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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6 21:37:10 조회 : 549         
사무엘상 47강(과거체험), 마태복음 109강(목숨없음) 19032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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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124.♡.122.56) 19-04-19 14:37 
과거 체험 (삼상 16:2-3)   
대전-47강   이근호  

2019년 3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16장 2-3 절




(삼상 16: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삼상 16: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삼상 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삼상 16:5)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삼상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삼상 16: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삼상 16: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 16:11 )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 상 16장 2절부터 3절까지 봅시다. 사무엘이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사울 왕 쪽 권력이 많지요. 사무엘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눈치를 보고 있는 거에요. 만약에 사울의 의견과 달라진다면 단순히 사무엘이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하겠지요. 왜 그러냐하면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어요. 자기 권력에 누수가 생기면 통치가 어렵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은 남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통제하려면 무엇이 성립돼야 하냐 하면 내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길 때만 통제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가족이 다섯 명이다. 아버지가 가장 노릇한다고 딸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하는 것을 통제라 하지요. 이렇게 통제하는 이유가 이 가정은 누구의 소유라고 여깁니까? 내 책임하의 내 소유라고 여기기 때문에 권력을 행사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이 통제와 통치에 계속 길들여지게 되면 누가 자기에게 명령하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계시고 성도가 있다면 성도는 분명히 신약 성경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통해서 지시 받고 결정하게 되어 있어요. 제 말이 잘못된 말입니까? 잘못된 말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요한 1서 2장에 나오니까요. 27절에 보면 기름 부음이란 성령을 말하거든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통제를 받으세요. 성령이 어차피 없다면 통치를 받으세요. 만약에 성령을 받았다면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팔요 없지요.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왜냐하면 가르치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두 사람이 필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늘 주님이 가르친다면 가르친 대로 살 수 밖에 없어요. 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냐 하면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넓은 길이란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과 대조기 되는 것이에요. 고난 받아도 넓은 길이 되는 이유가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 하지 않는 것은 전부 넓은 길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주를 위해 고생하고 주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하는 것 마저 부인 되야 되요. 천국 가는 길이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는 것은 부인 할 것이 따로 있고 부인 안 해도 되게 남겨 놓을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전부 부인해야 되요. 왜냐하면 죄를 이야기 해주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나쁜 소식은 우리가 뭐를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죄를 통한 사람만이 구원된다는 것이에요.


나쁜 소식을 경유하지 않으면 좋은 소식에 들어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발람 선지자가 있었지요. 발람 선지자에게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우선 나쁜 소식은 나귀를 탔는데 전진을 안 하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천사가 와서 자기와 상관한다는 것, 천사가 직접 자기를 다룬다는 게 보통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시시하게 사람과 상대하다니요. 사람과 상대 안하면 절에 가나 교회에 가나 마찬가지에요. 안 가도 마찬가지에요.


어차피 절에 가도 사람과 상대하고 교회에 가도 사람과 상대해야 하고 절이나 교회에 안가도 친구나 동창생하고 상대해도 사람하고 상대하는 거니까 똑같다는 말이죠. 가장 기쁜 소식은 가장 나쁜 소식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 사무엘상에서 사무엘이 자기가 선지자라는 신분 자체를 굉장히 후회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디 가서 제사장 정도면 묻지도 않아요. 선지자 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누구의 공격 대상이 되냐 하면 사울 왕의 표적이 되는 겁니다.

사울 왕의 입장에선 사무엘이라 할지라도 너는 내 통치하의 사람이라 보는 거에요. 그래서 내 뜻에 위반하면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본문 내용에도 나오잖아요. 나를 죽이리이다 라고 집에서 도 닦는 게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뭐를 남기냐 하면 복음의 현장을 유발시킵니다. 복음은 현장성을 줘요. 이런 말이 참 어려운 거에요. 어떤 현장에서 우리가 복음대로 살자! 이건 틀린 말입니다. 복음이 먼저 있고 그 복음에 합당한 현장이 추후적으로 만들어 져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복음이 먼저 있고 나중에 성도가 생기는 겁니다. 사람이 먼저이고 구원받으려고 복음이 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복음이 먼저 있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복음의 위력으로 만들어 지는 거에요. 우리가 복음의 공로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주를 사랑하고 공로자가 아니고 수해자에요. 혜택을 입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혜택을 입었을 뿐이에요. 그 혜택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복음의 현장화가 될 때


 새로운 케이스 경우 또는 현장을 만들을 때 그 순간 아하! 나는 까불락 까불락 나설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나서서 내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복음의 현장에 있다 아니다를 어떻게 알아요. 복음의 현장에 특징이 뭐냐하면 반드시 세상에 내 것이라고 쏟아내는 권력의 압박감이 현실 적으로 다가 올 때 복음 속에 있는 겁니다. 권력이란 이 세상에서 뭐냐 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요. 회사에서 권력의 판단 기준이 뭡니까?


네가 얼마나 믿음이 좋고 착실하냐 효자이냐를 묻는 게 아니고 돈 벌어주면 그 기업에서는 권력에 부합한 사람이고 돈 못 벌고 그 만큼 생산성을 못 내면 사표내고 나가야 할 악한 사람이에요. 기업 자체에 권력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교회는 뭐로 가득 차 있습니까? 교회 자체도 권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죠. 너의 발언과 행동이 교회가 커지는데 도움이 되는 지를 한번 생각해 봐라!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선이고 도움이 안 된다면 악인 거에요. 왜냐하면 교회는 자기꺼니까.

문제가 뭐냐하면 내 것이 따로 있다가 화근이에요. 인간은 내가 있는 이상 내 것이 확장되고 커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 강아지를 만지면 주인은 화가 날 거에요. 내 것에는 강아지까지 확장되어 있으니까 그것 건드리면, 내 소유물을 건드리면 곧 누굴 건드린 것이다? 나를 건드린 거에요. 옛날에 임금님은 자기의 그림자만 밟아도 죽여버렸어요. 자아가 자기 그림자까지 확장되어 있어요. 이 세상 구조는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레이저 같이 쏘아대는 촘촘한 망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몸 둥아리 밖에 없어요. 그런데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너라는 것을 요구한다고요. 너는 몸이 아니에요. 너는 몸에서 세상에 촘촘한 권력 망에 한 지점으로 있을 때 비로소 남들 앞에서 너가 되고 그들 앞에서는 나는 나가 되는 거에요. 자기 몸이 아파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몸은 멀쩡하고 하루 세끼 먹을 수 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뭡니까? 그것은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자아가 아파서 그래요. 자아 자체가 악마가 심어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이러스라 했는데

