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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9 21:39:24 조회 : 1009         
사무엘상 29강(강요당하는 선택), 마태복음 91강(도덕적 영웅) 17082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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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7-09-11 12:00 
강요당하는 선택 (삼상 8장 4-8 절) 대전- 29강


 이근호


2017년 8월 29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8: 4-8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사무엘상 8장을 보면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요구가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옵소서!”누구에게 왕을 달라고 하냐하면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 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지요. 왕이라 하면 그냥 정하면 되지 달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투표해서 뽑으면 되지. 자기들 가운데서 괜찮은 사람을 뽑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왕을 달라고 사무엘에게 이야기 한 것은 사무엘이 하나님과 통하는 그 당시 중보자적인 입장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뭘 달라고 요구를 하는 거에요. 그런데 오늘 날 교회의 입장에서는 뭘 달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이고 올바른 성도의 모습으로 보이잖아요. 그러나 얼마나 하나님을 몰랐으면 감히 달라고 합니까? 만약에 개가 사료를 먹다가 갑자기 이제 사료 먹기 지겨우니까 짜장면 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주면 주는 데로 먹을 것이니 무슨 말이 많아요!

우리의 인생이란 우리네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만드신 분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인생인지 내 인생이라고 따로 챙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달라고 한다는 의식 자체가 무슨 문제 있는 거에요. 우리 인생은 내 마음에 맞추어 가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달라고 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일을 제대로 안하시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뭐냐하면 미흡함,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면서 즉,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시면서 영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이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미 의견 충돌이 일어 난 거에요. 그런데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하는 거에요. 이 말은 지금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미흡함이 있는데 왕을 달라! 하나님께서 왕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당신은 빠지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왕이 있다라는 거에요. 여기서 인간들은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식이죠. 거기에 주님은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뜻이겠죠. 옛날에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때 같은 거지요. 갈아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미흡함을 드러내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발생했다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운다’이 세상에서 왜 웁니까? 욕심이 많아서 우는 거에요. 슬퍼서 우는 거지요. 왜 슬프지요? 자기의 인생이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운다는 겁니다. 그 말은 자기 나름대로의 내 인생은 이렇게 돼야 돼! 라고 움켜쥐고 있는 게 있어요. 이런 인간들의 사정을 성경적으로 설명을 해줘야 되요.

하나님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세계를 영적 세계라고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이스라엘에게 뭘 줬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사건을 주셨습니다. 지난주일 오후 설교 때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을 인간은 경작하지만 주님은 뿌린다고 했지요. 뿌린 데로 거둔다고 하잖아요. 추수 할 때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할 때 언급을 한 것 같은데 가라지와 알곡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 농부가 밤에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경작한 밭에 가라지를 뿌리 놓으면 뭐가 성립되냐 하면 스스로 자람이 성립되는 거에요.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종들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은 원수가 뿌렸다는 거에요. 주인은 원수가(가라지가) 왜 생겼는지 관여를 못해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경작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가 경작하는 게 아니에요. 마귀가 와서 뿌리면 확인 할 뿐입니다. 하늘나라라는 것은 누구의 나라이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이거든요. 굉장히 쉽지요. 만약에 나하고 하나님과 당구장을 운영하는데 시키지도 안았는데 탕수육이 배달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탕수육 안 시켰는데 하니까 내가 시켰는데 왜 이 말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주도권이 지속적으로 주님에게 있다는 말이죠.

주님에게 있는데 사건을 뿌려 버려요. 사건을 뿌려 버리면 이 사건은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냐하면 못 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에게 원치 않은 사건이 터져 버렸으니까 예를 들면 딸을 시집보내고 잘 보냈겠지 하고 돌아섰어요. 일주일도 안됐는데 신혼여행에서 오자마자 갈라섰어요. 이러면 결혼식 할 때 그 엄마는 분명히 딸이 잘 살 것이라고 손 털고 나왔다는 말이죠. 나와서 부조금 얼마나 들어 왔나 돈 세기 바쁜데 신혼여행에서 와서 “엄마 나 갈라섰어!”이건 감당하지 못하는 사건이죠.

영적 세계에서 사건을 줬을 때 우리는 어떤 테두리를 쳐버립니다. 내가 원치도 않는데 준 사건을 얼마 지나지 않아 테두리를 쳐서 내가 육적으로 포함시킨 사건으로 만들어 버려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내가 딸 결혼 할 때 기도에 소홀 했었나? 그 때 성경 공부에 빠져서 그것 때문에 벌 받아서 그런가? 십일조를 하는데 10%내야 하는데 5%밖에 안내서 그것 때문에 삐지셔서 그런가? 이런 사건에 대해서 육이 반응을 할 때 내 행동이 하나님의 원하는 법에 위반 됐기 때문에 징벌로 이런 사건을 줬다고 하는 순간 이 사건은 영적 세계로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내 관리 하에 들어가 버립니다.

앞으로는 이런 사건이 안 생기게 하기 위해 앞으로 십일조는 반드시 안 떼먹고 잘해야지 라든지 11시 예배는 10시 반에 가야지! 찬양 준비까지 해야지! 어떤 성의를 보임으로서 갑자기 누가 누구를 다룬다는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마음 놓고 영적 세계를 다루는 순간 육의 세계로 전환되고 만 겁니다. 육의 세계의 특징이 뭐냐하면 항상 선택사항이 주어져요. 경상도로 갈까요? 전라도로 갈까요?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말로는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찬송가에도 나오거든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 뜻이 달랑 하나만 나오면 괜찮은데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해놓고는 딱 두 개의 뜻이 등장하는 거에요. 중국집에 가서도 짬뽕 먹을까? 자장면 먹을까? 두 개의 사항이 생겨요, 애가 공부를 잘하는데 치대에 보낼까 한의대 보낼까? 이렇게 딱 꼬집어서 이것 하라가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뭐를 유도하냐 하면 골라잡아야 할 상황이 벌어집니다. 회사에 원서를 냈는데 삼성이나 현대에서 합격 통보가 두 개 다 온다던지 남자와 선을 보는데 (두 군데) 다 OK! 둘 다 조건이 좋아 곤란하게 만드는 양다리 걸치게 만드는 이런 것. 미장원에 가서도 계속 기를 까 자를까 이렇게 계속 선택 사항이 주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주의 뜻이 왜 선택 사항으로 주어지면 우리는 당황스럽고 우리를 유도하는 식으로 주어지느냐 하면,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선택을 했다고 합시다. 선택을 하게 되면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인간의 육이 여기에 개입이 되요. 즉 자신의 행위가 주어지게 되면 행위에 무슨 요소가 따라 오게 되냐하면 시간 요소가 따라 옵니다. 어제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몇 시간 전에 결정했다. 시간 요소가 따라오게 되면 내가 몇 일 또는 몇 시간 전에 결정한 것이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이 하나님의 뜻인지 결과를 지켜보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행위의 가치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일에 말려들게 됩니다. 내가 결정을 잘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이것은 주의 뜻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벌써 주의 뜻이라고 할 때는 이미 영적 세계를 떠나서 원인과 결과를 측정하려고 하니까 그 자체가 어디에 속하냐 하면 나의 육적인 세계로 편입돼 버린 거에요. 주의 뜻으로 받아 놓고는 나중에 처리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주님은 빠지고 내가 모든 것의 관리자로 또는 주인으로 변해가고 있어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변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들이)왕을 달라 할 때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누구의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잖아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서는 사건으로 되는데 사건 배후에 언약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상에서 나타날 때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이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사건이라는 것은 존재가 사건을 소유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주일 낮 설교에서 강정 이야기 했지요? 강정의 쌀 알갱이 하나하나가 사건의 다발이라고 했지요.

