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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3 16:46:47 조회 : 347         
사무엘상 50강( 현실구성), 마태복음 113강(포도주 세상) 19072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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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7-25 20:36 
대전-51강 사무엘상17장1절(현실구성)20190723-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7장 해봅시다. 사무엘상 17장 1절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죠. 유명한 대목입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그리고 소년 다윗이 한판 붙는 그 대목이 사무엘상 17장에 나옵니다. 교회 좀 다녔다는 사람들이라면 어릴 때 이 신나는 이야기를 다 알고 있죠. 그런데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골리앗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다 다윗이 되고 싶어 자부하고 있는데, 실은 우리가 골리앗이에요. 왜냐하면 추구하는 것이 골리앗이기 때문에. 성경에 의도적으로 다윗과 누구 하나님의 선지자 또는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람이 등장할 때는 우리가 성급하게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반대편에 나오는 자들의 성향을 우리가 살펴봐야 돼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성신을 못 받은 사람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다윗이 소년 다윗이거든요. 이 소년 다윗이 성신 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성신 받지 못한 사람들 둘이 나옵니다. 하나는 골리앗이죠. 블레셋 사람. 블레셋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우상을 섬기는 것. 우상의 특징은 여러분이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 아실 거예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뭐가 빠졌다? 언약이 없는 신. 언약이 없는 신이에요. 언약이 없는 신. 그런데 또 성신 못 받은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사울+이스라엘 군사들입니다. 현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사울+이스라엘 군사들이 언약이 없는 골리앗이 등장하니까 맥도 못 추고 있어요. 꼼짝도 못하고 있어요. 왜 골리앗을 겁을 내느냐 하면은 한통속이니까 때문에. 그러니까 골리앗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사울+이스라엘 군사들)과 사실은 한통속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교회 다니는 사람과 전부 다 한통속이에요. 하나님의 성신, 성신이라는 말은 요새말로 하면 성령이겠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나오니까, 둘 다 한통속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보낸, 마지막 때에 성령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은, 그전에는 성신이지만, 성령을 최초로 받은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단강에서.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셔서 받죠. 성신은 미완료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은 성령은 최종적이에요. 최종적. 이미 완료적이에요. 완료적입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다윗이 딱 성신을 받고 난 뒤에 나서니까 이쪽(골리앗)은 아예 우상이고 이거(사울+이스라엘 군사들)는 형식으로만 여호와고. 형식으로만 여호와인 것하고 진짜 여호와를 모르는 것에 오히려 그 안에 지금 빌빌 굴복당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세상을 오히려 부러워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이 둘을 보여주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양쪽을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는 뭐냐 하면은 ‘전쟁은 어떻게 진행 되는가’입니다.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시작한 전쟁입니다. 인간이 시작한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한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여기 블레셋 나라 장수 골리앗, 이 블레셋 나라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의 전쟁이죠. 인간의 전쟁은 오늘날 식으로 이야기하면 생존경쟁 또는 생존투쟁,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는 것. 취직하고 결혼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들 공부시키고. 전부다 이게 전쟁이에요. 전쟁이죠.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까?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죠. 인간의 전쟁이죠. 아까 차안에서 우연히 들었습니다마는, 애가 군대를 가야하는데 방위를 받았다. 이거 무슨 전쟁입니까? 하나님 전쟁이에요? 인간 전쟁이에요? 하나님 전쟁이냐, 인간 전쟁이냐는 판단하기가 쉬워요. 사람들이 군대를 정식으로 가는 것을 부러워해요? 방위로 빠지는 것을 부러워해요? 방위로 빠지는 것을 부러워하죠. 그러면 그거는 인간전쟁이에요. 왜? 골리앗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의 전쟁에서 이미 적이죠.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적의 편에 서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에서 적이 되는 것들을 우리가 그렇게 선호하고 부러워하고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원하는 것을 위해서 예수 부르짖으면서 교회 세워서 거기 다니고. 교회는 꼭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있는지를 교회 다녀야 이게 발각이 되거든요. 예수, 예수하지만 예수에 관심 하나도 없어요.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생존에서, 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원해요. 제가 보니까 집사님이 지금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편한 것이에요. 남편 죽고 편한 것. 그냥 내 몸 하나 편하면 돼요. 마음대로 수련회 갈 수도 있고 마음대로 성경공부 참석하고. 이제는 좀 제발 나 좀 놔줘. 힘들어 못 살겠다. 외로워도 좋으니까 좀 꺼져달라고. 뭐 이런 식이죠.

 

그게 지금 강의한대로 한다면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이게 나의 전쟁이에요? 주님 전쟁이에요? 나의 전쟁이죠.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목사가 교회 세워놓고 있는 것은 나의 전쟁이지 주의 전쟁이 아닙니다. 근데 목사가 더 나쁜 점은 자기 전쟁이면서도 사람들에게 뭐라고 사기를 치느냐 하면은 이게 주님과 관련된 일이라고, 사업이라고 사기를 치니까 더 나쁘죠. 아무것도 아닌데. 교회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교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구원받고 말씀으로 구원받잖아요.

 

그럼 교회는 뭐냐, 성령으로 인도하고 말씀으로 구원받는 그것을 교회가 오히려 방해하고 있죠. 막아서고 있죠. 근데 이것을 알아채는 사람이 없어요. 교회 등록하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니까. 왜? 구원받은 줄 알고. 본인이 그렇게 착각을 하고 싶어 해요. 교회 다니고 세례 받고 성찬식 받으면 구원되는 줄 알고. 그래서 누가 교회를 욕하면 지 욕하는 줄 알고 적극적으로 거기서 달라 듭니다. 왜 나를 건드리느냐? 자기 전쟁이기 때문에. 교회 욕하면 자기 적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1번 교회한테 죽었다. 2번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죽었다. 3번 모든 사람들한테 죽었다. 모든 사람들이죠. 그 모든 사람 속에,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모든 사람 거기에 이미 우리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은 늘 전쟁을 하는데, 무슨 전쟁을 하느냐 하면은 바로 나의 전쟁을 한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나의 전쟁이죠. 나의 전쟁할 때, 나의 몸이 있죠. 몸에서 나온 것이 납니다. 몸에서 나온 것이 나에요. 여기서 몸이 없으면 나도 없어지니까. 몸에서 나온 것이 난데, 나의 전쟁이라는 것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내 몸을 지키는 전쟁입니다. 내 몸을 지키는 전쟁이죠. 나라고 하는 것은 내 몸에서 나왔는데, 내가 편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 몸이 건강하고 편안하다는 뜻이에요. 외롭지 않고. 수다 떨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몸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서 욕망이 나오는데 욕망이 계속해서 전쟁을 유발합니다.

 

그런데 자, 이 몸이 1살 때, 2살 때, 3살 때, 4살 때, 5살... 세월이 갑니다. 몸이 1살, 2살 때는 가장 기초적인 전쟁을 하겠죠. 배고플 때 젖 달라하고 배설할 때 그냥 배설해버리고. 그러면 이 전쟁에서 갓난아기는 누가 처리해주느냐 하면은, 이 전쟁을 누가 대신 처리해주느냐 하면은 가까운 부모가 처리하죠.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해요. 인간의 전쟁은 자기 몸의 전제입니다. 그럼 부모가 언제 좋은가 하면은 내가 해야 할 전쟁을 부모가 다 해줄 때 좋은 거예요. 내 몸을 좋게 하면 그 부모는 좋은 분들이에요. 근데 내 몸이 이렇게 있는데 엄마가 시장에 간다. 애는 호소하죠. 울죠. 나를 놔두고 어디에 가냐고 울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누구 전쟁이에요? 내 몸 하나 중심의 전쟁이에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내가 날 때부터 하나님 없이 자기가 절대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죽음의 모습인데, 죽음이 나오는 원인인데, 원인이 그건데, 내 몸이 절대적이고 최고에요. 누가 아무리 뭐해도 내 몸이, 내가 잘 돼야 돼요. 내 몸이 편해야 돼요. 그거거든요. 그러면 한 4살 때가 됐다. 온갖 귀여움을 받아가지고 이제 부모는 누구 편이 됐느냐 하면은 내 편이 됐어요. 4살짜리 애가. 그런데 4살짜리 애인데 엄마가 또 동생을 가졌어요. 동생을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애한테 라이벌이 생긴 거예요.

 

그다음부터 전쟁이 뭐냐 하면은, 부모는 내 몸만 절대적으로 위하는 분들이다.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고, 이 때는 무슨 소리든지 다 해요. 커서 어머니께 효도하겠습니다. 뭐, 지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지가 편하니까 다하는 거예요. 근데 딱 동생이 태어나버리니까 엄마아빠의 관심이 다 어디로 갑니까? 갓난 동생한테 관심이 있을 때, 애는 이 동생을 뭐로 보겠습니까? 자신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자기 적으로. 그래도 뭐 철난 언니오빠들은 동생들을 돌본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라이벌이라는 것은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남길 때 동생은 주고 자기는 안 주면 이거는 용서가 안 돼요.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한결 같아요. 인간은 한결같이 자기 위주입니다.

