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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12:26:36 조회 : 3653         
대전 2월 25일 강의 행10강 사도의 터 위에 교회 (예수님→사도→교회→사도→예수님) 이름 : 관리자(IP:124.59.86.6)
100225 행6장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해석 스데반
 관리자(IP:124.♡.86.6) 10-02-26 12:38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100225a행6장a모세와하나님을모독하는해석a.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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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IP:124.♡.86.6) 10-03-26 13:18 
대전100225a행6장a모세와하나님을모독하는해석a


사도행전 5장까지는 사도가 부각되는데 6장부터는 교회와 교회의 실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있고 사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가 먼저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참 희한한 현상이죠. 그래서 에베소서 2장부터는 사도의 특유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사도의 특유의 교회가 세워지는데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예수님 계시고 사도가 있고 사도가 있고 난 다음에 교회가 있어요. 예수님에서 사도로 사도에서 교회로 가잖아요.

그런데 방금 이 방향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이 방향이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에게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방향이 예수님에서 사도, 사도에서 교회가 있다 해버리면 무엇을 제거해 버리느냐 예수님, 사도 둘 다 제거할 가능성이 많아요. "교회 있는데 뭐." "교회 다니면 구원받는데."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만약에 이것을 끊어 버리면 교회있음 자체를, 제가 한번 질문 던질께요. "교회가 있다." 그러면 이제는 예수님 눈에 안 보이니까, 사도가 눈에 안 보이니까 보이는 교회를 자기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버리면 뭐가 소홀히 됩니까? 홀드(hold)가 되죠. 무엇이 자꾸 멀어집니까?  예수님하고 사도가 자꾸 멀어지겠죠.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있음이 굉장히 위험하죠. 교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사도가 점점 멀어질 수 있는 요인이 교회 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만약에 초대교회처럼 분열되지만 교회가 분열되고 깨진다 교회가 깨어지게 되면 사도니까 사도는 말씀 증거자니까 교회가 방향을 뭐로 정하냐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고 말씀이 지향하는 것이 사도가 아니라, 만약 말씀이 사도를 지향한다면 사도는 또 교회로 갈거잖아요. 방향이 말씀에서 말씀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지향해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다는 말은 인간들이 말씀을 지킴과 상관없이 말씀 자체가 자기 사람을 변화시키고 자기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인간이 내가 어떤 인간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목표, 말씀 자체의 목표가 나타난 사람이 성도가 되죠. 내가 성도 되겠다고 해서 성도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너는 내 사람이 되어야겠다 만들어 내겠다고 시도하니까 그게 바로 성도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 화살표가 예수님에서 사도로 사도에서 교회로 이것은 다시 이 교회는 사도로 예수님으로 지향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예수님->사도->교회->사도->예수님).

이것은 항상 교회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를 부인해야 합니다. 상당히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사도는 안 보이니까. 사도가 하는 이야기가 긍정한다 우리는 다 긍정한다 그래서 긍정에서 생긴 용어가 흔히 공동체가 나왔잖아요. 그래서 제가 낼 모레 한국개혁신학회에 발표할 논문 서론부분에서 <예수님은 교회 공동체가 죽기를 원한다>는 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공동체를 죽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사람은 공동체가 그리워요. 공동체 안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을려고 하고 안심을 하고 안도를 누릴려고 합니다. "내가 교회 공동체에 일원이 되었구나 그러면 나는 이제 구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되겠구나" 라고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없애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없애는 방향으로 나가버리면 교회가 없어줘야 그 바탕에 사도의 말씀이 있는지 그 바탕에 예수님이 있는지 이것이 확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물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이라는 보물이 있는데 이 보물위에 파도가 친다고 합시다. 파도라는 것은 늘 변화하고 쉬지않고 움직이는 거죠. 파도가 움직였다가 썰물되어 쓸려내려갈 때 보물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파도가 치면 안에 있는 보물은 잊어버리고 파도가 전부인 줄 알고 여기에 현혹되어서 이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는 여기서 교회 공동체 때문에 심적인 좌절과 실망을 갖기도 하죠.

쫌 있다가 제가 사도행전에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대해서 강해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강해를 미리 땡겨서 약간만 이야기 해 보면 여기가 창세기고 요한계시록이라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시간을 나눠서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되고 과거가 되겠죠.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난해한 이유가 이 시간을 우리가 정립하는 것, 이것을 종합이라고 하는데 시간을 종합해 버리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우리에게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어려운 것이 스데반 집사를 이해할려고 우리가 시간적으로 아, 광야 교회는 과거의 일, 스데반 집사가 놓여 있는 곳은 현재 초대교회, 장차 예수님의 관한 이야기는 미래의 일.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든지 드라마를 보든지 모든 인간의 시간관념이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이것은 과거고 이것은 미래라고 분산되어서 이것을 거기다 다 집어 넣는다면 그것 자체가 성령의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이해가 아니고 성령과 상관없이 육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시간개념을 가지고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있던 모세 광야 교회 개념에 대해서 차질이 생기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이야기한 것과 우리 자신들이 이야기한 것과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현재에서 과거를 파악할 수 없냐면 이 과거는 건망증인데 건망증을 해결할 수 없고, 현재라는 것은 같은 가치를 연거퍼 중복을 한다는 오류가 생기고, 미래라는 것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조성해요.

이런것이 제거되고 불안감 또는 중복해서 강조하는 것, 말이 강조지 사실은 과장된 것. 자기가 있었던 경험과 사건을 아주 과장되게 누적이 되게 하는 거예요. 은혜받았으면 그저 은혜받았다고 하면 되는데 은혜받았거든 하면서 그 다음부터 은혜받은 시간이 말로하면 더 길어요. 마치 남자들이 군에 갔다 온 3년보다 군대 이야기가  더 길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의 시간관을 가지게 되면 모든 미래와 과거의 성경 말씀을 누구 위주로 끌어 당기겠습니까?

자기 현재 은혜받은 것 위주로 끌어 당기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계시죠. 무슨 주님의 계시겠습니까? 너무나 일방적이죠. 그런데 이것이 백명이면 백명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김집사 이집사 박집사 은혜받은 것 이야기 하라고 하면 전부 다 성경해석을, 은혜받은 것을 자기 중심으로 끄집어 당깁니다. 그야말로 육적인 해석입니다. 안 맞아요. 홍해 사건이 있다 홍해 사건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느꼈다 백명이면 백명이 다 달라요. 홍해 사건 진짜 의미가 뭐냐? 그것은 몰라요. 자기 위주로 이용하려고 분주해서 홍해 사건을 나라는 주체에 연결시켜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홍해 사건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입니다. 홍해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냐 여호와의 이름으로 했거든요. 예수님이 일으키신 홍해 사건을 사람들은 은혜받겠다는 일념으로 그것을 자기 사건으로 잡아 당깁니다. 그러면 그것은 육적인 해석입니다. 성령이 해석하려면 성령이 나왔던 그 노선을 따라서 해석해야 하는데, 성령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성령의 세례받는 것이 어떤 사건 이후에 왔죠? 십자가 부활 사건 이후에 성령세례 받잖아요.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그 뒤에 뭐가 줄줄이 갖고 나옵니까? 십자가 부활 사건을 갖고 온다고요. 십자가 부활 사건을 가지고 오게 되면, 성령이 받은 순간 우리는 뭐가 죽은 상태가 되냐면은 내가 생각하는 육적인 해석의 상태는 죽어 마땅하다는 해석이라는 것이 겸해서 옵니다. 큐티할 때, 네이게이토같은 경우에 성경구절을 외울 때 무조건 은혜받는 거예요.

"주여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시렵니까?" 그런 식으로 하는 일본 종교라든지 여타의 종교에 그런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티벳의 달라이라마이, 이슬람교의 말씀 대하는 태도 그렇게 성경볼 때 우리는 그것을 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으면 항상 성령받았다고 우기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그래서 육인데 우리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육적인 해석과 이런이런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라고 대비를 시켜줘야 육과 영을 다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인 해석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육적인 해석이 이러이러한데 그것은 아니고 성령받은 사람에게만 이런 해석이 주어집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 6장 3절 보면 스데반 집사를 포함한 일곱명의 집사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했죠. 성령받은 설교의 내용이 7장에 나옵니다. 7장에 내용을 해석할 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하겠죠.

만약에 성령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보통 사람이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봤다고 할 때, 설교들은 내용을 노트에 정리하라고 하면 성령받은 사람의 내용과 성령받지 않는 사람의 내용이 동일하게 되면 하나가 엉터리이던지 아니면 둘 다 엉터리이던지 둘 다 맞는 경우는 없죠. 일치하는 점이 없어야 됩니다. 일치하지 않는다 정도가 아니라 똑같은 해석을 영적, 육적으로 내놓았을 때, 다르다가 아니라 육적인 해석을 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의 해석을 보고 격분을 해야 돼요.

