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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6 17:39:18 조회 : 329         
사무엘상 71강( 상처의 전이). 마태복음 133강( 율법완성) 210726 이름 : 이근호(IP:119.18.7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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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96) 21-07-28 07:01 
대전-71강 사무엘상 25장10절(상처의 전이)20210726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사무엘상 25장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는 주인공이 세 명 나와요. 한 사람은 아비가일이고 남편이 있는데 이름이 나발,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다윗의 일단, 다윗의 일행. 이 세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서 사무엘상 25장을 다 끌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 셋 조합에서 A란 사람, B란 사람, C란 사람 이 셋 조합에서 C를 다윗이라 본다면 A, B 나발과 아비가일은 부부였습니다. 부부였는데 다윗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 둘 사이가 찢어집니다. 둘 사이가 찢어져요. 다윗이 개입해서 찢어졌다는 말은 다윗이 여기 등장하지 않았으면 일단 나발과 아비가일 관계는 찢어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평탄 또는 평온한 것, 평화로운 그런 관계지요. 평탄하다, 평온하다? 세상에서 상당히 좋아하는 겁니다. 분란이 일어나지 않잖아요. 좋은 이야기지요. 좋은 이야기인데 그러면 다윗의 배후엔 누가 있느냐 하면 다윗은 아시다시피 기름부음을 받은 자죠.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것은 배후에 하나님과 연결돼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돼있어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다윗을 하나님과 연결돼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올 때 어떤 식으로 찾아올 거냐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다윗이 하나님과 관련된 인물로써 어떤 평탄하고 평온한 인간세계에 왔을 때 그 인간세계는 어떤 분란이 일어나는지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요.

그래서 이 평온과 평탄이 지금 다윗이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어떤 상태냐 하면 사람들은 좋은 상태라고 여깁니다. 평화로우니까요. 좋은 상태. 그런데 다윗이 개입하니까 이 좋은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첫째는 나쁜 상태가 될 수도 있고요. 두 번째는 뭐냐? 더 좋은 상태, 이 말로 표현 안 돼. 더 멋진 상태. 영어로 하면, good! 좋은 상태, 더 멋진 상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련돼있는 다윗이 이 땅에 관여하는 순간 어떤 사람들은 그걸 나쁜 상태로 보고 어떤 사람은 이건 상상도 못할 좋은 상태가 돼버린 겁니다. 왜? 아비가일과 다윗이 결혼하니까. 아비가일 입장에서는 땡 잡은 상태지요. 왕의 처가 되잖아요. 좋은 관계 되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평온한 상태에 다윗이 개입할 때 여기서 필히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이것은 예외 없이 일어나는 상태로 뭐냐 하면 바로 다윗이 마음에 상처를 입은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오신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 이 세상에 관여할 때 하나님 일에 관여할 때 그 다윗은 또는 그 예수님 일은 또는 선지자는 이 땅의 상태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게 돼있습니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밉상 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윗은 이 땅의 정상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미움 받을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미움 받을 요소가 있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은 다윗을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비가일이 다윗과 나중에 결혼한다는 것은 특수한 상태에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특별한 일이거든요.

그러면 특별한 일은 우리가 나중에 진행을 보면서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했구나, 라고 알지만 초창기에는 아비가일이 다윗이 결혼해서 더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은 예상도 못한 겁니다. 그러면 예상할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우리는 평온하게 평탄하게 평범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평탄하게 평온하게 산다는 이것이 뭘 준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 사람을 뭘 준다? 상처를 주게 돼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요소를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반드시 예수님에게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요소가 있어요.

자, 나발 같은 경우에는 그냥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평온하고 평탄하고. 이 사람이 부자거든요. 25장 초반에 나옵니다. 굉장히 부자로 돼있어요. 마온이란 지역, 마온 지역은 여기 지중해 있고 사해가 있고 갈릴리 호수 있는데 요 사해 꼭대기와 예루살렘과 같은 위도에 있어요. 중간쯤 되는 여기에 마온이란 장소가 있습니다. 엔게디란 장소에서 좀 더 가면 마온이란 데가 있어요. 같은 위도에. 그 장소에 굉장히 큰 부자였습니다.

2절에 보면,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이렇게 돼있어요. 그리고 그 아내는 부자니까 아내가 예쁘겠지요. 용모가 아름다운 아비가일이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발의 입장에서는 지금 다윗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평온하고 평탄하고 본인이 만족스럽겠지요. 그렇지요. 상당히 만족스러운데 만족스러운 가운데서 다윗이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왜? 자체적으로 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사무엘상 25장 10절에 보게 되면 누가 사무엘상 25장 10절을 읽어보세요.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다윗이 도움을 요청하니까 요새 어중이떠중이가 왜 그리 많으냐 그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다윗이란 존재에 대하여 내가 침해받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요걸 요즘 말로 고쳐볼까요? 나는 예수라는 그 인물을 통해서 내 인생에 침해받는 걸 원치 않는다 그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있느냐를 여기서 다윗이 나발을 만나면서 있었던 그 일로 요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점검이 가능해요.

지금 나발은 누구 입장이냐 하면 나 중심입니다. 절대적인 나 중심이에요. 자아중심이죠. 나만 편하면 돼.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부자지요, 아름다운 아내를 가졌지요. 그러니까 이건 부족함이 없이 만족스럽다 이 말이죠. 만족스러운 걸 일부러 깰 이유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만족스러움에 비해서 그가 나발이 알고 있는 다윗이란 인물은 자기 영역에 끼어드는 것을 나발이 원치 않아요. 요새 주인을 떠나서 돌아다니는 피신해서 도망치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제발 내 구역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내칠 수 있는 거죠. 그 말은 나발에게는 예수님이 그다지 인기가 없고 예수님한테 흠모할 것이 전혀 없는 겁니다. 방금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 잘 아셨지요. 그러면 이건 지우겠습니다.