 

그래서 아까 질문한, 주님은 누구한테 죽었는가? 모든 인간한테 죽었습니다. 자, 4살까지 이야기를 했죠. 어느 부모가 4살 애한테 “애야, 밖에 나가도 밤 10시까지는 집에 들어와!”라고 4살 애한테 이야기하는 부모 있습니까? 없지요. 지가 알아서 오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내 몸이 갖고 있는 세계관, 나의 현실의 범주가 좁아요. 좁아서 골목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항상 어떤 위험을 느끼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많아요. 유치원 버스를 탔으면 유치원 버스는 나의 세계인 동시에 유치원 버스 바깥은 위험한 세계에요. 그래서 유치원 끝나자마자 자기 몸을 태우고 옵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서 유치원 버스에서 중간에 내려 PC방에 간다면 그 PC방 그 영역만큼은 나의 영역으로 이게 추가가 돼요. 그 PC방 말고 다른 데 못 가요. 그 PC방에 자기 자리에 앉아서 하다가 후딱 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7살이 되고 10살이 되고 이러면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은 집이 맞긴 맞는데 점점 집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의 범주가 넓어지겠죠. 자기가 넓어지겠죠. 넓어지면서 뭐가 생성이 되느냐 하면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가 드디어 형성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가. 자기 범주가 늘어나면서.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이 넓은 범주에서 나한테 해코지하는 이건 나쁜 것이고, 나쁜 상황이고, 나쁜 사람이고, 또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짓이 되고. 나에게 욕을 한다든지, 10살 때 어떤 친구를 만났는데, 어떤 친구가 나한테 욕을 한다면 그 애는 나쁜 아이에요. 나쁜 아이.

 

왜? 나한테 욕을 했기 때문에. 내 물건을 빼앗았기 때문에. 아니, 내가 그 물건을 좀 쓰자고 했는데 그 애가 안 돼! 라고 했기 때문에. 누가 깡패인지 구분이 안 돼요. 무조건 내가 하고 싶은데 거절을 했을 때는 패주고 싶은 거예요. 뭐, 깡패가 그냥 만들어집니까? 거기서 만들어지는 거죠.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태권도 다니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저 애 휴대폰 빼앗으라고 해서 그게 10살, 12살에 나온다면 이거는 깡패한테는 자기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니가 왜 건방지게 갖고 있느냐 하는 거죠. 니는 나한테 무조건 내놓고 굴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범주가 넓어지죠? 아니, 2살 먹은 애가 휴대폰 빼앗으러 다닙니까? 아니잖아요. 가면 갈수록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고 넓어지면서, 아까 몸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욕망이 나오죠. 욕심이 나오죠. 그렇죠. 지금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정리해드리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정리해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왜 우상과 한통속인 가를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몸을 포기를 못한다니까요. 내 욕망을 포기를 못해요.

 

지금 새 아파트에 입주를 하셨는데,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고 서울 강남에 가서 말하지 마세요. 재벌 타운 한남동에 가서 하면 안 돼요. 이 동네에서는 같은 처지니까. 전에 살던 동네에 가서 하세요. 인간의 자랑은 뭐냐 하면은 나는 옳은 일을 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래서 나는 좋은 집을 샀으니까 나는 복 받았다. 나는 옳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거 미쳤어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거 완전히 미친 거예요. 그러나 누가 미쳤다고 하던 이게 본성인데 어떻게 합니까?

 

미리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자리에서 나와요. 주께서 나밖에 모르는 이 본성을 새로운 자리에다가 집어넣습니다. 그 자리는 내가 이 더러운 본성을 가지고 찾아갈 수 없는 자리입니다. 내가 획득할 수 없는 자리에요. 오히려 내가 기피하는 자리에요. 그 자리에 주께서 집어넣습니다. 그 자리는 몇 번지냐? 대전시 몇 번지냐? 없어요. 왜 없는가, 인간이 나이 60이 되고 70이 되도, 인간의 현실은 늘어나기는 늘어나는데 이 늘어난 현실이 다가 아니거든요. 90인생을 살아도, 본인이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다 끌어 모아도 그거는 주님이 아는 현실이 아니고 현실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 인간이 아는 한계점, 그 한계점을 넘어서 주께서 오셨고, 주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한계점 너머의 자리에다가 옮기신 거예요. 처소를 이쪽이 아니고 저쪽에다가 마련하신 거예요. 저쪽에. 그곳이 어디냐고 굳이 물으신다면 저는 어렵게 답변하겠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뭐냐 하면은 ‘언약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굳이 물으신다면 언약 안이에요. 묻는 것이 잘못이었죠. 어디쯤 되는 줄로 아는데, 어디쯤이 아니고 언약 안이죠.

 

아브라함이 어디에 갔습니까? 언약 안으로 들어갔어요. 사라졌어요. 죽었어요. 이삭은 어디에 갔습니까? 언약 안으로. 야곱은 어디에 갔습니까? 언약 안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는 다 모여!‘ 산 자의 하나님인데,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죠. 교회에서 이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교회에서. 교회 교인들 보면 전부다 자기 욕심에 차있는데. 니가 욕심으로 갖고 싶은 그 현실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다른 데 있어요.

 

다른 데 있으려면, 이 속성이 어떤 속성이냐 하면은 이게 하나님의 원수 된 속성이어야 해요. 이 속성이. 우리의 본성이. 내가 내 몸 편해지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과 원수된 거예요.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로마서 5장을 한 번 봅시다. 8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시고 10절을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 예수님의 죽으심이 누구에게만 연결이 됩니까? 본인을 어떤 사람으로 볼 때만 예수님의 죽으심이 의미 있게 연결이 돼요? 자기가 죄인이죠. 근데 죄인이라고 해도 부족해요. 왜? “죄 지은 게 있겠지. 뭐, 내가 천사인가? 죄 진 게 있겠지.” 이 정도잖아요.

 

자, 로마서 5장 1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영웅이고 좋은 분이지, 진정 죽으심의 의미를 몰라요. ‘에이 뭐 죽었다가 곧 부활하겠지. 나는 부활만 챙기면 되니까.’ 이런 식의 생각으로, 아이디어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고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십자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굳이 뭐가 되어야 합니까? 굳이 우리가 원치 아니하더라도 우리는 뭐가 돼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집 잘 사셨어요. 집 잘 사셨고 보람된 인생이라고 자부를 느끼셔야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 거예요. 내 몸 하나 편하죠. 내 몸 하나 편하면 최고가 아닙니까? 굳이 제가 이런 질문을 해야 됩니까? 예수 믿는 게 편해요? 지 몸 편한 게 편해요? 꼭 그런 얄궂은 질문을 해야 되겠어요? 예수님으로 족합니까? 아파트 있는 것으로 족합니까? 이거 자칫 잘못하면 오늘 점심도 못 얻어먹고 쫓겨날 수가 있어요. 이사 왔으니 고생했습니다. 축복받았습니다. 이래 나와야 되는데, 이게, 이사 온 게 하나님의 원수의 또 다른 양상이에요. 원수 된 데에서 또 하나 추가하신 거예요. 근데 그걸 필히 해야 됩니다. 앞으로 더 크고 넓은 원수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빌딩을 사시든지.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죽으심을 양보 못 하거든요. 죽으심을 도저히, 니 머릿속에서 나의 죽음이 날아가는 것을 내가 참을 수가 없다. 택한 백성 같으면. 내 죽음 대신 다른 것으로 대리, 대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죠. 지난 낮 설교에 십자가만을 자랑하라고 했죠. 십자가만을. 성도의 특징은 뭐냐 예수 죽으신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가 나는데? 밥하는 소리에요? 이 동네는 밥하는데도 조용히 못하고 말을 하는 모양이라.

 

자, 아까 한 것을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좁은 범주라고 하는 것은, 7살 애한테 좁은 범주라고 하는 것은 해당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만약에 “니는 7살밖에 안 돼서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돼.”라고 한다면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46살 먹은 범주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70살 먹은 사람이 “아이고, 그것도 세상 살았다고.” 이러면 화를 내요. 왜? 자기 딴에 46년이라는 세월이 허송세월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여 진리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나름대로의 모든 노력을 해서, 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굴러가는구나, 라고 정리한 거예요.

 

그러나 백날 정리하면 뭐합니까? 나는 항상 옳다. 나는 항상 옳고 나는 항상 편해야 마땅하고 나는 절대로 고생하면 안 되는 인간이고. 나라는 존재는. 나는 내 눈에서 눈물 나면 안 되고. 만약에 누가 내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너 나 잘못 건드렸어! 나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만만한 인간 아니야! 하고 와락 달려들고. 구청에 가서 신나(시너)들고 불 지르고. 감히 구청이 우리 집에 공사한다고 난 용납 못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폭이 자기밖에 모르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사적영역이라고 합니다. 사적영역.

 

그럼 사적영역 바깥은 뭡니까? 공적영역이죠. 반대말이. 공적영역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모르는 거예요. 공적영역에 대해서. 길에서 담배피우지 마세요. 왜? 내가 피우고 싶은데. 이게 뭐냐 하면은 집에서 담배 못 피우게 하니까 밖에 나가서 피운다고 할 때에, 피우지 마세요! 피우려면 한쪽 구석에 가서 피우고 담배꽁초는 주머니에 넣고 다른 사람이 길에 다닐 때는 담배연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오게 해야 되고 버스 탈 때는 담배 피면 온 몸에 냄새가 배어서 다른 사람에게 냄새가 난다. 이런 것 공적사회를 담배피우는 인간이 압니까? 모르죠. 그걸 알면 담배를 피우겠어요? 안 피우죠.

 

내가 내 편하게 하는 행동이 무작위한 다른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줄 거냐를 자기가 살아온 자기 현실에서는 그게 없는 거예요. 그 따짐이 없는, 이성적인 판단이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결혼을 할 때, 중매할 때 너희 집안이 배운 집안이냐를 보는 이유가 뭣 때문입니까? 사적영역이 어설프기 짝이 없으면 시집이라는 공적사회에서 제대로 막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옛날 어른들이 그걸 따지는 거예요. 너희 아버지 교장이면 잘 배웠겠네. 요새 뭐 교장도 뭘 해서 교장이 된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교장선생님 이런 집안은 엄격해서 가정교육을 잘 받았고, 그러면 그 정보회사에서 점수가 막 올라가요. 아주 80점 막 올라간다고요.

