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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22:04:12 조회 : 1791         
사무엘상 7강(누구나 메시야), 마태복음 69강( 12보좌성) 151027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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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211.♡.45.164) 15-11-21 18:18 
누구나 메시야 (사무엘상 2:10-11 )                                                                    대전-(사무엘7강)

  

 

이근호

 



2015년 10월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10-11

  

 

(삼상2: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 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삼상2: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이렇게 한나가 찬양을 통해서 예언을 하지요. 이 본문을 읽어보면 읽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면 맞지요. 모든 사람은 하늘의 심판을 받고 모든 게 깨어지는데 깨어지는 그 작업이 뭔가 여기 계신 분을 부상시키고 부각시키지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방금 말씀을 들었잖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촛점이 갑자기 어디로 모이냐 하면은 모든 건 깨어지고 깨어지는데 그 깨어짐이 어떤 분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깨진다하는, 그 심판이 그냥 심판이 아니고 누군가를 올려 세우기 위한 심판을 하신다에 촛점이 되겠지요!

그 분을 뭐라고 되어 있냐하면 여기 말씀 그대로 보면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하고 여기서 기름 부은 자를 메시야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이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직분에 관한 것이고 이 직분을 완성 하신 분, 더는 그리스도가 없다를 확정짓기 위해서 앞에 이름이 붙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은 ‘더는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나사렛 예수,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 그 분 외에는 더는 없습니다. 어떤 그 누구도 메시야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이방인들이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는 사무엘(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겐 사무엘(상)이 없잖아요?

그들에겐 강감찬, 을지문덕, 연개소문, 화랑 관창같은 자기들의 역사가 있지 사무엘(상)은 그들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들의 역사는 알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역사가 아니면 뭐도 날라가요?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무엘상 2장 10절, 11절도 그들에게는 없지요? 그들에겐 없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말이 안되는 거에요.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말은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원받냐? 문제가 생기겠지요? 우리에겐 역사가 따로 있어서 이런 예언을 들어 본적도 없다. 그러나 우리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이러한 예언이 있어서 그 예언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다라고 오해를 한 것이 예수님이 있었던 당시의 유대인들이 한 오해입니다.

 

이렇게 오해를 한거에요. 역사가 있으매 우리 조상들에게 한 약속이 있어 그 약속이 어디 가겠느냐? 반드시 필연적으로 약속은 성취가 될 것이고 그 성취된 결과가 우리라고 해서 지옥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면 제 말은 뭐냐하면 양쪽 다 쳐버린 거에요. 역사가 있어도 소용없고 역사가 없으면 망해도 말한 이유 없이 그냥 망하고, 인간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생각에 천국은 텅텅 비었느냐? 아무도 없느냐? 그렇게 되겠지요? 그게 바로 뭐냐하면 없는데 새롭게 솟구쳐 올라오는 식으로 ‘없음’을 먼저 택지 조성하는 거에요. 아무도 없다, 없는 게 당연해! 그래! 암! 없어야 돼! 이것은 역사관을 가져도 실패, 없으면 없는 대로 실패, 너도 실패, 나도 실패, 다 실패되는데 어? 생겼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친히 만드시는, 창조하시는 자들이 있을 거고 그것은 인간의 개인 구원에, 구원 받는 본인이 손톱만큼도 관여 한 적이 없어야 돼요. 인물들이 끼여들면 안돼요. 내 구원에 내가 힘을 썼다든지 노력했다든지 참았다든지, 성실했다든지, 경건했다든지, 거룩했다든지, 기도했다든지, 헌금했다든지 어떤 요소도 우리 구원에 끼여들면 안됩니다. 때찌~합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구원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우리도, 이방인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이스라엘은 얼마나 구원에 갈급하고 목말라 했습니까? 나라꼴이 말이 아니거든요! 네 마리의 짐승이 와서 완전히 박살내버렸어요. 바벨론,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등 예수님 당시에 마지막 짐승인 로마가 짓밟아 놨습니다.

 

사람이 밟히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고집이 만만치 안습니다. 밟혔다고 해서 그래! 졌다라고 나올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졌다고 하면서도 다음 기회를 엿보게 되어 있어요. 을이 갑에게 “그래! 당신은 갑이고 나는 을이요 나는 졌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자성어로 ‘두고 보자!’ 이고 이것을 풀이해 보면 “네가 날 버리고 얼마나 잘되나 보자!”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채운 게 아니고 괴물이 채웠기 때문에 자기 속을 보고 자기가 깜짝 놀라요. 내가 이 정도로 성질 더러운 인간이었는가! 깜짝 깜짝 놀랍니다. 애들 때릴 때 두 대만 때리고 말려고 했는데 두 대 맞아도 반성 안할 때, 그럴 땐 정신없이 패 버리죠? 나중에 보면 신음 소리도 안 나면 내가 이 정도로 성질이 이랬나?

 

남들은 천심이라고 하는 데 남들에겐 사람 좋다고 소문났는데, 어떻게 성질나니까 이러내! 그러면 우리 속에 불 있다. 우리 속에 지옥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 또 자책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잘못은 아니고 원래 동일한 마그마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101호, 102호 집이 있다면 인간이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따로 독립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 속에 있는 마그마는 동일한 아담의 성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수도관이나 가스관을 통해서 이 쪽을 틀게 되면 이 쪽으로 올라오고 동일한 속성이 같이 오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 세계라 하는 것은 어지간하면 친구가 됩니다. 왜요? 성질이 다 똑같기 때문에,멀리 있으면 원수가 되는데 커피숍에 앉아서 한 두시간 이야기 해보면 다 친구 됩니다. 전화 번호 주고받고, 그러니까 다리 하나 건너면 원수지만 막상 그 사람 재끼고 같이 만나게 되면 서로 원수라고 하던 사람들이 합세해서 “네가 원수다!” 라고 하게 되지요!

 

항상 인간은 공통 요소가 잠재되어 있어요. 친해 질 수 있습니다. 한 패로 될 수 있어요. 예수님 빼고 다 한 패이다라고 보면 되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빼고 다 한 패입니다. 열 두 제자가 그렇게 했지만 전부다 하나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 빼놓고 똑같아요. 가롯 유다까지 합쳐서 예수님 빼놓고 다 똑같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것을 아시고 “너희들이 나에 대해서 연구하고 탐색하고 분석해서 이용 가치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나에게 올 수 있는 게 아니다!”란 말이죠. 지금 예수님 옆에 있고 식사 같이하고 잠자리 같이하고 삼년 동안 늘 같이 붙어 있잖아요?

인간 세계 같으면 이미 친구 중에 친굽니다. 벌써 다 터놓고 아는 사이인데 가까이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몰라요. 제자들도 그랬는데 50년 교회 나갔다고 해서 예수님을 알아요? 몰라요. 50년 아니라 100년 나가 보세요. 예수님을 아는지! 예수님은 본인 능력으로 알아서 구원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진짜 신앙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식으로는 이런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었다.” 이렇게 추 체험적으로, 추 체험적이라는 것은 앞에 (추)가 붙는 것은 반추한다, 되새겨 본다, 지난 체험을 다시 되새겨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그 예수는 아니였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예수는 뭐냐하면 교회에서 유행했던 예수거든요.

똑같은 인간들끼리 똑같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그 예수가 예수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고개 끄덕이며 동의했었는데 그게 아니였다는 겁니다.  전혀 예상 못한 그 예수가 예수라면 우리는 충분히 내 능력으로 내가 먼저 선점해서 믿을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 예수란 무슨 말이냐하면 이게 믿지 못할 예수에요.

 

믿지 못할 예수인데 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지 못할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고 내가 믿고자하는 예수는 믿지 못할 예수를 혹시 믿을까 싶어서 사탄이 선수친거에요. 마귀가 “이것 믿고 그걸로 끝내라! 천당갈테니 안심해라!” 는 식으로 선수치고 들어 온 겁니다.

선보는 자리에 중매쟁이가 중간에서 끼어서 선 볼 남자가 아닌데 다른 남자를 집어넣고 실컷 이야기하고 나니까 진짜 선 볼 남자가 나중에 오는 그런 막장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그런 것이 있을 거에요. 하도 비비 꼬아놔서..

 

성도의 성령 특징은 뭐냐 두 가지 예수가 있음을 안다는 거에요. 이 세상에 두 가지 예수가 있는데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산타클로스 같은 예수, 우리가 원하는 기대와 우리가 원하는 장점을 다 같고 있는 예수와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예수, 그런 예수를 오늘 본문엔 뭐라고 되어 있어요?