이 말을 왜 했냐하면 거기엔 자아가 없어요. 거기에 붙어 있는 모든 쌀 알갱이가 자기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소유를 하려면 소유의 주인공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주인공을‘나’라고 칭해 버려요. 내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만약에 눈 다래끼가 났다 하면 주님이 영적 사건으로 일으킨 다래끼를 사람들 앞에서 내가 다래끼가 났어! ‘나’를 집어넣어서 내가 다래끼가 있다고 해버려요. 나는 다래끼가 있다는 것을 소유해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내가 내 몸 관리에 소홀히 했다는 거에요.

관리 주체가 누가 돼버리냐 하면 내가 되어 소홀 했다 이 말은 뭐냐하면 앞으로 내가 관리를 잘하게 된다는 원인을 제공해 버리게 되버리면 두 번 다시 다래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과가 생겨 버리지요. 그러면 다래끼가 없던 인생은 그동안 누가 잘해서 인생을 꾸려 온 거에요? 내가 잘 한 거에요. 주님이 주신 인생을 주님의 사간의 다발을 나 잘남의 다발로 전환되고 만 겁니다. 그러면 관리자가 누가 되냐하면 내가 되어 버렸지요. 그렇게 만들게 된 내부에 지하 2층의 무의식 상태에선 욕구라는 게 있어요. 욕망, 충동이 있어요.

욕망과 충동이 뭐와 견주냐 하면 결과 내 인생을 자꾸 시비 건다니까요. “지금 네 인생이 네 마음에 드나? 안 들지 그치?”라고 자꾸 약 올리는 거에요. 어떻게 약 올리냐 하면 다른 사람을 모델로 삼아 버려요. “너 같은 나이인데 저 여자 봐라! 주름살 하나도 없잖아!”얼마나 미백을 하고 주사를 났는지 드라마 한번 봐라! 너하고 동갑인 탈랜트 얼굴 한번 봐라! 얼마나 품위 있는지 봐라! 여름에 하얀 밍크 옷 걸치고 얼마나 품위있어! 너는 뭐 했어? 하면 나도 옛날엔 좋았는데 자식 키우느냐고 몸이고 마음이고 다 망가졌다. 아이고! 우야노 새벽에 나가 또 기도할까?

살살 약 올리는 겁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 그랬어요. 인생에 모델을 두지 말라는 거에요. 인생을 모델로 삼으면 저절로 하나님 앞에 따지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관리 하는데 하나님이 보태 준 거 없잖아요. 그러니까 기도 하는 것이 원인이 되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고 내가 기도를 안 했으면 생기지 않을 일을 기도 했기 때문에 주님을 호출하는 거에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며 호출하면 내 요구 사항을 들어 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 사항을 들어 주게 되면 내 인생을 계속 누가 관리하고 있습니까?

내 관리 하에 있는 겁니다. 그래놓고 “내 관리 하에 있는 하나님은 용하다~ 응답의 하나님이야! 중보의 하나님이 딱딱 들어줘!”남의 교회에 가서 자랑 질 하는 거에요. 내가 목에 줄을 매놓은 하나님은 내가 시키는데로 다 한다~ 지금 이러고 싶은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 속에 누가 있는 거에요? 결국은 하나님마저 자기의 손아귀에 쥐겠다는 그 세력이 이미 인간의 모든 것을 장악해서 쥐었다가 놨다 조정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 하시는 것은 숨어 있는 마귀야! 나와! 이런 뜻이에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사건의 다발을 주었건만 그 사건의 다발을 얼마가지 않아서 어떤 범주로 다 담아버리냐 하면 육의 범주 안으로 다 집어넣어서 획일화시켜 버리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가 치매이시거든요. 그런데 저희 차가 빨간색 인데 맨 날 평상에 앉아서 그걸 보면서 “저 빨간 차 내꺼다!”하고 그 평상도 같은 빌라에 사는 아저씨가 만들어 놨는데 이 평상을 내 남편이 만들었다는 거에요.

이것을 보면 인간의 잠재 속에 뭐가 들어 있어요? 나’로 모든 것을 환원 시키는 욕망이 들어 있어요. 이것은 인간의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요. 남이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플 때만 문제가 되요. 지금 예를 들어서 대전에 북한의 미사일이 떨어졌다. 대전 계족산에 미시일이 떨어 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 집사님의 등이 근지러워요. 그러면 그 상항에 등을 긁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미사일이 터지던 말든 우선 긁고 봐야 되요. 이것을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의 정신은 육체에서 나온다. 정신 따로 있고 육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육체의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서 정신이 정립되는 겁니다. 근지로운데 긁고 나니까 시원한 거에요. 미사일이 터지든 말든 미사일은 그 다음 문제에요. 실존주의가 무엇에 반대냐 하면 존재주의, 추상적인 관념주의라는 것은 그것은 너무나 허망한 이야기이다. 실존은 ‘내가 여기 있다’가 실존주의에요. 실존주의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신, 예수, 기독교, 등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실존하기 때문에 신을 찾는 거에요.

내가 배고플 때 기도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고 그런데 마태복음 4장에선 예수님이 배고플 때 누가 나타났어요? 마귀가 나타났어요. 다른 인간에겐 마귀가 안 나타나요. 예수님이기 때문에 마귀가 탐색 전하러 마중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볼 때는 박사 학위라든지 지식이나 경험으로 보면 안돼요. 예수 그리스도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예수님 존재 자체가 사건이니까, 예수님은 언약으로 오신 분이죠. 그 말은 이미 우리는 사건의 다발이 주어져도 우리의 욕망 때문에 우리 자신도 내 소유가 돼 있어요.

나의 소유자가 나에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배고프면 돌로 떡이 되게 해라! 기도는 해도 실존부터 먼저이지 그것부터 되야 될게 아니냐는 말이에요. 그러면 오늘 날 우리가 교회에 왜 갑니까? 아까 여기에 택시타고 오는데 누가 문자를 보냈어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오늘 성경 공부가 있다는데 가야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제가 답변하기를 (성경공부)를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지 살펴보자는 거에요. 제가 바빠서 길게 이야기는 못했는데, 인간이 자기를 빼놓고 자기가 없는데 신을 왜 믿어요?

인간은 신에게 영광을 드린다고 말은 번지르 하게 해놓고 실제로는 나를 위해서 기도해요. 나 좋으라고 예수 믿는다니까요. 그러니 믿음도 믿음일수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에게 믿음이 있느냐? 믿음이 있다면 산을 보고 옮겨져라 하면 옮겨졌을 것이다.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렇게 믿음이 있는데 왜 자연은 너희를 안 도와주냐 이말이죠. 이 말은 예수님의 믿음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어요? 대자연과 같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러면 대 자연이 하루하루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 얼마 전에 개기일식이 있었지만 그렇게 해가 가리워지는 모든 사건은 누구의 명령대로 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명령대로 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명령에 의한 사건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연을 보면서도 늘 상 해는 뜨는 줄로 알고 파도 늘 그렇게 치는 줄로 알고 그런 가운데 우리 인생도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별 다른 게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주님의 언약 사건 속에서 이미 노아 때 전부 세상이 어떻게 됐습니까? 물 심판이 있었잖아요.

