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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1 21:54:05 조회 : 581         
사무엘상 31강(고립된 체계) , 마태복음 93강 (실패의 십자가) 17103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음성1                          음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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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7-11-17 18:56 
고립된 체계 (삼상 8장 10-19 절)
대전- 31강

 이근호


2017년 10월 31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8:10-19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삼상 8: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사무엘 상 8장 10절부터 11절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고 되어 있지요. 왕의 제도 이 대목에서 진도가 잘 안 나가고 있지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들이 처음부터 왕국이 있다고 인간들의 나라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창세 전부터 오직 하나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와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지요. 하나님 나라가 뭐로 구성되느냐 하면 사건으로 만들어 져요. 그냥 하나님 나라가 있다가 아니라 있음으로 사건으로 내용이 채워져야 되는데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 (십자가 사건)

죽음(저주) ⟶ 생명
 없음 ⟶ 있음

<인간이 천국가는 방식>
살아있다 ⟶ 천국
 있음 ⟶ 있음


 죽음에서 생명으로 또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두 가지 요소가 하나님 나라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되는데 그 내용은 바로 사건을 통해서 채워지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죽음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살아 있다에서 출발해서 가는 곳을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생각으로 내가 살아있듯 하나님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는 곳이 하늘나라이고 없음에서 있음이 아니고 있음에서 있음으로 가는 나라를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천국이 아니고 이것은 허망한 것이고 악마가 배후에서 인간들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고 진짜 천국은 살아있는 것이 어디로 가야 하냐하면 죽음으로 가야하고 죽으면 뭐도 같이 날라가냐 하면 살아있는 내가 나중에 천국 간다. 이런 천국도 죽음 안에서 소멸되고 깨져야 되고 소실되야 되요. 사람들은 살아있는 내가 누구를 믿느냐 하면 예수를 믿고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자가 누구지요? 내가 예수를 믿는 거지요. 이것을 하나님은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런 예수가 내가 예수 믿는 것을 후원해주고 호응해주는 예수이기 때문에 이건 가짜 예수가 되요.

가짜 예수여서 그 자리에 부처를 넣어도 괜찮고 온갖 신이나 메시야를 다 집어넣어도 중요한 것은 부처나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중요하냐 하면 내가 여기 계속 살고 싶다가 내가 원하고 있는 욕망에 의한 천국은 살아있는 한 계속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있는 것을 죽여야 하는데 죽일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해요. 그것은 죄로 인해 죽여 버리십니다. 내가 살아 있다라고 할 때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조인으로서 살아있기 때문에 죄 값은 저주이다라고 해서 주님께선 저주 받는 죽음에 집어넣는 거지요. 이 저주의 죽음을 아까 사건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인간이 천국에 가고 싶다라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라고 할 때에 살아있는 인간이 천국에 가는 방식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 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서 천국 간다 이 방법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해요. 또 한 가지는 사람에겐 이성이 있으니까 연구를 많이하고 똑똑해야 되고 지식을 많이 확보하는 양에 따라서 천국이 뚜렷해지거나 그렇지 않다 둘 중 하나에요. 인간은 지식과 지혜로 성인들의 불경 뿐만 아니라 성경까지 섭렵해서 많이 아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이에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옛날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만날 땐 기적으로 만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통과 했지요, 시내산에 자기 민족만 가서 모세가 단독으로 면회 가서 십계명이라는 돌판을 받았고 그것도 기적인 것이 하나님이 직접 쓰신 돌판을 받았고 언약궤 중심으로 요단강 건넌 것도 기적이고 성전 만든 것도 기적이고 여리고 성 무너진 것도 기적이고 여호수아를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 시에 모든 성들을 섬멸 할 때도 기적이고 그 때는 변변한 칼이나 무기도 없고 사사기까지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은 철을 다루는 대장간이 없어 블레셋에서 농기구를 수입했어요.

따라서 아무런 무기가 없는데 누가 도와줬나하면 대 자연이 도와줘서 승리했습니다. 우박이나 태양이 멈춘다든지 물론 약간의 농기구는 있었겠지만 어쨌든 대 자연이 도와줘서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그렇게 점령했거든요. 그러면 대 자연이 누구의 말을 듣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을 듣지요. 하나님께선 이쪽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을 주었고 자연에겐 언약대로 도와주라고 지시를 하셨고 언약이라는 말은 사전에 그 땅을 너희가 들어갈 땅이야라고 약속을 하신 거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에게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 땅에 필히 너희를 들어가게 하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을 믿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지요. 여호수아와 갈렙. 그래서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간 거에요.


언약이라는 것은 항상 이것을 생각하면 되요. 상자라고 생각하면 되요. 당기는 상자. 아이들이 노는 썰매 있잖아요. 썰매 위에 애를 태우고 끌면 미끄러지겠지요. 밑에 까는 것,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것은 언약이 가는 그대로만 가면 천국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 하지요. 구약과 신약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마지막에 깔아 놓은 썰매가 뭐냐하면 내 피와 내 살이에요. 그런데 살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기 위한 용도이니까 싹 빼버리면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깔려 버립니다. 그 위에 있는 인간의 종교적 행함은 의미가 없는 거지요.


제가 지난 설교에서 거울 앞에선 아무런 인간의 재롱에 같이 춤추지 않습니다. 거울은 그냥 본인이 비추고 싶은 대로 되비출 뿐이지 거울 쪽에서 말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백설공주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지 그냥 밋밋하지요.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재롱이라든지 헌금이나 전도나 봉사 그런 것은 무의미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보고 구원 하시지 우리의 재롱 잔치나 교회에서 벌이는 전도 잔치보고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 방법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방법을 고수 하지 때문에 그래요.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 가지 그 안의 가족들을 보고 넘어 가지 않습니다. 인간성이 좋다거나 좀 배웠다고 고려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몇 년 했는가. 교회에 나온 지 일주일 됐는가 15주 됐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항상 언약의 썰매처럼 실린 데로 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썰매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썰매가 이 세상에 와서 빠져 나가는 방식을 사용해요. 이것을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하고 이게 곧 썰매처럼 되는 거지요. 그러면 성도의 특징이뭐냐하면 내가 믿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고 주님이 그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면면을 성도의 몸을 통해서 되비춰 주는 것. 이게 성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했던 코스를 성도의 삶을 통해서 비춰주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이건 행함이 아닙니까? 하는 데 행함이 아니지요.

이것은 일방적으로 뽑아내는 거지요. 우리는 수면 내시경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의사가 입 벌리고 온갖 거 다 검사하고 끝나고 나면 멍하니 회복실에 가서 눈 뜨지요. 그렇게 편하게 인생 살면 좋겠는데 편하게 못 사는 이유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이 없다는 말은 우리 나름대로 고집이 있다는 거에요. 고집이 있어서 내 인생을 내 쪽으로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주님의 story 스토리를 주일날은 서사라고 했는데 주님의 이야기가 나와야 될 몸을 가지고 우리는 나의 이야기, 우리 집안 이야기, 내 잘남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억지 부리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구조가 뭐냐하면 처음에 베드로 나오지요. 다음에 사도 바울 이야기 나오고,


처음에 야고보 이야기, 베드로, 사도 바울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1부, 2부, 3부로 끝나 버리는데 1부, 2부, 3부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여 주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야고보도 복음 전하다 죽었지요. 스데반 집사도 복음 전하다 죽었지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아닙니까? 이 죄 많은 세상을 우해 버림받은 그런 이야기를 야고보나 베드로와 사도 바울에게 줍니다. 특히 베드로나 야고보 사도 바울에게는 그 당시에 예수님을 죽였던 정치적 세력이 강력하게 학대를 하지요. 그 학대하는 이유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그 이유로 학대를 하는 거에요.


