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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1 16:10:50 조회 : 194         
사무엘상 61강(다윗의 요소), 마태복음 123강(죽음의 자리에서) 20072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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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20-07-25 00:11 
대전-61강 사무엘상19장1절(다윗의 요소)20200721-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9장 1절,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그 대목부터 시작됩니다. 등장인물은 이렇게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울 등장하죠. 그 아들 요나단 등장하고 그 다음에 여기 진짜 중요한 주인공이 누가 나오죠? 다윗이 나오죠. 사울이 나오고, 사울 아들 요나단 나오고, 그 다음에 사울의 의도가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데, 죽이라! 다윗을 죽이라! 이렇게 돼요. 그러면 여기 사울이 다윗을 보고 죽이라고 함으로서, 사울의 세계에서는 다윗을 용납하지 못하겠다. 그런 뜻이죠. 사울의 세계에서 다윗이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다윗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자기 세계가 여전히 유지되기를 바라죠. 근데 여기에 다윗이 끼어들었다. 끼어들었을 때에 사울은 죽이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사울이 죽이라고 했을 때에 같은 영역에 있다고 하는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해요.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명령이 뭐냐 하면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4절에 보면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포장이라고 하는 것은 공로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왕께 득죄하지 않았고, 다윗이 아버지에게 한 일은 악한 일을 하지 않았고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사울은 죽이라고 하는데 요나단이 나서서 증언하기를 다윗은 죽일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었습니다. 이거는 죽이라는 이 이야기의 근거를 제시해주시옵소서.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왕이잖아요. 그래서 다윗이 죽어야 될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고, 5절에 보면 무죄한 자, 죄 없는 자, 그럼 죄 없는 자를 아버지가 죽이라고 한다면 어느 쪽이 죄가 있겠어요? 이쪽 사울에게 죄가 있겠죠. 그럼 이쪽에 죄가 있다면, 사울이 왕이거든요. 왕이 죄가 있다면, 왕이 통치하는 이 영역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죄가 지배하는 영역이 돼요. 이해되죠. 일반 개인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통치자잖아요. 통치자가 하는 명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따라야 된다 이 말이죠.

따라야 되는데, 나름대로 정립하기를 다윗은 지금 죄가 없는 거예요. 사울에게 죄가 없는 자가 혜택을 입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죄가 없는 자가 들어왔는데 사울이 죽이라고 하는 순간 사울만 나쁜 것이 아니고 이 자체가, 나라 자체가 지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뭔가 잘못 됐다. 이래 되는 거예요. 8절에 보면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9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절,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이래 되어 있어요.

사울은 다윗을 죽여야 된다는 것을 목표로 해서 짧은 창을 던졌는데, 그 창은 벽에만 박히고 다윗은 거기서 빠져나왔죠. 그러면 이 동네, 사울이 왕으로 있는 이 동네에 다윗은 포함이 되는 것 같지만 소속되지는 않는다. 이 나라에. 그리고 사울이 창을 던질 때 사울의 개인적인 하나의 의사였습니까? 아니면 여기 다른 게 있어서 창을 던지게 되었습니까? 9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있죠. 거기는 악령이라고 되어 있죠. 악령이 와 닿네요. 악령의 지배를 받아서 사울이 다윗을 공격했다면, 자, 그러면 여기서 다윗의 존재는 그냥 눈에 보이는 육적인 존재일까요? 영적존재일까요? 영적존재죠. 영적존재가 되는 겁니다.

악령이 없다고 한다면 사울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은 이성적이 돼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거예요. 이 합리적인 사고를 옆에 누가 하느냐 하면은 아들 요나단이 하는 겁니다. 아버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저 다윗은 사울의 적이 아닙니다. 왜? 우리한테 도움을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쉽게 들면 이렇죠. 이 집에 개하고 네 식구가 사는데, 어떤 나그네가 들어왔어요. 나그네가 들어와서 혜택을 줬어요. 아이고, 갈 데가 없어요? 여기 방 하나 비니까, 방 하나가 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주무세요, 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밤 2시 46분에 깨가지고 창 들고 와서 집사님을 때려서 죽이려고 할 때, 그럼 아들 둘은 뭐냐, 저 사람이 미친 모양이다. 왜? 우리가 혜택을 입었으면 합리적으로 고맙다고 해야 되는데 왜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생각을 하겠죠.

근데 그거만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거만 생각하면 성경이 아니에요. 뭐냐, 엄마가 영적이다. 이걸로 바뀌어야 돼요. 악령이 공격하는 쪽도 영적존재가 되는 거예요. 악령이 공격하는 쪽도. 지금 사울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고요. 우리는 어디까지 보느냐, 요나단도 뭔가 영적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눈이 밝지 못하다는 것까지 나가야 됩니다. 19장 마지막을 한번 보겠어요. 20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사자들을 보냈는데 그 사자들이 예언했죠.

그 다음 21절에 사울에 세 번째 사자들을 보내매 그들도 예언한지라. 22절,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절,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24절,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육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으로 쭉 이야기하다가, 19장 마지막에는 어느 세계에 들어가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로 진입해버리는 거예요. 19장 전체가. 그러면 끝에 영적인 세계에 들어갔다면 처음부터 영적인 세계에 있는 겁니다. 근데 처음에 사울이 창을 던지기 전까지는 사울도 그냥 평범한 인간이고 다윗도 그냥 평범한 인간이고 요나단도 그냥 평범한 인간이고. 이 동네 사람들이 다 한 동네 사는 전부 다 인간들이에요.

문제는 그들의 최종적인 인생의 끝이 영적인 판단에 의해서 어느 쪽으로 갈라지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이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요. 왜?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으니까. 합리적인 사고방식. 자,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생존게임에 속했다. 이러면 돼요. 생존게임. 보통 생존게임이라는 말을 잘 안 하는데, 생존게임에서 게임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생존이죠. 생존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생의 전부가 되는 거예요. 살아남는 게 전부가 되는 겁니다. 이게 육적일까요? 영적일까요? 육적이에요. 육적.

살아남는 게 전부에요. 태어나서 밥 먹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전부 다, 매일 매일의 삶이, 일상의 삶이 돈 있으면 생존하고 돈 없으면 죽는다. 그 원칙, 그 구조 안에 그냥 놓여있는 겁니다. 성경 볼 필요가 없죠. 성경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니까요. 착하면 나중에 천당 간다. 악하면 지옥 간다. 그 정도는 상식이니까. 합리적인 사고에서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죽어서 한번 확인해볼게, 이게 아니라 살아있으면서 생존게임에 빠진 모든 살아있는 것에서 과연 영적인 세계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과연 육적으로만 보이고 그냥 니나 내나 다 밥 먹고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다, 라고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이 세상 속에서, 육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어떻게 발췌하느냐, 찾아내느냐, 이게 관건입니다. 찾아내는 방법은 고맙게도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지는 거예요. 어떻게 하려고? 죽이려고. 혜택을 줬는데 반대로 돌아오는 것은 죽어버려라, 이래 되는 거예요. 너 까짓 것은 죽어버려야 돼.

근데 성경에서는 악령이 임했다고 되어있지만, 악령이라는 말을 달리하게 되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발작이 되는 겁니다. 발작이. 발작을 정신과용어로 표현한다면 히스테리라고 해요. 히스테리.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발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성질내는 것을 발작이라고 하지 않고 신체적인, 비정상적인 뒤틀림이 드러날 때 그게 병이 되거든요. 그냥 화를 내는 것은 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스테리는 병이 돼요. 이거는 병원에 가야 돼요. 화날 때 그냥 화만 나면 이거는 병원에 안 가도 되는데, 화가 남으로서 갑자기 손발이 마비가 된다든지 이럴 때는 병원에 가야 돼요. 그게 히스테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정신이 육과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 겁니다. 크게 쓸게요. 징후죠. 징후. 이게 징후가 되는 거예요. 뭐가? 나의 몸. 육체가. 육체가 이 세상에 영적세계가 있음을 징조 또는 징후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19장에서. 늘 그런 게 아니고 악령이 임할 때. 악령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히스테리 같은 경우를 예로 들게 되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데 유치원 때 나에게 돌을 던졌던 남자애가 있어가지고 그것이 평생 동안 내 맘에 트라우마가 되어가지고 어떤 때는 꿈에도 나타나서 깜짝 놀라서 식은땀이 나는데, 그때는 뭐 깨어나서 ‘아이고, 내가 뭐 또 옛날생각을 했네.’라고, 이럴 수가 있어요. 근데 이 앞집에 그 남자가 이사를 왔다면? 다른 식구는 모르죠. 왜? 동일한 과거가 아니니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거 성추행범인데.” “왜 그래?” “니는 몰라도 돼.” “나에게 기분 나쁜 존재가 앞집에 이사 왔어. 매일 봐야 돼. 그래서 못 견디겠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징후가 나타나느냐 하면은 밥맛이 하나도 없어. 그 앞집 때문에.

