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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8 21:42:49 조회 : 241         
사무엘상 58강(무장의 힘, 마태복음 120강(차단효과) 20042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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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20-05-06 12:48 
대전-58강 사무엘상18장6-7절(무장의 힘)20200428-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8장 6절부터 보겠습니다.

6절,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절,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7절까지 봤습니다. 여기 이질적인 것이 둘이 만나요. 사울과 다윗이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운행할 때에, 이 세상을 만들어나갈 때에, 이게 그 당시의 현실이거든요. 현실 만들기에는 반드시 짝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이질적인 것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원수가 앞에 이사 온다고 이래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그걸 떼 내고 싶죠. 독단적으로 살고. 그게 나답고 생각하는데 정말 나다운 것은 내가 원치 않는, 나하고 섞일 수 없는, 영원히 평행되게 갈 수 없는 그런 요소가 둘이 마주침으로서, 여기 현실은 어떤 현실이냐 하면은 새로운 현실구성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현실.

사울이 없었으면 다윗이 속편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렇게 되면 다윗이 말한 현실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은 나 중심의 현실이 돼요. 나 중심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용납을 안 해줘요. 나 중심의 현실은. 이질적인 것을 만나지 못한다면 누굴 모르는가 하면은 내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만약에 나 중심의 현실이 되게 되면 우리는 쉽게 목적에 도달합니다. 그냥 목적이 아니고 최종목적. 최종목적이 어디냐 하면은 내가 최고가 되고 나 편안대로 사는 것이 최종목적이죠. 이걸로 좋사오니, 이래 되는 거예요. 최종목적.

그러면 내가 과연 이 세상의 중심입니까? 아니죠. 내가 온 세상의 주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는 목적입니까? 아니죠. 우리가 알기로는 이 세상의 주님은 나 말고 따로 계시죠. 어떤 미지의 분. 주님. 미지의 분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분이에요. 모르는 분이 따로 계시다 이 말이죠. 따로 계시고 이 분은 눈에 안 보이죠.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나를 최종목적 자리에 앉히는 것으로 우리가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와서 싸운다 하지만, 사실은 다윗이 싸우려고 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다윗 내 중심의 현실과 주님의 구성하는 현실과의 싸움이에요. 나는 내가 최종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그 현실은 주님이 최종자가 되고 싶은 현실과 위배되는 겁니다. 마주쳐서 이거는 튕겨져 나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과정이라고 봅시다. 과정. 다윗은 본인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과정인데, 무슨 과정이냐 하면은 나 아니고 주님이 최종목적에 도달되어야 된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경로, 그 과정에 우리가 이 땅에서 쓰여 지는 겁니다. 뽑혀서 사용되는 거예요. 다윗이 형한테 도시락 전달하려고 왔지, 소년 다윗이 그 자리에 골리앗이 있는지 사전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모르죠. 그러니까 본인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도시락이 있었고 도시락을 형에게 전달한다. 이게 본인이 알고 있던, 본인의 한계치에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에, 누가 새로운 현실이 되면서 누가 개입을 하느냐 하면은 여기 골리앗이 개입했죠. 골리앗. 이거는 생뚱 맞는 거예요.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나 혼자 집에서 편안하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고 밥은 해도 되고 안 먹어도 되고 저녁에 늦게 와도 되는데, 장정 둘이 엉망진창을 만들어놨어요. 패턴이 다 깨져버렸어요. 내가 키운 개까지 시달릴 판이에요. 개까지 우울증 걸릴 판이에요. 벌써 개가 우울증이 좀..., 갑자기 웬 사람들이 쳐들어왔나? 내 나와바리에. 신경 바짝 써서 오늘 사료도 안 먹고. 짜증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외부에서 접붙여준 게 없으면 나는 그것으로 내 목적은 종료가 되고 종결이 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로 종결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나 중심의 현실이라는 것을 고집을 하게 되면 이것은 다윗이 보기에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싸웠지만, 우리가 다윗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사울 입장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이스라엘 왕이 누구냐 하면은 결코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아니에요. 지가 뭐 김정은도 아니고. 나이도 몇 살 먹지 않은 게 왜 갑자기 인기를 얻어요? 어디까지나 지금 누가 왕이냐 하면은 사울이 왕이라고요. 사울이 왕인데, 다윗이 지금 예상 밖으로 치고 들어온 겁니다. 거추장스럽죠.

바짝 사울 왕은 지금 화가 나있습니다. 긴장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성경을 볼 때에 내 중심으로 보지 말고 철로의 두 궤도처럼, 두 궤도가 나란히 있을 때에 상대방 편을 생각해보라. 바리새인으로 예수님이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바리새인하고 우리하고 상관없다고 하지 말고, 바리새인 편에 서야 제대로 예수님을 발견하게 돼요. 바리새인 편에 서야. 왜냐하면 내가 바리새인 편에 설 때 바리새인이 남이 아니에요. 바리새인들의 삶은 뭐냐 하면은 기어이 자기 잘남을 포기 못하는 삶이 바리새인의 삶이에요. 자기 의로움을 포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실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정의로움, 선함이잖아요.

그러면 의로움과 선함이 있을 때에 나에게 뭘 주느냐, 복을 준다 이 말이죠. 나쁜 사람에게 복 준다, 나쁜 사람에게 복 주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나쁜 사람에게 복 주는 하나님, 상상이 안 되죠. 바로 나쁜 사람에게 복 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세리와 창기를 부르러 왔기 때문에. 우리의 타고난 아담의 본성으로서는 하나님 자체가 진짜 하나님을 밀쳐버리고 악마가 만들어준 가짜 이미지의 신을 계속해서 붙들게 되어 있어요. 구약에서는 이걸 바알신이라고 하는데,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 우상의 특징은 반드시 앞에 붙는 게 있어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한 신을 내가 채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위한 신. 늘 상투적으로 나오지만, 교회가 있다면 내 교회를 위한 하나님. 내 교회를 잘 되게 하기 위한 예수. 새벽기도에 가서 우리교회 망하라고 기도하는 교인 봤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그 자체가 바알신, 우상이라니까요. 우상입니다. 그러면 나를 위한 신이라는 말은 나라는 몸뚱아리만 가지고 나라고 하지 않아요. 내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나의 영역이 있어요. 나의 구역이 있다고요. 나의 구역. 당구알처럼 점점 더 단단해집니다. 자기 구역밖에 모르는 겁니다. 갈수록 점점 더 이게 응집된다고 하는데. 응집.

천문학자들이 별을 조사할 때 태양 정도의 별이 나중에 에너지가 다 소진되게 되면 수소원자(H2)가 헬륨원자(He)로 바뀌면서 에너지를 다 소비하게 되어있다 이래 되어 있어요. 더, 더 소비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중성자별이 된다는데, 태양만큼의 크기의 중성자별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몇 킬로 안에 수십조의 쇠의 무게가 다 포함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상상이 됩니까? 너무 무겁죠. 무거워도 너무 무거워요. 요만한 크기의 방에 한 1조 톤의 쇳덩어리를 다 집어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나죠. 무겁죠. 꿈쩍도 안 하겠죠.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런 사람이 어디에 가는가, 요양병원에 가는 겁니다. 요양병원 안에 있는 그 노인네들을 보면 평소에 아무 할 일이 없으니까, 평소의 모든 생각이 할 일이 없는 순간 자기한테 다 집결이 돼요. 자기한테. 시간이 남아도는 그 빈 시간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도 행함이라고 했거든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 모든 목적이 자기 의로움으로 똘똘 뭉치는데 온 정력을 거기다가 다 투자하고 다 소비를 해요. 내가 자식을 잘 키웠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잘난 엄마라는 뜻이에요. 그 말이에요. 나 자식 잘 키웠다. 그만하면 잘 키웠다. 내가 둘한테 해줄 대로 다 해줬다. 나가라! 뭐 이런 거.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 의를 자동적으로 자기가 점점 더 하는 거예요. 점점 더 강하고 강렬해지니까 건드렸다 하면 폭발해버리는 겁니다. 자기 분노에 자기가 미치는 거죠. 이게 자기보다 더 무거운 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자신이 무거운 짐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뭐가 된다? 나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짐이 돼요. 그럴 때 해결책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라는 더 큰 짐이 와서 눌러버리면 이 나라는 것은 완전히 짜부라져야 되고 박살나야 돼요. 주님의 덩치 앞에서 네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자기를 아예 망하는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면 못할 일이 없다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경우는 어떤 경우밖에 없느냐 하면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그 순간에는 어떤 짓도 다 할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 옷 벗어달라고 하면 다 벗어줄 수 있어요. 그 정도로. 자기가 자기를 사수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아요. 주님 바라보기 바빠 가지고. 주님의 광채를 바라보는데 정신이 팔려가지고. 나한테 정신이 안 팔려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그 모습이 나오죠. 2장에. 들판에 목자들이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여기 묵직한 초월적인 세계가 덮쳐버려요.

