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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7 22:46:48 조회 : 2920         
111027 사도행전30강 마태복음 21강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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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7.76) 11-11-07 00:30 
대전111027a-행13장(바울의 설교)30강-이 근호 목사
대전강의10월27일 사도행전 30강

오늘은 사도행전 13장 17절을 해봅시다. 여기 13장에 나오는 이 내용은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같이 터키 중심지에 있는 안디옥이라는 데가 있어요. 안디옥이 터키에도 있고 저 지중해에 있는 이스라엘 땅에도 안디옥이 있어요. 지금의 시리아 두 군데에 있는데 안디옥이라는 터키의 중심지 안디옥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지진이 난 곳은 이쪽에 지진이 났고 안디옥에서 설교를 하는 대목인데, 사도바울이 설교를 하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사도거든요. 사도가 설교할 때 성령 받아서 설교 할 것이고 그 설교내용도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 설교내용과 비교가 되는 성경이 돼야 돼요. 성경을 ‘나 성경 안 보겠어. 나 성경 덮어버리겠어. 난 놀기 삼아 교회 가겠어.’ 이러면, 설교가 재미나는 설교, 사람 꼬시는 설교, 교회 와서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그런 사람 위로하는 설교로서 충분하죠. 어차피 하나의 점집이니까, 하나의 가게니까, 그냥 사람들 모여서 돈 뿌리고 뿌리는 사업은 번창하게 마련이거든요. 그걸로 충분하다고 보면 되는데, 성경만 펼치면 문제가 돼요.

성경만 펼치면 거기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하고 오늘날 목사들의 설교를 비교를 시도한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생각을 달리하게 돼요. ‘하아~ 우리가 교회 놀러가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이게 하늘나라에서도 반겨주는 게 아니구나, 교회서 교회 목사는 반겨주는데 문제의 관건은 교회까지는 왔는데 문제는 천국은 이게 보장이 안 되는 거예요. 실컷 교회에서 노인들이 많이 놀거든요. 그만큼 시설이 잘 돼 있으니까 노인들이 놀기 좋은데, 점심 주고 저녁까지도 주고 좋은데 문제는 교회가 그런 데가 교회가 아니고 교회라 하는 것은 천국을 갈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 그런 말씀이 있죠.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다.’ 두 세 사람이 있으니까 이건 얼마나 작은 숫자입니까? 그래도 너와 함께 있겠다. 그런데 지금 만약에 두 세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주변에서 무시하고 새로 온 사람도 ‘두 사람밖에 없네.‘ 하고 두 번 다시 안 올 거라 말이죠.

그러니까 복음 전하는 목사들로 하여금 용기를 잃게 만들고 절망케 하는 그런 분위기가 되죠. 그래서 제가 자주 이야기합니다만 교회가 있음이 교회를 망친다는 말을 제가 그래서 하는 거예요. 지금이 만약에 영 정조 시대, 조선시대 후기인데 여기 대전에 교회가 있다 하면 ‘교회가 뭐지?’ 하고 호기심으로 올 건데, 지나 개나 전부 다 교회 다 세워놓으니까 기존의 교회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참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교회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매도당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마귀의 전략이고 악마의 전략이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설교를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도바울이 설교한 것하고 예수님이 설교한 것하고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내릴 수 있어요.

뜸들이지 않고 바로 직접적으로 사도바울의 설교의 핵심부분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죽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구약 가지고 설교를 해요. 사도바울이 안디옥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설교를 하는데 여기 26절에 보면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이렇게 돼 있어요. 그 앞에 것은 조금 있다가 설명을 해드릴게요. 핵심부분만 먼저 짚고 갑니다.

여기서 말씀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구원의 말씀’이죠.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이런 톤으로 이런 식으로 설교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뭐냐 하면, ‘구원을 받으라.’는 거예요. 사람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닙니다. 재현이가 피아노 치고 있는데 ‘구원받으세요.’ 이러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지금 자기의 음악성을 들어줘야 되는데, 요리사가 지금 한참 요리하고 있는데 ‘실례지만 구원을 받으세요.’

‘구원을 받으세요.‘란 이 말은 모든 능력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독케 합니다. 거리에서 교통신호하고 있는 순경한테 다가가서 ’구원을 받으세요.‘ 이것은 ’당신은 구원받지 않으면 당신은 사람 취급 못 받습니다.‘하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톤으로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오른손이 범죄 하면 찍어버려라 그리고 오른손이 없는 채로 나머지 지체가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받으세요. 찍어버리더라도 오른 눈 빼버리고 오른팔 없더라도 지옥 불에 안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구원을 받으세요.’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지금 지옥 가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예요. ‘당신은 지금 지옥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할꼬, ‘구원을 받으세요.’

그러면 구원이 뭔가를 38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람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죄 사람을 받으라 돼 있죠? 그렇죠? 38절 맞죠? 죄 사함!!

그럼 교회에서 오늘날 목사가 설교할 때 뭐부터 해야 됩니까? 성경을 펼쳐놓고 그 다음에 뭐다? ‘구원을 받으세요.’ 그 다음에 구원은 어떤 식으로 해준다? 죄 사함을 누구의 힘을 입어서? 이 사람, 이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거든요.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정하신 분이라 했어요. 하나님이 정하신 분이니까, 결국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이 뭐냐 하면 아버지께서 이 세상이 지금 구원받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빠졌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구원을 받게 하는데 구원을 받는 거 그 전제는 뭐냐, 죄가 있고 그 죄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을 경우에만 뭐가 성립됩니까?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복 받고 어떻게 헌금하시면 여러분 가정이 핍니다. 이런 이야기가 없다니까요. 사도행전에 그게 없다니까요. 지금 일반 대중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이야기를 하질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사도바울도 그렇고, 그러면 예수님이나 사도가 이야기한 그 취지가 아닌 다른 설교를 한다는 것은 이미 노선이 좁은 길이 아니고 넓은 길, 멸망의 길을 가기 위해서 마귀가 만들어 놓은 교회 다니고 있는 거예요.

죄 사람을 받는데 있어서 증거가 ‘병이 나으면 죄 사함 받았습니다. 방언하면 죄 사함 받았습니다.’ 이런 증거가 없어요.

죄 사함은 증거가 딴 게 아니고 지금까지 날 위해 살다가 이렇게 되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돼 있어요. 원래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몸 바치는 사람들이 모임이 돼야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몸 바쳤다는 그 크기에 만족해서 오는 사람들은 안 돼요. 자기는 멀쩡히 살아있고 예수님만 아주 고생하고, 이런 것을 노리고 오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한 몸을 주님을 위해서 바치리라.

진주에 가면 유명한 성이 있잖아요. 거기 유명한 옛날 임진왜란 때 기생이 있죠? 논개, 그 논개 충절을 노래했던 한국 노래 있잖아요. 지난번에도 노래불렀습니다마는 ‘몸 바쳐서 몸 바쳐서’ 그게 뭐냐 하면 왜장한테 몸 바쳐서 나라 구했던 논개의 애국심을 말한 게 아닙니까?

교회가 뭡니까? 이 몸 바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리라. 이거 교회 아닙니까? 아주 깔끔하죠.ㅎ 문제는 이런 깔끔한 교회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자기 챙길 거 챙기기 위해서 이유를 위해서 온 거예요. 헌금 내고 자기 원하는 거 더 많이 30배, 60배, 100배로 갖고 가려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말이죠. 마치 가게 커피숍이나 옷 사고 돈 주고 커피 먹고 돈 주고 하는 것처럼 교회 헌금 내고 지는 챙길 것 챙겨가는 구원이나 챙기고 하나님 복이나 챙기는 그러한 가게들로, 점치는 점집으로 그렇게 대나무 꽂아 꽂은 데, 대나무 대신에 십자가를 대신 꽂아 놓았는데, 십자가나 대나무나 그게 똑같은 거죠.ㅎ

왜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제 대구 금호강을 산책을 하는데 뭔가 사람들이 모일 장소가 아닌데 많이 모여 있어요. 그것도 50대 남자들이. 쓱 들여다보니까 포커 판을 벌이고 있는데 만 원짜리가 즐비해요. 그래서 몇 걸음 떨어져서 112 신고했죠. 지금 포커 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100원 짜리 한다고 밑에는 100원짜리를 깔아놨어요. 혹시 덮치면 ‘우리 100원짜리 장난인데?’ 이렇게 해놓고 실제 판돈은 만 원짜리로 깔아놓은 거예요. 그것도 알려줬어요. 그래서 산책하고 돌아오다 보니까 완전히 해산되고 말았어요.ㅎ 참 좋은 일 했었습니다.ㅎㅎ 그 사람들 살리는 방법 이예요. 그 사람들이 정신이 빠져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있는 거나 교회에 와서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 간증 거기 빠져서 하는 것이나, 그 도박판이나 이 도박판이나 신고감이죠.ㅎㅎ

나에게 하나님이 뭘 주실 것인가가 아니라 이 껍데기 같은 이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쓰일 것인가,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다 이 말이죠. 그게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내 속에 주님 들어올 정도가 아니고 주님이 내 앞에 계셔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내 안을 주님이 점령해 버립니다. 그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50절 봅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그 지경에서 쫓아냈죠.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설교와 공통점이라 말이죠. 예수님이 설교하면 ‘제발 좀 우리 동네에서 놀지 말고 딴 동네로 가 주세요.’라고 쫓아낸 거예요. 오늘날 교회 가서 복음 이야기하면 교회서 쫓아내 버립니다. ‘남 영업하는데 니가 와서 왜 십자가 이야기해서 영업 방해하느냐’고 쫓아내 버려요. ‘지금 우리가 낸 헌금 가지고 놀고 있는데 이렇게 좋아하면서 교회서 역시 착한 일해서 수백 명이 와서 놀고 이게 얼마나 좋은 일 하는데 당신이 왜 우리 영업을 방해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우리를 모독하느냐.’ 이런 식으로 쫓아내요.