그러니까 밥맛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하면 단백질과 탄수화물 이래해가지고 그냥 숟가락을 들고 떠서 입에 넣어 먹는다는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인간이 등장해버리면 이게 밥맛이 떨어져서 내 쪽에서 강력하게 거부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은 굉장히 예민해요. 상당히 예민합니다. 왜 예민 하느냐 하면은 주위 환경에 같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환경에. 집사님이 여기 왜 이사 왔는지 이유도 모르겠어요. 주위의 어떤 환경에 의해서 엮어진 것을 인위적으로 거기서 벗어나는 거예요.

근데 오늘 본문 다윗 같은 경우에는 벗어나는 게 아니고, 다윗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다윗이 악령의 표적의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다윗의 누구의 표적? 악령의 표적이에요. 악령의 표적. 그러니까 다윗이 악령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사울왕은 아무것도 모르죠. 사울왕은 하나의 중개인이에요. 중개인.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악령이 작용하니까 던지고 싶은 거예요. “내가 왜 이러지?” 늘 그런 것이 아니고 악령이 임할 때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악령은 다윗을 주목하고 있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9장을 잠깐 한번 볼까요? 27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오늘날 지금 우리가 다윗이야기를 하죠. 32절에 보면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절, “귀신이 쫓겨나고” 그렇게 되어 있죠. 자, 소경이라고 하는 것은 눈이 감긴 사람입니다. 소경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중재자에요. 중재자. 어떤 징후라니까요. 그 사람이 죄를 지어서 소경 된 게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다 소경이 아니에요.

근데 이 사람은 소경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소경은 본인이 왜 소경이 됐는지 이유를 모르죠. 모르는데, 여기에 누가 지나갑니까? 예수님이 지나가는데 뭐라고 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연속시켜주시는 분이여, 옛날에 다윗에게 있었던 하나님과의 접촉사건, 다윗과 다윗의 특수성이 지금도 이 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그 결과로서의 다윗의 자손이여, 이 다윗의 자손이여는 신이시여, 하고 같은 말이에요. 다윗이, 예수님이 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하늘 쪽에서 오신이여.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용서받을 근거가 없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용서받을 근거가 없을 때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내가 바쳐야 할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나에게 혜택을 주시옵소서. 나의 아쉬움을 들어주시옵소서. 제가 뭔가 드려서 받아버리면 이거는 자비가 아닙니다. 이거는 거래죠. 흥정이죠.

불쌍히 여겨달라는 거예요. 불쌍히 여겨주는데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내가 소경이라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소경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소경될만한, 그만한 죄가 있어서 소경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그러면 죄는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어요. 하는 짓이 있기 때문에 내 죄를 내 손으로 그냥 원상복귀가 안 됩니다. 죄를 해결하는 것은 뭐에서 뭐밖에 없느냐 하면은 자비밖에 없어요. 그냥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아이고, 이 불쌍한 놈아.” 이렇게. 불쌍히 여결줄 때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은 죄책임, 죄책, 죄의식, 죄의식이라기보다도 무거운 자기의 잘못된 실적들이, 이게 전부 다 없어지는 거예요. 말소가 되는 거예요.

남녀가 둘이 사귀다가, 남자가 여자 몰래 다른 여자를 양다리 걸치다가 딱 걸렸어요. 근데 남자가 여러 가지를 변명하다가 궁지에 몰리는 결정적인 증거를 딱 될 때에, 두 가지 반응이죠. 니 아니면 여자 없나? 이거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은 아무리 봐도 이 여자가 돈도 되고 하니까, 생존게임이니까, 자기 생존이니까, 지는 좀 놀아도 저 여자가 생활비를 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는 뭡니까? 불쌍히 여기소서. 살살 빌죠. 전과가 없으니까 한번만 봐달라고 하죠. 두 번째 걸리면 안 되지만 처음 걸렸으니까 개과천선의 여지는 있잖아. 그러니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 자비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에요. 왜냐하면 생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밥 먹고 살려면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되지만. 영적인 문제, 영원한 죄를 심판하시는 분 앞에서는 사람에게 빈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뇌물을 갖다 바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뇌물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받지 않는 대신 누굴 꽂아주죠. 다윗을 꽂아주죠. 정말 이거 중요한 거예요. 인간의 제물을 받고 기도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안 받고 주신다는 말은 자비덩어리로 왔다는 거예요. 자비덩어리로. 이미 용서해주기 위해서 꽂아준 거예요.

그러면 용서가 용서되려면 주변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됩니까? 용서의 가치가 가치대로 드러나려면 이 세상의 통치자는 일체 용서가 없음이 발각되어야 하겠죠. 그 역할을 사울 왕이 하는 거예요. 혜택을 입어놓고 죽여라. 완전히 오기에요. 오기. 다시 말해서 사울은 말하기를,  다윗 너는 내 인생에 완전히 안 맞는다는 거예요. 맞지를 않으니까 통째로 뽑아내겠다는 거예요. 맞지를 않으니까 다윗은 뭐냐, 이 땅의 사람이 아니죠. 이 땅의 사람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는 해석이 안 되니까. “아버지 왕이시여, 다윗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었고, 블레셋을 이겼고, 참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면 우리가 보호를 해줘야지 왜 죽이라고 합니까?”라고 요나단이 이야기를 할 때 요나단은 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울은 그러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의 합리적인 계산으로 하는 생존게임 그 외의 세계에서, 외곽에서 심어줬고 찾아온 존재라는 사실을 악령은 알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사울은 하나의 매개체니까 그냥 정신없이 창을 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이 창을 던진다는 말은 악령을 대신해서 던지는 것이니까, 악령의 표적은 뭐냐 하면은 이 땅에서는 죄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러야지, 죄에 대해서 무상으로 용서하는 것은 악령의 세계에서는 눈뜨고 못 보겠다는 거예요. 나는 용납 못하겠다. 그것이 인간에게 이해가 안 되니까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발작을.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야, 사울 왕 참 못됐다. 구원을 해줬는데 구원자를 왜 그렇게 죽이느냐? 혹시 이 동네에 사울 왕 같은 자가 없는지 주변에서 찾고 하는데, 사울 왕이 누구냐 하면은 나에요. 내가 사울 왕이에요. 왜냐하면 다윗은 죽음에 노출되어 있어요. 영적으로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데, 우리는 죽음을 피해서 사는 게임에, 거기에 몰입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너 죽어야 된다고 찾아오면, 우리가 창 들고 있으면 그쪽을 죽여 버려요.

사울을 욕하겠지만, 사울은 자기가 구축한 자기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 영역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육의 영역이에요. 육의 영역에 허락도 없이 다윗이 하늘로서 꽂혀있으니까 육이 그것을 참지 못해서 그걸 뽑아내는 거예요. 죽여서라도 내 영역에서는 나의 공로와 나의 잘남으로만 가득 차 있어야 될 영역에, 다윗의 존재는 나에게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또 한 예를 들게 되면 남자가 돈을 잘 벌어요. 남녀가 사귀는데 남자가 돈을 잘 벌어요. 아버지가 재벌 2세가 돼가지고, 지는 재벌 3세고. 늘 이렇게 기마이(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음)쓰고 돈쓰는 즐거움이 있어요. 근데 좀 예쁘장한 여자 친구가 있어가지고 어떻게 좀 해볼까 하고 장난삼아 사귀었습니다. 사귀어가지고, 친구들도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고, 파티열고, 돈이 있으니까 고급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그런 짓하는 그런 파티에 자기가 새로 사귄 여자를 초청하니까, 여자가 친구들끼리 노는 분위기, 그 바닥을 보고 난 뒤에, 니도 한잔 먹으라고 하니까, 주여!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다른 여자들은 미니스커트 입고 왔는데 지는 뭐 긴치마에, 여자 전도사도 아니고. 긴치마 입고 와서 주여!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주여, 이 타락된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할 때에, 이미 그 영역은 뭐냐 자기 돈을 뿌린 영역이거든요. 자기가 잘나고 자기 공로가 있는 영역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보고 잘난 남자친구가 당장 뭐냐, 그 여자를 뽑아버려라. 왜? 이 파티 분위기를 버리니까. 노래 부르라고 하니까 뭐 마리아~ 이러고 하는데,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찬송가를 부르니까 분위기가 안 맞거든요.

그러니까 뽑아버리는 거예요. 창을 던지고. 니 오늘 끝났다. 절교다. 집어던지는 겁니다. 왜? 이 세계에 뭐가 필요가 없으니까? 죄 용서라는 그런 요소가 내 세계에서는, 나는 내 잘남만 있어야 되죠. 내가 이만큼 잘나간다만 있어야 돼요. 내가 뭐 돈이 있는데 뭐가 아쉬워요. 아쉬운 게 없는데, 여기서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래 나오면 재수 없다고 뽑아내겠죠. 썩은 무 뽑아내듯이.

우리가 지금 뭐 돈도 없고 아쉬우니까 주여, 살려달라고 이렇게 하겠지만, 만일 우리가 넉넉한 돈이 있고 잘나가면, 세상적으로 힘이 있으면 내가 다윗을 창으로 꽂아버려요. 내가. 그러니까 이 사울 이야기가 딴 동네이야기가 아니에요. 이제 조금 어려운 것을 해보겠습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아까 사울이 있는 영역은 사울 개인의 공로가 있는 영역이라서, 지금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다윗이 블레셋 골리앗을 이겼죠. 그러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뭐라고 했습니까? 만만이죠.