땅이 있는데 여기 땅에 선이 있다고 하고 나발은 여기 있다합시다. 나발 아내도 같이 있고. 여기서 다윗이 등장할 때에 다윗은 하나님과 같이 움직이고, 기름부음 받은 자니까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같이 작동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다윗은 사람들이 여기 있을 때 이 사람이 가진 게 이만큼이라면 이걸 더 키우고, 더 키워주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덜 키우고 더 키우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뭐냐 하면 다윗은 나발 때문에 상처 받았으니까 배척받았으니까 이걸 깎아버리는 거예요. 이게 다윗이 인식이라면 평균 이하로 이걸 깎아버려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음각이라 합니다. 조각할 때 깎는 거예요. 덧붙이는 게 아니고 유화처럼 캔버스나 뭘 덧칠하는 게 아니고 있는 것도 깎아버려요.

있는 것도 깎아버린다는 이 말은 다윗이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찾아왔다는 말은 오늘날 같이 언약으로 움직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의 있는 것도 어떻게 합니까? 깎아버리죠. 밥을 줄 때 머슴밥처럼 더 많이 주면 이게 정이 있는 거고 있는 밥도 깎아버리면 이거는 살벌한 관계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여기 있는 것에 대해서 상처를 받게 만들어요.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입게 돼있어요. 누구로 인하여? 나발로 인하여 상처를 입어요. 여기에 아비가일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5절에 보면,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자기 남편에 대해서 미련하다고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했으니까 정리해봅시다. 다윗에게는 나발이 미워할 요소가 있고, 나발에게는 다윗을 미워할 이유가 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 다윗은 쫓겨 가는 신세지요. 아무것도 권력이고 뭐고 다 박탈된 상태지요. 현상범으로 쫓기고 있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세상으로부터 쫓겼지만 다윗에게는 여전히 뭐가 있습니까? 기름부음이 있지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그와 함께 있죠. 하나님과 함께 있죠.

그렇다면 이 사무엘상 25장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닌 분이 이 땅에 나타났을 때 공식이 뭐냐? 다윗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예수로 바뀌고요 나발을 인간으로 바꿔봅시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이 미워할 요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뭐냐 하면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하지요. 이게 이 예수가 진짜 살아계신 예수가 아닌 거예요. 예수님에게는 인간에게 미움 받을 요소가 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미워해요. 구세주라 이야기하면서. 이상하게 이건 가짜 같아.

그리고 인간에겐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가 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예수님을 좋아할까요, 미워할까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내내 이야기하는 것이 예수님은 심지어 제자들한테도 버림받았어요.

그러니 교회가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건 분명히 백 프로 가짜 예수에요. 진짜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키워주는 예수, 내 소망을 들어주는 예수, 나에게 희망을 갖게 해주는 예수, 내가 잃어버린 것은 만회해주는 예수, 내가 아픈 것을 병 고쳐주는 예수, 내가 아쉬운 것은 채워주는 보충해주는 예수, 옛날에 칠성님 믿던 그 속성과 동일한 예수에요.

사람들은 그 예수를 믿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서 교회 가는 게 아니고 누구를 상상해서 가느냐 하면 하나님을 상상해서 간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뭘 가르치느냐? 하나님과 예수가 같은 편이라고 이렇게 가르쳤거든요. 그러니까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예수가 어떤 하나님이다?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십자가는 다 날아가 버려요.

십자가는 그냥 예수님이 폼 잡는 거고. 우리 죄를 스스로 못 씻으니까 그냥 우리 대신 죄 씻어주는 착한 일하는 덧붙여주신 분이고, 예수님 본인이 우리한테 미워할 요소가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한 겁니다. 있지도 않는 우상적인 예수, 우상적인 하나님으로 교회에서 줄곧 영업을 하는 거예요. 점치는 사람들이 교회 가고 전부 다 영업한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윗은 세상적인 인물로 보이는 나발, 모든 것이 풍성한 나발로 하여금 만남에서 다윗 같은 존재는 나한테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냉정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나발이 다윗을 배척하고 냉대하는 이걸 인간의 표준으로 삼을 것이냐, 말거냐? 그게 중요하겠지요.

인간 가운데 그렇게 성질 더러운 인간 있더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렇게 나쁘더라도 다른 사람은 점잖다. 이렇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나발이 모든 인류의 속성을 대신하고 대변한다고 그게 밝혀지기만 한다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들통 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우리가 맞이한 거예요.

절호의 찬스가 사무엘상 25장을 통해서 알려지는 겁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진짜 예순가, 아니면 내게 필요하다고 내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내 자유의지로 받아들인 그런 예수인지를 그걸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규명을 해봐야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발이 그냥 그렇고 그런 인간 하나 있다, 이거냐? 아니면 아담의 속성의 모든 인간이 기본을 나발을 통해서 대표해서 들춰낸 거냐? 이 점 규명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여기 음각이란 것, 파낸다는 것,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본성을 파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나발은 뭐냐 하면 현재 내가 아까 평탄하고 또 뭐라고 했습니까? “평온하게 살고 있으니까 나 건드리지 마. 나 이대로 좋아. 이대로 갈 거야. 날 건드리지 마. 파내지 마. 누구든지 파내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전부 그런 입장이지요. 다윗 같은 인간에겐 떡 하나 줄 수 없다, 그런 쪽이거든요.