격분을 해줘야 그 현장에서 십자가 사건이 다시 한번 재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는 건방지게 내가 모르는 해석을 왜 내놓아? 니가 뭐 잘났는데? 너 어느 대학 나왔어? 너 아이큐가 몇이야? 내가 모르는 해석을 건방지게 왜 하는데? 본문 문자를 봐! 문맥하고 프리셉트해봐! 이게 나오지 동사가 어떻교 명사가 어떻고..." 쭉쭉 해석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 스데반 집사 설교를 해석한 것을 딱 내놓았을 때 "그게 아니거든" 라고 했을 때 "그러면 우리 문법적으로 따져보자 왜 그게 아닌지" 라는 것이 육적에서 격분스런 내용이 나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 10절에서 11절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한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가 성령으로 해석하니까 듣는 사람들의 의견이 뭐냐하면, 그 당시에는 신약 성경이 없으니까요. 구약 성경만 놔둬도 마찬가지예요.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스데반 집사가 해석하는 것을 유념있게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해석을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도 정말 성령받았으면 육적인 사람에게, 그리고 구약성경을 철저하게 사수하고 구약성경에 순복하고 복종하고 쉐마 쉐마 들을려고 하고 말씀을 실천에 옮길려고 애쓰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해요?  너는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소리를 듣는 그런 해석이 나와야 합니다. 아예 성경에 관심없는 일반사람 같으면 논쟁이 시도되지도 않죠.

구약 성경 그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독대해서 시내산에서 직접 준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대로 지켜야 된다고 구약 성경을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너는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평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이미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할 때 그 당시 예수님을 비난하고 모의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뱉는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을 왜 처형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 모세의 율법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요한복음 7장을 보고 9장을 보면서 도대체 예수님의 어떤 해석이 모세 율법을 모독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림으로 한 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세 율법이 펴 있습니다. 책입니다. 여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모세 율법을 해석합니다. 우리가 그들이 모세 율법을 해석하는 해석법을 알아야 합니까? 몰라야 합니까? 당연히 알아야 합니다.

왜 당연히 알아야 하느냐면 거듭난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거듭난 것이 아니고 현재 육의 인간이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정말 거듭났다면 육적인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훤히 꿰둟고 있어야 그게 영적인 사람이잖아요. 육적인 사람은 육이 전부예요. 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의 세계와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육에서 영의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과 영을 아울러 다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육적 해석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육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난 몰라 난 바리새인 아니야 난 그 시절 사람이 아니야" 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안돼요.

그러면 우리가 그 시절 사람도 아니고 바리새인된 적도 없고 그 때 태어나기도 전인데 어떻게 해서 바리새인 해석을 하느냐? 이것을 바로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에서 육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나란히 같이 붙여보고 우리한테 제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문제는 나란히 육과 영의 해석을 붙여서 해석해 주니까 물론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굉장히 비난했는데 누가 좋아했느냐면 율법과 전혀 상관없는 헬라인이나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이 사도 바울의 그 영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굉장히 신기하죠.

사도 바울은 "너희들이 모세 율법은 육적이다 육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잘못이고 영적으로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양쪽다를 설명 했으면 우리 인간적으로라도 논리적으로라도 그들이 전에는 "아 이렇게 잘못되었구나" 라고 받아들일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들의 노를 더 유발시켰고 오히려 율법밖에 있는 개같은 이방인들이 얼마나 감사하면서 받아들였는지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해 봅시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올 때 사도 바울이 여기다 집어 넣은 것이 있습니다. 뭘 집어 넣어 해석했습니까? 육에서 영으로 그냥 넘어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영으로 넘어오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육이 뭔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죽은 자가 되고 또 나는 세상이 보기에 죽은 자가 된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보기에 육적인 해석은 사람을 죽이는 인간 또 죽이는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저주받은 길로 갈수밖에 없는 저주,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반대로 영의 해석은 하나님의 생명을 늘 공급해주시는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차이가 뭐냐면은 육의 해석은 해석의 주체가 내가 되죠. 왜 내가 되느냐면 십자가 이전이기 때문에, 십자가 이전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통과를 안 했다는 것은 결국은 뭡니까? 나의 해석과 나의 지혜와 이성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안 죽은채로 뭔가 대하기 때문에 말씀이 와도 항상 뭐가 나옵니까?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기 해석이 먼저 튀어 나옵니다.

자기 해석이 먼저 튀어나오면 그 모든 성경 해석은 누구 좋아라고 해석하는 것입니까? 옆 사람 좋아라고요? 박집사 좋아라고요? 최집사 좋아라고요? 아닙니다. 내 좋아라고 입니다. 왜? 내가 안 죽고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해석은 주체가 누가 하느냐면 바로 십자가를 통과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빈 십자가가 아니잖아요? 십자가 누가 졌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죠. 그러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해석을 해주는 해석이 영적 해석이죠.

그런 해석을 받게되면은, 나는 항상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은 육적인 것이 어떻게 해서 저주의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하는 그런 나쁜 해석인가를 말씀을 볼 때마다 계속해서 느끼게 하겠죠. 그러니까 눈감고 어떤 성경을 봐도 영적인 사람은 이것을 보면서 "아 이래서 내가 죽어서 마땅하구나" 이런 해석이 나옵니다. "해석을 이렇게 하니까 나는 죽어도 싸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려두는 것은 주님이 살려두어야 구원되지 내 힘으로 성경 지켜서 구원되는 법은 있다? 없다? 없습니다.

내가 나서면 항상 그것은 내 위주로 해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그것이 허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주님께서 살아계십니다 라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과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이 됩니다. 은혜 받습니다. 또 우리가 이렇게 안 하면 하나님께 은혜 못 받습니다. 은혜받는 것도 하면 은혜받고 안 하면 은혜 못 받습니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면 그 사람은 뭘 흉내낼려고 하면 나를 흉내낼려고 하겠죠.

그러니까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나처럼 하면 은혜받습니다 라든지 김장로처럼 하면 은혜받습니다. 이장로처럼 하면 은혜받습니다. 어느 부목사처럼 하면 은혜받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자체가 무슨 해석이냐면 영적인 해석이 아니고 육적인 해석되는거죠. 왜냐하면 그 김장로 이목사 따라 갈려면 자기가 죽어 있어서는 안되고 생생하게 더욱더 생생하게 자기 집착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살아 있어야 그 사람을 흉내내고 모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해야 은혜받고 저 사람처럼 기도하면 은혜받고 저 사람처럼 교회 봉사해서 은혜받고 라고 할려면 이것은 누구 볼 시간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관리해야 해요. 자기 자신을 가위표 칠 수 없어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어요. 오히려 자기를 긍정해야 합니다. 하면 된다. 야망과 비젼을 가져야 돼요. 자기 사명과 소명을 각인시켜야 해요. 되풀이해야 해요. 이것 떨어지면 주의 은혜고 나발이고 다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우리 놀면 주의 은혜 안 주십니까? 처음 은혜받을 때 그 때나 받았습니까? 내가 놀면 은혜 안 오고 내 놀면 지옥가고 그런 구조였습니까? 어제 수요 설교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캐나다 피겨 선수가 하고 난 뒤에 우는 거예요. 왜 우는가 하면 지 엄마 죽었어요. 자기 피겨 보러와서. 제가 그걸 보고 느낀것이 그 피겨 선수가 질문 잘못한 거예요. "하나님이여 다른 엄마는 다 있는데 내 엄마는 왜 없습니까?" 질문 참 잘못한 것입니다. 잘못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왜 내가 있어야 합니까?" "어제 죽어야 할 내가 왜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을 보듬고 남들은 엄마가 있는데 나는 엄마가 없는 거예요. 남이 있는 엄마 나에게는 없다고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 자꾸 닥달내고 따지는 거예요. 왜 나에게는 교회가 없습니까? 왜 나에게는 교인이 없습니까? 왜 나에게는 헌금이 안 들어 옵니까? 나에게는 왜 엄마가 없습니까? 나에게는 왜 아빠가 없습니까? 나에게는 왜 남편이 없습니까? 나에게는 왜 아내가 없습니까? 왜 나에게는 공부 잘 하는 애들이 없습니까? 왜 나에게는 말 잘 듣는 애들이 없습니까? 자꾸 왜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것은 주님도 손대지 마시고 다만 없는 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계셔야 자비로운 하나님 답다는 거예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 내가 왜 여기에 아직도 있어야 됩니까? 좀 데려가시지 않고. 사도 바울은 죽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비오는 날 내가 왜 있어서 관절 아프고 이래야 합니까? 왜 쓸데없는 인간을 왜 자꾸 살려 두시는 겁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왜 살려두는가 할 때는 그 질문은 내가 없다는 쪽에서 질문을 해야 내가 있음이 나 위주의 있음이 아니고 주님 위주의 있음이 되는 거예요. 내가 없는 쪽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야기 할 때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항상 없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야 있음이 부각돼요. 내 것으로 있음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서의 있음이죠. 값으로 준 것이 되었으니 너는 너것이 아니고 내것이다. 없는데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방법은 바로 십자가인데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성령이라고 하고 성령의 내용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게 되면 모든 말씀의 성취자는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성취하셔서 농땡이 부리고 놀던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화를 내던지 상관없이, 하나님께 대들던지 하나님께 찬송하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공짜로 주시는데 그것이 우리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숙제고 자기 일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우리에게 살 맛을 남기지 않는 쪽으로 일하십니다. "살 맛나는 세상" 이라는 책 제목도 있는 것 같지만... "살 맛을 제거하시는 고마운 주님!" 살 맛을 삭제해 주시는 고마운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살 맛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주님과 헤어지게 됩니다. 나만의 고유영역이 확보되기 때문에 "주님 딴 것은 손대셔도 이것만은 손대시면 저 화 낼겁니다" 라고 자기 위주로 바꿉니다. 하나님은 살 맛을 제거하는데, 살 맛을 제거할 때 왜 이것이 고맙고 즐겁우냐, 또는 누가복음처럼 기쁨이라고 합시다. 누가복음 주제가 기쁨이거든요.

