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대전강의
2019-05-28 21:32:15 조회 : 383         
사무엘상49강( 성신과 악신), 마태복음 111강(약점과 십자가) 19052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deYPaDhLh4"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HzwPgn7ub8o"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이미아(IP:122.♡.170.138) 19-05-30 23:43 
대전-49강 사무엘상16장13-14절(성신과 악신)20190528-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6장 13-14절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여기에 사람 말고 두 개의 이질적인 존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성신이고 또 하나는 악신이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보통 자기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연인으로 봐요. 인간들은 보통. 내가 태어났을 때 순수했고 지금까지 대체로 순수하려고 애를 썼고, 그리고 태어날 때 그 인간이 그대로 유지하게 되니까, 아마 죽을 때도 내가 유지한 순수의 양만큼, 분량만큼 하나님께서 어떻게 고려해주시겠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우리 자신의 자연성과 출생했던 인간의 순수함을 애써서 지키려고 수고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자연인, 순수한 나에게, 내가 그대로 순수하게 유지하면 된다는 것.

 

근데 오늘 본문에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 선지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락책이라고 보면 됩니다. 연락책. 이 연락책에 의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이 어떤 현상을 벌어지게 하는데, 자연인으로서는 도저히 예상 못했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다윗이고 하나는 사울 왕, 사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악신, 성신이 없으면 그냥 둘 다 자연인이에요. 그냥 인간이에요.

 

근데 사울 왕에게는 악신이 임하고 다윗에게는 성신이 임했다는 것은, 마지막에 하나님께 심판받을 때 자연인가지고 버틸 수 없다는 겁니다. 소속이 어디냐? 라고 묻는 거죠. 너 성령을 받았냐? 아니면 악신, 악마의 영이죠. 악마의 영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냐? 그거만 물어요.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할 때 앞에 있는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에요. 사람이 아니므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람이 아니에요.

 

근데 성경 말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성경 말고 어디에 나가도 전부 다 사람은 자기를 그냥 인간으로 봐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비춰보면서 살아온 겁니다. 인간이면서 자기 내면에 인간다움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 살아있음이 아마 세상 사람들에게 통하듯이 분명히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게도 그렇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정신적으로 은밀하게 대결하고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누가 순수성을 더 많이 품고 있느냐, 그걸 은근히 대결하죠. 목사들도 설교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까 그 순수함을 계속 키워내게 되면 여러분들에게 나중에 장점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구원 얻는데, 천당 가는데 아마 유리할 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성신과 악신이 외부에서 주입된다는 사실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받은 이것을 잘 관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이라는 것이 참조사항이 된다고 그렇게들 생각해요. 성경대로 바르게 살면 내 관리에 유리하게 참고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날마다 자기의 인품이 어느 정도 향상됐는가, 그것 측정하고, 자기가 어느 수준쯤 되고, 어느 쯤에 포함되었는가를 측정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비교하고 그렇죠.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은 이게 선지자가 말을 안 들을 때, 인간들끼리 모였을 때에 기껏 내놓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남을 교육하고 또 우리가 남에게 교육받을 때 어떤 차원에서 교육하고 교육받았습니까? 이런 차원이거든요. 니 안에 신의 품성이 있는데 니가 나쁜 짓하면 감소하고 니가 착한일하면 증가한다. 착한 일이 많이 증가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줄 거고 니 속에 있는 악한 기운을 계속 키워내면 너는 어디가도 저주받는다. 그런 식으로 가르쳐왔던 겁니다. 근데 성경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선 과 악이라는 대비되는 그런 인식에 인간이 휘감겨있다는 겁니다. 선과 악에 휘감겨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내가 선한 쪽일까? 악한 쪽일까? 라는, 현재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인식을 가지고 날마다 측정에 나서는 겁니다. 측정에 나서서 잠시 그렇게 모아진 것을,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양심인데, 누구의 양심이냐 하면은 나의 양심. 나만의 양심에 비추어봤을 때 그다지 악하지 않다, 라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각자 자기의 양심에 호소해 사세요.”라고 하는데, 과연 이 양심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이 될까요? 부합되지 않죠. 이 양심은 사회 평균적입니다. 양심이라는 게. 나이지리아 양심하고 대한민국 양심하고 달라요. 북한하고 다르고.

 

양심이라는 것은 항상 조작기능을 발휘하고 있어요.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성립하려고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항상 인간은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학교에서 애한테 뭐라고 하면 그 애는 알리바이를 내놓죠. “어제 손님이 와서 숙제를 못했습니다.” 그 애가 나중에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는데, 그 어린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일체 자기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 자예요. 일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어떻다고 단정 짓지 않아요. 어린아이는.

 

어린아이가 돈 벌려고 애쓰는 것은 이미 어린아이의 선을 넘어선 겁니다. 어린아이가 돈이 어디서 오게 되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출세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냥 주는 대로 까불면 돼요. 주는 대로 그냥 살면 돼요. 그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는 상태를 이미 우리는 거쳤습니다. 어린아이시절 때 이미 거쳐 왔어요. 어린아이의 선을 얼추 능가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먹는 것 입는 것부터 걱정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어른이 못돼서 환장하는데, 아저씨, 아주머니 너희들이나 다 하라고 하세요. 우리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되면 안 됩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에요.

 

선과 악을 알면, 이게 점점 자기가 똑똑해진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 똑똑한 게 문제에요. 똑똑하면 안 돼요. 자신의 평가를 자신이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하는 거예요. 니 인생 니 혼자 살게 되면 니가 선악과를 먹든 뭘 먹든 관계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인간에 대한 모든 운명과 결정과 평가는, 이건 하나님 쪽에서 결정할 문제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이 있는 것이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반대되면 안 됩니다.

 

다윗에게 성신이 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윗이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선악으로 평가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니 소속은 결정됐다는 것입니다. 소속문제에요. 애들에게 너 얼마나 착하냐를 묻는 게 아닙니다. 너의 아버지 뭐하시노? 이런 것 있죠. 너는 누구집 소속이냐를 묻는 겁니다. “아저씨 집에 보내주세요.” 집이 있는 거예요. 애들은 집으로 가면 그만이에요. 그 집이 자기의 세계입니다. 독자적으로 자기 의로움과 잘남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꼭 자기변명과 자기방어에 나서는 이유가, 어른들이 뭘 봤느냐 하면은 바깥세상을 봤기 때문이에요. 바깥세상을 봐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평생을 다 보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천국가지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 눈치 볼 것 같으면 니가 알아서 니 혼자 살지, 왜 주님만 의지해야 할 나라에 니가 왜 끼어들었느냐 이 말이죠. 천국은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만 가지, 어른심정으로, 이제는 좀 호사나 누려볼까? 이런 식으로 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닙니다. 참, 어른이 천국 못 간다는 것은, 그 어른은 죽어야 돼요. 죽여 버려야 돼요.

 

여기서 사울은 악신이 들렸다고 하는데, 인간 자체가 악신이 들렸다고 할 때에, 악신이, 그러니까 성신 받을 욕심만 부리지 말고, 악신 받은 자는 어떻게 사느냐를 주목하라고 사울에게 특별히 악신이 심하게 발작을 일으키게 했어요. 그러니까 평소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평소에 악신, 성신을 거론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아주 정상적인 보통 사람, 자연인으로 보는 거예요. 자연인이라는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착하게, 선악을 아니까, 악을 버리고 선하게 살겠다는 그것이 자연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니 품성이니 뭐 그런 식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을 때 사울은 특별히 변할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자연인이라고 행세하고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이것이 곧 누구를 위함이냐 하면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사는 건데, 이게 약간 강화된, 악신이 임하니까 그 노선, 그러한 성질, 성깔이 노골화된 게 악신이 들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 편향적이에요. 악마와 친근한, 악마와 한통속이 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므로 말미암아 소위 자연인이라고 행세하는 사람의 대변자로 등장이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자연인 같으면 서로가 싸울 이유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어요. 뻔하니까.

