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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8 17:32:11 조회 : 287         
사무엘상 62강(언약방출), 마태복음 124강 (자아) 20092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노래


동영상1                      동영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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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IP:119.♡.87.190) 20-09-28 20:48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리빙 호프 번안 가사

깊은 절망의 수렁 가운데
주님께 닿을 수 없던 우리
어둔 밤 중에 하늘을 향해
주의 이름 나 부를 때
어둠을 뚫고 오신 주 사랑
나의 절망 거두셨네
주님의 공로 다 이루셨네
주예수 나의 산 소망

그 누가 주의 자비를 다 알아
한 없는 은혜 측량할까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죄가 되신 구주 예수

주의 십자가가 내게 말하네
영원히 난 용납됐네
아름다운신 왕 나는 주의 것
그리스도 나의 산 소망

할렐루야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자유케 하셨도다
죄의 저주를 끊으신 주께 구원이 있도다
주예수 나의 산 소망

언약된 아침 장사된 몸에
부활의 호흡 시작됐네
유다의 사자 위엄찬 선포
사망이 무너졌도다

이제 사망은 무덤이 더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네
유다의 사자 위엄찬 포효 사망이 무너졌도다
주 예수 승리하셨네

그리스도 나의 산 소망
당신은 나의 산 소망
 이미아(IP:122.♡.170.138) 20-10-02 13:35 
대전-62강 사무엘상20장1절(언약방출)20200928-이 근호 목사

원래 진리는 실패를 통해서 알아요. 진실은. 실패하지 않으면 진실을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멀쩡하다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에요. 내 자신이 멀쩡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진실에 다가갈 때는 반드시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하면은 실패를 통해서 진실에 접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냥 십자가를 알면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알고자 하는 내가 십자가 접근에 실패해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를 수정해야 될까요? 나를 수정해야 될까요? 내 쪽을 수정해야죠. 내 쪽을 수정하기 위해서 여기에 고맙게도 뭐가 있느냐 하면은 삶의 환경이 주어져있습니다. 삶의 환경을 통해서 십자가,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십자가, 하나님을 찾는 의도가, 최종적인 그 의도가 나를 진실 되게 붙잡기 위해서 하는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삶의 환경이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 할지라도 실패로 끝나게 해서, 내가 진실에 다가서는 것은 없고, 진실이 나에게 다가오게 되면, 내 안에 진실의 자리가 마련된다.

지금까지 한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죠. 예를 들면 이것이 언약인데요. 언약할 때 뭐 여러 가지 언약이 있지마는, 노아언약 같은 경우에는, 노아하고 사람들이 있을 때에, 노아하고 그 당시 사람들하고 섞여 살죠. 섞여 살고 함께 살잖아요. 오늘날 여러분들이나 대전 사람들이나 뭐 이런 오늘날처럼. 섞여 살 때, 섞여 사니까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언약이 다가오니까, 방주 만들라는 지시가 오니까, 노아와 그 당시 사람들, 둘 사이가 날카롭게 분리가 됩니다. 너는 너 갈길. 나는 나 갈길. 분리돼요. 오늘 사무엘상 20장과 다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0장은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인데, 오늘 바꾸겠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요나단과 다윗의 이야기로.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 차이점이 있어요. 다윗과 요나단과 요나단과의 다윗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요나단 입장에서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를 보자 이 말이죠. 요나단 입장에서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 다윗입장에서는 요나단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보는 데에, 여기에 같이 합세하는데 실패를 해요. 아까 실패이야기가 나왔죠. 실패해요. 요나단이 다윗에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언약을 갖고 있었다 이 말이죠. 요나단은 언약이 없어요. 요나단은 다윗과 하나가 되고 합세하고 싶어요.

근데 실패로 끝납니다. 왜냐 하면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을 어떻게 보느냐의 입장도 중요하고 요나단이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서 왜 합세되는 것이 실패로 끝나는가, 오늘 첫째 강의의 제목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작별인사에요. 작별인사. 둘이 헤어져요. 근데 사무엘상 20장 내용을 보게 되면 이 둘이는 너무 사랑해요. 사무엘상 20장 17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남자가 남자를 서로 사랑한다 했고,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나오죠. 사랑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동성애자인가, 이래 생각하지 마시고요. 다윗에게, 보통사람에게 없는 신적인 요소가 있음을 사랑하는 거예요. 신적인 요소가 있음을. 그 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제가 강의 초반부터 이야기했지만,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있는 거예요. 초월적인 거. 그 사람은 우리 보통 인간이 맞는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와 다른 길로 가게 하는 다른 요소가, 별개의 요소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요나단은 다윗을 그렇게 본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을 어떻게 봅니까? 내가 세상의 일반 사람과 같다. 그런 생각을 하셔도 됩니다마는, 그런 생각하면서 뭐 그냥 보통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살지, 라고 하고 싶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어떤 힘이라고 할까? 어떤 관계,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는 것, 그런 것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수시로 늘 느껴져야 합니다. 사실은 이게 느껴져야 해요. 그게 어떻게 느껴져야 하느냐 하면은 스스로 그걸 묻는 거예요. 물음이죠. 내가 나한테 묻는 겁니다. “너는 예수님 왜 믿으려고 하는데?” 내가 나한테 묻는 거예요. “니가 왜 예수 믿으려고 하느냐?”

이거는 예수님이 베드로한테 한 질문과 똑같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할 때, 베드로가 답변을, 주체자를, “내가 질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질문 주체를 주께로 넘겨버립니다. “해답을 갖고 계신 분이 저한테 질문을 했잖아요. 주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주를 사랑하게 되지, 주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제가 먼저 주를 사랑하겠습니까?” 정답이에요. 딩동댕~♬ 정답입니다.

그 진리를 이제 사무엘상 20장에서 요나단과 다윗을 통해서 우리가 볼 참이에요. 볼 차례다 이 말이죠. 제목은 작별인사입니다. 작별인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별을 해요. 이별을 하면서 거기서 터져 나온 게 있어요. 이별을 하면서 요나단과 다윗 속에서 방출된 게 뭐냐 하면은, 그것은 바로 언약의 진수입니다. 언약의 진수. 같이 사는데서 언약의 진수가 아니라 헤어지는 데서 언약의 진수예요. 남녀가 헤어지면서 아, 사랑이었구나~! 아는 것처럼.

자, 여러분이 아시는 질문 하나 해볼게요. 여러분이 아시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늘로 올라갈 때에, 따라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자들 중에. 없죠. 작별이죠. 작별이에요. 작별할 때 언약의 진수가 나와요. 언약의 진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 쪽에서 언약을 수행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었다, 라고 하는 것. 노아언약을 이야기하면, 이런 것을 생각해보세요. 이게 노아방주입니다. 노아방주. 노아방주가 있는데, 물로 하니까 방주가 물에 떴잖아요. 그럼 여기서 물에 떴으니까 전에 살던 땅에서 벗어나겠죠. 그렇죠.

살던 땅이 이미 물에 잠겼지만, 일부러 생각을 이렇게 해보는 거예요. 물에 안 잠겼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럼 여기 이 땅에는 누가 사느냐 하면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적인 자기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가득참이에요. 그런데 노아는 방주를 타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과 방주 사이에, 이 간격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바로 물이 있죠. 그 물이 뭐냐 하면은 심판의 물입니다. 심판의 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죄가 관영하니까 물로서 심판했잖아요. 이게 언약이에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땅의 사람이 떠나는 방주에 쫓아 올라와가지고 헤엄쳐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배는 어떤 배냐, 떠나가는 배. 어떤 노래가 생각나는데. 떠나버려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게 항구라면 배가 떠나버려요. 떠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신기한 거예요. 이게. 이게 초월적인 요소예요. 이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올라타서 노를 젓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 안에 있어요.

신약에서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노아 때는 방주 안, 이 안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신학을 하고 기도를 많이 해도, 니가 있는 자리에서 이 방주로 건너올 수 없다. 왜? 나는 너희를 떠나가니까. 너희를 떠나가니까. 여기서 작별, 떠나감, 같은 뜻인데. 떠나가는 것. 자, 구원은 뭐냐, 구원이란 떠나가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탈출도 가능하지만 분리되는 겁니다. 분리되는 것. 이것을 우리 인간은,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알아서 떠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왜? 살아왔던 모든 생활이 그들에게 배웠기 때문에, 그들을 떠난다는 말은 이건 사회적인 죽음이기 때문에, 이거는 자살과 마찬가지에요.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떠날 수는 없지만, 언약이 왔기 때문에, 언약 때문에 안 떠나고 싶어도 주께서는 떠나게 하는 겁니다. 뭐 말이 통해야 함께 살지. 말도 안 통하는데. 이래 있어도 떠난 사람이에요. 이게 심판이라는 것을 건너갈 수가 없죠. 요한계시록 15장을 잠깐 한번 보겠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이래 보니까 떠나는 거예요.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이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이게 바로 출애굽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는 그냥 보통 물바다입니다. 근데 이건 유리바다, 왜? 불이 붙었으니까. 전에 출애굽 할 때는 홍해, 물이었잖아요. 홍해바다가 물이잖아요. 이제는 물이 아니고 불이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죄인인 입장이니까 건져내는 것이고요. 건져내는 것. 건져내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과 비교하는 입장에서는 떠나가는 것이고. 떠나가도록 건져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과 요나단을 생각하면 다윗은 요나단을 건져내고 싶지만, 요나단 입장에서는 누구에게서 떠나가느냐 하면은 아버지 사울에게서 떠나가는 거예요. 아버지 사울에게서.

