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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12:23:59 조회 : 4275         
대전 10월 29일 행6강 사적인 것을 삭제당하는 용서받은 교회 이름 : 관리자(IP:124.59.85.46)

091029 행4:32 신이 된 자아를 확장하는 육의 교회
VS 그런 육의 자아를 미워하는 교회(육을 영으로 교체)

 관리자(IP:124.♡.85.46) 09-10-30 12:47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전/대전091029a행4장32절a자기것이없는복음세계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전/대전091029b행4장32절b자기것이없는복음세계b.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전/대전091029a행4장32절a자기것이없는복음세계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전/대전091029b행4장32절b자기것이없는복음세계b.hwp
 관리자(IP:124.♡.86.6) 09-11-24 15:16 
대전091029a행4장32절a자기것이없는복음세계a

대전강의091029a


이것은 죄라고 생각했던 것은 죄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더 높이기 위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 죄인 줄 알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의로운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는 죄. 나는 반성을 반성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고상해 진다는 것에서 오는 자기 의로움. 그 의로움을 위해서 생각했던 그 죄가 나를 더욱 이쁘게 하고 착하게 하고 나를 훌륭하게 만드는 그 죄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이 죄의 개념이 나하고 상대 안하고 예수님하고...예수님 아시죠?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죄. 그 전까지는 내가 생각한  내가 죄를 알아야 죄를 끊고 선 쪽으로 나가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되거든요. 나를 선하게 만들수 있는 죄들...여기서는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저쪽 철학이나 기존에서는 합리화라고 합니다.

내가 만약에 돈을 벌었다면 이 돈을 벌게 했는게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 돈을 벌게 했는가? 이 돈 가지고 하나님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돈을 벌게 했다 라고 하거든요. 보통 그렇게 하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일조 내고. 그게 바로 합리화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의 돈 번 과정을 다 조사해봤어? 당신이 돈 버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것을 다 끄집어 내볼까? 그러면 할 말이 없죠. 얽히고 설킨 그런 것들이 굉장히 많으니까. 장사할 때 완벽하게 거짓말 안했습니까? 이게 다 나오면 곤란하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전에 어떻게 했냐면 어쨌든 나에게 먹고 살도록 해 주신 것은 그 돈 가지고 하나님께 교회 헌금내서 복음 전하고 영광 돌리고 그리고 내 자식들 내가 살아 있어야 하나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전세계 선교하는 그 어쨌든 이것은 착한 것이다 라고 우길 때 그걸 제가 아까 이야기한 합리화라고 하죠.

앞에 하나 붙인다면 나의 존재의 합리화 입니다. 나는 남은 죽어도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아야 합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나는 귀하니까. 남의 자식이 대학에 떨어져도 아무 감정이 없어요. 그런데 내 자식이 대학에 두 번 떨어지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요.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열 아홉 살 먹은 아들인데 한쪽은 대학에 합격하고 한쪽은 대학에 떨어졌을 때 남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오히려 기쁘죠. 왜 그 자식이 떨어져야 내 자식이 합격하니까. 오히려 즐거운데 내 자식이 떨어지면 기분 나쁘고 더욱 더 기분 나쁜 것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앞 동에 있는, 내가 미워하는 그 집 자식이 내 아들 떨어진 마지막 자리를 차지할 때 분노가 일어나는데 그 때 우리는 물어야 하죠. 왜??? 나는 화가 나느냐? 조사를 해보니까 내 자식이니까. 앞에 뭐가 붙어요? 바로 나니까.

결국 지금까지 죄라는 것은 누구 중심이냐면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부르짖어도 나 중심으로 살아 온 것입니다. 곱사를 갖고 있었던 분들이 병이 나았다고 하지만 그 곱사병을 갖은 자식의 그 부모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대놓고 원망을 할 것입니다. 곱사병 생겨서 곱사병을 낫게 하지 마시고 아예 처음부터 없게 할 수는 없었습니까? 병 주고 약 주고 하지 마시고 아예 남들처럼 처음부터 건강하게 해주셨으면 그 나이에 더 건강했으면 전 세계에 훌륭한 음악가가 될텐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 되는 거예요.

그것도 역시 뭐냐면 왜 하필이면, why me? 왜 하필이면 나를?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이 이런 사람들의 어떤 한풀이를 은닉한 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반대 급부로 뭔가 챙기는 것이 온다는 그러한 노림수를 가지고 모이게 되니까 누가 자꾸 빠지느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의 자기의 똘마니처럼, 이용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뭘 붙이느냐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대리하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다는 말은 반대로 나는 불가능한 것이 있는 존재죠. 나는 불가능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것 아닙니까? 나는 못하는데 주께서는 해주세요 라는 의미란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지금 내 자신이 자신을 보기에 미흡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미흡하다는 것은 나는 이런이런 것이 내 맘에 영 들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이만큼인데 내가 지금 한가하지 않은 시간에 교회에 새벽에 와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레벨이 이정도인데 이만큼 부족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주여 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내가 기도한 애쓴만큼 그것을 보상으로 채워주시면 저는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체험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죠. 그런데 우리 주님 보시기에는 어떻게 보냐면은 너는 너 자신을 미흡하다고 보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에게 현재 있는 것도 너 죄진거에 비하면 오히려 은헤가 넘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보신단 말이죠.

하루 세 끼 먹나?  먹습니다. 애는 잘 크고? 잘 큽니다. 그러면 너 주변을 한번 보라 하루 세 끼 못먹는 사람도 있고. 아파트는 있고? 있습니다. 원룸에 사는 사람도 지금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가 어디까지 만족해야, 두 번 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지 않을 정도로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안 찾겠습니다." 라는 레벨이 되야 되느냐 그리고 너는 그정도 되야 될 가치가 있는 존재냐 라고 물으시면서 예수님을 들이대죠. 예수님은 사람이 높아질려는 자리 보다도 우리가 제일 가기 싫어하는 우리가 소멸하는 죽음의 자리에 갔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죠.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9절에 보면 하나님이시나 그 모든 것을 집어 던져 버리시고 사람들의 종이 되셔서 사람들이 되기 싫어하는 종으로 사셨다가 어느 정도까지 희생하셨냐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거거든요. 사람들이 다 기피하는 죽기까지 복종했다면 그것이 사람을 위함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위함이냐를 생각해 볼 때 전능하신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죠. 전능하심이란 내 미흡한 것을 보충하는 전능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전능하심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쭉 나오다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를 하게 되요.

우리가 해야 될 기도가 뭐냐하면 주기도문이 대표적인 기도라고 교회에서 하잖습니까? 그러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면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는 그 코스, 그 절차를 보여준 분이 누구냐하면 예수님이시다 이말이죠. 예수님이 표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우리는 아는 것이 비록 내가 원하는 내 뜻이 아닐지라도 누구 뜻이 되느냐면 아버지의 뜻이 내게 임한 것이 되잖아요. 아버지의 뜻이 임함이 된다면 그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다 이해가 되는 것이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그 다음에 나온 말씀이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이말이죠.

그러면 교회 앞에다 정문 기둥에 붙여 보자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는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까? 왜 그런 교회 표어를 걸지 않냐면은 이미 교회 문을 들어 왔을 때 부터 이미 기도하고 자기가 주님앞에 어떤 선한 것을 내보이면서 뭔가 노리고 들어 온다 이말이죠. 헌금을 한다든지 전도를 한다든지 바쁜 중에도 예배에 참석한다든지.. 줄 것 주고 받을 것 챙기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하는 중심센터가 뭐냐하면 어디까지나 옆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앞동의 내가 미워하는 불교신자를 위한 것이 "나." 기도하는 당사자인 "나."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는 것을 더 가치있게 높이기 위해서 빌었다 이말이죠. 아버지의 뜻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장26절).

