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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9 21:36:09 조회 : 561         
사무엘상 46강(사무엘의 한계), 마태복음 108강(자기죽음) 19012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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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115.♡.251.218) 19-02-16 16:05 
사무엘의 한계 (삼상 16: 1-11)   
대전-46강   이근호  

2019년 1월 29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16장 1-11절



(삼상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삼상 16:2)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삼상 16: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사무엘 상 16절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야기 하시는데 사무엘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의견이 일치 돼야 하지요. 그래야 100% 전하지요. 지금 백성들은 사무엘이 인물이 얼마나 잘 났는지 말을 잘 하는지 관심 없어요.


사무엘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여과 없이 중간에 새는 것 없이, 누수 없이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만약 인간들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면 모두 죽습니다. 다시한번 볼까요.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면 인간은 다 죽어요. 그 중간에 선지자가 있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하는 기능 안에는 뭐가 담겨 있냐하면 죽여야 될 인간을 안 죽이고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요소가 이 안에 담겨 있겠지요.

그 요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거에요. 약국에서 파는 당귀정 있잖아요. 약 겉에 단 것으로 싸서 입히면 순하게 넘어가지요. 그렇듯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다 죽어요.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다 죽어서 안 되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당귀정처럼 둘러쌌다면 이스라엘 백성도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무수한 말씀을 그렇게 듣게 되어 있어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가 아니어서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용서하심으로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인간은 늘 용서받으면서 주의 진노도 전하게 되는 거에요. 마지막 심판인 진노를 다 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야기 하나를 하자면 하나님의 일의 중심이 어디쯤 있겠느냐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보통 하나님의 일은 창세 전에 있다고 하지요.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음에 그대로 창조 됐잖아요.


그런데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창세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있어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 된다고 했습니다. 숨어 있어야 될 중심이 이 땅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예전에 초등학교 운동회를 할 때 장대 하나에 만국기가 걸려 퍼져 있고 이것을 우주의 중심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중심으로 들어 온 거에요. 그러면 시간이라는 것도 창조에서 마지막까지가 어디서부터 펼쳐지겠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펼쳐지고 다시 예수님께로 모아지겠지요. 그래서 중심이 뭐냐하면 예수님 오심이 중심이에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갑니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심은 역사 한 복판에 와버린 거에요. 모든 중심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전에는 막연하게 안 보이는 하나님이었잖아요. 안 보이는 하나님이 시작이 아니라 예수님부터 시작한다고요. 모든 의미도 예수님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가치도 예수님께로 소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된다는 거에요. 이러한 발상의 대표적인 예가 뭐냐하면 보통 과학에서 D.N.A 라는 유전 인자가 있어서 자식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지요. 과학까지도 필요 없어요. 상식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와 엄마를 반반 닮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반대로 이야기해요. 부모가 자식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거와 다르게 중심은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지 보겠습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을 언급하고 또 언급해도 중요한 거에요.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보세요. 아브라함이 너희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은 누굴 보기를 원해요? 자기의 후손 보기를 원하지요. 자손이 자기보다 먼저 앞섰다는 거에요. 다윗도 자기 자손을 보고 주라고 해요. 주가 없이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데 자기를 자기되게 한 주는 후대에 온다는 거에요.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시간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시간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공간도 바뀌어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고안이 어디냐? 없어요. 지난 주일도 이야기했어요, 소돔과 애굽과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한 곳이라는 거지요. 어떻게 지리적으로 다른 지명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그것을 돌발, 돌출이라고 하는데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는 그 무엇,


그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은 그 현장에 가도 그 사건을 만나볼 수 있느냐? 만나볼 수 없어요. 사건이니까. 오늘 사무엘 상을 강의하면서 생각해야 될게 굉장히 많아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보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하면 사무엘의 문제점이 뭐냐는 거에요. 사무엘에게 문제점이 있다라는 것을 생각도 못했지요. 감히 선지자를. 그런데 그의 문제점을 누가 지적했는가? 하나님이 하신 거에요,


“사무엘아! 왜 아직도 울고 있느냐?” 왜 슬퍼하고 있느냐는 거에요. 따라서 너는 선지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동업자가 의견 충돌이 일어난 겁니다. 그것은 사무엘도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현재에 입장에서 과거에 들은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무엘 본인의 옳바름과 정당성을 위해서 그것이 하나의 벽 또는 보호막, 장벽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교인들이나 성도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항상 자기 주변에 그러한 장벽으로 자기 주변에 쳐져 있어요. 나는 이것도 알고 이것도 안다. 이것은 본인도 못 깹니다. 남은 더더욱 못 깨고요. 이것은 사건인데 사무엘이 이 사건 통해 자기의 장벽에 갇혀있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장벽 안에 갇히면 거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의미와 가치가 나오는데 그것이 누구를 위하는 가치와 의미냐 하면 고정되어 있는 사무엘의 의미와 가치에 푹 주저앉게 되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지만 중심은 어디 있다고요. 사무엘이 중심이 아니지요. 메시야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닙니다. 모세도 구원자가 아니고 예레미아도 구원자가 아니고 이사야가 구원자 아니에요. 모든 것이 통일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무엘의 자리가 멀 잖아요. 떨어져 있지요. 그러면 사무엘의 장벽은 찢어져야 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되요. 이 새로운 변화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갇혀 있는 상태의 사무엘은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거에요. 이럴 경우의 계시는 소유욕이 돼버립니다. 난 계시 안다. 난 하나님의 뜻 안다. 난 복음 안다. 소유욕이 되요. 내가 그 복음을 소유함으로서 구원 받는다 하면 소유욕이 되는데 변화가 와서 찢어지면서 계시가 되어버리면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동원된 거에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자기는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데 쓰여 질 뿐이지요. 그것을 신약에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무엘을 보는 것이 우리에겐 유익이고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기적이 막 일어나는 사무엘조차도 너무 인간적이었다. 난 이정도 아니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라든지 내가 이정도로 알아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었으니까 마음 놓고 하나님의 일을 해도 별로 하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지금 사무엘 상 16장 1절을 하는데 쭉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인 사울을 버리지요. 사무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택할 때는 그 상태로 갈 것이라고 예상한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게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왕이 되게 했다면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왕을 교체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거에요.


그런데 사울 왕이 교체가 됐다면 하나님에겐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는데 인간이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고 슬퍼한 거에요. 사무엘은 그런 사울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잃었다는 안타까움을 갖고 슬퍼한거에요.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하는 거에요. 어떤 선입견이 잘못됐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곱게 받은 것을 꾸준히 유지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별 탈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사무엘을 꽁꽁 묶은 선입견이고 자기 사상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보호막이 된 겁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도 모든 인간이 이런 생각을 다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던 가요? 세상의 중심은 창세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창세후도 아니고 이 세상 중심으로 이미 꽂혔지요.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잖아요.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타난 것이 하나의 중심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초등학교에서 운동회할 때 만국기 휘날리는 것처럼 생각해 보세요. 장대에 만국기 달리고 축제 분위기 나지 않습니까?