자, 지금부터 나발의 이게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하냐?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이냐? 이것을 한 번 규명해봅시다.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있다, 이것이 틀린 말이에요. 이것이 맞습니까, 물어보기도 싫어.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 틀린 말입니다.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주전자 있다합시다. 주전자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이걸 받아들이죠. 카메라가 있다. 이것 다 받아들여요. 이 뒤에 뭐가 붙었습니까? 있다, 있다가 붙었지요. 하나님 있다가 붙지요. 하나님이 있다고 하게 되면 필연적인 그 다음 질문이 나와요. 누가 만들었느냐?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그냥 있다는 게 아니고 분명히 누가 만든 자가 규명될 때 있다의 온전한 것이 다 알려지게 돼있어요. 그냥 있다는 것은 인간에겐 참을 수 없습니다. 여기 수박이 있지요. 집사님, 수박 있지요. 수박 누가 가져왔어요? 수박 있음으로 인간의 궁금증은 끝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있다를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기 있는 내가 나의 있음과 연결시켜서 같은 있다를 사용했단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한테 하나님이 있다할 때는, 이태한테 물어보지요. “하나님이 있어, 없어? 그것 누가 만들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를 규명해야 있음이 그 내용이 충족되는 거예요. (괜히 참석해서 어려운 답변하게 해서 미안해요.)

사람이 하나님에게 질문을 한다든지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있습니까, 하는 질문한다는 것은 지금 누구 좋으라고 질문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질문한다고 해서 하나님 좋으라고 질문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있음을 더욱 다지고 다지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뭐든지.

“이 수박 누가 줬습니까?” “집사님이 가져왔습니다.” “아이고, 인사도 못 드리고.” 왜 그런 일을 하느냐 하면 수박을 맛있게 먹고 그 다음에 먹은 사람으로서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치레를 해줘야 나의 나다움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이 쭈그리 되는 걸 용납을 못합니다, 인간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있다/없다’ 이런 생각 자체가 인간의 한계점이란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한계 넘어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젯거리도 안 돼요. 있다, 없다가 문젯거리가 안 되고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건 죄냐, 의냐? 이겁니다. 이 영역을 인간은 못 넘어가요.

인간은 그냥 있음 자체를 뭐로 보자고 우기느냐 하면 있으니까 잘나서 있는 걸로 쳐주세요, 이러는 거예요. 신이시여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걸 훌륭해서 살아 있는 걸로 그냥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기어이 살아남는 것이 성공한 인생으로 보는 겁니다. 이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그겁니다. 오직 살아남는 거예요. 백신을 두 번 맞든 세 번 맞든 살아남는 게 이게 승자가 된다는 거예요. 살아 있다는 게.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냥 연세 많아서 흰머리 되어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뭡니까? 예수님이 나이 많아 연세 많아 돌아가셨다, 그것 보여주려는 십자가입니까? 누가 처리했다는 거죠. 누가 처리한 거예요. 어느 쪽에서 처리했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게 죄와 의는 인간은 이미 의라는 것이 규명됐어요. 내가 나답게 내 의로움이 유지되면 그건 무조건 자기는 있는 것은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매 이야기해볼게요. 두 자매가 있는데 그 언니가 엄마 몰래 엄마 화장품을 썼다고 칩시다. 옛날이야기에요. 요새는 지 화장품 있으니까 그럴 일 없는데 화장품을 몰래 했다 칩시다.

그런데 동생한테 들켰거든요. 동생에게 엄마한테 고자질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동생은 언니가 뭐 주는 것 없으면 입 다물 일 없잖아요. 인간은 받아먹고 챙기는 게 없으면 남의 말 들을 위인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엄마한테 고자질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언니와 동생은 벌써 어릴 때부터 상처가 삐뚤어졌지요.

화장품 누가 발랐느냐, 그것 때문에 엄마가 화나 있는데 마침 그 집이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서 부도나서 집이 몽땅 망해서 촌으로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러면 두 자매간에 둘이 껴안고 화해합니까, 안 합니까? 그게 질문이에요. 집안이 쫄딱 망해서 촌으로 비참하게 살아도 언니고 동생 간에 화해할까요, 화해 안 할까요? 화해 안 하지요.

그렇다면 그 문제를 확대시켜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범죄가 많아서 이 세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린다, 불 심판 내린다 할 때 인간의 마음이 달라질까요, 안 달라질까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안 달라지지요. 안 달라집니다. 자매가, “언니 우리 이렇게 작은 문제로 싸울 게 아니고 우리 집안을 걱정해야 되지 않느냐?” 이러지 않아요.

한 번 엉켜있는 언니에 대한 미움과 동생에 대한 미움은 천지개벽이 나도 안 풀립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의 세트장이니까. 이 세상은 세트장이에요. 이 세상이 뭐가 있는지 이 세상에 아파트가 있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이건 절대적인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지옥 가는 것은 인간에게 안 중요해요.

