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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7 21:28:03 조회 : 479         
사무엘상 45강(하나님의 변동), 마태복음 107강(관계망)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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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12-29 23:17 
하나님의 변동 (삼상 15장24-35절)

 

대전- 45강

 

이근호

 

2018년 12월 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24-35절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 15: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 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삼상 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삼상 15: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삼상 15: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 15: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삼상 15:32) 사무엘이 가로되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삼상 15:33)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삼상 15: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

(삼상 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울의 말이 천상유수처럼 굉장히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사울이 신앙인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높이여기고. 여기에는 말씀이라고 적혀있죠. 자기보다 말씀을 더 높이 여긴다, 자기보다 더 가치 있게 본다 이 말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서 낮추어보는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두 가지가 지금 사울의 입에서 나옵니다.

 

신앙입니까? 이거 신앙이에요?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보다 더 높게 여겼다. 이 두 가지만 해도 한국교회에서는 신앙이라고 쳐주잖아요.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은 첫 번째 이 하나님이 가짜라는 겁니다. 두 번째 이 하나님도 가짜가 됩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오늘 첫 강 사무엘상 강의가 어려운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라는 이 질문이 성립되는 곳에 진짜 하나님이 있어요. 이 질문이 성립이 되는 곳에.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하나님이 이미 계신 것을 안다면 진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라는 의문을 던지겠습니까? 안 던지겠습니까? 안 던지죠. 그렇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진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질문을 안 던진다 이 말이죠. 집에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밥상차려 주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니 같이 생긴 아주머니! 진짜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쪽 어머니를 어머니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뜻이죠.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보다 더 높였다. 지금 강의에서 이걸 막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보다 더 높고, 자기는 거기에 종속되어 있고, 모든 만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근데 이 하나님이 가짜일 줄이야 상상도 못하죠.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그렇게 하는 사울 본인은 이런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를 진짜 신앙인으로, 진짜 인간으로, 자기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중에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것이 가짜라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제가 아까 물었습니다. 일단 정답에서 진짜 하나님은 없다가 돼요. 없고, 진짜 하나님이 없다면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고 인간은 누가 만들었느냐? 이렇게 문제가 나오겠죠.

 

자, 일단 하나님은 없고요. 두 번째는 뭐냐 진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질문을 할 때 그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실패하는 현장에 나타나요. 실패하는 현장. 인간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 됨이 거짓임을 드러내게 하는 기능으로서의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쉬운 예를 들면 아들과 엄마가 살고 있는데 서로 저녁식사를 합니다. 저녁식사를 하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님! 어머님은 진짜 어머님이 아닌 것 같아요?” 드라마에 그런 것이 있어요. 딸이 “어머님!” 하니까, “내가 니 어머니 아니야. 니 고모야.”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를 혹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인데.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저녁에 하는 일일MBC드라마. 회장부인이라는 사람이 “유경아! 나 니 진짜 엄마 아니야.”라고 하죠.

 

진짜 엄마가, 진짜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는 것을 들통 내는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진짜 하나님이 하셔요. 진짜 하나님이 나서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가짜라는 것을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사무엘상에서 진짜 하나님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누가 하겠어요? 사무엘선지자가 하는 겁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로 하여금 니가 평소에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거짓된 엉터리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짜 하나님이 그 현장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짜가 없으면 여전히 하나님은 없다가 돼요. 가짜를 가짜로 들추어내는 그 작용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은 나타나시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러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정도해도 충분하지 않겠느냐 라고, 여기에 자꾸 집착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이 좋아서 그래요. 자기 자신을 포기를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이 들통 났잖아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아들뿐인데, 아들은 예수님뿐이죠. 나머지기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쫓겨난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인간한테는 상당히 거북스러운 거예요. “내가 가짜라는 말이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묻죠. “그럼 니 진짜인줄 알고 있었어?” 가짜냐, 진짜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 서있을 때 그렇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중요해요.

 

십자가 앞에 설 때 인간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함이 등장하는 겁니다. 보통 교회에서도 십자가이야기를 자주는 안 하지만 더러는 하죠.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는 하고 있잖아요. 그럴 때 딱 뛰어들어서 물어보세요. “당신이 왜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까? 나는 당신 같은 훌륭한 신앙인을 처음 보는데 당신은 왜 죄인이라고 합니까?”라고 하면, 저쪽에서 할 말이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그것도 가짜에요. 그것도 구라 떨고 있는 거예요. 끊임없이 자기를, 그것을 자기 단도리라고 합니다. 자기를 괜찮은 자기로 챙기는데 스물네 시간을 소비해도 다 모자라요. 그것을 자기정당성이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옳다고 하는, 정당하다고 하는 그것을 위해서 전적으로 다 갖다가 쏟아 붓는 겁니다.

 

전에 대전모임에 오신 사람 중에서 누가 오셨느냐 하면은 지방교회 사람들이 오신 적이 있어요. 한 몇 개월 다녔는데. 지방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방금 제가 한 이야기에 해당이 되는 사람들이에요. 지방교회. 워치만 니 하는 쪽에. 하나님은 관심이 없어요. 나 구원받겠다는 거기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들이에요. 거기에 올인 하는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것.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왜 구원받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느냐를, 스스로 이게 반칙이 아닌가, 스스로 이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를 물어볼 수 있는 그런 여력이 전혀 없어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짓도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감히 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사무엘상 본문에서 등장인물이 누굽니까? 사울과 또 한 사람은 사무엘이죠. 사울과 사무엘이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서, 지금 두 명이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혼자 하는 것이 아니죠. 성도는 예수님과 둘이 해야 해요. 그러면 사울은 가짜고 사무엘은 진짜죠. 진짜와 가짜가 만날 때 여기서 누가 등장한다? 진짜 하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등장해요.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가짜를 가짜라 하고 진짜를 진짜라고 하신다. 그렇게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울과 사무엘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 사무엘상이야기가 성경이 기록된 것은 오늘날 우리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니가 사울처럼 당한 경우를 니도 당해봤냐?”라고 우리보고 묻는 거예요. 우리는 남들이 우쌰우쌰 하는 대로 따라가 줬기 때문에, “너 신앙 아니야.”라고 누구한테 지적받은 적이 있습니까? 많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울과 사무엘을 왜 등장시키느냐 하면은, 이 같은 경우가 우리에게 일어났는가를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한테 지적을 받아야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한테 지적을 받아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이 물음은 “예수님한테 지적받은 경우가 있느냐?” 하고 동일한 물음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사울을 지적하죠. 지금은 누가 누구를 지적한다고요? 예수님이 우리를 지적하죠.

 

지적할 때, 하나님의 존재인정,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높이는, 아주 겸손해 보이는 이 모습, 그런 것들이죠. 하나님의 존재인정을 좀 더 세분화시킨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거예요.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바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 번째 같은 경우, 하나님을 자기보다 높인다는 것은, 낮추고 또 낮추고 겸손하고 또 겸손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그럼 교회가 하는 일은 뭡니까?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거. 이게 교회에서 하는 일의 전부가 아닙니까?

 

이거 말고 딴 거 있습니까? 늘 기존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까 어떻습니까? 이거 말고 딴 거 있어요? 없어 보이죠. 이 전체가 가짜라는 것을 교회가 해야 되는 겁니다. 이 전체가 가짜라는 것을. 삼위일체 인정하고 낮추는 이것을 이단이라고 교회가 지적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걸. 이걸 지적할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괜찮은 신앙인이 등장해야 됩니까? 누가 등장해야 돼요? 바로 십자가가 등장해야 돼요. 십자가가. 십자가가 등장해야 돼요.

 

자, 그러면 이걸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뭐라고요? 이게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뭐다? 십자가다. 그럼 십자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경건해 보이는 것을 가짜라고 할 수 있느냐,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35절 마지막을 읽어보세요.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자, 끝에 뭐가 나왔느냐 하면 후회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하나님의 후회’입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거예요. 자, 제가 질문을 하면서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아까 첫 번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했죠. 두 번째는 하나님은 높이고 자기는 낮춘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 속에서 하나님의 후회하심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오죠.