김밥 앉아서 먹어도 맛있어 보이고 그렇게 휘날려주고 분위기 띄워줘야 공책 받으려 달려줘야 사이다 먹고 신나게 축제하듯이 이 중심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사무엘의 시간과 예수님의 시간이 거리가 멀다는 말이죠. 사무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누구의 때를 보기를 원했다 했어요? 예수님 보기를 원했지요. 왜 아브라함이 자기 고유의 나는 안다, 이 정도면 괜찮다, 구원 받는다를 멈추지 않습니까? 왜 그것으로 자족하지 않습니까? 나의 나됨은 나 스스로 확정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자식이 나를 닮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위해 내가 먼저 존재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자식은 또 그 자식을 위해 그렇고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생각해야 되요. 이 반대로 생각함이 거듭남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되는 거에요. 반대로 생각해야 되요.내가 표준이 아니에요. 심리적인 요소와 내 감정이 표준이 아니에요.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건에서 와해돼야 되요.

고정적인 이것이 나라고 하면 안되요. 그렇게 되면 의미와 가치를 품고 사는 것이 됩니다. 의미와 가치를 품고 살다가 새로운 상황이 오면 사무엘처럼 Cry 울어요. 우리는 울게 되어 있어요. 아파서 울어요. 몸이 아파 울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마음이 아파서 울어요.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가? 나는 하나님 잘 믿고 복음도 아는데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냐는 거에요. 복음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통일에 합하기 위해서 은밀히 우리에게 주어진 거에요.

복음에 의해 우리가 늘 깨어지라고요. 사도 바울에 있어서의 계시가 뭐냐하면 마주침이에요. 사무엘도 마찬가지이만 마주침 또는 부딪힘이에요. 사울은 누구의 왕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상황에 부딪히면서 이런 생각이 깨져버립니다. 깨지면 자기는 뭐가 되요? 난 뭐지? 내가 그동안 선지자 노릇 제대로 한 거야? 선지자 노릇이 100점 이었어? 아니면 0점이었어? 아니면 50점이었어?

자기 자신에게 회의가 오지요. 자기 자신에게 의심이 드는 거에요. 자기가 전한 것, 자기가 행한 것에 의심이 드는 거에요. 이렇게 의심이 들 때 자기의 완벽했던 보호막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순간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왜냐하면 계시는 지식이 아니고 내가 있고 지식을 화보해서 되는 게 아니고 뭔가 나를 찢어 놓고 와해시키는 것이 계시에요. 나를 뭉게 버리고 파괴하는 것이 계시라고요. 계시는 사건이기 때문에 내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새벽 2시45분에 주님이 그 영혼 데려가면 그 창고에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이 농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고두고 할 이야기에요. 천하의 사무엘도 지금 슬퍼하고 있잖아요.[ Don't cry for lsrael] 이스라엘을 위해 울지 마라.언제까지 그렇게 울래? 울지 마라! 그러면 진작 버렸다고 이야기 안 해 줍니까? 진작 이야기 해줘야 된다고 여기는 그 틀. 나는 하나님에게 다 들어야 한다는 그 틀 자체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 계시의 훼방질이고 방해물이 되는 거에요. 내가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이 방해물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복음은 늘 우리에게 부딪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부딪힘이 부딪히면서 누가 깨지느냐? 사도 본인이 깨져요. 사도 바울이 미처 예상치 못한 새로운 하나님의 뜻이 마구 마구 발산되는 거에요.그렇게 되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 내 인생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내 인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어요.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어려서 크리스마스 때 빵 얻어먹으려고 찾았던지 앞일에 걱정돼서 찾았던지 찾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 교회를 찾아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되지도 않는 소리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온 겁니다. 자기 틀은 깨지면 안돼요. 왜? 나 잘되려고 온 거지 욕바가지 먹으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와서 한 수 가리켜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프로패셔널한 목사님! 저는 성경에 대해 무식하니까 한 수 가리켜 주세요. 아주 겸손하게, 가르쳐줘서 무하게요. 나에게 담으려고요, 담아서 뭐 할 건대? 내가 깨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천국 가려고, 이것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의미와 가치를 고스란히 담지요.

자기가 변화 됩니까? 안 됩니까? 변화 될 수 없지요. allf 예측한 그대로 자기가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사울은 그래서 버림받은 거에요. 사무엘은 이래서 책망받은 겁니다.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없어요. 강물이홍수가 났다. 그 안에 수정구가 있어서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다면 어떤 변화가 와도 내 것은 안 깨지겠지요.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종교라는 겁니다. 종교란 나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식이에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험한 세파를 잘 이겨왔다는 거에요.


주여~내 손을 잡아 주소서! 라는 노래가 있지요. 미국에서 나온 가스펠 송이에요. 이런 것도 있지요. 주님은 풍파에 우리의 운전대이시다. I am sailing (Rod stewert)가 부른 유명한 팝송도 있지요. 항해를 할 때 험한 망망대해를 홀로 갈 때 주님이 운전사가 되어 주셔서 풍파를 이겨 달라는 사고 방식이 종교적 사고방식이에요. 눈물 흘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아직도 안 깨졌어요. 아직 계시를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십자가도 몰라요.


혼자는 다 배웠어요. 삼위일체도 배우고 십자가 복음도 다 배웠는데 주님은 어떤 용도입니까? 나 잘 되기 위한 나 안 깨지기 위한 용도이고 내가 지키고 싶은 의미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배우고 배운거에요. 나 좋으라고, 이제 하나님께 버림받아 봐야 아아! 내가 착각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는 거에요. 사도 바울에게 자기 인생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론 안 살았어요. 강물위에 수정구 같은 것이 없어요.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인생뿐이지 자기 인생이 아니에요. 주님의 성육신의 되풀이에요.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거에요. 그럼 나는 어디 있느냐? 그때 그때 달라요. 매일 달라요. 어느 하나를 잡아 내 것이라 할 수 없어요. 지금껏 신앙생활 한 것을 다시 재정비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책망 받는 것을 보시고 재정비 하세요. 어지간히 강의 다 들었어! 다 들으면 뭐합니까? 창고에 누적이 될 뿐인데 밑에는 막 썩고 있어요. 곰팡이 피고 너무 많이 들었어요.


