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대전강의
2020-10-27 20:13:09 조회 : 286         
사무엘상 63강(자존감과 사명감), 마태복음 125강( 하나님의 진지함) 20102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962" height="541" src="https://www.youtube.com/embed/rdaNzSRfSAI"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962" height="541" src="https://www.youtube.com/embed/nugYYDTJocQ"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이미아(IP:122.♡.170.138) 20-11-29 21:41 
대전-63강 사무엘상21장1-2절(자존감과 사명감)20201027-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1장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사무엘상 20장 1절에 보게 되면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도망하여, 라고 되어 있죠. 오늘 본문 21장을 보게 되면, 요나단에게도 기댈 처지가 못 되어서, 1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자꾸 도망 다닙니다. 다윗이 도망 다닌다는 뜻은 다윗을 공격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죠. 누가 공격하는가, 다른 사람은 별로 안 미워하는데 사울이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 미워하게끔 한 분위기가 뭐냐 하면은 골리앗을 다윗이 이기고 난 뒤에 인기가 다윗에게 쏠렸죠. 사울은 천천이지만 다윗은 만만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보고 만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은, 전에 사울, 자기 수하에 있었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백성들의 관심사가 다윗에게 쏠리고 말았습니다. 여기 성경 사무엘상 21장 다윗이 쫓기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자존감 또는 자존심.

이 자존심을 지금 사울은 극도로 높이고 있습니다. 자존감을 극대로, 극한으로 높이고 있죠. 자존감을. 자기는 왕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자존감을 높여서 다윗을 공격하게 한다면, 그럼 다윗 쪽은 자존감이 아니고 뭘 갖고 있는가? 사명감을 갖고 있죠. 이건 다윗입니다. 사명감이 극한 되는 겁니다. 자존감은 사울 왕이고, 사명감은 누구하고 했습니까? 다윗이죠. 근데 다윗은 처음부터 사명감으로 온 것이 아니고, 사울처럼 다윗도 뭘 갖고 있느냐 하면은, 자기도 자존감이 있어요.

자존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존감을 사명감으로 바꾸고, 사울은 그냥 자존감으로 쭉  가는 겁니다. 그럼 다윗의 입장에서, 자존감에서 사명감으로 바꿀 때에, 주님 주시는 역할 때문에 사명감으로 바꾸는데, 그 사명감으로 제공되는 역할이 뭐냐 하면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선지자가 전에 우리가 보았듯이 사무엘선지자하고 사울하고 만났을 때에 분명히 사무엘은 언급을 했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왕 됨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사울왕 몰래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이새의 집에 가서 누구한테 기름을 붓느냐 하면은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이새의 가정에 아들 일곱 명이 있고, 막내가 있어요. 막내. 아들 여덟 명이 있었죠. 10절에 보면, 이새의 아들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는데, 근데 일곱 명만 보여주고 막내는 나중에 크면 보여주겠다, 이렇게 생각했는지 안 보여줬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무엘이 다윗을 만났을 때에 자기 뜻으로 만났겠어요? 아니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만났겠습니까?

사무엘이 자기 뜻을 개입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일곱 명을 다 지나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무엘이 이상해서 혹시 이 자리에 없는 아들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럼 막내아들을 데려와 보세요, 해서 데려오니까,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더라” 이렇게 해서 사무엘 자기 역할은 끝났어요. 사무엘의 역할은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면 기름을 부어야 하는데, 일단 먼저 기름을 부었던 사울은 잘렸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했습니다.

그 다음에 기름 부은 사람은 다윗이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다 뭘 갖고 있습니까? 자존감이 있죠. 결국 여기서 우리가 잠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해요. 자존감에서 사명감으로 바뀌려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뭔가 투입이 되어야 해요. 그 투입된 것이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 신약에도 동일한 원칙이 주어집니다. 신약에도.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되어 있죠.  

여기 너희에다가 구약에서는 다윗을 집어넣고요, 신약에서는 우리를 한번 세워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졸지에 뭐가 됩니까? 다윗이 되는 겁니다. 기름부음이 있으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니까. 계속해서 요한일서 2장 27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고 했죠. 기름부음을 받으면 이제부터는 니 맘대로 산다, 니가 하는 것이 그게 옳다가 아니고,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서 우리 안에 기름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뭐가 들어왔느냐 하면은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렸죠.

그러면 나라는 인격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됩니까? 두 개의 인격이 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기름부음이에요. 교회 가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죠. 교회 가는 것은 내 다리 가지고 교회 갔고 예배드리는 것도 내 눈으로 예배드리고 내 음성 내세워서 찬송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뭐? 그래서? 교회놀이 잘했잖아요. 그래서 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니, 서커스 구경하면 구원받습니까?

서커스 구경하는 것이나 교회 예배 구경하는 것이나 차이점이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교회, 서커스, 영화관람, 경기관람, 야구경기 관람, 쇼 관람, 나훈아 쇼 관람, 또는 여기 뭐 어떤 세상 관광하는 것, 그것은 자존감으로 시작해서 집에 올 때도 뭐가 남아있어요? 자존감으로 가서 뭐로 나온다? 자존감으로 나오죠. 자존감으로. 옛날 대학 다니기 힘들 때, 또는 일류 고등학교, 일류 중학교, 또는 대기업 같은 것이 있을 때에, 옛날이에요. 옛날. 그때는 대구에 일류  중학교, 일류 고등학교만 돼도 대구 오래된 신문, 매일신문에 합격자명단이 나왔어요. 그리고 학교에 가면 합격자 명단이 죽 나와 있다고요.

그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갈 때 자존감을 가지고 가거든요. 그 합격자 명단을 보고 난 뒤에 돌아올 때는 뭐합니까? 자존감을 높여서 오는 거예요. 만약에 떨어진 사람은 자존감을 가지고 갔다고 돌아올 때는 자존감이 무너지고 오는 거죠. 그러니까 자존감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 현실 속에서 자존감이 사라지는 경우가 없어요. 자존감이. 사울이 아닐 때가 없다 이 말이죠. 사울이 아닐 때가. 교회 갈 때도 자존감가지고 가서는 올 때도 복 받았다고 착각해서 자존감가지고 오고.

이런 자존감을 유지하다가는 어디를 못갑니까? 천국을 못가는 거예요. 갈 수가 없어요. 이거는 잘리는 거예요. 성경이 왜 있습니까? 바로 성경은, 여러분이 이건 아시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거든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 이 말이죠. 구약성경.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인들과 만날 수 있지만 특별히 중간에 개입한 중보자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중보자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특별한 민족에게만 나타났다 이 말이죠. 호세아에서는 이 많은 민족 중에서 너희만 알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특별히 그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고, 그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는데 특별히 그 중에 왕, 왕의 자리에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만났다는 자를 등장시킵니다. 만났다는 자. 하나님을 만났다고 여기는 자를 등장시켜서 하나님 자신을 말하고자 하는 거예요. 이 성경 자체가. 그러면 오늘날 어떤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누구를 드러내고자 합니까? 인간을 드러내고자 해요. 인간을. 인간을 드러내고자 하는 거예요. 내 아는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고 내 아는 동생이 뭐 좀 되고.

오늘 아침에 kbs2에 나오는 아침마당에서 나진기라는 사람이 나왔어요. 나진기가 누구냐 하면은 나훈아 사촌이에요. 나훈아 사촌이 30분 동안 떠들었어요. 왜? 나훈아 하고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럼 나훈아 없었으면 나진기에게도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데, 나훈아 사촌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특별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제2의 나훈아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거예요. 그럼 이 땅에서 모든 인간들은 나 자신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평생을 살아가요. 나 자신이. 그것뿐이에요. 기억과 추억이 본인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나 그 기억과 추억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용을 쓰고 애를 썼던 긴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택한 백성들은 뭡니까?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은 무엇이냐, 에요. 인간은 홀로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누구와 만나야 돼요. 누구와 만나는가, 하나님과 만나줘야, 인간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존재가 인간이다. 이 말은 나의 자존심 높다는 그것을 드러내라고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에요.