골리앗을 이기고 난 뒤에 인기가 높았다 이 말이죠. 높았을 때에, 자기 영역에서 인기가 높았을 때 이 백성들은 자기 소유에요. 백성들은 사울의 소유에요. 왜? 왕이니까. 옛날 백성들은 왕의 소유거든요. 따라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누구한테 집중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사울 하나에게만 집중되어야 해요. 근데 갑자기 다윗이 정치적으로 부상이 되니까 사울은 참을 수 없는 거죠. 어떤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분명히 자기 노래에요. 막걸리 한잔, 노래가 있거든요. 이게 누구 노래냐 하면은 강진 노래라고요. 근데 별로 안 떴는데. 영탁이가 막걸리 한잔~~ 부르니까 갑자기 강진이는 천천이고 영탁이는 만만이 돼버렸다니까요.

자, 이렇게 될 때에, 발작이라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발작. 인간은 언제 히스테리, 언제 발작을 합니까? 아무리 좋은 관계를 유지해도, 그 좋은 관계라는 것이 순수한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순수한 것은 없어요. 자기 철조망, 자기 영역을 구축합니다. 심지어 형제간이라도 마찬가지죠. 내 영역, 내 나와바리죠. 내 영역이 고수되어서 이 영역에 누가 침투할 때는 내 허락을 맡아야 돼요. 왜냐 하면은 이 영역 구석구석이 자신의 손길과 자기 과거역사와 힘듦과 애씀과 공로가 다 여기에 배치되어 있거든요. 모든 게.

남편 출근한 뒤에 아내가 양말 개서 서랍에 딱딱 넣어놨을 때, 남편은 직장생활 하느라 정신없어가지고 양말을 휙 하고 벗어던지는데, 양말을 뒤집어서 벗어놨을 때 아내가 발작을 하는 거예요. 내가 그 뒤집은 양말을 다시 도로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 말이죠. 아무리 월급 받는 남편이라도 일단 집에 오면 집안은 누구 책임 하에 있는, 통제 하에 있는 영역이냐 하면은, 모든 서랍하나 모든 배치가 살림하는 것 하나 자기 고유의, 사울 왕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로마에 가면 로마의 규칙이 따로 있다니까요. 내가 로마인 같으면 로마 규칙을 따라야지 내 규칙을 밀어 넣어버리면 여기에 말썽이 생겨버려요.

방금 설명한 것은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고 사울의 인기가 떨어지니까 사울이 다윗을 미워했다. 이렇게만 해석해버리면 무슨 요소가 없어지느냐 하면은 영적요소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사무엘상 19장의 끝부분을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거기 보니까, 19장 다시 끝에 보게 되면 사울 왕이 나중에 정신없이 예언도 하죠. 다윗이 누구한테 찾아가느냐 하면은, 죽이려고 하니까 사무엘 선지자에게 피신 온 거예요. 피신을 하니까, 사무엘 있는 곳, 사무엘 영역에 다윗이 피신해 가있다 이 말이죠. 이 소문을 듣고 사울 왕이 따라 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 왕은 무슨 생각이냐 하면은, 지금 사울 왕 자기 영역에서는 사울은 어디까지나 자기 통치 하에 있습니다. 

자기의 이성과 합리성과 지성의 통치 하에 정신 차리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거길 떠나와서 사무엘 영역으로 딱 가니까, 사울이 예언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울이 횡설수설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옷 벗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이 영역에 오니까 기존에 내가 나를 통제하던 그 통제력이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이 말은 사울에게 뭐가 임했다? 악령이 임했다는 것이, 이게 하나의 그냥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실제적 현실이 돼요. 현실. 현실의 일부에요. 현실의 일부. 영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에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이 뭘 만든다? 현실을 중재자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영이 안 보이지만 영에서 보면 현실이 영에 속했음이 이게 드러나는 거예요. 

아까 그걸 뭐라고 했어요? 징후라고 했죠. 징후. 맛있는 반찬인데 옆집에 내가 싫어하는 남자가 이사 오니까 갑자기 그렇게 맛있는 것도 밥맛이 떨어진다는 것이 뭐예요? 인간은 자기 딴에 나는 정신 바짝 차리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한 것을 내가 책임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 반드시 달성해내겠다는 것으로, 너무나 그렇게 정신 차리고 살았지만, 다른 외부의 요소가 왔을 때에 그 정신 차림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그러한 상황도 따로 있는 겁니다. 근데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구약이 좀 엉뚱해 보이지만, 구약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게 육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이 붙어있다는 거예요.

조금만 나가서 사무엘이 사는 동네에 오면 갑자기 어떤 인간이 들어와도 여기서 다 미쳐버리죠. 아까 여러분들도 다 보셨지만 19장 끝에 보니까, 처음부터 사울이 온 게 아니고 사울이 세 번씩이나 자기 부하들을 보냈잖아요. 부하들이 멀쩡한 부하들이에요. 그 당시 서울대학 나온 부하들이 이쪽에만 나오면 전부 다 미쳐버려요. 이쪽 영역에 오게 되면. 이게 이웃집이거든요. 같은 땅의 지평이라는 말이죠. 같은 이스라엘 땅이라 이 말이죠. 어떤 경계선이 없어요. 어떤 DMZ 그런 것도 없고. 하여튼 붙어있어요. 조금만 밑으로 가면 갑자기 사람이 완전히 바보가 된다 이 말이죠. 

근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만, 신약에 가면은 세상과 주님의 나라는 지금 함께 있어도 그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 징후를 보여주는데, 소경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눈에 발라준 후에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하죠. 진흙 바르고 씻으니까 눈이 떴잖아요. 자, 눈을 떴을 때 여기서 여러분들이 놓치면 안 되는 게, 소경은 못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소경이 눈을 떴다. 그러면 이게 눈을 뜬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는 이게 눈을 뜬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소경이 눈이 감겼다가 눈을 떴으면 다른 사람에 보기에 “아, 이 사람은 소경이 아니네.” 이러는데, 소경이 눈을 떠서 당신들이 있네, 제자들이 있네, 바리새인이 있네,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는 그게 소경이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여전히 소경이에요. 눈을 떠서 예수님을 만질 수 있고, 예수님 키 크네, 몸무게 나가네. 누구 닮았지? 이거는 여전히 소경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으로 하여금 1단계 눈 뜨게 하고 2단계 예수님 믿게 만들어버렸어요. 이 말은, 믿는다는 말은 죽어서 천당 간다는 소리가 아니고, 이미 그 하늘나라가 육의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세계가 사울을 통제하고 있고 다윗을 통제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모든 것을 징후로 처리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왜 눈에 보이지 않느냐, 눈에 보이지 않아야 우리에게 다른 눈이 열렸느냐, 안 열렸느냐를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니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라고 했잖아요. 보는 걸로 마감이 돼버리면 육적으로 와서 육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육의 한계에 있을 때는 인간이 보는 것이 관찰이 되고 과학적 인식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계획과 미래를 설계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생존게임이에요. 생존은 내가 설치지 않으면 어떤 생존도 나한테 보장되지 않는다. 이게 생존게임이라고요. 남을 이겨야, 남을 꺾어야, 남이 가진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과연 사는 것이냐? 사는 것? 산다는 게 뭐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을 찾을 때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뭐가 들어와야 하느냐 하면은 자비가 들어와야 돼요. 자비가.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뭔가 칩처럼 심어준 게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은 어떤 짓을 해도 용서되는 장치가 심어져야 돼요. 안에 콩닥콩닥 뛰어야 돼요. 지금. 동대구역이나 보면 요새 코로나로 열 측정하죠. 열이 어디에 있어요? 참 재미있는 게 열이 어디에 있죠? 열은 우리 내부에 있어요. 내부에 있는데 이거 측정할 때, 머리 긴 사람 나오라든지 코가 비틀어진 사람 나오라든지, 이런 거 안 하거든요. 우리 표면에 없는 것을 찾아내요. 열이 어디에 있는가? 열은 우리 안에 있다고요. 열 탐지기. 체온 재는 것.

로마서 8장도 마찬가지에요. 니 안에 성령이 있는가? 성령 그걸 측정하는 거예요. 니 안에 성령이 있는지. 십자가의 다 이루심. 십자가에서 니가 해결해야 할 문제, 니 운명과 미래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니 안에 있느냐 없느냐를 보는 겁니다. 니가 한 평생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거는 물음의 대상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악마가 통치하는 모든 세계에서는 목적이 자기 생존으로 모든 의미가 마감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절대로 영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게 영적인 것하고 달라요.

영적인 것은 정신 차려서 될 문제가 아니고 외부적인 것이 와야 돼요. 이게 사무엘 옆에 누가 있다고 했어요? 사무엘 옆에 누가 있다? 다윗. 다윗적인 요소가 있어요. 다윗요소. 다윗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칼로 이겼습니까? 힘으로 이겼습니까? 다윗은 고백했어요. 이거는 내 전쟁이 아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할 때에 인간들끼리는 이미 힘이 있어야 승리한다는 그런 기존의 관념을 깨기 위해서 힘이 약한 소년 나를 보내는 거예요. 소년을 보냈다는 말은 소년의 힘이 아니고 아예 없는 힘이, 힘자랑하는 인간들을 꺾는 방식이 하늘나라에서 너희들을 용서하는 방식이다. 니가 나한테 뇌물을 바쳤나, 기도를 했나, 찬송을 했나, 전도를 했나, 예배를 드렸나, 니가 착한 일을 많이 했나, 해도 그거는 안 받아요.

