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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30 21:46:56 조회 : 448         
사무엘상 48강(버림받은 자) 마태복음 110강,(형상 지우기) 190430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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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IP:124.♡.122.56) 19-05-31 09:01 
버림받은 자 (삼상 16:10-12) 
대전-48강  

이근호  

2019년 4월 30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16장 10-12 절


(삼상 16: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 16:11 )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 상 16장 10절부터 봅시다. 이새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는데 그 아들이 다가 아니였지요. 아버지 이새의 입장이 개입됩니다. 인간의 뜻이 개입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는 사항을 하나님이 뽑아내시는 거에요. 인간의 생각이 곧 마귀의 생각,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생각. 이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시며 뭐를 꼭 들춰내나 하면 인간의 생각을 동반시킵니다.


거기에는 목적이 있어요. 그래서 니가 엉터리잖아! 니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틀어지잖아!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되지요. 반대되는 생각이 내 안에 잠복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눈에 보이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반대되는 뜻이 함유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지요. 그래서 성경 전체의 원리가 뭐냐하면 지옥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천국이 안 보이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되면 지옥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가는 천국은 전부 지옥의 한 골목이에요. 지옥의 한 부분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것은 문젯거리에요.


인간은 보람을 느낀다, 기대한다, 희망한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의 그 취지가 나는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끝내 이겼다는 말은, 인간은 이길 필요가 없는데 주면 그냥 받아 처먹으면 되지 왜 지가 이겨야 됩니까? 이긴다는 것이 기대하고 희망하는 거에요. 나는 교회에서 이기라라! 옆의 교회를, 옆의 교회는 교인 수가 7명인데 자기네는 3명이거든요. 옆의 교회가 7천명이라면 자기네는 8천명이 되겠다는 겁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간단해요. 이기리라가 기대이고 희망이에요. 내 딸같이 괜찮은 딸이 없다라는 드라마처럼 모든 것은 보람인데 그것을 행복이라고 하는 거에요.


정월 초하루나 연초에 사람들이 비는 것이 뭡니까? 절에서 비나 교회에서 비나 마찬가지이지요. 금요 철야하며 비는 게 뭡니까? 나는 이기리라! 나는 안 질래! 나는 지기 싫어! 앞에 ‘나’가 붙는단 말이에요. 성경을 동원해서 아무리 해석하려 해도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음을 성경은 이야기해요. 너 때문에 내가 치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전체가 선지자들이 고난 받는 길입니다. 본성이란 본능이거든요.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이 주님을 힘들게 하는 것만 있어요. 주님이고 뭐고 나를 이기게 해 준다면 까짓것 헌금으로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특히 구약과 신약에서의 차이점은 뭐냐하면 구약에 나오는 경우들이 인간들은 너무 감정적이고 인간들의 평범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을 흉내내는 거에요. 쉽게 말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냥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되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인정하는 사람과 인간이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과 별 차이점을 못 느낍니다. 성경대로 흉내를 내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할까? 주님이 날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것.

인간들이 사랑할 때 난 그대 없이는 못 살아요. 메마른 가슴에 단비 내리듯이 한 줄기 빛이 어두움을 밝히는 그대를 너무나 사랑해 난 그대 없이 못 살아요. 대중가요 가사거든요. 나의 모든 것들은 다 그대 꺼에요. 죽는 날 까지 같이 살아요. 김용임이 불렀던 내 사랑 그대여 가사에 평생을 같이 살아요.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라고 되어 있어요. 무슨 신앙심인지 애착인지 2절에는 그대의 모든 것들은 다 내꺼에요 라고 나와요. 세상 노래 가사와 성경을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과 같으냐 하면 ‘나“에요. 기여히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에요.


나를 포기 못하니까 평소에 건전해 보이는 사랑이나 소망도 사실 나 좋으라는 사랑, 믿음, 소망인데 특히 믿음 같은 경우는 더 그러한데 믿음의 속성을 그대로 신에게 바치면 신도 나의 건전함을 수용하지 않겠냐는 거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품성을 경건해 보이기 위해서 활용하는 그런 시간들을 예배나 집회를 통해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냥은 안 끄집어내지니까 드럼이나 기타 등을 동원하는 거에요. 박수치고 감정을 고취시키고 그 감정 속에서 평소 살면서 내가 이런 경지에 이르면 참 훌륭한 것이라는 것을 그 현장에서 도출해내고 목사들은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지요.


사실은 하나님 뜻에 대치되는 짓을 계속 해왔는데, 교회에서는 그렇게 감정에 몰입시키고 건전함을 그렇게 끄집어내는 목적은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함이지요. 이 수법으로 헌금하고 헌신하고 아까 노래 가사에서처럼 내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에요.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여기서 그대를 주님으로 바꾸면 되잖아요. 내 모든 돈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교회 그러니까 내 모든 돈은 교회 것입니다. 이런 지경까지 끄집어내는 하나의 수완이에요. 오늘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없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십니다.


인간은 '나'가 있음으로 문제가 되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사무엘을 이새에게 보내서 아들 일곱을 보고 그 아버지에게 사무엘이 그 외에 아들이 더 있느냐고 묻지요. 이새의 입장에서는 사무엘이 와서 이스라엘의 차기 왕을 뽑는다 하니까 그 아버지는 괜찮은 자식은 다 깔아 놨어요. 그리고 그 아버지가 보기에 막내는 철도 없고 그 눈엔 없는 존재가 겁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보낼 때 지위를 줘서 제가 하면 일 처리가 간편해 집니다. 사무엘도 모르게 만들었어요. 사무엘은 이새의 일곱 아들 가운데서 분명히 차기 왕을 뽑으려 왔기는 와서 후보감을 제시 할 때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다 동원시켜 보죠.


적어도 이 일곱 중에 있겠지! 후보감을 넉넉하게 정한 거에요. 그런데 후보감 전체가 거부당한다는 말은 무엇을 거부당하는 거에요? 인간이 끄집어 낸 모든 생각과 뜻은 일단 하나님께서 거부하고 가시는 거에요. 대수롭지 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거부하고 가는 거에요. 그렇다면 다윗은 존재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다윗을 누가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의 뜻이 가로막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가로막힌 것을 피해 다윗에게 가면 되는데 사무엘도 모른다니까요. 사무엘 조차도 가로막혀 있는 것에 막히도록 하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왜냐하면 왕이 되는 것은 심지어 선지자의 마음까지라도 보탬이 되지 않고 참여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 올 때 자기네 형제는 천국에 갔다, 누구네는 지옥에 갔다라고 판정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판정이 지금까지 자기가 알던 사람의 판정이에요. 예를 들어서 흉악한 인간인데 전혀 예수도 안 믿는데 교회에 나왔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은 가롯 유다 같아서 지옥에 갔다라고 한 것이 4월 30일인데 5월 1일에 은혜 받았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필 4월 29일에 은혜를 받았으면 4월 30일 날 그런 평가를 안 하는데 모든 인간의 평가는 결론지어져서 재는 안돼! 그런데 그 사람을 5월 1일 날 새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하면


 한 개인을 구원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소유화 시킬 수 없다라는 거에요.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거에요.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줄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다는 건방진 생각은 못하게 만듭니다. 그때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있는 이상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소유화 시킬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파가 이단인 것입니다. 언제 구원받았다는 그 생각, 그건 본인의 일방적 생각이에요.

