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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11:17:22 조회 : 5116         
대전 2009년 5월 28일 사도행전 1강 예수님은 주 이심이 맞습니다. 이름 : 관리자(IP:219.249.86.34)
090528 행1장 교회이야기 아닌 십자가 후 작업
 관리자(IP:125.♡.2.45) 09-05-3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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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IP:220.♡.176.169) 09-06-14 20:49 
대전090528a행1장a예수님은주이시다a

자아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실 때, 뭐를 집어넣느냐 말씀의 내용을 집어넣어서 자아를 만들어 버려요. 그렇다면 두 개가 되요. 자아Ⅰ, 자아Ⅱ가 되는데 만약 자아Ⅰ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말씀을 집어넣어 제조한 것이 자아Ⅰ이라면 자아Ⅱ라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이야기 했던 것. 내 기억 속에서, 내 욕망에 맞는, 내 구미에 맞는, 내 입맛에 맞는 것을 끄집어서 그것으로 어디까지 이어지냐면 미래까지 보장받으려는 개인적인 자아 이렇게 가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 둘이 서로 싸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이게 없어요.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이게 없기 때문에 자아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엔 급할 땐 뭐하겠습니까? 자살하지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 외는 없으니까. 만약 이것이 빨갛잖아요. 이게 빨갛다고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내가 이야기 하잖아요. 누가 와서 이것이 파랗다고 이야기해도 내가 빨가면 빨간거예요. 저게 시계잖아요. 시곈데 어떤 사람이 가스렌지가 왜 벽에 걸렸지? 아니야 아니야 시계야. 너희들이 다 시계라 할지라도 내가 가스렌지로 보면 가스렌지인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독단론이라고 해요. 이것은 자아가 현재 욕망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소집해서 미래로 이어지죠.

이제 시작할려고 하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사도행전을 정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일방적으로 합시다 라고 정했는데 왜 그랬냐 하면 사도행전에 대해 보통 상식은 뭐냐 하면 교회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게 보통 일반 교회에서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사도행전은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러면 사도행전을 펴 보세요. 사도행전의 내용은 십자가 후 작업 입니다. post cross라고 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후 작업. 예수님의 십자가 후 작업인데, 그러니까 십자가 후 작업이니까. 사도행전의 주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제대로 주시다. 주님이시다 라는 이 말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 바꾸면 예수님은 제대로 여호와 맞구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사도행전이예요. 다시 간추려 보면 사도행전은 흔히 교회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하는 그 주여 주여, 주의 이름 하는 아도나이 그 주님이 제대로  맞구나를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이예요. 그렇게 되면 사도행전에서 주인공이 누가 되죠? 방금이야기 했으니까 주인공이 누가 됩니까?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죠. 사도행전 주인공이 방금 예수님은 제대로 주시니까 주인공이 예수님이 되는데,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우리 재아씨.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예수님이 안보이죠. 안보이니까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주인공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걷어치우고 뭘로 하느냐 하면 소위 움직이는 사람, 또는 교회, 또는 공동체 이걸로 예수님의 주인공을 사도행전의 주인공으로 대체해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죠. 잘못을 범하죠.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예수님이 일했는데 사람이 일한 것처럼 그렇게 한 것을 방금 제가 오류라고 했죠. 잘못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앉아 있는데 앉아 있는 앉은뱅이가 누가 거치고 지나가니까 일어섰죠. 일어섰어요. 그럴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하셨다는 생각은 도무지 못했고 누가 했냐면 그 때, 찾아간 사람이 누구냐 하면 베드로와 요한이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했지,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과 신앙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 라고 사람들이 오해를 하니까 정작 베드로와 요한이 그걸 수정을 해요. 이 사람아 눈에 보이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이 사람을 낫게 했는데 왜 자꾸 당신들은 우리가 눈에 보인다는 단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우리 안에서 나간 능력으로 그 사람이 걷게 한 것처럼 그렇게 왜 오해를 하느냐 라는 말을 해요. 그렇다면 지금이 사도행전의 십자가 후 잖아요. 올해가 몇 년이죠? 2009년 이잖아요. 2009년 5월 달이니까 우리는 어디에 포함됩니까? 사도행전 십자가 후 시대에 포함 되겠죠. 그렇다면 이 시대의 지금의 주인공이 누가 되죠? 예수님이 되죠. 만약에 예수님이라고 했을 때, 만약에 여기에 불신자가 온다면 여기 예수님이 어디 있는데 화장실에 가셨나?  부엌에 있어?  유령이야 귀신이야 예수님이 어딨어? 라고 오히려 의아해 할거란 말이죠. 이상한 사람들 아니야 왜 눈에 보이는 자기들이 있는데 왜 자기들은 자꾸 제껴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아, 그것도 신앙심인가? 신앙인은 그래야 되는가? 아, 그렇게 멘트를 날려야 신앙인처럼, 척인것처럼 되는거야. 이렇게 자꾸 시비를 걸게 된다 이 말이죠. 방금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 했지만 이건 정말 어려운 이야기예요. 

고요할 때는 주님의 은혜라는 말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 탈이 없을 때. 그런데 갑자기 돌발 사태가 일어나면 우발이라고도 하고 또는 우연이라고도 하는데 하여튼 우발적이다 우연적이다 라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면 갑자기 예수님이 하셨다는 생각은 쏙 들어가 버리고 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를 따지죠. 책임이. 내가 평소에 하나님한테 소홀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심이 없어서, 신앙이 없어서 나에게 이런 벌이 내렸다는 식으로 그렇게 곡해하고 오해하는 겁니다. 성도한테는 벌이 없어요. 저주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믿으신다면, 정말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남은 것은 예수님 하실 일만 남아 있지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우리하고 의논하거나 타협하거나 협상하거나 너 까불면 매 맞는다는 식으로 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주님이기 때문에. 주를 몰라서 그러는데 주라고 하는 것은 누구하고 의논하는가 하면 주는 주님과 의논할 뿐이예요. 여기에 사람이 끼어들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로마서 8장에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주님이라면, 제가 만약 글씨를 쓴다면 막 쓰고 있는데 재원이 너가 와가지고 손을 붙들고 내가 쓸께 한다면 어떻게? 저리가 자리에 앉아 있어. 손을 떼버리지 그렇잖아. 그럼 더 쉬운 예를 들께. 매직이 쓰는데 지금 손은 안보이고 매직만 눈에 보인다고 봐요. 그럼 다른 사람 보기에 누가 썼어요? 매직이 알아서 쓴다고 보이죠. 그렇다면 실제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잡고 있어요? 내 손이 매직을 잡고 있잖아요.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 이라는 것이라니까요. 참 어렵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쥐고 글씨를 썼는데 불신앙인 사람은 그 앉은뱅이를 누가 낫게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이 매직밖에 안보이니까 누가 낫게 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다고 우기니까 그걸 베드로와 요한의 역할이 뭐냐 하면 그것을 수정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주님이 하셨어 라고 수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 안죽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재원이 너 피아노 치찮아?  너 피아노 칠 때, 아!!!피아노 잘 치네. 그 때는 독일어로 나인 나인 하죠. 아니야 아니야 주께서 힘주셔서 쳤어 라고 이야기 하라고 피아노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뭐가 된다? 성령이 임하면 누구의 증인된다? 아까 나의 자아의 기억의 증인 된다? 아니죠. 누구 증인 된다?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려고.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죠. 되어라가 아니라 반드시 되리라. 그렇다면 되리라고 할 때 누구의 작품이죠? 내 작품이 아니고 누구의 작품이죠? 예수님이 하나님 여호와시니까. 주님의 작품으로서 되고 말리라. 자, 여기 선풍기가 있고 시계가 있어요. 시계가 선풍기 보고 너 왜 시계 아니야 하고 따지면 되요? 안되요? 안되죠. 그리고 선풍기가 시계 보고 너는 왜 선풍기처럼 시원하게 못해 라고 따지면 되요? 안되요? 안되죠. 선풍기, 시계는 이 집 주인이 장만 한거죠.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나를 관계없이 주님한테로 가버리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아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했는데,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이 있든지간에 그것이 서로를 이렇게 만나면 안되고 만약 여기 A라는 사람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대로 만나면 안되고 주님을 거쳐서 봐 버리면 이 사람하고 나하고 경쟁의 대상이 되요? 안되요? 안되죠. 예를 들면 재원이가 피아노를 쳤으니까  피아노를 쳤을 때 나는 2등하고 쟤는 1등 했다 할 때 괜히 시기와 질투와 미움..우리 재원이 이런 마음 들었어요? 안들었어요? 들었죠.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의 열매라고 해요. 더 심한 것은 육의 열매가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뒤에 단서를 넣으면 천국을 못간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 다툼..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러면 내가 1등 해야 해요? 안되죠. 주님을 거치게 되버리면 얘는 그때에 1등을 해야만 되는 아이고 나는 그 때에 2등 해야만 될 아이란 말이죠. 그런데 1년이 지났어요. 내가 1등하고 걔는 2등을 했어요. 그럼 나는 뭐예요? 계속 1등을 해야 할 아이가 아니고 지금만 나는 1등을 해야만 하고 지금의 걔는 2등으로 밀려야 될 아이란 말이죠. 그 다음에 또 1년이 지났어요. 걔는 세계에서 1등을 했어요. 나는 예선 탈락 했어요. 