그것이 사무엘상 20장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0장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쭉 읽어보게 되면, 다윗과 요나단은 친구사이였더라. 그래서 좋아했더라. 그래서 우리 같이 지내자고 했는데, 근데 다윗이 하는 말이 너희 아버지가 나를 굉장히 싫어하더라. 요나단이 하는 말이,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아니야. 한번 물어봐. 다윗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봐. 그래서 순진한 요나단이 물어봤죠. 물어보니까, 욕을 해요. 30절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렇게 되어 있죠.

요나단이 순진하게도 아들이 좋아하는 친구를 아버지도 좋아할 것이라고 아주 순진하게 생각하는 거죠. 순진하게 생각하니까, 여기에서는 아직까지 떠나간다는 것, 작별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한 겁니다. 아니, 세상에 마음 맞는 자와 친구가 된다는 그것이 뭐가 허물이 되겠어요? 근데 사울이 등장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도 사랑할 것이다. 이렇게 삼각관계에서 사랑이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겁니다. 근데 사무엘상 20장에서 보면 사울은 뭐냐, 초월적 기능을 하고 있어요. 어떤 악한 기능. 언약을 보복하고 공격하는 그런 폭력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는 거죠.

그럼 아버지로 인하여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같이 계속 사귀고 있겠습니까? 작별인사를 해야 됩니까? 마지막에 뭐냐 하면은 작별해요. 42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이 가라” 둘이 좋아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서 헤어졌다. 이게 보통 세상이야기잖아요. 근데 여기서 성경이 기록된 이유가 그들이 헤어지면서 방출된 것이 있어요. 나온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다윗언약의 핵심과 연관된 내용이 나온다는 거죠. 연관된 내용이. 실패했을 때 방출하는 거예요. 방출.

꿀벌을 잡았다. 그냥 있을 때는 안 보였는데 터트려보니까 꿀이 나왔다. 이게 꿀의 방출이잖아요. 요나단과 다윗 사이는 보통 사람들처럼 서로 친구사이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좋아했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사이인데, 둘이 끊어지고 나중에 헤어지고 보니까 거기서 초월적인 내용이 나오는 거예요. 초월적인 내용. 초월적인 내용을 다시 설명해볼까요? 노아 때 사람들이 방주 쪽으로 갈 생각도 없었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있는데, 방주이야기가 귀에 안 들어오죠. 조금 있다가 비가 온다. 방주에 들어가야 산다. 이게 기존에 사는 일상적인 논리와 이성적인 보통 원칙에는 전혀 먹힐 수 없는, 먹혀들어가지 않는 엉뚱한 내용이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은 항상 그런 식이예요. 우리가 납득을 해서 내 쪽에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는다. 예수님 피는 깨끗하고 나는 더럽기 때문에 깨끗한 피가 내 더러운 내 죄를 씻는다. 언뜻 보면 인간이 이성적으로 수용할 것 같죠? 옷에 때가 묻었으면 세제를 넣어가지고 세탁기 돌리면 깨끗해진다. 그게 뭐 이상해요.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죠. 근데 그렇게 돼버리면 세제나 세탁기가 결국 주가 됩니까? 깨끗해지는 내가 주가 됩니까? 어느 쪽이 결과적으로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겁니까? 나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십자가를 모르는 거죠.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나 좋아라고 십자가 믿는 거예요. 그런 십자가는 없어요. 떠나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주께서 건져준다는 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왜냐, 건져준다는 말은 같이 거기서 살지 말라는 거예요. 같이 거기서 함께 살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건져준다는 게 뭡니까? 갈비탕에서 갈비 건지고, 샤브샤브에서 만두 건지잖아요. 오뎅 건지고. 건져주면 너는 늘 거기에 있지 말고 니는 분리돼라 이 말입니다. 건져준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걸 나와 너 사이에, 여기와 거기로, 나 너로 인하여 언약 안에서는, 언약의 시작점에서는 ‘나와 너는’ ‘여기와 거기로’ 이렇게 분리되는 겁니다. 나와 너는 여기와 거기로.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됩니까? 이걸, 여기와 거기를 지워버리면 이해가 되겠죠. 다윗과 요나단은 여기에 함께 있죠. 그러니까 다윗과 요나단이 함께 있을 때는 ‘여기’는 있지만, 뭐는 없는가 하면은 ‘거기’라는 게 없죠. 왜? 같은 한 장소에 있기 때문에, 친구사이로 그 동네 살았으니까, 거기가 없잖아요. 근데 작별하고 난 뒤에는 다윗이 있는 곳은 거기가 되고, 아니, 다윗의 입장에서 다윗이 있는 곳이 여기라면, 요나단이 있는 곳이 뭐냐 하면은 거기가 되는 거예요. here과 there이 되는 거예요. 여기와 거기.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방출이라고 했습니까? 이게 언약방출이에요. 언약방출. 제목을 또 바꿔야겠어요. 작별인사도 좋지만 언약방출로. 여러분들은 성령을 받으면 꿀벌입니다. 꿀벌은 꿀을 갖고 있어도 꿀이 안 나타나요. 밟혀야 돼요. 터트려져야 해요. 이 땅에서. 이 땅과 결합하는데 실패로 끝나야 되는 겁니다. 한쪽은 복음을 아는데 한쪽은 복음을 모르는 부부다. 남편 설득하는데 실패해야 되고 아내를 설득하는데 실패해야 돼요. 그걸 성공하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내가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니도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관한 개념과 지식과 기호와 단어를 알아들었죠.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 그거는 알아들었죠. 그러나 실제로 주님이 다가오는 것은 내가 아는 그 십자가, 복음, 피, 그게 다 구원하는데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소용없는 거예요. 그거. 그거 내 좋아라고, 천당 가려고 꼼수로 요령부린 거예요. 요령부린 거.

북한 김정은이 밑에 있는 그 장군들이 옷이 늘어지도록 온통 훈장을 다 달고 나오죠. 그 훈장 달고 한국에 오면 그거 효과가 있습니까? 단칼에 그냥 사형이죠. 그게 하늘나라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십자가 알고 복음 알고 이게 하늘나라에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요. 하늘나라는 내가 실패자가 되어야 해요. 내가 구원받으려고 그토록 애썼는데, 그게 전부 뭐였다? 그게 전부 다 실패였고 실패였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래야 꿀벌이, 원래 토한다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냥 밟혔다고 봅시다. 내 몸이, 벌꿀 몸이 완전히 처참하게 밟히니까 터져가지고 안에 있는 꿀이 나오는 거예요. 원래 꿀벌이 토해내서 꿀을 모으는데. 그런 식으로 곱게 하지 말고 과격하게 나갑시다. 밟혀서 가는 거예요. 밟혀서. 왜? 우리는 우리가 밟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강제성을 싫어해요.

다시 한 번 사무엘상 20장, 사무엘상 20장 줄거리를 들어보니까 굉장히 쉽죠. 아까 이야기한대로 서로 좋아했다. 아버지는 싫어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쉬운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자, 사울과 다윗은 왕과 신하로서 다른 신하들이 인정을 해줬고 다른 백성들이 인정을 해줬어요. 다윗은 사울의 신하요, 사울은 다윗을 신하로 인정했고, 다윗은 사울을 왕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서로서로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아는 사이, 서로 안 끊어질 그러한 관계. 어떤 관계? 돈독한 관계. 사울이 왕이 되고 다윗이 신하가 될 때, 우리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룬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근데 여기에 누가 끼었습니까? 여기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끼어들었죠. 이 관계에. 끼어들어서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성경 그대로 사랑했어요. 근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에게 뭐가 있었다고 했습니까? 초월적인 요소가 있어서 그 초월적인 요소를 보고 사랑한 거예요. 근데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이렇게 인정해줬으니까, 아들인 내가, 요나단이 다윗을 할 때에, 아버지도 좋은 사람 사귀었다고 칭찬해 줄 것이라고 요나단이 아주 순진하게 생각한 거예요. 순진하게.

