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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8 21:50:03 조회 : 411         
사무엘상 32강( 선지자 밑 왕) 마태복음 94강( 멸망의 가증한 것) 171128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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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24.139) 17-12-24 09:27 
선지자 밑 왕 (삼상 8장 19-9장9 절)
대전- 32강

 이근호


2017년 11월 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8:19-9:9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 8: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삼상 8:21)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삼상 8: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삼상 9: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삼상 9: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삼상 9:3)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삼상 9: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삼상 9: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
(삼상 9:6)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9:7)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삼상 9:8)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삼상 9:9)(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사무엘 상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 버려서 아들 사울이 찾으려는 대목입니다. (에브라임 산지: 지도상 좌측엔 지중해이고 우측은 아래는 사해이고 팔레스틴에서 가장 높은 산지) 고원인 산지를 사울이라는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돌아다니는 이 사람의 추적을 하나님께서 드론을 띄우시는 거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왕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뭔가 압력이 주어졌고 압력이 주어진 것이 추상적인 왕을 실체로 허락해 달라고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요청을 했고 선지자는 하나님께 전하고 하나님께 전해 받은 대로 그 요청에 응해서 왕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압력이 왔는데 왕이 튀어 나왔다. 만약 압력이 안 왔으면 왕을 달라는 이야기도 없었겠지요. 압력을 누가 줬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에게 압력을 줬어요. 그들에게 압력을 주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서 압력을 받았냐 하면 블레셋이라는 큰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해서 압력을 주니까 이스라엘에선 뭐가 튀어 나왔습니까? 왕을 달라가 튀어 나온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왕이 전혀 필요치 않았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요청 할 권한도 없어요. 뭘 요구 할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을 이끄시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 했을 때도 (주님이)내가 왕이다 하니 이스라엘은 거부해 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왕이다 하니까 자기들은 그런 왕은 필요치 않고 구체적인 왕을 달라는 겁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왕을 달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왔냐하면 자기들을 공격해 오는 나라들은 왕들이 있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왕들이 있다라는 조건. 이 조건이 뭐냐하면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뜻이에요. 택한 백성이 아니다라는 거에요. 왕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압력을 받으니까 본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방 나라들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는 자기들의 본색이 튀어 나온 거에요. 그런데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 하니까 왕을 달라고 할 때 이스라엘이 요청 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서 그 왕이 자기들을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런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냐 하면 하나님께선 구원하고자 이스라엘을 만드신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구원자인데 심지어 자기 백성에게도 얼마나 천대받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스라엘을 만든 거에요.


하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조차도 거부당하고 있는 그런 모습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이시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방식의 구원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밉상 받는지 그 이유가 뭐냐하면 인간들이 구원을 요청하는 방식 때문에 하나님 방식이 거부당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인간 방식의 구원이 따로 있다라는 말이죠. 원래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인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 블레셋이나 이스라엘의 생각이 같아요. 우리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라는 생각에 전혀 동의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고 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요.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한편이고 그 전체가 동행하시는 하나님과 싸움을 벌여야 될 판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그런 이스라엘은 버려져야 되지요. 지난 시간에 이런 논리에 의하면 너희가 하나님께 왕을 구하는 것은 나를 버림이요라는 말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 어려운 우리 가정을 구원해 주세요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을 버림이라는 겁니다. 죽으면 천국가게 해 달라는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배격하고 있는 거에요. 밀어내는 거에요. 이스라엘에게 (사울)왕을 주시는 이런 구조를 아셔야 되요.


다시 말해서 두 가지의 태도에 대해 다 이해가 돼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이라는 이웃 나라에게 압력을 받으니까 그럴 때 마다 기도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고 영웅이나 스타(왕)가 있어서 알아서 저쪽의 상대를 멸해주면 편하겠습니다.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하나님께 부탁하기를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라고 요청 한 거에요. 충분히 이해되지요. 자기들이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우니까 소수민족이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구원자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말이죠. 우리 보기엔 같은 입장에서 문제가 됩니까?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지지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려울 때는 요청을 해야지 요청을 안 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어려울 때는 요청하잖아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했잖아요. 자연스럽게 뭐가 나왔습니까? 죄이지요. 그럼 어려울 때 요청하세요. 어려울 때 요청하면 돼요. 요청하고 아하!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하면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요청하는 것을 정당시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안 찾지만 나는 예수를 찾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찾지만 나는 하나님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은 새벽 기도를 안 하지만 나는 새벽 기도를 한다. 그러지 말라는 말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 속에 자신들도 모르는 내가 생각하는 구원에 관해서 또는 구원 방식에 대해서 이미 내부에 장착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구원의 결과뿐만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구원해 주세요라는 방식까지 잡고 있었던 거에요. 이러한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겁니다.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죄가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구원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제시하는 구원과 인간이 요청하는 구원이 달라요. 처음부터 인간들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멸망으로 가는 길이 나와 있어요. 산상수훈 끝 부분에 보면 멸망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는가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멸망의 길의 특징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이 두 가지를 이야기 했어요. 하나는 넓은 길이에요. 쉬운 길이죠. 또 하나는 찾는 이가 많은 길이에요. 이 두 가지를 합해보면 인간은 멸망의 길을 가기 이전부터 이미 세상 자체가 멸망의 체질화 되어 있는 거지요.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해도 계속 꾸역꾸역, 너 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있어요. 멸망 길에 지향적이다. 모든 인간은 멸망될 수 밖에 없는 존재들로 되어 있는 거에요.

인간은 직업과 상관없이 본성이 이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만약 어떤 의사가 있다면 본성과 속성은 체질은 지옥화 되어 있는데 껍데기는 의사인 거에요. 사람들은 겉의 의사인 것만 보고 안은 못 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판사라면 겉만 보고 안에 멸망 길로 가는 것은 못 보는 거에요. 그래서 이 두 집안끼리 선을 본다면 이쪽은 판사 아가씨와 이쪽은 의사 아들이 만났다면 둘 다 멸망길로 가면서 커피숍에 앉아 있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 앉아 있느냐 권사나 장로들이 앉아 있지요. 목사 자녀들까지 합세하고 있는 거에요. 성경 말씀이 참 쉽지요~ 성경 말씀 정말 쉬워요. 말씀을 딱 보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을 필요 없어요.

우리의 내부를 딱 찍어 줍니다. “지옥 들어 있네요? 지옥이 체질화 되어 있네요~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말을 하면 아주 쉽게 아멘하고 받아들이고 천국 가는 길을 이야기 하게 되면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거부해 버리고 역겨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셨는데 구약의 사무엘 상에서도 이미 그 징조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택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라는 패 자체를 계속 버림으로서 그러면 이 세상에서 구원 될 자가 없지 않겠느냐? 그 버림이 교체 과정이 되요. 버림으로 없다고 하는 데서 새롭게 생산시키고 생산된 자를 또 버리고 버림으로 교체되면서 새로운 것이 또 나오고 버림이 없이는 구원도 없는 거에요.