진짜 너무 중요한 것이어서 써야 되겠어요. 우리 마음을 알아야 돼요. “내가 지옥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에 들어있는 악령적인 심보입니다. 악마적인 심보에요.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러면 다윗이 왔을 때 나발은 다윗이 어떤 위대한 영웅이라도 나발의 마음은 다윗 앞에 변하겠어요, 안 변하겠어요? 안 변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있음, 그리고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잘나서 있음이 이거는 본인이 만든 게 아니고 악마가 집어넣어줬기 때문에 악마의 뜻이 풀리지 않는 한 이 마음은 지옥 가도 계속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지옥 간 사람 있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사로와 부자 있지요. 그 부자가 지옥 가서 개과천선했습니까? 안 바꿨지요. 이건 나사로가 거지인줄 알고 시키지요. 안 바뀌었지요. 환경이 좋으면 마음이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안 바뀝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좋은 것, 주님께서 수박 주고 프로바이오틱스 이것 줘서 우리를 개과천선시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우리로 인하여 받은 상처 있잖아요. 상처를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상처를 줄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에서 상처를 입힐만한 요소가 영원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이유에요. 요샌 교회에서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게 아니고 교회부흥을 앞장세우지만. 교회를 앞장세우잖아요.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 존재가 왜 이게 복음이 아니냐 하면 교회 존재는 나발로 하여금 진짜 나발로 계속 가게 만들어요. “아 내가 괜찮은 사람이구나. 내가 집사 할만 해서 집사했고 내가 장로 할만 해서 장로 했구나.” 자기 긍정을 계속 유지를 하는 거예요. 주님의 상처가 그 사람 속에 상처로 음각, 파헤치질 못하고 있어요. 인간과 인간들의 모든 만남은, 목사와 교인들의 만남은 상처를 보듬어주려고 애를 써요.

그 인간이 갖고 있던 아까 인간이 뭐 갖고 있다 했습니까? 인간은 뭘 갖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선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의인 거예요. 그걸 어려운 말로 의미라 하는데 모든 의미는 내가 여기 있음을 내가 확정할 때 의미 되는 거예요. 수박 예를 듭시다. 수박을 사왔는데 수박을 드세요, 드세요, 드세요 다 했는데 한 사람만 쏙 빼놓고 안 줬다. 다른 사람은 다 잡숫고 있을 때 본인만 수박이 없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나쁘지요.

거기서 자기 음각이 된 거예요. 자기가 파헤친 거예요. 자기 의미가 상대적으로 손상이 간 겁니다. 이게 인간의 기초공사에요. 이게 인간이 꽉 박혔어요. 그래서 인간의 육신이라든지 자아라 하는 것은 이미 악마가 심어준 그 대들보에 그냥 장식용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 서울대학 나오고 재산이 얼마나 있나, 그건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그냥 장식용이에요.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덴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아쉬운 것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지금 그것으로 장사하잖아요. 마땅히 아쉬워야 되고 더 아쉬워야 돼요. 십자가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파헤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피난을 가는데 주님의 지적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데 도망칠 때 보따리 쓰고 도망치거든요.

요샌 유식하게 캐리어 끌고 도망치는데 캐리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의롭다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나는 의롭다를 캐리어 끌고 도망치는 거예요. 이 교회 아니면 다른 없나, 하면서 계속 가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의롭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이거는 본인도 그 병을 못 고칩니다. 나는 인간 말종입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빌립보 2장에 마음을 낮춰라. 곧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버리시고 종까지 왔으니 그 마음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버려요. 어디다 담아버려요? 캐리어에 담아버려요.

그러면 그 안에 담는 순간 마음을 낮춘 것이 자기의 의가 돼요. 내가 영원히 존재해야 될 이유가 돼버린다고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기껏 그게 다에요.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서 그것으로 자기를 안 다치게 만드는 겁니다. 세상은 다 지옥 가도 자기는 천당 가고 싶어요. 아니 제가 지옥 가도 자기는 잘난 척하고 싶어 지옥 가고 싶어 해. 이게 인간입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놀랍게도 아비가일에 자기 남편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요. 이미 그 부부는 다윗이 오기 전에 균열이 갔는데 다윗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아내가 자기 남편과의 균열을 더 가중시킵니다. 아무리 부부사이가 안 좋아도 제삼자 앞에서는 욕을 안 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여기 사무엘상 25장 25절에 보면 노골적으로 자기 남편을 가지고 이름하고 딱 맞습니다. 미련한 녀석, 미련한 잡니다, 이렇게 욕을 하는 거예요.

이게 다윗이라 그렇지 만약에 제삼자 같으면 남편 욕 안 해요. 아내 욕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남편이 미련하다면 미련한 자와 사는 너는 뭐냐? 너도 미련한 여자잖아, 라고 같이 싸잡아 욕 얻어먹을 게 뻔하기 때문에 그런 욕을 안 하거든요. 적어도 제삼자면 자기편이잖아요. 어제 부부 싸움했던 말든 일단 남한텐 자기편이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비가일은 마치 다윗이 기다린 것 같아. 언제나 우리 부부관계는 쪽 나느냐 이걸 학수고대한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당신을.” 이런 식으로. 왜 그러냐? 본성이 달라서 그래요. 이렇게 돈 있다고 으스대는 이런 인간과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이 안 되는 요소가 있어요. 같이 산 것은 다윗 같은 남자를 못 만나서 같이 산 거요. 그러니까 부부가 그냥 임시적 부부에요. 임시적으로 그냥 살아주는 거예요. 부자니까 뭐 쇼핑할 돈 주겠다, 지가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여기서 제가 주일 낮 설교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한지 몰라서 오 목사님 녹취한 것 보니까 녹취 본에 이렇게 돼있어요. 한 번 적어볼게요. “절도 있는 체계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돼있어요. 녹취에 보니까. 여기 절도 있는 체계, 이걸 쉽게 말하면 안정적 마음상태를 이야기한 겁니다. 절도 있는 체계로, 체계란 말은 인간은, 내가 나를 지킬만한 체계를 수시로 구성하고 있어요.