그러니 교회가 있다는 자체가 교회를 가로막아요. 교회는 늘 없다고 생각하고 말씀만 있으면 되는데, 말씀 가지고 교회 만들어서 말씀은 버리고 교회만 쥐려고 한다 말이죠.

질문자: 그런데 그 즐거움이 커서 그렇게 다니는 사람이 있잖아요.

목사님: 당연하죠.

질문자: 그 맛이라도 있어서 살맛이 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목사님: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주체에 대한 눈에 보이는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자기 대체물, 이 대체물은 남자들이 차 살 때 아주 애지중지 하죠. 여자들이 명품 가방 사는 것 이상으로 남자들이 차를 사게 되면 정말 신경 바짝 씁니다. 마찬가지고 교인이 헌금을 하게 되면 그 교회에 자기가 차 산 것처럼 교회에 그만큼 애정을 쏟게 돼 있어요. 그걸 목사들이 그 심리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서리집사에서 장로집사는 의도적으로 강제적으로 돈을 내라 합니다. 돈이 필요해서 돈 내라 하는 것도 있지만 일단 목돈 내면 어떤 경우라도 어지간한 경우라도 이 교회는 떠나지 않는다는 그런 심리적인 것을 이미 알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집사에서 장로집사, 장로집사에서 장로 될 때 막대한 목돈을 냄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낸 교회 지분, 주식을 산 것처럼 여겨서 이제는 몸 바쳐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그렇게 만드는 전략을 씁니다. 떠나면 그동안 돈 낸 게 아까워서 십일조 낸 거 복리로 계산해서...ㅎ

그러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그 말이 그 말 이예요. 뛰는 놈은 교인들이고 나는 놈은 목사라니까요. 사기꾼 위에 사기꾼 이예요. 어떤 책에 보니까 나는 놈 위에 또 있다고 합니다. 노는 놈이 있답니다.ㅎ

자, 그러면 사도가 성경을 보면서 아까 3가지 뽑아냈죠. 하나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과 두 번째는 죄 사함, 죄 사함은 그냥 죄 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이 예수님과 관련돼 있다는 것, 세 번째는 그렇게 설교하니까 쫓아냈다. 그만큼 예수님이 오셨던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 이예요. 말씀을 전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어두울 줄은 몰랐는데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고 십자가를 증거 하니까 쫓아냈다는 것은 그 뒤에 껍데기만 교회지 사실은 지옥 갈 사람들을 모집하는 여행사에요.

태국에 유명한 휴양지 있죠? 괌이나 여행지에 모집하듯이 지옥을 제대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데가 교회라 하면, 이런 이야기를 제가 지금 글로 다 적어서 11달에 한번 쓰려고 합니다. 이렇게 수고 안 해도 글을 써 놓으면 누가 그댈 녹취를 해주니까 하려고 예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게 구약성경은 이 설교를 누구보고 합니까? 구약성경을 신봉하고 있는 유대인들 보고 하죠. 터키 그 지방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그래서 그 유대인들 모아놓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 도사입니까? 구약에 도사고 말씀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보는데 사도는 거기서 죄 사함을, 구원의 말씀을 끄집어내는데 그들은 이 구약말씀 가운데서 끄집어내지를 못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것을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요. ‘너희들은 성경을 볼 때 문자적으로 해석하니까 이러한 십자가가 안 나오고 있더라.’ 그럼 나, 사도바울 본인은 영적으로 해석하니까 십자가가 나오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영적으로 십자가로 해석을 하지 않으면 교회 부흥되기가 나옵니다. 교회 사랑하기, 이게 나와요. 빛과 소금역할 하기, 이런 게 나와요. 사람들에게 인기 얻어야 교회는 이 나라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일 할 수 있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된다. 큰 교회 모토는 우리 교회에서 기도함으로써 남북통일 되고 이 나라가 좌파에 눌리지 않고 우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대전은 모르지만 서울에서는 그렇게 설교들을 하는 모양 이예요. 그래서 선거법에도 거리고 하는 모양 이예요. 누구 찍으라고.

그것은 뭐냐 하면 교회가 이 사회에 기여를 해야 되고 교회가 이 사회에 정신적인 구심적 역할을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확실한 증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뛰는 놈,(평신도들, 놈이라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지간한 교수, 박사해도 뛰는 놈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나는 놈 수법에 다 넘어가는 거예요. 무식한 목사보다 더 못한 거예요. 기껏 대학에서 교수라 해도 대학에서 영문학, 언어학 교수라 해도 성경 해석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나물에 그 밥 이예요.

그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뿌리 깊은 나물이라 하데요. 요새 연속극 뿌리 깊은 나무 하잖아요. 뿌리 깊은 나물이 다른 말로 하면 콩나물 아닙니까? 콩나물 비빔밥, 그거 뿌리가 안 깊어요. 지 딴아 교회 30년 다니고 어떻고, 어떻게 ‘한국 교회는 개혁돼야 된다. 비판해야 된다.’ 보면 뿌리 깊은 나물 이예요. 전부 다 육적인 해석, 유대인,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 이예요. 손OO 교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지도자, 저희들 맘대로 지도자.

사도바울처럼 해석을 해야 그래야 영적해석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야말로 육적이고 문자적으로 해석한 사람이 대부분인데 뛰는 자들이 다 이런 자들인데 교회는 안 되죠. 그야말로 두 세 사람이 모이죠. 그럼 이런 말씀을 전하려면 전하는 목사가 어느 정도가 돼야 합니까? 두 세 사람이 있는 것도 감지덕지 할 정도로 더 큰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 수 있는 목사만이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어야 돼요. ‘니 교회 몇 명이냐,’ 이렇게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하나님 믿고 계산한다고, 하나님 믿고 일체 계산하지 않는 사람 돼야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만약에 하나님 믿고 ‘내가 하나님 복음 전하는데 교인은 몇 명 왔고 헌금은 얼마고, 자꾸 계산을 해대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여전히 문자적 해석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중에는 점점 더 좌절감, 좌절감, 절망감에 빠져서 ’에라 내가 미쳤나, 내가 백날 복음 전해도 오지도 않고 때려 치워라, 씨,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왜 하나,‘ 이런다니까요.

예레미야는 계산하지 않는데 자꾸 예레미야 흉내는 내서 ‘복음 전하는 것이 뜻이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은 나중에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한테 지쳐버려요. ‘아휴, 20년간 복음 전했는데 교인들 다 나가버리고 나만 남았다. 나중에는 본인이 자괴감에 빠져버려요. 놀랍게도 그 한계가 처음부터 있었는데 자기는 마치 영적 사람인 줄 알고 착각을 했었죠.

자, 그러면 사도바울은 같은 구약을 봐도 하나는 문자로 하나는 영적으로 해석을 했다. 이걸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영적으로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말씀을 줬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 나오는가, 17절에 보면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이렇게 돼 있죠? 구약을 볼 때 긍정적으로 구약에 있는 조상들을 좋게 보고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 이거 문자적 관점입니다. 왜 조상들을 긍정적으로 봐야 하느냐 하면, 조상들을 긍정적으로 봐야 지금의 그 조상의 후손들도 조상님만큼 경건해야 하는 근거 때문에 조상님도 살았듯이 우리도 살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우리에게 보장돼 있다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조상님이 이렇게 경건했기 때문에 구원받듯이 지금 우리 현대인 이스라엘은 이처럼 경건하기 때문에 우리도 구원받는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상들이 거의 경건치 않았다. 조상들은 오히려 그들이 소행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봐주지 아니하면 늘 멸망과 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라고 역사를 긍정적으로 본 게 아니고 뭐로 봅니까?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려버리죠. 이렇게 구약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든 아브라함 후손들 전체를 다 제해버리고 그 중에 누구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저쪽을 발로 차 버리는 겁니다.