전에 이야기 했는데 타락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했지요. 그래서 타락을 감사한 자만이 구원된다고 이야기 했어요. 계속해서 버림이 없이는 구원이 없지요. 그렇다면 성도가 인생길을 쭉 가면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무엘상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거에요. 주께서 계속해서 내가 귀히 여기는 것들을 자꾸 쓰레기통에 버려버리시지요. 왜냐하면 체질화 되어 있기 때문에 넓은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속성들을 버리고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좁은 길로 갈 수 없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짊, 이거 다 버려야 되요. 수고하고 무거운 짊을 다 버리면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친히 살아 계셔서 버리고 교체하고 새롭게 생산하시는 작업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해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버리시는 데 아예 버리시면 어떻게 되냐? 그것이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처럼 그리스도를 찾아 왔다가 아예 빠이~빠이~ 하고 헤어 졌어요. 돈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버릴 때 다 버려버렸어요. 아기 목욕 시키고 딴 짓 하다가 애까지 다 버려 버렸어요. 주께서 버리실 때 우리는 원망도 되고 불평도 되고 내가 이럴려고 예수 믿었나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무슨 더러운 팔자가 있나 하지만 그 순간과 병행해서 구원의 기쁨을 주십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내 숙제가 아니다라는 사실이 우리 인생을 굉장히 가볍게 만들어요.


자꾸 구원 앞에 ‘나’를 붙이거든요. 나의 구원을 붙이는데 나를 버리는 거에요. 진짜 버린 것은 왜냐하면 내가 가고자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구원도 엉터리이고 구원 방식도 엉터리이고 그래서 지옥이고 결국은 지옥을 천국인 줄 알고 계속해서 강짜를 부리는 거에요. 주님께선 자기가 택하신 백성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한 고집하시거든요. 그래서 끝이 있어요. “안 돼!”라고 계속 끊어서 네가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날마다 깨닫게 하므로써 주님께서는 이미 ‘함께 있음’ 자체로 구원으로 탈 없이 정상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 중에 또 이러는 분 들이 있을 거에요. 처음부터 인간을 만들 때 말썽 부리게 하지 말고 그냥 건지면 되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는 거에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으면 끝까지 안 따먹는 그런 남녀를 보내서 그들이 자식 낳고 구원해주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말썽 없지요. 산뜻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구원만 중심이 되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신 것처럼 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에요. 피조물 위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 창조주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만드신 피조 세계는 만든 분은 따로 있어요. 그것은 구원론 중심(中心)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입니다. 여기서 불교와 한번 비교해 봅시다. 불교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 말, 마음 이 세 가지에 문제가 있어서 인간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다 따라서 행동, 말, 마음 이 세 가지를 변화시키게 되면 해탈에 이른다. 행복의 여부도 행동과 말과 마음 때문에 그렇고 거기에 욕심이 많고 행동으로 남을 힘들게 하면 안 되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고 이런 것만 고치면 착한 사람이 되어서 서로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렇게 할 때 성도가 아닌 일반인 같으면 불교의 말도 들을 만 하고 괜찮고 어떤 종교도 나쁜 종교가 어디 있겠냐고 되겠지요.


이태리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전통적으로 수 십년 동안 내려온 마리아 상을 다 치워 버렸어요. 왜냐하면 유로 연합 의회에서 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따른다고 이태리 전통을 하루아침에 박살내 버렸어요. 학부형들이 난리 났지요. 그러니까 그 교장이 하는 말이 천주교가 싫어서가 아니라 활동하는데 걸리적거려 치웠다. 불상을 여기 걸어 놔두면 좋겠나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현대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발휘하는 겁니다. 불교에 대해 기독교와 같이 균등하게 의미를 줘라고 했을 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지요. 같이 처리해 줘야 하니까

 그런데 성도가 아니면 이게 뭐가 문제인지 몰라요. 뭐가 문제입니까? 이렇게 서로 평등하게 자비롭게 사는 게 인간에게 뭐가 문제 되는 거에요? 불교의 이런 주장이, 요새는 중들도 점치며 다니지만 불교 교리 자체는 뭐가 문제가 되냐 이 말입니다. 어떤 문제가 되지요? 방금 이야기 했듯이 인간 위주이지요. 우리가 이것을 바로 지적 못하는 것은 평소에 습관이 신이나 예수도 인간 위주로 일을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불교의 좋은 이야기들이나 훌륭한 제안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못 느끼고 있는 겁니다. 마음을 비우면 행복하다, 이것도 불교에서 하는 말 아닙니까?


불교의 어떤 교파는 갈 때 까지 가요. 자비에 자비를 더 하기 위해서 자기가 선행의 업보를 쌓아서 해탈할 수 있고 극락 갈 수 있는데 지옥 가는 영혼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일부러 지연해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일부러 안 가겠다는 거에요. 양보심이 많아서, 이것보다 한 수 더 뜨는 중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을 때 그 사람의 업보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데 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살인을 해주고 그 사람은 극락 보내는 겁니다. 미친 거지요. 미친 거 아니야! 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그 사람은 지옥을 못가요.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선행이 쌓이게 되면 본인도 극락에 가게 되요. 결국 본인이 지옥에 간다는 조건 하에 살인자를 극락 보내려 다가 실패로 끝나요.


인간 위주로는 모든 게 모순 되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인간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피조물을 위한 책이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책이지요. 그래서 불교가 탈락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이나 교회 가서 설교 듣는 사람은 무엇을 전제로 해야 됩니까? 절대로 하나님은 내 위주가 아니다. 그것을 마음에 깔고 교회에 가야 되겠지요. 그런데 설교에 인간 위주가 나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나온다면 그 교회에 서 있어야 되겠어요? 나와야 되겠어요? 나와야 되는 거에요. 나와야 되지요. 거긴 절이니까 불교 사찰과 다름없거든요. 간판에 예수교 장로교나 침례교도 필요 없어요. 그냥 사찰이에요.

그러면 그 교회에 그냥 다닌다면 그것이 넓은 길이 아닙니까? 인간의 보편적 속성 다시 말해서 파멸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날 때부터 이미 지옥이고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은 뭘 하시나? 말리지 않고, 하나님은 말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날마다 늙게 만들어요. 늙게 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필멸의 존재로 태어 나다는 거에요. 반드시 멸망당하는 존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늙어 죽어라!” 하루하루 계속 늙게 만드셨어요. 죄의 값은 사망이다. 조금도 쉬지 않고 어떤 일을 해도 늙게 만듭니다.


정치를 하고 아무리 큰일을 하더라도 사람이 70세를 넘으면 일괄적으로 노욕이 되는 거에요. 늙은이의 욕심이 되는 거에요.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있지요. 아예 70세가 넘으면 TV 화면에 안 나오게 만들어야 되요. 왜 꼴보기 싫으니까 물론 한 20년 쉬다가 연예인이 나오면 옛날 기억이 남은 사람들은 저 사람 왜 그리 늙었나! 하지요. 하나님은 인간 중심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중심이던 인간을 데리고 가서 몽땅 천국에 넣어 주면 되지 않겠냐! 그래서 하나님이 둘로 나눠지는 거에요. 성부와 성자로 나눠지는데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계약이 있어요. 이것을 언약이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누가 주라고 하시냐 하면 주의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세상을 만드신 겁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5장에 나와요. 그 계획이, 아버지께서 만드시고 심판도 하신다 해 놓고 심판을 누구에게 맡기냐 하면 아들에게 다 일임해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는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가 아버지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로 이미 요건이 확정됐습니다. 조건이 확정 됐어요. 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획 없이 일방적으로 사람들을 그냥 사람들의 생각대로 건져내면 무엇이 성립 안 되냐 하면 아들에게 돌아갈 주의 자리가 안 되거든요.