하나님과 거래한 거라니까요. 하나님! 구원 주세요. 감사합니다. 죽을 때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 그다지 하나님이 필요치 안잖아요. 그 다음은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거든요. 구원파뿐만 아니라 침례교, 정통 장로교 합동 측 감리교나 개혁 주의 신학도 마찬가지에요.당신이 일단 성령 받아 구원받았으면 이제부턴 알아서 성령 받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 버려요. 그게 성화론이란 말이죠. 누구 마음대로 지켜요.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도 모르는데 뭘 지켜요. 억지 부리는 거에요. 지켰다고 우기는 겁니다.


복음 이야기 하니까 다 안다는 거에요. 뭘 알아요? 어제의 나도 믿지 말아야 되는데 어제의 나는 오늘 나에게 스크린 역할을 해요. 오늘 주신 은혜를 어제의 내가 훼방하고 있다는 말이죠. 늘 버림 받아야 되는데 새로움은 오는 데 버리지 안으니까 새로움이 튕겨져 나간다니까요. 그래서 오늘 첫째 시간의 핵심은 뭡니까? 버림받은 자입니다. 버림받은 다윗처럼. 공식은 지옥을 거치지 않으면 천국은 보이지 않는다. 버림받은 자 지옥을 먼저 이 세상에서 다윗이 경험케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실 까? 그게 인간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되기 때문인데 버림받은 자는 어디로 갑니까? 제가 내 밷어 버리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창세기 8장20절을 한번 봅시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지요. 여기에서 잘 보셔야 돼요. 노아는 누가 봐도 살아났어요. 사람들이 볼때 어디를 보냐하면 노아는 살았데 라고 좋겠다 하잖아요. 노아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니까 우리도 노아처럼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뭐를 놓치냐 하면 제단을 쌓은 것을 놓치는 거에요. 이미 성경을 보는 방식에 은근히 노리는 것이 있어요. 자기 이익과 자기 행복과 운명을 확보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인데요. 욕심인줄 몰라요.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이 욕심이에요. 누가 마귀의 일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나를 위해 하는 것은 다 마귀의 일이에요. 그것이 나의 구원이든 천국행이든 하나님의 관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안다 해놓고 십자가를 이용해서 자기가 구원받겠다는 것은 십자가 근처도 안간 사람이에요.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 악마의 일이에요. 자기를 위해 하는 것으로 만든 종교적 단체가 뭐냐 하면 교회잖아요. 교회가 마귀 일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온 것이기 때문이에요.


목사부터 해서, 시험에 들 문제에요. 노아를 통해, 성경을 본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본 모든 사람, 심지어 주석에서까지 노아는 살았대! 왜 살았지? 은혜 받아서, 그것도 그냥 은혜받은 게 아니라 착해서 은혜받아 하나님이 노아만 살리고 나머진 다 죽였데. 그래서 노아를 닮으면 구원받는데 이미 시작부터가 마귀적 의도에요. 하나님 일의 반대는 어디서 나온다고요? 잠복된 나에게서 나오지요. 배후에서 악마는 그 인간을 사주하고 있고 주님의 모든 성경 말씀은 그 인간을 향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나름 반응을 나타내지요.


하나님 뜻과 반대되는 반응들이 나오는 겁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는 (창 8:20)에서 노아가 깨달은 게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야 될 입장이 아니고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작업에 말려든 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노아는 종으로 들어간 겁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사환이 된 것처럼, 종의 특징은 자기 일이 없어요. 그것을 무정한 사람, 다른 말로 냉혈안, 피가 차가운 사람. 종의 특징이지요. 인간들의 감정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망이 현실적으로 성취되지 않으니까 악마적 분노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이기리라’고 했지요. 이기고 오면서 행복한 미소를 띠고 지게 되면 악마적 얼굴을 하게 되지요. 일 없이 놀던 사람이 취직 되었을 때 나는 취직이 됐다며 굉장히 기뻐해요. (어떤 사람이) 놀다가 포도원에 취직 되었을 때 드디어 포도원 일꾼이 되었다고 좋아했지요. 하루가 지나지도 않아 오후 5시가 되었을 쯤 일당을 받는데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돌변을 하지요. “이건 불공평합니다”라고 나오는 거에요. 자기 아들이 취직 돼서 월급을 250만원 받는다고 신나게 이야기 하는데 같이 있던 동창이 말하기를 우리 아들은 월급 700만원 받았는데 하면 집에 가서 자기 아들을 닦달해요.


기껏 공부시켜 놨더니 겨우 250만원이야? 얼마나 상대적이에요. 환경에 인간은 놀아나는 거에요. 단을 쌓을 때 그 주체가 어디 있어요? 방주는 노아를 실어 나르기 위함이 아니라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정결한 쌍으로 된 짐승들, 그 짐승들이 7장에 보면 정결한 짐승 암수 7씩이지요. 그 정결한 짐승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주변에 정결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벌어져야 할 상황들이 있다는 겁니다. 싹쓸이에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 정결함을 보여주기 위해 싹쓸이해버리는 겁니다.


지옥에 가는 자가 왜 있어야 되냐 하면 천국가는 사람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에 마태복음 25장 34절에 보면 뭐가 더 부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아버지로부터 복 받은 자들이라 인정받고 평을 받는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어요? 뭐가 더 필요합니까? 우리 집에 아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 필요 없지요. 내 감기가 꼭 나아야 한다? 필요 없지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복 받은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지요.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그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어떻게 티가 나냐하면 아이고! 세상의 군상들아! 이 불쌍한 인간들아! 똑같은 감정을 가져야 되요. 하나님께 복 받지 못한 세상의 모든 군상들, 국회의원이던 목사이던 관계없이 주께 복 받는 것에 관심 없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지요. 지금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중입니까?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지옥 가는 사람들을 못 닮아 환장들 하고 있어요? 그들과 안 닮은 것을 안타까워하십니까? 그들과 닮을 필요가 있어요? 삶의 방식을 없지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알아요. 그렇게 들었지만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그렇게 많이 들었습니다만은 교회 밖에 나와 하는 것을 보면 아이구! 부러워라~ 아파트 당첨 됐네! 좋겠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닮을 수 없는 존재에요. 버림받은 자입니다.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로부터, 없는 존재라니까요. 하나님은 다윗을 예정했으면서도 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히 노출시키고 드러내고자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예정된 자는 숨어있다는 겁니다. 어디 숨어 있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이 예정한 자는 인간들이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잘 안다는 인간의 기대치에 포위되어 있는 거에요. 심지어 다윗 본인도 몰랐어요. 사전에 몰랐어요.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삼을 거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미리 들떴겠지요. 알아서 좀 씻고 왔겠지요.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안 씻는다고 지옥갑니까? 복 받았는데, 주님이 알아서 찾아오는데. 제가 주일 날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니 그따구로 살래? 그따구가 뭐 어때서? 천국 가는 것과 아무 상관없잖아요.