믿어야 될 것은 조상들의 언덕을 믿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의인이고 다른 사람은 그분 앞에서 다 조상이고 뭐고 다 죄인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언급하면서 설교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목사들이 설교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 기철 목사, 손 양원 목사 훌륭하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되죠. 20년 전에 이 교회 세운 어느 돌아가신 장로님, 고 김 기백 장로님, 얼마나 훌륭한지,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고요. 땅을 다 내시고 그 유산을 몽땅 다 하나님의 복음 전하라고 내놓으시고 얼마나 그 신앙을 본받아서,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이런 소리해야 돼요. 고 김 기백 장로는 땅을 냈지만 그것도 죕니다. 이런 소리해야 된다고요. 아마 부 교역자 그 사람은 그 다음 주부터 부 교역자 자리 잘립니다. 전혀 교회에 보탬이 안 된다고. 사도바울이 설교할 때, 이건 성령 받아서 설교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설교 내용과 예수님의 설교 내용과 베드로 설교가 전부 다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한분만 의인이고 나머지는 죄 사함을 받아야 될 구원돼야 될 죄인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 20절에 사무엘 나오죠.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사도바울이 사사를 주셨다고 말을 한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줘도 무슨 소용이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원판이 시커먼데 인간의 원 심령이 영혼이 완전히 추잡스럽고 더러운데 아무리 사사를 주고 사무엘을 주고 뒤에 다윗을 줘요. 다윗을 왕으로 삼아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마저 주셨잖아요. 그러한 더러운 심보에 예수님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했다 말입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옛날 선지자 핍박하듯이 동일하게 핍박했다. 요게 복음입니다. 요게 신구약 설교하는 모델 이예요.

하나님이 약속을 해서 세례요한을 보내줬다. 하지만 27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한번 보세요. 그들은 안식일마다 뭐를 외웠습니까? 성경 말씀 외웠죠. 그들은 외웠으니까 뭐를 자부합니까? ‘성경에 정통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외웠으니까 성경 말씀 잘 안다.’라고 했던 그들이 도리어 어떻게 했습니까?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그분을 정죄하여 어떻게 됐다?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했다.” 야! 요거 아주 교묘하죠. 마귀가 하나님의 전략에 말려든 거예요. 마귀와 그 종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잡힐 때 빌라도가 뭐라 그랬느냐 하면 ‘예수여, 나한테 잘 보이면 내가 당신 풀어줄게. 당신 보니 죄 없는 게 확실한데 내 말 들으면 풀어줄게.’ 하니까 예수님 말씀이 ‘니가 지금 나한테 풀어 줄 권세가 있다고 우기냐, 누가 지금 사태 파악을 못하는지 모르겠어.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사가 와서 풀어준다. 그런데 니가 지금 나를 잡아 넘긴 것은 니가 악한 역할로 내 일에 참여된 꼴이 됐다. 하나님이 니가 나쁜 짓해서 지옥 가라고 이 나쁜 짓에 니를 집어넣은 거야.’

그렇다면 처음부터 누가 승자입니까? 예수님이 애초부터 승리자였고 처음부터 누가 패배자였습니까?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미 지고 들어간 거예요. 게임 오버, 게임 끝나버렸어요. 우리가 성도가 이 땅에 대구 땅에 대전 땅에 살면서 이 점을 믿어야 됩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는 속에 게임 끝난 거예요. 성도는 어떻게 되든 승자입니다. 성도가 빌어먹든 말아먹든 노숙자든 어떤 경우라도 거지 나사로가 되는 경우라도 어떤 경우라도 그들은 게임 끝난 거예요.

지난 주 ‘거지 나사로’ 했거든요. 거지 나사로 주변 전류 안에 뭐가 칭칭 감겼다 했습니까? 아브라함의 언약, 약속이 감겨 있잖아요. 그러면 나사로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지금부터라도 함께 있고 부자는 백날 돈을 쌓아놓고 살아도 부자 곁에는 부자 자기밖에 없어요.

참, 요즘 모든 교육이 바로 너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교육으로 다 이미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카이스트도 마찬가지고, 모든 교육이 ‘니 일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 남이 안 도와준다. 너 밖에 없다.’ 몰라 아브라함의 언약, 예수님의 은혜가 칭칭 감겨있으면 그건 천만다행이고, 앞으로 잘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니는 끝났다, 어떤 지경에 빠져도 이미 니는 승자,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 돼 버렸어요.

그걸 지난 수요일 날 유리구슬 속에 있는 존재라 했죠. 손톱으로 후벼 파도 그 안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훤히 보면서도 그 세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사정해서 살살 빌어도 못 들어가요.

그래서 말씀이 응했다. ‘말씀을 응했다‘고 돼 있거든요. 그러면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어느 안에 사는 사람입니까? 말씀 안에서 움직였던 사람 이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씀 밖에 있기 때문에 말씀 안의 세계를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이 대전바닥, 대구바닥, 서울바닥으로 그냥 말씀을 말씀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로 전환시켜 버렸습니다. 오늘날 목사들 같아요.

목사가 두 세 사람이 모여도 우리는 말씀 안에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면 되는데 ‘저쪽 교회는 500명인데 우리는 333명입니다. 빨리 따라붙자.’ 이거는 말씀 안의 세계가 아니고 이 대전 바닥 속의 세계 아닙니까? 이건 장사하는 영업세계에요. 기업세계.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 세계가 돼 버리면 두 세 사람이 있어도 이미 그 자체가 게임 오버, 끝나버렸어요. 이미 구원 받았는데 여기 5천명이 있어도 말씀 세계에 못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말씀 세계에 못 들어오고 있으니까 만날 노인들한테 복지를 베풀어서 동네 노인들 다 끌어 모아놓고 교회를 운영한다 말이죠. 필요하면 바자회 열어서 빛과 소금의 폼만 내서 노숙자 점심 주면서 뭔가 착한 일해서 인기 몰이하려고. 어디 이 동네 시의원 나올 일 있나. 정치적으로 국회의원 장악하려고, 배후에서 조정 하려고, 우리 교회는 표가 몇 표인줄 아느냐, 이런 식으로.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니까 못 들어왔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말씀 바닥에서 새삼스럽게 경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말씀 안에서는 이미 경쟁이 끝나버렸는데, 모든 걸 다 이뤘는데, 저쪽에서는 이뤄볼까 싶어서, 어떻게 하면 이 바닥에서 승자되고 내가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크게 될까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들은 이야긴데 대구에 어떤 교회는 헌금 경쟁을 하는데 어떤 아는 사람 친구는 가슴이 아프다고, 이번에 자기가 헌금 1등 되는 줄 알고 헌금을 냈는데 세상에 3등을 해서 뿔다구가 났데요. 그게 뛰는 놈 이예요. 나는 놈은 기분 좋아하고, 그 위에 노는 놈은 기분이 더 좋고.ㅎ 자존심, 그게 새삼스럽게 경쟁에 이겨보겠다는 거예요.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과거에 술 먹고 담배 피우고 하나님 몰랐던 그때 그 시절에 비해서 지금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받았다는 것을 남한테 과시하는 경쟁에 들어간 거예요. 일종의 도박이라. 김 장O이가 기부천사라 하죠. 기부하는 것도 도박입니다. 그거 한번 빠져버리면 못 헤어나요. 한국 기부는 재미없어요. 아프리카 가야 돼요. 김 O자처럼 아프리카 가서 오드리헵번처럼 죽어야 돼요. 이게 한번 착한일 하게 되면 자기 존재감이 달라져요. 지가 지한테 미쳐버려요. 주의해야 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 이예요. 간 떼 주고 신장 떼 주는 것도 그 쾌감이 보통 쾌감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누구의 팬으로 사는 것, 변 진섭, 이 상우, 20년 동안 ‘오빠’ 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 일본에서는 배 용준, 장 근석, K파, 이게 종교 없는 사람들은 종교 대체물로. 일본은 종교가 없거든요. 그저 비는 것밖에 없거든요. 그거 대체물로 현세적인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숭배해서 자기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어떤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여기는 이 근호 목사님 팬 아니에요? 예, 팬은 팬인데 돈이 안 되니까, 으하하하~ 모기들만 와요.ㅎ

그래서 여기 보면 29절에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죽였죠. 죽이니까 이 세상이 고요하게 된 거에요. 말씀 밖에서는 다 고요해요. 무덤이고 공동묘지고, 에스겔에 나오는 뼈만 있는 골짜기고, 조용한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려줬잖아요. 이게 바로 말씀에 응했던 말씀 세계의 핵심이죠.