세상이 그대로 있다면 뭐가 맞냐 하면 과학이 진리입니다. 과학은 자연 세계가 늘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토대가 과학적 인식에서 자연세계가 고정 됐다고 하는 겁니다. 변화 되도 자연 안에서 변화 있다고 본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과학을 공부하고 수능 만점 맞아 의대에 가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냅니까? 못 집어냅니까? 찾을 수 가 없지요. 그러면 무식한 인간이에요. 누가? 카이스트에 있는 인간들이 무식한 인간들이에요. 옷 만든 사람도 시계 만든 사람도 카메라, 자동차를 만든 사람도 전부 다 무식한 사람들이에요.

손재주는 있어서 만들지요. 그렇다고 법괘 만들었다고 해서 구원 받습니까? 출애굽기 31장에 오홀리압과 브살렐을 세워서 지혜를 주어 만들게 했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예수 안 믿어도 됩니까? 의인이에요? 십자가 피가 필요 없어요? 성막 만들은 것과 퉁치는 겁니까? 아니지요. 과학자가 구원받으려면 뭘 알아야 되요? 자기가 과학 하는 그것이 죄인 것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과학을 아무리 훑어봐도 자기 죄가 밝혀집니까? 안 밝혀지지요. 태풍의 경로를 밝히는 게 죄입니까?

밝혀서 미리 태풍을 대비하게 하는 것이 그래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게 죄에요? 묻겠습니다. 그게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이지요. 왜요? 지금까지 강의 한 것이 뭡니까? 영의 사건 다발을 육으로 처리 하는 거에요. 대비한다가 원인 그 결과로 벗어났다. 내가 즉 자아가 속해있는 이 바닥을 누구의 관리 하에 내 관리 하에 이것이 육 아닙니까? 그런데 일이 잘 안 된다면 누구한테 기도하고 땡깡 부리지요.“신이시여! 우리의 일을 도와주소서!”

오늘 본문이 이거 에요.“우리에게 왕을 주옵소서!”주님은“네가 뭔데? 어디서 허튼 소리하고 네가 지금 주제 파악 안되지? 그런 뜻이에요. 이 세상이 누구의 세상입니까? 주님의 세상에 악마가‘나’라는 강조 하므로써 라이벌을 집어넣은 거에요. 방금 제가 실존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분 좋지요? 나쁠 일이 없잖아요. 주님을 생각해야 되는데 먼저 나부터 생각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이 사실을 우리가 감추고 있어도 주님은 그 본심을 드러나도록 사건을 유발시키십니다.

점잖은 체 하고 믿음 있는 에 해도 사건이 유발되면, 우리 교회 주보에 보면 기도 순서 자가 있는 데 그 분이 안 오면 제가 어디 보자~ 하고 시키려고 가면 신나게 이야기들을 하시는데 남자 집사님들은 정치 이야기 하시고 하는데 제가 갑자기“김 집사님 오늘 어떻게 기도 해 보시지요?”하면 손으로 X모양 해요. 못한다고, 그렇게 갑자기 사건이 오는 거에요. 기도라는 것이 굉장히 쉬운 거에요. 제가 방금 기도 하시지요 하기 이전에
 실존적으로 어떤 대화를 했잖아요.

그 대화를 그대로 옮겨 오면 되요.“주여! 홍준표하고~ 잘 단합하고 문재인은 좀 억제하고~”그댈 이야기 하고 줄곧 이야기 하던 것이니까 하고 이 죄를 용서 하옵소서! 이러면 끝나는 거에요. 기도를 할 때 억지로 영적으로 할 생각하지 말고 실존적으로 출발하면 되요. 그런데 그 실존을 드러내 버리면 뒷담화가 감당이 안돼요. 깁 집사가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 개코 였잖아! 다른 교회였다면 기도 잘 했을 텐데, 그곳엔 언약적 사건이 없거든요. 어차피 가짜이니까! 자기들 실존을 자랑 질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기도 하라고 하면 처음엔 길게 하시다가 짧아지고 짧게 하던 분은 아예 안해요. 실존이란 것이 단순히 철학적 용어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나’라는 것이 실존에서 나왔다라는 말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내 주변에 있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적응하고 생존이 우선되는 거에요. 밥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밥 먹고 살고 현재 일어나는 사건의 상황을 생존에 유리하도록 맞춰 나가면서 실존은 그때그때 마다 변형되고 변신되게 되어 있어요. 나한테 뭐가 유리한가를 따지는 거지요. 늘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거에요.

선택 할 때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내 실존에 뭐가 유리한가? 성경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직장에서 가지마! 하면“목사님! 오늘 잔업이 있어서 못 가겠습니다.”라고 연락하겠죠. 기다릴테니까요. 아직 직장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깔끔하게 정리 되니까 그 순간 상사가 잔업이 있으니까 더 일 하세요!라는 사건이 주어 졌을 때 그 순간 퇴근하고 성경 공부해야 되는데 라는 선택 상황이 벌어지지요. 그러면 두 말 않고 무얼 선택합니까? 잔업 하지요. 왜? 무엇에 유리하기 때문에? 실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만약에 그 지시 있고 난 뒤 32분 후에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어떻게 할까요? 재림해도 일 할 꺼에요.

왜냐하면 이게 관성의 법칙과 같아요. 인간의 몸을 자기가 선택하고 관리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풍조가 밀어 준대로 밀리며 살아 왔어요. 하던 대로 살아왔어요. 하던 대로 안하게 되면 힘들어져요. 평소에 기도를 늘 때를 따라서 7~8시까지 했으면 누가 기도를 시켜도 당황스럽지 않을텐데 24시간 동안 기도 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기도하라고 하면 못한다 하지요. 지금 기도 못한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너무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하시니까 너무 감사하다는 억지로 변명해 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얼마나 평화로운지 기도 할 게 없어요.

답답할 일이 없이 안식의 연속으로 모든 것을 내가 처리하면 되니까 평소에 선택 사항 중에서 생존에 뭐가 유리한가를 결정해 왔으니까요. 모든 기본이 내 생존이에요. 이것을 넘어서려 하지마세요. 그러면 자기가 메시야가 되고 왕이 되요. 이미 인간은 여기서 왕이 있는데 왕이 필요 없다고 한 것은 “너희에겐 이미 왕이 있잖아!”그들이“ 어? 우린 왕이 없는데?”하면 “왕 있어!”어디 있어요? “내가 찾아낼까?”예! 그러면 찾아내는 거에요. 누구를 통해서?

사울을 왕으로 줌으로써 너희가 원해서 준 사울(왕)이 얼마나 마귀 짓을 하는지 너희가 혹독하게 당해봐라! 사울(왕)이 없었을 때와 사울(왕)이 있을 때 어느 쪽이 너희의 본색이 확실하게 드러나는지 보라는 말이에요. 대구의 어떤 교회가 57억이라는 돈이 있는데 그 돈이 모이기까지 그 교회의 설립자가 자기 딴엔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인다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 세상을 개탄하면서 나는 목자로써 모범을 보인다고 에어컨도 안 틀고 사례비도 줄인다고 부교역사도 자기도 월급을 줄이고 아내가 교사라는 이유로 월급도 작게 받고 모은 돈이 57억이에요.