 

북한이 미국을 겁내는 이유는 미국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핵폭탄을 가지면 겁내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북한이 취할 태도는 북한이라는 나라를 남이 넘보지 않고 우리가 행세하려면 우리도 뭘 가지면 된다? 핵을 가지면 된다. 이 사고방식에 별로 뭐 이질적인 것이 있어요? 사고방식이 안 다르죠. 힘을 증강하게 되면 강대한 국가가 된다. 이건 너나 나나 동의 안 할 나라가 없어요. 중국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어린아이같이 돼서 천국 간다. 이거는 뭘 빼는 겁니까? 힘을 빼는 거잖아요. 시편에 보세요. 내가 너희를 구함은 창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애굽의 군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의 숫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 된다. 이게 오늘날 정치에 먹혀들어가겠어요? 이질적이잖아요. 그래서 사울에게 악신이 임한 것은 뭐냐 하면은 사울이 정상이고 다윗에게 성신이 임한 이게 굉장히 이질적인 것이다 이 말이죠. 이게. 이게 의당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거는 아주 희한한 현상이에요. 이게. 자연인은 자연인으로 살면 이게 정상으로 여겼던 그들의 집단에서 성신이 임했다는 것은 성신이 임한 사람 빼놓고 나머지기 전부 다 뭐다? 악마와 한통속이고 편향적이고 악마의 힘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악마의 힘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은 뭐 간질이 걸리고 그런 것이 아니고 선악인식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선악인식, 자기 알리바이를 내세우는 그런 버릇에서 못 벗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악신 들린 자는 어떤 식으로 사는가? 그거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방어죠. 자기방어. 자기방어 하는 식으로 살아요. 그러면 자기방어가 끝난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자기방어를 못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죽는 경우죠. 죽는 경우. 두 팔로 감싸면 자기방어가 되잖아요. 근데 제가 죽었다고 칩시다. 두 팔이 축 늘어지잖아요. 누가 꼬집든 방어가 안 되죠.

 

다윗은 성신이 오고 난 뒤에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방어를 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 일 같으면, 평소의 자연인 버릇대로 나의 가치를 준수하고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모션취해서 치려고, 공격하려고 드는데, 이 자기에게 들이닥친 일은 성신과 엮여져서 다가오는 사태가 주어지는 겁니다. 성신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을 앞장세우면서 우르르, 성신이 계시는 그 세계, 월드world 있잖아요. 성신을 보냈던 그 세계, 그 세계가 한꺼번에 다윗에게 덮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되는 세계가 있겠죠. 그리고 기존의 사울세계가 있겠죠.

 

두 세계의 충돌이 일어나는데, 이 충돌은 다윗의 전쟁이 아니고 이것은 무슨 전쟁이냐, 이 전쟁은 다윗언약의 전쟁 또는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상당히 성경은 우리가 예상한대로 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면 천당 가지.” 이것은 여전히 선악이라는 악신, 악마가 유혹을 해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어서, 거기서 못 빠져나오는 그러한 몸부림이라는 발산이죠. 그거는. 바르게 살아서 천당 가겠다는 말은 나 악마요, 라는 말이에요. 결국 그 말이.

 

“주여, 착하게 살 테니까 복 주시옵소서. 착하게 살 테니까 우리 애 시험 치는데 성적 오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아엠 데블I'm devil, 나는 악마의 종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선교 많이 할 테니까 교회 부흥시켜주옵소서.” 이게 바로 악마라니까요. 이게 악마에요. “현지인에게 착한일 많이 해가지고 선교 활성화되게 하옵소서.” 이게 악마의 짓이라니까요. 나의 일이 없어져야 돼요. 죽은 놈이 무슨 자기 일이 있어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전부 다 누구 일이다?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에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를 꽁꽁 묶은, 밧줄로 수갑 채운 거예요. 수갑 채우고, 주님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에게 주께서, 쓸모 있는 주께서 쓸모없는 것을 통해서 다 이루어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의가 아니고, 바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의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주님의 세계, 주님의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동안 너무 나댔어요. 나댄 거예요.

 

왜 나댔냐 하면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면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뒤따라가고 그들과 한패 먹기 위해서 애를 쓴 거예요. “너희들 그 영역에 나 넣어줘!” “너 넣어주려면 이런 짓을 해야 돼.” “어. 할게. 해서 우리 같이 어울려서 한판 놀자. 그쟈? 사이좋게. 행복하게.” 그들을 못 닮아서 환장한 겁니다. 그들의 삶에서 추방될까봐, 그들이 나를 배제할까봐, 조마조마 겁을 집어먹고 평생을 살아온 겁니다. 성경 봐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봐야 뭐. 봐도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저 악신 받은 사람은 자기방어, 자기만 챙기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때부터 뭐냐 하면은 다윗이 자기를 위협하는 위협요인으로 알아요. 악신을 받았던 사울은 악신 받은 티를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악신을 받았다는 것은 똑같이 사울과처럼 악신의 세계가, 하나님께 대적하고 대항하는 세계가 따로 이렇게 모호했는데 이게 구체화됩니다. 그게 무슨 나라냐 하면은 사울의 나라에요. 사울의 나라는 무슨 나라냐 하면은 성신 받은 자를 내치는 속성이 발휘되는 나라,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이 나라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진리로 확정지은 나라가 바로 사울의 나라, 악마의 나라, 악신의 나라에요.

 

악신의 나라에서는 자기 자신을 악신 들렸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자연인이에요. “다 같이 우리 인간이지. 뭐 동창회하자.” 이러고 모이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보이스피싱을 한 그 범인이 하는 말이 이런 말이에요. “보이스피싱이 뭐지?” 이래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보이스피싱 당사자이기 때문에 보이스피싱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좀 안 떠올리면 좋겠다. 왜? 떠올려버리면 자기가 노출이 되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악마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보이스피싱이 뭐예요?” 하는 것처럼, “악마가 뭐예요?” “지옥이 뭐예요?” 그런 것을 이야기 안 해요. 집구성이 엉망이 되면 지옥인줄 알고 그렇지. 보편적인 지옥이라든지 악마이야기를 안 합니다. 왜? 이미 악마의 나라기 때문에. 쉿! 거기에 대해서는, 악마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어요.

 

선지자가 왜 있느냐? 바로 인간들이 단단히 철통같이 봉쇄가 되어 있는 세계에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선지자를 여기 침투해버리면 낯선 이야기, 들었던 이야기가 아니고 낯선 이야기. 낯선 이야기를 해요. 교회에 처음 목사가 와가지고 자기가 정통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복음을 이야기해요. 이거 한 2주 갑니다. 3주째 되면 “착하게 살면 복 받습니다, 라고 나와요. 여러분 기도에 따라서, 양에 따라서 복이 결정됩니다.” 이 이야기 외에는 없어요. 교회에 얼마나 돈 내고 헌신하고 시간 바쳤느냐, 그 이야기 외에는 없다 이 말이죠. “여러분이 잘하는 재주 있잖아. 착한 재주. 그 재주를 교회에 퍼부으면 교회도 복 받지만 여러분도 복 받게 됩니다. 우리 교회 잘 되어서 마귀를 이깁시다.” 지가 마귀면서 마귀를 이기자고. 자꾸 인간들에게 행함을 강요해서 전혀 달라진바 없는, 잠시 성령이지 그 다음부터는 끝났어. 성령 그 다음부터 끝났어요. 누가누가 잘났나? 누가누가 부러움의 인생을 사느냐? 이제 그 시합으로 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만 알면 그 외의 모든 것에 실패해도 상관이 없어요. 실패에 벌벌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면 그 자체가 이미 완료된 성공이기 때문에, 나머지기는 실패할 것을 두려워할 정도가 아니고 이제 실패 자체에 대해서 겁낼 필요가 없어요. 실패성공에 따라서 휘둘릴 필요가 없다니까요. 주께서 복음을 줬다는 것은, 이거는 내 능력이 아니거든요.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빠져나온 게 복음입니다. 빠져나옴이에요. 빠져나옴. 이게 복음 아닙니까? 빠져나옴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잖아요. 빠져나온 힘이 복음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빠져나온 그 힘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같이 있지만 사실은 빠져나온 사람이다 이 말이죠. 빠져나왔으니까 이 세상의 평가에 그렇게 귀 기울일 필요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의식할 필요도 없죠. 의식할 이유가 없어요.

 

도대체 사람들이 무슨 실패에 그렇게 겁을 내는지. 나도 그거 한번 체험해볼까?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야죠. 거참 재밌겠다. 부도난다는 게 뭐지? 나도 한번 부도나볼까? 6개월 만에 간판 내린다는 말이 뭐지? 자식농사 망쳤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자식농사를 망쳤다는 건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복음 알고 보니까 나는 별로 자식이 걱정이 안 되던데. 도대체 뭘 보고 뭘 평균내서 뭘 망쳤다고 하는지. 오히려 의아해해야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천국에 가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눈물이 없어요. 눈물이 없다는 말은 눈물 있는 이 세상을 우리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한 4년 전인가 tv에서 하는 영화를 봤어요. 내가 복음 알고 뭐 눈물 안 흘린다고 했는데 어느새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어요. 심은경이 나왔던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거든요. 그게 어느 노인네, 노파가 사진관에 가서 사진 잘못 찍어서 갑자기 20살 먹어가지고, 70후반의 노인네가 다시 20살로 돌아간 그 영화에요.