온 천하 얻는 것이 자기 목숨 얻는 것하고 동일하다고 어릴 때 부터 이렇게 배웠습니다. 온 천하를 챙기는 것이 내 목숨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를 얻고자 하는 그것이 관심사가 이미 비뚤어진대 가 있어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로 넓은 길 끝은 아시다시피 멸망의 길이고 좁은 길 끝은 영생의 길인데 우리가 어떻게 확인하느냐면 찾는 사람이 많을 경우에 그것은 거의 백 퍼센트 넓은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우리 권사님께서 "제가 큰 교회 다녔었는데 제가 한 20..."그러시길래 "20명 다니는 큰 교회 다녔습니다." 라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것은 복음을 아는 사람끼리의 농담입니다만 그런데 "한 20년 다녔습니다." 였습니다. 20명 다니는 큰 교회 같으면 "아하 그렇다면 복음을 진짜 전하셨나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20명이 아니고 20년 다닌 진짜 큰 교회 였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원하는 것을 제공했으면 많은 사람이 찾겠습니까? 그것은 함께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경우를 양산할 수가 있죠.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표준은 예수님께서 하셨는데, 예수님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은 자기 목숨을 미워할 수 없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성경에 다 나오는 것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잘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요 철야에서 잘 이야기 하지 않는 구절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이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은 중요한 복음은 다 빠지거든요. 전능하심의 의미가 뭐냐하면은 아무도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은 우리는 절대로 좁은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왜? 외로우니까. 사도 바울.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갑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도 못 갑니다. 모세도 못 갑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이 갔던 영생의 길, 믿음의 길은 본인의 의지나 결단력으로 그 쪽을 간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충돌 되면서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가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전능하심이 작용해서 본의 아니게 자기가 낯설기 짝이 없는 예상치도 못한 길을 가다 보니까 빠져 나왔는데 어디로 빠져 나왔느냐면 천국으로 빠져 나와 버렸어요. 와 보니까 천국이예요. 뒤돌아 보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서 천국을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오게 되면 면류관을 벗어서 반납한다고 하죠.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면류관을 벗어서 도로 주님께 반납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계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그럴 때 내가 면류관을 썼는데 반납하는 이 자유의지 행위가 나를 더욱 더 겸손한 인간으로 나를 재해석해 줄까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러하기 때문에 제가 써서는 안되기 때문에 후다닥 벗어 버려서 반납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까? "아 이런 행위를 하면 내 행위가 또 값어치가 올라가는구나" 라는 통밥을 굴려 가지고 "어때요? 제가 어느 정도 겸손하냐면 제 면류관도 반납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자기는 평생 구원 받은 것이 주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벗었겠습니까? 평생 주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땡겨서 하잖은 말입니다. 성경에 그게 있다는 말은 그것을 천국가서 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에서 면류관을 반납하는 행위를 하잖은 말입니다.

그 반납하는 행위를 시편에서는 찬양이라고 하고 감사라하고 에베소서 5장에서는 찬미라고 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시와 신령한 노래로 찬양하고 찬미하고 감사드리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될려면 이것은 백 퍼센트 필연적으로 자기를 뭘로 보느냐면 자기는 "내 것만 챙기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가치와 내 편안것만 내가 이렇게 믿음 좋다는 것만 남한테 과시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 온 나를 내 뜻은 이것이었는데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이것을 꺽어 버리고 나 자신마저 하나님의 공로, 주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서 내 뜻을 꺽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강제적으로 조치하신 그 은혜에 대해서 찬미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고린도후서 4장 7절 한 번 찾아 봅시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능력이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사적인 능력으로 발휘해서도 안 되고 은사란 이름으로 내 실력을 과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는, 늘 그릇이 비어진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가 병든 자를 낫게 했죠. 사도 행전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사도 바울이 손수건을 공장에서 생산해 가지고 여러 장을 뿌렸습니까? 그게 아니죠. 그 손수건으로 그 다음에 하면 또 병이 낫습니까? 그것도 아니예요. 이것은 일회성을 연발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소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행전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성령을 통해서 병이 나으니까 자기는 그 능력을 소지하기 위해서 돈 주고 평생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마귀야 라고 이야기 했죠. 사도행전8장, 1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은 눈이 멀었어요.  평생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은 여기 고린도후서 4장 8절에 보면 우리에게 심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어떻게 아느냐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그 다음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러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할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주어져야 됩니까? 이것은 쉬운 문제입니다. 우리 권사님 말씀에 보세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을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어야 되죠? 답답한 일을 당하여야 하지요. 첫 번째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야 하고 두 번째 답답한 일을 내 선에서 내 명대로 해결되야 합니까? 안 되야 합니까? 해결되면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알죠. 그러면 해결을 어떻게 하느냐? 답답한 일을 당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이 자기에게 기댈 때, 자기가 자기에게 기대할 때는 항상 답답해져요. 그런데 이것이 답답한 일을 당할 때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고 내 인생은 주님의 인생이지 볼 때는 갑자기 답답한 일이 아니라 이 답답한 일은 내가 그동안 주님 주시는 은혜를 잊어 버리고 시선을 놓쳐 버렸을 때 다시 한 번 주님 주시는 풍성하신 은혜를 보라고 답답한 일로 옆구리를 쑤셔온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내 인생의 가치를 높이려고 할 때 뭔가 푹 쑤셔 오면서 "주여 제 은혜가 족합니다. 하지만 또 욕심을 내었군요. 제가 몰랐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주의 은헤입니다 라고 할 때 답답한 것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발견하죠. 교회와서 하나님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왜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 베푸는데 왜 나에게는 내 기도는 무슨 저질이어서 왜 안 줍니까?  다른 사람의 헌금은 은혜가 되던데 복을 받던데 내 헌금은 십일조해도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이런 것이 나온다는 것이 이미 관심사가 십자가의 복음에 가 있지 않고 십자가 주께서 낮아 지심에 가 있지 않고 자기가 지금보다 더 높아지려는데서 오는 쾌감, 우열감, 인생의 사는 보람. 교만한 거죠. 구약에 의하면 바벨론처럼. 남을 억누르는데서 오는 즐거움. 남을 때리는데서 오는 쾌감. 이런 것을 맛보면서 아주 즐겁게 인생을 살려면 타인을 피해자로 만드는 그러한 정신적인 욕구의 발산일 수가 있습니다.

여기 9절에 보면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이것이 될려면 뭘 받아야 됩니까? 이제 쉽죠. 핍박을 받아야 되죠. 무엇의 이름으로? 복음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야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아니하며 망하지 아니하고 "너 망해 너 저주 받아"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누구한테? 목사한테도 들어야 합니다. "너가 뒤에서 목사 뒷 담화했지? 봐라 부흥사 이야기 하는 것 봤지 목사 험담해서 저주받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온 교회 다 봤죠. 그럴 때 교인들은 저주 받으면서 겁을 내죠. 저주 받으면서 겁을 낸다는 것은 이 사람은 성령이 없다는 뜻이예요. 성령의 효과를 부인하는 자 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너를 저주에서 해방하는 것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저주 받을 짓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저주 받는다는 소리를 한다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해봐야 해요. 그 자리에서 그대로 해봄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가 살아가는 것이 주의 은혜인 줄 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덕분인 것을 효과인 것을 다시 한 번 십자가가 얼마나 고마운 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 하는 것을 해보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표어는 간단해요. "저주 받자" 목사 험담하면 저주 받으니까 "목사 험담해서 저주 받자" 우리 교회 설교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뭔가 난관을 정면으로 부딪쳐야지 피해 버리면 마귀가 계속 따라와요. 십일조 안해서 저주 받았습니다. 당신이 이번 주일에 교회 한 번 빠져서 저주 받았습니다. 가사일이 안되고 얘가 공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선교 헌금 두 번 빠져서, 성경 세 장 읽어야 하는데 한 장 밖에 안 읽어서, 그렇고 기도를 두 번 해야 하는데 한 번 밖에 안해서 그렇고 계속해서 본인이 본인에게 저주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책망하고 재판걸고 재판에 자기를 피고로 세우고 그래서 어떤 십자가 복음이 너를 율법에서 해방했다고 하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했다는데 전혀 자유를 못느끼고 오히려 저주를 불러요. 꼼짝 달삭하지 못하게 갈수록 다음 저주가, 더 큰 저주가 기다린다고. 여기 10절에 보면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시체들고 간다 이말이죠. 엘리사 선지자가 죽으니까 엘리사 시체를 툭 던져 버린 그곳에 있던 시체가 살아 났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그 당시의 예루살렘 근처에 무덤이 열리면서 그 주위에 있던 시체가 살아났다는 것 들어 보셨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의미가 무엇이냐면 "나 죽는다 너 살아라" 이 말이거든요. "나 죽는 것은 너 살리기 위해서이다." "너가 죽는 것은 너 죄 때문에 죽는 것이고 내가 죽는 것은 너의 죄를 없애므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도 살게 하심이다" 하는 그런 의미라고 십자가 죽으니까 몇 몇 죽은 사람이 돌아 다닌 거예요. 나사로가 예수를 믿으니까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되어도 나사로를 예수님이 불러 내니까 살아 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신 것은 우리 힘으로 어떻게 우리를 영생을 얻는, 구원을 얻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우리 힘으로 못하는 진짜 전능하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죄에서 못 벗어 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죽음을 의식하고 저주를 의식합니다. 저주와 죽음과 죄를 의식하는데 문제는 이 죄책. 이 자체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요. 어떻게 죄책과 저주성과 죽기를 두려워하는 이 세 가지를 몽땅 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마귀죠. 몽땅 다 해방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거든요.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이 네가지를 한꺼번에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편충. 종근당에서 나온 구충제가 모든 것을 다 박멸하듯이 예수님의 피가 몽땅 다 한다 이말이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의 피를 믿어주면 우리가 저주와 죽음과 죄에서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벗어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어요. "목사님 믿습니다. 목사님 그 말 믿습니다." 하거든요. 이것 거짓말입니다. 이게 왜 거짓말이냐면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죄와 저주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우리가 해방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너가 이 말을 너의 자유의지로 믿어주면 너 것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통과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병무청에서 20살 되는 청년들에게 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 날에 논산에 입대하라 라는 말을 사람들이 뭘로 보느냐면 입대 할랍니까? 안 할랍니까? 물어 보는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입대 안해" 그러면 입대 안 해도 되고 입대 해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죠.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서류 조사해 보니까 김 아무개 청년 10월 31일 날 입대. 끝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가 몰랐던 내 신분을 외부에서 새삼 확인시켜 주고 통보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너가 창세 전 부터 너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저주와 죽음과 죄와 마귀로 부터 벗어나야 될 그런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 시점에 통보해 주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자기 결단을 발휘해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고 통보해 주는 거예요. 어이 10월 31일부로 너는 천국 사람이다. 통보해 주는 것이지 믿으면 구원해 줄께 이것이 아니란 말이죠. 만약 그렇게 되면 아침에 열 시에 믿는다 사람의 마음은 열 한시 되면 또 달라져요. 열 두시 되면 또 달라져요. 다음 날 되면 또 달라지고 나이 칠십넘어서 치매 걸리면 또 달라져요. 치매 걸리기 전에 어떤 종로는 예수 찬양 혼자 전도 다 하다가 치매 걸리면 예수가 누구신지 이렇게 나옵니다. 한 두명이 아닙니다. 유명한 목사 한경직 목사도 치매 걸려서 내 앞에서 예수 소리 하지마 자기의 의식을 이것은 철학의 문제인데 인간이 자아라는 인간이 의식을 지배할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 들일 때 그 시점에서 믿겠습니다 결단하고 손들고 앞에 나와서 학습 받고 세례 받고 성찬식하고 이래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 너 아들이 병이 나았다는 말은 그 전 부터 그 시점에 병이 낫도록 이미 작정되어 있었던 거예요.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은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권한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만들어질 때 부터. 그래서 사람들은 죄 짓고 난 뒤에는 독자적으로 하나님을 상대할려고 하죠. 하나님 저 어떤 것을 믿어 줄까요? 예 예 말씀 하세요 제가 믿어 줄께. 아주 건방을 떨면서 이렇게 나오죠. 하지만 나중에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아 주님께서 믿도록 하셨구나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 주신 선물이다. 처음에 아브라함이요 얼마나 지 자랑 했다고요. 야곱도 처음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얼마나 촐랑됐습니까? 나중에 보니까 내가 한 평생 살아 온 것이,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한 평생 살아 온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요리조리 몰고 다닌 하나님의 나그네 인생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라고 차후적으로 나중에 그것을 알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에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합니까? 아주 서슴없이 반납해요. 나의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전15장 14절. 그러게 진작 그렇게 이야기 해야지. 진작에. 그때는 역시 내가 믿음이 너무 좋았어. 사도 바울은 믿지 않았지만 나는 믿어서 복을 받았어 이런 식으로 자꾸 믿음에다가 자기 행함을 자꾸 걸쳐서 해대버리면 그 사람은 나중에 어떤 본의 아니게 죄를 짓는 순간이 오게 되면 그것도 사회 생활 하다보면 알지만 사회 생활의 죄가 본인의 단독 범행이 없습니다. 한 집단이 공범들이예요. 옆에서 떠미니까 밀리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 떠밀어서 고소하다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것은 약간 정신병자고 저 사람 애인 있는데 걷어 차야겠다 이런 애는 아주 나쁜 애고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위주로 자기 밥 먹고 살기 바쁘니까 저 쪽에서 떠밀면 우리는 변명할 거리만 생기죠.