결국 주님을 거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질이 본인의 능력에 의해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항상 누가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 누가? 주님에 의해서 그렇게 동일성이...동일성이라는 어려운 말을 썼는데 유지되어야 되죠. 방금 제가 그린 그림(A, B,주님이 머리로 개입)을 이렇게 변형시켜 그리면(A, B,주님이 머리로 개입=한 몸) 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죠.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도 의미가 없죠. 얘가 1등하다고 2등하다가 걔가 2등하고 1등하다가 얘가 세계에서 1등하고 걔는 예선 탈락 하더라도 전부 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죠. 한 형제 사이에는 무슨 개념이 없냐면은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어요. 시간을 느끼는 것은 맞는데 그 자체가 느끼는 것이지 이 안에서 뱅뱅도는 시간 밖에는 안되요. 그걸 가지고 천 년이 하루 같이 하루가 천 년 같은..이걸 묵시라고 표현하는데 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고 다만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거예요.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성경 베드로전서 찾아봅시다. 베드로전서 4장11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일 누가 말하려면 자, 불신자 보기에 말을 누가 합니까? 혀를 누가 갖고 있어요? 어떤 사람이 혀를 갖고 있지요. 혀를 갖고 말을 한다는 것은 음성과 피부구조를 동원해서 말하죠. 그런데 갑자기 누굴 집어넣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죠. 갑자기 주체가 하나님을 집어넣죠. 그 뒤에 보세요. 만일 누가 봉사를 한다, 누가 청소를 한다면 갑자기 누굴 집어넣어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 요게 신앙인이냐 불신앙이냐는 것을 가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그리스도 몸 안에 있을 때에 만일 누가 봉사를 한다고 할 때, 봉사라는 말 대신에 피아노를 친다고 할 때, 만일 피아노를 치거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피아노를 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믿고 안믿고는 본인이 알아서 하고 이해는 되느냐 말이죠. 이 성경 말씀이 이해는 되느냐 이 말이죠.  이는 범사에, 모든 일에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려 함이라. 갑자기 제 삼 자 예수 그리스도가 툭하고 들어가 버려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성도가 되어서 피아노를 잘 쳤을 때, 관객들은 지금 피아노를 친 사람을 보고 박수를 치지 예수님 보고 박수를 치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더라도 그걸 또 멘트라 해가지고 사실은 제가 박수를 받으면 안되요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는 그런 멘트를 날릴 필요는 없고. 그런 것은 미스코리아가 맨 날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고. 본인 생각에  박수는 내가 받더라도 사실은 내가 지금까지 이 자리에 서서 설사 안나고 보통 긴강하면 설사 쫙 나는데 오늘 이상하게 설사 안하고 틀린것도 없고 이 모든 것이 누구의 힘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야 그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님을 집어넣을 때만 영광이 되요. 이게 제가 지금 오늘 강의할 주제입니다. 이 강의 주제 이야기 할려고 긴긴 시간 서론을 이렇게 끌었습니다.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내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하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을 개입시켜야 한다는 그 것. 아...그게 왜 그런가 그 내력을 사도행전에 들어가기 전에 구약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이 서론은 앞으로 계속해서 두고두고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영광은 핵심이 뭐냐? 핵심은 누굴 넣는다? 주 예수님. 주 예수님의 개입. 만약에 주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개입할 때만 영광이 되는데 만약에 개입이 안되면 영광이 안되요. 주 예수라 했잖아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주 예수로 안보고 주와 예수를 찢어 버려요. 찢어 버리면 예수라 하는 것은 인간 예수만 남아 버려요. 인간 예수만 남아 버리면 여기에 여호와 주와 인간 예수의 연결고리가 성립이 안되요. 그러면 예수님은 주님이 아니고 단지 우리의 모델(Model), 삶의 모델 밖에는 안되요. 아주 훌륭하신 분, 하지만 나도 얼추 따라 붙으면 따라 붙을 수 있는 괜찮은 분, 멋진 분, 희생하신 분,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신 분 이것 밖에 안되요. 앞에 뭐가 끊어지면?  주가 끊어지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은 여기(위)에 계시고 우리가 여기(아래) 있다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주님으로서 들어가지 않고 주님이 어디에 들어오느냐면 주님은 옆에 계셔서, 주님은 우리의  모델 밖에 안되니까 내가 주님한테 한 수 배워서 내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야 영광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요. 내가 직접 나아가야. 제 말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지금 주제가 뭐예요? 주님이 왜 개입되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는 경우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에서 주가 떨어지면 남는 것은 인간 예수만 남아 버리면 인간 예수는 우리 곁에만 서 있죠. 우리 앞에 얼쩡거리지 못하죠. 만약 예수가 얼쩡거리면 나는 예수님 믿어야 하고 하나님 믿어야 하고 성경 믿어야 하고 바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것은 싫고 다만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본 받아서 내가 직접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되고 싶다는 그런 야망을 보이게 된다는 이 말이죠. 이렇게 되버리면 앞에 뭐가 없어져요? 주 라는 말은 같은 말로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주 예수가 달아나 버려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면,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는 거예요. 처음 듣습니까? 시편 110편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주가 몇 분 되버려요? 두 분 되버려요.  주께서 내 주에게..이게 바로 사도행전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자, 주께서 내 주에게 하니까 그 중에서 누구는 빠져 버려요? 갑자기 구원받고 싶어 환장한 나는 어떻게 되요? 빠지죠. 빠진다고요. 그럼 나는? 내 천국은? 그럼 나는 지옥갈 사람이야? 천국 가는 것은 내가 가는데 천국가야 할 당사자인 나의 의견도 묻지도 않고 내가 열심으로 믿는다는 것도 묻지도 않고 나를 완전히 제껴 버리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주님하고 의논해 가지고 나중에 우리에게 뭘 해주느냐면 뭐해주겠어요? 통보 해주죠. 통보..너 합격이래. 통보 해주죠. 이 통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앉으실 때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 우편에 주의 자리가 있고--오른 쪽 하는 자리는 주의 일을 하는 자리인데 나중에 깊이 들어가면 이야기 하고--주의 자리에 앉을 때, 주의 자리에 앉으면 성령이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제가 지금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만 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은 그냥 통보받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이전에 그 사람이 거지가 되든 이방인이 되든 헬라인이 되든 유대인이 되든 관계없이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되요.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청년이나 늙은이나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누구 덕분에? 하나님 옆에 있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그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 사람은 자기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이라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땅 끝까지 너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앉게 되는 예수님의 코스가 있는데 그 코스를 빨간 글씨로 쓰면  마리아에게 잉태되시고 출생하시고 서른 살 쯤 되어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거의 3년 동안 확실한 건 아니지만 거의 2년 내지 3년 동안 이 지상에서 전도 하셨죠. 전도하시고 마지막에 성전 깨부수시다가 정치범으로 걸려 십자가에서 사형당하죠. 그 다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의 자리에 가잖아요. 그럼 여기 빨간 코스에, 구원받을 사람이 빨간 코스에 들어갔습니까? 안들어 갔습니까? 안들어갔죠. 재아가 이야기 해보세요. 여기 예수님이 가신 빨간 코스에 검은 옷을 입은 우리가 이 빨간 코스에 들어 간적이 있어요? 없어요? 그렇죠. 안들어 갔죠. 재아  선악과 언제 따 먹었어? 너 태어나고 선악과 있었어?  없었지. 재원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구경했어? 안했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에 있었어? 없었어? 없었지.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기억할 것도 없어요. 태어나기 전이니까. 없었잖아 봐라. 없었는데,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은 아주 웃기는 분이야 그 분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보세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로서는 태어나기 25년전의 이야기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했다 이 말이죠. 태어나지도 않은 예수님만의 코스에 자기가 가입하지도 않으면서 이 코스가 어디로 밀려오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가신 코스가 뭐를 덮치게 되느냐면, 만약 우리가 죄가 있어서 까맣다면은 까만 여기에다 예수님이 가신 빨간 코스가 덮쳐버리게 된다니까. 성령이 오시게 되면 덮치게 되죠.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 십자가 되요?  덮쳤으니까. 