성경말씀을 보잖아요.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계속 구성해요. 이 원리와 이 논리와 이 체계가 나를 지킬 수가 있을까를 늘 점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절도 있는 체계, 안정적인 나의 삶의 의식과 그러한 논리체계가 그동안 뭘 해왔느냐 하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자부하고 계속 살아온 거예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교회에서 배운 캘빈주의신학 이런 거죠. 어떤 체제가 있으면 논리가 있으면 교회 안 다닌 사람 같으면 뭡니까? 공자 왈, 맹자 왈 이런 겁니다. 가만있는 공자, 맹자 이용해서 내가 나의 정서와 마음을 다 잡을 수 있는 체제를 계속 인간은 끊임없이 구성해온다 이 말이죠.

이러한 인간의 시도가 문제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언약의 사람 또는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 앞에 이게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지금까지 강의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이게 안 통하지요. 여기 보세요. 절도 있는 체계가 모든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여기에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상처가 빠져 있잖아요. 상처가. 상처를 없애기 위해서 저 체계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고통을 없앴기 때문에 또 고통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제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사람이 종 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봐라. 아무도 없었다고. 내가 노예 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럼 뭐예요? 그럼 예수님만 바보에요? 예수님만 노예가 됐고 사람들의 종이 됐잖아요. 내가 온 것은 섬기려 왔잖아요. 그럼 예수님만 바보 돼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은 똑똑이가 돼버리고. 격차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흔히 뭐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다고요? 말 똑바로 하세요. 예수님 이용하려고 하지 믿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과 하나 되고 싶은 마음 없지요. 그냥 알랑 떨어서 빼먹을 것 빼먹겠다는 수법, 수단이잖아요, 이게. 지금 절도 있는 체계가 무너져야 돼요. 나는 멀쩡하고 싶다는 겁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멀쩡하고 싶다.” 이게 어제 낮 설교에 의하면 나만 멀쩡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바로 사회로부터 동의를 받아내는 겁니다. 혼자 집구석 방에 앉아서 멀쩡하다 하면 안 알아주거든요. 밖에 나가서 필라테스를 하든지 탁구모임을 하든지 안 그러면 꽃꽂이모임에 가서 같은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말은 뭡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어떻게 보는지 자체적인 점검에 나서는 거예요.

“아이고 아이들 잘 키우고, 우에 그렇게 훌륭하십니까?” 그런 소리가 막 날아오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뭘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소에 소원이 나는 멀쩡하고 싶어요. 나는 의롭고, 의로운 자에게 뭐가 온다? 웃으면 뭐가 와요? 복이 오죠. 복 받을 자격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토대가 악마로부터 심겨진 거예요. 나발 같이.

하나님 보시기엔 미려한지만 인간은 자기를 미련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다, 난 누구한테 속았다. 인간이 누구한테 속았다는 소리만큼 참 더러운 소린 없어요. 완전히 바보 되잖아요. 내가 가난하다는 건 견딜 수 있지만 너는 바보 같다 하면 정말 이건 화날 일이에요. “내가 멍청이구나. 멍청인데 왜 살지?” 이런 생각 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나발의 이런 경우가 나발에게만 국한된 경우가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될 것 아닙니까,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치는 방법은 이 방법입니다. 환경(배경),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실 때 또는 오늘 본문에 누가 오지요? 다윗이 오게 되면 다윗은 뭔가 다윗이 몰고 오는 다윗이 속해있던 그 환경이 있고 배경이 있어요. 그 세계가 있습니다. 다윗의 세계가 있어요.

이 다윗의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기름부음 받음의 세계, 이걸 달리 하면 언약이 적용되는 세계. 누가 요한복음 3장 읽어봅시다. 요한복음 3장 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자, 여기 보세요. 예수님이 몰고 온 환경과 배경 속에 여러분, 영생만 있습니까, 또 딴 게 있습니까? 뭐가 있지요? 영생만 있는 게 아니고 또 하나님의 진노가 있지요. 그러면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그냥 멀쩡하게 좋게 이야기할게. 좋게 이야기해서 영생 얻자고 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졌습니까? 사람에게 미움 받았지요.

미움 받았으면 예수님이 몰고 온 환경, 다시 말해서 영생과 진노 가운데서 우리는 어디에다 먼저 들어가야 돼요? 영생에 들어가야 돼요, 차라리 진노에 들어가야 돼요? 진노에 들어가지요. 이게 바로 왜 아비가일이 자기 남편을 사정없이 내친 이유를 알겠지요. 다윗은 내 남편을 어떻게 한다? 그냥 진노하는 업무와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분으로 아비가일은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아비가일은 누구와 결혼합니까? 다윗의 생애에 삶에 아내로서 거기다 일치합니다. 들어가 버려요. 이게 언약의 활동이에요. 언약이 하는 작동방식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 믿으라 하면 자꾸 영생을 생각하는데 영생부터 가면 안 되고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진노에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니까 그냥 못 퍼줘서 환장한 하나님으로 봐요. 못 퍼줘서 못 도와줘서 환장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진노란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분으로 알잖아요. 왜? 금복주 할아버지처럼 인자하신 얼굴…… 진노의 하나님은 예수님의 일그러진 그 모습 자체가 진노에요. 십자가에서 피 흘린 모습이 그게 진짜 하나님의 얼굴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골로새서 1장에 나옵니다. 어설프게 인자한 그런 얼굴 찾지 말고 사람들로 인하여 당했던 찡그린 상처 난 그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그게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수할 만한 근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뭐로 차지했습니까? 자기를 지키는 체제를 갖고 있지요. 자기의 절도 있는 체계, 안정된 체계, 이 체계 왜 갖고 있습니까, 뭘 지키려고? 주님 지키려고, 하나님 복음 지키려고, 하나님 지키려고? 아닙니다. 누굴 지키려고? 나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신학이라든지 이런 교리 같은 걸 둘둘 감아놓은 거예요. 캐리어 집어넣고. 그런데 주께서 주시는 것은 준비된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이 구원받을 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 제가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배경이 바뀌면 아까 의미 했잖아요. 의미체제가 달라져요. 옛날에 이미 죽은 가수인데 박상규라고 <조약돌>이란 노래있어요. “꽃잎이 한 잎 두 잎 바람에 떨어지고~” 이런 노랜데 그 조약돌을 채석업자가 그 노래를 들으면 뭘 생각하겠습니까? 돌 캐는 채석업자거든요. 괜찮은 조약돌은 돈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보세요. 보통 사람은 조약돌 들으면 옛날에 어릴 때 청춘이 있었는데. 채석업자, 돌 다루는 장사꾼이 보게 되면 어디 조약돌 많은데 있으면 요새 안 그래도 자재 값 올랐는데,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비슷한 이야기하겠습니다. 둘다섯란 가수가 불렀던 <밤배>란 노래있어요. “검은 빛 바다 위를 밤배 저어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봐 한 없이 흘러가네~” 이걸 국정원이 보게 되면 뭐로 봅니까? 간첩선이에요. 검은 빛 바다 위에 몰래 배를 젓는 것은 간첩선입니다.