하나님이여 어쩔 수가 없었나이다. 내가 내 하청 기업을 부도내는 것은 내가 부도 내고 싶어서 낸 것이 아니고 우리 회사도 저 쪽에서 부도오니까 없어서 못 줘서 망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약간 여력이 있어서 버텼는데. 저 회사는 왜 작으냐 말입니다. 우리는 큰데. 작은 것이 죄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돈 있으면 왜 안 주겠습니까? 사기 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돈 있어도 떼 먹습니까? 사회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강도짓 한 사람 중에서 핑계 없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나를 버리고 이혼했고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 죄라고 하면 자기가 직접 난 사업 안 주겠다 도적질해도 난 사업 안 주겠다. 그래서 제가 언제 강의 했죠.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부르죠. 유영철이 들어오니까 전부 다 환호성을 하는 거예요. 그 전 까지는 자기가 뭐였다. 나 죄인이다 하다가 유영철이 들어 오니까 자기는 적어도 스물 몇 명은 안 죽였잖아요. 오늘 강의 처음 할 때 그랬죠.

인간의 죄라는 것은 누구 중심이다? 자기 변호하기. 하나님이여 저는 죄를 지었지만 이러이러한 죄는 안 지었습니다. 아직까지 의로운 것이 남아 있습니다. 자기 의를 증거하기 위한 하나의 매체로서 그것을 변명할 용도로서 몇 몇 죄를 끄집어 내서 그것을 반성하므로써 더욱 더 자기를 가치있게 보는데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십자가 피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해주느냐. 교회는 이겁니다. 교회에 그 나라 그 의를 구하자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이런 것 붙여 놨잖아요. 실제로 교회는 그렇게 붙이면 안 되고 어쩔 수 없나이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중들이 옛날에 절에 가서 산 위에서 했던 그 민중들이 산 밑에 내려오면 절을 찾아요. 그게 뭐냐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모든 한국의 민중들의 무속 신앙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내 노력한 만큼 그 만큼 보상이 주어진다.

이것은 성경을 덮고, 덮었을 때 진실되게 우리가 감추고 감추고 싶은 우리의 속내가, 속마음이 임함이예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된다는 것은 이 자본 주의 사회에서 뭐가 필요하냐면 기본 밑천이 필요하죠. 밑천이 마련되면 고객 확보가 용이 합니다. 같은 숯불 갈비집도 주차장 넓은데 하고 좁은데 하고 장사의 차이가 납니다. 투자한 만큼 손님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부모들이, 젊은 새댁들이 애한테 꺼벅 죽는것을 천하가 다 압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공부방 설치해 주고 노인들에게는 꽂꽂이 하고 하게 된다면 이것은 그들이 뭘 생각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교회가 이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구나 라는 호감을 느끼고 거기에 모이게 되죠. 그러면 그 시설비는 누가 됩니까? 기존 교인들이 내야죠. 소위 장로, 권사 오래 다닌 사람들이 내야죠. 내게 되면 그걸 보고 사람들이 찿아 오는 거예요.

결국 뭐냐 돈이 돈을 낳는 거예요. 돈이 없는 개척하는데는 그런 사람들을 확보 못하는 거예요. 개척교회 가 보세요. 사모님 점심 한다고 김치찌게 풍기는데 김치냄새 풍기는데 하고 향수 풍기는 데하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개척교회 하는 곳에는 창문도 없고 지하같은데 지하에 습기 차는데 한 번 참석 했다가 감기들면 어떻게 하려고 아이들을 어떻게 보냅니까? 신종플루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결국은 큰 교회가 큰 교회를 낳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게 솔직한 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그러면서 동원되는 것이 하나님은 앞에 붙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이 두 가지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가지고 한국 교회를 완전히 전멸시켜 놔버렸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을 때 뭘 원합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고 전능하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든 인간이 다 알고 것입니다. 심지어 갓난 어린애도 사랑에는 꺼벅 죽고 강아지도 사랑을  해 주면 꼬리를 흔들어요. 거기에다 전능하심까지 주었죠. 이런 하나님 외에 인간들은 어떤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나중에 강의 할지 모르겠지만 자유의지라는 것은 선악과 따 먹은 난 뒤에 새로 발생된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해요.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간에 인간은 선택을 할 때 본인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복음도 본인이 좋아하는 복음을 선택하는 권리를 외부에서 압박하지 말라는 심리가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을 내가 알아서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뭐냐면은 이 두 가지를 좋아해요. 왜? 이것은 결국에 이 두 가지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대단히 좋아하는 나를 더욱 더 좋은, 사랑의 대상으로 고착화 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시 나는 내가 좋아 그런데 이 하나님마저 나를 좋아해.  역시 나는 나를 못 버리겠어." 점점 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라는 것하고 동떨어지죠.

