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대전강의
2018-08-28 21:45:59 조회 : 480         
사무엘상 41강( 오지마라), 마태복음 103강( 막살았다) 180828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FtQZc5uM9Vk"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0BG4WdOSaPc"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주향(IP:115.♡.251.218) 18-09-30 18:41 
오지마라 (삼상 15장1-24절)
대전- 41강

 이근호


2018년 8월 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1-24


 (삼상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삼상 15: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삼상 15: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 시키니라
(삼상 15: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삼상 15: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삼상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삼상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삼상 15: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무엘 상 15장에 보면 아말렉과 전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데 우리가 만약 이스라엘 입장이라면 고요하고 조용하게 살기를 원했을까요? 말썽 없이 예수님의 인생이 고요했으면 고요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자기들에게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결과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들이 원했던 안정된 생활을 그들은 구원이라고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해이지요. 자기들이 기대하는 행복이라는 것, (행복 = 구원) 이라고 본 겁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주장했지요. 교회에 나와서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교회에 나와서 행복했다면 구원받은 증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행복이나 구원이라는 것은 아무 탈 없는 거에요. 안정되고 여유 있는 생활이겠지요.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 때 없는 사람이 착하게 살 가능성이 많습니까? 있는 사람이 착하게 살 가능성이 많습니까? 있는 사람이지요. 좀 베풀어도 자기의 생활에 지장이 없을 때 착하게 사는 겁니다. 좀 손해 봐도 마음에 평정을 갖는다면 사람들 보기에 대범한 사람처럼 보이지요.

옛날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부자가 차를 긁혀서 5만원 정도 손해 봤다고 해서 울고불고 안하지요. 그런데 하루 일당이 오 만원 되는 사람이 오다가 오 만원을 잊어버렸다. 이건 난리가 나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부자가 그까짓 오 만원 가지고 난리를 피우나 나를 봐! 나는 오 만원 손해 봐도 안정되잖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많이 가진 자가 선해요. 많이 있고 여유 있는 자가 착하지요. 자기 집 옆에 교회가 있다면 교회에 왜 나갈 까요? 이유가 빈 마음으로 가진 안을 거 아니에요. 아무 기대나 욕심 없이 교회에 가진 안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5 라면 교회에 나가고 나서 3이 될 리가 없고 7, 8 ,9 ,10으로 늘어나길 기대하며 교회에 나가는 겁니다. 교회에 나갈 때부터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것이 특별히 인간성이 더 나빠서가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 안했던 자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동행했던 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동행 했던 자들이 생각한 구원이라는 것은 안정되고 아무 탈 없이 사는 것을 생각한 거에요. 이런 것을 원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님께선 어떻게 보시냐 하면 낚길 미끼로 본겁니다.


이스라엘이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에 의해서 교회에 나가고 나서 더 행복하고 아무 탈 없고 가정이 안정되게 된다는 것을 미끼로 해서 이것을 부숴버리는 쪽으로 가요. 왜냐하면 행복을 생각할 때 인간은 지금의 행복으로 만족하지 않잖아요. 지금의 행복이 7이라면 8. 9. 10.. 점점 행복이 높아지는 어떤 노선이, 길이 형성되겠지요. 그런데 이 길의 끝은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은 이 길 말고 네가 원하는 길에는 천국이 없다는 겁니다. 넓은 길에는 천국이 있습니까? 없지요.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는 이유가 그 만큼 행복해지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좁은 길은 고생이 많아요. 그래서 아무도 그 길로 안 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동행 하시게 되면 가기 싫은 길도 억지로 가게 만들어요. 인간이 현재에 만족하는 하느냐 하지만 인간 자체가 이 땅에서 나름대로의 흔적을 남기려 하는 존재입니다. 너 어디로 갈거냐? 하는 겁니다. 이렇게 가면 안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길을 갈 것이다 라는 의도를 강제로 꺾어 버립니다. 주님의 인도함 때문에 안가고 싶은 길도 주님이 동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가야될 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쪽 주님의 길로 가게 되면 인간은 뭐를 포기해야 됩니까?

자신의 행복과 구원은 포기해야 되지요. 그래서 인간은 구원 될 자격이 없습니다. 행복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들의 본심이라는 것은 인정해요. 누구나 태어나면서 행복하고 싶은 것은 본심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본심이라는 이유 때문에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 헌금하면서 은근히 노리는 것, 이 모든 것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것 관리해서 열심히 교회 다니고 헌금하고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향을 이용해서 오히려 그것을 꺾어버리십니다. 좌절시키지요.


좌절시켜서 주님이 가는 길로 가게 하는데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잘못된 길로 가는 이유가 뭐냐하면 자신의 구원 때문에 설정했잖아요. 그러면 이 쪽 길은 무엇을 포기해야 되요? 내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은 접어야 되요. 포기해야 되요. 이쪽 길은 나와 관련된 곳이 아니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길이 되요. 하나님의 이름은 한자로 하면 주가 되고 주가 주되심에 다 이루셨다는 그 길. 그 길로 이스라엘이 강제로 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주가 주되심을 드러내며 가는 그 길이 주님께 인도함을 받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의도와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대척 관계, 반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되요.


내가 원하기 때문에 주께서 안 들어 주시는 거에요. 내가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에가 군대에서 훈련받고 좋은 곳을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안 들어 주시는 거에요. 아침에 눈 뜨면 우리가 기대하는 게 있잖아요. 그 기대가 내가 원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에요. 만약에 내 기도대로 된다면 나는 악마와 동행중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중이 아니고 악마는 인간을 격려만 하면 되요. 격려하고 넘어질 때 일으켜주고 격려만 하면 되요. 7번 넘어져도 8번 일으켜서 힘내라!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열심히 기도해라! 이게 악마가 하는 일이에요. 네가 가는 길이 내 길이야! 이게 악마가 하는 일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네가 가는 것은 네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가는 것은 내가 잘 되는 건데 이것이 같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행하면서 아말렉이라는 종족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무 탈 없이 안정되게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주의 길에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하고 싶었던 전쟁이 아니에요. 전쟁에서의 승리 보다 더 좋은 것은 아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 더 좋아요. 아프다가 건강해지는 것보다 처음부터 안 아픈 게 더 좋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의 인생에 스크래치가 나지 않는 것.