 

어디서 눈물이 나왔는가 하면은 심은경이라는 그 배우가 ‘하얀 나비’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하얀 나비를 부르면서 70후반까지 살면서 그 인생의 내력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2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임신이 된 상태에서, 한국에서 살 길이 없어서 독일 광부를 모집한다고 하니까 아주 착하고 순하게 생긴 남편이 배 불룩한 임신한 아내를 놔두고 자기가 광부로 갔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사망통지서를 받아요. 그때부터 이 20대 젊은 초반의 엄마가 시장바닥에서, 애는 유복자죠. 아빠 없이 난 애 하나 데리고 시래기 주워가면서 시장바닥에서 다 떨어진 솥에다가 시래기 삶이서 애 먹이고, 추어탕 집 부엌에서 울면서 일하는데, 애는 기어 다니고 우니까 발에다가 밧줄로 묶어가지고 그렇게 그 애 하나 키웠을 때에...,

 

아버지도 없지, 젊은 20초반의 여자가 애 하나 키우기 위해서, 이거는 뭐 자기 아름다움이고 청춘이고 그런 것 생각도 없이, 이거는 뭐 인생을 애 하나에다가 전념을 다 한 거예요. 그것을 70 후반이 다 된 상태에서 다시 20대로 돌아와서 20대의 노파가 하얀 나비를 부르는데, 그 하얀 나비의 가사가 뭐냐, 님은 어디에 갔느냐 이 말이죠. 남편이 죽고 난 뒤에 그 하얀 가루를 바다에 뿌리거든요. 하얀 소복을 입고 울면서 뿌려요. 뿌려놓고 그 다음부터 애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에 담아요. 어디로 갔나요? 내가 믿어야 할 내 하얀 나비가 어디로 갔나요? 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노래 할 때에 눈물이 났어요.

 

났는데, 참 복음이 매정하죠. 그렇게 눈물을 같이 내면, 아직도 나는 아직도 순수하고 착해 보이잖아요. 근데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세요. 과연 그게 눈물을 흘릴 일인가를 한번 따져봤습니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져볼 때, 첫째는 그 여자의 아이가 건강하다는 거예요. 건강하면 뭔들 못해요. 집안에 아픈 사람이 한번 있어보세요. 착하고 싶어도 아파서 못 착해요. 뭐 여기도 계시지만. 사람이 아프면 자기만 아픈 게 아니고 온 집안이 다 아파요. 본의 아니게 남한테 해를 입힌다니까요. 근데 젊지요, 애 건강하게 있지요, 젊으니까 건강이 있으니까 키우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말이 한국말이고 사는 곳이 한국 땅이잖아요. 이게 난민이 아니에요. 베트남아가씨가 아니라니까요. 네팔아저씨가 아니에요. 한국 어디가도 취직이 됩니다. 근데 가버나움이라는 영화 평 했죠. 거기는 난민들이에요. 나라가 전쟁이 일어나서 남의 나라에 가도 취직할 데도 없어요. 말도 안 통하고 서류가 없어서 출생신고도 못한대요. 근데 여기는 최저임금이라고 해서 생활비도 보조받아요. 옛날에는 못 받았지만, 하지만 주위에서 도와주기라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평균적인 어떤 슬픔, 선과 악, 이 정도 되어야 웃음이고 이 정도는 슬프다, 라는 그 자기가 속한 공간에서 임시적으로, 평균적으로, 통계적으로 정해진 그 기준에서 내려가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눈물이. 그만큼 자기는 우수하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 사정이 안 돼서 나는 좋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누구를 애도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애도하는 거예요.

 

니는 내가 필요로 할 때 있어야 하지, 왜 내 허락도 없이 미리 죽느냐 이 말이죠. 니 죽으니까 내가 할 일이 많잖아. 인간아! 같이 놀 사람도 없고. 아이고, 부모는 사는데 어린 내 자식이 왜 먼저 죽느냐 이 말이죠. 나는 너한테 모든 것을, 수억 들여 가지고 대학 보내고 공부 다 시켜놨는데, 내가 너 없으면 무슨 보람으로 사냐? 인간아! 왜 내 허락도 없이 미리 죽느냐고 원망조로 애도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울에 세계입니다. 악마의 세계에요. 자기중심주의에요. 선악에 계속 얽매여져 있는 겁니다. 근데 다윗이 성령 받아버리면 선악을 초월해버려요. 선악을. 울 일도 웃을 일도 본인이 결정할 수가 없어요. 왜냐, 이거는 어떤 수준에 이르면 웃어야 되고 울어야 되는지, 그 수준 자체가 넘어서는 수준에 입각해서 그거는 낯선 존재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돼요.

 

쉬는 시간에 유튜브 들어가서 하얀 나비 찾아서 들어보세요. 지금 봐도 눈물이 나요. 심은경이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음~~ 생각을 말아요~~♬ 하는데, 너무 잘해요. 자, 이 성신이 어떤 계통에서 오는가, 성신이 어떤 내용이 있어요. 아까 악신은 이야기했어요. 악신은 선악체제에 의해서 자기방어, 자기절대성, 이게 어딜 감히 내 세계를 넘봐! 강력한 저지죠. 내 세계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치는 거예요. 나한테 복종하려면 들어오고 안 그러면 말라. 내 믿음은 내가 가장 중요하니까. 내가 최고로 가치 있는 거니까.

 

그러면 성신의 내막은 어디서 오는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옵니다. 언약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바치는 심정.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심정. 자, 성신이 왔다는 말은 성신 배후에 뭐가 오느냐 하면은 언약의 세계를 성취하기 위해서 성신을 꽂아주는 거예요. 이제 다윗에게. 다윗은 그냥 자연인으로 자기는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사울에게 욕 얻어먹는 것도, 사실은 사울에게 욕 얻어먹을 짓을 안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왕위를 넘보면 이거는 정권 다툼하다가 쿠데타 실패해서 쫓긴다고 이게 되겠는데, 다윗은 그런 것도 없어요. 시편 22편에 나오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왜 하나님께서 괜히 내 인생 관여해가지고 계속해서, 모든 주변사람들이 뭐냐 하면은 원수가 되어 있어요. 원수. 다윗의 원수가 이게 내용이 뭐냐 하면은 시편의 내용이에요.

 

이 시편의 내용은 결국은 신약에 와서 누구의 원수가 돼요? 다윗 자리에 누가 뛰어듭니까? 예수님이 다윗 자리에 뛰어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윗을 다윗 되게 하는 것은 다윗언약이고 다윗언약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틀은 다윗이 만들고 그 틀에 예수님이 완성을 채우시기 위해서 들어가시는 거예요.

 

이게 다윗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의 이야기에요. 우리는, 성령 받은 성도는 내 인생이 낯설어야 돼요. 뭐 별 욕심도 없는데 이상하게 꼬여요. 인생이. 참외 먹고 싶은데 수박이 나온다든지. 차타고 빨리 가야 되는데 갑자기 가자마자 떠난다든지. 매사가 희한하게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세요. 내 뜻대로.

 

그것은 뭐냐 하면 언약 자체가 무엇이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다음에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니까 내 뜻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뜻과 교체하는 방식으로 투입된다. 이 인간아!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거기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뜻만 이야기하니까. 적용시키니까.

 

사실은 성령이 오지 않으면요, 자기 인생사는 것만 돌아보면서 자기의 수고한 것과 자기의 업적과 자기의 애씀의 결과에 대해서 날마다 자화자찬에 빠져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자식 잘 키우고 잘 살았구나, 하고 모든 영광을 누가 가져갑니까? 내가 가져가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간음하고 살인하고 나쁜 짓하는 것이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나 잘났다고 하는 것이 욕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은 반드시 악신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반드시 염두에 두고 오시거든요. 성령께서 우리 멱살을 쥐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 인간아! 이게 성령의 일이 아니고, 너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왜 자꾸 네가 뭐 했다고 등장하느냐? 비켜라! 비키라는 식으로 와요. 그게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겁니다. 비켜! 좀 비켜! 나는 너 배후에 악마하고 상대할 거야.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악신 앞에 뭐가 있습니까? “여호와가 부리신” 악신이죠. 여호와는 지금 어떤 구조, 체계를 그리고 있는 거예요. 체계를. 무대에 어떤 드라마를 올리고 있는 겁니다. 성신의 의미를 사람들은 모르거든요. 그들의 반대편에 허장강 같은 악신이 등장하는 거예요. 나쁜 역할을 하는. 나쁜 역할을 누가 해요? 악신이 들린 사울이 하는 거예요.

 

근데 사울이 하는 일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사람들은 사울 편에 들까요? 다윗 편에 들까요? 놀랍게도 사울 편에 듭니다. 왜냐하면 악신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 편향적이니까. 사울이 하는 것에 자기가 판단해도 나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동조하게 되어 있어요. 악신은, 악마가 하는 일은 전부 다 우리가 고개 끄덕일 일이에요. 으응~~ 아닌데?? 이거는 필요 없어요. 우리 교인들만 그래요.

