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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22:01:56 조회 : 502         
사무엘상 39강( 믿음없음) , 마태복음 101강 (쳐내기) 18062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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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115.♡.251.218) 18-07-26 19:26 
믿음 없음 (삼상 14장1-6절)
대전- 39강

 이근호


2018년 6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4:1-6


 (삼상 14: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삼상 14: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삼상 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삼상 14: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삼상 14: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 전쟁 중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전쟁을 하는데 전쟁을 왜 하느냐 하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가치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전쟁은 무산이다. 전부 평탄하게 만들어 버려요. 너 잘났다 내 잘났다가 전부 상실되는 만약에 한국에 전쟁이 없고 평화롭다면 비온 뒤의 우후죽순 같이 잘났다 하겠지요. 만약이 북한이 쳐들어와 해 폭탄 터뜨려 버리면 남자들은 군복 입어야 되고 여지들은 병기 공장에서 일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쟁이 없을 때 남하고 견주던 것이 무의미하게 되지요. 그런데 조용하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여기니까 갑자기 뭐가 부각되냐 하면 나는 너보다 잘났다가 부각되는 겁니다.

아무 일 없으니까 마치 자기 덕으로 자기가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 가치를 높여 버리면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예민해지기 시작해요. 조금만 자기를 건드리면 와락 화를 내게 되지요. 왜냐하면 본인이 하는 일이 평화로운 때는 별 지장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애쓰고 행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을 환경이 제공해 주는 겁니다. 열심을 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환경. 평화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 공동의 적을 맞닥드려야 되요. 평화 시에는 나 말고 나에게 대들면 전부 나의 사적인 적이 되지만 전쟁 시에는 너와 나의 다툼을 잠시 미뤄야 되고 접어야 되요.


공동의 막강한 적들이 오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전쟁을 일으키신다는 것은 결국 뭐를 의미하냐 하면 너와 나중 누가 의로우냐 잘났느냐 누가 훌륭했는가? 누가 실수가 없었는가? 누가 옳게 행동 했는가?의 비교 자체가 전부 무산 되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공동의 적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네가 나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적을 공동적으로 바라보면서 결합되는 행동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 중이라고 이야기 했고 전쟁에서의 적은 성령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알려 줍니다. 세상 신.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이다라고 해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이 우리 공동의 적이라면 영적 존재를 공동의 적이라고 인식하는 그 집단이야말로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교회하자고 뭉쳐봤자 옆에 교회와 라이벌이 되어 버려요. 교회 집안싸움에서 교회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가치를 무신 시키지 않고 있어요. 사도 바울이 세상 신을 적으로 삼을 때는 달리 이야기 하게 되면 세상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겁니다. 세상 신이니까 세상 신은 그냥 혼자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뭔가 지배하고 통치해야 될 대상 들이 있을 거에요.

세상 신이 그냥 혼자서 되는 게 아니고 뭔가 구체적으로 다스리고 자기 손 아귀로 줬다 폈다하는 업적을 발휘하고 있는 신이 세상 신이다는 말이죠. 세상 신은 현장감을 가지고 있어요. 현장감이란 것은 현재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느껴지고 지는 것, 사도 바울은 세상을 제배하는 세상 신과 싸우자는 말은 세상은 자기 뜻대로 안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 배후에 악마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으니까 그 통치하에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갇혀있는 거지요. 갇혀있고 닫혀 있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현장감을 반드시 드러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시선이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로 보다가 갑자기 세상 신이 공동의 적이 되어 버리면 너와 나를 볼 필요가 없지요. 그동안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원리 같은 것이 있는 데 우연히 만나는 이웃이나 식구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모르는 식구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들을 보면 얼마나 세상 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좋은 재료가 됩니까? 그렇지요? 주변에 안 믿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 그들의 목적이나 삶의 태도나 삶의 의미가 세상 신이 배후에 작용하는 중이에요. 식구 붙들고 싸울 필요 없어요. 식구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거든요.


욥기서 1장부터 보면 욥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과 사단의 이야기부터 나와요. 1장 빼고 나머지는 욥의 현장감을 갖고 있어요. 욥이 고난 받고 친구들이 등장했고 아내가 남편에게 불평했고 이런 이야기가 죽 나와서 1장 빼놓고 이야기 하게 되면 그래 고난 받으면 구원 받는 거야! 이란 식으로 또 자기 개인 적인 자기 잘남과 현재 자기 모습의 정당성, 이런 것을 뽑아내는데 1장을 딱 보면 인간에게 어떻게 챙길 수 있는 여지를 안줘요, 왜냐하면 1장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 사단의 게임에 말려 든 거에요. 일방적으로 인간하고 의논한 적도 없이.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우리 사는 것, 우리의 원대로 되는 게 아니고 태어나는 것도 우리의 뜻대로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뭔가 내기하고 게임 즐기고 있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예수님과 악마의 게임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다뤄지고 있는 겁니다. 1장을 빼놓으면 인간들끼리 잡는 거에요. 난 의로와! 넌 의롭지 않아 하며 싸우는 겁니다. 1장을 보면 그런 싸움이 주님 보시기에 가당치도 않은, 삐지고 토라지고 이 참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나서는 결국 이것은 세상 신이 인간에게 그동안 세뇌시킨 사는 데 원리가 되게 했어요. 네 잘남은 네가 챙겨야지! 챙길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네 잘남과 네가 사는 행복은 네가 챙겨야지 아무나 안 챙겨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적 자체를 인간으로 하여금 나를 위한 세상이라고 그 안에 동결시켜 버렸어요. 세상에서 난 손해 보기 싫다. 지금 세상 신에게 붙잡혀 사는 인간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하다 보니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울고불고 하는 이유들을 그 근거들을 한번 추려 보세요. 무엇 때문에 울었고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십자가 생각하면서 울고 웃었어요? 아니지요. 자존심이 아니에요? 나를 위한 나의 싸움이 아니 였습니까? 그거잖아요. 그것을 유일한 현장성으로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실감나는 현장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현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이에요. 그 전쟁의 이야기가 지금 사무엘상 14장에서 시작됩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었어요. 대립하고 있는데 사울은 숫자가 몇 명 되지 않아요. 여호수아 같은 경우엘 보면 이방 민족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숫자를 넉넉하게 주고 싸우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방 신들이 하는 원리와 이스라엘이 하는 전쟁의 원리가 가르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방민족들은 자기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 싸울 때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무기 될 만한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 가?

무기 될 만한 것으로 싸우는데 무기로 싸울 때는 목적이 있어요. 뭐냐하면 자기 보호입니다. 나를 안전하게 하게 보호하는 거에요. 물론 식구들을 보호하고 자존심을 보호하고 있지만 결국은 로마서 10장 3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 의로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당했다. 난 도저히 이런 상황을 못 참겠다. 그런 굴욕을 당해가며 살고 싶은 마음 없다. 난 싸워야겠다. 무엇을 위하여? 난 정당했노라! 난 옳았노라! 이런 대우 받을 존재가 아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나에게 함부로 대드냐 이런 거지요.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공격 할 때 글들의 신은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신이에요.