왜냐하면 이거는 나의 요소지, 내가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내 마음은, 내가 평소에 세상에서 나는 밥 먹고 살겠다는 내 마음과 동일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마음은 안 받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밥 먹고 사는 것이 최종목적이에요. 인간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힘을 가지는 것, 따라서 그거만 덜렁 들고 천국 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이거는 바보 같은 생각이거든요. 바로 내가 이렇게 밥 먹고 사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이 어쩔 수 없음이 바로 악령의 통치를 받는 죄 모습인 것을 인정하는 다른 눈, 다른 시선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살아가는 방식과 내가 이 땅에서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서 살아가는 방식과 그것이 너무나 대조가 되어야 돼요. 그 대조, 너무 차이 남.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나오는 이야기죠. 나는 잘난 사람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자기가 못난 자라는 것을 누가 자랑하고 있는가.

그 자랑은 결정적으로 대조가 될 수 있는 결정적 기준이 내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 심어져 있는 그 다윗의 요소로 하여금 또는 사울로 하여금, 다윗으로 인하여 사울로 하여금, 나는 예수보다도 돈이 좋다는 말을, 예수님보다도, 십자가보다도 돈이 더 좋다는 본성이 있음을 내가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 집도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 빨리 여기서 탈출했으면 좋겠다. 이 벌판에서. 이런 식으로. 강남에 뭐 한 세 채 정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 거.

내 속에서 주님이 준비한 나와 내가 지금 실제적으로 느끼는 나, 두 개의 나가 한쪽은 이름이 사울이고 한쪽은 다윗이 되는 거예요. 다윗은 예수님 이름이고. 다윗의 자손이니까. 사울은 아담에 속한 아담의 이름이에요. 사울 이름이. 그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이 사건이 반복이 됩니다. 계속 반복이 됩니다. ‘예수도 안 믿는 남편하고 내가 안 살아야지.’라고 했는데 차를 태워주네. 또 혜택을 입었으니까, ‘아, 이거는 나를 위함이 아니고 주께서 차 태워주라고 안 죽고 살게 했구나.’ 주님께 감사하죠. 그러니까 항상 시작은 내 생존이에요. 모든 시작은. 왜냐하면 이게 자연스러우니까. 이게 육에 속한 내 생존이고 내 욕망이에요.

그런데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끝은 뭡니까? 누구에게 감사하죠? 주님에게 감사하죠. 내 생존을 주어서, 이걸 제공해서 감사한 게 아니고. 뭘 제공해도 이거는 내 덕이에요. 내가 계획을 잘 짜서 그렇고. 이거밖에 안 되는 이것이 바로 나의 한계임을 지적해주신 것이 바로 감사고 고마움이에요. 이게 없으면 다윗과 같은 편이 아닙니다. 사무엘 다윗 아브라함... 이쪽 편이 아니에요. 이것은 주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사무엘상 19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고, 이미 징조로서 이 땅에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이 이 땅에 이미 왔어요. 이미 와서 자기 데려갈 사람을 데려가는 겁니다. 이미 온 사람의 특징은 만사가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고, 만사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본인은 항상 서툴고 어설프고 실패의 반복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지난주일 낮에 우리교회 장로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제가 설교 시간에 그걸 인용했지만, “실패하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실패하면서. 보통 우리의 상식은 내 생존, 내 계획이 우선이기 때문에 실패에서 감사가 안 나오죠. 뭐라고 나옵니까? 우쌰! 드디어 성공했구나! 성공한 것을 감사하는 게 바로 육의 세계, 사울의 세계의 특징이라면, 다윗에 속한 사람은 실패한 것에서 감사하는 거예요. 실패하면서.

근데 이 실패라는 것이 육적인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주님의 안목으로 볼 줄 아는 그 시선에 의하면, 내가 세상적으로 성공한 이것가지고 얼마나 희희낙락하고, 자만과 잘난 체하고, 인생 다 산 것처럼 우쭐대고, 남한테 내가 이만큼 잘난 존재라는 것을 떠벌리는 그 보람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한심스러운 모습이에요. 누구하고 비교해볼 때? 예수님하고 비교해볼 때.

다윗은 사울 왕과 그 어른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하등의 도움을 안 받았죠. 일체 안 받았죠. 조금의 도움을 안 받았어요. 도움을 안 받았는데 혜택은 뭐냐, 블레셋이 물러나갔잖아요. 이 시간 끝으로 한 가지 더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9장, 젊은 분들이 있으니까 이게 도움이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12절, 다윗이 집에 있을 때 사울이 명령을 해서 부하들이 와서 죽이려고 했죠. 죽이려고 할 때에 그 부인 이름이 미갈인데, 미갈은 자기 남편을 사랑합니다. 물론 좀 드문 경우지만. 하여튼 사랑해요. 남편한테 반했을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생겨요. 사랑합니다.

미갈이 남편을 사랑해서,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피하게 만들고 남편 침대에 인형, 우상을 덮어놓고 군사가 왔을 때에 병들었다고 해서 그냥 돌려보내죠. 사울이 그 소리를 듣고 “침대 채로 가져와라. 내가 죽일게.”라고 했거든요. 침대 채로. 아픈 채로 가져오라. 완전히 이거는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본인도 이유를 몰라요. 그냥 뽑아내고 싶은 거예요. 내 영역에서. 그래서 보니까 어떻게 됐어요? 나중에 보니까 이게 우상이에요. 우상을 공개했다고요.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사울이 다윗을 아무리해도 사울은 자기 행동이 어디서 나오는지 본인이 하면서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냐 다윗이 하는 행동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은 우상과 결부되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믿는 그런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를 사울 니가 했음을, 원래 침대에 누가 눕던 자리에요? 다윗이 눕던 자리에 다윗은 빠져버리고 우상이 들어가 버리면, 사울아, 너는 우상이나 맞이해라. 니가 하는 짓거리는 우상적인 사고방식에서나 나올 수 있는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다윗은, 그냥 다윗이 죽었나, 살았나가 중요한 게 아니고 다윗이 하는 모든 행적이 사울 본인이 몰랐던 본인의 본질을 다 알려주면서 다윗은 빠지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우리의 본 모습을 보여주면서 빠지는 것하고 동일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미갈입니다. 미갈이 이렇게 다윗을 살렸잖아요. 미갈은 다윗과 혼인한 사람입니다. 결혼했어요.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면 안정감을 얻죠. 육적인 세계에서는. 그러나 구원문제에 있어서는 결혼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남편을 영적으로 살릴 수는 없다. 그 이야기하고 싶어요. 결혼하는 것은 행복이다. 좋다. 다 좋은데, 해야죠. 하지만 결혼이 나를 용서하는 곳이 아니에요. 결혼은 나에게 근원적인 자비를 베푸는 곳이 아니에요. 진짜 결혼은 그리스도와 혼인해야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20-07-25 00:12 
대전-123강 마태복음27장11절-18절(죽음의 자리에서)202006721-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해봅시다. 마태복음 27장 15절부터 봅시다. 총독이 등장하죠.

15절,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16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절,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 대목부터 시작을 해봅시다. 빌라도와 그리고 죄수 한 사람, 그 다음에 또 예수님이 등장하죠. 그 다음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한 자들. 지금 이런 무리가 있습니다. 이런 무리가 있는데, 빌라도는 이방인이고 총독입니다. 로마의 총독이고. 그러면 이걸 구분하게 되면 죄수, 예수님, 예수님을 고소한자,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전부 다 이 세 무리는 같은 세계에 속해요. 같은 세계에 속합니다. 그런데 여기 죄수가 등장하죠. 빌라도가 보기에 고소한 자는 죄수가 아니죠. 그냥 보통사람이죠. 정의로운 자들이 있음으로서 뭐가 발생되는가, 죄수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요구한대로 이 죄수를 처형해야 돼요. 처형. 죽인다. 처형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빌라도의 입장에서 이 유대민족 가운데서 어떤 자리를 빌라도가 결정지어야 하느냐 하면은, 처형이니까, 처형은 사는 자리가 아니고 죽는 자리죠. 죽는 자리, 쓰레기통, 인간 쓰레기통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여기서 정의가 정의롭게 살려면, 정의에 부합되지 못한 죄수를 어디다가? 여기 쓰레기통에 집어넣게 되면 죄수가 빠진 이 세계가 무슨 세계가 되느냐 하면은 정의로운 세계가 되는 겁니다. 정의로운 세계. 

