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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21:38:35 조회 : 555         
사무엘상 42강 (소유욕), 마태복음 104강(임금)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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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115.♡.251.218) 18-11-08 23:22 
소유욕(삼상 15장7-24절)
대전- 42강

 이근호


2018년 9월 1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7-24



 (삼상 15: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삼상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삼상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삼상 15: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무엘 상 15장 7절부터 9절 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말렉과 전쟁을 유발시키셨는데 여기서 아말렉이 먼저 공격했다는 것을 아셔야 되요.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말렉을 붙여 공격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냐 하면 죽음의 의미 즉 죽음이란 게 뭐냐를 알게 하는 겁니다. 보통 죽음이라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 목숨이 끊어질 때 비로소 죽음을 안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죽은 당사자만 알지 살아있는 사람은 타인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이상 죽음에 대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죽음이란 것을 나중에 알면 되지 지금 살아있을 때는 구태어 죽음을 알아야 되냐는 생각들을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죽음을 알게 한다는 것은 인간을 처음 만들 때는 죽음이란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죽지 않을 인간을 만든 거에요. 죽지 않을 인간을 만들어 놨는데 무슨 난리를 쳐서 죽게 되는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의 의미가 하나님 앞에 더 중요한 거에요. 왜냐하면 죽음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어야, 갖고 있어야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도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아는 순간이 하나님이 뭔가를 알려 줄 때인데 그것이 뭐냐하면 죽음입니다. 인간에겐 죽음 없이는 하나님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은 살아있다고 우기는 인간에겐 알 길이 없습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가짜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과는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쪽에선 죽음을 품고 왔는데 그것을 마중 나오는 인간은 죽음을 도외시 한다는 것은 그 둘 사이에 대화가 될 리 없지요. 교회에 가 보세요. 죽여 주세요 하고 나오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앞장 세워 우리에게 나타나셨는데 교회에 가면 죽여 달라는 사람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 교회가 절간하고 똑같은 거에요. 아무 의미 없는 곳입니다. 살아 있는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뭐가 빠졌습니까? 무슨 요소가 빠졌어요? 죽음의 요소가 없잖아요. 살아 있는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헌금을 한다. 뭐가 빠졌어요? 죽음이 빠진 거에요. 죽음이 빠지면 가상 신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려 달라고 가상 신을 만들어 놓고 비는 거에요. 알다시피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할 수 있는 어떤 요건도 없어요.


하나님과 함께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에요. 하나님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부러 가져오신 죽음 안에 우리가 합류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사귀는 중입니다. (죽음 안 = 십자가 안)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피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서 같은 말이에요.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 서울에 있는 사람과 재전에 있는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안에 있는 사람과 죽음 밖에 있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인데 한국의 기독교 150년 동안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하니까 말하는 나도 성경과 다른 소릴 하는 느낌입니다. 한국 교회는 교단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어느 교단에 속합니다. 어느 교회에 속합니다만 이야기 했어요. 등록 하세요. 백날 교회에 속해 있어도 살아 있는 체 가는 거에요. 만약에 지금 여기서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가정 안으로 들어가요. 가정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가정 안으로 들어가요.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과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상관없거든요.


지난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 복을 달라고 힘을 달라고들 하는데 제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를 했지요. 황금 알을 매일 낳으니까 그 안에 뭐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까? 황금 덩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지는 황금을 만드는 기계가 그 안에 있는 줄 알았어요. 죽여 놓고 보니까 보통 거위와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백숙이라도 해 먹었는지, (웃음) 똑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잖아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한번 그렇게 쪼개 보자 말이죠.


쪼개 보니까 뭐가 들어 있어요? 설교 시간에 말했듯 그 안에 황금이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능력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의 무시가 들어 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서의 버림받음이 들어 있는 거에요. 그 버림받음이 풍랑을 잠잠케 했고 그 버림받음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버림받음이 우리 죄를 사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나처럼 세상에게 버림받을 수 있느냐 따를 수 있느냐를 묻는 거에요. 당당하게 버림받는 그 능력이 천국에 들어 온 것이 확인되는 것이고 버림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남에게 무시당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예수는 상상하지 마세요. 다른 예수는 없어요. 복음 가지고는 목회 안 됩니다. 이런 소릴 하는 데 무슨 목회가 되겠어요? 안 됩니다. 헌금하려고 돈 넣으려다 빼요. 택도 없는 소리지요. 절에 가던 사람이 교회로 올 때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절은 산에 있어서 머니까 가까운 교회로 가는 거에요. 그 인간 안 변했습니다. 변하지도 안는데 천국에 간다? 이건 예수님께서 극구 말리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가 이 세상을 실컷 봤잖아 보고 본 것을 통해서 구성된 사고방식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인생관이랄지 가치관.


그렇지요? 그냥 보기만 했을까요? 인간이 듣기만 했을까요? 이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 가지고 구성되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인생관이고 가치관이잖아요. 그런 가치관과 인생관은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천국은 그런 구성된 사고방식으론 넣어 주지 않는 곳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떤 사고방식이어야 되냐고 묻겠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사고방식, 예수님이 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겁니다. 30년째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이야기를 해서 알아들을 것 같으면 말도 안하지요.

교회가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라고 옛날부터 이야기 했거든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교회가 내세우는 예수는 가짜 예수에요. 왜? 내가 안 변하는데 30년 40년이 되도 내가 안 변했어요. 교회에 다니면서 뭐를 하냐 하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플러스에요. 내가 하는 일도 꽉 쥐고 있고 또 교회에 다니면서 취미 생활 하나 더 보태고 8+1이에요. 9+1이든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6 이라면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서 온전히 7로 해서 살아 있을 때는 6으로 죽을 때는 하나 더 보태서 7로 하려고 이것을 제가 보험 드는 것과 같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교회에선 그게 맞는데 성경을 보면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은 성경을 안 보거든요. 교회엔 가도 성경은 안 봐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전쟁이 없이는 죽음의 의미를 모릅니다. 아말렉이 쳐들어 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붙여 붰을 때 지난 설교에서도 했지만 모든 전쟁은 여리고 성 안에 있는 사람이나 여리고 성을 돌고 있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별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설교하면서 막 살아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착하게 살다가 악하게 사는 것으로 오해들 하는데 그게 아니고 막 살아라는 말은 마음을 낮추라는 이야기입니다. 악하게 사는 게 마음을 낮추는 것이 아니에요. 악하게 사는 게 자랑인줄 알고

 마음을 낮추라는 것은 번거로운 것이나 귀찮은 것이나 더 이상 이런 게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한 평생 살면서 이런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주님만으로 좋아요. 이런 고백이라면 무엇이 무섭지 않으냐 하면 번거로운 일이나 귀찮은 일이니 짜증나는 일이 더 이상 겁나지 않아요. 주님만으로 족하게 되면 사람들은 살면서 번거로운 일이 생길 까봐 미리 겁을 내요. 집 하나를 사고 옮길 때 서류 하는 것을 겁내잖아요. 기차 표 예매하는 것도 짜증나요. 예수님만으로 좋아요를 두 자로 하면 자유라고 해요. 어떤 번거로운 일이라도 와라 나는 그것을 귀찮게 여기지 않겠다는 거에요.


누구를 만나도 괜찮아! 나는 주님만으로 족하기 때문에 그런데 귀찮고 번거로운 있다는 예수님 만으로 좋은 rpo 아니에요. 뭔가를 기대하는 것 때문에 일이 짜증나는 거에요. 그런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있다는 것은 뭔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예수님만으로 족하다는 말은 기대하는 것이 끝났다는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끝났어요. 타인을 만난다는 것, 타인을 만날 때 두렵지 않던가요? 여러분이 나중에 상견례 할 때 하번 보세요. 지금은 웃지요. 며칠 앞두고 한 번 보세요. 멸 벌 되지도 않는데 이 옷 골랐다가 저 옷 골랐다가 이거 입어 볼까? 저거 입어볼까? 상당히 두려워요.