콜롬비아에 깊은 산속에 깊은 호수가 하나 있어요. 그 호수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에게 가서 금을 숨길 때거 없어 본국에 보내기 싫어서 호수 속에 원주민들 이용해 어깨에 메고 광산에서 캐낸 것을 다 호수에 집어넣었다는 거에요. 과연 이 호수에 금이 있을까요? 종교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교회에 가면 천국 간다. 교회에 가면 금이 있고 복석이 있고 미래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성경 속에 보물이 있고 예수님 속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 믿고 가는데 자기는 변하지 않아요. 자기는 멀쩡해요. 가서 호수의 물을 다 빼면 되겠지요. 부루룩 물을 다 빼면 금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100% 없습니다. 전설이기 때문에 없습니다. 그렇듯 교회에 가면 천국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구원도 없어요. 악마의 속임수였습니다. 교회 존재 자체가, 왜냐하면 구원은 우발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나에게 찾아오면 사건은 지식이 아니에요. 다시 한 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가면 천국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게 바로 구원이에요. 아하! 속았어! 속았어! 누구에게 악마에게? 내가 나한테 속은 거에요. 내 희망에 속은 거에요. 네 구원에 속은 거에요. 주님 내손 잡아주소서! 이게 속은 거에요. 옛날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 부르면서 내가 나한테 속은 거에요.찬송 불러도 구원 없어요. 구원은 없어요. 천국도 없어요. 오직 천국은 주와 나의 만남에서 오는 겁니다.

어디든지 하늘나라, 어디든지 하늘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세요라는 나 자체가 매일같이 허물어 지고 달라지고 허물어지고 달라지는데 주님께서 나에게 변화를 일으킨다는 자체가 나는 변화, 주님은 존재. 통일된 주님의 유일한 세계 중심만이 존재자이고 우리는 존재자를 증명하는 사건으로 데롱데롱 매달려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먹고 사는 것 전부가 주의 사건이니까 내 인생은 없고 주님의 사건의 연속이고 뒤돌아보면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를 주님의 인생으로 내용이 꽉차있는 계시의 사건으로 된 내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우리를 조져줘야 되는 거에요. 내 뜻대로 안 되줘야 되요. 슬퍼한다고요? 왜 슬퍼합니까?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상치 못하기 때문에, 어떤 분이 아가서로 수련회를 한다고 하니까 아가서 사랑의 내용에잔뜩 기대를 했다는 거에요. 다 끝나고 소감을 물으니 그 기대조차 나의 욕심이었다는 겁니다. 너무 멋져요. 그게 바로 계시입니다.

아가서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성경 말씀이 나는 멀쩡하고 몇가지 내속에 집어넣자가 아니라 그 집어넣는 주머니가 문제 있음을 아는 것. 이런 주머니가 있을 필요가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원해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살려주세요 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그냥 주님에 의해서 살기 때문에 지금 말장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그냥 주님에 의해서 살고 있잖아요. 살고 있는 것을 뒤돌아보고 감사하면 되지 미리 주여! 살려 주소서! 다음은 요롷게가 나와요.


가정 화평하고 몸 건강하고 요롷게, 결국 주님의 일은 누가 훼방합니까? 반발하고 있어요? 내가. 그래서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에요. 우린 죄인 되려면 한참 노력해야 되요. (웃음)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죄와 허물 속에 사는 것. 이 의미 문제가 중요한데요. 악마가 하는 일이 뭐냐하면 바로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에요. 악마가 하는 일은 이 하나 밖에 없어요. 선악과를 따 먹어라 하잖아요. 선악과를 따 먹어도 안 죽는다 했단 말이죠. 따 먹어도 안 죽는다는 말은 인간아! 네가 의미를 챙겨야지!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 것이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일이냐 하면 바로 주님의 일이에요. 주님이 죽고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선악과라는 인간에게 둔겁니다. 악마는 거기에 미끼로 말려든 거에요. 따 먹어! 따 먹어! 선악과 자체도 에베소서 1장 10절에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 되게 하기 위해 미리 깔아 놓은 악마를 이용한 미끼, 악마로부터 유혹받을 만한 것을 깔아 놓은 거에요. 왜냐하면 이것이 금지거든요. 금지 있을 때 욕망이 생가는 겁니다. 수련회 때 제일 먼저 한 욕망이라는 것이 뭐냐?


욕망의 사랑과 충동의 사랑을 구분해 놓았잖아요. 욕망의 사랑과 충동의 사랑은 뭐냐 내가 이런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걸고 그 조건을 들고 맞춰 나가는 게 욕망의 사랑이에요. 욕망의 사랑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도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으면 언제든 갈라 설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요. 그러면 왜 안 갈라서느냐? 자식 때문에. 충동은 내가 시작한 게 아니고 나 아닌 다른 분에 의해 시작 된 거에요. 충동은 충동을 주신 분에게 놀아나는 겁니다. 어느 것이 피조성에 부합될까요. 내가 욕망을 쥐고 목표를 달성했다가 피조물답습니까? 아니면 놀아났는데 그게 피조물답습니까? 놀아 난거죠.


어느 강의에서 했던가? 인간은 빈 박스 같아서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고요. 악령이 들면 악령이 차지해버리고 성령이 들면 성령이 차지해버리고 우리는 저항도 못하고 반항도 못하고 인생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공이다. 누가 와서 발로 차는 데로 굴러가는 인생은 공이에요.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에게 걸려든 공이고 아무나 잡은, 왜냐하면 결혼 전에 후보감을 기껏해야 몇 명이나 봤겠습니까? 선 두 세 번 봤습니까? 이 세상에 남자가 두세 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두세 명 보고 왔다는 것은 나를 차지하려고 두세 명 밖에 안 왔다는 뜻이에요. 좀 더 탐색을 많이 할 것이지. 그러기엔 결혼 적령기가 너무 늦어져요. 아무리 자기 딴에 올바른 선택과 치밀한 판단력을 동원해도 인간은 공입니다. 아무나 차면 차이는 거에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못 합니다. 사방에서 어떤 발길질이 날아올지 누가 장담합니까? 멀쩡했던 애가 나가서 기브스하고 들어올지 누가 알겠어요. 그냥 차는 데로 자이는 거에요.


이게 바로 사건입니다. 물리학을 동원해서 이 사건을 설명해 볼께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기차가 달리잖아요. 기차 안에서 위로 폴짝 뛰면 어디로 떨어집니까? 그 칸 아래로 떨어지겠지요. 왜냐하면 같이 움직이니까 이것을 멈추기 전에는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한다는 뉴튼의 관성의 법칙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도 사울을 보고 사무엘이 슬퍼했다는 것은 관성의 법칙에 해당되는 거에요.


내가 과거에 기억하던 그대로 가는 습성에서 인간은 스스로 못 빠져나오는 거에요. 내가 판단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은 돌발적인 사건이 덮치지 않는 한 우리는 늘 하던 행세 그대로 가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그 상황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새로운 변화에 여지가 있다? 없다? 없어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상 자력으로 변화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요. 주기철이고 누구이고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변화된 조건하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 구원되기 때문에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면 안 되지요.