그러니 지금 여기 세 사람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함께 같은 장소에 있죠. 그게 바로 요기요, 여기에 있는 겁니다. 여기서 거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온 집안이 임영웅이 노래를 들을 때, 온 집안이 재미있게 들어요. 온 집안이. 임영웅이 노래 잘한다. 백억 수입을 가질 만하다. 광고가 열 몇 개고. 역시 노래 잘해. 트롯 때문에 코로나를 이긴다. 전부 다 생각이 같아요. 같은데, 넷째 아들이 방금 군에서 제대하고 왔어요. 나는 임영웅이 보다 김호중이 좋더라. 이래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임영웅이 노래할 때 자기는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리죠. 갑자기 여기에 온 식구가 다 모였다가 뭐가 돼요? 거기가 발생되는 거예요. 거기가. 거기라는 장소가 발생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백날 소리를 질러봐야 오지를 않아요. 구원받을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는, 여기에 같은 인간인줄 알았죠. 목수의 아들이니까. 근데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밉상을 받고 폭력적으로, 강제로 죽임을 당했죠. 예수님이 죽어도 우리와 같은 데서 죽는, 일반사람들처럼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자꾸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버려도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너희는 땅에서 나서 땅에서 살지만 나는 원래 있던 장소로 간다. 나는 하늘에 올라간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자꾸 올라간다고 이야기해요. 올라간다고.

올라간다고 되어 있고, 요한복음 3장에서는 모세가 놋뱀을 든 것같이 니가 나를 쳐다볼 때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쳐다볼 때가. 쳐다보려면 인간보다 키가 더 높은 다른 공간이 있어야 쳐다봄이 성립되지 않습니까? 자꾸 다른 곳에 간대요. 예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면 언약이 알려지지 않을 건데, 언약을 모를 건데, 예수님께서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왔다가 올라가버리니까, 거기서 뭐가 방출이 됩니까? 언약이 방출이 되는 거예요. 아,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망상이구나! 망상이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구원받아 천국 간다는 게, 이게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구나! 그러니까 이게 갈 수 없는 곳에 가라고 마귀가 부추긴 거예요. 마귀가. 마귀가 기독교 종교를 만들어가지고, 교회를 만들어가지고, 자꾸 갈 수 있다고, 예수 믿으면 갈 수 있다고 자꾸 부추긴 거예요. 데리려와야만 가는데, 데리려오지도 않고 내가 갈 수 있다고, 니가 예수님만 잘만 믿으면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 가는 그 화물 있잖아요. 택배화물. 그 택배화물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내가 주인공이 돼버린 거예요.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어요. 누구 좋아라고? 본인 좋아라고. 왜?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니까, 골리앗을 죽였으니까,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윗 때문에 구원받았으니까. 그 구원자를 싫어할 이유가 없죠. 그러나 둘이는 나중에 어떻게 됐다? 결국은 작별인사를 했어요. 아까 작별인사를 봤죠. 20장 마지막 42절에. 빠이빠이에요. 그리고 그 뒤에 못 만났습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누구와 함께 죽느냐 하면은 자기 아버지와 함께 죽어요. 사 무엘상 제일 마지막장 31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버지도 죽고 요나단도 죽고 다 죽어요. 그래서 다윗이 사무엘하 1장에 보면 얼마나 우는지 모르겠어요. 굉장히 울어요.

지금까지 어려운 게 하나도 없어요. 요나단과 다윗과 사울이 여기에 함께 있었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해서 그것을 사울에게 이야기하는 순간, 여기가 갑자기 다윗이 따로 있는 장소, 거기가 만들어졌죠. 자, 그 원인이 뭐냐, 원인은 사울이 다윗에게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폭력적이었다는 사실. 너무 과하게 폭력적이에요. 너무 과하게.

그 점에 누가 또 놀라느냐 하면은 빌라도도 놀라요. 오늘 마태복음 하겠지만. 빌라도도 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너무 폭력적이에요. 빌라도는 뭐 이방인이니까. 율법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해서 그게 뭐 사형시킬 일인가? 미친 사람이 미친 말을 한 두 마디 하는데 그것가지고, 그걸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 이걸 가볍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울의 입장에서 다윗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사울은 알았어요. 왜냐 하면은 사울은 본인의 능력으로 본인이 교육받은 것으로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지난번에 했잖아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악신이 들어가는 거예요. 악신은 영적존재에요. 레벨이 영적레벨이에요. 영적레벨에서 공격을 받으니까 다윗도 어떤 입장인가 하면은 영적 레벨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윗도 영적레벨이에요.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보자 이 말이죠. 우리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우리가 본인 스스로 자기를 영적존재라고 평소에 생각하면서 대인관계에 나섭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는 뭐 친구한테 헤헤거리고 잘 보이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한번 정리해봅시다. 관계, 인간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되면 관계가 두 개가 있어요. 여기서 뭐 여러분들이 어렵다고 하겠는데, 어렵다고 해도 제가 밀어붙일 참이에요.

뭐냐 하면은 표현적 관계와 현상적 관계에요. 얼른 이 단어만 해가지고는 왜 이 말을 쓰는지 모를 거예요. 표현적 관계와 현상적 관계. 현상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툭툭툭툭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에, 빈공간이나 빈자리에 날파리가 이렇게 툭툭툭툭 들어오게 되면, 또는 모기가 오게 되면 이거는 현상이에요. 현상. 근데 표현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빙산에, 빙산을 보면 7/8은 밑에 있고, 1/8이 나타났다고 이래 하잖아요. 배가 이 튀어나온 이 빙산 꼭대기를 우습게보고 돌진하다가는 진짜 숨겨져 있는 몸통을 건드려가지고 배가 좌초하게 돼요. 이 튀어나온 이걸 표현이라고 합니다. 밑에 있는 이건 잠복된 거고. 표현한 거예요. 이건 본성을 따로 갖고 있는 거예요. 본성을 따로 갖고 있죠.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겉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전부 다 현상적이에요. 친구들이 모여가지고 중국집에 가서, “니 뭐 시킬래?” 주인은 주문받으면서 ‘제발 좀 같은 거 시켜라. 이 열 명아.’ 열 명이 왔다고 합시다. 짜장면 열 그릇 이렇게 시키라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열 명이 있다가, 나 짬뽕! 나 짜장면! 나 군만두!... 열 개가 다 다르면? 짜증나죠. 중국집 주인이. 다른 손님도 받아야 되는데. 이게 현상적인 거예요. 그런데 열 명이 다 짜장면 열 그릇! 이러면 처음부터 본성이, 속성이 동일하게 되는 거죠. 동일하게.

그래서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는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현상적 관계가 아니고 표현적 관계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남이 아니고 서로 표현은 다르지만 뿌리가 하나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인 거예요. 이게 바로 요나단과 다윗이 맺은 언약입니다. 사무엘상 20장 17절을 다시 보게 되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으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맹세라는 말이 나오죠. 그 다음에 이제, 요나단이 다윗을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너희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그렇게 맹세한 것이 있어요. 요나단이 다윗을 보고. 42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영원을 이야기하죠.

그 다음에 사무엘상 1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절에,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표현은 서로 딴 몸이라 서로 다르지만 안에 담겨있는 것은 다 같이 같은 언약에서 나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현상입니까? 표현입니까? 표현이에요. 그래서 제가 성도는 예수님의 아토피라고 한 거예요. 아토피가 있으면 피부에 발진이 나타나죠. 괴롭죠.

그러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수난을 성도가 본의 아니게, 본인이 유도한 게 아니고, 본인이 어쩔 수 없이 다 받아내야 돼요. 그래야 이 세상에서 정을 끊을 수가 있어요. 정을. 우리 딸에게 둘째 애가 있는데 돌을 지냈거든요. 아직도 엄마 젖을 달라고 달려드는 거예요. 그래서 방법이 뭐냐 하면은 식초를 발라라. 식초를 바르면 떨어질 것이다. 다른 애들은 다 떨어졌어요. 그런데 아직도 안 떨어지고 있으니까. 근데 그 전에 여러 가지 방법을 썼겠죠. 맛있는 설탕도 했고, 외손자는 그걸 간식으로 생각해요. 주식은 엄마 젖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젖 떼려고 식초 하니까, 엄마야! 하고 떨어져요. 떨어졌는데, 밤이 되니까 다시 돌아와서 아직까지 안 떨어지고 있어요. 자식이 부모하고 떨어진다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그런데 요나단과 다윗은 자식관계가 아닙니다. 자식관계가 아닌데. 혈연관계가 아니잖아요. 요나단은 누구하고 관계가 있느냐 하면은 아버지하고 관계가 있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가까워야 할 텐데, 이것을 버리고 다윗에게 더 가까이 하면서 뭐가 발생됐다. 언약이 수립이 된 거예요. 언약이 성립된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왜냐 하면은 인간에게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의 희망이에요. 다시 말해서 부모의 죄의 증거입니다. 죄의 증거예요. 자식하고 떨어지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거예요. 이 말은 절대로 인간은 자식하고 떨어지는 것을 상상도 못해요. 왜? 내 희망이고 내 꿈이기 때문에.