그런데 주의 자리가 되는 방식이 어떤 개념이냐? 그건 인간들이 몰라도 되요.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 만 아는 개념입니다. 그 주의 개념이 역사라는 것으로 펼쳐지는 거에요. 그러면서 비로소 뭘 알 수 있냐 하면 그 계획이 사단을 고려한 계획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 사단에 대해선 나중에 심판하시겠지요. 심판을 하려면 심판 주가 필요하지요. 그 심판 주를 아들에게 맡기는 겁니다.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사단이 대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에 대해서 대들도록 만드는 거에요. 결국 하나님은 빠지고 사단은 하나님의 언약, 계획에 대해 공격하는 거에요.

만약에 계약이 다 이루어 졌다면 사단은 더 이상 공격 할 것이 없게 되요. 다 이루었다는 것이 십자가에게 다 이룬 거에요. 이것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완전히 빠져 버려요. 인간이 끼어 들 자리가 없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은 가롯 유다가 마지막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스승을 팔아먹었다고 자책해서 목을 매어 자살 했지요. 이것이 사단이 시킨 짓임을 본인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절대 모르지요. 그러면 다시 이야기 해보면 모든 인간에게는 넓은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누가 이야기 하신 거에요? 예수님 쪽에서 이야기 하신 거지요. 예수님 쪽에서 이야기를 안 했으면 인간은 사단도 없고 단지 신만 있어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믿잖아요. 심지어 우리 나라도 조물주를 믿잖아요. 천지를 누가 만들었겠어요? 신이 만들었지 뭐, 답이 딱 나온다 말이죠. 해와 달도 내가 안 만들었잖아요. 인공 지능이 만들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인간 이전에 만들어 졌고 과학도 인간 이전에 해와 달이 만들어 졌다고 하고 우주는 137억 년 전 지구는 57억 년 전 만들어 졌다는 것도 엉터리이지만 이런 식으로 우주가 오래 됐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문제는 인간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몰라요.

과학 시대가 오기 이전에 모든 민족이 신을 믿고 있었다는 것, 태양신이던 별 신이던 달 신이던 신을 믿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누굴 닮았어요? 부모를 닮았지요. 그 부모의 속성이 원래 있잖아요.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것이 우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에요. 얼마나 생활에 실용적이고 편리 한가 만을 고안하고 고정되는 겁니다. 우주까지는 자기의 본성을 감출수가 없어요. 높은 의학적 지식을 가진 의사도 수술하기 전에 기도하고 그런다 말이죠. 영화 만들기 전에 고사 지내고 로봇 만드는 과학자도 인공 지능 프로그램 만들어도 기도 한다 말이죠. 실패하면 안 될까봐


 왜냐 본인들은 알거든요. 과학하는 사람들은 해보면 알아요. 완전히 운이에요. 모든 실험, 실습이 운이에요. 파스칼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항생제(페니실린) 발견한 사람도 마찬가지고 수 만 번 하다가 하나 얻어 걸렸어요. 성공 이전에 수 십 만 번 실험 한 것은 다 실패로 끝나 버렸어요. 방사성 원소(라듐)를 발견한 퀴리 부인도 마찬가지이고 전부 우연이에요.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에요.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거에요. 결국 인간은 마음속에 신의 도움이 있어야 된다고 하고 인간 자체가 이미 신이라는 추상적인 것, 이미 그 속에 자신들의 신과 연관되어 있다면 이미 신을 즉 하나님을 알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닌) 숨어 있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신다고요.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과 어떤 관계라고 했습니까? 계약(언약) 관계지요. 아까 드론이라고 했지요. 드론을 띄워 왕이 될 사울을 추적하고 있는 거에요. 암 나귀를 잃어 버려서 찾으러 가다가 누굴 만나냐 하면 선지자 사무엘을 만나게 하시죠. 이 말은 왕은 왕이되 예언 안에 있는 왕을 주시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 9장에 핵심입니다. 세상 안에 있는 왕은 절대자에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왕은 절대자가 아닙니다. 뭐가 왕보다 높으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높아요. 하나님의 예언이 높아요.

어떤 멸망될 왕이 뽑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그것조차 하나님의 예언하신 계획에 잡혀 있는 겁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자주는 아니지만 늘 감사하며 깊게 알 수 있는 그 느낌들이 모든 일들이 내가 하고 싶어 한 일들이 아니라는 것을 문뜩문뜩 온 몸으로 느껴지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냐 하면 책임감 같은 것이 날라가 버려요. 성도는 이것을 자주 느낍니다. 불신자는 못 느껴요. 주의 뜻은 예정된 의미도 있고 목적도 있어요. 성도는 주의 일에 끼어든 사람이에요. 주께서 벌리신 일에 끼어 든 거에요. 말려들었다는 말이 더 맞지요.

주의 일이 진공청소기라면 우리는 그 안에 빨려 들어간 먼지, 먼지가 뭘 하겠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사나 죽으나 먼지라고 생각하면 야고보서 4장에서는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그냥 물방울이죠.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물방울이지요. 우리의 있음은 안에 뭘 포함하고 있냐 하면 없음이라는 내부적인 자질을 품고 있음이 됩니다. 그래서 (있음 = 껍데기)이죠. 없음이 도리어 우리를 있게 하지요. 강의가 어렵다고들 하시는데, 광주 강의에서는 이 없음을 이름 없는 이름이라 했지요.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보통 이름이라는 것은 앞에 대상이나 실체가 있을 때 불러요. 앞에 강아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강아지가 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도비니까? 이름 만 남고 실체는 날라가 버리지요. 1984년도엔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었어요. 우리 기숙사에 나 보다 7살 정도 많은 분이 있었는데 보통은 신학교 안에서 경건한 척 하며 찬송가를 부르거나 가스펠 송 부르곤 하는데 이 사람은 이선희의 J에게를 부르곤 해요. 거기서 그 노래를 제가 처음 들었어요. 이 사람은 졸업 하고 난 뒤 얼마 안 있어서 죽었단 소식을 들었는데 중국에 선교한다고 하던 사람인데 J에게를 부르는데 J가 누군지 모르고 J에게 해당되는 ㅈ자 들어가는 이름의 여자 분은 다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J라는 이름을 부를 때 정확히 이름을 부르지 왜 J라고 부르냐? 그건 자기 곁에 없어서거든요. 떠나간 사람인 것 같아요. 얼마나 슬프게 부르던지, J 스치는 바람에~ 이름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 준 이름을 이름 없는 이름에 모든 구원을 다 집약시켜 놓으신 거에요. 실체가 있는 이름으론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 목사 최고! 이래서는 구원이 안 되는 거에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준 적이 없습니다. 아니리아와 삽비라가 재산을 많이 바쳤는데도 죽었잖아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실체가 있는 이름의 나 베드로를 속인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다.