오늘 날 대한민국에선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해도 대전 경찰서에서 조사 안 하지요. 물론 북한에선 문제겠지만 아무 문제없지요. 복음을 안 전해서 그래요. 교회에서 딴 소릴 해서 그래요.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나 세상의 마귀가 하는 이야기가 똑같기 때문에 그냥 터치 할 필요 없어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살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은 다 거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뭔가 하는 것은 해봤자 비 현실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한 마디로 죽자는 이야기에요.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일 낮에는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고 표현 했어요.

모든 문제는 자기를 미워하지 않아서 생기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의 결정과 자기의 선택을 미워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오죽 하면 제가 심수봉의 노래까지 거론하지 않았겠습니까? 남자의 작별이 미워요. 남자의 약속이 미워요. 남자의 눈물이 미워요하고 나오잖아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못해요. 대표적인 것이 자식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오히려 우리는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마귀로부터 계속 세뇌당하고 있던 겁니다. 교회 와서 비는 것도 죽으려고 비는 것이 아니고 전부 살려고 비는 거지요.

기도 제목을 내 자식이 스데반 집사처럼 죽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들러본 적이 없는데 다른 분들은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스데반 집사처럼 죽어도 곱게 죽지 말고 돌에 맞아 죽게 하옵소서! 그것도 백주 대낮에 차에서 머리 받혀 김주혁처럼 죽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는 안하지요? 일찍 죽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 안했잖아요. 김무생은 자기 아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죽는 것을 불행이라고 여깁니다. 불행이라 여기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처벌하는데 있어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처벌해요. 예수님을 곱게 안 죽입니다. 수치스럽게 옷도 다 벗기고 보란 듯이 우리에게 까불면 이렇게 당한다는 것을,


무섭지! 무섭지! 그러니까 말조심하고 우리한테 복종하란 말이야! 라는 식으로 죽여 버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뭐로 기뻐하냐 하면 십자가를 기뻐해요. 이것은 뭐를 포기 했다는 거냐 하면 기적적으로 구원되기를 포기하고 내가 원하는 기적, 내가 기대하고 있는, 내가 기도해서 응답을 기다리는 놀라운 행운을 포기했다는 말이고 신학 공부하고 성경 공부 많이 해서 구원 받겠다는 것을 포기하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다. 기적을 포기하고 지혜를 포기하란 말이죠. 기적과 지혜는 내가 살게 만들어요. 살아 있는 나를 더욱더 살게 만들지만 십자가 사건은 살았다고 하는 내가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을


 예수님의 안목에서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느니라 했고 달리 말하면 주께서 나를 날마다 죽이시는 이유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날마다 튀어 나오게 하기 위함이라. 밥을 먹고 설걷이 할 때 엄마! 또 설걷이 하네! 하면 네 눈에는 지금 엄마가 설걷이 하는 것처럼 보이냐? 주님이 설걷이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황당무개한 이야기이냐는 식으로 되지요. 내가 바이올린 켜는 것처럼 보이냐? 주님이 바이올린 켠다. 주님의 지체가 현장에서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정답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막상 주님의 뜻으로 성도가 설걷이 할 때는 예수 믿은 내가 설걷이를 해버려요. 본인이 예수를 안 믿어요. 구원은 받았는데 본인이 믿음이 없는 거에요. 믿음 없는 체로 그것을 불신앙이라고 하는데 믿음 없는 체로 구원을 받아요. 믿는 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내가 주님을 안 믿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절대로 주님의 구원에 내 믿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삭제 시킵니다. 왜? 내 믿음이 들어가면 내가 선행해서 내가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진도를 자꾸 못 나가는 이유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계획이 잡혀 있는 것이고요

 다만 이 계획에 환경과 무대 제공으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태어나서 보는 산과 강 들판이나 건물과 나라와 민족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나라를 위해서 저주 받은 죽음과 없음에서 있음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무대 장치 (미장센)라고 하는데 연극 무대에서처럼 하는 장치를 하는 거에요. 셑트를 만든 거에요. 무대 장치를 만든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배우로 할 역할이 뭐냐하면 하나님께 멸망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 지킨다고 하다가 내 속에 있는 죄가 율법을 만나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만 지킬 수 있는데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율법을 주시니까 자기 안에 내장된 숨겨진 원리대로 믿는다고 하다가 멸망당하는 역할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원리를 규범이라고 하고 ‘독자적 규범 체제’를 따로 갖춘 거에요. 규범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체제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왕을 세운다는 말은 王 자체가 주변에 뭐를 제공하냐 하면 법과 규범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은 법과 규범을 따라서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전부 일임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날아가 버리냐 하면 사랑을 숫자로 표현하면 (사랑 =2)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혼자 경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혼자 도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서 되는 게 아니고 사랑은 상대가 있어야 되요. 혼자서는 안 되고 둘이 있어야 되요. 두 명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난 오후 예배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내 조건을 따져 하는 것은 2가 아니고 1이 되어 버려요. 상대방을 내 의지대로 함몰 시키니까 2가 아니고 1이 되는 겁니다. 보통 사랑으로 결혼한다고들 하는데 전에 광주 주례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본인의 열정이다라고 했는데 진짜 사랑은 열정이 식어야 되요. 열정이 식는다고 바로 사랑이 되지 않고 존경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1에서 1을 부숴 버리고 1을 나누어서 2가 되야 돼요. 1은 독재입니다. 전제주의라고 하지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상대가 나를 위해 존재해야 되요. 말이 상대이지 2가 아니고 결국 1로 귀환되거든요. 1로 환원되어 버리거든요. 예수를 사랑한다? 거짓말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끝나서 2가 안되요. 그래서 인간은 2가 안되요. 가끔은 되요. 지난 오후 예배 때 뭐라 했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갑자기 내 조건과 관계없이 낯설게 다가 왔을 때, 그것을 반했다라고 했거든요.


낯설게 다가오려면 내가 먼저 이런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다가 갑자기 등장하는데 헉! 이론 순간 우리는 그 사람 앞에 내가 모든 게 파괴되는 겁니다. 내 조건이 함몰되는 거에요. 아직도 그런 사람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저럴 수가! 그것을 김수희라는 가수가 잘 이야기했어요.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지금 존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대 앞에만 서면 내가 작아진다는 거에요. 그대 뒤에 서면 안 보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거에요. 그대 앞에만 서면 자진해서 작아지고 싶어! 내가 그 사람 앞에 추잡하고 거추장스럽고 꼴사납고 그대만 존재한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


애만 있으면 엄마는 몸매가 좀 뚱뚱해도 괜찮고 애만 잘된다면 스타일이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애가 2살 때까지는 그런 착각들을 하지요. 애가 3살만 되도 요가하고 정신없어요. 펑퍼짐하게 애 잘 때 같이 자고 애가 남긴 것까지 다 먹어 그렇게 되는데 뱃살은 다 트고 어떻게 보상 될지. 그렇게 저는 사랑이라하지 않고 존경이라 하는데 나보다 우선되는 겁니다. 그런데 존경이 오래 안 가요. 이 땅에서의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은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짧게 존경이 되지만 그 다음 부터는 내가 그 만큼 존경해 줬으면 저쪽에서도 존중해줘야 하는데 한번 존경했었다고 나를 우습게보고 종 부리듯 부릴 때.

