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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7 21:36:29 조회 : 259         
사무엘상 52강(무한), 마태복음 114강(현장성) 19082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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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9-01 21:49 
대전-52강 사무엘상17장12절(무한)20190827-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7장 12절입니다. “다윗은”이라고 되어 있죠.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는 그 대목에 있습니다. “다윗은” 세상에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일들이 A라는 사건, B라는 사건, C라는 사건, D라는 사건... 줄줄이 많은 사건들이 무관하게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관해보이죠. 무관하다가 중도에 A가 B하고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그렇죠.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A라는 여자와 B라는 남자가 만날 때, 둘이 쭉 아가씨로 총각으로 살다가 만나잖아요. 만나죠. 결혼했다가도 이혼해서 갈라서기도 하고 그렇죠. A라는 사건이 계속 가는 거예요. 그리고 결혼이 계속되게 되면 A라는 것이 계속 유지가 되지만, 같이 한 가정을 이루어서 가지만,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가지고 A라는 사건이, B라는 사건이, 이것이 섞이거나 사라지거나 소멸되거나 그런 게 있습니까? 없죠. 그냥 가까이 접근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부부사이라도 아주 합치될 수는 없죠. 생각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다른 남자보다, 다른 여자보다는 가까운데, 그래도 딱 내 생각과 일치된다는 생각은 못 가지는 겁니다.

이게 우리 생각은 둘이 만나서 부부가 됐으면 생각이 하나일 것 같은데, 그건 우리 생각이죠. 자아의 생각은 그래요. 우리 생각, 나의 생각은. 하나의 예를 들면 둘이 결혼해서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자식 생각과 내 생각이 같을까요? 그게 또 아니에요. 분명히 내 몸에서 태어났는데, 내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나하고 생각이 또 달라요. 자식은 어디서 태어나느냐, 제로(0)지점에서 태어났어요. 없었다가 생긴 그 지점. 둘이 결혼해서 2년 만에 애가 있다. 3년 만에 애가 있다. 그 지점은 제로지점이에요. 제로지점인데 자식이 태어났다 이 말이죠.

그러면 자식은 부모의 생각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엄마아빠의 생각 속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식은 독자적으로 자기 생각을 또 따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걸 셀프 스토리self story라고 이야기를 해요. 스스로 자기 이야기에 충실 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생각보다 먼저 우선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인간의 몸이 우선돼요. 몸. 우리는 나중에 나오는 내 생각이 몸을 억지로 관리하려고, 통제하려고 아주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근데 제가 방금 한 용어대로, 부사처럼 이게 뭐냐 하면 ‘억지로’에요. 억지로. 억지로 하는 거예요. 자기 몸을 자기가 억지로 통제하는 겁니다. 마치 자기 몸을 하나의 낙타나 말이라고 치고 자기는 거기에 올라타고 있는 주인노릇을 해가지고 자기 몸을 채찍질하고 그렇죠. 소위 성경에도 그런 게 나와요. 경건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학대 한다는 이런 이야기가. 그래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몸의 주인이 따로 있는 거예요. 몸의 주인이. 나의 부모가 A라는 사건, B라는 사건을 가졌지만, 나도 자식처럼 내가 태어난 제로지점이 있을 게 아닙니까? 나의 제로지점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제로지점이 있고, 그 지점에서 내 자아가 생겼고, 그 자아가 평소에 살면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는, 인간의 해결방법은 뭐냐 하면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냥 단박에 죽어버리든지, 이러고 싶은 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 나오죠. 제가 욥기 3장을 언급했어요. 욥의 몸이 괴로우니까 욥이 내놓은 대책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습니다. 아예 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여전히 욥 생각에는 몸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냐 하면은 내가 우선이라는 겁니다. 몸과 나 중에서 몸보다 뭐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더 소중하다.

그런데 이 내가, 나라는 인간이 왜 잘못됐느냐 하면은 몸은 태어난 지점이 있고 죽는 지점이 있는데, 나는 한번 생겨버리면 영원한 것처럼 그렇게 여기게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한이라고 합니다. 무한이라고 해요. 무한. 인간의 모든 거짓된 특징이 무한을 추구한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니가 정녕 신처럼 되리라. 신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생각에는 무한이에요. 무한. 무한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몸은 뭐냐, 무한이 아니고 유한이에요. 몸은 내가 없을 때가 있었고, 내가 죽을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유한을 유한으로 보면 되는데, 우리의 자아는 자꾸 유한을 무한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아까 부사로 뭐라고 했습니까? ‘억지로’ 오늘 제목을 ‘억지로’라고 해볼까? 모든 게 내 몸을 가지고 이 대전바닥이나 대구바닥에 살면서 억지가 아닌 날이 한 날도 없어요. 전부 다 억지에요.

‘아이고, 어머니 좀 오래 사신다. 좀 알아서 가시지.’ 왜? 내 몸이 내가 불편하잖아. 내가. 내가 효도를 해도 어떻게 무한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내 할 일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무한히 해요. 그런데 엄마는 무한한 효도를 요구하는 거예요. 왜? 엄마는 몸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가, 돌아선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왜 전화 안 하냐고 이래 나오는 거예요. 정말 미쳐요. 미쳐. 아까 오후 두시에 봤잖아요.

자식이 돼가지고 뭐 사달라고, 뭐 사달라고 해서 사줬다 이 말이죠. 태권도 보내달라고 해서 태권도 보내줬어요. 오토바이 사달라고 해서 오토바이 사줬어요. 공부하기 싫다, 드럼치고 싶다고 해서 드럼 치게 해줬잖아요. 조국 딸처럼. 공부 때려 치고 드럼 하는 이 애를 어디에 보내려고 온갖 수작을 다했잖아요. 조국이. 왜 자식한테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자식은 몸이 아니고 자식은 따로 자아가 생겨가지고 자기 몸이, 이 머리가 안 되는 거예요.

어지간하게 머리가 안 되는데 의대 가려면 다 외워야 하잖아요. 라틴어, 독어부터 외우려면 골치 아픈 거예요. 일주일마다 한 번씩 시험 쳐야 되고.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한국에서는 의대에 갈 실력이 안 되는 애들이 헝가리에 가면 공짜로 넣어준다고 해서 공짜로 들어갔거든요. 근데 헝가리에서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거든요. 1학년, 2학년 넣어줍니다. 그래놓고 3학년 때는 다 유급시켜버립니다. 실력이 없다고.

그러니까 부모들은 헝가리에까지 가서 의대에 보냈는데 졸업을 못하니까, 의사 자격증이 안 나와요. 헝가리 의대는 입이 벌어지죠. 장사가 잘 됐으니까. 그 나라는 돈이 없으니까. 허영심 많은 한국, 일본, 중국, 동양 애들을 봐가지고 의대 운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1, 2학년 때 매일 시험 쳐서 안 되니까, 다 쫓아내버리죠. 자격이 안 되니까 무슨 인간의 몸을 다룹니까? 

그러니까 이게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의 문제가 뭐냐 하면 ‘억지로’에요. 억지로. 조국의 문제는 억지로입니다. 니만 억지로냐? 우리도 억지로다. 우리도 억지로인데 왜 니만 됐나? 그게 억지로가 남의 억지로를 이겼어요. 고위층의 억지로가 서민층의 억지로를 이겨서 서민층이 화가 난 거예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우리의 몸입니다. 몸인데, 몸이 뭔가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이걸 공식하나 내봅시다. 공식. 공식하니까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세요. 공식은 ‘몸+α’입니다. 알파α, 이게 바로 여분의 것이에요. 여분의 것 또는 잉여, 남아도는 것. 이것이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몸은 수상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들풀보고 너 수상하다고 이야기합니까? 안하죠. 참새 너는 음흉하구나! 이런 소리 안하죠. 코끼리 너는 왜 거짓말했어? 코끼리보고 거짓말했다고 안하죠. 그러면 음흉하다, 수상하다, 거짓말한다, 다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사람보고 하는 거예요. 사람보고. 사람보고 하는 거예요. 사단을 코끼리가 낸 게 아니고, 사자가 낸 게 아니고, 인간이 낸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것이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유한으로, 별이라든지, 뭐 해바라기, 코스모스 다 유한입니다. 인간도 유한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인간의 시작점은 뭐냐, 흙입니다. 흙은 인간이 아니에요. 흙+알파α, 생령을 집어넣으니까 뭐가 나왔습니까? 인간이 나오죠. 그래서 이 알파가, 하나님이 주신 잉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떠나버리죠. 떠나버리면 인간은 어디로 환원이 되느냐 하면은 인간에서 흙으로 도로 환원이 됩니다. 그냥 환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사무엘상 17장 이야기입니다.

자, 인간이라고 여겼지만 인간은 뭐다? 인간은 몸이 아니고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유한에 만족할 인간이 아니고, 만족하는 유한이 없어요. 아무리 가지고 가져도 어디를 지향한다고 했어요? 무한을 지향하는 겁니다. 무한. 무한을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절대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의 심리 가운데 그런 것이 있어요. 여자는 아니지만. 니가 나보다 더 예쁘냐? 내가 그냥두지 않으리라. 뭐 이런 것. 길 가다가 저게 이쁜데 무슨 화장품을 발랐지? 그 여자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화장품을 사용했거든요. 낯선 남자에게서 내가 아는 향기가 난다. 옛날 cf에 그런 게 있죠. 김선아가 나왔던. 김선아가 원래 cf모델 출신이거든요. 낯선 남자에게서 자기가 쓰는 향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그 남자의 여자가 내가 쓰는 향수를 똑같이 쓰나? 뭐 이런 거죠. 