여러분들이 쉽게 실험할 수 있습니다. 밤에 여러분들이 침대에 누워서 주무실 때에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잠결에 빠지잖아요. 하나둘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합니까? ‘오늘도 하루를 통해서 주님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다들 이렇게 하면서 주무시죠. 그러니까 사람은 안 보이고, ‘주님, 오늘 내 하루를 주님의 마음을 어느 자리에 가든지, 어느 시간대든지 제대로 전했지?’라고 하면서 잠들을 주무시잖아요. 잠들을. 그리고 내일도 제 역할이 하나님을 증거 하고 주님을 증거 하기 때문에 내일도 주님이 살려주신다면 증거 하겠다고, 이렇게 하잖아요.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나라의 의, 천국이 어떻다 하는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있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밤에 침대에 누워서, ‘오늘 저 사람이 내 욕 안 했을까? 나는 저 사람한테 저렇게 잘 해줬는데 나한테 실망을 주고 상처를 줬어. 내일 만나면 두고 보자. 따질 거야.’ 뭐 이런 것. ‘남편 비자금 어디에 숨겨놨더라. 분명히 돈 받았는데.’ ‘자식이 내 말대로 안 들어’ 전부 다 돈 생각, 돈과 자식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 자존감의 구성요소에요.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되면 내 자존감이 확 내려가고, 돈이 이렇게 손실이 되면 내 자존감을 다시 구축하기 힘들어져요. 내 건강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이 사울이라는 등장이 얼마나 우리한테 고마운 줄 몰라요. 왜? 우리의 바닥이니까.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은 악신이 들렸거든요. 나중에 그 뒤에 보면 창 들고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악신이 들렸다. 그러면 내린 결론은 간단하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어디에 걸린 사람이다? 악신이 걸린 거예요. 미친놈이죠. 환자죠. 정신적 환자예요. 성령이 없으면 무조건 정신적 환자예요. 자기 자존감 하나 내세우면서 덜렁덜렁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존감 내세우면서. 

다윗도 마찬가지죠. 인간은 다 타고났잖아요. 자존감.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기름 받았더라도 역시 어린 다윗은 어려요. 사울하고 똑같아요. 자존감밖에 몰라요. 그래서 사울이 자꾸 자기를 공격하니까, 다윗이 도망간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합시다. 다윗이 자존감을 본인이 지키기 위해서 도망간다. 같은 말이에요. 남이 중요 하냐 내가 중요하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하고 노나, 집사님은 강아지하고 논다고 하는데, 그거는 틀린 말이고, 집사님은 본인하고 놀아요.

인간은 나하고 놀아요. 인간은 하나님이 그리운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워요. 교회가도 마찬가지고. 강아지는 왜 키우느냐, 내 대용이거든요. 내 자존감 대용으로 하는 거예요. 왜 20대 남자들이 돈만 벌면 차를 바꾸려고 하는가, 20대 아니라도 60대도 차 바꾸려고, 240개월 할부로 차를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왜 차를 사려고 하는가, 차가 내 안에 있는 자존감을 바깥으로 끄집어낸 거예요. 이게. 일종에 여자는 강아지 남자는 차. 이게 뭐냐 하면 일종의 자기 자존감이에요. 본인의 사명은 내가 내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사명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교회 온다니까요. 사람들이. 그러니까 목사가 자존감을 키워주는 설교를 해야 돈 몇 푼이라도 내줘요. 돈 천원이라도 내준다고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어떤 사람이 교회 와서 헌금을 하는데, 부부가 교회 왔거든요. 그 교회 예배 마치면 점심을 줘요. 헌금을 천원을 한다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사람당 점심 값으로 오백 원으로 한 끼를 채우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나는 손해 보는 짓은 안 하겠다는 거예요. 손해 보는 짓은. 그러면 제가 그 사람에게 묻죠. 무엇이 손해입니까? 내 자존심에 손해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요? 내 자존감 높여주는 하나님만 나는 믿겠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 믿고 지금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지옥은 부자의 자존감을 유지시켜 주는 곳이 지옥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그러니까 어떻게든 뭔가 바꿔야 돼요. 죽기 전에 뭔가 바꾸어져야 돼요. 자존감이 사명감으로 바꾸어지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돼요. 제가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욥의 친구는 한 번도 인생에서 유턴한 적이 없다. 유턴. 차 없어도 아시죠? 유턴이 뭔지. 사람이 주님을 바닥에서 만나야 돼요. 바닥에서. 자기 바닥을 알아야 돼요. 자기 바닥을. 그러면 내가 자존심을 높이는 쪽으로 말고, 자존심이 망가진 그 이후에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야 돼요. 내 자존심이 다 망가진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져야 한다고요.

다윗도 사울하고 똑같아요. 자존감을 스스로 포기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름부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바닥 치게 만드는 과정을, 오늘 20장, 21장에서 연이어 보여주는 겁니다. 내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낼 때, 나는 내 자존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존재, 그런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내 자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전혀 없어요.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다고요. 지키는 분이 따로 있거든요. 사명감이 있는 자를 하나님이 지키지, 자존심이 있는 나를 지키지는 않아요.

따라서 기름부음은, 성령은 나로 하여금 내 자존감을 사명감으로 바꾸어주기 위해서 나의 자존감에다 모든 할 수 있는 것을 다 오게 해서 내 자존감을 뜯어내는 작업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저 아마존 바다에 가면 무서운 육식고기가 있다는 거예요. 피라냐, 라는 게 있죠. 007영화에 나오는데, 그거는 뭐 한번 던지면 거기에 전부 다 왁~하고 달려들잖아요. 성령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하면은 자존심이 있으면 피라냐처럼 다 뜯어먹게 해요. 다 뜯어낸다고요. 왜? 니 거 말고 내가 준 것 좀 보고 싶다는 거예요. 니 거 말고. 너에게 덕지덕지 붙은 자존감 말고. 니 추억과 기억을 통해서 갖다 붙인 자존감 말고. 내가 니한테 준 성령의 기름부음. 그거 보고 싶다는 거예요. 

이 말을 알게 쉽게 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진흙 바닥에 떨어진 닭발. 닭발 먹다가 딴 짓해서 진흙바닥에 떨어진 거예요. 닭발은 먹고 싶고 묻은 게 많으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다 털어내야 하죠. 성령께서 다 털어내는 거예요. 닭발 먹고 싶다는 거예요. 닭발에 붙어있는 양념 말고. 진짜 닭발. 주께서 주신 것. 그 작업에 다윗이 기름부음에 의해서 쓰여 지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 만나면 어떤 대화를 했는가 보세요. 잠시 생각해보세요. 어떤 대화를 했는지. 니 잘났나, 내 잘났나, 이거 외에는 없죠. 우리 애들 공부 잘해. 이번에 아파트 바꿨어. 전부 사울 대 사울의 대결. 배틀. 자존감과 자존감의 만남. 이거 외에 있었습니까? 

내 것이 없으면 참 좋은 게 있어요. 내 것이 없으면요, 뭐도 없다? 제가 일방적으로 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묻는 내가 잘못이죠. 내 것이 없으면 네모⯄가 없다. 가장 적당한 것은 지킬 것이 없다는 겁니다. 지킬 것이 없으면 그 다음 차례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근심이나 염려나 두려움이 없다. 이래 되는 겁니다. 이게 어떤 상태냐 하면은 일찍 찾아온 천국이에요. 이게 일찍 찾아온 천국입니다. 내 것이 없으면 지킬 것이 없고, 지킬 것이 없으면 걱정, 염려할 게 없어요.

그러니까 근심이 된다는 자체가, 이게 오만함입니다. 왜 근심이 되느냐, 내가 나의 증인이 되려고 하니까 근심이 되는 거예요. 남에게 그럴싸하게 내세울 게 없어서 조마조마 바들바들 떨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쓰시겠다는데, 우리는 주님 손 떼세요, 하고 내가 나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내가 나를 쓰겠다고. 이런 마음이 무슨 마음이냐 하면은 바로사울의 마음입니다. 이 나라가 내 나라인데 소년 다윗이 인기가 있으니까, 저 소년 다윗을 죽여야 내 자존감이 유지가 되는 거예요. 제사를 드릴 때, 동생의 제사는 받았고 나의 제사는 안 받았다. 만약 여러분들이 형이라면 그 동생하고 친하게 지낼 마음이 들겠어요? 짱돌로 그냥 죽여 버리죠.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정리하기는 기름부음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사명감이 나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사명감과, 이걸 사울이죠. 하나님의 의해서 패배당하는 사명감. 하나님 앞에 져버리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 초반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이유는, 하나님 저를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기신 거예요. 하나님이 저를 무너뜨려서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을 찬미합니다. 나는 남한테, 교회에서 인기 끈 거 말고, 다른 교회에서 십일조 백만 원 하는 교인이 우리 교회에 왔다고 성질부리지 마시고, 주님이 나의 고집과 나의 자존심을 꺾어버린 것을 찬미합니다. 그게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에 괄호(), 나에게는 뭐가 없다? 부족함이 없다.