깨끗하게 구두 닦고 나면 반들반들 하잖아요. 그것처럼 내 인생도 항상 윤기 있고 기름지고 아무 탈 없이 흠집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기를 원하지요. 백설 공주처럼 그런데 계모 만나서 작살나지요. 나중에 공주가 아니고 거지처럼 됐지요. 그래도 (난장이들이) 위해 주잖아요. 어디가도 예쁜 건 티가 나! 백설 공주가 예쁘지 않았다면 이웃 나라의 왕자가 반했겠어요? 안 반했겠지요. 그런데 성경이 재미있을까요? 백설 공주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까요? 백설 공주 이야기겠죠. 보세요. 자기 행복이야기 아닙니까? 인간이 뭔가 잘못 고른 것이 아니에요. 잘못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자기가 고를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거 할래? 저거 할래? 하나님이 물어도 이미 자기가 정해져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내가 안 고를래야 안 고를 수 없지요. 그러나 내가 원치 않은 것을 고르려 하면 반드시 주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이미 자기 마음에 정해진 것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 마음이 바로 악마의 성품입니다. 나만 잘되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천국은 내가 살기 좋은 나라가 천국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 살아 봤잖아요. 살면서 천국을 경험했습니까? 아니면 세상 경험입니까? 기억나는 것이 지금 한번 돌아다보세요. 줄곧 기억에 남는 것이 천국 경험이에요? 이 세상의 기억입니까? 세상 기억이지요.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생각나는 것이 세상 밖에 없는데 무슨 천국을 선택합니까? 기껏 아는 것이 세상이고 세상에서 좀 더 잘 살고 잘 되고 여유 있는 것 그런 것만 머릿속에 가득 들었는데 어딜 가요? 참! 거짓말도 무슨 그런 거짓말이 있어요! 더울 때 죽고 싶습니까? 아니면 에어컨 팡팡 트는 곳에 가고 싶어요? 덥다고 죽고 싶지 않아요. 에어컨 있는 곳에 가서 더 살고 싶어요. 인간은 자기 욕망에서 스스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악마가 심어준 성품에서 스스로 탈출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탈출할 때 알아서 탈출하라는 것이 아니고 탈출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동행하지 아니하면 너는 내가 있다는 것이 귀찮고 짜증스럽고 힘들더러도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로 데려 갈 때는 군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서 엉망이 된다하더라도 그렇게라도 주님께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데려가시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악마의 성품에서 조합된 거에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겁니다. 나 좋으라고 하는 거지 누구 좋으라고 하는 세계는 안 가려고 해요. 남 좋은 일 시킬 필요 없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바탕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 길 이거든요. 십자가로 갈 때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15세기에는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철학자가 연구를 스스로 해봤어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데 단 하나만 의심 할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것이 옥수수일까? 과일일까 사과일까? 의심할 수 있어요. 저것이 바나나이냐? 사과이냐를 의심할 수 있고 지금 내가 꿈에서 사과를 보는 것인지 현실에서 보는 것인지 의심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따져도 의심 할 수 없는 게 하나가 뭐냐 의심하는 나는 의심 할 수 없다입니다. 꿈꾸고 있는 나는 의심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마저 의심하라는 겁니다. 나마저 의심하라는 겁니다.


이게 가능해요? 불가능해요? 불가능한 거지요. 사무엘 상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한다고 했습니다. 동행한다고 할 때 이스라엘 쪽에서 보면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동행해 주니까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게 있어요. 잘 되는 것. 내가 잘 되게 되면 나만 잘되는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 가정이에요.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면 나에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숫자가 늘어나지요. 그렇다면 나라는 가정도 내가 잘되는 이상으로 가정도 잘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기가 농사를 짓는다면 간 고등어는 언제 먹습니까?

농사짓는 나 말고 옆에 자기 직업에 전념하는 사람 하나 있어줘야겠지요. 물고기 잡는 사람도 있어야 되지만 옆에 통닭 튀겨주는 사람이 있어줘야 가끔 먹어줘야 되잖아요. 안 좋은 기름이지만 스트레스 받을 때 콜라와 함께 먹으면 맛있거든요. 또 먹는 것만 있으면 안 되고 가끔 노래방에 노래 부르러 가게 노래방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러니까 이 집단 자체가 결국은 나와 내 가정을 위해서 필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치킨 먹고 싶을 때 치킨 먹게 해 주시고 고등어 먹고 싶을 때 고등어 먹게 해 주시고 배고플 때 밥 먹게 해 주시고 내 자식은 나 이상으로 잘 생겨야 되고 튼튼해야 되고 나보다 더 공부 잘해서 유명한 사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생각하는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 전혀 차이가 없는 거에요. 그것을 행복이라 하는 것이고 그 행복이란 미진한 것을 마저 채워줄 때 극대화 되겠지요. 극대화 된 향복, 내 가정이 극대화로 되고 이웃이 잘되면 나도 덩달아 잘 되는 것 같지요.


내가 북한에 사는 것보다 미국에서 사는 것이 더 낫지요. 왜냐하면 미국은 잘 살고 북한은 못 사니까 그래서 북한에서 빠져나와 미국으로 망명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추가되는 행복을 기대하고 가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천국까지 가게 해 준다면 이렇게 고마울 수 없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뭘 받는다고 아까 했습니까? 복을 받는다 했지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복이 뭐냐 하면 그냥 잘 되는 겁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충만이라고 하지요. 또는 팽창, 이것이 창세기 1장에선 복이 넘치는 거에요.


양적으로는 번식이고 질적으로는 의로움이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우다고 했지요.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저주는 죄인에게 주어지고 저주의 반대는 영생인 낙원이 주어지겠지요. 영국 사람들이 미국의 인디언이 있는 곳에 왔을 때 그들이 원한 것은 전에 살 던 것보다 더 풍족하고 팽창하고 자식이 번식하고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청교도인들 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그대로 연장된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되려면 땅이 있어야 겠지요.


땅에서 잘 된다는 것은 뭡니까? 이미 그들은 경험했다고 보는 겁니다. 왜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 보는 게 다 땅이잖아요. 대전에서 태어나면 다 대전 바닥 아닙니까?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이 오심으로서 제공되는 추가적인 그 무엇, 하나님이 없을 때 보다 하나님이 오심으로서 추가되는 행복 + 행복이 되겠지요. 아무 탈 없는 안정된 여유 있는 생활, 그것을 제가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현재 인간과 천국 사이에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서 천국을 이룬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들이 놓친 게 있어요.


뭐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것을 아까 길이라 했어요. 그 길에 있어서 인간의 소망과 기대가 하나님이 추가해서 개입함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 질 때 그 나라를 천국으로 본겁니다. 내 행복의 극대화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상 동행하니까 인간들이 이해하는 그 길 말고 다른 길을 제시 하시지요. 다른 길을 제시하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은근히 구원을 원했는데 인간의 구원을 말아먹는, 인간이 구하는 구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다른 길을 인도해요. 그것이 뭐냐하면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모든 기억은 천국에 대한 기억이 아니고 내가 잘 되는 기억이지요?


내가 잘 되는 기억은 자기를 의심해 본적이 없는 나는 잘 살아야 돼! 왜? 나는 괜찮은 존재니까. 그래서 아까 데카르트 이야기를 했는데 데카르느가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했지요. 이게 옥수수이냐? 아니냐? 이게 옥수수는 맞는데 이게 꿈속에서의 옥수수이냐? 있느냐? 내가 현실에 있느냐? 꿈속에 있느냐?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게 뭐라 했어요? 그렇게 의심하는 나 자신을 의심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선 우리에게 뭘 요구하십니까? 너를 의심해라! 너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라.


그냥 자신을 부인하지 않은 체, 너 자신의 문제 있음을 의심하지 않은 채 따라와 봐야 조작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 예수님이 아닌 거지요. 자기의 뜻을 가지고 주님을 붙들어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야기 한 바로는 천국이에요? 지옥이에요? 지옥 가는 거에요. 하나님께선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데 인간과 천국 가는 그 길에 예수님이 아무 탈 없이 안정되게 생활하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아말렉 민족이 나와요. 아말렉과 전쟁하는 거에요. 전쟁을 하면 인간들의 아무 탈 없음이 깨지고 소박한 꿈도 다 깨져요.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전쟁하는 길로 가게 하십니다.