그러면 죄인을 부르러 온 주님의 취지와 어긋나니까 의인이라고 여겼던 그 자체가 자기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자기 보호막을 형성하게 된 거에요. 난 이 만큼 의롭다, 정당하다가 되는 겁니다. 이 관성의 법칙에 의해 사무엘이 슬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새로운 변화를 줍니다. 본문 1절부터 보면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그런데 2절을 보세요.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다리가 없습니까? 신발이 없습니까? 왜 못 가요?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이게 관성의 법칙인거에요. 지금 권세 아래에 있잖아요. 권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권세의 종이 되었다 사실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 할 지라도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가 변화 될 뿐이지 결코 이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권세에서 벗어나야 될 게 아닙니까? 묻는다면 권세에서 벗어나야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이 권세에 종이 됨으로 구원이 되요. 왜냐하면 바깥에서 데리러 오시는 분이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래요. " 너 이 세상에서 나와! 나오면 천국에 보내 줄께!"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그렇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냥 혼자 걸어서 나오면 되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죄 밖에 없는 세상에 주님이 들어오셨다는 거에요.


들어와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데려 갈 때 자기 백성은 의인이 아닌 뭐로 간다 했어요? 죄인으로 가는 거에요. 고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동안 혹독하게 속았고 속았다는 것은 만약 그것을 위배했을 때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꽉 들어있는 거에요. 그래서 천하의 사무엘도 뭐라 합니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두려워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안 죽인다고 한 게 아니고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아까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죽기 때문에 그래서 중간에 당귀정이란 게 있어 하나님의 진노를 감싸주는 것이 있는데 그 당귀정이 뭐라고 했습니까? 용서라고 했지요.

용서와 하나님의 진노, 진노라는 것은 버렸다, 더 이상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상대하지 않을 경우에 인간의 특징이 뭐냐? 홀로되기이지요. 신자이냐? 아니냐는 이것 하나로 끝나는 거에요. 하나님 부르짖고 찾는다고 기도원 쫓아다니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찾아도 이 자체가 이미 홀로 있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을 가질 생각을 하지 마시고 믿음 없는 사람이 구원돼요. 믿음이 없는 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된다니까요. 자기 쪽에서 시도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니까 홀로서기에서 계속 멈출줄을 모르네,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이 땅에서 계속 홀로서기를 하기 때문에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를 지킬자가 없어요. 이 땅에서의 이상한 버릇을 하나님에게도 자꾸 써먹으려해요. 하나님 제 믿음 어때요? 제 사랑 어때요? 제가 헌신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데 이것 어떻습니까?

맨 날 자기 행함을 내세우며 나에게는 믿음도 있고 소망과 사랑이 있다는 거에요.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요. 버리면 자기의 존재도 없고 가치도 없기 때문에.그래서 오죽했으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를 데리고 다녔겠습니까?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세리와 창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움직이는 빈 무덤이라고 했지요.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것하고 같아요. 시체가 돼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개뿔도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어야 구원된다는 거에요.


혼인잔치에 누가 참석했다고 하던가요? 아무나에요. 아무나, 아무나 와서 맛있는 음식 먹은 거에요. 마르다가 준비한 것은 수요일에 이야기 했잖아요. 요셉 쪽에서 다 준비해요. 애굽의 바로 쪽에서 다 준비한다고요. 요셉의 형들은 빈털털이로 와야되요. 에스더가 하나님의 일을 한 이유가 뭡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원래 넌 죽었어. 얼굴은 좀 이쁘지만 죽었어요. 죽은 자를 사용하시는 거에요. 안 죽으면 안 죽은 것만큼 주의 일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무엘에게 죽는 상황을 만들어줘요.


이것을 사무엘이 기대한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고 원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피하고 싶은 상황이에요. 주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 너무 억울하지 안 습니까? 제가 뭘 잘못해서 죽을 상황이 되었습니까? 아니야! 죽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너희 보호막이 찢어지고 지킬게 없어지면 새로운 주의 사명을 받게 되요. 새로운 사명은 내가 살아있는 한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죽는 것과 동반해서 주어져요. 하나님의 말씀은 공책이 필요한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적는 공책은 그때그때 마다 조달해주지 기존에 있는 자기 공책 뒷면에 써주세요 하는 건 없어요.


주님의 계시가 가슴팍에 새겨 지려면 어제의 가슴팍은 날라가 버려야 되요. 새로운 변화 속에서 주님의 계시가 우리 몸에서 발산되는 겁니다. 매일매일 살게 해주시는 거에요. 어제를 닮은 내가 아니고 장차 오실 주님을 닮은 우리가 달라져야 되요. 주님은 이 땅에서 많이 고생하시고 설움 받으셨지요. 그 서러움과 변화 죽음을 점점 가까이 가서 우리는 그것을 닮아가야 되요. 나는 천국에 가서 잘산다가 아니라 난 이 땅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라는 억지가 아닌 내 운명이구나! 예주님이 나를 붙잡았다는 것이 정상이구나!


감기에 걸리면 기침하는 것이 정상이듯이 주와 함께 있을 때 내 염려와 걱정, 의미라는 것은 와장창 망가지는 거리를 또 내가 하나 어설픈 몸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나는 주의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는데 주의 일은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면 주의 일이고요 왕 짜증 나오면 이것은 악마의 일이에요. 소를 팔아서 썩은 사과를 사왔다는 거에요. 잘했군 잘했어! 이 일이 남이 보기엔 왕 짜증 나는 일인데, 소를 팔아서 썩은 사과를 사온 것이 왜 짜증나겠어요. 내 의미 내 보호막이 있기 때문에 내 영토가 있거든요.


내 영토가 침해받으니까 왕 짜증 난거에요. 내가 있거든요. 내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잖아요. 내가 살아있는데 당신이 밖에 나가 위기를 조성했다는 거에요. 우리는 위기랄 것도 없고 살려주시는 것을 뒤돌아보면서 감사와 고마워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드리블하며 차는 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115.♡.251.218) 19-02-16 16:07 
자기 죽음 (마 26:6-13 )
대전-108강   이근호  

2019년 1월 29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6장 6-13절



(마 26: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 26: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마 26: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 26: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 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6장 봅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보자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항상 있지 않는다는 것은 비존재이지요. 존재가 항상 있지 아니한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사건의 세계로 나가 버려요. 사건의 세계의 반대는 있음의 세계에요.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기정사실화한 있다는 것을 평소에 생각을 안해요. 내가 여기 있구나!를 생각 안 하잖아요. 오늘 뭘 하지!를 생각하잖아요. 없음을 가정하지 않아요. 내가 없음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 안해요. 없어진다는 경우를 생각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기 있는 모두가 한 50년 지나면 장담 못합니다. 없어집니다. 늘 가까이 있던 부모님도 나중에 늙어 돌아가시고 난 뒤 부모님 집에 가보면 휑하지요. 빛바랜 사진 만 벽에 붙여져 있고 가족들 끼리 억지 웃고 있는 사진만 있을 뿐이고 촌에 가면 하나씩 다 붙어 있잖아요. 가족사진 위에 손자들 사진 몇 게씩 덧붙여져 있잖아요. 사진이 있다는 말은 없다는 거에요. 결국은 사진만 남았다는 겁니다. 나중엔 사진도 없어질 거에요.