성경을 참 많이 봤지요. 볼때마다 내 뜻이 주의 뜻을 차단시켰습니다. 내 의도가 주님의 의도를 가렸습니다. 다윗이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은 기어이 다윗을 없는 존재로 만들어요. 내가 왕이 되었다! 형들, 아버지 저 왕이 되었어요.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고 왕이 되었어요. 이렇게 말한다면 다윗은 아직 멀었어요. 남에게 자랑하려고 “내가 왕이 되었다.” 한다면 마찬가지가 되고 끝내 이기리라가 되버려요. 처음부터 없는 자였잖아요. 없는 자 였는데 누군가 왔을 때 다윗의 의미가 드러났으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이 왔을 때 의미가 드러났지요.


기어이 그 말씀이 다윗으로 하여금 말씀만 남고 다윗은 없애버립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게 기름 부었다는 말은 신약에선 성령의 기름부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내 구원은 날라가 버리고 내 안에 말씀이 말씀답게 현실화되고 발견되는데 이용 될 뿐이에요. 말씀 구원이지 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내 안에서 계속 말씀만 일어나는 거에요. 말씀의 완성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드러나기 위해서 없는 존재인 나에게 하나님이 사용하신 거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게 한다?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수시로 인간은 육을 입고 있는 이상 이 공식을 누가 방해한다? 내가 방해에 나선다고요. 주께서 열심히 일했는데 내게 돌아오는 몫은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다윗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경과를 통해서 알려주는 식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더라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윗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도 같은 내용이 벌써 예고되어 있지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소돔과 소모라라 심판받습니다. 그것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만 구원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9장 2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내어보냈더라 는 말은 롯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므로 말미암아 롯을 아브라함에 종속되게 해요. 롯이 ‘나 구원 받았다. 나 이겼다.’고 이런 식으로 할 수 없어요.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거에요. 복 받은 자여~ 할 때도 예수님 때문에 복을 준 거지요.


내가 예수님 갖고 있는 괜찮은 것을 내 것으로 전환 시켰다고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구원파? 안돼요. 주님의 구원이 내 구원으로 되었다? 신난다! 이건 안돼요. 구원은 주님의 구원뿐이에요. 내 구원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을 어디 안에서의 구원이라고 합니까? 예수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원된 겁니다. 나를 위한 구원은 애시당초 성경 자체에도 없어요. 그래서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교회에 나오세요. 이건 자체가 악마의 뜻이에요. 그런 건 없어요.


 (창 19: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이렇게 말하면 교회에 나올 사람 아무도 없고 운영도 안되지 않느냐 교회가 교회를 가로막고 있으니까 교회가 망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요. 베드로 전서에 나오잖아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심판에 이르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는 본부를 치는 겁니다. 좀 진지하게 생각해야 되요. 흔해빠진 카페 생각하듯 교회가 존재한다고 해서 좋게 보면 안돼요. 기독교인 숫자가 몇 명이냐는 둥 쓸데없는데 신경쓰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숫자 세다가 다윗처럼 당합니다.


미리 이야기 하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을 받았거든요. 성신을 받은 마지막 결론은 시편 51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것, 내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선 이런 죄인이 드리는 제사는 안 받는다는 겁니다. 죄인이 드린 제사를 받으실리가 있겠습니까? 더러운데. 더러워서 안 받아요. 우리의 헌금, 예배, 찬송 다 안 받습니다. 더러운 것을 왜 받아요? 받는 것은 예수님 밖에 안 받아요. 히브리서 7장, 8장에 나오는 원리에요.

내 것은 더러워서 안 받으시고 주님께서 드림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습니다라고 하는 자가 성도에요. 이럴 때 비로소 내 사랑 그대여~라는 가사가 확 다가오는 거에요. 내 사랑 그대여~ 그대 없이 난 못 살아요. 그대 자리에 주님을 넣으면 되요. 메마른 이 가슴에 단비가 내리듯이, 마치 가스펠 송 같지 않습니까? 빛이 어두움을 비취듯, 무슨 요한복음 같아요. 나중에 이 노래 한번 들어 보세요. 세상 끝 날까지~사랑 앞에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는 겁니다. 얼마나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착해지려 하겠습니까?


사랑이 없다는 것을 마귀가 잘 알아요. 내 잘남을 계속 갖고 있으니까 마귀가 약을 올리는 거에요. 더! 더! 더! 더 하라는 거에요. 전에는 2시간 기도하던 것을 이젠 꿇어앉아서 해야 더 정성이 있지, 전에 헌금 천 만원 했는데 이천 만원은 왜 안내냐는 거에요. 주님게선 목숨까지 바쳤는데 너는 그까짓 천 만원 내고 입 닦을래? 하는 거에요. 주께선 모든 것을 주셨는데 너는 선교사가 안돼냐 이렇게 나와요. 태국의 어떤 선교사를 2주 전에 만났는데 제 책을 봤는데 동의하며 그 분이 하는 말이 “선교는 없다.” 라는 말에 자기가 15년 동안 선교를 했는데 그것도 오지로 가서 선교를 지금도 하고 있어요.


선교하려고 후원금 손 내밀고 거기서 선교 센터 짓는 것 다 헛짓이다라고 선교사 입으로 저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무려 4시간 동안이나 그 분이 한 말을 그대로 하자면 “그들은 다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노아는 제단을 쌓는 거에요. 그러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다윗이 아브라함 언약에 준해서 뭐 하냐하면 제단 쌓기가 되겠지요. 구약에서는 사람이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소나 양으로 제물을 얹지요. 사람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잖아요. 그런데 제단 쌓기의 목적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준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단을 쌓기 위함이고 제단을 쌓기 위해 인정받았기 때문에 신약으로 오면 돌과 불쏘시개와 동물의 제물, 제단의 확대를 한 거에요.


내가 제단위에 눕는다고 제물이 될수 있을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 되시고 제단을 확대시켜 버리면 아까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롯을 구원하기 위한 환경은 어떤 환경이었습니까? (지옥을 통과해야 천국이 보인다고) 소돔과 고모라는 아주 멸망시켜 버리지요. 그러면 멸망, 다른 말로 심판이 ~~요소 안에서만 구원이 발생되는 거에요. 롯 안에 무슨 요소가 있습니까? 심판의 요소가 있지요.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롯의 처가 있었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롯의 처를 애초부터 안 믿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때 데려오지 말았어야 되요. 그런데 일단 데리고 나왔다는 말이죠. 애초에 구원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그 동네 사람들과 같이 타 죽게 놔둬야 했는데 일단 데리고 나왔거든요. 그 심판과 멸망에 미련을 두고 그 쪽에 관심사를 돌리지 말아야 했거든요. 과연 멸망하는지, 심판 하는지를 그의 처가 뒤돌아보았는지를 질문하면 안되요. 롯이 왜 안돌아 보았는가를 질문해야 되요. 왜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지 않았습니까? 약속을 믿었으니까 그래요.