그런데 고소한 자가 이 죄수만 죽으라고 한 게 아니고 예수님도 고소를 한 거예요. 죽여 달라고 고소를 한 거예요. 그러면 이 죽음이 자리, 쓰레기통, 이 죽음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규정을 하는데, 빌라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유월절, 명절날에는 죽을 죄인도, 빌라도가 죄인을 죽을 자리에서 바로 이 자리에, 자기가 살던 자리로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면제도죠. 사면제도. 사면제도에는 뭐가 근거되어 있느냐 하면은 자비가 있어요. 자비가. 통치자의 자비가 있어요. 정의에 의해서 죽어 마땅한 자를, 정의로움보다 더 위에 단계가 되는 사랑의 단계, 자비의 단계가, 정의가 사랑보다도 못하고, 사랑이 정의보다 위에 있으니까, 사랑으로서 다시 이로 하여금 죽을 자를 살려주는 권한을 지금 빌라도가 행사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정의를 부르짖는 이 유다사회는 더 위의 단계에 있는 사랑의 통치에 의해서 더 안전하게 정의로움이 보장이 되는 겁니다.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는데, 엄마는 너무 깐깐해. 깐깐해서 너무 잔소리가 많아요. 그래서 엄마가 자식들을 고소합니다. 아버지한테. 자, 오늘부터 용돈 없다. 공부 안 하면 용돈이 없다고 처벌을 내리죠. 그러면 엄마하고 아들, 딸들은 지금 갑자기 모든 권한이 아빠한테 가있죠. “엄마의 말이 옳아요. 잘못했어요.” 잘못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엄마한테, 아빠한테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가 여기서 자비를 베풀 때 이 가정은 다시 평화롭게 돌아갑니다. 이 원리죠.

자, 이 원리가 사회에 이렇게 있다고 할 때, 사회에 이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이 원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내 마음속에 있어요. 내 마음속에 나를 재판하는 재판장이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있는 재판, 그리고 집사님 마음속에 있는 재판, 이런 게 합쳐야 정의롭다는 말로, 노선으로 같이 대화가 돼요. 정의롭다는 말로. 이렇게 공통점이 있어줘야 이 사회가 결속이 가능합니다. “아,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영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이라는 축구선수가 있는데, 한골 넣었을 때 그게 뉴스에 나와요. 스포츠뉴스가 아니고 국위선양뉴스기 때문에 나옵니다. “손흥민이가 한골 넣었는데 자책골로 드러났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그거 축구게임을 왜 뉴스에서 하느냐고 반대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어? 어? 저거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가? 그럼 일본 사람이 골 넣어야 좋은가? 결속력이 깨져버려요.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공통적인 이런 구조가 있어야 돼요. 이 구조가 정의라고 했잖아요. 선악이에요. 선악.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겠다는 그러한 의도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전부 다 우리 사람으로 인정해주겠다. 나는 선보다 더 악을 추구해. 이러면 우리 공동체에 용납하지 않겠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돼요. 일종의 상식처럼. 이 사회에 있는 상식처럼 깔려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빌라도를 이용하는 것은, 아까 첫째 시간에도 징후라고 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이 용서의 자리, 죽음의 자리를 가지고 주님께서는 세상이 과연 정상적이냐를 다시 보게 하는 거예요. 이 죽음의 자리에 최종적으로 바라바라는 악한 강도가 들어가느냐 아니면 예수님이 들어가느냐를 보는 겁니다. 빌라도는 안일한 생각을 해가지고 흉악한 살인강도가, 둘 중의 하나니까, 딴 사람 볼 것 없이 둘만 비교하면 돼요. 이들에게 선택을 주는 거예요. 자,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을 너희들 공동체에 다시 편입, 넣어줄 것인가? 아니면 이 공동체를 해코지 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공통적인 정의감에 반하는, 정의로운 질서체제를 훼손하는,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이 악한 자를 너희가 다시 받아줄 것이냐? 아니면 예수를 받아줄 것이냐? 너희가 선택해라.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빌라도가 보기에 결과를 미리 자기가 예단한 거예요. 너희들이 인간 같으면 예수를 그렇게 나쁘게 볼 이유가 없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고 뭐 종교적인 문제기 때문에. 실제적인 문제는 강도죠. 강도가 더 나쁘냐? 아니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예수가 더 나쁘냐를 놓고 그들을 선택하게 하는 거예요. 어느 것을 받아줬을 때 너희들로 하여금 너희들의 정의감과 너희들의 선함이 와장창 다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예수님이 들어갔죠.

이 죽음의 자리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전도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의 자리를 가지고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명도 없었다. 죽음의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차지한 죽음의 자리. 그러면 제가 이걸 구분하겠어요. 이런 질문이 됩니다. 무엇이 구원의 능력이냐, 1번, 예수님. 2번,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 2번이 정답이에요. 물을 필요가 없죠. 정답이 미리 나와 가지고. 예수님의 죽은 자리가 구원의 능력이 돼요. 근데 사람은 1번을 선호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왜냐하면 내가 평소에 다른 사람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자기한테 있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좋게 본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용의가 되어 있고, 그 사람에게 대접할 용의가 되어 있다. 이게 바로 일반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하고 친하게 지냈던 한 가족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남매간이거든요. 누이동생 둘 오빠 하나. 이렇게 예수님에게 잘해줬습니다. 잘해준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적으로 나올 수 있는 정의라든지, 사랑, 대접, 존경,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다가 뭘 만드느냐 하면은 죽음의 자리를 만들어요. 죽음의 자리가 먼저 뭐냐 하면은 나사로의 죽음의 자리를 만들어요. 두 번째는 그 나사로의 죽음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가 버립니다.

나사로를 죽게 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가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그래야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질문을 해보면 답변에 제일 궁한 게 뭐냐 하면은 예수라는 타인이 죽었는데 왜 당신이 용서를 받습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예수님을 본 적이 있어요? 만난 적 있어요? 없는데,  왜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죽었으면 그 사람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 받고 혼자 살아야지. 죽기는 예수님이 죽었는데 왜 멀쩡한 당신이 구원받고 천국엘 가? 이거 한번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다. 이거는 뭐 억지고 우격다짐 같은 생각이 안 들어요?

아니, 교회마다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설명을 해보라는 거예요. 설명을. 누가 나서서 설명을 해보라 이 말이죠. 이게 왜 이렇게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은 인간은 아침마다 거울을 보죠. 거울을 보면 자기의 몸이 보입니까? 자기의 자리가 보입니까? 몸이 보인다고요. 사실은요, 인간이 자기의 자리를 정리하고 있다고요. 인간은 눈에 보이고 자기의 영향력은 눈에 안 보여요. 지남철은 보이지만 지남철의 영향력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는 것을 수식화 시킨 사람이 있어요.

그게 바로 16세기에 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만유인력. 보이는 것은 사과에요.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 시대에 있는 사람들은 사과만 봤어요. 사과가 떨어진다. 주워서 먹어야지. 이거만 생각했어요. 왜? 생존게임이니까. 먹고 사는 것만 신경 쓰니까. 그런데 뉴턴은, 그 당시의 과학자라고 하는 것은 요새 말하면 신비주의자거든요. 실제로 뉴턴이 많이 신비주의고 연금술 같은 것에 많이 몰입한 사람인데. 저게 왜 떨어질까? 하는 거예요. 그러나 개 한번 떨어트려보세요. 떨어지죠. 저 개가 왜 떨어졌을까? 이거 생각 안 하고 119에 신고하라고 이래 나오지. 그게 왜 떨어지는지를 묻지를 않죠.

왜 떨어지냐를 문제 삼는 것은, 그걸 질문 삼는 것은 내가 인생을 살아도 거기서는 해답이 있다, 없다? 해답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잘하고, 빌딩을 세우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타고, 그것은 진정 내가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왜 그걸 선호하는지 이유가 없어요. 돈 좋아한다. 사람들은 그걸로 끝나요. 이재용한테 당신은 삼성그룹 회장인데 왜 돈 좋아합니까? 모르죠. 철학박사한테 당신은 왜 돈 좋아합니까? 백수 될래요? 교수 될래요? 교수가 좋죠. 왜? 월급이 나오니까. 왜 돈 좋아합니까? 몰라요. 아무리 철학을 해도 몰라요. 의사해도 몰라요. 뭐 되도 않는 인류에게 공헌을 한다고 하는데 거지가 되도 공헌하렵니까? 이러면 쑥 들어가 버리거든요.

근본적으로 돈이라는 것을 감추고 인류에게 공헌하고 남에게 기여한다고 자꾸 이런 변명을 하는데, 궁극적으로 파보게 되면 돈에서 막혀요. 돈. 인간은. 돈이라는 말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걸로 최종 스톱이 돼요. 왜 먹어야 되는데? 왜 입어야 되죠? 추워서. 그럼 에어컨 끄든지. 아니 왜 먹어야 되고 왜 입어야 되고 왜 잠자야 되는데? 몰라요. 그 이유를 몰라요. 이것은 뭔가 보이는 것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고 있다. 보이는 것에. 그것을 기독교가 오고 난 뒤에 철학적으로 풀려고 애쓴 사람들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해답에 도전했습니다.

