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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9 18:09:58 조회 : 245         
사무엘상 67강(왕의 영토), 마태복음 129강(요셉의 종점) 21032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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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82.♡.117.100) 21-04-15 23:25 
대전-67강 사무엘상23장1-5절(왕의 영토)20210329-이 근호 목사

오늘은 사무엘상 23장 1절,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있죠. 블레셋이라는 그 나라가 있다는 것은, 그리고 다윗과 투쟁을 하고 싸워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표면적인 영토분할시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구가 이렇게 있다면 우주에서 보면 지구가 둥글지만 가까운 곳에서 보는 지구라고 하는 것은 그냥 평면에 가깝잖아요.

평면에 있다면 이 평면을 이런 식으로, 논밭을 나누듯이 이렇게 분할해가지고, A라는 민족, B라는 민족, C라는 민족, D라는 민족, 이런 식으로 영토가 분할되는 겁니다. 표면적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표면적으로. 그러면 표면적으로 영토의 분할시대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러면 신약에서의 영토라고 하는 것은, 표면적 영토분할시대가 의미가 없이 되는 것이 신약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분할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표면적 영토분할시대가 구약 때부터 계속 쭉 내려오죠. 내려와서 어디까지 가느냐, 세상 자체가, 이 세상 자체를 달리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새 세상이 있겠죠. 그 새 세상에 의해서 이것이 다 멸망 당할 때 영토분할이 평면적으로 되던 것이 이제는, 신약에서는 수직적으로 분할된다는 것을 여기서 암시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되던 것이 수직적으로 돼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지금 구약에 살고 있습니까? 신약에 살고 있습니까? 신약에 살고 있죠. 그럼 신약에 살고 있는 성도 같으면 이 자체가, 이게 의미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이게 없어야 되죠.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의미가 없어야 된다 이 말이죠. 시골에 사느냐, 도시에 사느냐,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데려갈 때는 시골이라고 해서 나중에 보자, 이런 것이 없잖아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나잖아요. 언제든지 낚아챌 수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표면적 영토분할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이 시대가 표면적 영토분할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표면적 영토분할시대가 끝나고 수직적 영토분할로 이미 분할이 됐다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성도들의 의식과 관점도 주님 따라서 당연히 이게 달라져야 하는 거예요. 당연히. 뭐 서울시민 같으면 “나는 강북은 더러워서 못 살겠다. 강남으로 갑시다.”라고 이렇게 고집할 때, 고집하는 그 의식이 주님의 그 나라의 의를 생각해서 한 의식일까요? 아니면 구약적 마인드, 구약적 의식을 가지고 한 걸까요? 구약적 의식이겠죠. 

이 표면적 영토는 영토가 중요한데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사람이 죽는 것은 보통 죄 때문에 죽는다.’ 이렇게 다들 생각하실 겁니다. 죄 때문에 죽는다. 로마서 6장 23절에도 죄 값으로 사망이니까. 근데 그 죄 때문이라는 것을, 죄라는 것을 분석해보게 되면, 사람이 죽는 것은 출생지가 틀리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출생지가 틀리기 때문에 죽는다. 출생지. 영토가 달라서 죽어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블레셋 민족으로 태어났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에게 당하게 되어 있어요. 상당히 사적인 견해 같은 것은 구약의 하나님의 언약체제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것. 사적 또는 개인적인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왜 통하지 않느냐 하면은, 뭣 때문에 그러냐 하면은 구조에서는 개인적인 것은 봐주는 것이 없어요. 사적 견해와 반대되는 것이 구조적 견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째 시간에 사무엘상 23장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느냐를 찾아보면 돼요. 그러면 이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쉽죠. 그런데 그 구조적인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2절에 나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이래 되어 있죠.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이스라엘 구조가 어떤 구조냐 하면은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구조예요. 그 구조가. 