그런데 예수님만으로 족해요 할 때는 사돈이 어떻게 하든 아무 신경 안 써져요. 그 쪽이 나를 뭐라고 이야기 하든 그래서 파토 나도 상관없어요. 기대를 안 하는 거에요. 기대를 안 하는 방법은 우리가 주님이 아는 죽음 안에 있어서 죽음은 지옥이거든요. 여기가 지금 지옥이라 해 봅시다. 뜨거워서 나가고 싶은데 문이 잠겨 못 나간다고 해 봅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살려 주세요라고 밖에 할 수 없지요.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에서 외칠 수 있는 성도의 고백은 뭐냐 주님 살려 주세요라고 밖에 안 하지요. 주님이 살려 줬잖아요. 죽음에 있을 때, 지옥에 있을 때 주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주님으로 완결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겁니다. 기대할 것이 더 이상 없어요.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만남에서 이쪽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고 저쪽 아말렉은 언약이 없는 비언약입니다. 그러면 언약의 최종 모습은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이지요. 예수님의 죽음이지요. 그래서 이쪽엔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 있고 저쪽엔 없는 거에요. 아말렉은 죽음을 몰라요. 이스라엘은 이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죽음의 의미를 아는 거에요.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게 아니에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의 의미는 그냥 꼴가닥 해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으면 살다가 힘들면 자살하면 되요. 편히 쉬려고 자살들 하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편히쉬어요.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 끝입니까? 끝이라면 제가 여기 올 이유도 없어요. 그 다음은 본격적이라니까요. 그 지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무서운 것이냐 하면 차라리 이 땅에서 불의한 뇌물로 친구를 사는 남에게 횡령했다는 소리를 듣고 사는 게 낫다는 거에요. 지옥에 비하면 이 땅에서 너는 돈이나 횡령하고 감옥에나 가라고 지적 받고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차라리 저 지옥보다는 훨씬 옳은 선택이라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는 누가 복음 16장에 나옵니다.

 (히 9: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주님께서는 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제 파악하라는 거에요. 자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착해서 뭐할 건데 착한 건 써 먹을 데가 없다니까요. 아무 쓸데없어요. 어차피 지옥 갈 거 착하다고 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나처럼 죽으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면 구원에 대한 그림이 있어요. 사람이 바다에 빠져 있는데 잘 생기고 수염도 멋있게 하고 키도 크게 해서 물에 빠져서 손을 내밀어요. 성화라고도 하지요. 거기에 보면 파도가 막 치는데 주님께서 오른 팔로 왼 팔로 하면 안 되요, 오른 팔로 딱 잡는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서 문제점이 뭐냐하면 물에 빠진 인간을 건져 낼 때 그 인간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고 기독교적이지요. 전혀 성령과 관계없어요. 물에 빠진 인간을 그냥 건져 내는 거에요.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어떤 의도로 그린 것이냐 하면 값없이 건진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그린 거에요. 아무 댓가 없이 주의 능력 있는 오른 손으로 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럴 것 같으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어요. 다니엘 서 5장에 보면 나오지요.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오지요. 나와서 글씨를 쓰잖아요. 그것처럼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예수님이 오셔서 오른 팔로 전부 하나씩 건져내면 되는데


 내가 잡을 께 하면서 건져 내면 되잖아요. 다니엘 서 5장 5절에 보면 손가락이 나타났는데 이간 누구 손가락이에요? 주님의 손가락이잖아요. 주님의 손가락이 글씨만 쓰지 마시고 그냥 손잡고 데려가면 되는데 왜 성화처럼 안하시느냐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건지시죠.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했습니까? 거부했습니까?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옆에 베드로도 따라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제트 팔처럼 팔이 쭉쭉 늘어나서 화롯가에 있던 베드로의 멱살을 잡고 가자! 천국으로 이렇게 했으면 갔을 텐데 그게 아니고

(단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베드로에게 무슨 고백을 하게 만듭니까?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는 고백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구원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베드로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있을게 아니에요. 거기에서 구성된 메시아상이 있을 거에요. 그것을 베드로는 일치시키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메시아가 아마 저 분 일 꺼야 라고 했는데 주님은 냉정하게 그게 아니라고 하므로 말미암아 현재 베드로를 건지실 의향이 없으신 거에요. 아브람을 건지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건지는 거에요. 아브람을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그 인간과 상대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건짐을 받아야 되요. 좀 충격이 되겠지만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건지시는 거에요. 제가 지금 너무 나간 겁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영이 있는 사람만 건집니다. 같은 이야기에요. 어제 농협에선가 50대 아줌마가 강도짓을 했지요. 흉기가 뭐였어요? 공사장에서 못을 쏘는 총이지요. 주께서 성령을 우리 속에 못을 쏘듯 쏘아 버린 거에요. 주님이 먼저 쏜 거에요. 왜 우리는 주님을 무시하니까, 주님과 상종하기 싫어해요. 나의 가치를 인정 안 해 주니까, 내가 예수 믿는 노력의 가치를 인정 안 해 주니까,

예수님을 탓할 것 없어요.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를 건지는 것을 그렇게 섭섭해 하지 마세요.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건지려고 했던 존재가 우리에요. 거울아~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화장 빨이 제일 좋으냐? 이런 식으로 그러면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화장이 안 먹습니다. (웃음)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만남은 언약 대 비 언약의 만남인데 아까 그것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이야기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라고 해야 하냐하면 왜 죽어야 됩니까? 해야겠지요.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이스라엘은 무슨 일을 해야 하냐 하면 아말렉을 진멸해야 되요.


본문 15장 9절에 보면 진멸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지요. 진멸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아말렉을 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소위 가진 자의 여유로 보는 거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르치려 하는데 지금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가르치려고 하는 거에요. 진멸이란 다 멸하는 것이 진멸입니다. 100% 다 멸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하면서 자기들이 저 쪽을 죽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남을 죽여 버리면 그 때는 죽음의 의미를 몰라요. 왜냐하면 죽이는 나는 안 죽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나는 살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죽여야 될 자도 내가 죽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옛날 신파극에 보면 애가 남의 집에서 도둑질을 하니까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잘못한 애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회초리를 주면서 자기의 종아리를 걷고 네가 나를 때려라! 자식을 잘못 키운 벌은 네가 잘못이 아니라 내가 맞아야 된다하며 자기가 맞지요. 그 다음의 순서가 그것을 보고 자식이 아버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마지막은 울면서 서로 껴안고 끝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진멸하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것을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누구 때문에 죽으신 거지요? 죄인들 때문이지요. 죄인들에 의해서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가치관에서는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고 우리가 예수를 죽여도 죽일만한 권한이 있다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돌아 오셨잖아요. 죽으신 분이 돌아왔다는 말은 누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죽어 마땅하지요. 지금 착하고 안착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착하면 구원 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내가 아직 안 죽어 본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미리 아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안 죽어야 돼 가 아니라 비로소 나는 죽어 마땅한 것을 알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알기 위해 태어난 거에요. 1900 몇 년도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 관련지어야 하는 거에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타인이에요. 제대로 된 타인을 만나야 되요. 인간은 타인을 제대로 안 만나면 항상 자기 생각에서 출발해서 자기 생각으로 귀환됩니다. 수련회 때 사람들을 보면 각자 자기들의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아는 사람이 이 만큼 있고 플러스로 주님을 추가로 만나는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진장한 나를 알게 해주는 타인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남편 될 사람을 만나든 아내 될 사람을 만나든 저 사람과 만나 함께 살아도 내가 누군지 몰라요. 평생 살아봐도 남편이 안 알려주고 평생 살아도 아내가 나를 모르는 거에요. 둘 다 살면서 누군지도 모르고 그때그때 감정대로, 기분대로 살아가요. 진장한 주님(타인)은 싸우라는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양심 있는 우리가 남을 진멸하겠습니까? 타인을 죽이겠어요? 남을 죽이겠어요?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착각하며 봐주겠지요.