그 도전한 한 사람 중에 누구냐, 하이데거에요. 하이데거, 레비나스, 라캉 이런 사람들. 니체, 이런 사람들이 쭉 등장했어요. 철학가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살았다 부터 출발해서 해답이 안 나온다. 어디서 출발하느냐, 인간은 왜 죽느냐, 죽음부터 출발해야 된다. 죽음부터 출발해야 돼요. 헤겔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죽음부터 출발해요. 죽음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철학이기 때문에 해답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죽음부터 출발하는데 앞에 그냥 죽음부터 출발을 못했어요. 인간이. 내가 죽는다가 죽음인줄 알고 있어요. 내가 죽는다가 죽음이 아니에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죠. 우리는 숨이 꼴까닥 넘어가는 것을 죽음으로 보는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죽음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과의 결별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 니 오지 마!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피조물에게 주시는 최고의 저주는 뭐냐 하면은 따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있는 곳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 가장 저주에요. 대표적인 것이 악마에요. 악한 천사. 니는 따로 살고 나는 따로 살자. 둘 다 영원히 살자. 하지만 그동안 너에게 내가 준 혜택을 다 회수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준 혜택.

그래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에게 징후가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은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어때요? 이쁘죠. 참 이뻐요. 생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밧데리에 충전이 많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이 많이 남아있어요. 이뻐요. 딸애 같으면 더 이쁘죠. 이쁜데, 그 딸애가 나이가 한 86세라고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그 이쁜 것 어디에 갔어요? 생명의 밧데리가 다 됐나 봐요. 밧데리가 다 떨어져버렸어요. 20대 아가씨들이 이걸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20대 아가씨는 대학 들어가고 취직을 해가지고, 취직하면 그나만 지옥이거든요. 생활이. 개성이고 뭐고 다 날아갑니다. 완전히 종노릇해야 하니까 그것을 참을 수가 없죠.

그러면 20대 아가씨들이, 이거는 일본부터 그렇지만, 돈을 모아서 어디에 가느냐 하면은 진정 나를 찾는 거예요. 어디에 가서 찾느냐, 북유럽에 가서. 파리 독일 오스트리아에 가서 그동안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이거는 인간대우도 못 받은 이 직장생활에서 휴가내서, 모아둔 돈 가지고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가가지고, 지금은 못 빠져나가지만. 유럽에 가서 찰칵찰칵 셀카 찍고. 라라라라라라~~ 지중해가서 찍고.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그래서 혹시나 또 괜찮은 남자 만나서 둘이 또 어떻게 썸씽해볼까 싶어서. 일을 하면서 참아내고, 잔업하면서 참아내고, 성추행을 참아내는 이유는 이번에 티켓 끊어 유럽이나 파리가려고. 남자 쪽 결혼도 보류, 결혼하면, 나의 나됨은 배가 쑥 들어간 게 나의 나됨이에요. 아름다움이에요.

근데 결혼해가지고 애를 낳아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이 스타일을 어떻게 할 거예요? 이 스타일 감당 안 되죠. 애 낳으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됩니까? 달라붙어가지고 잠도 못자요. 새벽 두시고 네 시고 막 깨네요. 친구 못 만나죠. 애 때문에. 칠칠맞다고 욕하죠. 전부 다 결혼 안 했으니까. 결혼해서 애 낳으면, 그럼 여기서 사랑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죠. 친정엄마. 친정엄마한테 하루 종일 맡기고. 저녁때는 자기가 맡고 또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역시 직장생활이 힘들지만 애 키우는 것보다 낫다고 돌아다니고. 또 친정엄마는 50대에 내 생활을 해볼까 하는데 끝났어. 딸 하나 키운다고. 아들자식 키운다고. 출퇴근도 그런 출퇴근이 없어요. ktx타고 왔다 갔다 하고. 주말부부에요. 그리고 받는 돈은 조선족보다 더 못해요. 푼돈이에요. 50만원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딸도 그걸 노리고 있고. 250주다가 50만 주니까 얼마나 좋은지. 딸들이 특히 심하죠.

저주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살 수 있는 곳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 저주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하나님이 사시는 곳의 모든 인테리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꾸며놓은 거거든요. 요한계시록 21장에. 상상이 안 됩니다. 피조물의 인테리어도 펜트 하우스, 고급아파트 인테리어 대단하죠. 솔로몬이 입은 옷 대단하죠. 하지만 하나님의 천국 인테리어는 거기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너무 영광스러우니까.

그걸 누가 봤느냐, 사도바울이 봤어요. 어디 가서 봤느냐, 삼층천에 올라가서 봤어요. 삼층천에 올라가서 보고 난 뒤에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언어로서는 표현불가, 라고 결론 내렸어요. 인간의 언어로서는 표현불가.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걸 봤기 때문에 소원이 있는데 소원이 뭐냐, 빨리 내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이다. 그 좋은 펜트 하우스 놔두고 이게 무슨 짓이고. 로마에 가서 매 맞고. 빨리 생을 끝내는 것이다. 너무 좋아서.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 증거 하라고 사도바울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계속 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도소 가나 안 가나 천국 아닌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에, 자기는 교도소에 갇히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벌금 내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벌금 낸다고 하더니만 지금은 완화되어서 해라, 하라고 해서 요새는 지장 없이 모입니다. 완화시켜줬죠. 완화. 하도 반대가 심하니까. 기독교 차별한다고 데모하고 있으니까.

죽는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곳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을 철학자들이 나의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봤는데 생명의 의미가 나타나야 죽음이라는 것이 같이 동반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 누가 생명일까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니가 목숨이 안 끊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살아도 나와 같이 살고 죽어도 나와 같이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죽음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 내 안에는 죽음이 없어요. 죽지 아니한다 이 말이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두 번째 부활이라고 해요. 두 번째 부활. 두 번째 부활이 있는 한, 전에 있던 첫 번째 사망, 두 번째 사망도 전부 다 취소가 되는 거예요. 무의미하다고요. 무의미.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가 아닙니까? 마지막 웃는 자가.

마지막 두 번째 부활이 있다면, 이 땅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아래에 고개 숙여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하여튼 온 몸이 종합병동이라. 그러다 코로나까지 걸려서, 있는 기저질환에다가 코로나까지 걸려도, 부활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니 죽음이 있어야 거기서 부활이 나오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재료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부활이 부각이 되거든요.

어릴 때 딸로서 태어나서 아름다웠던 거, 벌써 60가까이 되면 그게 조금씩 삭감이 되고 없어져요. 죽음에 가까워요. 죽음에 가깝다는 말은 생명이 옅어진다. 생명이. 이 이야기하려고 20대 아가씨 이야기를 꺼냈는데, 20대 아가씨들이 이제 실컷 놀고 30대에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이미 30대에 본인은 못 느껴요. 그러나 남자친구나 주변에서는 알아요. 오랜만에 명절에, 설이나 추석 때 가면 “니 30대지?” 나이 이야기 안 해도 얼굴에 30대가 딱 나타나요. 그래서 김광석은 그걸 알아가지고 서른 즈음에 하잖아요. 점점 더 떨어져요. 점점 더. 아, 이게 시장에서 상품적 가치가 떨어지는 거예요. 어릴 때 있었던 나의 상품적 가치가 떨어져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도, 목숨도, 생명이, 목숨이 아닙니다. 왜냐,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은 나로부터, 내가 이해가 되고 내가 납득이 되는 생명과 죽음은, 이건 생명도 죽음도 아니에요. 나 자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나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이 자체가 나를 왜곡되게, 나를 잘못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에, 마귀적 인식 때문에, 나는 내가 있는 이 목숨, 주께서 할당해준 이 목숨, 인생이, 할당한 이유가 촛불 같아요. 촛불이 길어 보이지만 나중에 하룻밤 자고 나면 아침에 촛불이 꺼져있죠. 모기향 같은 거 그런 거 아닙니까? 모기향. 모기향이 뺑뺑 돌면서 상당히 길어 보이죠. 아침 되면 뭐가 있습니까? 옆에 재만 남죠.

이거 우리 인생을 닮았어요. 아무리 인생이 길어도, 타들어가는 것은 너무 작게 타들어가기 때문에 눈으로 못 봐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타들어가는 것이 조금씩 보이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죽어가는 목숨, 하나님과 결별된 이 목숨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인간에 대한 규정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타인의 것으로 내 속을 채운다. 이게 납니다. 이게 나에요. 타인의 것으로. 이거는 천국 가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타인의 것이 내 속에 채워져 있습니다. 타인의 것. 이게 어릴 때부터 시작이 돼요.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내가 오줌 쌌구나. 내가 빨아야지.” 어린애가 태어나자마자 이상하게 말을 하면서 “어머님. 제 기저귀는 제가 알아서 빨겠습니다.” 이런 어린아이 봤습니까? 없죠.

뭐로 봐요?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죠. 당연한 것. 당연한 걸로. 내가 가진 것은 전부 다 외부에서 타인이 나한테 제공된 겁니다. 어릴 때는 불쌍히 여겨서, 어릴 때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거예요. 외부에서. 그리고 커서는 뭐냐, 강제로 외부의 것을 내 것으로 빼앗아야 돼요. 빼앗아야 된다고요. 그러면 결혼은 뭐냐, 미친 짓이죠. 결혼은 그날까지 타인의 것을 가져온 것, 니 집안, 내 집안에서 가져온 것 있잖아요. 형제 몇 명이고? 아무도 없어. 그러면 아버지, 엄마 죽으면 다 내 것이 돼. 됐어, 됐어 결혼하자. 모든 가져온 것을, 옛날 60대쯤 된 사람들은요, 그냥 여자는 남자 집에 딱 오는 거예요. 여자는 그냥 딱 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옛날 노래를 보면 가사에 옛날 사고방식이 나옵니다. 당신이라는 노래를 혹시 아십니까? 당신.