그러면 내가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이 땅에 없다에요,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놔야 된다는 겁니다. 애쓰고 공들였던 모든 것, 아파트 입주 준공 검사 안 나서 못하고 있는 것도 죽은 자에겐 아파트 입주 못하는 것이 그다지 큰 문제가 안되요. 입주하고 들어가자 마자 두 시간 만에 죽어 버리면..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자꾸 본질을 뒤로 돌로 놓고 본질이 아닌 것을 가지고 우기면 안되요. 버티는 식으로 살면 본인이 괴로워요. 죽어야 되는 것이 정상인데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횡재하고 이상한 것이고 이건 행운을 얻은 것 같은 느낌, 덤으로 하나님께 보너스 받은 느낌이 되야 되요. 그러니 살아 있는 한 어떤 것도 마다 할 이유가 없지요.


살아있다는 환희, 그래서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모르파티( Amor Fati ) 라틴어로 니이체가 말한 거에요. 병원에서 아플 때 건강해진다면 내가 어떤 수모도 견뎌내리라는 각오. 그런 각오가 생기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올 때 인간의 중심은 살라는 것이 아니고 이건 우연이고요. 필연이 있다면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오신 거에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주일 날 했지요. 그러면 우리가 죽은 자로서 잠시 잠깐 살아 있다면 죽은 자는 그냥 죽어야지 왜 잠시 잠깐 살아있는 이유가 뭐냐?


욕심을 경험하고 체험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욕심 부리는 사람이 많겠어요? 욕심 안 부리는 사람이 많겠어요? 욕심이 없다는 사람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이지요. 욕심 없는 사람은 주님을 표현해주기 위해서, 즉 주님의 본질은 죽었다가 사시는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뭐겠습니까? 그냥 죽는 것. 여기서 주님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을 겹쳐보는 거에요. 그렇게 묶어 보면 인간은 왜 죽는지를 모르는데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아버지께 이야기 한 게 있어요. 죽는 이유가 아버지의 안목으로 봤을 때,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대표로 보여 주시는 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들이라도 죄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나무에 걸려 저주 받은 바 되사"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저주받는 것이 무엇이고 이 세상은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런데 그 죽음 안에 율법의 완성이 들어 있어요. 율법의 완성은 (죽음 = 다시 사심) 이거든요. 그러면 아들이 아버지께 저주를 받아 죽었으면 다시 살아날 이유가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조건이 마감됐기 때문에 죽을 자가 죽었다 끝이 라고 하면 그냥 마감되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완성 된다라고 하면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냐 하면 사랑이 들어 있다고요. 그 사랑을 다른 말로 대속이라 하고 대신 속죄하는 자기는 죄인이 아닌데 남의 죄를 가졌기 때문에 남의 죄를 가졌다는 고유 권한이 자기가 용서 할 자를 선택 할 권한도 되요. 마태복음 8장을 한 번 봅시다.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문둥병자를 만나요. 문둥병자가 뭐라고 하냐 하면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는데 여기서 저라는 것은 문둥병자에요. 문둥병자는 그 시대의 어떤 인식을, 아까 첫 째 시간에 말한 관성의 법칙이죠. 그 상황 속에서 어떤 인식을 받느냐 오죽하면 죄를 얼마나 지어서 이 땅에서 그렇게 살겠느냐 라는 평가를 받는 자에요. 문둥병자가 저주 받았다는 평가는 본인의 것이 아니고 문둥병자를 둘러 싼 자칭 멀쩡하다는 사람들이 문둥병자에게 덮어씌운 거지요.


덮어씌움에 본인도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런가 보다 남들보다 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는 데 이것을 보고 선악 체계라고 합니다. 선악 체계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과응보라고 했지요. 원인이 잘못 됐으니 당연히 벌을 받는다는 거에요.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 받는다는 것이 선악 체계라는 말이죠. 이미 내가 문둥병자라는 것은 문둥병에 걸릴 만큼 남보다 더 더욱 많은 죄를 지었다는 거에요. 양적으로. 멀쩡한 사람은 남보다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고 인생살이가 아주 고달픈 사람은 남보다 악의 분량이 더 많아지는 거에요. 그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에요. 정의로움 ( justice )


정의로움이라는 것은 선과 악의 양에 따라서 벌과 복이 공정하게 제공되야 한다는 것이 정의로움이에요. 그런데 주일 날 설교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공정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정의로움이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자는 구원이고 하나님이 버리기로 한 자는 지옥이고 그게 공정함이에요. 다르지요. 선악 체계에서 벗어난 거에요. 선악 체계에서 벗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은 일체 모든 것을 묻지 않습니다. 시편에 보면 기억치 아니한다. 멀찍이서 하는 게 아니고 끌어안고 하는 거에요. 아가서에 보면 오른 팔로 나를 감싸 앉는 거에요.


아가서 강의 할 때 빈틈이 없을 정도로 잡생각 넣지 말라. 하나에요. 오른 팔로 감았다는 말은 네가 내 안에 있다라는 것이고 내 안의 사랑이 네 사랑이라는 겁니다. 누구 주려고 사랑한 줄 아나? 너 주려고 했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줄 건데요? 이 피 흘린 사랑을 공연히 흘린 거에요? 피 흘릴 때는 쓰일 자리가 있어서잖아요. 자리를 앉아 주는 겁니다. 사랑할 때는 다른 말하면 안되요. 입을 다물어야 되요. 이것이 아가서 1장에 시작하면 나오잖아요. 입맞춤 할거야! 주둥이에 군말하지 말고 입 닫으라고,

지금 무슨 말이 필요해, 사랑하면 끝난거지!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마! 지금은 말도 하지마! 그냥 사랑하는 관계에선 말을 집어 넣지마! 그냥 우리 일에 열중해! 그냥 열심히 하는 거에요. 하나 됨은 하나 됨으로 끝나는 거에요. 기도를 세 번 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그냥 입 다물어! 내가 뽀뽀해 줄테니까! 악마는 그것을 싫어하는 거에요. 악마는 우리가 홀로서기 하는 것을 말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너만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말해요. 아침마다 눈 뜨면 우리를 그렇게 격려해요.