자기를 위해서 필요했던 신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 뜻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했던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과 모든 인간과의 싸움이에요.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이스라엘은 적을 이길 생각은 하지 말고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고 져야 하는 겁니다. 본인 스스로.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적을 이기려 할 때 그 적은 너희 눈에는 이방 민족으로 보이냐? 내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승리 할 때 나는 잘 났다가 되잖아요. 그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바가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요냐 하면 창세기 32장에 나와요. 야곱이 에서를 상대로 싸우려 했는데 나중에 저녁 지나 새벽에 보니까 자기가 밤새도록 누구와 싸웠습니까? 자기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그 하나님과 싸웠어요. 그러면 축복을 주신다는 그 하나님의 원수가 누굽니까? 축복 받았다고 우기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야곱 언약이에요.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그러한 의식의 끝은 하나님을 죽이는 거에요. 하나님과 대판 싸우는 겁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나에게 대든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은 아닐 것이라고 여는 거에요.


왜 하나님은 나의 편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차마 죽이려고 달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 망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본 거에요. 인생을 사는 데 모든 망신거리를 주면서 살도록 하시는 것은 절대로 좋으신 하나님이 내린 조는 아닐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지 결국 자기가 자기를 지키겠다는 일념이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분명이 이야기 하지만 자기가 아직도 쓰레기인 것을 모르면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쓰레기는 가치가 없는 거에요. 에스겔 30장에서는 네가 바짝 마른 뼈이다. 그냥 뼈도 아닌 희망 없는 바짝 마른 뼈다는 말이죠.

바짝 마른 뼈는 계속해서 바짝 말라 있어야 되요. 갑자기 거기에 화장하고 메이크업하면 안 됩니다. 이왕 바짝 마른 뼈이지만 이쁘기는 하다 이러면 안되요. 공동의 적 앞에서 악마를 이기는 재료가 되는 것은 일체 내가 가진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기도나 헌신이나 순종이나 선교한 것이라든지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십자가 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먼저 십자가 앞에서 무기랍시고 자랑할 만한 것들 그것은 가까운 쓰레기통에 다 집어 넣어버려야 되요. 기도해서 자식 잘 키운 것, 기도해서 가족 다 전도한 것, 쓰레기통에 다 집어 넣어버려야 되요.


지금 주님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잘남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잘남의 전쟁 앞에 누가 적이 되겠어요? 바로 주님이 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예수님의 12제자들 다 도망갔지요. 도망갔다는 말은 그동안, 3년 동안 누구의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까? 주님을 위한 전쟁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전쟁하려고 자기편으로 열심히 예수님을 끌어당긴 겁니다. 그런데 막상 최후의 전쟁에선 다 도망쳤잖아요. 남아 있는 군사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대접했던 세 마리아도 엄마까지라도 예수님을 전혀 이해 못했어요.

오늘 본문의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대치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지금 겁먹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 수가 너무 많으니까 약간이라면 용기를 더 해서 의기충천으로 버틸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숫자가 모자라도 너무 모자라는 거에요. 이미 전쟁하기 전부터 패배 한거나 다름없는 거에요. 이렇게 이스라엘이 기죽어 있고 기눌려 있다는 자체가 주의 일에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의외로 나는 주의 일을 못해!라는 것이 주의 일에 본격적인 시작이 되는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나댈 때가 오히려 주의 일이 아니에요. 여기사 주의 일과 나의 일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되요.


흔히 교회에서 기도하고 봉사할 때 주의 일과 나의 일을 구분 못해서 거기다 나의 일을 해놓고 겸손 붙이면 주의 일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됐습니다를 붙이면 주의 일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되려면 우리 자신이 할 때마다 뭘 느끼냐 하면 내가 점점 더 쓰레기임을 분명해 짐을 느낄 때 일하고 있으면서도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망나니짓을 하고 있음을 점점 더 느끼는 것. 그것이 주님의 주도하게 쫄다구로 일하고 있는 거에요. 우린 공동의 적 앞에 있다 했어요. 너와 나의 싸움이 아닌.


만약에 주의 일을 빙자해서 나의 일을 해버리면 누가 적이냐 하면 나는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는데 나가 하는 긴긴 세월의 가치를 한 번에 작살 낼 때 갑자기 어떻게 합니까? 화가 일어나고 분노가 일어나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를 했잖아요. 어디가 아픈가가 문제가 아니고 어디서 화나는 가가 문제라고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아파도 전신병자이고 아프지 않아도 정신병자에요. 더 중요한 정신병자인 것은 감추고 허리 아프고 감기 걸렸다고. 그건 감기 걸린 정신병자이고 감기 안 걸린 정신병자에요. 정신병자란 뭐냐하면 남네게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정신병자에요.

생각해 보세요. 정신병자라 하면 쓰레기가 같은 쓰레기를 보고 비교하는 거에요. 쓰레기장이 있잖아요. 쓰레기장이 있는데 6월 26일 아침에 눈뜨고 보니까 옆에 누가 있거든요. 라면 봉지 쓰레기가 있어요. 자기는 젓가락 쓰레기 이면서 라면 봉지를 보고 자기는 아직 쓸모 있다고 자랑 질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같이 어디에 있는 겁니까? 같은 쓰레기 더미에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젓가락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하면 쓰레기끼리 바른 교회를 하자는 겁니다. 쓰레기는 쓰레기다울 때가 가장 주의 일이 되요. 쓰레기가 자기의 경험대로 쓰레기가 아니 사람 되는 것은 세상 신이 평생을 통해 우리에게 집어 넣어준 의식이에요.

장래는 네 하기 나름이라고 장래에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낮 설교에서도 그랬잖아요.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고, 인간은 바뀌지 않아요. 그러면 블레셋과 이스라엘 가운데서 블레셋이 더 의기양양 한 것은 악마가 블레셋에게 그런 의식을 준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악마가 심어준 블레셋의 의기양양에 이스라엘이 지금 그 앞에서 기죽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블레셋이 상대적으로 기가 살아있는 이우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자기 안전입니다. 인간의 모든 본능은 어디에서 나오는 가? 본인의 것을 본인이 지키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화라는 게 분노라는 게 왜 생길 까요? 내 것 건들지 마라는 거에요. 자기 것 건들지 마라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 때문에 자기 것이 있을까요? 자기의 안정망, 그동안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신경써서 한 거에요. 남자 같으면 가다가 자기 차를 건드리면 화나고 여자 같으면 적금으로 산 옷이라든지 여동생이 와서 자기 선본다고 물어보지도 않고 가져가면 화나지요. 자기의 것을 털끝만큼만 건드려도 화가 나고 이건 물질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과거에 명예나 평소에 감추고 싶었던 과거 내력, 그리고 스스로도 고쳐지지 않는 성격을 누가 험담하게 되면 화가 나요. 그래서 인간은 화 날 요건으로 채워져 있다고 보면 되요.