그런데 요나단은 아버지하고의 관계에서 중간에 누가 개입했다? 사울왕 입장에서는 다윗 니가 개입해가지고 우리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이래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아버지가 아들한테 욕을 하는 것을 봤죠. 30절에,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아들아! 니는 내 뜻을 따라야지, 왜 내 뜻을 거역하느냐, 이 말입니다. 혈연관계 이게 사랑의 관계지만 혈연관계에 강제를 띠게 되면 거기서 초월적인 폭력이 나와요.

하나님에 대한 폭력이, 육적인 관계를 강제로 뗄 때, 그 관계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혈육을 꽉 잡고 있던 이 악의 세력. 인간은 절대로 혈육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그 악마의 세력이 뭘 반대한다? 언약수립을 반대하는 거예요. 언약수립을. 니 뿌리와 니 원천이 이 혈육에 있는데, 니가 어떻게, 니하고 예수하고 언제 아는 사이라고, 나를 버리고 예수를 택해? 그게 바로 인간이 유일하게 초월적인 존재, 악마에게 속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저번 주 광주강의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들어봤죠. 남편이 복음이 좋다고 따라다니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니는 니 취미생활해서 좋은데, 당신 취미생활 때문에 우리 사이가 지금 엉망이 된 것도 모르나?” 이런 거. 또 반대로 아내가 그러면 남편이 “니는 나하고 결혼했나? 니가 니 신앙하고 했나?” 이런 식으로. 복음 아는 사람이 일부러 부부생활이든지, 부부사이를 깨려고 그렇게 했겠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언약이 먼저 찾아와서 남편과 아내, 복음 모르는 그쪽이 저기가 되고, 내가 복음을 안다면 여기가 되고. 갑자기 같은 여기가 안 되고 저쪽은 저기가 돼버려요.

주께서는 그걸 떠나가게 만들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건져내신다는 말은 뭡니까? 섞이지 말라는 거예요. 저 국물 같은 것, 더러운 국물과는 섞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원래 거룩이라는 뜻이 뭐냐 하면은 분리 자체가 거룩이라는 겁니다. 거룩. 좀 더 이야기를 이어나가 봅시다. 이게 관계거든요. (표현적, 현상적)관계.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 다윗이 요나단을 먼저 사랑한 게 아니고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잖아요. 먼저 사랑했어요. 오히려 다윗은 인기가 많으니까 뭐. 요나단이 먼저 사랑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다윗을 만나면서 요나단은 무슨 변화를 느끼느냐 하면은 다윗의 그 영적세계가 요나단에게 스며듭니다. 스며들면,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순진하다고 했죠. 나하고 다윗하고 사귀면 아버지는 격려까지는 아니더라도 허용은 하겠지. 이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강력한, 다윗이라는 그 작자라는 그 이유 때문에 강력한 반발이 있을 줄을 요나단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러면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에서 요나단이 뭘 아느냐 하면은 나를 아는 겁니다. 스스로 알아요. 이게 성경에서는 누가 나한테 질문을 해줘야, 먼저 다가서야 나를 알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관계예요. 관계. 이게 관계입니다. 관계에는 두 종류가 있죠. 뭐냐, 표현적 관계와 현상적 관계죠. 현상적 관계는 서로 좋게, 좋게 지내면 돼요. “아이고, 이사 왔는데 떡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저도 떡 하면 드릴게요.” 이러면 되지. “너하고 나하고 같이 살란 말이야.” 이렇게 오버할 필요는 없잖아요. 왜? 뿌리가 다르니까. 따로 각자 살고 그냥 우연한 현상으로서 마주쳤을 뿐이니까. 그렇다 이 말이죠.

결혼 같은 게 뭡니까? 결혼 같은 것이 같이 산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표현이 아니고 뭐였어요? 너는 니 취미생활, 나는 내 취미생활, 따로 현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건 이미 같이 살아도 딴 살림하고 있는 거예요. 니는 니 방에 콕하고, TV 한대 더 사자. 니는 드라마를 보든지 뭘 보든지. 나는 유럽축구나 볼란다. 따로 있는 거예요. 이미 그런 현상이 구원된 현상입니다. 근데 그렇게 함으로서 전에는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만 모았는데, 이렇게 복음이라는, 예수님이라는 것 때문에 폭력적인 관계가 있을 때, 그것이 나한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것이 나를 알게 하는 질문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답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까 제가 베드로하고 예수님하고 한 이야기했잖아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을 해 오시는 거예요. 니 누구냐? 다윗을 통해서, 아버지가 다윗을 싫어함으로서 도달하는, 자기 자신에게 오는 어떤 처지를 결정해야 돼요. 아버지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다윗을 따를 것이냐, 결정해야 됩니다. 결정한 것을 20장 끝에 가보면 화살을 쏘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내 몸 하나 던져서 다윗 너를 살려줄게. 누구로부터? 언약에 대해서 유난을 떨면서 폭력적으로 반대하는 우리 아버지로부터 내가 지켜줄게. 이게 요나단과 다윗이 보여주고 있는 언약의 방출입니다.

언약이 방출된다는 말은, 서로 좋아할 때는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을 했죠. 그러나 정말 좋은 관계라면 헤어지면서 한쪽이 한쪽을, 또는 서로가 서로를 희생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 그런 표현을 보일 때, 그 사람은 영원한 같은 언약에 속했다고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을 하듯이,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그 환경을 통해서, 내가 주님에 대해서 변호하고, 희생하고, 손해 볼 각오가 돼있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예수님을 추방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머물러 있잖아요. 요나단처럼. 그런데 우리를 향하여 어떤 사람들처럼 결정을 요구한다든지, 예수를 버리라고 강제적인 조치가 왔을 때, 그것은 바로 거기에 대해서 내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느냐, 안 들어주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그걸 통해서 진짜 나의 정체를 아는 거예요. 나는 진정 여기에 있는지 아니면 저기에 있는지를. 본인에게 본인의 자리를 계속 묻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성도는요, 세상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게 협박이고 겁박이고 위협적인 요소를 담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현상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죠. 표현적 관계가 아니고 현상적 관계.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주님이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 주님이. 내가 당한 것을 너도 한번 맛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해보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협박과 공갈, 위협, 니 이러면 우리 관계 끊어진다. 이게 뭡니까? 협박공갈이잖아요. “내가 성경공부 참석하고 늦게 오지 말라고 했지? 늦게 집구석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이게 뭐예요? 전부 다. 협박과 공갈과 위협이죠. 뭐, 그 정도까지는 안 나가지만. “뭐 오늘 많이 늦네.” 이 정도. “오늘 저녁은 내가 한다고 하다가 손 베인 거 봐.” 이게 뭐냐 하면은 협박과 공갈이에요. 당신 지금 당신 취미생활하고 있다는 거예요.

“당신 취미생활이 중요해? 아니면 내 자식과 혈연관계가 중요해?”라는 것은, 우리를 협박하는 협박용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당신, 성경공부 따라다닌다고 이 집구석 꼬라지 좀 봐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물론 그렇게 교양 있고, 스스로 교양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교양 없는 말은 안 하겠죠. “또 늦었네.” 이런 식으로. 자기 딴에는 예의를 차리고 그 분노를 억누르면서 한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 다 협박공갈위협이에요.

당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당신의 임무는 혈연관계의 돈독함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거기에 대해서 알아듣는 이야기라 이 말이죠. 왜? 여기거든요. 여기뿐이라 이 말이죠. 뿐이고~ 여기뿐이에요. 여기뿐. 제주특강에서 요한계시록 강의 했잖아요. 여기뿐.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 그 점에 대해서 우리도 알아요. 그런데 방주에 태워, 나를 떠나가는 배로 하게 하시는데요. 뭐. 난들 어쩌라고요. 내가 나한테 묻는 거예요. “나는 혈연관계로, 이 가족들과 화목하게 추석 같이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싶어도, 하고 싶어도 다윗처럼 또는 요나단처럼 우리에게 주님의 관계가 더 우세한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관계가.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낮 설교처럼, 없는데서 있다가 죽을 몸으로 가는 그 간격이에요. 그 간격. 텀. 그 텀이 뭐냐 하면은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오해하기를, 없음에서 뭐로 끝난다? 우리는 살다가 죽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했죠. 이게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이게 죽을 몸인데 안 죽어서 문제예요. 안 죽거든요. 그래서 그 내막을 나도 몰랐는데, 주님이, 성령이 찾아와서 개입을 해버리니까, “아, 내가 여기서 떠나가는 배구나! 그리고 그걸 가지고 주님께서는 건져낸다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요나단은 비록 다윗을 떠나보내도 그 언약의 관계는, 그 밑바닥에 잠복되어 있는 몸통은, 다윗언약의 몸통의 일부로서, 죽어도 다윗언약과 함께, 다윗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이미아(IP:122.♡.170.138) 20-10-02 13:36 
대전-124강 마태복음27장19절-26절(자아)20200928-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7장, 십자가이야기가 계속 일어나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그때 일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누가 이렇게 묻거들랑 이렇게 답변하세요.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십자가가 왜 복음이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천국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가는 곳이다. 십자가 의미가 뭐냐, 천국은 못 가는 곳이에요. 못 가는 곳인데 무리하게 가려고 하니까, 십자가가 나서야 이게 막을 수가 있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들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좋은 세계를 꿈꾸고, 그 세계를 가기를 원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눈이 밝아졌다고 했죠.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진짜 그들의 눈이 밝아졌죠.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자아를 보는 거예요. 자아. 자기 자신을 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벌거벗었음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눈이 밝음, 눈이 밝음은 바로 자아의 시작, 자아시대의 시작이에요. 나에 대해서 눈이 밝아졌어요. 나에 대해서. 그렇다면 나 같은 것은 어두워야 된다는 말이냐? 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고, 그게 또한 뭐냐 성도가 가는 나라, 천국이 그러해야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내가 세세하게 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볼 필요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완전함, 완전히 거룩함이에요. 우리는 내가 나를 봐서 깨끗해야 거룩함이잖아요. 정결함이죠. 나를 아예 안 보는 것이 정결함이고, 나를 아예 신경 안 쓰는 것이 거룩함이고. 그러한 조건이 구비된 나라가 무슨 나라? 하나님 나라. 왜? 예수 안에 들어있으니까. 추석 때, 명절 때 많이 보는 것이 있잖아요. 택배상자. 택배상자 안에 들어있다 이 말이죠. 밑에 상표가 뭐냐 하면은 거룩이라. 거룩한 성도. 성도 자체가 거룩한 존재, 거룩한 자, 이게 성도 아닙니까? 안에 제품 자체가 거룩이에요.