 인간은 근원적으로 병들은 거에요. 너도 환자이지만 나도 환자에요. 전부 다 환자뿐이에요.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모두 환자에요. 먹지 말아야 될 독 사과, 독약을 먹은 거에요. 농약 마신 것처럼 농약에 취해서, 악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이 내 것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는 것이거든요. 사무엘도 잘 한 것 없어요. 사무엘의 몸도 주님이 관리 할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 몸보다 주님이 복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러나 권력의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시무엘이 살아 온 일종의 관습이거든요. 살아온 관습이라는 말은 줄 곧 살아온 식대로 자아가 자기 몸을 다루려고 할 때 관습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당연 한 것처럼 되거든요. 왕의 안 말을 들으면 죽어 나간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니까 내가 왕의 눈 밖에 나면 가혹한 조치가 내려 질 것이라고 내가 먼저 감지한다는 것은 그쪽에서 어떤 조치를 하기 이전에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온 주눅들은 티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몸의 주인 되시는 성령으로부터 지시 받는 것이 아니라, 옛날 선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늘 지시 받는 게 아니고 지시 받기 전 그 텀 사이에는 세상적으로 살았거든요. 왜냐하면 구약이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이 몸을 살아온 성질대로 권력에 주눅 들어 살아온 거에요. 사울에게는 칼든 군사들이 있지만 사울에게는 보디가드가 없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의 보디가드 있는 것처럼 없잖아요. 그래서 죽이려하면 죽는 것이거든요. 그건 죽는 것이 무섭다는 거에요.

죽는 것이 무섭다는 것은 새로운 지시를 못 받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먼저이고 죽는 것과 사는 것도 복음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내가 자체적으로 관리할 대상이 아니거든요. 몸이 있고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자아가 있다고 했지요. 사무엘 몸의 자아는 하늘에 있어요. 주님이 자아에요. 사무엘의 몸은 누구의 몸이냐 하면 주님의 몸인데 사무엘은 이 자아를 어디에서 가져왔냐 하면 계속해서 관행적으로 살아왔던 권력에 주눅들은 자아상으로의 몸으로 같이 결합되어 있었던 겁니다.

주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못 끊어내요. 끊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권력들이 발악을 해줘야 아! 내가 환자구나! 정상이 아니구나! 를 깨닫기 위해 그러한 권력자들이 그렇게 난동하는 거에요. 민주주의와 공산당이 친하면 공산당이 나쁜지를 모르잖아요. 그런데 공산당이 가끔 난동을 부린다는 말이죠. 개성 공단 하니 안하니 삐졌다하니 그 순간은 애초에 공산당이 질 좋은 사람들이 아니구나! 그 순간은 깨닫게 되는 거에요. 난동을 부려줘야 되요.


안 믿는 남편하고 믿는 아내와 친하게 지내면 복음의 차이와 가치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남편이 술 먹고 난동 부리며 교회 가지마라! 설칠 때 아하! 저 인간의 존재와 내가 애초부터 달라야 하는구나! 를 느끼고 달라야하는데 너무 다르면 가정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조금 씩 맞춘다면 당신에게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정치적 딜, 협상을 해 왔는데 그 평화가 가끔은 깨어져야 되요. 그래야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또 내 마음대로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고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나쁜 소식에 있지 아니하면 좋은 소식이 값을 못하듯 복음이 귀한지도 몰라요. 사람이 귀한 게 없으면 세상에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요. 그렇다고 세상을 원망하지 마세요. 세상보다 소중한 그것이 없을 때는 주께서는 그것을 게속 찾는 작업으로 세상에 휘둘리게 하시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이라는 노래를 아세요? 우리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왜 헛된 것을 그 만큼 나에게 헛된 것이 없을 경우에는 헛된 거라도 붙잡아야 그동안 유지했던 내 자존감이라도 지킬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는 거에요. 헛되고 헛된 것들을~우리 주님 하신 말씀,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것을 주님 주신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너무 세상 먼지에 깊이 파 묻혔잖아요.


그러면 먼지를 떨어 내줘야 하거든요. 먼지를 요청하게 된 동기가 외부의 탓이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려는 세속적인 자아상이 주님을 숨 막히게 하는 겁니다. 꼼작 말고 가만히 계세요, 숨 죽은 듯 사세요. 복음 가만히 있으세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보다 내 가치를 소중히 한다면 주님을 억압할 수 밖에 없어요. 제가 주일 낮 끝부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람이 신앙생활을 못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여러분도 사랑을 해 본적이 있지요. 사랑할 때 상대방이 나를 욕해도 좋기만 하지요. 왜 그렇게 무장해제를 하냐 하면 그 사랑의 관계가 깨질까 싶어서 그러고 내 자존심은 문제가 안 되지요. 주님이 나로 인해 가리워지는 것이,가장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으로 나로부터 대우받지 못할까봐 안타까운 거지요. 디모데 후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을 대할 때 인간이 견줄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딤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있어 권력과 비교 대상이 되겠어요? 안 되잖아요. 빈대보다 못한 인간이 어디서 깝죽대면서 대듭니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지시를 받고 있다면, 주안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다면 누가 건드립니까? 건드린 자가 심판받지요. 우리의 주민 등록을 분명히 해야되요. 우리는 하늘의 호패를 찬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 나라에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지요.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잖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개무시하는 사람에게 모욕당할 때 주님이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아시지요. 일부러 당하게 하시는 거에요. 정신 못 차렸으니까 아직도 주님의 피 그 자체가 소중하고 기쁜 소식인데 그것을 제끼고 세상적으로 내 중신에 기쁜 소식을 따로 만들어 놓게 되면 그것이 주님의 기쁜 소식인데 가만 두시지 낭ㅎ지요. 그것이 상이고 복입니다. 주님의 가치를 가리는데 가만두는 것은 버린 자식이지요.


그것이 아니고 손질하고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 본문에 사무엘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지금 껏 하나님의 계시를 박아 선지자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막상 새로운 사태가 벌어질 때 갑자기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간이 작아졌어요.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 원래 그래요. 인간은 늘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돌아볼 때나 생기는 것이에요. 그 시점에서는 행복이 행복인지 몰라요. 안 아플 때나 건강할 때 행복을 느끼지 안 아플 때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다른 걱정이 찾아오잖아요.

행복이라는 것은 돌아볼 때나 생기는 거에요. 이미 버스 지나가고 난 뒤에 어~어~행복아! 서라! 하면 뭐해요. 벌써 지나 갔는데 그러면 성도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미 다 지나간 것으로 여기면 되요. 나는 오늘 죽은 자로 간주하면 되요. 그렇게 해놓고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다시 이 세상에 끼어든 초월적 존재로서 아무 부담 없이 어차피 놀러 왔기 때문에 나의 살던 고향에 놀러 왔거든요.


나는 이렇게 살다 죽었다라고 현장 답사 왔기 때문에 나는 사나 죽으나 이미 죽은 자거든요. 죽은 자의 입장에서 이 땅에 어슬렁거리는 겁니다. 인생을 어슬렁거리는 거에요. 어느 인간이 주님을 몰라 나에게 욕하는 지 구경해 보는 겁니다. 오늘 본분에서 사무엘은 구약의 인물이기 때문에 성신은 함께 있지만 성령이 아직 안 오셨기 때문에 어슬렁대지 못 했어요. 초조하고 가슴이 조마조마 간 떨어 질까봐 하며 내 마음을 하나님은 나를 편치 못하게 하나?