그러면 하나님은 뭐냐? 십자가죠. 그런데 십자가인데 여기에다 사랑, 이걸 사람들은 교회에서 십자가를 이야기 하면서 이 십자가를 사랑과 전능하심으로 연결 시키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십자가는 그게 아니고 내가 온 것은 너희들에게 화평을 주려 함이 아니고 처와 자식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와 너 자신과 싸우고. 너 자신을 사랑하는 나는 사랑해야돼 라는 나와 아니야 나는 죄인이야 죄인을 사랑하면 안 돼 내가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는데 나는 죄인인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야 이것은 안돼 이 둘 사이를 균열 시키기 위해서 오신 그런 능력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죽으셨을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한 거예요. 나는 죽어서 마땅합니다 라는 말을 하므로써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이 오니까 비로소 십자가 앞에서 죽었던 피가 내 죄.근원적인 죄를 흘린 이런 것 좋아하는 사랑 좋아하고 전능 좋아하는 그래서 결국 나를 좋아하는 하나님은 나의 졸개고 진짜 주인은 내가 내 주인 된다는 이러한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 내가 창조자 되고 오히려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는 피조물, 위치를 전복 시키는 거꾸로 만들었던 내가 신이고 신은 나보다 하수인 신. 급할 때는 나 먼저 찾지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내가 우선 되고 그러한 죄, 죄인 자체의 인간에 대해서 십자가는 너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주신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미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교회라 하는 것은 육이 모여서 육을 외치는 그런 교회가 아니고 육이 왔더라도 주께서 보내시면 영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 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갈 때 요한복음 3장 8절에 나온 말씀인데 어떻게 바뀝니까? 니고데모가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놋뱀 들리듯이 내가 높이 들려야 하리라 했습니다.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 죽으심을 이야기 한 것이라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내가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것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 내가 죽어야 너도 살 수가 있다 내가 죽어야 니가 좋아하는 너도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뭐냐 같이 죽는 것입니다. 같이 죽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죽으면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잖습니까? 새로 만들죠. 영으로 새로 지어진 피조물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내가 나의 육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죠.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자기 작품을 사랑하니까. 갑자기 말을 어렵게 했습니다. 뭐냐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더이상 여기 살아 있는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살아 있다는 이런 관계를 한 자로 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영을 어떻게 보느냐면 나는 안 죽고 신비로운 전능하신 능력을 받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영이라고 해요. 이것은 니체의 주장입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주장입니다. 너의 속에 잠자고 있는 능력을 깨워라 이것에서 나오는 용어가 뭐냐면 하면 된다. 왜 너의 잠재력을 썩히느냐 뭐든지 답습하고 훈련하면 될 수 있다. 조그만 더하고 십 분 쉽시다. 제가 감기 걸려서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요. 컨디션이 안 좋아서 지금 조용조용히 하는데 컨디션이 좋아 버리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죠.

강의와 관련되서 이야기 드립니다.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면 육을 영으로 바꾸는 곳입니다. 왜 영으로 바뀌어야 하면 육이 영으로 바뀌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뀔 때는 육이 산 채로 영으로 바뀌지를 못하고 육은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죽을 때 자살하면 안 됩니다. 노무현처럼 자살하면 안되고 그리고 최진실처럼 기독교 신자 이름으로 자살로 하면 안됩니다. 죽더라도 내 죽음 죽으면 이것은 개죽음 됩니다. 내 죽음이 주님의 죽음으로 바꾸어져야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죠. 십자가가 오게 되면 너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십자가란 예수님이 혼자 자살한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죽이는 채로 있었죠. 누가 죽였습니까? 인간이 죽였죠.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죽였을 때 이 십자가 주변에, 소나무 옮길 때 소나무만 달랑 옮깁니까? 주변의 흙을 팝니까? 흙을 파서 소나무를 옮겨야 그 소나무를 다음에 정원에 옮겨도 죽지 않고 살잖아요. 그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유발시킨 동기들 같이 합쳐서 십자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스란히 그대로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우리 육한테 오게 되면 우리가 그 십자가에 죽인 그 가해자 속에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요.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아담의 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인간치고 아담의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죠.

로마서 5장에 보면 모든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죄를 입었다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죄의 왕노릇이라고 합니다. 왕이라는 개념은 지배 개념이예요. 왕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왕이란 말은 전부 통치해 가지고 그 왕 체제에서는 못 빠져 나오는 것을 가지고 왕 노릇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이 아니고 우리의 결단력과 선택이 왕이 아니라 누가 왕이다? 죄가 우리의 결단력 선택력 모든 것에다 대입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것을 해도 우리는 아담의 죄에 힘에 의해서 결단을 하고 결정을 한다는 말입니다. 나 클래식을 들을까? 대중가요를 들을까? 라고 결정하는 그 속에도 죄가 발휘되는 거예요. 아까 보니까 시빌리우스하고 어떤 악보가 있던데 그러면 어느 음악을 연주하는 그것도 반드시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것이냐면 앞동 아저씨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좋아라 하는 것이잖아요. 왜 내가 내 좋아라 right 옳은 이야기가 되는가? 이것을 해결한 철학자 아무도 없습니다.

잡채하고 소세지 있는데 어떤 아이는 잡채를 먹지 않고 소세지를 먹는데 그러면 "너는 왜 잡채를 먹지 않고 소세지를 먹느냐?" 하고 물으면 "나는 잡채보다 소세지가 좋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물어 보면 "너는 왜 잡채보다 소세지를 좋아해야만 하느냐?"고 물으면 아이가 답답해 하죠. "아저씨 내가 좋아한다니까요" 그러면 묻죠. "왜 너가 좋아해야 하는 그것이 진리이어야만 하느냐? 그 답변을 하라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하고 빌라도하고 대화예요. 사람은 내가 좋으면 진리예요. 내가 소세지 좋으면 무조건 누가 뭐라고 해도 천지 개벽이 일어나도 잡채를 해도 "나 잡채 싫어 소세지 먹어야 해요." 왜 내가 결정했으니까. 그래서 민주주의가 뭐냐면은 내가 결정한 것을 존중해 주자는 이거 아닙니까? 그래서 민주주의는 진리가 아니예요. 옛날에는 귀족이 좋아하는대로 따라 갔지만 지금은 각자가 좋아하는 대로 선택한 대로 가는 그것이 민주주의 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가 아니고 자기가 현재,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진리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인간은 자기 위주로 하면 안되고 하나님 진리에 가 있어야 되는데 선악과 따먹은 이후로 인간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진리로 알고 그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 하면 그 좋은데 약사도 들어오고 중매도 들어 왔는데 왜 저같은 인간하고 결혼했는지. 그런 분들 많아요. 젊을 때, 그  누구도 장구치는 친구가 있어요. 어릴 때 경찰에 있던 사람이 자기 보고 그렇게 좋다고 하고 결혼 하자고 하는데 그 때는 이상하게 마음에 없었는데 그 사람은 지금 서장하고 있고. 지금 자기하고 결혼한 6살 연하의 남자는 자기가 한 것을 핍박까지 하면서.. 내가 미쳤지 왜 그 때 그렇게 했는지. 그것은 그 순간 그 때 본인이 좋아해서 한 것입니다. 남이 강요했다고요. 강요해도 역시 좋아해서. 자기 안에 타협을 한 것입니다. 강요한 것을 들어 주면 무슨 이득이 주어질까? 항상 자기 이득을 포기하고 선택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그것을 가지고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 까지 포기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 믿고 아무리 잘 믿어도 죽을 때 까지 자력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뭘 느끼느냐면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셨구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부터 뭐가 생기느냐면 여기에서 용서란 것이 생기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내 열심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주께서 용서하시는, 죄를 용서하시는 긍휼의 능력으로만 구원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용서받은 자가 많은 자가 주께서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자기 생명이죠. 예수님의 자기 생명으로 내 대신 죽은 것은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을 주께서 자기 생명 던져서 용서하심으로 구원했기 때문에 이 용서 앞에 반드시 뭐가 전제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뭐였다? 우리는 죄인이다. 죄 플러스(+) 용서가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내가 안 되는 것을 전능하신 용서의 힘으로 하죠.

그러면 용서가 계속 용서로서, 은혜가 은혜로서 유지될려면 우리는 뭐가 되야 되죠?  내가 아직도 모르고 있는 죄가 뭘까? 자기 죄를 찾게 하시도록 주께서 여러 가지 사태를 벌리게 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차를 몰고 점잖게 신호 위반 안하고 갈 때 하나님이여 오늘도 신호 위반 한 번도 안했습니다. 나는 너무 착해 내가 착해서 미치겠어 이렇게 생각하다가 나중에 십자가 라는 용서를 알고 난 뒤 부터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내 의라는 이것도 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죠. 옛날에 구제하면 착한 일 한 줄 알았는데 남한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옛날에 간통 안하면  죄 안 지은 줄 알았는데 길 가는 여자를 보고 마음 속에 품어도 그게 간음죄라는 사실. 옛날에 교회에서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갚아야죠. 하나님께 맹세했으면 갚아야지 왜 안갚습니까? 협박 공갈에 넘어가서 안 갚으면 저주를 받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저주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 오십억 내겠다고 손들고 한 푼도 안 갚아 보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죄가 되는 사실. 성경에 일체 맹세하지 말라. 옛날에 내 자식을 신학교에 바치겠습니다 라고 맹세 한대로 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더니만 맹세 한대로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이 내 의를 드세우는 하나의 교만인 것을 발견하는. 날이 갈수록 이제는 모든게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이. 그러면 왜 사느냐 주의 용서와 주님의 은혜 덕분에 지금 이 모양 이러한 큰 행운으로 살아 갑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찬양과 찬미로 나와야 합니다. 10분 쉽시다.