인간은 유한에서 무한을 추구하기 때문에, 무한이 유한인 몸을 굉장히 강압을 하고 힘들게 만들어요. 시달리게 만드는 거예요. 사람이 몸이 굶어서 교도소에 가고 죄 짓는 경우는 작아요. 그야말로 장발장 같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빵집 유리창 깨고 하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니가 나 무시해?” 이것 때문에 모든 사건의 99퍼센트가 니가 나 무시해?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드럼이나 치지 뭣 하러 의대에 갑니까? 의대에 가야 조국의 가문을 살리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모습이 딱 나왔죠. 딱 나온 거예요. 왜 교회에 갑니까? 교회에 가는 이유가 뭐예요? 옛날에는 교회에 안 갔어요. 어디에 갔어요? 무당 찾아 갔어요. 무당은 뭐냐, 신과 지상세계와 연락책이거든요. 연락책이 무당이잖아요. 근데 무당이라는 조잡한 그런 형식에서 이제는 세계화된 무당을 찾아가는 거예요. 뭐 무당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에 교회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아끼고 나를 될 수 있는 대로 무한한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을 받으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그러한 것을 지향성에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몸이 가만두지 않죠.

오늘 첫 번째 강의 사무엘상 다윗과 골리앗 전쟁하면서 서론이 길다고 생각이 들지만, 이 서론은 좀 길어야 돼요. 이 서론이 길지 아니하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다윗이 나왔죠. 사무엘상 17장 12절에 “다윗은”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는 셀프 스토리self story, 내 이야기이고 싶어요. 내 이야기. 사람들이 다윗이든 예수님이든 뭐 어떤 이야기든 딱 궁금한 것은 나의 역사, 나의 이야기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괜찮은 인간의 어떤 스토리, 인생의 스토리가 있으면 내가 그것을 흉내 내게 되면 동일한 효과를 내가 얻어 챙길까 싶어서 영웅담이라든지 그런 것을 찾는 거예요.

우리 어릴 때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런 동화 보잖아요. 신데렐라 인생이 한방이잖아요. 인생 뭐 있어? 한방이지. 한방이 대박이 나면 인생이 풀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신데렐라 아닙니까? 그 한방을 위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보이즈 비 앰비셔스, Boys Be Ambitious가 아닙니까?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한방. 언젠가는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돈 되는 그런 남자가 길거리에서 스카우트 할 것이다. 뭐, 길거리 스카우트 할 수 있죠. 계약직으로 입사했는데 부딪혀서 커피 흘려가지고 만나는 그 이야기. 전부 다 드라마는 한방입니다. 그 한방에 출생의 허접함을 이겨내잖아요. 출생의 비밀까지 이겨내요. 나중에 “오빤데! 배다른 오빠!” 이런 경우가 참. “우리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런 거.

다윗이야기를 우리가 수입하려고 하는데, 성경의 이야기는 이렇게 됩니다. 다윗이야기가 등장하면 우리이야기는 접어야 돼요. 접을 때, 뭘 접어야 하느냐 하면 나의 신 됨을 접어야 합니다. 나의 영원함을 접어야 합니다. 다윗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걸 접으려면, 뭐냐 하면은 여기서 교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체.

자, 다윗이야기니까, 여기 다윗이야기는, 셀프스토리는 곧 누구 셀프스토리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기이야기죠. 하나님의 자기이야기를, 나를 유지하는, 견지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여기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어오려면 내 셀프스토리는 파괴되어야 해요. 있으나마나가 되어야 돼요. 김정은이 미사일 한방을 나한테 쏘아야 돼요. 완전히 박살나버려야 해요. 내 인생에 어떻게 많은 것을 투자하고 애지중지했더라도, 그 애지중지가 다윗이야기 앞에, 또는 하나님이야기 앞에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쌓아놓은 모든 바벨탑이 다 허물어져야 하고 무산되어야 돼요.

그 다윗이야기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다윗이야기 속에 십자가이야기가 들어있어요.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나의 세계는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내 셀프스토리가 무의미한,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애썼던 내 인생이 예수님 한방에, 십자가 한방에 끝. END. 끝났어요. 세리나 창기가 자기인생, 자기셀프스토리 그거 붙들려고 간수하고 빛내려고 하는 인간들보다, 세리와 창기는 바닥인생이죠. 이거는 내세울 것이 전혀 전무한 거예요. 없는 거예요. 굳이 내세울 것이 없는 인생.

꼭 지금 옆에 털갈이 하고 있는 개 같아요. 차라리 개가, 무한을 포기한 개가 더 인간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주여, 개처럼 되게 하옵소서.” 왜 그런 기도를 안 합니까? 자존심도 없고, 그냥 천당 갈 생각도 안 하고. 줏대가 없어요. 개는. 아무 줏대가 없죠. 물론 자존심 있다, 줏대가 있다고 하지만 그거는 너무 인간하고 가까이하다보니까 인간물이 들어서 그래요. 오염된 개에요. 개 같지도 않은 개. 그건 개가 아니고 위험한 개에요. 진짜 개는, 순수한 개는 인간들이 청문회 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는 개. 청문회 할 때 국회의원 다 치우고 개를 이쪽에 다섯 마리 이쪽에 다섯 마리 놔두면 좋겠어요. 깔끔하게.

독재자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을 개로 보고 유일하게 자기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 독재자에요. 김정은이죠. 이걸 수련회 때 예외라고 했어요. 예외. 그런데 예수님은 예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비-전체. 전체 속에 아예 들어와 버렸죠. 예외, 멀찍이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가 아니고, 개만도 못한 속에 같이 개만도 못한 같은 처지로서 들어와 버렸어요. 이게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입니다. 이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이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전부 다 뭐냐 하면은 자아가 상상한, 그걸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념이에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고 싶거든요. 되고 싶은 것에 누가 먼저 있다고, 누가 먼저 가 계시다고 상상하고, 거기서 내 삶에 활기를 주고 목표가 될 수 있는 대상, 그걸 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신은 거기에 계시고 내가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오셨어요. 비천한 몰골로. 우리가 외면할 정도로. “나는 그런 타입은 내 타입이 아닙니다.”라는 거예요. 그런 신은 내 타입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타입은 뭐냐, 나를 신으로 만들어주는 신이 좋은 타입이에요. 나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타입이 내가 믿고 싶은 타입이지, 나를 저 밑에서 잡아당기는 하나님은 내 타입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내가 비참한 게 싫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욥기 3장은 왜 나온 거예요? 욥기 3장에. 욥기는 왜 있는 겁니까? 하나님 때문에 마귀가 왔고, 마귀가 밀어내니까 욥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좋았습니다. 태어나기 전까지 가게 하옵소서.” 제가 자꾸 서론에 머무는데, 제가 본론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본론이 참 어려워서 그래요. 그래도 어려워도 들어가기는 들어가야 하니까.

자, 몸과 자아를 분리시켰습니다. 자아는 무한, 신. 몸은 이미 흙이에요. 이미 흙이라니까요. 이미 흙이에요. 여러분 인간보고 흙이라고 하면 이게 명예훼손죄로 걸립니까? 안 걸리죠. 인간보고 흙이라면? 왜? 흙이니까. “당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나쁜 말이 아니잖아요. 당연한 거잖아요. 죽어 가면 뭐가 되죠? 흙이 되죠. 그러니까 “당신, 흙이 되어갑니다.” 이게 무슨 욕이에요? 지당한 팩트지. 욕이 아니다 이 말이죠. 욕이 아니죠. 그걸 명예훼손 걸고 그러면 안 되죠.

근데 이 자아를 주께서는 회수하는 겁니다. 이 자아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선악과 들어있으니까 이거는 나쁜 자아거든요. 신이 되려고 했다 이 말이죠. 진짜 자아는 어디에 들어 있느냐 하면은 몸에 부합이 되어줘요. 이 몸에 부합된 자아일 때, 그 자아가 몸에 합당한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몸의 자아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아라는 것을 인식하는 거예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피조물에게는 뭐가 없을 거예요? 인생의 주도권이, 피조물이니까, 창조된 거니까, 창조되었다는 말은 지금 창조주가 살아있다는 뜻이거든요. 창조주가 우리를 창조해놓고 돌아가셨어요? 그게 아니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는 분이 주도권을 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악마가 주도권을 쥠으로 말미암아, 완전 창조주는 이 몸의 주도권이 현재 니가 이 몸이 살아있다는 것으로 나가서는 그게 참된 자아, 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대로 나가버려요.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 몸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몸을 지닌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어요. 실제로 그것도 재수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내가 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죽고자 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죽음이 창조에요. 죽음이 왜 창조냐 하면은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내 백성을 위해서 죽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 죽음의 효과는 오직 누구한테만 해당이 됩니까? 내 백성한테 해당이 되겠죠. 그러면 누가 성도냐, 누가 성도 아니냐 하는 것은 오직 죽음만 전파해야 되죠.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전파해야 돼요. 죽음을. “죽음이 나를 살렸군요.”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그래서 나의 삶보다 뭐가 더 소중하다? 나의 살아있는 셀프스토리보다 뭐가 더 소중한 거예요? 예수의 죽으심이 더 소중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무것도 알지 않는다. 아무것도, 라는 이 말은 모든 성경구절들이 어디에 모아서 해석이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만 도출되는, 내가 뭐 믿음이 좋다는 이런 것 말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왜? 그 분만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은 죽음으로 나타나거든요.