전쟁하는 길을 가면서 평소에 남들과 경쟁하잖아요. 전쟁할 때 빈손으로 못나가잖아요. 준비한답시고 마련 한 것이 뭐냐하면 기껏 자기가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원된 기술들, 요령들, 지혜 등을 동원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으로 주님이 붙이신 적들을 이기지 못해요. 전쟁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붙이신 전쟁에서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선 백전백패에요.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패배한다는 뜻이고 구원에 실패하는 거에요. 이것은 애굽에서 나와서 도로 애굽에 갇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이유는 애굽에서 나온 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의 일이라는 거에요. 니 보기엔 애굽에서 나왔으니 두 번 다시 끔직한 애굽의 포로된 생활을 하지 않게 하시겠지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날마다 되풀이해요. 타임 루프라고 하는데 시간이 고장나게 되면 분명 하루를 보냈는데 이튿날이 되면 또 그 날이에요. 영화에서 보면 그런 게 많잖아요. 시간이 자꾸 반복이 돼서 제자리인 거에요. 하루가 지나면 지나야 되는데 계속 제자리가 되는 거에요. 이스라엘이 제자리 뛰기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행하시는 주님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동행 당하는 인간은 과거도 잊어버리고 미래로 나아가는데 동행하는 주님은 시간이 계속 맴돌아요.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위주가 아니고 언약 사건 위주이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이 동일하게 벌어지지 않으면 늘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언약적 원칙의 효과입니다. 똑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게에요. 어제가 8월 27일이지요. 오늘은 28일이라 분명히 달라져야 하는데 아침에 눈뜨면 8월 27일이나 8월 28일이나 주님은 똑같이 취급하는 분이 주님입니다. 분명히 달라졌고 애도 그 만큼 컸고 강아지도 늙었지만 모든 게 변해 시간이 흘렸다는 것을 알지만


 나도 거울 보면 늙었다고 느끼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외형을 전혀 보시지 않아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이 길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행 하시는 주님의 자기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자기 목적은 어떻게든 자기 백성을 천국에 넣어 주시는 거에요. 그 전제가 뭐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포기해야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을 포기해야 되요. 구원을 포기해야 됩니까? 나를 포기해야 됩니까? 나를 포기하고 자기를 의심해야 되요. 자기를 잊어 버려야 되요. 맨 정신으로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믿을 것은 나 밖에 없는 거에요.


누구와 편하게 이야기 할 때도 전제가 뭐냐하면 믿을 건 나 밖에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되서 이야기 하지요. 내가 이렇게 들었는데 너에게 전한다. 들은 것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것이 문제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들은 나마저 문제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 못해요. 의도가 그래요. 끝까지 자신을 포기 못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 언약 법칙이 요한복음 6장 66절을 읽어 보세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라고 했는데 오게 하여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오지 못한다 했습니까? 예수님께로지요.

 (요 6: 66)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기억이 아니고 내 위주로 살려는 세상 기억 밖에 없어요. 세상 기억 밖에 없는 인간이 무슨 천국을 가고자 해요? 자기가 아는 것은 세상에서 버틴 것 밖에 아는 게 없는데 이렇게 해서 내가 살고자 하는 기억 밖에 없는 인간이 어딜 가요? 주님이 좋다고요? 자기만 좋아하며 살아온 기억 밖에 없는데 내 좋은 것을 포기 못 하는데 가긴 어딜 갑니까? 콩고 말도 못 하면서 콩고에 가는 거하고 똑같은 것이지! (웃음) 전혀 말도 못하면서 가요? 죽으려고 가요? 탄카니카에 가서 죽을 라고?그래서 오늘 제목을 오지마라라고 정했는데 천국에 오지마라는 거에요.

지금 천국을 가겠다는 게 문제가 되요. 자기를 포기 못하고 자기부인도 못하면서 내 가정, 내 새끼, 내 남편도 포기 못하면서 어딜 간다는 말입니까? 천국이 그렇게 만만하니? 오지마란 말이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오지마라를 알려 주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오지마라! 이게 선교이고 전도에요. 오지마라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그럼 누가 갈 수 있는데? 아버지께서 오게 한 자만 온다입니다를 전하는 거에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포기 못해요. 부인 못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힘이 스스로 자기 부인 못하는 것을 깨뜨려서라도 천국에 오게 만들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이고 능력입니다.

천국에 오지마라! 입니다. 그러면 어디가요? 지옥에 가야지! 너는 너 밖에 모르기 때문에, 너 밖에 모르는 인간은 그냥 지옥에 가야 되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대상은 하나인데 자기의 사랑을 유지 하면서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소유라고 해요. 다들 결혼 할 때 소유 해봤지 않습니까? 언제 사랑했습니까? 소유하는 것이지 남편이 돈도 좀 잘 벌고, 직장이 안전하니까 저 남자 같으면 소유할 가치가 있다. 입을 보니 귀엽게 생겼네! 소유하잖아요. 남자도 보니까 애 잘 키울 것 같고 음식 솜씨 좋고 어딜 내 놔도 이쁘다하고 말 잘 듣고

 정숙하게 직장도 안 다니고 시집 갈 준비만 해 가지고 그 가정을 보니 그 어머니가 남편만 잘 위하는 것을 배웠으니 얼마나 나를 잘 위하겠는가! 그런 착각에 의해서 그 여자와 좋다고 하지요. 조건과 조건의 만남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소유한 거에요. 소유가 안 되는 경우는 내 몸에서 자식을 낳을 때 소유가 아니라 소유 당하게 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소유합니다. 인간이 절대적 자기를 믿는 한 예수를 믿어도 소유이고 하나님을 믿어도 소유이고 삼위일체나 교회도 모두 소유에요. 진짜 교회는 침목 단체가 아닙니다. 친목 단체는 헌금을 할 때 보람을 느껴요.


왜냐하면 그 헌금이 나에게 편리함과 칭찬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헌금 할 보람이 생겨요. 그런데 어떤 교회가 천국을 외치고 오지 마라를 외치는 교회에 헌금을 한다면 그 헌금은 마치 길을 가다가 창문을 열고 돈을 뿌리는 것과 같아요. 헛돈 날린 거에요. 왜냐하면 아무 보람이 없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헌금 하는 것이 죄라고 하니 누가 기분 나빠서 하겠어요? 그래서 천국과 교회는 오지 마라니까 왜 왔어? 그러면 그 쪽에서 화내지 마세요! 아버지가 보냈습니다. 이렇게 대화가 되요. 니가 뭔데? 아버지가 보냈는데 이렇게 된다고요.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께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로,

왜냐하면 인간은 가고자 할 떼 이미 네 중심에서 미래를 천국이라고 오해하거든요. 그래서 천국은 아버지께 오리는 말이 아니에요. 아버지께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로 보내 버리지요. 예수님에게 네가 경험하지 않는 것, 네가 체험 하지 않은 것, 네가 몰랐던 모든 천국은 예수님에게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주 천국은 이와 같다, 천국은 이와 같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천국은 이와 같다고 하는 당사자가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천국에 갈 사람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내용을 인간의 언어를 통해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막상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요. 보아도 알지 못 하지요. 아무도 몰라요. 포도원 같은 경우에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포도원에서 일을 시켜놓고 품삯은 나중에 온 사람하고 똑같이 줘 버려요. 이 세상을 뒤집어 버려요. 우리가 이 세상에 얼마나 충실하고 태어 날 때부터 온갖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상식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서 합세했던 모든 이론은 천국의 이론과는 정 반대되는 것을 실컷 배운 거에요.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 애가 있으면 애를 키운다거나 손자를 본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모든 일들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래서? 자! 실컷 애도 키우고 일을 했다 한다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일을 하게 되면 일을 한 기억이 남지요? 내가 키웠다는 것. 내가 군대도 보내고 고생하며 다 키웠다. 계속해서 내가 지워질 수 없어요. 그렇지요. 결국 아무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땀 뻘뻘 흘려가며 일해도 결국 남는 것은 천국이 아니고 땅에 대한 미련이고 나의 행복이에요. 집착이고 그거 해서 뭐하게? 그거 해서 실컷 지옥에 가란 말이죠. 거기에 몰두하고 온갖 마음과 몸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 오직 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 했다면 가라! 지옥으로,


그런 식으로 지옥에 가란 말이죠.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마음은 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천국에 갈 수 없어요.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되요. 우리 힘으로 변화가 안 된다니까요. 내가 열심히 한 나를 어떻게 미워해요? 광고 CF에도 나오잖아요.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 (떠나요~ 둘이서 제주도 푸른 밤으로~ ) 제주도 요새 험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생각해도 제주도로 놀러 가나 지중해로 놀러 가나 태국으로 가나 가봤자 거기 누가 있어요? 내가 있잖아요. 사랑하는 내가 있잖아요. 내가 끼어들면 지옥입니다. 어딜 가도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내가 끼어들면 그 순간 망치는 겁니다.