 

왜?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철두철미하고 실수가 없기 때문에. 실수 안 하신 분이 후회한다는 말은, “아하! 내가 일을 잘못했구나. 내가 이것도 모르고, 내가 미리 알지 못했네.” 이럴 때 후회가 되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은, “사울 니가 그렇게 나올 줄은 사전에 꿈도 못 꿨다.”라고 할 때에는 후회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하나님의 후회라는 이 요소가, 하나님의 절대적 존재와 하나님은 높으시니까 나는 낮춰야 된다는 이러한 공식에 이 후회가 들어갈 자리가 있어요? 없어요? 들어갈 자리가 없죠. 대단한 분인데 후회를 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거죠. 앞뒤가 안 맞죠. 창세기 6장 5절부터 6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과 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기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고’ 이렇게 하셨는데, 마치 인간에게 잔뜩 기대를 했다가 인간이 기대를 저버리니까, “아이고,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하고 탄식하고 근심하는 모습이 나타나죠. 하나님이 굉장히 허술하신 분이시네요. 하나님에게 굉장히 허술한 면이 있네요. 전지전능하시고 예정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해놓고는 뭔가 하는 일에, 계획에 자꾸 빵꾸가 나는 느낌이 들고 허점을 보이는 느낌이 들죠.

 

그러면 보통 하나님을 믿을 때는 절대 신뢰하지 않습니까? 하자가 없고 오류가 없음을 믿고 절대적으로 당신에게 기대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뭐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근데 후회하시는 하나님한테 맡겼다가는 같이 거덜 날 일이 있습니까? 이렇게 허술한 하나님에게 제대로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겠어요?

 

자, 여러분이 이야기해보세요. 하나님의 후회하신다는 그 취지가 뭘까요? 자,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죠.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하니까, 그럼 무슨 하나님을 믿는 셈이 돼요? 후회하시는 하나님, 어설픈 하나님을 믿는다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바로 하나님의 후회 같은 요소를 담아낼 수가 없어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분을 상품화시켜가지고 무조건 믿고 기대면 천당 간다는 이런 식의, 그걸 상품화시키고 그걸 전파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하나님 가운데 숭숭숭~ 구멍이 났다는 이 사실에 있어서는 그들이 감당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후회하심의 취지가 뭐냐, 이 시점에서 너무 뜸들이지 말고 직접 말씀드려야겠죠. ‘모든 것과의 연관성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일부러 참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과의 연관성이에요. 모든 것과의 연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는 추이나 사태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모습을 조정해나가시는 분이시다.’라는 이 말입니다. 조정해나가시는 분.

 

골목식당에 나오는 백종원 셰프가 있죠. 그 사람이 처음에 나올 때 설탕을 막 뿌렸거든요. 맛있게 하려면 설탕을 뿌려라! 그전까지는 설탕은 몸에 해롭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설탕을 막 부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사람이 밥이나 죽이나 막 아무데나 설탕을 뿌렸습니까? 아니면 상황 봐서 집어넣었습니까? 상황 봐서 집어넣었죠. 추이에 따라 집어넣었죠.

 

인간들이 생각하는 고정된 하나님은 그냥 믿기만 하고 겸손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죠. 근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들이 터져 나오는 죄악과 더불어 변동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고 있는 겁니다. 알리안츠보험에서 나오는 상품 중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있어요. 변액 상품이 있죠. 다른 데도 다 있지만.

 

변액 상품이 뭐냐 하면 고정금리가 아니라 주식이나 투자로 인해 이윤을 많이 주고 적게 주는, 말하자면 변액이죠. 변액. 변액이 뭡니까? 액수가 변한다는 뜻이잖아요. 액수가 변한다. 자, 과외를 할 때 “우리 애를 받아주면 한 달에 50만원을 줄게.” 이렇게 계약하는 가정도 있지만, “애가 성적이 오르면 10만원을 더 줄게. 근데 성적이 내려가면 10만원은 뺀다. 콜call?” 이런 게 있다고요.

 

하나님이 유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을 생각할 때 인간보다 월등히 우월적인 존재로 고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알아요. 인간의 고정화된 신이 바로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이 돼요. 나는 부족하지만 주께서 안정되게 해주시면 내가 언제든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럴 때 하나님 좋아라고 섬기는 거예요? 누구 좋아라고 섬기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자기 자신은 손해 안 보려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하죠.

 

다시 말해서 “나는 결코 어떤 경우도 가짜가 안 될래.”라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할 때는 모자란 나보다, 부족한 나보다, 연약한 나보다, 나약한 나보다, 한계성 있는 나보다, 그보다 월등히 대조되고 차이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설정해놓고 그걸 상품화로 날려버린 거예요. 바겐세일 하듯이 그것도 바겐세일해서 마구 날려서, “믿고 의지하면 여러분의 장래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믿고 의지하세요.”라고 할 때에, 그게 바로 사무엘상에서 가짜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이 같이 변화하는 겁니다. 유도리(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처리)라고 하죠. 자,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자, 인간은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또는 누굴 대하면서 항상 인간은 뭘 갖고 나오느냐 하면은 목표를 가지고 신에게 나와요. 또 타인에게 나옵니다.

 

지금 사울왕의 목표가 있어요. 사울 왕이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은 아말렉과 싸우죠. 그럼 사울 왕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저쪽은 아말렉 왕이 누구냐 하면 아각이에요. 아각이라는 이름이 32절에 나옵니다. 아각이 나오죠. 그러면 저쪽의 왕, 아각은 아말렉의 왕입니다. 이쪽은 누가 왕입니까? 사울 왕이죠. 사울이 사적인 목표, 의도가 있었어요.

 

뭐냐 하면 저 아말렉을 자기가 지배하겠다, 접수하겠다는 사적인 욕망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목표를 세웠느냐 하면은 아말렉을 접수하게 되면 사울은 점점 더 왕의 지위가 공고히 되고, 자기의 권력이 더 세지는 거예요. 수제비하기 위해서 밀가루 반죽한 것에 또 다른 반죽을 치대버리면 그야말로 더 커지잖아요. 권력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권력도. 내 소유에 저 타인의 소유까지 겹쳐버리면 내 소유는 커지고 확장이 되겠죠.

 

개척교회 하는 목사님들이 제일 바라는 기적중의 하나가 옆에 있는 교회 목사가 말썽피워서 나오고 난 뒤에 그 교인들이 우르르 자기교회로 다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거는 뭐 전도할 필요도 없어요. 가만히 있는데 왔다 이 말이죠. 저쪽에서 십일조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그거 계산한다고 바쁘죠. 십일조 한 사람이 몇 명이냐? 푼돈 말고. 한주에 와서 5천원 내는 사람 말고. 정기적으로 십일조, 목돈 내는 사람. 그게 제일 관심사에요. 그거뿐이라니까요.

 

이게 목표가 돼요. 사무엘상 15장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에게 아각 왕이 갖고 있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유혹이 돼요. 유혹. 여러분 유혹이 없는데 목표가 세워질까요? 아니 목표를 세울 때, “나는 물에 빠져 죽을래.” 이것을 목표로 세우는 사람은 없잖아요.

 

겨울철 날씨가 춥다. 백화점 앞을 쓱 지나가다보니까, 세상에! 내가 입었으면 평생에 더는 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딱 맞춤. 그것만 입으면 내 목숨이 달아나도 소원이 없는 그런 옷이 있다 이 말이죠. 살짝 가격표를 보죠. 3,750,000원. 주인이 다가오죠. 어떻게 내가 이 물건을 놓고 발길을 돌려야 점잖은 손님이라는 티가 나겠는가, 지금 그거 고민하고 있어요. 3,750,000원짜리를 어떻게 구입합니까? 대출해도 안 되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 새벽기도 나갑니다. 특히 송구영신예배 때 새벽기도 하잖아요. 기도 백날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다른 기도는 다 헛방, 헛다리 기도에요. 진짜 기도는 그 백화점의 옷이 내 옷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유혹이 뭐로 이어집니까? 목표가 되죠.