그 당신이라는 노래의 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내 품에 안겨 잠자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이 울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고왔던 여자가 못난 나를 만나서 폭삭 늙은 것에 대해서 자기가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는 노래에요. 중절모자 푹 눌러 쓰고서 김정수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고왔던 여자의 순정이 못난 나에게 바쳐져서” 가사가 그래요. 바친다는 말을 해요. 바쳐져서, 옛날 여자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모든 걸 바쳐져서. 나하나 믿고 바쳤는데 내가 이렇게 고왔던 너를 고생시켰구나. 아내여, 여자여, 내가 한평생 모든 것을 너를 위해서 살리라. 그 노래 가사가 ‘당신’입니다. 식사할 때 가사 한번 들어보세요. 노래 하나로 히트해서 먹고 사는 사람. ‘흙에서 살리라’ 노래하고 똑같은 거예요. 노래 하나만 히트하면 평생 먹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 가사에 보면 그 당시의 결혼관이 그대로 나와 있어요. 여자는 남자한테 일체 모든 것을 다 주는 거예요. 다 주되,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모든 생계를 책임지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생존게임이기 때문에. 모든 생계를 책임지는 거예요. 그래서 딸 낳으면 시집에다가 자기 딸을 인수인계하는 거예요. 시집보내는 거예요. 이걸 원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고, 여자는 몸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삶의 자리가 오는 거예요. 결혼을 하는 것은 삶의 자리와 자리의 결합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집안의 패물을 들고 와야 되지 그냥 오게 되면, 여기 남자의 집에 있는 어머니, 시어머니죠.

시어머니가 처음에는 여자한테 미사일을 보내죠. 아무것도 안 가지고 오고  맨 몸으로 와놓고 니가 한 게 뭐 있노? 구박을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들고 왔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꼭 들고 오는 것을 말로 해야 되느냐? 시집을 왔을 때는 니를 밥 먹여주니까 어느 정도 체면을 차리고 와야지. 쟤는 몸만 달랑 와서 있다. 심지어 어떤 시어머니는 쟤는 속옷만 입고 왔다고 해요. 속옷. 속옷만 입고 왔다고. 이 큰 원 안에 여자가 작은 원으로 들어온 거예요. 이럴 때 여자는 인생의 행복을 느낍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책임져줄 때. 근데 여기서 사단이 나죠. 문제가 있죠. 왜냐 하면은 여자의 이 자기 세계가 이게 없어졌습니까? 살아있습니까? 살아있죠.

뭐냐 하면은 인간의 자아는 과거거든요. 과거에 내가 살던 식으로 그걸 연장시켜달라는 겁니다. 확장시켜달라는 겁니다. 심지어 나의 결핍마저 만회시켜주는 조건하에 나는 시집을 온 거예요. 지금까지 이 결핍을 내 힘으로 채우니까 안 채워지는 거예요. 근데 괜찮은 남자를 만나가지고 내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 미흡한 것, 모자란 대목을 남자가 마저 채워주니까 내가 결혼하기 전에 꿈꾸던 그 모든 나의 계획이 으쌰! 드디어 성공을 한 거예요. 성공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게 옛날 여자들이 했던 생각이고. 지금은 여자들이 영악해가지고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통장을 모으되 이렇게 모읍니다. 니 통장 따로 관리하고 내 통장 따로 관리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를 할 때 결국은 인간은 생존게임이기 때문에 마지막엔 뭐냐 하면은 사랑이고 나발이고 없고 무슨 문제입니까? 돈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마지막 문제에요. 이것 때문에 변호사들이, 특히 여자 변호사들이 밥 먹고 살아요. 여자변호사들은 이혼전문 변호사들이에요. 여자 변호사들은. 남자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 여자가 감당하거든요. 돈 문제라니까요. 돈.

그래서 통장관리를 만약에 옛날처럼 생각해가지고 통장관리를 안 하고 오게 되면 남자가 이혼을 안 시켜줘요. “니 큰소리 쳐봤자 니 돈 없다. 지금껏 시집에서 밥 먹고 살고 애나 키우고 살면서 무슨 재주가 있노? 너는 경력단절이야. 니는 끝났어. 니는 해도 안 돼.” “그렇다면 돈은 원하지 않는다. 애는 내가 키우겠다.” 그러면 법원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돈도 없는 주제에 애를 잘도 키우겠다. 지금 돈 문제거든요. 돈 문제입니다. 돈도 없이 못 키우니까 애는 아버지가 키워라! 그러면 남자는 기분이 좋지 뭐. 돈도 별로 안 줘도 되고 애는 자동적으로 자기애가 되고.

더구나 이 친정이 못 산다면? 친정에 가족이 없다면? 이 친정에서 아빠,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면? 여자는 뭐예요? ‘사랑과 전쟁’이야기입니다. 돈 문제만 따로 하고 공통점만 이렇게 제시해요. 사실 공통점은 남자보고 생활비 내고 내 돈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이래 나가겠지만.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나를, 제가 결혼문제를 길게 했는데, 결혼할 사람도 있기 때문에 했는데, 내 문제는 나를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어떠한 경우가 내 쪽에서는 내세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뒤집을. 나에게서 나를 빼낼 재주가 나한테는 없어요. 그럼 내가 있다는 말은 우리는 결국 어느 나라에 못 간다? 이미 쫓겨난 채로 지옥가야 돼요. 천국 못 가는 거예요. 내가 있는 한.

내가 있는 한 선악적으로 같이 있죠. 악마의 마음이 같이 있죠. 그러면 지옥과 천국 뭐 예수 믿는 것, 이 모든 것은 뭡니까? 항상 거기에 누가 채워져 가요? 내가 최종의미자로, 결국은 나만 구원되고, 내가 복 받아야 되고, 내가 천당 가야 되고, 자꾸 이렇게 우기는 억지를 부려요. 억지를. 그 자체가 지옥에 가야될 이유인데. 주여, 믿습니다. 누가?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내가 믿는 이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닙니다. 내가 우격다짐하는 거예요. 내가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믿으면 천당 간다고 하니까 억지로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는 예수를 믿는 나를 믿지만. 예수를 믿는 나를 믿는 것은 그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렇게 해요. 이렇게 공통점이 아니고 주님의 자리가 있다면 우리를 거기다가 함몰시켜, 성령이 와서 집어넣어버려요. 이 자리에다가. 주님의 자리에다가. 그 주님의 자리가 뭐냐 하면은 바로 세상 사람과 바꿔치기한 자리. 바라바는 비록 사람을 죽인 죄인이지만 본인은 죽기 싫은 거예요. 죄는 지었지만, 중요한 것은 죗값으로 내가 죽는다는 것을 본인이 싫어하는 거예요. 본인이 원치 않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죄는 짓되 다치기는 싫은 거예요. 왜? 다치면 행복을 추구하는 내가 불행해지잖아요. 세상이 불에 타도 나만 행복하면 괜찮아요. 내가 편하고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만족하면 까짓 거 나 빼놓고 다 멸망해도 사람들은 그거 뭐 신경 안 씁니다. 신경 쓰지를 않아요.

내 자리에서 벌어지지 않는 일이라면 어느 누가 울고불고 난리가 나도 우리는 전혀 신경 안 씁니다. 누가 음주운전해서 누가 서른 살 때 죽었다. 그거 뭐? 그건 내 식구가 아니잖아? 내 식구에서 내 친구가 그랬다면 우리는 환장하는 겁니다. 이게 미치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은 몸체가, 거울 보면 내가 아니라 그동안 내 기억 속에 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 자리에서 나를 뽑아내버리면,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나는 죽음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그동안 생각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강남강의에서 했는데, 뭐냐, 자살입니다. 자살.

내가 그동안 구축한 이 자리가 누가 준 것이다? 타인에게 준 거예요. 내가 그동안 타인에게 요구했기 때문에. 엄마, 젖 줘요. 엄마, 기저귀 축축해요. 전부 다 내가 타인에게 요구한 거예요. 타인이 다 준 거예요. 그러면 서울시장은 누가 준 거예요? 서울시장 자리는 누가 이만큼 뽑아놓았습니까? 시민들이죠. 서울시장은 시민들의 눈이 무서운 거예요. 저쪽 시장은 여자만 건드리고. 이게 싫은 거예요. 싫으니까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뭐밖에 없습니까? 이 자리 안에서 내가 사라져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가룟 유다에요. 모든 인간은 자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그 자리를 포기 못하니까. 포기 못하면 그 자리가 인왕산이 되고 북한산이 되고, 그 자리가, 내가 살던 자리에서 내가 장렬하게 자폭하고 폭발해버리는 거예요. 눈감고 다 안 보면 그만이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죠. 인간의 죽음이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에 가는 것이 죽음이에요. 그래서 임마누엘이 뭡니까? 나와 함께 있는 것. 임마누엘을 두자로 줄이면 예수가 돼요. 예수님은 자리 마련하려고 오신 거예요. 이 하나님 자리에 초청하려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의 이 자리가. 그 초청 자리가 우리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내가 가기 싫은 자리를 대신 간 자리.