왜 너는 이름 없는 이름을 이름 있는 이름 보다 더 소중히 여기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이름이 있고 실체가 있는 이름을 소중히 부름은 성도라 할 수 없어요. 성령 받았다 할 수 없어요. 그건 일반인이지요. 일반인이니까 안 보일 때는 그럼 교회는 누에 보이지 않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이름을 쥐고 있는 단일 이름, 그것을 대표 이름이라 하는데 수요일에 대표 이름이라 했잖아요. 구원 할 대표 이름, 바로 그 분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못 받는 거에요. 이래서 어려운 거에요. 사람과 사람이 있고 주님도 계시잖아요. 한 사람이 상대방 이름( 예를들어 J 정숙아!)을 부르면 그 무르던 못 된 입으로 주여! 부르면 과연 같은 이름이라고 쳐 주겠느냐 말이죠.

정숙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는 뭘 부정 안 해도 되요? 내 이름을 부정 안 해도 돼요. 그런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내 이름을 부정 안하고 부르면 이건 정숙이를 부르는 거하고 똑 같은 거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내가 부른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성령님이 나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 있음을 확인 시켜주는 마음으로 성령이 시키는 데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요. 함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주께서 쪼르륵 오시고 하시지 않습니다. 보통 떼 창이라 하지요. 주여! 주여! 주여! 하면 주님께서 천사 대동하고 오시는 줄 아십니까? 안 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불러야 되요.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부를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어서 찝찝하니까 그것을 자꾸 감추려고 쭈여! 쭈여!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허한 것을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거에요. 일종의 변지지요. 안 되는 거에요. 나오지도 않는 변비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면 변비가 설사로 바뀝니다. 그냥 할 말이 없어져요. 주여!라는 말도 안 나와요. 아하! 그렇구나! 모든 일이 이미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구나! 라고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에요. 주님을 부르도록 조치된 결과에 진공청소기가 윙하는데 우리는 먼지로 빨려 들어가는 입장이라니까요.


사울로 하여금 암 나귀를 찾다가 누굴 만나는가? 사무엘상 9장에 보면 9절에 보면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12절 까지 계속해서 내용을 보면 지금 선견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안돼!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선지자가 산당에서 제사 드릴 때 그때 만나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왕이 될 자라도 누구의 스케줄을 따르냐 하면 선지자의 스케줄에 따라야 되요. 그러면 사울이라는 왕은 선지자보다 위에서 지시하는 왕이 아니고 선지자 사무엘에 종속된 왕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는 전과 후가 달라진 게 뭐가 있어요? 외형적으로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요. 전에도 블레셋이 왔을 때도 사무엘이 나서서 이겼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니 이제 사무엘은 늙었고 아들들의 꼬라지를 보니 그 아버지와 비교해 보니 비교도 안되고 인간 말종이라 다시 선지자를 뽑느니 차라리 세습해서 한 번 왕이면 자식도 왕이 되는 고정된 구원자의 자리 또는 영웅의 자리를 다른 이방 나라와 같이 모방해서 우리도 제도를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제시한 구원의 방식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방식을 엉터리이지요. 엉터리구원의 방식을 하나님께선 결과적으로 선지자 밑으로 집어넣으시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이 왕을 달라는 방식이 앞으로 선지자의 모든 활동에 의해서 왜 이래선 안되는 가를 두고두고 그 결과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겁ㄴ미다. 선지자가 더 과격해 졌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너희가 결국은 이것 밖에 안 되잖아를 보여주는 겁니다. 감기 걸렸는데 감기약 사러 가기 귀찮아서 기도를 했던이만 감기가 뚝 나았다. 이럴 경우에 이런 체험을 했던 사람이 그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하! 이게 하나님의 은혜구나! 잊으면 되는데 다음에 또 감기 걸렸을 때는 감기약 사러 가는 것이 아니고 기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감기 걸렸을 떼 약 사지 않고 본인은 뭐로 보냐 하면 신앙으로 보는 거에요.

그런데 다음에 약 사러 가게 되면 신앙에서 퇴보되는 거니까 본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안잖아요. 그래서 기도를 해본다고요. 기도해서 감기가 안 나으면 천만 다행인데 또 나아버린 거에요. 두 번이나 되니 이건 확실하다고 하겠지요. 이게 뭐냐하면 이런 식으로 진행한다는 말은 누구를 버림이라? 하나님의 방식에 말려든 거에요. 자신이 생각하는 구원의 방식은 하나님 보기에도 인정받았다. 내가 끄집어냈지만 이것이 옳다고 인정받았다고 자기 방식을 고집하게 되면 자기 이름을 빛내는 역사로 포함이 될 것이고 자기 이름으로 구원되는 방식이 되어 버려요.


자기 이름으로 구원되는 방식이 있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성도에게도 이런 일들이 있어요. 왜 있냐 하면 그런 일이 없는 것과 있는 것에서 십자가와 비교해 보는 겁니다. 기도해서 병 낫겠다는 것이 전에는 죄가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런 데 낫고 십자가와 마주칠 때 물론 성령께서 마주치게 할 때 자기 이름 위주의 자기 잘남, 자기 고집, 자기 멋짐이 얼마나 죄인가를 알게 되겠지요. 그러면 앞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뭔가 자기 뜻대로 잘 될 때 그것을 뭐로 보겠습니까? 주여! 바로 이게 십자가에 죽게 하는 죄이군요라고 알게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주께서 인도 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24.139) 17-12-24 09:29 
멸망의 가증한 것 (마 24장 15-21 절)
대전- 94강

 이근호


2017년 11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15-21


 (마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태복음 24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2절)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물었는데 질문을 잘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끝이라는 것은 인간이 바라보면서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석양이 질 때 저것이 석양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산이 있고 석양이 지면서 노을이 붉어지겠지요. 그런데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느끼냐 하면 석양 쪽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볼 때 그 있는 곳도 붉다는 것을 느끼지 못해요. 저쪽은 벌거니까 이쪽은 아직 대낮인 줄 알고 있어요. 이렇게 인간이 자기중심적이 되어 버리면 자기는 거기에 포함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끝이 되면 저 끝은 통곡 소리 들리겠다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자기는 아직 통곡 안 하고 있다는 말은 아직 끝이 덜 된 거에요. 끝의 특징은 끝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강력한 저항이 나오면서 끝이 되는 겁니다. 저항이 안 나오면 끝이 아니에요. 인간은 마지막을 싫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기업에 원서를 10군데 내었는데 다 떨어졌다. 이 사람이 절망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절망 안 합니다. 왜냐하면 원서 내려고 100장 정도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런데 100번 째 지원했는데도 안 됐다 하면 그 땐 절망 하겠지요. 끝을 느낀다 말이에요. 10번째가 왜 안되냐 하면 아직도 90장이 남아 있으니까.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끝을 만들어 내요. 저항을 근거로 만들어 내요. 그렇게 흔히 만들어진 것이 바로 종이학이에요. 자기는 종이학 1000장을 접겠다는 거에요. 종이학을 만드는 데 큰 종이로 만들었다고 퇴짜 맞아서 작은 종이로 1000장을 만든다는 드라마가 있어요. 종이학을 1000장을 만들면 학이 진짜 날라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끝과 끝이 아닌 마지막 천 번째 종이와 학이 되는 그 순간을 끝이라고 누가 조장했어요? 본인이 그렇게 만든 거에요. 절에도 있어요. 107번째 절과 108번 째 절을 달리 생각하는 겁니다. 108번째 하게 되면 일어서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묵주를 돌릴 때 10바퀴 돌릴 것인가? 몇 마퀴를 돌릴 것인지 본인이 계산하고 있어요.