 

우리 교인들은 누가 와서 설교하면서, “여러분 이렇게 복음 아니까 그 복음에 합당하게 행합시다.”라고 하면, 그런 목사도 안 왔지만, 우리 교인들은 빈틈이 없어요. 으응~~ 이상하게 아닌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설교하는 사람은 뭐? 뭐? 성경대로인데. 성경대로 잘 가르쳐줬는데. 뭔가 이상하게 수상해? 헌금할 때 바르게 하시고. 뭔가 이상해? 이상해? 열심히 다해서 주를 섬기고. 뭔가 이상해? 이상해? 아닌 것 같아. 뭔가 꿍꿍이 노림수가 있는 것 같아. 감 잡습니다. 놀라죠. 제가 놀라죠. 정상이 아니므니다.

 

성신이 온다는 것은 악신을 드러내는 거죠. 다 합쳐서 그리스도가 꾸미는 언약체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쪽은 뭐냐 하면은 악신이죠. 그러면 이게 고요하게 잘 지내는 것이 아니죠. 누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악신이 누구를 공격해요? 성신을 공격하게 되면 성신은 악신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피해 도망가죠. 이거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이 그대로 앞서서 재현해주는, 앞서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신 들린 사람이 쫓겨 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이거는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내 인생에서 무엇이 당연 하겠다? 죽음이 당연함을 느끼는 겁니다. 자, 이삭이 태어났죠. 이삭의 본질은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밥 먹고 살았다. 여기에 이삭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내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이삭의 본질입니다.

 

근데 이삭을 죽도록 제물로 바치는 분이 누구냐? 아버지잖아요. 아버지의 이름이 아브라함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잖아요. 이것은 대역이에요. 대역. 누구 대역이냐 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 대역을 아브라함과 이삭이 한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는 때가 마지막 때고 아브라함이 BC2000년경에, 그 사이에 누가 끼어듭니까? 다윗이 끼어들었다 이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때 이 시대에는 우리가 있고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는 게 정상이 아니고 바쳐진 제물로 살아야 된다. 죽음을, 주님이 생각한 언약적 죽음, 영생을 제공하는 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형식의 죽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사는 형식의 죽음. 기차가 있을 때 기차 앞에 에너지, 동력을 주는 기차를 기관차라고 하죠. 이 힘에 의해서 붙잡혀 가는 것을 객차라고 하죠. 그러면 기관차가 앞서가고 객차가 뒤따라가는 형국이죠. 우리는 뭐냐 하면 “살다보면 죽는다.” 이거잖아요.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거꾸로’에요. 죽음이 기관차고, 사는 것, 이것은 여분의 것이에요. 죽음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지금 등장한 겁니다. 죽음이 주가 되고 우리는 보조가 되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보조가 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죽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근데 그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죽음에 부딪히는 건데, 보통 천국 가는 문이 있다고 하잖아요. 성경에는 문이 없어요. 문이 없으니까 주님께서 문이 없는, 전혀 문이 없는 곳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문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 없다? 천국에 갈 자격이 없는데 주님의 죽음과 동반해서 죽음이 앞장서서가니까, 없다고 여기는 그 현장에, 허공에 구멍이 생겨버린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행함으로 무슨 수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게 무슨 상태냐 하면은 갇혀있는 상태거든요. 아무리 애를 쓰고, 종교적으로 기도하고 헌금해도 빠져나올 구멍이 없어요. 내 행함 자체가 내가 선악에 의해서 나의 선으로 이해가 되기 때문에, 나의 의로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이것마저 떨쳐버릴 재주가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인간에게 없어요.

 

그러면 방법이 뭐냐, 주님의 언약적 죽음이죠. 내가 스스로 자살하면 안 되고. 아버지에 의해서 죽는 죽음에 합류되어야 해요. 아버지에 의해서. 성신에 의해서 다윗이 죽어야 돼요. 죽는데, 죽음이 기관차니까, 객차에서는 뭐냐, 죽음이 뭐냐를 보여주는 것이 객차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만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 사건들입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내 식대로 안 되는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어떤 결과물을 내주는 거예요. 골리앗을, 어?! 내가 이기게 해주는 거예요. 빈틈없는 골리앗에 빈틈을 만들어서 이기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놓고 다윗은 말하기를 “이 싸움은 내 싸움이 아니에요. 내가 이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었어요.”라고 자꾸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시편 23편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이 외우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그분이 인도해야만 길과 문이 그쪽에 있어요. 내가 문을 찾아가고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을 내가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좁은 길을 알아서 가면 알아서 가는 그 자체가 나의 의가되기 때문에 안 돼요. 우리는 그냥 제가 한 게 없습니다, 에요. 왜?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라는 인식을 갖고 보게 되면 항상 그 길이 영생의 길이에요. 내가 한 모든 길이 영생의 길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만들었어요. 이게 뭐냐, 선악이전으로 돌리는 겁니다. 선악이 없는 상태의 다윗이 되게 하는 거예요. 다윗이 되려면 다윗으로 하여금 죽은 자로 만들고, 죽은 자가 경험할 때, 뭐냐 하면은 따먹을까요? 말까요? 이게 아니라, 이제는 따먹고 말고의 선택의 여지도 없이 소속이 이미 성령의 소속, 성신의 소속, 주님의 소속이 돼버린 거예요.

 

누가? 다윗이. 그 상태가 다윗이 성신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성신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계획한 일은 전혀 없어요. 주의 계획, 다윗 같은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너처럼 왕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맞닥트리는 이런 모든 사태는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온갖 원치 않는, 예상 못한 일들을 계속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은 누구를 충분하게 이해를 합니까? 사울에 소속된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누구를 이해해요? 바로 죄인들을 이해하는 겁니다. 갇혀있기 때문에 그런 외침과 그런 반항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바르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요. 뭘 아느냐? 우리의 태생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뭐냐 하면은 헌금이나 우리의 제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십일조 안 받아요.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뭘 받느냐 하면은 상한심령을 받아요. 상한심령. 상한심령을 받는 거예요. 돈 안 받습니다. 감사헌금 올려놓은 거 안 받습니다. 하얀 봉투에 감사헌금 이런 거, 우리 애 수시합격, 이런 거 안 받아요. 새 아파트 이사해서 감사헌금, 그런 거 안 받습니다. 주께서 상한심령을 받습니다. 따라서 새 아파트 마련해서 가세요.

 

“주여, 오늘도 또 상한심령이 되라고 새 아파트 주셨사오니, 이 새 아파트에서 더 심하게 상한심령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더러운 태생이 노골화되게 하옵소서. 본색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루를 더 살게 하셨사오니, 하루치 산만큼 또 더러운, 내가 왜 상한심령일 수밖에 없고, 주께서 내가 드릴 것은 왜 이것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으러 가는 것을 즐거워해야 돼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전 있죠? 이게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지막 장면이에요. 더 세상 구경할 생각하지 마세요. 해외 나갈 생각도 하지 말고. 이게 마지막 장면이에요. 이거 보고 오늘 잠을 자면, 잠자다가 주께서 데려가면 끝나는 거예요. 항상 마지막이라는 인식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구의 재판이나 누구의 평가에 휘둘릴 이유가 없고 그게 부담으로 올 필요가 없어요. 부부가 잠을 자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소속이고, 그 주님한테 휘둘리는 거예요. 나의 어떤 가치나 이런 것을 따로 챙기는 것은 사울의 세계, 악신이 들린 자들에게만 납득이 되는 세계, 거기에서 통용되는 원리원칙입니다. 방금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내가 누구의 소속이냐, 이게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이죠. 성령을 안 받으면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로 몰려오느냐? 이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화를 냈던 이유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거든요. 보니까, 저기 방탄소년단 팬들이 더 많은 거예요. 오늘날은 해외는 방탄소년단이고 국내는 송가인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송가인 몰라도 돼요. 미스트롯에서 용두산 엘레지 부른 가수.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유명하다고 좋아하는 것은 얼추 나도 그게 부러운 거예요. 왜 우리 집안에는 저런, 내 아들은 저렇게 안 되고 우리 집안에는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안 나오는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자, 이 분노, 누가 나한테 몰려오는가를 가지고 나의 역량,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측정하고 싶은데, 올 때 기분 잠시 좋아요. 그러나 그 사람이 왔다가 떠나버리면 모든 게 분노입니다. 화를 내요. 이거는 부부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손에 물 안 만지게 하겠다고 해놓고, 결혼하고서는 관심도 없을 때는 분노가 일어나죠.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내 중심으로, ‘당신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내 중심으로 살아야 돼.’라는 것을 내가 은연중에 그걸 구축했어요. ‘내 눈에 눈물이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 나는 하얀 나비는 안 부를 거다.’ 이런 식으로. 하지만 이것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꾸리려고 하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살아야 되겠다는 기관차가 앞장서니까, 이거는 뭐 세상에 고생, 고생, 고생, 그런 마음고생이 없어요.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누구한테나 고개를 다 숙여.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진리기 때문에, 더 살아도 더럽게 살아요. 더럽게 살다가 지옥 가는 거죠.