여기에 만약 내가 1층 바닥에 있는데 2층에서 쾅쾅 콘크리트 공사를 하다가 2층 천장이 무너져 버리면 그 무너진 천장이 누구한테 덮쳐요? 1층 바닥에 있는 나한테 덮치니까 갑자기 나는 1층에 있으면서 2층 맛을 보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만약 위에서 지금 운동기구 가지고 놀다가..위에 누가 사십니까? 할머니가 머신 타다가 발작을 일으켜서 지붕이 내려 앉았다 하면 나는 1층에 있으면서 졸지에 무슨 맛을 봐요? 2층에 있는머신(기계) 맛을 보잖아요. 왜 덮쳤으니까. 우린 그냥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안에 뭐가 담겨 있어요? 성령 안에는 예수님이 가신 빨간 코스가 담겨 있어 이게 덮치면 나는 그냥 내 일상생활,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바이올린 켜고 피아노 치고 하는 일상생활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생애가 여기에 덮쳐버린다 이 말이죠. 시간과 상관 없이, 시간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덮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하...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사실은 내가 가야할 길, 십자가에 죽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길을 예수님께서 선점해서 먼저 가셨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그 길을 본의 아니게 가야 되는구나. 그런데 그 길이 십자가에서 끝납니까? 예수님의 코스가 어디예요? 십자가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끝났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끝나고 난 뒤 어디갔죠? 부활 승천해서 하늘 나라로 갔잖아요. 그렇다면 코스가 십자가 끝이 아니고 결국엔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 계신 나라, 아들의 나라, 천국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나라 라고 하면서도 아들의 나라 라고 했어요. 이 아들의 나라까지 가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가신 코스,  그 천국까지 합류가 되는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할 때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할 때 과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히브리서 9장 27절에 나오는 말씀, 죽고 난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뛰어 내렸겠습니까? 연필 있죠. 연필 모르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연필 보면 여기 심지가 나오고 뒤에 지우개 달려 있고. 자, 여기서부터 여기 까지(심지에서 깍인 부분까지)가 연필의 전부예요? 부분이예요? 부분이죠. 그럼 뭐가  전체예요? 심지부터 지우개 달린 부분까지가 전체 아닙니까? 그러면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뭐냐면, 눈에 보이는 산다는 것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연필전체)가 아닙니까?  과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걸 생각했겠느냐 이 말입니다. 지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걸 생각했겠느냐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을 생각했겠느냐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심지는 끊어지면 또 깍으면 되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연필 전체가 중요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내가 착해지기 위해서 예수님의 어떤 점을 본 받아야 하는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 전부를 다 받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까지는 비록 죄는 없으시면서 무슨 길을 갔습니까? 죄는 없으신 분이 무슨 길을 갔습니까? 죄인이 가야 하는 길을 가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이 가신 코스대로 하면, 그 코스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뭘 해도 뭐가 되요? 예수님의 코스에 의하면, 이게 모델이니까.  표준이니까.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의인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부활 하셨거든요. 이유가 뭐냐 예수님만이 의인이시기 때문에.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의인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코스대로 주어지면 우리는 죄인으로 살다가 예수님 덕분에 의인으로 달라져서 나중에 예수님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죠.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의하면 우린 뭘 해도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가신 코스에 의하면 예수님 십자가의 코스는 인간의 길인데, 인간의 길은 예수님이 바로 죄를 진 자는 결국 이런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게 되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십자가 버림받는 거거든요.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코스가 우리의  나머지 모든 인간이 가야 할 그 아담의 길이었습니다. 아담의 길이고. 그 다음에 부활되고 난 뒤에 길은 바로 예수님의 길. 제 2의  마지막 아담 되신 분 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길. 최초의 부활되신 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방금 길게 이야기 했는데 이것을 다 안다 치고. 정작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주 예수님 이야기가 아니고 두 번째 입니다. 첫 번째 것, 또 잊어버리니까 자꾸 반복합니다.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누굴 개입해야 한다? 누굴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어요? 주 예수님. 그 근거는 베드로 전서 4장 11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 두 번째. 요 이야기가 구약에서 근거가 있느냐?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우리하고 집어넣어야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과연 구약성경에 근거가 있느냐?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거기 하나님께서 누굴 부르시느냐면 아브라함 들어 봤어요? 아브라함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받고. 임재아씨 이것이 옳다고 봅니까? 자, 여기 우리 성도들 계시는데 전부 다 잘났어요. 다 잘났는데 아까 강아지 어디 갔죠? 제가 강아지 안좋아하는데, 이 강아지 저한테 안기겠어요? 제가 강아지 안았잖아요. 다 잘났고 착하고 훌륭하다고 나름대로 생각 하는데. 제가 이야기 합니다. 제가 하나님입니다. 이제부터 말하노니 이 개를 축복하면 복 받고 이 개를 만약에 저주하면 저주 받는다 할 때, 누가 화를 안내겠어요? 누가 화를 내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각자 전부 다 잘난척하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나를...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엉뚱하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갑자기 여기 강아지를 떡하고..강아지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었나니. 아브라함 자리에 뭐를 집어 넣습니까? 강아지를 집어 넣잖은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강아지, 재하고 내하고 누가 잘났는데 강아지 저게 뭐라고 하잖아요.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게 바로 나의 선택이다!!!이런 경우가 다윗에게 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그로 하여금 복의 원천지가 되게 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저주하면 아무리 착해도 아브라함을 저주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해 버리고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는 복과 저주의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해 버렸습니다. 여기에 방금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일방적 계약이라고 하는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라고 하는데 이 계약에 누구도 안믿었게요? 아브라함 본인도 안믿었어요. 놀랍게도 아브라함 본인이 안믿었습니다. 왜 본인이 안믿었느냐 하면 너무너무 겸손해 가지고. 하나님 저는 그냥 개입니다. 제가 남보다 휼륭하지도 않고요, 제가 완벽하지도 않고요, 제가 뛰어나지도 않고요, 제가 믿음 좋은 것도 아니고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저는 그럴 입장이 못됩니다...