2009-11-06 16:51:02 녹취 : 이미아
 관리자(IP:124.♡.86.6) 09-11-24 15:20 
대전091029b행4장32절b자기것이없는복음세계b

대전강의091029b


아까 이야기 한 저주를 받을까 아니면 축복을 받을까가 내가 목사한테 어떤 관계와 태도를 갖느냐에 딸렸다 라는 식으로 목사가 기능적으로 종속시켜 버려요. 교회 전체를 종속시켜 버려요. 그게 흔히 중세 교회라고 하는데 요새는 중세 교회보다 더 하지만.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해도 같은 교회내에서만 공부하고 다른 데에서는 하지 말라는 이유가... 성경 공부가 무엇의 수단이냐면은 성경 공부라는 것은 진리잖아요.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는 진리가 아니고 그 교회가 크는 것이 진리가 되버려요. 그 교회가 크고 그 교회 당회장에게 복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진리가 되버려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한테 복종하는 거예요.

보통 교회에서는 이것을 교인들에게 감추기 위해서 뭐라고 하냐면 우리 교회는 목사 위주가 아니고 주님 위주입니다 라는 말을 앞에다 딱 깔아 놓아 버려요. 깔아 놓으면 교인들이 아무리 목사의 헛점을 파내도 그정도까지 말을 깔아 놓으면 더 이상 수사가 진행이 안됩니다. 목사는 뭐가 전문가냐면 교인들이 목사의 헛점을 파내는 것을 차단시키는 막을 여러 개 갖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이 아무리 덤벼 들어도 파악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우리 교회는 목사 위주가 아니라 주님 진리 위주입니다 라고 했다가 진짜 바보 등신같은 교인 하나가 그 말을 곧이 듣고, 목사가 그 말 할 때는 뭐냐 이런 말을 하는 목사를 배나 존경하라는 식으로 뒤에 노림수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얼마나 훌륭해 라는 노림수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너 다른 교회가지 말고 우리 교회 나와 이런 뜻으로 하는건데 아이큐 한 20밖에 안되는 바보 등신같은 인간이 그 말을 곧이 듣고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목사가 우선이 아니고 주님이 우선이라고 가르쳤지요?"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방금 목사님이 하신 그것은 이 성경 말씀하고 어긋나네요." 하면 목사가 "나가!!" 우리교회 그런 분이 계십니다. 이상규 집사님이라고.

그 분 아무것도 모르고 진리에 관심있어요. 교회 부흥도 관심 없습니다. 전에 목사가 이렇게 가르치니까 "아이구 목사님 잘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걸 그대로 가져가요. "목사님 가르친대로 그대로 하는가 봅시다." 이렇게 나와요. 목사가 "이 사람 등신이야 이렇게 가르치면 가르친 나는 빼돌라는 말야 이 뜻이야 임마" 그런데 그 사람 넘어가지 않아요. 왜? 성령 받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성령 받았으면 모든 것에서 부터 자유. 무슨 자유? 목사 저주하면 저주 받고 집안 망한다는 여기에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러면 이 자유는 말씀에 종속되었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기 때문에 진리에 종속된 것을 자유라 합니다. 진리로부터 벗어난 자유는 없어요. 이 사람은 진리가 주관심사이기 때문에 교회가 말씀을 그렇게 기능적으로 가르치는 기능적으로 하는 목사가 지휘하는 말이 옳은가를 확인해 보겠다는 자유함. 그것을 말릴수가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성도는 눈치코치도 없는 바보 등신같이 교인들의 눈에 보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야말로 그 사람이 그 교회에 목사보다 더 뛰어난 진짜 더 위대한 보석같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권사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나오고 말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가 모든 저주를 어두운 그림자를 기억들을 다 회수해 주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복음으로서. 더이상 무서운 것, 두려운 것, 죽음 이런 것, 어두운 그림자가 없기를 바래요. 그것을 미백효과하고 하는데, 기미 주근깨...화장품 좋은 것 바르면 뭐 없어진다 그러잖아요. 깔끔하게 영원히 영원에서 침침하고 어두컴컴한 것이 없기를 바래요. 용서. 용서예요. 어느 구석에서든지 내 발끝 어느 구석에서도 용서가 다 흘러서 죄에서부터 용서 받았으면 더이상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 진도 나가 봅시다. 사도행전 4장 32절. 다같이 한 번 읽어 봅시다.

32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본문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어 하나 나오죠. 나의 것, 제 것이라고 하는데 제 것이라고 합시다. 제 것이 없다고 했으니까 엑스표(X)를 칩시다.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라캉은 S에다 빗금을 쳤는데 제 것이라는 것이 없을수가 있습니까? 처음 오신 분들도 어렵더라도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참아 주시고 이렇게 어려운 것도 있구나 하고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열도 내렸겠다 드디어 컨디션이 돌아 왔는데 서서 해야 겠습니다. 제 것이 없다고 누가 판단합니까?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여기 냉장고가 있는데 이 냉장고는 내 것이 아닙니다. 라고 누가 판단합니까? 내가 판단하잖아요. 그러면 내 것이 있잖아요.

이 문제를 현대 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풀어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그러면 십자가를 믿고 있는 내가 보이죠. 십자가를 믿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믿는지 안 믿는지 확인할 수 있는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있죠. 그러니까 둘 중의 어느게 나냐 이 말이죠. 결국에 뭐냐하면 내가 이것을 앞장 세워서 나의 가치를 더 높이려는수작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다. "목사님 믿어요. 나는 믿습니데이~ 하나님 나 잘 믿죠. 잘 믿으니까 복 주세요." 라고 하면서 복은 내가 챙기고 믿는 것 이걸 손을 내밀어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 과연 이것이 믿음일까? 하나의 수작이죠. 연출이고 연기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경우를 학계에서 뭘 알아 냈느냐면 '자아' 쉽게 말해서 "나" 나가 무엇이냐를 알아야 해요. 내가 무엇이냐? 내가 누구냐? 라는 것 보다 더 어려운게 내가 어디 있느냐? 입니다. 손바닥이 있습니다. 손바닥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확인하느냐면 손바닥을 자르면 되죠. 자르면 손바닥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없습니까? 있잖아요. 자 다음엔 상반신을 다 잘라 봐..어떤 일본 사람은 오체가 없잖아요. 오체가 없어도 내가 있죠. 그러면 남아 있는 부분이 어디겠습니까? 머리 부분이죠. 머리 부분을 반을 잘라봐요. 잘랐는데 여전히 나가 있어요. 내가 있단 말이죠.

이런 실험을 하면서 얼마나 실험이 어려운지. 옆에 사람이 묻는 거예요. 팔을 잘랐습니다. 아저씨 느끼거든 대답해 보세요. 아직 나가 있습니까? 있어요. 그러면 두뇌를 반 잘랐으니까 의식이 있을 때 답변해 보세요. 아직 나가 있습니까? 있어요. 두뇌를사분의 삼을 잘랐습니다. 아저씨 빨리 답변해 보세요. 나가 있습니까? 답변이 없어요. 죽었어요. 그러면 문제입니다. 죽으면 외부에서 나가 있다는 소리를 못 듣고 죽었는지 진짜 나가 없어 졌는지 어떻게 판단합니까? 모르죠. 어떤 사람이 로보트를 만드는데 로보트를 만들고 인간과 똑같은 감정과 의식과 웃음과 눈물을 다 흘리고 심지어 로보트하고 인간이 대화를 하는 로보트를 만들 때, 또 움직이는 청소하는 로보트를 만들면서 자아 의식을 가진 로보트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로보트만 만들면 되지 의식을 가진 로보트를 만들 필요가 없잖아요. 결국은 자아 의식을 가진 로보트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발견하지를 못하는 것니다. 인간은 두뇌 사분의 삼을 잘랐을 때 죽었어요. 역시 인간은 자아가 두뇌에 있는데 두뇌가 죽으니까 자아가 없어 라는 평가를 지 맘대로 내리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면 두뇌를 봅시다. 두뇌 속에 자아가 어디에 있습니까? 표면효과 라고 해 가지고 두뇌에 어떤 정보가 들어서 점점이 피어내는 이미지가 자아냐? 이미지를 자아라 한다. 어떤 사람은 전체 이미지가 아니고 특정 이미지, 신이나 믿음을 표현하는 특정 이미지가 따로 있다. 네온사인을 멀리서 보면 I LOVE YOU 라는 네온사인이 지나가면서 I LOVE YOU  I LOVE YOU 라는 글자가 막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막상 앞에 가 보면 네온사인이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까? 네온사인은 지나가지 않죠. 한 쪽이 점멸이죠. 한 쪽이 켜지고 꺼지고 하는 것이죠. 하나의 기계가 켜지고 꺼지고 하는데 멀리서 보면 글자가 막 지나가고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네온사인은 가만히 있잖아요. 네온사인은 깜빡깜빡할 뿐이고 움직이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가 생각하고 이런 것이 나중에 두뇌를 조사해 보면 두뇌는 번쩍번쩍 정보를 나타낼 뿐이지 거기서 생각한다 우습다 이런 것이 안 나타난단 말입니다. 우습다, 생각한다 그러한 레벨은 물질 차원이 아니고 그것보다 다른 높은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한 이미지인데 그 이미지를 파악할 때 이미지를 파악하는 그 주인공이 되는 자아는 어디에서 만들어 내느냐 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이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성경은 해결하는데 어떻게 해결하냐면 우선 과학은 인간이 있고 과학 외부에 있는 것을 자연이라고 했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나 서양 철학에서 옛날 신화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교류를 했어요. "주먹 쥐고 일어 서" "도끼 들고 하늘 봐" 인디언들이 지은 이름이거든요. 그 때는 인디언들은 인간을 자연의 아들로 봤어요. 교류가 되요. 자연은 엄마예요. 엄마. 이걸 가지고 바알 종교라고 합니다. 우상하면 다 부처한데 비는 것으로 아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것 전부 다 바알 종교입니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자" 이것 다 바알 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연과 교류가 되었는데 과학이 발달 하면서 자연은 뭐로 재구성이 되었느냐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구성이 되어서 이것은 과학 세계를 말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분석의 대상이라고 하고 인간은 이것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쭉 나왔으면 참 좋았는데 문제는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봤다고요? 옛날에는 자연과 종속되었는데 자연을 분리시켜서 자연을 탐구의 대상으로 보았죠. 이제는 달나라가 어떻고 별나라가 어떻고 ..그 다음 문제는 과학 입장에서 인간을 보니까 과학이 우선이고 인간이 대상이 되겠죠. 인간을 수술해야겠죠. 수술하고 뜯어 고치고 DNA를 조작해야 되겠죠.