도대체 이걸 위하여 득달같이(목적한 곳이나 수준에 도달하는)달려드는,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자, 로마서 8장을 한번 봅시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거든요. 그게 진흙판에 떨어진 닭발이라 이 말이죠. 떨어질 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8장 마지막에, 악마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 질겨요. 굉장히 질긴 거예요.

이거는 어떤 환난도 주님이 주신 닭발은 안 끊어지는 거예요.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우리의 염려, 근심이, 하나님의 결과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결과물을 우리가 우리 자존감으로 흐려놓은 거예요. 방해 놓은 겁니다. 가려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와 고마움이 없고 그 대신 염려와 근심이, 수심이 가득한 거예요. 하루를 살면 하루치 수심이 가득, 이틀을 살면 이틀치 수심이 가득, 일주일을 살면 일주일치 수심이 가득해요. 수심이 가득하니까, 참으면서 한 달 뒤에 봅시다. 내년되면 좋은 일이 있겠지. 시공간은요, 주님이 사용하는 것이지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1년 뒤고, 2년 뒤고 주님의 시간이고 공간이지, 내 시간공간은 아니거든요. 왜 내가 거기다가 끼어듭니까?  

그래서 여기서 기름 부었다 해가지고, 구약이니까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역할을 사용하실 때, 두 가지 기능이 나오죠. 하나는 뭐냐 하나님을 공격하는 기름 부은 자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는 다윗 같은 기름 부음 받는 자가 있다는, 구약을 이렇게 제시하는 겁니다. 구약을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했다. 이게 하나의 모델하우스거든요. 이스라엘은 모델하우스이기 때문에, 아니 모델하우스가 불이 났다고 해가지고 진짜 그 아파트 단지에 불이 난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죠. 모델하우스는 그냥 모델일 뿐입니다. 모델.

그 모델을 통해서 이 지상에서 말하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인간들의 방향 쪽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은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가 아까 했잖아요. 다윗도 자존감이 없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작용하니까 다윗의 자존감이 사명감으로 바뀐 것뿐이지, 다윗 자기가 노력해서 사명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20장, 21장에서 다윗은 지금 겁이 나서 도망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할 거예요. 도망치고 있다는 거예요. 도망치는 것을 훌륭하다고 할 수 없어요. 근심걱정이 늘어났어요. 사울이 따라와서 죽이려고 하니까 자기는 죽기 싫고, 다윗 본심이 아닙니까?

인간의 그 본심, 문제는 인간의 그 본심을, 자기는 그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그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잘났던 못났던, 구원 된 사람과 안 된 사람과 둘 다 인간의 인간다움의 본심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오류가 있다는 겁니다. 오류가.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아는 사람은 다윗 같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걸 숨기면서 아닌 척하고 있는 인간들은 전부 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함축해요. 압축시킨 모델하우스가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기름 부음이라는 하나님의 그러한 계시를 받았건만, 역시 망할 자는 망하고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는 성령은요, 그 기름 부음은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안에 이미 완성된 것이 들어가요. 우리 안에. 우리 안에 완성된 것이 들어간다고요. 완성된 것이 들어갔으니까 구닥다리는 어떻게 됩니까? 뜯겨져 나가야 되죠. 그래서 제가 주일 낮 초반에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있으면 주님은 없는 존재고, 주님이 만약에 살아있다면 나는 없는 존재다, 라는 말을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백퍼센트 망상이고 환상이고 가짜입니다. 가짜예요. 지금 여러분이 저를 눈에 보고 있잖아요. 가짜죠. 그러면 진짜는 어디에 있는가? 초과적이죠. 보이는 가짜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할 때, 성경에는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거든요. 돌 던지는 유대인에게 그 현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에게 초과적인 것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그냥 스데반 집사가 이단 소리하는 그것만 보이는 거예요. 이거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못 넘어가겠어요. 이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우리는 이 공부 시간이 지나면 보는 것만 보고 있거든요.

사도행전 19장을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15절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죠. 여기 이야기를 누가 한다고 했죠? 악귀죠. 그럼 그 현장에서는 누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귀는 안 보이잖아요. 보이는 자가 입을 열어서, 혀를 놀려서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성도는요, 광기 너머에 있는 광인들이에요. 세상은 미쳤는데, 성도는 그 미친 것을 볼 수 있는 더 미친 사람들이에요. 어차피 미친 것은 마찬가지인데, 미친 것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는 미침.

이거는 왜냐하면 세상에서 이쪽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쪽 이야기를 못 알아듣게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쥐나 개나 천국을 안 오게 만드는 겁니다. 복음 전파는 씨 뿌리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 씨 뿌리는 것이지, 설득하고 내 사람을 만드는 것이 복음전파가 아닙니다. 참, 이거 말해도 기존교회는 사람 하나 꼬시려고, 뭐 삼성생명도 아니고. 전부 다 사람 꼬시는 거. 성과급주고. 이거밖에 없어요. 어디 보험회사 사원들이에요? 구원 되고 안 되고는 성경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냥 성령 받은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너희들은 너희 자존심 주장하지? 증거 하지? 우리는 주님 증거 한다고 하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냐면, 주님이 어디에 있는데? 어디 있는데? 보여 달라고 하는 거예요.

니가 보고 있다고 하니까 니가 오류가 있는 거야. 우리는 살아서 부활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이, 주님이 보이지 않아야 설교하고 전도하고 뭐 하는 우리가 가짜인 것을, 나는 가짜고 나는 자존심밖에 챙길 게 없다는 것을 증거 할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가짜라는 것을. 나는 아니요. 우리 주님이라고 할 때는, 보이는 것은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은 깁니다. 진실입니다. 그게 되잖아요. 그게. 일주일동안 돈 벌다가 교회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예배드리고 하는, 그 반복적인 그 쓸데없는 짓을 하는. 또 한 3, 4년 다니면 장로 시켜준다고 해요. 돈 더 내라고. 그 놀음에, 언제까지 그 놀음에 말려들어야 돼요. 그 허접스러운 악마의 장난에.

아니, 목사치고 이단 아닌 자가 어디에 있어요? 제가 이야기합니다. 이단이기 때문에 목사 하는 거예요. 목사 안수 받을 때 진짜다 싶으면 이단들이 목사 안수 다 안 주니까. 목사가 노리는 것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아닙니다. 보이는 예배당이에요. 교회예요. 밤이 되면 네온사인이 켜있는 예배당 보고서 목사 직업을 얻는 거예요. 뭐 돈이나 될까 싶어서.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스스로 묻고 답해봅시다. 그럼 목사님 초과적인 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고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모든 있음을 있는 대로 다 부정해버려요. 모든 있음을. 예배당이 있으면 예배당 부정, 헌금 했으면 나 헌금 안 했다고 부정,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있음은 내가 본다 이것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보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고, 주께서 보고 계신다가 중요합니다. 주께서 보고 계시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돼있어요. 예수님의 증거를 어떻게 하느냐, 무슨 과정을 통해서? 어떤 인간도 자존심이 없는 인간이 없잖아요. 자존감이 사명감으로 바뀌는 그 과정을 증거 하는 것이면 그 사람은 초과적인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참 쉽죠. 말로는.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애초부터 자존감이 없다고 하면 안 돼요. 있어요. 그거 버리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다 쓸데 있습니다. 자존감 세우시고, 그 자존감이 뭐로 바뀐다? 성령이 오게 되면 사명감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걸 더 쉽게 이야기하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이 성령이 와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온갖 것 해가지고, 유발시켜가지고 뜯겨져나가면, 나한테 이런 게 있었나? 나한테 주님이 주신 것이 있었네!