 

또 동창회를 나갔는데 자식 자랑을 합니다. 걔가 이번에는 수능 전교 석차에서 1등급이 됐답니다. 자기 아이는 5등급이에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난 뒤에 송구영신 예배할 때 헌금봉투 들고 교회에 내든지 하잖아요. 할 때, “소원을 말하세요.”라고 하잖아요. 보통 해 뜰 때, 달 뜰 때 소원을 빌듯이 송구영신예배 때 소원빌라고 돈 갖고 가죠. 완전히 교회가 무당이에요. 올 때, 그 소원이 뭐가 되겠어요? 이 1등급은 욕심이고, 1등급은 SKY캐슬이나 하는 거고, 나는 5등급이니까 4등급 해달라고 이 목표를 잡을 때, 이 목표는 어디서 오는 거다? 유혹에서 오는 겁니다. 유혹에서.

 

그럼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이미 유혹이 맺어졌다는 자체가,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지만, 그런 사울 왕 자체는 뭐냐 하면 가짜 인간이 조작해낸 가짜가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바꾸라고, 그게 아니라고 신학 공부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적으로 뭘 부수느냐 하면은 32절을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무엘이 가로되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절 끝을 제가 읽습니다.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사울의 유혹을 찍어 빠개버린 거예요. 롯데백화점 물건 봤잖아요. 물건 봤거든요. 그날 저녁에 롯데백화점 불나버려요. 불내버립니다. 여러분, 아들과 아들친구의 차이점이 뭡니까? 부모로서, 또는 엄마로서 차이점이 뭡니까? 이거는 엄청난 차이점이죠. 친하게 지내니까 아들친구에게 라면 맛있게 끓여주고 다 좋아요. 어디까지나 아들친구하고 아들하고는, 아들친구는 남남이죠. 근데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다룰 때에 천국이 누구의 나라냐 하면 아들의 나라거든요. 그럼 천국에 들어가려면 누구처럼 되어야 해요? 제대로 아버지를 알고 제대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이 말입니다. 만드는데, 문제는 천국 갈 이 아들이 그동안 세상에서 누굴 만났어요? 친구, 프렌드friend죠. 이 프렌드가 있어요. 친구들이 있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제목을 하나님의 후회라고 했는데, 이걸로 바꿔버릴까요? 찍어 쪼개버림으로. 아들 친구를 찍어 쪼개버리는 거예요.

 

근데 이게 왜 사무엘 쪽에서 이렇게 하느냐 하면은, 이걸 사울은 합니까? 못했습니까? 사무엘상 15장에서. 못했죠. 못한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다 죽이라고 했는데, 사무엘상 15장 8절에서 9절을 보세요. 8절,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절,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남기고”



왜 남깁니까? 접수거든요. 접수. 접수다 이 말이죠. 목회자 떠난 이웃교회 교인들이거든요. 오지 마세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각양 좋은 거예요. 특히 십일조 하면 가장 좋은 양입니다. 이걸 왜 찍어 쪼개버립니까? 왜? 유혹이라는 하는 것은 그동안 목표였던 것입니다. 목표. 그동안 목표였거든요. 난 그렇게 됐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는 목표였다 이 말이죠.

 

인간이 가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목표가 매일같이 새롭게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등장한 그 목표는 어디서 왔느냐, 유혹을 받아서 그래요. 유혹을 받아서 목표로 전환된 겁니다. 유혹이 목표로 전환된 거예요. 아침에 눈떠서 그게 없으면 하루생활 권태로워서 못합니다. 심심해서 못해요. “사는 게, 이게 뭐 사는 것도 아니고.” 이래 되는 거예요. 반드시 갖고 싶다,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천국에 못 가는 겁니까? 이래 되죠. 그래서 하나님은 유동적인 하나님이에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짓거리는 하나님의 후회할 짓거리만 해요. 후회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내가 니 꼬라지 보니 후회 안 할 수가 없다.” 날마다 후회할 짓거리만 나타나요.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위주가 아니라 나 위주기 때문에. 나 위주거든요.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기쁨이라는 이것은 입에 발린 거짓말입니다.

 

아들과 아들친구를 다시 봅시다. 왜 아들은 엄마가 친구를 내쫓기 전에 왜 못 쫓아냅니까? 친구처럼 되고 싶어서 친구한 거예요. 이용가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목자하고 양치기 소년의 차이점이 뭡니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목자가 있죠. 크리스마스 때 나오는 대목. 광야에 천사가 와서..., 목자하고 양치기 소년의 차이점은 목자는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소식을 듣고 가봤습니다. 이거는 자기를 잃어버렸어요. 지금 양을 쳐야 된다는 자기 본연의 임무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천사가 와서 전한 소식에 비하면.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두는 유명한 이야기를 아시죠?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물동이를 버려뒀다니까요. 그날 저녁 밥은 다했어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버려뒀다는 것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라는 인생에서, 내가 어떻게 물 길어서 밥 먹고 사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이제 내 안에 쑥 들어오게 되었다 이 말이거든요. 그 까짓것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사는 게.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활이 있는데 죽는 게 왜 무섭습니까? 그렇죠. 부활이 있는데. 부활이 없으면 죽는 것이 무서워요. 근데 부활은 뭡니까? 뭘 해야 부활이 돼요? 죽어야 부활이 되잖아요. 왜 축구 전반전도 안 뛰고 포기합니까? 전반전이 십자가라면 후반전은 부활이다 이 말이죠. 전반전 십자가 뛰어줘야 뒤에 부활이 되잖아요.

 

교회교인들이 믿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나는 믿기지가 않아요. 믿는다고 해놓고는 살라고 아주 악을 쓰고 사니까. 특히 연세 많은 70넘은 사람들은 그냥 악으로 살아요. 옛날 놀던 가락, 고집이 있어가지고. 그래서 자식들이 집안 어른 모시기기 그렇게 힘든 겁니다. 그 고집 때문에. 곧 죽어도 자기는 어른이라는 겁니다. 곧 죽어도. 며느리한테 모든 것을 수발 다 받으면서도 자기는 곧 죽어도 시어머니 노릇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이고, 시어머니 노릇 가관이에요. 가관. 옛날에 어른 행세하는 가락이 있어가지고, 그거는 장기기억이라 오래가요.

 

목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어요. 자기의 구세주,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만나는 것을 생각해서 자기 양 보는 이런 문제는 중요하지도 않은 거예요. 그런데 양치기 소년은 뭐였습니까? 뭐가 중요했어요?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사기 쳤죠. 나중에 진짜 나타날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만 챙기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인들이 목자입니까? 아니면 양치기 소년입니까? 전부 다 양치기 소년들이에요. 거짓말쟁이들이에요. 믿음도 거짓말, 모든 것도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노래 겨울수련회 교재에 올려놨죠. 조항조가 불렀던 것이거든요. 가사를 개사해보세요. 모든 것이 거짓말이에요.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자, 진도 나겠습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쳤죠. 지금 사울은 아각이 갖고 있는 것이 부럽잖아요. 그럼 아각을 쳤다는 말은 누굴 쳤다는 말입니까? 사울을 쳐버린 거예요. “왜 니는 친구 먹어서는 안 될 그것들에 왜 미련을 두고 집착을 했느냐?”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를 바꿔서 순환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게 되면, 십자가 은혜가 오게 되면 내가 가져야 될 자가 아니라 내가 없어져야 될 자라는 것을 아는 객체가 될 때에, 우리는 현재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아는 거예요. 이 은혜의 집단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그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누구이어야 하면 바로 왕이어야 하고, 그게 누구여야 하느냐, 사울이어야 하죠.

 

근데 사울은 이걸 못하고 있죠. 나라가 자기 것이라는 거예요. 마치 교회가 목사 본인 것이라는 것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주님을 증거 해야 될 목사가 교회부흥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주 이거 가짜죠. 교회 불이 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일곱 교회가 나오죠. 왜 일곱 교회냐 하면은 일곱 교회가 돌아가면서 가짜인 것을 보여주니까 일곱 교회에요. 일곱 교회는 사실 필요치 않아요. 하나의 교회뿐이에요.

 

왜냐하면 일곱 교회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겁니다. 오른손으로. 이번에 수련회 할 때 제가 오른손을 강조할 거예요. 어느 대목이냐 하면 아가서 2장 6절에 나와요. 왼손으로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안아주는 포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이 포즈 한번 경험해야 되는데. 왼손으로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감아주거든요. 아가에 나오는 그 남녀, 남자가 솔로몬이 아니냐 하는 그런 설은 많아요. 그 남녀가 나올 때 그 포즈 하나하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다 중요한 것들입니다.