그러면 지상에서, 대전바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소소한 일이 돼버립니다.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평화로다. 니가 사는 현실은, 니가 음악 하는 것을 가꾸고 사수하고 지키고 하는 그게 니가 태어난 목적이 아니라 아기예수 만나러 가는 것이다. 니가 이 타이밍, 이 시간에 들판에서 양치는 것은 이거 해서 아르바이트해서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 시간의 만남, 일본말로 아다리라고 하죠. 천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타이밍에 밤새도록 양 치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뽑힌 사람을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 소유가 아니고 과정이에요.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경로에 차출된 겁니다. 뽑혀 나온 거예요. 내가 목적이 아니에요. 내가 양 쳐서 우리 가족들 먹여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살까? 내가 살까? 나의 생존, 이게 목적이 아니고, 주님의 존재 앞에서 나는 주님의 존재를 증거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갈뿐이죠.

그런데 이런 과정에, 내 존재가 희석되고 과정으로 가려면 매일같이 수시로 내가 이질적으로 느끼는, 내가 역겨워하는, 내가 싫어하는 내가 귀찮아하는 그런 것과 억지스럽게 동반해야 될 상황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거예요. 자꾸만 동반해야 될 상황들이. 자식문제 처리하면 다른 문제가 들러붙고. 집에 개 키우는 것 귀찮았는데 개가 어떻게 죽었다. 해방이라고 했는데 고양이 두 마리 키우게 되고. 새로운 요소가 계속해서..., 내가 이쯤 숨 좀 돌릴 수 있겠지. 이제는 마음이 편하겠지. 홀로 편하겠지. 홀로. 나 홀로 사는 게 제일 편하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주께서는 사울과 나란히 붙여주는 겁니다.

사울 밉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울 입장에서 다윗이 미운 거예요. 내가 사울 미운 것만 생각하지 말고 사울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사울입장에서 다윗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눈에 티같이 느껴지겠습니까? 이런 경우가 고린도후서 12장에도 나와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좀 마음대로 각색을 한다면.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다. 나는 삼층천의 천국을 봤다. 너희들 보기에 참 부럽지? 그지? 내가 그 정도야. 그 정도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는데 그 가시 이름이 무슨 가시냐 하면은 사단의 가시다. 악마의 가시가 꽂혔어요.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나한테 고통이 되는지, 물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가시를 빼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최종성, 나의 편안한 쪽으로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예단하고 예상한 그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게 된 그 원인 자체가 너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도 너는 감당해야 된다는 게 응답이에요. 니가 지금 고통스러워서 기도하는데, 제가 차마 남편자식보고 이런 말하기는 죄송합니다만.

내가 이 아픈 가시 좀 빼달라고 하는데, 그거는 니 소관이 아니고 내 소관이라는 거예요. 니가 존재도 아니고 과정에 불과하면서, 더 높은 곳에서 보는 과정의 그 의미와 취지를 개뿔도 모르면서 코앞에 있는 내가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하면서, 착오를 일으키면서 이것 빼주시면 주께 마음껏 영광 돌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 사도바울의 소원이 오늘날 우리의 소원과 다를 바가 뭐가 있어요. 똑같지요. 똑같아요.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앞으로 더욱더 헌신하고 복종하겠습니다. 이런 거래는요, 누구나 하는 거예요. 누구나.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했겠습니까? 다윗 좀 빼달라고. 우리가 다윗 입장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리고 가시가 사도바울이 표현하기를 무슨 가시냐 하면은 사단의 가시에요. 그냥 가시가 아니고, 에이 내가 실수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다. 이런 가시가 아니라니까요. 사단의 가시는 의도적이에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내가 죄 지어서 받는 벌이 아니에요. 징계수준이 아닙니다. 니가 정신 바짝 차리면 빼줄게. 이런 거 없어요. 끝까지 가요. 아니, 주님이 박아놨다니까요. 주님이. 주님이 박아놓은 거예요. 다리 아프니까 철심 박아놓은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사단의 가시가 빠지잖아요. 그러면 사도가 안 됩니다. 성도가 아니에요. 주님의 요소가 같이 합류되어야 성도라는 신분을 부여받지, 만약에 주님의 요소를 했다가 빼버리면 그거는 내가 돛대가 되고 내가 절대자가 돼요. 내가 나한테 우상이 돼버려요. 이거는 누구에게 복종한다는 그 요소가 빠지는 것은 도리어 사탄이 원하는 겁니다. 사탄이 원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이런 점을 고려를 하고 해석을 해주셔야 돼요. 이런 점을. 이런 점을 고려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사탄과 동행해서 살아야 해요. 남은 인생을.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은 “니 은혜가 족하다.”라는 것이, 사탄이 있는 이것 자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도바울의 삶이 계시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때문에.

“주님만 좋으면 그만이에요.” 이게 참 말은 쉽게 합니다만, 주님만 좋으면 그만이에요. 나는 죽는다고 난리다. 못살겠다고. 스트레스 받아서 심장이 멈출 것 같아. 심정지 일어날 것 같아서 스탠트 수술해야 돼요. 중국 의사가 와서 수술해야 되는데. 나는 스트레스 받아서 죽을 지경인데 주님은 족하다는 겁니다. 니가 원산에서 죽든 말든 그걸로 족하대요. 김정은의 신세가 좋다고 할 게 아니고, 바로 우리가 그 모습이다. 김정은이나 우리나 아담에 속하잖아요. 김정은이의 속성이 지금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어요. 똑같습니다. 김정은이라는 그 청년이 원산 그 동네 산에서 감자나 캐고 감자나 먹으면서 그냥그냥 두 끼나 먹고 살게 된다면 스트레스 안 받을 거예요. 자기가 평민이니까. 위대한 태양이 아니고 평민이니까. 그렇게 스트레스 안 받을 거예요. ‘아이고, 살다가 감자 떨어지면 죽지. 배급 떨어지면 죽지.’ 뭐 이래 되겠죠.

그런데 김정은이는 자기를 뭐로 봅니까? 민족의 태양으로 보잖아요. 백두대간. 그러니까 이게 착오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지도자 그걸 보지 않는데. 그걸 빼고 보는데. 하나님은 그냥 죄인으로 보는데. 본인 옆에서 으쌰으쌰해주니까, 지가 백두대간의 뭐 민족의 지도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착오, 우리는 오늘날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라 이 말이죠. 우리도. 사도바울에게 사탄의 가시를 준 것은 마음을 낮추라 이 말이죠. 본인의 능력으로 못 낮춰요. 주께서 이걸, 그야말로 스탠트 수술을 하든지, 심줄을 심던지, 사탄의 가시를 박아서 사탄의 가시가 영원히 죽을 때까지 동행해줘야 비로소 주께서 규정한 사도가 됩니다. 사도에게는 성도다움이 돼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사탄의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사도기 때문에 박아놓은 거예요. 사도기 때문에. 성경대로 하면 자고하지 말라고. 스스로 자기를 지도자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말 많은 사람은 말을 조심하고, 남을 가르치는 자는 혀를 조심하라. 뭐 이런 이야기가 야고보서에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일은 시키되, 일을 시킨다고 해서, 남이 나한테 배운다고 해서 니가 남보다 낫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여지없이 사탄의 가시를 거기다가 심어버린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의 흐름이에요. 흐름. 오늘 제목을 흐름이라고 할까? 흐름이라는 것, 흐름은 물방울들이 같이 통합돼서 그냥 하나님께서 쫙쫙 주의 주되심을 향하여 밀려나가거든요. 근데 그 물방울의 모양새가 다 다르고 크기가 다 달라서, 나는 니보다 더 낫다. 내 모양은 짜부라져서 인생 못 살겠다. 이러지 말라 이 말이죠. 어디를 가느냐 하는 이 방향이 중요합니다. 집사님 어디로 가십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가신 곳이 우리 가는 곳이잖아요. 방향이. 주님 가신 곳으로 방향을 잡으면, 우리는 뭘 쳐다보느냐 하면은 주님 가신 곳을 쳐다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주님 찾아 가는 게 아니고 자기 생각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주님 가시는 곳과 따로 본인만이 가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본인이 가고 싶은 곳. 그렇게 가게 되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은 흐름이 아니고 동행입니다. 뭐, 이것도 정한 것이 아니지만. 동행이 없어요. 가룟 유다는 동행이 없고, 기껏 동행하는 것이 사탄하고 동행하는 것이고. 동행이 없고, 뭐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이해가 되시겠죠. 지금부터는 어렵습니다. 무척 어려워요. 어렵기 때문에 어느 대목에서 어려운지를 성경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아멘.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지 말라. 요한복음 20장 17절.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다윗과 사울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줬죠.