 

그런데 다윗은 성령 받았기 때문에 뭡니까? 나는 누구의 소속인 거예요. 도대체 나에게서 하나님의 것이 나오도록 나를 뭐로 만들었다? 아주 죄인 중에 죄인으로 만든 거예요. 상한심령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 끝에 했죠. 너무 조심스럽게 살지 말라고요. 조심스럽게 산다는 것은 남을 의식한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기준 하는 나의 모델을 내가 못 버렸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를 괴롭혀요. 근사한 이미지가 나를 괴롭힌다고요. 이 기관차에다가 십자가를 꽂아 넣으시고 주님의 죽음에 동참한 자만이, 그 자체가 이미 산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5-30 23:44 
대전-111강 마태복음26장 21-25절(약점과 십자가)20190528-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6장 21-25절

21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2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절,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이 대목에 대해서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람들이 성공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 2000년 신학 가운데서도 이 대목을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신 분이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야박하게 하시느냐 하면은 차라리 본인 입장에서는 안 태어난 게 좋을 뻔 했다고. 만들어놓고,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왜 편애하는 식으로, 한쪽을 미워하는 식으로 그렇게 했을 때에, 하나님의 그런 조치가 착하디착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힘든 거예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에 대해서 사람들이 연구하고 연구하다가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신학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구제해주기로, 이렇게 하자는 의견들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아마 천국에 갔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 수가 아니면 이 가룟 유다에 대한 어떤 적절한, 인간적인, 인간적으로 납득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컷 부려놓고 차버리면,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버리면, 그 사람입장에서는 얼마나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겠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불공평함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속성으로 같이 받아들이라고 요구를 하신다면, 우리는 딴 거는 받아들일 용의는 되어 있는데, 가룟 유다에 대한 조치도 그걸 정당한 거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때는 우리의 자리에 그 가룟 유다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 있을 자리가 없죠. 그러면 95퍼센트는 받아들이고 5퍼센트는 빼놓으면 그게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아니죠. 믿으면 다 믿고 안 믿으려면 말지, 뭐 빼고 보태고 이래서 믿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 믿음이 가짜로 들통이 나는 것이 두려운 겁니다. 다 믿겠는데 이건 못 믿겠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거 못 믿으니까 니는 믿는 것도 아니니까 믿음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해버리면, 그러면 신학자 되려고 신학박사가 되려고 목사가 되려고 노력한 것이, 사람들에게 천당 가라고 복음 전했던 이 수많고 숱한 목회의 수고와 애씀이 허사가 되잖아요. 허사. 그게 아까워서 미치죠. “딴 건 다 믿겠는데 가룟 유다를 이렇게 내치는 것은 너무 심했습니다. 주여!”라고 항변하고 싶은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음식을 먹을 때 목에 몽땅 넘어가면 목이 시원한데, 이게 닭 뼈다귀처럼 가다가 걸려버렸어요. 걸리게 하는 그 대목, 이것이 바로 가룟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주님의 조치입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24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자, 이 대목이 어떻게 풀려야 될 수 있느냐, 그거는 우리가 평소에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갖고 있으면 절대 풀릴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면서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는 사람한테는 이것이 하나의 계륵의 닭 뼈처럼 십자가 전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요인이 돼버려요. 인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내가 믿고 싶어 해요. 왜? 십자가 피가 나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니까. 한 번 적어볼게요. 십자가 피가 나의 죄를 용서한다. 분명히 이게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죠.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돼있기 때문에. 그런데 무엇이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 ‘나’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아무리 예수님으로 둘러싸여도 나에 대해서 모르게 되게 되면, 그 둘러싸인 예수님, 십자가, 모든 것이 다 거짓이 돼요. 자기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동원한 것밖에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주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습니다.” 입만 떼면 내뱉는데, 그래서 본인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면 본인에 대해서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저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무조건 주께서 해줬다는 거예요.

 

그래놓고 “나에 대해서는 내가 어차피 잘 알겠지. 내가 아는 나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를 모르니까 십자가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망가져야 되니까. 주님께서 나와 상대해서 십자가 피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약점을 상대해서 주님께서 피를 흘리신 거예요. 나의 약점을 상대해서. 그런데 우리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을 감추기에 급급해요.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데 급급 하는 거예요.

 

이걸 논리로 따지면 굉장히 어려운데 쉽게 가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 못할 짓을 했어요. 큰 실례되는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고개 숙이든지 뭐 이러고 피하겠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진짜 인간의 행복은 천방지축 까부는 나를, 시건방 떨고 잘난 체하고 자만하고 교만한 나를 진정으로 인간 만드는 것은, 내 약점을 쥐고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내 앞에 등장했다는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행복이에요.

 

최고의 행복은 뭐냐 하면은 나에게 고삐를 걸어준 사람. 그분이 나를 함부로 해도 그게 좋아. 함부로 다루어도 그게 나에게는 영광스럽고 고맙고 과분해. 왜? 내가 한 짓이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이 사라지면 겁이나. 그분이 없어지면 내 인생이 안 돼. 왜? 그분이 계속 내 앞에 있어서 나를 밟아줘야 돼요. 일종의 매조키즘의 심리일수도 있는데.

 

사람의 본성은 선악과 따먹고 이미 악마가 되었어요. 악마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신처럼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사니까 부모님이라고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부부가 결혼할 때에 서로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언제부터 이 사랑이 식어지느냐 하면은 각자 독자적인 자기의 일에 바쁘다보니까 그 다음부터는 결혼이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연예인들 보면 누구하고 뭐 사귀고 어쩌고 쭉 하죠. 근데 좀 있으면 갈라섰다는 거예요. 왜? 이유가 뭐냐? 서로 하는 일이 바빠서. 서로 하는 일이 바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잡힐 약점이 없는 거예요. 니 없이도 독자적으로 내 돈 내가 벌어서 살아갈 수 있는데, 내가 뭣이 못나서 너한테 매여서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 고려시대 사람들, 옛날 우리시대 이전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들이 결혼할 때에 결코 결혼이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이것은 여자들이 밥 빌어먹을 데가 없어서 취직한 거예요. 시집에. 시아버지는 사장님이에요. 시어머니는 사모님이고. 자기는 하녀로 팔려간 거예요. 농경시대기 때문에. 농경시대는 일꾼의 숫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일꾼해주면 밥 먹여줄게.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잖아요. 고개고개 넘어가도 또 한 고개 남았네~ 넘어가도 넘어가도 끝이 없는 고갯길~ 세상살이가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 매워~ ‘고추’유지나의 노래. 그 여자들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든지 고추보다 더 맵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시집이라는 거대한 가문, 뼈대, 그 뼈대를 위해서 뼈를 묻어야 돼요. 딸을 낳으면 안 돼요. 아들을 낳아서. 이 시대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만, 여자를 동물과 인간 사이에 중간 경계지점에 여자를 집어넣었어요.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여자가 아닙니다. 남자가 대표해요.

 

그래서 출애굽에 보면 열 가지의 재앙을 할 때 바로가 찔끔찔끔 양보를 하잖아요. 김정은이처럼 찔끔찔끔 양보를 하는데, 나중에 막판에 가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남자는 가라. 하지만 여자하고 가축은 놔두고 가라.” 그 다음에 또 재앙을 때리니까 “그래. 남자, 여자 너희끼리 가라. 하지만 가축은 놔둬라.” 이 말은 뭐냐, 여자가 어디에 끼인 존재냐 하면은 동물과, 동물은 자연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문화와 문명 사이에, 그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그 연결고리의 역할이 바로 여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여자는 동물에 속하면서도 인간성이 많이 누락된, 인간성이 많이 빠져있는 덜 인간적인 요소로 간주한 겁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메시야가 누구의 후손으로 태어납니까?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잖아요. 애기를 낳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전부 다 남자의 세계에요. 여자는 뭐냐 하면은 남자의 징후, 증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남자의 증상. 징후니까 증상이죠. 남자한테 붙어있으면서 남자가 어떠하냐를 보여주는 계기판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자가. 창세기 3장에 여자는 혼자 못 살아요. 남자를 사모하면서 살아요. 여자의 운명은 남자한테 달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자체가 남자의 세계기 때문에, 여자로 태어난 자체가 이거는 모자란 인간으로 간주해서, 남자 쪽에서 여자를 보호함으로서, 여자가 고유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고, 여자를 보호하니까 얼마나 착한 남자냐, 해서 이 가정에 복을 줘요. 그래서 옛날 여자들은 아무리 시집살이로 고생을 한다고 해도 꼭 참아야 될 이유가 그 복된 가정의 소속이고 가구기 때문에, 같이 더불어 복 받을만하거든, 끽소리 말고 남자가 바람을 피우든 바람을 날리고 오든 뭐하든 니는 그걸 못 본 체하고 남자이름의 자식, 남자 성을 가진 자식이나 충성을 다하라. 이게 여자의 팔자고 운명이에요.