 

왕의 교체에 나섭니다. 교체에 나서려면, 왜 교체에 나서는지 이유가 드러나야 되잖아요. 따라서 사울이 있던 자리가 하나님의 뭐로 채워지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후회하심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유동적이에요. 변액보험이라고 하죠. 하나님께서는 이 연관성, 세상 모든 것이 연관성이라고 할 때에 하나의 일일로 들어가는 거예요.

 

후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같이 고통 받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는 죄 때문에, 자기는 초월적 위치에 있지 않고 니가 나쁜 짓하면 내가 고스란히 당하는 그런 입장에서 이 세상 형성에 같이 관여가 되어 있는 거예요. 오늘도 마찬가지에요. 주님께서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안 아프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성도가 당하는 고통에 함께 있어요. 성도가 당하는 아픔을 같이 아파하시고. 주님을 너무 높은데서 찾지 마세요.

 

인간의 욕심 때문에 다치고 있는 사람을 보자 이 말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 나의 욕심 때문에 누가 다치죠? 내가 다치죠. 바로 내가 다칩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내가 다쳐요. 이게 성도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 아니면 내 욕심 때문에 남이 다치지만 성도는 내 욕심 때문에 주님이 간수하는 ‘나’는 ‘나의 나’와 ‘주님의 나’가 있거든요. 주님은 이걸 구분하려고 하는데 나의 나가 자꾸 방해하고 훼방질 놓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상 15장 한번 봅시다. 26절 봅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애초부터 왕이 못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왕이 되게 하고 난 뒤에 비키세요! 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내가 내 편리를 위해서 만든 하나님이잖아요.

 

근데 주님께서 비키세요! 나를 치워버리는 가운데서 뒤돌아보면 진짜 하나님은 내가 눌러앉아있었고 숨 막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돌아보면서 그걸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중요해요? 주님이 중요해요? 주님이 중요하다는 것은 짧은 순간이지만, 나보다 저 중요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의 인생은 한없이 가벼워지죠. 한없이, 새털보다 더 가벼워지죠. 한없이 가벼워져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요. 내가 이렇게 자유로워도 되나? 나쁜 짓만 했는데 내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어?

 

사람이 자기 죄를 알게 되면요 못할 일이 없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집에 있는데 채권자, 빚쟁이들이 몰려왔다. 남편은 겁나서 도망가고 아내가 마중을 나옵니다. 남편은 뭐 부동산중개한다고 하고 아내는 노래 가수한다고 다 말아먹고 있거든요. ‘차달래 부인의 사랑’이라는 드라마입니다. 다 보시네요. 자, 이렇게 빚쟁이들이 왔을 때에 왜 남편이 도망을 갑니까? 감당이 안 되니까 아내한테 맡기고 가잖아요. 만약에 남편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안다면 빚쟁이가 천명이 와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알면 무서울 게 없어요.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죄를 알게 되면 살고 싶은 의욕도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두려울 게 없잖아요.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관계없어요. “괜찮아! 뭐 그럴 때도 있어.” 그런 식으로 넘어가버리죠. 사람이 언제 무서운가 하면은 자기가 의롭다고 여길 때, 모든 것이 악마의 시험이고 공포가 찾아옵니다. 자기가 잘났다, 정당하다, 의롭다고 할 때에. 나는 다치면 안 돼, 다치면 안 돼, 그럴 때 공포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교인들한테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악마의 표적이 되게 만들어요. 그리고 목사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믿음 좋습니다. 시험해보세요.” 근데 시험해보면 큰일 나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시험할 꺼리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시험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이 시험은 악마의 시험이에요. 그래서 좀 나아진들 그거 어디에 써먹으려고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 왕을 폐위시키죠. 그럼 우리가 사울 왕이라면 신약적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옳소이다.”라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옳소이다. 주께서는 의인으로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내가 건방떨면서 내가 왕이라고 착각했었습니다. 주님의 후회하심을 이제야 감각으로 느껴지니, 세상에 주님을 만난 이 기쁨과 자유를 제가 어떤 것으로 되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것뿐이에요.

 

성경은 답변이 굉장히 쉽습니다. 성경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문제는 이게 몇 초 안 간다는 것이 문제죠. 이게 몇 초 가지를 않아요. 몇 초 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기는 이게 변액이라는 게, 매일같이 찾아와서 어느 정도 나는 복음 안다고 하는 나를 다시 주저앉히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하나님을 또 다시 소개하고 또 다시 알려주는, 진짜 주님께서는 하루를 48시간으로 사시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느껴지고 알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 혼자 바빠요.

 

우리는 내 욕심 챙기고, 백화점 옷 못 사가지고, “내가 이래 살아서 뭐 하노? 일 한번 저질러 볼까?”이런 것만 있잖아요. 나를 꾸미고 나를 돋보이게 하는데 온 정신을 거기다가 다 소모시키는데요, 그게 바로 사울이었다. 사울은 지옥 간다가 아니라, 우리나 사울이나 다를 바가 없구나. 근데 주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셔가지고, 요새 말로 예수님을 보내셔가지고, 주님께서 니 자신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까지 주님 자신의 몫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번 봅시다. 27-28절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27절,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절,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왕의 이웃이 누구겠습니까? 다윗이죠. 다윗. 다윗에게 주는 거예요.

 

줄 때, 곱게 인수인계를 하지 않고 아주 난폭한 일을 의도적으로 일으켰죠. 난폭한 일을. 이거는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니한테 왕위를 물려준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빼앗아서 주시는 거예요. 강제로 빼앗아서 주시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과 인간의 우정이라든지 사랑이라는 것은 믿지 마세요.

 

오늘 첫째 시간의 결론은 뭐냐, 사람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잘해줄게. 내가 니를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아느냐? 진짜 나 너 때문에 산다.”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그거 전부 다 믿지 마세요. 믿은 적 없죠. 이게 뭐냐 찢어지는 거예요. 찢어지는 거. 인간의 관계는 찢어지는 겁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부부가 믿어서 문제가 아닙니까? 안 믿으면 부부생활 좋은데. 너무 상대를 다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사랑을 너무 이상화시키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랑은 이 땅에서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데,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한테 무슨 사랑을 기대해요? 내가 남을 사랑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기를 기대합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데. 주께서 찢어주시고 다시 죄인과 의인을 합치하시는 이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간다는 이것이 이 첫째 강의의 내용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8-12-29 23:20 
관계망 (마 26장 1-5절)

 

대전- 107강

 

이근호

 

2018년 12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6:1-5절

 

(마26: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마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마26: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마26:4)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마26:5)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자,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할 차례입니다. 마태복음 26장부터 보게 되면, 본격적으로 십자가 사건 속으로, 소용돌이 속으로 진행해갑니다. 2절에 보면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을 미리 다 아셨어요.

 

그리고 이 십자가사건에 관여되고 있는 인물들이 나오죠. 유월절 이전에 모든 것을 깔끔하게, 사회불안요소를 제거하자는 식으로, 정치적으로 이렇게 나온 겁니다. 십자가사건이라 할 때에, 우리 인간들이 제일 먼저 봐야 될 것은 이게 정치적사건이라는 겁니다. 정치적사건이라는 말은 이게 권력이 작용하고 있고, 이 정치적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타인간의 권력으로 엮어진다는 거예요. 인간의 권력이라는 게.

 

사람은 이렇게 자기 일 같으면 그저 자기 일만 열심히 살면 그나마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죠. 근데 외부에서 경찰이 온다든지, 세무서에서 온다든지, 나라에서 군에 아들 보내라고, 전쟁 났으니까 입대시키라고 왔을 때 뭘 느끼느냐 하면은 나의 이 작은 힘이 감당 못할 외부의 강한 힘이 오는 거예요. 가택수색 하겠다는 감당 못할 힘이 오는 거예요. 이럴 때 뭘 느끼느냐 하면 권력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냥 식구끼리 뭐 생일축합니다, 라는 것을 할 때 이럴 때는 안 느껴요.