20절에 보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이것을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산산이 깨어지는 것, 산산이 부셔지는 것.메시야가 뭐냐? 메시야를 뭐로 설명하면 됩니까?를 물으신다면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 될수 있는 분, 이게 메시야에요.

 메시야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서 죽고 마지막에 천국가고 태어나기 이전, 창세 이전부터 하신 모든 것이 홀로 하셨지요? 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메시야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 누가 다치고 물에 빠지고 하는 그 모든 것도 “에이~ 주께서 알아서 하신 것 맞지요?”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는 거에요. 하나로 설명이 안되게 되면 이것은 죽어도 억울합니다. 왜? 해답을 안 갖고 있기 때문에, 해답이 없어서 질질 70, 80 끌어봐야 치매 걸려서 끌어봐야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이가 문제가 아니고 십대 이십대가 문제가 아니고 교회를 몇 년 다니고 몇 번 다닌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해답이 있어야 되요.

 

요한복은 14장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 ‘나’가 몇 분인가가 중요해요. ‘나’가 몇 명입니까? 한 명이지요? 이 말은 나만 뭐다? 나만 길이고 나만 진리이고 나만 생명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면 예수님 빼놓고 우리는 뭐에요? 길 아니고 진리 아니고 생명 아니죠? 생명도 아닌 것이 생명 얻고자 하는 이것이 죄고 진리도 아닌 것이 진리를 얻고자 하는 것이 죄고 길도 아닌 것이 길의 행세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선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간단합니다. 성경은 간단해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종교란 뭐냐하면 문화에요. 문화라 하는 것은 취향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가 절에 갈까? 아니면 교회에 갈까?” 이건 본인 취향의 문제에요. 그러면 본인 취향의 문제라고 한다면 결국 취향을 선택하는 것은 누가 선택한다? 본인이 선택하겠지요?

 

그럼 본인이 뭐에요? 내가 예수를 믿을까? 말까? 하는 그 순간 본인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겁니다. 가짜 입니다. 이건 가짜에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비가 온다? “그래! 요새 가물어서 비가 와야 되!” 왜 비가 와야 되지요? 이 나라에 내가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모는 것이 하나로 설명이 되는 거에요.

 

되어진 모든 일이 나 중심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겁니다. 그렇게라도 생각을 해야 이 험한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그래도 약간의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에요. 이런 사상과 정신을 가지고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 봤자 어떤 성경 귀절을 들치고 찬양 부르고 설교 들어 봤자 이미 모든 것은 나 하나로 설명이 된 상태에선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전부다 내가 만약에 거울이라면 거울에다가 교회 다니면 오늘은 교회에 갔다고 일기장에 정보 하나를 추가하는 것뿐이에요.

 

전에 이런 예를 들었는데 팔레트가 있으면 (그 안에 색깔대로 물감을 짜 놓아서) 빨강, 파, 랑, 노랑, 흰색 이렇게 있는데 특히 노랑과 흰색은 면적이 넓어요. 많이 쓰기 때문에, 만약에 스무 살 때 교회 다녔으면 팔레트 안에 스무 살 때 교회 다녔던 체험을 물감 짜 넣듯 하는 거에요. 그러면 (팔레트) 바닥은 뭡니까? 이건 바로 ‘나’가 되는 겁니다.

 

이미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이미 설명이 된 상태에요. 자기가 메시야란 말이에요. 메시야란 뭐라고요?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 옛날 구닥다리 한 50년대나 60년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그런 집안의 어른들, 시아버지나 친정아버지나 어른들이 자식들을 명절에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하게 되면 그 연설의 내용이 뭡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려고 하는 거에요. (국제 시장 영화같이)

 

“내가 너희들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일사후퇴 때 나 홀로 내려와서 흥남 부두 건너와서 너희들 키운다고 그때 흥남 부두에서 아버지가 나한테 부탁하기를 엄마하고 동생들 부탁한다는 소리를 듣고 와서 부산의 국제 시장에 가서 얼마나 고생, 고생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아버지여! 내 참 힘들었거든요~” 영화 전부가 그걸 보고 감동 안 할 수가 없지요. 왜요? 동의 하니까! 같은 마그마가 101호나 102호나 같은 수도관이나 가스관을 틀면 나오는 거에요.

“그래! 고생 많이 했구나! 그래 이 영감아! 당신만 고생 했나? 나도 고생 어지간히 했다. 아이고! 당신 팔자나 내 팔자나 둘 다 참! 팔자가 그렇다~”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이 고생 했다는 소리 듣고 “내 팔자나 니 팔자나 예수님 팔자나 마찬가지다” 는 겁니다. 이건 팔래트에다가 예수님 하나 짜놓은 것밖에 안되요.

 

내가 믿는 예수는 100% 가짜 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여 됩니까? 아까 팔레트(나) 있었잖아요. 오늘 본문 사무엘상 2장 10절에 보니까 이것이 깨어져야 되요. 아주 작살나고 와장창 깨어져야 됩니다. 깨어지려면 어떻게 되야 되는가? 지금부터 쉽게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뭐가 깨어져야 되냐하면 추억(기억)이 깨어지는 거에요.

 

인간이 깨어졌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회 칼로 살을 잘랐다 이렇게 깨어지는 게 아니고 보통 깨어졌다, 내 인생 깨어졌다라는 말은 아까 하나로 설명 한 것이 깨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깨어지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지요? ‘나’가 깨어지게 되면 여기서 나라는 것은 기억과 추억이 누적되어 진 것이거든요.

 

그것이 와장창 깨어지게 되면 전부 유리 파편처럼 흩어지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때는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사는 거에요. 테이프를 사서 깨어진 파편들을 모아서 전부 테이프로 붙여요. 이렇게 붙여진 것을 인생이라고 합니다. 내 인생은 뭐냐? 깨어진 과거의 추억들을 주서 모아서, 하나로 설명해야 되니까 현재에 있는 나가 나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정당성을 테이프로 하나하나 다 붙여요.

 

붙일 때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합니다. “그래! 어릴 때라 뭘 알았겠어?” 그리고 자기가 잘한 것은 붙이더라도 번쩍번쩍 빛나게 해놓고 “그래! 내가 이렇게 잘났구나!”하며 붙입니다. 그러니까 나 중심으로 하나되기는 백번을 깨져도 돌아서면 똑같아요. 또 다시 갖다 붙입니다. “예전에 비바람 불고 찬서리 내릴 때 .십리를 걸어서 부흥회에 참석했었어! 그때 은혜 받았어.” 그런 깨진 파편을 갖다 붙여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 역사를 버리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 역사를 자랑하는 거나 개개인이 자기 과거의 역사를 아쉬워하고 추억하고 기억하고 회상하는 거나 다 똑같은 거에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밑에 수도관이라든지 가스관을 통해 올라오는 것이 다 똑같아요.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믿는다 안 믿는다를 다 치워버립시다. 다 똑같으니까!

 

가을이 되면 자주 나오는 옛날 노래 중에 최양숙이 부른 (가을 편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왜 그러냐 하면 부르냐 하면 추억은 항상 지금보다 시간이 어릴 때에요.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단단히 하나로 설명이 되고 아니 그것보다 그렇게 되고 싶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되고 싶어요.

 

심지어 어릴 때는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둘’하잖아요. 별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 저 별은 니 별일까? 오빠 별, 내 별” 자기 마음대로 소유권 주장하고 있어요. 저 별은 내 별이고 저 별은 오빠 별이라는 거에요. 그 뿐만 아니고 떨어지는 낙엽 떨러져 굴러 가는 것도 모든 것이 자기의 입장을 위로해 주고 설명해 주고 다독거려 주고 힘내라고 격려해 주는 자연 세계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 근거를 대라! 근거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 그런데 그 버릇이 어디 가겠어요? 그 버릇이 50된다고 해서, 60된다고 해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또 그 때를 추억 하는 거에요. 또 예를 들면 동네에 극장이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에 남진이 온다는 포스터가 있으면 정작 남진이 온다하면 어른들은 가는데 어린 아이들은 못 가잖아요?