근데 우리는 컴컴한 상자 안에 들어가 가가지고, 지금 내가 깨끗한가, 내가 추잡한가, 내가 죄지은 게 없는가, 이래 생각한다고요. 그래서 이거는 반품해서 지옥가야 합니다. 이거는 지옥 가서 그런 생각해야 돼요. 지옥 가서. 거지나사로가 천국 가서, 극락에 가가지고, 내가 지금 거지냐, 깨끗한가, 그걸 생각할 필요가 없죠. 왜? 바깥환경 보기에 바빠 가지고.

제주도나 아니면 지리산이나 유명명소든지, 몇 날 며칠 자기 캠핑할 채비나 차리고, 고급 수천 만 원짜리 하는 카메라 있잖아요. 줌인이 되는 그런 카메라 갖고, 여기 두 개씩 메고 다니는 전문사진기사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자기 찍으려고 그렇게 장비를 갖춰서 먼 데까지 갑니까? 자기 찍으려고. 자기 찍으려면 자기 집에서나 찍지. 뭣 때문에 갑니까? 나를 안 보고 뭘 찍어요? 노을 진 푸른 하늘에 강정마을 별빛들. 내가 서울바닥에서, 도시에서 아무리 해도 얻을 수 없는 그 풍경을 보기 위해서, 장비를 갖춰서 여행을 하면서,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바위에 다리 벌려가며 파도치는 것을 찍으려고 죽을똥살똥하며 찍잖아요. 바깥을 보기 위함이잖아요.

뭘 안 본다? 바깥을 보게 되면 뭘 안 본다? 나를 안 보죠.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이게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를 보려고 뽑힌 사람이, 택함 받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예요. 나보라고 한 게 아니고, 지금 어디까지 왔나, 지금 이거 측정하려고 하는 건 성도가 아니에요. 이미 악마와 만나가지고 이 몸을 보는데, 어디를 보느냐, 자아를 보잖아요. 이 자아를 본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몸을 보는 거예요. 자기 몸을. 눈이 밝아져서 자기 몸이 벌거벗었음을 봤다고 했잖아요. 창세기 3장 7절에.

몸은 본인이 봐서는 안 돼요. 누가 보느냐? 주님이 보면 돼요. 주님이 보면 된다고요. 결혼해가지고 30년이 지났는데, 샤워하면서, “여보! 눈 감아. 이불 속으로 들어가! 두 손으로 눈 가리고 있어! 딴 데 보고 있어!” 이건 뭐 아직도 청춘인지. 아니면 남남인지. 둘이 어디 뭐 모텔에 왔어요? 애기 놓는데 남편한테 부끄럽다고 저리가라고 하는 이런 것. 뭔가 그거는 자의식이, 내 몸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시키기 싫다는 이 말이 아닙니까? 그렇죠.

그게 하나님께서 그런 짓하라고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경은. 성경의 시작은 자아있음 자체가 이게 너를 지옥 보내는 짓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일상의 일이 너를 지옥가게 한다. 이게 성경이야기입니다. 이 복음대로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설교듣기 어렵다, 싫다, 뭐 이래 되죠. 일상이 일이 나 어떻게 하면 돼요? 라고 할 때, 어떻게 하면 돼요, 앞에 뭘 집어넣었어요? 벌써 나를 보잖아요. 나 어떻게 하느냐? 뭘 해도 지옥 가는 거예요. 뭘 해도 지옥가요. 왜?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래서 인간이 지옥갈 수밖에 없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 뭐냐, 이걸 한글자로 옷이에요. 옷. 옷을 하나님께서 안 만들었죠. 아담의 옷을, 하와의 옷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안 만들었어요. 인간이 인간을 만들었어요. 뭘 보면서? 자기를 보면서. 어떻게? 정상이 아니라고. 내가 보기에 내가 수치스럽다고 옷을 만든 거예요. 어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성령 받았다는 것은 통째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거예요.

거룩한 옷은 제사장들이 입는 거잖아요. 오늘날 성도가 제사장들이에요. 거기에 있는 보석들 전부 다 거룩방지용입니다. 소방사가 불속에 들어갈 때 소방복을 입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속됨에 속한, 더러운 것에 대한 무서운 맹렬한 하나님의 저주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옷이에요. 그냥 통째로 입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 옷에는 피가 묻어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었다고 묻어있는 옷이거든요.

그러니까 천사가 누구라도, 사탄이 와도, 성도한테는 지적질 할 게 없어요. “저 사람은 남에게 사기를 쳐가지고 벌써 열 번이나 교도소에 왔다 갔다 하는 순악질 여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저 여자는 사기 쳐서 교도소 열 번이나 왔다 갔다 한 순 성도입니다.”라고 말을 바꿔요. 한 것은 맞아요. 사기 친 건 맞는데, 순 성도예요. 순악질 여사라고 일자눈썹해가지고 그렇더라도 순 성도, 거룩한 사람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갈 수 있는 나라는 하늘나라, 천국밖에 없어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갈 수 있는 나라는 천국밖에 없어요.

이 반전, 이 뒤집힘, 그거는 자아 때문에 그래요. 자아. 세리와 창기가 워낙 욕을 얻어먹었거든요. 끝까지 남한테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아요. 남들은 우리 아들 공무원 합격했다고 이래가지고, 에듀윌 때문에 했다고 이렇게 자랑질 하는데. “니 아들은 뭐하노?” “지금 해양대학 나와 가지고 논다.”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자랑질을 못했어요. 왜? 자식은 나의 소원이니까. 자식이 지옥가면 엄마가 같이 따라가야 할 정도로. 그 정도로 혈연관계는 강렬하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남의 자식이 아니고, 나, 내 자식이에요. 나는 나를 부인해도 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이 운명적인 결합체. 이게 뭐냐 이 말이죠. 그래서 나를 못 버리니까,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여기서 뭘 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은 천국 문을 만들어요. 천국 문. 성경을 이용하든지 뭘 하든지 천국 문을 만들어요. 내가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드리라고 했으니까 두드려요. 두드리는데 문이 열리겠어요? 안 열리겠어요? 열릴 일이 없죠.

왜냐 하면은 주님께서는 나 자신을 인정을 안 했는데. 내 말을 듣고 문을 열어줄 수가 없죠. 내 자아의 말을 안 들어요. 주님은 내 몸을 보시지, 자아를 안 보거든요. 주님이 보지도 않는 나를 가지고 원인이 되어서 천국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안 열어주죠. 그럼 안 열리는 문은 뭐냐 하면은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은데, 벽이에요. 벽은 문이 없어요. 그냥 내 집이라고 이렇게 그려놓아도 그냥 그림그린 것이지 벽이에요. 십자가는 뭐냐, 벽입니다. 십자가는 두드린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에요. 목숨 바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안 됐어요. 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고. 갑자기 여기와 거기가 나눠져버려요. 처소가 달라요. 처소가.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가겠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벽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문이 없어요. 아예 애초에 문이 없어요. 폐쇄공간이에요. 천국은. 왜? 모든 인간은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를 허용한 천국은 존재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에서 천국은 자아의 범주를 벗어난다. 이렇게 했어요. 적어볼까요? 천국은 자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이거 생각하시고 여러분들이 다녔던 모든 교회의 목사 설교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다녔던 모든 교회의 목사 설교.