베게 안에는 칼로 찢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었지요? 작은 스펀지 같은 게 들어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속에는 뭐가들어 있습니까? 나를 지킬 만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했냐하면 배설물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생각나는데 변비 약 광고 대사 중에 “하늘이 그레이 색이야!”라며 제발 빠져 나오라고 짜증내는 게 있어요. 이 약을 먹으면 시원하게 빠져 나온다는 거에요. 성도가 쏟아 내야 하는 것이 그레이 색을 빼는 거에요.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내 스스로 나의 가치와 의미를 지킬 만한 것들이 배설물같이 차 있으면 이것은 영적 변비입니다.


공동의 적을 모르고 있어요. 평생 자기의 싸움을 한 거에요. 나만을 위한 싸움. 내 것 지키기 위한 싸움. 그것이 지켜졌을 때 안전하게 자기 가치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거에요.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뒤에서 떠들면 화가 나지요. 이것은 뭐냐하면 자기의 안전성 이건 본능입니다. 본능은 이유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 지키려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한번 건드려 볼 까요? 화나지요. 본능이 자기 지키기에요. 자기 지키는 것과 또 자기 지키는 것과 싸우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다? 어느 편도 안 들어 줘요. 둘 다 세상 신으로 사고방식이 영적 변비로 꽉 차 있는데 누굴 도와줍니까?

사무엘상 14장 6절 봅시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지금 보세요. 숫자가 안 되잖아요. 요나단이 몇 명 몰고 쳐들어갑니까? 자기까지 포함해서 군사가 몇 명입니까? 자기까지 포함해서 두 명이에요. 지금 사울 쪽은 수천 명도 안 되는데 겨우 두 명으로 뭘 하겠다는 거에요? (요나단 +1)이 하나님의 일은 시 공간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개시 할 때 시 공간적인 어떤 조건도 아무런 장애 요소가 안되고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님께선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신다? 오직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 일 하시지요. 6절에서는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할례 없는 민족으로 애굽에서 구출 된 민족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오면서 할례를 행한거에요. 할례를 행해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너희를 불렀는데 너희와 하나님의 표징이 바로 할례 받은 것으로 되는 거에요. 오늘 날은 성령 세례 받았나로 표시가 되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아느냐? 믿느냐로 표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 가치나 안전성에 대해 동조 하시겠어요? 안 하시겠어요? 안 하시지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은 안 보이고 막강한 힘을 가진 블레셋만 보이겠지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지금 기죽고 있는 거에요. 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12제자와 더불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요. 풍랑이 일 때 그게 바로 현장감이잖아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은 감각이에요. 현장감이라는 말이에요. 현장감은 우리의 본능을 자극하지요. 아까 말했듯이 본능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습니까? 자기 안정이지요. 자기 안정이니까 본능은 행함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주님을 어떻게 깨우냐 보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가라앉기 때문에 열심히 물 퍼내는 일을 하겠지요.


물을 왜 퍼냅니까? 물을 퍼내야 자기 육체가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주님은 믿음 없음으로 보시는 거에요.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안 일어났으면 제자들은 믿음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었겠지요. 풍랑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관심 없고 본능적으로 이성적인 거 말고 본능적으로 인간은 자기 보호에요. 이유 달 것도 없어요. 그러면 자기 보호 하는 것이 믿음 입니까? 믿음 없음이지요. 예수님이 깨어 나셔서 믿음 없음으로 일괄적으로 평가를 내리시는데 믿음 없다는 기준이 뭐냐하면 너희는 복음을 위한 존재라는 거에요. 복음을 나타내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라는 거에요.

그런데 배에 물이 들어와서 물 퍼내는 그 일은 믿음 없는 행위가 되는 거에요. 믿음 없음이 복음을 위해서 믿음 없는 존재가 되야 된다는 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보호하려는 행위는 믿음 없는 행위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12제자를 뽑은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 없음을 아는 것으로 구원 받아요. 내가 믿음 없음을 아는 것으로 왜냐하면 믿음을 가져 버리면 이것도 하나의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은 갖는 게 아니에요. 복음을 가져 버리면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된다고요.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경유해서 결국은 나는 복음 알아서 구원됐다는 자기 보호 본능에 충실한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오면서 믿음 있는 자의 모델인양 생각하는 데 그건 평생 현장감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 위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구차한 이유와 변명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 구차한 이유와 변명마저 나의 의를 지키려는 본능애서 나온 것이라 그래요. 믿음 아니까 이젠 그만 괴롭히세요라는 것이 정말 믿음 아는 것일까요? 믿음 모르는 거지요. 남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믿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지요. 같은 쓰레기장 안에서 짜장면 묻은 나무젓가락이 왜 라면 껍데기를 보고 시기하고 질투합니까?

월드컵 16강에 일본은 들어가고 한국은 못 들어갔다면 왜 축구 팬들은 시기하고 질투합니까? 떨어지려면 다 떨어져야 하는데 너희는 왜 올라가느냐? 내 애는 서울 대학 떨어 졌는데 옆에 있는 애는 붙었다면 왜 시기 나야 합니까? 이게 번부 자기 보호에서 나오는 거에요. 성경은 간단해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전혀 우리는 현장감 때문에 안 믿어요.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까 화가 나잖아요. 화나니까 누굴 찾냐 하면 기존 교회의 나보다 더 믿지 않는 사람을 찾아 견주는 거에요. 저거는 믿음도 없어! 왜 그렇게 견주어야 되지요? 쓰레기가 왜 쓰레기와 비교합니까?

차라리 약을 올리며 너는 아직 죄인 안 돼봤어! 그런 것으로 약을 올리세요.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 보세요.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잖아요. 얼마 전에 종영된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그 드라마를 보면 현대에 직장 생활하며 살아가는 남자들, 망했던 남자들, 일용직하는 남자들과 아침에 축구모임 하는 남자들, 그냥 우리 시대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자기 청춘 때 꿈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니까 그 괴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어떤 남자는 머리 깎고 절에 간 사람도 있어요. 술집하는 자기 애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머리 깎고 절에 가니까 절에 가서 니가 나를 잊고 득도하는가 보자! 땡깡 부렸어요.


그들은 하루 일과 보내고 어디로 모이냐 하면 술집으로 술로 달래요. 왜 그럴까요? 술을 먹으면 젊어서 내 모습을 그나마 건질 수 있기 때문에 개기 부리고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 같거든요. 술 힘을 빌려서 잠시 술 취한 동안은 나는 아직 안 죽었어! 라는 티를 내는 거에요. 남자들이 술 먹고 짐에 가서 행패 부리는 짓이 여자를 학대하잖아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그 말은 처음 결혼 할 때부터 남편에게 아내란 짓밟기 위한 속마음을 가지고 결혼한 거에요.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감은 뭐냐하면 돈 벌어다 주는 기계이고 돈 벌어다 줘도 욕만 얻어먹게 되기 때문에 그 괴리가 잠시 술 먹고 나는 하늘이고 너는 땅이야! 라는 술 취해있는 만큼은 행복이라는 겁니다.