 

왜 그런 관행들이 있느냐 하면은, 이걸 보는 거예요. 니가 아무것도 안 배웠는데 니가 철이 날 일은 없다. 어릴 때부터 이단이든 삼단이든 교회 다닌 애들 보면 좀 이렇게 주춤하는 게 있어요. 조심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교회 안 다니고 막 되먹은 애들은 주춤하는 게 없어요. 왜 하나님이 없으니까.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니가 와? 신이 어디에 있나? 신이 어디에 있어? 이런 식으로. 신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내가 신이라는 것을 노골화시키는 거예요. 자제할 줄 모르고 노골화시킨다 이 말이죠. 어릴 때 엄마 따라서 교회 다닌 애들, 그 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가지만, 크리스마스 때 빵이라도 얻어먹으러간 애들은, 군에 연무대가서 실로암 노래 부르면서 눈물 좀 흘리고 군에 제대하면 교회 잘 다니겠다고 하죠. 제대하면 마찬가지지만.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 그리고 사울과 이스라엘이 있죠. 이 사람들이나 이 사람들이나 뭘 이루느냐 하면은 연대를 이루죠. 연대라는 말 알죠. 여러 사람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 연대를 이룬다. 혼자서 할 때는 이게 옳은가 그른가 자신감이 없는데,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같은 질의 친구를 만나니까, 아,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블레셋 앞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골리앗이 등장하죠. 그럼 골리앗 뒤에 누가 있습니까? 여러 사람이 있었던 거예요.

 

골리앗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야! 이번 전쟁 간단히 끝내자. 대표자 뽑아가지고, 나 한 사람 나설게. 니도 한사람 나서가지고 우리 이긴 쪽이 다 먹기로 하자.” 이걸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승자독식이에요. 이긴 사람이 다 먹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국회의원 선거 아닙니까? 2등이 뭐 필요해요? 1등만 국회의원이지 2등은 국회의원이 아니거든요. 승자독식이에요. 승자가 다 먹는 거예요. 좀 나눠주는 게 없어요. 화투판에서는 나눠주는 게 좀 있는지 모르겠지만. 화투판보다 더 하죠. 현실은. 다 먹죠.

 

자, 대학교 때 친구 둘이 있었다. 서로 친합니다. 그런데 대학 4년 졸업반이 되어서 취직자리가 한 개 남았어요. 한 개 남았다. 교수님은 나에게 취직하라고 하지 않고 내 친구한테 알려주라고 했다. 니 말고 니 친구가 딱 적임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을 먼저 접한 내가, 친구한테 알리지 않고 그 회사를 먼저 안 내가 알아서 합격했다면 이거 뭡니까? 배신이죠. 배신이다 이 말이죠.

 

여러분 오늘 강의를 잘 들으셨을 줄 알고 계속 진도를 팍팍 나갑니다. 자, 군에 갔다 온 시기가 28세라고 합시다. 28세 대학교 같은 과에 있는 둘이라고 합시다. 28세까지 둘이 친구였을 때 현실은 뭐냐 하면은 배신 없는 현실을 맞이했죠. 28살 때까지. 대학교 4학년 졸업할 때까지 배신 없는 현실을 맞이했습니다. 근데 군에 갔다 와서 졸업할 때가 되가지고 취직자리가 달랑 한 개 남았어요. 둘인데 한 사람만 뽑아요. 둘을 뽑는 것이 아니고. 하는데, 친구한테 해야 될 그 자리를 자기가 인터셉트, 가로채서, 교수추천만 되는 곳인데, 교수추천이 되는 곳에 한 애가 자기 친구는 싫다고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들어갔다면, 이 두 친구가 새로운 현실을 맞이했다면 그 현실은 뭐가 추가된 현실입니까?

 

살기 위해서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이 추가된 새로운 현실의 폭을 넓힌 겁니다. 가면 갈수록요, 선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순진에서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순수함에서. 이런 경우를 여러분들이 친구한테 당할 수도 있고. 당한 얼굴들이 아닌 것 같은데. 그걸 입 다물고 적극적으로 거짓말 한 게 아니고, 입 다문 그 자체가 배신이 되고 거짓말 하면서 평생을 자식 잘 키우고 교육 잘 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가 승자기 때문에.

 

이런 순수함 진리가 문제가 아니고 살아남는 것, 그것도 내 몸 하나 편하고 잘 먹고 살아남는 자가 이 땅에서, 이 골리앗이 세상에서는 뭐다? 이게 승자로, 누가? 연대적으로, 남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남들이 다 그렇게. 여러분 오늘 성경 잘못 보신 겁니다. 안 봐야 되는데 괜히 봤어. 이거 안 보면 착한 사람이 되는데 완전히 이거 하고 난 뒤에 하나님 원수가 되었어요. 어떤 인간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 연대니까. 연대. 연대라고 하는 것은 내가 거기서 빠져버리면 나는 왕따 당해요. 그러면 나한테 일거리 맡길 사람도 없고 나한테 취직시킬 사람도 없어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야 그 사람들이 나를 취직시켜주고 월급 줘서 내 가정을 먹여살려주는 거예요. 세상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범위라니까요. 그 범위. 일곱 살 때, 네 살 때는 그걸 몰랐죠. 엄마 말씀 잘 들으면 되는 줄로 알았죠. 그러나 이미 열네 살, 열다섯 살이 되면 엄마 말 안 듣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컴퓨터를 못하니까. 이제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현실에서 엄마가 무용지물이에요. 똑똑한 친구가 유용해요. 그러면 엄마를 버리고 컴퓨터를 하죠. 컴퓨터 기술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친구를 하죠. 그럼 그 친구가 갖고 있던 그 사고방식도 같이 수입을 해가지고 엄마의 인생관을 버리게 되어 있어요.

 

솔로몬이 여자가 많잖아요. 솔로몬이 여자가 천명 가까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들이 올 때 그냥 몸만 왔습니까? 종교와 사상도 같이 왔습니까? 같이 왔죠. 그래서 솔로몬이 그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상 제단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솔로몬이 아는 현실의 전부에요. 솔로몬이 아는 현실의 전부. 솔로몬은 그런 식으로 복 받는 이스라엘을 복 되게 지키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자리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교회를 집어넣어봅시다. 그럼 당회장 목사가 교회 개척교회 했습니다. 자기는 이 교회가 그야말로 하나님의 순결한 신부처럼 순수하기를 원했죠.

 

그런데 여기에 뭐가 옵니까? 여기에 교인들이 어떻게 와요? 교인들의 욕망, 욕심, 기도제목, 그거 신경 안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그거 들어줍니다. 성경말씀 다 바꿔가지고 그들의 무당 짓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때에, 이 이스라엘은 무슨 이스라엘이에요? 이거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죠. 교회가 아니죠. 절이죠. 절. 그거 왜 그렇게 했느냐? 목사한테는 이 교회가 자기 현실의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가 있으면 나는 밥 먹고 살고 교회가 없으면 나는 밥 못 먹고 죽기 때문에 그래요. 생존이에요. 생존.

 

그런데 자기가 개척교회를 했는데 다른 교회 개척교회가 인테리어를 잘했다. 에어컨 팡팡 나오고 그런다. 그럼 돈 들여 가지고 또 기도해가지고 인테리어 또 바꿔요. 이거는 둘 다 가게에요. 가게. 업소에요. 업소. 이쪽은 장로교합동 측인데 이쪽은 통합 측이다. 그럼 내 교회는 뭘 주장합니까? 내 교회는 프랜차이즈를 주장해요. 프랜차이즈를. “우리교회는 장로교합동측입니다. 저 교회는 wcc(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해가지고 자유신학이니 가지마세요. 혹시 이사 오거든 정통합동 측인 우리교회로 오세요.” 앞에다가 간판 걸어요. 합동측 간판은 동그라미로 되어 있고 통합측은 두루마리처럼 되어 있거든요. 이걸 왜 합니까? 교단적으로. 프랜차이즈에요. 프랜차이즈.

 

이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내가 아는 현실에서 내가 행복하고 복 받은 증거를 찾기 위해서 교회를 온 겁니다. 나는 이 정도보다 더 잘 살아야 합당한 존재인 것을 목사님 쪽에서 좀 이렇게 긍정적으로 증명해달라는 거예요. 이 모든 문제는 인간의 한계가 있다. 인간의 현실적인,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복을 알아도 그 현실을 뒤집을만한 현실은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십자가를 안다. 알지요. 우리가 알아요. 모르는 게 아니에요. 로마서 아까 읽어봤잖아요. 알잖아요.

 

근데 내 몸은 배고픈데 어떻게 하라고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무상관이. 내가 어금니가 아픈데 어떻게 할 거예요? 어금니가 아픈데. 그 어금니 내가 아프게 했습니까? 누가 아프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프게 했잖아요. 하나님이. 결국 하나님이 아프게 했다는 말은 내가 내 능력으로, 내 실력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 없다? 못 지킨다는 단절성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성령 받은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역할은 누가 합니까? 오늘 본문 사무엘상 17장에서 누가 합니까? 누가 하겠어요? 이 전쟁에서 누가합니까? 하나님의 전쟁을 누가합니까? 누가 내세워서 합니까? 다윗이죠. 다윗은 뭐냐 왕, 선지자입니다. 왕+선지자입니다. 왕이요 선지자에요. 왜냐하면 다윗은 이 전쟁 이전에 먼저 기름 부었죠. 사울을 대신했죠. 근데 사무엘이 입 다물라고 했죠. 왜? 죽으니까.