죽으심으로 나타나는 해석만이 진짜 해석이에요. 다른 해석은 안 됩니다. 뭐, 이거해가지고 교회 복 받아서 부흥됐다. 이런 해석은 안 됩니다. 교회가 있다, 없다가 아니고 죽으심이에요. 죽으심이, 말이 재밌어요. 죽으심이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것은 아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살아있고, 우리는 그 죽으심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죽지만 산사람이 돼요.

주의 일은 뭐냐 하면은 반드시 내 죽음을 잡아당겨서 들어갑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님은 내 안에서 비로소 살아있어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전제조건이 뭡니까? 내가 이미 죽은 자, 흙이며, 이 몸은 죽어야 될 몸인 것을 인정하는 순간, 다시 말해서 나의인생, 셀프스토리가 흐지부지 되는 순간, 주님의 백성에 대해서 꾸준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진도를 나가봅시다. 그거하고 이 이야기하고 다윗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나오겠죠. 중요합니다. 자아가 헛방이에요. 이거는 헛방이에요. 몸에서 여분이 나오는데, 여분이 뭔가 수상해요. 뭔가 음침해요. 악마적이라서 이 몸을 누구 몸으로 바꾸느냐 하면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져야 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이 땅에 인간의 죄의 몸으로 오신 거예요. 자기백성에 한해서.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자아가, 자아로 인하여 몸이, 자아에서 몸으로 가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자아와 몸이 만남으로 죄가 자꾸 생산이 되어야 합니다. 생산되어야 이 몸을 처리하여야 할 정당성이 확보가 되는 거예요. 죄의 값은 뭡니까? 사망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죽는 거예요. 어떤 철학자도 우리 인간이 왜 죽는지를 몰라요. 철학자들이 아무리 이론을 내도, 과학적 이론을 내도 왜 죽는지를 몰라요.

담즙은 어떻게 고치는가, 갑상선은 어떻게 고치는가, 이건 되는데, 고쳐놔 봐야 죽는 이유를 의사는 몰라요. 부산의학전문대도 몰라요. 장학금 받아봐야 몰라요. 왜 죽는지를 모른다고요. 이 말은 살아있는 내가 왜 의미 없이 살아있는지 이유를 몰라요. 헛되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중들이 헛되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헛된 이유를 몰라요. 왜 헛된데요?

제가 어제 여수강의를 했거든요. 기타강의에 보면 나옵니다. 여수강의. 강의하면서 거기에 계신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누가 당신을 건드리면 기분이 나쁘죠? 왜 기분 나쁘죠? 기분 나쁜 이유를 한번 대보세요. 문제는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왜 기분 나쁜지. 기분 나쁜 것은 맞는데 왜 기분 나쁜지. 그러면 누가 당신을 죽이면 기분 좋습니까? 당연히 기분 나쁘죠.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죽이면 하나님에 대해서 기분 나빠하겠습니까? 당연히 기분 나쁘죠.

근데 기분 나쁘다고 하면 믿음이 없다는 소리 들어가지고 또 인생 힘들게 만들까싶어서 또 아양을 떨어야 될 게 아닙니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사실 뜻이 뭡니까? 그냥 유한을 가지고 무한을 행세한, 모방한 거예요. 이게 마귀 짓이거든요. 유한이면 유한으로 이렇게 인정을 해야지, 어떻게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갑니까? 세상만사가 어떻게 내 뜻대로 다되어집니까?

여수에 가면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어요.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는데, 너무나 유명하고 요리가 너무 좋아요. 토속적으로. 문제는 주차장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주차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장사를 안 하면 돼요. 이게 인간의 모순이에요. 인간의 모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이 꼭 죽어야 돼요. 남이 나보다 쳐져야 되고. 이 경쟁 사회에서. 그걸 제로섬zero-sum이라고 하는데, 한쪽이 플러스가 되면 필히 한쪽이 마이너스가 되는 거예요. 한쪽이 합격하면 한쪽이 불합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아와 몸의 결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몸을 죽이되 그냥 죽이지 않고, 죄와 결탁시켜서 이 몸을 제거하는 작업을 해주시는 거예요. 제거하는 작업. 이걸 오늘 사무엘상 17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게 전쟁이에요. 다윗과 지금 누구하고 전쟁을 하죠? 골리앗과 전쟁하죠. 그런데 이 다윗이 어른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지만, 남들 보기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죠. 블레셋의 대표자는 골리앗, 그럼 이스라엘의 대표자는 그 당시에 왕이 있어요. 사울이 대표자가 되어야 하는데, 사울이 대표자를 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다윗이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은 이미 골리앗의 전쟁에서 이미 승리한 것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패배자가 되는 거예요. 패배자.

지금 제가 하는 취지를, 중요한 대목이니까 이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로마서 5장 12절에 읽어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다 이 말이죠.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사망의 왕 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죄의 왕 노릇, 사망의 왕 노릇, 그게 17절에 나옵니다. 누가 읽어볼까요?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왕 노릇 한다고 되어 있죠. 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이 뭐냐 하면은, 개인이 사적으로 어떻게 착하게 사느냐, 바르게 사느냐, 그거 접자. 우리 그거 접자. 내가 옛날에 이런 실수를 했고 이런 죄를 지었다. 아, 그거 일단 접자. 접고, 하나님의 그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쪽의 대표자가 뭐냐 하면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간 니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고, 인간을 누가 지배하고 통제하고 통솔했고 누가 왕 노릇 했는가를, 니가 그 왕을 내세우는 식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죄가 나에게 왕이 되고 그 죄에 대해서 우리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내 욕망의 왕 노릇을, 내가 거기에 대해서 반항할 수 있는 자질이나 그런 역량이 없습니다. 교회 가서 빌어도 소용이 없어요. 전부 다 교회 가서 비는 것, 행동하는 것, 내 욕심과 욕망에서 나온 겁니다.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몸+여분의 것’이에요. 제가 아까 욕망의 방향은 어디라고 했습니까? 욕망의 방향은 무한이에요. 무한.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되니까 주님께서 관여하사, 신이 되고자 하니까, 신의 특징은 안 죽어요. 이게 불멸성이 있어요.

그런데 진짜 그때는 계시를 모를 때고, 계시고 딱 오고 보니까, 아, 우리가 신이 되고 하는 그것이 나를 죽이는구나! 그게 지금 우리는 죽이기 전에 벌써 죽음으로 질주할 수밖에 없고, 그 자체가 이미 죽은 상태구나! 사망이 왕 노릇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죽은 상태라고 제대로 지적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이래서 죽는다고 하는 것만 복음일까요? 아니에요.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뭐가? 하나님의 의가. 이쪽의 대표자가 인간이 아니고 악마라면, 죄라면, 사망이라면, 저쪽의 대표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사적으로 남한테 도와주고 착한일하고 뭐 훌륭하게 살고, 그거는 구원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고 상관도 없는 짓이에요. 없는 짓인데, 마귀가 니가 바르게 해야 한다고 왜 자꾸 독촉하는 겁니까? 기분상 이렇게 바르게 착하게 살면 어느 신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그렇게 내가 느끼도록, 배후에서 마귀가 그런 식으로 거짓된 인생을 평생 살도록 나를 그렇게 뒤에서 채찍질해온 거예요. 참, 실수했다고 무릎을 치고 잘했다고 우쭐대고. 그렇죠. 전부 다 청문회 열어볼까요? 까발려볼까요? 도대체 믿어야 할 것은 안 믿고 자기 행함을 믿어요. 내가 예수 믿었다. 십자가 믿었다. 전부 다 하는 짓이 내가 믿었다. 내가 행했다. 좀 빠져 도! 안 빠져요. 우리가. 

대표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범죄 한 그 모든 정황을, 이 사태를,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 너네 말고 한 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문제에서 해결되고 그 죄의 왕 노릇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그 벗어났을 때의 예수님의 행하심이 있잖아요. 그 행하심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내 의가 아니고 주의 의가, 아담의 죄가 나를 죽였듯이 주의 의가 있는 한 나는 지옥가고 싶어도 못 가는 신세. 지옥이 고향인데,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지난 오전설교에서 했거든요. 룻하고 오르바가 대조적이에요. 오르바는 자기 남편 죽고 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갔잖아요. 룻은 가고 싶어도 가면 주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거예요.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고향 바꾸기. 출처 바꾸기. 태생 바꾸기.

따라서 이거는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인간의 본질은 전쟁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아요. 인간은 누가 나를 건드려줘야 해요. 전쟁을 하는 순간, 주님께서 무슨 조치를 하셨는가, 내가 안 되는 것을 다 이루셨거든요. 완료입니다. 완료. 첫째 강의 제목을 완료로 하고 싶어요. 완료입니다. 사울이 못한 것을,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 어느 누구도 못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에요.

