요. 성령을 못 받았으니까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붙들고 그걸 통해서 탈출을 시도하는 겁니다.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이 신학을 가지고 개혁주의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신학은 기초가 뭐냐 하면 역사에요. 역사. 역사기 때문에 진리가 없어요. 다만 진리로 점점 가까이 갈 걸? 간다는 것도 아니에요. “갈 걸?”이에요. 왜? 이천년보다 점점 더 재림에 가까우니까, 그만큼 정보가 이게 누적이 되어있으니까, 전에 보다는 점점 더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지, 진리는 아니에요.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믿어요. 현재 이 시간과 계속 연결되어 있는 어떤 시간에 주께서 재림하시면 그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개혁주의신학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거의 백퍼센트죠. 백퍼센트 모든 교회가 이 개혁주의신학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아니에요. 성령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목사들이. 여기 출신들이에요.

 

혹시 성령을 받았으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을 받았다면, “이건 아닌데?”라고 이렇게 되죠. 그거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기존의 교회하고 완전히 담을 쌓아야 되죠. 항상 성령 받게 되면 나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니 죽었나? 살았나?” “나는 죽었다.” “죽은 사람은 말 하면 안 돼.” “나는 살았거든?” “아니, 죽은 거야? 살은 거야? 둘 중의 하나만 해!” 아니, 둘 중의 하나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둘 다 있어야 해요.

 

이쪽 기존의 시간공간에서는 죽었고, 예수님의 시간공간에서는 살았고. 둘 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두 개의 시공간이 중첩되어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 아버지에게 간곡한 기도를 드렸다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알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에이, 알지 뭐. 십자가 지게 되면 뭐 어떻게 되고 다 알지 뭐.”이러죠. 알면서 기도를 왜 해요? “내가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날 걸?” 다 알잖아요. 이미 이야기하셨잖아요. 이미 이야기하셨거든요.

 

근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마치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기존의 시간관, 단선의 시간에서는 그걸 설명을 못하지만 복선으로 되어 있는, 중첩, 다중현실이라고 했죠. 다중현실 속에서는 주께서 하신 말씀 그 하나하나가 이게 아버지의 뜻이고 계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혼자 그냥 구원받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고 발산해야 돼요. 이 세상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어떤 투쟁과 어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 몸뚱아리 하나로 발산해야 돼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건 그렇게 생각하시고. 시간의 중첩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

 

그러면 그 시간으로 봤을 때,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은 완료가 되는 거예요. 끝났다. 끝. 이 완료를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마지막 때.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마지막 때는 기존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흘러가고 있다고. 아직 구원의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완료된 채 지속되는 거예요. 이걸 설명하면 뭐냐, 질적으로 이미 새로운 질은 없고 끝난 거예요. 그러나 양적으로는 계속 하루하루가 가고 있죠. 지금 6시 가까이 가고 있죠. 양적으로. 양이 많아진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교도소에 어떤 사람이 갇혀있다고 합시다. 감방에 갇혀있어요. 그럴 때 바깥에 있는 아들이 “아빠! 교도소에 갇히니까 답답하지?”라고 물으니까 아빠가 하는 말이 “아니야. 여기도 개발할 것이 많고 투기할 것이 많고, 여기도 아직까지 아파트 지을 곳이 많아.” 감방 안에서, 매일 해봐야, 개발해봐야, 지어봐야, 이 좁은 감방인데 누가 사겠어요?

 

인간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거대한 감옥이라는 생각을,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완료되어 있거든요. 질적으로. 그런데 김우중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죠. 근데 그렇지 않아요. 할 건 없어요.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근데 김우중이라는 회장은 그렇다 치고, 오늘날 선교단체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김우중이라는 사람하고 똑같은 이야기한다고요. 젊은 애들 모아놓고. 복음학교 이런데서.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뭐 파키스탄이 회개하고...이런 짓 하고 있다고요. 앵벌이 시키는 거예요. 계속 거기에 있는 애들은 뭐하냐 하면 계속 꿈만 생산하는, 일종의 포주한테 잡혀있는 창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꿈이라는 몸을 팔아서 니가 성도라는 지위를 니가 유지하라고. 마귀가 이렇게 시키는 거예요. 마귀가.