그걸 로마서 8장에서는 주님의 죽으심이 있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 안에 들어있을 때, 아, 나는 하나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담지자라고 해요. 담다디 담다디 그 노래 말고. 담지자. 뭔가 담아있는. 뭔가 담겨져 있는 거예요. 담겨져 있는 거. 주님이 그것을 늘 주시하고 있었어요. 밤이나 낮이나 늘 주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다시 한 번 들면 이렇습니다. 오늘밤 여러분들이 주무실 때에, 자존감이 있으니까, ‘오늘도 누구한테 실수한 거 없을까? 아, 내가 그런 말을 안 해야 되는데.’ 또는 ‘내가 그럴 때 더 강하게 요구를 했으면 내가 수입이 좀 더 많아질 텐데. 내가 괜히 손님 보냈네.’ 이런 식으로 하루일과를 정리할 거예요. 자존감과 관련되어 있죠.

그랬는데, 그냥 쑥 들어온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서 뭐하나?’ 이런 식으로. 그렇게 살았다 치자. 내일도 그렇게 살았다 치자. 그러면 니가 나중에 완전히 뭉개져서 요양병원에서 죽을 때, 그럼 니는 평생 뭐하고 살았느냐를 물을 때, 이것마저 소급해서 이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게 하셨구나. 내 자존감이, 내 자체가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밤에 베개머리에서 다시 한 번 지적받는 거예요. 지적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된 것은 인내성 있게 지켜보신 하나님 덕분이구나. 못난 것 들어서 예수님 자기 증거 하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벌써 꿈자리에 들어가죠. 잠을 자는 거죠. 어떤 사람은 내 설교 듣다가 반도 못 듣고 자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설교를 듣든 뭘 듣든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잠만 잘 자면 되죠.

영어로 펜스fence라고 하는데, 장벽입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을 통해서 사울과 다윗 그 사이에는, 비트윈between, 사이에, 이 경계선 사이에는 다윗도 어쩔 수 없고, 다윗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성령께서 또는 기름부음이 친히 마련하신 장벽이 있습니다. 장벽. 이 장벽은 다윗이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을 설득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친구 요나단을 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얼마나 많이 했는데도 소용이 없어요. 그 뒤에도 다윗이 쫓길 때 계속 이야기합니다. 저 사울 왕이여, 기름부음 받은 왕이시여,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쫓아와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할 때에, 사울 왕이 뭐라고 합니까?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너는 없고 내가 나쁘다고 이야기를 해봤자, 장벽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다윗의 세계에 사울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장벽의 두께가, 장벽이 장벽답게 그걸 증거 하라고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남편한테 아내한테 백날 설교해봐야 먹히지도 않아요. 먹히지도 않는다니까요. 주님이 쳐놓은 장벽을 누가 극복할 수가 있습니까? 세치 혀로 됩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설교란 뭐냐, 여러분들이 전도할 때 그냥 던지는 거예요. 그냥 외치는 거예요. 외침이에요. 외침. 그걸 세례요한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뭐다? 니가 어떤 인간이냐고 할 때, 나는 괄호()다. 나는 소리다. 옛날에 소리사, 전파사 많이 있었어요.

나는 소리다. 나는 보이스voices다. 그냥 소리다. 소리니까 본인의 소리가 아니겠죠. 나를 마이크로 사용하신, 오실 분의 소리를 내가 대역하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역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초라한 사람이고 죽을 때도 비참하게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소리 자체가 비참하고 죽을 때도 처참하게 죽는다는 말은 뒤에 오실 소리를 담아준, 그 담지자, 담게 하는 그분과 자기 운명이 연속, 연결되어 있는 그분도 비참하게 사시다가 비참하게 죽죠.

자, 그렇다면 오늘 첫 번째 강의의 결론부분이 정립됐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자존감이 있죠. 자존감이 있는데, 자존감을 뭐로 바꾼다? 사명감. 그럼 사명감은 아까 이야기했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사명감이죠. 자,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그럴 때 사무엘상에서는 쫓겨 다니는 다윗이라고 하지 말고, 쫓겨 다니는 하나님. 그리고 매 맞는 하나님. 친구한테 버림받는 하나님. 다 시편에 나와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떡을 먹었던 친구가 나를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버림받는, 학대받는 하나님. 무시당하는 하나님. 처참한 하나님. 망가진 하나님. 그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윗도, 사울도, 사무엘도, 전부 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죠. 했잖아요. 그러니까 사울이 제사지내고 다 했잖아요. 그러나 그 하나님은 나의 자존감에 막혀있는, 나의 자존감에서 만들어낸 상상의 이미지에 불과해요. 자존감은 자존감대로 살리고, 자존감이 망가지지 않는 조건하에 믿는 하나님. 백 퍼센트입니다. 백 프로 가짜에요. 백 프로 가짜라고요. 나의 있음을 있음으로 돋보이게 하는 하나님, 백 프로 가짜입니다. 악마죠. 가짜라는 말보다 그냥 악마의 얼굴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하나님은 그게 삼위일체를 갖다 붙이든, 예수, 성령, 신학을 하던 뭐 소용이 없어요. 그냥 내 자존심을 안 건드린다면 그건 백 프로 가짜예요. 전부 다. 오늘날 한국교회 백 프로 가짜라고 보면 돼요. 전부 다 같은 말이에요. 가짜입니다. 나를 망가지게 한다고 해서 내가 거지되고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부자가 되든 망가지든 간에 내 자존감을,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내 자존감을 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적기가 와서 폭격을 해버리시는 하나님.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쫓겨 다니는 다윗을 보아라! 나쁜 짓 한 것이 없으면서도 얼마나 억울한가를. 이 억울함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돼요. 이 억울함과 공동체험을 해야 돼요. 이 억울함.

나쁜 짓하고 매 맞는 것은 억울하지 않죠. 그런데 상대가 오해해서 억울하게 됐을 때, 진짜 이거는 미치고 환장하는 겁니다. 미치고 환장한다는 것은 아직도 뭐가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자존감이 살아있는 거예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억울한 일을 당하니까, 갑자기 미치고 환장하고 잠을 못자는 거예요. 잠을 못 이루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안에 누가 있다? 마귀가 들어있다. 나는 복음 알고 두 시간, 세 시간 강의하는데 설마 내 안에 마귀가 들어있는 줄을 몰랐던 거예요. 내 안에 나의 것은 다치지 말자고 자꾸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그 어떤 괴물이 나한테 달라붙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와서 십자가의 억울함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들통 나지 않아요.

자, 사무엘상 21장 1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놉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 그 근처입니다. 베다니 가기 전에 놉이라는 곳에 왔는데.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수도가 아니니까. 그냥 한적한 곳이라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거기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이르렀다 이 말이죠. 아히멜렉이 “어? 당신이 여기에 왜 왔느냐? 당신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되잖아. 사울하고 있어야지. 왕의 측근이 여기에 오면 되나?” 이렇게 물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파견했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다윗이 누굴 속이느냐, 아히멜렉 제사장을 속이는 거예요. 왜 속일까요? 자존심 때문에 속이는 거예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인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자존심이 상하니까, 멀쩡한 체하는 그런 게 먼저 등장하죠. 다윗도 자존심 주장하는 것은 똑같아요. 이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다윗에게 어떻게 사명감을 부여하는가 하는 거예요. 어떻게 부여하느냐 하면은, 자기는 정말 당해도 자기만 당하면 되는데, 자기 주변사람들이 당할 때, 아 그때 정말 미치는 거예요. 죽어도 내가 죽으면 되는데 아들이 내 대신 죽는다든지, 욕해도 나만 욕해만 되는데 자식을 욕했을 때는 갑자기 없던 자존감이 확 튀어나오면서 니 죽고 나 죽자 이래되죠.