오늘도 네가 열심히 보람 있게 하게 되면 그 결과는 돌아 올 것이다 맨 날 잉과응보적인 선악과적인 소리를 매일 해서 부풀게 만들고 남과의 경쟁에서 안 지려 하게 하고 시비 걸어 게임에서 승리자가 되게 하려는 예수님의 율법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대속이지요. 산상설교에서 "오른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버려라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 버려라" 아예 토막 살인을 하지, 통닭집에서 닭 토막 내듯이 작정하고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문둥병자를 만났어요. 뭐라고 하냐하면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도대체 어는 학교에서 이런 것을 배운 겁니까?


놀라운 겁니다. 이 말은 저주 받은 내 쪽에서는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없고 뽑아 낼 수 도 없고 뽑아낸다고 될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는 이처럼 철저하십니다. 주님의 저주는 내 힘으로 뚫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인이라는 게 얼마나 악마의 속임수인지를 모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잘남으로 살아요. 전에 예를 들었던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를 보게 되면 여자 주인공 우주 비행사가 임신을 하게 되는데 외계 괴물의 바이러스가 여자 몸을 이용해서 괴물의 자식을 키워 낳아요.


그렇듯 인간은 악마가 심어놓은 선악, 하나님을 훼방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지옥에 갈 씨앗이 자라날 인큐베이터입니다. 카더가든이라는 가수가 부른 명동콜링이라는 노래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가사를 보면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인간도 아니에요.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믿을 수 없어. 밤하늘 달만 쳐다본다는 거에요. 노래 말에 믿을 수 없어, 내가 이렇게 괴물인줄 믿을 수 없다는 거에요. 그동안 내가 인간인 줄 알았지요.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그렇게 자기가 인간인줄 알고 있게 되요. 뉴스에서 정치인들을 보면 괴물이 인간으로 변신해서 괴물 인큐베이터가 많이 등장하잖아요.

유시민서부터 자기가 인간인줄 알고 있어요. 김형석 교수, 100살 먹은 사람인데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는 그런 사람들, 100살 넘어도 철이 안 들었어요. 자기가 아직도 인간인줄 알고 돌아다니면서 인간의 행복을 논하고 있어요.무슨 괴물 행복하려고, 괴물이 행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왜 괴물이 행복해야 되요? 왜 내가 행복해야 됩니까?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삶의 목적이 하나밖에 없어요. 행복이에요. 아침에 해 뜰 때 간절히 비는 게 뭡니까? 올해도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사업 잘되게 맨 날 비는 게 나의 행복이잖아요. 모든 게 내 뜻대로 되고.


매사에 주님이 관여 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요. 문둥병자가 주님께 올 때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은 지금 주님이 괴물 안에 뭘 심으셨습니까? 주님의 원하심만 심어 놓으면, 십자가에서 완성하심을 심어 놓으면 누가 뭐래도 의인이 되는 거에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주일날도 이야기 했지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의 용도로 내 안의 말씀이 말씀답게 드러나는 용도로서의 빈 그릇이에요.


물론 빈 그릇이 요란스럽기는 한다지만 예수님이 집어넣을 때 네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지킨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주받은 문둥병이 나았을 때 구약에 제사장에게 드릴 예물을 드려라 구약 때의 모든 말씀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이 홀로 지키기 위해 이 땅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결과가 된, 깨끗하게 된 자가 전해라 그것을 예수의 증인이라 부르는 겁니다. 예수의 증인은 완료된 상태에요. 예수의 증인이 되어 천국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천국이 확정된 사람만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존재의 이유는 나의 본질과 더불어 겹쳐져 있는, 중첩되어 있는 예수님의 본질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 죽음인데 하나가 더 있는데 부활이지요. 그런데 부활은 골라잡을 수는 없어요. 아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구나! 이제 난 부활을 믿어야지! 이렇게 골라잡을 수 없어요.그러면 우리가 계속 살아있는 게 되요. 이게 바로 기독교나 종교거든요. 교회도 그렇게 죽어야 될 인간이 교회를 왜 다니고 다닌다는 의미가 뭐 있어요. 죽은 시체가 괴물이 교회 가봐야 괴물 집단 되지요.


우리는 일단 죽어야 되요. 죽을 때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죽는 이유를 알아야 되요. 다시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지요. 우리는 괴물이기 때문에 악마의 인큐베이터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반드시 뭐가 나옵니까? 욕심이 나오는 거에요.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욕심이 많다가 아니라 전부다 욕심뿐이에요. 욕심 없는 사람이 기이해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26장 7절부터 보면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우리가 욕심이 없다 하지요. 있는 것에 자족하며 살지 뭐, 난 소박한 게 취미야! 이런 거 있잖아요. 촌에 조그만 집을 사가지고 터는 한 560평에 건평 60되는 쪼그만 집, 이층 양옥에 시설 잘 되 있는 집. 아무 욕심 없이, 욕심이 없다 하는 기준은 뭐냐하면 본인이 선과 악을 결정해 버려요. 평균인데요. 통계학에 보면 그래프가 나오는데 분포도에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이 제일 많은 구성이 뭐에요? 평균이에요. 1%는 드물어요. 뭐가 진리이냐 하면 확률 상 제일 많은 부분이 평균이 되고 진리가 되는 겁니다. 1%는 서울 의대나 가라고 하세요. 코디해서, 이러한 특수한 의대 교수출신의 집단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나 있는 것이고 대부분은 평균이에요.


자기가 그러한 환경에 있기에 나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참해! 나는 너무 훌륭해! 혼자 뒤에서 웃는 경우는 어떤 경우 입니까? 자발적으로 평균에서 약간 밀리게 되면 밀린 만큼 자기 의가 되겠지요. 오늘은 고난 주간이니까 북한에 있는 손주를 생각해서 밥은 안 먹고 주먹밥 먹을란다! 주먹밥이 더 비쌉니다. 주먹밥 먹었다고 스스로 지나면 피자 한 판 시켜서 그동안 한 맺히게 못 먹은 거 다 먹으며 그래도 고난 주일 지켰다는 자기가 자기를 조절하는 거에요. 선과 악이라는 것을 조절해서 스스로 착하다 하고 못 견뎌요.


미치겠어! 난 왜 이렇게 착한지 모르겠어! 자기가 자기에게 반하는 거에요. 9절에 보면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아이고! 천사 나셨네! 그 비싼 향수를 팔아 많은 사람에게 부의 효과를 나눠줬으면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이 되고 의롭게 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갓을 한 순간에 사건화 시켜버린다는 말이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 머리에 부어버린 거에요. 그냥 날려버린 거에요.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이 여인은 예수님의 본질을 그 순간 보여주는 사건화가 된 거에요.