 

이 여자의 운명과 팔자를 누가 전수하느냐 하면 여자가 여자한테,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전수한다고요. “니가 여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마라. 안 그러면 니는 죽어. 니는 세상에서 안 돼.” 그래서 옛날 일제시대 그 전부터는 배우면 안 돼요. 여자가 똑똑하면 안 돼요. 여자의 행복은 등신 되는데 있지, 똑똑하면 여자의 행복은 그걸로 끝났습니다. 다 바보같이. 그런데 남자가 바보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여자는 똑똑한데 남자는 바보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똑똑한 여자가 자기의 영광을 자기한테 돌리지 말고, 모든 것을 다 바보 같은 남편을 부추겨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할 때 여자가 덩달아 존경을 받는 여자다. 이래 되는 거예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게 전통적으로, 제도적으로 계속해서 인간사회에서 지녀온 겁니다. 여자들 바보 아니야? 좀 배워가지고 그걸 넘어서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겠죠. 넘어서봤자 이게 뭐냐 하면은 그 형식 자체가, 틀 자체가 남녀가 구성된 것이 그거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여자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자 같은 여자가 되는 거예요. 여자의 가치가 남자가 하는 일을 잘 했다는 이유 때문에 존경받는 거예요. 여자 고유가치가 애초부터 없다니까요.

 

어? 여자가 바둑을 잘 두네! ‘최정’이라는 우리나라 바둑기사가 있는데, 이 여자는 여자대회에 안 나가고 남자대회에 나가서, 계속해서 지금 수억 하는 세계대회LG배에 본선에 올라가 있어요. 32강에서 이겨서 16강, 옛날 세계챔피언이었던 스웨 선수를 이겼어요. 내일 되면 또 8강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지금 난리가 났어요. 여자가 이렇게 바둑을 잘 둔다고요. 여자가.

 

보통 여자는 남자하고 할 때는 두 점 나야되는데. 여자가 지금 세계정상인 남자를 이기니 난리가 난 거예요. 여자의 게임은 없어요. 여자의 게임도 있긴 있지만 대부분 남자하는 게임에 여자가 파고드는 거죠. 필드하키나 전부 다. 여자게임은 이쁜 것 있잖아요. 물속에서 춤추는 게임 그런 것 밖에 없고요. 아니, 여자가 트랙터를 몰아! 이런 것. 이제는 여자의 전유직업이었던 해녀마저 남자가 뛰어들어서 해남이라는 것이 또 등장했죠.

 

남자가 여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성으로 하여금 미스코리아라는 것을 만든 거예요. 미스트롯도 만들고. 남자가 원하기 때문에. 남자의 노리갯감이에요. 여자가. 그리고 그걸 누가 전수한다고요? 여자가. 자기가 경험한 게 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단단히 굳어져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철딱서니 없이 남자의 세계에 까불면,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 여자는 운명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세뇌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유일한 낙이에요. 남자한테 사랑 못 받으면 자식한테도 사랑 못 받고. 남편한테 버림받고 자식한테도 버림받으면 이 여자는 인생 살 이유가 없어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한 많은 미아리고개의 옛날버전이 뭐냐 하면은 철사줄로 꽁꽁 묶여 남편이 가는데 여자는 남편이 그리워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미아리고개가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버전은 뭐냐 하면은 갈 테면 가라 나 혼자 산다. 그거에요. 가사가. 여러분 백날 여자가 하면 뭐합니까? 방탄소년단 브라질공연에 무려 10만 명이 오는데. 남자는 거의 안 와요. 전부 다 여자들만 오는데. 여학생들만 오잖아요. 이게 방탄소년단이 그 방탄소년단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독자적으로 산다가 되는 거예요. 여자도 “아유, 하나님! 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내 지식과 내 용모 같으면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대통령감일 텐데.” 뭐 그런 이야기를 하죠. 여자가 또 남자답고 왈가닥 같으면, 뭔가 여장부 같은 것이 있잖아요. 아휴,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일 냈을 거야. 뭐 국회의원을 하든지 큰일 했을 거다. 참 아깝다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간에 남자 자체가 모델이 되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라멕. 라멕이 남자든 여자든 모든 것을 다스리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유월절에 빠져나올 때도 여자가 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나서죠. 남자가 나서서 가장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남자에게는 여자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할례에요. 그래서 십보라가 모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은 피 남편이다. 당신 덕분에 우리가 좀 살자. 그래서 십보라가 할례를 행함으로써 남자가 살면 같이 살아가는, 남자가 살았기에 남자에게 복속된, 예속된 나도 같이 살아서, 사나죽으나 우리 남편만을 위해서 사는 게 여자의 운명이고 팔자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여자와 남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벌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할 때에, 방금 제가 한 이야기로 항상 출발해야 해요. 인간은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으로. 그러면 산다는 것은 저주가 팽팽한 이 세상을 극복해야 살 수 있거든요. 그러면 저주를 극복하는 방법이 뭡니까? 복이죠. 복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복을 받으려면, 인간은 선악과를 알기 때문에 어떤 때 저주가 오고 어떤 때 복이 옵니까?

 

선하면 복이 오고 나쁜 짓하면 저주받죠.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뭘 자꾸 없애야 돼요? 자신 속에서 뭘 제거해야 됩니까? 약점을 삭감하고 제거해나가야 되겠죠. 빡세게 기도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교회에 충성해서, 뭐 예수님이고 뭐고 거기에 관심도 없어요. 뭘 제거하는데 급급합니까? 나에게서 흠집을, 나의 바이러스, 병균 같은 것, 나에게서 치부가 되고 치졸이 되는 그런 것들을 계속 없애나가는 거예요. 인간의 운명이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자, 가룟 유다를 봅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랐잖아요. 모든 걸 버리고 따랐다고요. 왜 따랐습니까? 따랐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예수님 덕분에 자신의 선함을 극대화시키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니까 그 옆에 붙어있으면 나도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갈 거라고 여긴 거예요. 이 가룟 유다의 이러한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심보가 오늘날 기독교를 만든 게 아닙니까? 오늘날 기독교, 교회 이게 뭐예요? 예수님하고 관계없어요. 자기영광이에요. 자기가 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선해야 뭘 받습니까? 선해야 복을 받으니까. 뭐 시키는 대로 성경보라면 성경보고 성경공부 참석하라면 성경공부 참석하고 예배참석 다 하겠다는 거예요. 그저, 그저 나를 우수한 존재로, 오늘 제목을 우수한 존재라고 할까? 우수한 존재로만, 그걸 내가 이해하니까 하나님도 내가 인정한 만큼 나를 우수한 존재로 인정해달라, 확인해달라는 겁니다. 그러한 목표가 없이는 열심을 안 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인간인 자기에게 이익이 없는데 왜 열심을 내요? 참, 그 교회에 가니까 은혜가 되더라. 뭔가 이상해? 수상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했죠. 주님의 영광을 갉아먹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라. 주님의 영광이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러면 십자가를 노출시키려면 나는 잘나야 돼요? 못나야 돼요? 못나야 돼요. 제가 시편 51편 이야기를 했잖아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라. 상한심령.

 

제가 지난번에 설교한 것을 다시 하겠습니다. 그 부분 중에. 보통 오후예배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애를 귀엽다 하면서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묻는데, 그렇게 묻지 말고 “아빠 되기를 원해? 엄마 되기를 원해?”라고 물어야 그 애의 솔직한 면을 끄집어낼 수가 있어요. 인간은 누구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용대상이라고요. “아빠처럼 될래. 나는 엄마가 모델이야.” 이게 태어난 인간의 본심에 부합이 돼요.

 

인간은 자기를 좋아해요. 자기 외에 안 좋아합니다. “니가 좋아? 남이 좋아?” 애한테 물으려면 그런 것을 물어야 돼요. 목사가 “예수님이 좋아요? 여러분이 좋아요?”라고 물으면 그건 너무 노골적인 문제죠. 그건 우리가 좋지, 예수님이 왜 좋아요? 나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아직도 필요한 존재라고 간주해서 옆에 붙어있는 거죠.

 

가룟 유다는 지금 떠나려는 사람이에요. 관계청산하려는 사람입니다. 관계청산. 인간대 인간의 관계는 언약적 관계에요. 언약적 관계기 때문에, 언약적 관계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비언약적 관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와 비성도의 사이에는 비언약적 관계로 맺어져있습니다. 안 믿는 동창생, 안 믿는 친구, 언젠가는 이게 갈라서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언약적 관계기 때문에, 본드가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의 마지막이 뭡니까?

 

여기에 언약의 마지막이 나오죠. 2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죠. 언약의 피를 받은 사람이 성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면은 언약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언약 앞에서 개인은 뭐냐, 자기의 약점이 노출된 사람이에요. 이 사람도 약점이 노출되어 있죠.