왜 하나님은 내 소박한 작은 평화로움 마저 이렇게 뺏어 가는지 지금 사무엘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어 환장했어요. 좀 좋게 지내면 안 되나? 왜 이렇게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난처하게 하는지 차라리 선지자 때려 치워버리지, 어제 메시지를 하나 받았는데 저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 왔어요. 체육관 사범을 오랫동안 했어요. 어제 날짜로 그만 두게 됐다는데 그동안 권투 사범을 하면서 회원들이 연습할 때는 온 몸으로 다 받아줘야 되요. 그러다 집에 가면 온 몸에 다 통증이 오는 거에요.

그 펀치 에너지를 다 받으니 아픈거에요. 이제는 주께서 그만 두게 하셔서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것을 하면서 비로소 몰랐던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왔는데 권투 사범만 그런 게 아니에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주위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이 자기 성질부린다고 온갖 불평을 성도를 향해 쏘아대고 펀치를 날리고 있는 거에요. 홍삼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쏘아대는 거에요. 너는 왜 내 가치를 개부시하냐고 그런 식으로 쏘아대는 거에요. 도대체 너의 가치라는 게 어디 있는데? "나는 내 가치가 제일 소중해!" 그래서 그 사람에게 주님의 복음이 짓밟히는 거에요. 이 세상은 곁눈질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거든요. 진리가 없어요. 믿는 것도 안 믿어요. 그냥 컨닝하는 평생을 동생은 크면서 형을 컨닝하고 형은 아버지를 컨닝하고 딸은 엄마보고 컨닝하고 둘째 딸은 언니를 따라하고 가족은.


후배는 선배를 컨닝하고 신참은 고참을 컨닝하고 회사에게 선배들이 만든 메뉴얼, 형식, 방식을 컨닝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사무엘에게 소중한 것은 뭐냐? 없어요. 주로 과서 살아온 방식대로 해왔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되냐? 새로운 것을 주는 거에요. 이게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차이입니다. 구약은 그들이 모르는 것을 조금씩 줘서 그들을 개조해 나가는 방식으로 구약의 성도를 다루십니다.


그런데 신약은 십자가로 끝났어요. 이미 줄 것 다 줬어요.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에요. 내 살과 내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으리라,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떡을 먹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뭘 더 구합니까? 예수 믿고 이미 영생을 얻었는데, 죽고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 없는 거에요. 아까 말했듯이 졸업하고 난 뒤에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 가보는 것과 같은 거에요.

이건 내가 앉던 의자이고 책상이고 내가 입던 교복이고 과거 체험 하는 거에요. 성도의 인생은 과거 체험이고 죽었음에도 죽은 지 모르는 과거 체험을 통해서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떤 공로를 세운적도 없고 보탠것도 없고 수해자로 그냥 은혜를 받기만 한 거에요. 은혜 앞에서는 선과 악을 논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기의 과오를 찾아내지 마세요. 그것은 악마의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래 당신 말을 듣고 이런 것은 고쳐야지!” 고치지 마세요.


고친다는 것은 구약의 사람입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죽는 것 외엔 새로운 게 없습니다. 죽음 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날마다 죽은 자라는 사실 외에 새로운 사실은 없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큰 기쁜 소식이 있다면 사나 죽으나 죽은 자라는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사실, 그 소중한 내용을 고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보물이라서 녹도 안 슬고 도적이 와서 뺏어가지도 못해요.


도적은 기껏 쓰레기 같은 목숨이나 뺏어가지, 귀한 복음은 뺏어가지 못합니다. 달리 예를 들지 마세요. 스데반 집사 예를 들면 되요. 그들이 돌을 던져서 뺏어 갔는데 뺏긴 것은 목숨이 아니였어요. 구제품 같은 옷이었습니다. 알아서 벗어 놓으려 했던 옷, 아담에 속한, 흙에 속한 유니폼을 알아서 저쪽에서 뺏어가네 친절하게도. 은혜라는 말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의 열심으로 부여받아 사는 것에요. 계속 제공되는 겁니다.


내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나의 것으로 되돌아 와요. 정말 성도라면 주님 쪽으로 되돌아와야지 내 쪽으로 되돌아오면 안 되잖아요. 내가 뭔데요. 내 안에 창고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어야 되지요. 저쪽이 고향이라면 나의 창고는 텅텅 비어야 된다는 말이죠.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빼고는 아무것도 없어야 되요.

주님의 새로운 계획이 주어집니다. 본문 3절에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이세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고 하는 거에요. 새로운 왕을 선출하라는 겁니다. 새로운 왕이 선출되게 되면 이스라엘에게는 사무엘이 주는 새로운 계시에 대해서 선택이라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너희가 사울 편이냐? 다윗 편이냐?를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정화를 했는데 좋은 개념을 이야기 했어요. 성경을 해석 할 때 하갈의 해석이냐? 사라의 해석이냐를 묻는 거에요. 이것을 갈라디아서는 두 언약이라고 했어요. 언약과 비 언약, 개인은 배제되요. 개인의 결심이나 각오는 없어져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의 복음이 먼저 있고 인간은 그 나중이라고 창세전에 계획이 먼저 있고 인간이 태어났다고요. 언약이 먼저 있는 거에요. 언약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있는 거에요.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갈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하갈의 언약과 사라의 언약이 있는데 하갈의 언약은 노예가 되는 거에요. 천국의 가치를 높여주기 위해서 나는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하기 위한 집단이 필요한 거에요. 나는 저 좋은 천국에 못 들어갔어 라고 고백해야 될 집단이 필요한데 그 곳이 뭡니까? 두 자로 지옥이지요. 반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 왔다고 이야기해야 될 사람들, 자기 공로가 아니지요. 인간은 배제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예정된 사랑에 의해 나는 너를 안다고 하시는 사라의 언약이 되겠지요.

그러면 해석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서 해석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서는 해석이 어떻게 됩니까? 두 종류의 해석이 나오겠지요. 하나는 하갈의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의 해석이 나오는 거에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하갈은 어느 쪽입니까? 사울 쪽이고 다윗은 사라의 해석이 되겠지요. 본문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다시 정리해 보면 사무엘은 장래에 대해 압니까? 모릅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누구는 아나? 사무엘에게 장래를 주신 하나님은 아시죠. 그 관계를 우리가 놓치면 안되요. 내가 성급하게 앞장서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인간에겐 주의 일이란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주님만 아시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면 그만이에요. 미리 예측되고 예상되는 그런 하나님의 일은 없어요.