 

아주 어려운 말을 쉽게 하게 되면, 쉬운지 어려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사이에는 정의로움은 없습니다. 아는 사이에 정의를 찾으면 어떻게 돼요? 아는 사이에는 그냥 정으로 가는 거지, 얼마나 정의로우냐 하는 것은 필요치 않아요. 아는 사이에서는. 손자가 할아버지 기업을 고발하고 하면 안돼요. 아는 사이에는 정의로우면 안돼요.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내 힘의 권력 말고 다른 힘의 권세가 들어올 때, 지적당할 때 우리는 힘을 느끼는 거예요.

 

음식이 있잖아요. 내 몸이 만져지잖아요. 실제로 있죠. 음식은 눈에 보이죠. 근데 권력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남이 이렇게 차고 들어올 때는 권력이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권력이 더 실제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냐, 부들부들 떠는 공포가 유발되는 겁니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공포가 유발되는 거예요.

 

부부사이가 좋지 않을 때 여자들이 상담하는 사람들이 있죠. “나는 남편 꼬라지만 봐도 심장이 떨린다. 벌써 각방 쓴지 40년 됐다. 신혼여행 갔다 와서 각방 썼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쪽 몸무게 70키로 잡고 이쪽 60키로 잡고, 몸체가 딴 몸인데 왜 벌벌 떱니까? 몸이 딴 몸인데. 아니 마네킹보고 떱니까? 아니죠. 근데 왜 떱니까?

 

이게 바로 인간과 인간관계는 그냥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체가 아니라, 이게 실제가 아니라 그 둘을 이어주는 권력이 실제가 되는 거예요. 권력은 눈에 안 보입니다. 따라서 악마가 실제입니다. 악마는 인간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그 죽음을 오므려 쥐고, “이러면 죽는데이~”하면서 협박 공갈하는 악마는 실제적입니다. 그 실제가 예수님 당시에는 정치적 권력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권세 잡은 악마, 실제 하는 힘과의 싸움이에요. 지금 중국에서는 크리스마스 행사하는 사람들을 다 잡아두려고 하고, 부르네오 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면 5년형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목사 다 잡아가죠. 국가가 정복의 힘으로 다 잡아가죠. 예수님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정복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계가 옛날 십자가사건과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지금 한국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도 왜 가만히 있느냐? 첫째는 복음이 뭔지 몰라요. 왜? 교회만 있기 때문에. 복음을 외쳐야 뭐 핍박을 받죠. 복음을 전하는 자도 없고 자기들끼리 착한일 하는데 잡아가면 안 되죠. 자선냄비해서 구제하는데, 그건 착한일인데 왜 잡아갑니까? 복음이 아닌데.

 

크리스마스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기예수가 태어났을 때는 누가 죽었어요? 헤롯이 베들레헴 두 살 아래 남자애들을 다 죽였죠. 이렇게 복음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아주 피 터지는 살인사건 같은 게, 험악한 분위기가 유발되는 거예요. 실제로 교회에서 복음전해가지고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 그리고 또 목사와 복음 아는 사람과 아닌 사람과 치열한 투쟁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사건은 정치적사건이에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사건을 먼저 너무 복음적으로 다가서지마라는 말이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첫째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이 없어요. 없고, 몸부림치니까 그때그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냥 복음으로 이렇게 돼버리면 교회가 복음을 전부 둘러쳐버려요.

 

그러면 복음이 있고 교회가 그 복음을 둘러쳐버리면 사람들은 교회를 믿지 복음을 안 믿게 되거든요. 교회가 복음이 있다는 소리를 가지고 뭐하냐면 정치적인 권력행사를 해버려요. 그러면 교회 목사 말 안 들으면 지옥 가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 권력행사거든요. 정치적사건입니다. 이 정치적사건의 특징이 뭐냐, 뭐로 움직이는가 하면은 법으로 움직여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복음은 뭐로부터의 벗어남? 법으로부터. 법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어떤 법? 양심의 법이고 뭐고 어떤 법으로부터도 저촉 받을 필요가 없어요. 왜? 죽은 자는 죽은 자를 재판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가짜끼리 재판해봐야 그 재판이 하늘나라까지 유효하지 않습니다. 재판은 누구의 재판이 유효 하느냐 하면은 의인이 죄인을 재판할 때만 하늘나라에서 인정해줘요.

 

그 재판의 기준이 뭐냐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결정이지, 얼마나 악했느냐 안 악했느냐, 얼마나 성실했느냐, 기도 얼마나 했고 헌금을 얼마나 했느냐, 그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일체 묻지도 않아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갔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뭐가 안 됩니까? 교회 목사 영이 안 서죠. 교회 목사 영이 안 서면 뭐가 안 됩니까? 정치적 세력화된 교회라는 조직체가 안서니까, 교회를 위해서라도 법이 있어야 되고, 그 법을 따라야 되고, 안 따르게 되면 저주받는다는 엄포와 협박공갈들이 줄줄이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설교하는 것 따져보면 전부 다 협박공갈들이에요.

 

협박, 공갈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거든요. 진리가 아닌 이유는 협박, 공갈 여기에는 보복이 따라오거든요. 협박, 공갈한다는 것은 이 보복을 만회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회복될 행함의 여지를 교회단체에서 제공해버려요. 당신보기에는 당신 집안이 엄마도 아프고 나쁜 짓도 많이 했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어떻게 행동을 똑바로 바꾼다든지, 반성한다든지 안 그러면 뭔가 충성하게 되면 행함을 통해서 만회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라는 것으로 장사를 하는 거예요. 교회는 협박주고 장사하고 협박주고 장사하고..., 협박은 돈으로 만회해주면 봐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일반교인들은 회사 다닌다고 바빠서 못하죠. 돈으로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예요. 하나님나라에, 성령이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돈만 내라. 우리가 대신 선교사, 기도부터 해가지고 모든 것은 전문가인 우리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이래 나온다고요.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어디 권력 안에 잠겨있다? 정치적 권력 안에 잠겨있고, 이 정치적 권력 안에서 인간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가야바나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어디에다가 질식시킵니까? 자기가 갖고 있던, 예수님을 죽일 때 힘이 어디서 나와요? 무슨 힘이에요? 정치적 권력이죠. 정치적 권력으로 예수님을 죽임으로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인다고 할까요? 우리의 말을 거스르면 결국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근데 여기 2절에 보면 뭡니까?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알아요? 몰라요? 미리 안다는 것이 대단한 거예요. 미리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권력은 아무리 노력해도 영적인 세계에 진입을 못한다는 것을 나의 십자가로 그걸 까발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러면 정치적 권세가 일단 이겼죠. 아무도 못 빠져나가잖아요. 못 빠져나갔죠. 못 빠져나갔는데, 그러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못 빠져나오는데 빠져나온 거예요.

 

그런데 일단은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뭐가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아무도 못 빠져나갔다가 선행이 되어야 해요. 아무도 못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못 빠져나갔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구원에 성공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 자기백성을 넣기 위해서는 빠져나간 주님이 도로 어디에 들어가야 합니까? 빠져나온 힘을 가지고 아무도 못 빠져나온 권세에 외부에서 타격을 가해가지고 구멍을 내야 되겠죠. 어떤 탈출구를, 봉창이라든지, 봉창을 내야 되겠죠.

 

그 봉창을 내는 것이 뭐냐, 이것이 바로 성령이 진입하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설명했으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세상은 무슨 세상이다? 바로 지옥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이 세상은 아무도 못 빠져나가는 지옥이다. 그런데 성공했다.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생겼다. 법이 있어서 성공했습니까? 법 없이 했습니까? 법 없이 성공한 거예요.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아줌마가 있죠. 그 사람은 천국 갔습니다. 어떻게 갔습니까? 법이 있어 천국 갔습니까? 법 없이 갔습니까? 법 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 간음법,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은 뭡니까? 구원되는데 보탬이 됐다? 안 됐다? 전혀 안 됐죠. 전혀 안 됐지만 구원에는 참여했어요.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간음을 안 함으로써, 이 말은 참 어려운데, 간음을 안 함으로써 이게 간음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간음을 안 하게 되면 계속 어디에 저촉을 받습니까? 간음죄에 계속 해당되는 사항이 되는 겁니다. 그냥 군에 갔다 오면 되는데, 계속 입대를 미루는 거예요. 그러면 군에 갔다 와야 될 법에 저촉을 받는 거예요. 이 간음을 자랑하면 안 되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내가 빠진 세계입니다. 내가 빠져있는 세계. 내가 관여 안 해도 만들어진 세계. 내가 관여 안 한다는 조건하에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근데 이 세상의 모든 세계는 누가 관여해요? 필수적으로 누가 관여하느냐 하면 내 세계, 내가 관여해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진다는 것을 미리 알죠. 그게 뭐냐, 이래 보면 돼요. 예수님이 요구했고, 예수님이 그 요구에 충족하신 세계. 예수님이 인간에게 요구했고, 그 요구를 누가 들어줬다?