6개월 만에 다 날라 갔습니다. 왜요 그 후임자가 선교한다고 다 날렸어요. 얼마나 교회가 재미납니까? 그래서 제가 주일 날 그랬잖아요. 그건 교회에 마귀가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모범을 보인다고 에어컨도 안 틀고 월급을 줄이고 월급도 작게 받는 그것이 마귀인줄 몰랐지요. 왜 그것이 마귀 짓일까요? 주님을 안 바라보고 뭘 바라본 거에요. 내가 소유한 교회, 정답이 딱! 나오지요. 종교를 바꾼다고 절에 다니다가 교회에 갔는데 집구석이 엉망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벌어졌어요? 예수를 믿는데 누구를 위해 믿었다? 내 가정을 위해 믿은 거에요. 내 육을 위해서,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내 가정이 먼저가 아니고 딸이나 아들도 주님이 주신 사건인데 영적 사건을 가지고 꽃 빵을 만들어서 거기다‘나’라고 매직으로 그려버린 거에요. 내 남편, 내 자식이라고 한 거에요. 남편이나 자식을 보면서 교회에 다녔던 그 사람은 자기의 실존을 전제로 바라보는 겁니다.

내가 지금의 남편이 아닌 다른 남편을 만났으면 내 실존이 얼마나 행복했을까를 생각하는 거에요. 미흡하지요. 미흡할 때는 뭘 달라? 나에게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하나님께 하지요. 그게 바로 기도잖아요. 기도가 다른 말로 우는 거에요. 어제 제게 전화가 왔는데 말도 안하고 엉엉 우는 거에요.“목사님이지요?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죄인지 들어 보려 하니까 저희 아내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하지만 전화 톡! 꺼버렸어요. 얼마나 현명한 처사입니까? 들어 볼일 없어요. 끊어버렸어요.

나는 목회자라는 실존으로 해서 주님의 사건에 불쌍한 영혼 어떻게 건져 볼까 해서 들어 보려하는데 아내는 톡! 말도 제대로 안하는데 무슨 말 들어 볼 필요도 없다하고 꺼버렸어요. 여호와께서 보낸 분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죄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죄에요. 새삼스럽게 죄 지었다고 우는 것은 자기가 잘난 척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그 죄를 안 지으면 마치 의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운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욕심이 많아서 울어요. 자기가 쌓아 놓은 마일리지 있잖아요. 그것이 이번 일로 한방에 다 날아가서 억울해 미치겠다는 거에요. 제가 통 닭 집인가 중국집인가 마일리지를 쌓은 적이 있어요. 꼬박꼬박, 옛날에. 세상에 어느 날 탕수육하나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했더니 문 닫고 이사 갔어요. 주님의 사건이 내 실존은 탕수육을 원했건만 주님께서 새로운 언약 사건으로 깨닫게 하시는지요. 실존은 욕망인 겁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가 잘 됐다고 창고를 지어 놨는데, 마일리지 쌓았거든요. 창고 잘 지었어요.

그런데 그 영혼을 새벽 2시 46분에 데려 가버렸어요. 저 창고는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길 했잖아요. 전도서 주제가 내일의 행복을 오늘로 미루지 말라고 했지요. 사실 그 주제는 일시적인 것이고 더 큰 주제가 있어요. 뭐냐하면 네가 지금 행복한 것 같아도 감옥에 갇혀 있다라는 거에요. 심판 받은 세상에서 이래도 저래도 심판 받을 것을 마치 사형수에게 마지막 만찬 같은 것, 그거나 먹어라! 하듯이 마지막 만찬이거니 하고 살아라. 어차피 중력에 의해서 우리의 척추가 모두 주져 앉게 되어 있어요.

이빨도 임플란트 해도 소용없어요. 다 와르르 주저앉아 버리잖아요. 주저앉기 전까지는 형체가 있었는데 폭파 공법에 의해서 다이나마이트 터뜨리듯 하면 나중에 뭐라해요? 뭐가 있었나? 점선만 남지요. 이게 무너지게 되면 뭐가 같이 없어지냐 하면 그림자도 없어져요. 인간이 생각하는 유령의 특징이 있어요. 유령과 인간의 차이점은 인간에겐 그림자가 있지만 유령은 그림자가 없다는 것. 유령 만나보지도 않았지만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도 생기겠지요.

홀연히 없어지듯 우리가 죽으면 성도는 하늘의 천사같이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그러니까 여기 있을 때 시집도 많이 가보란 말이에요. 이상아라는 연예인이 있는데 세 번 이혼했는데 또 결혼하고 싶다는 거에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일곱 번 했어요. 어차피 부활되면 못 할 거 누가 찾을 때 가야 되요. 왜? 사소한 일이니까. 나 자신이 사소해요. 우리 실존 자체가 주님이 보시기에 안개 같아요. 세상의 모든 것이 사소함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심각한 거에요. 왕이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왜? 그래야 우리가 산다는 거에요.

왜 살아야 되는데? 산다라는 자체가 사건에 속하지 않고 그들은 이왕 살았으니까 존재로 바꾸겠다는 거에요. 존재 덩어리로, 배후에 누가 있어 시켰어요?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에요. 마귀가 죽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만든 거에요. 내 새끼, 내 가족, 내 아내가 있으니까 이것을 지켜야겠다는 거에요. 왜? 이유는 몰라요. 무조건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간 거에요. 혹시 종교 바꾸면 복 받을까 싶어서, 복 받지요. 이거나 저거나 다 같은 불교이니까. 교회도 절이고 이쪽도 절이고 둘 다 절이니까.


사람 좋으라고 있는 거에요. 실존 좋으라고 있는 거에요. 육은 덩어리에요. 그러나 영은 사건으로 등장해요. 오늘 걱정은 오늘까지 해라 그리고 하루를 살았지요. 하루만 살고 끝났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전부 가 사소한 거에요. 지난주일 대전에서 대구까지 예배 참석하러 오셨잖아요. 사소한 일 하셨어요. 그런데 오면서 느꼈던 모든 것은 사소하지 않는 사건을 주셨어요. 내가 가면 이런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결과와 원인의 노선을 완전히 깨어 버리고 예상 밖에 사건을 주셨지요. 그럼 또 가겠는가? 이건 선택 사항입니다.

갈지 안 갈지는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할 거에요. 갔다 오면 은혜는 받지만 온 몸이 삭신이 쑤시고 몸이 견딜 수 없어 두 번 갔다가는 죽겠다 싶지요. 그렇게 되면 사건의 은혜는 은혜이고 중요한 것은 내 몸 위주이고 실존 위주에요. 내 유리한 쪽으로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주께선 실존마저 영의 세계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아하! 그래야만 하는구나!”우리 실존의 허술함과 사소함이 아무것도 아님을 이러한 실존 위주로 매진하고 거기에 집착하고 존재를 붙드는 것마저도 주께선 영적 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소급해서 우리에게 사건으로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뒤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신선한 고백을 날마다 진정성 있게 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겁니다. 머리를 자를까? 기를까? 이렇게 주저했던 것들이 다 늙어가는 마당에 마찬가지지만 “오! 이렇게 자르게 하셔서 내가 죄임임을 다시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은 영적 존재로써 주께로 관리 받고 있을 때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7-09-15 09:31 
도덕적 영웅 (마 23장 37-39 절) 대전- 91강


 이근호


2017년 8월 29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3:37-39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마 23:39)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3장 7절부터 봅시다. 제가 몇 번이나 언급 했지만 이스라엘은 멸망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었습니다. 소위 신학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거부해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버리실 수 없다는 식으로 로마서 11장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37절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이에요. 유대인들이라니까요.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롬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롬 11: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차이점은 뭐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엑기스, 남은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 자긍심을 갖는 이유가 구약의 시편이나 여러 군데를 보면 이스라엘은 버려도 뭐는 남긴다? 유대 지파는 내가 기어이 남기리라고 주님이 수십 차례 약속 한 것이 있어요. 약속 한데로 하나님께서 약속 했으니까 유대인은 반드시 구원 된다고 (그들이)주장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너무나 합당하겠지요.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영적인 것이 나중에 인간에게 오면 뭐로 바뀐다고요? 육적인 범주 내에 재편성 돼 버린다니까요. 사건이 뭐로 변했다? 존재 뭉치로 변해버린 거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으로 인간의 소유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벌써 몇 번째 이야기 하는 데 다 잊어 버렸지요. 인간의 소유가 안 되지만 인간의 실존 때문에 다 뭘로 변해져요? 나를 위한, 내 존재를 위한 말씀으로 변형되고 만 거에요.