사람이 예측을 하게 되면 조치를 하려해서 안되요.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인간은 자기 계획과 기대감이 있으면 죄가 된다고 했거든요. 근원적으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는데 성경을 모르면 어때요. 모르면 못 삽니까? 이 성경을 안 보면 모르면 못사는 거에요? 성경 없이도 살사는 사람이 많잖아요. 나름대로 행복한 사람이 많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들은 뭐가 문제입니까? “그까짓 것 성경 알아야 돼?”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성경을 제대로 안 대하면 자기가 환자이고 병자라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께서 의사로 오실 때 전제가 뭐였습니까? 병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오신 거에요. 그 대목이 마태복음 9장에 나올 때 지붕 뚫고 내려 온 사람이 있지요. 중풍 병자와 그 친구들, 그들은 뭐만 생각했냐 하면 내 친구는 중풍 병자라는 것만 생각한 거에요. 중풍병이 들어서 환자가 아니에요.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환자인 거에요.


주님이 중풍병을 고쳐 준 게 아니에요. “네 죄를 사해주노라!” 하신 거에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데 우리는 뭘 고쳐야 하는 지 몰라요. 주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태를 일으키고 새로운 사건을 제공할 때 내가 몰랐던 병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내 죄를 몰라요. 주께서 하시는 일은 내가 모르는 죄를 나에게 만들어 내신다는 거지요. 죄를 지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죄를 만들어 놓고 만들어 내신 죄를 사하시는 겁니다.


성경을 안 보면 복음을 안 들으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되어 버려요. 그게 문제에요. 괜찮은 사람 되는 게 문제라는 거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왔다가 갔습니까? 집사님이 얼마나 힘들면 오지 마라 했겠습니까? 그 분들이 올 때 소망하고 기대한 것이 있어요. 어떤 계획이 있어요. 나는 예수 잘 믿지요. 이것을 기대하고 있단 말이지요. 자기가 의사라 의사가 필요 없어요.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물론 의사를 이용하려 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용 대상이 아닙니다. 나 자체를 파괴 시켜서 주님 안에서 나라는 것을 재구성 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마음이 들어야 되요. 지금 뭐가 문제이냐 하면 주님 따로 나 따로 라 문제잖아요. 멀쩡한 내가 돼서 주님을 멀쩡하게 섬기겠다는 거에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주께서는 멀쩡한 인간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병자이고 죄인이라 부르러 오신 것이지 멀쩡하고 잘나가는 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현재 얼마나 내가 잘 나가냐가 문제가 아니고 잘난 존재이고 싶다를 지향하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에요. 앞으로 질 좋은 내가 되겠다는 것이 문제라는 거에요. 이 만큼 복음 들었으니까 얼추 내가 알아서 살 수 있겠다는 것 자체가 문제에요. 내과 의사라 뭐라고 하던가요? 약을 언제까지 먹으라고 하던가요? 죽을 때 까지 먹으라 하지요. 협약 의존적이어야 되요. 우리는 계속 죽어줘야 되요. 계속 과거 체험을 해야 되지 이 정도 됐으면 이제 알아서 복음 전할까요?


인간이 무슨 복음을 전해요? 그것은 주의 일입니다. 왜 복음을 못 전하냐 하면 앞일을 몰라요. 현장의 의미도 모른다고요. 나쁜 소식 속에서 깨어질 때 비로소 좋은 소식이 부각되어 나오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근원적 질환이 뭐냐하면 자꾸 마귀와 합작이 돼서 홀로 살려해요. 혼자 사는 거에요. 그것을 오후 설교에서 자기가 자기 팔을 흔드는 것. 은혜 받았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혼자이고 요새 아가씨들 결혼 할 마음 없어요. 왜 결혼 안하냐? 하면 답변 간단합니다. 혼자 살고 싶어서요.

혼자 사는 것이 정답이고 같이 사는 것은 정답에서 뭔가 혼자 사는 것이 실패하거나 성공하지 못할 때나 차선책으로 같이 살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에요. 심지어 결혼해도 애를 안 낳아요. 왜 우리끼리만 살겠다는 거에요. 둘이 살다가 심심할 경우는 낳을 용의가 있다. 그것도 귀찮으면 애 말고 강아지나 키우자 하고 세상이 악마의 작품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 사무엘, 본문 6절부터 보면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새가 큰 아들을 먼저 부르지요. 엘리압은 괜히 있다가 첫 아들이라고 불렸다가 버림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10절에 보면 아들 일곱 명을 사무엘 앞을 다 지나가게 해요. 왜 하나님께서 현장에는 다윗이 없는 상태에서 왜 사무엘에게 장차 여기 차기 왕이 될 자가 있으니까 기름 부으라고 찾아 가게 합니까? 무엇이 중요합니까?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전부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에요. 왜냐하면 있게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 우리 큰 아들을 보세요. 큰 아들도 큰 아들이지만 엘리압도 용모가 뛰어나고 하지요.


사람들이 뭔가 발언을 할 때는 그냥 무심코 나오는 게 아니고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대와 소원이 함축되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결국 뭐냐 하면 있음이 솔직하게 고백되게 하는 거에요.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있음 자체가 문제 있음에 그 죄를 지적하는 거에요. 죄 있어서 죄 짓는 게 아니고 있음 자체가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음은 과거에 살아온 인식이 종합돼서 내가 있다는 거에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내 것이 있어서 문제잖아요. 내 것 있음이 문제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있는 것을 가지고 내 것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있음은 내 것이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에요. 주님이 새로운 것을 지시 할 때는 현재 있는 것으로는 안 되지요. 그 속에 내 기대와 소망이 있음을 향상시키려하는 거에요. 질 좋은 있음으로 개선하려는 본능이 발휘돼요. 괜찮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거에요.


그럴 때 누가 빵! 빠빠~ 방 하고 나서야 됩니까? 없음이지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개입합니다. 수시로 개입합니다. 있음의 잘남을 없음이 개입해서 박살내 버리지요. 그래서 그 복음의 현장에서 어! 우리가 기대하고 왕을 뽑으려 하는 데 일곱 명 중에는 없는 거에요. 결국 이 집안에 왕이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묻지요. 11절에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그래서 여기 없습니다.

왕이 되더라도 순서대로 되는 것이 이새의 있음이 갖고 있던 선입견을 주님께서는 뿌리 채 뽑는 겁니다. 항상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는 현재의 있음이 뿌리 채 뽑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일생 살면서 복음이 어떠니 십자가 안다 해도 항상 우리는 1초만 지나도 강렬히 생기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 이고 그냥 살아 있다가 아니라 뭐든지 괜찮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드는 살아 있다가 되는 거에요.