구원은 어차피 뒤돌아보나 안돌아 보나 작살났을 거니까. 혹시 대전엔 유명한 축제가 있습니까? 온천 축제가 있다면 여러분은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없지요. 거기서 행복을 찾고 보람을 찾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절에서는 연등을 달아 올리는 축제를 벌여요. 절이 아닌 시에서도 여러 형태의 축제를 만들어 내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거든요. 심지어 교회에는 예배라는 이름의 축제가 있어요. 부흥회도 그렇고 일반 예배도 의미가 없거든요. 밴드가 있고 해도 의미가 없어요.

롯의 처가 왜 뒤돌아 봤냐고 접근하지 마시고요. 롯은 처는 뒤돌아 봤는데 우리는 안 그랬다 하지 말고 왜 롯은 안 뒤돌았는가를 봐야 되요. 잘 먹고 살든 말든 의미없고 이미 망하도록 된 대사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과연 그리 보고 있느냐 말입니다. 남북 대화를 하든 말든 의미 없다는 말이죠. 김정은이 오든 가든 핵 폭탄 열 개, 천개를 만들든 관계없다는 거에요. 니! 저 이런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의미 없어요. 꼭 참석해 주세요,~참석하긴 할 텐데 의미 두지 않는다.


둘이 실컷 만나든 헤어지든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주님 재림하시면 끝인데 “그래 사돈은 무슨 옷을 입고 나온다는데?” 난리에요, 손님은 몇 명이나 올지! 온 정신을 거기에 두는 거에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잡가고 장가가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기름 부은다는 것은 뭐가 들어온다고요?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들어오는 거에요. 약속이 들어오면 약속 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드라마가 어떻게 끝나든 의미 없어요. 세상 유행가가 어떻든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버립니다. 유황불 맞는 게 아니고 이것은 뭐냐하면 롯의 가정 안에 롯의 처는 하나의 기념물이 되는 겁니다.


내 아내는 심판 받았다. 다시말해 우린 심판 안에서 살아남았다. 그 심판의 흔적을 두 딸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조상이 되면서 그때 심판 받아야 될 환경이 구약내내 따라오게 되어 있지요. 이게 다윗이 말했던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내 속에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되는 요소가 잠복된 암 세포처럼 때가 되면 발작을 일으키고 와락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주님 가신 길을 내가 가겠다고 나서지 마세요. 주님 가신 길을 주께서 만드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서게 되면 나의 일이 되고 나의 구원이 되고 주의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일이 있어 동네에 있는 절에 가게 되었는데 비오는 날 법회 한다고 시끄러워요. 지직~ 지직~무슨 타는 냄새가 나서 보니까 대목이 돼서 연등을 서로 복잡하게 놓아 놨는데 비가 와서 줄줄 물기 때문에 나무는 타고 합선이 되고 불타서 다 날아갈 뻔 했어요. 법회 한다고 정신없는데 차단기를 내려서 불타는 건 모면 했는데 법회에 가보니까 하긴 교회도 법회이지만 전부 자기를 위해서 에요.


본문 16장을 다시 봅시다. 이새는 사무엘에게 왜 다윗을 소개하지 않았을까요? 언약에 보면 항상 혈육을 비켜나게 되어 있는데 여러분들도 다 아시지만 이삭이 누구를 더 좋아했어요? 에서를 좋아했지요. 하나님께서 맏 아들 에서를 이삭이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야곱을 좋아하지요. 이 상황을 대비해 보세요. 언약적 이삭이 누구를 사랑해요? 에서를 사랑하지요. 그래놓고 하나님은 복 주는 이삭의 뜻과는 정 반대로 싫어하던 야곱을 복 주게 만들었어요. 결과가 야곱에게 복이 가게 만드셨지요.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혈육적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렀습니다. 인간이 믿고 좋아하는 것을 뒤짚어 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다윗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다윗 역시 압살롬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다윗의 인생에서 압살롬 계열이 솔로몬의 계열로 뒤짚어 지지요. 다 제거해 버리니까 주님께선 부단히 누구를 제거해요? 나 자신이 뿜어내고 있는 스스로 처리 못하는 본심을 성령을 통해 매일 같이 쳐 내시는 거에요. 16장에서 다윗이 뭐라고 했냐하면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이새는 다윗을 그렇게 안 봤느냐는 말이에요.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방금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똑같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좋아해버리면 그 사람은 용모가 뛰어난 사람이 되고 빛이 나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너무나 주관적이지요. 이번 수련회에서 아가서 할 때 그랬잖아요. 도대체 여자가 얼마나 아름답고 남자가 얼마나 멋있는지 우리는 상상이 안 간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을 한번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아가에 나오는 솔로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봐야 어떤 사람은 술람미 그것도 인물이냐?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너무 과장되어 있어요. 그 묘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아름답게 보일 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 눈에는 별로 보인다는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우리가 주의 뜻을 날마다 훼방하고 있음을 주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 뜻대로 안 되게 해 주신 주께 감사하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124.♡.122.56) 19-05-31 09:34 
형상 지우기 (마 26:17-25 )
대전-110강 
이근호  

2019년 4월 30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6장 17-25 절


(마 26: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26: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마 26: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마 26: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마 26: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마 26: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마 26: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6장 17절부터 보면 중요한 대목이 난해한 것은 유월절이 나오지요. 유월절은 신약에 속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 속하지요. 아시다시피 유월절은 출애굽 하기 전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건넌 날이지요. 그 날을 기억하라. 그러면 유월절날 그 당시의 히브리 인들이 양을 잡았는데 양을 잡는 주체가 누굽니까? 본인이 양을 잡고 피를 누가 바릅니까? 천사들이 와서 발라주고 하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했잖아요. 이런 일을 하려면 누가 확실히 의식되야 하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음이 우선 돼야 하지요.


내가 피도 바르고 양 고기도 먹고 전부 “내가”가 빠지면 유월절이라는 결과가 안 나온다는 결과가 완전 느껴지잖아요. 유월절을 지켜야 되니까 지킨다는 말은 주체가 내가 확연하게 있어야 되고 내가 없으면 유월절 자체가 성립 안 되니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이벤트 행사에 내가 빠지면 얼마나 섭섭해 할 거냐는 생각이 들겠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이런 의식을 가지고 봅니다. 예배에 내가 참석을 했습니다. 예배에 내가 참석을 안하면 예배가 안 됩니다. 그런 의식을 항상 평소에 자기 자신에게 갖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거에요. 내가 없으면 유월절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유월절이 나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했다. 구약에선 내가 지킨 건 나 잖아요. 그런데 유월절을 지켜 나온 결과가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고 다른 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유월절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키면 받아 줄께! 가 아니라 “너는 안돼! 네가 지킨 건 유월절이 아니야! 나는 안 받을 거야!” 이렇게 유월절을 지키는 분이 따로 있다라고 한다면 우리가 뭐부터 지워야 하냐하면 내가 지키겠습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유월절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나를 스스로 지워버려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지울 수 있냐 하는 겁니다. 못 지워요. 인간이 생각하기를 내 몸이 여기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이 계시고 지시를 내린다면 하나님과 그 지시는 내 몸 바깥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밖에 있는 것이 우선이냐 내 몸이 우선이냐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말씀이 우선이냐 내 몸의 컨디션이 우선이냐? 인간은 자기 몸의 컨디션이 더 중요해요. 그것이 더 시급하고 긴급한 문제이고 컨디션이 먼저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도 컨디션 나쁘면 못 지킨다고 하고 있어요.