그런데 특징이 뭐냐, 다윗도 그 당시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죠. 사울도 눈에 보입니다. 다윗이 보기에 사울도 눈에 보이고 사울 보기에 다윗도 눈에 보이죠. 모두 다 가시적, 눈에 보인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눈 뜬 사람은, 장님이 아닌 이상에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사울 앞에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백성들이 어떻게 호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죠.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열배나 더 쳐주거든요. 주식 시가를. 이걸 다 알죠. 그래서 둘이 치열하게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만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만진다는 말은 눈에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셨네. 만져봅시다.” 눈에 보인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저게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러면 내가 손을 뻗는다든지 내가 눈으로 봤을 때 거기 계시네, 거기 존재하고 계시네, 거기 있네. 이게 성립이 되죠. 그 방식은 무슨 방식이냐 하면은 구약방식이죠. 구약방식. 뭐가 어려운가 하면은 눈에 보이는 식으로 너와 동행하는 형식을 나는 취하지 않겠다. 만지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 가버려요.

그러면 제자들은 누구하고 동행하느냐 하면은, 이미 한쪽은 아버지께로 가버린 사람이에요. 가버리면 제자들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 동행이 된다는 것. 와! 이거 그야말로 불가능해요. 안 보이는데 동행이 되니까, 안 보이는 것이 동행이 된다는 이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뭐가 장애가 되느냐 하면은 보이는 것들이 다 장애가 돼요. 신종코로나, 대전, 아파트, 차, 자식들, 교회 가면 교인들, 헌금 내서 만든 교회 예배당, 신축 예배당. 이 모든 것들이 뭐를 가리느냐 하면은 주님의 복음과 십자가를 가리는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요양병원에 있는 우리 아버지. 모든 게.

그 장애물의 가장 장애물이 뭐냐 하면은 본인이라는 것. 본인이 본인의 장애물이 돼요. ‘나는 아무도 없어. 나 혼자 뿐이야.’ 이런 생각이 하루 스물 네 시간, 이 생각뿐이에요. ‘내 곁에 주님이 계신다. 그래. 믿어야 돼.’ 이게 억지스럽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개코, 기도에도 응답을 안 해주는데요. 냉철한 이성을 동원해서 생각해보자. 내가 50년을 예수 믿었다. 나는 직분이 장로다. 집사다. 그런데 52년 째, 개코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나는 그렇게 소망할 뿐이죠. 나는 그렇게 소망하죠. 소망하는데 현실은 홀로 태어나서 결국 죽을 때도 혼자밖에 없다. 자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식들은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유산가지고 싸움이나 하고. 짜장면으로 싸대기 날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더러워서 아버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요. 이게 kbs1 ‘기막힌 유산’이라는 드라마 내용이 아닙니까? 김치 싸대기에다 짜장면 싸대기까지 나오는데. 아버지가 참다 참다 못해서 다시 살아났어요. 드라마에서 진짜 살아났어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서로 속이는 연기들을 하는 겁니다. 교회가. 왜냐하면 평소에 자존감이 있거든요. 자존감은 남들이, 그걸 타자라고 하는데, 타자가 인정을 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저 사람은 천천이고 나는 만만이라고. 나를 항상 오냐오냐 하는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고 내가 그렇게 오인하는 겁니다. “어머니 없이는 못 살겠어요. 어머니 정말 우리를 잘 키워줬어요.” “그래. 내가 니한테 그런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고생한 것을 다 잊어버린다.” 둘 다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의를 포기를 못합니다. 자기 의로움. 홀로 최고 지점에 앉아야만 내 욕망이, 악마가 준 욕망이 만족해요. 최고지점에. 남은 나를 우러러봐야 되고 나는 남을 밑으로 봐야 되고. 이러한 요소가 다윗에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겠죠. 그 다윗 옆에 지금 누굴 동행하는 겁니까? 사울이죠. 사울의 그 이스라엘 왕 됨은 다윗의 내부마음입니다. 내부 본질이에요. 내부성이에요. 내면성. 나의 적이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이죠. 내 안에. 내 안에 들어있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붙여줌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힘으로 사울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 비로소 사울을 이기는 겁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 비로소 사울 집안은 거덜 나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하고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누구의 집이 되느냐 하면은 다윗의 왕국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왕국이 되고. 사울에게는 뭐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내부가 순전히 죄만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본인이 인정하는 그러한 혜택을 못 입었어요. 성신이 온 게 아니고 뭐가 왔느냐 하면은 악신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사울에게 뭘 내려줍니까? 악신을, 그것도 힘 있게 내리죠.

골리앗을 이긴 영웅, 소년 다윗이 이겼으니까 얼마나 영웅이 되겠습니까? 다윗은 그야말로 다영웅이에요. 다영웅. 다윗은 영웅이죠. 영웅인데, 다윗이 영웅이 되면 안 돼요. 누구의 공격을 받아야 돼요? 사울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돼요.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시를 한 번 보세요. 시편에 나오는 시는 신날 때 나오는 시가 아니고 전부 다 난데없이 억울함을 당할 때 튀어나왔던 고백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예수님의 모든 사역, 행하심과 기적과 모든 사역과 설교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말씀들이에요. 십자가. 모든 예수님의 행하심과 병 고침,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병 고침에 눈독을 들여 버리면 십자가를 놓치고, 그 대신 인간들이 저 힘을 내 힘으로 가져서 나는 더 큰 영웅이 되겠다. 나라는 존재는 더 큰 내 목적에 부합이 되는, 내가 최고라는 목적에 부합이 되는 강한 나. 내가 원하는 나. 그 나에 대해서 예수님이 협조해주는구나.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기도해서 복 받겠다는 시도가 전부 다 그런 시도거든요. 지금 힘이 모자라는데 하나님께 기도해가지고 더 큰 힘을 기르게 되면 남들이 나를 좋게 볼 거죠. 그러면 남들이 나를 좋게 보게 되면, 타인이 나를 좋게 보게 되면, 그것이 뭐다? 지금의 진짜 나다움이라고 그렇게 확정짓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의 심리가.

그거는 누구의 일이냐 하면은 사울이 그런 식이에요. 사울에게 뭐가 임했다고 했습니까? 악신이 임했죠. 악신이 임한 자들이 그런 식으로 평소에 살아가는 거예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자기 잘되기 위해서. 아까도 강의했지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이 등장하는 것을 예상 못했어요. 영웅 되고자 하는 그 어떤 시도는 없었습니다. 사울도 사실은 왕이 되기 전에 그랬었어요. 자기가 왕 된다는 것에 극구 사양한 겁니다. “나같이 이 작은 자가 어떻게 왕이 되겠습니까?” 그때 굉장히 겸손했었어요. 심지어 사울이라는 사람은 왕 되기 전에 뭐까지 했느냐 하면은, 사무엘을 만나 함께 있을 때 예언도 했어요. 성신에 의해서 예언을 막 했어요.

그래서 사울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이다. 예언자 그룹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소문날 정도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게 사울이 예언한 것은 사울 덕분이 아니고 그게 사무엘과 함께 있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십자가마을에 영어로 번역한 것이 있잖아요. 거기에 댓글을 제가 달았잖아요. 그 댓글에 보면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가장 강한 복수는, 니 맘대로 살아라.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죽어서 지옥이 아니라 벌써 지옥이에요. 동행이 빠져있다 이 말이에요.

동행이 빠져있으니까, 지옥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본인 자체가 자기한테 짐이 되거든요. 짐이 되니까, 세상이 자기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럼 누굴 지적하고 누굴 원망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본인을 계속 지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죽기 전에 벌써 지옥생활 시작한 거예요. 개시한 거예요.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남 탓 하거든요. 남 탓. 남 탓을 하지만 남 탓을 한다는 자체가 결국 누구한테 옵니까? 그 탓이 결국 누구 탓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내 욕망에 결핍이 일어났다. 내가 지금 불만족스럽다는 표시에요. 불만족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렇다고요?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사람. 자기한테 불만족스러우니까 그 불만족을 누구한테 터트립니까? 가까운 아내, 가족들한테 마구, 마구 분노를 퍼붓겠죠. 지금까지 다들 그런 생활을 했었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고. 했었던 사람들도 있고. 돌아가신 분들 중에도 있고. 어쩜 자기밖에 몰라. 자기가 제일 아파.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아픈 사람이 없어. 자기가 제일 고생 많이 하고, 팔자 제일 더럽고, 가장 불행스럽고, 가장 비극적이고, 인생 꼬일 대로 꼬인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 자기가 인생 제일 꼬였어.