 

인간이 들어준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요구한 당사자가 그 요구를 충족시켜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생성된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예수님의 이름의 세계입니다. 예수님 이름의 세계. 예수님이 제시했고 예수님이 혼자 다 이루신 세계. 지옥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부활은 이미 완성했죠. 탈출에 성공했잖아요. 탈출 성공한 능력을 다시 지옥 같은 세계에 집어넣는 거예요. 딱 집어넣는 겁니다.

 

바늘 찌르듯이 들어온 거예요. 바늘 뒤에 뭐가 달려 있느냐 하면 실이 달려있죠. 그 실이 뭐냐 하면 이미 죽음에서 부활한 능력이, 줄로 연결된 실이 성령이라는 바늘을 통해서 우리를 찌르게 되면 우리는 아야! 하죠. 아야! 왜? 자존심이 상하니까. 우리의 정당성이 소용이 없으니까. 내 잘났다는 것으로 평생을 살거든요. 갑자기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내가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가 반대말이에요. 의미 없다. 자살하나 사나 아무 의미가 없는 게 반대말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게 드러나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행함이 소용이 없으니까. 내 행함으로 탈출이 가능한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탈출 못하는 세계에 있잖아요.

 

그런데 한번 보세요. 평소에 우리가 누구한테 주눅이 들었습니까? 내가 만든 양심의 법, 내가 만든 법에 우리가 주눅이 들은 거예요. 자기가 만든 환상에, 환영에 오므라들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내가 부모한테 효도를 안 하면 남들이 나한테 뭐라고 욕을 할까?’ 이게 내가 만든 환영이에요. 특히 맏이, 장남장녀는 주의를 좀 해야 돼요. ‘무슨 일이 터지면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나보고 뭐라고 볶아댈까? 얼마나 내 행동을 주시할까?’ 본인이 그렇게 환상을 생각하는 중입니다.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데.

 

그게 선행에 과욕을 내는 거예요. 철저함에 철저함을 더 가하는 겁니다. 뭐 마귀의 시험이죠. 어떤 사태가 일어난 것은 내가 소용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으킨 사태거든요. 부모가 아프다, 시어머니가 아프다, 누가 아프다 하는 것은. 그걸 수발하면서 내가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내가 존재해봤자 이거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말해봤자 그 말이 무슨 실효가 있겠어요. 내가 말한다고 병이 낫습니까? 위로받는 것처럼 강요하지 마세요. 위로받는 것은 따로에요. 말 따로 위로는 따로입니다. 목사가 설교한다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 따로고 목사의 설교 따로에요. 설교 잘해가지고 구원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명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누가 빠진 세계라고요? 내가 빠진 세계. 다시 말해서 십자가 질 때, “아서라 고만. 따라오지 마! 너희들이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외치면서 십자가 지시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엄마가 잡채를 하는데 두 살, 세 살 먹은 딸애가 지가 돕겠다고 나서봤자 이게 잡채가 아니고 엉망진창이잖아요. “아서라 고만. 니는 주는 잡채나 먹어라” 이렇게 사랑으로 말리죠. 우리가 너무 나서서 문제에요. 우리가 너무 부지런해서 문제에요. 그 부지런함이 뭐냐, 나의 철저함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나의 철저함에서 나오는데, 나를 둘로 나눕시다. ‘내가 이해하는 나’와 ‘주님이 이해하는, 주님이 생각해둔 나’, 이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이유가 바로 십자가 사건 때문이에요. 십자가 사건 때문에. 일단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에게 하는 이야기는 뭐냐, 일단 좀 맞자. 니 좀 맞자. 뭐 구원해주세요, 라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좀 맞자. 다시 말해서 일단 좀 죽자 이 말입니다. 제발 좀 죽어다오. 근데 이 죽는다는 것이 숨을 멎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힘이 사는 힘보다 강할 때 죽음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이걸 설명하려면 할 수 없이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관계 또는 관계망인데,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새로운 관계가 나와요. 관계망이 나와요. 관계망이 되려면 나와 너가 성립이 되어야 둘 사이에서 관계망이 있죠. 어떤 애가 시골에서 혼자 공부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안 됩니까? 혼자서 공부해서 관계망이 안 되죠. 요새 하도 섬이나 촌에는 애가 없어가지고 교장선생님 한명, 애 하나 하고 달랑 둘이 분교가 있죠. 걔가 어느 정도 잘하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누구 하나 전학을 왔다. 이제 난리도 아니죠. 드디어 비교대상이 생기잖아요.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가지고는 안 돼요. 너와 나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너와 나의 관계보다도 뭐가 우선되느냐, 나가 우선이 돼요. 혼밥, 혼술이라고 하죠. 혼자 사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오늘날 20대입니다. 어떻게 결혼할거가 아니라 어떻게 혼자 사느냐가 우선이에요. 결혼은 뭐냐 하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결혼하고 안 그러면 말고 그런 거예요. 그냥 혼자 사는 거예요. 기술이 점점 늘어가지고 20대는 혼자 사는 것이 힘들지만, 자꾸 혼자 살다보면 30대쯤 되면 얼추 전문가 수준이 됩니다.

 

아가씨들이 옛날에는 결혼을 생각했거든요. 남의 애보면 아유, 예쁘다고 해가지고 나도 결혼해서 애 낳고 해야지 했는데, 이제는 20대 아가씨들이 직장에서 일하고 돈모아가지고 배낭 메고 해외 놀러가기 바빠요. 놀러가는 것도 처음가게 되면 뭐 놀라고 설레고 떨리고 하는 것이 있지만, 두 번 세 번 가게 되면 뭐 떨리지도 않아요. 하여튼 보너스 타게 되면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가까운 일본이라도 갔다 와야 돼요. 지금 연말이라 일본 가면 한국아가씨들이 거기에 다 가 있을 거예요. 비행기 값이 얼마 안 하니까. 보너스 타면 무조건 여행이에요. 여행.

 

요새 아가씨들 돈 안 모아요. 쓰고 보자는 거예요. 즐기고 보자.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는 겁니다. 세대차가 난 게 아니라 완전히 찢어졌어요. 세대차가. 말이 안 통할 정도라니까요. 말이 안 통해요. 혼자 사는 재주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거예요. 혼자 사는 거. 관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우리 관계가 있을 것이냐 하는 그것은 그냥 만날 때부터 헤어지는 카운트에 들어갔다고 보면 돼요. 100일 하고 빠이빠이. 200일 하고 빠이빠이. 전부 다 헤어지려고 만나는 것 같아요. 헤어지려고 만나요.

 

근데 십자가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에서는,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라는 사람이죠. 이미 사람이고 또 그 분은 하나님이죠. 하나님과 사람, 벌써 관계가 됐죠. 요한복음 8장 17-18절에 나오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율법에는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 내가 곧 증인이고 아버지가 곧 증인이다. 이래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8장 16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이걸 고기 잡는 그물이라고 합시다. 그물을 우리에게 던지는 거예요. 우리에게 고기 잡는 그물이 철렁하고 덮쳐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하게 되면, 우리 쪽에서 나온 믿음소망사랑이기 때문에 이거는 주님께 도달이 안돼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냥 열심이고 악바리고 낮추고 또 낮추고 겸손이고 온갖 거룩과 경건을 다 동원해도, 가봤자 중력에 의해서 자기 얼굴에 침 뱉기밖엔 안돼요. 모든 교회 앞에 붙어야 돼요. 침 뱉는 교회. 자기한테 자기 침 뱉는 교회. 침 뱉는 우리교회. 전부 다 자기한테 침 뱉기에요. 도달이 안돼요.