다 나와! 하는 겁니다. 여자가 화나서 술 쳐 먹었거든 디비 자! 하며 갑자기 현실 모드로 돌아와서 디비 자고 난 뒤에 아내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이니 힘내라고 콩나물 국 먹이고 빨리 돈 벌러 갓! 문제는 결혼도 안하면 그럴 남자도 없다는 것,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고 믿음 없음을 유지하세요. 믿음은 우리에겐 없는 겁니다. 우리가 가질 믿음은 아예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믿지 마세요. 믿음이 원래 없는 거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없어야 되요. 믿음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자꾸 믿음 소망 사랑을 자기에게 자꾸 억지로 붙이는 겁니다. 뭐로? 행함으로. 점점 더 자기의 본색을 가리고 있어요.


자기를 감추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선 그것이 안 들키는데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전쟁을 일으키시죠. 전쟁이 일어나면 나와 너 너와 나 사이에서 비교 했던 기준은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무산 되요. 전쟁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선 무산됩니다. 6절에서 보면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두 사람이 있지만 병기 든 자가 달랑 하나이지요? 단 하나만 있어도 충분해요.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이길 수 있는 이유가 할례 받지 않은 민족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언약 밖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요나단은 뭐를 돌파 하냐 하면


 요나단도 믿음 없는 세계니까 본능의 세계지요. 본능은 뭐에 충실 한다? 자기 보호이지요. 그래서 벌벌 떨고 있는데 여기서 시 공간을 뚫고 나와 버리면 할례 언약, 다시 말해 할례 있고 없고 로서 전쟁은 결판난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에 즉 인간이 생각하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숫자가 누가 더 많으냐 누가 더 쓸만한 무기를 가졌느냐? 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이라는 끈의 유무, 있음과 없음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할례 받지 않은 것을 알고 튀어 나오는 순간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현장감이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블레셋이 자기들끼리 찔러 죽였어요.


그덧은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겁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3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악한 사람이 최종 승자가 아니고 하나가 올라서면 서로 발목 잡고 당기고 서로 속고 속이죠. 속였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속는 절차가 남아 있어요. 자기들끼리 속고 속이는 거에요. 처음부터 승자라는 것이 성립 안 됩니다. 이 세상 인간들끼리는, 그래서 13절 이후에 그러니까 성경을 보라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 세상 사람들끼리 싸우는 방식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끼리 싸우는 방식은 누가 잘났느냐, 누가 옳았느냐, 누가 정당했느냐, 나는 누구에게 욕 얻어 먹을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욕을 얻어먹어 분통 터진다. 이런 싸움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서의 싸움은 그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전부 쓰레기라는 말이죠. 바짝 마른 뼈에요. 모든 인간은 믿음이 없는 거에요. 지금 믿음 없는 자를 구원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같으면 할례 언약을 통해서 요나단이 보고자 한 것은 기존의 현재 현장감 말고 하나님의 전쟁이 일어났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나타나지 않았을 현장. 일으키셨기 때문에 일어난 희한한 현장.


블레셋은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이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언약대로만 움직이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려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 본인 자체가 언약에 의해서 쓰레기 같은 목숨이라도 거기에 걸어야 되지요.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도 바울은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고 오직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홀로 사는 여자가 자식이 육체의 자녀보다 많다는 나처럼 이 세상에서 누굴 이겼다는 소릴 하지 말고 복음이 나를 통해서 계속 승리한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여라 말이죠. 그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가 자기의 안전 위주가 아니고.


복음이 복음답게 펼쳐질 때 사람 대 사람으로 모이는 이 현실 말고 하나님이 개입하고 말씀이 완성되는 새로운 현실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주님이 하는 영적 전쟁터가 오늘 대전 바닥이고 대구이고 서울이고 이 바닥입니다. 주님이 홀로 하시는 전쟁에서 우리는 장애물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장애물인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으로 연결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이미 승자임을 이 세상에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가치 없는, 믿음 없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매일 같이 우리는 포기하게 됩니다.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태어난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복음을 앞장세우는 것 외에는 다른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어느 강의에서 했나 기억이 안다지만 매일 같이 우리는 자살해야 되요. 다음에 여기가 아디이지 하고 새로 눈떠야 합니다. 자살을 하게 되면 지난 과거가 내 발목을 안 잡아요. 과거가 더불어 나와 죽었기 때문에 지난 과거의 다툼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은 매일 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매일 안 죽었다는 뜻은 매일 안 죽고 싶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긴긴 과거의 역사가 지금의 이쁘장한, 지금의 대한한, 위대한, 훌륭한, 착한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갓이 아까워서라도 지난 과거를 무산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에요.


그러나 성령께서 말씀을 주게 되면 너를 위한 현실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현실인 것을 다시한번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평화로운 시대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대가 아니에요. 평화로울수록 주님 앞에서 생각하고 남들 보다 내가 얼마나 더 휼륭하냐를 나보다 못난 사람을 통해서 자기가 돋보이는 식으로 하기 쉬워요. 그런데 갑자기 북한 핵을 폐기한다 해놓고 터트리도록 폐기해서 대전 바닥에 떨어지게 되면 어제 콩나물 값 깎으려던 아주머니와의 싸움은 의미 없는 거에요. 대전에 폭탄 터지면 층간 싸움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다 쓰레기장인데.

이것이 바로 언약의 복음만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필히 그러한 감각을 우리에게 갖게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115.♡.251.218) 18-07-26 19:36 
쳐내기 (마 25장 14절-46절)
대전- 101강

 이근호


2018년 6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14-46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 25: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 할 새
(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하고
(마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하고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지난 시간에 했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를 구분 짓는 것에 똑같은 취지로 이 말씀을 하신 거에요. 처음부터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고 다섯 처녀의 존재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다섯 처녀를 대비시키는 겁니다. 천국은 25장 1절을 보면 그 때에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은~ 쳐 내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쳐 내는 작업이 없으면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에요.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준비하라 그냥 이게 아니라 비교시키는 겁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다섯 처녀를 대비시키는 겁니다.