말씀에 이웃을 사랑하라 하면 자기 몸이 불편하면 이웃 사랑도 못 한다고 하는 겁니다. 주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 몸 컨디션이 조금 나아지면 지키겠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아까 하나님의 지시는 나보고 지키라고 한 것 같지만 내가 아니고 말씀을 지킬 나는 따로 있다는 것은 알려 주면서 지우겠다고 나서는 나는 지움의 대상이에요. 사라짐의 대상이에요. 사라져야 될 대상이란 말이죠. 이 세상에 있는 나를 지운다는 말은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의 형상들이 있잖아요. 나를 지우는 방식은 모든 형상들을 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나무가 있으면 나무도 지우고 해가 있으면 해도 지우고 달도 지우고 다 지워버리는 상태, 하나도 없게 하는 상태, 그것이 내가 서서히 죽어가는 상태입니다. 눈이 감기는 상태, 내가 보고 있던 형상들은 사실 내 몸이 일방적으로 자각했던 형상에 불가했던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엔 내가 장악한 형강 따로 있고 주님이 뜻이 있어서 만들어 놓은 주님의 형상이 따로 있겠지요. 그래서 주의 뜻은 주님의 형상만 남기고 내게 있는 형상을 지워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형상이 주님이 주신 형상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을 지킨다고요? 오늘 본문에선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키시죠. 그리고 본문에서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묻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준비해서 유월절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우리가 교회가서 예배드리고 예배 드렸다고 생각한다는 말이고 출석 체크 했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 나의 형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램대로 나됨을 뚜렷하게 하는 데 종교라는 것, 교회라는 것, 예배 드리려는 스케줄 이 모든 것이 더욱 나를 부각 시키고 나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동원된 것들을 형상화 시켜 예배당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어디 기도 처소는 없나? 어디가서 예배드릴까? 이 말은 신앙생활을 50년이나 60년 해도 서슴없이 막 나와요. 예수님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릴까요?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릴까요?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얘기 하길래 우리도 안 지려고요, 끝내 이기리라! 우리도 안 지려고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데 어느 쪽이 맞습니까? 하는 거에요. 이미 선택을 해놓고 주님께 묻는 거에요. 주님은 양쪽을 다 없애버리지요. 지워버린다니까요. 저 쪽도 아니고 이쪽도 아니에요.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리심 산도 아니고, 왜 그러하냐 하면 예배를 드리겠다는 내가 지워져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배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과거보다 몸의 컨디션을 더 중요시 하듯이 지금도 주님께선 인간의 행함보다도 지금 벌이고 계신 이 일이 주께서 하실 일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떡을 먹으려 왔을 때 너희가 왜 왔느냐? 배부르려는 까닭이지 하나님의 일로 오병이어의 떡이 만들어졌고 그 떡으로 배부른 일이 만들어 졌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로 혜택 입은 일로 본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보낸 자가 떡을 먹게 되었으니까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보내신 자가 떡을 줘서 먹게 되었으니 난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그게 바로 너희의 오해이다. 내가 이야기 할 때니 믿을 수 있으면 믿어 봐라! 예 이야기해 보세요. 우리가 믿겠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믿습니다.


그러면 한 번 이것도 믿어볼래?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그들은 주님이 만나를 주면 거기까지만 하나님의 일이고 그것을 주워 먹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라고 생각해서 주워 먹으면 그 행위로 자기가 산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은 이것도 한 번 주워 먹어보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이라고 했으니 어떻게 주워 먹겠어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경과한다? 인간의 뜻을 경과하지요. 인간의 뜻은 뭡니까?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기를 원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쏟아내는 피와 살은 인간을 경과하는 인간의 어떤 것을 경과하냐 하면 긍정적인 것을 경과합니까? 부정적인 것을 경과해요? 인간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면서 뜻이라고 우기는 핍박받는 경로가 아니면 뭐가 생산되지 않습니까? 예수의 살과 피가 생산되지 않아요. 가거라! 떠나라! 이 말이죠. 그냥 떠나는 것도 아니고 핍박해라! 나를 공격해! 공격을 해야 피와 살이 만들어질 게 아니겠습니까? 너희 죄를 위해 주께서 흐린 피라 하면 그들은 무엇을 생산해내야 되요?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뭡니까? 죄를 만들어 내는 거에요. 죄를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성화가 아닙니다. 참 쉽지요! 죄를 지면 되요. 죄를 안지어서 문제에요. 제가 주일날도 했잖아요. 아담의 죄에서 나의 죄를 따로 뽑아내지 말라고요. 가만히 점잖게 있어도 아담의 죄에요. 뭘해도 죄가 되요. 먹는지 마시든지 죄가 되요. 그래야 먹는지 마시든지 의가 되듯이, 지워버리는 일을 해야 되요. 이것을 증거한 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이었고 고난 받으며 또 신약에 증거한 자들은 성령받은 제자나 사도들, 스데반 같은 자들이 세상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심판입니다. 심판 뒤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알려주는 일을 사도들이 합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뭐고 했습니까? 모든 것이 무의미 한 거에요. 지워버리는 겁니다. 어떤 팝송 가사를 보면 이러한 형상 지우기와 결부되어 있는 좋은 예가 될 것 같아서 찾아 봤는데 이 노래 가사가 나름대로 얼마나 심오한지 들어보세요. 빈센트 (반 고흐)라는 가사를 존 맥클레인이 불렀지요.

빈센트 ( 반 고흐 ) 노래 가사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당신의 팔레트를 파란색과 회색으로 칠해 보세요

Look out on a summer's day 어느 여름날을 내다 보세요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내 영혼의 어둠까지 아는 듯한 눈으로


Shadows on the hills 언덕 위 그림자를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나무와 수선화를 그려 보세요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산들바람, 추운 겨울을 잡아내 보세요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눈처럼 하얀 린넨같은 대지의 색채들 안에서



Now I understand 이제 알 것 같아요.

What you tried to say to me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을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그들을 놓아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지만

Perhaps they'll listen 아마도 이제는 귀 기울일테죠.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환하게 빛나게 타오르는 꽃들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보랏빛 안개 속, 소용돌이치는 구름들이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청자처럼 푸른 빈센트의 눈 속에서 빛납니다.

Colors changing hue 빛깔을 바꿔가는 색채들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 호박색 곡식으로 가득 찬 아침 들녘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고통으로 금이 간 낡은 얼굴들이

Are soothed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예술가의 애틋한 손길로 어루만져집니다.