이런 말들의 다 특징이 있어요. 끝을 기다리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게 끝이에요. 저항이 반발했기 때문에, 저항이 있다라는 것은 본인은 단독적인 실체라고 간주해달라는 겁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끝이 나를 점령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왜? 본인이 아직도 희망이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포부가 있는데 끝이라고 하면 곤란하지요. 12월 초에 딸의 결혼식이 있는데 11월 말에 재림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재림하면 결혼식장이 불바다가 되는데 불구덩이 속에서 딴따다단 할 수 있습니까? 안되잖아요.


재림은 하시되 결혼식 후로 미뤄 달라는 은근히 간절한 기대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저항입니다. 주의 일에 강력하게 반발한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지키려는 힘이 아직 펄펄 살아있다라는 거에요. 그러면 오믈 본문 15절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사람이 어떤 산에 신상이라든가를 세울 때 그것을 사람들이 왜 세우겠어요? 보라고 세우는 거지요. 보라고 세운 이유가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서 세우는 겁니다. 파군재 삼거리 우리교회를 오게 되면 파계사와 동화사 가는 길에 신숭겸 동상이 서 있어요.

어느 날 운동하다가 보니까 70넘어 보이는 사람이 차를 그 곳에 세워 놓고 정중히 절을 하고 있어요. 아마 신숭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동상을 세울 때 돈 낸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신숭겸 동상이 왜 있겠습니까? 이게 저항이라니까요.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니까요. 저항은 무엇을 기초로 하느냐 하면 자기 것의 고수입니다. 자기 것이 고수가 되어 버리면 조건부 감사가 됩니다. 감사 할 때 내 것을 지켜주시는 조건하에 감사하겠다는 거래가 형성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가 없어요. 내 것을 사수하는 경우에만 감사가 나오고 이것을 침범하게 되면 더 이상 못 참습니다가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내 것)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이 안되지요.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는 그 앞까지 오겠습니까? 속에 까지 오겠습니까? (내 것)내부에 까지 들어와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이유가 이(내 것)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십자가 피가 오게 되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감사하겠어요? 분노하겠습니까? 분노하지요. 십자가가 막상 내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분통을 터뜨립니다. 왜 내 인생을 짓밟느냐는 거에요. 슈퍼에 있던 버려진 캔을 수집할 대 고물상에서 어떻게 처리 합니까? 발로 밟아 찌그러트리잖아요. 그래야 캔이 고물상의 소유로 전환되는 거에요.


병은 수거하면 안에 있는 것을 부어버리잖아요. 아까 말했듯이 껍데기라고 껍데기는 껍데기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사를 예쁘게 해서 집어넣으면 주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버림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고 했지요. 그것을 버릴 때 얼마나 우리가 아까워하겠습니까? 저것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 볼라고~ 살아 볼라고~ 애 한번 공부 시켜보겠다고~ 얼마나 애써 미국 유학 보내 놨더니 잘못되거나 죽어버리고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만나는 순간 왜 분노하게 되냐 하면 그 요소가 내가 끝까지 책임질 것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다른 건 다 건드려도 대는데 내 자식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그런데 그 자식 마저 건드릴 때 제대로 주님 만난 것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분노하기 때문에 “내 자식은 건들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것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이것을 건드립니까? 이건 끝까지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요!”이 끝, 종말이 되면 주님이 주시는 끝과 내가 사수하는 끝과의 마지막 대 전쟁이 벌어집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교회에 간다는 것도 결국 뭐냐 하면 내가 마지막 까지 내 자존심을 걸고 지키고 싶은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목사가 시키는대로 해서 이 끝은 내가 쥐고 있고 그것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덮개를 끌어 모으는 것을 기대하면서 교회에 가는 거에요.


십일조 할테니 이것은 지켜주옵소서! 봉사 할테니 지켜 주옵시고 선교비 낼 테니 요것 지켜달라고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헌신할테니 제발 요것만큼은 지켜달라! 이런 것 때문에 교회 다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교회에선 성경 말씀은 전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지요. 그러면 교회 다니는 이유가 집에서 교회하는 것 보다 역시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도의 응답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을 만나면 선한데 개인 개인이 모여 교회가 되면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희안하지요. 그 이유가 제가 설교할 때 미꾸라지 통으로 비유했어요. 미꾸라지가 혼자 있을 때 끝까지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이 필요할 때는 받아들이고 필요 없는 것은 뱉어 내지요.


이것은 내 자식을 지키는데 필요 없다 혹은 이것은 내 자식을 지키는데 꼭 필요 하다 그렇게 반복하는 겁니다. 만약에 교회에 피아노 전공자가 있다. 그런데 내 딸이 피아노 과에 진학을 한다면 교회에 갈 때 말씀도 듣긴 하겠지만 끝나면 빨리 그 전공자에게 궁금한 것을 묻게 되겠지요. 그렇게 교회란 곳에서 자기가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필요치 않은 것은 빼내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미꾸라지 통을 이야기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남이 뱉은 욕망을 자기가 삼키고 자기 것은 뱉고 그러니까 미꾸라지 통을 보면 표면에 뭐가 올라와 있습니까? 거품이죠. 이 전체가 육이거든요.


교회라는 이름이 그냥 육이에요. 같은 미꾸라지 통에 같이 있어요. 육의 거품, 지옥의 거품 속에 있으면서 끄집어내는 것들이 욕망들만 끄집어내고 끄집어 낸 그 욕망을 먹고 그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에 가도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 육에서 벗어 날 수 없어요. 육에서 갇혀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말씀처럼 갇혀 있는 거에요. 그러면 영은 뭐냐 영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형식으로만, 작용으로만 오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이름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많기를 원하노라 (고전 2장) 예수님의 죽으심을 집어넣는다 말이죠.

나는 이 땅에서 끝까지 지키는 것을 포기 했다 이 말이죠.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주께서 가진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준다고 했지요. “나는 네가 사는 동네에서 죽었어!”너희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며 따라오고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이름으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하냐는 말이죠. “줄께! 내 살과 내 피를 죽음에 동참하라고 줄께!”어데에, 그건 안 된다는 거에요.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은 누가 키우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끝까지 지키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꾸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밀어 내기 때문에 분노를 안해요. 왜 알아서 밀어 냈기 때문에.