집에서 하던 행세, 집에서 새던 바가지 어딜 가도 안 샙니까? 갈 때부터 싸우던 것 올 때까지 싸우고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벗어나요? 안되지요?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에게 올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고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거에요. 이게 복음이에요. 아무도 올 수 없단다. 이게 전도에요. 사람 꼬시는 게 전도가 아니고 사람들 꼬셔봐야 얼마 안가서 본색 드러나고 다 가요. 자기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 안 해주면 삐져서 다 도망 가버려요. 교회라는 것이 허상입니다. 사람들을 모았다. 어떤 인간들을 모았는데요?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놨는데 그게 무슨 교회겠습니까?


그래서 아말렉을 붙여 줍니다.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했어요. 진멸이 뭐냐하면 ‘파괴’라는 방식의 예배에요. 이게 진멸이에요. 내가 누구를 잔혹할 정도로 지근지근 밟아 놓는다. 그러면 그렇게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생각하겠지요. 내가 이토록 잔인했었는가를 생각하겠지요. 하나님이 아말렉을 완전히 짓밟아라! 심지어 갓 난 어린 애 까지 다 죽여 버려라! 가축이며 모든 것을 다 죽여 버리라 하거든요. 그것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해요. 신명기에도 나오고 민수기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은 다 죽여 버려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다 죽임으로서 이스라엘도 마땅히 죽어 줘야 되는데 거룩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으로 깨닫는 거에요? 집에서 자상한 아버지와 함께 공원에 갔는데 가면서 강아지도 데려 가는데 평소 강아지를 굉장히 예뻐해요. 그런데 공원에서 아버지에게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을 몰랐던 거에요. 예를 들면 강아지가 쫄랑쫄랑 다가오니까 갑자기 안 하던 욕을 하면서 돌로 개를 쳐서 피를 내고 박살 내놨다. 그럴 때 누가 무서워하겠어요? 평소에 그런 면을 못 봤던 가족들이 저게 아버지의 또 다른 진심인지 언제 아버지가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겁을 내겠지요.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아말렉을 싹다 죽여라! 그게 나의 예배이다. 봉헌, 진멸이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잘한다! 내 자식 잘한다! 네가 날 닮았구나! 그런데 막상 진멸에 나서는 인간의 입장에선 눈에 뭐가 보입니까? 눈에 밟히지요. 애들을 볼 때 누가 생각나겠어요? 내 애를 생각해서 차마 못 죽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결코 자기를 부인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아말렉과의 전쟁이 아닌 거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아느냐?” 네, 좋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고뢔? 진짜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그런데?”제가 안 그래도 착하고 구한 하나님을 원했는데 정말 이렇게 저희에게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네가 왜 착하고 훌륭한 하나님을 왜 원했는데?” 제 품성이 원래 착하기 때문에 제 품성보다 더 착한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러면 “ 니 품성이 원래 착하냐?”하지요.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누굴 자랑하는 겁니까? 이런 하나님을 믿을 정도로 나는 착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자기 자랑하는 세계, 그게 천국이겠습니까? 지옥이겠습니까? 이게 지옥이에요. 다시 말하면 천국은 어떤 세계냐 하면 나의 착함을 안 받아주는 세계에요.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아버지께서 떠밀어서 온 사람들의 집합이 천국입니다. 내가 차마 갈 수 없는 세계에요. 정리하자면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아말렉에 있는 강아지까지 작살내라 했을 때 그대로 작살낸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있다? 없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어요. 왜? 다들 착하기 때문에 인간은 왜 자기를 사랑합니까? 자기 속에 차마 내칠 수 없는 귀한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가끔 자기가 미워질 때도 있어요. 그건 뭐냐하면 예상 밖으로 남에게 실수하게 됐을 때 말하자면 뮤지컬 연습 늦게 끝나서 술 한 잔 먹고 그라이슬러 외제 차타고,

자기가 운전하고 20대의 배우가 두 명 같이 타고 가다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갓길에 세어둔 트럭을 박아 버렸어요. 원래 악한 사람이 아닌데 부자처럼 여유 있는 사람이 착하게 되어 있어요? 아니에요? 착하게 되어 있지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 하면 박해미(뮤지컬 배우) 있는 거에요. 음주 운전해서 두 명 죽고 세 명 다친 이야기. 그런데 그 남자가 아주 부자 아닙니까? 유명한 부자. 그 사람이 술 먹고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였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술 많이 마시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유명한 아내는 이 죄를 어떻게 다 씻을 까하며 통곡을 했다잖아요.


그 날이 바로 우리나라 축구가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가 아시안 게임에서 4강에 올라간 날이에요. 축구가 이겨도 문제는 남들이 아무리 잘 된다 하더라도 내게 사건이나 일이 벌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지옥이 되지요.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남들이 음주 운전으로 사고 나서 죽든 말든 내 땅 값이 100배 올랐다면 내겐 천국이에요. 이런 시고 방식 가지고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런 것만 기억해요. 어딜 가요? 천국 못 가요. 천국은 그냥 나를 잊어버리고 잘했든 못했든 내 잘못을 짓밟아 버리고 예수님만 잘되면 좋습니다가 천국에 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실수 없잖아요. 남편은 음주 운전해서 수 억 날라 가게 되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은 아무 문제없잖아요.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다가 되려면 우리에게 뭐가 일어나야 되요? 내 것이 와장창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게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 길로 인도하는 거에요.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전쟁이 일어나요. 어떤 전쟁? 내 잘났다가 박살나는 전쟁이 일어나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 사람이 술 먹고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가 아니지요.

어떻게 실수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에요. 맨 날 음주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건이고 박살내는 전쟁이에요. 누구는 그 일이 고소하다고 여기지만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감사합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하고 원망하겠어요? 이것을 주일 오전에 과도한 처벌이라고 한 겁니다. 평소에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박해미나 그 남편도 평소에 많이 베풀어 줘요. 배우들을 자기 딸 같고 동생 같다고 이야기 했어요. 얼마나 베풀어 줬겠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베풀어 줬는데 이 사단이 났잖아요. 그럴 때 자기가 한 행위보다 기억하는 자기 인생보다 더 과도한 처벌이 주어 졌지요.

그러나 그것을 격어야 되요. 우리가 그게 십자가 은혜에요. 평소에 네가 뭐 때문에 감사했냐는 거에요. 십자가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말로는 잘 하지요. 그 십자가는 뭐냐하면 내가 부인되지 않는 가짜 십자가, 가짜 예수란 말이죠. 그런데 감사하게도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내게 위해서 십자가의 진짜 체험, 예수님이 목숨 받쳤잖아요. 우린 목숨 안 바쳤잖아요. 그러한 경험을 체험케 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인생이 쪽 났다는 것. 오늘 제목을 쪽? 오지마라로 정합시다.