 

못 가면 소원이 생겨요. 나도 빨리 어른되서 가야겠다는 남진 쇼에 돈 내고 들어가 보고 싶다는,  특히 술집이나 나이트클럽 홍보하는 것 보면 홍진영 온다고 붙은 것 보면 어른들은 뭐 돈벌러 오나보다 하지만 못 들어가는 애들은 빨리 들어가 볼까 해서 엄마꺼 바르고 입고 호기심에 가고 싶은 거에요. 또 그걸 보면 옛날 자기 생각나고 그러니까 이 (팔레트가) 세상 내 중심으로 간다는 것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하면 내가 바로 메시야이다. 그래야 10절이 설명되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이 한나의 본문이 현실화 된 것이 이방 나라에요. 첫째가 이방 나라이고 두 번째가 예언을 받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린 죄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도 못 들었을 거에요. 이스라엘의 죄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린 죄, 그게 죄에요. 왜 그게 죄가 될까요? 여기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라는 개념 속에 본인을 빼버렸어요. 왜녀? 자기의 팔레트에 여호와께서 주신 약속을 자기가 깨지는 용도로 사용되어진 것이 나이고 저가가 담을 수 있는 용도로 새로운 정보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지?” 라는 내게 필요한 종교적인 항목에 그 말씀을, 정보를 집어넣은 거에요. 마치 선교 단체 아이들처럼 성경 말씀을 다 외운거에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다 외우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마치 수능시험 치듯이 성경을 다 외워요. 외워서 전도 할 때 말발 서라고 상대방이 이런 소리 하면 성경 남발하면서 여호와 증인처럼 막힘없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게 자기의 팔레트에 물감 짜넣듯 다 쌓이는 거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 가? 그것 중심으로 내가 사니까! 세상 모든 것이 나 하나로 설명이 가능할 때 자기가 심리적인 안정을 얻으니까요.

 

오늘 강의에 핵심은 이겁니다. 성도는 심리적인 안정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불안정 해도 괜찮아요. 이게 믿음이거든요. 예수를 믿으면 안정감을 갖고, 이렇게 되버리면 예수도 수단이 되버리고 안정감 갖는 내가 목적이 되버리잖아요? ‘나’라는 목적을 끝까지 포기 못하고 있잖아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깨뜨리는데, 다시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첫째는 이방인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본인들이다.

 

처음에 강의 할 때 그랬잖아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모두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아무도 없는 거에요. 로마서 3장 4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러면 거짓된 자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거짓입니까? 아닙니까? 그것도 거짓되지요? 이것을 사도 바울은 사도되기 전에는 몰랐어요. 사도 되기전에 사울은 이것을 누구에게 이야기 한줄 아는가 하면 자기 나라 빼놓고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로 본 거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왜 참되는가 하면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역사? 구약에 언약에 따른 역사이기 때문에 자기는 참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지금 이스라엘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이스라엘을 우리가 부러워 해야되요? 부러워하지 말아야 되요? “아이고! 저 거짓 된 것 주제 파악도 못하고~”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성경 해석의 목표가 현재의 이스라엘 나라를 목표로 하면 되요? 안되요? 안되지요?

 

그건 성경 해석 잘못 한 거지요! 모든 해석을,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종말의 관한 것이 그렇게 해석되면 안된다는 말이죠! 무화과나무가 언제 피고 여름되고 뭐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되요. 뭐 마곡이 어떻고, 지금의 흑해 근처 나라가 참~ 그런 설명을 들으면 지형도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경의 지형도, 지판도, 이걸 잘못 잡은 거에요. 성경에 나오는 땅이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거에요.

 

언약 안에서 설명이 되야 되거든요. 왜냐하면 언약 안에 누가 들어 있냐하면 언약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약 안에는 예수님만 들어 있어요. 예수님 옆에 우리가 같이 들어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쫓겨 나가야 되요. 쫒겨 나오고 성령이 올 때 쫓겨난 자리에서 부름을 받아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안 쫓겨나고 옆에 붙어 있다가 어드벤테이지 얻어 가지고 마일리지 쌓여서 구원 받으면 안되요.

  

가까이 한다고 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쿠폰 더 모은다고 중국집에선 탕수육 작은 것 하나 더 줄지는 모르겠지만 천국엔 쿠폰 없습니다. 백날 중국집 다녀봐야 백날 교회 다녀봐야 쿠폰 없어요.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제자 입장에서 예수님 가실 때 나서서 이야기 했잖아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할 때 너는 못 온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주님 죽으신다는 데 제 목숨 걸고 가겠습니다. “니 목숨 걸고?” 목숨 걸어도 못 가는 거에요. 왜? 나만 생명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지금껏 자신의 목숨이 자기 것 인지 알았어요. 주님의 팔레트에 있는 물감인데 주님이 그림 그릴 때 필요한 팔레트위의 물감에 불가한데, 베드로를 찍어서 그리려 하는데 베드로는 자기의 팔레트를 갖고 거기에 예수님에게 들은 말씀을 짜 넣으면 그것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것은 우리가 봤던 사무엘상 2장10절을 오해 한 겁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에서 여호와의 대적하는 자를 우리가 깨뜨리면 안되고 주님께서 말씀대로 여호와의 대적하는 자를 깨뜨린 그런 사례나 그런 경우를 자기들을 포함 시켜서 추체험 되야 해요. 자기를 포함시켜야 되요. 그래야 내가 말씀을 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있는 그 곳에 언약에 들어간 사람인 것이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결국은 무슨 다툼이냐 하면 주인공 싸움이에요. 내 인생에서 누가 주인공이냐? 누가 주가 되느냐?의 주인공 싸움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버리면, 내가 메시야가 되지요. 메시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 하는 분, 이것을 메시야라고 합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누구 위주로 설명 합니까? 자기 위주로 설명하지요? 하여튼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잖아요.

 

자기가 메시야가 되는 거에요. 메시야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말은 그것은 노골적으로 말하면 나의 메시야인 것을 밝혀서 저를 심판해 주시옵소서 그런 말이 아니면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 하시고 언약의 내용을 까보면 그 안에 사무엘상 2장10절,11절이 들어 있습니다. 언약 안에는 누가 들어 있는가?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 하시는 분이 담겨 있어요.

 

그 분은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니고 누굽니까? 예수님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아닌 분이에요. 왜 예수님이 아니냐고 설명하게 되냐 하면 내가 믿는 예수가 되면 안되거든요! 내가 믿는 예수는 내가 동의한 예수이기 때문에, 내가 결재한 것이 담긴 예수이기 때문에 역시 나를 설명하는 일환 중 하나의 과정에 포함된 예수이기 때문에 잘못된 예수일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믿는 예수.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내가 믿는 예수와 내가 믿기 싫은 예수 둘 다 체험되어 질 때 성도란 말이죠. 그러면 내가 믿는 예수는 뭡니까? 내가 내 중심으로 생각해 주는 것을 긍정해 주는 예수가 내가 좋아하는 예수지요? 그러면 내가 싫어하는 예수는 뭡니까? 아무리 내가 스카치테이프를 들고 깨어진 추억의 유리파편을 오늘도 우리는 연결시켜서 역시 세상은 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복해서 깨뜨려 버리는 것, 사정 보지 않고 깨뜨리는 예수.

 

이미 예수님이 중심인데 “왜? 니 중심이 따로 있어야 될 이유가 없지 않느냐”라고 질책 하시면서 지적 하시면서 그것을 깨버리죠. “제발! 시키는데로만 해라! 딴 짓 하지 말고, 왜 자꾸 결과에 대해서 니가 궁금증을 갖느냐!” 하시죠. “주님 저 천당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라고 하면 “그것은 네가 걱정 할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천국을 못가요.” 왜? 내가 생각하는 너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생각하는 너는 이미 천국에 가 있는데, 천국 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적질을 해 주시잖아요. 주님이 천국 가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거에요.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하면 나를 어떻게 주님 중심으로 바꾸는 그 작업을 내가 어떻게 체험 하느냐 그것만 남아 있는 거에요. 매일 같이 내 중심을 누구 중심으로? 주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뭘 해야 됩니까?

 

매일 아침 일어나며 내 인생 다짐 해야지요. 오후 되면 깨지고 저녁되면 또 깨지고 아침되면 또 시작하는 거에요. “오늘은 뭘 해야되나? 우리 딸 집에 가서 뭘 해 줄까?” 온갖 생각하는 것이 깨질 생각은 안하고 깨진 것 주서 모아서 예쁘게 포장 할 생각만 하고 살아갑니다. 저녁이면 보람찬~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집에 가서 무슨 큰 일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 주무르라고 하지요!

 

자! 이제 좀 더 어려운 것 해 봅시다. 하나로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이것은 지평을 이룹니다. 하나의 지평을 이루게 되면 추억과 기억의 파편들이 다 있는데 우리는 아침이 되면 또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깨어진 것을 연결해서, “깨어 졌든 말든 내가 지고 갈 내 인생이다. 수레에 담겨져 있는 고물이라고 욕하지 마라! 그래도 내 인생이다.” 이래서 아침이면 수레에 자기 추억의 과거를 이끌고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싣고 가지요.

 

치매 걸린 할머니들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들 자기 집안에 다 집어넣듯이 치매에 걸리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믿을 것은 과거 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알던 물건 다 집어넣는 거에요. 완전히 집을 쓰레기장 만들어 버려요. 그것을 버리면 왜 아깝습니까? 자기의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자기의 파편이 깨지잖아요.