그러면 그 구조는 하나님과 더불어 있다는 말은 그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인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다, 라는 말도 되고. 달리 강조하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적인 견해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이 자체가 구조적이고 개인적인 견해는 거기에 묵살되는 겁니다. 의미 없는 거예요. 신약에 있는 수직적인 영토분할이, 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는 영토와 계시지 않는 영토를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아주 친절하게도 이렇게 시각적으로, 표면적인 영토분할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지금도 가자지구라든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그 지역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군대를 가지고 철저하게 그걸 지켜요. 이스라엘을 가보니까. 군인들이. 근데 팔레스타인은 군인들이 없어요. 아무것도 안 지켜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말은 자치구역인데 이게 자치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뺑 둘러 포위하고 있습니다. 포위하고 있는데, 만약에 이스라엘 쪽에서 정착촌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협의 같은 게 없습니다. 그냥 서류 들고 와가지고 “오늘부로 이 무화과 밭은 우리가 접수합니다. 정착촌을 지어야겠습니다. 일주일내로 비워주세요.”라고 하면 끝나요. 보상금을 주면서. 보상금 안 주고는 할 수가 없고.

보상금 주면서 일주일내에 이사 가라고 하면 끝나는 겁니다. 안 간다? 탱크가 와가지고 밀어붙이죠. 그리고 뭐 또 이렇게 시위를 한다? 장벽을 세워버립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높은 장벽들이 있어요. 무엇과 무엇의 분할이냐 하면은 우리 이스라엘,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와 하나님이 없는 나라와의 생생한 분할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도 이 신약시대에. 그러니까 현재 이스라엘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가짜가 되는 거예요. 신약시대에는 영토분할이수직적이지 수평적, 표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들은 구약 다윗시대 때에 그 의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겁니다. 왜 가져오느냐, 무엇이 안 되기 때문에? 불연속성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을 쭉 진행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과 약속의 지시 사이에 인간들로 하여금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연속 됐다는 사실을 현재 이스라엘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인간과, 이거는 강남강의에서 했는데요. 인간과 그리고 언약의 완성된 이 나라 사이에는 인간이 이 나라에 들어오려고 해도 들어올 수가 없도록 막혀있는 겁니다. 막혀있어요. 그 막혀있는 방법이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죽인다!” 그게 아니고, 그런 방식이 아니고, 그런 힘으로 하는 방식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그냥 살인사건이에요. 메시야 살인사건.

그리고 그 가해자, 주모자는 누구다?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이에요. 여기서 유대인, 유대인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요. 이걸 확장시켜봅시다. 유대인이라고 하지 말고 모든 인간이라고 하시고, 그 모든 인간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구원받고자 하는’, 그 다음이 중요해요. ‘⭴인간’ 이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했던 무슨 인간이 들어가는 하면은 ‘사적인 인간’이 들어가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인간은 어디에 못 간다?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왜? 연결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기대와 희망과 보람은 하늘나라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 개인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구조적이다.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약속을 펼치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온 것은 구조예요. 구조. 하나님의 구조입니다. 구조가 유지되는 것, 구조가 유지되는 그 방법은, 구조가 형성되는 방법은 바로 자기백성 분류하기입니다. 자기백성을 분류를 하는 거예요.

자기백성을 분류를 하는데, 아까 이야기를 쭉 들어보면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구조적이다. 같은 말은 사적인 것이 배제된다. 사적인 것이 배제돼요. 그러면 자기백성을 분류하기 위해서, 분류돼서 백성에 들어오게 된 사람의 특징은, 어떤 특징이냐 하면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 나의 실력과 나의 능력으로 내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 자체가 이게 아님을 아는 겁니다. 나의 실력과 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 이것이 자기백성이 되는 겁니다.

여기 자기능력과 실력이라는 말은 인간의 행동을 말하거든요. 인간의 행동은 어디서 나오느냐, 인간의 의도에서 나온다 이 말이죠. 그 의도자체가 내가 백성이 되고자 한다든지, 내가 살고자 하는 이것은 전부 다 묵살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다 묵살되는 거예요. 묵살이 되고,  나님과 통하고 있는 특정인의 조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그들은 하나의 영토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한꺼번에 구출이 되는 그런 현상이, 이 구조가 만들어지는 현상입니다.