전쟁하기 전에, 다윗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패배되어 있어요. 여기 골리앗은 큰소리가 막 나오는 거예요. “이 비겁한 머슴아들아 나오너라!” 막 이런 식으로. “우리 일대일로 붙자! 남자끼리. 전쟁할 거 뭐 있노? 손해만 나니까 일대일로 해가지고 이긴 팀이 다 먹자. 이긴 쪽이 다 먹자. 몰빵하자! 콜?” 막 이런 식으로 놀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용기가 없나? 인간들아!”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왜 겁을 냈습니까? 이걸 묻고 싶어요. 왜 골리앗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까? 아까 전에 질문한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 당신은 누가 건드리면 기분 나쁩니까? 하고 똑같은 거예요. 답변은 뭡니까? 우리의 본성이니까 그렇죠. 무조건 나를 건드리면 나는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본성이 있어요. 하나님 건드려도 우리는 신경 안 써요. 근데 나를 건드리면 내가 신경질 나요. 왜? 하나님보다 내가 더 소중하니까.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비교하는 거예요. 진정 소중한 것이 뭐냐, 우리가 진짜 소중한 것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소중한 것을 끊임없이 이걸 가리고 있구나. 치워라! 그거. 되도 않는 것을! 치워야 되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왜 골리앗을 무서워하느냐에 답변을 드리면 골리앗이 등치가 크거든요. 등치가 커요. 답변이 별로 어렵지 않죠. 왜 등치가 큰 게 무서운가 하면은, 이미 이스라엘이 등치가 큰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 보통 사람은 등치가 1미터 70센티미터라면 골리앗은 3미터거든요. 그러면 1미터70에 비해서 3미터는 1미터 70한테는 뭐로 받아들여지느냐 하면은 무한으로 받아들여져요. 무한으로 여겨지는 겁니다. 무한으로.

지방대학 학생한테는 서울대학이 무한으로 여겨져요. 서울대학 학생한테는 의대학생이 무한으로 여겨져요. 세상에! 그 어려운 단어를 어떻게 다 외워요. 의대 1,2학년 해보세요. 정신없습니다. 외울 단어가 수천 개가 돼요. 고둥학교 때 그렇게 공부했으면 천재 다 됐을 거예요. 그걸 다 외워야 해요. 일일이 그것도 색다른 용어. 그것도 단어가 짧은 게 아니라 긴 용어. 그걸 다 외워야 돼요. 그걸 다 외워야, 그 다음에 재료가 되어야 재료를 엮는 원리구조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을 철저하게 해부해야 되니까. 나이 많아서는 의대공부 못해요. 머리가 안 돼서. 한창 파릇파릇 할 때 의대공부 하잖아요.

170한테 296.8되는, 약 3미터가 넘는 엄청난 키는 비상적(어떠한 한도나 한계를 뛰어넘어 벗어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죠. 비상적이고 초월적이죠. 거인족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거인족을 두신 이유를 알겠죠.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 잠재력과 능력의 밖에 있을 때, 이거는 마치 뭐냐, 우리의 소망을 미리 현실화시킨 신 같은 존재에요. 신 같은 존재. 목사의 강대상이 높은 것은 바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내 기도해야 소용이 없어. 의인의 기도만이 간구를 들어주는 기도야. 의인이 누구냐, 목사가 기도해줘야 되요. 그래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차 샀는데 교통사고 나지 않게 차 대가리에다가 기도해주세요.” 이렇게 하는데, 물론 목사는 그게 또 솔찬히, 꽤 많이 수입이 돼요. 수입이 된다고요. 

전쟁이 초월적이고 무한한, 죄 된 인간이 무한을 선망하는, 무한히, 힘센, 나보다 위대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그리고 그것만 있으면 나는 내 소원과 욕망을 달성할 것 같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자진해서 고개를 숙이죠. 그렇죠. 이 세상이 그렇잖아요. 힘센 것, 돈 많은 것, 권력 있는 것에 대해서.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어디에 있어요. 돈으로 다 되죠. 재벌 3세가 까불락까불락 거리는 이유가 뭡니까? 변호사보고 반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니 돈 보고 온 우리 집 하인이 아니냐?”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이런 세계와 전쟁을 벌인다는 말은, 다른 식으로 이 다윗의 세계는 구성되고, 운용되고,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윗의 세계가 뭐냐, 이게 바로 천국이고, 이쪽, 골리앗의 세계는 뭡니까?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이 되죠. 전쟁이 천국과 지옥의 전쟁을 다윗과 골리앗을 대변해서 대표해서 보여준 거예요.

자, 주님께서 다윗의 세계가, 주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니까, 다윗에게 일어났던 그 상황을 주님이 그대로 몸소 했고,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했던 또는 다윗이 있던 상황을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자기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그걸 제공해버리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오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이름을 풀이하면 뭐냐 하면은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백성을 죄에서, 아까 죄는 내가 짓는 죄는 죄가 아니죠. 현재 왕 노릇하는 이 전체가 죄예요. 크고 돈 되고 위대하고 하는 그것을 선망하는 것이 죄다 이 말이죠. 그 세계에서는 통용이 돼요. “아이고, 부러워라! 골리앗. 부러워라! 골리앗.” “니 취직 어디에 했노?” 추석이 되면 젊은 애들 혼나죠. 결혼은 했나? 취직은 했나? 언제 장가갈 거야? 애인은 공부 잘한대? “취직은 했나?” “이번에 대기업에 했습니다.” “아이고, 대기업!” 대(大)자에요. 대(大)자. 큰 거. 대기업이에요. 대기업. 골리앗이 아닙니까? 골리앗.

대기업의 특징은 안정성이 있다는 것. 평생을 몸 바칠 수 있다는 것. 연봉이 4천만 원이라는 것. 중소기업은 연봉이 2천만 원이에요. 반값이에요. 반값. 왜 반값이냐, 대기업에서 하청 받았으니까 반값이죠. 중간에서 떼고 가니까. 뻔한 거잖아요. 대기업 되는 순간 다른 기업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냥 대기업 못해가지고 뭐 노끈공장해서 돌리고. 광산김씨처럼 노끈공장해가지고 나도 언젠가는 내 아들이 스타가 될 거라는 것을 기다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성경에서 왜 다윗이 등장하는가를 이제는 아시겠죠.

이 세상이 경쟁입니다. 우리가 친숙하고 익숙한 이 세상이 계시의 세계에요. 주님께서 이 세계를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다윗은, 다윗을 쳐야 되겠죠. 다윗의 세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다윗의 특징은, 다른 말로 하면 다윗의 무기는 뭐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인간 대 인간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대 인간의 전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지옥 속의 인간들의 발상에서 나왔죠. 참된 하나님은 소년 다윗,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저 비리비리하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그 거인 골리앗에 비해서, 골리앗은 어른이죠. 키 크죠. 소년은 미성숙하잖아요. 소년이니까. 어른은 아니다 이 말이죠.

무기는, 골리앗은 칼 들고 방패 들고 완전무장하고. 이쪽은 뭡니까? 다윗은 비무장이다가 방탄복도 안 입었어요. 돌멩이 들고 나와요. 돌멩이 들고. 근데 이 돌멩이의 의미가 뭐냐, 이 골리앗을 뭐로 보느냐,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뭐로 봅니까? 하나의 짐승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뭡니까? 유일한 인간이죠. 인간이 짐승 잡는 거예요. 왜 그런 안목은 우리한테 없습니까?

이 말은 복음이 안 통하거든 말 섞지 마세요.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 안 통할 때는. 갑자기 걱정이 되죠. 이혼을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혼해도 마찬가지에요. 같이 있어도 이혼이냐 진배없으니까. 괜찮아요. 구태여 헤어질 생각하지 말고. 제 말은 말이 안 통하거든 억지로 달래줄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러면 소년 다윗이 안 되고 이스라엘 돼버려요. 아부한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핑계로 아부하지 마세요. 그거는 얼추 부러운 거예요. 부러우면 지는 거예요. 그쪽 세계가.

다시 한 번 내 몸을 자초하는, 무한으로 내 몸을 감싸려는 그런 시도를 하지 마세요. 우리는 무한이 아니고 유한입니다. 이 유한은 악마라는 무한에 지금 통제당하고 있어요. 완전히 노예에요. 노비에요. 노비. 다윗의 정신이 되도록 성령께서 오십니다. 다윗의 정신은 뭐냐 하면은, 이 내가 보잘 것 없어요. 맞아요. 반드시 보잘 것이 없는데, 보잘 것 없어도 의미 있어요. 왜? 이건 셀프스토리, 나의 스토리가 아니고 누구 스토리? 주님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전쟁에서 이겨야 되지 않습니까? 이미 이겼어요. 왜 우리가 나서서 이기려고 합니까? 이미 이긴 꼬라지가 이 꼬라지에요. 이미 이긴 꼬라지가. 부러워하지 않는 꼬라지. 그 나라와 의를 사모하는 꼬라지. 이게 이미 이긴 겁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환란과 핍박이 올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보다 더 소중하고,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는 운반체거든요. 내 몸은 어디에 효력이 있느냐, 십자가로 승리했음을, 십자가로 이제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는 그 몸으로 사용되기 위해서 아직도 주께서는 우리 몸을 여전히 살려주십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9-05 23:15 
대전-114강 마태복음26장 31-35절(현장성)20190827-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강의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부터 보겠습니다.

 

31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흩어질 것이고 나를 떠날 것이라고 그냥 말만 하면 되는데, ‘기록된바’라고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전에 아버지하고 약속된 것이다 이 말이죠. 모든 게. 약속된 것을 예수님이 실시한다는 말은, 약속된 것이 직통으로 누구로 실현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실현된다는 것은 어떤 노선을 다 차단시키는 것입니까? 약속된 것을 인간 우리가 지킨다는, 지켰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으로 완성되어야지, 그 말씀을 내 행함으로, 선행으로 지켰다고 하는 것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하는 거예요. 예언된 대로 예수님께서만 되죠. 예수님께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든 예언은 어디를 향하고 있다? 예수님으로 향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글이 바로 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할 때에, 말씀을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식해서 지키죠. 하나님을 의식해서. “하나님이여, 제가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계시죠. 풍성하게 넉넉하게 주세요. 오늘 시간 짬 내서 기도합니다. 주여, 기도응답 넉넉하게 주세요.”라고 했죠.