 

그것이 내 눈 앞에 있어야지 그것이 없으면 내가 하나로 아우르는데 허전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빠짐없이 담아요. 맨날 자식들에게 욕 얻어먹지요. “ 엄마~ 이것 쫌 갖다 버려라! 이 옷 좀 갖다 버려, 사줄 께!” 그러면 “야! 야! 그걸 어떻게 버리냐? 이건 니 아버지가.”

 

사연이 많아요. 이야기가 많아요. 사연 없는 것이 없어요. 사연이 그렇게 많아요.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어떻게 오시는가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메시야잖아요? 하나님은 언약을 보내잖아요. 언약 안에 누가 들어 있다? 메시야는 창세 전 부터 끝까지 하나로 설명한다.

 

그런데 어떤 목사들이 설교하는데 예수님을 증거 하지 않고 이 교회는, 내력은 하면서 교회 중심으로 하나로 설명하지요. 그리고 당신들은 뒤에 늦게 왔기 때문에 하나의 지형판. 즉, 이 교회는 주의 제단이라고 설명해야 될 돕기 위해 여러분들은 왔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시고 여러분들은 교회를 도와서 구원받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라고 하나의 지형판으로 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자칭 메시야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되지요.

 

이것을 철학적 용어로 추상적 보편성이라고 해요. 상당히 상상적이죠! 추상적 보편성을 개인에게 이야기 할 때는 뭐가 들어가냐하면 공식 즉, 폭력이 개입됩니다. 갑 질, 추상적 보편성, 하나의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되는 하나의 “네가 말 안 들으면~” 여기에 뭐가 주어집니까? 폭력이 주어지지요. 모든 가정의 폭력, 직장 폭력, 교회 내 폭력, 정신적 폭력, 물질적 폭력, 모든 갑 질과 모든 폭력은 추상적 보편성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드라마에 보면 가난한 여자가 우연히 회사에 취직 했는데 출근 하자마자 어떤 남자와 부딪혀서 넘어져 식판 떨어뜨리고 남자가 한 눈에 그 여자에게 반했을 때 나중에 드라마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입니다. 그 때 재벌 사모님이 하는 말이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을 데려와서~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이게 가당키나 하나?” 조용히 불러서 봉투 주면서 “이거면 돼? 네가 임신 했다고? 이거 가지고 유학을 가던지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럼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 돈 바라고 한 것 아니에요. 나는 그 남자 사랑해요.” 이러지요.

 

그런데 이런 폭력을 우리가 드라마에서 실제 보면서도 도대체 이것을 설명하지 못 했잖아요? 설명 궁금해요? 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메시야에요. 세상 모든 것은 하나로 설명하기 위해 준비된 세상, 지금 뭘 설명하려고 하냐하면 아무리 성경에서 뭐라고 하고 복음이 뭐라고 하던 우리는 돌아서면 마찬가지에요. 아까 싸가지 없는 사모님 못지않게 돈이 없어 못하지 돈만 생기면 그럴 거에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들이라고 분명히 할 사람들입니다. 100% 입니다.

 

추상적 보편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이 추상적 보편성과 맞닥뜨리면서 여기서 하나의 지형판이 생겨요. 위에 지형판(예수님)에서 아래 지형판(추상적 보편성)을 뚫어 버려요. 뚫어 버리면 (추상적 보편성)에 구멍이 생기죠? 바늘로 꿰뚫고 실로 똘똘 묶어서 그대로 위로 가져갑니다. 죄의 덩어리를 그대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로 구원 받고 가면서 여전히 뭘 하는가? 아침에 눈 뜨면서 싸가지 없는 사모님 놀이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위에서 당기는 힘은 사망이나 권세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 어떤 것으로도 이 끈을 끊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미 나는 하나로 설명 한 상태인데 그 나 외에 하나가 내가 관여 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없는 다른 능력의 힘이 외부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내가 가위 들고 끊을 수가 없는 거에요. 아무리 내가 반항하고 저항해도 끊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사자성어로 이것을 데롱데롱 이라 해요.

 

데롱데롱이면서 기껏 두 싸가지 없는 사모님 끼리 서로 싸우는 거에요. 매일 같이 교회에서 김 집사, 박 집사 둘 다 싸가지 없는 사모님이라 “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뭐 어떠니 저떠니, 나 없을 때 그런 소리 했지?” 그래도 주님은 그런 짓 하는 채로 데롱데롱 매달아 잡아 당기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입니다. 이렇게 매인 사람, 남은 자 에요.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탈락 조치가 있었고 탈락 조치는 뭐냐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는 예언된 말씀이 적재적소에 투입이 되고 나머지가 매달린 결과입니다. 그것이 한나가 낳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바로 남은 자에요. 남은 자는 반드시 심판이 이었었다는 것을, 심판 체험을 품고 있는 겁니다. 깨진 체험. 한나의 가정 사실은 깨진 거에요. 아들 낳고도 내 아들이라고 하지 못하고 갖다 바쳐야 되는 아들.

 

이것은 이 지평이 깨어져야 깨어진 그 구멍 속에서 이 일에 내가 했던 내 일로 설명하는 지평에 없던 낯선 것이 구멍을 통해서 올라오잖아요? 전에 위에서 설명 했잖아요? 그런데 역사에선 위가 없으니까 지워버리면 낯선 것이 어떤 균열이 생기면서 뭔가 불쑥 부각된다 이렇게 보면 되요. 그것이 아까 몇 절이었습니까?

 

10절 마지막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높인다. 부각시킨다. 부상시킨다.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 속 지평 속에서 묵시를 끄집어내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상당한 복음인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질대로 싸가지 없는 사모님처럼 살게 하십니다.  

 

그냥 살아요. 사는데 늘 수시로 낯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말고 예수님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되는 요소가 나를 통째로 데롱데롱 끄집어 올리는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사건이 일어나요. 사건이라는 이유가 하나의 구멍이 점이기 때문에, 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냐하면 사건에는 면적이 없습니다. 점은 면적이 없지요?

 

점은 면적이 없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두 번 다시 일으킬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모든 일은 사건이에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다 다음에 또 만드셨습니까? 아니지요? 그 다음에 물들고 와서 주님! 포도주 되게 해 주세요 그래도 안 되지요?

 

사건은 찢어지기 위한 용도이기 때문에 찢어진 내가 찢어진 구멍을 소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평에 구멍이 나면, 이런 예까지 안들어야 되는데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임신해서 배부르잖아요? 아기를 낳으면 아래 뱃살은 어떻게 됩니까? 터지잖아요. 전에 있던 면적에 있던 피부가 늘어난 피부가 다시 줄어들어야 되는데 이게 줄어들어도 이미 터진 근육은 원래대로 안되고 줄무늬가 생기잖아요.

 

그것처럼 이미 터져버린 상처에 대해서 그것을 메꿀만한 내 추억이 없어요. 찢어진 체험은 찢어졌을 뿐이지 그것을 메꿀 체험은 따로 어디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린 스카치테이프를 가지고 그때 은혜 줄라고 했는가 또 핑계대면서 이었을 뿐이죠. 또 (무늬)하나 만들어 졌을 뿐이지, 그 다음에 또 무슨 다른 사건 가지고 그 균열이 생기면서 아예 통째로 대롱대롱 내가 주의 것이지, 내가 주를 위해서 이것 하면 구원받고 저것 나쁜 짓 하면 지옥가고 그런 입장이 아니에요.