 

근데 복음학교를 보면, 기존교회 설교가 맘에 안 들어서 나온 교인들이 거기에 가서 훈련받으면 거기에 있는 준비된 창녀 같은 자들이 가르치고 거기서 푼돈 주는 그걸 가지고 생활하는 거예요. 은혜 받았다고, 세상에! 이렇게 십자가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을 못 봤다고. 목사님! 십자가중심으로 설교하는 것 들어봤습니까? 하여튼 십자가중심이라고 하는데 들어보면 아니에요. 지난 주일에 이야기했죠. 뭐 십자가이야기하면 다 십자가인줄 알고. 부채표가 없는 활명수는 활명수가 아니에요.

 

없어요. 없다고 해야 해요. 있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없다고 해줘야 마음이 편해요. 없는데, 있다. 아, 기적이다.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이래 되지, 있을 건데? 라고 하면 다 실망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뭐다? 죄인이고, 십자가마을이고 우리교회고 뭐고 다 죄인들의 단체다. 그래서 거기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죄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하고 뭐 어떻게 십자가마을 수련회해도 다 죄다. 이게 성령 안 받으면 이게 안 돼요.

 

우리끼리는 뭐 참된 교회다. 이러면 이거는 악마의 마지막 작품이에요. 이게 지방교회잖아요. 신천지고. 하나님은 주님만 받아요. 우리 안 받아요. 주님 안에만 들어가면 되지? 주님 안에 들어갈 때는 죽어서 들어가요. 내 이름이, 나라는 존재가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어서 들어간다고요.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았던 그대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못 들어간다고요. 인간은 살아있으면 종교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어떤 분에게 카톡을 짧게 보냈는데, “일찍 예수님 중심으로 사세요.”라고 이래 보냈어요.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목사라면 나 중심으로 말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라고. 그런데 이게 중요해요. “일찍” 다시 말하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이게 돼야 돼요. 이게. ‘가다보면 나중에 천국이 있겠지.’ 이게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의 중심이 아니면, 지금 오후 7시에 와도 지옥 갑니다. 지금 예수님 중심이 아니면.

 

성령께서 일찍 와요. 왜? 성령은 무슨 영이냐, 종말의 영이에요. 종말의 영. 성령은 종말의 영, 일찍 영이에요. 시간을 중첩시키는 영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살잖아요. 초대교회가.

 

특히 대표적인 분이 스데반집사님입니다. 분명히 다중현실이거든요. 분명히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반기고 있어요. 그 말은 뭐냐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전부 다 돌 하나씩 쥐어줬다고 이래 보는 겁니다. 누굴 빨리 나한테 보내라고? 스데반집사님을 고생 그만 시키라고. 돌 쥐어 줘가지고, 돌도 작은 돌이 아니에요. 요만한 돌은 아프기만 하지 안 죽어요. 죽을만한 돌을 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스데반집사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뭐하시노? 때리더라도 요만한 돌로 죽지는 말고 죽을 뻔까지만 해야지. 죽으면 되나?”라고 이렇게 하지만, 본인 스데반집사는 그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성령이 충만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성령은 뭐냐 하면 스데반집사가 모델이 되어가지고 종말에, 그러니까 다중현실, 떠나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 있음을 증거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도행전 3장에 나오잖아요. 성전 미문에 왜 앉아 있느냐, 이 앉은뱅이를 낫게 해준 것은 지금 예수님이 낫게 했다. 이것도 다중현실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낫게 하신 거예요.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 옥문이 열렸다. 간수가 놀라서 자빠졌다. 살려달라고 했다. 이걸 누가 했어요? 주께서 바울과 실라에게 드라이버 주고 전기톱 줘가지고 지지직해서 소리 다 들리고, 알아서 나오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간수들 잠 다 자게 만들고 몰래 나온 거나,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저절로 열릴 때나, 사도바울 자기 자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느냐? 소속이? 주님의 소속인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빨리 죽는 거다 이 말입니다. 고생그만하고. 사도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그 소원을 주께서 들어줍니다. 하나님도 참 너무 길게 끌었어요. 로마에 가서 그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 소원이 될 때 하늘에서는 “생일 축하합니다! 이제 왔나?” 하면서 반기고 했을 거예요. 제대하는 기분이죠. 폭죽 막 터트리면서 드디어 사도가 자기 할 일 끝내고 제대했다!