 

그러면 방향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한다. 무시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한다, 라고 할 때 방향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쪽이 아니고 내 기도가 계속 유효한 가치를 남기면서 하나님 앞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가 돼버리면, 누가 소외돼요? 누가 배제되는 겁니까? 모든 기도는, 기도하라가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완성됐다는 것을 내가 지금 모르고 있든지, 알면서도 일부러 기피하고 있는 거예요.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라고 한 말은 누가 이룬 겁니까?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라.” 이것은 예언이죠. 예언은 누가 이룹니까? 예수님이 이루죠. 근데 그 틈새에 새치기해서 나도 기도할 수 있다고 끼어들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죠. 그러면 기도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기도는 기도고 니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우리를 고발하는 용도로 성경말씀이 있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사도바울이 이해한 복음, 예수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취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것도 성실하게 훌륭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성경을 보는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착하니 주님이 나에게 복을 줄 수밖에 없지.’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있으면 됐지, 왜 내가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전에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요한복음 1장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죠. 여기 “그가” 하나님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죠. 알파와 오메가가 예수님이에요.

 

주님이 만물이 있게 했다면, 주님이 생명이라면, 우리의 이 헌 고물을 반납해야하는데, 반납창고가 어딥니까? 주님한테 반납을 해야죠. 주님한테. 나 안 믿고 누구 믿는다? 나 안 믿고 예수 믿어야죠. 내 차가 아니라고 주님 차에 내 차를 폐차시키는 거예요. 내 차 폐차시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달아나죠. 없어지죠. 사라지는 거예요. 그동안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사는 것이 다 억지가 되는 거예요. 짜증나고 억지로 되는 겁니다.

 

자,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모든 예언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여기에 있고 나는 만약에 내년에 죽는다면 나는 죽어도 살 수 있다. 부활된다. 이래 되어있죠. 근데 내 옆에 내 아내가 있다. 아내가 있는데, 내가 예수 믿고 죽어도 부활된다면, 아내가 내가 믿는 예수를 같이 믿으면 아내도 죽어도 부활된다. 자, 이런 생각에 무슨 하자나 잘못 같은 것이 나타나지 않죠.

 

자, 그런데 아내가 먼저 죽었어요. 1년 전에 아내가 죽었는데 예수를 안 믿는다. 근데 지금 내가 예수 믿게 되었다. 그럼 지금 예수 믿는 내가 1년 전에 예수 안 믿고 죽은 아내를 부활시킬 수가 있습니까? 천국갈 수가 있습니까? 안 되죠. 그런데 이게 된다는 거예요. 1년 전에 죽은 불신자 아내를 천국에 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천주교에서 그렇죠.

 

천주교에서 방법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여기 하늘나라에 가면 먼저 간 수행원들한테 빽을 쓰는 거예요. 빽을 쓰는데 한 백만 원 정도 듭니다. 그것도 카드로 해도 되고 현찰도 받아줘요. 성당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미사 넣는다고 합니다. 미사 넣는다. 미사 넣으면 여기에 있는 성자계열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한테 빽을 쓰느냐 하면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이걸 못해요.

 

누구한테 빽을 쓰느냐 하면은 여기에 여성분이 있거든요. 성모마리아한테 빽을 써요. 근데 성모마리아 지가 못해요. 성모마리아와 예수님과는 아들 관계기 때문에, 아들이 효자거든요. 엄마 말을 듣고 빽써서 미사 넣은, 그쪽에 관계된 조상들, 마리아 모르고 예수님 모르는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그냥 구원하면 차이가 없잖아요. 평등이 깨진다고요. 균형이 깨지니까 그냥 하면 안 되고 애 좀 먹이고 가야 돼요. 믿음 값을 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천국에 바로 가지를 못하고 연옥에 가서 있는데, 연옥이 뭐냐 하면 연수학원이에요. 거기서 연수를 받아야 해요. 천국생활을 하려면 잘 적응이 안 되잖아요. 일단 여기서 연수과정을 거쳐서, 연수과정에서도 고집이 세다? 그러면 마리아 빽도 안 돼요. “나는 죽어도 예수 못 믿겠다. 마리아 못 믿겠다.” 그러면 뭐 지옥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연수과정에서는 어지간하면 다 가요.

 

왜냐하면 연수과정이 이렇게 좀 혹독하고 다른 대책이 없으니까. 이미 지옥에 왔으니까. 몰아넣기 식이에요. “니가 지금 뭐 여기까지 와서 천국에 안 가고 지옥 갈 생각하고 있나? 니가 아무리 성질이 고약해도. 한번 대책 내놔봐라. 대책 있나?” “대책 없네요.” “그럼 니 뭘 선택할래? 천당 선택할래? 지옥 선택할래?” “아이고, 뭐 천당 가야죠.” “그래, 천당가거라.” 이래 되는 거예요. 이래 되는 겁니다. 연옥이 천국이 아니니까. 좀 갑갑하고 답답한 동네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뭡니까? 미사 넣어라! 미사 넣으라는 것이 한 마디로 뭡니까? 돈 내거라!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은 천당은 없어져도 성당은 커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천주교인들이 성경 전체를 몰라도 쉽게 천주교가 되죠. 입구에 하얀 마리아상이 있잖아요. 들어오면서 꽂으면 돼요. 꽂으면. 성부성자성신 성호를 그으면 돼요. 들어오면서 인사하면 되거든요. 팍팍팍팍팍팍 꽂고 들어가면 돼요. 꽂고 한 몇 달만 들어오면, 학습 받고 영세 받으면 뭘 또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살과, 딱딱한 비스킷과 포도주를 또 마실 수 있어요. 그거 먹으면 뭐 돼요? 주술적인 효과가 있어가지고 그거 먹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기 때문에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절에 다니는 어머니, 딸이 천주교신자다. 어머니는 불교에 빠져가지고 모든 식구 이름을 절에다가 다 집어넣었다. 근데 이제는 엄마를 불쌍해한다고 뭐냐 하면, “그냥 다니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야야, 내가 어려워서 모른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신부님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 신부님이 뭘 시키겠어요? 주술적인 모션motion있잖아요. 행위. 여자들 수건 덮어쓰는 것부터 해가지고 모든 게 형식이잖아요.

 

향 피우면서 어디서 이상한 복장해가지고, 유니폼입고 흔들어댈 때, 거기가가지고 하니까, “어머니는 안 돼요. 1분 참고 영세 받고 해야 해요.” “야야, 영세가 뭐꼬?” “합격통지서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절에 가는 것 치우고 여기서 1년만 버티면.. 딸의 소원 좀 들어주세요.” “그래, 내가 잘 모르지만 니 소원은 들어줄게.” 그래가지고 떡 하니 천주교신자 된 거죠. 불교에서 천주교로 입적한 거예요.

 

그게 수법이죠. 그걸 기독교에서 부러워하는 거예요. 언제 성경공부 시켜서 학습 받고 세례 받습니까? 중간에 공부한다고 바쁘다 해서 다 빠져나가고. 주일에 나오기도 바쁘다고 하고. 교인수가 등록은 많이 하는데 출석교인수가 얼마 안 돼. 여기서 목사로서는 기분나빠가지고 총동원전도주일을 해가지고 눈으로나 한번 보자. 우리가 숫자 모아놓았는데 그거나 확인해보자. 총동원전도주일을 자주 하는 게 아니거든요. 1년에 한 번씩 총동원전도주일해가지고,

 

“여러분들이 마시는 것도 이만 원인데, 커피 값 한 달 모아가지고 여러분 초청한 사람 봉투에 오만 원 넣어주면 온다. 억지로라도 오게 해서,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데려오면 구원받습니다. 노는 사람들 억지로라도 데려오라고 했잖아요. 혼인잔치에서.” 그 본문을 또 인용해가지고, 사회에 나가서 아무나, 에브리바디, 아무나 데려와 가지고, 장로는 좋아가지고 뒤에서 숫자 세면서 부흥됐다고 흐뭇해하고. 그때는 계산해가지고 목돈 쓰고, 맛있는 것 해주고, 선물도 주고, 비올 때 우산도 주고. 이거는 뭐 난리도 아니에요.

 

자, 그렇게 총동원전도주일을 해도 한번 들어왔다가는 다 빠져나가죠. 그러면 대안이 뭐냐, 최근에 대안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이거에요. 1. 중보기도. 최근에 등장한 거예요. 10년 전부터. 중보기도. 일종의 연옥이죠. 안 믿지만 내가 기도하게 되면 응답받는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2. 참선. 이것은 불교에서 온 거죠. 대승불교에서.

 

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하다보니까 심령이 전부 다 컴컴하고 상했어요. 그럼 교회에서 뭐냐 하면은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되죠. 편하게 하는 방법은 뭐냐 참선하는 것처럼 영적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불교용어니까 차마 못 쓰고. 대신 영적훈련이라고 해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을 해줘서, 이런 서비스를 해줌으로써 우리 교회가 이 동네에 있어야 될 정당성을 이제 알리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여러분들이 심란한 마음을 안정되게 하시면 마귀가 떠나고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이런 훈련을 가지고 끌어 모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는 유지되어야 되고, 유지되려면 돈이 있어야 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돈 문제로 끝나는데, 목회 뭐 있어요. 이게 목회죠. 딴 게 아니에요. 이게 목회에요. 사람들이 아쉬운 그것을 채워주겠다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 방식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함께 있어버리면 나를 위한 예언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예언이 되겠죠. 예수님을 위한 예언이.