그동안 이스라엘이 남(타인)을 생각할 때 평소에 어떤 식으로 남을 생각했는가를 아말렉을 다루면서 자신들의 진면목이 다 드러나요. 귀한 것은 살려주고 쓸모없는 것은 죽였다가 되거든요. 이것이 평소에 귀한 것을 이스라엘은 소유하고 싶은 거에요. 인간에겐 소유욕이 있는 거에요. 이것을 가져서 뭐 할 건데? 가져서 살아있는 내가 더 살고 싶은 소유욕이 있는 겁니다. 사람은 왜 화를 냅니까? 네 소유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겁니다. 내가 그건 안 갖고 싶은데 가지라고 해서 화가 나는 거에요. 또 화가 나는 것은 나는 그것을 갖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내 소유가 안되서 화가 나는 거에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 것으로 하는데 지장이 있어 화를 내는 겁니다. 제가 울산 강의에서 (나 ⟶ 내 것⟶소중한 내 것)한 번 소중한 내 것이 되면 절대로 빼앗기기 싫은 것, 그 다음은 내 것이 왜 소중하냐? 나의 의로움을 반영하기 때문에 나는 이 정도는 가질만한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거에요. 간단한 예로 부잣집을 봅시다. 부잣집이 자랑하는 것은 부동산인 집이 내 것이라 하지요. 길에 지나는 것을 보고 목욕탕에서 옷 벗으면 부자인지 가난한지 몰라요. 약간 차이는 나요. 거의 몰라요. 그런데 목욕탕에서 나와 타는 차를 보면 단박 표시 나지요. 그 차를 건드리면 내 것을 건드리게 되는 거에요.

왜 건드리지 마라는 것이냐 소중하니까 다르게 말하면 내 것이 소중하다는 것은 내가 소중한 거에요.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이때 화를 내는 겁니다. 나도 그 만큼 소종한데 내가 소중함을 티낼 방법이 없네, 가진 게 없어서, 가진 게 빚 밖에 없어서 남에게 내가 소중하다고 외칠 근거가 없어요.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금융에서는 신용도라 해요. 대출할 때 신용도 등급보고 하잖아요. 저는 소중합니다. 대출해주세요. 뭘 보고 해줘요. 담보 잡을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만 나는 내가 소중합니다. 하면 가 주세요! 당신에게 대출해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신용 안에서 움직입니다.


신용 없는 사람은 죽어 마땅할 정도에요. 세상에선 냉정하게 신용이고 가정에서나 개인적으로는 신뢰이고 같은 이야기입니다. 남북 관계에서도 신뢰이고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뢰 관계지요. 신뢰 또는 신용, 근거가 있어야 되지요. 담보가 있어야 되고 신용의 뜻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희안하지요. 비슷한 말도 아니고 정 반대되는 말이지요. 왜? 담보가 있어야 되니까, 담보를 신뢰하는 것이지 나는 너를 신뢰하지 못한다. 담보가 있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신뢰할 께! 방금 이야기한 이러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습관처럼 몸에 배였어요.


내 소중한 것을 위해서 타인과 관계해야 되고 타인을 통해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살아가는 재미이다라는 겁니다. 막 결혼한 새댁들이 모여 무슨 이야기들 합니까? 저기의 남편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해 주는 지, 자기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이야기하잖아요. 커피숍에 모여 앉아서 뭐냐하면 나를 보호해줄 타인이 적어도 이 정도야 하고 자랑하는 거에요. 다들 그렇게 해 왔지요. 그게 바로 내게 필요한 타인이에요. 무조건 나는 소중해요. 소중한 것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그런 타인을 원합니다. 이 타인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나에게 필요한 타인이라는 범주 안에 하나님을 집어넣고, 예수님도 집어넣고 자칭 신자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유욕입니다. 그런데 이 소유욕이 죄라면 이 죄를 알게 되는 것이 자유입니다. 내가 뭔가 안 가져도 구원되는데 뭔가 소중한 것을 찾는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나의 죄가 된다는 사실. 이것을 아말렉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되는 겁니다. 사울이 그럽니다. 저건 귀한 것, 진멸하지마! 것 죽이지마! 소중한 거야!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아말렉 전쟁을 통해 보여줍니다. 저 살찐 양, 살찐 소, 기름진 것들을 그러면 그 나라는 언약의 나라가 아니라 사울 본인이 살아가는 인생관이 확산된 것 뿐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사용하신 것은 그런 소유로 인해 잘 되기를 바라는 바로 죽어 마땅한 인간에게 죽음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아말렉을 맞닥뜨리게 하신 거에요. 이러한 전쟁이 없으면 사울은 내가 왜 죽어야 해? 내가 뭘 잘못해서 죽어야 해?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데! 이 만큼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사울의 모습이나 아말렉 사람의 모습이나 사실 똑같아요. 죽임당해야 될 적이나 죽이는 이스라엘이나 똑 같아요.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살린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똑같은데 누구를 정죄합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했는데,


이렇게 남을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에게 주님이 벌이신 전쟁은 뭐냐?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죠. 저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말은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을 의시대고 있는 거에요. 주님이 바닥에 글씨를 쓰실 때 그 다음 차례는‘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죄를 쓰시는 겁니다. 주님은 그래 잘 던졌어! 그런데 네가 던질 돌로 너도 한번 맞아봐라 이거에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끼리 만날 때 그 사람은 몰라요. 주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때 왜 그 사람을 만나게 했는지,


그 사람이 나를 대하면서 하는 사고방식이나 내가 평소에 사람을 대하면서 하는 사고방식이나 얼마나 똑같은지, 그런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같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너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나는 살아남아야 돼! 속으로 미안허이! 이렇게 되는 거에요. 하지만 미안할 것도 없어요. 둘 다 죽어야 하니까. 구한 것은 남기고 하찮은 것은 죽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말렉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마땅히 진멸돼야할 민족이라는 것을 까발리십니다. 그럴 때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오히려 내 힘으론 빠져나올 수 없는 족쇄를 주님께서 의미 있는 타인을 보내 비로소 빠져 나올 수 있게 되는 거에요.

어떤 모습으로? 의인의 모습으로? 아니! 천하의 죄인의 모습으로 빠져 나올 때 주님은 말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그 죄는 흉기를 들고 못 총을 쏴야 죄인이 아니라 소유욕 자체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인 안될래야 안 될 수 없게 만들어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그래서 폭망 했다고 하잖아요. 폭망 했다는 것은 소유욕이 있었다는 거에요. 자유를 못 얻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만으로 좋아요가 안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뭐가 두렵다는 거에요. 다음에 또 망할까 싶어서 뭔가 기대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은 성도 주위에 전부 아말렉을 두십니다.

모든 타인과의 만남은 전쟁입니다. 가수 임재범의 노래 중에 너를 위하여라는 가사에 전쟁 같은 사랑~ 사랑도 전쟁이에요. 사실 전쟁이 아니라 전투입니다.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어요. 전투에서 이긴 것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전투에서 적이 지면 물러났다가 다음에 다시 보자! 하며 또 달려들지요. 전투는 온전한 게 아니에요. 사소한 전투는 계속 일어나요.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겨야지요. 게임 오버가 돼야 되요. 끝났어요. 이미 주님이 나를 밟았어요. 그냥 꽉 밟아버렸어요. 백날 튀어 봐야 안에 있는 소유욕이 튀는 거에요.