대비 시켜 놓고 기름이라는 이 요소가 처녀라는 요소를 온전히 지배하는 원리가 되는 겁니다. 기름을 준비하라는 것은 누구의 명령에서 나왔습니까? 주님의 명령에서 나왔지요. 아까 첫째 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천국이라는 것은 주님의 지시 또는 명령에 의해서 새롭게 구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름이라는 요소는 인간이 준비 할 수 있다고 미리 의견을 던진 것이 아니지요. 기름 준비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는 것으로 합의 봅시다. 이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천국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가는 거에요. 그래서 천국을 이루는 모든 기준이나 요건은 주님께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이 준비 할 수 있다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하나를 뽑아낸 것이 되요. 그렇게 되면 천국은 주님 홀로 이우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 + 인간의 협조)가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 할 때 기름을 준비했다 안 했다의 기준으로 제가 기름이야기를 했지만 기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신랑 올 때 준비된 기름이어야 되거든요.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를 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까? 아니지요. 신랑이 왔을 때 난 기름 준비 안 할거야 라고 오기 부리는 처녀는 없어요.


신랑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기름 같은 정도는 준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나 마음가짐. 그 정도는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들은 탈락되었어요. 주님의 오실 타이밍에 준비 못한 것을 본인들이 뒤늦게 라도 기름 준비 하겠다는 말은 본인들은 그 정도는 행할 수 있는데 하는 거에요. (주님은) 인간들이 그 정도는 행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천국 가는 기준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기준은 주님의 타이밍이 결정적인 거에요. 이 말은 천국이라는 것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상관없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건지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 한 쳐 낸다는 것이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주님의 기름 준비하는 것과 달란트 비유 말씀을 할 때 우린 어느 편에 서야 되요? 천국은 쳐 내는 것이라면 우린 주님 앞에 책망 받는 쪽에 서 있어야 되지요. 그래야 천국이 어떻게 하는 가를 아는 겁니다. 주께서 천국의 이야기를 쳐 내는 식으로 하기 때문에 쳐 낼 때 비로소 천국의 기준이 쳐 냄을 당하면서 비로소 아는 거에요. 쳐내기 전까지는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땅히 천국 갈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게 되는 겁니다. 우기게 되면 그 기준이 나중에 ~까? 물음표로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하고 물음 해요.

마태복음 25장 42절부터 누가 읽어보세요. 44절 마지막에 ~ 아니 하더이까로 묻지요. 물었다는 말은 왜 주님은 내가 할 수 있는 기준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반발이지요. 주께서 시키면 내가 안 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시키면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 시키셨습니까? 나는 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는데 언제 주님이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물 달라 언제 제게 이야기 했습니까? 이야기도 안하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구원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물어요. “제가 언제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해요.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그러니까 구원 된 사람과 구원 안 된 사람 둘 다 물음표로 주님의 구원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물음표로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천국을 만드실 때 인간이 준비한 기준은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상하거나 타협해서 사람을 건질 의도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쳐낼 때 사람들은 억울할까요? 억울하지 않을까요? 쳐냄을 당한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억울함을 품고 지옥에 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무엇을 유발시킨다? 기어이 억울함을 유발시키는 쪽으로 천국을 구성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억울함을 당한 쪽이 아닌 쳐냄을 당한 쪽에 서라 했지요. 그러면 지옥가면서 억울함을 당할 때는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게 아니에요. 그 이유를 자세히 봐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달란트 비유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쳐냄을 당할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말이죠. 사람이 누구에게 거부당할 때 가만있지 안 잖아요. 왜 날 거부하는 거에요? 왜 나를 싫어하냐? 라는 손오공의 저팔계(만화도) 있잖아요. 돼지인데 왜 나를 싫어하냐? 싫어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잖아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지옥가도 괜찮아요. 왜 그 이유를 알았으니까 그런데 천국 가는 것에 쳐 냄을 당할 때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이유가 없어요.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본문 24절부터 다시 보면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되어 있지요. 아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해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분리되고 쳐 냄을 당했지요. 그래서 이것을 해석 할 때 주인이 돌아 왔을 때 쳐냄을 당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변명이 있었잖아요. 변명을 분석하고 동조하면서 생각해 봐야 해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에요. 첫 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돈을 없애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 그 돈은 누구의 돈이다? 자기 돈이다? 주인의 돈임을 알았다는 것. 세 번째 그 주인은 만만히 볼 분이 아닌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다.


여기서 보세요. 주인이 달란트를 주면서 종들에게 이 돈을 가지고 장사해서 이윤을 남기라고 지시 했어요? 안 했어요? 안했어요. 한 적이 없어요. 여기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칭찬한 이유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쳐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겁니다. 쳐내는 기준을 일방적으로 주인이 쳐 낸 자체를 위해서, 쳐 내기 위한 의도를 위해서 그 의도 때문에 일방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하면 쳐 낸다하는 것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천국의 기준이 있어요? 없어요? 천국의 기준은 없습니다. 기준 없이 구원받아요.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것이 나중에 끝났을 때에 지옥에 갈 만하고 천국에 갈 만한 것은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고 난 뒤에 거기에 부합되는 기준을 새삼스럽게 만들어 내어 알려주는 거에요. 왜냐하면 지옥 간 사람들의 특징들이 뭐냐하면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거에요. 요한복음 20장에 나오지요. 지옥에 간 사람들의 특징들이 뭐냐하면 행함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천국에 간 사람은 행함이 착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어요?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간 거에요. 책은 달랑 두 권 밖에 없어요. 나쁜 행함 책, 좋은 행함 책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행함 책에 있는 사람은 다 지옥가요.


유황불로 갑니다. 지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냥 지옥 불이에요. 다른 하나는 생명책에 기록 돼서 천국 가는 거에요. 천국에 간다면 내가 무엇을 행해서 천국에 가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간 거에요. 행함 없이 천국에 간 거에요. 그 행함을 요한복음 20장에서는 주님의 행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선한 일은 주님의 행함만이 선한일이에요. 이 선한 일을 가지고 행한 대로 네가 구원받으리라 요한 계시록 22장에 나와요. 20장에 보면 그 사람이 행한 대로 구원받는 것은 바로 무엇을 증거 하느냐? 요한 계시록 22장에 제일 마지막에 보면 누구보고 오라 했습니까?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제 스케줄이 아니잖아요. 제 스케줄에 따라서 제가 살아가는 게 아니 잖아요라는 뜻이에요. 주님의 스케줄이에요. 스케줄대로 일관되게 진행하게 되면 그게 행복한 거죠. 만약에 내가 미워하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 500억을 벌었습니다. 그때 신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그것도 주의 은혜로 돈 벌었다고 하면 약 오르지요. 화나지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왜 화 난다고 했습니까? 자기 보호. 자기 안전 때문에 그래요. 그때 그 사람이 뭘 놓치고 있냐 하면 주님이 주신 복음, 십자가 피가 500억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깜박 그 순간 잊어버린 거에요.