만약에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임재아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저주받고 임재아를 축복하면 복을 받는다 하면 재아 너는 기분 좋겠나? 괜히 부담되지. 아, 내가 완벽해야 되고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하고 부담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하고, 인간하고 상대한다? 안한다? 상대 안하죠. 아브라함이 괜히 자기가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예요. 하나님이 자기를 택해서 축복과 저주를 삼으니까 아브라함 본인 생각에 자기가 좀 완벽해야 하고 이제부터 행동도 고쳐야 하고 이제부터 믿는 사람척 해야 하고 뭔가 쫌 해야 하는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반대로 아브라함의 처음 이름이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있어요? 없어요? 없는 인물이예요.아브람은 있어요? 없어요? 아브람은 있어요.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데서 있게 만들기 위해서 아브람을 이용한 것 뿐이예요. 아브람은 아무 상관 없어요. 심지어 아브라함 하고도 상관이 없어요. 복과 저주의 기준은 신약 시대에 누구냐 하면, 신약 시대에 복과 저주의 기준은 주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주 예수님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방금 두 번째 구약 근거가 있느냐 라고 했죠. 구약 근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2장이라고 했죠. 창세기 12장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해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삼았다 했죠. 그렇다면 아브라함 본인이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냐? 그것도 아니라고 했죠. 그만큼 훌륭하냐? 그것도 아니예요. 그렇다면 뭐냐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올라 탄 거죠. 씌인거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아브람이 있기 전에 누가 먼저 있었다? 예수님이 먼저 있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속에 들어가 아브라함 속에서, 자기 영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축복 기준을 구약에 미리 땡겨 구약속에 들어가 아브라함 안에서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어려운거 쉽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안다 치고 세 번째로. 그러면 아브라함하고 하나님과 맺은 사항을 뭐라고 했습니까? 계약이죠. 같은 말로 언약이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뭐냐 하면  바로 할례 언약이라는 겁니다. 할례 언약이 뭐냐, 할례언약을 알기 위해서 예레미야 4장을 봅시다. 강의 50분하고 쉬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한 번 보도록 합시다. 예레미야 4장 4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여기 보면 스스로 뭘 행하고? 할례를 행하고. 할례라는 것은 약속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가죽이라고 했습니까? 마음 가죽이죠. 저는 이 마음 가죽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사도행전 강의 들어가기 전에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할례라는 말을 어린 재하씨는 알아요. 할례가 뭔지 알아요? 할례를 네 자로 하면 포경수술 이라고 하는데. 포경수술이 뭔지 친구들한테 들어 봤어요? 요건 뭐냐 하면 남성의 성기 끝에 가죽이 덮여 있다는 겁니다. 덮여 있는 가죽을 찢어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몸체와 가죽을 분리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참 하나님 희한하시죠? 방주 언약이라는 것은, 노아 언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잠수함도 아니고 배도 아니고 방주 하나 만들어 가지고 만들어진 방주를 가지고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물건이죠 물건. 잣나무로 만들었으니까. 재질이 목재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은 재질이 목재가 아니고 물건이 아니고 뭐다? 꼬추라 이 말입니다. 꼬추인데, 태어 날 때부터 가지고 온 가죽과 몸체 부분을 구분해서 잘라내는 그것을 노아 때 방주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할례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무슨 가죽이죠? 마음 가죽이죠. 보통 포경수술 같으면 의사 선생님이 "얘야!! 포경수술 해줄까?"  "예. 가죽을 벗겨 주세요." 이래야 되는데 "예. 제 마음 가죽을 벗겨 주세요" 라고 하면 의사가 뭐라고 합니까? "웬 마음가죽? 마음에 무슨 가죽이 있어? 얘야 도리어 묻고 싶어. 마음에 가죽이 있어?" "예.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에 나온 답니다. 마음에 가죽이 있답니다." 그러면 마음에 가죽이 있다는 것은 벗겨서 제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가죽을 잘라서 제거하듯이. 

마음의 할례란 것은 뭐냐 하면 현재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그 마음 가죽을 잘라서 분리시켜야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가정에 가보면 아브람은 있다 했죠. 아브람은 있는데 아브라함은 없죠.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은 없어요. 다만 뭐가 있다? 아브람은 있죠.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느냐? 하나님께서 언약을 집어넣으면 점차점차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죠. 바뀔 때에, 할례를 행하죠. 그렇다면 진짜 아브람이라는 것은 복의 근원이 아닙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은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지 아브람에 관한 것은 아니란 말이죠. 임재아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런 것은 없어요. 성경에 안나와요. 이근호도 안나와요. 신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 인간은 안나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과 저주의 방식의 기준을 알려면 뭘 해야 하냐면 이 가죽이, 마음 가죽이 벗겨져야 하는데 이 마음 가죽은 어디서 갖고 왔느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할례를 행할 때에,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았어요. 자식을 낳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낳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삭을 낳게 했어요. 이삭을 낳았는데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은 이삭이 최초예요. 이삭 때문에 다른 사람이 준비 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스마엘은 아니라 구원을 못받아요. 왜냐하면 아브람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을 못받아요. 이삭은 구원을 받아요. 왜냐하면 아브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했잖아요. 아브람 속에 아브라함이 들어 있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들어 있었던 거예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걸 믿었어요. “나는, 내 아내는 태가 죽었기 때문에 자식을 못낳아도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은 내 아내에게서 태어날 것이다.” “나는, 내 아내의 자궁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자식을 못낳아도 불가능해도 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그 약속 때문에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해야될 일은 기어히 해 내고 맙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가 바로 믿음이다.” “너가 바로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면 마음의 가죽이라는 것은 뭡니까? 육으로 보고 세상적으로 보는 모든 성경 해석...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세상적으로 아까 처음에 눈에 보이는대로 성경을 보고 예수를 볼 때 인간으로 보는 그런 육의 가죽이 짤라질 때, 나라는 인간은 나다 라고 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에 나 밖에 없다는 것이 짤라질 때,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게 되면 그것이 뭐냐 마음의 가죽을 벗겨낸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할례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도행전을 해석할 때 마음 가죽을 벗겨내고 보게 되면 사도행전은 훤하게 보입니다. 10분 쉽시다.