어떤 권력이라든지 자랑 거리, 자식 자랑, 돈 자랑, 건강 자랑, 지식 자랑, 다 내 것 괜찮다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사태를 유발시키십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124.♡.122.56) 19-04-19 14:42 
목숨 없음 (마26:14-16 )
대전-109강   이근호  

2019년 3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6장 14-16 절



(마 26: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 26: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태복음 26장 14절부터 16까지 보면 여기서 제자들이라 하면 마귀의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제자들이 몇 명이냐 하면 12명인데 12명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남들이 보기엔 예수님 자신의 본인만을 위한 일로 보이지만 제자들과 엮여져 있잖아요. 12제자는 숨겨진 이스라엘로 보면 되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낼 때는 예수님이 하는 모든 성과가 예수님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12지파에게 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144000 이라는 겁니다. 12☓12☓1000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을 향해 질주하는 과정을 숫자로 표현한 거에요. 12지파 곱하기 12지파라는 야곱 언약의 성질이 1000 이 될 때 마감이 되고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잘되면 덩달아 잘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전혀 부담가질 이유가 없어요. 내가 하기 나름이다라고 한다면 이미 실패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믿는 사람이고 자기 외에 아무것도 안 믿는 것이지요. 불신자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천 독하고 만 독을 해도 아까 말했지만 사라의 해석이 아니고 하갈의 해석이 나오는 거에요. 다윗 편이 아니고 사울편이 나오는 거에요. 이미 버린 자의 편이 되는 거에요.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신 거에요. 잘 가라~ 적극적으로 밀어 내는 겁니다.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너는 천국 오면 안돼! 강력하게 밀어내시는 겁니다.

밀어내시는 손길을 무엇과 같이 병행해서 봐야하냐 하면 끌어당기시는 경우와 동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한 쪽은 밀어내고 한 쪽은 오기 싫다는 천국을 강제로 끌어당기는, 개 키우는 사람들은 알아요. 개를 목줄해서 데리고 갈 때 개가 가기 싫다고 강제로 버티지요. 흙이 파일 정도로 버팁니다. 미끄러지며 고집 부리지요. 목줄이 더 세잖아요. 이 목줄이 주님의 열심입니다. 주님의 목줄이, 주님의 은혜가 내 행함보다 더 세요.


이것이 고백으로 나와야 되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따라서 12제자가 있다는 것은, 만약 개인적 구원이 있다면 그런 건 없지만 그것은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거에요. 종교란 정신적 안식을 얻기 위해서 지혜와 정보를 자기 쪽으로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귀절을 모으고 기도하고 체험을 계산하고 정신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자기 좋기 위해 하는 겁니다. 그러나 끌어 모아 봤자 끝에 남는 게 본인만 남아요. 어디에 쓸데 있겠습니까? 아무데도 쓸데없습니다. 예수님을 모델로 보자면 예수님 본인이 하는 일이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의 집단 구원에 대표자로 일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집단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행동은 나 잘났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라는 원칙으로 일하지요. 희생이라는 것이 누구를 부르는 것이냐 하면 타인을 나의 세계로 자석처럼 확 끌어당기는 힘에 희생이 있는 겁니다. 내가 너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필히 희생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희생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에요. 희생이라는 목줄에서 못 벗어나요. 피가 묻어있는 사람은 그 피의 가치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어디 술집에 가든 창녀촌에 가든 피의 가치보다 더 셀 수 없어요. 아무리 지옥 가려고 몸부림 쳐도 피가 있는 곳으로 가야 되요. 희생이 나온 원천으로 끌려가야 되는 겁니다.

가면서 희생 덕분에~ 희생 덕분에~ 계속 이러면서 가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의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나 잘났다하기 위한 의가 아니에요. 따라서 나 잘났다 하는 의를 주님의 의가 파괴 시키는 거지요. 잘났다고 하다가 깨지고 잘났다고 하다가 깨지고 맨 날 이런 식이에요. 끌려가는 방식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몸이 아파야 됩니까? 하면 주님은 “네가 그렇게 잘났나? 건강해야 할 이유라도 있어?” 저는 의롭거든요. 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요. “이게 미첬나?” 뭐가 빠졌어요? 희생이라는 것이 빠지고 나름대로 빡세게 한다는 거에요.

그런 것은 아주 독하게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한다는 것은 불교나 천주교에서나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아주 독해요. 여자들 머리 깎는 거 보세요. 패션인지 모르겠지만 머리 깎을 정도로 자기를 부인하잖아요. 은혜가 없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 재주 밖에 없어요. 자기를 채찍질 하는 재주, 꼭 가롯 유다 같아요. 내 뜻대로 안되니까 과감하게 장렬히 죽는 재주, 자기가 안중근도 아니고 윤봉길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해요. 세상이 자기와 관계있습니까? 내 인생도 나와 관계없어요. 주님과 관계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왜 내 인생에 사사건건 관심을 두고 쓸데없이 신경을 씁니까? 시험에 빠져서 마귀가 우리에게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네가 잘 된다는 겁니다. 광야에서 주님이 기도하니까 마귀가 와서 하는 말이 우선 밥 먹고 하자! 경제적 욕망이거든요. 네가 뛰어 내리면 신기한 주의 사자가 돕잖아! 종교적 욕망이잖아요. 내게 세상 모든 것을 줄께! 정치적 욕망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욕망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에요. 경제적 욕망과 종교적 욕망, 내가 신의 자녀라는 것, 하나님이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을 티내려는 종교적 욕망과 정치적 욕망,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발 아래로 두고 싶은 욕망, 유대인들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했다는 거에요. 채워 준다는 거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의를 유지하고 갖고 있는 의를 채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 한 거에요. 이제 인간이 교회 가서 간절히 금요 철야하며 기도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친목하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내가 목사가 시키는 데로 하므로 말미암아 신자가 맞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고 내가 나에게 확답을 얻고 싶은 거에요. 내가 안 무너지고 싶고 안 망하고 싶은 거에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길 했지요. 창기 되기 싫고 강도되기 싫고 세리 되기 싫거든 말도 섞지 말라고 그런데 말도 안 섞으면 전부 조용해져 버려요. 그 만큼 말이라는 것은 안 망가지려 할 때만 입을 연다는 거에요. 우리 자신이, 물론 쓸데없이 입을 열어 망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용 목적이 아니면 오지를 않아요. 나를 좀 무너뜨리고 망가지게 하옵소서! 자진해서 요청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자진해서 망가진다는 거에요. 희생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갈 저주를 이스라엘, 12제자들을 위해선 내가 감당할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12제자라는 것은 자신의 운명 같은 겁니다.그 운명을 위해서 일단 죄의 바닥, 저주 바닥까지 가고 보자 가서 다시 돌아오겠다는 거에요. 끝까지, 제자들의 대표가 누굽니까? 베드로입니까? 가롯 유다 입니까? 가롯 유다이지요. 왜냐하면 제자의 모든 활동은 그들이 투표해서 다수결로 결정한 게 아니에요. 한 명이 배신 하니까 나머지 제자들도 와르르 다 무너지잖아요. 그 무너지는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다?

그것을 허용하신 주님이지요. 주님이 희생해야 할 바닥을 가롯 유다를 통해서 이 땅에 조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롯 유다)는 필요한 인물이에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자면 차라리 그 역할을 안 맡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꼭 필요한 인물입니다. 망하고 지옥가야 될 인간은 지옥 요소가 천국에 가는 우리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성질을, 가롯 유다 같은 성질을 누구나 장착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라는 독을 먹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 가롯 유다 있다.