그들은 설교를 뭘 겨냥해서 설교합니까? 나를 겨냥하잖아요. 이게 왜 이단인지 아시겠죠. 기존교회들이 왜 이단인지 아시겠습니까? 개혁주의 신학부터. 바로 끝까지 나를 천국 보내줬다는, 보내주겠다는 아주 고마운 제안을 하는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실은 그게, 교회 가는 나의 일상조차도 나를 어디로 보낸다? 지옥으로 보내는 겁니다. 나의 모든 일상이. 포도 까먹고 하는 모든 일상은 나 좋아라고 까먹기 때문에 나를 지옥으로 보내는 거예요.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말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를 계속해서 의식하게 만드는 일들의 총체.

그걸 우리는 마이 웨이my way라고 하죠. 나의 한평생. 애들 앉혀놓고 “내가 너희 둘 키운다고 얼마나 애 쓴지 아나?” “엄마 고만해라” 하고 문 닫고 나갔을 때, 그 자식들은 나에게 던지는 주님의 질문이 되는 겁니다. “자식들이 하는 행동 봤지? 다 컸다고 지 맘대로 하는 것 봤지? 니는 조져놨어. 니는 희망도 없어. 자식들이 자기 갈 길로 가버렸어. 너의 한결같은 소원도 너를 배신했잖아. 이제 니 누구 믿을 거야? 니가 니 믿다가 잘 됐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다가 응답이 안 되고 자식들이 그대로 안 됐을 때에. 네, 그렇죠. 알고 있을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식이 있습니까? 왜 예수님이 자식이 없는가? 이거는 남한테는 안 가르쳐주고 여기에 있는 분들한테만. 농담입니다. 예수님이 왜 자식이 없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잉태치 못한 여자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천국은 이 땅에 없는 자들만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 없는 자들. 이 땅에는 육에서부터 육으로 가는,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자아에서 자아로 가기 때문에, 전부 다 이 땅은 자아들의 모임이에요. 집합이고. 전부 다 마스크 쓰고 자아들이 있는 거예요. 마스크에 써놓아야 해요. 자아라고. 이건 내 마스크라고. 모든 게. 코로나 오니까 코로나 앞에서 누가 겁내느냐, 몸은 겁내지 않는데 자아가 겁내요.

참, 이 말이 진짜 어려운 말이에요. 몸은 겁내지 않는데 자아가 겁낸다고요. 왜? 자아의 바다고 자아의 세계에 있으니까. 여기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 아버지의 자아, 엄마의 자아가 자식이라는 자아를 만들고, 그 자아가 결혼해서 또 애 낳으면 자아가 되고. 전부 다 자아의 세계예요. 나의 세계. 이미 알아버린 나를 자기가 알아서 포기하려고 하는 것이, 그게 바로 불교 아닙니까? 나는 무다. 없다. 없다는 말을 본인이 하고 있어요. 뭐가 본인이 없어? 무를 추구한다는 자체가 본인이 있다는 뜻인데요.

이 자아가 어디까지 가는가, 지옥까지 따라가요. 그래서 거지나사로 맞은편에 살던 부자는 지옥에 가서라도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그 나사로 불러다가 에비앙생수 한 병 달라고, 택배로 부쳐달라고 요청하고. 그거 거절하니까, 지금 내 동생 다섯 명이 안 죽고 있는데, 나도 바보지만 그들도 바보등신같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죽으면 지옥에 온다는 사실도 모르고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좀 나사로를 보내가지고 복음 좀 전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도 니 생각이다. 그것도 니 가족이지.

이게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과 선지자와, 율법과 선지자에서 니가 하지 않더라도 이미 율법과 선지자에게 이야기 잘했다. 문제는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다시 말해서 자아를 어떻게 구원하는 게 아니라 자아 없던 시절의 이야기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내 자아가 없다. 그러면 자아가 없어지려면 다른 자아가 등장하면 되겠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아들에 의해서, 좀비 같은 자아를 갖고 있는, 좀비의 자아에 죽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바로 천국에 합당한, 새로운 자아로서 우리한테 오는 겁니다.

그 자아에 있는 이름이 뭐냐, 그게 바로 주의, 그 다음에 뭐냐, 이름이에요. 이름. 주의 이름. 그게 주의 이름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오늘 마태복음 27장 19절을 이야기하면서 여기 등장인물들을, 자아들을 해보겠습니다. 19절 이전에 보면 바라바 나오죠. 바라바. 바라바 나오고 그 다음에 누구 나오느냐 하면은 빌라도 나오죠. 오늘 본문은 주로 빌라도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 다음에 여기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 죽이려고 하니까, 갑자기 자기 마누라가 “여보, 여보, 재판 경솔하게 하지 마라. 어젯밤에 꿈자리가 사나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해가지고, 마누라하고 둘이 있을 때는 풀어주려고 했는데, 막상 현실에 나와 보니까 내 자아가 저 많은 유대백성들로부터, 지도자들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 똑바로 재판 안 하면 우리들이 로마황제한테 직접 고소할 거야. 그러면 당신 잘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자아가 있다는 말은, 자아는 더 큰 자아들에게 협박을 받고 있고 권세에 눌려있는 겁니다. 이걸 아까 관계라고 했죠. 관계. 인간의, 자아와 자아의 관계. 육과 육의 관계. 이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이웃들과의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겁니다. 나라는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모든 관심사는 내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우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몸을 지켜야 되겠죠.

그리고 그 다음에 지킬 것은 자존심과 위신과 체면과 명예, 비록 먹을 것이 있더라도 자존심이 상하면 자살. 위신이 상하면 자살. 그 사람이 자살했다는데 그 사람 집에 먹을 것이 없었는가? 냉장고에 보니까 먹을 것이 가득 차있어. 안심고기하고 있어. 근데 왜 죽었는지? 기분 나빠서 죽었대. 기분 나빠서. 자아가 손상을 입어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자아를 잃었습니까? 아니면 자아를 지키려고 죽은 거예요?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죽이는, 자아가 그걸 지시한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자아가, 니 몸은 죽더라도 자아는 있어야지, 라고 시켰기 때문에, 그거는 본능적으로 죽은 겁니다. 자아 지키기 위해서.

특히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관계,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살을 많이 해요. 혼자 있을 때 자살 안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 대표적인 것이 뭐냐, 부부싸움. 부부싸움 이후에 베란다 문 열고, 높은 아파트 가면 곤란하다니까요. 문 열고 그냥 충동적으로 뛰어내려버려요. 충동적으로. 혼자 뛰어내리려고 하다 보니까, 내 자아만 손해 보는 것 같으니까, 애들 있는데 아파트에 불질러버리고. 그럼 옆집은 뭐예요? 홀라당 다 타버리죠. 안 그러면 자식 목 조르고 자기도 죽고. 근데 자기 목을 너무 약하게 졸라서 자기는 살아있고. 뭐 이러죠.

전부 다 세상은 뭐냐, 악마가 심어준, 악마가 심어줬거든요. 이 자아를. 악마가 오기 전까지는 자아가 없었어요. 왜? 이 몸은 누구 거니까? 주님 거거든요. 아내도 주님 거고 나도 주님 거고. 그러니까 서로 주님으로 만난 관계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된 겁니다. 그런데 모든 이 세상의 부부는 절대로 한 몸이 될 수가 없죠. 자아 때문에. 자아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제 낮 설교 하면서 제가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교회 봉사하면 그게 나의 힘으로 축적이 된다고. 누적이 돼있어요. 봉사하면. 봉사하면 할 때마다 삐질 확률이 더 높아지게 돼있어요. ‘나만 등신이가? 나만 봉사하고, 내 봉사를 사람들이 지금 농락하고 있구나. 이용하고 있구나. 남한테 이용당하는 나만 바보지.’ 이게 뭐냐, 자아가 점점 더 강화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게 아니고, ‘나 어때, 나 자아의 가치가 봉사 안 하는 너보다 훨씬 낫지?’자랑질 하려고 봉사하는 거예요. 헌금도 마찬가지고. 다 그런 겁니다. 심지어 복음가지고 논쟁할 때도 마찬가지고. “아이고, 초짜네. 이 정도는 알아야 복음을 알지.” 비슷하게 되는 겁니다. 갑자기 침묵이 흐르네.

자, 바나바와 빌라도. 그 다음에 예수님 빼놓고요. 20절에 대제사장. 그 다음에 장로들. 무리들. 자, 이것들이 뭘 했느냐 하면은, 자아들이 모여서 뭘 했느냐 하면은 저 자아는 우리 자아에 포함이 될 거냐, 말거냐를 결정한 자아재판을 한 거예요. 우리 자아하고 예수라는 자아하고 같이 결속이 될 수 있느냐, 아니면 우리 자아를 공격할 요소가 있느냐를 판단해서,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우리 세계에 섞일 수 없는 자아라고 판단을 내리고, 그 자아를 없애는 것이 옳다고 한 것이 십자가예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바라바, 빌라도, 대제사장들, 장로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리들도 마찬가지고.