겉으로는 남 탓을 하지만, 사실은 솔직하게 말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맘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 이런 삶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그전까지는 주위에서 우쌰우쌰 나 잘한다, 나 칭찬하는 친구들이 있어가지고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자기인줄 알았어요. 내가 그리로 계속 가는 줄로 알았죠. 친구 하나 떨어지고 누구 하나 잘되면 내 곁에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별로 남아있지를 않아요. 나를 힘들게 할 때, 다시 말해서 사울 입장에서는 그나마 왕이었어요. 이 세상에 칭찬받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등장하고, 소년이 자기 말을 안 듣고, 갑옷도 그냥 안 입고, 아무 무장이 되지 않은 채로 이겼어요. 그 다음부터는 사울에게 있어서 자기가 받은 영광의 대부분을 누구한테 뺏겼습니까? 다윗에게 뺏긴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 생각했던 그 자아상이 완전히 황폐해져버렸죠. 파탄이 난 겁니다. 이걸 가지고 무장해제라고 해요. 무장해제. 이걸 제목으로 해야 되겠다. 이게 뭐냐 하면은 사울과 다윗이 만났을 때에 좋게 만난 게 아니고 지금 적으로 만났잖아요. 팬클럽이 천천인 사람과 만만인 사람과 적으로 만났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각자 둘러싼 무장된 힘이 있다는 거예요. 무장된 힘. 사울에게는 천명이 사울을 옹호하고 다윗은 만 명이 옹호한다. 만 명이 옹호한 거예요.

그러면 이 소리를 들을 때 사울의 무장된 힘은 천밖에 안 되고 다윗은 만이 될 때, 이런 식으로 인간 대 인간이 서로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무장된 힘, 무장의 힘, 무장이라는 것은 무기를 장착하는 거예요. 이 힘을 사울은 의도적으로 긁어모은 거죠. 왕이니까. 그걸 지키려고 하겠죠. 다윗에게 무장된 힘은 본인이 긁어모으려고 했습니까? 이거는 누가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신 거죠. 그러면 사울이 다윗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윗을 한번 빼버립시다.

다윗을 빼버리면 사울은 지금 누구를 공격하느냐 하면은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신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 되니까, 사울을 뭐라고 규정하느냐 하면은, 사울의 모든 행동은 어디에 규정된다? 하나님의 반대말이 뭡니까? 악신이죠. 악신이 하는 행위가 되는 거예요. 다윗의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우리는 뭘 봐야 하느냐 하면은, 다윗만 보지 마시고 악신에 들린 자가 어떤 식으로 다윗을 무엇에 근거해서 공격하는가를 봐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가 자꾸 다윗 편에 서려고 하지 말고 사울 편에 서서, 우리는 또 어떤 식으로 남을 험담하고 공격하는가를 사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봐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점을 좀 더 쉽게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다윗을 신문지로 봅시다. 신문지. 여기에 가위를 하나 준비합니다. 가위를 준비했죠. 그 다음에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죠. 하나님과. 근데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점선으로 표시합니다. 그럼 가위가지고 이 하나님의 부분을 한번 오려봅시다. 오려봅니다. 오렸으니까 실선이 딱 되겠죠. 다윗에게는 여기가, 오린 하나님 부분이 비어있어요. 비어있다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을 소유합니까? 못합니까? 하나님이 빠져나왔으니까 소유되지를 못했죠. 소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려오면서 사울과 붙여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했잖아요. 성령이 임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자기 맘대로 소유할 수 있다, 없다? 자기 맘대로 부릴 수 있다, 없다? 안 되는 거예요. 왜? 비어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거든요. 죄인 중에 괴수. 그러면 이 죄인 중에 괴수를 주께서 사용한다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잖아요. 신약적으로 따져보면.

이 하나님의 은혜주심. 그러니까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그냥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 자체가 뭐냐 하면은, 바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장된 힘이 된다는 사실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냥 용서받은 거예요. “엄마는 나한테 그런 잔소리를 하지 마! 엄마는 왜 그렇게 하는데?”라고 했을 때, “왜? 주님 주신 은혜다.” 이 말은 뭐냐, 남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욕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세리와 창기가 그랬어요. 세리와 창기가. “얼레리 꼴레리 그 집안 망했대.” “그래, 망했다. 그래.” 왜? 죄인이니까 망한들, 긍휼 입은 것만 생각하고 은혜 입은 것만 생각할 때, 어떻게 망하든 간에 나를 위함이 아니고, 주님이 빠져나가고 남은 무장된 주님의 은혜. 이 빵꾸난 종이.

이걸 통해서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된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내 하루의 삶이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멍 난 빈종이로, 털레털레 구멍 난 종이로, 신문지로 가볍게 살아가는 거예요. 무장되지 않은 채. 주일 낮 설교와 결합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도 고귀하지 않다. 첫 번째에 고귀하다고 들어가면 안 되죠. 주께서 죽여 버리죠. 나는 고귀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존재하는 힘은 주께서 죄인을 용서하신, 그 용서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 용서가.

그러니까 이 빈 곳에 용서가 살아있죠. 왜 가위를 가지고 오리라고 이야기를 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아까 요한복음 20장 17절, 이제 외우시죠? 뭐라고 했습니까? 만지지 말라! 보인다? 안 보인다? 주님은 안 보이죠. 안 보이는 주님의 용서가 보이는 인간의 칭찬보다 더 나은 거예요. 청와대 삼촌보다 하늘에 계신 주님이 더 힘이 된다 이 말이죠. 1년이 가도 한 번도 안 찾아오는 자식하고 며느리보다, 나를 아프게 해가지고 이 마지막 노년을 요양병원에서 그야말로 썩어지게 만드는 주님이 더 좋아.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라는 것이 진정성이 있죠.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죠. 근데 다윗도 그렇게 안 돼요. 다윗도 자꾸 물어요. 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삽니까? 내가 주님에게 나쁜 짓도 한 것 없는데 왜 힘들게 합니까? 나쁜 짓해서 사울한테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울의 공격이 없으면 다윗이 다윗답지를 않아요. 다윗을 존재에서 과정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바로 다윗이 모르는 자기의 내면, 다윗이 아담의 죄에서 태어났잖아요. 다윗도 마찬가지고 사울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것이 나의 내면이 가시화되는 거죠. 바깥에.

나를 괴롭히는 그것이, 바로 그게 왜 있느냐, 지금 남이 나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심한 괴로움이 내가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아휴,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하다니.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닌데. 나쁜 짓을 하면 가만히 두지 않고 나중에 벌을 내리면 그럼 교회 다닌 것 다 손해 보는데. 그럼 복을 못 받는데.’ 자꾸 내가 내 자신을 당구공처럼 응축하는데, 내가 나쁜 짓해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그게 악신이 들린 건데. 선악이거든요. 악신이 뭡니까?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러니까 다윗이 생명나무라면 사울은 무슨 나무입니까? 선악과나무인 거예요. 선악적인 요소가 다윗 내부에 여전히 살아있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설교하면서 죄에 대해서 세모난 죄, 네모난 죄, 오각형 죄, 이야기를 했죠. 그 죄는 죄 같지도 않는 죄예요. 그게 죄라고 느껴지는 것은 평소에 남들한테 얼마나 욕 안 얻어먹고 살라고, 그게 사는 보람이고, 내가 사는 이유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죄는 뭡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 거예요. 전두환 아닙니까? 전두환이가 지금 뭐 5,18 사과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데, 그거 죄도 아니에요. 죄가 아니라니까요. 십자가를 부인하는 그게 죄라니까요. 왜 큰 죄를 놔두고 작은 죄를 가지고 그렇게 신경 쓰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의 과정이고 흐름이라면, “주여, 제가 몇 살까지 살겠습니까?”라는 그런 질문 자체가 나오면 안 돼요. 그렇죠. 그래서 오늘 걱정은 오늘 해질 때까지 마감하라. 해질 때까지. 내일 또 생이 보장되지 못해요. 제가 느끼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아까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것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앞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동행을 할 때 보이는 자들과 동행한다?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한다?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하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러니까 자기 세상적인 힘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사도들을 보고 얼마나 비-무장된 자들로 보겠어요? 니 재산 얼마야? 니 팬클럽 얼마야? 니 세상권세자야? 권세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무시하겠냐 이 말이죠. 니가 돈이 많아? 아니면 권력자야? 아니면 자식이 잘 돼? 그렇게 묻는 것은, 그렇게 묻는 세상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본인이 나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는 것을 사도 앞에 다 티내고 있는 겁니다. 티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보이는 게. 그럴 때 우리는 “흥!” 하죠. 근데 이게 이론상 그렇지만, 실상은 친구들 만나가지고 이번에 애 자랑하고 이번에 또 애가 아파트 바꾸라고 3억 주고 차 바꾸라고 1억 주고, 요새 차 새로 바꿔야 하는데 고민이라고 후딱 약 올리고 집에 간다면, 우리는 복음 안다 치고 이론을 동원하는 거예요. ‘흥! 나는 예수님 십자가만 있으면 돼!’라고 했는데, 보내놓고 나서는, 왜 그리 이게 사는 것도 아니고. “이게 사는 거야? 거지지. 내 인생 돌아보면 도대체 남는 게 하나도 없고. 주여, 어찌합니까?” 또 주님한테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이 나오기 전에 10분 쉬어야 돼요.
 이미아(IP:122.♡.170.138) 20-05-07 22:49 
대전-120강 마태복음26장69-75절(차단효과)20200428-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보겠습니다.