사무엘상 23장에 보게 되면, 2절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여기 그일라 라고 하는 것은 지명인데, 예루살렘이 있고 베들레헴이 있고 여기 요단강이 있고 여기 사해바다가 있다면 이쯤 되어 있어요. 이쯤. 이 동네를 계속 지금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돌아다니는데, 거기에 그일라가 있어요. 그일라. 여기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거예요. 쫓기는 과정 속에서도, 그 속에 들어가서 그일라를, 자기백성을 건져내는 겁니다.

여기 건짐을 당하는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왜 건짐을 당해요? 마음씨가 착해서 건짐 당했습니까?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누구 때문에? 왕 때문에. 이게 바로 구조적이에요. 구조적. 하나님이 만든 구조를,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는 영토분할에 있어서, 구조적인 세계에 있어서 그게 어떤 식이냐 하면은 왕이 통치하는 구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그 면모를 드러내시는 거예요. 왕.

그리고 왕과 그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백성들은 이거는 덤으로, 아무 영문도 모르고 구원받는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이 구원받은 겁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왜 우리는 구원받고자 하는 노력과 열심도 없이 왜 그냥 덜렁 구원받았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게 구조적이야. 사적인 게 아니야. 개개인이, 너하고 나하고 면접 봐서 하는 게 아니야.” “앞으로 우리 회사에서 일 잘 할 수 있어?” 면접 보는 것 그런 것 없어요. 그냥. 덜렁 영토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구조 안에 들어온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약 자체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언약 자체가.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조적으로 일하신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언약적으로 일하신다. 언약적으로. 약속으로 일하신다. 그러면 그 약속은 인간의 사적인 견해로 이게 눈치 채고 알아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르죠. 사적인 것은 안 돼요. 일체 개인적인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의, 이스라엘 언약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보면서 이 구조가 어떻게 번져나가는지를 우리가 한번 봅시다.

창세기 14장을 한번 봅시다. 18절을 보게 되면 살렘 왕이 나오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오죠.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살렘 왕. 그런데 그 뒤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은, 21절에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이래 되어 있죠. 여기에 왕이 두 사람이 나와요. 하나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오고 또 한 사람은 소돔 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어디에 있어요? 아브라함은 그 멜기세덱 왕의 대리인으로 참석하는 겁니다. 대리인으로. 대리인. 분명히 우리가 살렘 왕 멜기세덱, 18절에도 나오지만, 18절 이전에 14절에 보면 싸움은 누가 했느냐 하면은 아브라함과 318명이 데리고 쫓아가죠. 그리고 13절에 보면 동맹 국가들이 나오죠. 어쨌든 간에 아브라함이 지금 전쟁의 주도권자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은 소돔 왕하고 싸우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그러면 승리는 누구의 승리여야 마땅하죠? 아브라함의 승리여야 마땅한데, 아브라함이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누굴 만나느냐 하면은 멜기세덱을 만나요. 자, 아브라함은 지금 왕입니까? 왕이 아닙니까? 왕이 아니에요. 왕이 아니니까 이거는 사적이에요. 사적이니까 구조적이 아니에요. 구조적이. 영토적이 아니라 이 말이죠. 내 조카를 구출하려고 전쟁 벌이고 싸운 겁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상대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똑같이, 사적으로 싸움한 사람은 소돔 왕이에요.

8절에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11절에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절,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그거는 소돔 왕의 맞은편에 있는 적이에요.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왕은 도망치는 왕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아홉 가지 부족 중에서 같이 연합해서 싸우든지 적이 되어서 싸우든지 싸웠다 이 말이죠.