500억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500억 보다 더 귀한 것을 받았는데 그 귀한 것 받은 것을 순간 묵사발로 만들어 버려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에서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뭐냐하면 주의 십자가 피 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재물이 500억 아니라 5000억이라 해도 그것은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한 것을 훼방하는 방해 요소이기 때문에 전혀 부럽지 않아야 되지요? 그래야 앞뒤의 논리가 맞는 이야기가 되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고래고래 노래 불러 놓고


 그러면 주님께서 정말 세상 사람들이 거부 할 수 밖에 없는 요소를 자꾸 눈에 들어오게 하고 눈에 띄게 하는 거에요. 동창생이 갑자기 500억 벌었다는 소리를 왜 듣게 하셨을까요? 자기가 아는 것과 실제가 일치되는 것을 계속 확인해 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십자가 피로 기뻐하고 기도원에서 내려오다 자빠져서 뼈 부러져서 3주가 나왔다. 기뻐해야 되지요. 내 목숨보다 복음이 더 중요하구나! 또다시 느끼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와 관계를 맺잖아요. 관계를 지으면 그 사람이 내개 의미 있게 다가와요. 그러다 그 사람이 떠나가면 무척 서운하고 아깝다는 생각을 해요.


그 말은 주님의 복음보다도 내가 아는 사람이 많은 어장 관리한다 하지요. 관리해서 내 위치가 위장이 이 정도 대단하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뒷 받침해주니까 으쓱 한거에요. 왜 작은 교회에 안 가고 큰 교회로 갑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에 갔더니 규모가 있어서 교인도 좀 있는 줄 알았지요. 가보니까 주일 날 예배 시간인데 교인이 달랑 두 명 이었어요. 앞에 목사님 한 분과 뒤에 사모님 한분. 그러면 씨겁하고 나오지요. (웃음) 만약에 끝나고 식사하고 가라고 해서 붙잡혀 버리면 교회에 처음 나와서 자기 과거가 다 털린다니까요. 어디서 무얼하고 살았는지, 왜 목사님 사모님은 너무 반가우니까 나쁜 의도가 아니라

 이제 등록 교인 한 명으로 시작이 되거든요.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 데려오면 두 세명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껏 사랑을 해줘야 되거든요. 만약에 교인 수가 한 다섯 명 된다해도 씨겁하는 거에요. 그런데 교인수가 한 5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고 안심 푹 놓고 왔다 갔다 해요. 누가 과거 묻는 사람도 없고 헌금 얼마 내냐고 묻는 사람도 없고 붙잡고 식사하고 가라는 귀찮은 일도 없고 30분 늦게 와도 괜찮고 헌금도 안내고 국수 한 그릇 먹고 가도 뭐라 안고 자도 괜찮고 자기 마음대로에요. 교회 등록 했다고 해서 안 나가도 교회 주차장은 사적으로 사용해도 되고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거리가 많으니까

5천 명 넘는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가 커지는 거에요. 이유 없이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뭔가 이유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 이유를 부님께서 내치는 이유로 사용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유가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그 이유 때문에 너는 지옥에 가야한다는 이 말입니다. 천국은 지옥 갈 이유가 있음에도 천국가게 하시거든요. 지옥 갈 이유 밖에 없어요.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데 기준에 해당되는 사항이 없게 하는 거에요. 그것이 아까 말한 복음을 위하여와 나를 위하여가 항상 대조 됩니다. 나를 위해서에 인간은 들어가야 되요.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나를 위해 태어나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와 복음을 위하여가 둘 사이에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 가? 단절 되야 되요. 나를 위해서 백날 기도해 봐야 그것은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고 다시 나에게도 돌아오게 되어 있거든요. 주일날도 이야기 했지만 어떻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머리에 기름 바르려고 금식했어요? 금식하는 것을 티 내지 말라, 티내려고 금식하는 거에요. 바싹 야윈 게 안 보이냐 이런 식으로 티내려고 해요. 인간의 행함은, 그 과거는 인간의 기억엔 두 가지가 있어요.


해마라는 두뇌와 편도체가 있는 것이 기억의 활성화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번 경험한 것은 저장되기 때문에 자기 과거를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유기체는 자기 모호와 보호 본능으로 안전을 위해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성적으로 말리지도 전에 성급하게 먼저 튀어 나온다는 말이에요. 믿음이 있다하더라도 건드리면 왈칵 화를 내요. 따라서 주님이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그 선에서 못 벗어난다는 기준을 제시하시고 자기 본능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가지고 주님은 쳐 낼 수밖에 없는 당위성으로 기준의 내용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참고]
※편도체[amygdala]는 작은 구형의 아몬드 같은 모양으로 공포나 화 등 감정과 관련된 학습 과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서와 관련된 기억, 즉 정서적 학습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감정을 조절하고, 공포에 대한 학습 및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마[hippocampus] 해마는 뇌의 다른 부위로 신호를 전달하는 중요한 원심성 신경섬유 역할을 한다. 학습과 새로운 것의 인식역할을 하며 기억에 관여하며 감정 행동 및 일부 운동을 조절한다. 둘레계통에 포함되며 장기 기억과 공간 개념, 감정적인 행동을 조절하며 해마머리는 편도의 뒤와 맞닿아 있다.


너는 네 본능에서 못 벗어나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쳐내도 할 말이 없다라는 거에요. 군소리 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러면 다섯 달란트 받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떻게 칭찬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본능 상 칭찬을 받을 짓을 못해요. 인간의 본능은 자기 위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칭찬 받은 사람도 본인이 보기에도 기이해요. 그래서 묻습니다. 제가 언제 주를 위해 먹을 것을 드렸습니까?라고, 나는 나라는 인간을 아는데 이기주의와 잘남, 안정성을 폐기하고 주를 위해 물을 드리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아는데 어떻게 이런 내가 주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준적이 있습니까?


나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됩니다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이건 천국에 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지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게 물어요. 묻지요. 묻는다는 말은 자랑 질하는 거에요? 자랑할만 한 것이 하나 없는데 왜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칭찬은 일방적이어야 되요. 칭찬을 예상하면 안되요. 그것을 내쳐야 될 지옥 갈 사람들의 행세입니다. 평소에 피아노 좀 친다는 소릴 들어서 보니까 교회에 교인 수가 별로 없어 반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목사님 제가 반주해도 됩니까?라고 물어서 좋지요 해서 반주를 했다.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래서 그 소리가 좋아서 교인들이 흐믓해 하니까 그날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여러분 마태목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있는데 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피아노 치는 재능을 받았으니까 그 재능을 썩히지 않고 교회를 위해 해 주니까 얼마나 기쁩니까? 이것은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듯이 그렇게 한 겁니다라고 할 때 그 교회는 통째로 주님 앞에 쳐 냄을 당하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반주자는 피아노 반주를 하므로써 주님께 왜 이렇게 구원 하십니까를 물을 수 에 없는 기회를 부여받은 거에요.