오늘 강의 제목을 부력으로 할 까 합니다. 부력이란 눌러도 떠올라요. 상한선을 누가 정하냐 하면 본인이 정해요. 내가 이 정도 내려가는 것은 폭망이 아니고 이 정도는 망한거다. 본인이 정해요. 이 정도 올라가면 얼추 성공한 거다. 상한선과 하한선을 만들어 놓고 하루 종일 그 생각해요. 주여! 오늘도 무사히, 이건 무슨 뜻입니까? 상한선과 하한선 그 사이에만 있게 하옵소서! 하한선으로 내려가면 난 삐질거야! 이런 식으로, 소유욕입니다. 모든 전쟁은 인간 속에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아말렉 전쟁을 통해서 알려 줍니다. 사무엘 상 15장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이 먼저 쳐들어갔어요? 아말렉이 먼저 쳐들어 왔어요?


아말렉이 먼저 쳐들어 왔지요. 아말렉을 두 자로 하면 타인이지요. 타인인 아말렉이 왔다는 것은 평소에 이스라엘이 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는 겁니다. 남을 어떻게 생가하라 했나요? 하나님은 진멸하라고 했지요. 진멸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낸 타인은 너희가 아직 죽기 전에는 모르는 죽음의 의미를 타인으로 인해 깨닫게 하는 겁니다. 죽음의 의미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왜 죽어 마땅한 가를 타인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 거에요. 그 방법으로 진멸, 즉 다 죽여 버리는 거에요. 그런데 사울이 다 죽입니까? 안 죽입니까? 다 안 죽이지요.


안 죽인 이유가 뭐냐하면 진멸하라고 한 아말렉 안에는 본인이 탐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사울이 평소에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귀한 것, 자기에게 더 소중한 것은 챙기고 자기에게 안 좋은 것은 쓰레기처럼 내어 버리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가꾸어 온 것입니다. 왜 가꿀까요? 그것은 내가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꼭 살아남아야 되는 삶의 의미에 치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진멸하라는 아말렉을 그 중에서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남겨두고 쓸데없다고 여기는 것들은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의미를 알기보다 자기 살고자 하는 본색이 노골화 되었지요.

이 사고 방식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이 왔을 때 사람들은 현재 나에게 소중한 것이 있지만 예수님을 하나 더 보태면 플러스로가 돼서 이것도 소중하지만 저것도 소중해서내게 소중한 것 +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그 소중한 것에 의해서 천국 가겠지 하고 생각하는 거에요. 전혀 달라진 게 없지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오른 손으로 건져 낼 때 물에 빠지기 전에 인간을 그내로 곤져 버리면 건져 낸 인간이나 물에 빠진 인간이나 달라진 게 없잖아요. 우리는 자기 형편 아쉬운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건져주는 메시야이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그건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달라져야 되요. 주님이 바깥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니고 직접 구원하신 주님은 아예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지요. 니가 죽음의 의미를 알아? 이런 식으로 너는 살고자 하잖아? 나는 죽기 위해 왔다는 거에요. 니가 알고 있는 예수 아니야! 정 반대의 메시야가 온 거에요. 인간은 왜 살고자 합니까? 바로 소유욕 때문에 귀한 것을 살려 두는 이유도 귀한 것들을 끌어 모아서 나에게 장착 시키면 사는 데 보다 유리 할 것이라 생각해서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을 살려 두라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죽여라!


그런데 사울은 다 죽이지마! 결국 사울이 기대하는 세계는 천국이 아니고 누구의 세계입니까?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천국이지요. 자기 자랑하는 천국, 가짜 천국, 엉터리인 있지도 않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능력을 행할 때 그 능력이 궁금했겠지요. 예수님을 쪼개 보니까 뭐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까? 사람들에게 당한 멸시가 들어 있어요. 무시당한 것이 우리를 용서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내가 내 안에 들어오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해도 예전엔 나는 무시당하면 안돼! 무시당하면 안돼! 나는 소중하니까! 막상 우리가 버림받아야 마땅한 죄인인 것을 예수님으로 인해 알게 되니까,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그 죄를 알게 되니까 그 죄를 용서하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부터는 오히려 무시당해도 짜증나니 않는다는 능력이 이미 천국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에요. 나보다 누가 더 소중해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보다 소중하니까, 예수님만으로 소중하니까, 예수님만으로 좋으니까 나에게 어떤 귀찮은 일, 어떤 번거로운 일도 이젠 무섭지 않은 거에요. 누구든 오라는 말이죠. 어떤 타인이든 오라는 말이에요. 그동안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타인은 오고 쓸데없는 타인은 가라! 했잖아요. 그것을 고른다고 벌벌 떨고 있었어요. 이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좋아요가 되니까 이 땅에서 누구를 붙여줘도 그건 아말렉이고 그들을 보니까 어쩜 나와 똑같은 지, 자기의 소유만을 이용해서 나를 찾으러 온 거에요. 그들이나 나나 똑같아요. 나도 귀한 것을 건지기 위해 그 사람을 만났다는 말이에요. 똑같은 입장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이고 죽어 마땅한 나의 죽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바로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 매, 부력이라 했지요. 자기를 계속 띄우는 거에요. 너무 떴나 싶으면 자기가 누르고 자기의 욕심을 또 띄우고 상한선과 하한선을 두고 띄우는 겁니다.

올라갈 땐 기분 좋고 내려 갈 땐 기분 나쁘고 조울증, 우울증 환자 되요. 좋았다가 슬펐다가, 좋았다가 슬펐다가 짜증났다가 좋았다가 감사하다가. 부력에 구멍을 내어 버립시다.

10분 쉽시다.
 주향(IP:115.♡.251.218) 18-11-08 23:25 
임금 (마 25장 34- 46)
대전- 104강

 이근호


2018년 9월 1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 34-46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34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에 관한 문제로 심판을 생각하게 되면 재판을 하는 법원에 피고 있고 변호사 있고 재판장 있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재판장이 누구냐 하면 임금이에요. 임금의 특징은 왕국을 자기 입맛에 맞춰 만들어요. 임금이 왕국을 만드는데 거기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본인뿐이에요. 상당히 이기주의지요. 그야말로 왕국이잖아요. 지금은 어떤 시대이냐 하면 민주주의이지요. 우리나라 헌법에는 왕이 없어요. 모든 권력은 왕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있는 것을 왕조라고 해요. 왕조와 민주주의는 정 반대이지요.


왕조란 신분 제도가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인 우리나라의 헌법에는 어떤 신분이나 종교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나와 있어요.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는 쪽이 진리인 것 같습니까? 민주주의가 진리 같습니까? 왕조가 진리 같습니까? 왕조가 진리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민주주의는 왕조 다음에 온 거에요. 그 다음은 타락한 겁니다. 이제 갈 때까지 간 거에요. 민주주의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갈 때까지 간 겁니다. 민주주의의 시작이 아테네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21세 이상의 남성들,


그것도 돈 좀 가진 사람들 끼리 투표권이 있는 것이고 여자는 그것도 없어요. 왜 민주주의가 타락했냐 하면 대리와 대표 사이가 일치가 안되요. 좀 어렵지요. 대리라는 것은 일종의 위탁이에요. 내가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거에요. 그리고 대표라는 것은 위임하는 것으로 권리를 다 가져가요. 권리를 다 가져가면 투표할 때만 말 잘 듣고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는 말 안 들어요. 왜 대리자가 아니고 국회에 대표자이기 때문에 까불지마! 니가 나에게 권한을 넘겨줬으니까 내 만음대로 북한에 가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꺼야! 월급을 얼마를 받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꺼야! 이렇게 되요.