 

사도바울은 이걸 미리 이야기했어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생명의 면류관, 그러니까 생일 빵이 기다리고 있으니, 축하 빵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조금도 후회 없이 떠난다. 잘 있거라. 다만 말씀만 편지로 남기고.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남기고. 지난,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런 이야기는 이 국면이 우리가 아는 이 세상 국면이 아니고, 다른 현실 국면 속에서 대화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국면을 전제로 해야 된다고 초반에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럼 사도바울이 일한 것도 아니고, 스데반집사님이 일한 것도 아니고, 성령이 일하죠. 그럼 성령은 누가 보내신 거죠? 예수님의 주되심이 보냈잖아요. 예수님이 성령 보낸 이유는 결국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종말이다. 마지막이다. 마지막이, 마지막이 언제인가를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질적으로, 시간이 진척되더라도 의미 없어요. 질적으로 이미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의 특색이 뭐냐, 마지막에는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새로운 피조물이 발생된다는 것. 반딧불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거죠. 죽은 이삭이 살듯이, 이미 다 같이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너! 너! 너! 깨어나! 하고, 마치 에스겔 37장의 말씀이 임하면 바짝 바른 뼈에 살집이 생기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성령이 터치해서 깨어난 사람이 있어요. 그게 마지막 때라야 그 솜씨를 부려요.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게 깨어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해요. 그냥 깨어나는 것이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걸 깨우는 겁니다. 그래서 손으로 터치해서, “너 일어나! 잠자는 자여 어둠에서 일어나!”라고 할 때, 손에 뭐가 묻어 있느냐 하면 이미 예수님이 충분하게 깨울만한 근거가 은혜의 탱크 속에, 은혜의 탱크가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가 그 탱크 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뭐만 자랑하겠어요? 예수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소중하게 여기겠죠. 거기다가 뭘 자기 것을 보태겠어요? 안 보태겠어요? 안 보태죠. 그런 설교가 나오는가 한 번 보라 이 말이죠. 그런 설교가 나오는지. 교회 가면 그런 설교가 나오는지를 들어보라 이 말이죠.

 

맨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우리 목사님 인간성 얼마나 좋다고요. 세상에! 일부러 어려운 장애자들 키우고요. 우리가 아무리 해도 못 따라가는 얼마나 선한 일을 한다고요.” 이러고 있다고요. 지금 엉뚱한 소리 하고 있다고요. “우리 목사님은요, 생활비도 안 받아요. 사모님이 일하는 것도 그걸 다 선교비로, 구제비로 다 내놓고요. 헌금 강요도 안하고요. 우리 목사님은 얼마나 마음을 낮추고 산다고요.” 그거 할 거면 절에 성철스님 찾아가라고요.

 

그게 일찍 온 천국입니까? 일찍 온 천국은 뭐라고 했던가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죄. 그렇게 양자들이고 장애자 키우고 다하세요. 여러분, 여러분 보기에 이게 지금 마음 낮춘 겁니까? 이게 바로 교만이고 죄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목사 같으면 제가 복음을 안다고 인정할게요. 장애자 키우든 월급을 안 받든 관계없이.

 

마치 모범이 되는 것처럼, 주기철 목사하고 똑같아요. 모범된다고 자기가 신사참배를 안 했어요. 왜 안하냐고 하니까 모범이 된다고. 자기는 목자니까. 목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자기가 왜 교회 머리가 되는데? 지는 죄인인데. 신사참배를 안 할 수도 있어요. 안 하고 난 뒤에 뭐라고 해야 됩니까?

 

신사참배 이게 뭐다? 죄다, 라고 이야기를 해줘야죠. 하나 안 하나 죄라고 이야기해줘야 되죠. “나는 이거 안 하고 빨리 제대할 테니까 니들은 이거 하고 더 오래 더러운 지옥 가서 살아라.” 이래서 떠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거는 교인들이 보니까 목자가 모범을 보인다고, 예수님의 모범을 보인다고 이래가지고 신사참배 안 한 거예요.

 

그러면 신사참배 안 한 주기철 목사는 마음속으로 음란 없어요? 그거는 안 하고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음란은? 인간의 성욕, 리비도, 이거는 말릴 수가 없어요. 인간이 손 댈 수 없다고 어제 오후설교 때 했잖아요. 사실은 더 심하게 해야 되는데, 그러면 갑자기 중심이 말씀보다도 딴 거 상상할까봐 제가 걱정이 돼서 더 심하게는, 19금까지는 안 가고 건전한 선에서, 사건의 경계선상에서 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만 들으라고 그렇게 보지 마시고, 이 말씀이 여전히 두 개의 중첩된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보고. “이왕신앙생활 하는 거, 주님이여! 아름답게 하겠습니다.” 신앙생활 아름답게 하지 마세요. 죄를 아름답게 짓는다고 죄 아닙니까? 바람피울 때 여인숙에 가면 더럽게 바람피우는 거고, 호텔에 가면 아름답게 피우는 겁니까?