 

언약은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그냥 구멍을 통해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황공스럽게도 나라는 죄 많은 지평을 뚫고 강도와 세리와 창기 같은 것을 뚫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그 점이 중요하지! 괞찮은데 뚫렸다? 이런 예수님을 증거 하니까 나머지 나는 괞찮은 모양이야라고 자기 스스로 위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45.164) 15-11-21 18:20 
12보좌 성 (마 19:28)                                                                                            대전- 69강



이근호

 



2015년10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19장 28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이방인들에겐 단군의 자손에겐 “이런 무슨 희안한 소리가 있냐?” 할거에요. 단군의 자손이 이 말씀을 들으면, 만약에 연개소문이 이것을 들으면 “ 그래! 너희들끼리 다 해먹어라!” 고 조롱조로 이야기 하겠지요? “너희에게만 역사가 있고 우리는 인간도 아니냐?” 하는데 예, 인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스스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큰 과오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흙이다 또는 흙가루, 흙의 파편, 쇠퇴하는 인간이라 할 수 있지요. 지난 수요일 날 말씀드린 것처럼 수에 칠 가치가 없다. 왜 수에 칠 가치가 없느냐 하면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했거든요.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그런데 껍데기 가지고 인간이라 하지 않겠다. 생명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풍선도 바람이 들어가야 풍선답지 바람 빠지면 풍선 아니잖아요. 그냥 고무 덩어리지, 그렇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집어넣으시는데 집어넣을 때 헬륨가스 넣는 것이 아니고 언약 가스를 집어넣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이는 왜 사람이 아니냐 하면은 언약이 없으면 관계성이 성립이 안돼요. 누구와의 관계성? 주님과의 관계성이 성립이 안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 자기 것이 들어 있어요. 그것을 원어로 ‘첼렘’이라고 하는데 형상이라고 합니다. 맡겨 놓은 거에요. “내 형상 돌려줘!” 이 말 입니다. 언제 줬습니까? “어? 사람 아니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여기 있네요!하면 “ 어~ 사람이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 자기의 모습을 피조물 속에 어떻게 들어오시는가? 수 놓는 것처럼?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만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을 통해서 집어넣으려면 방주를 만들어서? 아니에요. 그러면 돌판 만들어서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들어오는데요? 원래 사람 속에 사람이, 타인이 못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자체가 독립적 존재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가도 백혈구가 가만있지를 않고 강력하게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외부 물질에 대해선 용납을 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몸에 다른 것이 물리적이던 생물적이던 정신적인 것이라도 어떤 것도 남들이 꼭 망치 같은 것으로 날 안 때리더라도, 누가 인터넷에 내 욕을 하게 되면 그것을 보고 스스로 화가 나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누가 떠밀지도 않았어요.

 

차라리 글 모르는 나을 지도 모르죠. 글 읽고 난 뒤에 갑자기 화가 난다 말이죠. 왜 화가 나는지? 욕을 했는데 왜 화가 나지요? 욕이 무슨 대패나 망치입니까? 물리적인 쇠뭉치도 아닌데 왜 화가 나지요? 몸+자아로 되어 있는데 이 자아가 수상한 겁니다. 몸은 원래 누구의 것이냐 하면 주님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몸을 ‘네 것’이라고 하면서 따로 ‘내 것’이라고 만들어 버렸어요. 자아를 만들었어요.

  

원래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자아란 것이 없었어요. 따 먹고 난 뒤에 자기변명 하려고 변명조로 생긴 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선악과의 취지는 뭐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말씀 안에 장악되어 있다는 그런 취지로 준 것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자유는 주되 절대로 사유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미 자기의 한계가 ‘하지 마라’로 끝났으니까! “따 먹지 마라!” 로 된 세계에서 자유를 활용하면 안되요.

 

자유를 안 써먹을 때 자유로와요. 그것을 써먹으면 안되요. 환장할 노릇입니다. 설날에 새배 돈 자식에게 주면서 딜레마에 빠지는 말을 하지요.“야! 새배 돈 줄 테니까 쓰지마라”는 거에요. 주지를 말든가! 장남감도 사고 인형도 사고 싶은데 쓰지 말라는 거에요. 모아놨다가 나중에 저축하라고 하든지 엄마에게 맡기면 저금해주고 나중에 시집 갈 때 돌려줄께 하는데 그것 다 떼먹거든요! 시집 갈 때 새배 돈 받은 사람 거의 없어요.

 

이자 계산해서 달라 하면 엄마들에겐 준비된 멘트가 있어요. “너 밥하고 빨래 해준 값 내놔라!” 주부의 한 달 일한 가치가 450만원 정도에요. 옛날 보다 올랐어요. 결혼 하고 30년 동안의 위자료가 45억 나옵니다. 드라마에 보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는 순간에는 너를 위한 자유를 애초부터 준 적이 없고 네가 자유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주님의 자유로 니가 구원 받는 다는 겁니다.

 

선악과 상관없이 안 따먹었음에고 불구하고 구원이 되버린 상태, 자유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유가 나를 구원한 상태, 이것이 바로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주의해야 되요. 첫째는 주님의 믿음이 있고 둘째는 내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은 모든 것을 나 하나로 생각하는 내가 메시야인양 처신하는 그 지형도에서 나온 믿음이에요. 이 믿음은 무엇을 동반 하냐하면 자유를 동반 합니다. 내가 믿고자 하면 믿을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들이 무얼 강조 합니까? 믿으라고 강조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순종해서 믿어 버리면 그건 가짜 믿음이에요. 왜? 내가 믿는 자유를 사용했기 때문에.

  

대표적인 잘못된 설교가 ‘워치만 니’의 육과 영과 혼으로 삼 분으로 나누는 거에요. 삼 분으로 왜 나눴을까? 성경에 보면 인간 전체가 육이고 인간 전체가 영으로 되어 있는데 삼분이라는 것은 없거든요. 그런데 육과 영과 혼으로 나눴다는 말은 나를, 하나를 세 조각 냈다는 말이죠. 세 조각으로 나뉜 것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선 누가 관리해야 되요? 내가 알아서 관리해야 되요. 주의 말씀을 참고로 주의 하신 지시와 기도와 순종하라, 열심이 충성하라는 것을 참고로 깨어진 나를 알아서 관리해야 되지요?

  

내 자유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 잘못된 설교의 대표적인 것으로 오류로 봅니다. 내가 숨 쉬고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자유의 결과물인데 우리는 이것을 거부하고 내가 결심한 나의 결과물로 자기인생을 수거하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쓰레기에요. 그냥 배설물입니다. 갖다 내 버려야 되요.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특징이 뭐냐하면 내가 마귀로부터 받은 ‘내 몸은 내 것이다’ 나의 것, 자아( EGO), 내 것이라는 것을 뭐고 끄집어내느냐? 주께서는 배설물로 끄집어 내주는 그런 좋은 역할을 성령께서 해 주십니다. 어떻게 끄집어 내주냐 하면 “나와! 너 ”이렇게 협박 하시는 게 아니고 한탄하시고 근심 하면서 끄집어내지요. 성령께서 말 할 수 없는 탄식과 근심으로 “네가 그래서 되겠는 가?”

 

그것은 결국은 “그건 니 자유지”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의 아픔을 가지고 하시며 우리는 “주여! 이건 제 것입니다.” 하면 “그래! 쓰레기 가져 왔구나!” 또 “주여! 이건 십일조입니다.” 하면 “그래! 쓰레기 가져 왔네!” 그건 너한테 갖다 버려라 “제가 다섯 명 전도 해왔습니다.”하면 “ 아이고! 쓰레기 가져 오셨어요~ 니가 전도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아버지가 보낸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안는다고 했으니 괜찮아요.

 

아버지가 보내지 안으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이것은 아버지와 내 문제인데 선교와 전도는, 네가 건방지게 니가 중간에 끼여드냐는 말이죠! 어떤 분이 비밀글로 선교에 대해 언급을 하셨어요. 제가 답변을 달아 드렸습니다. 선교가 뭡니까? 선교라는 것은 심판인데 옛날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많은 나라들이 있잖아요? 모압, 앗수르, 암몬 등 이스라엘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주의 이름이 함께 있어요. 언약의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주변 나라가 핍박을 해요. 핍박을 하면 남들 보기에는 저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는데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에게 공격하는 것으로 계산해서 마지막 예언에서 (핍박했던 나라)를 심판하게 되어 있어요. 심판하면서 기름 부은 자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심판 하시면서 “너희가 이스라엘을 잘못 봤다! 너희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만 보지만 그 안에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여호와 야곱의 하나님을 공격했다”라고 이 세상에 심판을 통해서 알려주는 거에요. 이것이 선교라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날 선교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음을 증거하면 되지요. 이게 뭐냐하면 복음 전파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누가 공격하겠어요.? 교회 중심으로 하는 교인들과 목사들이 공격하겠지요? 그게 선교에요. “ 니 눈엔 그냥 사람으로 보이지?” 주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이런 고백이 안 나오잖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안 나오잖아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설명하는 말이 “당신은 왜 자꾸 죄인이라고 합니까?”하는데 당신이라고 하는 그 말이 주님을 공격하는 말이에요.

 

당신 눈에는 당신하고 나, 그렇게 둘 밖에 안 보이지만 그게 주님을 공격한 거에요. 왜냐하면 주님이 나에게 너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면 그대로 내 놨다는 말이죠. 설교해도 죄고 강의해도 죄고 강의하러 돌아다녀도 죄고 헌금해도 죄고 개척해도 죄고 선교사해도 죄고 몸이 아파도 죄고 몸이 안 아파도 죄고 병 나아도 죄고 모든 게 죄입니다. 라고 할 때 그들에게도 같은 탄식의 성령이 있다면 OK가 될 텐데 OK가 아니고 욕으로 돌아 왔다는 것은 다른 영을 받고 있는 거에요.