십일조 내면서 주님을 돌려보내고 선교 헌금 내면서 주님을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들어와 버리면 아이들이 떼 쓸데처럼 정 안 될 때는 발버둥치지요. 여자 분들은 나 이러고는 못 산다, 마지막엔 말로도 안되고 그럴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론 도저히 안 깨지는 철야를 해도 안되고 금식을 해도 안 깨지고 모든 재산을 교회 갖다 바쳐도 안 깨지는 것. 깨어질 리가 있습니까! 다 미꾸라지 통에 들어 있어서 뭐가 깨져요. 행함이 아니고 은혜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주님이 이 곤란한 인생을 완전히 딱지 붙여서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서 전환된 인생을 예수님의 복음이 담긴 인생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니엘에 예언 된 바 가증한 것 앞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멸망이지요. 뭐냐하면 주님 보시기에 이미 멸망 받을 세상에서 멸망할 것을 하나님이 허락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들 각자 속에 멸망 받을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내용에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 왕이 있는데 (헬라화 정책) 메대, 파사 망하고 헬라 마케도니아 다음에 로마의 순인데 세 번 째 헬라 나라가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와 터키, 이라크, 이란이 망하고 난 뒤에는 네 부분으로 나눠졌는데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관여 하면서 북쪽에 있는 왕과 싸웠는데 남쪽에 있는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 왕이 싸우는데 휴전 중간 지점에 성전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서 거기에 예언을 깔아 놓으시는 거에요. 그것을 지난 수요일에는 무늬라고 헸습니다. 자연에 무늬가 있다. 자연의 질서가 있다라고 하면 과학적 이야기로 되는데 질서 대신 무늬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늬 형식으로 있는 겁니다. 여기에 종속되어서 모든 세상의 왕들도 전부 하나의 예언대로 장기 판위의 알처럼 주님이 밀고 당기고 싸우게 하는 거에요. 세상의 모든 왕들도 그 무늬를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그 취지가 뭐냐하면 성전은 망한다. 망하는 이유가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의 한 복판에 서 버리요.


헬라의 신이 성전 중앙에 서는 것이 다니엘의 역사적 사실이고 무늬라고 했지요. 하나의 예언을 가지고 마지막 세상을 멸망시킬 때 빌미로 세상 역사 속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거룩한 것은 성전이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다니엘의 예언대로 역사적으로 봐선 A.D 70년 경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덮쳐요. A.D 70년으로 모든 이스라엘 역사가 끝납니다. 그 이후로 혼혈된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의 이스라엘은 아무 의미 없어요. A.D 70년으로 끝나 버립니다. 로마가 헬라를 다시 정복한 것은 B.C 160년 경이에요.


바벨론 ⟶ 메대⟶ 파사 ⟶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이런 나라들을 다니엘에서는 네 마리의 짐승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일반 역사가들은 짐승이라고 안하지요. 짐승이라는 말은 부정적이잖아요. 멸망의 대상 또는 흉측한 것들 없애야 되는 데 어떤 일 때문에 거정해서 생긴 나쁜 것들 이러는데 성경에서 짐승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짐승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일 만한 어떤 것과 대조하기 위해 짐승이라는 표현을 했단 말이에요. 그게 뭐냐는 말입니다. 짐승과 대결 상태에 있는 것. 짐승이 늘 반항하고 저항하고 노리면서 삼키고자 하는 대상이 뭐냐?


다니엘에서는 인자의 나라,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를 누가 공격한다? 짐승이 공격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는 역사를 초월해요. 묵시적이에요. 짐승의 나라는 역사에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완성은 역사와 묵시가 만나는 곳에서 모든 세상은 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것과 인간이 사용하지 못한 것은 중간지점, 접점 경계선 그게 끝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경계에 서 있는 사람. 지난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성도가 십자가를 보면서 저 피를 믿으면 나는 산다가 아니라 나는 이미 죽었다를 확인해야 되요.


이미 죽은 자로서 세상을 유령처럼 살아가는 자가 성도가 되는 거에요. 이런 인식을 실제로 느낀다는 것은 큰 은혜를 받지 않으면 도저히 생길 수 없어요. 요새 제가 외손녀와 하는 놀이가 있는데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12시가 되면은 문이 열린다고 할 때 마주 잡은 손으로 잠아 주면 좋아 하지요. 놀이를 계속 개발해요. 한 것 주번 하면 재미없어 해요. 계속 해달라고 하면 팔 아프잖아요. 안 잡으면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하면 잡을 줄 알고 통과하잖아요. 통과할 때 세상이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 남들이 약을 올리는 데 전혀 약 오르지 않는 것. 겁 하나도 않 나는 것.

문재인은 위험하다고 오래된 원자력 발전 가동 정지시키는데 사고 나면 우리나라 사람 반 이상이 죽는 다는데 죽어도 괜찮은 것. 원자력 발전소 10개가 잘못 되도 아무 상관없는 것. 이게 유령이잖아요. 마치 이 세상에서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 이게 고린도 전서 7장에 나오는 대 한번 봅시다. 이게 기쁜 소식인데 29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마치 ~아닌 것처럼 남편은 아내 없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이 없는 것처럼 니 마음대로 사세요.


그 다음 절엔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울 일도 아닌데 내가 왜 울지? 미쳤어! 유령이 우는 것 봤습니까? 전설의 고향에선 봤지만 이 땅에 맺힌 한이 없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우는 자는 한 이 맺힐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아직 뭐가 그렇게 미련이 남았냐는 말입니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이미 죽은 자가 실패를 염려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죽은 자에게 무슨 실패가 있으며 죽은 자에게 무슨 성공이 있습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마지막 때 뭔가 지키고 책임지고 싶어 하는 것이 있으면 여기에 마귀가 달려들어요. 가증한 것이 계속 킁킁 냄새 맡고 달려든다고요. 너 이러다 십일조 안하면 못 킨다고 헌금 안 해서 네가 망했어! 자꾸 공격해대는 거에요. 십자가는 주문 한적 없다고 돌려보내고 택배 기사 시켜서 내 것은 내가 지킨다. 내 가정은 믿음으로 내가 지킨다. 그것이 맥아더의 기도가 아닙니까?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 그게 뭐가 기쁘냐 말이죠. 그 다음에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사려면 사고 말려면 말고 배짱 부려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이 말을 한 마디로 하면 유령처럼 살아라! 다른 말로 하면 이름 없는 자가 되라! 자꾸 네 이름을 기억하지 마라! 네 존재를 기억하지 마라! 이름이란 실체라는 존재로 붙인 것이잖아요. 이름 없이 살아라!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면 교인 하나도 안 나오겠죠. 자기 것 사수하며 주께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 그래서 기도 하는 보람이 있었는데 이렇게 하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목사님 그러면 기도 할 필요 없네요?”하지 마세요. 기도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무시로 기도하라 했잖아요?”기도를 하게 하시지요. 본인들 기도 말고 주께서 기도 하시게 하는 게 따로 있어요. 주의 일을 거부하지 않도록. 주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복음에 방해하지 않도록 하시지요. 다시 본문 24장 봅시다. 그러니까 이혼 문제도 나는 우애 사노? 그런 걱정 하지 마세요. 할 때 되면 하면 되고 또 다시 만날 때 되면 만나면 되고 (결혼도) 다섯 번 째 하려면 다섯 번째 하면 되고 여섯 번 째 하려면 너무 많이는 하지 마세요. (웃음)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해요? 내 힘으로 어찌 말립니까? 좋아하면 좋아하면 되고 식상 하면 헤어지면 되고 이 세상에 대해 구해 받을 필요 없어요.