어쨌든 간에 아브라함의 관심사는 롯이 사로잡혔다는 거예요. 적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왕이 도망쳐버리고. 이럴 경우에 아브라함은 사적인 전쟁을 한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고 난 뒤에 이거는 사적인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언약적인 그러한 틀, 구조를 세우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이용한 거예요. 조카가 잡히는 그러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자기세계, 자기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구조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 이용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아브라함이 알아요. 이거는 내가 사적으로 잘나고 똑똑해서, 열심을 내어서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니라는 사실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은 바로 얻어 챙긴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 미사일 탄두에서 제일 꼭대기, 제일 중요한 부분, 십분의 일을 차지하는, 전체를 대표하는 십분의 일. 그것을 아브라함이 누구한테 바치느냐 하면은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이게 종속의 의미가 있어요. “이번 일은 제가 시작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시작한 일입니다.”라고 이렇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나서 소돔 왕이 와서 하는 말이 “아브라함 당신 덕분에 우리 물건을 되찾았으니까 우리가 바치는 선물을 좀 받아주세요. 성의표시입니다.”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나는 내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얻은 것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부해요. 거부해버리죠.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구조에는 반드시 이 땅에 누가 등장하느냐, 언약을 추진할 왕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등장하는데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쟁케 해가지고 살렘 왕이 왕답게 등장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게 있어요. 언약한 게 있어요. 언약. 언약의 첫째와 둘째는 실질적인 것이고요. 셋째는 의미입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은 땅이에요. 그 다음에 씨,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를 주신 거예요. 씨와 의와 땅을 합쳐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땅은 영토, 영토에서 살 수 있는 것. 씨는 백성. 백성들의 공통적인 속성은, 본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나라의 의. 하나님의 의. 의인들. 의인들이 새로운 영토에 집합하는 것. 이게 바로 언약의 나라, 완성된 나라, 천국입니다. 여기서 뭐가 없어집니까? 개인적인 의도와 의향이라든지, 기대, 소망, 이거는 다 탈락입니다. 이걸 잘라내 버리죠. 이걸 잘라내 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땅을 구할 때도 개인적인 의도는 다 끊어버리고, 씨를 구할 때도 개인적인 의도는 다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도 개인적으로 나는 의인이고 싶다는 것도 다 끊어버리죠.

이 끊어버리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죽음. 그 증거가 창세기 23장, 23장 한번 봅시다. 17절에 보면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이런 이야기 나오죠. 이게 누가 죽었느냐 하면은 23장에서 사라가 죽어요. 23장 1절에 “사라가 일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죽고 난 뒤에 매장지를 구하면서 그 죽음의, 사라 죽음의  효과가 나타나요.

사라가 죽어서 매장지를 구하는 그런 일을 통해서 그 지역이 정식적으로 돈을 지불한 아브라함의 영원한 소유지가 되는 겁니다. 사라가 죽지 아니하면 아브라함의 땅은 약속의 땅에서 어떤 한 평도 아브라함의 소유의 땅이 없어요. 지금 우리가 표면적 영토분할의 일이 개시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그 땅에서 단 한 평도 아브라함의 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있는데, 언약은 있는데, 땅도 없고 씨도 없고 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의 일은 불연속성이에요. 하나님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누구 것밖에 없다? 인간들의 사적인 것밖에 없어요. 사적인 것. 그러면 성도가 되었다는 말은 사적인 것이 몽땅 다 날아갔다는 뜻이에요. 사기를 당하든, 몽땅 다 날아간 거예요. 내 게 없는 거예요. 안경 누구 겁니까? 누구 거예요? 주님의 것이잖아요. 딱 나와야죠. 안경뿐만이 아닙니다. 자식도 누구 거예요? 주님이 붙여준 거예요.

만약에 안경도 내 안경이고 자식도 내 자식이라면, 천국 갈 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의도 나의 의가 되어서 땡! 탈락이에요. 천국 탈락입니다. 의가 주님의 의가 되려면 현재 갖고 있는 씨와 땅 이 모든 것도 내 것이 없어야 돼요. 내 것이 없다는 말은, 내 것이 없어도 천국가면 주겠지, 라고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내 것이 없다는 말은 구조적으로 왕의 것이에요. 그래서 십일조 바치는 겁니다. 왕의 것이지, 왕의 것 안에 내가 누리는 것이지, “나중에 천국 가면 내 것 준대.” 이래 돼버리면 어디에 빠지느냐 하면은 상급론에 빠져요. 상급론에. 조금만 참아라. 다시 다 돌려준다고.