 

이 관계망이 되어야 하는데, 기도해놓고 오늘 나 두 시간 기도했다.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요. bring it back~ 보헤미안 랩소디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노래.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고요. 누굴 사랑한다고요? 내 사랑이에요. Love of my life 내 인생의 사랑. 다시 내 사랑으로 돌아와요.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사랑으로 채우지 마세요. 너무 심화문제를 냈구나. 내가 없는 내가 아닌 자리에 사랑으로 채우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백지영이 불렀던 ‘사랑 안 해’라는 노래 가사에 보면 나와요.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자리에 사랑 채우지 마’

 

이게 뭐예요? 비록 나는 내가 떠나도 떠나고 난 뒤에 니는 다른 여자를 만나지 말라는 이 말이거든요. 아내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죽고 난 뒤에 새장가 들지 말라고 이러거든요. 왜 아내가 못 죽느냐 하면은 자기 남편 다시 장가갈까봐 화가 나서 악바리같이 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나에요. 나. 관계가 사라진 나. 관계없는 나에요. 오직 나뿐이에요. 혼자라니까요. 혼자. 왜? 창세기 3장에서 뭘 따먹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따먹지 말라는 분과 내가 관계로 형성되어 있죠. 따먹지 말라는 그물망으로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어가지고, 계속해서 연결되고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마귀가 와서 그까짓 거 가위로 잘라버려라. 그래서 선악과 자체를 강탈했다 했잖아요. 선악과 과실을 도둑질 했다는 것은, 이제는 선악과를 누구 맘대로 한다? 선악을 누구 조정 하에? 내가 선이라면 선이고 내가 악이라면 악이야. 자기의 수하에 두겠다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하는 짓이고 우리가 그 마음을 닮은 겁니다.

 

엄마가 아프다. 남들이 판단을 어떻게 할까?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한다고요. 주님께서는 그 법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거든요. 남이 뭐라고 하던 간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과 나와의 관계거든요. 주님 때문에 집안에 누가 아프고 하는 일이 생겨서 주님과 나 사이가 어떤 사이인가를 알려주려고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나의 정당성, 나의 옳음, 나의 성실함, 나의 철저함, 나 이만큼 훌륭함, 그것을 남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활동을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인간의 한계가 그래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관계가 나와요. 관계. 관계가 나오니까 이 관계에 의해서, 아까 나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좀 맞자고 했죠. 십자가 사건에서 나는 어떻게 됩니까? 죽어야 되죠. 그럼 나는 있어요? 없어요? 죽어서 없어지고, 주님과 구원되는 새로운 나가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 사건에서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율법의 완성은 바로 형제를 위해서, 원수를 위해서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은 마치 역기봉처럼 바벨이 양쪽에 달려있어야 돼요. 그 안에 작대기가 사랑이라면 누구와 누가 사랑할 거냐, 라는 그 실체를 위해서,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위해서 매달리는 양쪽이 있어야 돼요. 이쪽은 의인이신 주님이고, 이쪽은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의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겁니다.

 

아, 이게 억수로 어려운 이야기에요. 강의를 하지만 아마 사람들이 제일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점이에요. 의인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이 점을 제일 모르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의아해할 거예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거 뭐 쉬운데, 목사님 왜 어렵다고 합니까? 라고 하는데, 누가 한번 찾아보세요. 누가복음 23장 34절. 제가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 입장에서, “아버지.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건은 아버지와 나의 사건이잖아요. 저들은 철딱서니가 없어가지고 일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분명히 제가 방금 알려드렸죠. 우리는 성령이 오기 전에는 십자가에 대해서 알아요? 몰라요? 모르잖아요. 이제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는 모르죠. 모르는데 우리는 모른다고 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모르는 것을 가지고 자꾸 악마의 시험을 받아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거예요. 이 안다를 쪼개보면 뭐가 들었는가 하면 선악이 나와요. 선악이. 선악이 뭐냐 하면 참 의로우신 분이 억울하게 죽었다, 라는 쪽으로 십자가를 이해해요. 이게 화근이에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죠. 멜 깁슨이 감독한 예수님이 얻어맞는 영화. 그 영화를 보시면 참 주님이 불쌍하다, 안 됐다, 그런 생각이 들죠.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가실 때 거리에 아줌마들이 나왔어요.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참 안 됐다, 불쌍하다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동정에 대해서 좋게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휙 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니나 챙기세요. 니나.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니 딸들을 위해서나 울라 이 말이죠.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 아줌마들은 선악체계를 가동시킨 거예요. 자기는 괜찮다 이 말이에요. 자기는 십자가 안 졌으니까 편안한데,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 저렇게 억울하게 됐으니까 참 안 됐다가 되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십자가 성령은 바로 이러한 지층을 뚫고 들어오면서 우리가 이처럼 철딱서니가 없다는 것을 전부 다 까발립니다. 트랙터로 밭을 갈 때 보면 밑에 있는 흙들이 다 까발려지죠.

 

십자가가 지나가게 되면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민했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정말 이거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그것마저도 은혜인데 고민고민하고 있었다는, 우리의 정당성에 부합된, 이 정도는 가져야 된다는 그 오기의 죄성을 완전히 LA이 갈비 하듯이 다 뒤집어내는 거예요. 뒤집어내요. 성령이 오게 되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고민할 것은 주께서 주신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 몸이 아프다. 그래서 뭐? 죽으라고 아픈 건데 죽어야지.

 

자, 여기서 모른다고 했죠. 그럼 진도 한번 나가봅시다. 나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이해하는 나. 내가 이해하는 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선악과에서 나와요. 선악과. 선과 악을 누가 통제 하겠다? 내가 통제하고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항복하고 이익이 되면 이걸 뭐로 봅니까? 선으로 보고. 나에게 불리하면 이걸 악으로 보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베트남 사람이다. 근데 박항서 감독이 와서 스즈키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내가 베트남 국민인데, 그럼 그게 뭐가 돼요? 악이 돼요? 선이 돼요? 선이 되죠. 박항서 감독 때문에 우린 악한 나라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트남 축구가 우승을 하니까 베트남 국민이 왜 좋아합니까? 이게 잘못된 거예요. 우리 애가 성적이 올라가는데 내가 왜 좋아해요? 내가 이해하는 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이해하는 나.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공부 잘하고 못하고 거기에 대해서 니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왜냐하면 나를 이미 죽은 자로 다루시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자가 어떤 목표 같은 것을 정하고 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인식이 그만 사라지고 앞으로는 악바리처럼 더 살아야지, 왜? 희망이 있으니까. 갑자기 또 희망을 만들어내 버렸어요. 희망을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이 나, 다른 말로 자아는 뭐냐, 늘 구성적이라고 했어요. 구성적이다. 나라는 것을 내가 구성, 조성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이해하는 나는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나에요. 십자가 안에 있는 나는 뭐냐 하면 이거는 구성적이 아니고 돌발적이에요. 우연적이고 사건적이에요. 그래서 내 안에는 두 개가 들어있어요. 내가 스스로 괜찮은 나를 다듬기위해서 만들어낸 구성적 자아가 있는 반면에, 구성적 자아를 만들어버리면 그 자아가 나한테 우상이 되잖아요. 우상이 되고, 그 우상이 권력단체가 되어서 또 다시 예수님을 핍박하게 돼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핍박한다는 것은 못 박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보다는 누가 중요하다? 역시 내가 중요하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나와 나 사이를 대조를 시킵니다. 대조를 시키면서, 대조하는 가운데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개입하게 되면 나 말고 다른 나, 다른 나 말고 나, 두 개의 나 사이를 갈라지게 하는 그러한 결과를,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강남강의에서 했습니다만, 성령은 무슨 사건 이후에 오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이 온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이 없어버리면 성령은 온다? 안 온다? 안 오죠.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관련이 없는 성령을 언급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삼위일체 때문에 그래요. 삼위일체 이론 때문에, 세 분의 하나님이 5분 대기조로 대기상태에 있어요. 성부 필요하면 성부 제공하고 성자 필요하면 성자 제공하고 성령 필요하면 성령 제공하고. 세 분의 시어머니가 사이좋게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때 성령이 필요하면 “성령을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이랬다가 “성자여 오시옵소서.” “성부께서 오시옵소서.” 이러니까 성부성자성령 한꺼번에 세트로 해서 다 찬양을 받으옵소서 라고,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순서가 있는데. 성령은 십자가 사건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그럼 십자가 사건을 전달하게 되면 예수님의 정치적인 비극적 사건이 우리에게 반복되는 거죠. 그럼 여기서 권력에 의해서 죽으신 예수님이잖아요. 그 권력에 대해서 우리가 가하다, 선하다, 옳다, 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참, 이런 말이 어려운데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다. 이 말도 맞지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고 자칭 선하다고 우기게 만들어가지고 십자가사건을 유발시킨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래서 2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미리 아시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 질 것이라고.