자,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바른 소리고, 틀린 소리가 아니겠죠. 근데 뭐가 빠졌는가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걸 빠트리면 안 돼요. 뭘 주시느냐 하면은 우리를 공격했던 자아, 우리 자아 때문에 돌아가셨고, 따라서 우리 자아를 문제 삼으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우리는 성령을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원하는 성령은 어떤 성령이냐 하면은 내 뜻대로 잘 되는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내 자아를 지켜주는 성령, 그 성령을 성령이라고 이해하고 받아서, 성령이 충만했다고 이래 이야기하는데,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집사는 죽었어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주여, 돌에 맞아 죽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 안 했거든요. 왜냐 하면은 벽이, 벽밖에 없을 때는 문이 없어요. 그러나 저쪽에서, 저쪽 벽 밖에 있는 세계, 하늘나라에서 문을 만들어서 열 경우에만 문이 생기고, 그 문을 자아가 들어가려고 하면 다시 벽이 돼버려요. 문이 있던 자리에서 문이 없어져버려요. 진짜 도깨비 같아.

자아가 없어질 때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말이에요. 성령 받은 게 정답이에요. 자아가 한 순간이라도 없어질 때. 나 같은 것은 죽여 버리세요, 라고 할 정도로. 그걸 아주 기쁘게, 아이고 반갑다. 그동안 지긋지긋한 자아, 아이고, 잘 뺏어가서 감사합니다. 이게 짧은 한 2초, 3초, 5초라도, 짧은 순간에, 그런 순간이 있을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이 있어요. 괜히 자아가 있어가지고 애 걱정, 세상걱정, 모든 걱정, 이제는 백령도 걱정까지 다 한다. 짜증난다. 이러다가 갑자기, 아, 참 걱정할 거 뭐 있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그런 일을 또 주께서 일으켰는데. 나는 여기서 지금 귀신으로 파견근무 왔잖아. 주여, 일 그만 시키고 데려가시죠.

이거는 자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이루었다를 생각할 때는, 택배 안에 어두컴컴한 데 앉아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살피고 측정하고 분석하고 숙제내고 점수매길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내가 나한테 점수를 매기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오늘 제목을 뭐라고 할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내가 나한테 점수 매길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이 자아라는 것은, 십자가사건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제자들도 원했던 것이 아니고, 단독행위에요.

여러분,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보낸 것도 아닌데..” 그게 서른 즈음이라는 김광석 노래예요. 그 가사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내가 떠나왔다. 자아가 동원되죠. 내가 보냈다. 자아가 동원되죠.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해주세요, 라고 부탁한 게 아니에요. 이미 유대인들은 유월절 그걸로 충분하다고 봤지, 유월절 그것이 어떤 인물화 된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들은 유월절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 유월절은 자아가 지킬 수가 있잖아요. 아, 제사 지낸다면서요. 제주도에서. 제사 지내는 것, 뭐 얹으면 되잖아요. 좌청룡 우백호 얹으면 되잖아요. 제사 지내면서 뭐 얹을 때 다른 건 안 올리죠. 근데 죽었다고 소문 난 4대 증손 할아버지가 거기 걸터 앉아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건 기절초풍할 일이죠. 지금 제사 대상이 되는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마스크 쓰고 다리 꼬고 앉아있어 보세요. 야! 니 뭐하노? 그러면 섬뜩하죠. 귀신이라고 넘어가겠죠. 그동안 우리가 살아있는 자 보고 죽은 제사지냈죠.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시잖아요. 무엇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내 자아가 시도하는 구원의 모든 시도가 악마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살아계시다 이 말이죠. 주님은 우리가 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눈이 밝아져가지고 내 인생은 내가 단도리하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관리하고. 최종관리자가 내 자신이라는 이것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악마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죠. 왜? 자아가 있는데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죠. 무책임하면 욕 얻어먹을 일이지.

내가 알아서, 나이 그만큼 됐으면 나도 취직해서 공무원 돼서 월급타고 결혼하겠다. 이게 뭐가? “아들아! 니는 이제 죽었어. 니는 끝났어.”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래, 기특하구나. 자랑스럽다. 아들아.” 이렇게 하죠. 우리의 모든 일상이 결국은 우리 모든 자아를 지옥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새로운, 자아가 없는, 잉태치 않은 분이, 그 일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일상이 자아를 지켜주는 일상이라고 해석을 그렇게 해버리죠. 해석을. 인생을. 일기장 쓸 때 그런 이야기 쓰죠. 그렇지 않고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거는 기적이라는 말도 아까워요. 신비로워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가 있는데 내가 나를 왜 포기해!

그걸 가지고 십자가라고 하는, 예수님이 십자가 졌잖아요. 이 사람들, 자아들이 만든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사건이죠. 주님께서 알았습니다. 십자가하면서 자기를 부인하라. 자아를 부인하라. 너를 부인하라. 그래야 십자가가 보인다. 인간은 자아를 부인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부인이 돼요. 자기 부인이 되면서 그게 기뻐요. 그 무거운 모든 짐이 없어져요. 왜? 거룩이라는 택배상자 안에서 우리가 이 세상이 끝나고 운반되고 있는 중이니까.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혹시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거저 건지는 그런 가스펠송이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가스펠송이 전부 다 “여러분들이 회개하면 구원해주십니다.” 이런 종교적인 가스펠송밖에 없는데, 그런 가스펠송 말고 가사 제대로 된 가스펠송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져왔어요. 한 장씩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Living Hope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게 영국노래거든요. 근데 이 번역을 보게 되면, 모든 가스펠송의 번역을 보게 되면, 전부 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열심히 해서 예수그리스도로 믿자. 이런 번역이었어요. 번역자체도 그렇고 원래 가사도 그럴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복음적인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어요. 이런 복음성가의 가사내용은 처음 접해요. 깜짝 놀랐어요.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것 듣지 마시고, 들어도 좋지만, 스캇 브래너 레위지파 찬양팀에서 번역한 가사와 다른 사람들이 번역한 가사를 보세요. 가사가 완전히 달라요. 그 가사를 제가 한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깊은 절망의 수렁 가운데/ 깊은 절망이죠. 뭐가 없는 거예요? 희망 없습니다. 무슨 희망? 자아니까. 오늘 강의 제목을 자아라고 합시다. 간단하게 자아라고. 자아자체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자아 자체가 소용이 없으니까 기도해도 소용이 없죠. 이 찬양을 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주님께 닿을 수 없던 우리/ 자, 자아를 뭐로 표현했습니까? 어떤 나였다? 주님께 닿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문을 열어도 그 문이 아니었고 하나의 그림이었고 벽이었다고 했죠. 어둔 밤중에 하늘을 향해, 아, 그 다음 가사가요. 정말 어려운 가사가 나왔어요. 뭐냐, 보통가사에서는 주님이 나를 부를 때에요. 보통가사에서는. 근데 주님이 나를 부른 게 아니에요. 여기에는 주의 이름이 나를 부른 거예요.

주의 이름 나 부를 때/ 주의 이름이 돼버리면 나는 내 구원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의 기능자가 됩니다. 이름은 기능이기 때문에. 아까 뭐라고 했죠? 이름=자아 근데 나 자아는 없고 주님의 자아가 나를 대신했기 때문에 나의 일상은 주님의 자아의 기능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오늘 강의를 들었으니까 주와 주의 이름의 차이점을 아시겠죠? 주는 존재가 되고 주의 이름은 기능이 되는 거예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나라는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주님의 기능자가 되는 거예요. 이미 닿을 수 없는 우리인데 주의 이름이 온 거예요. 구약 때부터 주의 이름은 항상 기능으로 왔어요. 주의 이름으로.

어둠을 뚫고 오신 주 사랑/나의 절망 거두셨네/주님의 공로 다 이루셨네/주 예수 나의 산 소망/ 중요한 가사번역은 좀 뒤에 나옵니다. 그 누가 주의 자비를 다 알아/ 보세요. 내가 주의 자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비라는 택배상자 안에 내가 놓여버린 겁니다. 놓여버리면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기도한 것처럼 주의 사랑과 자비의 높고, 깊고, 길고, 넓음을 누가 다 알 수 있느냐? 모르죠. 주의 자비에 관심이 있어버리면 어디에 관심이 없을까요? 내 집구석, 내 수입, 이런 데 관심은 없죠. 그게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 가는 길은 없는 겁니다. 막혀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죠.