남편이 먼저 죽었다. 장례식장에서 막 울죠.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가가지고. “여보 조금만 기다려. 내가 조금 뒤에 갈게.” 가면요, “누구세요?” 더 이상 남편은 아내한테 매이지 않고 아내는 남편한테 매이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매인바 되기 때문에 그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소유가 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그 누구의 소유가 되지 않습니다. 어서 그때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참 그리워지죠. 보고 싶다는 것은 소유 당했다는 의식을 표현한 겁니다. 누굴 보고 싶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미지로 매인 관계가 돼버려요. 구조적이 아니고 사적인 관계가 된다고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뭐냐 하면은 그리워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 누구에게 그리워하느냐가 분명히 해야 해요.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데, 누구 얼굴? 바로 그때는 주님의 얼굴. 항상 믿음, 소망, 사랑도 그냥 그리워하고 바라고 믿는다는 게 아니라, 누구? 누구를 말해요? 다시 말해서 나의 사적인 것을 일체 용납하지 않게 하는 그 누구를 그리워해야 해요?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게 하는, 나를 생각하는 것을 필요 없게 만드는 그 누구? 그게 아가에 나오는 그 누구입니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은 서로가 서로의 그런 상대였어요. 눈앞에 보이는 그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자기한테 매임이 되는 사람. 그 관계가 사랑입니다. 자기에게 눈먼 사람. 바보 같죠. 바보 같은 사랑이에요. 자기한테 눈멀었어요. 자기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이 땅에서도 약간의 간접체험이 되죠. 왜냐 하면은 부모가 자식이 아플 때 보세요. 자기 생각 안 하죠. 자기는 말라 죽어가면서도 젖 주려고 젖을 내미는 것 좀 보세요. 그거는 뭐 개도 그렇게 하지만. 짐승도 그렇게 하지만. 이거는 맹목적인, 이유가 없어요. 그러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어제 오후 설교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이렇게 성도는 주님한테 먼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세상적인 애는 좀 컸다 싶으면 “엄마 이건 뭔데?” 이거 뭔데? 하고 자꾸 묻지만, 성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묻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 자체가 주님의 물음이에요. 내가 너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내가 너를 만들었어. 그럼 나가 있으면, 옛날에 사적인 나가 있겠죠. 두 번째 구조적인 나가 있겠죠. 사적인 내가 내 목표가 있는 반면에, 인간은 목적 지향적이니까, 집사님 뭐 좀 이루었어요? 뭐 만든다고 하던데. 목표가 있는 반면에 목표를 부질없이, 목표를 만들고자 애를 쓰는 그 찌질한 내 모습이 주님의 목표예요. 그 찌질한 모습이 주님의 목표라고요. 빨리 주님 재림할 것을 생각해야지 목표 만들어서 뭐 하려고요. 회식밴드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주께서 재림하시면 그만인데요.

아까 했잖아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뉘 것이 되겠느냐? 항상 죽음은 언제든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죽음은. 이게 구조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안 죽고 싶은 것은 사적인 마음이고. 구조 안에서는 니 목숨 니 맘대로 안 되고 내 맘대로 된다는 겁니다. 그분이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굉장히 그리워해야 돼요. 나를 묵사발 만드시는 분이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요. 나를 인간취급 안 해주는 분이 있다는 것. 너무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그 정도가 돼야 믿을만한 분이 아니에요? 나를 박살낼 수 있는 분.