자기가 반주를 해도 죄인이고 안 해도 죄인 나는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을 내가 뻔히 아는 입장에서 구원을 해 주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반주 안 할 때는 죄인이지만 반주를 하게 함으로서 왜 이렇게 구원하십니까의 기회를 부여 받은 거에요. 왜냐하면 반주를 해도 죄인이고 안 해도 죄인이다를 나는 나 밖에 모른다를 내가 뻔히 아는 입장에서 구원을 해 주기 때문에 반주 안 할 때도 죄인이지만 반주하게 함으로서 내가 얼마나 나 위주의 칭찬받고 싶은 생각, 남에게 너는 믿는 자야, 너는 죽어도 천당갈거야라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 심보가 자기 행함을 통해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거에요.


목사가 그렇게 설교하면 안돼요. 오늘 처음 반주했습니다만은 반주해서 구원받는 건 아니죠. 이렇게 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만약에 삐졌다면 그건 설교를 잘하신 거에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몇 달란트를 남겼어요? 다섯 달란트죠. 만약에 다섯 달란트 받았는데 세 달란트를 남겼다면요? 그 사람 생각엔 세 달란트라는 추가가 생겼잖아요. 그런데 지금 주인은 자기가 준 달란트 외의 추가분을 따지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따지는 것 같으면 다섯 달란트가 아니고 네 달란트나 세 달란트나 두 달란트만 남겨도 “아이고! 수고 했다. 하나라도 더 남긴 게 어디야!”남는 장사했는데.

지금 주인은 달란트 얼마를 남긴 것으로 시비 거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두 달란트 받았는데 한 달란트를 남겼다면 책망 받아야 되겠어요? 하나라도 남겼으니 당연히 칭찬 받아야지요. 주인이 원하는 것은 주께서 맡긴 것의 결과가 우리의 수고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맡겨준 달란트를 통해서 너희가 주인께서 달란트를 작용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보여줬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차라리 네가 땅에 묻지 말고 은행에 맡겼으면 이자라도 나오지라고 했거든요. 다시한번 들어 보세요. 그러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은행에 맡겼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그래도 칭찬 받겠어요? 칭찬 받습니다. 왜냐하면 달란트 비유는 많이 남긴 사람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니고 저쪽을 쳐 낼 구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전에 엘리사 선지자 이야기 했지요? 아람 군사가 쳐들어 왔을 때 요아스 왕이 화살을 땅에 몇 번을 쳤습니까? 세 번 쳤지요. 세 번 치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대 여섯 번 쳤으면 왕이 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을 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세 번 치기 전에 다섯 번 치라고 진작이야기 하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번 쳤냐? 다섯 번 쳤냐를 묻는 게 아니에요. 너는 어차피 잘려져 나갈 것이라는 존재인 것을 억지 구실을 만드는 거에요.

억지로라도 지옥 보내 줘야 천국은 인간이 예상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또 한 가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이 멀리 출장 갔을 때 달란트를 남겼지요. 그러면 주인이 다시 출장가며 맡길 때 또 남기겠어요? 안 남기겠어요? 남기는데 전보다 덜 남겼다면 이 사람은 칭찬 못 받고 내 쫓깁니까? 아니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내 쫓길 사람을 쳐 냈기 때문입니다. 기름 준비 할 때도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를 했잖아요. 그래서 신랑과 함께 하는데 기름 준비 안한 다섯 처녀는 기름 준비하고 문 열어 달라고 해도 기름이 뭔데 문 열어 주면 되잖아요.

다섯 명 하고 결혼 하는 것보다 열 명하고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웃음) 기어이 다섯을 쳐 낸다고요. 그러면 기름 준비한 그 다섯 처녀가 신랑하고 싸우는데 네 번째 처녀가 잔소리한다고 쳐 냅니까? 아니지요. 왜냐하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신랑 쪽에선 더 이상 쳐내지 않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목마를 때 마시는 것을 주었다고 한다면 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한 것이 주님은 나를 위해 한 것으로 여겨 줬다면 다음에 다시 예수님이 목마를 때 마시는 것을 안 주었다고 탈락입니까? 아니지요. 천국은 뭐냐하면 기준이에요.


천국은 기준이기 때문에 나와 협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간 뒤 어떻게 탈락합니까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되요. 내가 훌륭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잘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왜 구원 받아놓고 그 짓을 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행할 수 있어서 그런 기준을 제시 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아버지가 있는데 두 아들이 있어요. 한 아들은 재주가 있어요. 사냥을 잘해요. 다른 하나는 조용하게 집에서 책을 본다고 합시다. 아버지가 유언 할 때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물었어요. 둘째에겐 묻지도 않았어요.

편애하죠. 조용히 오라해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먹고 싶다. 사냥한 고기로 요리를 해 오면 내 재산을 네게 다줄께! 만약 대전에 이런 사람 있으면 욕 얻어먹어요. 맏이에게 몰아주려고 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 말을 아내가 엿들었잖아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사냥한 고기로 요리를 해 줬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조건이 그냥 사냥한 고기가 아니라 맏이가 사냥한 고기였습니다. 야곱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야곱이 팔에 털을 감고 형처럼 위장해서 아버지께 갔어요. 맏이 인줄 알고 기쁨으로 축복하고 재산을 다 넘겼어요. 그런데 뒤 늦게 사냥하고 와서 보니까 이미 다 줘버린 거에요.

만약에 우리 같았으면 자기를 속린 아내와 둘째 아들을 혼내겠지요. 아버지를 우습게 본 것을 나무라면서 축복은커녕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니 같은 것은 자식도 아니다 하며 내쳤을 거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의 실수로 재산을 다른 자식에게 줬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재산을 반반 나누던지 해서 나에게 돌리세요라고 하는 것이 에서의 합리적 생각이에요. 당연한 생각이에요. 원래 아버지의 계획이 뭐냐 맏이에게 재산을 다 주는 것이잖아요. 이삭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자기가 생각한 인간적 기준에 하나님의 언약 기준이 일방적으로 덮어버린 거에요.

이것을 이삭이 받아들인 겁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로면 내 뜻을 발휘해야 되요? 안 해야 되요? 성질나는 대로 살아야 되요. 자기 보호하고 지키는 것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야곱도 그런 인간이었고 야곱이 구원 받는 것은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행동하기 이전에 이미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지옥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전에 주님의 결정이 언약을 통해서 아버지를 바꾼거에요. 아버지가 하는 일에 아버지는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요.