살 맛을 제거하는, 기쁨을 주는 주님인데 그 방식이 뭐냐면은 주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데 주님은 우리를 매트릭스처럼 조종하시는 우리를 끌어땡기는 주님의 구조, 말씀의 구조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부담이 없어요.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살 맛 난다고 해도 관심이 없고 살 맛 안 난다고 해도 아무 신경 안 쓰고 아예 주님은 우리한테 관심이 없고 우리 속에 있는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에게서 사도 사도에게서 교회, 그래서 교회를 흩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숴야 흩어진 하나하나가 예수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이러한 식의 논리를 애벌레 자아라고 했습니다. 전에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 새" 라는 노래에서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이 있어" 라고 했어요.

보통 철학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데카르트는 둘로 봐요. 적자,  대자로 자아를 둘로 보는데 둘로 보는 것이 아니고 애벌레 자아, 구더기 자아가 많아요. 왜냐하면 자아를 둘로 보면 이것이 하나의 형식화가 되어서 강제로 묶는 것이 됩니다. 제가 전에 이야기 했죠. 거짓말 하는 나와 이게 거짓말이라고 지적하는 내 속의 나. 나가 두 개입니다. "너 방금 거짓말 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내가 알아" "이번 한 번만 봐줘" "알았어" 하고 에고와 이드가 서로 타협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애벌레 자아는 그게 아니고 나라는 것도 주변의 사건과 부딪치는 사태가 그때 그때마다 여러 개의 자아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아침에 자아 다르고 오후 두 시 자아 다르고 30m 탈락했을 때 자아 다르고 김연아 할 때 자아 다르고 하고 나서 자아 다르고 아사다 마오 할 때 자아 다르고 하고 나서 김연아 자아 다르고 주어진 사태에 따라 자아가 그때 그때마다 애벌레처럼 구데기처럼 생겨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자아중에서 사람은 한 개를 골라 잡는다는 것입니다. 열 개 중에서 "저게 나야" 하면서 한 개를 골라 잡아요. 골라 잡아서 그것을 대회용으로, 대회용이라는 것은 바깥에 누가 있습니까? 목사 있고 예수님 있고 하나님 계시잖아요. 그래서 기도할 때는 애벌레 자아중에서 괜찮은 자아를 뽑아내서 기도하겠죠. "주님이여 이렇게 열심히 있는데 도와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라고 나오겠죠. 그런데 뽑아내는 자아가 반드시 외부에 자기가 기대한, 미래에 예견한 어떤 것을 기대하고 그것과 결부시켜 뽑아내는 것입니다.

뽑아낼 때 아까 이야기한 육적인 시간관, 현재를 중심으로 해서 미래가 펼쳐지고 과거가 된다. 과거에 기여한 것은 과거가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선별해서 기억해 놓고 그것을 나의 과거라고 생각하고 그 과거와 나와 서열, 체인을 만드는, 기차처럼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러다가 미래는 뭐냐하면 이 과거에 준해서 "자 이런데 하나님 이런 미래를 어느 정도는 나한테 주셔야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라고 미래를 미리 과거에 기준해서 덧붙이기해서 플러스해서 미래를 미리 고정시켜 버립니다. 저는 언젠가 이것을 희망이라고 했죠.

그런데 이 희망은 하나님의 소망에 의해서 박살난다고 했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에서 말씀에 준한 희망이 따로 있어요. "너는 이런 이런 인간이 되어야 해" 라고 하나님의 요구하는 바가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서 너는 좁은 길로 가라 그런데 우리는 좁은 길로 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넓은 길로 가죠.

넓은 길, 좁은 길 차이가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같이 동행이 많으면 그것은 백퍼센트 넓은 길이고 동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면 그것은 좁은 길로 간다고 했죠. 얼마나 이 말씀 자체가요, 좁은 길로 가라고 할 때, 이 말씀 자체를 어떻게 보느냐면 애벌레 자아 중에서 자아 하나를 끄집어 내서 좁은 길, 넓은 길을 봤다고 합시다. 우리는 생각이 드냐면은 내 자아가 안 죽게 되면 "주여 좁은 길로 갈테니까 내가 예상한 미래를 들어주옵소서" 이렇게 하겠죠.

주여, 좁은 길로 가는 조건하에 내가 원하는 것은 좀 채워줘야 뭐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고 좋은게 좋은데 말씀대로 살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열 개 중에 뭐 하나라도 응답해 주셔야 내가 살 맛이 나지 않습니까? 라는 식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7장 끝에 죽죠. 죽을 때 스데반 집사가 어땠습니까? 재수 없는 겁니까? 슬펐습니까? 마치 땡잡은 것인냥 "나에게 웬 이런 행운이!!" 그런 기분이잖아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때만 그런 기분이겠어요? 아니면 설교할 때부터 그런 기분이겠어요? 이미 그 전부터 죽기 전에도 그런 기분이잖아요.

이것은 스데반 집사를 이끄는 그 시간대는 스데반 집사의 현재에서 나온것이 아니고, 자기가 뽑아낸 것이 아니고 어디서 나왔어요? 하늘에 있는 사다리가 내려오듯이 예수님의 시간대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스데반 집사한테 꽂힌 거예요. 어묵에다가 꼬챙이를 꽂으면 어묵이 기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꼬챙이를 잡아당기면 어묵이 딸려 나오듯이, 어묵이 스데반 집사고 그 꼬챙이는 성령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 인도함이 되면 스데반 집사 본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하고 전혀 관계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시간의 계획에 의해서 스데반 집사는 꽂혀서 설교를 해야만 하고 꽂혀서 죽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스데반 집사는 꼬챙이에 꽂혀서 어묵처럼 딸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고정적이 되어서 주체적으로 앉아 가지고 어묵맛을 찍어버리면 해석이 안되죠. 이쪽 변화되면 우리도 같이 따라가야죠. 수영선수 갈 때 카메라가 찍을려면 어떻게 해야해요? 수영선수 혼자 헤엄치면 안되잖아요. 점점 멀어지잖아요. 같이 헤엄쳐서 따라가야 되잖아요.

이번에 벤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10000m 할 때 이승훈 선수를 카메라가 같이 따라가잖아요. 스데반 집사를 영적으로 해석할려면 우리가 고정적으로 있으면 안되고 스데반 집사와 같이 그 꼬챙이에 꽂혀서 따라가줘야 영적인 해석이 되는데 여기서 따라가지 않고 내 자리를 고수하면서 스데반 집사의 흐르는 설교를 해석하면 육적인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해석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만약에 내 위주로 산다면 스데반 집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보는 그 해석 나오고 그 다음에 자기를 따라가면서 하는 해석 따로 또 나와야 하고 우리는 이 두 가지의 해석을 지금부터 다 할 겁니다.

첫 번째 우선 영적인 해석부터 보면 11절 다시 봅시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한다" 모세와 하나님을 뭐합니까? 모독한다고 했죠. 출애굽기 33장을 봅시다. 왜 출애굽기를, 그 많은 모세의 내용 신명기도 있는데 출애굽기를 펴라고 제가 요구했느냐? 거기에 하나님과 모세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을 보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라고 되어 있죠.

이 의미를 이 부분에서는 몰라요. 모르고 34장 6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이 대목도 이해 안돼요. 똑같은 동어반복이라 같은 말을 되풀이 하니까. 이 은혜의 장에 대해서 육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영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시작을 항상 육적으로 시작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34장 9절을 보세요.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앞에 만나는 것을 모세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가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했죠.