 

사람들의 현실에 맞춰서 그들이 원하는 현실은 이미 있어요. 사울 왕한테는 한통속으로 말이 왜 그렇게 잘 통하는지 잘 통해요. 사울 왕이 추구하는 것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키우자! 백성들은 오케이하고 나선 거예요. 여기서 소년다윗은 뭐 있습니까? 기름만 부었을 뿐이지. 아직 어린애인데요. 지가 김정은이가? 어린애인데요. 백성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천천이고 만만은 사무엘상 17장 지나봐야 아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소년다윗 자기도 난감해요. 자기는 뭐 별개입니까? 자기는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요. 하나님의 성신이 가만두지를 않는다니까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근데 성령이, 주님이 가만두지를 않는다니까요. 넓은 길로 못 가게 만들어요. 가면 지옥이니까.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입사 지원하는 것이 아니고 스카우트하는 거죠. 원서 내는 것이 아니에요. 아, 좋은 나라니까 들어갑니다. 자기가 원서 내는 것이 아니고 스카우트하는 거예요. 스카우트. 스카우트 당할 때 선물로 오는데, 선물로 왔을 때에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자신이 갑자기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선물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쓸모 있다? 쓸모없다? 아무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꼬라지 세상만 좋아서 그거 어디 쓸모 있어요? 우리는 하늘나라에는 쓸모없어요. 그걸 폭로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신 거예요.

 

그리고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못 찾아가요. 우리야 가만히 있는 입장이 못 되거든요. 부지런히 설치는데 그 설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넓은 길, 세상과 연대가 하는 것. “나 여기 쓸모 있어요. 나 필요하죠. 나 채용해주세요. 나는 돈 필요하고 당신은 나 필요하니까 잘 됐네.”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내 생존. 나는 존재할만한 가치가 넉넉히 있음. 그것을 남한테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실력을 자랑하죠. 십자가를 자랑해가지고 어디 취직한다고요? 십자가 자랑해서는 교회도 취직이 안 되는데. 교회도 십자가 자랑하면 취직됩니까? 안 되죠. 큰일 나죠. 사람 끌어 모으는 재주를 자랑해야지 십자가 자랑한다고 되지를 않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색은 가면 갈수록 내가 알고 있던 이 현실판, 내 중심의, 중심은 항상 내 중심이죠. 내가 잘되기 위한 이 현실판은 이거는 엎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아니라도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겁니다. 남들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하고, 이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대치되는,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반대편에 있는 겁니다. 그냥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매일 전쟁 중입니다. 주님하고 매일 전쟁 중이에요.

 

우리 강집사님 그림 하나 딱 그려놓고. 잘 그려놨잖아요. 카메라 한번 비춰봐야 하는데. 이 정도로 잘 그렸잖아요. 이거 아마추어 솜씨가 아니잖아요. 그림 그린 사람은 뜻이 뭐냐 하면은 내 생각한대로 그대로 반영이 될 때 제일 기쁘죠. 내 생각한대로. 그래 아주 기쁘죠. 십자가 기쁨입니까? 내 생각대로 작품이 나왔을 때, 아, 내가 내 현실 속에서는 나는 그림을 못 그렸다고 여겼던 그것이 몇 달 전이었는데 그림 작품이 딱 나온 뒤에는 뭐가 추가 되었느냐 하면은, 얼추 그리네! 내 자신이 생각하기를 얼추 그리네! 이래하다가 나 화가로 나갈까? 저 정도 같으면 화가 솜씨 같은데. 예? 동생이 화가라고요. 아, 그럼 강집사님 동생이 그린거구나! 끝날 때 카메라 한번 좀 비춰주세요. 이렇게 말만 하면 듣는 사람들이 감질 난다고요. 얼마나 잘 그렸길래 그러는지.. 제가 대신 자랑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자랑 대신.

 

우리는 전쟁을 안 하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이 시비를 걸어서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그 전쟁을. 어떤 차원이냐 하면은 왕과 선지자거든요. “왕+선지자” 자,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일평생 살면서 내 몸 위주의 현실판이 있어요. 그런데 왕과 선지자는 그 배후에 왕과 선지자가 되게 하신 성신의 세계에 있는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 현실과 이 현실의 대치관계, 대치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면 흔히 우리가 이해하듯이, 교회 와서, 나는 이 세상 버리고 천국가고 싶어요. 진심이십니까? 예. 진심입니다. 그런데 이 몸은 어디에 익숙해졌는가 하면은, 친근한가 하면은 내 몸 위주의 이 현실에 친근하거든요. 여기에 친근한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몸에 들어가려면, 내 쪽의 몸이 아니고 왕과 선지자 쪽의 몸이 되려면 내 몸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되겠어요? 완전히 교체해야 되겠죠. 바꿔져야 되겠죠. 그 말은 뭐냐, 내 몸의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 하면은 실망해야 됩니다. 오늘 첫 번째 제목은 실망이에요.



이 모든 것의 실망인데, 실망을 언제 하느냐, 주께서 인도하시면 매일 실망하는데, 누구한테 실망해요? 처음에는 현실한테 실망해요. 세상이 나를 안 알아준다고.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고하고 나중에는 뭐냐 하면은 나한테 실망해요.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을 십자가와 복음 앞에서 다시 한 번 그걸 깨닫는 거예요. 나한테 실망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첫째는 현실에 실망하면서 짜증나고 두 번째 나한테 실망하면서 낙담되고 세 번째 이게 바로 기쁨이 돼요.

 

내가 어떤 인격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이미 놓여져 있는가를. 이미 이쪽 자리(왕+선지자)에 놓여있는, 자리는 이미 나도 모르게, 잠자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도 모르게 이미 성령이 와버렸어요. 왔기 때문에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자리는 이쪽 주님의 자리인데, 몸은 완전히 기존세계에요. 그러니까 인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아, 나는 하는 것마다 짜증나요. 내 뜻대로 안 되는지 짜증내다가, 성령이 와서 깨달음을 줘서 보니까, 아, 내가 큰일 날 뻔했구나!

 

내가 저쪽으로 가면 지옥이죠. 이쪽으로 가면 천국이고. 가만있었으면 천국으로, 컨테이너에 실려서 그냥 천국으로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갑자기 나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이 불쌍해지고 측은해지고 가련한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는 신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으니까. 이게 내가 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주께서 그냥 일방적으로 주신 거예요. 창세 전에 예정된 자에게 그냥 주신 거예요.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있어요. 그것 때문에 사도행전이 있거든요. 영생 주는 것이 스카우트라고 했으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 중에 포함이 되었기에, 비로소 내가 평생 공들인 이 현실이 나를 망하게 한 현실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게 누구의 사고방식이냐 하면은 바로 다윗의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다윗의 사고방식이에요. 다윗이 늘 그런 생각을 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자, 그럼 좀 더 진도를 나가봅시다. 제가 아까 이쪽의 세상을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연대라고 했죠. 연대. 혼자가 아니고 연대. 서로 의견이 하나가 됐죠. 근데 다윗은 몇 명이죠? 놀랍게도 가시적으로 달랑 한명이죠. 한명. 1名. 누가 말렸는가 하면은 이쪽 사울 쪽에서 말렸어요. “야야, 그냥 가지 말고 갑옷입어라. 창 들어라. 투구 써라.” 가다가 무거워서 벗어놨다는 거예요. 무거워서.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지. 제목을 바꿀까? 무거움으로.

 

우리는 이 현실이 무거워요. 강집사님 화가처럼 그림 발전하려면 레슨 받아야 합니다. 일하시는 것 한 15만원 나가야, 레슨 받아야 저 작품이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발전이 되려면 뭐가 돼요? 발전이 나에게 중력이 되고 나의 짐이 된다니까요.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욕망이 나에게 스트레스같이 다가온다고요. 애들 키워보세요. 지금 애 키우고 있잖아요? 무슨 생각이 납니까? “천재처럼 잘 키웠다. 아주 훌륭하게 키웠다.” 애를 키웠는데 이렇게 가족들로부터, 주위로부터 좀 듣고 싶어요. 아이고, “애 키웠는데 아주 엉망이네.‘ 이것보다 낫잖아요. 끝도 없어요. 끝도. 내 현실을 넓히는데 끝도 없어요. 좀 더 유명해지고 가치 있고 쓸모 있다고 그렇게 평가를 받고 싶어요.

 

이게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다윗은 갑옷이고 뭐고 세상이 주는 것 다 갖다버렸어요. 필요 없다고요. 왜 필요 없는가 하면은 이 전쟁은요, 나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걸 우리한테 하면 내 인생, 여기 이사 온 것, 내 뜻 아닙니다. 우리 애 방위로 빠진 거 내 뜻 아닙니다. 우리 애 영창 간 거 내 뜻 아닙니다. 다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선하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그럼 니 거는? 니 것은 없잖아? 없어서 감사하죠. 내 것이 없어서 감사해요. 그냥 소유가 아니고 그냥 누리는 거죠. 그냥 누리는 거예요. 이 아파트 그냥 누리는 거예요. 그냥 감사하면서 뭘 하든지 마음껏 누리는 거예요. 즐기는 거죠. 욕심내봤자, 욕심낸 만큼 우리는 이 땅에서 그만큼 내주는 게 있어야 돼요. 그냥 공짜가 없거든요. 욕심낸 만큼 그만큼 힘든 희생을 또 감수해야 돼요.