뭔가 손해 본 듯한 주고받은 게 있어야 하는데 존경했는데 입 싹 씻고 그 다음부터 함부로 대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 나는 상대방이 기분 좋으라고 칭찬을 해 줬는데 자기가 잘나서 칭찬한 줄 알고 당연히 생각하고 칭찬이 열 개가 갔으면 적어도 두 개는 와야 되는데 30분 동안 칭찬해도 한 개도 안오고 당신은 왜 칭찬안하나? 하면 “나는 경상도 사람이다!”경상도인 게 자랑도 아니고 “꼭 말로 해야 되나?”말로 듣고 싶은데 안 해줘요. 이러한 정량적인 양적으로 저울을 달아서 재보는 균형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이 아닌)열정에서 존경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경에서 사랑이 되려면 예수님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그 중에서 12제자 중 가롯 유다입니다. 얼마나 존경했으면 스승을 팔아먹은 나 자신이 미워서 자살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사단이 그렇게 하게 했다는 거에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의로웠던 사람들이 누굽니까? 바리새인 이지요. 그럼 바리새인이 사단입니다. 이제 사단의 특징을 아셨지요? 사람들이 사단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교회에 가면 다 있습니다. 다 모여 있어요. 당회장 사단부터 장로 사단, 봉사 많이 하는 사단 새끼들이 우르르 다 모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자적 규범 체제이거든요. 어떠한 법이 있어요.

이 법은 눈에 보이는 왕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당회장 이지요.) 반드시 행함으로 실천해야 될 규범이에요. 이 규범이, 만약에 교회에서 법을 만들어 놨는데 교회법에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할 때 서리 집사에서 장립 받으려면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법을 세워놨는데 만약에 그 법을 안 지켜버리면 전통적인 독자적 규범 체제가 와해되어 버려요. “저 사람은 십일조 안 해도 장립 집사 됐는데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어버린다니까요. 인간의 행함은 반드시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실적에 자기 자신을 거기에 담아 버려요. 십일조를 하게 되면‘내가’한 것이 반드시 붙어 버린다는 거에요.

그래서 법이 있고 왕이 있을 때 왕은 내가 뽑은 왕이 되는 겁니다. 왕과 백성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게 2가 아니고 1의 관계에요. 왕은 왕대로 1이고 백성은 백성들대로 1이에요. 갈등이 생기게 되겠죠. 8장 10절부터 17절의 십일조 해야 하는 데 까지 쭉 나오는 데요 왕의 제도가 뭐냐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하게 되면 그 제도는 2가 될 수 없고 1이 된다는 주님의 취지입니다.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 부장을 삼을 것이며”너희의 아들로 즉 1인자(왕)의 부하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그것을 누구 좋으라고 만들게 하냐 하면 1인자를 만족케 하려 했지요.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왜 줍니까? 봉급주기 위해서지요.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그런데 오늘날 목사에게 주지 않지 안습니까? 목사에게 주는 게 아니고 교회에게 주지요. 그것은 교회가 1로 만든 이상적 규범 체제이니 때문에 그래요. 체제라는 것은 결국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나라가보고 싶은 거에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적인 하늘나라는 싫어요.

그러면 내가 십일조를 했는데 십일조를 한 교회가 커지더라 하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나님께서 팍팍 기적으로 내가 다니는 교회를 키워주게 되면 누구라도 비난 못할 하나님 자체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그것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을 써요. 확장이라는 말은 뭐냐하면 폐쇄 공간 또는 독자적으로 격리된 공간을 따로 만들어서 그것을 격리됐으니 폐쇄 됐을 게 아닙니까? 여기에서 여기까지 경계선을 쳤으니까 이것을 그들은 눈에 보고 싶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겁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로 보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왕이 있다!


만약에 누가 어떤 교회에 와서 십일조를 했는데 그 다음 주부터 십일조를 하던 교인이 다른 교회를 갔다고 하면 좋아라 합니까? 하늘나라 확장하라고? 안 좋아 하지요? 어~어! 집사님~ 집사님 하지만 사실은 어~어! 돈~ 돈하고 따라가 붙잡거든요. 왜 그렇게 그 사람을 붙들려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의 공간, 폐쇄된 공간과 격리된 공간을 절대화 시키려 하기 때문이죠. 자기가 그 교회에 당회장이잖아요. 그러면 자기는 눈에 보이는 주의 사가가 돼 버리는 겁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을 대리하는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이런 집단적 공간의 대표적인 모델이 이천 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천주교입니다. 교황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교황이 있다는 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줘서 천주교에 등록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 너무 추상적이라 모호해요. 하늘나라도 우리가 믿도록 해 줬을 것이고 눈에 보이는 어떤 규범이 있을 것이고 보이는 법적 체제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격리된 공간된 체제를 구성하게 돼서 여기에 등록하면 하늘나라 직행이다. 여행사처럼 이런 간판 걸고 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 이언 폐쇄된 눈에 보이는 공간을 인간은 누구나 선호하거든요. 여기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어요. 아니라 할 수 있어요? 못하지요.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선 성도로 하여금 자기 나름대로의 우리끼리는 성도다, 진짜 성도끼리 모였으니까 진짜 하늘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은근히 기대하는데 그것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이게 고마운 거에요. 파괴시킨다는 말은 내가 사랑했던 내 교회가 파괴되는 거에요. 이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주께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내가 헌금하고 봉사했던 교회가 산산조각 났을 때 비로소 교회에 가리워졌던 내가 진작 추구해야 했던 십자가 사건이 다시 한 번 우리 속에 반복되지요. 사도행전에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소속 되었던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버리면 두 번 째, 세 번째. 네 번째 교회들이 등장해 버려요. 일곱 교회 등장 하듯이 그런데 주께선 오직 하나의 교회, 하나의 하늘나라만 필요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나라뿐이고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지 그들은 교회 유지하려고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목회자나 감독과 장로는 왜 세웠는가? 목회자는 바로 이러한 교회가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 세운 거에요.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야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모일 때 마다 뭐를 하냐 하면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고 여겼던 떡을 떼는 사건, 예수님 잡히시던 그 날 밤에 일어났던 사건을 재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을 시작하려고 세례 요한에게 받던 그 물 세례도 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두 사람 외에는 세례를 준 적이 없다. 그리고 성만찬도 결국 말씀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그것도 의미가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성만찬 자체에서 예수님의 사건이 이제는 성경 완성에 사도 이후에는 성경 자체 말씀이 스스로 운동력이 있어서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의 이해관계를 자기중심의 1의 관계로 만드는 작업에 격리된 공간을 찾는데 주님께선 사건을 통해서 파괴시켜 버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강의가 어떤 의미에서 어려운데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 같으면 아예 격리된 공간도 허락 안하고 파괴도 안 시키면 되는데 허락해놓고 파괴시켜 버리십니다.