존재 귀신이 그 말씀 사건 사건을 전부 존재에 필요한 곳에 다 집어 넣어버렸어요. 그렇게 해놓고 그 결과가 뭐냐 “역시 우리는 구원 받았어!”이러고 싶다는 말이죠. 이 말이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그려보면 인간은 육으로 시작합니다. 시작하니까 여기에 마귀가 개입 하거든요.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아담이 육이 된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인간인 아담이 육이 된 것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요. 아담이 흙이 된 것은 누구의 꾀임에 빠졌어요?


악마의 꾀임에 빠졌잖아요. 그냥 만나고 헤어 졌습니까? 헤어지지 않아요. 악마는 이 세상 신이에요. 이 세대의 신이라구요. 인간을 안 떠났다니까요. 인간을 통치하는 신이라니까요. 이게 에베소서 2장 2절에 나와요. 어둠의 신이라고 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신이에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니까요. 교회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말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악마라니까요. 왜? 납득이 되니까.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에요. 제가 지금 틀린 말 안 하지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인데 인간은 예수님을 몰랐잖아요.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겸해서 뭘 몰라요? 겸해서 아버지를 몰라요. 아버지를 모르는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은 악마라니까요. 논리가, 이게 어려운 논리가 아닙니다. 우린 예수님을 알 잖아요라고 주장하는데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어요. 고린도 후서에 보면 지난 설교에서 제목이‘다른 예수’잖아요.

그러면서 예수를 안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진짜 복음을 아는 사도가 보기에는 예수를 아는 게 아니고 다른 예수라니까요. 그들은 성령을 안다고 했거든요. 삼위 일체 주장하면 성령을 안다고 했는데 다른 성령이에요. 그들이 복음을 안다고 했는데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라니까요. 참~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되나! 참~ 걱정되는데 어쨌든 육에 마귀가 결부되면 ‘정신’이 되는 겁니다. 제가 두 주째 제발 정신 줄 놓으라고 했잖아요.


정신 줄 놓는 것을 뭐라고 했어요? 설교 시간에‘사랑’이라고 했잖아요. 정신 줄 놓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정신없어요. 사랑하는 사이에 명품 선물 할 때는 가격 같은 건 보지도 않습니다. 얼마 나왔는지 몰라요. 선물 하고 있는 걸 보기만 해도 좋다고 나오면 얼마인지 상관없어요. 제가 주일 날 이야기 했던 사랑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오는데 사랑은 뭐다? 자진해서 그대 앞에 내가 패배자가 되는 거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작아지지요.

마귀가 개입하면 정신을 차려요. 그래서 악마의 특징은 지혜로와요. 지혜롭다는 것은 따지는 거에요. 요모 조모 따지는 것. 인간은 따지는 것이 이성이고 이성은 자신을 스스로 비판 못해요. 한계를 보자 어디까지 가는 지 칸트의 이성 비판이에요. 그러면서 이성이 뭔지 몰라요. 정신을 차리고 성경을 봐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무엇으로 단합되냐 하면 구약의 율법으로 단합된 사람들입니다. 성경으로 단합되어 있는 거에요. 단합되어 있으니까 예수님께선 보자~하고 오신 거에요.

성경 해석 가지고 거꾸로 추적해서 그들 속의 악마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마태복음 1장에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지요. 구원자의 특징이 뭐냐? 죄에서 건져내는 거에요.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미 죄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이 아니고 안다고 우기는 자들이거든요. 이것을 도덕적 영웅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계속 도덕적으로 도전에 도전을 합니다. 어디까지? ‘절대 도덕’에 도달할 수 있는지, 절대 도덕과 절대 윤리. 도덕은 내면적이고 윤리는 상황적인데 외부의 이웃 사랑이 윤리이고 내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이거든요.


도덕적으로 최고의 지경에 도달해서 고것만 넘어버리면 드디어 그리워하던 하늘나라가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이 십계명을 어릴 적부터 지켰습니다. 내가 십계명의 초자가 아니올시다라는 뜻이에요. 십계명을 지키는 프로이다라는 말은 그냥 프로가 아니겠지요.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 스스로의 지침서를 만들었지요. 이것이 십계명의 어느 조항에 위배되냐 안 되냐를 늘 자신을 살피지요. 살펴서 주 앞에 들으라! 들으라! 쉐마! 쉐마! 했으니까 순종 하겠지요.


그것을 한 해 주 해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은 왜 네가 했느냐를 따지시는 거에요. 그것을 왜 했느냐를 따지냐는 거에요. 그걸 왜 했느냐는 거에요? 누가 시켜서 그렇게 했느냐? 이 말입니다. 부자 청년이 뭐라 할까요? 하는 것이 나쁩니까? 주님께선 그러면 “다 (재산)팔고 거지 돼서 한번 따라 와 볼래?”그건 못하겠습니다. 거봐! 내가 시키는 대로 못하잖아! 네 속에 내가 시키는 것은 ‘못 한다’귀신이 들어있는 거에요. 거봐!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배후에 누가 있다?

마귀가 “십계명 지켜서 도덕적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고것만 넘으면 네가 그리던 천국이 네 앞에 있다. 그러면 너는 합격이야!”휴~스스로 모두가 자칭 메세야가 다 돼버린 거에요. 주께서 메시야만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그들 가운데 보내버렸습니다. 누가 메시아냐? 한번 비교해 보자는 겁니다. 그에 앞서 누구를 보내냐 하면 세례 요한을 보냈지요. 마태복음 3장을 보면 그때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예수님이 오실 때 누구도 같이 왔습니까?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왔지요.

그 때 세례 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뭐였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여러분! 이스라엘, 즉 유대는 멸망하라고 만든 나라에요.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니들이 구원받으면 돌멩이도 구원 받겠다. 차라리 말 못하는 돌멩이가 낫지요? 왜? 돌멩이는 귀신 안 들렸으니까. 그들은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공포 영화에 보면 인형도 막 움직여요. 제가 지난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교인들 영화관에 데려가 공포 영화를 보게 해서 아직도 무서워한다면 아직도 실존주의입니다.