그렇다면 묻습니다. 말씀 세계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십자가!! 왜냐 하면 말씀 세계와 이 대전 바닥의 접촉점은 오직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 나와 함께 있을 경우에만 말씀 세계 속에 함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은 말씀에 응해서 구원된 사람의 한 사람에 포함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내 소원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말씀에 응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말씀에 응한 것이고, 그뿐 아니고 예수 믿어야 될 사람이 믿게 되는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정된 채로 믿게 되지,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가 아무리 자진해서 손들고 나가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게 바로 침례교 쪽에서 이야기하는 손들고 나와도 안 되고 미국의 남 침례하고 다른 거예요.

이 십자가까지는 주님이 하시고 나머지 손들고 나오는 것은 자유의지라고 이야기 하는데 제 말은 그건 잘못이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가 증거 한 게 뭐냐 하면 사도는 이 말씀 바깥에 있으면서 ‘어떻게 구원해 봅시다. 이러면 잘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걸 도모하는 게 아니고 사도바울 자체가 말씀 속에 있으면서 ‘혹시 이 중에 말씀 속에 있는 사람 계세요?’ 하고 손들라고 그 이야기하기 위한 멘트를 날리는 거예요. 그게 교회 설교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노인들을 꼬이는 설교가 아니고 ‘ 이 가운데 혹시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 있습니까?’ 고거 확인 차 말씀을 증거 해야 돼요.

새삼스럽게 게임을, 누가 목회 잘하고 누가 사람들 끌어 모으나, 게임을 사도바울은 벌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자들과 레벨이 달라요. 36절 봅시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라고 돼 있죠? 그러면 다윗은 무엇이 대표자입니까? 모든 썩어짐의 대표자들이죠? 그러면 ‘사람은 죽으면 썩으면 그만이다.’라고 했을 때 ‘죽어도 썩어도 다시 부활된다.’ 가 초점이 아니고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가 설교 초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죽은데서 삽니다.’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내가 예수 믿으니까 난 살았다. 자기가 죽었다가 자기가 산 것이 초점이 아니고, 그게 설교의 초점이 아니고 내가 살았다가 핵심이 아니라 누가 살려주느냐가 핵심이 되는 거예요. 질문: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임하는 거하고 성령이 임하는 거하고 같은 거죠? 예, 같은 거죠. 왜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져야 성령이 오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이 왔다는 말은 일체 인간들은 자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도 없고 지가 손들고 나와서 쉽게 구원받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뭐라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절대로 내 열심과 노력으로 몸부림쳐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란 고백을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지가 느낀 대로 그걸 외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건 안면 바친다. 아는 사람이다. 저 사람 권세 있다. 내가 저 사람 아니면 저 사람이 쫓아낸다. 그런 말씀 밖의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청종할 이유가 없어요.

다니엘 세 친구 보세요. 내가 저라면 풀무 불 들어가는 것은 당신들 자유지만 그렇게 내가 하나님이 날 살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 지금 그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고 어쨌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그게 일차적으로 내가 증거 해야 될 문제입니다. 주께서 살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절하지 않겠습니다. 하니까 집어넣었죠. ‘그래, 알았어, 그럼 그게 니 현실이라면 본대를 보여줄게,’ 그래서 불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하고 같이 춤추고 있었죠.

그러니 성경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우리가 상식 밖의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잖아요. 상식 밖의 이야기를 언급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왜 자꾸 상식 밖의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물 위를 걸었다든지, 왜 하느냐 하면 그래야 이쪽의 상식 속에 사는 것이 상식이 아니고 그 자체가 죄라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곧 우리보고 ‘니는 죄인이야.’라고 집중해서 다가오게 우리를 만들어 몰아가는 그 험악한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설교를 여기까지 해서 한번 정리해 보면 간단한 거죠. 인간이 있었다. 여기에 예수님 오셨다. 예수님 오심으로써 인간과 비교해 봤다. 그래서 인간은 뭐가 됐다? 의인이 아니요. 전부 다 죄인이고 그 죄인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들 몸에 의도적으로 죽임을 당하셔서 말씀이 응했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는데 이 자체가 말씀 세계의 완성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 세계를 완성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완성했기 때문에 우린 여기서 손쓸 수는 없어요.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매일매일 삶은 막 살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우리한테 해당되는 겁니다. 어떻게 손쓸 수가 없잖아요. 성령 받았으면 성령 받은 대로 막 사시면 돼요. 그런데 ‘성령 받은 대로 막 산다‘ 가 이해 안 되는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면 지가 절제해서 막 사는 세계에서 막 안사는 세계로 접근을 시도하고 이걸 도약을 시도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성령 받아 막 산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간추려 이야기하면 뭘 못 받았다? 성령을 못 받은 게 돼요. 성령을 못 받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막 산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막 산다는 이야기를 안 해버리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성령 받은 척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질문: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되는 거죠? 그렇죠. 그 이야기죠. 자유케 하죠. 우리가 사는 것은 막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늘 자유롭게 만들죠. ‘너는 자유야, 자유야,’라는 소리가 늘 들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항상 남 이야기도 그렇고 우리 이야기도 마찬가진데 우리가 항상 성경 말씀 들을 때는 그러지만 돌아서면 상식의 세계로 넘어와 버립니다.

상식의 세계는 예수님이 빠져있는 세계거든요. 예수님이 빠져있으면 예수님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지가 되고 싶은 것, 지가 안 가졌는데 이미 다 가진 자, 지가 되고 싶은 그 자리를 먼저 앞서서 그 자리를 접수 하고 있는 사람, 내가 희망 사항을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와서 여기서 ‘나는 뭐고?’ 자꾸 계산하게 되죠. 이게 상식의 세계. 우리는 이렇게 수시로 돌아설 수밖에 없죠. 상식의 세계. 상식이 세계는 예수님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 멀리 하늘 저편에 있죠. 하늘 저편에 ‘주님 주일날 봅시다.’ 이렇게 되죠.ㅎ

사단은 주님이 저 멀리 하나의 대상으로 훌쳐 버리죠. ‘니 일은 니가 알아서 해야 된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니 아무도 안 도와준다.’ 이 말은 뭐냐, 열심히 하면 된다, 안 된다. 문제가 아니고 뭔 뜻이냐 하면 ‘니 인생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각인시키는 겁니다. 늘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내가 중요해. 예수님보다 내가 소중해.’ 그러면서도 교회 와서는 노래 부르기는 뭐가 부릅니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런 거짓말!!!ㅎ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냥 밑바닥으로 가도록 설교를 해야 돼요. 그냥 중간에 환상 속에 예수님을 만나 버리면 다시 주님께 오지 말고 ‘니 자리 가 있어.’ 니 자리 가서 나는 줄 창 나만 생각하는 그 자리 가 있으면 성령께서 오시게 돼 있어요. 성도에게만.

성경 말씀은 사도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오라하지 않고 ‘니 자리에, 멸망 받을 자리, 저주의 자리’에 우리를 보내는 겁니다. ‘자꾸 니 자리 떠나지 마, 니 자리 붕 떠있는 자리가 니 자리가 아니고 니밖에 모르는 자리가 니 자리야.’ 그리고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니 마음껏 상식대로 살고 그냥 니가 진짜 막 살고 ‘나는 나밖에 없어. 나만 최고야.’ 그걸 본대를 보이란 말 이예요. 그 자리에 갔을 때 우리를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 때 그게 말씀에 응한 말씀의 완성 상태예요. 아! 정말 내가 말씀에 비춰봐서 내가 내놓을 게 없구나,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 느껴지게 하는 능력이 주님이 같이 구원돼 있는 게임 오버된 완료된 주님과 함께 있는 구원된 상태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항상 붕붕 뜨죠. 갑자기 어깨에 어릴 때 풍선 날리면서 자기가 붕붕 뜨죠.

그냥 시장바닥에서 쪼그려 앉아서 떡 볶기 먹을 때는 자기가 지 자린 줄 알지만 갑자기 파티 참석해서 드레스 입고 가면 갑자기 자기가 고관귀족이 된 것처럼 붕붕 뜬다니까요. 시장바닥에 전포에 앉아서 떡 볶기 먹을 때가 차라리 낫지, 붕~ 떠서, 그래서 성경에서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그게 니 자리다. 그래서 초상집에 갈 때는 까만 양복을 입고 갈 게 아니고 평상복보다 더 집에서 입던 파자마 입고 가든지, 진짜 낮게 가는 게 옳은데, 사회 관념상 안 되죠.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도 있으니까. 주관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은 썩어졌는데, 다윗이 뭘 대표해요? ‘모든 사람은 썩었다’를 대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뭐냐, ‘제발 다윗을 믿어라’ 이 말 이예요. 재밌는 사실은 ‘다윗이 썩었잖아.’ 썩은 다윗을 믿으라 이 말이죠. 너희 유대인들은 그 당시 ‘다윗은 위대하다. 다윗 같은 왕이 올 것이다.’ 자꾸 다윗을 높였는데 다윗을 완전히 풍선 바람을 다 빼버렸어요. 썩어빠진, 썩어문드러진 다윗, 문둥병 같은 다윗, 그 다윗을 믿자는 거예요. 그렇게 훌륭해도 썩었잖아. 봐라, 썩었잖아. 니 썩을 놈 믿었잖아. 썩은 주 기철 믿고 썩은 손 양원 믿고, 썩은 죽은 고김 기백 장로 믿고, 썩었잖아. 돈 헌금 내고 죽어 썩어버렸는데요 뭐. 김 기백이라는 이름은 그냥 내가 지어낸 거예요.