 

뭐냐하면 자아에요. 모든 것을 자아 하나로 설명하는 자기 인생 중심으로 설명하는 티가 나버립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보게 되면 중간에 보면 이방 나라에 대한 저주가 나와요. 이상하다?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지 왜? 남의 나라 자꾸 건드리는지 뭐 두로가 오만 했구나! 오만 하던 말든 그건 이방 나라인데 놔두지 왜 실성한 이사야가 3년 동안 벌거벗은 채로 선교한 나라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이 아니였습니다. 이사야 20장 애굽에 선교한다고요.

 

애굽에 선교를 왜 합니까? 이사야가 누구의 선지자인데 자기 건사나 잘 하지 남의 절에 가서 갓 바위에 올라가서 왜 선교해요? 왜 그러냐 하면은 심판하는 심판의 소식입니다. 너희들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반드시 심판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왜냐 너희 보기에 벌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너희들이 같이 우습게 봐서 그렇다. 하나님은 앗수르라는 나라를 몽둥이로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유다는 망하진 않지만 패긴 했어요. 북 이스라엘은 아예 망했고,

 

이스라엘을 패니까 이 몽둥이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자기가 힘세서, 일반 정치적 논리처럼 갑 질하는 거에요. 어떤 군사력이 많아 승리했다. 군사력이 많아 승리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하나로 모든 것을, 세상을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한 것처럼, 자칭 메시야에요. 자기가 알아서 구원 받겠다는 그런데 그 몽둥이가 치는 과정에서 갑자기 몽둥이가 어떻게 되었어요? 오만해 진거에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몽둥이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앗수르를 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통해서 치는데 칠 때 치는 방법이 뭐냐하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해 놓고 망한 것 중에 남은 자를 따로 건져 내시는 능력으로 앗수르와 모압과 블레셋을 다 쳐버려요. 굉장히 복잡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뭐는 용납하지 않아요? 성경에선 이스라엘의 주체성을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굴 이긴다던지 이런 건 없어요. 교회란 단체가 누굴 이겼다도 없습니다. 교회가 절을 이겼다 없습니다, 기독교가 불교를 이겼다. 어느 이런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누굴 이긴다. 없습니다. 그런 건 없어요. 내가 부자되면 앞집에 사는 불교신자도 감동받아 교회 나온다 그런 건 없어요. 그렇게 나와도 소용없고요. 사도 바울이 말 잘하고 베드로가 전도해서 구원 받겠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늘 깨지고 주님에게 베드로가 주님 앞에 늘 깨지고 사도 요한이 늘 깨질 때 깨어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구원 받지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다름 사람이 구원 받지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로 구원 시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십자가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아까 배운 것 해 봅시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을 때 무엇이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나만 진리요, 나만 생명이고 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도 오직 하나 밖에 없어요. 예수 이름으로 해야 되요. 기도 할 때도 예수 이름으로 해야되요. 네가 하는 일은 네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네가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네 일로 생각한다면 안된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부를 때는 시작 할 때 부르는 것이 아니고 끝 날 때 불러요. 추체험이라고 하지요! 추가해서 되는 체험, 빨리 하니까 잘 이해 안되지요? 다시 정리 해 봅시다. 체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체험, 이거 돼요? 안돼요? 내가 예수를 믿는 체험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고생했던 체험이 내가 믿는 믿음을 구멍을 내 버려요. 깨뜨려 버려요.

 

주께서 이미 나를 사용하고 있어야 되지 내가 예수 믿고 주를 위해서 일하면 안돼요. 그건 나의 일이 되요. 내 속에 내 일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게 현실인데 우리는 내 중심의 현실을 따로 뽑아내기 위해서 요거는 내가 했고 요거는 네가 했고를 분류시켜 버리면 네가 했고 내가 했고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나의 주체성이, 내 자아가 또 살아서 들어가요. 매일의 일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상에 구멍을 뚫어야 되요. 일상에 구멍이 나야 되요. 구멍을 뚫을 때 남들에게 전도가 되요. 엽전에 구멍 나있잖아요? 우리는 엽전처럼 구멍 난 사람처럼 남에게 전도하는 겁니다. 백지영의 유명한 노래 총 맞은 처럼 구멍 난 가슴에, 제일 핵심 부품이 불타 버렸어요. 평소엔 우리가 몰라요.

 

평소엔 모르다가 상주 터널 갔을 때 알게 되요. 도시락 싸서 수학여행 가고 있는데 옆 차가 신나 싣고 가다 불났을 때 터널은 길지! 불났을 때 죽는 겁니다. 소방관 두 명이 와서 신속하게 대피하게 해서 죽을 사람들 살려 냈잖아요. 만약에 그 현장에 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진작에 죽어야 하는 인간인데, 그동안 철딱서니도 없는 인간을 한탄하시면서 근심 하시면서 극한 인내를 가지고 질질 끌고 오신 거에요.

 

우리의 인내는 없어요. 주님의 인내로 구원 받는 겁니다. “아이고~ 이 성질” 제가 삭개오 이야기 참 좋아합니다. 왜 좋으냐 하면 삭개오가 세리입니다. 돈 장사하는 사람이에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 장사 하려면 정보력에 딸려있습니다. 정부와 결탁되어 있는 사람은 돈을 벌고 정보에 어두운 사람은 돈을 못 벌게 되어 있어요. 세리가 하는 일은 뭐냐하면 정부가 책정한 세금 액수 플러스 나머지는 다 자기 것입니다.

 

따라서 세무, 관리 직원에게 뇌물만 주게 되면 그 적정선이 자기 마음대로 조정이 되요. 그러니까 세리가 부자 될 수 밖에 없지요. 이 말은 삭개오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오늘 날도 삭개오의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와 닿는 거에요. 모든 것이 돈으로 되는 거에요. 이 만큼 내가 돈 벌었다는 것은 능력있는 사람이고 행운아 이며 복 받은 사람이다라는 말이죠. 왜? 돈이 있다는 것이 곧 내 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돈이 있는 데 키 작은 것은 전혀 약점이 될 수 없습니다. 키 커도 돈 없으면 내 앞에 전부 꿇어야 되니까. 키 보다 돈이 더 우선이니까 그런데 키 작은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와 눈빛이 맞춰지는 순간, 그는 예수의 세계에 일부러 편입됐습니다. 돈 있어도 괜찮아요. 키 작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내 인생 아니니까! 네 집에 구원이 이르른 거에요. 메시야가 이르른 거에요.

 

그래서 삭개오의 집은 구원의 뿔을 부각시키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촬영 세트장이에요. 나는 합천에 있는 가건물, 인생 자체가 세트이고 그 세트들이 모여서 주님을 높이는 세트,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높이는 세트, 주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높이는 세트에 그동안 쓰여진 거에요. 전혀 양심 가책 가질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혀 죄의식 가질 필요 없어요. 이제는 이 돈이 내 돈이 아니라는 표시만 내면 되요.

 

그것이 뭐냐하면 네 배로 갚겠다는 거에요.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닌데, 여덟 배도 되요.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잖아요. 그걸 보면서 네 배나 갚아야 성도다 아니에요. 두 배도 괜찮고 10% 보태도 괜찮고 상관없어요. 돈 안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내꺼 아니니까! 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구원이 네게 이르렀다 그 순간 완전히 바꾸어 버렸어요.

 

좁은 길 출판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고가 변변치 않아요. 어머니 집을 창고로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하는 말이 “야야! 이 방에 있는 게 뭐냐?” 책 입니다라고 하는 순간 어머니 집은 날아가고 출판사 창고가 되버려요. 천부 씩 찍어 내니까 그 많은 책이 한꺼번에 팔릴리가 없고 집사님 집에 권사님 집에 전부 다 주님 책이 들어 있어요. 이름이 바뀌었어요. 내 이름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문패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돈, 그냥 있어도 괜찮아요. 자식이 애먹여도 괜찮습니다. 말썽 부려도 괜찮고, 아들 낳아도 괜찮고 딸 낳아도 괜찮아요. 손녀나 손자도 괜찮아요. 어차피 내 인생 아닌데, 내 인생 아니잖아요. 그게 삭개오에요. 회개하고 가난한 자를 도왔다? 아니에요. 회개 할 것도 없어요. 어차피 쳐들어오는 데 내가 주님이 미리 이렇다 한 사람은 회개를 하지요 나의 자유를 사용할건데, 나의 자유를 사용할 틈도 없이 그냥 쳐들어 온 거에요.