그것이 13절에보면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자가 그만큼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사건화 된 행위가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질 때는 여자의 행적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했다는 것으로 계속해서 합류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어! 이 정도란 말이죠. 가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 복음인 십자가에 눈물 흘려 놓고 또다시 눈물 짜내려해 보세요. 연기를 하는 것 같지, 그러니 안되는 거에요.


그때그때 돌발 사태, 돌발 사태가 뭐냐하면 내가 어떻게 살든 노숙자가 되고 집안이 불나고 망해도 교회가 불나고 없어져도 이 세상 다 끝나도 사기 당해도 난 괜찮아요 할 정도로 갑자기 본인의 고백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 나오거든요. 아까 성령의 일이 뭐라고 했어요? 어떤 현상을 보여준다? 성령의 일은 고맙고 감사하지요. 조건이 있는 게 아니에요. 충동적으로 나오는 것이고 사건이기 때문에 유지하려고 하면 안되요. 인간은 욕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으니 난 신자가 맞다고 그것을 보호막으로 삼아 사무엘처럼 책망 받지 마시고 사건은 내가 잡을 수 없는 거에요.


바람같이 불고 떠나가 버려요. 바람아! 가기 말고 옆에 있어! 바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지휘하지 마세요. 내 인생은 사건이기 때문에 내 인생을 이렇게 저렇게 하다 뜻대로 안되면 자책하고 질타하고 학대하게 되요. 죽었다가 살아났으면 아모르파티 자기 생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멱살지면서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인간아! 그런 실수를 왜 했어!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였잖아! 뭐 어떻고 저떻고 내가 나를 멱살 잡고 시비를 걸고 있다는 말이죠. 남이 뭐라해도 심지어 재벌이 되도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욕심쟁이 인간은 스스로 욕심쟁이이다라는 자기 판단이 있겠지요. 이정도 넘어가면 이건 욕심이다.


스카이 캐슬에서 3대째 의사 집안이다. 이건 욕심이다. 그런데 나는 욕심도 없어! 우린 2대째 의사 집안인데 이것으로 끝내자!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는 거에요. 나도 사치 하지만 잘 사는 사람을 좀 봐라! 내가 사치인가 이건 사치가 아니고 최선의 교양이지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파트 100평정도 살고 별장이 3개밖에 안돼! 마이클잭슨은 더 많은데 이런 식으로 부자와 비교해서 자기는 소박하다는 것을 강조하지요. 인간은 자기가 욕심인줄 몰라요. 그런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오는데 그가 자기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겁니다.


대단하지요. 자기가 부자인 걸 감추는 거에요.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나는 선함에 있어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선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을 믿고 온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자기의 본질을 찔린 거에요. 자기는 욕심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욕심이 없다 라는 것이 인간에겐 본질 상 안 맞다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내가 욕심 없이 착하게 사는 것도 욕심이에요. 욕심 아닌 게 없어요. 왜 욕심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어요. 악마의 인큐베이터 아닙니까? 악마가 우리를 자기가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한 거에요. 나가란다고 나갈 악마가 아닙니다. 우린 그럴 능력이 없어요. 우린 괏ㅇ의 법칙대로 왔던 대로 그냥 살 뿐이에요. 나름대로 주절을 하지요.나쁘게 살면 지옥, 착하게 살면 천당, 이렇게 배웠기 때문에 자기가 얼만큼 악하게 사는지 모르잖아요. 도시의 거지들이 입는 츄리닝을 아프리카에 가면 중산층이 입습니다.

자기가 지식이 모자라고 경험이 모자라기 때문에 자기를 정당화하고 변명조로 일관하거든요. 평생 변명 외에는 나올 말이 없어요. 인간은. 박근혜를 왜 찍었는데 하면 그럴줄은 몰랐어. 그런 남자와 왜 결혼했어? 몰랐지! 결국 주님께서 다 긁어내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숟가락으로 내 자아를 싹 긁어내신다고 바로 구원의 과정이에요. 긁어내고 돌아서면 또 차지만 항상 긁어내야 되요. 근심해서 돌아오도록 주님께 부자가 먼저 왔잖아요. 그게 욕심이었던 거에요. 집에 있어야 하는데 조바심이 나서 날 안 찾아오면 어쩌나 걱정되는 거에요.


착함으로 하나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한 겁니다. 선물을 앞장세워 이 정도 착한 것을 작품으로 마들어서 드리니까 어떻게 나도 선물과 같이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왔다가 개망신 당한 겁니다. 놀란 것은 부자 청년이 아니고 옆에 있던 제자들이 놀랐어요. 주님! 이래가지고선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겠습니다. 못가는 거에요. 천국은 아무도 못 가는 거에요. 왜냐하면 욕심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욕심의 작품이고 악마의 작품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안돼요. 천국이 지옥 됩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도 새거든요. 천국가도 새요. 그 성질머리론 안돼요. 가도 못 살아요.


사건이 터져야 되는데 그 사건은 주님으로부터 와야 됩니다. 본문 10절에 이 여자를 괴롭게 하지마라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 누구를 괴롭게 하는 거에요? 본질이 이전 됐기 때문에 예수님을 괴롭게 하는 거에요. 제자들이. 이 여자가 잘못했다면 주님이 여자여!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안돼!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줘야지! 라고 하실 거에요. 진짜 진리가 뭐냐? 진짜 의가 뭐냐는 것은 내가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시키는 거냐? 안 시키는 거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해도 주님이 시켰다하면 끝나네, 주님이 시킬 경우에는 내가 파괴된다니까요. 내가 졸지에 인간도 아니에요.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은 인간도 아니야! 믿을 수 없어~ 주님으로부터 개망신을 당할 때가 주님이 함께 있는 순간입니다. 개망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것이 정상이 되지요.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살아있는 것이 이상하다고요. 내가 왜 살아야 되요? 이상하잖아요. 진작에 죽었어야 되요. 살아도 죽은 것이고요. 살아 있는 저주에요. 저주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진작 죽어야 되는데 지옥 같은 세상에서 계속 꾸역꾸역 삽니다.


온갖 수모 다 당하고 기대 한 거 다 어긋나면서 살아야하는 이유가 나는 욕심쟁이 우후후~입니다. 모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욕심이 아닌 게 없어요. 결국 이 여자를 칭찬하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을 나무라기 위해서, 내가 너희의 스승이지만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유대 사회에서 스승은, 이스라엘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스승을 공경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복을 받는 다고 유대에서 랍비라고 해요. 부모보다 더 높여줬어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제자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 가려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루고 가겠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이 서운한 말씀을 하시지요.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겨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네가 살고 싶으면 죽은 자를 따르지 말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죽은 자의 세도와 죽은 자의 법과 죽은 자의 환경과 죽은 자의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려면 너는 나를 따라야 된다. 천하 지식이나 모든 것을 버린 자는 백배나 받고란 말이 그런 뜻이에요.