자아가 어떻게 되었어요? 자아가 누구한테 점령 당했습니까? 자아가 과학적인 자아에 의해서 사적인 자아가 종속되죠. 인간이 과학을 삼키려 하다가 도리어 과학이 인간을 다스리게 되버린 겁니다. 다스릴 때에 그러면 자아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두 가지를 모두 통합하는 이 자리에 자아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마저 초월한 자아. 이게 바로 신의 자리입니다. 자연과 나마저. 쉽게 말해서 옛날에는 나는 자연의 것이다 나는 나대로 살아야지 했는데 지금은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드는 거예요. 지금의 신체, 몸 이것은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뜯어 고쳐야 되겠죠. 이것을 쉽게 말해서 미친놈이죠. 나도 내 맘을 내 맘대로 못해.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딱 한 가지 아는 것은 지금의 나는 전혀 내 맘에 들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면 나는 마약을 먹어야 하고 나는 나에게 마치 강아지 말 안들으면 때리듯이 나는 내가 원하는 나를 찾기 위해서 그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마약을 한다든지 술을 퍼마시든지 아니면 마약과 술과 비슷한 것이 뭐냐면은 금요 철야에 가서 손바닥을 친다든지 부흥회 하든지.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드는 전능하신 신이여!! 내 가정사나 내 자식이나 내 남편이나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제발 남한테 과시할만한 내세울만한 것좀 만들어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는 뭡니까? 너가 누구냐? 몰라요. 다만 지금의 나는 맘에 안든다 그 뿐입니다.

결국은 이것은 뭐냐면은 내 것이라는 것을 줏어 모으지만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에 항상 뭐가 들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설명하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 무엇이 잘못 됐는가?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할께요.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그러면 자아라는 것은 뭐냐하면 말씀이 인간의 신체, 몸하고 말씀하고 와닿는 그것에 생기는 것이 자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선악과를 따 먹지 마" 또는 "생명과를 따 먹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을 누구보고 이야기 한 것입니까? 자아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아라는 것은 말씀이 올 때 내 신체에 마주치는 그 지점에 생기는 것이 자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말씀으로 사는데 말씀을 버릴 때 이 자아는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공백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자아는 누가 채우느냐 현재 내 눈에 있는 내 몸 가지고 자아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쌍꺼풀 수술이 맘에 안들어 새로 해야겠어 이것은 뭐냐 누가 누굴 채운다? 현재 있는 나에게 손을 대 가지고.. 쌍꺼풀 수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우리 교회에서 삐지는 사람이 있어서요. 나는 키가 작아서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되겠다 이 말은 키가 적당히 180센티미터 되는 것이 자아인데 이것을 누가 만들어 놨어요. 내가 만들어 놨어요. 성경 예레미야에 보면 "너는 키가 180센티미터 되야 구원 받는다" 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있는 것은 신체 밖에 없는데 알 수 없는 신체 말고 외부에 뭔가 신체에 대해서 불만을 자꾸 집어넣는, 불만을 자꾸 일으킬만한 그러한 다른 어떤 세력에 의해서 만나는 지점을 자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뱀이죠. 악령과 만나는 지점. 악령의 지대. 모든 불신자들은 자아가 있는데 그 자아는 악령과 교신하는 자점을 말해요. 제가 좀더 쉽게 이야기 하면 어항이 있잖아요. 어항이 있으면 여기 물고기 살잖아요. 물고기가 사는 어항은 물이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세아. 있어야 되죠. 물과 고기가 유리관에 있어야 어항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선악과 따 먹지 마" 말씀을 같이 집어 넣는데 마귀가 뭐라고 하냐면 "뛰어 나온나 말씀에 얽매일 필요 없다. 말씀만 벗어나면 너는 뭐가 된다? 너도 신이 되는거야." 라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누구와 교신하게 되는. 악령과 교신하는 뱀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그 때 부터 이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야 할 말씀과 교신해야 할 그 자리에 마귀가 자꾸 말씀을 기피하는 쪽으로 너가 신이야 잠자는 신을 깨워라 불교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왜? "너가 신인데 뭘 믿어 누구를 믿지 마라 너는 있는 그대로가 너가 신이다" 요새 기독교도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불교하고 접촉이 되어 가지고 "예수를 믿지마라 너가 예수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 합니다. 왜? 자기 악마성하고 딱 들어 맞아요. "목사를 믿지마라 너가 목사다" 그러면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 합니까? 그리고 교회 안 가고 불교 안 가도 일반 길 가는 사람한테 물어 보세요. 당신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 한 마디만 해도 기분 좋은 굿모닝보다 더 좋은 즐거운 인사입니다. 당신은 귀하신 분이십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거드는 노래 있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이게 뭐냐하면 있는 그대로를 긍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온 사고 방식이 바로 긍정적 사고 방식입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의 원조는 니체라는 사람입니다. 아까 이야기 한 "하면 된다" "잠 자는 신을 깨워라" 이 말은 자아라는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라? 눈에 보이는 너의 신체를 굴려서 너 자아에 만족스럽게 채워라 못한다고 하지 말고. 하. 면. 된. 다 I can do it. I must do it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야만 된다. 학원 같은데 보면 많이 있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쭉 이런 것 있잖아요.

나는 할 수 있다. 이게 뭐냐하면 너는 너가 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것입니다. 단 누가 도와줘서? 교회는 누가 도와 줍니까? 성령이 도와주고 성부가 도와주고 성자가 도와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너가 되고 싶은 욕망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할 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댓가는 헌금으로 내라 그래야 교회가 커지니까. 교회라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의지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든지 내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교회죠. 고착이라고 하는데 철저하게 내 것에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내 것으로만 즐거워 하는 것.

그러면 교회가 커지면 옆에 사람이 좋아질까요? 본 교회 교인들일 좋아질까요? 본 교회 교인이 좋아지죠. 왜냐하면 내 교회이니까. 지난 청소년 축구할 때 한국하고 8강 시합을 누구하고 했습니까? 한국하고 가나하고 했을 때 한국이 졌잖아요. 누구를 응원하겠습니까? 한국을 응원하죠. 대~한민국 짝짝짝 하고 응원 하잖하요. 왜 응원합니까?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을 응원하잖아요. 얼마나 자연스러운 자아 채우기 입니까? 자아 채우기.

만약에 졌으니 망정이지 이기면 또 서울 광장에 난리 나잖아요. 어떤 술집은 술도 공짜로 주고. 왜 그렇게 해요? 자아 공백을 대한민국 청소년 축구팀이 그 공백을 메꾸어 주므로 말미암아 나라는 테두리가 더욱더 견고해지는, 역시 나는 나로 인하여 살만해 나로 인하여 즐겁고 기쁘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교회 사람은 자기에게 투자합니다. 교회 헌금 내는 것 남의 교회 헌금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헌금한 교회, 투자한 교회 커지기를 바라죠. 왜 목사가 그렇게 목사직을 내놓기를 거부하고 장로가 장로직을 내놓기를 왜 그렇게 거부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아의 공백을 채워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쉽게 내놓냐면은 목사보다 더 좋은 것이 들어 왔을 때 쉽게 내놓습니다. 사립학교 이사장. 이것은 실제적입니다.