그건 왜냐하면 아까 했듯이 인간을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을 죽일 때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의도 함께 있기 때문에 죄와 의라는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원하는 데로 해주고 그것을 파괴시키는 순간순간 주님의 십자가가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그런 설교를 했거든요. 성도라는 것은 그 자체가 온전하지 않아요. 육에서 영으로 다시 영에서 육으로 순환되는 겁니다. 예로 사도 바울의 육신의 가시라고 하는 데 삼층천을 봤을 때 신났지요. 나는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 그 세계에 너누 놀라서 내가 몸 밖에 있는 지 몸 안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아를 초월했었던 하나님의 기적이 갑자기 육체의 가시가 와 버린 거에요. 가시는 육체에 박혔지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지금 어금니가 아픈데 온유하고 자비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찡그려 가면서 아픈 건 아픈 거에요. 이번 달 월급이 안 나왔다. 온유하고 평안하라 말이 안 되는 겁니다. 하던 계약이 틀어졌다. 그리고 지금 애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중이다. 너무 좋아해서 곧 결혼하기로 했던 29살 인 아가씨는 부산에서 촬영하다가 사랑하는 애인 김주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유합니까? 화평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라 하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사랑에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예수의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고 복음이 위로가 되겠어요? 영에서 항상 육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지난 낮 설교에선 이것을 강력 모터라고 표현 했잖아요. 믹서기 확 돌려 버리면 표면에 육적인 것이 다 드러나 버립니다. 믹서기 안에 쓸데없는 배설물들이 다 있잖아요. 믿지 않는 것, 나 밖에 모르는 것이 표면에 다 드러나 버립니다. 영에서 육으로 왜 가도록 하십니까? 복음 들을 땐 기쁜데 또 돌아서면 육으로 가는 게 뭡니까? 그 육에서 영으로 다시 영에서 육으로 가는 모든 과정에 불가능한 구원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은 절대 네 힘으로 안 된다는 거에요. “내가 영이니까 성령 받아서 충만해야지!”그 유지하려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안되요. 처음에 신학교 들어갔을 때는 막 눈물 흘리고 웁니다. “주여!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그랬던 그 신학생이 중간고사에 컨닝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4학년 쯤 되면 컨닝도 안합니다. 족구하고 놉니다. 다 소용없어요.. 교회를 키우는 데 있어 이 땅의 신학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동기생들하고 놀기 바빠요. 그런데 신학생의 특징이 있어요. 1학년 때는 바짝 얼굴이 창백해요. 3학년 쯤 되면 얼굴이 다 살쪄있어요. 놀아도 너무 놀았거든요.

중들의 특징도 다 살쪘다는 거에요. 머리만 깎고 있어도 돈이 되기 때문에 백성들이 알아서 무당을 만들어 주니 무당 짓을 안해도 다 찾아오는 거에요. “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전부 찾아오니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주의 응답이 어떻습니까? 헌금하면 복 받겠습니까? 원상회복 되겠습니까? 은행 대출해서 찾아오니 채우는 것은 마귀가 다 채워줍니다. 어차피 교회도 그 장사하거든요. 복 팔아먹는 장사 아닙니까? 이것이 폐쇄적 규범 체제이다. 이 체제를 허락하시고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중간에 뭐가 튀어 나옵니까? 사건을 통해서 언약이 하나 둘 씩 풀어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오는데 첫 번째 언약이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9장에 보면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했는데 준수하지만 겸손해요. 나 같은 것은 왕감도 못된다고 굉장히 겸손하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왕의 제도를 알게 해 주셨잖아요. 인간의 죄를 누가 먼저 만드시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만들어서 인간 속에 삽입시켜 버립니다. 이것을 주일 낮 설교에선 독감 예방 주사라고 했지요. 독감 병균을 미리 집어넣는다고요. 우리가 의인 되고자 하는 것에 주께서 아예 죄인 되라고 원천적인 죄를 아예 집어넣어 버려요. 이렇게 집어넣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날아가냐 마면 사단의 명줄이 끊어져요.


 (삼상 9: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삼상 9: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사단의 무기가 뭐냐하면 내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착해질 수 있고 의롭게 될 수 있느냐? 경건하게 될 수 있느냐? 이것이 사단의 무기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드리면 왜 사단은 자꾸 우리에게 착해지라고 하냐하면 착함과 의로움에 대해선 신도 그것을 보고 터치를 못해서 존재인 우리를 계속 살게 만들거든요. 착함을 죽이면 안되잖아요. 하나님은 착한 분인데 착함을 부정해 버린다는 것은 잘못된 하나님이잖아요. 그것 하나 믿고 사단은 계속해서 이렇게 하면 착하게 되고 사는 것에 유리하게 된다. 이것을 교회에선 행운이라 하고 축복이라고 합니다. 모든 행운을 어디에 유리하다? 내가 생존하는데 유리한 것을 행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행운을 눈에 보이는 물체로 표현한다면 돈이에요. 돈이 생기면 지금보다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축복을 달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돈 벼락 맞게 해 주시옵소서! 돈만 주시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이상으로 좋다는 식으로 하지요. 김 마담! 요번 일만 되면 다이아 반지 사줄께! 허장강이 나오는 옛날 영화 보면 그런 장면이 있어요. 남자의 허세 아닙니까? 결혼하면 손에 물 안 묻히겠다고 하면서 하는 옛날 버전이고 요새 버전은 설걷이 하다가 뼈 부러져 기브스하고 일을 너무 시켜 병석에 눕기까지 하고 남편과 자식 섬긴다고 골병들고 남편은 친구들하고 낚시하고 놀러가기 바쁘고 술 먹고 하는데 술은 혼자서 못 마셔요.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되요. 그래서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혼자 안 먹고 둘이 같이 먹어야 술 맛이 나는 모양인지 케이블 tv에 나오는 정치이야기는 안주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1 자기만을 위하는 것. 그런데 여기에 대해 주님께선 1은 네가 아니고 내 존재가 1이고 넌 존재도 없고 하나의 받침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있습니까? 하나의 무대 장치라니까요. 우리 몸이 주께서 활약하시는 현장입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7-11-17 19:48 
실패의 십자가 (마 24장 1-20 절)
대전- 93강

 이근호


2017년 10월 31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1-20


 (마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 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태복음 24장을 1절부터 보면 잘 지은 성전이 전부 다 돌 하나에 돌이 중첩되지 않고 다 파괴될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적이라는 개념과 주님의 기적이라는 개념이 달라요. 인간들은 있음에서 더 크게 있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거든요. 잘 되는 것, 주님께서는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그게 기적이에요. 왜냐하면 있는 것을 없애버려야 진짜 있는 것이 방해받지 않고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세운 것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세운 것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뽑힌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뽑히는 것을 겁낼 게 아니고 하나님이 심은 것은 무엇이냐? 이것부터 먼저 관심을 둬야 되요.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뽑힌다고 하니까 아리고! 내 것 뽑히면 안되는 대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것을 뽑아버리면 자기 걱정 자기 단도리 할 생각 하지 말고 하나님이 심은 것 외에는 다 뽑혀 버리면 심은 것을 알아야 되지요. 이것만 알게 되면 심은 것 외에 자진해서 다 뽑아내세요 하고 자기를 맡기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다 뽑아내세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심은 것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선 하나님의 의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롭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가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은 죄가 드러나는 곳에 의를 심어 놓고 두 가지의 의미가 동반해서 나타나게 하시는 거에요. 의만 나타나는 법이 없어요. 의가 있는 곳에 그러면 죄가 뭐지? 하고 죄도 같이 드러나도록 하는 겁니다. 천국 간다. 천국에만 관심 두는 천국은 없어요. 뭐지? 지옥이, 이렇게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반드시 이것을 짝패라고 하는데 순 우리말로 짝이라고 하는데 양말의 짝이든지 장갑의 짝처럼.