그게 바로 바라바가 갈 자리를 예수님이 차고 들어간 거예요. 인간들이 밀어서 간 그 자리, 그 자리가 십자가 자리에요. 십자가는 그냥 주님이 자살한 자리가 아니고 누가 들어가야 할 자리를 그가 안 들어가고 대신 들어갔던 자리가 십자가 자리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이 자리에요. 십자가 자리. 그 죽음의 자리가 생명이 아니고 뭐가 이 자리를 마련했는가, 바로 생명이 마련한 자리 같으면 그게 죽는 자리라도 그게 생명의 자리고 하나님의 자리고 천국이에요. 그게.

제자들은 그 자리를 기피했습니다. 자진해서 기피했습니다. 왜? 자기 자리를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베드로보고 어떤 여자애가, 자리가 나왔으니까, 오늘 제목을 수정해보자. 자리보존. 베드로하고 같이 불을 쬐고 있었던 거예요. 모닥불을 이렇게 피워놓고 베드로하고 사람들이 쭉 둘러 앉아 있고 이쪽에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있었던 거예요. 베드로가 여기 있는데 어떤 사춘기 소녀애가 밤이라 잘 안 보이지만 불빛이 어른거리니까, 바람이 불어서 불빛이 베드로 얼굴을 쫙 비췄다 이 말이죠. 그럼 몽타주가 딱 떠오르죠. 수배자. 여자애는 파파라치죠. 파파라치. 왜냐하면 여자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세상으로부터 니가 인정받아야 니가 인간이라는 것이 꽉 차있거든요. 여자 안에는.

따라서 이참에 공적을 쌓으면 더욱더 세상이 나를 인정해 줄 거고 그럼 나는 취직이 잘 되겠죠. 어차피 돈이니까. 세상이 인정 안 해주면 돈이 안 생기거든요. 세상이 불러다가 일을 시켜야 돈이 나오기 때문에. 세상에서 소외돼버리면 내가 원하는 돈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게 기분 나쁘다 할 게 아니고 우리는 평생 그렇게 살았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어릴 때는 부모가 다 알아서 무상으로 해줬기 때문에 자기는 동화책만 보면서 자기는 백마 탄 왕자만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죠. 백마 탄 왕자가 오기 때문에 영어, 컴퓨터 성적이 안 좋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그렇게 얼굴만 된다면 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세상은 뭐냐 하면은 어른이 되었으면 가정에서부터 이미 쫓아내요. 나이가 몇 살인데 집구석에 있나? 나가! 30까지는 키워준다. 30되면 무조건 나가! 쫓아내거든요. 그다음부터는 뺏어야 돼요. 왜냐하면 타인이 나한테 갖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사기를 쳐야 되는 거예요. 사기는 말빨이 되어야 돼요. 말이 되는 순간 전부 다 돈이 된다고요. 골목식당 백날해도 말이 안 되면 백종원이 왔다 갔다 해도 장사가 안 돼. 어서 오세요. 고객님! 이렇게 말이 되어야 돼요. 화사하게 웃어야 되고. 스트레스는 좀 받지만. 웃어야 되고 고객위주가 되어야 되고 배알 같은 것은 전부 다 빼줘서 길에 갖다가 버려야 되고. 에이, 내가 오 만원 보고.. 처음에는 이렇죠. 나중에는 이만 원도 오케이죠. 이만 원이고 만원이건 간에 돈 되는 것은 다 주워 모으는 거예요. 돈 되는 것은.

처음에는 힘들지만 숙달이 되면, 몸이 익숙해지게 되면 친화성을 허락해요. 아, 이렇게 굴러가는 것이 세상이구나! 갑자기 거기에 하나의 같은 동지애가 되죠. 동지애. 동지애를 느끼면서 아까 첫 번째 강의해서 뭐가 빠지면 안 된다고 했습니까? 다윗의 요소가 빠지면 안 되죠. 그런데 너무 동지애가 돼버리면 그게 자기정당화가 돼버려요. “아니 세상이 나만 가지고 그래. 세상이 다 그러면서. 나만 나쁜가? 나만 쓰레기인가? 다 쓰레기인데.” 자꾸 변명들이 나와요. 자비를 구하면 되는데, 자비를 구하는 게 아니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돈 버느라 바쁘다 보니까 복음을 멀리했습니다.” 자꾸 변명이 나와요. ‘나 죄인 맞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를 가지고. 구차한 변명과 핑계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아까 무슨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됐죠.

그러니까 세상에서 경력 따지고 막상 성인이 돼보니까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인간 내부의 본색이 나 위주로 타인을 이용하는, 남의 것을 가지고 나만 먹겠다는, 나만 절대자가 되겠다는 그 본성을, 나이 서른이 되어 사회에 나가면서 지대로 자기에 대해서 어렴풋이 감을 잡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잘나도 나는 남을 이용해야, 남을 등쳐먹어야, 사기꾼이 되고, 창녀가 되고, 도둑놈이 되어야 사는 세상. 이 더러운 세상. 욕을 하면서도 그 세상이 좋아요. 좋아요! 구독 부탁합니다. 유튜브 전부 다 사기꾼들이에요. 하지만 나도 유튜브 해가지고, 좋아요 해서 집에서 한 달에 그냥 백만 원. 그것도 직원들 두어서 편집하고 밑천은 들어가지만. 좋아요, 구독 부탁합니다.

아니, 니가 나쁜데 내가 안 나쁠 필요가 없잖아요. 같이 경쟁이니까. 누가, 누가 더 나쁘냐, 누가, 누가 더 성공하느냐, 에요. 이 세상은. 더러운 세상이 아니고 더러븐 세상이에요. 이게 우리 안에 꽉 차있어요. 배설물로. 꽉 차있습니다. 세상 친화성이에요. 욕하면서 그 세계에 더 깊숙이 들어가요. 더 깊숙이, 더 깊숙이. 거기서 깃발 하나 뽑으려고 해요. 최종 성공의 깃발을 내 손에 쥐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전에는 이 사회 활동은 남자만 하게 되어 있었는데, 결혼하고 난 뒤에 평생 직장생활을 안 했어요.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만. 염치도 없이 평생을 남편 월급가지고 먹고 산 거예요. 밖에서 얼마나 고생한지도 모르고. 잔소리만 해대고. 월급이 적다고. 이 영역은 내 나와바리 내 영역이라고. 그러니까 남편도 할 말이 없죠. 병든 부모나 모시라고 큰소리치죠. 흥정이니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고.

어떤 인간도 나라는 것에서, 아무리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해도 끝까지 나를 포기할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한 몸인 척 하면서 유지되는 게 결혼이에요. 한 몸인 척 하면서. 그것은 결국 돈 문제죠. 그러니까 ~인 척 하는 것을 견뎌내면 이혼 안 하고 잘 사는 거예요. ~인 척 하는 것. 그러나 본색을 드러내면 안 돼요. 끝까지 내 본색을 밟아야 돼요. 그래야 같이 살 수 있어요. 그래야 결혼이라는 사업이 유지가 돼요. 그걸 파토내면 안 돼요. 성질나서 바람 피웠다고 이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이니까. 겸손하게. 돈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어요. 오랜만에 바른 소리하는데, 다른 데서는 박수가 막 나올 건데. 돈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 끗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 위대한 것의 쓰레기가 되신 거예요. 그러니까 위대한 것을 찾다가, 참으로  니 자신이 뭔지 안다는 것은 니가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그 위대함 때문에 누가 쓰레기가 되었는지 한번 찾아보라 이 말이죠. 주님은 쓰레기통에 계세요. 우리가 갖다버린 쓰레기통. 발로 차버린 쓰레기통. 돈도 없는 게? 라고 무시했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까꿍! 하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울고불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잘 믿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확 밀려와요. ‘아, 내가 잘못된 것을 왜 이제 자각할까? 왜 진작, 아무리 봐도 세상을 봐도 잘못됐고 나도 잘못됐는데.’ 그걸 억제하면서 ‘아니야, 그 가운데 선한 것이 있을 거야. 뭔가 그 가운데 정의로움이 있을 거고 그 가운데 천국 가는 갈만한 요소가 있을 거야.’ 억지를 부리는데, 살면 살수록 전부 다 모든 것이 환상이고 허구에요. 진짜 실제는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아직 재림 안 했어요. 버스 안 떠나고 있는 거예요. 언제쯤 돌아오는가 한번 보자. 언제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돌아오는지 한번 보자. 십자가는 한결 같아요. 그 안에서, 그 죽음이, 예수님 죽음 자리가 우리의 생명의 자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잘못 보는 것은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비정상인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이 비정상임을 내치지 아니하시고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다리는 그 사랑의 끈질김을 이제는 우리 속 안에까지 들어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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