Now I understand 이제 알 것 같아요

What you tried to say to me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을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그들을 놓아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지만

Perhaps they'll listen 아마도 이제는 귀 기울일테죠




For they could not love you 그들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어도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당신의 사랑은 언제나 진실했었죠

And when no hope was left inside 한 가닥 희망도 보이지 않았던 그때

On that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에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간혹 사랑할 때 그렇듯 당신도 스스로 생을 거두었지만

But I could have told you Vincent 나는 빈센트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이 세상이 그리 의미 있지는 않다고

beautiful as you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텅 빈 벽에 걸린 초상화들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이름 모를 벽에 액자도 없이 걸린 얼굴들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세상을 보며 결코 잊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당신이 만난 낯선 사람들처럼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다 해진 옷을 걸친 다 해진 남자들

The silver thorn of bloody rose 피처럼 붉은 장미에 달린 은빛 가시가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산산히 부서져 첫눈 위로 내리네요.



Now I think I know 이제 알 것 같아요

What you tried to say to me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을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그들을 놓아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듣고 있지도 않으며

Perhaps they never will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별이 빛나는 밤~ 내 영혼의 어둠까지 아는 듯한 눈으로” 벌써 심오하지요. 화가 빈센트가 어렵게 고생하며 살면서 세상에 가진 자들이 얼마나 허위와 위선을 고발하는 쪽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죠. 그림에 담겨 잇다는 말이에요. “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을” 정말 중요한 건데 이것 때문에 이 가사를 보는 건데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온전하기 위해)성화지요. 얼마나 힘들었는지~오늘날 교인들에게 목사라는 악마가 하게 해 온전하려고 얼마나 힘들었어요.


악마가 가르쳤지만 내 스스로도 원했던 거에요. 반 고흐처럼 세상은 더럽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주의 뜻대로 깨끗하게 살아보지 않겠느냐? 이게 성도의 삶이 아니냐?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그들을 놓아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 내가 하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거에요. 놓아주려하는 거에요.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지만 아마도 이제는 귀 기울일테죠. 별이 빛나는 밤에 환하게 빛나게 타오르는 꽃들 보랏빛 안개 속, 소용돌이치는 구름들이 청자처럼 푸른 빈센트의 눈 속에서 빛납니다~”. 마치 인간의 혼돈을 바깥으로 표현했다고요.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청자처럼 푸른 빈센트의 눈 속에서는 인간의 위선과 울분 같은 것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빛깔을 바꿔가는 색채들 호박색 곡식으로 가득 찬 아침 들녘~” 그 다음 가사가 참 좋아요.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고통으로 금이 간 낡은 얼굴들이~ 농부들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농부들이 밥 먹고 살려고 얼굴에 금이 가는 거에요. 그것을 누가 위로해 주냐? Are soothed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예술가의 애틋한 손길로 어루만져집니다.


예술가인 고흐의 손길로 그들의 금이 간 얼굴을 어루만져 줍니다.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을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들을 놓아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지만~” 꼭 에스겔 같아요. 에스겔이 아무리 전해도 말씀을 들을 때는 닿지만 전할 때는 아프지요. “~아마도 이제는 귀 기울일테죠. 그 다음이 중요한데 For they could not love you 그들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어도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당신의 사랑은 언제나 진실했었죠.~”


사람들은 고흐 당신의 뜻을 알지 못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언제나 진실했다는 말이죠. “ 한 가닥 희망도 보이지 않았던 그때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별이 빛나는 밤에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간혹 사랑할 때 그렇듯 당신도 스스로 생을 거두었지만 ~” 고흐가 자살했거든요.“나는 빈센트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이 세상이 그리 의미 있지는 않다고~” 고흐씨 이 세상은 의미 없어요. 무의미 하다는 말이죠.

beautiful as you (누구에게?)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당신 자체가 아름다운데 남을 설득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별이 빛나는 밤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텅 빈 벽에 걸린 (무표정한)초상화들 이름 모를 벽에 액자도 없이 걸린 얼굴들~” 처럼 세상은 무의미 한 거에요. “세상을 보며 결코 잊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 화가의 그림에서 이러한 무의미한 것들을 잊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당신이 만난 낯선 사람들처럼 다 해진 옷을 걸친 다 해진 남자들 (농부들이지요.)


The silver thorn of bloody rose 피처럼 붉은 장미에 달린 은빛 가시가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산산히 부서져 첫눈 위로 내리네요.깨끗한 첫 눈 위에 피가 묻히듯이 고흐는 작품을 그런 식으로 했어요. 이 세상 순수함 속에 더럽혀졌다는 말이죠. “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을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들을 놓아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마지막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듣고 있지도 않으며


(그 다음 이 중요합니다.) Perhaps they never will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이 세상에서 고흐는 갔지만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금이 간 얼굴을 가지고 망가진 인생을 살 겁니다. 이게 빈센트의 가사에요. 왜 이 가사를 인용 했냐하면 이 사람이 화가잖아요. 화가는 뭐냐? 형상입니다. 그림 속의 형상은 기존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고 지워버려요.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의미가 없거든요. 의미를 화폭 속에 한데 모아 놔야 되요. 이것을 유월절을 지켰던 그 많은 사람들 그 유월절 양을 예수님께서 하나로 응축 시킵니다.


자신의 몸에다가 백날 유월절을 지키고 백날 열심히 살고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각자 거짓된 자신의 몸들을 통해서 주의 뜻을 이루겠다는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데 자기 구원과 욕구를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거든요. 왜 본인의 형상을 지우지 않느냐 하면 자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를 지운다는 것은 구원받는 대상인 자기도 지우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이제는 나를 믿고 너의 형상을 지워버려라! 예수님이 빈센트 고흐 같아요. 왜 내가 무의미 한 것을 왜 무의미 하냐를 의미의 구심점으로서 내가 유월절을 지킬께!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면 기존의 모든 것, 예배도 의미 없는 정도가 아니고 이 자체가 의미 없어요. 12제자가 죽어야 되요. 없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사도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예수님 죽을 때 12제자도 죽었어요. 13번 째 제자가 있었지요. 누구지요? 사도 바울이지요. 사도 바울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성령을 통해 소급해서 시간이 흘렸다고 해서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이 되는 거에요. 십자가의 현재형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응축했기 때문에 나라는 의미는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애가 군대에 가 있고 이런 것도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언제? 요양 병원에서 눈 감을 때, 눈 감을 때는 과거에 몇 년 살았다도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 순간도 성령이 일으킨 사건이지요. 모질 게 살았고, 힘들 게 살았고. 아까 노래 가사에도 나오지요.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왜 그렇게 쓸데 없는 짓을 했어요? 그놈의 성화론 때문에 쓸데 없는 짓을 했냐는 말이죠.


어차피 죽을 의미 없는 개체인데, 없어야 할 형상에 불가한데 그놈의 형상을 천당 보낸다고 얼마나 공 들였습니까? 차라리 절에 가서 도를 닦지, 사월 초파일 날 연등이라도 달게 되면 죽어도 등은 남지, 또 아들이 제사 올릴 수도 있고. 예수님의 유월절을 양을 준비했느냐 질문을 묻는 가운데서 모든 형상을 지워버리고 화가가 화폭의 담은 예술가의 심정으로, 그 심정처럼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세상을 보라는 겁니다.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안 받은 때이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를 몰라요.