대표에서 내각을 만든다, 내각 책임제가 되요. 국민이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아 버리면 위임제가 되겠지요. 권력이 두 개로 나눠지겠지요. 행정부와 입법부로 나눠져요. 권력이 두 개로 나눠진다는 말은 개판이라는 말이죠. 내각 책임제는 권력이 하나에요. 국회의원 중에서 총리를 뽑는 거에요. 그래서 국민들이 마음에 안 들면 내각이 전부 사퇴하는 거에요. 이 때는 권력이 하나에요. 물론 사법권리는 복속이 된다하고 의회라는 게 뭐냐하면 법을 우리가 만든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국민의 대표자가 법을 만들어요. 그리고 법을 만든 본인만 다스리는 게 아닙니다.


자기에게 권한을 줬던 모든 국민들을 자기들이 만든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국회의원 월급이 1억 5천이라면 그것에 대해 너희는 군소리 하지 말고 구경만하고 있으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특별비를 사용 하더라도 끽소리 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러면 타락한 민주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 뭐냐? 제가 수련회 때 언급했지요. 여론이고 이것을 구체화 한 것은 언론이에요. 그래서 전체주의국가에서는 뭐를 통제합니까? 언론을 통제하잖아요. 북한, 김정은 어버이~ 수령님! 하는. 언론을 통제해서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민주주의가 왕조에서 타락한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왕조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한 것이라고 보는 거에요. 그러나 민주주의가 왜 타락한 것으로 보는 가하면 그것을 구약부터 보면 왕은 보이지 않아요. 왕이 누굽니까? 하나님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가 있어요. 투표하는 게 아리라 왕과 같이 세습제로 합니다. 누구냐 하면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통치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중매자입니다. 또는 매개자 역할입니다. 제사장은 몸에 죽음이 품어져 있어요. 제사장의 귀에 피와 기름을 바릅니다. 피와 기름은 한 가지의 제물에서 나온 거에요.


제물의 해체,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고 결단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누구에게 보낸다? 나에게 보낸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예수님에게 누가 오느냐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보내줘야 알 수 있어요. 예수를 안다에는 두 종류가 있겠지요. 본인이 알아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겠고 아버지가 보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겠지요. 아버지가 보내신 사람을 택함 받든 사람이라고 해요. 인간이 예수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거든요. 상상하는 것은 자유지요. 본인이 상상하겠다는데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인간이 상상할 때는 뭐가 빠지냐 하면 택함이 누락돼서 빠져있어요. 택함은 내가 예수를 믿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에요. 나를 예수 믿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나를 제끼고 따로 계시다는 거에요. 이미 창조 전에 내가 있기 전에 내가 태어나서 믿어야 된다고 하기 이전에 결정된 겁니다. 부산 강의에서 한 건데 고기를 사서 도마 위에 얹어 놨는데 대가리 떼고 꽁지 떼고 몸통만 놨는데 누가 먹더라도 원래는 몸통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대가리가 있었는지 꼬리가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냥 생일 축하합니다~ 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자기가 태어나는 것부터 해서 유황불로 돌아가시는 것 까지만 알아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몸통만 보고 전체를 안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그래서 결정을 누가해요? 하나님을 믿던 예수를 믿던 교회에 가든 모든 것을 본인이 결정해야 되요.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의 택함은 대가리에서 나와요. 대가리에서 나와서 그것을 현실화 시킨다 또는 실제화 시킨다는 말이 맞아요. 구체화 시키는 것,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절재로 내 마음대로 되는 개 아닙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등 모든 것을 몸통만 가지고 찾으려 하지 마세요.


괜히 소주 한 잔 마시고 저수지에 가서 아이고! 내 남편, 내 아내 왜 죽었나 하고 통곡해 봐야 몰라요. 아무 의미 없어요. 제사장은 왕이 아닙니다. 그럼 모세가 왕인가? 모세는 왕이 아니라 선지자라고 해요. 나중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오신다고 했거든요. 왕과 선지자, 그게 바로 메시야의 기능이 하나로 모아지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왕 같은 선지자, 또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거든요. 기름 부은 왕으로 오세요. 왕, 선지자, 제사장은 전부 기름을 부어요. 기름을 붓는데 요단강에서는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이 성령이 오잖아요. 성령의 기름 부은 자,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해요.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왕국의 시작이라고 해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가 온다는 것은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물이 오는 거에요. 세 가지의 기능이 중첩된 분이 와요. 우리에게 대가리가 오는 거에요. 몸통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우리에게 창조 전에 프로그램화 된 우리임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에요. 프로그래머가 자기 프로그램을 확인하러 오시는 거에요. 그것이 택함이에요. 이게 에베소서 1장 4절에 이미 창세전에 예정돼서 택했다고 되어 있어요. 어디서?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프로그래머로 삽입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가는 길이 삽입돼요
.

삽입이 되면 어떤 특징이 있냐 하면 민주주의를 포기해요. 민주주의가 되려면 본인의 가치와 권한이 계속 본인에게 있다라는 것을 고집해야 됩니다. 남들은 군대 안 가는데 나만 군대에 가면 억울하잖아요. 다같이 민주주의니까 차별을 두지 않는 거에요. 종교라든이 인품, 성격, 계급이나 어떤 차이를 두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가 탁락하고 범죄했다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어떤 대안에서 비롯된 것인데 자본주의의 대안이에요. 자본주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겁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가 목적이 아니고 자본 즉, 돈을 노리고 이렇게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때 프랑스의 나폴에옹이 왕이잖아요. 황제인데 황제가 되어 돈 벌이 하는 것 보다 영국의 제도가 돈 벌이에 더 유리한 거에요. 경제 활동에 정치 활동이 장애물로 등장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왕조시대 우리나라 구 한 말에 고종 시대 때 왕 제도라 해서 모든 주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탐냈잖아요. 우리나라 즉 조선 내에 의지 있는 사람들이 뭘 했냐 하면 우리도 힘을 키우면 되지 않겠냐는 거에요. 힘을 키우는데 있어서 왕조가 방해가 되는 거에요.


각자의 능력을 눈치 안 보고 발휘하려면 사람들에게 뭐를 제공해야 하는가 하면 사유 재산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왜 중국이 공산당인 사회주의를 하다가 때려치우고 자본주의로 들어갔습니까? 핑퐁 외교 이후에 자본주의를 왜 도입합니까? 그렇게 가다간 나라가 가난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에요. 중국은 일당 체제를 하되 경제는 무슨 주의로 바꾼다? 자본주의는 뭐냐? 사유 재산을 인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의욕과 용기를 제공해요. 내것, 인간의 탐욕이 노골적으로 정당화되는 구조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를 받쳐주려면 민주주의가 되야 되요.