우리는 자존감이 없다고,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되지 아니하면 항상 우리는 우리 성질이 불쑥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참다 참다 성질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복음 듣고 좋은 거 다 듣지만, 철봉에 매달려서 해보지만, 결국에 힘이 빠지면 다시 지옥 가는 그 선반위로 그대로 미끄러져요. 언제든 손을 놔버려요. 내가 교회 다녀서 열심히 하고 복음 알고 하다가 그냥 나 하던 대로 할래. 결국은 지가 지쳐서 복음이고 성경이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그냥 살래. 이렇게 갈 수밖에 없는 주님의 펜스, 장벽, 성령은 그걸 넘어서서 십자가의 억울함에 순간순간 동참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20-11-30 09:08 
대전-125강 마태복음27장 27절-32절(하나님의 진지함)20201027-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7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과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절,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절,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며” 이렇게 되어 있죠. 유다 나라에, 나라니까 왕이 있어야 되고 그 왕은 하나님의 의해서 선택된 자가 유다 나라의 왕이 되어야 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이거에요. 왕의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멀쩡한 예수님을 자꾸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재해석. 이래 보면 돼요. 예수님 자체가. 인간이 알고 있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도대체 왜 죽느냐에 대해서 하나님의 해석을 예수님에게 담았다고 보시면 돼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재해석인데, 뒤에 기니까 그냥 없애버리면 예수님=죽는 존재. 더 간단하게 해서 예수님=죽음. 인간은 죽어도 모르는 일찍 찾아온 죽음. 일찍 찾아온 죽음이다. 이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 속에 섞임으로 말미암아 이 인간세계에 하나님이 보시는 죽음이 보편화된 거예요. 전부 다 깔아버리는 겁니다. 인테리어를 예수님이 죽은 죽음으로 바닥을 다 깔아버리는 거예요. 토대를, 그라운드를 예수님의 죽음에다 다 깔아버리죠. 깔아버리면, 구약에서 그렇게 예언했던 이 죽음은 구약적으로 보면 되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진멸이 되는 겁니다. 젖먹이부터 늙은이까지, 남자여자 관계없이, 주를 모르는 자는 완전히 밀어버려야 돼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나라를 할 때에 주를 모른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얼마나 그 사람이 성품이 좋은가, 이웃사랑을 많이 했는가, 점잖은 양반인가, 그거 필요 없어요. 그냥 불도저로 밀듯이 다 싹 다 죽여 버려야 돼요. 

그게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여호와께서 벌이시는 전쟁, 여호와 전쟁입니다. 여호와 전쟁은 진멸시키는 전쟁.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겁나겠습니까? 가해자 입장에 서면서도 겁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무슨 전쟁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전쟁이다. 붙여주셔서, 하나님 내가 붙여준 것은 모조리 다 죽는 거예요. 죽이는 거예요. 모기나 파리 잡을 때 요 근래에 나온 것이, 옛날에는 파리채로 때려잡는데, 가만히 있어도 전기가 통해서 붙어서 죽는 것이 있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냥 전기파리채를 잡고 눈감고 있다가 눈떠보니까 다 붙어있어요. 알아서 달려들어 전기파리채 모눈종이 하나에 다 진멸 당했어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어린애든 노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관계없이, 인간이면 다 진멸대상이에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진멸되어도, 망해도 그거는 원점이다. 니가 진멸당해도,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도 니는 손해 본 거 하나도 없다. 왜? 원래 자리기 때문에. 원래 죽음의 자리기 때문에. 근데 사람들은 죽음을 하나님의 해석된 죽음으로 보지 않고 내가 목숨 붙어 있다가 나중에 요양병원에 가가지고 헉헉거리다가 꼴까닥하고 죽는 거. 그 죽음만 생각하니까, 죽을 때만 죽음이고 아직은 안 죽었다고 버티는 거예요. 안 죽었다.

제가 어느 설교에서, 수요설교에서 그런 말씀드렸는데, 술하고 담배하고 하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라는 이유가, 술하고 담배 하는 남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허세에요. 허세덩어리에요. 허풍덩어리. 그게 뭐냐 하면은 나 안 죽었다는 거예요. 나 안 죽었다. 끝까지 나이가 많아도 나이야가라, 나이야가라~ 나이야 가라는 거예요. 나이아가라 폭포 가보지 않았는데. 나이야가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아모르파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는. 결혼은 선택 연애는 필수. 또 어떤 노래에는 이 나이가 어때서~ 내 나이가 백세든, 구십세든, 팔십세든, 전부 다 그게 다 뭐냐 하면은 나 안 죽었다, 에요. 나 안 죽었다.

목숨 붙어있으니까 그걸 살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산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진멸을 하려면 진멸의 재료가 필요해요. 진멸당할 시료가 필요하다고요. 실험실 할 때 필요한 재료. 그 재료로 인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내 진멸의 맛을 한번 보게 하기 위해서. 레위기에 보면 제물을 태울 때 몽땅 다 태우잖아요. 번제. 그때 하나님께서 흐음~! 맛있다. 그 다 태운, 진멸된 냄새를 흠향하시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사 복을 내리시리니. 그래서 사람은, 우리나라에 박씨가 있고 김씨가 있고, 최씨가 있지만, 박씨, 김씨, 최씨, 이씨, 남씨고 장씨고 다 치우고요. 이름을 따로 지으세요. 이 숯 덩어리. 우리는 다 태워져서 이 숯 덩어리. 박 숯 덩어리. 숯 덩어리예요. 상견례 할 때 두 숯 덩어리 만난 거예요. 하나씩 앞에 두 숯 덩어리 만난 거예요. 숯 덩어리 네 명, 아들 딸, 여섯 숯 덩어리가 앉아가지고 결혼식 날짜 잡고 있고. 숯 덩어리 이번에 수석 합격해서 취직됐다고 좋아하고. 숯 덩어리인데.

진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에 가는데 그냥 비어있는 땅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딪침을 봐요. 부딪침을. 부딪침을 볼 때에 그들은 어린양 피로 인하여 살아남은 자들이잖아요. 신났죠. 신난 거예요. 어린양의 피 때문에. 알기는 잘 알죠. 체험했으니까.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그래서 살아난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다고 좋다고 했는데, 홍해를 딱 건넜잖아요. 홍해를 건너는데, 홍해 앞에 딱 오니까, 그 뒤에 뒤늦게 쫓아왔던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바다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홍해바다에 뭐가 떠있습니까? 시체들, 말, 창, 칼, 수레들이 있죠. 어떤 느낌일까요? 이 세상에서 표현할, 형언할  단어가 없어요. 그 충격이라는 것이. 

살았다, 신났다, 하면 안 돼요. 아! 하나님의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애굽 군사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건널 수 없는 것을 화들짝 건너 온 거예요. 이거는 충격입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무서워도 너무 무서워요. 왜? 얼마 전까지 애굽에서 같이 살던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홍해 바다에서 저쪽은 시체가 되어서 떠내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시체를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시체는 진즉에 누가 시체가 되어야 해요? 내가 시체가 되어야 해요. 왜? 우리 힘으로 건너왔으니까. 홍해. 건너올 수 없는 곳을 건넜고 올 수 없는 자리에 온 거예요. 올 수 없는 자리에. 누가 그렇게 했던가요?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바친 거예요. 어린양. 어린양의 목숨. 하나님이 일을 할 때 그냥 말로 일한 게 아니고 자기 목숨을 걸고 일한 거예요. 나는 내 목숨 걸었다. 니는 뭐 내놓을래? 이 말이에요.

뭐 찬송 몇 가지한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 목숨 걸었는데, 자 니는 니 목숨 걸어서 건너왔잖아. 함 니 꼬라지를 봐라. 니 따라온 저 많은 군사들 꼬라지를 봐라. 시체 됐잖아. 니도 시체였어. 니도 시체였다고. 뭐 다를 줄 알았지. 아니야. 시체인 자와 시체 안 되고 멀쩡히 살아서 찬미하는 너의 차이점은 뭐냐, 그건 하나님의 자기 목숨 버리심, 하나님의 열성,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진지함’ 저는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은데요. 이걸 하나님한테는 자기 목숨 걸고, 하나님 자기 이름을 걸고 영원토록 시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거 뭐 삼성에서 하는 프로젝트, 택지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집사님 프로젝트 많이 참여했잖아요. 그런 프로젝트 아니에요. 단기로 끝나는 그런 프로젝트 아니에요.

우주의 모든 팔자와 운명을 걸고 한 프로젝트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었다면 이미 우리의 미래는 규정된 거예요. 확정된 겁니다. 근데 인간들은, 술하고 담배하는 인간들은 술집에서, 저는 그런 데 안 가봤습니다만, 동그란 철판테이블에 연탄불 피워놓고, 퇴근해서 밤새도록, 아내 전화는 끊어놓고, 술 마시면서 나 안 끝났어! 이렇게 하거든요. 옆에 만약에 복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끝났어! 그래야죠. 니 인생은 뭐 어떻게 승진을 하고 이사가 되고 사장이 되고 이건희처럼 회장이 되도 니 인생은 끝났어. 봤지? 이건희 봐라. 원불교 따라가다 지옥 가는 거 봤지? 원불교 장례 치렀어요. 봤지? 이건희 라는 이름의 애굽의 시체를 보고 있잖아요. 우리가.