 

그러면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는 뭡니까? 자기의 약점을 언급하는 거예요. 나 이렇게 못났다고. 나 이렇게 나밖에 모른다고. 그런 관계. 참, 그렇게 보면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 구조로, 곧 무너질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겠죠.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은 목돈을 바치는 관계로 이루어져요. 목돈 바친 사람은 그 교회에서 잘 안 나가요. 푼돈이나 아예 돈을 별로 안 낸 사람은 쉽게 나가고 삐지면 나가요.

 

근데 목돈 낸 사람은 삐져도 잘 안 나가요. 3,4대 아버지가 장로부터 온 사람은 잘 안 나갑니다. 뼈를 묻었기 때문에. 삐져도, 목사 니가 나가라고 하죠. 이 관계가요, 돈, 자본의 관계에요. 교회라는 게. 자본 없이는 교회가 안 되기 때문에. 초창기에 교회 설립할 때 초창기투자금을 누가 많이 냈나? 이래 나와요. 홀 정할 때 누가 목돈 냈나? 이래 나옵니다.

 

목사가 복음 못 전한다고 욕하지 않아요. 목사가 돈 떼먹을 때 욕해요. 교인들이 복음을 알아요? 장로들이 복음을 모릅니다. 목사가 들어와서 헌금을 많이 내게 만들고, 알뜰살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희생하고, 월급 지 스스로 자취 안 흘리고 삥땅 안 하면, “아이고, 우리 목사님 예수님 닮았어. 예수님 종 같아.” 이러고 있단 말이죠.

 

옛날에 버스 탈 때 안내양이 있었죠. 좋은 안내양이 뭡니까? 오라이~~ 이거 잘 하는 게 좋은 안내양이 아니에요. 돈 삥땅 안 하는 게 좋은 안내양이 아닙니까? 뭐 협동조합 한다고, 협동조합에서 돈 아끼는 이사장이 최고 이사장이에요. 고개 끄덕이시는데,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죠. 뭐. 만났다 헤어질 때는 돈 때문에 만나고 돈 때문에 헤어지는 겁니다. 돈 끄집어내지 않을 때는 만나요. 그러나 돈 문제 끄집어내면 헤어지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부부가 이혼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관계는 돈입니다. 돈은 다른 말로 뭐냐 하면 돈은 힘입니다. 돈=힘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졸지에 이 세상은 세상이 아니라 광야로 돌변해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광야에서는 돈이 귀합니까? 만나가 귀합니까? 만나가 돈보다 더 귀한 거예요. 이 교회에 돈이 얼마고 얼마나 예배당을 잘 지었고 헌금이 얼마냐가 아니라, 만나가 만나대로, 만나는 지상에서 생산 못하고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그게 교회입니다. 만나입니다.

 

교회 크게 하려고 이 핑계대고 저 핑계대고 성경 핑계대서 돈 끌어당기면 그거는 교회 아니에요. 돈 모았다고 교회되면 돈 떨어지면 다 나가버립니다. 또 바보병신들만 낚여가지고. 보이스피싱이 와가지고 또 돈 내죠. 십일조 안 내면 지옥 가는 줄 알고.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너는 남자한테 움푹 빠지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기성 목사가 초짜 목사한테 그걸 계속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렇지 않으면 니가 이 바닥에서 목사질을 못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우리의 약점을 상대하는 거예요. 약점을 그동안 감추었던 거예요. 근데 창세기 3장에 보면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는 뭘 느꼈습니까? 수치를 느끼잖아요. 그러면 그 전에 창세기 2장에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죠. 둘 다 벌거벗었어요. 둘 다. 옷이라는 인공적인 제품이 없잖아요. 여기 인공적인 제품 없잖아요. 천상의 것, 주님의 것만 있다 이 말이죠. 인공적인 것이 가미가 안 되어있죠. 그냥 태어난 대로, 만들어진 그대로 있잖아요. 그게 수치스럽지 않은 거예요. 그게 부끄럽지 않은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언약으로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부끄러움이 없는 그 상태로 되돌려가는 거예요. 그러면 뭡니까? 수치가 있음을 고백할 때 그걸 감사히 여겨야 될 게 아닙니까? 여기 김치공장 사장님이 계시지만, 배추가 펄펄 살아서 숨 쉬고 있을 때 뭘 뿌립니까? 소금을 뿌리면 지가 알아서 기어들어가죠. “잘못했습니다.”하고 기어들어가죠. 매일같이 소금뿌리는 분이 있어야 돼요. 매일같이.

 

나 복음 전한다, 뭐 어떻게 한다, 할 때에 놀고 있네. 내가 네 과거를, 나는 지난여름에 니가 한 일을 다 알고 있어, 라고 하시는 그런 분이 있어야 돼요. 그런 분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진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하거든요. 예수님이. 독자적으로 독립하지 말라고. 니 까불지 마! 니를 내가 안다고. 내가 알아. 지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인간이 어디서 잘난 체 해?

 

누군가는, 소의 고삐라는 것이 있죠. 고삐. 고삐가 뭐냐 하면 소의 코에 끼워서 까불면 땡기는 그 기구가 있잖아요. 십자가가 우리의 고삐가 되어야 해요. 주님은 우리보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귀엽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죄를 딱 걸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걸린 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그때 나에게 지적질하고 나를 우습게보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그 사람에게 우리가 할 말은 뭐냐, “사랑합니다.”에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게 부부간의 사랑이에요. 사랑합니다. “제발 떠나지 마세요. 나 당신 없으면 인간이 안 됩니다. 당신 없으면 내가 잘난 체 하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안 됩니다. 계속해서 함부로 대해주시고 계속해서 나를 밟아주세요. 주여!”

 

가룟 유다가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까? 안 했었습니까? 못하죠. 못한 거예요. 이용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목사가 복음적으로 교인들 밟아버리면 그 목사 못 견딥니다. 잘립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피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잘난 체 하고 돌아다니는 것, 그거 예수 아닙니다. 그거 십자가 아니에요. 조작된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마귀를 허락한 거예요.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십자가는 사실은 개인문제에요. 그 개인이 모여서 집단이 되지만. 그래서 개인구원은 없고 집단구원인데. 집단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찾아오되 그 관계성, 그 관계성이 똑같이 적용될 때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성도관계, 언약관계로 맺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관계로 맺어지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창세기 2장에는 뭐였다? 수치를 안다? 모른다? 수치를 모른다. 나의 약점을 쥐고 있고 그분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로 계속 살아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에, 그 사람 앞에 나설 때 우리는 수치를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안 느껴요. 고마움이 느껴지죠. 고마움이.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해서 “주여,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라고 하는, 이거는 지금 주님하고 남남이에요. “주여, 제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제가 실수했습니다.” 이래 나오면, 그거는 지금 주님하고 거래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예수 이용하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짓 했다고, 자기 자신이 상한심령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고, 주님 앞에 쪼르르 달려와서 자랑질 해야 돼요. 또 다시 이렇게 개판인 것을,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성경에 문자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주여, 이게 실감나대요. 뭐 이런 식으로.

 

아까 심은경이 ‘하얀 나비’ 노래 부르는 것을 봤잖아요. 악바리처럼 애를 키우겠죠. 실제로 그런 일도 많고. 특히 그런 일이 부천이나 부평 쪽에 많아요. 왜냐하면 피난민들이 그쪽에 많이 살기 때문에. 6.25 때. 저 남쪽에는 자갈치시장에 있고. 대구는 어중간해서 다 올라가버리고. 서울은 경기도 쪽 부천, 부평 쪽에 피난민들이 많이 살아요. 그래서 어떤 국회의원이 부천, 부평이 후지다고 해서 욕을 먹은 적이 있거든요. 다음부터 표 안 찍어준다고. 사실 말이 맞잖아요. 그쪽에 있는 사람들.

 

사람은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살맛이 나요. 뭐 가난한 사람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겠지만. 집세 때문에. 자기가 어느 정도 못 살아도 못 사는 것이 아니고 얼추 사는 것처럼 보인다니까요. 지하에 있잖아요. 반지하나 지하. 그 동네에 가면 다 그렇게 살아요. 꿇리지 않죠. 다 같이 담배 피우는 동네면 다 같이 담배 피워도 괜찮아요. 근데 고급아파트에서 담배 피우면 큰일 나거든요.

 

그 동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죄를 알겠습니까? 아니죠. 악바리만 남죠. 나라에서 안 도와주나? 이렇게 악바리만 남지. 청와대 앞에서, 국회 앞에서 데모하자. 이거만 남지. “주여, 나로 하여금 죽음과 맞닿게, 죽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죽음이 주는, 아슬아슬하게 죽음과 병행해서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미리 이렇게 살지 않죠. 그런 사람에게는 조금만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걸 굉장히 감사하게 여깁니다.