 <참고>
 [중국은 1978년 닉슨대통령과의 대표적인 핑퐁외교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시기 중국 정치구도에서도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문혁4인방을 처단한 등소평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등소평은 대양진운동의 실패 이후 실용주의를 주창하면서 권력을 잡았지만 마오의 문화대혁명으로 좌천되게 됩니다. 그런데 대양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중국경제는 완전히 파탄나게 됩니다. 적게는 1천만 명 많게는 1억 명 이상이 기아로 사망한 했다고 서구에서는 예측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중국은 그동안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실용주의적 경제체제로 이행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등소평이 생각했던 경제발전은 바로 전면적으로 대변되는 개혁개방이었습니다. 선부론 혹은 흑묘백묘론이라는 말처럼 서구식 자본주의를 실험적으로 선전 등 주요 5개 도시를 개방하게 됩니다. 선전은 홍콩 배후 도시로서 쉽게 서구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경과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는 남쪽 도시였기 때문에 실험이 실패했고 타격이 별루 없을 것으로 생각한 중국정부는 선전을 개방하게 됩니다. 광저우 상하이 등 후속으로 개방도시를 확대하면서 서구식 자본주의를 도입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공은 결국 동쪽의 도시 전체로 확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제발전을 중국전체로 확대하게 위하여 중국은 서부대개발이라는 정책을 수행하여 오늘날까지 고도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경제의 명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합니다. 즉 정치는 사회주의 공산당의 일당독재이면서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서구식 자본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뭐냐하면 사회주의입니다.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나라는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이거든요. 아르헨티나는 표를 얻기 위해 국민들의 세금으로 공무원을 너무 많이 뽑았어요. 그리스와 비슷해요. 일단 되고 보자! 권력을 쥐고 나면 편하잖아요. 한 사람당 표는 한 표이지요.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민주주의지요. 민주주의는 뭐가 우선이다? 표가 우선이잖아요. 그런데 자본주의의 시유 재산을 인정하고 경제 구조가 되려면 반드시 골고루 잘사는 구조는 절대로 자본주의가 발단하지 않아요. 몇몇이 잘 살아야 되요. 재벌이 잘 살아야 돼요.


재벌이 잘 살아야 나라도 잘 살아요. 현대 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하던 말이 있거든요. 사람 열 명에게 오천 만원씩 줘보면 일 년 뒤에 한 사람은 일억으로 되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다 날려 하나도 없게 된다고 그러니까 그게 정상이라는 거지요. 다시 이야기 하면 세상은 뭐가 중심이다? 돈 중심이지요. 돈이 누구 것이 되야 하면 내 것이 돼야 하는 존 로크의 사상인데 그동안 내 것이 안 됐습니까? 내 것 되면 안 된다고 위에서 억누르는 힘이 있었지요. 그게 뭐냐하면 왕조였잖아요. 왕조의 특징은 그 나라의 백성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면 당신 자식들이 후계자로 왕이 되도 군소리 안 하겠습니다가 왕조에요.

만약에 왕조가 백성들을 잘 살지 못하게 하면 구테타 일으켜서 죽여 버리는 거에요. 이것이 지난겨울 수련회에서 열왕기 하를 할 때 북 이스라엘에 구테타가 9번 일어났잖아요.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났습니까? 백성들을 잘 살지 못하게 한 거에요. 남 유다는 구테타가 왜 일어났습니까? 유다는 잘 먹고 못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성전이 있으면 하나님과 만나는 임재의 자리가 있으니까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왕이시니까 여러분! 신을 소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북쪽 바알 종교는 인간이 신을 소유하려 해요. 신마저 소유하는 겁니다. 왜 나 잘되기 위해서 신은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을 소유 할 수 없어요. 전부다 신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땅에서 살았어요. 농경사회라고 하는데 땅의 생산물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신의 아들이 돼야 돼요. 땅에서 농산물이 잘 되려면 제때에 비가 와야 되고 오지 않아야 될 때는 안 와야 되요. 그러면 왕은 제사장의 역할을 해서 백성들의 요구 사항을 신에게 호소해서 농사가 잘 되도록 가뭄이나 폭우가 오지 않도록 해야 되요. 그러한 신이 땅의 신인 바알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바알 신을 믿느냐 하면 농경시대의 신은 바알이에요. 여호와는 뭐냐하면 여호와를 그들이 알았다는 것은 이 쪽을 떠나서 저쪽으로 가는 이동 중이에요. 이동 중인데 땅이 경작되고 난 뒤에는 이동 중일 때의 신은 필요 없고 땅이 잘 되길 원할 때는 바알 종교가 갖고 있는 노하우가 있어요. 신을 섬길 때는 반드시 예배가 있는데 그 예배의 방식들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어요. 그 전통이라는 것은 통계이고 확률이에요. 점치는 것도 통계이고 확률입니다. 이 성씨와 저 성씨가 몇 시에 태어났고 사주가 얼추 맞으면 통계적으로 안 혜어지고 잘 살더라, 이게 궁합 보는 겁니다.

한의학이에요. 한의학이 통계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것을 달여 먹으니까 감기가 낫더라! 그것을 외우는 것이 한의사들이에요. 손 어디쯤을 누르니까 허리가 낫고 전부 전통적인 누적된 지식의 축적이거든요. 그래서 한의사들이 공부를 많이 하는 거에요. 그냥 무조건 외워야 되요. 논리도 없어요. 바알 종교를 섬길 때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고 비 안 올 때 무슨 제물을 바치면 제때 비가 오더라! 또 무슨 제물을 바치면 풍재, 메뚜기 같은 것들이 안 오더라! 그런데 바알을 나의 주인으로 섬겼고 우리의 남편으로 섬긴 겁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짝이 있어요. 아세라라고 있어요.


실제로 이스라엘 유적지를 가 보면 바알 옆에 아세라가 세워져 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옆에도 아세라가 있어요. 그러니 여호와를 뭐로 봤습니까? 우리의 농사를 잘 되게 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이것이 너희의 남편이냐? 내가 남편이고 이것이 너희의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라고 그렇게 에스겔이라는 후계 선지자 비로소 자기 자신을 남편으로 본 겁니다. 이스라엘을 아내로 본 겁니다. 내 아내를 애굽에서 끄집어 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그게 안 나와요. 충분히 죄가 노출되는 환경을 봐서 뒤엎는 겁니다.


왜? 그래야 심판이 되니까, 죄도 없는데 심판하면 안 되잖아요. 충분하게 죄가 드러나야 심판하는 거에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뭐냐하면 하나님은 왕이라는 거에요. 오늘 날 민주주의 사회에는 뭐가 없다? 왕이란 게 없어요. 그러나 성경에는 임금이라 되어 있고 이게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지금. 그렇다면 바알 종교의 특징은 인간들이 다룰 수 있습니다. 열왕기 상 18장보면 엘리야가 제단을 쌓을 때 바알 선지자와 450 대 1로 붙지요. 그 섬기는 바알 신을 어떻게 불러냅니까? 밤새도록 자해하지요. 어떤 제사장이 땀 뻘뻘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를 치고 하면 감동 받아요.

정성이 저렇게 지극하니 우리도 감동 받는데 신이 감동 안 받을까? 라고 하는 거에요. 오늘 날 교회 부흥회하고 똑같아요. 감정 이입을 통해 신과 합의를 노리는 겁니다. 복음은 그렇던가요? 복음도 가슴치고 울고불고 할까요? 복음 즉, 영의 세계는 육과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육으로 행하는 것, 아무 상관없어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요. 그래서 안 믿는 거에요. 그래서 못 믿는 거에요. 바람을 피우고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해도 영의 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왜 육의 세계는 모든 것이 사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계에 대장은 누굽니까? 악마입니다.


악마가 하는 일은 우리 행동 하나하나를 다 끄집어냅니다. 이래가지곤 너 이번 주 장사가 안 될텐데! 너 이러니 이번에 아이가 성적 내려 갈꺼야! 이렇게 했으니 다리 하나 부러 질꺼야! 어떻게든 영의 세계를 못 보게 막아요. 고린도 후서 4장 4절에 보면 악마가 이 세상 신이 하는 일이 표현도 잘 되있죠. 세상을 덮는 신이 하는 일은 복음의 광채인 영의 세계를 못 보게 계속 막는 거에요. 계속 잔소리하고 양심을 후버 팝니다. 좌절하게 만들고 스스로 미워지게 만들고 난 자살할 거야! 이렇게 살아서 소용없어! 나 같이 가치 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스스로 파괴하게 만들어요.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점점 죽음에 가깝지요. 우울증에 걸리게 만들고 남과 비교할 대 난 너무 뒤진다. 남과 비교하게 만들죠. 타인은 사소한 존재인데 다 사소하거든요. 영의 세계를 보면 부자나 가난한 자나 둘이 맷돌을 갈든 아무 관계없어요. 이미 정해진 대로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두는 거에요. 주님은 우리와 의논 안 합니다. 의견 타진 안해요,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조차 사소한 게 되어 버려요. 사소한 것 보다 더한 시시해요. 대수롭지 않아요. 영적인 내용을 알고부터는 옛날에 심각했던 그런 일들이 아무 문젯거리가 안돼요. 내가 왜 걱정하고 고민 했던가!