지금 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나를 키울 수 있는 그런 것이 오면 바꿔 치웁니다. 언제 또 자기 마누라를 버리느냐면 젊을 때는 마누라 최고더니 더 이쁜 마누라 오면 버릴 수 있죠. "나 너하고 사느라 고생 많이 했다 나가도" 장로가 장로직을 언제 버리느냐면 귀찮은 일 생길 때 "나 장로 안 할께. 때려 치울께 사표 낼께"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직을 언제 버렸습니까? 안 버렸습니다. 메시야직은 나는 대우 받으려 온 것이 아니고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 쓴 잔을 마셔야 한다" 자기 제자들 보고 너가 마실 잔이 있는데 뭐냐? 나처럼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한 쓴 잔을 마셔야 한다. 이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아까 본문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아! 이것 참, 이것이 성경에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 여기서 제 것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죠. 오늘날 교회에 가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 한다면 어떻게 설교 하겠습니까? 이 취지와 반대로 설교 하겠죠. 여러분 집 참 좋죠? 아파트 있죠?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좋은 차 타시죠? 여러분들은 성경에 보니까 제 것이라고 하지 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의 전 성전 꼬라지 한 번 보세요. 이게 뭡니까? 이렇게 영적 양식을 먹이는 목사의 사택은 비가 세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투자 하세요.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교회는 커집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커지면 누구 것입니까?

제 것이잖아요. 결국은 제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제 것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확대되었죠.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재산 가족 전부 다 교단에 바치고 집단 공동체 생활 하는 단체가 대표적인 것이 박태선. 통일교. 신천지. 이제는 아예 재산 다 바쳐서 우리끼리 폐쇄적인 집단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험 정신은 16세기 17세기에 전 세계에 여러군데 많이 일어났습니다. 뉴질랜드도 있고 호주에도 있는데 공동생산 공동소비라는 공산주의 사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곳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될려면 대장이 있어야 되는데 그 단체는 누구 것 됩니까? 자기 것 되죠. 교주 하나 만드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김정일체제죠. 북한은 종교 단체예요. 완전히 교주예요. 왜 그렇게 미쳤는가? 그게 정신적으로 아까 자아는 독단적 자아는 없고 신체와 외부에서 날라오는 악령이 교신하는 지점이 자아가 생겨요.

그러니까 악령이 자아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 자아를 신체를 통해서 악령이 자기 새끼를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무엇을 집어 넣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까 생령,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죠.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입김이 없이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되는데 사람들은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 더이상 말씀이 듣기 싫은 것, 복음이 듣기 싫고 이제는 내 공백은 내가 메꾸겠다고 나서는 것이 이걸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되면 죽은 자의 징벌이 뭐냐면은 사실은 저주거든요. 일반 교회에서는 살아 있을 때 저주를 말하지만 성경에 보면 저주라는 것은 살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고 난 뒤에 지옥불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지옥불에 가는 특징이 뭐냐? 하나님과 복음적인 관계가 끊어진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지 못한 사람. 그게 바로 죽은 자가 되고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 하겠습니다. 자아라는 것은 인간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악령이 되었든 성령이 되었든 인간을 사용할 때, 영적 존재가 인간을 다룰 때 접선 지점에서 자아가 발생된다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악령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악령 대신에 빈 공백의 자아, 이것을 가지고 A라고 하죠. 라캉은 A라고 하는데 빈 공백의 자아, 빈 공백의 대상. 텅텅 비어 있는 곳에서 나를. 자꾸 나를, S 주체라고 하는데 나로 하여금 이유없이 그곳에서 그것을 쳐다보면서 다가가게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내 욕망을 채우고 거기다 향유, 즐거움을 지향하도록 만드는 것. 쾌감을 지향하도록 하는. 다가가면 갈수록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주체는 다시 없어지고 다시 생기고 다시 없어지고 이 공백에 다가서죠. 하면 할수록 이 공백은 점점 더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이 공백은 점점 더 멀어지고 커지는 거예요.

여러분 달을 한 번 쫓아가 본 적이 있습니까? 손에 잡히든가요? 자꾸 가면 산 넘어 가 버리죠. 산 타고 가면 또 산을 넘어 가잖아요. 인간이 메꿀 수 없는 이 허전함은 아무리 돈이 많고 박사가 되고 해도 도무지 뭔가 텅비어 가지고 자꾸만 채워야 하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 줄 몰라요. 무엇을 원하는 줄 모르는데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하죠. 이것이 타인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야 합니다.

이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 것을 요구를 하죠.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접근해 들어갑니다. 이 타인이 옛날에는 의사. 박사. 똑똑한 것. 장동건처럼 잘 생긴 것. 이것은 아주 젊을 때고. 나이가 한 오십 쯤 되면 인생을 좀 알면 이 타인이 누가 되느냐면 신이 되고 예수가 되죠. 너는 나를 본받아야 하느니라~~ 너는 이 말씀을 지켜야 되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자아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 주여 조금 기다려 보세요 제가 주님 원하는 말씀을 잘 지켜서 보란듯이 지켜서 우리 교회에서 제일 믿음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고 따라가죠. 그러면  이쪽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가지고는 아직도 모자란다~ 더욱 더 착해야지~~ 나오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집 집사 신장이 하나 없어진단다~ 신장 하나 주어라~~ 예 드려야지요. 완전히 미친짓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동의. 이 사람은 신앙을 이렇게 봅니다. 산으로 봅니다. 정상은 하나이다. 불교라든지 기독교라든지 결국은 올라가면 한쪽으로 모인다. 다만 종교라는 것은 올라가는 과정에 있다.오백미터 올라간 사람은 삼백미터 올라간 사람하고 수준이 다르다 우리는 레벨을 높이자 어디까지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자 이게 고상한 티를 내는 교회에서 악마가 이런 소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항상 빈 공백이 있고 이 공백에 예수와 성령, 하나님을 집어넣고 뭘 집어 넣어도 공통점이 있는데 종교적 희열인지 해탈인지 관계없이 나의 빈 가슴을 돈이나 명예같은 시시한 것은 때려 치우고 신적인 성화, 거룩으로 채워서 내가 원하는 내가 만족스럽다는 레벨까지 올라가겠다는 시도. 악마의 짓입니다. 이것 아주 교회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숫자는 많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은 한국 교회를 비판합니다. 한국 교회 썩었다고. 속물이라고. 그러면 자기는 뭐고? 자기는 거룩하다고. 한국 교회 더러워서 못 보겠다고. 한국 교회 말씀대로 안 산다고. 이런 사람들의 제일 고수가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죠.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 오면서 뭘 보느냐면 우리보다 레벨이 높은 분, 계급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목사로 보고 그보다 한 수 아래를 부목사로 봅니다. 아이구 신학교 나온다고 얼마나 고생했노?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교 나온다고 좋다고 나왔습니다. 고생 안 했습니다. 공부 안 하고 놀다 왔어요.

그러니까 그 높은 분을, 거룩한 분을 손대면 위에서 돌맹이 날아와서 저주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목사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 속엔 뭐가 들어 있느냐면 나도 오기가 있는데 언젠가는 그 목사가 지금 이야기 하는 레벨을 따라 붙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예수입니까? 마귀의 장난 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올라가지 말고 내려가라 세리와 창기 바로 너다 세리와 창기가 되어도 기생 라합이 되어도 예수님의 피는 어느 구석에도 너를 천국 보낸다 그 때 너는 면류관 벗어서 던지고 주의 은혜입니다 그것만 이야기 해라 딴소리 하지 말고. 내 한 평생  한것은 주의 은혜지 내가 누구를 본 받아서 따라 붙어서 그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2초내지 3초 동안 뭘 느끼느냐면 "주여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군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을 때 그 짧은 2초내지 3초 사이에 그 사람 속에 뭐가 왔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왔죠. 그러면 아까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이 산다고요? 진짜 자아는 뭐라고요? 성령이 말씀과 우리 신체가 만나는 그 접선 지점이 진짜 새롭게 성령으로 거듭난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한테는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 "주여 제 몸이 제 몸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군요." 안다 이 말이죠.

그럼 그 사람은 무조건 교회 돈 내놓고 그럽니까? 아닙니다. 집에 있는 것 다 팔아서 교회 바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현재 집에 침대가 있고 냉장고가 있더라도 거기에다 붉은 딱지를 붙입니다. 이것은 차압된 것. 주님의 것. 주님은 국세청입니다. 심지어 애 머리에도 딱지를 붙여요. 애 이마에 빨간 딱지 붙이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 애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기 이마에도 붙여야죠.