10분 쉽시다.
 주향(IP:115.♡.251.218) 18-10-03 23:50 
막살았다 (마 25장 32- 46)
대전- 103강

 이근호


2018년 8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 32-46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32절부터 보겠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어요. 심판 주 되시는 주님께서 이미 판정을 내렸습니다. 오른 쪽과 왼쪽을 구분하고 다음에 판정을 내린 입장에서 이 쪽은 보내라! 천국에 참여 할 사람은 천국에 참여해라! 빠이! 빠이! 이미 판정이 났는데 거기에 뒤늦게 언급할 이유가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구분해 놓고 오른 쪽과 왼쪽을 구분해 놓고 네가 왜 왼편에 서 있고 너는 왜 오른 편에 서 있는 지를 이미 갈라놓고 이야기 한다고요.


그리고 저 뒤에 나온 말은 뭐냐하면 천국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이럴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제가 언제 주님께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이렇게 나온 다고요. 지옥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제가 언제 주님께 마실 것을 안주었습니까? 알았으면 진작 주었지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여기사 이야기 하는 것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은 본인이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결정 났다는 거에요. 교회 백날 다녀도 소용없어요. 천국 가려고 애써도 소용없어요. 안다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거잖아요. 알아도 소용없고 몰라도 소용없어요.


알아도 소용없으면 통곡이라도 하지 몰라도 소용없으면 통곡할 것도 없어요. 그냥 사세요에요. 그냥 막사세요에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냥 살고 있어! 내가 알아서 뽑을 테니까! 그 말이에요. 회사가 사람을 뽑을 때 입사공고를 안 낸다니까요. 인사 책임자가 사장님이라면 그냥 놀고 있는 사람에게 “야! 너 와!”보통은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하잖아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는 지 이야기 하고 가셔야지 이러잖아요. 그런데 주의 뜻은 뭐냐하면 “야! 너 와!”이렇게 하면 그냥 끌려가듯 가는 거에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딸려 가는 거에요. 그냥 유괴 당하는 것처럼.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은 몰라도 소용없는 사람은 그냥 나둬버려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 두는 거에요. 거기에 동생애가 나오는데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든 말든 여호와 증인이 군에 가든 말든 니 마음대로 해! 그냥 방치해요. 유괴하는 것의 반대말은 방치하는 거에요. (방치 = 내어버려 두사) 그냥 내버려 두는 거에요. 이것을 보면 사도행전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에는 선교가 없지요. 선교가 없다면 구원은 어떻게 받는 가? 외재성,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오면 주님의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하기 싫어도 되야 돼요.


빌립 집사가 싫어도 사막에 가야 되고 누굴 만나야 되고 사도 바울이 싫어도 폭풍 만나야 되고 토인 만나야 되고 누굴 만나야 되요. 내가 뭘 했다 안했다가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사도와 베드로가 나오잖아요. 주님과의 관계를 주목해야 되요. 성령께서 어떻게 하셨냐가 중요하지 몇 명 건지고 몇 명 만났냐는 아무 의미 없어요. 어차피 이 땅은 죽음의 세계이고 사도들은 다 죽어가고 야고보도 죽지요, 베드로도 나중에 잡혀가고 사도 바울도 죽으러 가지요. 죽으러 가도 상관없어요. 이 관계가 살아 있잖아요. 사도 바울이 죽어도 이 관계는 살아 있잖아요.


인간은 처음부터 죽은 거에요. 주일 날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뒤에서 떠밀고 앞에서 댕기고 인간은 처음부터 죽은 거에요. 살았다는 기준을 누가 정하냐 하면 하나님이 정해야 됩니다. 낙원의 조건이 뭐냐하면 선과 악을 기준을 모르는 것이 낙원의 조건입니다. 선과 악을 모른다는 조건하에 이 조건은 하나님이 정하신 거에요. 선을 모르고 낙을 모르는 조건하에 이간 바보 등신이지요.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고 하나님의 의도 몰라요. 이건 바나나, 이건 사과 이것만 아는 거에요. 그냥 주는 것 먹고 그냥 사면 되요. 더 고민 할 것도 없고 하지마라는 것은 안 하면 되요.


선악은 모르지만 따먹지 마라하면 안 따먹으면 되는 거에요. 그것 빼놓고 나머지는 먹으면 되는 거에요. 예수 믿으라 하면 믿으면 되는 거에요. 월급이 안 나오고 애가 아프고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그냥 예수님만 믿으면 되요. 아브라함이 그냥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되요. 아는 게 탈이에요. 안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으로 안다는 것이 주의 판정입니다. 선과 악이 주입된 앎이에요. 안다는 게. 사람을 볼 때 당신을 좋은 사람으로 압니다. 뭐가 앞에 붙어요. 나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좋은 것을 제공해 주는 사람으로 압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해고지하는 사람으로 압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그냥 만나는 게 아니에요. 선과 악을 토대로 해서 만난다니까요. 그래서 선과 악은 확장이 된다고 했지요. 선과 악이 선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선은 뭐냐? 악이 아닌 것, 악이 뭐냐? 선이 아닌 것. 이렇게 된 겁니다. 짝을 이루는 것, 선과 악의 개념은 짝이 없는 독자적인 개념은 없어요. 예를 들면 예쁘다의 뜻이 뭐냐하면 반드시 안 예쁨과 견주어 예쁨이 되는 겁니다. 여러 번 예를 들었습니다만 시골 강원도 골짜기에 주민 수가 한 50명 남짓한 곳에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30대 아가씨가 오르간을 친다.


총각이 네 명이다. 여기서 총각이란 20대에서 50대 까지를 말합니다. 이 마을에서 예쁘다의 의미는 뭐냐하면 이상형(ideal type) 이 기준이 되요. 왜냐하면 20대가 예쁜 이유가 20대이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50대 총각이 볼 때 자기는 30년이라는 세월의 굴곡이 있잖아요. 아무리 예뻐도 세월이 지나가면 수분이 빠져요. 탄력성이 떨어진다고요. 여러분 나이 80된 할머니가 다리 내 놓고 옷 입은 것 봤습니까? 못 내 놓지요. 생기 있지 않으니까 바짝 마른 육포 같은 다리로 못 내놓고 나이가 들수록 치마 길이가 길어지잖아요. 십대나 20대는 치마 길이가 짧아져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라니까요. 이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그런데 이 마을에 등산 왔다가 길을 잃어 20대의 서울 아가씨가 두 명이 왔다. 그 때부터 반주하던 아가씨는 이쁘다가 아니라못 생기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ideal type)이 깨지는 겁니다. 인간의 이상, 초원적인 것은 어디서 만든다? 나의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진짜 초월을 봐서가 아니라, 이상 세계를 봐서가 아니라 지금 보다 더 나은 무엇, 지금 보다 월등한 무엇. 이것이 어디에서 나왔다. 선과 악에서 나온 겁니다.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만은 선과 악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로 보냐 하면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은 뭐로 보냐하면 인간 속에 선이 있다고 본 거에요. 악이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것을 실마리라 하는데 실마리가 뭐냐 뭔가 둘둘 말린 곳의 끄트머리를 실마리라 해요. 이것에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이 나온다면 인간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선을 악으로 쫓아내면 내 마음은 개선되겠지요? 정화 되겠지요? 왜 이런 생각을 하냐 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 그럼 사회가 좋은 사회가 좋겠어요? 나쁜 사회가 좋겠어요? 좋은 사회라는 것은 뭐냐?