2009-06-13 16:31:04  녹취 : 이미아
 관리자(IP:220.♡.176.169) 09-06-17 16:55 
대전090528b행1장b예수님은주이시다b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주제의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천천히 한 번 정리하는 뜻에서 다시 하면 사도행전의 주제가 주님의 하실 일. 주님의 작업. 주라는 것은 여호와라, 여호와의 작업이다. 십자가 이후에 여호와 작업이 사도행전의 주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아니라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하면은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주님이 개입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 했습니다. 그 예로 든 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예수님의 하신 일로 영광이 되는데 이것은 신약 성경의 축복과 저주가 누굴 기준으로 한다? 예수님의 말미암아 영광이 되기 때문에 영광이 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오고 영광이 안되면 저주가 오게 되어 있거든요. 축복과 저주가 주님으로 결정이 되는데.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런 것이 구약에도 있느냐? 구약에도 이런 근거가 있느냐? 제가 구약의 근거로 창세기12장을 이야기 했습니다. 거기 보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제가 이야기 했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냐? 아니예요,아니예요. 대단한 인간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처음에 아브람이라는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인데 여기에 뭐가 왔느냐 하면 언약이 주어지니까 대단한 사람이 되었죠. 그런데 그 언약을 뭐라고 했죠? 아까 끝부분에 그 언약을 뭐라고 했죠? 할례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할례 언약이라는 것은 뭐냐면은 가죽이 이렇게 있고 몸체분야가 있으면 가죽과 몸체를 분리시키는 언약, 뜯어내는 언약이라 뜯어내야 해요. 인간은 맨 정신으로는 아브람 밖에 안되니까. 뭔가 그 인간을 확 뜯어내 버리면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고 아브라함이 들어 있고 예수님이 들어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천국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는 설교 하기 전에 늘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한 번 적어 볼께요. 저는 교인들 앞에 설교할 때, 강의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설교할 때, 저래서 천국 가겠나? 저렇게 살아서 천국 가겠나? 라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천국 가는데 라는 것에 대해서 답변을 하기 전에 천국 가야 되요. 천국을 가야 되요. 이유없이 무조건 천국 가야 됩니다. 천국 갈려면 우리 안에 뭐가 있어야 하냐면 이것을 크게 쓸께요. 우리 안에 언약이 있어야 되요.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베드로 전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가 어떤 말을 하든지간에 어떤 봉사를 하든지간에 너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피아노 예를 들었죠? 우리 재원이 피아노를 칠 때, 남들 보기에는 재원이가 피아노를 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해주셨다는 그 언약. 아브라함 같은 그리스도의 언약이 있을 때 주님에 의해서 구원 받습니다. 식당에서 있을 때 재아씨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해놓고 진짜 사랑한다면 지옥이 없어야 되는데 사랑한다고 해놓고 지옥 보내면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렇게 할 때, 제가 답변하기를 요한복음 17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자기가 구원 받을 사람을 사랑한다. 아들의 속한 사람을 사랑한다. 이게 정답인데 왜그런가 하면 엄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할 때 자식은 자기 밖에 없다고 하지만 엄마의 DNA. DNA이 알죠?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유전정보. 엄마의 DNA가 반이나 들어 있어요. 나머지 반은 누구거예요? 아빠거지. 엄마의 자기 것이 들어 있으니까 그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잖아요. 그만큼 자기 것이 들어 있으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보고 끄집어 내신다니까요. 낚시할 때, 낚시가 어떻게 생겼어요? 밋밋하게 생긴게 아니라 탕하고 걸렸다 하면 고기가 빠질 수 있어요? 없어요? 빠질려고 하면 더 쪼이게 되어 있잖아요. 그처럼, 낚시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와 버리면 껍데기는 관계없어요. 어떤 껍데기인지 관계없이 껍데기가 어떻게 살든지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요소로 인하여 그 사람은 빼도박도 못해요. 아무리 탈출을 강행해도 안되요. 하나님의 언약이 그런겁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식을 낳게 했죠. 아브라함 자식이 한 사람 누구라 했죠? 이스마엘. 또 한 사람은 누구라 했죠. 이삭. 이삭인데, 아브람속에서 나온 이스마엘은 결국은 버림 받아요. 버림받고,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나긴 했지만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이삭은 구원 받아요. 이게 갈라디아서4장에 나와요. 두 언약이 있는데 하나는 저주받은 언약과 복받은 언약이라고. 자,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레미야 4장 4절. 마음의 가죽을 벗겨라 이 말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어떤 가죽에 덮혀 있다는 것. 이것은 비언약이죠. 이스마엘적이죠. 하나님의 가죽이 덮혀 있는데 이것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자꾸 자신을 껍데기로 보죠. 아까 처음에 제가 했죠. 인간의 자아 속에는 뭐가 들어 있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기억이 들어 있죠. 이것은 가죽에 해당되는데, 이것을 육이라 하는데 이것을 벗겨 버리면 내것이 아닌 외부에서 온 것, 이질적인 것, 사실은 예수님의 것이죠. 나는 내 것만 있는 줄 알았지만 예수님의 것이 내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이 홀라당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죽이 벗겨지면.....

자, 이제부터 조금 어렵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도 어렵지만...내 것과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것의 차이점이 뭐냐? 내 것,나의 것과의 예수님 안에 있는 차이점이 뭐냐? 이 차이점이 어렵기 때문에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내 것이라 하는 것은 내 행위로 구원 받는 것, 이것 내 것이죠. 여기엔 윤리 도덕 양심 성격 유전적 요인 미친 자 또는 여러 가지 정신병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유전적 요인, 여러가지 성질...예수님의 것은 이야기할 것 없죠.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한 약속. 그러면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우기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행위로 지옥가는 것 자기 행위로 지옥가는것. 우리 재아씨에게 물어 볼까? 니 행위로 지옥가나? 우리 이미아씨에게 물어볼까요? 이미아씨 행위로 지옥갑니까? 아니죠. 그게 아니예요. 이삭이 자기 행위로 태어났습니까? 아니잖아요. 이삭은 태어나고 보니까 이삭이라. 태어나고 보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 났어요. 따라서 예수님의 것은 뭐냐 하면 내 행위로 지옥가는 것도 아니고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받는다는 요소가 내 안에 들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공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행위. 둘 다 있습니다. 이게(예수님의 것)있고 저게(내 것)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내 것과 예수님의 것, 이것이 둘 다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내 것도 있고 예수님의 것도 것이 있는데 항상 내 것은 뭐냐 내가 뭘 했더니만 복을 받았어 내가 뭘 안했더니만 저주받았어 다음 부터는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이게 전부 다 바로 뭐냐 하면 예수님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 자살로 마감되든지 어떻게 되든지간에...바라기는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이 책임지지 마세요.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평생 스트레스 받아요. 내 인생 스스로 책임질려고 하면 아무리 성공할라고 해도 결국은 허무로 끝나요. 허무. 니체가 여기...허무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허무는 소극적 허무와 적극적 허무가 있는데 소극적 허무는 쇼펜하우어. 적극적 허무는 니체라는 사람입니다. 적극적 허무는 굉장히 밝은 것 같은데 속에는 뭔가 공포가 들어있는, 쫓기는 것, 굉장히 밝은데 뭔가 자꾸 쫓겨. 내 인생을 내가 추스려야 할텐데...내가 어떤 한계에 부닥쳐서. 이 놈의 인생을 탈피해야 할텐데 그만한 능력과 힘도 없고 아이디어도 없고 재주도 없고 열성도 없고 열심도 없고 인내심도 부족하고 항상 내 것은 나를 추궁해. 재아씨 추궁이라는 말 알아요. 나무라는 것, 자기에게 벌 주는 것. 우리 재아씨는 자기에게 벌 준적 있어요? 이 못된 놈아 너는 나빠 앞으로 너는 밥도 먹지마..아직 어리니까..자꾸 나를 질책하는 거예요. 나를...인간아 인간아 니가 이래 사니까 이 모양 이 꼴이지. 