그런데 사람에 옛 사람이 있어서 이마에 아무리 붙여놔도 2초 지나면 다 잊어 버립니다. 내가 저 번 주에 은혜 받았는지 무엇 때문에 은혜 받았는지 모르겠다. 제 아내가 수요 예배 마치고 돌아 오잖아요. 돌아서면 한 2분 걸립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뭐고?" 이럽니다. 은혜 안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면서 5분 동안 다시 이야기를 해 주면 "아! 그것, 아! 그렇구나!" 합니다. 5분 동안 다시 이야기 했기 때문에 기억상 한 10분 갑니다. 그래서 양식은 매일 먹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말씀을 매일 먹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복음을 안 보고, 복음이라는 것은 풍선을 가지고, 빈 새우깡 봉지 확 불면 빵 터지잖아요. 교회가 뭐냐면은 지 잘난 체 하다가 예수님 피 때문에 내가 용서 받은 것을 알고 주여 또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콱 밟아 버리는 것이거든요. 그게 교회거든요. 키우는 것이 교회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적 교회에서 늘 들어야 되는데 한 두주 빠졌다 하면 풍선이 요만했던 풍선이 이만케 되요. 주님이여 제가 한 두 주째 교회 안 나왔지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바이어 만나 가지고 큰 건수 올린 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복음을 아니까 이런 큰 복을 주었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오늘 빈 손으로 오지 않고 헌금 듬뿍 가져왔습니다 하고 오잖아요. 이것 십자가 복음 앞에서 빵 터져야 합니다. 터지면 헌금 낸 것 말고 나머지 것은 누구 것이다?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입니다. 헌금 한 푼도 안 내도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집안의 문제, 부인으로서 가정주부로서 가장으로서 집안의 문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남자 여자 자식들이 있으면 전부 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잖아요. 죄인이잖아요. 죄인이 뭐냐면은 말씀을 기피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피하면 자아가 어디서 생깁니까? 자아라는 것은 현재 신체와 내가 되고 싶은 완벽한 신체와의 자아와의 관계. 이 속에서 자아가 생깁니다. 라캉이라는 학자가 밝혀 냈어요. 현재 신체하고 뭔가 알 수 없는 여기 자아가 이 사이에서 늘 결핍 된 존재 빈 자리. 그것을 거세라고 하는데 자꾸 거세되는 욕망을 채우면 자꾸 거세되고 하는데 본인만 이런 것이 아니잖아요. 아빠, 자식들. 부인이 있단 말이죠. 아빠가 보기에 부인과 자식은 누구 것입니까? 자기의 빈 공백을 채우는 자기 소유가 되겠죠.

그런데 놀랍게도 부인은 어떻습니까? 남편과 자식은 누구 소유입니까? 자기 소유죠. 자식들은 아빠나 엄마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죠. 재아야 그렇지? 이렇게 본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협상이 일어 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직장 생활하다가 때려 치우고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망했어요.  여보 도와줘 해서 돈을 끌어다가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잘 안되서 IMF 터져서 아까 이야기 한대로 누가 미니까. 성질 나빠서 마음씨가 나빠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미니까 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망한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됩니다. 이유없이 결과적으로 죄인되요.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것 참 희한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결정하니까. 미니까 밀려서 망했어요. 그러면 처음에 부인이 뭐라고 했냐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니까 하는 것입니다. "여보 내가 당신의 아내인데 결혼할 때 슬플 때 괴로울 때 함께 한다고 했죠. 여보 힘내요. 내가 있잖아. 내가 어떻게 장사라도 해서 당신 일어서게 할께." "아 고마워요" 눈물 흘리잖아요. 이거 6개월 갑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는 자식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지만 몇 개월 지나면 아빠 보기 싫어서 가출합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뭘 보고 기대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뭐가 형성되요? 협상이 유효하죠. 당신 잘 되면 누가 잘 된다? 남편이 사업 성공하면 나는 사모님이 되잖아요. 결국은 남편 위주가 아니었고 당신 있음에 내가 잘되기 때문에 약간의 희생과 봉사와 투자를 해요. 그게 협상입니다. "저 남자는 요번에 실수해서 한 거야. 원래 복 받을 짓을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개입을 잘못했어 참 교회 헌금 잘 하고 봉사 잘 하는데 다른 나쁜 놈들은 망하지 않고 아 하나님 실수 한거야 이 참에 내가 더욱더 감사 헌금을 해야지" 그래서 사업 망하고 감사 헌금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여 사업 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감사 헌금하는 사람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그것을 보고 욥 봐라 욥처럼 처음에는 이렇게 망해도 나중에는 복 받지 하면서 사기를 쳐 가지고 축복 한다고 손가락 벌리고 한다고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싶어서 그 짓 하지만. 하는데 협상하다가 기다리다가 안 되거든요. 서서히 협상에서 협박으로 바뀌죠. "당신 너무 논다" "당신 일 좀 알아봐라" "나도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그 다음에 협박에서 유능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저 남자하고 내가 여기서 약간 버티면 나는 괜찮은데 내 뱃속에서 난 자식들은 무슨 죄고?" 여기서는 이혼을 하지 않습니다. 빚쟁이들 따돌리기 위해서 우선 형식적으로 이혼한 것 처럼 하자 당신 믿는다 하면서 잠깐 헤어지고 자식들은 크면서 엄마 믿을 수 있나? 자식은 독립하고 막장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여기서 남편과 다시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자는 새로운 남자 만나서 결혼했는데 또 그 남자도 부도가 나고 또 헤어진 남편은 재벌 여자를 만나 잘 되고 그러다 이 남편이 어디에 부딪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려 다시 찾고 만나고....막 이렇게 되겠죠.

결국 이 이야기는 어떤 인간도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위치나 자격같은 것은 애초에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그나마도 같이 한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삼겹살처럼 두껍게 쌓여 있는 것인가를 알려면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모르고 살아 갔는가를 깨닫게 하는 사태가 벌어져야 그동안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는가를 알게 됩니다. 너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마지막 때에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예수님 피로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 받습니다. 살아질 땐 잘 몰라요. 그러나 나중에 죽고 보면 이 피가 얼마나 고마운지 용서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 본문 말씀을 보게 되면 재물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그 다음부터 계속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순간 각자의 마음 속에 성령을 주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접촉하는 피조물로서 교회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누구의 영광입니까? 각자의 영광입니까? 아닙니다.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영광이냐면 제 몸은 주님의 것으로 그냥 사용했을 뿐입니다. 내가 냉장고를 내놓았다 냉장고를 내놓아도 내 행동도 주께서 주신 능력으로 내놓은 것이지 절대로 내가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놓고 내가 했다고 자랑 할 수 없습니다는 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정에 혹시 어려움이 있고 자식들이 애를 먹인다든지 자식이 차 키 훔쳐서 박아 가지고..그런 일이 일어 난다고 해도 내가 그들 용서해야지 라는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지 마세요. 오늘 목사님이 예수님을 본받으라 예수님이 희생했으니까 너도 희생해야지 그렇게되면 도인됩니다. 그 때는 반대로 나가야 합니다. 주여 내가 몰랐던 내가 얼마나 이기주의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런 사태가 일어 났습니다. 자기부터 낮추어야 합니다. "여보 당신이 부도 났는데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부자였을 때 당신이지 부도난 남편하고 살 마음이 없다 당신 각오해라" "하나님에게서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고 은혜를 주면 당신은 하나님 덕분에 나하고 붙어 사는거고 만약에 주께서 그런 은혜를 주지 않으면 섭섭하지만 당신하고 헤어지고 싶고 당신은 헤어져도 나하고 내 자식 책임져라 당신은 뭐든지 해서 원상복귀해서 나를 불러달라" 그러면 남편은 "사실은 나는 내 위주로 살았다 미안하다" 이렇게 될 때 진정으로 아빠 힘내세요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서로가 죄인인것을 알 때 제대로 처음으로 아내 값 했고 남편 값 한 것입니다. 그동안 남들이 보란듯이 남편, 아내 했지만 그것은 다 가식적이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진정한 죄인인 것을 드러날 때 그게 진정한 아내고 남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을 봅시다.

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천국 문 열고 닫고 누구 천국 넣어 주고 안 넣어 주고 하는 것이 누구의 소관이다? 주님 소관이다 라는 요한계시록 3장 7절 말씀이 우리들의 신체와 두뇌를 자극해서 지금 와닿으면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고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딱 듣고 하는 말이 "그래 좋아 열면 닫을 사람 없고 닫으면 열 사람 없다고 그러면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야 아니라고 그럼 나는 이 말씀 당분간 못 믿겠어." 이렇게 나온다면 평소에 이 사람은 말씀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악령과 연결되어 있는 바로 지옥갈 사람이라고 판정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 말씀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10월 31일 날 영장 나왔다. 갈까요? 말까요? 가 아니라 "빨리 들어와 빨리 들어와 논산훈련소에 들어와" 통과하는 것처럼 "이 말씀이 맞습니다. 내가 그동안 내 인생위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용서에 주시다니 주님의 은혜입니다." 알면 그사람은 은혜가 가득한 새로운 피조물 입니다. 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따라 갔습니다. 남 흉내냈습니다. 넓은 길 많은 사람이 찾는 길로 갔습니다. 잘되는 것이 복이고 못되면 저주라고 배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사도바울은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재벌된 적이 없고 그들이 가정을 가진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용서가 이 죄인을 구원했다는 것이 이제는 유일한 자랑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9-11-06 16:54:41 녹취 : 이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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