질서가 잡히고 좋아하는 세계라는 말이죠. 질서가 잡힌다는 것은 남들이 누구와 같았으면 좋겠어요? 내 마음 같았으면 좋겠지요. 안 싸우고 그래서 이 사회는 정의로와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정의를 최고의 덕으로 본 겁니다. 그러면 정의롭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각자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보는 겁니다. 통치자는 지혜가 있어야 되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은 용기가 있어야 되고 농사짓고 공사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은 참아야 되고 절제가 있어야 되지요. 지혜의 덕, 용기의 덕, 절제의 덕 각각 자기 일에 맞도록 갖추려면 이것이 뭐냐? 사회는 정의롭다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 조선 시대 아닙니까? 상놈은 상놈답게 해야 되요. 상놈이 지혜로우면 어떻게 됩니까? 나라 꼴이 안 되지요? 그렇지요? 지혜는 통치자만 갖고 있어야 되요. 통치자는 세상을 보다 넓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대장간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넓게 보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데 양반들이 10냥 밖에 안 내. 100냥 내놔! 하면 나라 꼴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참아야 된다고요. 가정에서 남편은 뭡니까? 하늘. 여자는 땅, 여자의 할 일은 참아야 하느니라 여자의 덕은 참아야 하느니라 . 왜? 남자는 밖에 나가 큰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가 배우면 안돼! 여자가 배우면 지혜로와져 세상을 넓게 보기 때문에 남편의 무식이 들통나요. 가정의 남자와 여자가 바뀌게 되면 나라 꼴이 안돼요. 그레서 여자는 항상 남자보다 무식해야 되고 더 알면 안 되고 항상 집구석에서 군불만 떼면 되지 여자는 오직 남편 말만 들어야 되요. 남편 말만 들어야 되고 시키는 대로 들어야 되요. 그렇게 되면 여자는 시집이라는 사회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절제하고 칭찬받고 이게 너에게 주는 복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 볼께요. 인간에겐 뭐가 있다? 선과 악이 있다. 이것을 성경에선 한마디로 육이라 했어요.


이게 바로 지옥이에요. 선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냐 내 안의 갈등인 선을 키우고 악을 내쫓음으로 천국에 간다. 이게 바로 육입니다. 한국 교회는 뭡니까? 사람들을 지옥에 다 보내요. 지옥에 다 보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했지요? 천국은 어떻게 간다고 했습니까? 내 선을 키우고 악을 내쫓아서 훌륭한 사람 되면 천국 갑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런 나를 잊어 버려라! 지금 선의 게이지가 올라가고 악은 내려갑니다. 신이 납니다라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거지요. 그 자체를 왜냐하면 천국은 아버지가 누구에게 보낸다? 예수님을 보낸다. 그러면 천국 지옥은 누가 다 이루었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셨어요.

그러면 이상형(ideal type)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에요. 우리 힘으로 잊어버리지 않아요. 어떻게 나를 잊습니까? 십자가 마을에 모였더라도 말씀 들을 땐 말씀을 보잖아요. 다들 잊어 버려요. 50분하고 10분 쉬잖아요. 은혜 받은 건 다 날아가고 잊어 버려요. 나중에 끝나고 나면 뭐 때문에 모여 있나 하지요. 10분 쉴 때 전부 자기 생각만 하지요. 그것을 도루묵이라 해요. 다시 할 께요. 낙원이란 선과 악을 모르는 조건하에서 낙원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2장이거든요. 그런데 3장에 보면 이미 우리가 선과 악을 알게 되지요. 왜? 선과 악을 왜 모르는 조건이야 하면


 낙원은 다시 말해 천국은 악마를 넣어 주지 않는 조건 하에 천국이에요. 이게 왜 어려운 말이냐 하면 천국 없는 지옥 없고 지옥 없는 천국은 없어요. 왜냐하면 지옥과 천국은 같은 조를 맞춰 만들어 낸 겁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낸 거에요. 그러면 지옥은 누굴 위해 만든 것이냐? 악마를 유황불에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겁니다. 악마로 하여금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와요. 여러 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유황불에 거짓 선지자가 나와요. 항상 지옥은 누굴 위해 있는가? 악마가 안 나와요. 성경은 제일 뒤로 가게 되면 앞에 있는 것의 결론이 요한계시록에 다 몰려 있어요.


천국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선악과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그러면 천국에는 뭐가 있냐 하면 생명 나무가 있어요. 예수님 자신이 생명나무라고 아까 했지요.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니까 결국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뭐냐하면 생명나무만 알아야 될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악과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못 알아듣지요. “내가 그럼 지킬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증인 될까요?”자꾸 외부에서 오는 것을 선이라고 여기고 이미 선으로 여긴 자체가 잘못이잖아요.


주님 옳소이다! 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주님은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옳소이다야!” 옳소이다라고 해놓고 십자가에 죽여 버리고서, 주님은 내게 꼭 필요한 분이다하면 주님은“니가 알아?”제가 주님은 알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모르는 이유를 주님은 아셔요. 그게 뭐냐하면 죽었기 때문에 숨 안 쉰다고 죽은 것이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악마와 한 통속 되면 죽은 거에요. 아직도 생각 중에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라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 닭을 거론 하셨을까?


이 말씀을 안지가 4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이 부분이 깔끔하게 풀리지 않아요. 계속 생각하는 거에요. 왜 닭이 들어가는 거에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 오늘도 오면서 그 생각을 했거든요. 제가 정리 한 것은 이거에요. 닭이 울어 버리면 뭐가 되요? 소나 돼지가 아닌 닭다운 닭이 되지요. 닭이 음매~하면 닭이 아니잖아요. 닭이 운다는 것은 닭이 가장 닭다울 때이지요. 베드로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한 그것이 가장 베드로다울 때에요. 다시 말해 베드로가 가장 악마스러울 때. 주님 앞에서 베드로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낸 것은 자기가 뭔가 하겠다고 할 때.

그게 바로 주님과의 단절, 끊어짐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뭘 하겠다는 것. 내가 목숨을 바치겠다는 거에요. 여기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은 본인이 살아있다는 생각하는 거에요? 죽어 있고 생각하는 거에요?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살아 있으니까 귀하게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을 너무나 모르는 거에요. 그야 말로 사탄아! 물러가라!~와 똑같은 것이거든요. 제자들에게 나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난다는 것을 마태복음 16장에서 이야기 하셨지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나서 이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보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값을 치루기 위해 죽으시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에요. 주구의 값을 치루기 위해 죽는 겁니다. 어떤 값이냐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값이에요. 베드로는 자신을 살아 있다고 봤지요. 그러니까 자기에겐 귀한 목숨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 목숨은 귀하다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위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침에 눈 만 뜨면 살아야겠다는 것뿐이에요. 음주 운전으로 다쳤다. 뭐 보상 좀 해주면 되겠지라고 하지요. 그런데 죽은 사람이 92살 된 사람과 96된 할머니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 참 땡 잡았네!

내일 모레 죽을 사람인데 받혀 죽었으니 보상금 한 5000만원 만 되도 자식들 좋아 하겠네!가 되요.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하나는 20대 고 하나는 30대이면 아이고! 세상에~이렇게 되는 거에요. 세월호에서 빠져 죽은 아이들이 17살이다 하면 아이고! 세상에~ 이게 뭡니까? 스마트 폰 밧데리가 아직 남아 있는 거에요. 저녁에 자기 전에 스마트 폰 밧데리 충전 하지요. 아침에 보면 밤새 충전해서 꽉 차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생생한 생명으로 보는 거에요. 하루 종일 사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량이 줄지요. 우리는 우리를 밧데리 충전하듯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어릴 때는 생명력이 넘쳐서 그 만쯤한 애들은 못생긴 애가 없어요. 머리 깎이나 안 깎이나 다 이뻐요. 왜 생명이 충만하니까 그런데 나이 95세치고 예쁜 사람 봤습니까? 괴물이죠. 안 볼란다! 요양 병원에 있는 부모를 잘 못 찾아가게 갑니다. 옛날 좋은 기억으로 찾아 가지요. 막상 보게 되면 코에 뭘 꽂고 하아~ 하아~숨 내쉬고 들이 쉬고 있어요. 눔 떠 보세요 헤도 감고 있어요. 그런데 그 부모가 서른에도 그랬습니까? 안 그랬지요. 잠재되어 있어요. 어닌 애 안에 그런 노인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기 찰 노릇 아닙니까? 주님은 시간을 이미 끝난 시간으로 봅니다.