 

사함을 받은 자가 어떻게 한다? 많이 사랑하게 되죠. 사함을 받은 자가. 자기 주제파악이 된 사람. 세리와 바리새인 가운데 세리가 서울대 합격하고 저쪽 바리새인은 서울대 불합격했어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냥 죄인입니다, 라고 엎드렸을 뿐이에요. 근데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어디 앞에서? 언약구조 안에서.

 

언약구조 안에서 우리는 뭐냐, 주께서 우리 약점을 꽉 쥐고 있는 거예요. 그 약점이 주님 손에 가있다는 것을, 그걸 굉장히 감지덕지하게, 고맙게 여겨야 돼요. 이 말은 내 약점을 내 손에서 처리하거나 관리할 이유가 전혀 없다. 주님이 꽉 쥐고 있으니까. 나의 본색을 쥐고 있으니까. 나의 근원적인 핵심을 그쪽이 꽉 쥐고 있으니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막사는 일만 남아있어요. 막사는 것. 막사는 것만 남아있어요.

 

그런데 그 막사는 것도 언약을 위해서 막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에게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면 그 열두 제자가 나중에 열두 사도가 되는데, 지금은 가룟 유다 빼고 열한 사도, 그들이 나중에 자기 자랑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자신들의 어떤 약점을 주님 앞에 쥐임을 당한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배반했다. 뭐가 무서워서? 이 세상이 무서워서.

 

이 세상이 광야로 안 비친 거예요. 광야에 사는 것은 만나만 있으면 돼요. 국회의원, 서울대학 뭐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광야는 만나만 있으면 살아요. 그러나 세상에 살려면 얼추 높은 계급에 좀 들어가야 돼요. 왜? 낮은 계급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안 돼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사람의 행복은 뭐냐, 내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자유거든요. 자유가 행복이에요. 왜? 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가 신이에요. 신이라고우기면서 부자연스러우면 이건 종이 되기 때문에 안 돼요. 뭐든지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럼 뭐든지 할 수 있으려면 뭐가 넉넉하고 풍부해야 돼요? 돈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신이 신답게 행세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누구를 부러워합니까? 부자를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럼 부자가 돈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자유롭게 되어서 우리는 누구의 자유권에 들어가야 돼요? 부자권에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자진해서 부자의, 딸랑딸랑 종이 되어야 돼요. 거기서 뭐가 떨어져도, 뭐 콩고물이나 부스러기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라도 있기 때문에. 부자에게 가서 거기에 누워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맨날 돈 없는 자기들끼리 해가지고는 경쟁이 너무 심해요. 부자들 들어가는데 너나 나나 전부 다, 여기 부자 끈 하나 쥐기 위해서,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해서, 어떤 여학생 같으면 인물이 뛰어나가지고, 어떤 몸매가 있으면 몸매로 밀어붙이는 것, 어떤 것은 말 잘해서 유튜브에서 말로 밀어붙이는 것, 아나운서로, 노래 잘해서 가수로 출세하겠다는 것, 운동해서 운동으로 뛰어 들어가겠다는 것, 여자골프 이런 것. 어떻든지 간에 이 중심권을 들어가 보려고 오늘도 과외 받고 뭐 이렇게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보면 외국유치원은 가르치지도 않아요. 그냥 놀아요. 그냥. 왜? 경쟁대상이 없기 때문에. 복지가 잘되어있기 때문에 뭐든지 해줘요. 그래서 외국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놀아도 되는가? 라고 여깁니다. 빨리 한국에 들어와야 돼요. 한국에 들어와서 우리가 지옥인 것을, 자기가 지옥에 걸 맞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신이 아닌 것을 알아야 돼요. 돈 없으면 인간 대우를 못 받는다는 것을 즐감해야 돼요.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돈 있는 세상만 세상이지 돈이 없으면 지옥이지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이게 느껴야 돼요.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다? 내가 스스로 독자적으로 신이 되려는 나의 이 썩어빠진, 상한심령이 있음을 알아야 돼요.

 

만나란 바로 내가 엉터리일 때 만나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내가 잘나면 만나가 의미가 없어요. 내가 잘난 존재면 돈이 필요하지 만나가 필요 없습니다. 만나가 필요한 사람은 나는 순 약점만 있고, 죄인 중에 괴수고, 내 재주는 죄 짓는 재주밖에 없음을. 그 죄가 뭐냐,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만 방어하고 나 사수하고 나 잘난 체 하는 그것만, 하루 온종일 그것만 생각하는, 나의 약점이 안 들키기만을 원하는, 그게 바로 나의 죄거든요.

 

십자가와 관계 맺어지게 되면,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는 가식과 위선으로 몰두하게 됩니다. 누가 내 약점을 캐내지는 않는지. 도대체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얼마면 내 약점을 입다물어주겠어? 이렇게 나가요. 그러나 십자가와 관계 맺어져있으면 이제는 노골화됩니다. 내 주변에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다. 나를 좀 자근자근 밟아주시고. 조금만 이렇게 잘났다 싶으면 여지없이 또 밟아버리고. 서로의 약점을 쥐는 관계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수치를 모르는, 서로가 지적질 할 게 없음을 깨닫는 만남. 이게 바로 사랑의 만남입니다. 사랑의 만남.

 

약점이 많아서 함부로 하자가 아니에요. 약점이지만 십자가를 보여주는 약점이기 때문에 천하보다 귀한 분이죠. 그래서 성경은 귀하다를 어디다가 붙이느냐 하면은 탕자에게 붙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은 것, 잃어버렸다가 얻었을 때 그게 귀한 것이죠. 사람은 귀하지 않지만 그게 귀한 거예요. 그것의 쉬운 예가 뭐냐 하면 요르단 수도가 암만입니다. 암만에 가면 어떤 예술이 있느냐 하면은 조그만 병에다가, 색깔 있는 모래가 접시에 담아있어요. 색깔 있는 모래를 순서대로 하나씩 집어넣어서 병에다가 낙타 같은 것을 조각한다고요. 그러면 병에서 보면 이 순서가 보여요. 순서가. 낙타가 그려진 순서가 보인다고요. 어떤 경과가 실감나게 눈에 보이잖아요.

 

우리 성도는 뭐냐, 십자가가 우리 몸에 배어있음을, 경과를, 꼭 모래가 담긴 예술병처럼,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손질하고, 어떤 식으로 이루어간다는 그 경과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병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뭐에 증인이 된다?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거예요. 예수의 증인. 근데 우리는 이 말씀대로 돌아가게 되면 또 검은 것으로 덮어버려요. 이 자체가 우상이 되는 거예요. 나 예수 믿는다. 우상 돼버렸어요. 경과를 보여줘야 하는데 예수 믿는 내 존재를 보여줘 버리면 이 경과가 안 보이잖아요. 천으로 덮어버렸으니까.

 

성령께서 와서 이걸 들춰버립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이 네 수치를 꽉 쥐고 있기 때문에, 니가 이렇게 성도가 된 거예요. 가룟 유다는 이 관계가 없어요. 가룟 유다하고 다른 제자들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근데 가룟 유다는 주님 앞에서 내친 거예요. 왜? 가룟 유다에게는 빠져있는,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그림이 없어요. 아무리 이래 봐도 그리스도가 빠이빠이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가룟 유다의 병속에 남아있는 것은 뭐냐, 지 잘남이 남아있겠죠. 얼마나 잘났으면 스승 팔아먹었다고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그러면 가룟 유다의 마지막 색깔 모래는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자살모래가 들어가는 거예요. 목매어 자살하는 모래. 주께서는 이것을 비언약의 대표자의 계시로 활용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라면, 베드로가 세 번씩 주를 부인했잖아요. 부인했는데, 사랑의 관계로 보게 될 때, 제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주님이 먼저 저를 사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오셔서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잘남과 나의 의미를 내 쪽에서 만들 필요조차가 없는 거예요.

 

만나 먹었으면 인생 실패한 것이 아니에요. 이미 성공이 완료된 겁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 들어오면 완료된 인생이에요. 완료된 인생이기 때문에 이 병을 가지고 어디에 굴려도, 이 병은, 십자가의 언약적 기능은 계속 발산되게 되어 있어요. 그동안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본능적으로 멀리했을 거예요. 그런데 멀리하지 마세요. 괴롭히려는 사람에게 당할 때 괴롭히는 사람을 주님이 보냈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주님이 보낸 고삐일 수가 있고, 주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소금 뿌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잘난 너야! 평균적으로 잘난 너야! 니가 평균보다 못해!” 배추에 숨죽이듯이 뿌리게 되면, 우리는 내가 더 이상 내가 내 수치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매사가 감사거리고, 고마움거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덩어리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이제는 성공실패, 선악이라는 것을 넘어서버렸거든요. 왜냐하면 처음에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주님과 더불어 약속합시다.

 

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를 늘 지적질 해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때마다 주님을 사랑하라고, 반응과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세상 살아가면서 남들 앞에 근사하게 보이려고 힘든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그 가식과 위선적인 것을 이제는 그만두게 하여주옵소서.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림을 그리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