“주님! 희생하지 마시고 우리 좋게 이야기 합시다! 제 기도 들으시고 내 헌금 받으시고 내 선교 의지, 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이 결심을 들어 주셔서 내가 남을 용서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을 들어 주소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나의 처절한 사투, 말씀대로 경건해야 된다는 그 사투를 이쁘게 봐 주셔서 천국에 넣어 주세요. 내가 하는 거래, 딜이 가롯 유다의 요소이지요. 희생이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의 자리를 중간지점으로 정했어요. 가롯 유다에서부터 정하지 않고 중간 지점부터 정해서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주님과 합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진짜 내 모습이 아니고 가롯 유다가 내 모습이에요. 가롯 유다의 자리는 악마의 복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4장에 이미 가인에게 시연을 보인 것이지요. 동생이 형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동생은 하나님과 상관했지요. 주님과 상관해서 제사를 드렸지 형에게 잘난 체 하려고 제사 드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벨에게 믿음을 줘서 그냥 아벨은 주님이 자기의 속성, 장차 오실 예수님의 속성을 말하지요.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할 일을 미리 앞 당겨서 아벨에게 집어넣은 거에요.

히브리서 11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11장에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의 주도권은 믿음입니다. 그 인물들이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양산라고 생산해 냈다고 보시면 되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에요. 증거가 먼저 있어요. 그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두고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의 마음이 증거에요. 8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이 증거를 얻은 거에요.

 (히 11:7)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8)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을 주님으로부터 할당 받은 거에요. 선진들이 믿음을 받은 거에요. 믿음은 선물이잖아요. 그러면 내가 믿은 믿음과 그 믿음과 경쟁하겠지요. 가롯 유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었지요. 왜냐하면 가롯 유다는 충분히 근접했어요. 왜냐하면 가롯 유다도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도 행했으니까 12제자 중 하나이니까요. 가롯 유다 너는 빠지고 장부만 정리 나머지만 귀신을 쫓아내라 그런 게 아니었어요. 12제자 모두 귀신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어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자신감이 있었던 겁니다. 무슨 요소가 필요치 않다고 본 것이냐하면 희생이 필요치 않다고 본 거에요.

12제자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제자로써 합격이라고 자신 만만했어요. 이제 남은 것은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높으냐만 있는 거에요. 누가 더 상급을 받느냐만 남아 있다고 본거에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누구든지 나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되어 있어요. 희생의 잔입니다. 그들은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희생이라는 요소가 빠졌습니다.지난 강남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했어요. 오실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오신 메시야는 모르는 거에요. 오늘 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오신 메시야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창 자국과 못 자국이 있지요. 예수님에게 왜 이것이 있습니까? 뭐를 경유했지요. 뭐를 터치했잖아요. 인간의 죄를 터치했잖아요. 인간은 갈 수 없는 인간이 모르는 오직 주님만 아는 죄를 반환점 터치하고 돌아오면서 그 식에 근거해서 자기 백성만 뽑아가는 거라는 말이죠. 작업의 진행 과정이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했거든요. 요한복음에 나와요. 창 자국과 못 자국 난 예수님의 희생의 마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건 성령 받지 않으면 안 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 마음을 받는 거에요.


잠언서 16장에 보면 마음에 대해서 나오는데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유대인들도 이 말씀을 봤을 것 아닙니까? 오늘 날 교인들도 이것을 보겠지요. 해석을 해 보라면 탈무드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이런 것을 해석한 거에요. 혼자의 해석이 아닌 전통적으로 몇 천년 내려오면서 계속 누적된 사람들에게 가장 은혜를 끼칠 만한 해석을 모아 논 책자가 탈무드라는 겁니다.

 (잠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유대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겠어요?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주계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뭐였습니까? 바로 도마가 만났던 주님,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지요. 이게 응답이에요.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의 경영하는 것이 죄인 것을 모르게 되면 예수님 찔린 창 자국과 못 자국은 헛된 짓을 한거에요. 십자가의 못 자국이 헛된 짓이 안 되려면 무엇과 매치가 되야 하냐 하면 내가 마음을 경영하는 것이 죄로 폭로돼야 되요.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더 죄가 죄 되게 하고 죄 짓게 하는 겁니다. 잘못된 해석을 유도하는 거에요. 잠언서 16장 3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용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전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재벌이 되서 회사 하나를 더 빼앗게 될 때 치어스! 하며 샴페인 터뜨리고 난리 나지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뭐보다 낫다? 기업체 하나 갖고 오는 것보다 나은 거에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딸을 시집보내려고 선을 보게 하는데 정망 마음에 드는 총각이 나타났어요. 실제 있었던 이야기에요. 그런데 여자가 머리숱이 가운데가 빠져서 가발을 쓰고 나갔는데 그게 흠이 돼서 파토 났어요. 성을 빼앗다가 실패하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인정합니까? 아이고! 안되도 주의 뜻인데.. 이게 응답이 아니에요. 뭐를 알아야 되요? 뭐를 눈치체야 되요? 총각을 얻겠다는 그것이 바로 전에는 그 총각이 나타나기 전까진 몰랐던 내 죄가 새롭게 내 안에서 만들어 진거에요. 나에게 이런 욕심이 있다니,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길 위인이 못 됩니다.


주께서 사랑을 퍼부어 줘야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 주께서 계속 관섭해줘야 내 죄를 알아요.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것이 주님의 희생 없이는, 피 흘림 없이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는 것, 이것은 내 선함과 내 경건과 내 거룩으로처리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내가 주님께 총성 봉사해서 처리 될 일이 아니에요. 주 앞에 성의와 열심을 낸다고 해서 용서 받고 처리 될 죄가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도 처리 되지 못할 죄를 날마다 뿜어내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선약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요거는 죄이고 요거는 의이고 뭐가 계산기 튕기고 있다는 말이죠. “나쁜 게 아주 나쁜 건 아니잖아요.”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주 나빠요. 아주 나쁜 거에요. 우리가 어느 정도 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나빠요. 숨 쉬는 것도 덤일 정도로 아주 나빠요. 온 몸이 아파 기왓장으로 긁을 정도여도 숨은 쉬잖아요. 숨 쉬는 것이 남아 있는 죄. 우리는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주께서 건지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가롯 유다처럼 되야 되요. 가롯 유다를 구원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역할이에요. 우리는 가롯 유다를 남의 이야기로 여기고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라 여깁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우리는 착하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가롯 유다처럼 막가진 안 았지요. 그렇지요? 이러고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11장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말씀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먼저이고 말씀이 말씀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후발 주자가 인간이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4절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다시 말해서 믿음이 아벨으로 하여금 아벨되게 했고 가인으로 하여금 가인되게 하신 거에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하라고 가인은 태어나야 했고 아벨도 태어나야 한, 그리고 둘 사이에 죽이고 죽는 관계가 성립되야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세월호에서 내 첫 째 아들이 그것도 공부 잘해서 서울대 간다고 했는데 빠져 죽었다면 누굴 위해 그런 일이 벌어진 거에요. 주님이 주님되기 위해 그렇게 된 일이에요. 그럴 때 그 부모가 알아야 하는 건 가롯 유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가롯 유다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은 거에요. 아들 죽은 것이 복이 되는 거에요. 왜 쓸대없이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을 챙기고 있었냐는 말입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주님의 믿음보다 더 소중한 것이 따로 있었냐는 말이에요. 이런 시험이 아브라함에겐 안 한줄 압니까?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이 하셨지요. 세월호에선 차가운 바다가 죽였지만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기 아들을 죽인 거에요. 집에서 키우던 개를 복 날 먹겠다고 잡을 때 아이들이 보면 난리치지요. 아이들이 학교가고 집에 없을 때 잡아요. 아이들이 집에 와서 국을 주니 맛있다고 하면 그것 네가 이뻐하던 뽀삐다. “엄마! 차라리 나를 죽이지!”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맛있게 먹을 때는 언제이고. 어떻게 내가 믿음에 대한 조치는 어떻게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가 아니고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어떻게 행합니까?