애가 군대에 갔다. 그게 뭐 어때서 그게 뭔데? 아무 문제가 안돼요. 바알 종교는 이게 아닙니다. 아래에서 위를 찾아가는 종교거든요. 어떻게 행하냐에 따라서 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 바알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가진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신이 가진 것을 빼앗아 가거든요. 그것을 벌이라하고 저주라 하거든요. 내 것 안 빼앗기기 위해서 신을 달래야 되요. 안식일 지켜야 되고 십일도 해야 되고 안 빼앗기고 오히려 30배. 60배, 100배 더 오기를 바라지요. 어차피 돈 놓고 돈 먹기니까. 산에 가야 범을 잡고 교회에 가야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종교이지요. 바알 종교, 기독교 종교 이렇게 장사하는 거지요. 협박해서 겁나게 만들고 괜찮은 사례들이나 간증들 주욱 해서 당신들 같이 이렇게 어려웠었지만 암 걸리고 기도원에서 주님 섬겼더니 나았습니다. 부자 됐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회유하는 거에요. 이 모든 중심에는 내 것 지키기에요. 여기에 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사소한 거에요. 주님은 내 몸을 보는 게 아닙니다. 주님 자신의 몸을 봐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에만 관심 있어요. 그래서 이사야 53장에서 그 분이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쓸데없는 우리가 구원 받은 거에요.


주님의 관심은 창세전에 아들에게 관심이 있지 우리에게 관심 없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태어났는데 아담의 범죄로 사단에게 사로 잡혔어요. 세상 신에게 갇혀버렸어요. 악마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행하라! 행해서 탈출해야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 내리라고 했어요. 돌이 떡이 되게 해라! 저 많은 것들 부럽지 않느냐? 나에게 절하면, 나하고 협상하면, 내가 시키는 데로 하면 다 줄께!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시험하는 거에요. 갇힌 거에요. 네 행함에 따라서 네 미래가 결정된다는 거에요.


여고생들에게 그런 다잖아요. 네가 지금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느냐에 따라 신랑감이 바뀐다고 그렇게 하는데 우리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성경 지식, 기도하는 뜨거운 감정, 지, 정, 의를 꽉 쥐고 평생 공격하고 있어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주저하지 말고 믿어라! 이런 것 있잖아요. 제가 울산에 강의하러 가면 그 근처 식당이 있는데 그 모퉁이에 타이어 집이 있어요. 거기에 광고가 어떤 것이냐 하면 우리 가게보다 더 싼 곳이 있으면 제가 해병대에 재 입대 하겠습니다. 그렇게 써 붙였어요. 해병대 갔다 온 것 자랑하는 지, 남자들에게 군대에 재입대하는 것이 꿈에라도 끔직한 일이거든요.

그 정도로 우리 집은 비싸지 않다는 의연한 결의를 보여주는 거에요. (웃음) 인간은 소유 때문에 벌벌 떤다 했지요. 그 소유를 구체적으로 물질로 표현한다면 돈입니다. 임금이 있던 시대가 좋았던 것은 임금이 기도하고 제사장하고 해서 우리는 그냥 임금의 품안에서 보호받으면 되는 거에요. 골치 아프게 정권 바뀌는 것까지 신경 쓸 것 없이 나는 농사만 짓고 신의 혜택만 받으면 되고 임금은 신과 자기 사이에 신의 아들 역할만, 중매자 역할만 하면 된다는 구조가 고대 왕조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구조가 깨어지고 민주주의로 바뀌었느냐? 그게 바로 그리스, 로마에서 나온 철학입니다.

그것이 모든 기준은 인간이다. 신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보이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따라서 신은 인간을 닮았다. 이게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이지요. 인간이 만물의 기준, 척도라고 이야기해요. 여기사부터 과학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분석하면서 나중엔 기술이 발달하면하게 되고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지 말고 노동과 기술이 접목되면 여기에서 우리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돈과 재물이 생기다는 겁니다. 이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그 다음 20세기에는 돈을 위해서 돈을 갖는 거에요. 원래 돈이라는 것은 물건을 교환해서 물건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가한데


 그 다음부터는 없어요, 뭐든지 교환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신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미래에 필요한 것 까지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이지요. 그건 돈 밖에 없어요, 이젠 물건이 좋은 게 아니에요. 돈이 되는 물건이 좋아요. 물건을 사도 다시 팔 때 몇 배가 되는 아파트도 살기위한 것만이 아니고 팔 때도 돈이 되는 가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누가 임금입니까? 내가 임금이에요. 내가 완이에요. 내가 신이고 이럿을 서로서로 인정해 주자가 민주주의입니다. 갈 때까지 다갔어요. 극한 타락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25장에서 임금이라고 해놓고 임금의 특징이 뭐냐하면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34절에 창세부터 예비 된 것이죠. 혼수를 따로 마련해 놓은 거에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혼인 잔치를 보세요. 혼인 잔치를 할 때 신부가 가져 온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혼인 자치를 누구 주최로 다 합니까?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음식을 다 준비해 버려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말은 그 당시의 왕이라 하면 그냥 쳐다보는 거에요. 모든 운명은 왕에게 있는 거에요. 왕이 잘 되면 바알 신에게 복을 받아서 농사도 잘 되는 거니까 왕이 뭐냐 하면 나보다 중요한 타자(남)이 되요. 타인에게 복속되요. 소속이 되는 거에요. 왕 소속의 사람을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게 왕조의 특징이에요. 이순신 장군이 누구를 위해 선전했지요? 조산을 위해 했습니까? 왕을 위해 했습니까? 왕을 위해 했어요. 그 당시는 위인이 아닙니다. 백성을 위해 한 것도 아니에요. 자기는 왕의 신하에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도 왕에게 한 거에요. 자기는 소모품이라 왕만 있으면 나라도 있는 거니까 자기는 왕을 위해 소모품이 되겠다는 겁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왕이 있으면 나라도 있는 겁니다. 내가 있어야 내가 기쁜 거니까 내가 안 다쳐야 되요. 남이 죽든 말든, 나라가 어렵다? 이민가면 되요. 우리나라에서 스케이트 잘 타는 것을 안 알아준다. 소련으로 국적 바꾸면 되요. 안현수처럼.