 

내가 죽기 전에 이미 1년 전에 죽은 아내에 대해서, 아내가 지옥에 가고 나는 천국에 간다고 했을 때에 지금 비교를 누가 합니까? 아내라는 몸과 누구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나라는 몸과 비교해서, 죽은 아내가 나처럼 될 수 없을까? 나는 천국에 가니까, 이렇게 비교가 되겠죠. 이게 연옥설이라고 해요. 연옥설. 연옥이 이때 나온 거예요. 불쌍한 아내가 나처럼 됐으면 좋겠다.

 

자, 중보기도 나왔죠. 개신교에서 하는. 중보기도의 원리가 뭡니까? 저 안 믿는 사람도 나처럼 됐으면 좋겠다. 전부 다 기준이 뭐예요? 나를 모델로 하고 있죠. 나처럼. “하나님이여, 나처럼 되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그런 잘못을 했어요. 엘리야가 수배당하고 난 뒤에 아합이라는 못된 왕의 부인, 아합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세벨이라고 있어요. 이세벨. 이세벨은 아세라 바알종교에서 시집온 사람이거든요. 시집올 때 그냥 오지 않고 옛날 친정에서 있었을 때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말이죠.

 

가지고 왔는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렸어요. 문제는 이제 누구만 조지면 돼요? 누구만 조지면 다시 바알종교나라가 돼요? 엘리야만 조지면 돼요. 엘리야가 쫓길 때에 하는 말이 나만 남았다고 했어요. 나만 남았다. 엘리야 본인이 자기가 기준이 됐어요. 나만 남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추격하고 나를 현상수배 했습니다.”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만 아니고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왕상19:18)

 

기준을 나와 아내하고 하지 말고, 나를 없애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이 들어가게 되죠. 예수님이 들어가게 되면, 모든 예언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죠. 그러면 뭐냐 하면은 1년 전, 2년 전이 없어져버려요. 예수님한테는 시간이 멈춰버립니다. 어렵죠. 제가 주일 낮 설교에 설교한 내용이 뭐냐 하면은, 지체와 몸 사이에는 오직 사랑으로 연결되고, 지체와 지체사이도 오직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고요. 그 사랑과 사랑이 연결될 때 그 사랑은 뭐가 멈추어진다고 했습니까? 시간이 멈추어줘요. 시간이. 시간이 멈추어집니다.

 

만약에 혹시라도 어떤 부부가 사이가 좋아도 너무 좋아요. 연애할 때보다 사이가 더 좋고, 어느 정도냐 하면 같이 있어도 보고 싶을 정도로. 같이 옆에 있어도 보고 싶을 정도로. 뭐, 다들 이해가 안 되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사랑은 시간이 멈추니까, 이쪽이 44일 때 40이었고 64일 때 61이었고 82일 때 78이었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네. 왜? 시간이 완전히 무시당하니까. 시간이 무시당하니까요.

 

근데 사랑이 없는 가족은, 부부는 자꾸 사랑이 없다보니까 홀로 살고 싶은 거예요. 따라 오지마라. 일주일간 전화하지 마라.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마라. 80대 할머니가 아침에 문 열어보고서는 아직도 눈 뜨고 있는 남편에게, “니 아직도 눈 뜨고 있나?” 90대 할아버지한테는 “친구들은 다 산에 가서 누워있는데 니는 아직도 방에 누워있나? 아이고, 지긋지긋하다 정말. 지긋지긋해.” 다시 말해서 사랑의 대상도 아닌데 왜 자꾸 내 옆에 둘러붙어 있느냐 이 말이죠. 이물질처럼. “좀 떨어져라! 좀 알아서 가라! 알아서. 눈에 안 띄게. 너하고 엮이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비극이다. 엮이는 것 자체가.”

 

예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시간이 멈추어진다는 말은, 시간을 뛰어넘었다 이래 돼요. 그럼 시간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시작과 마지막 사이에 시간이 있거든요. 시작도 시간이 없고 마지막도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마감되었으니까. 이 사이에 시간이 흐른다 이 말이죠. 그럼 인간세계에는 시간이 흐르겠어요? 안 흐르겠어요? 흐르죠. 인간세계에는 시간이 흐르죠. 인간세계에 누가 침투했어요? 바로 하나님의 예언이 침투했죠. 그냥 예언만 침투하면 시간이 흘러요.

 

근데 예언에 예언의 완성이 들어가죠. 예언이 완성돼버리면 이 시작이 마지막이 돼버렸죠. 시작한 예언이 마지막이 되죠. 알파와 오메가요. 마지막이 마지막을 향하여 달리는 그 기차위에 올라타 버렸다 이 말이죠. 이게 성령의 임함입니다. 성령의 임함. 성경에 이런 게 있는지를 몰랐죠.

 

골로새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절,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이유가 뭐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은 어디에 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죠. 시간이 흐르는 곳에서 니가 죽어있고. 공동묘지에 누워있는 시체는 시간을 느낍니까? 못 느낍니까? 못 느끼죠. 몸이 죽었으면 시간의식도 같이 죽은 거예요. 시간이 흘러도 나는 이미 그 시간에서 은퇴한 거예요. 은퇴한 자에게 시간은 해당사항이 없어요. 죽은 자에게는 2019년, 2020년이 의미가 없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읽는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자, 에베소서 2장 5-7절을 여러분들 중에서 한번 읽어보세요.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세대에 휘말리지 않는 거예요. 세대라는 말은 앞에 기관차가 있고 뒤에 열차가 10량 이상 있죠. 각 열량마다, 각 세대마다 군데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역사를 초월한 사람이 군데군데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고 예수님을 봤죠.

 

아브라함 자체가 언약 속에 있으니까, 시간을 능가하는 거예요. 시간을 능가한다는 말은 멀리 오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노아도 그랬고 아벨도 그랬어요. 아벨, 노아, 아브라함, 야곱, 이삭... 그 계열, 그 나열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그 인물들의 나열이 나와요. 다윗도 나오고 이사야도 나오고... 나와요.

 

그 인물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지금 그 시대에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걸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그들 속에 예수님의 영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들 속에. 성령이 임해버리면 나라는 것이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 안에 누가 살아 있느냐 하면은 완성자가 살아있어요. 하나님의 예언의 완성자가 나를 이용하는 거죠. 그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피조물다움이죠. 창조주가 주도권을 쥐고 피조물을 마음껏 다루는 거예요.

 

이 세상의 시간의 흐름이나 기대치에 휘둘리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기대와 희망에 휘둘리면 지금 현재가 불행해져요. 도대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가져도 미흡함이 남아요. 모자람을 자꾸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을 이번 수련회 제 3강에서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보편적 정신병’이라고 했죠. 모든 정신병은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거예요. “뭔가 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지금 이런 삶은 아니야. 뭔가 있어. 미치겠어. 모자람이 있는데 그 모자람을 마저 안 채우니까 내 마음이 괴로워서 못 견디겠어. 밤에 잠도 안 와. 뭔가 있어.”

 

앵그리 버드가 뭐냐 하면은 만화의 캐릭터인데, 눈이 올라가서 항상 화가 나 있어요. 뭔가 모자라. 그 모자람이 불편해죽겠어. 불편해서 맛있는 것을 먹어도 이상하다. 미지의 X가 자꾸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옷을 신상을 사 입어도 뭐 한 이틀이나 사흘 지나고 난 뒤에, ‘아니야, 아니야, 이 옷이 아니야. 바꿀까?’ 바꿀까말까 하다가 한나절이 다 지나가는 거예요. 또 확인할까 해서 친구하고 전화 붙들고 1시간 반 동안 하다가, 백화점에서 옷 샀는데, 옷 보여주려고 화상통화해서 “이 옷이 나아?” “왜 맞는데.” “으응~ 그때는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안 맞아.” 이러면서 벌써 30분이 지나가버렸어요. 바꿀까말까 하다가 30분 지나고, 전화통화 하다가 30분 다 지나버리고. 항상 화가 나 있어요.

 

자식이 와가지고 “엄마! 오늘 시험 잘 쳤어.” “알았어. 시험 잘 쳤다고 건방떨지 말고 공부해. 숙제해.” “엄마! 칭찬 좀 해줘.” “뭐? 백점 맞은 거 너만 맞았나. 나도 옛날에 백점 맞았다.” 이런 식으로. 뭔가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거예요. 불만이. 이거는 아무리, “당신, 불만이 있어서 안 되겠다. 태국에 가든지 우리 해외여행 한번 갈까? 뭐, 크루즈여행 한번 갈까?” 가도 소용이 없어요. 짐 싸서 갈 때부터 싸워가지고 올 때까지 싸워요. 갈 때부터 앵그리 버드인데 올 때까지 앵그리 버드에요. 괜히 가서 돈만 날리고 몸만 축나고 완전히 몸이 더 젓갈이에요. 젓갈. 몸이 젓갈된 거예요. 쭉 쳐져버렸어요.