69절,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절,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절,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절,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절,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아멘. 여기에 베드로가 나오죠. 베드로가 나오는데, 현재 베드로 입장에서, 여기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럼 베드로가 여기에 있다. 이걸 제가 베드로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 자리가 있는데, 이쪽은 뭡니까? 예수님이 계시죠.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의 자리가 있겠죠. 그럼 베드로의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여기 중간에는 사람들의 자리가 있겠죠. 자리가 있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하고 베드로 당신하고 한패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들이 베드로하고 예수님하고 한패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물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 지금 베드로 아십니까? 이래 물은 것이 아니고, 베드로보고 이렇게 예수님을 아냐고 물었죠.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베드로보고 “너 예수님 좋아하지?”라고 물으니까, 베드로 입에서 나온 말이 뭐냐 하면은 “나도 저 예수를 저주한다. 싫어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하고의 자리하고 예수님의 자리는 이게 지금 차단되어 있습니다. 끊어져있죠. 우리가 이 대목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 대목을 보면서 요거 한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이 말씀의 정답은 이렇습니다. “주님은 차단하는 식으로 구원하신다.” 이것만 알면 정답입니다. 차단하는 식으로. 받아주는 식이 아니라 차단하는 식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뭘 차단했느냐 하면은 베드로와 예수님 자리가 차단되어 있음을, 그걸 알려주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이 차단되었음을 그전에는 베드로가 몰랐어요. 수제자니까. 차단이 안 된 줄 알았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베드로가 아무리 3년 동안 같이 다녀도 베드로는 주님과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만들어내신 겁니다. “니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쓰고 원해도 니는 내 곳에 오지를 못한다.” 그것을 일관화 시키는 겁니다. 그걸 그대로 정형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정답은 뭐냐, 주님은 차단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이 말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대단히 감사하죠. 왜 그러냐 하면은 내가 어떤 시도를 해도 이 차단벽을 통과하지 못함이 뻔하기 때문에. 이게 뻔하거든요. 내가 어떤 식으로 해도 내 쪽에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거는 성사되지 않음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줘요. 편하게. 포기하게 해주죠. 포기하게 해주고, 이 포기할 때 그냥 포기하면 안 되죠. 차단된 이유를 알고 포기해야 되죠.

그게 뭐냐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되신 주님과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차단되어야 마땅합니다. 자, 비슷한 이유를 들어봅시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이야기 나오죠. 탕자가 언제 아버지를 알았느냐 하면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아버지를 몰라요.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혼자 나갔을 때에, 비로소 내가 아들의 입장에서 되돌아올 그러한 요소는 나한테 없음을 알아요. 내가 마땅히 아버지의 집에 가도 돼, 라는 그 사실을, 전에 있을 때는 그래도 될 줄 알았는데, 나가보니까 마땅히 나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걸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잃어버린다.’라고 해요. 잃어버리는 게 바로 차단이에요.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어버렸다는 것을 이거는 누가 그렇게 규정해야 하느냐 하면은 내가 규정하면 안 되고, 주님이 너 잃어버린 자라고 규정을 해줘야, 잃어버렸다는 요소가 있어줘야 그 요소를 품고 구원이 돼요. 잃어버림이 빠져버리면 구원이 안 됩니다. 마땅히 구원될 자이기 때문에 구원이 된다. 이래 나와요. 그러면 지 잘남의 증인이 돼버려요. 주님의 증인이 아니고. 모든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차단이 드러나야 해석이 돼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가 드러나야 해석이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그걸 어디에다가 시도를 하느냐 하면은 부활에다가 욕심을 내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부인하고 난 뒤에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체포되어 가지고 사망하셨죠. 보통 의사들이 “운명하셨습니다.”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느 편으로 건너갔느냐 하면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살아있는 사람이 따라 잡을 수 없는 쪽으로 건너가 버렸죠. 차단이 확실하게 차단이 되었죠. 문제는 인간들이 그 예수님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사람은 죽어본 적이 없어요. 이게 신앙의 제일 난관입니다. 죽어본 적이 없습니다. 죽어본 적이 없으니까, 죽었다 치고 기껏 상상하는 게 다예요. 죽었다 치고. 죽고 난 뒤에 “주님이 저기 계시지. 나는 주님 믿습니다.” 이렇게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짜는데, 실제로 죽어봤나? 안 죽어봤다 이 말이죠. 안 죽어보니까 상상일 뿐이에요. 실제로 죽어본 적이 없습니다. 탕자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탕자는 탕자 자기 자신의 재산이 다 날아갈 때에 탕자 자신이 당당하게 돌아갈 데가 없음을 알았죠. 당당하게. 당당하게 돌아갈 데가 없다. 그러면 취직자리라도 아버지 집에 취직하고 싶은데, 그때는 아들의 자격이다? 아니다? 아들의 자격이 없죠.

그래서 탕자 자기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 뭘 잃었느냐 하면은 탕자가 희망을 잃어요. 희망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이게 차단의 효과입니다. 차단의 효과. 주께서 차단해버리면 우리한테는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망이 없죠. 이 지경까지 주께서는 유도하십니다. 이 지경까지. 뭐, “믿습니다.”를 천번만번해도 소용없어요.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없을 때에, 그때 인간들이 하는 작업이 뭐냐 하면은, 소망이 없을 때, 희망이 없을 때에 인간들은 그 다음에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대용소망, 대용희망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대용이라는 말은 보통 군인들 건빵을 뭐라고 합니까? 대용식사라고 하죠. 정식식사가 아니라 대용하는 것. 대신, 대체하는 것. 소망이 없으니까, 소망이 없어서 못 견디니까, 소망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 억지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 나를 구원해가라고 내가 추파를 던지는 겁니다. 주님한테. 주님을 유혹하는 거예요. 살랑살랑 재롱부리면서. 때로는 화내다가, 그것도 안 통하면 스스로 울기도 하다가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어찌합니까? 가슴을 치고, 울기도 하고, 뭘 이렇게 화내기도 하고 뭘 해도 어디까지나 대용이에요. 비어있는 소망이 너무나 허전해서 그걸 메워서 뭐라도 계속 때우고 채우는 것에 진력을 다합니다. 진력이라는 말은 일반사람들은 모르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알죠. 모든 정력을 거기다가 다 쏟아 붓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이걸 식물인간이다. 식물인간. 심정지 당해서 누워있는 식물인간. 그냥 시체가 된 거예요. 시체.

이런 베드로에게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여기 사람자리, 베드로 자리, 주님자리가 있죠. 그런 베드로에게 차단이 됐다. 차단. 본인이 주님을 저주한다고 했으니까 차단이 됐잖아요. 이 세 자리 가운데서 두 자리는 차단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차단되지 않은 자리가 있었어요. 그 자리가 뭐냐 하면은 닭 자리. 닭 자리는 차단이 안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우는데요, 자기 자신이 실망스러워서 우는데, 그 울 때 무슨 소리를 듣고서 웁니까? 닭소리를 듣고 울죠. 왜냐하면 닭소리가 그냥 닭소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예언한 하나의 계기를 통해서, 주님께서 예언하심이 그대로 적중했음을 알고 우는 겁니다. 적중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베드로가 자기를 버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아까 이야기한 대로 닭이라는 것은 차단의 효과입니다.