이미 죽었던 안목으로 어린 애를 봐요. 아까 첫 째 시간에 아랄렉의 어린 아니도 진멸하라 할 때 조금도 아깝지 안 습니다. 왜 어차피 늙어 죽을 아이니까. 네 눈엔 어린 애로 보이냐? 내 눈에 90세 노인으로 보인다. 아무 의미 없지요. 왜 질적으론 이미 선악과를 알고 있으니까. 본능적으로 선악을 알고 있어요. 선악을 아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절대자인 조건으로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이미 신처럼 됐음을 유지하는 그것이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성품입니다. 그것을 맹자는 사단칠정[四端七情] 인. 의. 예, 지라고 하는데

<참고>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인간의 본성(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착한 본성[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감정을 말하고,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이다.

인과 의의 차이점은 애가 만약에 어른에게 맞아서 아프면 불쌍해서 꼬옥 안아 주는 것이 인이에요. 의는 애 편에 서서 어른을 패 주는 것이에요. 소극적이고 적극적이에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대기업의 횡포에 의해서 작은 마트가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할 때 인은 뭐냐하면 아이고! 안됐다하며 그 집에서 물건 하나 더 사주는 것이 인이라면 머리에 띠 두르고 대기업은 물러 거라! 대모 하는 것이 의에요. 여러분은 인을 할래요? 의를 할래요? 예란 남을 배려하는 겁니다. 지는 지식이지요. 이것이 인간 속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 속에는 이런 것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것도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선이 들어 있고 악도 들어 있으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군자 같이 산다는 것이 뭘 의미 하는지 한 평생 살아가는 것이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면 해야 될 일이 뭐냐 내 안에 있는 선으로 악을 몰아 내는 것. 이게 하늘의 뜻이라는 겁니다. 맹자 이야기를 했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교회 이야기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가 지옥이라는 것에요. 계속 관심사가 어디로 쏠립니까? 날마다 큐티 하면서 나는 얼만큼 복을 받는 가? 착하면 복을 준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이상형(ideal type)이 누구냐 하면 내가 나의 이상형이에요. 거기다가 목사가 뭐라고 하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부이야 하면 거룩한 분이잖아요. 거룩한 분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면 나머지는 복이 그냥 주어지는 복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지상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들, 얻고자 하는 것들, 자식이 공부 잘하고 내가 부자 되는 것, 내 몸 건간 한 것, 이런 것들을 보너스로 주겠다는 거에요. 여러분 근원적으로 뭐가 잘못 된 줄 모르겠어요? 근원적으로 우리가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잘못 된 거에요. 주제 파악을 못해서 그래서 주님께서 너는 막 살았다는 거에요. 언제 이야기해요? 최후 심판 때. 천국 가는 사람도 막 살았고 지옥 가는 사람도 막 살았고.


제목을 막 살았다로 해야 겠어요. 그냥 막 살은 거에요. 그런데 막 사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하면 악마의 성품으로 막 살았어요. 천국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나는 알아요. 내가 어떻게 산 지를 알아요. 나중에 치매 걸리면 그것도 생각 안 나겠지만 치매 안 걸린 조건 하에 알아요. 내가 알기 때문에 뭘 몰라요? 나 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이 주님께 물을 대접 한 것을 몰라요. 왜? 100% 내가 한 것만 알기 때문에 내가 주님이 목마를 떼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준 기억이 안나요. 하루 종일 나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도착해보니까 어디이다? 천국이다. 우째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 까? 아까 요한복음 6장 66절이 그거죠. 하나님은 자기가 하는 일을 중도에 포기 한 적이 없다는 거에요. 그 결과물이 바로 아무도 모르고 예수님에게 유괴 당해서 와보니까 천국이라 그러면 그 사람이 천국에 가서 자기 자랑하겠어요? 자기가 행한 것 내 놓겠습니까? 안 내 놓겠습니까? 더러운 죄 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요. 그래서 면류관마저 부끄러워 쓰질 못해요. 후딱 벗어서 누구 발 앞에 던집니까? 주님 발 앞에 던지지요. 주님께서 쓰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 주와 예수님 주가 쓰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고백을 최후 심판 때 가서 할까요? 미리 해야 됩니까? 지금 마태복음은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십자가 지고 난 후가 되면 모든 일이 마태복음 25장은 끝났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통보합니다. 물론 인간의 시간상으론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재림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이미 끝났어요. 버블이 우리말로 풍선이지요. 풍선 안에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 있으면 예수 안에는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이미 완료가 되었어요.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어요.


왜냐하면 죽어 있는 우리에게 뭘 찾았습니까? 값을 치룬 거에요. 바깥에 보면 뭐가 있습니까? 율법이 있어요. 율법 있는 곳에서 비누 방울 안을 보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애들끼리 학교에서 놀다가 선생님이 누구 하나를 편애하니까 사랑 받지 못한 쪽에서 “에에 내가 어제 물건 훔치는 것 봤어요. 고자질 하는 거 있잖아요. 율법은 계속 고자질 하는 거에요. 율법은 선악으로 고자질을 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선생님이 오기 전에 누구와 있어야 하면 자기들끼리 놀았잖아요. 자기들끼리는 고만고만 같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와서 편애를 한 거에요. 편애가 있어야 질투가 유발 되요. 지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함으로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뭘 유발 시키냐 하면 질투심이 유발 되게 만드십니다. 제는 한 게 없는데 지금 주님 품안에 있어요라고 질투하게 만든다니까요. 그러면 백부장은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 하라고 해서 했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왔어요. 내 쪽에서 뭔가 준비한 게 없어요.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고 음식 준비하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동생 마리아는 뭐했습니까? 아무것도 그냥 말씀만 듣는 거에요. 왕 싸가지에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좋은 쪽을 택했다 하지요. 그러면 어떤 목사님들은 그래 갖고 목회 안되면 어떻게 하냐? 전부 왕 싸가지가 돼서 헌금도 안해 말씀만 듣고 도망가기 바빠서 교회 형광등이 나가든 화장실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어~ 자기 편한대로 살아 그러면 목회 자체가 안되잖아요라고 한다면 닭 모가지 날아가듯 해야 되요. 왜? 완벽한 교회를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완벽한 교회를 해서 완벽한 신자이고 싶어 해요. 최후의 악마의 시험이 그겁니다. 내가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되고 완벽한 목사, 완벽한 집사, 철저한 성도 되려 해요.