개인이 나서지만 뒤에는 보편성이 따라오죠. 그 보편성이 뭐냐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그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가 이해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죄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니까 앞에서 이야기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예요. 이런 것이 신학적으로 어려운데요. 죄인이기 때문에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잖아요. 죄가 원인이 되어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은혜주시는 분이 원인이 되야 해요.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사도바울이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하기 함이라" 그러면 "우리가 영광돌리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 하겠네" 라고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 죄 짓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게 더 영광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한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점점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그것 참 멋지다 라고 놀리는 식으로 이야기 했던 모양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죄 짓는 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죄가 있어야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이 말입니다. 이 하나님이 원인이 되고 그 원인에 의해서 다시 원인으로 되돌아 올려면 은혜가 왜 필요하고 긍휼이 왜 필요하고 자비가 왜 필요하는가 하는 어떤 배치물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의 근거가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면은 이스라엘 백성을 뽑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이 뭐예요? 목이 곧고 죄가 있고 악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이 말이 뭐냐면은 목이 곧은 인간이 스스로 목 풀고 죄 있는 인간이 스스로 착한 일 하고 그 다음에 악한 자가 스스로 악하지 않는, 이래서 은혜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기서  나라는 주체, 우리 모두의 주체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은혜를 유인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유인책을 여기서 만들어 낼 수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반석위에 두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너와 내가 언약을 맺는데, 원래 십계명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셨죠. 그게 깨져야죠. 깨졌다는 말은 인간은 처음부터 언약을 깬 상대자로 간주하고 언약을 시작해요. 너는 처음부터 언약을 깨버렸어요. 이미 언약을 깨트린 자에 관해서 언약을 맺어버립니다. 그 인간은 아무리 언약을 줘도 내 힘으로 이미 깨트렸다는 것을 취소시킬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언약이 깨진 인간이예요. 그 깨어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복제물을 만듭니다. 깨어진 십계명의 복제물을 하나님이 안 만들어요. 누가 만드냐면 땅 밑에서 모세가 만들어요. 깨어진 십계명을 복제한 십계명을 만들고 거기에다 글자 새기는 것은 하나님이 새겨서 그것을 약속 언약궤라고 해서 상자 안에다 집어 넣습니다. 상자 뚜껑에다 언약궤 시온좌라 은혜가 임하는자리인데 여기에 하나님이 이름이 임합니다. 이것은 동행을 의미하거든요.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가는 거예요. 언약궤가 갈 때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다? "이미 우리는 언약을 깨트려 버렸다." 앞으로 과거부터의 모든 미래는 우리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일을 자기 계획대로 밀어 붙이는데 누구를 사용해요? 우리 이스라엘같이 목이 곧은 백성이고 죄 있는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음을 그걸 증거물로 사용해서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자기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뭐만 남느냐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만 긍휼을 주신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않더라도 그것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너가 구원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구약 성경에 대해서 그 당시 스데반 집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하는 말이 모세의 율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구원 안 할것 같으면 뭣 때문에 율법을 주셨겠느냐는 이 말입니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육적인 인간으로서는 이것은 언어학을 공부 안 해도 언어 해독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라" "하지 말라" 의도가 뭐겠어요?  누가 봐도 시키는 대로 하면 복 받고 구원해 주겠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것은 천 명이 달라 들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는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자체가 "하라" "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언약에 들어가서 누구를 만나느냐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긴다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라" "하지 말라" 를 들고 그냥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직접 만난 하나님은 안 만나고 그냥 자기가 상상한,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었던 한계 바깥에 밀어 놓았던 모든 지평을 신이라고 하거든요.

내가 이것까지는 해결할 수 있는데 바깥에는 내가 손댈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신의 영역이라고 넘겨 버려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철학을 공부해 보면 알아요. 신이라는 것은 인간 한계 바깥의 지평을 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납득이 안 될 때, 이것은 논리적으로 안 맞을 때 신의 영역이다. 그쪽이 기적의 공간으로. "이게 웬 떡이지? 세상에 내가 은메달 딸 줄 알았는데 금메달을 땄네! 이것은 덤으로 얻은 것이다" 라고 이상화 선수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이미 고정되어 있습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울 주신다" 이 대목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해석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강퍅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강퍅에 가두어 두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어서 구원한다. 너무나 확실하게! 더러운 소리 안 나오게!

너희가 달음박질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낸다고 해서 은혜받는 것도 아니고 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강퍅에 가두어 두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긍휼로만 구원하시기 위함이라. 구약 전체에 대한 해석이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신다는 이 말씀 앞에 에서는 처음부터 미워하도록 태어났고 야곱은 처음부터 사랑받도록 태어났다는 그 대목 바로 뒤에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진짜 모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 같으면 바로 유대인처럼 자기 육의 가능성, 나의 실천력, 말씀을 준수할 수 있는 실천력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신학은 뭐냐하면 간단합니다. 긍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구원받고 행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행함으로 말미암아 은혜+율법,그러니까 자기들 보기에 은혜 주는 것은 율법없이 주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는 것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므로 말미암아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율법의 의미가 안 죽고 이것이 무의미하게 살아있지 않고 되살아 난다고 본 것입니다. 긍휼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여호와로 보고 그 다음에 행함의 주체는 누굽니까? 여호와가 하는 것이 아니죠. 내가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다해 주시는 것이 아니죠.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자기가 주체로 나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주체와 나의 주체가 결합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들은 목이 곧고 죄 지었다는 말을 어디까지 끊느냐면 바로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이게 들통난다는 것입니다. 너가 율법을 잘 지키면 이것은 긍휼받은 사람 티가 나고 율법을 무시하고 안 지키면 너는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단정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단정에 의해서 죄인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이 방식에 의해서 죄인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방식에서 어디까지 긍휼이 포함됩니까? 예수님은 구원하는데 까지만 긍휼이 포함됩니까 아니면 율법적으로 못 지키는 이 범위까지 다 합해서 주께서 꺼내 주시는 겁니까?  다 합쳐서 은혜 주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으면 어디에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육적인 사람은 이 바리새인들 신학에 혹하는 것입니다. 이게 동의가 되는 것입니다.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입니다.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거기에 정운찬 총리가 붙어 가지고 하여튼 거기에 수많은 유명한 사람 다 모였어요. 이 만명 삼 만명이니 얼마나 많겠어요? 소위 깨여있고 지식적이고 기복신앙을 포기하고 오직 자신의 성화의 실천력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 다 모였어요. 질이 우수하다고 여기고 싶은 사람 다 모였어요. 그 사람들은 뭐냐하면 예수믿고 사람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고 사람이 안 달라져요.

예수 믿고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죠. 그 때는 죄인인것을 몰랐는데 예수 믿고는 내가 본격적으로 죄인인것을 알게 되죠. 모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금 유대인들이 무엇을 거론하냐면 성전 문제죠. 성전이 뭐냐하면 모세와 하나님과 결합해서 나온것이 성전이라는 거예요. 성전은 눈에 보이죠. 가시성이죠. 사도행전 6장 14절을 읽어 보세요.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성전을 누가 세웠습니까?  누구 손으로 세웠습니까? 바로 다윗 자손 유대인들이 세웠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누가 초청해서 오셨습니까? 아무도 없죠. 예수님 그냥 하나님이 보내셔서 본인이 그냥 오셨죠. 그렇다면 지금 뭐가 대비가 됩니까? 성전과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뭘 헐어 버린다? 성전을 헐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성전을 헐어 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성전을 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성전을 누가 세웠습니까? 사람이 세웠잖아요. 예수님이 뭘 무시한다? 사람의 존엄성,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천력, 율법을 지키려는 의지, 이 모든 것을 모독하는 것이 되잖아요.

모독하니까 그들,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뭘 모독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성전을 예수님이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육적인 해석을 내는 사람들이 영적인 해석을 하는 스데반 집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이런 공격 받습니까? 이 성전하고 교회하고 바꿔 봅시다. "당신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우리 교회 무너진다" 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 듣도록 설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설교를 멋있게 십자가 복음 설교 다하고 끝에 나오는게 뭐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고 나와요. 이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바로 육적입니다. 교회는 뭐다? 가시성입니다. 사람 눈에 보이고 교회 짓는데 돈 안내고 지을 수 있어요? 다 돈 내고 하죠. 우리가 돈 내서 생긴 교회를 예수 지가 뭔데 이것을 허무느냐 이 말이죠. 결국 교회는 뭐냐면 주체의 확장이죠. 나라는 주체의 확장, 나는 안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해석은 뭐냐면은 예수님만으로 완성되어 버렸는데, 스데반 집사의 특징입니다. 예수님만으로 다 되었는데 예수님 앞에 뭘 얼쩡거리고 뭘 예수님을 가릴 수 있느냐 모든 구약, 모세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야기 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10-03-22 22:57:58  녹취 : 이미아
 관리자(IP:124.♡.86.6) 10-03-2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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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예수님에서 사도가 있고 사도에서 교회가 나오는데 교회라는 것은 반드시 사도성이라는 것이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사도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교회를 흔들어 버리면 그 안에 사도성이 있는지, 사도성이라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는지 또는 사도가 죽고 없어지고 사도가 순교하고 하는 그 가운데서 과연 교인들이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사도를 믿는 사람인지 분간이 된다 이 말이죠.