39절 봅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그러니까 아예 사도바울이 설교하면서 전제가 뭐입니까? 모세 율법에서 어떤 너희가 존경하는 조상도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못 받았다? 못 받았다. 심지어 다윗까지도 썩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45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그러면 영생 얻을 자냐. 아니냐. 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정을 내리셨습니까? 내가 성령 받은 사도를 보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영생 받지 못할 자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대전바닥에서 대구바닥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성도님들은 딴 걱정 말고 이, 십자가 복음 전하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라 해서 몸 바친다 해서 모든 걸 다 끄집어내서 이러는 게 아니고 집도 치우고 기도원에 기도하는 게 아니고 평소에 막 사시면서 성령 안에서 막 사시면서 십자가 이야기하면 여러분 주위에서 영생 받아야 될 사람과 기어이 받지 말아야 될 사람이 구분됩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10) 11-11-12 23:52 
대전111027b-마10장5-20(잃어버린 양)30강-이 근호 목사

 마10:5-20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10장 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요 대목에서 소위 선교신학 또는 선교를 부르짖는 사람은 요 대목에서 난처한 대목이에요.

선교라 하는 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뭐라 하시느냐 하면, 이방인에게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 에게도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니까 야~ 이거 예수님께서는 전에 얘기하고, 나중에 얘기하고 예수님 스스로 모순되게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게 선교하는 입장에서는 난처해하고 굉장히 힘들어해요.

 그래서 선교집회에서 어떤 신학생이 요 대목을 질문하니까 그 교수가 답변을 못했어요. 자기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이방인은 가지 말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설마 그것도 모르겠다하는 것은 다른 것도 다 모르겠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관심사가 교회실적, 선교실적에 몰두하다 보니까 목적이다 보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관심이 없어요.

쉽게 말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일하는가? 관심 두다 보니까 지금 인간들 일 말고 예수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에는 완전히 관심 밖에서 노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활동하면서 그 수고비를 챙기려는 심보가 들어있는 겁니다. 목사들이. 교수들이. 이런 것들이 들어와 버리면 관심사가 내 하는 일이 정당하니까 좀 도와줘! 여기에 호소하고 있고 대중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지 나는 죽어도 마땅해! 나는 죄인이야! 이건 관심이 없어요.

 나는 한때 죄인이었고, 한때 죽을 죄인이었지만 예수님 믿고 잘됐으니까 날 좀 도와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죄인 만드는 일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를 우리의 본래의 자리, 우리가 죽을 죄인의 자리로 몰아넣는 세우는 것이 지금도 주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예요. 왜? 우리가 살아나면 주의 일이 훼방 받아요. 주의 일이 나의 열심과 나의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주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 돼 버려요.

 나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데 부인하고 싶지가 않아요. 인간의 본성이 그래요. 인간은 남은 죽어도 저는 안 죽고 싶은 게 인간이거든요. 남은 망해도 저는 안 망하고 싶은 거예요. 아파트 무너지는데 요 동은 남아보세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다고요. 남은 죽더라도. 무려 1000Km 300몇 키로 달려와서 약혼자가 지진에 묻혀있는 것을 약혼자가 달려와서  살려줬다는 거예요. 남자가. 달려올 때 여자를 다 살리러 온 것이 아니고 지 약혼자만 살리기 위해서 온 거예요. 이게 인간입니다.

교회 올 때 저만 살겠다고 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 달려온 인간에게 주께서는 십자가로 박치기해 버리고, 절벽에 십자가로 박치기해서 콰당! 십자가가 박아버리면 완전히 깨져 버리죠. 그럼 깨져놓고 건집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말씀의 세계와 바깥의 세계 대전 바닥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로만 배치되어 있어요. 지금 만약 대전 시내에 카이스트는 뭐로 배치되어 있습니까? 앞에 정문에 수위가 지키고 있지요. 수위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냥 구경하러 왔습니다. 하면 안 넣어 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세계와 대전바닥의 관계는 십자가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모르게 되면 말씀세계에 못 들어갑니다. 같은 말로 주님께서 말씀세계에 넣어 줄 때는 반드시  십자가정신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정신은 뭐냐 하면,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십자가라 하는 것은 자기 죽음이죠.  죽음을 기정사실화 시키고, 자기가 부인되어 지고 자기가 죽었으니까 자기 힘으로 못 들어가잖아요. 그럼 누가 죽여요? 나를 죽이고 나를 부인시키는 그 분의 손에 의해서 말씀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간단하지요.

 구원은 우리가 들어가려고 하는 우리를 저지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는 식으로만 구원하시는데 우리를 데려가시는 그 능력이 우리를 그냥 멀쩡하게 데려 가는 게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게 만들어서 주님의 십자가와 더불어서 우리가 죽는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예요. 주님과 함께 죽어요. 주님께서 함께 십자가가 옆에 붙어서 그래서 십자가 공로로 말씀세계 천국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갈2장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바로 말씀세계와 대전 바닥과의 협조적입니다. 그러니 대전 바닥의 상식으로 사는 사람이 말씀세계가 보이겠습니까? 안보이죠. 왜냐하면 이 세계는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절대로 부정해서는 안 되고 항상 긍정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세계에 꾸려나가야 된다는 것을 이걸 진리로 알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런 세계가 아무리 문을 똑똑 두드려도 문이 열릴 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세계에서 제자들을 여기다 집어넣으려 하시는 거예요. 말씀이 주어지는데 이 모든 마10장도 결국은 십자가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뭐로 몰아넣습니까? 말씀 말씀이 모여서 뭐로 몰아넣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10장의 말씀이지요. 내가 온 것은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라는 그 말씀이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 죽게 만드는 동기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십자가안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이것을 이해 할 까요? 못 할까요? 이해 못하고 제자들도 이해 못 하죠. 다만 이 상태에서는 이해 못해도 괜찮아요.  왜냐 하면 예수님과  따라 다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르르 따라 다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가 거기를 가면서 십자가 인지를 모르죠. 모르는데 나중에 돌아보면 말씀의 완성의 시기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잃어버린 양은 어디 있느냐? 잃어버린 양은 없어요. 잃어버린 양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지금 이 말씀하고 있는 제자들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인데 잃어버린 양이 없어요. 찾았는데 아무도 없어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게 아니고 잃어버린 양 되게 해서 찾아요. 잃어버린 양 되게 해서 찾는다고요. 과부, 십팔년 된 꼬불어진 귀신들린 여자, 사마리아인중 소경된 사람,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그 사람들은 잃어버린 양이 아닌데 잃어버린 양되게 하셔서 구원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양으로서 구원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지요.  예수님 본인 안에 잃어버린 양이 포함돼 있어요. 예수님 본인이 키 작은 삭개오 집에 가 버리면  삭개오 집에 무엇이 임합니까? 너희 집에 구원이 임한 거예요. 잃어버린 양이 되게 하시는 능력이 그 안에 임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미 임했거든요. 우리는 기뻐해야 돼요. 왜 잃어버린 양이 나니까.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린 양으로 규정받게 된 것이 바로 구원이 임한거니까. 왜 주님께서는 이방인이 아니고 오직 잃어버린 양만 찾으시니까 잃어버린 양이 해당되는 자가 되도록 그렇게 조성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방인은 뭐냐? 이방인은 절대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스라엘만 구원해요. 이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문제는 육적인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결국은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어요. 자기는 아브라함 자손이다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8장에 보면 나오죠.

어떤 로마의 중대장이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세상에 이방인 가운데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 처음 봤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기들이 아브라함 자손들이고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자기들 안에 아브라함 자손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러면 우리는 죽어도 혈통 상 천국가게 되어 있습니다. 라는 것을 유포시켰던 거예요.

유포시키면  그게 무슨 유포냐 하면, 개념 유포지요. 뉘앙스가 유포되는 거예요. 그 시대 전체에 그러면 개념유포니까 개념 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고, 아브라함 자손도 개념으로 포함되어 있겠죠. 이미 그 시대에 예수님 당시에 아브라함 자손은 혈통적 아브라함 자손만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굳혀져 있고 천국은 그들 약속대로 그들만 거룩하게 되어서 구원된다는 것이 이미 유포된 상태에요.