안 보입니까? 아니, 세상에 나가면 안 보여요? 애굽 군사들이 시체가 되어서 국회에서 국감하면서 떠들고 뉴스에 나오는 시체들 안 보입니까? 전부 다 시체들이에요. 잘 한다고요? 잘 한 거 없어요. 끝났어요. 우리도 끝났고 니도 끝났고. 우린 이제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자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그 끝남에 대한 근거, 그거는 예수님의 자기 목숨 바침이에요. 십자가, 예수님 자신의 생명 바침, 죽으심의 최종 토대를 두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백날해도 지옥 갑니다. 지옥 가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파멸되기로 확정되었어요. 뭐 시점이 문제입니까? 나이야 가라, 나이야 가라가 문제가 아니에요. 90에 파멸되나 70에 파멸되나 마찬가지에요. 이건희는 78세 죽었죠. 78에 죽으나 송해처럼 90세 더 오래 사나, 이미 끝났어요. 끝난 거예요. 

복음전해서 튕겨나가면 지옥이에요. 복음전해서 쑥 들어오면 그거는 천국가기로 끝난 거예요. 마태복음 22장 14절을 한번 봅시다. 우리 성도의 사명이 이정도로 굉장히 중차대한 겁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이. 노닥거리면서 교회에 가서 월급이나 받겠다고 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보세요. 청함을 받은 자는 왜 그리 많은지. 천이백만이니, 천주교까지 합쳐서 천오백만이니, 왜 그리 많은데. 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적지요. 무엇과 비교해서? 많음과 비교해서. 자꾸 많음에 비교하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많아 보이지? 적어. 적다니까요. 적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드물다. 그래도 생기면 으잉?! 있기는 있네. 웬 기적! 이정도예요. 이정도. 

오늘 읽었던 본문은 지금 지옥가기로 확정된 자가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목숨 바쳤다는 말도 모자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기다 다 걸어버린 그분을 왕이라고 코스프레 한 거예요. 이 코스프레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니가 왕이라며? 내가 왕답게 치장해줄게. 이렇게 해서 코스프레 한 거예요. 갈대로 지팡이도 하고 머리에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고 하는데, 이거 코스프레 한 거예요. 조작하는 거. 이 조작하는 것은 평소에 인간이 그 짓하는 거예요. 평생을, 태어나면서 조작 외에는, 왜곡, 자기를 감추는 것 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이 수 밖에는 없어요. 이거 타고 났어요.

제가 지난 주일에 설교하면서 옷을 이야기했거든요. 옷이 뭐냐, 옷이 왜 필요합니까? 에덴동산에는 옷이 필요 없어요. 쫓겨나갈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옷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는 어디에 살다가 강제조치 당했다는 뜻이에요. 이게. 옷을 입는다는 게 이 표시라니까요. 옷을 입는 게 이 자체가, 이 존재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겁니다. 원래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옷을 입은 게. 그러니까 인간이 옷을 입었다는 말은 지금 연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옷은 연출용이고, 스타일이 연출하는 거예요. 옷은 연출용이에요. 연출이 뭡니까? 조작이고 위장이고 위장술이고 감추는 거예요. 이거는 타고났어요. 타고났어.

옷을 입는 행동이나 밥을 먹는 것까지 다 포함이 돼요. 옷을 입으나 밥을 먹으나 그 행동이 그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데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똑같죠. 밥을 먹어도 없는 게 있는 척하고. 밥만 그런가요. 말하는 것도 그래요. 없는 게 있는 체하고. 그게 좀 평소에는 참다가 술하고 담배 들어가면 이게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허세, 허풍덩어리. 라떼는 말이야~ 내가 왕년에 말이야~ 내 때는 이렇다고. 고구마라떼 하나 시켜놓고. 거기다 허풍을 담고. 라떼는~~ 그래서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추억과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의 극대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추억과 기억의 환상이 만들어낸 거예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추억과 기억이 매일 만들어내요.

그래서 내가 차를 타고 오랜만에 경치 좋은 데 갔다 오고 안 그러면 자기 어릴 때 고향에 갔다 오면 다시 어릴 때 자아로 돌아가요. 회사 회장이 되어서 근엄하게 부하들에게 지시하다가, 지휘하고 위엄을 갖추다가, 막 표준말 써가면서 하다가 부산에 가서 친구 만나면 한 오분도 안 돼서 사투리 다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한테 잘해줬던 엄마 만나면 엄마~! 다시 과거로 돌아가요. 인간은 자기 위장하는 층이 너무 두꺼우면 스트레스 받아요. 위암부터 해서 모든 암의 원인이 되고, 대장암, 췌장암, 속여도 너무 속였어. 속이는 것이 체해서 스트레스 받아서 암 걸리는 거예요. 물론 암에 걸리는 것이 DNA가 다른 사람하고 달라서 걸리겠지만. 환경적으로 봐서는 뭐냐 하면은 이미 끝났는데, 자꾸 악마가 집어넣어준 자아가, “니 할 수 있어! 니 안 끝났어! 일곱 번 자빠져도 일곱 번 일어서면 돼!” 자꾸 허풍을 집어넣는 거예요. 악마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저 낮은 곳에 바닥까지 내려갔잖아요. 바닥까지.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에 사람이 없을 것 같죠? 가보세요. 도사들이 미리 진치고 있어요. 도사들이. 그림 그리면 그림 그리는 도사. 골프 치면 골프 치는 도사. 꽃꽂이 하면 꽃꽂이 도사는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종이접기하면 종이접기 하는 도사들도 또 있어요. 몇 년 했어요? 30년. 도사. 공부해도 도사. 심지어는 계단청소 하는 것도 도사. 아르바이트 하는 데도 벌써 거기 노털들, 도사들이 다 있고요. 시킨 대로 해야 되고.

인간은, 학교에만 졸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6년하고 졸업하고, 뭐 다 있죠. 그러나 인생도 졸업해요. 졸업해서 뭐 배우겠습니까? 민수기 16장 잠깐 보겠습니다. 16장 31절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말이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32절,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33절,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이걸 아까 제가 강의 중에서 이스라엘이 모델하우스라고 했죠. 이들이 망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원래 망했어요. 처음부터 망했어요. 처음부터. 

독일동화에 이게 있어요. 개구리와 왕자라는 동화가 있는데, 공주가 금덩어리를 가지고 놀다가 궁에 있는 우물에 그걸 빠트렸어요. 귀한 금을 빠트렸는데, 우물이 너무 깊고 해서 못 내려가고 있는데, 고민하고 있을 때에 그 우물 밑에서 개구리가 나타나서, 내가 금덩어리를 찾아서 다시 올려 보낼 테니까 나하고 이야기상대를 해주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공주는 다급하니까 그렇게 하고 금덩어리를 얻었어요. 그리고 난 뒤에 개구리를 무시했습니다. 근데 기어이 개구리가 공주한테 찾아왔어요. 침대까지 찾아왔어요. 그 열심에 놀라서 결국 나중에 공주하고 개구리하고 뽀뽀를 했더니만, 그게 사실은 개구리가 아니고 왕자였다는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고 개구리였던 거예요. 처음부터 개구리였어요. 사람인척 한 거예요. 악마인데 악마가 사람의 탈을 썼다고 봅니다. 이게 바로 진멸이라는 겁니다. 진멸. 갓난아기도 죽여요.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요. 심지어 이 땅에 속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죽이되 죽이고, 죽이고 다 죽여 버려요. 심지어 자기 아들 예수님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이 땅이라는, 죽음이라는 해석이에요. 이 땅이라는 해석은 예수님 십자가로, 죽음으로 의미가 다 확정되었어요. 끝났어요. 그냥 죽는 겁니다. 안 끝났다고 고집부리면 안 돼요. 죽는 것이 확정되었어요. 