만약에 어떤 남녀가 서로 연애를 하는데, 여자 쪽에서 “우리 집은 돈이 없어. 그저 뭐 한 이천만원 밖에 마련 못했는데.” 이렇게 할 때 남자가 하는 말이 “이천 만원 좀 더 써라” 이런 남자보다도 “그냥 몸만 와. 그냥 와! 다해줄게. 다. 다해줄게. 원하는 대로 다해줄게. 전부 다해줄게. 차 뭐 세대 사줄게.” 여자가 자기 생각할 겨를이 없죠. “오빠, 짜장면 내가 낼까?” “필요 없어. 파스타 내가 사줄게.” 요새 파스타 자주 나오는데. “파스타 내가 사줄게. 포크로 돌돌 말아가지고. 그러니까 너 돈 쓰지 마! 니 돈 안 받을게.” 내 생각할 겨를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내 생각을 할 겨를이.

왜냐하면 나를 못 믿게 만들어줘야 그게 믿음이거든요. 나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는 나인데 왜 자꾸 기대하게 만들겠어요? “며칠간 금식하면 복 받겠습니다.” 이런 거 믿음이 아니거든요. 아예 나에게 기대를 철회시키는 분. 이것이 바로 주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되려면 우리가 반드시 그 언약 앞에서 어느 자리에 서야 하느냐, 이게 바로 사적인 것을 없애기 위해서 주께서 언약적으로 마련한 자리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죽음의 자리에요. 죽음의 자리.

아까 사라가 몇 년 살았다고 했습니까? 127세. 127년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은, 제가 설교 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여기 자크가 이만큼 나와 있죠. 손잡이가 걸쳐 있잖아요. 이 손잡이를 빼려면 어디까지 가야 됩니까? 자크 끝가지 가가지고 억지로 빼내면 손잡이가 해방이 되죠. 이게 뭐냐, 죽는다는 것은 성도에게는 되레 사적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날이에요. 만세! 축 사망! 드디어 자기의 육신에 얽매이지 않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소망입니다. 이게 빠지는 것이 사도바울의 소망이에요. “나도 좀 놀자 좀 그만” “나도 좀 쉬자” 이 날이 죽는 날이에요. 그래서 성도에게 사망은 쉬는 기간이에요. 쉼의 시작이에요. 쉼의 시작. 

이미 그 자리가 확보되어 있으니까, 그걸로 인하여 이 세상사는 것도 살만하죠. 어차피 제대날짜 잡아놓고, 제대날짜 받아놓고, 예비군복 개구리 군복입고 거들먹거리면서 병영사이를 들락날락거려보세요. 말년 때 주어지는 불과 하루, 또는 12시간의 해방감입니다. 그럴 때 저기 대대장이 오게 되면, 제대가 많이 남아있으면 “충성!” 이러잖아요. 그러면 대대장이 왔다. 자기는 개구리 옷을 입었어요. 성령의 옷 입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옷 입었을 때는 대대장이 와도 충성~ 이러죠. 거기에 대해서 대대장도 심하게 뭐라 말 안 하죠. 내일 아침 되면 갈 사람이기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 그 개운함. 비현실적인 이야기 같아서 수습해야겠다.

다윗이 전쟁을 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다윗은 누구의 대리전쟁이냐 하면은 멜기세덱의 대리전쟁이에요. 멜기세덱의 대리전쟁. 왜냐하면 히브리서 6장,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하고 만났을 때에 그 하나님의 대리자하고 맹세했거든요. 십일조로 맹세했다고요. 그 대목을 한번 볼까요? 오늘 첫 번째 강의가 이렇게 논리가 난해해요.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여기 6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절,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라고. 여기 맹세를 하는데 누가 누구보고 맹세를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맹세한 걸로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하고 맹세한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하고 맹세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대변자로 아브라함에게 등장했기 때문에.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냐, 멜기세덱과 하나님이 맹세한 맹세를, 그걸 어떻게 진척과정과 그 맹세가 어떠한 전개를 보여 주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족보, 후손들, 씨앗을 통해서 확인되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멜기세덱이 나오죠. 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살렘 왕인데 특징이 뭐냐 하면은, 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아무도 없죠. 신약성경 359페이지입니다. 이 말은 뭐냐, 아브라함은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있다는 말이에요.