그런데 소련에서도 그러면 또 국적 바꾸면 되요. 전부 자기중심이에요. 캐나다로 이민 갔는데 못 살겠어서다시 와야겠다,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못 살겠어서 다시 와야겠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살려줄 수 있어야 되요. 그러나 미국이나 자본주의가 발달한 곳은 대통령이 살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영어를 잘해야 되요. 영어를 못 하면 취직이 안돼요. 불편해요. 오해하기 때문에 영어가 안되면 다시 한국으로 와야 되요. 조금 배워도 안 되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해야 얼추 먹혀들어가요. 말이 통해야 되지 한국 사람끼리 모여 있어봐야 세탁소하는 사람이나 미장원 하는 사람,

자기들끼리 있어봐야 무슨 도움이 됩니까, 서로 살기 바쁜데 안 되지요. 오늘 본문에서 임금이 창세 전에 이미 준비해 놓았지요. 준비 했으니 그 다음에 인간의 행위를 일체 묻지 않습니다. 본문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 하니 천국에 가는 사람이 주여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임금에게 복속되어 있다면 충분히 설명이 되요. 임금의 나라에서 모든 움직임은 임금을 위해서 일어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게 민주주의 같으면 이해가 안되요. 민주주의는 누구를 위해 삽니까?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거에요. 옛날의 왕조도 마찬가지지만 민주주의 되면서 노골화 된 거지요. 왕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전통이니까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과거 밖에 모른다는 뜻이에요. 옛날 7080 노래들이 너무 좋아요. 윤형주가 기타 치면서 하얀 손수건 나오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나 하고 어니언스의 편지 나올 때는 어떻게 이런 가사가 있나 하고 아침 이슬 나오면 대모하고 싶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 노래가 좋을 땐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앞으로 이것보다 더 좋은 노래가 안 나올꺼야! 여겨요.


항상 그래요. 인간은, 그런데 그 뒤에 나미가 나와서 빙글빙글 돌고 호랑나비가 나와서 세상에 이렇게 즐거운 노래가 있나? 이것으로 끝이야! 더 이상 다른 노래는 안 들을꺼야! 그런데 그 다음에 이런 사랑 없습니다 나오고 임재범이 나와서 너를 위해 나오고 이렇게 가사가 완벽할 수가 전쟁 같은 사랑하니까 인간이 안다는 것은 오직 과거 밖에 난 몰라요. 그래서 본문에 예수님 보고 하는 말이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라고 하는 것은 머리 떼고 꼬리 떼고 몸통 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에게 거저 주신 거에요. 하늘나라를 창세 전에 예비 된 거니까.


그럴 때 우리는 민주주의적 대통령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 나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왕의 것을 받아요. 내가 평생 노동한 것을 받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한 것 없는 것을 왕이 다하신 그것이 마태복음 25장 34절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상속 받으라, 상속 이야기하고 마치겠어요. 이 상속이야기를 하려면 오래 걸리는데 정말 귀한 거에요.

상속의 특징이 뭐냐하면 받을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과거밖에 몰라서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천국에 못 갑니다.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왜 못 가느냐 하면 자기 행함이 있어요. 자기 노동의 댓가만 생각합니다. 이게 과거만 알아요. 내가 이 정도 행했으니까 인정받겠지, 그런데 아브람에서 뭘 끄집어 내냐 하면 아브라함을 끄집어내요. 끄집어 낼 때 그냥 끄집어내면 안 되고 똑같은 인간은 안 되고 아브라함을 죽여야 되요. 죽이시는 방법이 이삭을 집어넣습니다. 이삭은 없는 자식인데 자식으로 인해 아버지를 변화시켜요.


자식이 아버지를 변화시킨다. 이 말은 미래가 현재 우리 밖에 모르는 과거를 미래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내가 이 만큼 헌금 했으면 복 받겠지요 했는데 그 다음 어떤 일이 있고 난 뒤에 헌금 하게끔 하는 이유가 헌금 하는 것이 내 구원과 관련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때 그때에 헌금하게 하신 거에요. 왜냐하면 헌금함으로서 자기 잘난 맛에 도취 되서 난리도 아니에요. 그 사이에서 신자가 분리될 때 내 노동에 의해서 내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악마에 속한 사고방식을 미래에서 다 천국을 마련해 놓고 그게 아니야!하고 수정해 주시는 쪽으로 성령이 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달라져요. 어떻게? 내 행함에 집중할 때 그 인간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 악마에 속합니다. 내가 완벽했을까? 좀 더 잘할 걸 기도 할 때 꿇어 안아 할 걸! 전에 꿇어 앉아 기도했으면 지금보다 나은 텐데 계속 수정하고 수정해 나갑니다. 악마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지고 옵니까? 율법을 가지고 오지요. 계속 지적해요. 너 지금 뭐하고 있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모르게 하라고 해서 그래! 완벽해야돼! 철저하게 성도라면 이 정도는 사랑해야 돼! 악마가 그렇게 하거든요. 착한 게 죄거든요. 착하다고 의식하는 게 죄인데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다메섹에서 내려가는 사울에게 누가 찾아 왔습니까? 예수님이 찾아 왔지요. 사울이 예수님에게 누구십니까? 물었을 때 그냥 나는 누구이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핍박을, 울산 강의에서 했는데 너 나에게 왜 그랬어? 만약에 회사에서 일하는데 프린트기가 고장 났을 때 누가 그랬는지 모르니까 문자로 직원들에게 다 보내는 겁니다. 너 왜 그랬어? 하면 누구만 몰라요? 고장 낸 사람, 다른 사람들은 나랑 관계없는데 그 사람은 들켰구나! 사울에게 주님은 뭐라고 하냐하면 너 나에게 왜 그랬어? 십자가에서 죽은 것도 니가 날 죽였어!


이 말은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을 죽일 기회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께서는 니 행동과 자기의 죽음을 연관시키시는 게 아니고 네가 그런 행동을 한 공간 있잖아요. 니가 생각하는 과거라는 공간 그리고 니가 알고 있는 전부의 세계가 결국은 구원자를 죽게 만드는 원인에 듬뿍 잠겨 있다고 하시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린다고 한 짓이거든요. 그게 예수님을 죽게 한 거에요.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데 꾸역꾸역 하고자 하는 게 지금 악마에게 말려든 거에요.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면 되요.


그래도 그렇게 네가 나에게 했다라는 거에요. 그 일이. 자식에게 먹인 것도 나를 먹게 했다는 거에요. 내가 보기에 이미 창세 전에 니를 위해서 이미 그런 일을 하도록 프로그램화 괬다는 거에요. 주께선 다해놓고 막상 천국에 와보니 내가 뭘 해서 얻은 게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주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것이고 준비해 놓으신 겁니다. 그것을 상속이라 합니다. 상속이란 아버지의 재산을 자식에게 주는 것이잖아요. 아버지의 노동이에요. 자식이 노동한 거 아니에요. 자식들은 고마운 줄 알아야지 꼭 비교해서 형님은 (부보님) 아플 때 몇 번 와봤습니까? 이런 거, 막내 시동생은 유학 간다고 돈 다 가져갔지 않습니까?

그 때가 되면 시시콜콜 다 끄집어내요. 인간은 과거 밖에 모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한 과거 밖에 몰라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제가 언제 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이건 과거에 행한 것 상관없이 미리 준비하신 것을 성도에게 상속이라는 형식으로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천국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신경 쓸 필요 없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시시하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요. 죽을 때도 시시하게 죽어야 되요. 이번에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즈음 생전 안 오던 여동생이 와서 갑자기 우리 돌아가며 밤샘을 하자는 거에요.

지는 일 년에 두 번 인가 와놓고 졸려 죽겠는데 밤샘을 하자는데 아무도 동의 안 했거든요. 그랬더니 자기 혼자 밤샘해서 나중엔 뻗어 버렸어요. 막상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못 왔어요. 힘들어서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어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요. 흑흑 제가 왔어요. 어머니! 이걸 원했던 거에요. 그래서 제가 영상을 찍어 놨어요. 너무 섭섭하지 않게 보여 줬어요. 이게 마지막 순간이다 하고 그얀 숨 가쁘게 쉬시다 잠들 듯이 했어요. 인간은 자기 행한 것만 생각하니까 성령이 아이고! 시시한 인간아~ 나는 신경도 안 쓰는데 니가 왜 신경쓰느냐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를 꾸짖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인간에게 상속해 주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내 행함에 매이다가 악마에게 농락당하지 말고 차라리 주님만으로 좋아요 하는 마음으로 자기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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