그러니까 진노하시는 주님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 교회의 종교생활이 뭐로 보이겠습니까? 이거는 자기를 지키는 절도 있는 체계로 보는 거예요. 50년 교회 다녔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나는 직분이 목사입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신학대학 나왔습니다, 신학박사입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게 자기 진노를 부르는 거예요. 그게 아무 의미 없는데 무의미한데요.

주님 덕분에 우리 자식 잘 키웠습니다, 이런 것 있잖아요. 병이 나았습니다. 나발입니다. 욕하는 게 아니에요. 나발입니다. 나발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다 공히 적용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바로 성령께서 뭐를 바꾸느냐? 이 토대를 우리가 갖고 있던 나 중심의 토대를 주님께서 성령께서 여기다 기초공사를 따로 해버려요. 십자가를 꽃아 버린다고. 꽂아버리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것 다 외우지요. 십자가 언급하잖아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잖아요. 2장 마지막은 이 대목이에요.

십자가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십자가가 나타나는데 그 십자가는 나를 지키기 위한 모든 체제는 어디다 말아먹어야 된다? 십자가에 다 말아먹고 주님한테 일임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소유권이 바뀌어요. 지금껏 내 살아온 과거는 나를 위한 인생사가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었음을, 주님 손길의 연속이었음이 밝혀지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 서예 배우고, 난 치고 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것이 결코 뭐가 안 되게? 나의 의가 안 되게. 어디서 어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 다시 말해서 생명이란 반드시 먼저 사망의 자리에 있어야 생명의 의미가 생겨요. 진노의 자리에 있어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건 없음을 그때야 아는 겁니다.

이런 사무엘상 25장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네가 나발이다, 나가리야. 네가 나발이다. 나발인데 뭐로 바꾼다? 아비가일로 바꾸는데 누가 개입했다? 언약의 사람 다윗이 개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96) 21-07-28 07:02 
대전-133강 마태복음28장19절(율법완성)20210726b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이야기한 것 다시 한 번 중요한 것 해드리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것이 그냥 계시는 게 아니고 누가 만들었느냐를 표현적으로 그렇게 결합이 돼야 온전한 의미가 되는데 온전한 의미를 얻고자하는 이유가 뭐냐? 그런 것까지 알아채는 내가 온전하다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거세에요. 절단이에요, 절단. 잘라버리는 겁니다. 뭘 자르느냐 하면 하늘과 땅은 거세됐다. 땅이 잘려진 거예요. 절단된 거예요. 끊어진 겁니다. 왜 끊어졌느냐 하면 연결자가 하늘에서 보냈다는 말은 끊어진 상태라는 뜻이에요. 연결자가 없으면 계속 끊어져있고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연결자가 등장한 겁니다.

그럼 연결자 오기 전까지는 중보자 오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안 끊어졌다고 본 거예요. 무슨 이런 환상, 착각이 있습니까. 그래서 거세, 잘라짐은 바로 환상을 낳는다. 그 환상을 낳는 거예요. 그 환상이 바로 정신세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정신세계를 인간세계에서 꽃피우고 있지요.

정신세계라 하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사물, 물건, 물질 말고 나머지 전부. 사랑, 믿음, 소망부터해서 영원, 자유, 이런 물건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사물과 일대일 대응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정신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의미, 이런 것. 집에 돈이 있는데 막 자살하지요. 그 이유가 뭡니까? 사는 의미가 없어서 죽겠다는 거예요. 명예, 체면, 전부 다 정신세계에요.

정신세계를 저는 정신세계로 표현하지만 좀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게 바로 영적세계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영적세계에요. 옛날 고대에서는 너무 영적세계였어요. 번개 쳐도 신이 노한다 했는데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물질세계는 점점 범위가 넓어져가고 있고 정신세계는 점점 더 쫓겨 가고 있지요.

코로나 터졌을 때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이거는 천사가 와서 작살내는 걸로 이해했잖아요. 코로나 터진 것 말고 옛날에 전염병은. 페스트 병 16세기 유럽에서. 지금에 코로나에 대해서 하나님의 저주고 계시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최근에는 나타났지요. 코로나와 재림날짜와 이런 게 뉴스에, 재림날짜가 가까이 왔다, 이런 식으로 해서 코로나를 이용하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적세계는 시간이 정체돼있다고 보면 돼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별로 시간요소가 깊이 관여 안 되고 있어요. 지금은 사랑하지만 내일 쯤 사랑할게. 이게 안 되잖아요. 사랑한다고 하면 내일 가서 사랑해야지 사랑한다고 미리 지금은 사랑하지만 내일 쯤 사랑해줄게, 이런 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사랑이란 건 정신세계, 영적세계는 모든 것이 시간이 정체돼있어요. 시간이 늘어 터졌다. 시간이 늘어 터진 거예요. 특히 한 식구들끼리 있을 때는 시간이 잘 안 가요. 그런데 직장 가서 바르게 세상에 모르는 제삼자들과 있는 세계에 딱 들어가게 되면 시간이 촉박 되지요. 빨리빨리 그 다음 손님, 굉장히 촉박 되지요.