18절에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요 만큼도 내 것이 있는 사람은 그 날이 처참한 날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을 께 아니고 그 날은 어느 정도이냐? 그 날이 기쁠 정도가 되려면 젖먹이 자식이 있더라도 혹은 재산이 있더라도 마지막을 감사할 정도가 되야 돼요. 내 애라는 생각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애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본문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로마 군인들이 와서 성전에 로마 깃발을 꽂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이에요.

역사는 하나의 무늬에 불가한데 역사라는 것은 다른 역사, 이 역사 말고 다른 역사가 공통성을 갖고 있어요. 보편적인 속성을 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것을 가증한 것이라 하지 않고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섣다는 말은 사람들은 멸망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요. 석굴암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깁니까? 불교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여기지요.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이 아직도 멸망할 때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냥 살면 되지 이상히 여기지 안잖아요. 그런데 성도가 볼 때는 아하! 저 석굴암은 인간들의 본성을 물체화 시킨 것이라고 마태복음 24장을 그렇게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석굴암뿐만 아니고 큰 예배당도 마찬가지지요. 거기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아하! 저게 가증한 것이구나! 교인들이 저것을 원했구나! 예수님을 원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키고 책임 질 내 교회를 원했구나! 그래서 일반 성도들은 말씀이 안 맞으면 그냥 나오면 되는데 못 나온 사람들을 보면 그 교회 돈 많이 들인 장로급들 목돈 낸 사람들, 푼 돈 내면 금방 나올 수 있어요. 목돈 내고는 못 나와요. 자기가 그 교회를 지켜야 되요. 제가 아시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가 되려는데 목사가 불러요. 돈 이렇게 내서는 안 된다고 더 내야 장로 임직 내준다고, 누구라고 말할 순 없지만.


21절 봅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환란이라는 말은 어떤 경우이냐 아직 묵시가 안 되었어요. 역사 속에 있을 때 환란입니다. 유령이 덜 되었어요. 빼내는데 아까 분노라고 했지요. 우리는 내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에 넓은 길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찐득이처럼 안 떨어지려고 하듯이 붙어서 하나 떼어내면 하나 다시 붙고 다시 떼어내면 다시 붙고 기여이 이 세상에서 자기 의미, 자기 이름의 의미를 꼭 부여 하려고 해요. 떼어 내도 안돼.

그러니까 그 전체가 뭐냐하면 환란이 되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환란이고 부자라고 해서 환란 없는 게 아니에요.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육적인 체질 때문에 환란을 자처해요. 그것을 기도 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신경을 더 쓰기 때문에 점점 환란을 부채질 하지요. 기도까지 했는데 설마 지켜 주겠지! 차라리 기도 안하는 게 낫지 자기가 기도 했다고 주장 하는 셈이 되어 버려요. 그 중에 한 예가 있는데 환란이 있다는 말은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거기서 아무도 빠져 나올 수 있다? 없다? 못 빠져 나온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못 빠져 나와요.

왜 성도는 환란이 와야 끝임을 이론이 아닌 실습과 체험을 하고 살아가면서 늘 느끼는 거에요. 하나 해결하면 다른 게 터지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말씀대로 이미 우리에게 푹 잠겨 있음을 체험하는 거에요. 그래야 아하! 말씀대로 대는구나! 하는 자가 성도에요. 고생 안하는 게 성도가 아니고 고생을 하더라도 이것은 필히 그럴 수밖에 없어! 왜 주님의 말씀이니까 그런데 환란 속에 있는 사람이 더욱 더 환란을 가중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고 모방하고 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김영철이라는 개그맨이 있는데 무구를 자꾸 흉내내냐 하면 하춘화를 흉내 내요.

그래서 김영철이 흉내 낼 때 똑같다고들 하니까 어느 날 진짜 하춘화가 나와서 하춘화가 김영철이 흉내 낸 하춘화를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연기를 하는 거에요. 왜 남들이 인정하는 하춘화가 될 때 자기가 계속 출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내가 없어요. 남들이 꾸며주는 데로 그것이 나라고 입혀줘야 숨 좀 더 쉬고 오래 살 수 있어요. 밥을 먹고 살 수 있어요. 여자가 처음 시집와서 집안에서는 본인은 없어요. 이 집안에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잔소리로 덧입혀 줘야 시집살이에서 한 숨 쉴 수 있습니다. 사랑 받고 그래서 오랫만에 친정 엄마가 오게 되면 기가 차는 거에요.

친정 엄마가 딸이 변한 것을 보고 눈물 흘리며 돌아가잖아요. “엄마 이젠 안 와도 돼요” 완전히 세뇌 당해버렸어요. 시집 사람으로 왜냐하면 본인이 시집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적응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 환란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게 아니고 환란에 더 깊숙이 얼싸안고 망하는 쪽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결속하고 단결하고 소통하고 있는 겁니다. 페이스 북에 올라온 어떤 사람을 봤는데 오늘 본문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에 딱 맞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정명 목사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여수 은현 교회 은퇴한 목사에요. 거기에 보면 자기는 엉터리 목사라는 거에요.


나는 설교하는 기술만 발휘했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지 못했다라고 이제는 은퇴해서 이렇게 회개하고 내가 교회를 보다 사랑 했어야 되고 자기 딴엔 목회를 잘 했다고 생각해서 은퇴하고 나면 하나님이 복을 줄 시줄 알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오히려 둘째 딸이 교통사고로 실명하고 큰 딸은 뇌종양에 걸렸다는 거에요. 이 교회가 흔히 말하는 시골 교회 한번 오게 되면 절대 떠나지 않는 한 오백 명이 모이는 십일조는 기본이고 교회가 조용하게 은혜롭게 잘 되는 그 교회는 마음씨 좋은 목사가 있고 이렇게 착한 목사가 오면 한 30년은 그냥 먹습니다. 복음도 필요 없어요.


노인들 잘 대우하고 착하기만 하면 그냥 가는 그런 목사에요. 이렇게 착하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은퇴하고 나면 복 줄줄 알았는데 자식들이 아프고 그래서 이제는 회개한다는 거에요. 교회를 조금 더 사랑할 걸 조금 더 교인들 사랑할 걸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하면 이 목사는 뭘 모르냐 하면 인간은 회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몰라요. 회개하겠다는 말이 뭐에요? 마귀의 종이라는 뜻이에요. 자기가 마귀에 속했다는 고백이에요. 회개하고 난 뒤에 자신의 모습을 본인이 예상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예상 하지요. 이데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에요. 인간은 자기의 반성을 딛고 나쁜 것을 극복하고 그 뒤의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까 김영철의 하춘화 이야기 했지요? 서로가 서로를 모방해요. 전부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마음속에 꽂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목사가 회개하려면 누구에게 해야 되요? 십자가 앞에서 해야 되요. 교인 오백 명 육백 명도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없어야 되고 단독으로 십자가 앞에 서야 됩니다. 설 때 내가 하는 목회가 전부 뭐였다? 이건 나쁜 목회를 해서 죄인이 아니에요. 교인들 등쳐먹어서 죄인이 아니고 성실하게 하든 바르게 하던 교인과 교회를 사랑했어도 심지어 교회를 위해 내 간을 떼 줬어도 그게 죄였다고 해야 되요.