내가 벗어 놓은 옷을 마귀가 밟으면 “아니고! 냄새 나는 것 실컷 밟아라! 세탁 안 해서 좋네, 찢어버려! 어차피 버릴건데!”이런 마음으로 보게 되면 공포 영화가 재밌는 코미디가 되어 버리지요. 그런데 아이고! 깜작 놀랐지? 놀랐어! 공포 영화 내용을 보면 꼭~ 얘들보고 윗 층이나 지하실에 내려가지 말라고 당부 하거든요. 숨바꼭질 한다고 꼭 지하에 내려간다고요. 그 때 안내려갔어야 하는데, 뭔가 원인에 문제가 있어서 이런 나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면 그건 마귀들인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것을 보면서 내 자신의 과거에 저기에 주눅 들어 살아왔다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돼야 되요. 저것 때문에 깜작깜작 놀랬고 우울증 걸렸고 저것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고 계속 마귀가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낭패를 줘요. 그리고 망신을 줍니다. 낭패 망신을 줘가지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백날 외쳐도 뭔가 알 수 없는 내 위신과 나의 의에 지금도 계속 시달리고 있음을 폭로시키지요. 여러분 사도들을 보세요. 사도가 가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잖아요. 십자가의 길.

사도들의 인생길은 사건이 안 터지는 게 아니라 전부 십자가의 길이에요. 사도의 인생을 보세요. 정상적이 아니지요. 낭패와 망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막 짜증냈습니까? 아니면 감사했습니까? 오히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포지션이나 지위에 있든지, 내가 그 지위를 가졌다고 소유한 순간 마귀의 표적이 되고 공격의 대상이 되요. 겁을 계속 주거든요. 네가 이런 짓 하게 되면 망신당한다. 예를 들어서 설교를 빙자해서 목사가 자기가 좋아하는 집사하고 밀회를 나눴다.


안 들키게 몰래 했겠지요. 안 들키게 모텔에 몰래 갔는데 그런 곳은 약점을 잡으려는 자해 공갈단 같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일부러 차에 와서 다쳤다고 해서 신고도 못하게 하고 돈 뜯기고 아이고! 우리는 5만원 밖에 안 뜯겼다하고 오는데 길 건너는 늙은 할머니를 딴소리하다 치어 버렸어요. 죽으면 다행인데 안 죽고 골병만 들게 해놨어요. 다 지어낸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할머니에게 아들이 일곱 명 인데 일곱 명 모두 남의 등쳐먹고 직업도 없는 아들들에게 걸려서 병원에 가면 “네가 목사가 돼서 그런 짓 하면 되겠나?”잔소리 듣고 돈은 돈대로 빼앗기고 목사는 사임하고 집사하고 우리끼리 살자고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개털 되어 버렸는데 목사는 그만두고 가족에게 이혼 당하고 자식에게는 “저건 아버지도 아니다. 악마야!”란 소리 듣고 양쪽 집안이 망신과 낭패 당해서 할 수 있는 상상을 다 동원해 보세요.


그래서 돈도 없으니 서로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그 집사는 복음 듣는다고 왔는데 그도 개털 되어 버렸네. 그래서 둘이 헤어지고 그 목사는 평소에 자살한다고 욕 해놓고 자기는 나무에 목 메달아 자살하고 사람들이 “아이고! 복음 전한다는 목사가 자살했데.”뒷 담화 들으면서 죽고 그렇게 시나리오가 짜여졌다 칩시다. 그게 당사자라고 해 봅시다. 그 집사는 구원 받겠다고 했다가 돈 뺏기고 몸 뺏기고 온갖 것 동원해서 상상해 봅시다. 어때요? 그럴 때 주님의 은혜로 생각 되겠어요?

당사자라면 겁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했어요? 죄인이라고 했지요. 분명히 십자가 진 이유가 뭡니까? 내 피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죄인을 부르러 왔을 때 우리는 동의 했지요? 동의 했는데 그렇게 목 메달 긴 왜 메달아. 우리는 자신을 뭐로 봤습니까? 주님은 죄인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평소에 내부적으로 악마가 자꾸 우리에게 뭘 부추겼습니까? “니가 그래도 의 건질게 있데이~ 니 그 동안 복음 많이 전했잖아! 그게 마일리지 쌓이면 니 의인 되는 거야!”


의인이라고 우리가 해 왔지요. 보세요, 악마가 얼마나 끈질깁니까? 그동안 복음 알았어요? 몰랐어요? 복음 알았다고 한 게 전부 거짓말인거에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마귀한테 감사해야 해요. 그 마귀 누가 보내신 거에요? 주께서 보내신 거에요. 왜? 그 사람 구원하려고 마지막 순간에 진짜 예수님이 말한 취지를 개털 되고 난 뒤에 안 거에요. 얼마나 감사한 지! 지난 낮 설교에 그랬잖아요. 도둑놈은 어디서 세운다고요? 도둑놈을 어디에 세웠습니까? 영광의 자리에 앉히지요. 어떤 형태로? 도둑 형태로, 개털 난 형태로.


그리고 말합니다. 저 사람 속에 누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거에요.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버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귀에게 속한 가짜 나를 계속 집착했고 지키려고 한 거에요. 바리새인과 똑같은 거에요. 가짜인 나를 주께선 버려야 되는데 주께서 버린 괜찮은 나를 안 버리고 우리는 가짜인 나를 붙들고 “그래도 복음 전했는데! 그래도 복음 아는데! 그래도 나는 건질게 있는데!” 계속 집착한 거에죠. 그게 무슨 성도입니까?


그런데 성도 아니니까 누가 성도로 만들어 준다? 주께서 성도를 만들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사랑은 언제 오냐 하면 마지막에 와요. 오늘 본문 39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보면 지금 주의 이름으로 벌써 오셨잖아요. 왔는데 너희한테는 주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에요. 그런데 그 예수를 부르는 모습이 실존이라니까요. 사건이 아니고, 아까 그 할머니 죽지도 않아요 병원에 그냥 누워서 돈만 내놓으라 하고 그 아들 일곱 명 만나고 그 할머니를 차에 치게 하고 둘이 바람나서 공개되고 망신당했다는 그것이 사건이라니까요.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실존을 사건으로 만든 거에요. 다시 할께요. 성도의 모든 것은 사건의 연속이고 다발인 거에요. 그 사건을 우리가 이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어 버리면 엿으로 강정 만든 것 밖에 안되요. 그것을 잇는 것은 내 자아가 아니라 주님의 자아에요. 주님이 주체가 되어 잇는 것을 마귀는 내가 조심해서 내가 잘 살펴서 내 인생 이만큼 살아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오늘 본문이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같이 있어요. 같이 있기에 그들은 예수님 속에서 뭘 발견하냐 하고자 하느냐 하면 자기가 놓치고 싶지 않는 자기 자아를 (예수님)대신해서 자기의 모습으로 보고자 하는 거에요. 이 말이 좀 어려운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그려 보는 거에요. “예수님! 천국 갈 때 주의 영광 중에서 나는 오른 쪽에 쟤는 왼편에 앉게 하옵소서!”(막10:37) 예수님 속에서 자기의 미래를 보는 거에요. 자신의 목적을 보는 겁니다. 나 저렇게 되고 싶어!

주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육으로 해석하는 거에요. “아! 그 좋은 천사가 있는 나라, 나도 들어가면 좋겠어요!” 지금 예수님을 아는 거에요? 모르는 거에요? 잘못된 자아를 가지고 예수님을 일방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육적으로, 이것을 지난 낮 시간에 제자라고 했지요. 제자는 안돼요. 제자는 뭐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사도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다 잊어 버렸습니까? 이야기 하니까 기억나지요. 왜냐하면 이야기 하는 것이 사건이기 때문에, 평소에 우리가 말씀을 볼 때 이미 실존으로 봐요.