 

따라서 이 다윗을 요약해보면 다윗은 뭐였다? 왕+선지자죠. 이거 이야기는 다음 강의 때 하겠습니다. 왕, 선지자라는 내용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은 이것은 항상 단독자라는 것을 아시고 여러분들이 너무 외로워마세요. 다윗도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외로웠기 때문에 연대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요? 아주 개무시를 한 거죠. “아이고, 뭐 혼자 믿음이 좋기는..” 그들은 연대를 이루고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은 지옥 가는 길이잖아요. 성도는 이렇게 외로워요. 하지만 주어진 현실이, 이 자리는 내가 전에 알던 자리가 아니고 낯선 자리에요. 그 자리에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이 나오시길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7-25 20:37 
대전-113강 마태복음26장 28-31절(포도주 세상)20190723-이 근호 목사

 

마태복은 26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두 가지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겠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피를 흘림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는다 하는데, 이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어떻게? 어떤 논리로 그게 가능하냐? 이게 실제냐? 이게 실제로 그러냐? 그냥 위로삼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실제로 그랬어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이게 현실입니까? 같은 말이에요. 피 흘려서 죄 사함을 얻는다는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면 기존 현실은 이게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이순신 장군이 피 흘렸다고 내가 용서받아요? 안 되죠. 어디 강감찬 죽었다고 해서 우리가 용서받는 것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는 그건 현실이 아니고 비현실이죠. 비현실은 뭐냐 하면은 그냥 망상, 상상, 다른 말로 하면 허구, 뭐 그렇게 되겠죠. 허구, 망상, 상상이죠. 왜냐하면 어느 입장에서 볼 때, 그냥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죄 사함이라는 이 소식이 없다면, 소식이 없는 경우라면 그거는 망상이 아니고 상상이 아니고 허구가 아니고 제대로 잘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돌아가죠.

 

그런데 피 흘림으로서 죄 사함이 돼버리면, 피 흘려도 죄 사함이 안 되는 이 세상, 누가 죽는다고 해서 수백 년 후에 죄 사함이 안 되는 세상이라면, 그 현실은 실효성이 없고 그거는 쓸데없는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있으나마나한 그러한 현실이 되겠죠. 실효성이 없으니까. 그러면 이쪽 세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복음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반대로 어느 쪽을 망상이라고 하겠습니까?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을 극구 밀어내겠죠. 왜? 자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기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는 이상한 것이 끼어들면 그걸 강력하게 밀치겠죠. 밀치고 싶은 거예요.

 

그 대표적인 집단이 뭐냐 하면은 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이 돼버리면 그 순간 그 사람들은 교회 나올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나올 필요가 없잖아요. 아니, 목사가 주일날 아침에 열한 시 오십 분 되어가지고 양쪽에 못을 박아가지고 강대상에다가 지 몸을 떡하니 정육점에 고기 걸어놓듯이 걸어놓고 오는 사람마다 목사 피를 흘리게 되면, 사람은 또 몰라 저 목사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게 현실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게 없다 이 말이죠.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면, 그러면 교회의 덩치, 건물, 부동산이 문제가 아니고 교회에서 뭘 외치느냐가 중요하겠죠. 교회에서 뭘 외쳐야 됩니까? 피 흘려서 죄 사함이 안 되는 현실은 결코 여러분들의 망상에 불과합니다, 라는 것을 외쳐야 되겠죠. 그러면 그 망상 속에 뭐도 포함이 되어야 돼요? 교회 잘 되면 우리 복 받는다는 것도, 그것도 망상이고 잘못된 겁니다, 라고 목사 입에서 나와야 되겠죠. 어떤 사람이 기도해서 병 낫는다는 것도 망상에 속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겠죠. 왜? 어떤 사람이 기도해서 병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저쪽 병 낫는다고 내 애가 병 낫습니까? 그것은 아니라 이 말이죠.

 

이게 망상이라고 허구라고 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뭐냐 하면은 내가 뭘 해야 그 결과가 나한테 주어지는 거예요. 내가 뭘 해야. 빡세게 기도해야 응답받는다든지, 헌금을 해야 복 받는다든지,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든지, 내 쪽에서 뭘 해야 그 좋은 결과가 누구한테 온다? 나한테 온다고 했잖아요. 근데 이 피 보세요. 이건 뭡니까? 피 누가 흘렸습니까? 내가 흘렸습니까? 우리 목사가 흘렸어요? 우리 장로님이 흘렸어요? 누가 흘렸어요? 보지도 못했어요. 나는 피 흘리는 거 보지도 못했습니다. 봤습니까? 예수님 키가 몇 센티입니까? 우리 태어나기 전에 이야기잖아요. 태어나더라도 이스라엘 이야기라고요. 그때는 비행기도 없고 예수님 한 번 구경하려고 배타고 저 이스라엘까지 가봐야 합니까?

 

그러면 그 예수님이 있을 때 같이 봤던 제자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봤으니까 이거 믿었습니까? 그들은 보고도 안 믿었어요. 보고도. 본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보여줌으로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경인가를 노출시킬 뿐이죠. 지금 이 본문에 내가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은, 아,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정말 이것이 감당된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현실은 아주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이 부쩍 생기는 것이 이 논리에 부합되는 결과입니다. 이 논리에. 이것이 이 정답에 부합되는 결과이어야 되죠. 그까짓 인생 그게 뭔데? 이래 나와야 되죠.

 

그래서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열두 제자의 태도는 이랬어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 전부다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너희들 앞에 그냥 죽는다고 하니까 수제자인 베드로가 가서 말립니다. 뭐,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 병고치고 물위를 걷고 인기 있는 것, 이것으로 쭉 갑시다. 가면, 사람들보세요. 당신을 왕으로 삼습니다. 오병이어로 예수님을 임금 삼겠다고 따라다녔잖아요. 목회 지금 잘 되고 있잖아요. 잘 되는 목회를 왜 파토 내려고 해요. 주님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만큼 추종하는 세력이 많을 것 같으면 자기들은 뭐냐, 장로급이 되죠. 장로급.

 

예수님은 일을 하시고 자기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 수제자들이에요. 수제자들. 아까 차타고 오면서 좋은 이야기 많이 했네. 수제자들이에요. 수제자들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 도망갔는데 수제자들이에요. 배신하고 도망가는데. 자기는 예수님한테 배울 만큼 배웠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딱 죽으니까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이야기가 도리어 망상이고 헛된 소리였어요. 실효성이 없는, 현실성이 극히 결여된, 이상한 헛소리, 예수님에게서 나온 모든 소리는 헛소리였고 병 고치는 것도 하나의 눈속임이었고 뭐 그런 거죠.

 

왜냐하면 현실이 달라질 것을 그들이 기대했거든요. 현실이 바꿔지기를, 혁명적으로 바꿔지기를 기대했는데, 혁명은 전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고요했습니다. 그리고 승자는 누구냐, 승자는 로마 본디오 빌라도가 승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패자로서 무덤에 잡혔습니다. 게임오버. 게임 끝났습니다. 지난 번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죠. 제자들이 예수 믿는 것은 뭐였습니까? 공허함이다. 공허함.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주어진 것은 공허함. 강남강의 들어본 적 있어요? 공허하죠. 세상 주변사람들은 니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실적 내놔보라고 닦달 내죠. 예수 믿고 난 뒤에 병 고친, 복 받은, 수익이 늘어난, 잘된, 이런 증거들을 내놓으라고 난리인데, 사도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공허함이에요.

 

마치 예수님 따라다니면 뭘 얻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수많은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 남는 것은 그들의 공허함만 남죠.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청춘을 바쳤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말이죠. 이 땅에서 맥없이 죽는 사람을 내가 뭐라고 마치 메시야라고 착각해서 거기에 청춘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돈 바치고 미치듯이, 마치 그게 진리인양,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준 것인 양 여겼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천사가 내려와서 구해내실 줄 알았죠. 그냥 침묵이에요. 쉿! 고요했어요.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요. 아무것도.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인지를. 병 고칠 때는 신났는데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동떨어져요. 현실감이 떨어져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과대망상증 아닌가? 지 혼자 하는 착각이고 우리가 그냥 말려든 것이 아닌가? 실없이. 이거 병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왜 우리가 예수 말에 말려들었지. 이제 와서 본전 찾자. 그래서 본전 찾은 게 고기 잡으러 갔어요. 아이고, 다 잊어버리고 하던 가락이나 하자 해서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왜? 죽은 사람은 끝났잖아요. 끝났다 이 말이죠. 근데 제자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줄 몰랐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줄 몰랐던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말로만 큰소리친 줄 알았지 이게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인줄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 순간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안 거예요. 이제 성령이 오면 더 모든 것을 알겠지만. 아, 내 인생의 자리가, 내 인생의 자리가 아니고 주께서 이용한, 주께서 주님 되기 위해서 우리가 채용되었다는 거예요. 그냥 주님께 참여당한 거예요.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주의 자리에요.

 

그래서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니가 인생을 백날 계획해봐야 예수님 내 자리지 니하고는 상관없는, 너희하고 상관없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성도가 가야할 운명입니다. 지난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어요. 피로 죄 사함 받는 것, 이걸 두 자로 이야기했어요. 이걸 모순이라고 했어요. 모순. 모순은 인간이 기껏 아는 이성적 체제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납득해서 따져서 믿을 수 있는 내용은 성경에 하나도 없어요. 맞지를 않으니까. 요래하면 저래하고 저래하면 요래하는... 맞지를 않는 거예요. 맞지를 않아요.