닭이라고 해서 생각이 나는데, 저의 처가 쪽에 어떤 아시는 분인데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실 때 연세가 84세에요. 84세의 할머니인데 돌아가실 때 얼굴이 멀쩡했어요. 홀로 사시다가 뒤늦게 83세 때에 사위가 목사님이신데, 딸은 목사님 사모님이시고, 그 사택이 넓고 방이 있으니까 장모님을 거기다가 모셨다 이 말이죠. 그 장모님에게 공책을 주고 연필을 줬어요. 그러니까 그 장모님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일기. 근데 그 일기가 세상 사람들 보기에 너무 순수하고 순박하고 꾸밈없는 신앙이 그대로 일기장에 다 있어요. 그래서 그 일기를 책으로 만들었는데, 나중에 돌아가시고 책으로 만들었는데. 한쪽은 할머니의 실제 필기 그대로 인쇄했고 한쪽은 알아보기 쉽게 활자처럼 해가지고 책을 냈어요. 그 책을 제가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공짜로 나눠줄 예정인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할머니가 굉장히 옛날 할머니에요. 아버지가 독립운동 했으니까. 초창기 교회의 권사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닭을 사서 계란을 낳으면 그걸 팔아서 개를 사고, 개가 크면 팔아서 돼지를 사고, 돼지가 크면 팔아서 소를 사고, 소를 잘 키워서 이 집안의 보탬이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일기장에 나와요. 어느 날 이웃집 개가 그 닭을 가져가버렸어요. 그러면 그 할머니의 소망은 어떻게 됩니까? 일거에 초반에 그만 날아가 버렸죠.

자, 베드로를 봅시다. 베드로가 미스였던 게 뭐냐 하면은 출발점을 자기 자리부터 출발한 거예요. 이게 차단이라는 것을 생각 못하고 내 자리부터 출발해도 차단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기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하고 모든 게 나로부터 하게 되면 차단이라는 벽을 내 힘으로 뚫어낼 수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를 십자가 앞에서 왜 배치하셨습니까? 베드로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어요. 베드로 없는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있어줘야 십자가 의미가 삽니다. 차단의 의미가 살아요. 십자가는 뭐냐, 확실히 차단되었음을 가장 가까운 수제자를 통해서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그래도 목사님, 예수님께서 나중에 성령 보내서 베드로를 살려냈잖아요?” 이렇게 하잖아요. 베드로를 살려내지 않습니다. 닭을 살려내죠. 베드로가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하면은 닭으로 바뀌어야 돼요. 자, 닭과 베드로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은 베드로는 차단되어 있음. 닭은 차단되어 있지 않음. 왜냐, 닭은 꼬끼오~ 하고 두 번 울어야 돼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이 자리가 어느 자리에 가야 돼요? 닭 자리로 가야 돼요. 닭 자리로. 이 베드로 자리가 차단의 자리다 이 말이죠. 그럼 베드로 자리에서 잉태하고 베드로 자리에서 키워지고 커지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베드로 이 본인이 예수님 앞에 자기 행함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베드로 자리가 그렇게 베드로를 부추긴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나한테 이런 자리가 있을 줄을 몰랐죠. 자기는 예수님의 수제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른 자리인줄 알았어요.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이 누구이야기 합니까? 베드로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죠. 이렇게 해서 베드로가 이 사람들하고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죠. 그러면 사람들의 자리하고 베드로의 자리하고 평소에 같았다는 말입니까? 달랐다는 말입니까? 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거예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처음에 이렇게 이야기했죠. 신종코로나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같이 온다고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동질하다는 것. 동일성이에요.

그래서 설교 초반에 사도바울이 저희는 멸망의 빙거, 증거라고 할 때에 저는 이걸 뭐라고 봅니까? 인간에 대한 욕설이라고 봅니다. 인간에 대한 욕설. 나는 아니요, 라고 말하는 자리가 똑같아요. 같은 아담의 자리, 똑같은 자리였어요. 멸망 되어야 된다는, 멸망을 모르면 예수님을 몰라요. 나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멸망의 사람하고 왜 그렇게 친하고, 죽고 못 살고, 교회 갈 시간에도 멸망의 친구가 오면 반기고. 그 멸망의 자리, 멸망의 증거를 소개할 때 그 사람들에게 항상 1순위가 나는 고귀하다. 출발점이 항상 여기에요. 나는 고귀하다.

근데 아까 제가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죽어봤어요? 안 죽어봤어요? 안 죽어봤죠. 주님이 가시는 그 세계에 인간은 아직 안 가본 거예요. 아직 안 가봤으니까, 대용, 가짜소망, 가짜예수, 가짜 삼위일체, 계속해서 만들어내는데, 그 만들어내는 자리가 무슨 자리다? 나는 고귀하다.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 누가 감히 내 구원의 자리를 차단해? 그 차단한 사람을 나는 용서하지 않으리. 근데 그 차단한 분이 주님인데요? 주님이 차단했는데요? 그러면 베드로가 지옥에 갔습니까? 그게 아니죠.

베드로의 그러한 예수님 부인, 예수님 저주가 이게 뭐냐 하면은 주께서 지시한 차단의 효과가 되는 겁니다. 차단의 효과. 무슨 말이냐 하면은 십자가로 구원받으라는 말은 니가 십자가를 믿을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만들어낸 나, 자리는 어디 진흙이 있으면 그 진흙으로 만들면 내가 되잖아요. 그 자리는 나만의 자리가 아니고 아까 베드로를 질시하는 그 수많은 민중들, 그 사람들과 자리를 공유하고 있죠. 그러니까 너, 나 차이가 나지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전부 다 같은 자리 방석을 깔고 앉은 거예요. 같이 이불 덮고 같이 사는 거예요.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뭔가 융기 되어가지고 이게 ‘너’고 이게 ‘나’라고 할지라도 자리는 공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공통의 자리에서 십자가로 가는 것은 이미 차단되어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닭을 하는 것은 니가 닭처럼 정신 차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베드로가 닭 앞에서 울었다고 해서 베드로가 울어서 구원받습니까? 그럼 십자가와 관계가 없게요. 그럼 실컷 울면 천당 보내주나요? 아니잖아요. 원천을 봐야죠. 원천. 나라는 인간은 원천이, 이미 차단된 원천의 하나의 부산물이거든요. 부산물. 거기서 생성된 혹 같은 것이라 이 말이죠.

십자가 믿어봤자, 이거는 옛날의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르고 믿는다고 했던 그 사고방식하고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죠. 다만 대용십자가, 가짜 십자가만 만들어내죠. 누구 좋으라고? 나는 이렇게 십자가 믿었으니까, 믿은 나의 공로를 봐서라도 주께 천국을 넣어달라는 거예요. 내가 믿었다는 거예요. 그건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죠. 출발점을 기존의 현재 나의 자리에서 하는 거니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할 때에 자기 부인이 인간에게는 성사가 안 돼요.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닭의 자리가 어디일까요? 닭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이죠. 닭이 정신차려가지고 시계보고 이때쯤 울어주자. 하나! 둘! 셋! 이러는 게 아니에요. 닭은 예수님 자리에 종속된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울 때 울어야 해요. 그런데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울었다는 말은 현재 베드로의 자리하고 닭의 원천인 예수님 자리하고 이게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죠. 끊어져있다는 것이죠. 예수님하고 닭하고 함께 묶습니다. 베드로하고 세상 사람들하고 묶습니다. 그러면 이건 완전히 끊어진 겁니다.

누가 창세기 4장 1절을 읽어보세요.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득남한 그 아이의 이름이 뭡니까? 가인입니다. 그러나 아벨한테는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안 하죠. 그렇죠. 아벨한테는 그런 이야기가 없죠. 가인에게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낳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가인이 창세기 4장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가인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가인을 통해서 나와 버려요. 왜 그러냐 하면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을 때 배후자 되는 뱀, 악마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선악과를 훼손하도록 그렇게 도구로 사용하죠. 하나의 통로로, 수단으로 사용했죠.

이 사실에 대해서, 이 사실을 하나님 입장에서는 옛날에 한때 있었던 과거의 사실로 돌이키기를 원치 않았던 거예요. 그걸로 뱀이 영원히 멸망, 지옥 갈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유지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가 인간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인간을 통해서 증명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뜻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미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가인을 통해서 주께서 실시하신 거예요. 여호와로 말미암아, 라는 것은 결국은 이 지상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가인은 죄를 짓는 겁니다. 죄로 말미암아 죄를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인의 원천은 가인이 아니고 죄가 가인을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죄가 지배하는 그런 입장에 있어요.

그게 창세기 4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죄의 소원은 어디에 있다? 죄가 노리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인을 노리는 거예요. 죄가 아벨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노린다니까요. 죄가. 그냥 죄가 아벨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가인을 가지고 아벨을 죽이게 만들어요. 그래야 죄가 가시적이 돼버려요. 가시적. 가시적이 되고 하나님은 불가시적. 하나님은 안 보이고. 죄가 또는 악마가 가시적 형태를 아바타를 사용하게 하도록 하는 거예요. 악마로 하여금.