교회가 흔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만약에 교회가 흔들리는데 짜증내고 화내버리면 이것은 교회를 자기의 주체와 일치시키는 것 밖에는 안되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고 자기 개인적 사업체가 되버려요. 목사 개인의 사업체, 내가 이 사업체 세우는데 얼마나 애썼는데...이런 식으로. 그것은 여행사 차린것 밖에 안되니까.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 6장에 보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무너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뭐냐하면 성전도 마찬가지예요. 성전에 보면 성전에 세 가지 과정을 겪는데 첫째는 사람의 손으로 성전 세우는 것이 다니엘에 보면 이것이 7이레, 이것을 7 곱하기 7 하면 안 됩니다. 그냥 7이레로 하면 됩니다. 7이레, 성전이 세워지거든요. 그 다음에 62이레, 이 세워진 성전 박살내는 기간이 62이레 입니다. 그 다음에 1이레, 다시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나옵니다. 다 합쳐서 70이레입니다.

70이레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남의 나라에 포로된 그 기간을 말합니다. 70년 동안 너희들은 이방나라에서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기간이 70이레인데, 70이레라는 말은 1이레라는 말로 7로해서 490년이라고 하면 안되고 이레라는 시간을 주도하는 분이 너희들이 계산할 수 있는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이 아니고 이레라는 특정시간을 주도하는 바로 인자되시는 분, 하나님께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을 짓고 그 다음에 깨어지고 다시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을 짓는 이 전체를 가지고 인류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쫙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었던 모든 성전은 다 부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성전이라는 기구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고 눈에 보이는 성전지어 놓고 눈에 보이는 것만 좋아하지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죄성에 대해서 까발리는 것입니다. 까발린다는 것은 사실은 그들에게 징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입니다. 그 축복된 관점에서 이제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설교에 들어 갑니다.

6장 초반에 1절에 보면 그 때 제자가 많아져 가지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와 싸워 가지고 눈에 보이니까 봉사나 구제에 몰두하고 있었고 자기 명단이 거기에서 누락이 되어가지고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사도들이 거기에 대해서 하는 말이 교회가 구제할려고 온 것이 아니고 말씀과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하고 이러한 다른 일은 교회는 사도의 말씀에 지배를 받으면서 종속되면서 그들은 교회에 나오도록 하자 해서 그들에게 말씀 전파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진의는 사도가 주도권을 쥔 것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면 되죠. 교회를 만들지 교회가 말씀을 소유할 입장은 안 됩니다. 말씀대로 했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흔들려서 흩어진다는 것은 곧 말씀덩어리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꾸 안 흩어질려고 하면 안 돼요. 말씀안에 충만하면 흩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전도와 선교의 일환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누구의 일환이 되느냐면 온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통일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잡혀있는 시나리오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슬퍼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어요.

특히 목사님들 보면 교회가 나란히 있으면 분명히 저 사람이 우리 교회 올 건데 다른 교회에 가면 얼마나 밉겠어요. 똑같은 미용실이 있는데 머리하러 저쪽으로 가면 얼마나 밉겠어요. 같은 횟집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의 구약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이 뭐냐하면 망할 수 밖에 없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를 전개합니다.

하나님이 뭉쳐줘도 흩어지고 뭉쳐주면 흩어지고 광야에서 인도하면 대들고 짜증내고 원망하고 그 역사예요. 이게 영적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자꾸 뭉칠려고 해요.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어" 자꾸 이게 긍정적으로. 긍정적일 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좁게 보면 나, 주체에 대해서 유리한 것을 가지고 긍정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긍정의 범위가 넓어 버리면 내가 나에 대해서 잊어버릴 때 보이는 것이 비로소 보이는 그 세계를 긍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 후서1장 18-19절에 나오죠. 예수님은 모든 것이 아니오가 아니고 모든 것이 예가 된다고 하죠. 사도 바울은 개인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지금 고생 엄청나게 해요. 그런데 내가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쓰지 않도록 더 넓은 지붕이 더 큰 구조가 눈에 들어 온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긍정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이 아니오가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아멘이 된다는 것.

이것을 아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라고. 내가 성공 실패를 내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미완료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따질 것인데 한국개혁주의신학의 문제가 이미, 아직이라는 것에 아직까지 빠져 있습니다. 아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 다 미완료가 없고 모든게 완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미완료라는 것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완료고 인간이 저주 받아도 완료고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간들이 있더라도 완료입니다.

미완료라는 것은 누가 만들어 냈습니까? 주님의 완료를 육적인 해석을 하니까 완료와 미완료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미완료가 생각난다는 것은 그게 수상합니다. 거기에 누가 개입되었어요? 내가 경험적으로 긍정하려고 하는 시도, 과연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내가 예수믿은 사람인지 어떤 아주 특이한 사건, 기적적인 사건을 내가 간증적으로 체험하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믿을 수 있겠다고 그 증빙 자료를, 내가 납득이 될 수 있는 증빙 자료를 가질려고 할 때 완료와 미완료로 갈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 자연적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은 아니고 내가 말씀을 지킨다는, 내 쪽에서 말씀을 잡을려고 할 때 항상 미완료가 생겨요. 또 마귀가 그렇게 하고.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신자가 그래서 되겠느냐? 그런 죄를 지어놓고 니가 구원받는다고 하겠느냐? 성경봐라 이래놓고 니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포기해라" 이런 식으로요.

욥기에 보면, 욥기에 있어서 완료는 이미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누가 내기했습니까? 하나님과 욥하고 내기했습니까? 사탄하고 내기하셨죠. 이게 중요해요. 하나님과 욥하고 내기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하나님과 누구하고 내기합니까? 나하고 내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말씀 잘 지키는가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은 그 포커판에 우리를 넣어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장기를 둔 적이 없어요. 바둑을 안 두었습니다.

내기는 악마하고 내기를 했습니다. 악마가 하는 말이 "내가 욥을 한 번 손 좀 볼까요? " "손 좀 봐라 하지만 재산은 손대되 그 사람의 신체는 손대지 말고" 처음에 이렇게 하셨죠. 욥이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자도 하나님이시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내가 나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욥의 마지막 주제입니다. 욥은 자기가 믿으면서도 그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나중에 알아요. 그 당시에는 몰라요. 그런 고백을 내뱉으면서도 몰라요. 본인이 어느 정도 깊은 신앙인지 몰라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봐라 욥 봤지?" 자꾸 욥을 자랑하니까 악마가 화가 나서 "자기 신체를 손대면 아마 딴소리가 나올걸요?" 하고 "손대봐 다만 목숨은 하지 마라" 자기 목숨을 하지 말라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느냐? 하나님과 사탄은 아는데 누구는 몰라요? 욥은 몰라요. 그래서 욥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죠. 얼마나 좌절입니까? 죽여 달라고 하는데 우리 같으면 순교해 달라는 것이잖아요. 죽여 달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한테 응답 받습니까? 응답 못 받습니까? 묵살당하죠. 묵살의 기쁨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묵살하는데서 오는 기쁨을 맛보라예요. 만약에 하나님의 응답을 내가 응답받았다고 우겨 버리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느냐면 내 시간 노선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거봐 내가 기도하니까 응답 되잖아 세 개 하니까 한 개 되잖아" 이게 우리가 이미 현재 내가 짐작했던 기도 응답의 여러 가지 항목중에서 그 중에 아홉개는 안 되도 한 개는 건졌으니까 내 기도가 어떤 중보적인 효능이 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층에 그냥 머물러 있어요. 육적인 층에. 언제 우리가 위에서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느냐면 내 기도가 응답이 안 되고 묵살될 때.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 묵살되는 기도를 하면 돼요. "주여 부자되게 해 주세요" 안 그러면 "주여 죽게 하옵소서" 죽게 하옵소서 기도했는데 안 죽었을 때 그것은 은혜입니다. "아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은혜지!!" 집사님들 애들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세요. "애들 잘되게 하옵소서" 기도 끝나자마자 묵살당합니다.