 

맞지를 않는다는 말을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제는 포도주로 난 것을 하늘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에게 날까지 오지를 않는다, 라는 이 말을 제가 요약해드리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완성된 사건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일들이 거기에 연계되어서 일어났다.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하나의 완성된 사건. 포도주 사건. 포도주 먹는 이 사건. 포도주가 핵심이 되는 그 사건 하나 때문에 그동안 모든 세월들이, 역사들이 그 사건에 전부다 모아졌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세 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소실점이에요. 그림 그려서 아시잖아요. 그림 그릴 때 원근법이 있죠. 나무든 건물이든 결국 선으로 연결해보면 하나의 지점으로 모든 것이 다 모아집니다. 이 그림에도 소실점이 다 있어요. 아까 쉬는 시간에 카메라로 찍은 거 보셨죠? 소실점, 중심점이죠. 그 소실점이 꼭 화가의 자기시선에 있는 지점에 있습니다. 내가 본대로 그리기 때문에 그리로 다 빨려서 오죠. 내 자리에서는 이렇게 풍경이 보인다는 것을 화면으로 펼쳐놓은 것이거든요. 그 사물들을 다시 끌어 모으면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십자가 피가 죄 사함을 주는가를, 우리 논리로서는 왜 모순이 되고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소실점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잖아요. 그냥 살아있습니까? 관점이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나름대로 본다고 여기는 겁니다. 본다. 어디서? 어느 중심에서? 내 중심에서 보지 어디서 보겠어요. 나니까 내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니는 니 중심으로 보고.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니까, 내가 보는 해석 따로 갖추어져 있으니까, 주님이 최종적으로 주님의 소실점에서 보는 해석과 이 해석이 모순될 수밖에 없죠.

 

주님이 흘린 피 때문에 내가 죄 사함을 얻는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이에요.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이기 때문에, 이런 주님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때 나에게 의논했습니까? 나하고 의논 안 했잖아요. 그럼 나는 어차피 모순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나하고 협상하지 않고 나하고 의논하지 않은 이야기를 불쑥 내놓아버렸다 이 말이죠. 내 피를 흘리면 너희가 사함을 얻는다. 죄가 없어진다. 이걸 불쑥 내놓았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은, 니가 이 말에 대해서 니가 모순을 느낀다면, 니는 평소에 죄 사함을 얻는데 니는 어떤 아이디어를 니 몸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가, 니가 내놔봐라. 이러는 거예요. 주님께서 정답을 먼저 제시했어요. 정답을 먼저 제시하고, 내가 예상한 정답하고는 전혀 다른 정답이에요. 그러면 니는 니 나름대로의 니 행함을 통해서 정답을 내놓아봐라 이 말이죠. 니가 내놓는 어떤 질문과 답변, 그리고 주님이 내놓은 정답, 이게 니가 내놓는 예상된 질문과 답변이 같은가 한번 대조해봐라. 대조해보면 같지를 않죠.

 

그 같지 않은 것 때문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 몸으로 죄 사함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죄 사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적으로도 죄 사함도 아니고, 뭐로 죄 사함입니까? 예수님의 피. 피는 그냥 흘리신 것이 아니고 인간한테 둘러싸여서 인간한테 린치당하고 뭇매당한 증거와 표적이 뭐냐, 피잖아요. 그냥 죽음이 아니고 사람에게 얻어맞은 죽음. 사람에게 밀침 당해서 죽은 죽음. 사람에게 미움당하고 핍박받은 죽음이죠.

 

그럼 피가 정답이죠. 정답부터 개시한다고 했죠. 펼쳐진다고 했죠. 펼쳐진다면 피에서 나온 것이 뭡니까? 인간은 나를 핍박했다. 그런 사례들, 그런 경우들이 뭐냐, 피를 통해서 쫙 나오겠죠.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가 피 이야기한다는 말은 뭡니까? 지금 너희들이 교회 나온 행세자체가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범죄가 된다는 것을 강단에서 이야기할 수 있죠. 강단에서. 너희들이 지금 헌금하고 하는 이유가 교회가 있어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것. 이거는 모순이 아닙니다.

 

교회가 있어야 교회 제도가 성립이 되고, 교회제도에서 교회가 그냥 가만히 있지 않잖아요. 성만찬이고 의식을 행하겠죠. 성만찬, 세례. 그럼 세례 받는 사람은 뭐 한다? 죄 사함을 받는다 하겠죠. 바로 그것이 무엇에 대한 모독이고 무엇에 대한 공격입니까? 피 흘림에 대한 공격을 교회가 앞장서서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실상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알고 싶다. 이제는 말한다. 뭐 이런 거.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내용. 이 실상을 알게 되죠. 왜 교회는 항상 세상과 더불어 영원히 생겨야 되는 이유를.

 

그거는 이 세상이 연대가 되어 있고 이 세상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그들이 모순이 아니고, 모순되지 않고 납득이 되는, 그들이 하나가 되는 바벨탑 쌓기, 만들기 그런 거죠. 그럼 우리가 하는 그것이 나쁘다는 말입니까? 우리만 나쁜 것이 아니에요. 우리만 나쁜 것이 아니고 누가 있느냐, 이스라엘이 그걸 행하는 겁니다. 뭘 가지고 율법을 가지고 그걸 행한 거예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전입니까? 후입니까? 전이에요. 예수님 십자가 후에는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이 오지를 않아요. 스카우트니까. 자기가 택한 백성만 부활의 영으로 찾아가신 거예요. 성령으로. 직접 몸으로도 찾아가시고. 물론 세 번 밖에 안 나타나셨지만.

 

예수님이 세 번 밖에 안 나타나셨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성령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세 번 나타나셨잖아요. 누가복음에 나와요. 그럼 예수님이 세 번 나타나시고 승천하시고 난 뒤에는 누가 오십니까? 시도 때도 없이 성령이 바람 부는 대로 오죠. 바람 부는 것은 바람이 결정하지, 바람 부세요! 우리가, 바람 맞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오후 설교 끝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네거리의 태풍은 신호를 안 지킨다고 했죠. 신호하는 율법은 누가 만든 거예요? 인간의 행동에 맞춰서, “이거는 네거리입니다. 그냥 함부로 무단횡단하지마시고 파란불에 건너가시고 빨간불에 스톱하세요.” 이거 누가 만든 거예요? 인간이 만든 거잖아요.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고 그거 지키면 옳은 줄 알고 그거 지키면 죄 사함을 얻는 줄 알았죠. 우리는. 횡단보도 안 지키면 지옥 가더라. 지키는 사람은 천당 가더라. 이게 우리의 인식이에요. 타고난 법의 인식이라고요. 그 타고난 법의 인식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신호위반을 했다고 죽이는 거예요. 지금 사태가 이런 사태입니다. 내가 하는 짓이 예수님을 죽이고 또 죽이는 짓을 하는 거예요.

 

율법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에 이걸 집어넣겠습니다. 아까 사무엘상 할 때 인간은 나름대로 현실구성을 하죠. 나름대로의 현실구성. 현실구성에서 보다 큰, 첫째 시간에 28살 먹은 애를 예로 들었죠. 초등학교부터 친구였다고 합시다. 무려 그야말로 20년 친구가 취직자리 하나 놓고 배신해버렸죠. 세상이 그런 거예요. 세상이. 좋다고 결혼해놓고 22개월 만에 이혼했잖아요. 혜교하고 중기. 같은 송씨 집안인데. 결혼할 때는 몰랐죠. 잘 맞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둘이 90까지 살 생각했어요. 우리 한 3개월 살고, 한 2년 살고 헤어지자는 그런 생각을 안 했다고요. 군대생활보다 짧았어요. 몰랐죠.

 

그러면 이 현실구성에서 새로운 현실구성을 알게 되었잖아요. 갑자기 이혼녀가 되었죠. 이혼남이 돼버리고. 이쪽에서는 난리에요. 돌싱되었다고 환영하고. 돌아온 싱글되었다고 좋아들 하는데. 사적영역에서 공적영역으로 돌아온 거예요. 팬들은 좋죠. 골키퍼가 없어지니까. 새로운 현실구성이 나오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이 주입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배신했잖아요. 왜 배신했습니까? 그 베드로가 취하고 제자들이 취한 그 현실에서는 도저히 예수님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자기한테 모순이 돼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보고 십자가지지 말라고 하니까, 너무나 모순되니까 반대했잖아요. 인간은 모순되면 반대해요. 그래야 자기의 꾸준히 이어져온 생각이 정당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정당을 포기할 생각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일단은 부정하고 본다고요. 니가 잘못됐지. 나는 옳다. 이러고 싶어요.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늙은 아버지 요양원에 보내려고 하면 난리도 아니에요. 집안에. 내가 멀쩡한데 거기 왜 가느냐? 내가 멀쩡한데. 내가 아프나? 거기 왜 가는데? 아파도 집에서 누워있을래. “어머님. 아버지. 제가 지금 돈벌이 한다고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아이, 내가 알아서 한다. 너는 돈 벌 이 해라. 그래. 내가 애써서 자식 키워도 소용없다!” “아버지만 요양병원에 가시면 자식들이 싸울 필요도 없고 만사 다 됩니다. 돈 모아서 요양비 댈 테니까.” 한 사흘 갔는데, 답답해서 못 살겠다고 해요. 답답해서. 왜? 왜 답답합니까? 낯선 현실이거든요. 낯선 현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저나 여러분이나 남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될 수가 있어요. 내 집에서 내 몸 추스르겠다고 하는데, 왜 이상한데에 똑같이 귀신 돼서 모여 있는, 같이 귀신 되라고 하느냐? 안 된다. 나는 죽어도 못 간다. 개 끌고 가듯이 하는데 버티죠. 이렇게 버티는 가능성이 있을 수가 있어요. 다들 믿음 좋으니까 그것도 감지하겠지만.

 

성경에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해아래 새것이 없어요. 그 고물이나 이 고물이나 같은 고물이에요. 그쪽 행세, 마음가짐 다 갖고 있어요. 속성 다 갖고 있다고요. 내 집 놔두고 내 자식 놔두고 왜 거기가지고, 고려장도 아니고 왜 그러냐고 하는데, 이거는 자식 생각 안 하고 자기만 생각하는데 익숙해져서 그렇습니다.