자꾸 질책하는 거예요.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엄청난 짐이 됩니다. 평생토록 이것이 없어지지 않아요. 바보야 바보야 아!!! 나는 바보처럼 살았군요. 맨 날 자기를 치는 거예요. 그 걸 보고 성화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네 자로 "놀고 있네" 앞에 두 글자 더 붙이면 "자슥~놀고 있네" 그래 천국이 그렇게 만만한줄 알았더냐 너가 완벽한다고 천국을 갈 것 같으면 부처도 갔다. 가룟 유다가 얼마나 양심적이었으면 자살을 했겠습니까? 더러운 짓 해 놓고 자살한 사람 많습니다. 진중권씨가 이런 이야기 했죠. 노무현씨 죽었을 때, 아이구 이 노무현씨야 전과 14범도 자살 않고 잘 살고 있는데...전과 14범이 누군줄 아세요?  전두환이예요. 전과 14범도 자살 않는데 당신이 왜 죽느냐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것!!! 양심을 못버려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양심을 못버립니다. 아이고 내가 그런 실수를 내가 그런 바보같은 실수를 하다니 아!!!도저히 내가 나를 용서 못한다. 평생 우리는 그런 자아를 못버립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는 인간 하나님은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누구하고 의논하시느냐면은 그렇게 몸부림치는 우리를 거들떠도 보지 않으시고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공로하고 주께서 주와 의논해서 이 껍데기 같은 우리를 건져 가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행전 주제가 되는 주께서 하신 일이 이겁니다. 그러면 이런 껍데기 내 것만 챙기는 내 스스로 자처하고 자기 과시하는 역시 나는 훌륭해 라는 자기 자존심 챙기는 이것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내 것이 있을 때, 내 것에 둘러 싸여 있을 때, 예수님의 것과 내 것이 얼마나 극대 극으로 큰 차이가 나느냐 이렇게 보여 주기 위해서 이 내 것 속에 둘러 싸인 채, 예수님의 것이 튀어나오게 합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사도행전 성경 해석 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성경 해석의 종류가 몇 종류 되겠어요?  두 종류 되겠죠. 내가 내 것으로 완벽을 기하는 성경 해석 나오겠죠. 자, 이제부터 사도행전 본다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이젠 주님의 형상을 본 받아야지 나는 남보다 더 착한 사람 되어야지 나는 개 같이 살았지만 이젠 성경처럼 살아야지 아!!! 정신 바짝 차려서 이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라는 내 것의 해석이 있겠죠. 그 다음에 또 다른 해석이 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해석이죠. 왜 나는 쪼다냐? 왜 나는 그렇게 주께서 사랑해도 나는 내 완벽만 추구하는 쪼다냐? 하는 그 시원한 해석이 나오겠죠. 그래서 사도행전의 해석은 두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행전 1장부터 보면서 이 두가지 해석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보일 겁니다. 똑같은 사도행전의 본문을 두고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자, 여기 보면 내 것의 해석과 주님이 해석이 있는데 쭉 적어 볼께요. 내 것의 해석은 공포심, 미흡함, 미완료... 공포심에서 공포심 제거 미흡함에서 만족 미완료에서 완료 있는데 이게 내 것 해석이고. 주님의 해석은 이미 완료, 이미 완성, 이미 성취, 이미 거저 주심, 이미 새로운 피조물 됨. 다르죠? 이것(내 것의 해석)은 뭐예요. 뭔가 다가서는데 앞에 점선이 있죠. 이상적인 나의 최고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여분이 남아 있죠. 점선은 아직까지 도달되지 않은 거예요. 이것(주님의 해석)은 뭡니까? 이미 실선이예요. 이미 여기 차가 있어요. 있어서 돌아보는 식이라 내가 어떻게 해서 어떤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께서 다 이루어 주셨지? 왜 내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거저 구원해 주셨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즐기는 식이죠. 이것(내 것의 해석)은 공포심, 뭔가 쫓기는 듯한 아직도 미흡해 아직도 멀었어 더 나아가야 돼. 완벽해야 돼. 이것은 반성의 연속이죠. 이것(주님의 해석)은 느긋함이죠.  악마는 느긋함에 질린다. 악마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느긋함이예요. 악마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줄 알아요? 너는 초조해라.너 배고프지? 40일 금식해서 배고프지? 너는 초조해야해 돼. 너는 지금이라도 기도해서 돌을 돈으로 바꿔 그 돈으로 떡을 사서 먹어야 너가 메시야의 일을 할 수 있어 그 다음에 시험이 뭐냐면 사람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너는 완전히 메시야야 따라서 너는 성전어떻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천사가 와서 발을 받쳐 주는 기적을 베풀면 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추종하리라. 세 번째 시험은 세상의 모든 권세를 너가 쥐고 있어라 그게 너 목표잖아. 이게 바로 사실은 우리가 반성하는 목적 우리가 회개하는 목적 우리가 자기 추궁하는 목적이 사실은 이런 공포심으로부터 보다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그런 심보를 마귀가 예수님한테 유혹거리로 템테이션(temptation,유혹)으로 준 거예요. 2등해 보세요. 2등하면 앞에 뭐가 남이 있습니까? 1등이 남아 있죠. 그럼 1등 해보세요. 앞에 뭐가 남아 있죠. 1등이 대상이라면 허무가 남아 있죠. 허무가... 노무현씨가 만약에 옛날 사법고시에 패스하지 않고 과수원 농사꾼이라면 지금 이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 농협 공판장에 가서 물건 값 흥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엉위 바위에 올라갈 생각은 할 필요도 없어요. 물건 값 흥정하느라...허문데, 나의 것이 허구로 끝나는데 왜냐하면 1등을 해봐도 허무가 남아 있고 대상을 해봐도 허무가 남아 있어요. 대상하면 또 대상해야되요. 다른 사람의 눈이 있어요. 대통령이 되면, 자기 이미지가 뭐냐 하면 청렴한 대통령. 나는 불의한 돈을 먹지 않은 어떤 역대 대통령보다 깨끗한 대통령. 누가? 노무현씨가. 천 육 백 억을 해먹은 사람도 있는데 나는 깨끗한 대통령이다. 이 깨끗함을 유지하는 방법이 뭐예요? 장렬하게 죽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허무입니다. 이 허무를 없앨려면 예수님이 만들어낸 나라는 자아가 따로 있어야 됩니다.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자아는 말고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 내는 자아가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 속에는 내 것, 부모로부터 받은 내 것이 있고,내 성질, 내 성깔,이게 뭐냐면 아까 이야기 한 나의 것. 이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예수님의 백성,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새로운 자아가 여기에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내 속에 죄가 있는데 이 죄는 자꾸 완벽에 거하려고 하는데 자꾸 완벽할려고 하는데 완벽이 안되는 늘 미흡한... 그래서 오호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허무한 사람이다. 이 허무한 인간을 세상에 주께서 나를 십자가로 건져 내셨구나!!! 허무하지 않은 인간을 건져주는 것이 허무한 인간을 건져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결합에서 보니까 전체적으로 보니까 허무하지 않은 거예요.

아까 그림을 봅시다. 하나님 사이에 내가 있죠. 처음에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주님이 있을 때 나는 죄인이고 나는 허무할 때, 허무하고 죄인으로 있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덮쳐서 아까 2층 이야기 했죠? 2층의 할머니가 운동하다가 1층으로 내려 앉을 때, 졸지에 나는 1층에 있으면서 2층 맛을 본다고 했죠. 주님이 가신 코스. 임신 출산 시련 전도 십자가 부활 승천...예수님의 코스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의인 되어서 구원 받는 거예요. 의인 되었다는 조건은 죄인에서 의인의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의인의 자격으로 아버지께 구원을 받는 거예요. 아버지 집에 돌아온 탕자가 뭐했습니까? 객관식 1번 농사지었다 2번 착하게 살았다 3번 아버지 말에 더욱더 순종했다 4번 아버지만 자랑했다. 몇 번 이겠어요? 탕자의 이야기 알아요? 모든 재산을 다 기생과 더불어서 써버리고 나중에 빈털털이 되가지고 부끄러워서 다시 돌아온 탕자. 그 탕자의 이후 생활이...1번 아버지 말에 순종했다 2번 농사 잘 지었다 3번 자기 반성에 들어갔다 4번 아버지만 자랑했다. 몇 번 이겠어요? 재원이 몇 번 이겠어요? 너가 탕자라고 생각해 봐. 몇 번 이겠어요? 4번이 정답이죠. 왜냐하면 가락지를 끼었거든요. 그 가락지가 자기 노동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집 나간 탕자가 돈 다 날리고 왔는데 아버지가 뭘 준비했느냐면 아버지의 가락지를 준비했고 아버지의 옷을 준비했고 소를 잡았다. 그래서 걔는 그 다음부터 동네에 나가면 무슨 가락지? 그 가락지는 아버지의 공로로 주신 가락지. 아버지가 입혀준 옷이고. 자기의 입은 것 모든 것. 전부가 아버지가 그냥 거저 주시는 것이예요. 이게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화와 관계없이 내가 변화되든 상관없이 일방적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통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행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자기 아들. 예수님의 요소, 예수님의 DNA, 예수님의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 있으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영을 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8장 보세요. 로마서 8장 8절에서 11절까지 한 분씩 읽어 봅시다. 8장 8을 누가 먼저 한 번 천천히 읽어 보세요.