그래서 주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은 다른 말로 악마의 일은, 영적인 일은 십자가의 복음이 주어지는 현장에만 나타나요. 그 외에는 안 나타나요. 안 나타난다고요. 자, 십자가 없는 현장에서의 인간들이 삶은 뭐냐 하면은, “죽어서 어떻게 되지?” “아이고, 그건 죽어보면 알겠지. 뭐. 지금은 그런 것 생각할 필요가 없고, 신종코로나 걸리지 않도록 마스크나 잘하자.” 뭐 이래 나오겠죠. 자, 뭐라고 합니까? “에구, 죽는 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이나 살자.” 이렇게 되겠죠.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예수님은 지금 어느 쪽으로 넘어갔습니까? 이미 죽음 쪽으로 넘어갔죠. 지금 베드로가 못 따라가잖아요. 차단되어 있어요. 죽는다고 해서 금세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죽고 난 뒤의 삶에 대해서 인간은 안다? 모른다? 전혀 모르죠. 죽고 난 뒤에도 모르면서 개코나 이 땅에 대해서 알아요? 이 땅의 것을 뭘 알아요? 모르니까 사람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대용종교를 만들어요. 대용종교를. 종교를 대용하고 진리를 대용하고. 대용종교. 대용진리. 사랑도 대용사랑. 가짜 사랑을 계속 만들어내는 거예요. 왜? 소망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허하기 때문에. 희망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구원받고자 하는 그러한 희망을 교회가 뭔가 채워줘야 교회갈 맛이 나거든요.

어느 교회가 차단을 이야기합니까? “떨어졌습니다. 집에 가세요.” 뭐 이런 교회를 봤습니까? “소용없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해주시옵소서.” “내가 죽어봤습니까?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요?” 이래 되겠죠. “그저 좋은 말씀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옆에서 가짜 이야기만 해도 좋습니까?” “좋습니다. 긍정적 마인드만 주신다면, 적극적 사고방식만 주신다면!” 그런데 주께서 그런 종교, 그런 대용소망도 주의 차단 작업의 일환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사울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고요. 그런 차단. 가짜들의 범람, 가짜들밖에 없어요. 찐찐찐~ 진짜는 없어요. “진짜 나타났다. 지금!” 그런 멘트가 있는데. 지금 나타나긴 했지만.

가짜밖에 없게 하는 그것은 이미 우리 내부가 가짜 선호적이다, 라는 사실을 눈에 보이는 세상을 통해서 확인해주는 겁니다. 닭은 그냥 울었죠. 그러나 닭이 울면서, 닭이 꼬끼오~ 이래 울어야 되는데, 닭이 또 주제넘게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해가지고 떼떼루야~ 이래 울게 되면, 그건 닭이 오버한 거예요. 닭이 그냥 울어야 돼요. 닭이 그냥 울어야 되지, 닭이 말을 해가지고, 누구처럼, 발람선지자 앞에서 나귀가 이야기한 것처럼.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제넘게 오버해서 떼떼루야~ 이래 울면 안 돼요. 닭이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냥 울기만 하면 돼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제넘게 전도한다고 남 꼬시려고 할 필요가 없이 울 때 울면 돼요. 울 때.

어차피 차단된 거거든요. 우리가 설득한다고 차단된 것이 풀어지고 하는 이런 게 없습니다. 차단되는 방식으로만 주님은 세상에 작업을 해요. 차단작업. 차단작업을 하세요. 모든 걸 끊어내는 작업.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빌립보 교회 없어졌다고. 빌립보 교회가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다 없어졌어요. 뭘 교회를 지켜요? 뭘 교회를 부흥해? 없어지라고 있는 건데. 차단작업이에요.

제가 아침마다 산책, 운동 비슷하게 하는데. 사람 없는 곳에 가요. 아침에 가면 고요하거든요. 고요하고, 산이 있고, 개울도 있고,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데. 아침에 가면 차도 안 다니고 아무도 안 다니는데.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오소리하고 황새하고 새들이 와서 아침마다 시냇가에 물 먹으러 와요. 내가 아침마다 저걸 찍어야 되는데. 근데 휴대폰을 안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아침마다 휴대폰을 가지고 다녀요. 사진 찍으려고. 드디어 어제 찍었어요. 전에는 훅 날아가서 못 찍었는데, 어제는 살금살금 가서 그 오소리를 찍었습니다.

찍으면서 생각나는 게 뭐냐, 다윗 옆에 사울이 몰래 오는 것을 느꼈어요. 무장된 채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을 찍었어요. 찍고 집에 가서 그걸 찾아보니까 없어졌어요. 오소리가. 사진은 분명히 찍었는데. 그게 잘못 찍은 것이 아니고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가 찍은 대상은 3차원이거든요. 3차원이라고요. 시간, 공간. 깊이, 넓이. 사진판은 뭡니까? 면적이 2차원이잖아요. 2차원에 3차원이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컴퓨터로 확대를 해보니까 희미하게 나와 있어요. 희미하게. 분명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근데 차단되었는데 왜 차단되었느냐 하면은 베드로 입장, 성령을 받기 전에 베드로 입장, 성령을 안 받은 베드로보고, 니가 저 예수님을 부인했지? 니도 같은 당이라고 했던 인간들, 그 인간들의 마인드를 가지고서는 예수님을 느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존재하시는 예수님의 작업을, 지금도 일하기에 느껴지지를 않아요. 차원이 낮으니까. 낮은 차원에서. 아까 첫째 시간에서 이야기한, 주님께서 만지지 말라고 했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니까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내 인생 꼬여도 진짜 거지같은 인생이라고 한탄하겠죠.

그런데 여러분 사도행전 7장에 집사 한 분 등장하죠. 무슨 집사입니까? 스데반 집사죠. 스데반 집사를 2차원적으로 봅시다. 2차원적으로. 스데반 집사가 지금 죽습니다. 여기 유대인들은 짱돌을 들고 던지는데, 왜 던집니까? 죽으라고 던지죠. 죽으라고. 맞아서 아프라고 던지는 게 아니라 죽으라고 던지죠. 죽으라고 던지는데 주님이 말렸습니까? 안 말렸습니까? 안 말렸죠. 이게 문제에요. 만약에 스데반 집사가, 그때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성령 충만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령 충만이 실제로 나와 있어요.

충만이라는 말을 제가 여러 번 설명했는데, 충만이라는 말은 술 취했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술 취하면 눈에 뵈는 게 없잖아요.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실 것을 보노라 한 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이 서신 것이 보인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술에 취하면 자기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지가 지금 여기가 오줌을 눌 때인지 아닌지를 모르죠. 자기가 하는 행동이 옳은 행동인지 아닌지 전혀 감을 못 잡죠.

여러분들은 술을 전혀 드시지 않으니까 경험도 없잖아요. 오직 성령에 취해서 이만큼 살았는데. 술에 취한 사람을 보면 간접경험 할 수밖에 없는데. 보게 되면 정신 나갔죠. 미친 존재죠. 미쳤죠. 스데반 집사가 미쳤어요. 자기가 죽는 줄도 몰라요. 사실은 알죠. 알면서도 성령에 취해버리면 안일한 일상이 관심이 없어요. 왜?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의 일이 아니고 자기는 일종의 닭이거든요. 타이밍 맞춰서 주께서 돌을 던진 사람이 자기 앞에 지금 연기자로 있고, 연출자는 주님이고, 이 타이밍이 죽는 타이밍이 돼야 되거든요. 왜? 주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순종만 하면 되거든요. 그 현장을 받아들이면 돼요.

내일 염려를 할 필요가 없어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아내가 얼마나 외로울까, 그런 것도 생각이 안 나요. “아빠! 왜 죽었어.” 너무 오버했다고 아들이 자기에게 비난하는 것도 생각이 안 나요. 아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자기도 주의 일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주의 일을. 그러면 만약에 스데반 집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다면, 스데반 집사가 돌을 던질 때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게 지금의 여러분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주여, 제가 순교합니다. 주께서 제 영혼을 받아주시고, 제가 얼마나 보람된 일을 하는지 주께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하겠죠.

1순위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고. 그 다음에 돌을 거둘 것이고, 나는 덜 아플 것이고. 이런 생각하다가, 주여, 이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께서 이왕 죽는 것 인생최후를 아름답게 마감하도록 스데반집사는 순교했단다. 찬란히 순교했대, 라는 소리를 남한테 듣게 하옵소서. 이게 뭐냐 2차원적 생각이에요. 영적 생각이 아니에요. 육의 생각이에요. 육의 생각. 우리가 평소에 이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하다가 인생의 위기가 오게 되면, 이래 된 거 찬란하게 죽어서 주한테 칭찬이나 받자. 이런 계산을 머리로 굴리죠. 통밥 굴리죠. 이거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 아니에요. 끝까지 자기 의를 못 믿는 거예요. 자기의 신앙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차단의 효과가 아니에요. 차단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꾸미고 의롭게 지금 치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하기 바빠요.