그러나 같은 식구, 아버지와 있다 하면 늘어 터져요. 아이와 자식과 있으면 그 애와 아버지는 그 모습이 계속 유지된다는. 시간이란 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못 느낍니다. 세상은 굉장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고 가정이란 평온하니까 시간이 별로 안 가지요. 영적세계, 정신적 세계라 하는 것은 시간이 늘어 터진 거예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의 특징은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는 걸 영원이라 합니다.

뭐 지옥 가서 한 5년 쯤 복역하면 나아지겠지, 이런 게 없어요. 오늘의 지옥 불은 내일 되도 마찬가지 지옥 불이에요. 아니 내일 자체가 없어요. 모레도 없고 한 달도 없고. 그 상태로 그냥 가는 거예요. 어떤 상태? 제거된 상태, 거세된 상태, 잘린 상태, 영생으로부터 배척받은 상태로.

그러니 지옥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보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설을 하신 거예요. “지옥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욕, 저주를 하신 거예요. 지옥 있다. 그리고 못 나온다. 영원히 갇힌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욕 얻어먹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욕을 먹는다 하면 인간으로서 대책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섬겼잖아요, 이런 식으로 커버 나서려고 하지요.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은 준비된 게 있어요. “내가 보낸 하나님을 네가 죽였잖아. 단절되어 있잖아. 단절 돼놓고 무슨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다고?” 어디 그런 가짜 뉴스가 있느냐 말이죠. 함께 있는 게 아니지요. 쫓아냈지요. 하나님을 버렸잖아요. 인간들이 합세해서,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누구 주도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버렸잖아요.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으면 이제는 하나님한테 있는 영생은 인간에겐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잖아요. 분명해졌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간다 해도 인간세계에선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내일 또 내일, 내일 또 내일이 되던 아무 더 나아지겠지, 희망이 있겠지, 소망이 있겠지. 희망, 소망 자체가 거세된 세계에서는 그게 아무 의미 없어요.

자알 될 거야. 잘 되지 않습니다. 쨍하고 해 뜰 날. 해 떠도 소용없어요. 나중에 해가 없어질 거니까요. 뜰 것도 없어. 해도 저버리고 달도 하늘에서 별도 다 떨어지는데 빌 데도 없어요. 별 하나에 내 이름, 그것도 없어요. 우르르 다 떨어져서 없어요.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 28장을 보면서 그 점을 먼저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뭘 염두에 두느냐? 거세, 잘라버리는 것. 거세란 말은 멀쩡한데 잘라버렸다는 거예요. 자른 거예요. 같은 말이 절단돼있다. 이렇게 그 연결이 끊어져있어요.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세계가 끊어져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 요한복음 3장 12절을 누가 찾아 읽어보세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자, 땅과 하늘이 땅과 하늘은 유일하게 예수님에게만 연결돼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유일하게 예수님에게만 연결돼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땅에 와서 땅의 일을 하면 땅의 일일까요, 하늘의 일일까요? 하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왜? 유일하게 연결돼있으니까요. 그럼 예수님 빼놓고는 하나님의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연결된 겁니다.

냇가에 있는 송사리가 인가의 신체에 대해서 평생, 송사리의 평생이 몇 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평생 구경 못했는데 내가 냇가에 발을 담그면 그때가 송사리가 유일하게 인체에 대해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지요. 송사리야. 이게 하늘의 일인가, 땅의 일인가 묻는 겁니다.

그 발에 대해서 우리 동네 발이 아니네. 우리 송사리 떼가 아니네. 이건 인간의 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그건 정말 하늘의 일과 접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 인간들은 예수님 보고 하늘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뭐냐 하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네, 이렇게 된 거예요. 땅의 일로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 보고 땅의 일로 생각한 거예요.

자,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한테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이 거세가 의문점이고, 절단되는 것, 끊어지는 절단이 그들에게는 안 받아들이는 거죠. 하늘과 땅의 절단을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 예수님의 행적을 보시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했잖아요.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고, 그 다음에 승천이 있고, 그 다음에 재림이 있고, 승천까지는 됐으니까 이런 일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걸로 보여요. 땅에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한테는 재림이 아직 안 됐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는 말이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아직 재림은 남아있고 나머지는 다 이루었다하든지 아니면 부활, 승천은 남아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십자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 뒤에 있는 부활, 승천, 재림까지 포함시켜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 되는 이유가 뭐냐? 주께서 십자가 질 때 1단계는 넘어갔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할 때 그 다 이루었다함에 어떻게 재림이 포함되느냐 말이죠. 인간들 보기엔 시간적으로 남아있는데.