죽는 것이 확정되었으면 이제 뭐가 신기합니까? 생명을 얻는 것,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세상, 에덴동산의 완성,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된 겁니다. 왜? 망하는 자에게는 넘볼 수 없는 이야기거든요. 넘볼 수 없는 이야기. 근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확정되었다고 했죠. 아까 청함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고 했죠. 적다가 없다가 아니거든요. 있기는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천국과 지옥이 확정되어 있죠. 구원받은 사람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요. 확정되어 있고, 그리고 지옥 갈 사람도 완전히 다 확정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이 죽음의 세계에 예수님도 들어가 있었죠.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지시고 난 뒤에 며칠 만에 부활했습니까? 사흘만이죠. 사실은 이틀 좀 더 되는데. 그동안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고요하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무 일도.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지옥 갈 세상에 대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부활의 혜택을 입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지옥가는 대로 지옥가면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십자가에서만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이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러니까 여기에 구원받을 사람에게만 무슨 일이 일어나요. 근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심지어 교회예배 참석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장로, 목사, 신학박사가 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아휴 뭐 사람 사는 것 죽을 때까지, 맨날 죽을 때까지래. 이미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하다보면 은혜 받겠지. 지금 자기는 살았다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살았다는 것은 왜곡이고, 오류고, 위장이고, 감추고, 조작이죠. 조작.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거. 살아갈 때 그냥 곱게 사는 법이 없어요. 늘 조작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식으로.

그중에 옷 스타일, 차 바꾸고, 뭐 바꾸고, 가구 바꾸고... 코로나 이전에 20대 사람들이 명절이나 연휴에 주로 어디에 간다고 했던가요? 해외에 많이 나가죠. 처음에는 조심스러워서 중국가고 가까운 일본가고, 돈이 덜 드는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이정도 조심스럽게 갑니다. 필리핀도 가고. 필리핀은 좀 위험해서 잘 안가지만. 그렇게 갑니다. 근데 이제는 너도나도 어디를 가느냐, 좀 이게 배포가 세졌어요. 어딜 가느냐, 유럽에 갑니다. 북유럽. 그거 누가 먼저 했는가 하면 일본아가씨들이 먼저 한 거예요. 일본. 일본의 경제수준이 좀 따라가잖아요. 일본이 돈 되니까 20대, 30대 아가씨들이 결혼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배낭 메고 스페인에 가서 걷기하고 뭐 하다가, 이런 거 했는데, 이제 그걸 한국이 따라가는 거예요.

근데 코로나 와서 못 나가잖아요. 답답해서 미치는 거죠. 답답해 미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코로나 걸려서 죽는 게, 이게 마땅함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이 파멸이 마땅함인지를 모른다고요. 마태복음 24장 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돌 위에 돌이 이게 엮어지게 되면 다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돌 하나 옆에 돌 하나가 또 있어서 돌 위에 돌이 있는 것도 나는 무너뜨린 것으로 간주하지 않겠다. 철저하게 무너뜨리겠다. 철저하게 무너뜨리겠다. 돌 위에 돌이 있으면 이게 한 형체가 되잖아요.

일체, 인간이 자기 스타일 꾸미고 조작하고 연출하고 뭔가 내 손으로 내가 했다는 그거 있잖아요. 그걸 나는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 이게 하나님의 이미 확정된 활동입니다. 다 파멸해버리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이 지옥 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안심 푹 놓고 이 땅을 밟아가면서, 든든하네, 든든하네,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식구들 간에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보고 뭡니까? 홍해에서 우리 흉내 내다가 빠져죽은 애굽 시체와 갑옷들만 보이죠. 한편으로서는 신나죠. 신나면서도 한편으로서는 주님이 두려운 거예요. 아, 주님이 일을 하신 프로젝트취지가 저거구나. 근데 애굽 군사들은 왜 홍해에 빠졌습니까? 건널 수 없는 데를 건너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구원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았어요? 건널 수 없는데 황당 그 자체죠. 건널 수 없는데 건너와 버린 거예요. 자기는 멋도 모르고 바다에 길났네. 바다인줄 모르고 길인 줄 알고 왔는데 보니까 이게 원래 바다였었어요. 건너서는 안 되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저와 여러분이 천국 오면 안 돼요. 강의 오늘 끝내버려야겠어요. 우리는 천국 오면 안돼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면 안 된다고요. 우리가.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고 니가 천당 가려고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그러냐고 하면 우리가 가슴을 쳐야 돼요. 천국 가려고 교회 간 것이 아니고 나는 못 간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복음말씀을 들으려 가는 거예요. 이거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습니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걸 세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새로움, 제목이 계속 바뀌는데, 이 제목으로 해야겠어요. 새로움. 날마다 새로움이에요. 복음의 새로움. 다른 세상 기쁨은 기쁨도 아니에요. 골프치고 뭐하고. 날마다 새로움을 주는 거예요. 어디서 나온 새로움이냐, 죽음에서 나온 새로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온 새로움. 죽음에서 나온 새로움. 이 새로움이 나오게 되면 이 새롭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 내뱉는,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모독과 모욕을 계속해서 듣게 되는 새로움이에요.

이거 뭐 복음 아는데 집 꼬라지하고는! 이런 거요. 복음을 안다는데 집 꼬라지하고는, 이게 뭐예요? 뭘 모독하는 겁니까? 이미 홍해바다를 건너온 초과적인 이 신분과 이 위치를 그들은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또 그들이 욕하죠. 니가 교회 다녀도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내가 놀리니까 기분 나쁘지? 나쁘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미 복음을 알아서 홍해를 건너온 사람한테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기분 나쁜 게 뭐예요? 내가 건너가려고 애썼으면 기분 나쁜데, 니는 니 관점에서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십일조 하면 하나님께서 착하다 해서 천국까지 넣어준다. 이렇게 하면 내가 기분 나쁠 건데, 이미 와버렸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한 것도 없이, 터무니없이, 황당하게 와버렸으면 그 다음부터는 남들이 나의 인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놀리는 게 기분 나빠요? 목사님한테 몸 아프고 비실비실하다고 하면 기분 나쁩니까? 니 망했다고 하는 게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망한 거 나도 알아. 나는 수십억 가졌어도 망했어. 멀쩡하고 건강하고 내 집안이 잘 되도 망한 거예요. 왜? 이거 못 건너면, 홍해 못 건너면 망한 거예요. 돌 위에 돌을 남기지 않는 관점이라면, 집사님 새 아파트 세워놓고 돌아서면서 다 무너졌네. 사실 안 무너져도 그 자체가 이미 무너진 거예요. 거기 새 아파트에서 복음이 나옵니까? 새 아파트에서 오후 여섯시 돼가지고, “관리실에서 말하겠습니다. 지금 십자가복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까? 안 나오죠.

이 세상은 전부 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걸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아까 그 조작이에요. 위장함. 스타일. 자기 선에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이보다 더 우수해야 내 맘에 든다는 거예요. 남에게 지기 싫다는 거예요. 주님은 자기의 목숨을 다 걸고 자기 백성을 십자가를 가지고, 그 능력에서 선택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냐 하면은 주님의 선택과 무엇과 정면 교통사고가 일어났느냐 하면은 나의 선택이 계속 충돌이 돼요. 나의 선택은요, 나의 새로움으로 내가 이 땅에서 계속해서 위로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인생의 삶이 너무 지루한 거예요. 너무 지루해서 뭐 딴 일 해볼까? 뭐 그림 하나 그려볼까? 상이나 파고 뭐 이런 거.

그러니까 개구리인지 모르고 자꾸 왕자로서, 심심한 왕자가 돼버린 거예요. 뭔가 하면 내가 개구리에서 벗어나서 왕자가 된 것 같은데, 이거는 나의 선택입니다. 나의 선택인데 주님의 선택이 어떻게 찾아오느냐 하면은, 흔들기를 해버리는 겁니다. 흔들어버려요. 흔들어보면 우리한테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의 조치가 나와요. 내가 조치를 할 때 여기서 나온 게 뭐냐, 자기 의가 나와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구원 안 받은 사람은 그게 일상이기 때문에 관심도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자기 의가 나오는데, 그 자기 의에 모양새하고 그 내용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조롱하는 거, 그 조롱하고 똑같아요. 내용이 똑같아요.