 

우리가 이걸 한 두 번 들을 소리가 아니고 평생 들을 이야기입니다. “니가 회칠한 무덤이다.” 왜? 주님이 이미 우리를 죽일 때 육체를 남겨놓고 죽였잖아요. 육체는 육체대로 살면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할 때는 이 육체를 통해서 니가 왜 죽어야 되는 존재인가를, 남은 육체를 가지고 늙어가면서 실컷 체험하라고 주신 육신이에요.

 

그야말로 이 육신은 아담의 하체를 덮은 것처럼, 인간의 근원적인 오리지널 씬original sin, 원죄죠. 샤론스톤의 원초적 본능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원초적 본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니가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경험하라는 겁니다. 사람이 젊을 때는 자기의 품위유지와 고상함을 단단히 챙기죠. 자물쇠 채워가지고 스스로 자기한테 너무 철저하게 하지만, 나이가 적어도 사건의 경계선 60이 넘어가면요, 이게 느슨해져요.

 

자기 철저함이 느슨해져가지고 이거 뭐 방귀 뀔 때 안 뀔 때 못 가리고, 빈자리 남아 있으면 가방 던지고 궁댕이 들이밀고, 늙은 사람도 서 있는데 젊은데 앉아있다고 막 대도 않는 잔소리해대 쌌고, 점점 70, 80이 되면 정신이 완전히 좀비가 돼요. 혼이 나갔어요. “아이고 어머니에, 우사스러우니까 그러지 마세요.”라고 해도 “뭐 어때서? 뭐가 어때서? 하여튼 요새 젊은 것들이!”이래 나와요.

 

“아이고, 나는 우리 어머니하고 어딜 가지를 못해. 얼마나 낯 뜨거운지. 우리 어머니가 언제부터 그랬노?”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게 원죄가 있어서 처음부터 그랬어요. 다 원초적 본능이에요. 다 샤론스톤이에요. 전부 다. 그저 늙은 남자들은 젊은 것들이나 찾고. 나이 60넘어가서도 힙합hiphop한다고. 스웩swag~스웩swag하면서 흔들고. 아이고, 꼴사나워서. 그냥 파마하지 생머리해가지고, 얼굴 완전히 빠졌는데 생머리해보세요. 완전히 귀신같아요.

 

여기 지금 나오는 아름다운 이 모든 것, 이것은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우리한테 계속 적용되고, 이 말씀이 오면 우리에게 일부러 의도적으로 이러한 재료들을 우리 몸을 통해서 주께서 만들어냅니다. ‘아, 내가 주님 좋아하지만 역시 나는 여성으로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구나.’ 그 아름다움이라는 집착과 그리고 아름답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슬픔, 애환, 탄식, 그런 것들이 나이가 90이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어떤 tv를 보니까 81살 된 할머니가 악기를 열 가지 배운다는 거예요. 자기는 배워서 좋은데 같이 배우는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역인줄 압니까? 왜? 나이 많이 먹으면 냄새나거든요. 그리고 선생도 배려하다보면 수업진도가 안 나가요. 제가 이렇게 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럼 죽을까? 죽고 싶어도 안 죽어지는데 어떡하라고?”이렇게 하거든요.

 

제 말은 연세 많으면 성경공부 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마음을 낮춰서 오라는 말이죠. “이 젊은 것들이!”라고 하지 말고. 대우받으려고 하지 말고. 성의 받으라고 하지 말고. “힘없지만 도와줄 거 없나?” 이런 마음자세로 오면 얼마나 좋으냐 이 말이죠. 왜? 죄인이거든요. 아니, 죄인이 무슨 권리를 주장합니까? 죄인이 무슨 나이 많은 행세를 해요? 조심해야지. 어차피 우리는 중첩되어 있으니까 행세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주의해야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29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화 있을진저, 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땅에 아브라함이 있음으로 해서 뭐가 생긴다?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축복과 저주가 생기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완전히 완료, 완성이니까. 마무리 끝났으니까. 이제 끝이에요. 그냥. 종말은 끝이거든요.

 

저주가 무엇인가는 살다보면 아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저주라니까요. 그냥 살아가는 것이 저주기 때문에, 내가 뭐 이렇다 하는 이 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나를 주어로 삼는 거예요. 저주의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중입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일찍 그 다음에 무슨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주께서 나를 이렇게 하셨다. 나를 이렇게 죄인 되게 하셨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나이 들어가지고 잔소리만 늘어나게 하셨다.