 

다시 마태복음으로 넘어가봅시다. 소용이 없어요. 인간은 나름대로의 현실을 적응하면서 자기를 주인공 삼아서 뭐합니까? 예언을, 미래의 그 멋진 일이 내게 실현되기를 원하죠. 그러면 내게 실현되기를 원하면 누가 목격해야 되고 누가 그 좋은 날을 누가 친히 눈으로 봐야 됩니까? 바로 내가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날에 내 희망하는 것이, 나에게 매일 만족시켜 줄 것을 고대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평소에 아버지가 있을 때 사법고시 공부하다가,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는 소주 들고 오징어 구워서 어디에 갑니까? 아버지 산소에 가죠. “아버님! 제가 왔습니다.” 여자 친구 데리고 와서는 “니도 인사해라.” 그 여자 친구는 기독교신자인데 그건 무시하고. “니도 인사해라.” “어머, 아버님, 저 왔어요.” 무덤 안에 있는 쥐들이 웃고 있고. 왜 그래요? 왜 그렇습니까?

 

그걸 가지고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은 절대로 나의 이름으로 산적이 없다.” 뭐로 살았냐?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늙었건 죽었건 간에 관계없어요. 아버지의 요청이 지금 나를 나 되게 하면서도 미흡점이 있어요. 아버지의 욕망은 너무 세니까. 나는 거기에 못 미치니까. 항상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아버지한테 미안하고. 미안한 것을 못 해줘서 아버지한테 분노하고.

 

이게 양의성, 의미가 두 가지에요. 같은 상황인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내게 너무 감당 안 되는 것을 요구했던 그 아버지가 미워요. 미우니까 복수한다 치고 맨날 뭐냐, “애 봐주세요. 대출해주세요. 집 사는데 돈 좀 빌려주세요.” 이거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한테의 복수에요. 아버지에 대한 복수. “저는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대로 했잖아요. 그만한 값을 하세요.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대로 했으니까 이번 아파트 대출 2억은 해주셔야죠.”

 

이렇게 누구든지 뭔가 붙들고 분풀이를 하는 대상, 이걸 두자로 가족이라고 합니다. 가족. 이게 가족이고, 가족이 충족되지 못할 때는 친구한테 해요. 친구. 친구, 가족. “내 분풀이 좀 들어 도!” 분풀이를 안 하게 되면 정신병에 걸리니까. 분풀이를 하게 되면 정신병이 약간 완화된 것처럼 느껴지죠. 한 시간 반 동안 붙들고 전화하니까 확 풀리는 거예요. 친구 좋은 게 뭡니까?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은 친구 아니가! 친구거든요.

 

근데 복음을 알게 되게 되면 이 세상에 재밌는 드라마도 없고, 재미있는 게 없어요. 다 시시하고 재미가 없어요. 복음을 알게 되면. 기쁨을 주는 게 전혀 없어요. 복음 듣는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이 없으니! 재미 하나도 없어요. 시시해. 시시하니까 친구하고 또 떨어져요. 친구하고 연락 안 하다가 나중에는 뭐하죠. 친구만 떨어집니까? 이제 가족모임에도 가기 싫어요. 백날 들어봐야 한 수가 낮은, 맨날 시시한 수(手), 조국이야기, 정치이야기, 그런 시시한 이야기. 놀기 싫어.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이미 끝을 터치한 거거든요. 터치. 미식축구에서 점수 내는 방법은 마지막 순간에 공을 다운터치하게 되면 점수가 3점, 5점, 7점이 나거든요. 볼 하나 더 터치하게 되면 점수가 더 추가되고. 럭비도 마찬가지고. 터치하면 되는 거예요. 성도가 됐다는 말은 이미 성령이 와가지고 완료가, 완료를 터치한 거예요. 그렇다면 1년 전의 내 아내가 지옥 갔는지 천당 갔는지 죽은 내가 판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창세전에 제 아내를 선택했다면, 내 눈에는 마치 구원 안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 보시기에 택한 자라면 주께서, 연옥까지 갈 것도 없어요. 주께서 그 백성이 내 백성이라고 하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남은 자에게 속하는 거예요. 아까 엘리야이야기 기억나시죠? 엘리야는 자기가 중심이다 보니까, 내 판단이 중심이다 보니까, 아내는 안 믿었다고 하지만, 모르죠. 아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모르죠. 그래서 주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노골적으로 사탄 들었다고 나대는 가정이면 몰라도. 노골적으로 사탄에게 넘겨줬다는 사도바울이 말한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성도는 천국과 지옥을 아무도 말하지 못하겠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복음으로 인하여 천국 갔느냐, 지옥 갔느냐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전에는 내 기준이었거든요. 나처럼 믿으면 너는 천국 가고 나처럼 안 믿으면 너는 지옥 간다. 이게 옛날의 내 기준이었잖아요. 그러면 그 나라는 기준하고 예수님의 기준, 십자가 기준하고 비교해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기준은 뭐가 됩니까? 일방적으로 내 기준이 되니까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내린 판단도 죄가 되는 그 판단기준은 뭡니까? 오직 십자가죠. 그러면 성령을 받은 성도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1년 전에 죽은 예수 안 믿은 내 아내하고 나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데, 내가 죽은 아내하고 똑같이 전혀 구원하고 상관이 없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됩니다.”라는 것을 성령이 와서 인식, 알게 하신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골로새서에도 나오고. 하나님의 계시의 영을 주사 그 능력의 풍성함을 알게 하신 거예요. 에베소서 1장 17절로 23절까지 나와요. 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내가 이렇게 믿었다는 것을, 나를 증거 하게 되면 이거는 잘못된 판단이고,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을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을 증거 하는 자를 건드리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지옥 안 간다, 안 간다고, 우리가 판단 못한다고 제가 전제했죠. 근데 성령이 오게 되면 판단 못한다가 아니고 필히 판단이 돼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아내는 1년 전에 죽었으니까 그거는 내 소관이 아니고. 죽은 아내는 아내의 세대가 아닙니까? 나는 내가 살아있으면 지금 이 세대에 살아있는 자들의 모임이니까. 이 세대다 이 말이죠. 이 세대가 죽은 세대까지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오는 세대마다 주께서 하니까. 내 세대가 할 필요가 없고. “이 세대, 니나 잘하세요.”라는 거예요. 그럼 나는 뭘 하느냐 하면은, “내 행함과 상관없이 주의 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은 내가 내 능력에서 나올 수 있는 인지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알아서, 내가 잘 처신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증거 하는데, 그 증거에 대해서 대드는 것은 나에 대한 대듦이 아니고, 주님에 대한 대듦이에요.

 

이렇게 논리로 설명하면 또 어려우니까, 갈라디아서 1장을 한번 봅시다. 사도바울이 말을 함부로 툭툭 던지는 타입이 아니고, 툭툭 던진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보이더라도 굉장히 심오해요. 사실 심오함을 능가하죠.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지금 사도바울이 복음과 또 뭘 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알게 되면 필히 복음 외에,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죠. 사도가 인간이지만, 주님이 아니지만, 이미 알잖아요. 어떤 사람이 지옥가고 천당 가는지를 모르는 게 아니고 알고 있어요. 아는 기준이 나처럼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자기는 날마다 죄인의 괴수니까, 나처럼 믿으라고 할 수 없는 게, 내가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 사람에게 찾아왔잖아요. 찾아오니까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방법은 뭐냐, 주님이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으면, 나에게 주님이 찾아오지 않을 때 나는 지옥 가는 줄을 몰랐는데, 찾아오니까 내가 찾아오지 않았을 때가 지옥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올 때 그냥 빈손으로 찾아옵니까? 복음 들고 오십니까? 복음 들고 오시겠죠. 그러면 복음 들고 온 결과가 뭐냐 사도바울 본인이 아닙니까? 본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다른 복음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이미 복음을 받았다는 뜻이고요. 갈라디아서 1장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벌써 이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옥에 가는 거죠. 복음 안에 안 들어왔으니까.

 

그 다음에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뭘 받는다고 했습니까? 저주를 받는다고 했죠. 참 사도, 멱살 쥘만하죠. “니가 뭔데 판정관이야.” 이렇게 멱살 쥐고 흔들만하죠. 이렇게 도발적인 발언을 하니까.

 

자, 이 말을 그냥 설명하면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복음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다른 비복음도 같이 동반해서 등장하겠죠. 복음 외에 나머지기는 다 비-복음. 복음이 왔는데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는 복음 알잖아.” 이렇게 하겠죠. 사도바울이 여기서 멀찍이 표현합니다. 복음 안에 너, 사도바울이 포함이 안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사도바울이 복음 안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복음 안에는 사도바울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누구만 들어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만 들어있어요. 예수님만 들어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나 아니야.”라는 방법 외에는 없어요. “나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비-복음은 아니고. 나 아니야를 포함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복음이 돼요.

 

복음 안의 기준이, 복음만 전하면 여기 우리라는 말이 나오죠. 8절에. 우리라 할지라도 또는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우리나 천사가 뭐가 됩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저주를 받는다. 그 말은 진짜 저주가 안 되는 순수한 복음 안에는 나의 공로가 끼어들어야 된다? 안 들어야 된다? 내 공로가 끼어들어서는 안 될뿐더러 나를 증거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복음을 믿게 된 나를 증거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가 증거 되어서는 안 돼요. 복음을 아는 우리가 증거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이미 복음을 알았으니까, 복음을 안 내가 복음에 들어왔다는 게 논리적으로 맞는 거니까.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성령께서 복음을 기준으로 하거든요.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행하심이 복음이니까. 행하심만 증거 하니까.