버리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는 거에요. 버린다는 것이 이것을 버리면 내가 삽니까? 이런 뜻이 아니에요. 그것조차 버려야 되니까 너는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거에요.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 버려야 마땅하기 때문에 주님의 본질이 들어가야 되요. 그러면 주님의 본질이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죽어 마땅함과 “아버지여!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 심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지금 이 여인은 그 심정을 뭐로 깼습니까? 시집가려고 모은 향유 옥합을 이딴 게 무슨 소용 있느냐! 이것이 있음으로 이것 때문에 인생을 목표로 꾸역꾸역 힘을 얻고 살았다.


이것을 모으기 위해 이것 하나에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내 목표라는 이유 때문에 방해가 된 겁니다. 차라리 이것을 없애버리면 뚜렷하게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겠는가 생각해서 다 버린 거에요. 이것이 자기 죽음이에요. 어떻게 죽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죽는 것을 함께 죽음이라해요.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라고 하는 거에요. 교회를 정의할 때 성경적으로 정의하면 종말에만 나타나는 성령 공동체, 이것을 인간이 세운 것일까요? 아닐까요? 인간은 못 세우지요. 성령이 와야 되고 끝이 되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과 두 개의 ~을 갖고 있어요. 이 세상의 교회는 잡상인이지요. 인간이 세우고 간판 걸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인간이 세운 교회에요. 그냥 사기 단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가장한 사기단체에요. 성령이 와야 되고 올 때는 바람같이 오니까 이미 사건화 된 거지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교회에 소속이 됐어요. 이미 하나 밖에 없는 교회. 그리고 이 세상은 마지막을 보여주는 거에요. 꺼져가는 세상을 보는 거에요.


사춘기 때 뒷산에 올라가면 목초지가 있잖아요. 앉아서 멀리 보이는 동네의 집들이 보이겠지요. 요나가 니느웨 성을 바라보듯이 보면 저녁 노을이 지고 해가 지겠지요. 배가 고파 질 때 쯤 굴뚝에 연기 나고 된장찌개 끓고 그렇게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나와 한번 보자는 거에요. 저주받은 동네에요. 욕심과 욕심이 만연하고 자아와 자아가 싸우는 거에요. 그러면 맨 날 산으로 갈까요? 아니에요. 여기에서 특이성을 보이는 거에요. 이 특이성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욕심이라는 압력을 마지막 때이니까 욕심의 끝이 나의 멸망이고 나의 끝이고 죽음인 것을 자인하는 겁니다.


그렇가고 집에 가서 항수를 던지지 말고 향수를 사든 옷을 사든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사란 말이죠. 그러니까 좋은 옷은 자주 입으세요. 좋은 옷들도 없는 것 같지만 좋은 옷은 아끼지 말고 자주 입어야 되요. 어차피 버릴거니까 그것을 고린도 전서에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 있는 자는 다 쓰지 못한 자 같이 하라 왜 세상은 다 없어지기 때문에, 없어져 가는 거에요. 마치 여자가 늘 주님 앞에서 향수를 뿌리는 심정으로 가는 겁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고 안고 자폭하는 거에요. 그래! 욕심내자! 욕심내고 자폭하는 거에요. 쓰고 죽자! 자기의 저주성을 늘 가까이 체험해야 되요. 남 욕할 게 아니고 TV 틀어놓고 손예원이 어떻고 저떻고 하지l 말고 매일 같이 살고자 하는 그것이 악마의 부추김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다고 죽은 싶은 마음은 전혀 없거든요. 그러니까 자폭하는 거에요. 날마다 죽는 거에요. 그렇게 사시란 말이죠. 그 모습 사건이 터져야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 구나! 내가 최고의 욕심쟁이이고 죄인중에 괴수라는 것을 늘 만끽하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에요.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것이 모습이 아니고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뭘 익히냐 하면 특이성을 익히는 겁니다. 제자들이 화를 낼 때 여자가 모르겠어요? 향수를 팔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용할 거라는 것을 알고도 깨뜨리는 거에요. 그런데 (제자들이) 안다는 것이 자기를 죽이고 지옥가게 하는 거에요. 북음에 대해서 알고 안다는 그것이 교만의 요인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는 것이 정상이에요. 사는 것은 보너스입니다. 살면서 뭘하느냐? 이 땅을 실컷 구경해라! 니가 살던 교향은 지옥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지옥답게 한 목을 누가했냐하면 내가 부지런히 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길 “오호라! 내가 화로다 죄인 중에 괴수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마지막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접목된 사람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대속이 있다 했지요. 마태복음 8장17절을 보겠습니다.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우리 힘으로 천국을 못 뚫어냅니다.

우리 힘으로 내 보호막을 뚫어낼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존심을 철거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나의 가치와 의미를 양보 안 합니다. 이것 때문에 사는 데 미쳤다고 양보를 해요. 내 존재 의미 때문에 사는 데요. 이게 연학함이에요.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거에요. 그런데 친히 어떻게 하셨다? 담당하신 거에요. 대신 죽으신 거에요. 죄 없는 분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죄 밖에 지은 것 없는 우리도 같이 기념되게 될 거에요.

너 같은 못된 인간도 강도와 창기도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혜택을 누렸다.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것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한 고백 때문이 아니라 대신 죽으심.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일생은 군데군데 십자가의 피를 조금 씩 흘리고 왔던 거에요.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 성령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어는 누구도 천국갈 수 없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란 악마에게 속아서 착하면 가는 나라에요. 본인은 착하지도 않는데 자꾸 억지 쓰는 거에요.


착하다는 거에요, 욕심 부린 적 없고 나름대로 잘하고 뭐 아껴쓰고, 고쳐쓰고, 아이고! 무슨 시민 단체가 착한건가? 세상에 무슨 착한 게 있습니까? 그런 착한 것도 돈 앞에 다 무너지는데 돈이 궁해보세요. 착한 게 어디 있습니까? 목숨 같은 재산이 날라가는데 무슨 착한 게 있어요? 돈으로 해결 안되는 게 없잖아요. 집도 한 서너채 가지고 있을 걸 준공 검사 안 떨어 져서 전전긍긍 하지 말고, 다 내 탓이에요. 내가 돈이 없는 내 탓이에요. 예수님이 돈을 안 갖다 주고 예수님의 피를 갖다 주었다는 의미, 우리가 언제쯤 철이 나서 내 스스로 고칠 수 없는 병자라는 것을 언제쯤 알까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주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의 생각이 이렇게 다른지 몰랐습니다. 저희의 못되먹은 성질 모든 것을 익히 아시면서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시리라는 그 사랑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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