 

내가 너희 집 좀 사용해야 되겠다! 아이고 그러시옵소서! 얘야 너희 집을 사용하고 싶다.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렇게 내 놓은 거에요. 마치 나귀를 내놓듯이,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계속해서 하게 하시기 때문에 본문 열두 보좌에 앉아 여시서 12라는 숫자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습니다 만은 12라고 하는 것은 하나에서 나온 12에요.

 

대나무가 있는 데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 마디 중간을 잘랐고 윗 부문을 칼로 탁탁 치는 데 밑에 마디는 강해서 잘 안들어 가고 약한 윗부분을 치면 12갈래로 갈라지면 12는 무엇을 의미 합니까? 하나 됨을 12모습으로 보여주는 거지요. 이것을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무슨 다양성? 언약의 다양성. 하나로 하나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성을 가지고 하나됨을 증명하는 겁니다.

 

발이 눈보고 쓸데없다 못하고 목사 됐다고 집사를 무시하지 못하고 목사를 라이벌로 여기지 말고 각자각자 다양성이 있는 데 한 성령을 마셨지요? 고린도전서에 한 성령을 마셨는데 이상하게 똑같지 않아요. 똑같지 않음으로써 하나됨이 더욱 더 하나됨이 된다는 말이죠. 왜그러냐 하면 모든 것이 다양하니까 사람이 다양하니까 자기 개성을 최종적인 하나로 우기기 십상이잖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성령받은 자와 안 받은 자의 차이를 다양함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겁니다.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한 성령받은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유하면 뭐가 됩니까? 우리는 죄인 되지요? 그게 선교이고 전도에요. 그게 바로 1과 12의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가 하나됨이 더욱 더 다양해지면 12×12×1000을 해보세요. 144,000이지요.

 

모든 성도가 이름이 있다면 144,000이에요. 숫자로 부른 다면 모두가 144,000이에요. 언약적 계산으로 하면144,000이고 인간끼리 소통하는 숫자로 계산하면 144,000이 될 수 없지요. 왜냐 자기를 1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 하나, 너 둘 이런 식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식은 틀린 거에요. 7도 마찬가지 입니다. 7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7일을 만들어 놓고 이것은 역사적 7일이고 묵시에서는 이것이 하루에요.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하루를 대나무 쪼개듯 쪼개면 7이 되는 거에요. 1,2,3,4,5,6,7 다음에 8이 아니고 다시 1,2,3,4,5,6,7 계속 7일이 되는 거에요.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창조물이다 이런 뜻입니다. 창조물을 숫자로 표현하면 7입니다. 그 안에는 완성의 의미에 대해서 무엇이든 풀잎 하나라도 완성되었기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완성의 의미인 7을 완성 숫자로 보는 겁니다.

 

6일 동안 천지를 만드시고 7일 째 쉬셨다. 안식일 날, 이 말은 안식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KAL기 CF의 노래에 보면 KAL기 구름 밑에는 굉장히 요란스러워도 구름 밑에는 조용하잖아요. 그 때 나오는 노래가 (짐 리브스/에니타 커) Wlcome to my wouid~ Won't you come on in~ 기억나십니까? 옛날 건데, 고요하게 밑에선 소나기 내리고 바람 불어도 그런 것이 묵시 세계, 안식의 세계에요.

 

그런데 그것이 밑으로 내려가면 다양해져요. 누가 얻어맞고 터지고~ 교회에서 권총 들고 설치고 칼 들고 설치고 하여튼 밑엔 요란해요. 자기 영역 자랑한다고 교인 몇 명이냐? 헌금 얼마나 나오냐? 저 목사는 뭐 어떻다 저떻다~ 위는 빠빰 빠바밤, 위의 세계는 고요한 세계, 묵시 세계에요. 그 세계가 얼마나 좋은 세계인지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가면서 그 쪽 세계에 있으면서,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있으니까 하늘의 신분을 가지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렇다고 일부러 돌 맞으려고 연출하지 마세요. 너는 그렇게 살아야 되고 나는 춘천 닭갈비 먹어야 되고 우리는 닭갈비 먹어야 되고 한식 뷔페 먹는 것 있어야 되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죽으려고 하는 거에요. 손자 봐주다 얼른 죽으라는 말이에요. 회 먹고 빨리 죽고 단풍놀이 갔다가 빨리 죽으란 말이에요. 단풍놀이 하다가 그냥 죽지 말고 구경하다가 사진 찍고 죽으란 말이에요. 어차피 우리는 하나로 모이니까.

  

그 말은 모인 하나를 위하여 지금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라는 같은 이야기에요. 움직였으니까 하나로 모이고 하나가 퍼지면 다양성이 되고 다양성이 모이면 하나가 되고 그런데 그런 단체, 조직에 포함됐다는 증거는 뭐냐? 어느 경우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만 의인입니다. 십자가라는 숨겨 놓은 하나님의 의, 이것만이 거룩이고, 경건이고, 천국에 통하는 속성이에요.

  

천국은 의로운 세계라서 이 세상 인간의 행함 가지고 완벽해도 안됩니다. 아무도 의로울 수 없고 언약을 다 지킨 분만, 율법을 다 지킨 분만 의를 만들 수 있는 데 그 의가 하나가 되고 1에서 12가 된다면 이제는 1에서 줄이 쭉 내려와서 12가 될 거에요. 이게뭐냐 한 권세에서 나왔으니까 12권세가 되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2제자 뽑을 때 주께서 뽑아 놓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았지요? 12제자들은 자동차 영업 사원들이 아니에요. “야! 너희가 영업사원이니까 알아서 고객들 데려오면 반반 갈라서 수당 줄께!” 이런 것 아니에요.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주의 권세와 가서 그럴 때 그들이 얼마나 자기 자랑 하겠어요. 철이 없었으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막 떨어집디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십니까? “귀신 떨어지는 것 좋아하지 말고 네 소속이 어디냐를 봐라!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봐라!” 네 소속이 귀신 떨어뜨리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 백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요. 주님 죽고 난 뒤에 다 도망갔는데 소용없어요. 다만 귀신을 쫓아내지요.

 

그런데 그러한 방법이 귀신도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개 거품 무는 귀신은 표현적 귀신이고 진짜 귀신덩어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게인들이에요. 점잖고 경건스럽고 성화론을 펼쳐요. 다시 합니다. 12라고 하는 것은 뭘 보여 준다? 1을 보여주기 위한 다양성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야곱에게 아들이 12이 있잖아요? 야곱의 이름이 바뀌어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의 이름이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그런데 예수는 이름이 이스라엘 그러면 네 자이고 예수는 두 자 인데 왜 같은 이름이 아니잖아요. 이러잖아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지요? 임마누엘은 네 자 이고 이사야 7장에 보면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름이 임마누엘이에요. 이름을 임씨로 지어서 임마누엘 이렇게 되야 되는데 이름이 예수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지자 말하고 안 맞잖아요? 이 말은 문자적으로만 예언한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다 엉터리인줄 알아라는 거에요.

  

성경을 문자적인 완성으로 푸는 인간들은 다 엉터리 해석인줄 알아라는 이 말입니다. 제가 전에 그랬잖아요. 국어 시험문제 이야기 했지요? 다음에서 이 지문과 거리가 가장 먼 것은? 무조건 ⑤번이라고 지문에서 부터 ① ② ③ ④ ⑤ 순서상 ⑤번이가장 멀잖아요? 바보같잖아요? 거리를 생각하는 거에요. 내용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임마누엘은 이름이 네 자인데 왜 이름이 두 자라고 합니까?라고 누가 물어 본 적이 있어요.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도 바보이고 남들도 바보이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식으로 전부 다 눈 감고 있어도 눈 떴다고 우기고 있으니까 다 눈 뜬줄 알고 있어요. 이름은 기능입니다. 어떤 기능? 사적인 기능. 현재 우리 이름을 지우는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근호라는 이름을 주께서 불러주면 안되요. 왜냐하면 이근호라는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나의 추억을 내가 유지해야 되는 사람이 되어 버려요.

 

나와 관련된 것들은 어떤 고귀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요. 그런데 이름을 지워버리고 예수 이름이 들어가 버리면 내가 갔다 버린 추억들이 있잖아요? 나의 어두운 추억들도 사실은 주께서 필요해서 다 생겨나게 한 사건들인데 우리는 내 잘남이 중심이라 내 의로움과 잘남이중심이 되버리니까 나에게 유리하다 싶은 것은 남겨두고 필요없다 싶은 것은 다 갔다 빼버리고 이것은 반칙입니다. 언약이 아니에요. 자기의 역사, 드라마 짜는 거에요.