채소 같은 건 안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평소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기이한 사실은 아버지의 행동을 뒤 엎어 버리는 주님의 언약, (죄인 + 하나님의 약속) 이것이 뭐냐? 천국의 기준으로 그 현실에 등장한 거에요. 달란트 이야기는 비유이기 때문에 원리의 뭉치에요. 원리의 뭉치라고 하는 것은 달란트의 원리대로 모든 사람을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내겠다는 예수님의 계획을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를 다시 봅시다. 25장 24절에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

이게 바로 주권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구원한다. 그 사상이잖아요. 여기서 뭐가 빠졌습니까? 은해로 구원해 버리면 나는 있는데 하나님이 덮쳐서 구원한다가 되잖아요. 그 중간에 뭐가 빠졌지요? 십자가가 빠졌지요. 내가 있고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자체가 이게 죄가 된다는 거에요. 나는 공짜로 구원 받았다. 이게 죄가 된다니까요. 뭐를 경유하고 이야기 해야지요. 나는 백 날 해도 인간 안되고 은혜로 구원 받았다 이렇게 되야 되요. 자기가 죄인으로 한 요소로써 들어 가줘야 되요. 그런데 내 쫓긴 한 달란트 바당ㅆ던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이야기 한다고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못하는 일이 없으신 거에요. 못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몇 달란트 남겨 봐야 성이 차겠습니까? 다만 내 나름대로 하나라도 주셨으니까 니갓이 내갓이 아니고 주의 것이니까 주님의 속성을 담아서 마음껏 다시 출장 갔다가 오실 때 내가 주님은 이런 분인 줄 알고 달란트를 내밉니다. 달란트 주신 것을 무시하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해서 묻어 놨었습니다. 주님은 그럴 줄 알고 다섯 달란트나 두 달 란트 남기도록 조치하신 거에요. 잘린 자는 이런 변명 하든 저런 변명을 하든 잘리게 되어 있어요.


주여! 저를 봐서라도 내 딸을 구원해 주세요라고 해도 안되요.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아들을 엄마 빽으로도 안 된다니까요. 왜냐하면 엄마도 자기 빽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돼어진 모든 현상은 달란트 비우대로 되어지고 있고 이 현실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구분되듯이 돼야 돼요. 그러면 기준이 뭐냐 기준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쳐 내기 위한 기준 적용입니다. 그 기준에 대해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아하! 내가 남겼기 때문에 칭찬받는구나! 이런 생각을 이 주 사람은 하면 안되지요. 안되고 지옥에 가는 쳐내는 기준이 뭔가 보라는 이야기지요.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책망을 받았는데 이유가 첫째는 전능하신 주인님( 주권사상 ) 둘째는 내 것은 다 주의 것이다. (멋있지요?) 셋째 그는 주인을 두려워했다. (경외) 쉽게 말해 그 가치를 높여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의 기준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이 기준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주는 겁니다. 전능하신 주님도 아니고 내 것은 다 주의 것이다라는 고백도 의미 없고 주를 두려워한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아까 마태복음 25장 37절 이후에“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제가 언제 저는 죄인인데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죄인 일 때는 이유가 있어요. 진짜 죄인은 나 밖에 모르고 내 몸 편하고 안전하고 나만 배부르면 그만 이고 나를 위해 사는 데 어떻게 그것이 주를 위하여 한 것입니까? 라고 이건 겸손이 아니고 진정성 있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결국 양과 염소 가운데 구원 받은 자이거든요. 구원 받은 사람은 뭐를 알고 있어요? 본인이 죄인인 것을 알고 기준을 알아요? 몰라요?

이미 기준을 아는데 이 기준에 대해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의로운 것을 앞에 엮을 수 없다는 것을 구원 받은 사람만이 알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라는 기준에 의해서 나의 의는 조금도 섞여 들어가는 것을 안된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구원 받았기에 아는 거에요. 사도 바울의 말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도 구원 받았기에 그러면 이것을 현실 속에 응용해 봅시다. 달란트 비유의 원리가 뭉텅이로 주님 재림하셔서 이 땅에 오실 때 까지 계속해서 페인트칠을 해버립니다. 어느 한 순간 단 1초라도 기준에서 적용 안되는 시, 공간이 없어요. 다 적용되요.


적용된다면 결국 내가 죄인으로 사는 자체가 뭐냐하면 남긴 것이고 이것이 주님의 작품이고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이 자체가 내 솜씨로는 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이지요. 평생에 주님께 물 한 그릇 대접한 적 없고 돌본 적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당연하게 여길 때 그 사람은 천국 백성이고 화내며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할 때는 그 사람이 뭐를 아냐하면 평소의 내 기준과 사상과는 맞다? 안 맞다? 전혀 안 맞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고 있는 겁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주님께서 이야기 하셨건만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전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십자가 질 때 도망치고 안 해요. 주님의 이런 취지를 몰랐어요. 모르고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하신 말씀을 다시 자기가 자기 힘으로 구원 받지 못하는 입장에서 새롭게 생각하겠지요. 천국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일방적인 자기 행함과 솜씨로 결정짓는 것이고 여기에 지혜로운 처녀도 일방적으로 신랑이 결정짓는 겁니다. 기름을 네 명이 준비한다고 신랑이 오는 게 아니에요. 딱! 택한 백성 다섯 명이 될 때 오는 거에요. 여섯 번째가 끼어들면 안 됩니다. 왜 여섯 번째에겐 해당 사항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요. 아버지가 나에게 보내신 자가 누군지 알아요. 알기 때문에 택한 백성에게만 원리가 적용되는 겁니다.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퍼 부어 놓고 어는 누구도 내가 태어나서 이 만큼 성실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 관리 잘 하며 살았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그럴 소릴 못하도록 하는 기준으로 매일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 현실 속에서 매일 사건을 만듭니다. 현실 속에서 무슨 일이든 예상했던 안 했든 계속 뭔가 부딪힙니다. 그것을 오늘 강의에 적용하면 부딪혔을 때 본능적으로 생기는 것이 뭐냐하면 내 것 챙기기지요?

이번을 통해서 어제까진 괜찮았으니까 열흘 뒤엔 망가지면 안 되겠지! 그러면 내가 정당한 변명을 하고 나 때문에 피해 본 사람은 보상해주면 되겠지! 왜 이 만큼 쌓아 온 탑이 있잖아요. 괜찮은 존재라는 것. 그것을 한꺼번에 부정당하지 낳고 남에게 상대적으로 내가 우월한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굳힐 때 성령이 작용해 버리면 아하! 비로소 나는 내 분수를 알게 되는구나! 결국 이것 밖에 안되는 것이 바로 나의 한계라는 사실, 내 힘으론 백 날 노력해 봐도 구원 될 수 없고 이런 말도 안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주께서 귀한 살과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짧은 순간 깨닫게 됩니다.

깨달아 봐야 몇 초가지 않겠지만 깨닫게 되요. 그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 했지만 다른 사람이 몇 억 벌게 됐다면 그래! 너는 몇 억 벌어라! 이것과 몇 억 버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족히 비교 할 수 없어요. 사도 바울의 자랑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주님의 죽으심에 내 몸을 넘긴다. 성령이 오셔서 낸 몸은 죽음에 넘기우고 죽을 육체에서 뭐가 나오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나에게서 나오게 하시게 성령께서 인도 하시는 겁니다. 그게 자신이 받은 상이고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 당시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저희가 성경을 백독하고 천 독을 해도 모를 이야기를 성령께서 주셔서 천국은 일방적으로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우리를 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이삭이 깨달은 것처럼 천국과 지옥의 전수를 바꾸지 않은 것처럼 주님의 기준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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