그리고 영적 차원에서 보니까 스데반 집사는 뭐가 보입니까? 돌 던진 사람도 보이겠지만, 뭐가 보여요? 예수님이 지금 보입니다. 예수님이 남들한테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돌 던진 사람들한테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돌 던진 사람들이 왜 스데반 집사한테 돌을 던지느냐 하면은,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식으로 스데반 집사도 똑같이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돌을 던진 거예요. 죽는 게 무섭잖아요. 내가 죽은 것이 무섭다는 말은, “내가 돌 던지면 니도 무서워하지? 그러니까 그 설교를 멈추라 이 말이야!” 하고 돌을 던지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도 똑같은 사람으로 보면 돼요. 하지만 무엇에 충만? 성령이 오니까 2차원의 인생이 아니고, 영적 차원, 3차원을 영적으로 보면, 3차원적으로 보니까 내가 죽는 게 지극히 사소한 일인 것을. 내가 죽는 게. 에취! 하고 기침하는 거. 뭐 그 정도 밖에 안 돼요. 딸국질 하는 정도. 내가 죽는 게. 그러나 돌 던진 사람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목숨 부지하는 것,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전부 다 햄릿이에요. 햄릿. 햄릿들이 돌을 던지러 온 거예요.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뭘 전했습니까? 예수님을 전했죠. 복음을 전했죠. 설교 내용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성전 짓고 거기서 제사 드린다고 해서 의롭지 않다. 의는 예수님이 우리한테 주시는 것이 의다. 그걸 믿으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그들은 믿음에서 행함으로 빠지니까, 그게 못마땅해서 돌로 쳐 죽이라 이 말이죠. 니 우리 사람 아니라고. 자, 묻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보통 순교라고 하잖아요. 스데반 집사가 이때 순교했습니까? 평소에도 순교입니까? 평소에도 순교죠. 평소에도 3차원으로, 영적으로 보는 거예요. 꼭 죽을 때만 장렬한 게 아니고 평소에 맛있는 빵을 먹을 때도 장렬하게 빵을 먹는 거예요. “주여, 죽여주옵소서.”라고 하면서 맛있게 먹는 거예요. 참외 먹으면서도 “주여, 이거 먹고 인생 끝나게 하옵소서.” 이래요.

이것이 사도바울이 빌립보 1장에서 차라리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생이 자기에게 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짐이 안 되죠. 하나의 도구로, 주님 증거 하는 도구로, 구원의 증인으로 사는 거죠. 구원의 증인. 이거는 자기의 몫이 아니고 성령 받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 자기는 도구로서 쓰여질 뿐이에요. 아까 다윗처럼. 자, 그렇다면 계속 물어볼게요. 베드로가 나중에 성령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외칠 것은 뭐냐 하면은 “나 그때 배신했는데, 주님 때문에 나 구원받았고 나 구원받은 사람 맞다.” 이것을 증거 하겠어요? 아니면 그때 이야기만 하겠어요? 아니면 지금 이야기 하겠어요? 바로 닭과 자기 사이의 관계가 과거의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꼭 그 식으로 끊임없이 그걸 되풀이 하고 계시는 것이 현재 주님의 하신 일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영원히 계속해서 반복되는데, 그 반복되는 내용은 베드로가 배신했던 그와 같은 상황을 주께서 끊임없이 의도적으로 유발해내시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우리의 하루하루의 일과에요. 또 뭐 집에서 닭 키우지 마시고, 닭 안 키워도 누가 울어도 울어요. 우리 속에 닭이 있다. 이래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그것도 식상해서 닭이 울던 말든 하죠. 그래서 아까 그 가짜 소망, 가짜 소망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제가 답변할게요. 바로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닙니다. 내 자리에서 나오죠.

나와 내 자리의 차이점은 나는, 나라고 하면 폐쇄된 나를 이야기하지만. 내 자리는 다른 모든 사람과, 아담에 속한 자들과 공통된 것이 나를 통해서 대변해서 말해주는 것이 내 자리다. 나의 원형. 나의 바탕. 나는 하나의 돌기, 융통돌기라 하죠. 혹처럼 빠져나온 것. 원래 바닥은 뭐냐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가짜 소망의 특징은 주님을 위해서라고 핑계대면서, 척하면서 사실은 진짜 우선순위는 뭡니까? 내 미래, 내 운명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이거죠. 잘 되기를 바라는 거죠.

그러면 주께서는 차단시켰는데 우리는 내 잘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차단 자체가 이거는 우리가 스스로 강제로 부인하고 싶죠.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 십자가 말고 부활의 예수님 그게 좋아. 십자가는 그냥 훅 지나가고, 못 본 듯이 하고 그냥 부활만 주시면 내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려만 주신다면 뭐라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십자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스쳐지나가서 부활에 도착하게 되면, 베드로의 자리가 부활된 셈이 돼요. 베드로의 자리가. 베드로의 자리는 차단된 자리기 때문에 이거는 지옥의 부활이에요.

제가 설교에서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의 부활이라고 했죠. 십자가 사건의 부활이에요. 좀 더 말해서 주님의 몸의 부활이고 주님의 몸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자리가 마련돼요. 주 안에서의 부활이에요. 주 안에서. 나의 부활이 아니고.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상당히 논리가 난해하죠. 난해하지만, 여기서 뭐가 탈락이 되었느냐 하면은 원래 내가 잘되고 싶고 내가 천당 가고 싶은 나는 십자가와 함께 탈락이 돼야 된다는 것. 그 탈락을 로마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이라고 말해도 되고요.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되고. 같은 뜻이에요. 내가 아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

왜냐 하면은 내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지체로서 사는 것이니까. 주님과 연관된 일종의 닭으로 사는 거예요. 닭. 그냥 말씀대로 되어진 닭. 말씀대로 되어진 닭이라고 하니까, 그것도 주일 낮에 했던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보충하면 야곱이 구원받고 에서가 지옥 가는 것은 그들이 태어나서 어떤 행동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스케줄대로 되는 것이에요. 그 스케줄의 일환에 의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졸지에 우리는 어느 자리에 가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자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겁니다.

베드로의 자리. 그동안 예수 믿는 것도 가짜였고, 진짜 예수님은 나의 원래의 자리가 차단되었음을 일깨워줄 때 진짜 주님이 찾아오신 상황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거예요. 그래서 누가 나에게 욕을 하고 자식이 애를 먹이고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우리는 돌을 맞을만하고 내 인생이 꼬일만해서 꼬인다는 사실. 내 인생은 절대로 내 소원대로 안 되고, 수술하려고 하니까 그동안 신종코로나 때문에 수술도 못하고, 모든 이것이 기존의 내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그런 대용, 가짜 소망이 먼저 형성됐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걸 배제시켜보는 거예요. 배제시켜보면서 “누굴 위한 너냐?”라고 꼭 묻는 겁니다. “너를 위한 너냐? 아니면 진정 나를 위한 너냐?” 이러면 우리는 또 핑계대기를, “죽어서 잘할게요.”라고 하죠.

천국은 죽어서 잘하는 곳이 아니에요. 성령이 오면 이미 시작이 되어야 해요. 지금 성령이 안 오고 지금 천국생활 안 하면 죽어서도 소용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미리 성령이 오고 오늘날 우리에게 미리 성령이 주어지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훌륭하다가 아니라, 내가 바로 부인한 베드로가 맞습니다, 라고 할 때에,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만이 되풀이 돼서 우리에게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대접하려면 참외 좀 맛있는 거 대접하지. 미리 맛보고.’ 이런 것도 다 내 기대치에 못 미치는 거예요. ‘빵도 좀 비싼 빵을 사지. 이거 시장 빵인가?’ 이러다가. 그다음부터는 뭐냐 하면은 이게 전부 다 집사님이 준비하신 것이 아니고 주께서 준비하신 거예요. 전부 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주의 뜻이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 개님 잘 주무십니까? 개부터 해가지고 모든 게 주의 것이니, 주께서 알아서 처분해도 또 주께서 일하신 결과니까.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너는 천국 그 나라의 의를 사모해라. 내일일은 스톱. 내 담당 내가 살아있으니까. 주께서 뭔가 작업지시를 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부지런히 일하시는 것을 모르고 나만 싸대고 열심이고 결과도 없다고 얼마나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었습니까? 남한테 화내는 것은 주님한테 화를 내는 것임을, 다시 내부에 베드로의 속성을 드러내는 그 일인 줄 알고, 그렇게 내게 하시면서 십자가의 죄 용서가 얼마나 나보다 귀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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