 

현실에서 갈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할 때는,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잘 되는데 왜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라고 했습니까? 사탄이라고 했습니까? 사탄이에요. 우리가 사탄의 종이었어요. 자기가 몰랐죠. 내가 마귀인줄 몰랐죠. 마귀생각에 중무장이 되어서 몰랐죠.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인간은 어느새 자기 마음속에 사드방어체제가 되어 있다고요.

 

누가 뭐라고 하면 단추 눌러서 미사일 쏠 생각이에요. 뭐든지. 심지어 부부사이라도. 조금만 뭐해도, “양말 좀 제대로 해가지고 하지. 거꾸로 벗어놓으면 안 됩니다.” “내가 왜 양말을 이렇게 하는데? 돈 버느냐 힘들어서 그래. 내가 집에서 놀고 왔나?” 미사일 항상 단추 누를 준비가 되어 있어요. 김정은이하고 똑같아요. 까딱하면 미사일 쏴버리려고 해요. 이게 사람이 나이 들면 좀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나이 들면 더 심해져요. 굉장히 예민해져버려요. 이중인격자들.

 

십자가지고 난 뒤에 각자도생이에요. 각자 홀로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 말은 각자 다른 현실을 붙들고 가버린 거예요. 이 현실이 완전히 두 동강 났어요. 남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28세 때까지 친구였는데, 친구가 배신당할 때 배신한 사람이 미안은 하지만, 항상 약간만 세월이 지나면 몇 개월이 안 돼서 정당한 것이 돼요. 정당하게 돼요. 항상 인간은 자기 현실을 정당하다고 해줘야 내가 정당하니까. 인간의 본성은 그렇습니다. 내 정당성은 어느 장소에도, 어디에 가도, 어느 날에도 포기한 적이 없어요.

 

한강에 물에 빠져도 자기 정당성은 양보 안 해요. 물에 빠져가면서도. 나는 정당한 거예요. 안 죽을 자가 죽는다고 여기는 겁니다. 죗값, 로마서 6장이야기는 다 없어져요. 내가 남의 땅에 와서 물에 빠져 죽을 줄을 몰랐다. 분통 터트리면서 죽었을 거예요. 나는 정당하다! 이러면서. 나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거저 살려줘도 항상 우리는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은 살만해서, 살 가치가 있어서 살렸다고. 나는 그걸로 무장한 인간입니다.

 

여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십자가 들어가죠. 예수님의 십자가에 제자들이 들어가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제는 살고 죽고 사랑이고 뭐고 간에 주님이 결정할 문제이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갑자기 베드로가 자기 현실의 한계를 알아요. 나는 한계에 부딪혔다. 나는 벽에 부딪힌 거예요. 내 세계 버리고 천국 못 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우리가 어떤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이동할 때는 십자가로 개입이 돼야 돼요. 십자가 개입이 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다른 현실이 주어집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했지만 흔히 하는 쉬운 말은 이겁니다. 제가 적어볼게요. “어제 나 은혜 받았어.” 간단한 문장이에요.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다 이 말이죠. 오늘 생각해보니까 어제 나한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구원받았다. 이 이야기가 아닙니까? 은혜 받았다. 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럼 그런 이야기를 오늘 한다 이 말이죠.

 

오늘 와서 어제 구원받은 것이 오늘의 현실에 긍정적인 작용을 해가지고 이것을, 이 현실을 긍정해버려요. 오늘 나 구원받았다, 라는 것으로. 그러면 내일되면 뭐가 됩니까? 내일이라는 현실로 가려면 오늘이 그대로 이어져가야 돼요? 내일 현실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십자가가 들어가야 되죠. 사람은 매일 죽으니까. 십자가 들어가잖아요. 들어가면, 어제 은혜 받았다는 것도 결국 오늘 보니까 내 자랑이었다가 자각이 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이거는 시간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시간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어려운 이야기하니까 슬슬 더 피곤해지죠. 한국에 살 때 우리가 아는 지평은, 한국 잘 되어야 한다. 한국 무조건 잘 돼야 된다. 왜? 본인이 살고 있으니까. 무조건 잘 돼야 돼요. 그런데 어느 계기가 되어가지고 한국에 안 살고 캐나다에 삽니다. 이건 공간입니다. 그러면 한국이고 뭐고 한국 정치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뭡니까? 이 캐나다가 잘 살아야 돼요. 왜? 캐나다가 잘 살아야 복지가 나한테 더 주어져요. 공간이 다르니까 갑자기 현실이 달라지죠.

 

전에는 한국 땅에 살면서 주식, 코스닥, 이런 거 있잖아요. 주식 안 해봐서 잘 모르잖아요. 어제 주식시황이 얼마냐, 2095원인가 그래 되어 있어요. 코스피가 그런가. 코스피. 코스닥은 팔백 얼마고. 캐나다에 살면 이거 관심이 없어요. 왜? 캐나다 주식 투자했지 한국 주식 투자 안 했을 거니까. 공간적으로 다른 현실이 돼버리면 현실이 또 다른 현실로 이동해요. 그러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이 돼버린다고요.

 

자,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러분들이 수준이 되니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지금 예수님이 속한 곳이 유대나라죠. 원래 유대나라 라는 게 없어요. 처음에 출애굽 할 때 이 나라의 이름은 이스라엘이지 유대나라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에서 유대나라로 남았다는 말은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이 말이 아닙니까? 그 많은 일을 겪을 때, 말은 쉬워요. 많은 일을 겪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언약이 투입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언약이 투입되었다.

 

노아언약이 투입이 되니까 여기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사람들이 다 죽었죠. 다 죽은 거예요. 노아 있는 데는 비가 안 내렸습니까? 비 왔죠. 다 같이 홍수 맞았는데 노아는 왜 살았어요? 노아의 방주가 언약이 되거든요. 방주 안에서 노아는 산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노아가 살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살려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노아를 하나의 미끼로 사용하신 거예요. 노아는 언약의 증인이 된 겁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하고 똑같아요.

 

피 흘림이 있은즉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마지막 언약, 최종 언약, 새 언약을 증거 하라고 집사님이 이 동네에 터 잡고 살게 된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좋은 땅에 왔다고 하지만-공간, 집사님 참 오래 삽니다-시간, 이런 현실을 증거 하라고 온 게 아니에요. 동감하시죠. 에어컨을 19도까지 올리지만. 지금 에어컨 19도가 문제가 아니에요. 추운 게 문제가 아니고. 이런 현실, 주와 천국에서 함께 있는 현실에 와보지 아니하면 어떻게 피가 죄 사함이 되는지를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요.

 

왜냐하면 언약이 계속 투입이 돼야 하니까. 언약이. 우리는 기존현실이 있으면 그걸로 전부에요. 꼭 일곱 살 애들 같아. 받아쓰기 백점 다 맞아요. 그런데 그 부모는 지금 우리 애가 천재인줄 알고 있어요. 받아쓰기 10문제 백점 맞았다고. 아니, 받아쓰기 10개해서 백점 맞으면 서울대에 들어갑니까? 서울대에 들어가면 계속해서 난제들이 투입되는 거예요. 교과서가 계속 추가가 돼요. 교과서가.

 

하나님이 마지막 언약에 돌입되려면, 그동안 노아언약? 아니에요. 아브라함 언약? 아니에요. 이삭언약? 그게 전부가 아니죠. 야곱 언약? 전부가 아니라니까요. 무슨 언약? 다윗 언약. 끝이에요. 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니까. 다윗 언약의 내용은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은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다 내 것이라는 뜻이거든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그전에는 뭐였는가 하면은 아들이 아니었어요. 너희들은 내 율법을 지키면 아들이 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고요. 내 율법을 지키면. 그게 무슨 언약입니까? 율법을 주는 언약이 무슨 언약? 모세언약이죠. 모세언약.

 

오늘 본문 누가 29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저 혼자 아멘 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포도주, 피로 죄 사함을 얻죠. 이 원칙은 이제 천국 올 때까지 변치 않는 요지부동의 원칙으로 끝. 굳어졌다 이 말이에요.

 

공간이 어디든, 캐나다든 관계없고, 시간이 2019년이든 3019년이든 관계없고, 포도주의 그 원리는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에요. 내가 세운 언약은 세 번째 네 번째.. 더 이상 불필요한 최종 언약을 내가 너희에게 내린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 새 언약에 속한 우리는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 이상 달라질 필요가 없죠.

 

제가 주일 낮에 뭐라고 했습니까? 문간에 피 바르고 다리 꼬고 앉아 있으라 이 말이죠. 뭐 다리 안 올라가요? 다리가 짧아서. 다리 꼬고 우아하게 커피마시고, 홈드레스 입고 앉아있으라 이 말입니다. 이게. 수출규제를 하든 말든, 북한이 핵폭탄을 터트리든 말든 관계없어요. 세종시에 북한 핵이 터져도 관계없어요. 터지든 말든 다리 꼬고 맞자 이 말이죠. 날아와라 내 머리위에. 다리 꼬고 앉아서.

 

왜? 어떤 추가적인 사항이 이쪽 원리를 흔들어놓지 않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원리.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원리에 의해서 어떤 추가적인 역사 사건도 이제는 더 이상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거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거 복음 아니에요? “목사님! 큰일 났어요. 우리교회 불났어요.” 불나도 관계없어요. 교회 불나도 의자 다 태우고 전기 누전돼서 다 날아가도, 지금 이 시간에 우리교회 불이 안 났는지 몰라. 말이 씨가 된다는데. 씨가 되도 괜찮아요. 이미 씨가 된 것이 있어요.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거요.