어떻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되요. 나는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누구의 품안에 있습니까? 어디 안에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이 질문이 사도 바울 편지의 핵심이지 내가 어떻게 합니까?는 의미 없어요. 목사들이 맨 날 설교하는 어떻게 사느냐를 이야기하는데 본인이 성도가 아니거든요. 본인도 지옥에 가면서 나를 따르라! 지옥으로!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지옥 가려면 혼자 가든지 에스겔에 나오지요. 죽을 영혼을 살리려는 것도 나쁘지만 산 영혼을 죽이라하는 것도 나쁘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 하던 것을 이젠 목사들이 그렇게 하는 거에요. 권력의 맛이 들어서 내 것이 있다는 겁니다. 내 것이 어디 있어요? 주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기물들이에요. 가구같이 의자가 있으면 내가 좀 앉으려면 “비키세요! 내가 지금 다리가 아파서 무거워 못 견디겠습니다.” 하면 이게 뭐래? 가져다 버려버릴까? 주인이 앉겠다는 데 자기가 무슨 말이 많아요. 우리가 병들어도 보통 고질병이 아니에요. 전부 환자니까 모두 전염돼서 전부 정신병자에요. 서로 격려하려고 교회에 모였어요. 가롯 유다는 출구이다. 구원으로 통하는 출구이다. 가롯 유다 안에 출구가 들어 있어요. 천국에 통하는 문이 있어요.

다른 데는 없어요. 지금 제자들 중 누구와 예수님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까?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누구를 팔아야 되요?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되요.십자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줘야 되요. 가롯 유다가 출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빠져 나오는 유일한 출구, 가롯 유다 속에 있는 거에요. 내 속의 가롯 유다가 구원하는 길로 열리는 거에요.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유는 복수 때문입니다. 악마의 복수이죠.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아벨에게 뭐가 있어요. 뭐가 있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에게 복수를 하는데 그냥 하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4장을 보세요.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이 분노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분노한다는 것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겁니다. 가인이 분노하면서 제사 드린 건 아니거든요. 평소의 가인답지 않았어요.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의 소원이 누구에게 있다? 가인에게 있다. 엎드린다는 것은 개가 엎드린 것과 같이 덮치는 거게요. 덮치면 가인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아담에게 악마의 유혹이 덮치니까 저항하는데 실패했어요? 성공했어요? 실패했지요. 그래서 모두 실패자에요. 우리는 다 실패자입니다. 우리는 환자에요. 실패자가 나대봐야 그것도 실패의 양상이에요.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간단하게 이해하면 되요. 우리는 뭘 해도 실패다. 실패 외에는 할 게 없어요. 실패 할 재주만 있을 뿐이에요. 이 세상의 어떤 성공자도 부러워하거나 좋아하지 마세요. 가롯 유다도 실패하기 위해 제자로 뽑힌 겁니다.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스라엘을 해체시켜야 되요. 해체할 때는 해체 당하는 당사자에게 해체의 이유가 삽입 되어 있어야 되요. 우리의 몸으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몸이 해체되려면 그 이유는 가롯 유다와 같은 요소가 우리 몸에 장착되어 있어 그 요소에 의해 미련 없이 몸을 갖다 버려야 해요. 우리가 그것에 대해 기대하거나 미련을 가져선 안돼요.


버릴 패라니까요. 버려야 할 이유가 예수님에 대해서 악마적 속성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 안에 사단이 들어갔으니까 예수님에 대해 복수하는 겁니다. 그 복수의 방법은 기존에 있는 새 권력자에게 일임하는 겁니다. 자기는 은 30냥을 받고. 일임한다는 말은 기존의 권력 체제를 인정 한다는 것입니다. 그 권력 체제는 오직 하나이다. 이 세상의 현실이 전부이다. 이것을 가롯 유다는 인정하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생각이에요.


본디오 빌라도와 가롯 유다나 제자들이나 인간이라고 생긴 것들은 다 같은 생각이에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했어요. 재판 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재판 할 때 질문이 시살은 우리를 대표해서 한 것이라고 보시면 되요. 사람들이 당신을 고소했는데 당신이 그 고소가 잘못 됐다는 반대 증거를 내 보라는 거에요. 그들이 당신을 고소 할 때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이 맞느냐?