 

잔소리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습니다. 앞에 주어만 붙이면 돼요. 주께서 젊은 것들이! 라고 잔소리하게 했다면 할 수 없어요. 이거는. 안 하고 싶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가 잔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설거지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근데 내가 참 주책 떨지? 그지? 죄인이야.”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거 참는다고 의인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늘 세상을 보면서 주께서 뜻대로 하게 하는 근심, 다시 말해서 말씀, 말씀에 의해서 지적받을 짓을 세상에 나가서 하면서 또 지적받는 즐거움. 지적받고 죄인에게 나오는 것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저 모든 것에 감사밖에 안 나와요. 감사밖에 안 나옵니다. 기도를 하면서 응답은 감사로 끝나야 돼요. 기도로 끝나지 마시고.

 

기도했다, 기도 중간쯤이다, 기도 끝났다, 끝. 이게 아니라, 기도를 했으면 기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감사로 끝나야 돼요. 기도하기 전부터 감사해야 되는데, 주께서 기도하게 하셔가지고 잊어버린 감사를 회복시키는구나, 다시 느끼게 하시는구나, 하고 느끼면 되죠. 기도를 만약에 안 하게 되면 기도 안 한 것도 죄인가? 여기에 자꾸 스트레스를 받아요.

 

다시 29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적, 위선이라고 보면 되고, 그들은 선지자 하면 굉장히 받들어 모시는데, 너희가 누굴 죽였다? 너희가 선지자를 죽였다 이 말이죠. 30절,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뭘 근거로? 선지자의 노선은 예수님에게 도달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지자를 알면 누굴 알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눈치를 채야죠. 그런데 선지자는 높이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시한다는 것은 바로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그 후손이 된다는 겁니다. 악마죠. 악마의 앞잡이들이에요. 근데 이 세상에서는 주님만 안 그렇고 나머지기는 다 그렇거든요.

 

그런데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얼음! 땡! 놀이를 하는 거예요. 얼음하면 가만히 있고, 땡하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얼음! 땡! 해가지고 너는 새사람이다. 그 새사람 된 사람은 예수님이 경험했던 그 경험을 똑같이 이 땅에서 겪게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했더니만 갑자기 삐져서 친한 사이도 갈라지고 헤어지고. “이러려면 헤어져.” 갑자기 잘 사귀다가도 복음이야기 해가지고 헤어져버리고. 그런 경우, 예수님이 그렇게 하게 한 거예요. 좋은 관계인데, 딴 거 이야기하면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데, 복음이야기 하니까 갑자기 원수가 돼버리는. 그런 경우들이 있죠.

 

32절 봅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양으로 채우라 이 말이죠.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이래보면 돼요. 독사가 있다면 인간의 등허리에 독사가 있어가지고, 평생 이 독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독사가 날름거리면서 계속 무는 겁니다. 독사가 인간을 계속 물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 스트레스죠.

 

전부 이 단선적인 시간 속에서 “니 그러면 벌 받는다. 저주받는다.”라고 계속해요. 악마는 우리를 정죄하는 자에요. 이 독사를 누가 얹었습니까? 주님이 얹었어요. 주님이 얹어가지고 정죄케 하는 거예요. 심지어 욥한테도 누가 왔어요? 사탄이 왔잖아요.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사탄을 만나게 했잖아요.

 

사탄이 어디에 있느냐, 사탄은 이 세상의 모든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정신세계 안에 있어요. 정신세계 안에. 인간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다하면 전부 다 사탄의 지시 하에, 지휘 하에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 사탄을 움직이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자기중심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최고죠.

 

그것을 주일 낮에 이렇게 했죠. 자기표현. 죽을 때까지 자기표현. 그래서 사람이 언제 자기표현이 그치는가? 병원 중환실에 있는 모니터에서 띠띠띠~하고 선♒이 잡히다가 띠이익~하고 이 선━으로 그치죠. 이거 나올 때까지는 헉헉거리는 자기표현이라고 했어요. 띠이익━하면 끝. 이 끝을 바로 종말이라고 했어요.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우리는 맥박 해봐야 사실은,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으로써 띠이익━너의 이름은 이미 죽은 자요.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죽은 자한테는.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안 받아요. 안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 모든 것을 그냥 주시죠. 죽어야 될 몸까지 주신 거예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죽어야 될 몸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5장 43절,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욕된 거예요. 우리보기에는 두 살 된 아이가 너무 예뻐요. 거울 보면서 혼자 놀고 까부는 것이, 그게 너무 예쁜데. 그게 왜 예뻐요? 우리는 늙었고 그 아이는 생명이 가득하니까, 참하고 뭘 해도 다 이쁘고 똥 싸도 예쁘고 똥도 다 이쁘지만. 주님보시기에는 욕된 거예요. 추잡하고 더러운 거예요. 지금은 안 보이지만 그 아이가 90살까지 살아서 늙어보세요.