 

그 드라마엔 언약이 없다고 주께서 거부 하십니다. 이것은 그냥 다양성이에요. 주님과 관련 없는 다양성이에요. 주님과 관련이 있다면 어떠한 다양성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되지요. 누가복은 16장에 보면 주님이 이상한 이야기 하십니다. 흔히 불의한 청지기라는 말 하지요? 횡령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회사 넘어가게 됐습니다. 부도나게 되 버렸어요. 사장님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직원 잘못 들여 가지고 돈 다 떼먹고.

  

그런데 그 사람이 오히려 너희들보다 더 의롭다고 했지요? 더 지혜롭다고 했잖아요. 더 의롭다는 말이에요. 이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이고 그 안에 내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혜롭게 사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다는 말이죠.

 

뭐가 잘못된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말아먹는 세상이죠? 어두움의 세상이죠? 그것을 놓친거에요. 왜 놓쳤는가 하면 똑같은 한 통속이기 때문에 내가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속해있는 세상도 괜찮은줄 알고 있어요. 우아한 세상인줄 알고 있어요. 살기에 괜찮은 세상인줄 알고 있어요. 송강호 나오는 영화 우아한 세계있어요. 이게 얼마나 역설적인지 깡패거든요. 살기 힘들어요.

 

얼마나 우아하게 살고 싶은 세상을 염원했으면 깡패생활을 했겠어요? 비록 깡패지만 내가 그리던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한 세상을 늘 꿈을 버리지 않는 현대인들을 꼬집는 영화가 우아한 세계입니다. 모든 게 내 뜻대로 안될 때 화가 나서 역설적인 이름을 붙인 거에요. 세상은 우아하지 않습니다. 고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냐 내가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더러운 내가 있는 데 어떻게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죄인 중에 괴수가 있는 데,

  

차라리 나도 더럽지만 너도 더럽고 모두 다 더럽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예수님이 왜 풍덩 이 땅에 들어오셨는지를 그 순간 더 뚜렷하게 부각되겠지요! 여기 계신 목사님이 불꽃놀이 사진을 십자가마을 사진첩에 올려놓으셨는데 불꽃놀이를 생각해 보면 그 특징이 아름답지요? 불꽃놀이 할 때 그것을 안 보는 사람은 분명히 소매치기일 것입니다. 불꽃놀이를 보면 무얼 느끼느냐? 허무해요. 불꽃놀이 끝나면 다 흩어지지요.

 

불꽃이 있던 하늘을 다시 보게 되면 정적만 흐르지요? 연극이 끝난 후에도 정적만 흐르지요? 조명이 꺼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굉장히 요란한 듯 싶지만 나만 죽으면 조용한 세상이에요. 내가 분주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도 분주한 듯합니다. 나 같이 착각하는 사람들이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이 분주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남미 쪽에 마야민족이나 인디언들은 산골짜기나 산 위에 살잖아요? 산 위에 사는 사람들은 해만 지면 자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많아요. 해가 지면 자고 세계에서 제일 하늘이 맑아요. 별만 보겠지요? 별만 보니까 중국의 무슨 문제나 북한의 무슨 문제든 다 아무관심 없습니다. 그저 정적만 흐르는 아주 고상한 우아한 세계입니다. 물론 복음은 모르겠지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던 상관없이 결국 인간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 남긴 세상에서 그 짧은 하나의 배치물이고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12보좌를 누구에게 확정짓지 마세요. 12보좌는 이미 요한계시록에서 그치지 않고 뭐로 퍼졌습니까? 12×12로 새끼를 쳐 버렸어요. 1000을 쳤어요. 1000 번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의 한계를 말합니다. 12×12×1000을 곱하니까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특징은 뭐냐하면 이 세상 전부가 말씀의 한계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안에 갇혀있다. 못 빠져 나간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고 너희들이 얼마나 십자가에 반대되는 짓들을 했느냐? 그걸 보여주면서 그런 심판 가운데서도 무엇이 부각됩니까?

 

그런 불구덩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새로운 피조물들은 불에 대이지도 않으면서 흰옷입고 천천히 데롱데롱 주님의 나라에 신부로써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나의 거대한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의 실제된 사건을 요한계시록의 사건이 어느 사건이냐고 묻지 마세요. 당신이 오늘 밥 먹는 사건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17장입니다. 18장이고,

 

이걸 찾는다고 전쟁 다 뒤지고 전쟁, 역사도 개뿔도 모르면서 시사 역사 동원해서 그것에 관련된 휴거나 소설이에요. 자기가 다 편집해요. 자기가 편집국장도 아니면서 드라마를 써 가지고 그 내용은 결국 뭐냐 자기 하나 구원 받는 것으로 스토리를 잡아요. 바코트니 베리 칩이니 받으면 안된다는 거에요. 인간 자체 세포 안에 이미 정보가 들어있어요. D.N.A 안에 정보는 어떻게 빼낼건데요?

  

세포 하나하나 다 꺼집어내야 되는 데, 인간 자체가 정보의 변형체에요. 트렌스포머에요. 정보의 트렌스포머에요. D.N.A를 R.N.A가 복사해서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정보의 변형체에요. 그 몸을 누가 갖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있는 몸이면 주님의 형상이 들어있는 것이고 주님과 관련 없고 악마가 들어 있으면 주의 사람이 아니고 다만 성도는 주님과 우리 사이의 그 과정을 깊숙이 개입해서 우리가 느낄 때 성도가 되는 거에요.

 

세포하나하나 몸둥아리 하나하나, 여기 얼굴 살짝 다쳤을 때 세포 한 10개 정도 죽었을 거에요. 주님 것 날라 갔어요. 세상의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되고 주님의 뜻대로 되는 거에요. 어떤 것 하나라도, 그럴 때 마다, 사건마다 멀어보이던 주님이 이미 나를 작업을 으싸으싸 발동소리 내면서 매일 숨소리 내면서 코로 호흡하고 숨 내쉬게 하면서 만들어 내시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욥이 하나님에게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물으면 하마가 눈에 보이냐? 산 염소 보이잖아! 욥아 네가 보고 있는 걸 봐라! 별이나 산 염소, 하마. 하마가 킁킁 내는 소리나 악어의 긴 꼬리,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요? 주님이 만든 기계였습니다.

 

그런데 “욥아! 너는 네가 기계가 아닌 줄 아나? 내가 그렇게 사용하겠다는데 네가 왜 그렇게 말이 많냐? 내가 고난주겠다는데 네가 왜 주냐 마냐 하느냐?” 지금 네 속에 자아가 있구나! 너나 네 친구들이나 다 똑같다. 자아가 있으니까 내가 의롭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로 가기 전에 반드시 이런 바탕이 깔려 있어야 되요. “나는 잘났다! 나는 의롭다!”라고 할 때 이런 팔레트, 이것이 한방에 다 깨져야 돼요.

 

내가 잘난 것 맞아요. 그러나 내 것이 주님 것으로 등기 이전 됐기 때문에 잘난 거지요? 성도의 신분은 천사도 부러워하는 신분이에요. 전혀 무시당하면 안돼요. 잘났어요. 잘 났는데 소속이 바뀌어서 잘난 거에요. 소속이 바뀌면 우리는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사명을 해야 됩니다. 그런 사명을 미션 임파셔블이라고 하지요. 제 5전선. 어릴 때 보던 미국 드라마에요. 맥가이버 보다 더 재미있어요.

 

우리에겐 불가능한 사명이에요. 그러면 높은 산에 올라갈까요? 빌딩에 올라갈까요? 아프카니스탄에 선교하러 갈까요? 그냥 하던 대로 회 잡수세요. 그냥 회 먹고 그냥 라면 끓여 먹고 그냥 사셔도 그것이 주께서 주시는 사명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명을 우습게 보지마시고 괜히 어려운 과제를 내가 내지 마세요. 할 수 있는 것만 하세요.

 

할 수 있는 것만 하시고 뒤 돌아봐서 “내가 이렇게 감당치 못할 일을 했네!” 이렇게 스스로 주 앞에서 놀라세요. “내가 라면을 끓이다니? 스스로 놀라세요.”이런 주의 일을 내가 하다니? “ 본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남들 같으면 라면 잘 끓였다고 감사 하겠어요? 안 하지요? 그런데 나는 감사하잖아요. 천사가 흠모 할 신분이지요.

 

어디서 그런 감사가 나옵니까? 늘 끓이던 라면인데, 작은 것도 아름답고 시시한 것도 귀하고 살아있는 것도 고맙고 죽으면 더 고맙고, 실패라는 단어도 없고 성공이라는 단어도 나에게 굳이 붙일 필요도 없고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자체가 주님의 성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12보좌에 앉을 권세가 함께 있어 예수님만 증거하고 선교하는 사명으로 산다는 것을 저희들이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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