없는 계열을 아브라함이라는 언약관계에 있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거기서 Ctrl+v, 복제를 해버리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구조를 혈육적인 족보를 가진 아브라함 후손에다가 그걸 이렇게 입혀버리는 거예요. 덧입혀버리죠. 표면에, 언약적 마그마가 표면을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거예요. 올라와가지고. 언약이 자기 구토물을 내고 그걸 역사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핏줄은 세상적인 핏줄하고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세상적인 핏줄은 어떤 핏줄이냐 하면은 아버지, 엄마 있으면 당연히 자식이 핏줄이잖아요.

근데 아브라함 핏줄은 제가 아까 봤듯이 죽음이라는 것을, 언약적 죽음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땅도 죽어야 생기는 땅이고, 씨도 지금 있는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되는, 대비해서 비교해서 내보내야 되는 그러한 자식. 이삭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 이거는 비리비리 만날 남한테 의지하고 속여가면서 내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고 누이동생이라고 이렇게 속여야 그 남의 땅에서 빌어먹는, 자기생명밖에 모르는 이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행한 것도 없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인도하심이죠.  

아브라함은 어떤 언약적인 권세와 권력을 행세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기어요.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난다든지,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전부 다 임신을 못한다든지.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는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그런 나라가 돼요. 다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이 되려면, 이스라엘에게서는 공통적인 언약적 요소가 각인돼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할례언약입니다. 창세기 17장, 누구든지 할례언약을 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아브라함 너의 자손이 되지 못한다. 아브라함 너의 국가가 되지 않는다.

이 말은 누구든지 할례언약을 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혜택, 구조적 혜택을 입는다, 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할례언약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죽이시는 죽음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것이다. 죽는 게 복이랍니다. 죽는 게 복이래요. 안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적 죽음에 동참해야 비로소 그 죽음 속에서, 이 세상의 죽음의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새로운 영토로 귀순이 돼요. 월북하죠. 월남하든지. 그 경계선을 죽어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있잖아요. 죽고 난 뒤에 월남, 월북한다는 것은 언약이 와서 모셔가는 겁니다.

그게 누가복음 16장에 거지나사로가 죽을 때 혼자 죽었습니까? 누가 와서 그 시체를 가져갔습니까? 누가 와서 가져갔죠? 거지나사로가 죽을 때. 1번 장례사, 2번 보람상조, 3번 세브란스병원, 4번 천사, 몇 번입니까? 천사죠. 왜 천사가 왔느냐 하면 육의 일은 여기서 끝났다. 더 이상 육이 협박이나 공갈을 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끝났다. 새로운 영토는 에스겔 후반에 보게 되면 누가 하느냐, 바로 천사가 합니다. 새로운 영토는 천사가 와요. 천사가 와서 다 끌고 올라가죠. 대우가 아주 특별납니다. 엘리야는 뭘 타고 갔습니까? 불수레 탔죠.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가면서 요추가 다 나가도록 얼마나 덜컹덜컹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건 아니고 거지나사로는 천사가 와서 아주 가볍게 갔어요. 엘리야는 가볍지를 못했습니다. 왜? 생생하게 살아있어 가지고. 불수레 타면서 밑에 보면 얼마나 아찔했겠어요. 그러나 오늘날 신약에서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냥 다 잊어버리고 데려가는 천사에 끌려서 거지나사로가 누구 품에 들어갔다고요? 아브라함의 품이죠. 언약이 기다리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겁니다. 이게 아브라함 족보의 특징이에요. 단절성, 불연속성, 죽음의 개입.