“주님은 나에게 내 인생을 이렇게 흔들기 했지만 내가 악바리로 해서 이만큼이라도 살림 일궈놨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지금 자기 목숨을 내놓는데, 목숨 내놓는 자리에서 우리는 지금 나의 잘남을 내놨다고요. 물론 성도한테는 그게 나와요. 흔드니까 나오는 거예요. 자기는 뭐 복음 알고 하나님께 충성한줄 알았죠. 막상 흔들어보니까 여전히 내 안에 내 의가 살아있고, 시체에 불과한데 시체 안 되려고 자기를 얼마나 조작해왔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그것이 나를 속인다고. 모든 속임수는 내가 살아있다는 그 순간부터, 그 다음부터 나는 나한테 속아 넘어가고 있어요.

이 세상 자체가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 전쟁이야기, 여자사사 드보라이야기 있잖아요. 싸우는 거. 우리가 보면 신났죠. 기드온이 뭐 하고. 우리는 갑자기 이스라엘 편이 되가지고, 이방인 민족이면서 같이 으쌰으쌰하면서 신났잖아요. 그게 홍해 건너왔을 때, 홍해바다에 애굽 군사들 갑옷이 떠있는 그게 마냥 신날 이야기에요? 오히려 화들짝 놀랄 이야기죠. 주님의 진지함에. 하나님의 자기 아들 죽으심만 기억합니다. 그 죽음이 니한테 있는가 보자, 라고 우리 속을 탐색하면서 보는 거예요. 흔들면서 하게 되면 갑자기 우리 속에서 자기의가 막 나오고, 십자가에서 욕했던 그 이야기가 마구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성도냐, 성도 아니냐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지금 가을입니다. 가을풍경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은 차 안에서 가을풍경을 보는 것하고 차 바깥에 나가서 가을풍경을 보는 것하고. 가을풍경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종말로, 종말풍경으로 봅시다. 차안에서, 비겁하게 교회 안에 숨어가지고 세상보지 마시고. 주께서는 예수님과 똑같아요. 내가 이 세상에서 직접 밥벌이하고 먹고 살고 부대끼고 식구들한테 당하고 사람들한테 욕 얻어먹었듯이, 너도 차안에서 나오너라. 코로나 무서워서 차안에서 바깥풍경보지 말고 나오너라. 그 지는 세상의 단풍, 낙엽, 저 져버린 꽃잎 밟아라. 그리고 너도 가을풍경의 일부가 되어라. 그 가을의 쓸쓸함에 니가 참여하라. 니 자신을 쓸쓸하게 봐라. 미련두지 말고. 낭만을 위하여. 

그냥 나도 한때 철딱서니가 어떻게나 없었던지. 내가 예수님 믿고 천당 가려고 했던 그 철딱서니 없었던 것도 같이 이 종말과 함께 쓰레기가 되어가지고 주께서는 없애버리는 일을 하신 거예요. 이미 너는 확정했다는 거예요. 뭘 확정했느냐, 니는 진멸의 대상이었다. 니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걸 믿냐? 내가 선택한 것을, 내가 믿을만한 선택을 한 것을 믿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십자가 안에만 들어있는 상황을 새로움으로 주면서, 그 새로움을 니가 믿느냐? 이 말이죠.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세상은 이미 끝났어! 세상은 진멸되어야 돼! 믿냐? 그 종말을. 그 끝났음을. 믿는다면 니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 확실하지? 네,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니가 구원된 것이다.

도저히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천국에 가요. 왕자가 아닌데. 개구리는 개구리다워야죠. 그런 성령은요, 십자가이후에 옵니다. 여기 제자들 다 도망가 버리죠. 아이고, 제자들이 철봉 하다가 힘 빠져서 다 내려오는 거예요. 자, 그다음에 봅시다. 마태복음 27장 33절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2절, “희롱을 다한 후” 이런 말씀들을 우리가 차 안에서 보지 말고, 바들바들 떨면서 ‘나 이러면 안 돼. 나 천당 가야돼.’ 이러지 말고. 아예 십자가현장 바로 옆에 붙어서 보자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27장 54절에 나오잖아요.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죠. 그 현장에 있던 이방인 중대장이 이미 죽어서 정육점의 고기처럼, “간다. 간다. 갔어. 큰소리치더니만 별 것도 없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하나님의 자기 죽음으로 본 거예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던지신 것으로 본 거예요. 이 백부장이. 우리도 성령 받으면 이런 눈이 있어요.

뭐 백내장 수술 안 해도 이런 눈이 있어요. 이게 보입니다. 현장에 있다면. 우리가 만약에 지금 와서 그 현장에 있다면.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우리도 그 십자가현장에 가고 싶습니다.” 이 대전이, 우리 일상이 십자가에요. 일상이 십자가라고요. 식사 받으면서 이 식사는 내가 먹을 자격이 못 돼. 이런 식으로 보는 이것이 ‘주여! 진멸인데, 아직도 왜 진멸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마음. ‘주께서 곧 오신다. 아이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든 걸 하게 되면 진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먹는 거 입는 것으로.

자, 더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 시몬 구레네 사람을 만나죠. 언젠가 마가복음 할 때 했는데, 구레네 사람 시몬 할 때,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라고 했어요? 32절에.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 다음에 뭡니까? “억지로”죠. 억지로. 이게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에요. 십자가에서 나오면 새롭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걸 다른 말로 고칠게요. 억지로.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국 가게 만들어요. 억지로. 꼭 시몬 같은 입장이에요. 눈 떠보니까 이미 홍해바다 건너왔어요. 그냥 보니까 같은 동료의 시체가 홍해바다에 떠있어요. 뭐 이런 시추에이션이 다 있어요. 시추에이션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주님은 생명을 바쳤는데, 그렇게 진지한데, 제목 다시 합시다. 주님의 진지함으로 바꿉시다. 그만큼 주님은 진지한데, 왜 우리는 복음이나 십자가나 주님에 대해서 왜 그렇게 안 진지한지요. 그게 내 것이 있어서 그래요. 내 것이 너무 단단해서 그래요. ‘굳이 주님이 아니라도 내 것 가지고 밥 먹고 살만한데. 나는 뭐 취미생활이나 하고 이러면 되지. 뭐 그거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세상이 이제 가을이고 겨울입니다. 종말이에요. 이 모든 게 종말입니다. 종말에 “억지로”라는 말을 왜 했느냐 하면은 알아서 구원될 사람은 저부터 해서 여러분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우리는 조작하고 연출하는 거, 이거는 잘해요. 이게 타고난 본능이 그래요. 진멸의 대상입니다. 저주의 대상이고. 왜?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태어난 그 자체가, 예수님마저 저주받았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저주받는 거예요. 그냥. 저주받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구원받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히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고요한데,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 우리를 깨웠어요. 이 죽음에서. 그것도 억지로 깨웠어요. 억지로. “니 생명책에 기록됐단다.”하고서. 명단, 호명 부르면서 그냥 깨운 거예요. 깨고 보니까 우리 이름을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고. 몰랐죠. 우리는. 아니, 몰랐죠. 갑자기 제목을 몰랐죠, 라고 하고 싶네요. 정말 몰랐죠.

교회가보니까 뭘 해야 구원받는 줄 알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배웠죠. 몰랐죠. 그거 해도, 예수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몰랐죠. 우리는. 우리 인간은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유대인들이 얼마나 철저합니까? 철저하게 성경연구해서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확증된 진리체제를 갖고 있었어요.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새로움으로 해버려요. 기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오직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는 그 자체가, 어린양의 피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그 앞에 걸치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살았다, 그거 걸치지 마세요.

예수님의 죽음만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만.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맨날 진흙 바닥에 떨어진 닭발이에요. 쓸데없는 것이 묻어도 너무 묻었어요. 드라마 연속극 보고 울고불고 하면서, “아이고 불쌍한 니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아이고, 내 인생 왜 이러카노.” 이런 식으로. 또 자기연민. 자기위로. “주여, 저를 위로해주옵소서” 뭘 위로해? 망했는데 뭘 위로해? 우리는 안 끝났다고 하지 마시고요. 끝났어요. 끝났는데,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새로움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채워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 기쁜가 하면은,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에게만 기쁨으로 와요. “주여, 이제 이 코스프레 하는 거 지겹습니다. 내가 이 몸 가지고 코스프레 하는 거 지겨우니까, 저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요.” 하는 그 순간은 주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너는 이미 내 것이라는 기쁨과 함께 동반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되게 진지한데 우리는 장난이고 농담처럼 여기지 않았습니까? 내 것에만 진지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존심가지고만 진지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죽어도 상관없는 자유를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