죄를 제대로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의도 모른다가 되요. 지옥에 대해서 모르면 천국도 모른다고 보시면 됩니다. 난 지옥 같은 건 몰라! 난 천국만 알면 돼! 이런 말은 잘못 된 말이에요. 그래서 죄가 있는 을 살펴야 되요.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는데 그러면 죄를 어떻게 살피느냐 하면 죄를 살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적으로 선악 체제, 선악지식을 가지고 파악하는 방법이 있는데 물론 엉터리이지요. 이건 잘못된 겁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가지고 살필 때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먼저 선악 체제를 가지고 죄를 살피게 되면 그 죄는 제대로 된 죄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반칙이 들어가는데 어떤 반칙이냐하면 나는 필히 죄인이 아닐 것이다. 이 조건이 죄가 무엇이냐는 작업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요건 반칙입니다. 예를 들어 학급에서 선생님이 오늘 숙제 안해 온 사람 손들어 라고 이야기 했는데 어떤 학생이 반에서 좀 그 반에서 노는 학생이“봐! 선생님이 숙제 검사 한다고 했잖아! 숙제 안한 사람 손들어! 손들어!”선생님이 너부터 너! 너! 그렇게 말한 너! 너부터 한번 보자 이거에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거든요. “하나님 말씀에 거짓말 하지 말라 했어요! 간음 하지 말라 했어요! 도둑질 하지마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삽시다!” 주님은 너 말이야! 너! 너! 너! 너!

네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네가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하면서 선생이 어떻게 거짓말 하느냐 말이냐? 간음하지 말라 해놓고 네가 어떻게 간음질 하느냐? 도둑질 하지마라 네가 어떻게 도둑질 하느냐?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그렇게 하고 굉장히 시원했는데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는 겁니다. 자기는 도둑질 하지 마라해서 어릴 때부터 도둑질 안했다는 거에요. 참 철이 없지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도둑질 안 하는 레벨이 어떤 레벨이냐 하면 가진 것 다 주는 것이 도둑질 안 하는 레벨이에요.

즉, 이 말은 인간은 자기가 존재 했다는 말은 남을 속였고 남을 것을 뺏았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존재에 필요한 돈을 번거에요. 남에게 눈물을 흘리는 결과를 야기 시키면서 자기가 웃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에요. 인간은. 이것을 경제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돌아가는 정보에 대해 모르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은 가난이라는 계층으로 전락하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은 돈의 흐름을 누군가 캐치하는데 그 캐치 할 때 정보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서 잡아버려요. 먼저 안 사람이 가져가면 나중엔 껍데기만 남아요.


노래방이 잘 된다고 해서 하면 이미 그 뒤에 하는 사람은 막차 타듯 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주식에 투자를 해놓고 십자가 복음 이야기를 해버리면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런데 목사가 설교 시간에 주식 투자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소리가 그냥 은혜로와요. 왜냐하면 목사는 주의 사자인데 주의 사자가 주식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주식에 투자한 사람에게 뭔가 행운을 가져다주고 더 생존케 하는 힘을 주도록 하나님이 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목사가 주식 투자를 설교 시간에 하는 것은 목사 본인이 주식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가 펀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목사가 펀드를 했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자기가 발을 어디에 발을 담궜냐가 그 사람의 관심사로 이미 선점되어 있고 선점이라는 말은 다른 것들도 있지만 우선적으로 관심 두는 것을 선점이라고 하지요. 목사님! 바빠서 이번에 교회에 참석 못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다른 말로하면 돈 벌어야 되요겠죠. 지금 내가 발을 담군 그곳이 급합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중에 참석 못한다고 신경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아까 첫 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반드시 육에서 영으로 가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믹서기를 돌려 버리면 아하! 내가 믿는 게 아니구나! 티 나게 해 주실 때 믿는 자가 아니라고 자랑 질 하는 건 안 되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사람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신 거에요.


항상 인간은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갔을 때 내가 구원 받았다가 중요하지 않고 나같이 육 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천국 백성이 되었는가? 십자가 능력이지요. 그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믹서기 돌리듯) 돌리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이 망하는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이 대목이 좀 어려운데요. 일단 여기에선 성전이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전혀 아니에요. 성전이 안 무너졌다는 말은 돌 사이사이에 누구의 공로가 들어갔다? 인간의 염원이나 기대와 희망이 들어가 있어요. 특히 성전은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통하는 채널 같은 겁니다.

다른 데서 제사를 드리면 소용없어요. 지정된 장소에서 했어요. 아까 강의에서 했었는데 다시 해 봅시다. 장소를 뭐라고 했지요? 독자적 규범체제, 규범 체제에서 법이 나오지요. 법을 가지고 이 체제를 계속 가동 시키는 겁니다. (독자적 규범체제)란 말이 너무 길면 교회라고 합시다. 교회는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자체가 가동되기 위해서 계속 유지하고 번창하기 위해서 사업하기 위해 이 땅에 교회가 있는 것을 허락하신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 가서 교회를 믿으면 안돼요. 지금 낮 설교를 보게 되면 고린도 교회와 누가 계속 싸웁니까? 사도 바울과 싸우지요.


사도 바울은 그냥 사도 바울이 아니고 바울에 대해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나오지요. 마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이 한마디에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에게 대들고 있고 가짜 사도라고 우기는 것과 사기꾼이라고 우기는 것은 그들 자체가 뭐를 반영하냐 하면 우리는 마귀가 당회장입니다라고 큰 소리 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끼여 들게 되면 그 교회의 지향하고 추구하는 목표가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냐에 따라서 결정 나는 겁니다.


전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기독교 방송에서 데려다 방송을 하는데 방송 내용을 제가 봤거든요. 십자가 복음은 날라가 버려 없어요. 없고 나는 여태 바르게 살았습니다가 튀어 나와 버려요. 그게 뭐에요? 그 좋은 기회를 왜 그런 이단 같은 방송국을 왜 하게 했습니까? 모든 기독교 방송을 허락 하셨을 때는 방송국 확장하라고 준 게 아니고 그 방송국이 누구를 가로 막는다? 십자가 복음을 가로 막는 단체이니까 행여나 주께서 그렇게 연결 시켜서 방송케 하거든 거침없이 하이킥처럼 방송국 망하라고 강의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복음 아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한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주께서 보내신다면 우리 교회 망하라고 보낸 사람이에요. 그러면 망하는 설교를 해줘야지요. 우리는 매일 같이 망하지만요.이 차이를 좀 보세요. 믿어지는 것과 믿기지 않는 것. 둘 중에 어떤 게 맞는 지를 믿기지 않는 것이 믿음이잖아요. 제가 전에 구자억 목사가 부른 가사 언급한 적이 있지요?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었는디~ 하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소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소식 는 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손에 죽었다는 것이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었는디~ 이렇게 나와야 되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린 거에요. 가짜로 완전히 들통나버린 겁니다. 다 가짜에요. 가짜를 가짜로 들통나게 하게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에요.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겁니다. 전에 수요 설교에서 그런 이여기를 했잖아요. 하나님 앞에 속지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했지요. 자꾸 안 속을 라고 믿을 만한 것, 꼬깃꼬깃 다지고 생각하고 측정해서 믿을 만한 것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에 속아 넘어 가세요. 아! 도저히 못 믿겠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말짱 도루묵이고 거짓이란 말인가? 아! 도저히 못 믿겠다. 십자가뿐인가? 그래, 속자! 이래야 되요.