죽음에 개입되는 그 방법을 히브리서 7장에서는 뭐로 개입하느냐 하면은 십일조로서 들어가는 거예요. 십일조죠. 십일조에 종속됨으로서 더 이상 사적인 나에게 내가 종속되지 않는 것. 그게 십일조에요. 신약의 십일조는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십일조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구약에 의하면 율법에 속하거든요. 그러면 십일조의 완성은 뭐예요? 십자가에요.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한 게 뭐냐 하면은 새롭게 발견된 존재론적 자원들의 영토. 설명하면 새롭다는 거예요. 인간이 예상 못한 거죠. 인간의 예상은 뭐냐 하면은 내 몸 추스르는 것만 예상하잖아요. 내 몸. 그런데 내 몸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덮쳐버린 것. 새롭게 발견된, 새롭게 발견했으니까, 내 쪽에서 발명한 건 아니에요. 예상한 건 아니에요.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거기에 사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꿈같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나는 거기에 존재론적으로 그 영토에 속했다 이 말이죠. 존재론적인 자원들, 자원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이 말이죠. 어떤 주인공을, 왕을 왕 되게 옹립하는 자원들. 왕을 왕으로 이해하고 왕에게 종속되는 실제적인 그러한 하부조직이죠. 그 종속된 사람들의, 그 다음에 뭡니까? 영토.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묻는 의미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무엘상 23장으로. 그러면 블레셋은 뭐겠어요? 아까 아브라함의 전쟁에서는 블레셋은 소돔왕이겠죠. 소돔왕. 물론 이건, 23장 5절, “소돔왕(블레셋)과 싸워서 그들을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그 다음에 뭡니까? 구원하죠. 자, 구원한다는 의미가 이렇게 구조적으로, 계획에 맞추어서 착착 진행되는 그런 요소들이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일을 할 때에 아브라함은 영토, 씨, 의가 전부 다 아까 뭘 근거로 한다고 했습니까? 언약적 죽음인데, 언약적인, 구조적인 죽음을 죽어서 등장한다고 했죠. 자, 그러면 창세기 25장 3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많이 찾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거는. 제가 이 본문 하나를 다 외워야 하는데 못 외워서 죄송합니다. 지금 비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25장 34절을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가볍게 여겼다는 말은, 아, 이거는 뭐냐 하면은 에서는 구조적이 아니고 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니가 나한테 팥죽을 주었다고 해서 신분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니 생각이 이상한 생각이 아니야? 니 나한테 속았어. 팥죽만 날렸어. 니는.” 이러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뭐라고 평가합니까?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 그러니까 야곱은 언약을 생각하는데 에서는 지금 전혀 언약이라는 구조를 생각 못하는 거예요. 팥죽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나답게 연속성을 가지면, 나가 계속해서 연속성을 살리면 이걸 사람들은 세상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성공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됐으니까 성공했다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빠졌습니까? 죽음이 없죠. 사적인 것이 죽어줘야 그 다음에 구조가 눈에 띄는데, 구조가 눈에 안 띄는 겁니다. 내가 누구한테 종속됐다는 사실이 눈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나는 나한테 종속되었어요. 나한테 종속된 겁니다.

그러니 참, ‘새로움’, ‘새로움’, 이게 굉장히, 말은 새롭다, 새롭다고 하지만 이 새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되겠죠. 창세기 24장 4절과 7절에서 보게 되면 사라가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삭의 아내, 아브라함의 며느리감을 구하면서 아브라함의 종이 갑니다. 4절에,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7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라고 되어 있죠.

땅과 씨가 만나는 거예요. 따라서 이삭을 그 동네 여자에게 장가를 안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씀, 이거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게 이삭을 살리고 난 뒤에 이삭에게 준 복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오기 전에 이삭은 무슨 경험을 했습니까? 아버지한테 칼 맞아 죽는 경험을 했죠. 요새 말로 하면 권총이죠.

아버지가 이삭보고 죽으라고 한 거예요. 죽어야 니가 산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낼 때, 예수님을 죽이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세계가 폭발하도록 하는 하나의 동기가 되게, 추진할 수 있는 신호탄이 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그게 십자가사건이죠. 언약은 이처럼 이 세상과 불연속성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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