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이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여기까지 조건이 뭡니까? 그 사람이 육신이 아니고 영이야 라는 그 조건이 뭐예요? 그 사람 속에 뭐가 거해야 되요? 영이 거하면 누구든지 그 사람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 되는 거예요.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영은 우리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속에 들어왔던 이질적인 영을 말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11절 누가 읽어 보세요.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의 관심사가 뭡니까? 우리 안에, 우리를 해부해 보고 관심사가 뭐예요? 너는 세 살 때 어떻게 했어? 일곱 살 때 어떻게 했어? 이걸 묻는게 아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관심사가 뭐예요? 너 나이 얼마야 그것이 아니고 여기서 뭘 찾아요? 본문 11절에 보면 뭘 찾습니까? 하나님이 집어 넣어 준 자기것이 있느냐를 찾죠. 그게 뭐라고 되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죠. 죽을 우리 몸이 죽어야 마땅한데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우리가 행실을 바르게함이 아니라 죽을 우리가 무엇 때문에 다시 살아요?  아까 낚시라 했죠. 낚시라는 것은 이질적인 것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잖아요. 우리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영에 꿰여서, 영에 의해서 죽을 너희 몸도 그 영으로,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라. 이게 뭐냐 하면 영으로 해석하는 것과 나의 것, 육으로 해석하는 것, 차이점이 이렇게 다르면서도 같이 우리 속에 있어줘야 비로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고귀한 분이신가 부각이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생각엔 내 것이 없어져 버리고 완전 도사처럼 신선처럼 아주 진짜 부처처럼 아니 예수처럼 뭘 해도 완벽하게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허락하질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뭔가 쫒기면서 평생 허구에 시달리고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그리고 서로 자책하면서 심지어 자살까지 하면서 뭔가 자꾸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 쫓기면서도 그러면서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아!!!이런 것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란 말씀 때문에 로마서8장 11절의 약속.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무엇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이질적인 것,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다면 한 번 물어 봅시다. 그럼 내 속에 영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압니까? 진짜 예수님의 영이 있으면 자기가 맞습니다. 나는 곤고합니다. 허무합니다 라는 말만 할 뿐 아니라 허무하기 때문에 느긋하잖아요. 허무하기에 너무나 느긋하다 이 말 됩니까?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허무하기 때문에 느긋하다 다른 말로 하면 허무를 느끼는 여유로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옛날 음악 크게 틀어 놓고 누워서 들으시면서 허무를 느끼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남들은 허무가 자살로 이어지지만 나의 허무는 느긋함으로 여유로움으로...더 쉽게 말해서 실컷 한 번 울고 싶을 때 울어 보세요. 운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고 우는 것을 참는다고 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는 것은 우는거고 구원받는 것은 주의 영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하기 전에 실컷 한 번 울어 봅시다. 그러데 이상하게 눈물이라는게요, 눈물의 특징이 그만 나와도 된다 싶지만 눈물은 계속 나와요. 끝도 없어요. 희한해요. 내가 마셨던 물의 양과 비교가 안되요. 내가 물을 한 컵 마시면 눈물은 두 컵 나와요. 아무리 울어도 눈물은 또 나와요. 울면서 구원 받는 울면서...운다고 해서 믿음 없는 것도 아니고 운다고 해서 인생 실패하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느긋함의 일종이고 웃을 때 또 웃으세요. 웃는다고 해서 교만한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면서 구원은 챙기고 이 주제가 전도서 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유용한 말씀이 많아요. 쓸데없이 돈 아끼지 말고 있는것 맛있는 것 니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죽어라. 쓸데 없이 돈 모으지 말고 평생에 돈 모아야 허무한건데 평생에 낙이 뭐냐 니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돈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그것을 낙이라 했어요. 아!!! 성경 위험합니다. 성경 아주 위험한 말이예요. 이유가 뭐냐 물어보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기 때문에. 앞뒤가 안맞는 것 같죠? 헛되고 헛되고 헛되기 때문에? 뭔가 세상적으로 말하면 인생 한 방이다 라는 식으로  막장가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게 아가서와 연결시키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허무조차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완료된 사랑이 있기 때문에 허무도 즐길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성경을 봄으로 말미암아 이젠 덜 울고 뭔가 어떻게 인격이 완성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인간 못난 것은 이미 기정 사실이예요. 인간 못난 것은 이미 기정 사실로 있기 때문에 못난 인생 미련 갖지 말고 이런 인간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솜씨가, 작품이 어떤 솜씨인가를 아는 것이 사도행전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주님은 주님이시구나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직수씨가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그게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땡기는대로 살면 되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죠? 쓸데없는 조심스러움은 병이예요.

자, 이제 사도행전 들어가 봅시다. 사도행전 서론 길은데 다음 시간에 또 할겁니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도행전 1장은 사도행전이 하나의 객차라면 앞에 객차가 또 있어요. 그 객차가 예수님의 일생. 여자의 일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예수님의 일생 다음에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공부 잘 했는지 봅시다. 나의 일생은 어디에 있어요? 우리 재원이 인생 어디 있어요? 예수님의 일생을 빨간 글씨로 쓰면 나의 인생은 어디에 있어요? 나의 인생은 여기 있겠죠. 그러면 사도행전은 누구와 연관이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일생과 관련된 사도행전. 빨간 예수님의 일생과 연결된 사도행전이고 나의 인생은 검은 것으로 시작해서 검은 것으로 끝나 버리죠. 그러면 나의 일생은 빨간 예수님의 인생과 상관이 없죠? 예수님의 일생이 무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흐지부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생이 어디에 효과를 줘요? 효과...효과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어린 재아씨는 굿하는 것 봤어요? 무당이 굿하는 것 봤어요? 무당이 춤추는 것 봤어요? 실제로 본 적이 있어요? 못 봤죠? 요새는 굿 잘 안하니까. 그러면 점쟁이집에 가 봤어요? 재원이 해 봤어? 애들이 장난 삼아 해보는 점치는 것 해봤어? 아주 모범적이 학생이군요. 심심풀이 토정비결 사주팔자 장난 삼아 해보는 것. 사실은 진지한데 장난 삼아 한다고 하죠. 좋으면 좋고. 그러면 왜 봅니까? 사람들이 점을 왜 봐요? 그것을 두 글자로 하면 효과죠. 만약에 점치는데 돈 이 만 원 주고 오 만 원 주고 봤는데 효과 없으면 안하죠. 그런데 저 집이 용하대 용해 쪽집게래 쪽집게. 쪽지게라는 것은 빈틈없이 다 정확하다는 말입니다. 그 효과를 보고 가죠. 지금 여기에 교회를 검은교회.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사람들이 움직이죠? 왜 갑니까? 지금 점쟁이 집에 사람들이 점 치러 가고 굿하는 집에 굿하러 가는데 그러면 교회를 왜 가요? 교회는 뭘 노리고 갑니까? 효과죠. 효과를 보러 가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현재 사람들이 교회 와서 효과 볼려고 하는 것은 검은 사람들의 검은 교회죠. 그러면 여기 효과가 무슨 효과입니까? 검은 효과죠. 그런데 제가 빨간 글씨로 썼어요. 예수님의 일생은 빨간 것으로 되어 있고 사도행전도 빨간 글씨로 되어 있다면 여기 예수님의 일생과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효과는 검은 효과입니까? 빨간 효과 입니까? 빨간 효과죠.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나의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무슨 효과예요? 검은 효과죠. 그렇다면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효과를 이야기 해줘야 교회예요? 안그러면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점 집을 찾는, 굿을 하는, 사주팔자 보듯이 자기 이득이 되는 그런 효과를 찾는 어느 것이 교회예요? 어느 것이 교회예요? 예수님이 세운 교회가 교회가 되잖아요. 그러면 사도행전은 이 두 가지 교회가 다 있겠습니까? 두 가지 다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도들의 편지 속에 이 두 가지의 효과가 다 들어 있죠. 갈라디아서1장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이야기는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앞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이 객차라면 그 앞에는 예수님의 일생이 있죠. 