내가 그동안 했던 헌금과 수많은 예배 출석과 봉사와 전도나 선교. 몽땅 다 헛것이라는 말에 에따~ 모르겠다하고 속아 넘어가는 거에요. 속아 넘는 게 사랑입니다. 그대 앞에 만 서면 한 없이 축소되고 작아져야 되요. 내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될 때 수많은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짊이 얼마나 깃털처럼 가볍겠습니까? 그것이 삼층천이에요.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는 거에요. 얼마나 가벼워요. 그것을 없음보다 더 작게 無보다 더 가볍게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없음을 강조하는 강조 법.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숙하다는 말은 정숙을 강조하기 위해서 없음보다 더 가벼운 것.

이것은 인간이 믿기지 못할 정도로 가벼워지는 거에요. 그게 영입니다. 영인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의 가시를 줘버리면 귀신도 아는 사도 바울도 빼달라고 몇 번 기도해요? 세 번, 삼 세 판이에요. 세 번 기도합니다. 못살겠다고 이래고서는 사도 일을 못하겠다고 거기에 주님이 응답을 줬어요.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는 말을 쉽게 하면 “지금 네 일을 하고 있어? 내 일을 하고 있어? 이건 내 일이야!”왜 자꾸 내 일을 네가 하는 것처럼 착각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내 신세가 왜 이러냐고 할 때 그 사고방식 근본적인 문제가 내 인생이라는 게 아예 없고 주님의 공생애를 보여주는 인생인데 내 인생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앞에 항상‘나’가 붙어요.


아이고! 내 신세야!, 아이고! 내 팔자야! 이게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 요새 재벌들의 이야기입니다. 재벌들이 자기의 원대로 안돼서 이러고 있어요. 재산이 2조원이나 되면서 내 신세야 이러고들 있어요. 재산 680억에 나이 99세 노인네가 아이고! 내 신세야! 어떻게 후손들에게 청부 살인이 일어나느냐! 재일 교포 노인이 680억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후손끼리 죽였다는 이야기를 주일 낮에 예로 들었잖아요. 68만원이 있었으면 죽었겠느냐는 거지요. 문제는 내가 있음이 문제에요. 내가 있음이 나를 콕콕 바늘같이 찌르는 거에요. 계속 찔러주는 겁니다. 아니고! 내 신세야!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죽다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위로하는 말이 십자가를 믿으세요. 당신의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입니다. 그런 남자를 알게 하신 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그만! 그만 하겠지요! 노래에도 있는지 제발 그 음악은 틀지 마세요~ 제발 내 앞에서 위로한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에요. 진리인데요. 주님의 의는 실패 속에서 나와요. 주님은 지금 진지해요. 장난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멀쩡하지? 내 일은 저것(성전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이 내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뭐냐하면 자기가 하는 거을 징검다리로 여겨서 신과 교류를 하려하고 신과 연결을 시도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식의 연결을 주께서 무너뜨려 부순다는 것은 애초부터 예수님 없이는 연결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의 업적과 실적이 집대성 되어 있는 거에요. 바벨탑 같은 거란 말이죠. 그것을 무너뜨릴 때 무엇도 무너뜨리냐 하면 인간을 무너뜨리는 거에요. 주님께서 오신 것은 네가 네 구원을 방해하고 주님을 방해하는 마귀의 앞잡이가 되는 겁니다. 겨울 수련회 교재를 쓰고 있는데 이런 내용을 포함시켜 놨어요. 뭐냐하면 결정은 인간의 본심이 하고 실행은 인간에게 맡긴다고 했어요. 인간의 본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개입 못해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견물생심이라고 했는데 물건을 봄으로 마음이 새롭게 생산되는 거에요. 선을 볼 때 두군데를 보고 둘 중에 하나를 해라하면 아가씨들이 싫어해요. 왜? 제 3의 가능성을 놓치기 싫어서 그래요. 그런데 세 번째 선을 봤는데 정말 자기 조건보다 초월한 너무 반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처음에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 엄마를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왜 두 군데 봤을 때 없던 마음이 생기는 거에요. 바로 저 사람이라고, 보는 동시에 무엇도 동반해서 생긴다?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같이 생기는 거에요. 이것을 현대 정신 분석에서는 요구에 부응하는 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설명하면 어려워지는데 요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나 자아가 개입할 수 없어요. 그냥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요구인데 그 요구에 대해 어떻게든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이 욕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여기엔 미흡함이 있어요. 즉, 미흡함이 슬픔이고 절망이고 우울이고 걱정이고 근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200억을 벌어야 하는데 이번엔 150억 밖에 못 벌었다면 50억이 빠지지요. 그것이 걱정 근심이 되는 겁니다. 밥 못 먹어 하는 근심이 아닙니다. 미흡함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분명히 애가 공부를 잘 하는데 전교에서 1등은 하는데 전국1등은 안돼서 걱정 근심이 되는 겁니다. 저더다 서울 대는 가겠는가? 배부른 걱정이지만.


새로움이 등장하면 요구가 내 자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요구)가 툭 나오거든요. 사단이 그렇게 하는 거에요. 사단이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미흡함을 양산시켜요. “기도 더 해야지! 헌금 더 해야 미흡함을 매울 수 있어! 충성히 요번 주에 교회 갔잖아! 봐! 이런 사단이 생겼잖아!”더 충성하고 더 엎드려 기도하고 기도 할 때는 건성으로 하지 말고 간~절이 해야 되요. 무조건 간절히 해야 돼요. 더 헌신해야 되고 목사 섬겨야 되고 교회 봉사 다 해야 되고 더! 더! 해야 네 요구와 욕망이 근접하게 된다고 계속 마귀가 그러는 거에요. 마귀는 실적 위주에요. 기도 해놓고 얼마나 응답 받았나 돌아보고 기도 해놓고 또 돌아보고 점치는 거하고 똑같아요.