뭔가 겁나는 게 있어요. 겁나는 게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귀를 보내서 겁나게 한 거에요. 뭔가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주님! 제발 이것만큼은 안 가져가면 안돼요? 이런 거요. 제가 수련회에서 분명히 했는데 8강 할 때인가? 엘리야에 대해 할 때 과부 있지요? 과부에게 기름 주고 가루 줄 때는 입 째지게 좋았습니다. 야! 역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어떻게 했습니까? 아들을 죽게 하지요. 과부가 화냅니까? 안 냅니까?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 조져야 되요. 조지는 게 없으면 십자가 아닙니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을 너무 잘 알아요. 지키고자 하는 그것을 마지막 마지노선을 깨부술 때 우리는 개망신 당하고 낭패 당하지요. 그 현장이 바로 내가 가고자 했던 천국이 만들어 지고 나타나는 거에요. 얼굴을 쏙 내미는 거에요. 이게 천국이다.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을 일상에서 어느 직업에서든 다 있어요.


어느 음악가가 연주회 연다고 포스터 붙여 다 알리고 대관하는데 50명짜리 빌리면 되는데 욕심내서 200명 모이는 곳을 빌려서 수석 이고 서울대 교수라는 타이틀 걸고 초대를 얼마나 했든지 다 모였어요. 연주 할 때는 안 보고 하잖아요. 연주자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연주 시작하고 틀리기 시작하는데 백곡을 연주 한다면 한 번 쯤은 틀릴 수 있지만 이건 그게 아니고 못 들어 줄 정도로 그럴 때 연주자의 심정은 어떨지 연습 한다고 6개월 준비 했는데 여럿이 연주 하면 틀려도 묻혀서 넘어 갈 텐데 단독 연주로 하면 귀 쫑긋하고 다 듣는 다고요.


그때는 뭘 저주하겠습니까? 내가 이럴려고 여섯 쌀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가? 저주 하게 되겠지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그동안 잘 난 내가 지옥으로 가면서 천국인줄 알았어요. 왜? 잘난 나를 계속 우대해 주니까. 39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다른 말로 감사거든요. 고마움이지요. 제가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고마워지면 성령의 일이고 후회되면 악마의 일이라고요. “아휴~ 내가 그때 차 몰고 안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하면 악마의 일이고,

감사합니다. 할머니 다치게 해서 개털된 것. 고맙습니다. 내가 예상 못한 일이잖아요. 예상 못한 일을 벌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털 되고 천당 가고 자리 지켜서 지옥에 가고 어느 장사가 남는 겁니까?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간통하다 걸려서 천당가고 안 걸려서 지옥에 가고 어느 것을 할 겁니까? 그래도 우린 안 걸리면 하지요. 지금 우리가 지키지 말아야 될 것을 지키고 있는 거에요. 지키지 말아야 할 버려야 할 자아를, 마귀가 준 자아를 온 힘을 다해 지키고 있는 거에요.

남 앞에 내세울 전시 효과의 자아를 붙들고 맨 날 울고불고 기도 하고 철야하며 땅 바닥 치면서 십일조 내면서 이래도 우리 가정 안 지켜 줄 겁니까? 이쯤대면 여러분이 질문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할 겁니다. “목사님! 꼭 그 정도로 망해야 됩니까?”지금 망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수상한 자아에요. 질문을 이렇게 해야 되요. “목사님! 주님이 누구십니까?”질문을 바꿔야 되요. 망해야 됩니까?는 여전히 자기를 쳐다 보잖아요. 반대로 주님이 누구십니까?로 보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한 것 같이 하나님이 왕이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 졌잖아요.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삶을 통해서 보여주면 되는 거에요. 이렇게 망신당해도 누구의 솜씨이다? 주님의 세심한 배려에요. “이것 먹어봐! 이건 칼슘이 부족해서 안돼! 마그네슘이 부족하니까 반찬은 고거 먹어야 되고 알레르기에는 고런 반찬 먹어!” 너무 세심 할 땐 짜증나지요. 콩나물 하나 얹어주고, 시금치 하나 얹어 주고 비타민 A, B 비타민 C, D들어가야 되고 눈에도 좋아야 되고 세심하게 하듯이, 왜 이렇게 세심하게 하나?

이 몸이 주님이 보시기에 사랑하는 귀한 몸이기 때문에 마귀, 귀신 다 동원해서라도 떼어 내는 게 뭐냐하면 밀회하다 걸린 것, 바람 피우가 걸린 것, 다 걸리게 만들어서 웃음거리 되고 이제는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주님 가신 길, 그 길입니다. 세상이 안 받아 주는 거에요. 이혼 당하고 자식도 인간으로 안 보고 산에 나무도 많다. 아무렇게나 밧줄에 메달리던지 해서 그냥 산에 가서 누워 있으면 들짐승이 와서 뜯어 먹겠지요. 들짐승이 와서 뜯어 먹던 뭐하든 그 들짐승도 누가 보냈냐!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산도 옮기니까 주께서 옮겨 놓고 네 믿음으로 옮겼다고 보는 거에요. 결과를 주께서 만들어 놓고 원인에 우리를 집어넣어요. 그러면 그 원인에 주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지요. 그것이 바로 내가 나 된 것과 사도 된 것도 누구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는 그냥 돌아서면 5분도 안 돼서 사건의 다발을 내 인생으로 다시 존재로 만들어 버려요. 끊임없이. 오늘도 복음 안 나가 되었다! 그럼 누굴 믿는 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알게 된 나를 믿어 버려요. 끊임없이.


자! 순서를 보세요. 순서가 중요합니다. 유대인을 공격하지요? 유대인들이 품으려고 해도 오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죄가 뭐냐? 의가 뭐냐? 구원은 뭐냐?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메시야는 어떤 분인가? 이미 (마음에)꽉 차있다니까요. 이미 예수님에게 잔소리 들을 필요 없어요. 이미 자기가 확보 했다니까요. 어떻게? 도덕적 영웅, 영웅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계속해서 도전하지 않으면 영웅이 아니에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 했잖아요.

신부하고 수녀가 가는데 먼저 신부가 문둥병 환자를 보고 불쌍하다고 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씻을 물을 갖다 줬잖아요. 신부가 바쁜 가운데 그렇게 한 젓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을 기억했기 때문에 자기 돈을 내서 해 줬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고마워요. 문둥병 환자에게 혹시 병원에 가서 돈이 모자라면 해 드릴께요. 여기 까지는 되는데 뒤에 있는 수녀는 뭐했습니까? 발 씻은 물을 마셨지요. 그냥 외부에서 도와줘 버리면 나는 강자가 되어 버리고 도움 받는 자는 약자가 되요. 자기는 갑이 된다고요. 도와주는 자는 갑이 되고 도움 받는 자는 을이 되잖아요.


그런데 수녀는 그게 아니고 그들과 같이 문둥병에 걸리면 그 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으리오. 사랑이란 정서적 동질감이 아니고 진짜 모든 게 하나가 돼버리는 거에요. 그들과 같이 고름이 흐르는 아픔을 겪지 않으면 주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한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나는 해석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그 수녀는 씻은 물을 마셔서 나도 문둥병자가 될께! 라고 했어요. 이게 바로 도덕적 영웅주의라니까요. 이게 마귀에게서 온 거에요.