 

제가 주일 오전에 했는가, 오후에 했는가, 90세 넘은 할머니들 동창회 사진 한 번 찍어보세요. 전부 다 이게 뭉개져서 전부 다 평평하게 되어가지고 얼굴을 다 뻬빠로 밀은 것 같아요. 전도서 말씀대로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똑같아요. 뭐 인생이 인물을 보여준다고요? 안 보여줘요. 나이 들면 다 똑같아요.

 

죄의 결과는 마찬가지에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점점 사망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젊을 때 가꾸라고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전도서 말이 맞아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으면 피곤해서 못 놀아요. 피곤해서 여행도 못 가는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걸 찬송가에 집어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니까 미리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보니까 ‘아하, 우리가 죄인이구나.’ 죄를 졌으면 벌을 받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 벌이, 인생 자체가 형벌이에요. 우리는 갇혀있습니다. 사는 게 저주에요. 사는 게 저주니까 그 안에 사는 나도 저주를 증명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주를 증명하면서 뭘 오길 바라는가 하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해요. 저주받았으면 지옥가야지 왜 천국을 넘봐요.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지옥가야지. “언제쯤 지옥 갑니까?”이래야죠.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것도 몰라요. 천국을 왜 넘봅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것이지, 기다리면 가는 곳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착각한 것이 그겁니다. “내가 언제 갑니까?” 가기는 왜 가요? 천국이 마중 나와서 오게 되죠.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못가니까 오는 것이잖아요. 못가니까.

 

오늘 본문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독사의 새끼들, 욕이죠. 독사의 새끼들아! 하니까 애비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그 애비의 그 자식이라는 말이죠. 같은 DNA를 받았다는 말이죠.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 니하는 행세를 보면 마귀의 행세라는 말이죠. “목사님, 마귀의 행세가 뭡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십자가 복음을 반대하면 마귀에요. 마지막 때에 이 땅이 마지막 때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도 마귀고.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 다른 걸로 대체하는 것, 그럼 오늘날 십자가 대신으로 대체하는 것이 뭐냐, 과학, 또는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과학자들은 과학 빼놓고는 모든 것은 다 뭐가 된다? 미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자만이 참된 진리를 아는 종교인이 되는 겁니다.

 

과학은 종교에요. 이 종교교육을 지금 공교육으로 해서 모든 국민에게 다 가르쳤습니다. “과학적이지 않으면 미신이다. 믿지 마라. 그거 엉터리다.” 과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북한도 과학을 하기 위해서 핵폭탄 만들었잖아요. 과학기술. 북한 자체는 종교니까요.

 

그럼 과학하게 되면 어느 나라에 갑니까? 화성에는 가게 될 줄 몰라도, 달에는 가게 될 줄 모르겠지만, 천국에는 못 가죠. 왜? 과학의 확장이 지옥이니까. 그래서 마귀가 일찍 우리에게 합리적인 과학이성을 믿게 한 겁니다. 똑똑함을 주장하죠. 그 똑똑함에 반해서 십자가는 뭡니까? 똑똑한 자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죠.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뭐가 된다? 구원의 능력이 되죠. 이거는 오직 탁 건드려서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만 과감하게 외치지, 이걸 지적으로 알아가지고는 못 외칩니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요? 미쳤다는 소리나 들으려고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사랑에 미쳤다. 이 말은 뭐냐, 안 미쳐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십자가에만 거기다가 완전히 몰입해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에, 거기에 완전히 몰두하지 못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우리도 물론 인간적으로 하면서 십자가에 몰두하지 않지만, 그때그때마다 마트의 채소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한 김을 뿌려주는 것처럼 말씀을 뿌려주니까, 십자가에서 나와서 뿌려주니까, 그 말씀을 통해서 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죠. 혼자 원어연구 해봐야 십자가에 안 통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죽게 되면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죄인인 것을 알고, 그 죄인인 것을 알게 하는 그것이 이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죄인된 것과 연결된 겁니다. 이럴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 확인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대동해서 살아간 아브라함처럼, 그런 입장이고, 그런 신세고, 이 지옥 같은 세상, 마지막 세상에 복의 근원으로서, 복의 증거자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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