 

복음을 전하는 우리교회는 절대 누전되고 불나면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불냄으로써 엎어버린 거예요. 불냄으로써. 우리 예수님만 있으면 천국에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대로 잡히거나 체포되거나 고난 받아서는 안 된다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생각이, 체포되고 죽으심으로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인은 뭐냐, 바로 우리가 일단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그 베드로의 현실관이 깨지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새로운 현실로 바꿔치기 된 겁니다. 참, 새 아파트 얻는데, 90까지 살라고 했는데, 갑자기 창문 흔들려가지고 완전히 빈대떡이 되어서 돌아가시면 30명 되는 주위 70대 된 사람들이 얼마나 애곡하겠습니까? 그런데 괜찮아요.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런다고 내가 떨어진다고 해서 피 흘림의 죄 사함이 바꿔 질 리도 없고.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바퀴벌레 안 나오는가 몰라. 괜찮아요. 뭐. 그야말로 최양락이 했던 개그 있잖아요. 충청도 개그. 괜찮아요~ 뭐~ 죽으면 그만이죠. 뭐. 이런 식으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자, 이제 진도 나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있던 세계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유다였습니다. 자, 유다로 오면서 그냥 나라가 바뀐 게 아니에요. 유다 나라에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만 남았다는 특성이 있죠. 왜? 원래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지파가 열두지파잖아요. 열두지파인데 지파가 달랑 뭐만 남아요? 달랑 한 지파 남았어요. 한 지파. 유다지파 남았어요. 그래서 이름이 유다나라에요. 유다지파 중심이라고. 그러면 유다지파인데 그냥 나라만, 땅만 쥐고 있으면 되는가? 아니죠.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율법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을 가지고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죄 사함을 얻으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언급하신 거예요. 자, 죄 사함이 율법 지켜서 죄 사함이 되느냐, 아니면 내 피로 되는가, 한번 두고 보라는 겁니다. 너희들 한번 판단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제자들보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최종 약속인지. 마지막 골인지점이 천국으로 골인되는지. 어느 쪽이냐 말이죠. 율법 지켜서 되는 것이냐, 내 피로 되는 것이냐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피를 흘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제 3의 자리에서 피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있어야 구원받는 자리에서 피가 들어오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행함이 없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 이거는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제 3의 지역은 없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자기한테 의미가 주어지니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현실을 통해서 우리는 옳다, 그르다를 판정한다고요. 이게 내가 만든 법이죠. 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양심의 법이든지 뭐든지. 하루일과를 돌아보세요. 오늘 내가 잘했나, 못했나, 반드시 법으로 자기를 측정하려고 하고, 측량하려고 하고, 시험 치려고 하죠. 오늘 하루는 제대로 살았다. 체크(✔), 오늘 못 살았다. 잉잉잉(ㅠㅠㅠ) 오늘 못 살았다. 나는 잘 살았다.

 

이것은 누굴 만나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은 밖에서 친구를 만나든 어떤 사람을 만났던 집에 오게 되면 뭘 생각합니까? 오늘 혹시 내가 말실수 한 것이 없는지, 앉았을 때 다리 벌리고 앉았는지, 이런 것. 아주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해가지고 저쪽에서 내가 얼마나 못 배운 인간이라고 욕 했을까? 집사람 내외분 이제 사람들 맞이해놓고 돌아간 다음에 둘이 이제 고민합니다. 혹시 복음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복음 아는 사람이 왔는데 우리가 실수한 게 없을까? 에어컨 너무 내려서 춥다고 감기는 걸리지 않을까? 온갖 것 자기 행동의 측정을 다해요.

 

이게 법으로 우리는 둘둘 감겨있어요. 법으로. 근데 그 순간 뭐가 날아갑니까? 피 흘림이 있은즉 죄 사함이 있다는, 그 기쁨이 그만 막혀져버리죠. 막혀져. 그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속한 나라가 뭐냐 하면은 율법이라 이 말이죠. 그럼 율법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유월절이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자기를 참여시킵니다. 유월절은 율법에서 나왔죠. 그러면 사람들의 분위기가 유월절을 지키자. 율법을 지키자. 그 분위기잖아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죠.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 왜 지키느냐? 그래야 누가 좋아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원하는 바다.

 

이렇게 생각할 때 사람들은 이걸 우상이라고 생각했겠어요? 못했겠어요? 생각 못 했죠. 오늘날에 그대로 해봅시다.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나가니까 옳은 일이다. 바르게 한다. 교회에 나가면 누가 좋아한다? 우리 주님이 좋아한다. 이게 율법이겠어요? 율법 아니겠어요? 이게 바로 율법이고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여기에 옛날 바리새인만 욕하지 마세요. 오늘날도 계속 바리새인 못지않아요. 다윗의 전쟁에서 우리가 적이에요. 우리가 주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

 

그러니까 이미 뭐냐, 이미 자리가 구원받아 놓고, 그 다음부터 우리에게 매일같이 나타나는 게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었고 어떤 인간이었는가를 계속해서 발췌하면서 오직 십자가와 피와 그리고 부활의 복음만 우리를 통해서 증거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랑할 게 뭐예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죠. 그냥 문장으로 외워서 자랑하는 것도 있지만, 이거는 실제적으로 경험상 그게 도드라지게 나와서 온몸으로 체험하도록 그러한 일들이 계속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자꾸 우리가 어떤 일을 해치우고 난 뒤에는, 이게 잘했나 못했나를 지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고요. 설교 해놓고 제대로 했을까? 못했을까? 지금 수련회를 앞두고 바짝 지금 졸아서, 바짝 쫀 거예요. 막 변비 되고요. 첫째 시간 뭐하고 둘째 시간 뭐하고 지금 앞뒤로 다 생각하는데, 그걸 이론상으로 하자. 그거는 주께 맡겨야 된다. 이론은 또 오죽 잘 알아. 주께 맡겨야 된다고. ‘그건 내 일이 되면 안 돼. 주의 일이 되어야 돼.’

 

이론이 되지만, 그거는 이론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이론만 주고 실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론과 더불어서 주님이 정답을 갖고 있으니까, 나는 내가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질문한 거거든요. 그럼 답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 내가 질문하면 주님이 답변합니까? 아니죠. 주님이 답변가지고 니 이론이 얼마나 엉터리 이론인지를 현장에서 실감나게 하는 거예요. 부딪히게 하는 거예요. 나를 죽게 하는 거예요. 나를 현장에서 죽게 하는 겁니다. 니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론이 아니고 실감나게 하는 거예요. 실감나게. 옳고 그름, 잘했다, 못했다 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잘했다. 못했다 에서.

 

그래서 어떤 요령도 필요가 없어요. 어떤 지식도, 사전에 공부한 것도, 준비한 것도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 현장성에 빠져들어 갈 뿐이에요. 그 현장성에. 자칫하면 앞에 뭐 자크 내려가 있을 수도 있고 정신 못 차릴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피가 죄 사함을 얻는다, 라는 이 원천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 피가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은 어디에 계속 가리어졌습니까? 나는 옳았을까? 법적으로, 율법적으로 바르게 살았을까? 이것을 앞장세우는 바람에 이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이 가리어지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는 그걸 용납 안 하죠. 계속해서 자리 바꿉니다. “니는 내가 피를 흘릴 정도로, 이 정도로 엉망이었어.”라고 내세우면서, 죄 사함도 같이 동반되게 큰 은혜로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피 흘리고 죄 사함 받는 그 현장에서 너는 결국 잘난 사람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게 무슨 나라냐, 이게 바로 유다나라에요. 유다나라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이스라엘에 그동안 문제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 있었고, 그 문제의 개입은, 들통 나는 것은 바로 언약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언약 때문에.

 

한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뭡니까? 의롭다함을 얻었죠. 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그 사건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올 때까지 이어지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게 오늘 본문에서 포도주로 난 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실력이 되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되기 위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까?

 

우리 갈라디아서 3장 봅시다. 여기 아브라함으로 이방이 복을 받고 믿음으로 복을 받잖아요. 행함이 아니고 의로움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죠. 3장 8절, 9절에. 그러면 3장 8절, 9절 말고 갈라디아서 17절 보세요. 17절. 사백 삼십 년 후에 율법을 주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의 언약은 계속 가면서도 거기를 보여주는 율법 주는 사건이 나오죠. 이게 오늘날 성도가 사는 모습이 아닙니까?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의 원칙이 가죠.

 

가면서 우리는 고요히 갑니까? 스카치테이프로 묶어서 갑니까? 계속 우리 인생에 사건이 벌어지잖아요. 그 사건은 뭐냐, 율법사건인 거예요. 계속 양심의 법이 안 죽고 살아있는 거예요. 나는 바르게 살았을까? 애 교육은 제대로 했을까? 아이고, 내가 일을 잘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지. 계속 판정하고 내가 나한테 시비를 걸고. 그 다음에 뭡니까? 분발하라는 거예요. 분발. 앞으로 이런 실수를 하지 말고. 앞으로 잘하고. 계속 나한테 분발 시키는 거예요. 분발을.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관심사가 괜찮아진 나에게, 개선시킨 나에게 집중을 하겠죠. 그것이 나의 현실을 괜찮은 현실로 계속 이어나가려고, 남한테 자랑거리하려고, 나 이렇게 살았어. 잘 살았어. 십자가 자랑 대신 내 자랑하고 싶죠.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오직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니가 건전하게 살아서 해결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게 하시는 원인이, 내가 이런 엉터리 같은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게 구원받았기 때문에, 새 언약의 피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우리의 본성은 율법주의적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겁니다. 돌아서서 또다시 감사하시고. 이걸 우찌! 우찌! 알았을까? 우째도 아니에요. 우찌 알기는? 하나님의 선물 받아서 알게 됐죠. 하나님의 성령 받아서 알게 됐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세상을 그렇게 보게 하옵소서. 세상이 물바다가 된 것을 본 것처럼 불바다 속에 있음을 저희들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거기에서 탈출한 것은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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