그런 구원개념이 유포된 것을 주님께서 거부해 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틀리다. 그것은 마귀가 진행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 누구고?”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우리 애비는 아브라함입니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마태복음8장에서.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죄다! 너희가 정말 아브라함 자손이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나를 믿지 않는 것으로 봐서 너희 애비는 악마가 되어서 나를 못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의 한 마디는 우리 인간들이 유포되어 있는 개념에서 개념에 들어 있는 말은 절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그 말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다 그렇게 해요. 요한복음6장에서 ‘생명의 떡‘할 때 그들은 떡! 하니까 떡은 이렇게 생긴 물체로서 손가락으로 쥐면 먹을 수 있는 떡이거든요.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떡이 왔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그 떡을 내가 너희에게 줄게”라고 했다고요. 분명히 떡이란 유포된 개념을 사용하는데  떡을 달라 하니까 줄게. 해 놓고 내 살과 내 떡을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하니까 사람들이 다 가버렸어요.

왜 우리가 알고 있는 유포된 개념을 사용 안 하느냐 말 이예요. 주님께서 “사용했잖아. 떡 준다 했잖아“ 그들은 ”그 떡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너희들이 죄 있다 는 것을 어떤 식으로 까발릴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너희들은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해 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아무리 신학을 해도 모르게 돼 있어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도저히 성경해석이 초반부터 전혀 안 되게 돼 있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말은 뭔 뜻 입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이 말은 그전에 자기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거든요. 떡을 먹듯이 영생도 먹어서 영생 얻는 방식을 내 놔라 이말 이거든요. 그럼 주님께서 줄게. 그런 방식으로 줄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하니까 어떻게 우리가 사람의 살과 피를 뜯어 먹습니까? 드라큘라도 아니고.

너희들이 먹는 방식으로 내 놓으라며. 그러니까 그 용어를 사용한 거예요. 같은 인간인데 말이 안 통해요. 의도적으로 해야 그 쪽에서 자기 죄를 드러 내면서 자기를 죽일 수 있잖아요. 예수님을 살해할 수 있잖아요.  구원받은 백성보고 “구원 받으셨어요?“ 하는 것은 차라리 죽기를 자처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목사님, 구원 받으세요?“ 이것은 교회에서 쫒겨 날려고 환장한 거예요. 오늘 새 교회 등록했습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이 교회 와서 저는 목사님 구원시키고, 장로님 구원시키려 왔습니다. 쫒겨 납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해도.

세상사는 상식이 이렇습니다. 여자 계모임이 놀러갈 때 12명 중에서 10명이 동의하면 싫더라도 그 쪽 방향으로 놀러가야 됩니다.  지가 뭔데? 내 뜻대로 하겠다고  빠지면  그 계모임에서 못 삽니다. 이 세상은 다수결입니다. 우리는 그게 상식입니다. 우리는 집안에 모일때도 마찬가지예요. 결정할 때 다수결이지. 그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식으로서는 이해 안 되는 쪽으로 예수님이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내 말 듣고 구원받을 인간 아무도 없다 이말 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건져 줄 때 구원받지 나는 주님 말씀 알아들었어! 이해 잘 했어!  이해해서 구원 받을 인간 없어요. 항상 구원 받는 사람은 모든 은혜와 공로를 예수님께 돌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것이 십년 믿어도 만찬가지고, 20년 복음 안다 할지라도 그 다음 되면 역시 나는 내 잘난 위주로 새롭게 만들어 내요. 우리는 이렇게 죄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일 잘난 죄인으로 살라고 막 살라고 만들어 내요. 만들어 낸 그것을 또 주께서 오늘도 관리하셔서 주님덕분으로 우리가 용서받아서 삽니다. 라고 고백이 또 나오게 만듭니다.

제자들은 잃어버린 양을 할 때 잃어버린 양이란 것은 결국은 이방인 고을도 안 가고, 사마리아 고을도 안 가고, 이스라엘 고을도 안 가고, 오직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가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만약에 우리 상식 같으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니까 일단 이스라엘 내부에 잃어버린 양이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복음을 전파해서 야~ 이스라엘의 메시야구나! 이렇게 환영 받는 쪽으로 선교 일을 하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죠.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15절 보세요.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분명히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선교를 한다 해 놓고 막상 결과가 뭡니까? 이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땅이라 하는 이 땅이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악하고 악한 세상이었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선교를 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한국에서 아프가니스탄 갈 때 이 아프가니스탄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더럽고 추접한 세계입니다. 라는 말을 해야 그게 선교다 이말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병원 세워주고, 의료봉사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돼요. 학교 세워 주지 말고 이 남부수단은 지옥가도 쌉니다. 그 이야기하고 거기서 죽어야 돼요. 왜 병원을 세워줘 가지고 암에 걸려 지가 죽고 “울지마라 톤즈”  약간 봤어요.  보면서 아이고~ 아이고~ 상식으로 사는 인간아! 그게 육적이지 그게 영적이야 그게.

지금 복음 전하는 사람은요 본인이 복음 전한다 하면 전부다 가짜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면 가짜예요. 우리는 복음 전하면서 우리 복음 전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 때 그게 복음 전하는 거예요.

전도한 우리가 큰집에 복음 전도하려고 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 복음을 끄집어내면서 남는 게 결국 복음으로 시작해서 성질내는 것으로 부화 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잖아요. 이~씨 내 말도 안 듣고, 에이~ 지옥 가거라! 시합으로 끝나요. ㅎㅎ 그게 선교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선교를 해도 모든 공로와 영광은 우리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주인이 나를 사용했을 뿐인 거예요.

재미있는 현상은 실컷 복음 전하니까  삐져가지고 안 먹어 주니까 화났거든요. 며칠 후에 그 이야기 다시 해 보라하고  그럼 선교 누가 했습니까? 내가 했지요. 예수님이 한 게 아니예요. 성질이나 벅벅 냈지. 니 같은 것은 복음도 아깝다. 해서 소금뿌리고.  소금 뿌리지 말고 재를 뿌려야 돼요.

8절에 보면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은 제자들보고 하는 소리죠. 제자들과 누구와 동질화 됩니까?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자와 동질화 되어야 될 때 비로소 복음이 전파가 됩니다.

동질화 될 때 제자들이 죄를 사해 줄 때 죄사함이 돼요. 제자들이 용서 안하면 하늘나라에서도 용서를 안 해줘요. 조건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동질화될 때 그렇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질화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동질화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죄인으로 달리잖아요. 죄인과 제자들이 동질화 되지요. 그럴 경우에만 제자들이 하는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제자들로 그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 본인이 구원은 거저 주는 것이 구원이라 하는 것을 너희들의 삶을 통해서 너희들이 보여 줄 때 너와 나는 하나의 동질화 될 수 있다 이말 입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거저주면 구원받는다가 아니고 보내신 예수님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댓가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거저 주는 거예요. 그저 자기 생명과 자기의 몸과 살을 거저 준거 예요. 믿으면 구원해 줄게. 가 아니고 거저 준거예요. 거저 받았다는 것이 믿음 이예요.

믿으면 주고 안 믿으면 안 주지. 이게 아니고 거저 주니까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주여, 거저 받았습니다. 이게 믿음이라니까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겨요. 주여, 이 산을 옮긴 것도 거저 받았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것도 저는 어림도 없고 제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항상 뭘 해도 주께서 하셨습니다. 가 준비된 사람은 뭘 해도 주의 일이 돼요.

그런데 인간은 뭘 해도 예수님하고 비교 하는 게 아니고 남하고 비교해요.  저 사람은 못 했는데 나는 했고, 저 사람은 모르는데 난 알고 자꾸 이리 되니까 주의 일을 해방하는 사람이 돼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 게 아니고 이렇게 줬으니까 댓가 내놔라 이거는 목사에게만 꼭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해당되고요.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이 거저 받은 거예요. 거저 받았는데 언제 거저 받은 걸로 알고 내가 용쓰고, 애쓰고, 때려 가면서 교육시켰다는 것이 언제 생각이 나냐 하면,  예수님과 우리가 선교차원에서 떠러졌을 때, 주님이 생각이 안 날 때, 독자적으로 있을 때, “아이고~ 저 놈의 자식을 내가 저거를 키운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자, 열날 때 내가 업고 새벽2시에 병원에 쫒아 다닐 때, 니 아니? 모르지? 니 공부하고 애 먹일때 내 속상해서  애먹인거  모르지?”  그럴 때는 뭐냐 하면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느냐 하면 니가 지금 자식보고 부모노릇 했다고 하는 그것조차도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내가 니한테 그냥 준 인생인데 니 모르지?” 하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 돼요.