우리가 누구한테 묵살당한다는 것은 참 이것은 내 바깥에 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바깥에 누가 있으니까 내 맘대로 안되게 나보다 더 세신분이 내가 원하는 내가 만들어지지 않고 내가 만들어짐 조차도 그 분 권한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바로 내가 만들기를 시도하는 그것이 장해가 일어날 때, 만만치 않을 때, 깨어질 때, 방해받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움직인다. 그 움직일 때 뭐가 움직이냐면 말씀대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니라" 이거요, 우리가 이 말씀 알았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했다 이 말이죠. 이 기도 응답 됩니까? 안됩니까? 안됩니다. 인간은 이래요.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는 대신 다른 댓가를 나한테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살 맛 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 기도는 응답된다는 그러한 과시를 남한테 보이는 그런 간증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은근히 노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돈을 사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할 때 항상 주께서 묻는 것은 무슨 의도로? 왜 그런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그 자체가 관심사가 누구입니까? 주님한테 있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내가 얼마나 근사한 존재냐, 여전히 자기 존재 가치를,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되찾아 오겠다는 심보인 거예요. 이 자체가 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의 의도는 어떤 기도를 평생을 해도 기도 응답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말씀대로 기도 응답하지 내 기도한대로 응답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22장에 나오죠.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제가 죽어서라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엉뚱한 이야기 해요. "너같은 인간 사탄이 잡아 먹을려고 노리고 있는데 내 기도 덕분에 니가 안 잡혀가고 있다고."

베드로가 언제쯤 자기 기도말고 자기 기도 하나 안 하나 주님이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을 언제쯤 알겠습니까? 바로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버리고 고기 잡으러 갈 때, 주께서 "베드로야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 할 때 베드로 처음 봤던 그 이벤트를, 그 장면을 재현합니다. 재현이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려운 용어인데 같은 것을 절대로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어요. 되풀이라는 것이 보통 의미가 뭐냐 같은 것을 두 번 되풀이 하는 것을 말하는데 같지 않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 어디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한 번 은혜받은 것은 두 번 다시 은혜를 받지 못해요. 두 번 다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안다고 해서 찢을 필요가 없어요. 저 개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우는데....성경 말씀을 한 번 지켰다고 해서 다시 지킬 수 있다는 능력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 때 지키도록 했을 뿐이고. 그 성경 말씀이 살아서 그 다음에 자기가 5년 전에 알았던 말씀이라도 새롭게 다가오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무엇을 주십니까? 성령을 줘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안 줍니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성령을 줘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돌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전갈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생선 대신 뱀을 주겠느냐 하물며 너희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장9-13절). 이것은 우리가 예의상 했던 뭐던 우리가 달라는 것하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는 애굽 것하고 안 줍니다. 만나를 줘 버립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항상 낯설게 다가오는 그 낯선데서 다가오는 참신함.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고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흐름을 타라는 것입니다. 무슨 흐름? 성령께서 말씀대로 나를 사용했다는 것, 쪽집게로 꽂았으면 쪽집게가 더 세지 밑에 달린 것은 안 셉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인도하는대로 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인도 받는가? 간단합니다. 바로 주께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날마다 들추어 내시면서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야만 저 사람하고, 절에 다니는 안 믿는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구원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새롭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지 않아야 됩니다. 왜? 달라지는 그 때부터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절대로 달라지면 안됩니다.

어제도 계셨으면 오늘도 계셔야지 영원한 목자이어야지 양이 2년간 목자, 3년간 목자 계약됩니까? 이런 것 없습니다. 계속해서 목자가 있어야 하고 계속해서 지팡이 있어야 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후려쳐야 됩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더욱더 목자 뿐이어야 합니다. "저는 목자도 잘했지만 저도 근사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나는 목자 뿐입니다" "나에게는 예수님 뿐입니다." 라는 것이 크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 내력으로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7장에서 여기 중요한 개념의 키(key)를 쓸께요. "우리" 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서 뭘 끄집어 내느냐면 언약을 끄집어 내요. 우리 속에서 우리를 끄집어 내면 육적인 해석이 됩니다. "아, 그 우리가 우리구나!" 이렇게 되면 육적인 해석이 됩니다. 우리 속에서 언약을 끄집어 내면 우리는 갑자기 우리 눈이 공동체를 보다가 공동체를 보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광야 교회로 끄집어 낸 언약을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그 사람은 스데반 집사가 이야기 한 우리가 그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끄집어 낸,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언약이 그 실상을, 자기 본질을 끄집어 낸 그 사건들을 나열한 것이 사도행전 7장의 설교입니다. 그러면 끄집어 낼 때 공동체가 언약 알아서 끄집어 냅니까? 맨날 주여 주여 하고 주의 이게 언약입니까?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이게 바로 부딪힘이죠. 우리라고 우기는 우리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라고 하는 부딪힘과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벨기에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죠? 열차 충돌 사건이 일어났죠. 제가 그림 한 번 그리겠습니다. 이게 딱이예요. 진짜 그 열차 사고 난 뒤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대번에 써 먹었습니다. 열차 앞이죠. 이쪽 열차 앞이 이렇게 가고 여기 열차 앞이 이렇게 오죠. 한 지점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충돌을 일으켰으니까 둘이 충돌된 이후에 사태가 이쪽이 찌그러지고 박혀서 저쪽이 찌그러지죠. 여기 결합된 이 부분을 보자는 말입니다. 이 결합된 이 부분에서 누가 죽어요? 내 앞길을, 내 미래에 비젼있는 나를 받아 버렸으니까 이게 내가 죄인되고 내가 죽게되죠. 그러면 나만 죽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마중나오다가 죽어버렸죠.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예수님이나 나나 둘 다 죽음에서 비로소 소통이 돼요. 대화가 돼요. 소통이 뭐냐? 죽음과 죽음에서 비로소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반석이 깨어졌을 때 뭐가 나온다? 물이 나오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항상 비켜라 비켜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자기 노선앞에 누가 얼쩡거리면 제일 싫어해요. 전부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싶어요.

우리 목사님도 부교역자 해보았지만 당회장 목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부목사가 설교를 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종용히 불러서 "내 니 키워줄려고 하는데 니 내 아니면 벌써 짤렸어 내 때문에 살았어" 자기 앞길에 쪼다같은 목사면 괜찮아요. 그런데 똑똑하면 안 돼요. 자기 앞길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정말 총으로 쏘아 죽이고 싶어요. 용서가 안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녀간의 싸움, 부부간의 싸움이 뭐냐하면 아내 앞에 남편이 있으니까 남편한테 대들고 그 대드는 것이 남편과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서 둘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야 해요. 결혼을 해야 싸움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야 나는 내 노선만 고집한다는 그 죄가 들어나요. 처녀들이 혼자사니까 고상한 줄 알고 있어요. 누구냐면 수녀들. 수녀들 결혼해야 해요. 중매 해주고 싶어요. 한 번 깨져봐야 해요.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이 그냥 긍휼 긍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피해자로 오는 것이 긍휼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졸지에 나는 가해자가 되고, 나는 가인이 되어 버리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 도리어 나에게 얻어 맞은 아벨이 된 상태. 그래서 피로 오잖아요. 그럴 때 비로소 언약이 그 순간 발현되는 것입니다. 발현이라는 것은 얼굴이 발갛게 피어오르는 것, 구체화 되는 것.

언약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로하고 설명한다고 언약이 아니고 뭔가 누가 와서 자전거도 내 차에 받쳐봐야 우리는 벌겋게 올라오죠. "아 오늘 내가 흥분했구나" "오늘 과속했구나" "내가 욕심을 냈구나" 누가 뭔가 부딪치지 아니하면 자기 노선 수정이 안됩니다. 이게 인간들이 타고난 것입니다. 모든 목이 곧은 백성들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해서 맨날 본인이 얻어 터지는 것입니다. 혼자 원망을 다 받는데, 혼자 원망 받는다는 것이 누구를 대표하느냐면 모세가 여호와를 대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을 다 받으니까 나중에 모세가 참다 참다 못 참으니까 반석을 지팡이로 지시하라고 했는데 모세가 화가 나서 반석을 지팡이로 쳤죠. 보세요. 또 완료예요. 물은 물대로 나왔는데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그럼 이 물은 누가 주었습니까? 물이 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모세는 뭐가 됩니까? 모세는 죄인이 되죠.

모세가 지옥 갔습니까? 변화산에서 엘리야하고 주님하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예요? 모세는 천국 갔잖아요. 천국 간다는 것은 말씀을 위배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위배 안 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위배 했음을 알므로서 천국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에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한 개의 말씀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 면류관도 주님 발 앞에 반납하고 하는 말이 내가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완료고 완성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언약을 그냥 주지 않고 공동체가 생기고 난 뒤에 언약이 생겼는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7장을 봅시다. 이것을 안 보고 그냥 육적으로 보면 무지무지 쉬워요. 스데반 집사는 왜  우리가 구약 성경 다 아는 것을 왜 쓸데없이 지루하게 두 번씩이나 했는가 할 것입니다. 38절~40절 봅시다.