한없는 은혜 측량할까/ 이 말의 가사가 또 중요한 게 인간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누구를 측량하느냐 하면은 나를 측량해요. 나를 측량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되었을까? 주님은 얼마만치의 은혜를 주셨을까? 맨날 측량하는 거예요. 근데 오늘 가사에 보니까 한이 없기 때문에 세세한 것, 화장실 문 잘 안 닫히는 것도 자비라. 은혜라. 모든 것이 손만 대도 자비고, 어느 것 하나 자비 없는 것이 없는 것. 어떻게 그걸 측량을 다해요. 전부 다 자비 안에 푹 잠겨 있는, 자비의 눈사태 안에 놓여버렸는데. 사방팔방이 다 자비인데 뭐.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불평하고 불만하고 따지고 원망하고, 그게 나올 수가 없죠. 모든 게 둘러봐도 자비니까.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이죠. 어느 복음송에도 나오지 않는 가사. 죄가 되신 구주 예수/ 보통 뭐냐, 죄인이 되신 예수예요. 죄인이 되신 예수. 근데 죄인이 아니고 죄예요. 죄. 제가 이 노래를, 가스펠송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너무 장사모습이 보여요. 안 보는데, 제 생전에 이런 가스펠송 가사 처음 봤습니다. 죄가 되신 예수여. 왜냐 하면은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은 의롭기 때문에 죄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잠시 죄인이 됐지만 죄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가사가 ‘죄가 되신 구주예수’예요.

이 가사가요,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외국 곡을 보니까, 이 가사가 없어요. 죄가 되신 구주 예수는 이게 너무 겁나가지고 이걸 번역할 수가 없어요. 전부 다 뭐냐 하면은 달리했어요. 죄인으로 오신 주 예수님, 이런 식으로. 아니에요. 죄가 되신 거예요. 그동안 인간들은 죄인이면서도 뭘 몰랐다? 죄를 모른 거예요. 죄도 모르면서 죄 짓고 있었던 거예요. 죄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를 알지, 다른 것을 통해서는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신 것이 아니고 죄가 되신 거예요. 신학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되죠. 신학자들은 도저히 이걸 용납 못합니다.

왜, 예수님이 죄가 되셨는가 하면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눈이 밝아서 자기를 따져가지고 학문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계산해보니까, 예수님이 죄가 되면 안 되고 죄인이 되어야 맞다. 예수님이 우리같이 죄인이 되었구나, 라고 해야, 이게 은혜롭다고 판정을 누가 내리느냐 하면은 자아가 내린 거예요. 내가 내린 거예요. 주님이, 하나님이 죄가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의 자아들의 세계에서는. 참 이거 겁 없는 번역이죠. 죄인이 되신 예수님이 아니에요. 죄가 되신 예수님이에요.

자, 죄가 되시면, 죄인으로 알던 사람은, 인간이 자아의 죄를 벗기 위해서 누굴 찾습니까? 예수님을 찾게 되죠. 근데 만약에 예수님이 죄가 된다면 다시 죄를 지으려고 예수님을 찾을 위인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안 찾게 되는 겁니다. 복음성가들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의인되신 주님의 보혈의 피, 깨끗한 피를 받으면 우리는 죄 씻음 받아서 천당 간다. 이게 그동안의 모든 가스펠송이었잖아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아직도 우리가 내 죄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헛소리예요. 이게 얼마나 깊이 있는 복음입니까?

이 가사를 쓴 사람이 지금 이 정도까지 안다는 생각이 저는 안 드는데, 제가 지금 해석을 이렇게 했지, 제가 억지로 해석을 해서 그렇지, 번역한 사람이 거기까지 알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안다면 보통사람이 아니에요. 번역이니까, 한국 사람이 했겠죠. 원래 가사는 이게 아닐 거예요. 죄인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했겠죠. 그러니까 제가 지금 번역을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관계없이 저는 적절하다고 해서, 오늘 강의와 관련해서 이게 옳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다음 봅시다. 그 다음 가사가 적절한 가사가 나왔어요.

주의 십자가가 내게 말하네/영원히 난 용납됐네/ 보통 용서하는 단어를 쓰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용납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용서라는 단어를 써버리면 니가 용서받고 난 뒤에 깨끗하게 살아야한다는 책임, 직무가 주어지잖아요. 그런데 용납이 돼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개판으로 살아도 다 용납이 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도 나의 설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무조건 이용하면 그만이거든요. 영원히 나는 용납됐네. 앞으로 어떤 짓을 해도 용납됐네. 용서받았으니까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깨끗하게 살아라, 이게 아니라 어떤 짓을 해도 나는 용납됐네.

아름다우신 왕 나는 주의 것/ 아름다우신 왕 그 다음에 뭡니까? 멋지잖아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주의 것’이라고 하죠. 주의 소유가 된 거예요. 그러면 나는, 내 자아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소유권이 바뀌었으니까. 소용이 없죠. 그동안 나의 자리에 있던 것이 주님으로 바뀌었으니까.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잡아 땡길 그 주체가 사라져버렸죠. 주님이 내 소유가 된 겁니다. 그리스도 나의 산 소망.

할렐루야 주를 찬양하여라/할렐루야 자유케 하셨도다/죄의 저주를 끊으신 주께 구원이 있도다/주 예수 나의 산 소망/ 죄의 저주를 끊으신 주께 구원이 있도다! 이 말도 멋지지 않습니까? 구원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끝까지 자아를 없애버리면 주님께 구원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주님의 구원의 기능자일 뿐이에요. 구원이 나한테 없고 주님께 있어도 나는 좋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자. 그게 바로 성도라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보세요. 멋진 표현이 나와요.

언약된 아침 장사된 몸에/ 언약을 등장시키죠.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의 호흡 시작 됐네/ 부활의 그 다음이 뭡니까? 호흡이죠. 지금 주님이 살아있음을 호흡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부활의 호흡이 그 다음에 뭡니까? 시작 됐네. 끊어졌던 호흡이 다시 시작된 거예요. 이것은 바로 우리 안에 주님의 호흡이 시작됐으니까, 우리가 죽은 자가 아니고 우리가 주 안에서 주님의 호흡이 뛰는 거예요. 내 호흡이 아니고, 자아의 호흡이 아니고 주님이 호흡이 계속해서 작동을 하는 기계가 우리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혈육관계라고 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자아와 자아의 만남이거든요. 자식이고 부모고 부부고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유다의 사자 위엄찬 선포/ 사자가 뭐냐 하면 메신저라는 뜻이 아니고,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영어로 라이언이에요. Lion. 그래야 그 다음에 포효라는 말이 성립되니까. 5절,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유대지파가 맹수다 이 말입니다. 맹수. 이스라엘의 언약을 책임질 맹수. 적들을 아주 이빨로 으깨버리는 그러한 힘을 가진 유다지파가 그 힘을 드디어 발휘하기 시작했다. ‘위엄찬 선포’ 말씀 자체가 현실이 되니까.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으니까.

사망이 무너졌도다/ 영어로는 브로큰broken(부서진, 깨진, 나누어진, 부러진)으로 되어 있어요. 사망이 무너진 거예요. 무너졌으니까 보이는 것이 재가 돼버린 거죠. 제가 주일학교 아이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폐허위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이들 밖에 없다. 왜? 어른들은 자기 평생에 일군, 공들인 것을 불도저로 다 밀어버렸으니까 울고불고 난리가 났죠. 근데 애들은 뭣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호호거리면서 재미나게 노는 거예요. 놀이터 새로 생겼다고. 사망위에서 놀 수 있는 사람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사망을 보고,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나도 그랬었었었어.

이제 사망은 무덤이 더는/우리를 주장할 수 없네/유다의 사자 위엄찬 포효/사망이 무너졌도다/주 예수 승리하셨네/그리스도 나의 산 소망/당신은 나의 산 소망/ 포효는 아까 선포했으니까, 으르렁대는 소리. 시간 한 4분 남았는데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Living Hope, 살아있는 산 소망. 한국의 어느 바닷가에서 여럿이 합창하면서 합니다. 각자 듣기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시 하게 되면 이 자아는요, 마귀가 심어준 것이라는 것. 자아를 보게 함으로서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 자아중심으로 돌이키게 하는 악마의 모습은,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을 극구 방해하는, 악마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인간이 말려든 거예요. 오늘날 모든 세계가 말려들었고.

그래서 십자가라는 것은 무슨 뜻이다? 빌라도, 바라바, 대제사장들, 장로들, 무리들, 전부 다 그들은 무슨 직책이 있지만, 모든 것은 하나의 악마에 놀아나는 자아들이고, 그 가운데 우리가 현장에 있다면 우리도 같이 놀아나는 자아의 한사람일 뿐이에요. 예수님이 백번 와도 맨날 우리는 못 알아봐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자아에 절망을 줘가지고, 이 자아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 자아 자체가. 내가 잘해볼까 하는 이 자체가, 내가 기도하고 예수 믿어서 천당가보자 하는 이 자체가 문제 있음을, 성령이 올 때, 아, 이거는 바로 내 자체가 죄구나. 황송하게도 주님도 죄가 되셔서 이제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혈육밖에 모르고 자아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서 분리가 되도록, 주께서 오늘도 복음을 알려주시고 성령 주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십자가 이 비밀을 성령을 받지 않고서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에 성령이 오셨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예수님 자아 자체가 우리에게 심겨진 그것이, 성령의 일하심이고 증거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스데반 집사가 성령 충만을 받고 난 뒤에 기쁨 속에서 죽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미 우리가 죽은 자로 기쁨 속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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