(성도중에서: 내거는 아무것도 없다 결국은 내 소유는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이죠.)
그렇죠. 그게 믿음인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시킨 거예요. 애지중지하고 OOO를 보문산에 갔다 받쳐 할 때 이게 내 작품이고 내가 공들였고 내가 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렇게 받쳐라 하는 아브라함 니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될 때 그게 내가 너를 공들여서 아브라함 되게 하신 거예요.

그걸 우리는 내 소유가 있는 이상 그걸 잊어버린다니까요. 내 소유가 있으면 내 자체가 주님의 소유란 사실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어라 이 말은 니가 다른 사람이 못 하는 제자역할을 귀신 쫒아내고, 병 고치는 역할이 네 재주가 아니고 그것도 니가 거저 받아서 하는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 이말 이죠.

 그런 마음으로 설교하고, 그런 마음으로 복음 전하란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하죠. 내가 받은 상은 복음을 전해서 따로 받은 상이 아니고 복음 전하는 이 자체가 남이 갈 수 없는 상을 받았기 때문에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체가 나에게 상이 된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니 왠 떡이야! 그런 마음이 사도바울이 담고 있던 이 생명의 면류관 생명의 삶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성도도 마찬가지지요. 성도가 하나님이 거저 준 작품이고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가 사회문제 가지고 고소하지 말라 세상에서 억울한 일 당했다고 법정에 서지 말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저 여자를 소유하려고 하고, 저 남자를 소유하려고 한다면 결혼이 거저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업적이 돼 버려요. 이렇게 예쁜 여자와 결혼한 것은 내가 보통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예쁜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남자들은 가끔해요. 가끔한다고요.  우리는 반대로 저렇게 못생긴 여자하고 결혼한 것은 내 일생에 큰 실패로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생각할 수도 있지요. 웃을 일이 아니예요. 여자들은.....그런데 다들 거저 받은 걸로 여길 때 부부의 갈등은 사라집니다. 사라지고 싶어요. 갈등이 ㅎㅎ 사라집니다. 라는 말은 못하겠고 그렇게 되고 싶어요. ㅎㅎ

그래서 뭐냐 하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리고 너희 지갑에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지 말고 왜냐 하면 내 것을 가저버리면 거저 주어라가 희석되거든요.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은.

그런데 여기 예비 문제를 내야 되겠어요. 기존 교회의 지적 때문에 어떤 목사가 교인 오천명하고 월급도 많이 받고 퇴직금도 수억 받는데 그걸 다 교회에 희사하고 그 퇴직금도 안 받고 그냥 나왔다. 훌륭한 목사입니까? 아니죠. 거기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지요. 그게 나는 놈 이예요.  교인들은 거기에 감동 먹거든요. 차라리 그 목사는 밟혀서 나오는 게 좋아요. 그 목사 그렇게 훌륭한 줄 알았더니 그렇게 지저분한 놈 못 봤다. 그게 차라리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의 합당한 모습입니다.

그게 두 번 다시 그런 목사는 목사도 아니다. 두 번 다시 목사 이름 안 부를 때  그런 목사는 훌륭한 목사입니다. 그게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원래 정 뗄 때 못 되게 굴잖아요. 사람이 거저 받아 거저 있어 버리면 그 교회는 예수님 교회가 아니고 그 안목의 훌륭한 목사 교회 돼 버려요. 기념관 세울걸. 한경진 목사 기념관처럼. 
(성도 중에서: 꾸미잖아요. 기념할 만한 것을) 그렇죠. 그게 바로 소유라 하는 겁니다. 법정이라 하는 무소유의 소유입니다. 실체 없는 소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 무소유가 더 무서운 놈이죠. 더 한 단계 노는 놈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12제자가 마지막 예수님을 어떻게 하지요? 배반하지요. 부인하지요. 벌거벗자 도망치지요. 요한 같은 경우에. 다 지 집으로 다 가지요.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철저히 멋있습니까? “봐라, 원래 밑바탕은 그런 놈이야!” 그리고 마지막 까지도 사랑해줘. 베드로가 요한에게 뭐라 합니까? 저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꼭 요한하고 비교해 가지고. 쟤는 주님오실 때 살아있습니까? 또 이리 한다고요. 너는 십자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하니까 쟤는요? 끝까지 인간입니다. 메시야가 아니예요. 아무리 훌륭해도 메시야가 아닙니다.

여기서 11절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합당한 자를 찾아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이지요.  잃어버린 양의 매치라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뭘 전해야 됩니까? 오직 복음을 전해야 돼요. 복음을 전해야 되고, 제자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다 버린 우리 자신에서 다 버린 모습을 발견할 때 그 때 매치가 되는 거예요.

14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이 때는 모든 교회에서 복음전하는 사람은 받지를 않아요. 그러니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가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것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좀 어렵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대략 BC2000년경이라,  그러면 예수님 당시가 보통 AD30년 그러면 세월이 몇 년입니까? 2000년 지났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로 보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의 시간대 에서는 소돔과 고모라는 옛날 사건이지만, 그 옛날 사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현재 시대에 그대로 퍼붓는 것이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나오지요.  요한계시록 한 번 볼까요.

계11:8절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죠. 예수님은 항상 묵시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무엇으로 번역해서 봤습니까?  시간적으로 번역해서 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을 이해 못하는 거죠.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같이 있는데 그들은 엘리야 모세는 모르는 겁니다. 자기들 살아있는 이웃만 아는 거예요. 요한은요? 베드로가 어떻고, 어떻고, 어떻고, 자기들끼리 보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우리가 말씀을 잊어버리고 상식으로 살면 다시 응축이 됩니다. 존재의 응축이 돼 버리면 뭐가 응축되는가 하면, 시간과 공간이 응축이 돼 버려요. 다시 말하면 기억의 응축이 됩니다. 어느 바닷가에 갔었다. 옛날에 내가 제일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와 같이 왔던 그 바닷가. 갑자기 바닷가의 바위를 보니까 응축이 된 거예요. 그래서 나보고 고시에 합격하면 사귈게 했는데 고시에 떨어지고 난 다음에 그 여인과 헤어졌다 안다성의 이별의 노래가  나오고 눈물을 죽 흘리고  그걸 응축이라 해요. 응축인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뒤에서 마누라가 집에 안가나 빨리! 응축이 깨지면서 현실로 돌아와요.

 비오는 날 창가에 서서 안에서 옛날 7080 음악 켜면  특히 흐린 날, 비오는 날 이면 묵시적 시간으로 바뀌면서 과거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여고시절부터 돌아간다고요. 교복의 하얀 칼라 입고, 일본식 벨트 메고, 낙엽 주워 모아서 책은 안보고 책갈피에 넣어가지고 시를 써가지고 물감 입혀가지고 옛날 편지 가지고 50대는 알아요. 애들 많이 했어요. ㅎㅎ 일기장 쓰고. 고물상에 가 보면 이사 하면서 다 갔다 버렸어요.

 그게 인간은 존재응축이 뭐냐? 자기의 존재의 응축이 되어 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소돔인지 고모라인지 구분이 안 되고 천국이 돼 버려요. 결국 교회는 천국은 자기 세계가기 위해서 자기 응축된 자기 과거를 보상받기 위한  자기만의 세계지 예수님 계시는 근거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과 안 해도 꿈만 꾸면 갈 수 있는 이상향 그걸 사람들이 천국이라 여기고 교회에 오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행함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행함이라 하는 것은 행할 때마다 죄입니다.  나는 20살 때 교회에서 행했던 것 응축이 되지요. 25살 때 행한 것 30살 크리스마스 때 봉사했던 것 기억들을 하나도 노치지 않고 그걸 수집해서 앨범처럼 해 놓고, 앨범 들고 통과하려는 천국!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데 우리는 잘 난 것 만 누적이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행함을 찾고 행함을 따지고, 행함을 계산하고, 행함을 들추기면서 어떤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성령 받은 행함이다 이런 걸 자꾸 수집하고 모아놓는 거예요.  자기가 주인공, 자기 존재의 응축에서 나온 습관적 발상된 종교. 종교예요. 이건 믿음도 아니예요.

그래서 기존에서 주장해온 성화론을 좀 더 강조 했다는 것이 지 맘 이예요. 지가 지한테 도치되어 있는 겁니다. 아직도 여고시절 이예요. 아직도 초보시절이고, 그 세계 안에서. 유아적이고 정신적으로 퇴행이라 해요. 거꾸로 가요. 지금 바로 가면 우리는 시체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장의 시체고, 우리는 죽어도 친척들 와 가지고 부조금 받고 놀러가고 산에다  묻고 가야 될 관속의 모습이 우리 모습인데 우리는 아담하게 치장을 하는 거예요. 예쁘게.