종말을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이 있고 내가 말하는 종말이 있어요. 사람들의 몸의 컨디션이 우선인 것처럼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 하면 내 인생의 종말을 먼저 챙기고 다음에 주의 종말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죽음이 가까이 온다, 세상 끝이 온다, 그러면 난 어떻게 살지? 평소에 어떻게 살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종말 때에 내가 어떻게 살아남지? 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악마에게 매어 사는 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뭔들 못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매어 삽니다. 악마님! 사단님! 제 목숨만 좀 살려주세요! 제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 제발 내 목숨만 살려 주세요! 이것을 조금 확대한다면 내 가족만 살려 주신다면 또는 내 자식만 살려 주신다면 뭐든지 다하겠습니다. 50쯤 돼서 사회와 단절 돼서 아줌마가 들어 갈 자리가 뻔하지요. 식당일 같은 이것을 왜 하냐하면 애들에게 용돈이나 유학비 보내주고 장가갈 때 집 사면 보테주려고 하는 거에요. 다들 그렇게 사니까 이게 마땅하고 착실 한 것처럼 되지요. 제가 문제 하나 낼테니 한번 맞춰보세요. 어릴 때 자식 키우느냐 애쓰고 남편도 변변치 않아서 애도 키우면서 돈 벌이 하러 나와 고생했으면 이 여자분 구원받습니까?


사람이 고생한다고 인간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생한다고 인간 안되요.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 자기 형상을 지울 줄을 몰라요. 성경 천 독 한다고 무슨 소용 있어요? 아무 소용없어요. 교회에 뻔질나게 일주일 내내 출석해도 소용없어요. 교회에 와서 비는 게 이건 데요. 그저 내 남편 건강하고 우리 가족만 잘 된다면,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교회 청소부터해서 꽃꽂이도 내가 다 할께요. 평생을 매일같이 반복하면서 이런 거래를 악마와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와서 차라리 천벌을 받으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천벌 받는 낙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천벌이 뭐지? 이런 식으로 살면 되잖아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지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아하! 날 살리려 오신 게 아니라 없애버리러 오신 거에요. 악마와 거래하고 맨 날 악마에게 빌빌 비굴하게 노는 나를 없애버리고 무의미하게 본다니까요. 예수님 흘린 피를 찍어 바른다고 구원받는다고요? 사도 바울의 복음이 그렇던가요?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갈라디아서 1장에 내가 사람을 좋게 안한다 했잖아요. 사람에게 받은 계시도 아니라 했잖아요. 그러면 성경을 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 지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좋게 안한다면 내가 평소에 뭘 원하고 있고 뭘 좋게 하고 있고 평소에 어떤 식으로 안일하게 살아 왔는가 보세요. 기돌를 하고 헌금을 하며 옆집 아저씨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아랫 집 담배 피우는 인간 좋으라고 기도 생활 하는 겁니까? 그 인간 죽어버리지! 자기 자신이에요. 그 인간 죽어라! 왜? 누가 편하게요? 내가 편하잖아요. 왜? 담배 연기 안 올라오니까.


아까 죽으면 죽으리라는 뭘 지우기라고요? 형상 지우기. 우울병이니 조현증이니 하며 칼들고 설칠 때 이건 뭐냐 하면 자기를 안 지우겠다는 거에요. 나는 안 죽이고 내가 사는데 지장을 주는 누굴 죽이겠다? 옆집 이웃, 형상을 지우겠다는 거지요. 이것은 주님이 하시도록 맡기세요. 심판의 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주님이 심판하십니다.


 (갈 1: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 1: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시편에 그런 말씀이 있지요. 괴롭히거든 기다려봐라! 너를 괴롭히는 자가 없어진다고 주께서 괴롭히던 자들을 다 없애 버려요. 누가 가장 우리를 괴롭힙니까? 나, 나를 없앤다. 나를 없애 버려요. 그날이 기쁜 날이에요. 그동안 내가 온전해 지기위해 애를 썼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형상을 지웠잖아요. 어떤 분이 질문을 했는데 진지하게 했어요. 뭐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상 자체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질문을 아주 잘 하신거죠. 분명히 그 사람은 교회에서 들었을 거란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서 착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분명히 배웠을 게 아닙니까? 개혁주의 신학대로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에 굉장히 반가웠어요. 하나님의 뜻이다하고 친절하게 가르켜 줬어요. 형상은 예수님이 형상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졌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중심이고 우리는 시다발이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없어진 거에요. 왜? 자기가 주인이 돼버렸으니까 그런데 신학이란 게 뭐냐하면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신학부터가 그래요. 여러분들의 형상이 천당을 못갑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면 천당간다는 거에요. 에베소서 5장을 뭐 어떻게 해 가지고 창세기에서 형상대로 본받고 삽시다 해가지고. 형상은 예수님이에요. 골로새서 1장에 나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어떤 상태나 상황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대상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형상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형상이 우리 속에 나타난다는 말은 나를 지운다는 거에요. 내 고집이 있으면 예수님의 형상이 죽어요.

 (골 1: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그래서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날마다 나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매일매일, 잘 때는 죽은 거 같잖아요. 의식이 없으니까 아침 되면 또 시작하는 거에요. 형상을 의미 없게 지워버린다니까요. 그냥 무의미하다하면 안되요. 왜? 무의미하다고 하는 나는 의미 있게 되니까 안 지워지고 내 본성대로 그냥 발휘해요. 먹고 싶은 것 먹고 백화점에서 사고 싶은 것 사고 놀고 싶으면 놀고 하면서 아이고 피곤해! 의미 없다! 이쯤해서 빈센트 노래 가사중 중요한 대목을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언덕 위 그림자를 나무와 수선화를 그려 보세요 산들바람, 추운 겨울을 잡아내 보세요.’ 그림 자체가 산들 바람은 그냥 흘러가잖아요. 그림에 그것을 포착해 버리지요. 그러면 흐름은 중지가 돼버리지요. 이 말은 그림 자체가 형상이거든요. 이 세상에는 형상이 없어요. 일시적이에요. 봤다!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여보! 애가 다쳤어! 하면 경치보고 있다가 애 아프다니까 경치는 좋은 데 그 형상이 날라가 버려요. 어디에 놀러 갔는데 갑자기 생각나는 게 집에 가스 불 안 끄고 온 거,