그리고 빌라도가 나는 너를 풀어줄 수 있는 권한도 있고 체포해서 사형 시킬 권한도 있다. 권력. 아까 광야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세 가지 권력에서 경제적 욕망과 종교적 욕망과 정치적 욕망을 이미 악마가 심어 놨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 나갈 수도 없고그 것 외에 다른 욕망은 없어요. 내가 살고자 애쓰면 애 쓸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겁니다. 구원 받았다고요? 그것이 더 얽혔지요. 내 사적 구원은 악마에게 더욱 매이게 됩니다. 개인적 구원이라는 것은 없어요. 단체 구원이고 집단 구원이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했잖아요.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에요.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우리 아버지라고, 내가 내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집단, 우리. 만약에 갈 수 없다면 나는 천국에 가야 된다를 고수하는 사고방식은 나를 포기 못하는 사고방식이에요. 왜 포기 못 할 까요? 아까워서에요. 내가 죄인이 되고 멸망한다는 것은 그동안 정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버리려면 그동안 살아온 보람과 의미가 상실해버리잖아요. 상실하지 않으려면 기존 현실에 맞는 거기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 주체로 나를 계속 유지해야 되요. 이게 뭐냐 하면 가롯 유다가 하나밖에 없는 권세에 예수님을 넘겨버린 거에요. 악마에 나라에 넘겨버린 거에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빌라도가 한 겁니다. 나는 너를 놓아줄 수 있다. 악마의 거래라고 보면 되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하냐 하면 지금이라도 12영이나 되는 천사들이 와서 나를 빼낼 수 있는 그 나라에 속한다. 그리고 내가 유대인의 왕인 것이 맞는 이야기인 것이 너희가 모르는 새롭게 만들어 낼 이스라엘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그 이스라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드시 가야 될, 격어야 될 일을 하는 거에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려는 구나! 했지요. 그게 바로 사탄의 생각인거에요. 기존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기존 세상을 세상으로 인정하라는 거에요. 다른 이상한 꿈을 꾸지 말고 니가 살아남으면 좋은 것이고 천대 받으면 믿음 나쁜 것이고 벌 받은 것이라고 그렇게 간주 하자! 이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이미 합의 본 진리 아니냐는 거지요. 네가 무슨 통뼈냐는 말이지요. 인간이 거기서 거기란 말이지, 계속 마귀가 안타깝다는 듯이 우리에게 인정어린 모습으로 호소하는 거에요. 살아야 되지 않겠냐는 거에요.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목숨과 바꾼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챙길 목숨이 없다는 거에요. 오늘 제목이 “목숨 없다” 에요. 우리에겐 바꿀 수 있는 목숨이 없어요. 악마와 거래할 게 더 있어야지요. 가롯 유다는 자기 목숨을 챙기기 위해 은 30냥을 받았는데 그 당시의 남자가 120일 정도 일하고 받는 액수에요. 그 당시 일꾼의 품삯이 은 30냥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은 것은 이스라엘을 구축하기 위해선 반드시 예언서가 완성되야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언서는 구약의 말씀에 속하잖아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이고 그리스도가 예언을 완성합니다. 스가랴 11: 13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여기서 왜 은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냐 하면 목자 값에 영 부족하다해서 던지는 거에요.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가치를 은 30냥 정도로 봤는데 나는 그것보다 더 가치 나간다고, 그런 의미로 토기장이, 엉뚱한 남에게 줘 버린 거에요. 그것으로 산 것이 토기장이의 밭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롯 유다가 자살을 하지요.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것은 뭐냐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없는 현실이 새롭게 생긴 거에요.

그리고 인간이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이미 버린 저주받은 땅이에요. 그 저주의 땅에 우리가 어슬렁 어슬렁거리면서 과거 체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성도를 실천 되도록 이끄실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말씀에 준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슥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마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마 27: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 27: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 27: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여기서 피밭이라는 것은 누구의 피라는 얘기에요? (마27:6)에서의 핏 값이란 가롯 유다의 핏 값으로 부동산을 구입했고 이곳의 이름을 피밭이라고 한 거에요. 가롯 유다의 사고방식을 기념한 거에요. 오늘날 박물관인 셈이죠. 저주의 핏 값, 저주의 피로 만든 가롯 유다의 박물관을 이 세상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왜? 그렇게 되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이 세상을 통해서 증명되고 이 세상의 역할이 충분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믿음을 선물로 받는다든지 성령을 통해서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사실 성경에만 있고 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나는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주어진 말씀으로 인해 졸지에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로 되는 조건과 동반해서 죄로 인해 죽었다는 것을 동반해서 비로소 없던 현실이 우리 안에서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자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자살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죽은 자로 간주하는 복, 내가 없다가 아니고 주께서 만든 나가 있어요. 내가 없다가 아니고 이미 없는 목숨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내 목숨 챙기려고 나댈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 목숨 내가 챙기고 싶은데요. 그렇다하더라도 주께서 알아서 없다라고 해 주실거야, 왜? 성령께서 한 번 오시고 마는 게 아니고 계속 이끄시니까, 강제로 진짜 내 모습이 있는 곳으로 하늘나라이지요. 우리의 호패가 천국에 있다고 했잖아요.

우리의 본질이 천국에 있으니까 천국에 갈 때까지 주님의 희생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롯 유다의 모습이 되었었는데 어떻게 이런 가롯 유다와 같은 나를 인도하셨는지 충분히 보여주는 것을 성령께서 다 해주시는 거에요. 우리는 그 고백으로 감사만 하면 된다는 말이에요. 인생 자체에 대해 그렇게 부담 가지지 마세요. 우리가 못 살겠다, 괴롭다 하는 것은 아직 내 것이 형성하고 있다는 죄를 다시 들추어 주신 거에요. 내 것이 있다고 하는 데 근본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내가 달마다 달라요.

가인과 아벨에서 악이 등장하는데 악의 성질이 뭐냐하면 복수였습니다. 아벨에 대한 복수가 아니고 누구의 복수이냐 하면 일방적으로 동생의 제사를 받아 준 하나님에 대한 복수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복수를 할 줄 알고 아벨 속에 장차 오실 자신의 모습을 담아 둔 거에요. 가인은 아벨에게 복수를 했지만 가인 속의 괴물은 예수님을 공격한 괴물의 성격이 있다는 것을 가인을 통해서 일찌감치 창세기 4장을 통해서 메시야의 희생 모습을 보여주는 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각자의 인형극 같아요. 자기가 맡은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화내고 성내고 분노하고 때로는 감사하고 하루에도 몇 번 씩 바뀌는데 어느 쪽의 모습이 나 입니까? 그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자유자재로 내 성질을 가지고 말씀이 메시야적 모습으로 드러내는 거에요. 그 핵심은 바로 희생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예수님이 빠져나갈 길은 파는 모습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거에요. 가롯 유다의 복수를 자기 일생에 결절적 일로 수용해야 되는 겁니다.


악마가 벌이는 일을 주님이 서슴없이 받아줘야 되요. 그래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보여주는 거에요. 아버지 앞에서 나의 뜻도 이렇게 부인한다. 이것을 너희가 본 받아라가 아니라 필히 내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런 것을 내가 하게 만들것이다라고 미리 알려 주시는 거에요. 예수님 자신이 원형이고 모델이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팔려 잡혀 가고 제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흩어 졌지요.


그러면 제자들이 생각했던 이스라엘은 없는 겁니다. 완전히 망상이었어요. 그러나 12제자를 택할 때 집단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하신 다 이루었다를 근거로 해서 집단적으로 주어지는 거에요.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가 성립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다 달라도 구원받는 것은 공히 예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로 희생으로 구원받는 거에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성도가 사로 모일 때, 세상 사람들의 모임을 서로 이용하려고 모이지만


 또는 혈육적인 정 때문에 관계 때문에 모이지만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반드시 복음으로 만나야 되요. 그 말이 뭐냐하면 망가진 채로 만나자! 그냥 멀쩡하더라도 내 안에 가롯 유다 있다. 주께서 심어놨어. 왜? 그것이 나에게 구원의 출구야! 주께서 그 문을 통과 하셨기 때문에 가롯 유다가 있기에 주님과 내가 빠져나간 것을 계속 알릴 수 있어! 이렇게 가롯 유다같이 나는 주님께 반항하고 대들고 분노하는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서로 만날 때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체로 만나지 말고 우리가 목숨이 없는 자라는 가벼움으로 만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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