지금 나이 50되면 화장발도 안 받는데. 그저 이 땅에 일찍 자는 게 최고예요. ㅎㅎ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뱃살 나오는 것도 40대나 하는 얘기지 50대는 뱃살이고 뭐고 신경도 안 써요. ㅎㅎ 지금 웃을 때가 좋지 70 돼 가지고 78, 79 저는 80 이래 앉아 가지고 성경 공부 이래하고, 야는 참석도 안하고 벌써 국내 시사대 가 있고.

 십자가가 나오면 이미 말씀이 응한 거지요. 그렇게 우리밖에 모르는 그 자체가 이미 말씀대로 너는 너 밖에 모르는 죄인이어야 해! 하는 증거물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16절 해 봅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그렇다면 세상이 이리라면 우리는 양이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서로 상대가 있지요. 이리와 양은 서로 하나는 물어뜯어야 되고, 하나는 물려야 되고, 양이 곱게 자란 양, 홀로 독거하는 양 이런 양은 필요 없어요. 반드시 이리를 이리되게 만드는 경우에만 너희들을 보낸다 말이죠. 너희들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고, 제자로 보내는 게 아니고 양이 되어라 보내는 거예요. 왜 이리 만나라고. 계획적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공회가 뭐냐 하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죠. 결국은 다수결이죠. 미가야 선지자가 몇 대 일로 붙었습니까? 400대 1이예요. 40대 1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예’할 때 혼자 ‘아니요’ 했어요.

이건 아까 계모임 이야기 했잖아요. 상식에 의하면 이러면 안 돼요. 이러면 사회성이 떨어져 안 돼요. 이런 인간은 사회생활 못 합니다. 어디가도 사람대우 못 받아요. 지금 미가야 선지자가 이 일 말고 딴 일 같으면 이렇게 ‘아니요’를 계속 했을까요? 이번에 모이는데 감주할까요? 아니면 식해 할까요? 그것 때문에 400대1로 싸운 게 아니잖아요. 그것 때문에 싸우면 사회생활에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삼성이 우승할까? SK가 우승할까? 그것은 문제될게 아니예요. 박지성이 몇 골 넣고 이거는 미가야하고 비교하지 맙시다. 그거는 천상회의가 아니고 지상회의에서나 하는 것은 우리는 거기서 양보하고, 양보하고 양보해야 돼요. 왜 거저 받았으니 그냥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리 되어야 돼요.  그런데 미가야가 ‘아니요’ 한 것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 회의를 봤거든요.

하나님 계시고 천사들 앞에서 주재하는 회의를 참석했다니까요. 내용이 뭔 줄 알아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거짓말 하는 영을 1번 받아먹어, 2번 받아 쳐 먹어, 3번 받아먹어...400명 몽땅 거짓 영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받은 본인들은 거짓 영을 받은 줄을 몰라요.

그래서 시드기야 왕이 화가 나 가지고 니만 목사라고 귀싸대기 얻어맞아 이가 나가고 기부스하고  그거를 사진 찍어 놔 보세요.  역시 사회에서 적응 못한 인간 어디가도 못 산다 나오겠죠. 그런데 미가야는 ‘아니요’ ‘예’를 지가 지 맘대로 못 해요. 왜 지도 거저 받은 존재니까. 천상회의를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거든요. 그냥 보여 주니까 볼 뿐인데. 이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이게 성령 받은 사람 특징 아닙니까?

성령 받으려고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 알려고 신학박사 한 적 있습니까?  어느 날 십자가를 알아버린 거예요. 끝났네. 끝났어. 어떤 행함도 구원받지 못하고 십자가 피로 끝~~ 다 이루었다! 어떤 죄도 용서받는다! 끝나버린 겁니다. 어떤 예배하는 것도 정해질 필요 없어요. 떠난 이야기예요. 교회목사, 장로, 집사 아무 소용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끝났어요. 예수님의 피로 도가니 10배라도 구원받습니다.

(질문:16절에서 보면, 뱀 같은 지혜로운 양이 돼라  비둘기 같이 순결한 양이 돼라. 는 어떤 의미인지요?) 상대가 있지요. 저쪽이 이리들이 지혜로워요. 그리고 이리들이 순결을 내세웁니다. 양과 이리는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정했잖아요. 이게 한데 섞여 버리면 이리를 이리인줄 모르고 니와 내가 똑같이 순결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순결과 격이 다른 지혜를 내어 놔야 돼요. 그게 바로 이리로 판명될 때 주께서 그렇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들과 다르게 해서 이리는 이리로 드러나게 하고 양은 양으로 드러나게 하는 특이한 지혜와 특이한 순결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만 이 지혜는 뱀 같은 지혜라고 주님 쪽에서 양에게만 그렇게 판결하고 이 순결은 주님 쪽에서 양에게만 평가하는 겁니다.

이런 뱀 같고 비둘기 같은 평가를 이리한테는 기대하지 마세요. 이리한테는 반대로 이야기할 거예요. 얍삽하기는 뱀같이 얍삽하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욕을 얻어먹어요.  하지만 주께서는 특이성과 차이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말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이 결코 니 솜씨가 아니고

20절 보세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뭐다? 성령이죠. 그럼 여기서 뭘 구분해야 됩니까? ‘아니요’를 내가 알 필요가 있지요.

야~~ 이게 제일 어려운 부분 아닙니까? 내가 했는데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한 것인지? 이거는 내가 ‘아니요’라고 했지만 내가 한 것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예요. 문제 꺼낸 자체가 문제 돼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결국은 뭡니까? 남한테 어떤 평가될 생각을 하지 말고 니 자신부터 니 속에 계신 이에게 니가 죽사발 나야 된다. 이말 입니다.

남한테 욕 얻어먹는 것은 문제거리가 아니고 이리한테 욕 얻어먹든 그것은 신경 쓰지 말고 니 속에 계시는 예수님한테 매일같이 얻어터지면서 살아야 된다. 이말 입니다. 왜 우리는 자꾸만 잘난 체 하기 때문에. 주님 지혜 알아서 뱀 같은 지혜 발휘해 볼게요. 요따위 소리 하다가 얻어터진 다니까요.

매일같이 순결합니다. 요 소리 하다가 얻어터진 다니까요. 제발 너 자신은 죄인인데 이 죄인을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걸 멤버로 해서 죄인을 뭐로 바꿉니까? 잘난 존재로서 바꾸려는 심보를 죄인이기 때문에 자꾸 발휘하려 해요. 내부에서. 그러니 우리는 어떤 현장에 갔을 때 어떤 순결을 보여 줄 때 그 현장에서 매일 우리는 주님한테 얻어터지느라 바쁜데 그 얻어터지는 것이 외부로 나올 때는 성령의 일이요. 순결이고 뱀 같은 지혜가 나오는 겁니다. 난 못났어요. 나는 죄인이 죄밖에 할 줄 모릅니다.

이것을 이리들은 도저히 해 내지 못하는 순결이요, 지혜가 되는 겁니다. 니 그거 어디서 배웠노? 우리는 아무리 공부해도 모르겠다. 니 어떻게 해서 그런 말 배웠어? 내 안에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어!  성령이 있어서 나는 매일같이 얻어터집니다. 왜? 나는 매일 내가 한 것은 내 공로로 돌리고 싶은 충동을 내가 스스로 저하하거나 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잘난 것은 남기고 못난 것은 다 잊어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잊어버리지 않고 어디다 넣느냐 하면 저 지하창고에 다 넣어 놨다가, 우연히 남이 나를 지적하면 발끈 화를 냅니다.

유명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신하들이 아부한다고 임금님에게 멋있습니다! 멋있습니다! 전부 다 아부를 하는데 아부할 줄 모르는 어린애가 하는 말이 어이, 얼레리 꼴레리 임금님 벌거벗었다! 이리 이야기 해 버렸어요. 본질을 이야기 해 버렸어요.

 그 역할을 제자나 성도나 주님이 동질성을 가지고  하게 하도록 힘든 인생이지만, 대전 바닥에서 지금도 여러분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임금님 벌거벗었다는 이야기는 남들이 보기에는 사회성도 없고 눈치코치도 없는 막 돼먹은 인간이라고 얼마나 욕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진실은 내가 벌거벗었기 때문에 누구도 마찬가지로 나도 죄인이기 때문에  너도 죄인인 거예요.  제가 주일날 설교를 했지요. 주님보시기에 다 죄인인데 무슨 명예훼손이 성립돼요? 인기를 구하는 것도 이게 어디 주님 앞에 통합니까? 그것은 남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주님한테 우리가 날마다 우리 자신이 무시당해도 싸다는 그 고백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무시당해도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복음을 알도록 귀한 신분을 주셨는지 우리 안에 주님만 가득차서 주님의 은혜와 용서와 자비와 사랑만 가득차서 주님의 공로만 증거 되게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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