지금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원인으로 제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너희는 찬송하리로다는 뭐냐 오실 주님이라니까요. 그게 나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해석하는 시대가 끝나고 주님이 어디서 사라집니까? 십자가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 십자가를 지졌던 그 취지를 품고 옆에 난 창 자국을 가지고 주께서 다시 나타나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사는 내가 저 분을 믿었다가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찾아오신 거지요. 그럴 때 나오는 것이 뭐 밖에 없습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이렇게 되는 거지요.


아까 그 과부는 자식을 잃고 난 뒤 기름과 떡을 먹으면 맛이 납니까? 맛있어요? 안 맛있겠지요. 누가 죽었는데? 자기 아들. 부모는요 아까 그 수녀와 같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자식은 살리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그 만큼 사르밧 과부한테는 자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자식을 죽여 버립니다. 여러분에게도 자녀가 있지요?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식이 죽었어하고 연락이 오면 성경공부 계속 해야 됩니까? 계속 해야죠. 이론 상. 그러니 주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의미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자기 자식을 쳐다보잖아요. 그러니 뭘 해도 죄인인거에요. 자기가 낭패하지 않고, 망신당하지 않는 쪽으로 처신을 하게 마련입니다. 이게 예 사람이에요. 옛 사람은 마귀한테 줘 버리세요. 가져가서 망신을 주든 지근지근 밟든, 마귀는 무섭지? 무섭지? 그런 식으로 공포 영화를 만들어요. 아니, 코미디인데.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으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 사는 거지요. 내 몸은 일종의 옛 그림자이지요.


발상의 전환을 해라. 내가 어떤 남자를 버렸습니다. 나하고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 양다리 걸쳐 기분 나빠 그 남자를 욕하고 했어요. 버릴 때는 욕을 해야 되요. 그래야 자기가 잘 버린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욕을 하니까 친구가 그 남자의 편을 들면 친구 관계도 끝나지요. 그런데 위로해 준다고 하면 신나지요. 내가 짓밟을 것을 마귀가 짓밟아 주니 고맙다 친구야! 난 살 가치도 없고 남에게 피해만 줘! 난 적패야! 누적된 패단이야라고 평소에 자기를 욕할 때 같이 내가 욕 해 줄께! 하면 고맙다 친구야! 하지요. 이론 상 그래야 되잖아요. 더 밉지요 사실은. 욕을 해도 내가 할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라고 하지요.

부부 싸움을 하는데 경찰이 오면 갑자기 얻어맞던 아내가 남편 편들어요. (경찰에게)네가 뭔데 남이 얻어맞던 말든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해요. 인간은 웃겨요. 심지어 욕하는 것도 마일지리 누적이 되요. 자기의 행동 하나하나가 장차 괜찮은 결과를 유도하기 위한 행동 인 것처럼 자꾸 계산을 그렇게 해요. 못 돼먹었어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못 됐다는 것을 절감하라고 아담의 몸을 주신 겁니다. 남의 애들이 수학여행 갔다가 빠져 죽던 말든 자기 등 가려우면 긁어야 되요. 실존입니다.

부부 사이도 “당신 왜 요새 나를 사랑 안 해주노?” 보통 아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하는데 남편은 돈 번다고 기분 신나는 순간이에요. 사람이 한 쪽에 관심을 쏟아 부으면 다른 데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와서 “여보! 사랑해!”라고 할 때는 지금 남편의 수입이 변변치 않다는 뜻입니다. 일이 잘 안 된다는 뜻이에요. “나 위로 해줘!” 그런 뜻이에요. 우리로 받을 곳은 당신 밖에 없어!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것은 전부 다 이기주의 숲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모델로 삼습니까? 세상에! 문둥병 환자가 씻은 물을 마셨다. 심지어 극단적인 영웅주의를 모델로 삼아서 장사하는 기독교 단체도 있어요. 있어요라는 말이 잘못됐다. 다에요. 다라니까요. “여러분들은 오기도 없어요? 그리스도의 형상 본받고 싶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졸장부처럼 뒤로 숨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 사랑을 알았으면 까짓것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한번 큰 목돈을 내 보세요. 남자 아닙니까? 남자. 성경에 보면 남자처럼 강건하라는 말도 있잖아요. 자식들 과외 시키는 돈은 잘 쓰면서 다 여러분의 자식 잘 되라고 하는 겁니다. 돈 내세요!”

하면 갑자기 비겁한 인간이 대단한 인간이 돼서 막 돈을 내지요. 왜 그런 꼼수에 다 속아 넘어 가십니까? 그것은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에게 감사하고 싶은 거에요. 예수님 믿는 자기에게 감사하고 싶고 찬양도 자기에게 하고 싶어요. 1절 부를 때는 은혜롭지요. 2절 부를 때는 약간 그렇고 3절 부를 때는 내가 오늘 괜찮게 부르는 것 같은데 4절 부를 때는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어요. 인간의 실존은 버리라고 준 몸이에요. 아담의 몸은 네가 살 동안만 관리하고 이제는 빠이~빠이~헤어져야 될 몸이에요. 분리수거 해야 되는 쓰레기입니다.


여러분 자기 몸에 너무 많이 투자하지 마세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찬양 할 준비를 했어요. 누구에게? 도덕적 영웅주의에게. 무슨 말이냐 하면 도덕적 영웅주의로 갖춰져 있으면 깨끗하다는 거에요. 바리새인이 제일 높고 사두개인도 높고 밑에 세리와 창기는 더러운 쓰레기에요. 이 구조와 체제를 동의 해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거에요. “차암~ 훌륭한 종아! 고생했다. 네가 내 뜻을 제대로 알아서 잘 적용시켰구나!”이런 메시야로 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세리와 창기를 영광의 자리에 앉혀 버리는 거에요.

이건 도발입니다. 완전히 모레 시계처럼 뒤엎어 버리는 거에요. 모두가 간다는 천국은 지옥이었고 천국은 누구나 갈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문을 만들어 줘야 되고 예수님이 만든 문만이 천국의 문이기 때문에 갈 수 없는 곳을 열어 줘서 집어넣고 도로 닫아 버리는 그래서 천국의 문에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뿐이 되는 거에요. 그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렇게 정들었던 일가친척 가족들, 자식, 남편 아내, 누구도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겁니다. 외로워지죠.


세상이 나를 그런 식으로 떠미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에 보면 세상이 떠민다고 떠밀리지 말고 복음 때문에 떠밀려라! 그러면 죄짓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요. 어떤 일이 터지게 되면 그 자체가 고맙고 감사 할 때 이론이 아닌 온 몸 전체가 정신병자처럼 자기가 완전히 개털 되었는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 도리어 감사하고 있으니까 미친 거 아니야? 남편 부도나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서 차도 팔고 뭐도 팔고 걸어 다니고 있는데 이제 십자가를 알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에요.

너무 충격 받아서 정신이 돌아버렸거나 그렇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오늘 두 번 째 강의는 부담됩니다. 귀 씻어 내서 안 들은 걸로, (웃음) 그러나 기쁜 소식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고 다시금 질문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께서 허락하신 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무엇이 중헌디? 내가 구원 받은 것 보다 예수 그리스도 보다 귀한 것은 없어요. 그 찬송가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는 개털 되고 난 뒤 부르는 거에요. 개털 될까봐 벌벌 떨데와 다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은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나 위주로 도덕적 영웅주의 위주로 잘못 해석 했는지 날마다 우리에게 주신 사건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의 일답게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주신 사건의 다발인 것을 다시금 찬양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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