그러면 이걸 빨간 글씨로 쓰면 예수님의 일생이 그대로 이어져서 사도행전이 되고 사도행전에서 뭐가 오겠습니까? 효과죠. 예수님의 효과죠. 우리는 예수님의 일생이 아니기 때문에 검죠. 검은 인간들이 모인 곳이 뭐라고 했습니까? 검은 교회. 검은 교회에서 바라는 것은 빨간 효과 입니까? 검은 효과 입니까? 시커먼 효과. 이것은 점치는 것이나 굿하는 것하고 마찬가지겠죠. 그런데 정작 사도행전이 줄려고 하는 효과는 검은 효과가 아니고 무슨 효과? 예수님의 효과죠. 예수님의 효과는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의 일생에서 나오죠. 예수님의 일생을 사도행전에서는 진짜 교회 맞나? 예.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생에서 얻은 것을 너희에게 공짜로 효과 줄께. 이게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교회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어떤 교회가 나오겠습니까? 인간들이 세운 엉뚱한 교회와 진짜 교회와의 마찰과 다툼도 사도행전에서 나오겠습니까? 안나오겠습니까? 나오겠죠. 그런것도 사도행전 공부하면 나온다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데오빌로여 그 다음에 예수님에 대해서 먼저 쓴 글에, 먼저 쓴 글이 누가복음이거든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일대기 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에 먼저 쓴 글에 성령으로 했던 그것을 이제는 승천의 날까지 기록하였노라. 이제는 승천부터 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것이 시커먼 너희에게 죄 많은 너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를 보라. 이게 사도행전 1장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효과가 뭡니까? 그 효과가 뭐냐 하면 그 효과를 크게 쓸께요. 그 효과를 성령이라 했어요. 누가복음 9장 9절부터13절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어떤 아비가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며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비가 어디있느냐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게 되거든 하물며 그 자식에게 사랑하는 아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입체감입니다. 어떤 입체감? 천국의 구조의 입체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나왔습니다. 천국의 구조라는 말을 오늘 강의에서 처음 했습니다. 왜 제가 구조라는 말을 썼느냐면 구조가 되어야 우리는 거기 일부분으로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만약에 카드(?)같면 성령이 나의 일부가 되버리죠. 하지만 성령이 구조가 되버리면 오히려 내가 성령이 만들어 내는 천국의 구조에 하나의 기둥처럼 밑에는 하나의 발판처럼 하나의 부분이 되죠.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구조하면 장충체육관. 여기 대전에 무슨 체육관 있죠? 충무체육관 있죠. 충무체육관 갈 때 충무체육관을 내 안주머니에 넣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성령을 받는다 하니까 보통 사람들은 성령을 내 마음 속에 담을 수 있는 걸로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게 오류다 이 말이죠.  체육관 속에, 성령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들어 간다는 것은, 성령은 입체감이죠. 홀로그램.. 성령은 입체감인데 내려오는 천국의 구조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근거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나와요. 너희들이 서로 성령 안에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주 어려운 말이죠. 성령이 온다는 말은 갑자기 내가 아주 작아져 버리고 작아진 나에게 뭔가 덮치는데 보니까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갑자기 사람들은 내 걱정 자책하고. 나는 뭐야 나는 죽고 싶어. 내가 인간이야 인가도 아니야. 나는 죽어도 마땅해. 맨 날 자신에게 몰두하다가 갑자기 뭔가 위에서 턱하니 와 보니까 무슨 생각이 달아나 버려요? 나는 실력이 얼마며 나는 한 달 수입이 얼마며 내 가족이 몇 명이며 이 생각이 없어져 버려요. 강아지 밥을 먹였을까? 그런 생각이 없어요. 지금 재원이 몇 시 인데 아직도 집에 안들어오지 그런 생각이 안나요. 갑자기 성령이 와 버리면 그걸 가지고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면 삼층천에 올라가니까 내가 거기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돌입되 버려요. 그래서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변화산 알아요? 변화산에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올라 갔는데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변해가지고 죽었던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니까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구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했죠. 그 순간 베드로가 누구 생각 안했습니까? 자기 생각 안했죠.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을 때, 초막 셋이 각각 누구용입니까?  하나는 예수님 하나는 엘리야 하나는 모세죠. 그러면 자기 것은? 자기 것은 없어요. 그러면 뭐가 없어져요? 아까 이야기한 주제? 아까 질문한 주제? 성령 안에서 뭐가 없어 집니까? 자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생각나지 않아요. 이게 성령 안에 보면 천국의 구조 속에서 자아는 일부로 포함되기 때문에 생각나지 않아요. 이것을 주께서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만약에 강렬해 버리면 강렬한 채로 기도하게 되면 성령이라는 예수님의 효과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했던 욕망을 기도하게 되죠. 나를 키우는 용도로서 기도하게 되죠. 보통 한국 아줌마 같으면 일단 역시 머니머니 해도 돈. 두 번째 자식 성공. 세 번째 건강. 네 번째 나름대로 자아찾기. 다섯 번째 같으면 자기가 교회 다닌다면 자기 교회 부흥..이걸 원하죠. 요런걸 주게 되면 뭐가 커집니까?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는 점점 더 굳어지고 강력해지고 자아는 더 커지고 이렇게 되죠.  자아가 이런 것이 돈도 안되지 자식 성공도 안되지 건강도 나빠져 남한테 실수해 가지고 공개적으로 아주 수치를 당해 자기가 이렇게 부끄러운 인간인 줄 온 천하 온 신문지상에 인터넷에 떠돌면 이럴 땐 사람 죽고 싶죠. 그리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부흥이 안되고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이럴 땐 결국에 남는건 뭡니까? 자살하죠. 농약 먹고. 보통 농약을 많이 마시는데. 결국 천상천하 유아독존. 철학에서 독아론. 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이런 인간이 원하는 것이 그대로 있더라도 이 윤곽이 실선이 아니고 점선으로 변하면서 흐물흐물해져요. 우리 재원이 계란국 먹어 봤어요? 계란을 탁 깨면 계란이 다 어디로 가요? 계란이 뭉쳐져요? 흩어져요? 흩어지죠. 자아라는 윤곽이 흩어져 버려요. 그러면 따로 자아라는 윤곽을 붙잡을게 없어요.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아라는 윤곽이 흩어져 버리니까 따로 붙잡을게 없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감사와 이미 성취된 이미 완성된 그 성령의 구조 속에 주님이 만들어준 용서라는 건축물, 용서라는 구조물안에 하나의 내가 갇혀있어 버리면 놓여 있어 버리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용서가 되기 때문에 그게 너무 좋아서 자기 생각은 흐물흐물해져 버립니다. 식사비 내가 낼께. 차비 내가 낼께. 일본말로 그 다음에 기마이쓰는 거예요. 그 전에 원수가 뭐로 변합니까? 진짜 원수를 원수라 하지 않죠? 뭐라고 합니까? 웬수죠. 원수가 용서가 되죠. 용서라 한다는 것은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한다면 용서가 안되요. 원수를 용서한다는것 자체가 자꾸 자아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용서가 안되요.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위대해지기 때문에 용서라고 하면 안되요. 원수는 잊는것이 최고지 용서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사과 들고 오면 골치 아퍼...사람이 연인 사이에 서글픈 관계가 뭐냐 하면 미운사이도 아니고 원수 사이도 아니고 제일 서글픈 관계가 뭐냐? 실례지만 누구신지.. 잊혀지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최고의 위기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문을 닫고 말을 안하는 거죠. 아...영화 10도라.. 재털이 어딨나? 리모콘은? 밥 차려줘?(말로 대답 안하고 몸짓으로만 함) 형제간에 그렇게 말 안하고 싸울 때 있어요? 없어요? 형 나좀 봐. 여기 좀 보라고. 눈을 안맞대죠. 바라기는 내가 나를 볼 때 잊어버리세요. 나하고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나라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지금 뭘 해야 되지? 그것만 생각하고 해야될 것만 하면 되지. 난 했는데 잘 했을까? 완벽 했을까? 어쨌을까? 저쨌을까? 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내가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가지고 거기서 점점 더 자기에게 큰 무게를 둬요. 그러면 자기가 쫓기게 되고 두려워지죠. 가만히 있어봐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기도하고 그만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행전을 첫 시간 이렇게 같이 보았습니다. 우리 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인정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천국가느냐 지옥가느냐 결정된다는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받아 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2009-06-17 13:07:56 녹취 : 이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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