이 유혹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십자가 마을에서 너 뭘 모른다 하면 기분 되게 나쁘지요. 아니야~ 알아 하고 반박 하지요. 이게 결국 뭐에요? 진짜 닭 목을 치듯 해야 되요. 사이다의 병뚜껑을 열면 팍 하고 쏟아져 나오지요. 차여 있던 것이 뿜어져 나와야 되요. 나의 완벽도 빠져 나가야 되고 철저함도 빠져 나가야 되고 내가 복음 안다는 자랑 질도 빠져 나가야 되요. 율법은 옛날에 예수 안에 있지 않던 시절을 생각나게 해서 자꾸 유인하는 거에요. “나와! 거기서 서로서로 착한 자랑하던 그 시절이 좋았잖아! 네 믿음 좋다고. 신앙 좋다고 자랑할 때 네 기분 좋았잖아! 너 왜 거기 가 있어?”자꾸 나오라고 하는 거에요.

그 때 주님은 뭐러고 하십니까? 얘는 율법에서 이미 죽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누워서 아무 말 못하잖아요. 죽었는데 보고 너 빨리 돈 갚아! 너 예수 믿는다고 고백해야지! 사도신경 해봐! 찬송가 틀어줄까? 해도 이미 눈 감았어요. 기도 하자! 너 열심히 헌금도 하고 신앙생활하고 전도해야 성도의 삶이잖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으라고 에베소서에 나오잖아! 본받자! 하는 데 죽어 버렸는데요. 경건하게“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베드로 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해야지! 해도 이미 죽어 버렸는데요.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다. 죽은 놈을 흔들어 깨워 봐야 소용없어요. 마귀가 그래도 안 먹히니까 뭐라고 합니까? 저주하며 니가 지난여름에 네가 한 짓을 내가 안다. 너는 이제 끝났어! 만약에 니가 우리 교회에 안 나오면 니 자식 재수 했지! 이번에 수능에서 또 떨어 질꺼야! 이것을 누가 이야기 할까요? 문제는 내 안의 내가 이야기 합니다. 내 안의 옛 성품이 잘 나가는 재미로 살았던 내가 나를 힘들게 해요. 결론은 내가 나를 힘들게 해요. 주여! 이런 짓 하다가 벌 받으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목사하다가 교인 다 떠나가 버려서 달랑 두 명 남아 버리면 노후 대책도 못 세웠는데 안 되잖아요.

항상 이래요. 아까 첫째 시간 제목이 뭐였습니까? 오지마라를 잊어 버렸어요. 교인이 많이 오게 꼬셔야 교회가 유지되고 운영이 되고 돈 줄도 생기고 유지가 되요. 그 근거가 뭐냐하면 나는 죽었다는 말입니까? 살았다는 말입니까? 살아있는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싫다는 거에요. 그런 안목이 어디서 생겼어요. 나에게서 남이 죽는 건 괜찮아요. 나는 죽으면 안돼! 왜 내가 죽으면 안 되는 데요? 그런 성품을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마귀에게 배운 거죠, 난 착하니까 남에 집에 비가 많이 와서 물들어 오는 건 괜찮아요. 신나게 퍼내라! 하면서 우리 집에 물들어 오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절대로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이게 뭐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원받았지요. 구원받았는데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가 목적이 되야 되요.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막 살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기 위해서 외부에서 마귀가 우리에게 지적질 하는 것을 허용을 해요.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막상 매일 벌벌 떨어요. 매일 이런 짓 해서 벌 받으면 어떻하나? 이런 식으로 내가 착한 일 했으니 복 받겠지! 안 주면 어떻하나?

복 받아도 이 복이 몇 달 못 가겠지 하고 벌벌 떨고 있어요. 모든 것이 공포와 불안감이 한 순간도 없어 질 때가 없어요. 늘상 그래요. 강의 제목도 벌써 잊어 버렸어요. 항상 우리는 5분전의 나에요. 5분 지나면 5분 전의 나는 이미 죽어 버렸어요. 그때 좋았던 것이 10분 후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1시간 후엔 어떤 괴물로 될지 장담 못합니다. 지금은 말씀을 들으니까 착한 것 같은데 만약에 2시간 뒤에 누구와 멱살 잡고 싸운다면 이건 인간도 아니지요. 그럴 때 2시간 전의 나는 뭡니까? 이미 죽었어요. 날마다 살립니다. 뭘로? 주님의 살아계심에 사는 거에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에서 주님 살아계심에 살아 있는 거에요. 로마서 7장 24절을 보겠습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사도 바울이 어떤 요령을 부려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에요. 사도는 몇 명을 꼬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사도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 졌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사도행전이 되듯이 로마서도 마찬가지에요. 주님께선 사도를 곤고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이 몸이 예수 믿는 다고 안 사라져요.


안 먹으면 배고파요.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가 나고 성질나요. 잘난 척 할 때는 흐믓해요. 이런 건 없어지지 않아요. 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문제에요.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값을 줘야 하는 가? 우리는 재 놓고 값을 다 치러놓고 치룬 상태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거에요. 우리의 잘잘못을 일체 묻지 않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매일 어디에 놀아나냐 하면 내가 잘했을까 못 했을까? 실수를 조금했을까? 많이 했을까? 남에게 해코지를 많이 했을까 혹시 남에게 엉뚱한 소리는 안했을까? 남에게 잔소리 한 건 아닌가? 이것 우리 두뇌가 자꾸 기억해요.


말도 안 들어, 기억하지 말라고 기억해요. 나는 옛날에 이뻣었다, 잘 났었다를 기억한다니까요. 이것을 기억하다 보니까 내 안에 뿌연 죄만 자꾸 차요. 예수안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내 안에 육의 모습을 자꾸 드러내는 겁니다. 주일 날 할 것을 미리 당겨서 하자면 육의 열매가 뭐냐하면 시기와 질투가 있지요. 그게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뜻이에요. 제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고 못 고친다니까요. 고칠 수가 없어요. 왜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이 죽은 자를 살렸잖아요. 죽은 나를 내가 살렸습니까? 아니지요.


나는 죽어 있는데 외부에서 나를 살렸잖아요. 외부에서 살리심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상태인가를 남은 생을 통해서 새록새록 마음껏 보여 줘야지요. 이렇게 앉아 있어 점잖지만 나이 90쯤 되면 자식들 보고 욕하고 너희가 바쁜 모양이지 자주 안 오는 거 보니까 그래 내가 너희를 다 키웠어! 하고 행악질을 하는 거에요. 어머니 그렇게 안 봤습니다. 권사님이 그러시면 안 되는데 권사가 왜 붙여요? 거기서! 뭔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이러다 지옥 가겠다! “그래! 나 지옥 간다!” 예수님이 좋아요? 미쳤나 예수님을 왜 좋아 하는데.. 다 그랬던 사람들이에요.


40대에 50에 주여! 주여! 하며 새벽 기도 하던 사람들이에요. 자식들을 위해서. 알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구원 받아요. 우리는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믿을 게 없음을 인장할 때 성령이 한번 오면 떠나지 않아요. 90대에 행악질해도 40대에 성령이 오면 오히려 우리를 까발리지요. 내가 성령을 소유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안되요. 성령은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물어 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값을 치뤘는지 얼마나 개판이었습니까? 내가 모르는 개판, 내가 모르는 지독한 악마를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살려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따라서 육의 열매라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웃음) 아니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열매라고 한 겁니다. 보게 되면 항목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옛날에 예수 믿기 전에는 그랬지가 아니에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와야 될 것들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막 살아서 남을 해코지하면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면 그 조절을 보면 질투에도 너무 나가는 질투와 적은 질투가 있어요. 우리는 막 나가는 것을 진짜로 보지만 살아가면서 작은 질투도 질투에 포함되듯 나는 죽은 자였었어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계속 나와서 구원이 아닌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을 증거케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내가 구원받으려고 천국에 가려고 성경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지만 시작은 내 좋으라고 보다가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면 나는 이미 망가졌고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쪽으로 일하시는 것을 증거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