부부 동반해서 구라파 여행 갔는데 가면서부터 싸워서 기내 닭고기 요리 먹을래? 다른 거 먹을 래? 하다가 싸워서 남편 헛짓 하는 거, 쓸대 없이 돈 쓰는 그 형상이 보여지니까 이쪽 형상이 저쪽 아름다움을 다 가려버려요. 아침에 주님의 은혜로 주신 아침 식사 시간을 누가 방해하냐 하면 말썽꾸러기 아들이 다 방해하고요. 주님의 은혜를 만끽하고 싶어도 계속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없애버려요. 내가 감상하고 만끽하고 내 중심의 형상을 주님은 용납 안 해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재물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안 받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준비한 양은 예수님 본인을 이야기 하겠지요. 본인 속에 누가 같이 함몰돼야 됩니까? 12제자도 함몰돼야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떡을 만들어서 주시는 거에요. 제자들은 아직 정신 못 차렸지요. 선생님께서 자비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떡을 주시는 줄 알았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이미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그때 부터 먹는 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거에요. 먹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먹어도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먹이시는 거에요. 매일같이,


음식 먹어도 죽어요. 이것이 생명이 아니라고요. 영생의 만나가 아닌 것을 알고 먹는 거에요. 모든 시작을 나부터 하니까 성경 해석을 아무리 해봐도 안되는 겁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내 스스로 복 있다고 한 조치로부터 떠나 두 손을 놔버린 겁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을 놔버린 거에요. 지난 오후 설교에 기도 제목이 뭐였냐 하면 내가 나를 감시하지 마라고 했지요. 내일 같이 내가 나를 감시하는 거에요. 내가 나를 놔야 되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관계 없어요. 아직도 남편 앞에서 방귀를 못 트면 곤란합니다. 트림이나 방귀나 재채기 같은 것. 코 고는 것.


그러면 결혼 생활 힘들겠지요. 트림 할 때마다 다른 방에 가서 하고 와서 고상한 티를 내고 그건 관계가 끊어진 거에요. 사랑이란 한 쪽에서 사랑을 줄만 했기에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자기 것으로 꼬시기 위해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자기 선언을 한 거에요. 아름답다고 선언을 한 겁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위하여 서로가 필요한 거에요. 주님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하듯이, 우리가 물을 마시잖아요. 지옥에선 물 한 컵도 과분합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지옥을 경과하지 않으면 뭐가 안 보인다고요? 천국이 안 보이지요. 그러면 세상에서 살면서 물 한 컵을 마실 때 마다 아이고! 왜 이리 과분한 은총을 하는 마음가짐으로 물을 마셔야 되요. 왜? 지옥인데도 불구하고 마실 물이 아직 있으니까, 거의 공짜로 있으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이 땅에서 안 죽거든 뭔 뜻이 있어 머무시는데 단 기대는 하지 마세요. 지옥 구경해보라고 머물게 하시는 거에요. 패스트 트랙( fast track) 이런 거 있잖아요. 구경하라고 아무 의미 없는 거거든요.

내일 죽을 지 모르는 인간들끼리 안 죽겠다고 싸우는 거잖아요. 복 받은 자 입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처럼 한심스럽고 안타깝고 어리석은 자가 또 없어요. 복음을 모르는 부모님이 안 찾아오면 네 유신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나이 먹었다고 다 철이 난 건 아니에요.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사고방식인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시면 저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왜냐하면 살아온 방식이 악마가 가리켜 준 그 방법 외에는, 그 스킬 외에는 다른 방법 알지 못해요. 악마가 가르쳐 준 것.


그러고 보면 여기도 개가 있지만 개가 인간들보다 훨씬 나아요. 아무생각 없잖아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주는 것은 먹고 죽으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너는 살아 있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떡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주는 것도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왜 죽은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살과 피라는 새 언약이 안 받아지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을 듣고 동창생들을 한번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아까 말했듯이 아~지옥이란 것을 이런 것을 보고 말하는구나! 지옥에고 혼자 가는 게 아니에요. 으싸! 으싸! 뜻을 모아 가요. 교회에 가보세요. 전부 지옥으로 가고 있지요. 뜻이 하나로 가고 있지요. 전부 나를 위해서, 교회나 절이 똑같아요. 21절을 한번 봅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유월절 준비된 음식을 먹을 때에 평소 했던 것처럼 유월절을 지킨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때 예수님은 누군가 나를 팔리라 했다고요.

 (마 26: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렇다면 유월절을 지키면서 그것이 유월절이다? 아니다? 유월절을 지키면서 내가 개입되어 있는 유월절은 유월절이 아니다가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유월절을 생각해 볼 때 아하! 그렇구나! 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인생을 누가 산다고 해요? 누가 하루하루 애쓰며 힘들게 살았어요? 내가 산다고 느끼게 해요. 느끼게 하면서 성령이 오면 내사 사는 게 아니고 주님이 살게 하신 인생인 것을 바꿔치기 하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변수가 미리 예측한 게 아닙니다.


내가 예측한 것도 제한된 한계에서 예측하는 거에요. 나는 짜장면과 짬뽕이 좋아! 그건 팔보채가 없는 상태에서의 말이고 나는 당신만 사랑해! 그건 여러 여자를 안 사귀어 봐서 그래요. 내겐 당신 같은 남자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남자를 몇이나 사귀어 봤습니까? 키 크고 성격 좋고 돈 있고 음성 좋고 건강하고 자기 관리 잘하고 아내 잘 챙겨주고 집안 살림 다 해주고, 키 크고 많이 배웠고 성격 온화하고 돈 있고 목소리 좋고 누구 말하는 겁니다. 배우 유동근 있잖아요. 이런 사람 멋있잖아요.


그런데 후보감이 키 더 크고 돈 더 많고 성격 더 좋으면 둘이 비교 된다고요. 당신이 최고 좋아! 하는 경우는 나는 억지로 행복한 가정인체 하기 위해 떼쓰고 있는 것이고 발악을 하는 경우죠. 실재는 안 그런데 아니면 내가 죽었거나 내가 죄인인 것을 알 경우 둘 중 하나입니다. 잘해주면 주의 뜻이다 하는데 거짓말이에요. 내가 잘해줬으니까 잘해 줄꺼야! 라고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내 뜻이지 주의 뜻이 아니에요. 인간은 함부로 자기 뜻에서 안 벗어납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가 뜻을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성령은 새 언약에서 나오거든요. 따라서 성령이 뭡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거에요. 그러면 거기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나를 팔리라는 요소가 성령이 오실 때 마다 쏟아내는 겁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우리를 핍박에 해당하는 자로 알려줄 때 비로소 의인과 죄인의 만남, 새 언약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가 성립되요. 용서받을 때는 자기의 죄인인 것을 알아야 되요. 그것은 날마다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각이 없다는 겁니다.

왜 자기가 너무 힘든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내가 살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왜? 이래야 우리 가정이 산다. 믿을 것은 나 밖에 없다. 오직 내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소 똥 치우고 밭일 하고 힘들어도 내 몸 부서져 일해야 우리 가정이 산다.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이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악만 남지요. 독하기만 하지요. 제가 지난 주일 날 독하지 말고 악해야 된다고 했지요. 애초부터 아담이 악해요. 세상에서 나쁜 짓 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담의 죄를 성령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 그것은 새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복된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유월절 작업을 우리를 통해서 적용시킨 것을 너무나 감사합니다. 주님을 팔아넘기고 내가 행한 것으로 영광 돌리려 했던 우리가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날마다 유월절 속에 있으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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