무당 단체가 교회입니다. 목사는 계속 약 올리지요.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어린 애 같은 믿음이 되지 않아서 순전한 어린 애와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응답이 없고 따지지 말고 바치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 유도하고 있지요. 욕망을 채우지 못했을 땐 우울증이 오고 모든 정신병 환자는 요구와 욕망 사이에 틈이 벌어져 해결이 안돼서 그래요. 그래서 우울병 걸리고 정신병에 걸리는데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이 정신병자입니다. 대통령부터 해서 위아래 상관없이 목사, 장로, 교인 모든 사람이 정신병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왜 사단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정신병자는 천국에 못갑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이 천국 갑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강조하셨기 때문이고 유일하게 죄에서 의로 갈 수 있는 분이고 중심에서 원심 분리가 되어 버리게 하시면 주님의 영향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지요. 내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 활동장이 돼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통 구원이에요. 아시죠? 통감자, 고속 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것,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지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폐허 시키는 겁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이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실 때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이것을 누가 하셨냐 하면 예수님이 하셨어요. “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하옵소서”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흉내 낼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를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이런 기도를 한다고 응답받을 생각 마시고요 이런 기도 조차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네가 해라가 아니고 내가 해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까 제목을 뭐라 한다고 했습니까? 현장성, 실패성, 하나 더‘이미’예수님이 역사의 시작이고 끝이니까

 예수님이 일한다는 말은 시간에 초조할 필요 없다. 이미 합격시켜 놓았으니까 내가 도대체 못났는냐만 따지면 되요. 인생을 살면서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가를 성경을 보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라고 하면 “그래, 내가 이것을 못 지키지! 못났구나!” 이러면 되는 거에요. 뭐든지 참 쉽죠? 굉장히 쉬운 거에요. 자기 주제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하고 살면 되요. 그런데 주님이 보낸 마귀가 있어서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았잖아! 갑자기 통 감자에서 개인 감자로 돌아서는 게 있거든요. 주께서 그렇게 하세요.


이미라는 말을 나에게 적용시키지 마시고 예수님에게 적용시키고 관계성 속에서 이미 참여된 자에요. 인간의 말에는 어패가 있지만 이미 우리는 아직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이미라는 것과 아직이 붙어버려야 되요. 이미 우리는 구원 받을 게 남아 있어요. 고린도 후서 보면 나와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지금 신납니다. 이제 2절 이후부터는 진도가 굉장히 빨라져요. 그 뒤에 이야기는 박살내는 이야기인데 예구님이 왜 세상을 박살내려고 하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할 일이 끝났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은 무엇의 무대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무대잖아요. 그 무대가 이미 이르렀어요.

이미가 아직과 비교되는데 아직에 대해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시제는 아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접수함으로 말미암아 이미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세계관과 예수님의 세계관이 달라요. 세례 요한의 세계관은 아직도 인간에게 가능성이 남아 있어요. 이미라는 것은 모든 것이 예수님께 일임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대신’이라고 해요. 모든 것을 대신 가져가 버렸어요.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남는 것은 철수 작전에 나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파장이지요. 5일장에서 파장. 파장하는 날은 바람은 왜 그리 부는지 파장 분위기 썰렁합니다.


주님께서 슬슬 장 거두고 있는 거에요. 파장 분위기에요. 성경에서는 이것을 추수라고 하지요. 추수 할 때 특징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심어 놓은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데 그것을 알곡이라 합니다. 알곡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들어 있어요. 피가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그래요. 피 묻히고 데려가고, 피 묻히고 데려가는 겁니다.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추수할 때 그 추수 당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뭘 한 것이 없는데요. 구원 받는데 제가 뭐 한 게 없습니다.”이게 요한복음 4장에서의 사마리아 여인이죠. 남편 다섯 있다가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요한복음을 설교한 뒤 올려놓았더니 어떤 분이 늘 목사님 설교 듣고 은혜 받는데 이 대목이 틀렸다는 거에요. 여자가 문란한 여자가 아닌데 그 장시 유대 풍습에 의하면 여자는 제대로 하고 버림받은 것인데 왜 문란한 것처럼 설교를 하십니까? 라고 이야기해서 제 설교의 취지는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이던 간에 문란하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신사임당이에요. 왜 놀라는 얼굴을 하십니까? 평생에 오직 지아비 하나만 바라보면서 자식을 키운 여자라는 데 주님 보시기엔 어떤 여자이다? 문란한 여자에요. 왜 그 여자나 저 여자나 다 아담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분명히 그런 설교를 했었는데도 이해 못하는 거에요.


이 사람이 문란하다 안 문란하다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선 전혀 보탬이 안돼요. 그 내용이. 문란하지 않아도 문란하다고 해 줘야 그 설교의 의미가 살아요. (현숙하다고)믿음 좋아서 구원받는데 아니거든요. 신앙이 좋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제사 잘 지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어느 쪽에서 예배를 드려야 맞습니까? 하는데 그 자체 질문이 문란해요. 자기의 행함이잖아요. 사단의 생각이에요. 주님은 그냥 성령을 줘서 네가 생명의 물인 생수가 나오는 움직이는 우물이 되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움직이는 우물인데 나는 남편이 다섯 명 있었고 여섯 번째 남자도 남편이 아닌 내용이 전혀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고 역할까지 포함해 줘야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말이죠.


왜 의는 죄 속에서 나오기 때문인 것이 이해가 되시겠죠. 아이고! 그냥 의를 주시되 남이 모르게 쉿! 쉿! 내 과거에 대해선 쉿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전히 개별 구원에 잔뜩 신경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좋은 게 아니고 내가 좋은 사람.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사랑에 몰두라고 있는 사람이 그런 현상을 보이겠지요. 그렇다고 구원받았다고 남이 듣고 싶지도 않는 옛날 자기가 조폭 했던 것을 자랑도 아니고 왜 이야기 합니까. 쓸데없이 자기 나쁜 짓 한 것 자랑하고 그런 오지랖은 하지 마세요. 부셔져 노출시키는 것도 주님 앞에 노출 시켜야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은 자기 믿음 좋다고 하는 것 밖에 안되거든요.


주님께선 파장하십니다. 철거 작업을 하십니다. 그러면 철거 작업은 왜 하느냐? 철거 작업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본색이 드러납니다. 철거 작업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의 자아, 주체를 주께서 철거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없애버리시죠. 우리 자신의 무슨 문제냐 하면 살고자 하는 겁니다. 24장 17절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철거 작업 현장입니다. 우리는 현장으로서 자기 역할만 보여주면 되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시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아기는 누가 배도록 합니까? 주님이 시키셨잖아요. 주님이 시켜놓고 뭐라고 합니까? 아이 낳게 해 놓고 심판하시든지 아이 밴 채로 화가 있을지어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렇게 해 버리면 맡은 배우 역할이 너무 심한 역할 아닙니까? 배에 베개를 집어넣고 아이 밴 역할 하라고 하면 다하고 빼내면 되지만 주님이 주신 역할은 실제로 임신을 시켜버려요. 그리고 해산하기 이전에 실제로 예루살렘 성이 멸망해서 자기 걱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안에 있는 애가 걱정돼서 허겁지겁 걸음아 날 살려라! 살고자 하는 본색을 들춰내시면서 철거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인간의 몸 자체가 배후에 사단이 있거든요. 몸과 몸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몸이냐 아니면 네 몸이냐?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본성 상 사단이 우리 몸을 다룬다는 생각은 안하고 주여! 모든 것을 시키는데로 다하고 믿을 테니까 이 몸만큼은 건들지 말아주옵소서!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이 몸을 바꾸기 때문에 피가 흐르거든요. 피가 흐른다는 것은 피는 생명입니다. 즉 이 말은 네 몸에 흐르는 생명은 생명도 아니고 목숨도 아니고 버리고 저주받아야 될 목숨이다는 것을 통보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 한다고요. 겉으로 보기에 피가 나오니까 몸과 몸을 이야기 하는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을 두고 이야기 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몸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면 안에 피가 있겠지요.