38절.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에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절.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이들이 누구냐 하면 이들이 광야 교회입니다. 38절에 나오죠. 광야 교회가 구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교회라는 용어가? 안 나오죠. 그러면 구약 전체를 뭐로 땡겨 봤다? 현재 교회로 땡겨오죠. 그러면 교회가 구약에 있었단 말입니까? 없었단 말입니까? 있은거로 보죠. 있었는데 우리라고 했죠. 아까 여기서 언약이 나온다고 했죠. 결국 "언약을 품은 우리"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뭐라고요? 그냥 교회 간판걸고 심방만 하면 교회 입니까? 뭘 품고 있어야 된다? 언약을 품은 우리가 될 때 교회가 되죠.

그러면 그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체를 뭐로 바꿉니까? 우리를 죄인되게 하죠. 그럼 쉽죠. 다시 정리하면 교회가 뭡니까? 우리를 더욱더 죄인되게 만들기 위해서 언약이 상주하고 있는 집합체. 교회죠. 그것을 제 논문에서 "교회란 속죄 양의 표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집합체." 그러면 뭐가 생각납니까? 요한계시록 생각이 나죠. 요한계시록에 두 가지 인이 있죠. 하나는 짐승의 인이 있고 하나는 어린 양의 인이 있죠.

속죄 양의 표시가 뭐냐하면 언약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언약을 뭐라고 했습니까? 새언약이라고 했죠. 새언약의 표시가 있는 사람의 집합체가 교회죠. 그러니까 교회는 뭐만 외치면 된다? 어떻게 지킬수 있는가를 외치면 안 되고 우리는 어떤 말씀도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여기 모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 나올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전하면서 왜 인간은 이 성경 말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 어떤 말씀이든지, 모든 말씀을 보면서 뭘 증거하면 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육적인 해석으로 이렇게 해서 자기가 지킨걸로 여기는 해석과 주님께서 이 해석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두 개를 제시해 가지고 그래서 우리는 육일수 밖에 없고 주님의 은혜로 용서 받는다 그런 식으로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를 스데반 집사는 7장에서 구약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편지도 없었고 초대 교회 초창기이기 때문에 논할 수 있는 성경 귀절은 구약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가지고 구약 때부터 교회가 있었다. 구약 때부터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를 무슨 교회라고 했습니까? 광야 교회라고 합니다. 광야 때만 교회가 아니라 나머지도 마찬가지로 교회인 이유가 그 당시에는 뭐가 있었습니까? 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결국 스데반 집사가 이 언약을 이야기 하면서 다윗 언약을 이야기 해요. 다윗 언약은 무슨 언약이냐면 성전에 관한 것입니다. 성전은 뭐냐하면은 "성전은 집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성전이 만약에 그냥 하나님의 보좌라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성막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성전, 곧 집을 지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다윗보고 성전 짓는다고 할 때 짓지 말라고 하셔야죠. 그런데 지었잖아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잖아요. 그러니까 2번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죠. "나는 하나님의 보좌가 성전인데 왜 집을 지어? 짓지마!" 이러면 될 터인데 나는 하나님의 보좌라고 해 놓고는 집을 지라고 했으니까 2번 가지고는 모자란다는 이 말이죠.

두 번째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다 하면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안 들어간다" 집을 지어 놓고 안 들어간다고 하면 처음부터 짓지 말라고 하시든지. 성전이라는 개념은 이 두 가지를 다 끄집어 낸 틈바구니에서 나옵니다. "발생론적 성전 개념" 이라고 합니다. 발생론적 성전 개념은 무엇을 거부하느냐면 존재로서의 성전은 성전이 아니다.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필요 없다? 그것은 아니고 거기에 있는 성전은 성전이 아닌데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삐죽삐죽 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의 괴기영화 링인가? tv에서 귀신 나오는 영화 알아요? 머리 푼 여자 귀신 나오는 거..그 영화를 보면 놀래죠. 왜냐하면 화면에 있는 여자 귀신은 절대로 화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전 지으라고 했을 때는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집 밖으로 못 나온다 그러니까 예배당 안에는 하나님이 있고 예배당 바깥에는 하나님이 없다 또는 제단 밖에는 못 나온다 하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괴기 영화에 출연해서 머리 풀고 화면 밖으로 기어 나오시는 거예요. 그럴 때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인간을 tv로 만들고 tv이 만들면서 나는 tv에다 하나님을 가두어 두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데 이 속성을 거부하시고 나라는 죄인에서 의인이 튀어나와 버려요. 제가 이야기 해도 무서워요. 나같은 죄인속에서 뭐가 나온다? 주님의 복음이 나온다니까요. 여러분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뭐 복음을 전해야 소름이 끼치지...

지금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지요? 돌에 맞으면서 튀어나오는 것? 돌에 안 맞으면 나오지 않는 것? 돌에 맞아야만 나오는 것? "지금 주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모르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세상에 그냥 용서하라고 하면 안 나와요. 또 돌에 맞아 가면서 자기가 천국 가면서 tv이 다 깨져가면서 머리 풀고 귀신 나오듯이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가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압니까? 우리도 모르죠. 그런데 우리가 아는건 뭡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애들에게는 나타내시고 귀 있는 자는 귀 있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고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받을려고 어린아이처럼 된다고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어린아이에게 나타나시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감추시고 이 이야기를 듣고 나타내기를 기다려서 우리가 어른은 포기하고 어린애가 될려고 하는 그 방법, 이 방법이 육적인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뭡니까? 어른같은 내가 어린아이로 달라지겠다는 그 움직임, 그 의지와 행위는 누가 주도해서 일어납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주도해서 일어나죠. 그 방법이 뭐냐? 약삭빠른 지혜로운 자의 방식이 되겠죠. 그러면 나타나면 곧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되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타나면 어린아이 되지 말라고 해도 "나는 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아주 가벼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무겁고 나는 가볍고, 말씀이 내 안에 머리 푼 귀신처럼, 나는 고장난 tv처럼, 나를 통해서 고장난 tv가 계속해서 나오게 하시는 그 주인공은 누구냐? 내가 아니라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그렇게 길게 설교했는데 유대인들이 그 설교를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육적인 인간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쳤다는 것은 스데반 집사의 말을 알아 들었다는 거예요? 아니면 못 알아 들었다는 거예요? 아주 잘 알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잘 알아 들었죠.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를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성령이 충만하면 사람들이 감동하고 눈물 콧물 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보수측의 교회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맨날 평양의 산정현 교회 따지면서 그 때 성령의 충만해서 설교해서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성령 충만 받으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줄 알아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성령 충만해서 설교할 때 유대인들이 화내고 그냥 갔습니다. 가고 난 뒤에 그 뒷 모습 보고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역시 말씀대로 되는구나!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구나! 역시 말씀대로 되는구나!"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면 그 결과든 그 과정이든 모든 원인이 말씀 안에서 말씀대로만 되는 거예요. 내 설교 잘한다는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만 된다니까요. 그렇다면 설교자가 자기 설교 안 듣고 기분 나빠하고 삐지고 돌로 치고 그냥 간다고 해서 설교자가 삐졌다는 말은 평소에 설교자가 설교하면서도 본인은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오늘 설교 잘 했고 감동적으로 뿅가게 설교 잘 했다 그러니까 다음 주일에 안 오기만 해봐!"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되는데 그런 죄에서 목사가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도 설교할 때 바로 그 점을 잊어버리고 설교한 사람 없습니다. 다 설교할 때는 "주여 오늘 설교 잘 됩니다. 제발 서너명이라도 은혜받게 하옵소서" 이걸 노리고 설교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본인은 설교 잘 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하고 옆에 사람 자고 있고 설교 빨리 끝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휴대폰들고 밖에 나가고 이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 목사가 좌절하죠. 그거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4장 13절 마지막 때에 내가 사도를 뭐같이 사용한다? "쓰레기같이" 내가 마지막 때에 사도와 목사들을 쓰레기처럼 취급해서 너희들은 망하고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게 하겠다고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제 논문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사도와 목사들을 쓰레기 취급해서 갈구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목사도 쓰레기조차도 사용하셔서 구원받게 하시니까. 세상에 이런 놀라운 주님의 현존함이, 실존함이 또 있겠습니까? 자기가 쓰레기 되면서 비로소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용서했다.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 해 놓고 다른 사람은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 좋았습니다. 은혜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목사는 지금 기가막힌 거예요. 도저히 이것은 내가 받을 영광이 아니잖아요. 그걸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와 이것이 뭐냐하면 항상 십자가로서 그 사람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나 나올 나의 열매가 아니고 주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한 번 정리하면 스데반 집사가 구약 역사를 우리라고 이야기 했고, 왜냐하면 구약은 지나간 시간이 아닙니다.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기억은 오류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기억한다고 하는데 십자가를 기억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지금 십자가지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억하게 되면 인간의 현재 자기 욕구와 섞여서 변양되죠. 무슨 변양? 주체의 변양. 변양이 무슨 뜻입니까?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기억 못하고 현재 내 욕구와 욕망과 욕심과 섞여서 과거를 아주 아름답게 멋드러지게 조정해 들어갑니다. 그래서 간증은 전부 다 거짓말 입니다. 모든 간증은 거짓말 입니다. 왜냐하면 변양되었기 때문에, 변양된 주체에 필요한 변양이기 때문에 그 때 그 기분은 같은 장소에 두 번 다시 갈 수 없습니다.