 

성령께서 뭘 하느냐 하면은 우리들에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거예요. 책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는 책망을 받는다는 자체가 복이에요. 다른 사람한테 책망을 받는 줄도 모르고 있어요. 이게 책망인가? 책망을 책망이라고 인식하는 자체가 한패에요.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하는 거예요. 복음을 가지라고 준 게 복음이 아니고, 복음을 증거 하라고 한 겁니다. 간만에 고함을 지르니까 또 배가 고프네.

 

잘 들어보세요. 복음을 가지라고 준 게 아니고, ‘야, 저거 가지면 천당 가겠네.’ 복음을 가지라고 하는 게 아니고, 복음 목걸이 만들어서 달랑달랑 달고 다니라고 준 게 아니고, 복음을 증거 하려는 거예요. 복음을 증거 하는 방법은 뭡니까? 복음을 만들고 복음의 효과에 대해서 내 쪽에서 한 게 있다? 없다? 없다. 이게 믿음이에요. 내가 믿었다가 아니라 복음에 대해서 한 게 없는 게 믿음이에요.

 

왜냐하면 그래야, 내 쪽에 믿음이 없다 해야 믿음조차도 어디서 나왔다? 복음의 능력에 포함되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포함된 능력이어야 되지, 내 솜씨가 남아있는 믿음은요,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지 않아요. 벌거벗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돼요. 이 말은 다 벌거벗고 오라는 말입니다. 다 벗고 오라. 세리와 창기처럼 다 벗고 오라. 너한테 더덕더덕 걸치고 있는 것, 그거 다 버려라. 다 버릴 수가 없죠. 주께서 알아서 다 죽게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걸친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거기서 죄가 발생되고, 그 죄로 우리를 죽게 하죠. “주여, 이건 가져가도 이건만큼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우린 매일같이 소중한 것을 생산하는데 오늘도 투자하고 있습니다. 뭐, 집사님한테는 개입니까? 진짜 소중한 것. 나는 그걸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그 무엇. 딸내미에요? 손녀에요? 아들이에요? 나보다 더 사랑하고 싶은 것. 그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합니다. 우리가 소중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있어요. 있는데, 주께서 건드려주면 “아, 있었네!”라고 발각당하죠.

 

다리가 아프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민간요법이지만, 다리가 아프긴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를 몰라요. 그러면 민간요법 하는 사람이 다리가 아픈데 손가락을 자꾸 쑤시는 거예요. 지압. “어디 아픕니까? 여기 아픕니까?” “아니요.” “그럼 여기 아픕니까?” “아!!! 맞아요.” “그 자리가 허벅지 아픈 자리입니다.” 거기다가 침을 딱 놔가지고, “이제는 이 아픔으로 인하여 다리 아픈 것이 상실될 것입니다.” 민간요법이에요. 그거 뭐 돈 안 든다고 그거만 믿고 병원에 안 가면 안 되고. 민간요법이거든요. 그걸 지압이라고 하잖아요. 지압이라고 하죠.

 

성령은 어딜 지압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나도 몰랐지. 이렇게 소중한 것이 있을 줄이야.” 그 점을 찾아와서 지압을 해줄 때, “아, 내가 평소에 주님에게 입에 발린 소리를 했구나! 주님 좋아한 적도 없으면서 또 매 안 맞기 위해서 주님, 주님 했구나! 실제는 나는 주님 이용해서 이것 지키려고, 이것 살리려고 이 짓했구나!” 그게 명예일수도 있고, 자존심일수도 있고, 나의 가치 또는 의미, 내가 키우는 강아지, 자식, 남편, 아내, 내 부동산, 동산, 내 지나온 신앙생활 50년 한 것, 교회 다니는 것, 그 어떤 것이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한국의 젊은 애들이 그 소중한 것이 누구냐 하면은 10대, 20대는 손흥민, 30대는 류현진, 류현진이 깨지고 난 뒤에는 밥맛이 없어. 손흥민이 한골 못 넣고 토트넘이 누구한테 졌다고 하면 고민이 돼요. 방탄소년단 욕하면 막 악플 달아요. “나에게 얼마나 방탄소년단이 중요한데.” 젊은 사람들은 방탄소년단. 나이 60먹은 사람들은 송가인. 누가 송가인 욕하면 용서가 안 돼. 이 강의 듣는 사람들 중에 송가인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보세요. 찾아보면 트로트의 여왕 송가인이라고 또 나와요. 송가인 집이 성지순례가 됐어요. 막 찾아와요. 그것도 막 버스대절해가지고. 용두산아~~ 막 부르면 수천 명이 막 넘어가요. 용두산아~~ 일백 구십 사 계단을 올라가면~~

 

왜 그러냐 하면은 믿을 게 없고 아무 기쁨이 없으니까. 결국은 소중한 게 나의 기쁨이 되는 그 무엇, 미지의 X. 이것은 정답이 뭐냐 이거에요. 몸입니다. 몸. 오늘 본문 봅시다. 예수님이 떠나고 오늘 제자들이 어디에 갔는가, 갈릴리로 가죠. “아이고, 뭐 한 때 좋았는데, 뭐, 예수님 이제 시마이(끝)했다. 가자 갈릴리로! 옛날 고기 잡았던 곳으로 가자! 갈릴리 바닷가에 가서 고기나 잡자.” 일곱 제자가 가서 고기 잡았다고 했죠.

 

근데 너희보다 누가 먼저 간다? 예수님이 먼저 간다. 올 줄 알고서. 올 줄 안 것도 예언이거든요. 32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너희들이 완료를 몰라. 니가 아무리 내빼 봐도 그 현장에서 주님이 “네 수준을 모를까? 니 행세를 모를까 보냐? 이미 뻔할 뻔자 다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자리에 이미 용서가 완료된 상태에서 받아줍니다. 이리와! 이리와! 품에 받아줍니다. 시편 131편에서 젖먹이가 젖을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는 것처럼. “이리와! 이제 너는 망가질 거야. 내 품안에서. 사도바울처럼.” 굶고, 맞고, 강도의 위협이 있더라도 그 품이 무슨 품입니까? 예수 안에 있죠.

 

그게 아까 봤던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에, 이제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품 안에서, 성령께서 “때찌때찌 그거는 소중한 것이 아니야. 주님 십자가가 소중해. 때찌때찌 돈 좀 몇 푼 날렸다고 그거 하지 마. 니가 돈 좀 몇 푼 없어도 내 용서가 더 커.” 깨우쳐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항상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주님 기준에서, 성령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주님과 우리를 항상 대화가 되게 하고 눈 쳐다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어요. 성도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주님한테 물어보면 돼요. 지시받으면서 살면 돼요. 주님한테 지시받고 하면 돼요. 어떻게 하는지 모르잖아요. “주님! 뭐 할까요?” 물어보라 이 말이죠. 물어보면 주께서 이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현재 나를 가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하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다. 근데 아니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그것마저 핀트가 잘못된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거 하나하나 의미를 두지 마라. 이미 너는 내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우칠 때에,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자유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요. 막 살라고 했잖아요. 자책하지 마시고. 주저할 일도 없고. 누가 와도 그 사람 욕할 이유도 없고. 주의 은혜로 나를 인간 만들기 위해서 주신 거니까. 나를 건드리라고 했으니까. 배후에 주께서 또 그렇게 하게 하신 일입니다. “갈릴리에 먼저 가리라” 항상 이 자리가 갈릴리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돼요.

 

조그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양떼가 흩어졌죠. 누구만 남고? 예수님만 남고 다 흩어졌죠. 중심이 뭐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언은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 보기에 흩어졌지만, 흩어진 제자들 입자에서는 뭡니까? 예수님 중심입니까? 아니면 자기 몸이 있는 곳입니까? 내 몸이 중심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해도 내 몸만 살면 그만이에요. 내 몸만 편하면 예수님이 죽든 말든 관계없어요.

 

이게 오늘날 우리 실정이에요. 우리가 언제 예수님 걱정했습니까? 내 몸 아픈 것만 생각했죠. 이게 실정이에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그 현장에 주님이 또 다시 작용해버리면,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될,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야 될 의도적인 상황인 것을 내가 다시 소급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가 어디에 가도. 미국에 가나 캐나다에 가나 어디에 가도. 북한은 가지마세요.

 

자, 33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어떤 경우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했죠.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5절에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이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니가 그런 장담을 할지라도, 벌써 그런 장담조차도 내가 알고 있는 예언의 부록에 불과하다. 부록에. 예언에 불과한 겁니다. 오늘 제목은 예언입니다. 예언에 불과한 거예요. 예언의 완료에요.

 

그러면 베드로의 배신은 이 예언의 미완료입니까? 완료입니까? 소급해서 보면 완료죠. 열두 살 때 오줌 싼 거 완료라니까요. 주님의 뜻이라니까요. 1년 전에 아내 죽은 것도 주의 뜻이고.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죠. 이거 뻔뻔스러운 건지 무책임한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간에 진리에요. 이것이 기쁘지 않으면 뻔뻔스러운 것이고 기쁘면 성령이 오신 것이죠. “아, 그렇구나. 잘 됐네. 지금 죄 지으면 10년 뒤에 주의 뜻이라고 하면 그만이네.” 이건 기쁜 게 아니고 뻔뻔스러운 것이고.

 

기쁜 것은 뭐냐,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현장을 일부러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제목을 예언이라고 하지 말고 현장성이라고 해야 되겠어요. 현장성. 이게 적당한 것 같아요. 어디가도 주께서 유발한 예언의 완성상태에서,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증인이 되라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함보다 예언이 우선인 것을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름을 고대할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 안에서, 완료된 상태에서, 어딜 가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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