그 불신의 피가 예수님께 우리 오빠 왜 죽게 놔두었냐고 달려들게 한 요인이 그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피를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그 쪽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목숨을,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사단을 대신해 예수님의 성령이,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피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대신 한다는 것은 없앤다는 것이 아니고 사단이 지배하는 목숨에 예수님의 목숨이 들어오면 사단은 사단대로 자기의 본색을 들춰내면서 죄가 있는 곳에 의가 피어나도록 주께서 이런 공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주님을 믿고 난 뒤부터 참 불편해요. 불편함을 덜 하기 위해선 성경을 안 보면 되는데 또 성경을 안 보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 자체가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현대적이지 않아요. 현재의 삶에 도움이 안돼요. 보탬이 안되는 겁니다. 차라리 토정비결이 맞아요. 왜 이사는 언제가고 저 사람의 사주팔자가 맞으면 행복하고 되는데 성경은 전혀 그런 것이 없거든요. 자기를 미워하라, 네 원수는 집안 식구니라 이렇게 나오니까 성경 보는 게 불편하고 설교를 들어도 성경 이야기 안하는 교회를 찾게 되요.


성경은 그냥 폼이고 누가 교회 봉사해서 복 받은 이야기, 희망적이고 낙관적이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사례들, 간증이죠. 그런 것들로 한 30분 설교하는 너무 길게 하면 듣기 싫어하니 그런 교회에 가고 싶어! 그리고 나머지는 찬양 집회로 온 몸에 전해오는 가락이 내 세포와 같이 춤출 때 갑자기 은혜 받은 느낌들고 그런 교회에 가고 싶지 복음을 듣게 말씀 전하는 교회도 싫고 거기다 복음을 전하면 아이고! 무서워라 도망쳐 버리지요. 사람이 이익이 없는데 노동할 이유 없잖아요. 교회 오면 이익도 없는데 오겠어요. 본색을 드러내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몸들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호들갑 떨면서 도망치게 만들어요.

심지어 12제자들도 도망치는 겁니다. 누구만 남았어요? 달랑 예수님만 남았어요. 그것이 언약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계약자로 남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쫓아내고 쫓아내고 달랑 예수님만 남았지요. 결국 이 세상은 예수님과 모든 세계와의 정면 승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정면 승부. 모든 세상은 한 소리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들이 보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실패지요. 실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담입니다. 누가 봐도 십자가는 실패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니고 너희가 실패했다는 겁니다. 왜 실패했다고 여겼던 자들,

예수님을 실패로 몰아넣었던 자들, 그럼 누가 성공했어요.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이 성공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실패한 이 분을 사흘 만에 부활을 시켜 놓으니까 자기는 성공하고 예수는 실패했다고 간주하는 것은 본인은 성공했다는 안목의 전제하에서 예수님은 실패자인데 이 실패를 주님께서 성공으로 바꿔버리니까 그 안목 전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곧 실패로 드러나게 된 거에요. 따라서 내가 실패이다를 아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어쨌든 나는 실패 안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옥가는 사람이에요. 종말을 경유하지 않으면 주님의 십자가(말씀)를 경유하지 않으면 이런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종말을 통해서 나도 주님을 버리고 아이 밴 여인처럼 내빼는, 살고자 내빼는 그 본성을 유감없이 대전과 대구 바닥에서 마음껏 발휘해주시기 바랍니다. 강력한 사랑의 모터를 통해서 바로 주님이 이야기하는 불신자가 도망친 제자가 남이 아니고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도대체 내가 어떤 존재이기에 주님 홀로 구원의 근거를 다 100% 제시 했는가 도대체 내가 얼마나 잘못된 인간이라는 것을 되새겨 가며 평생 주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이제 본문의 종말론을 보면 신이 나지요. “주여! 부숴주시옵소서! 부숴 부숴 주시옵소서!”하겠지요.


이 본문을 지금껏 교회에서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님께서 무서운 심판주가 되셔 가지고 보라!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을, 이것은 경고용이다.”그러니 정신 차려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마지막 때에 깨어서 도적같이 오신다니까“ 말씀을 받으면 경고로 받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요. 문제는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차리고 4시부터 5시까지는 쉬느냐는 문제가 있어요. 그리고 치매 걸리기 전에 정신 차리느냐 걸린 후에 차리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는데 하여튼 정신 바짝 차려서 깨어서 기도하고 마지막 때에 정결한 뭐가되고?


신부가 되어가지고 화장도 좀 하고 정결한 신부가 되어서 마지막 때에 흠 없다 소리를 들을 때 그렇게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정신 못 차려도 경고성으로 하는 이유는 그 만큼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악한 것과 정신 차리는 것을 구분해야 되는데 악한 것이 뭐냐? 666 이마에 바코드 받으면 안되고 이번에 이스라엘에서 무슨 핵 폭탄인지 시사 연구해서 살펴야 되고 바티칸이 어떻게 되가는지를 살펴야 되고 소련과 마곡과 곡 이란과 이스라엘이 어떤 전쟁을 일으키는 가 정신 바짝 차려야 되고 성경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시사로 넘어 갑니다.


현재 사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고 단 지파의 한국에서 단군의 자손인 한국에서 북한이 마지막 때 핵 폭탄을 일으키는 사태를 미리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봐야 되고 그러니까 신천지 잘 다녀, 신천지뿐이겠어요? 조용기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에 다니면서 정결한 신부로서 이 세상에서 영의 분별해서 이 시대가 어떤 지 제발 교회 와서 우리끼리 교회가 방주니까 구원의 방주에 돈을 많이 처들여야 되요. 그래야 방주가 살아 남은 자가 산다. 결국은 돈 내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마지막 때에 이건 대학 교수이든 박사든 관계없어요. 살고자 하는 사단이 있는 이상은 돈 갖다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장로도 그렇고 안 넘어 갈 수가 있어요? 사단이 사단에게 이야기 하니 안 넘어 갈 수가 있어요? 영이 같은데 살고자 하는 영과 살려 줄게 하면 같은 영이 아닙니까? 뭐가 빠졌냐 하면 이미가 빠졌어요. 돈 가지고의 이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로의 이미가 됐잖아요. 십자가로 이미 됐잖아요. 협박과 공갈, 얼마나 바보처럼 다 당했습니까? 나의구원? 없어요. 애초부터 개인 구원은 없어요. 그냥 주님이 활동하시는 무대라니까요. 우리가 하나의 역할에 불과해요. 역할을 잘해서 구원해 주시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나는 내 역할을 너는 네 역할을 하면 되요. 너는 지옥가는 역할하고 나는 천국가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앞으로 말씀을 전했으니까 세상에 나가서 자신이 협박과 공갈 많이 받으세요. 사단이 가만있지 않고 계속 속일 겁니다. 네가 못됐기 때문에 애들도 못 된다는 식으로 계속 우리 속에 깜짝 깜짝 놀라게 할 거에요. 자식 없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다 자식이 있잖아요. 내가 지금 게으르면 자식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내가 그렇게 원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모습인 것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확인 하는 절차의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대한 분석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얼마나 십자가를 가리는지 사단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늘 깨닫는 가운데 주님의 피로 감사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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