헤라클레토스가 쓴 흘러가는 강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 목욕하게 되면 이미 다른 물에 목욕하는 것이지 같은 물이 아니다. 이게 뭐냐?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운동이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인간이 변화되는 주님을 우리가 잡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잡는 순간 우리는 스톱되어 버립니다. 화살 잡아 버리면, 화살 앞의 색깔이 빨갛고 뒤의 색깔이 파랗다면 날라가면 모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화살을 잡아야 "아, 앞부분은 빨갛고 뒷부분은 파랗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 화살은 그 화살이 아닙니다. 무슨 화살이냐? 내 손에 잡힌 날라가는 화살이 아니고 가짜 화살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지킬 때, 그 말씀은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스톱시키는 거예요. 앞뒤를 짤라 버려요. 짤라 놓고 우리는"주여 이 말씀 제가 지켰습니다." 하는 거예요. 사실은  말씀을 지킨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흘러가는 주체를 고정된 주체로 만드는 반칙을 범하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은혜받았다고 좋다고 하죠. 나중에 돌아서면 그 때 너무너무 일방적이었다는 것을 알죠.

우리 교회에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의 아내가 아파요. 그래서 병원에 갔다가 쫌 나아지면 전화해서 "목사님 제 아내가 많이 나아 졌어요" "오래 갈건데요 오래 갈건데" 하죠. "나아졌어요." 며칠 지나면 "목사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더 아파요." 평소에 아내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거든요. 기대를 하니까 뭐가 성급합니까? 내 기도가 과연 효과 있다는 것을, 성과를 빨리 보고 싶어하죠.

그러니까 조금만 빌붙을 것이 있으면 전부 다 자기 은덕으로 끌어 모아 가지고 주체의 변양, 이 주체가 바뀌어 가지고 주변의 것을 다 끌어 모아 가지고 "내 기도봐라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잖아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잖아" 이렇게 우긴다 말이죠. 이게 육의 열매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받으면 화가 나고 시기나고 불평하고 불화가 일어나죠.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왜 살아 있습니까? 안 살아 있어도 되는 나를 왜 살게 하십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는 너가 좋아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숙제할려고 너를 필요로 했다. 너는 필기도구다. 내가 너를 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에,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너 볼펜이 아니고 내 볼펜이다. 그러면 내 볼펜 같으면 뭐가 나와야 해요? 주께서 가신 같은 코스가 나와야 하죠.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나왔잖아요. 근데 스데반 집사 마지막 보니까 "주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나왔잖아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 자기가 했습니까? 누가 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니까 주께서 스데반 집사를 볼펜으로 사용해 가지고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쓰는 거예요. 그처럼 지금도 우리를 쓰시는 거예요. 쓸 때마다 우리가 바로 언약 때문에 산다는 것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스데반 집사의 설교인데 이제 약간 내용을 더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언약이 나오죠. 우리가 나오고 언약이 나오죠. 여기 8절에 보면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아브라함이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이죠.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먼저입니까? 이근호 목사가 먼저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교회 왜 있습니까? 교회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모인 것입니다. 언약 때문에 구원받지 교회 있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모인 것이 교회이어야죠. 만약 어느 날 교회에서 십자가 새언약이 빠지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움직인다는 것이 빠져 버리면 그것은 바로 사교 단체예요. 사교 단체의 특징의 중심이 뭐냐하면 각자 각자가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쁘게 해줄때만 다닌다는 거예요. 만약 어떤 노인네가 왔다. 그 노인네를 이쁘게 해줄려면 교회가 돈 모아서 뭐 해줘야 해요? 복지센타를 세워야 하죠. 복지센타 왜 세웁니까? 언약때문에 세웁니까? 아니죠. 이 복지센타 혜택을 받을, 사랑받을 노인들을 모집하는 것입니다.

대구 어떤 교회는 봉투에다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었거든요. 돈 맛을 들이니까 노인들이 모였거든요. 그 교회가 커지니까 옆에 있는 교회도 돈 줬거든요. 그래서 그 동네 노인들은 어떻게 하느냐면 1부 2부 예배가 있으니까 일단 이쪽에서 1부뛰고 저쪽가서 한 탕 더 뛰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는, 노인네를 사랑하는 좋은 교회가 되는 겁니다. 돈만 사랑하는 더러운 교회. 이게 뭐냐하면 육이 좋아는대로 해줘야 교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이 좋아하는 교인들을 모아 놓을려면 처음에 왔던 육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줘야 계속 남아있지 만약에 육을 이야기 했는데 여러분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몰라도 흩어지게 되어있죠. 안 흩어질려면 계속해서 육적으로 점점 더 나아가줘야 교회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들이 있다는 그자체도 이것도 하나의 언약적인 성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에게 은혜가 안 왔으면 우리도 그런 목회를 할 수 밖에 없는 목사였다는 것을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나도 만약에 그런 교회가 원한다면 월급이 그렇게 많고 사택도 화려하다면 가능성이 있을수가 있죠.

그 다음에 14~16절을 한 번 봅시다.
14절.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절.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이 죽고 난 다음에 뭐했습니까? 세겜에 내려가서 무덤을 샀죠.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왜 무덤이 있죠? 문제는 무덤이 죽은 자가 산 자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언약이 있어요. 무슨 언약?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샀죠. 아브라함 언약에 뒷사람들이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이삭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종속되고 야곱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되고 나중에 모세언약도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 긴긴 역사입니다. 모세와 함께 다니면서 계속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쉽게 갑시다. 그림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여기 계시면 유격 훈련할 때 줄이 있죠. 그 줄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옆에 누가 있어요? 예수님 있어요. 그걸 가지고 오른편에 있다고 하죠. 사실 아브라함 언약에 같이 있죠. 줄이 축 늘어지면 이게 뭐가 되냐? 이게 바로 역사가 되죠.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과 옆에 바로 늘 계시는 거예요. 이게 축 늘어지는 거예요. 축 늘어진다는 말은 결국은 아브라함 언약이 있지만 이삭 언약, 야곱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처음부터 어디로 옵니까? 아브라함 언약으로 돌아 오죠.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죠. 아브라함 자손이 열 명이 아니고 단 한 명 뿐이다. 

그러면 중간에 축 늘어진 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이죠. 몇 년 뒤에 갔다? 430년 후에 율법을 주셨잖아요. 율법 준 것은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뭐가 축 늘어졌다? 위에 탱탱해 있는 아브라함 언약이, 묵시적으로 탱탱해 있고 역사에서는 축 늘어져 있고. 결국은 아브라함 언약은 그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의가 되죠. 그러면 믿음이 뭡니까? 뭐와 뭐가 연결이죠?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결. 아브라함이 오징어처럼 쭉 뻗어 있는 거죠. 이게 믿음이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죠.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내용이 빠지고, 내 행함은 빠지고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아브라함한테 언약을 주어서 예수님 나오게 했다. 그러면 자기 안에 쭉 뻗으면 행함은 빠지고 뭐만 남아 있어요? 언약만 남아 있죠. 무슨 언약? 아브라함 언약만 남아 있죠. "하나님이 주신 언약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을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하셨죠. 자기는 쭉 뻗어 있고 자기는 다리(bridge)고 그 브릿지를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공로로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한 집안 사람, 패밀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축 늘어지게 한 긴긴 언약의 노선입니다. 이게 430년 뒤에 율법을 주게 되면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줄 알고, 축 늘어진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줄 아는데 그것은 소창자인데 아브라함 창자, 축 늘어진 창자 백날 지켜봐야 율법을 주신 것은 죄로 하여금 더욱 죄되게 하고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심판아래 있게 하심이고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죄 안에, 저주 아래 가두어 두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육적인 사람은 말씀을 보고 지킬려고 할 것이고 영적인 사람은 내가 지킬려고 시도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대비해 볼 때, 주님은 죽으심으로 지켰는데 나는 살려고 지키고 이 말씀 지켜서 더 살아 볼려고 지키는, 나는 어떻게 하든지 살려고 하고 예수님은 이 말씀 지켜서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에서 죽을려고 하고 방향이 다르잖아요. 죽음이 무덤 남기는 것, 무덤이 완성인데 우리는 안 죽을려고 버티는게 이게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그 육적인 것, 이 육과 영의 만남이 성령을 통해서 딱 대비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대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약이 우리 속에 온 것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준 언약인데 우리는 자꾸 미완료로 내가 살기 위해서 지킬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죄가 되어도 구원되는지를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 실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0-03-22 23:00:45   녹취 : 이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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