 

쉽게 말해서 나를 죽이라 이 말이에요. 안 죽이면? 죽일 때까지 예수님은 계속 나서시는 거죠. 기어이 안 죽이고는 못 배기도록 만드시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자체가 선악이잖아요. 선악으로 있잖아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살아있다? 내 안에 선악이 살아있어요. 그러나 선악은, 인간인 피조물은 절대로 먹어서도 안 되고 알아서도 안 되는 거예요. 이거 알게 되면 에덴동산하고는 빠이빠이입니다.

 

다시 천국에 가려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돼요. 선악을. 선악과와 더불어서 우리를 죽여 버려야 돼요. 선악을 아는 나를 선악과와 더불어서 죽여야 돼요. 그럼 우리는 이렇게 선한데, 선악을 알 정도로 선한데, 나를 왜 이렇게 죽음으로 몰아넣고 힘들게 하십니까? 하고 반항하겠죠. 반항 그것이 예수님이 맥없이 죽게 만드는 요인으로서 그걸 거기다가 부각시키는 거예요. 약을 올리게 해서, 그 약을 올린 자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게 만드는 겁니다. 피 흘리도록 만드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은혜가 임하면 주체와 객체가 바뀐다고 했죠. 십자가가 임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도 주께서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유발된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뭐로 드러나면 돼요? 죄인으로 드러나게만 되면 감사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감당이 돼요. 내가 죄인이 아니면 도망치기 바빠요. 숨고 도망치고 도 닦으러 지리산에 들어가고.

 

이게 뭐냐 하면 지가 잘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시장바닥에서 장사하고 물건사면 되는데, 꼭 뭔가 기도원에 가서, 또 집에서 빌면 안 돼요. 기도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한다고요. 근데 기도하러 갈 때 휴대폰은 왜 들고 가요? 휴대폰을 들고 가는 이유는 어머니 돌아가셨다는 그 소리 듣고 싶어서 그래요. 또 들고 가는 이유는 내가 거기서 죽었을 때 자식이 와서 내 시신 찾아가라고 연락취하는 거예요. 여전히 나에요. 나. 혼자 있는, 혼자 선과 악을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우기는 이 나. 나는 처치곤란입니다.

 

며느리하고 시어머니가 만났다. 며느리고 시어머니고 뭐 계급장 다 떼고 합시다. 그럼 나와 나의 만남이에요. 그 만남의 대화가 뭡니까? “내가 정당하니까 이런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야. 애기야! 내가 정당하니까 이런 권리가 있다.” 결국은 뭡니까? 둘 다 자기 정당함의 논조가, 대화가 오고 가는 겁니다.

 

“내가 김장해서 경비실에 맡겨 놀 정도니까, 그 다음에 내가 아파트에 연락 없이 와도 되잖아. 김장까지 해줬으면 그만한 자격이 있잖아.” 며느리가 있다가 “그 김장김치 갖다가 버리세요. 내가 마트에서 사서 먹는다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니가 시어머니의 김장솜씨를 우습게 보는구나.”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영역에 쳐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막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살 때는 그리 안 했다.” “요새는 시대가 다른데 왜 이러십니까? 그러면 옛날로 돌아가서 사시든지요.” 지금 시대가 혼자 사는 시대에요. 허락 맡아야 돼요. 자식 키워줬다고 권리주장 못합니다. 부모가 빚졌다. 자식이 안 갚아줍니다. 뭐 연예인 됐다고 다 갚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그 부모는 연예인 자식 팔아서 돈 빌렸겠지만.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저희가 모른다고 했거든요. 모른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관계망인데, 관계망의 형성은 십자가로 돼야 돼요. 다시 설명하면 이겁니다. 예수님 혼자 있습니까? 아버지하고 함께 있습니까? 아버지하고 함께 있죠. 여기서 생겨난 것이 하나의 그물망이라고 했죠. 이불 또는 그물망. 이걸 우리한테 뒤집어씌워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 아닌 자를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아들 되게 하는 거예요.

 

아들 되게 하려면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했던 그 관계망이 완성이 되어야 하고 인정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천당 가려고 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이불, 이 관계망, 그물망이 우리한테 덮쳐져야 해요. 이 관계망이 인정될 때 우리는 아들로 인정이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이 관계망을 줘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아들 됨으로 할 때, 십자가로 인하여 됐잖아요. 그 십자가의 관계망을 우리한테 주는 겁니다.

 

주게 되면 우리는 혼자 살고 있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복습입니다. 혼자 살고 있다가, 혼자 산다는 그 자체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이 자체는 뭡니까? 아들이다? 아니다? 아들이 아니죠. 관계망이 형성이 안 됐기 때문에 아들이 아닌 거예요. 그럼 우리가 하나님하고 사귀면 되지 않느냐? 나라는 인간과 하나님과 사귀면 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데요?

 

아버지와 관계망을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그 관계망이 와야지,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자체가 멀쩡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에 의해서 나는 죽고, 새로운 그 죽은 자리에 예수님이 생각해둔 나가 심어져야, 그 심은 나와 이 아버지의 사이가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임플란트 있죠. 임플란트 할 때 뒤집어씌운다고 해서 그냥 뒤집어씌우면 다 떨어져요. 먼저 나사못으로 잇몸에 박아야 되죠. 박고 난 뒤에 거기에 씌우잖아요. 이 박는 역할, 새로운 나를 박아 넣어서 거기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주는 거예요. 이 박아 넣을 때, 박아 넣은 이 나가 누구냐 하면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나.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새롭게 태어난 나. 또는 율법 완성, 법에 저촉이 필요가 없는, 더 이상 간음이고 살인이고 일체 법에서 벗어난 나를 심어놓고, 심어진 그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우리를 아들 만들게 하신 거예요.

 

그것이 구약 이스라엘에 나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가 언약을 세울 때, 자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불붙는 시내산에 계십니다. 다 같이 합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세요. 부르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까? 아니죠. 여기 누가 대표로 다녀와야 되죠. 누굽니까? 모세죠. 모세가 손에 뭘 들고 왔느냐 하면 돌판, 법 들고 왔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희생의 피, 제사법이죠. 피를 뿌려버립니다. 법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피를 뿌리고. 그럼 법 플러스 뭐가 돼요? 법+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법 앞에 모든 인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은 일체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악을 판단할 때, 그 판단하는 판단 자체가 우리한테 없어야 될 판단이거든요. 선악을 판단하는 자체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 한 거다 이 말이죠. 이거 악마가 집어넣은 겁니다. 악마를 처벌하기 위해서 만든 것에 악마가 그걸 가지고 인간을 밀어 넣어 방패막이 삼은 겁니다. 선악을 벗어나서 이미 선악이 종결된 상태에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보시기에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의인이고 나머지기는 죄인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거 심어놓고 그 죄인을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다는 말이 어디에 나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오죠. 그 대목을 볼 때 제가 심쿵했죠. 심쿵. 가슴이 뛰었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죄 사함이 우리의 선행이 아닌가요? 우리의 경건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서 니는 혼밥, 혼자 살면서 먹는 밥처럼, 홀로 산다는 인간 자체를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피와 맺어진 관계망. 피의 관계망만 주께서 인정하시는 거예요. 마귀가, 세상의 악마, 정치적 세력, 이 모든 마귀가 한결같이 커버하고 안 들려지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행위로 우리가 용서받는다는 사실. 우리가 용서해달라고 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되거든요. 그걸 적극 저지하고 안 들려지게 하는 거예요.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고. 선한 게 진리가 아니고 진리는 십자가에서 진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돼서 우리에게 죄 사함의 영역으로 넘긴 사실을 말 할 수 있는, 이제는 저희들에게 유일한 기쁨이요 비밀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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