그래야 그 사람은 유령 같은 존재가 돼서 지금까지 평생 지내온 것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죄인을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그 교회에다 집어넣었다고 생각하고 정말 통곡해야 하는 것은 왜 이 사람이 은퇴하기 전에 왜 복음을 교인들에게 못 전했는가에요. 밥 먹고 살려 하는 것. 뭘 해서? 목회해서 결국 뭐냐하면 마지막 때에 교회도 문제이고 목회도 문제이고 신학교 간 것도 문제에요. 이 모든 것이 누구 때문에? ‘나’가 문제에요. 내가 문제에요. 내가 끝이어야 되요. 끝이 된 내가 누구와 만난다? 십자가 지신 주님과 만나게 될 때 내가 바로 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끝으로서 움직여야 되요. 여러분 교회도 의미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 모르면 다 엉터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못했을까요? 몰랐고 안다하더라도 안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목사가 잘립니다. 그 전통적인 교회에서 노인네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줘야지 십일조 내는 사람 알아듣게 해줘야지 못 알아듣게 하면 내가 몸 바치고 돈 바치고 청춘을 바친 이 교회를 못 알아듣게 하면 사단이 왔다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가 뭡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안 사람이 없었잖아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핵심이 그거에요. 인간치고 예수를 알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이 몰래 오신 거에요. 돌아가실 때도 아무도 붙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정해서 여인 세 명도 왔지만 심지어 엄마까지 왔지만 동정이지 정말 예수를 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안 사람이 없는데 왔고 아무도 안 사람 없이 갔다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아무도 못 아는데 천국은 누가 갑니까? 천국이 덮친 사람만 가는 거지요. 성령을 통해서 천국이 덮친 사람은 본인이 뭘 고백하겠습니까? 나는 죄인이라 전혀 주님을 몰랐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몰라도 괜찮아! 구원은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어차피 모르는 사람에게 경정하라고 윽박지를 수 없어요.


모르는데 뭘 네가 천국갈래 지옥갈래 그런 선택 여부를 물을 이유가 없어요.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데 무슨 이름을 쓰고 시험 문제를 냅니까? 모르는데 구원했다면 처음부터 주님의 택한 아이이고 주님의 택한 신부이기 때문에 본인이 본인 결정을 무시해야 되요. 날마다 그래서 책임지지 말라는 거에요. 나는 결심했어! 결심은 하는데 책임은지지 마세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도무지 뭐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네가 맹세 할 레벨이 안 된다는 거에요. 미래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무슨 맹세를 해요. 끝이 오잖아요. 해가 지잖아요. 지면 그냥 지는 데로 덮쳐오면 그냥 어두운 줄 알고 밤이구나! 밤 속을 유령처럼 살면 되잖아요.


이 말씀을 할 때 제자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그들은 유령처럼, 공기처럼, 바람처럼 이 세 가지를 합친 것은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공기인데 공기 없는 곳이 어디 있어요. 다 있지! 바람 불면 부는 거지요. 유령도 마찬가지 그런데 주께서 이렇게 살려주시는 데 평소 우리의 삶은 아직 육이 있기 때문에 저항을 느끼는 겁니다. 그게 어떤 경우냐 하면 외 나무 다리에서 주님과 만날 때 유령같이 또는 바람같이 살면 같이 합세질 수 있는데 아니면 주께서 오시면 저항을 느끼고 실체를 느끼니까 이러시면 아니 되옵나니다 이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펜스가 쳐지는 거에요. 이러시면 아니 되옵나니다 주님은 나는 너를 박 공기, 최 공기로 알고 있는데 공기2, 공기3 아니었어? 아니 되옵나니다 이러시면 내 딸은 누가 지키옵니까? 내 아들은 누가 지킵니까? 이러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내가 챙겨야 되는데 60까지 다녀야 연금 많이 타는데 아니 되옵나니다 그러면 아니 되옵나니다라고 할 때 주님의 대책이 뭐냐?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삐지시면 큰일 납니다. 주께서 상황을 만들어 주시는데 본문에 의하면 끝의 상황, 손을 떼야 될 세상의 상황을 주러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미 부여가 뭐냐 하면 아직은 아니 되옵나니다 이지요.

그러면 주님의 의미는 “끝났어! 야! 손 털고 가자!” 이러시는데 “아닙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들 장가는 보내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한다 말이죠. 자기가 암 걸렸으면 주여! 조금만 시간을 더 주옵소서! 어떻게 15년만 더 살려 주옵소서! 아직 아니 되옵나니다 할 때 거기서 뭘 끄집어 내냐 하면 그 의미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아니 되옵나니다라는 의미가 어디서 나왔냐 하면 바로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라도 내가 나를 지키는 것에 지성소처럼 여기까지는 오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시 어머니가 김치 해다 주는 것은 좋은데 경비실까지만 와서 맡기면 내가 찾으러 가야지 집까지 들어오시는 건 곤란합니다. 어머니 안녕히 돌라가십시오. 여기까지는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냐 하면 성도는 여기까지 들어오시지요. 그러면 우리는 분노하지요. 그 분노를 타락이라고 봐요. 그리고 타락이 없으면 예상 못한 새로운 의미와 기쁨과 감사가 절대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상하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고 내가 이건 기뻐해야지 하는 것은 내 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예상된 기쁨이기 때문에 이건 다 가짜에요. 예상 못한 기쁨은 엔돌핀입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웃으면서 세상에 이런 기쁨도 모르고 내가 돌았어! 돌았어! 자기가 자기보고 철없다고 하고 지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거야! 이렇게 넓은 길로 가다가 방향을 틀어서 영생이 있는 좁은 길로 인도 하시는 겁니다. 주님 앞에 절로 찬미와 감사가 나옵니다. 3분 내지 5분? 기뻐요. 심지어 암에 걸려서 일주일을 못 넘긴다고 해도 죽는 것이 그리 좋아 아하!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좀 당겨줄 순 없습니까?”하면 “안 됩니다.”아이!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려! 이 정도 기쁨으로 되면서 온 몸의 세포가 활성화 되면서 일주일이면 죽는다는 인간이 15년을 더 사는 히스기야의 기적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나는 죽은 자 같으나 살았다라는 그 말씀이 옛날에는 남의 이야기였는데 분노 가운데 그 말씀을 집어넣어서 내 안에 말씀이 글자가 아니라 실제로 잉어처럼 펄펄 뛰고 있다는 것을 짧은 순간 느낄 때 감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만 살았는 줄 알았는데 주님도 살아 계시고 주님의 말씀도 살아 계시고 십자가의 능력도 살아 있어 철없는 우리에게 늘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늘 기쁨으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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