승천뿐만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 재림 그 사이에 성령 주심도 포함돼있지요. 부활, 그 다음에 승천, 그 다음에 승천돼야 성령을 주시니까 승천, 성령을 주심, 그 다음에 재림. 이런 요소가 아직 남아있는데 십자가에 달랑 돌아가셔놓고 이것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느냐? 그 내력을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율법 따라 죽으셨기 때문에, 율법 따로 죽으셨다. 율법이니까 이건 뭐냐? 법이죠. 다른 말로 하면 규칙입니다. 하나님의 규칙 따라 율법에 따라 죽으신 거예요. 그러면 그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자부했지요. 그래서 자기들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할 때 근거가 뭐냐 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자기는 택한 백성 맞다, 라고 지금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율법 안에 뭐를 못 찾아냈느냐 하면 율법이 하나님과 인간세계를 거세하고 잘라낸다는 그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감히 생각을 못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아담에 속한 인간은 다 죽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죽어야 되는데 우리가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께선 율법을 보내셔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살렸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살았다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가 죽었다는 생각과 짝을 이루어서 살았다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죽었다는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살았다고 희망 갖는 그것도 제대로 살았다는 그 내용이 아니겠지요. 그렇지요. 말하는 내가 더 어렵게 이야기하네. 목숨 끊어진 게 인간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좀 설명해야 되겠는데요. 목숨 끊어진 것이 죽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질 않아요. 율법을 성취하지 못하면 죽은 거예요. 이게 율법의 취지입니다. 율법의 내용대로 살지 못하면 죽은 거란 말이죠.

그리고 신명기 28장에 보면 죽은 정도가 아니에요. 뭡니까? 저주받은 거예요. 죽는다는 것은 저주받은 현상의 하나일 뿐이에요. 율법대로. 다시 말해서 율법은 뭐냐 하면 거룩한 거거든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가. 거룩한 이 거룩을 인간의 신체가 다 감당할 수 있습니까, 버텨낼 수 있어요? 못 버텨내지요.

만약에 어느 복음적인 가정이 있는데 애가 또 백 점 맞아왔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또 백 점 맞았구나. 엄마한테 얼마나 칭찬받을까 했는데 엄마가 굉장히 아이한테 닦달내고 하는 거예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니가 백 점 맞는다고 해서 율법을 감당할 수 있어? 니가 영어도 백 점, 수학도 백 점, 사회도 자연도 백 점인데 이 백 점이 백 점 맞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테스트,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냐 이 말이야?” 이렇게 닦달내고 나무라는 엄마는 있을 수도 있어요.

온전한 의, 온전한 거룩은 율법을 준수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이미 거세되었음을 이미 끊어져있음을 확인 차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줘야 인간은 어떤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겁니다. 확실하게 가져갈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을 준 것은 이 율법을 통해서 복된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의 참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그렇게 되면 안 지킬 사람이 없다면 율법을 준 의미가 취지가 실패로 끝나요. 하나님의 취지가 실패로 끝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와 같은 거예요. 야구에서 공 던지는 사람을 투수라 하지요. 공 받는 사람을 포수라 하잖아요.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투수가 공을 힘차게 던져놓고 그 던진 공보다 더 빨리 가서 포수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던진 공을 자기가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스트라이크. 그게 다 이룬 거예요.

재림이 남아 있다가 아니라 누가 율법을 박았느냐? 누가, 어떤 인물이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 계약자가 예수님 외에는 다른 사람은 계약자가 될 수 없어요.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의 명의로 다른 사람 도장 찍어서 성사되는 그런 계약은 주께서 다 찢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도장 찍어야 돼요. 예수님 소유권이 돼야 된다고요.

그런데 십자가를 하면서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제가 답변하겠습니다. 율법이 성사되면 의롭지요. 율법이 성사되면 의롭다 할 때에 그 의로운 증거가 뭐냐 하면 한 자로 이거에요.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보지만 한꺼번에 줄여서 살과 피를 합쳐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피로 맺은 언약이라 돼있지요. 피로 세운 언약, 계약서, 피로 세운 계약이에요. 누구 피? 내 피와 내 살로 말미암지 않고는, 새 언약은 내 살과 내 피로 이뤄진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율법의 초점이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이미 다 이루었다가 되게 되면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 빼놓고 나머지 일은 가차 없이 쓰레기 취급해서 버리시는 것이 그 다음 합당한 조치가 되겠지요. 안 버리시면 그건 합당한 조치가 아닙니다. 예수님 하신 것 빼놓고 다 버리는 거예요.

여기 수박 있는데 이것 계속 먹고 있으면 안 되지요. 버려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잘라낼 것은 잘라내신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그것이 수긍이 되는 사람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입니다. “야, 신난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고 한 내가 잘려야 되는구나.” 그걸 반가는 거예요. 자아 구원이 아니고 자아 잘림이 돼요. 내가 잘려나가는 거예요.

몸통 가면 되는데 뒤는 잘라내야 되지요. 엄마 나갔다? 엄마 나갈 때 애는 따라 나가는 것, 그건 아직도 엄마가 자기 한 몸이라 생각하는데 그런데 봐줄 수 있지만 다 커서 엄마 가는데 엄마 찾아가면 이건 잘라내야지요. 자아 잘림을 사도 바울에서 예수님이나 다른 사도는 자기 부인이라 하지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자르고 날 따르라.

그동안 네가 너한테 충실했잖아. 네 자존심과 체면과 네 의미에 네가 완전히 종노릇했다. 네가 너한테 매여 살았다는 거예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오십을 살아도 칠십을 살아도 항상 생각은 무슨 생각밖에 안 해요? 나 살릴 생각밖에 안 했잖아요. 그걸 잘라내야 되는 겁니다. 참 이게 속 시원한 거예요. 더 이상 나한테 농락당하지 않아야 돼요. 나의 위신과 나의 의미에 농락당하지 않는 것.

여기에 마귀가 발악을 합니다. 네가 얼마나 귀한데, 네가 이만큼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비굴한 짓, 아양 다 떨어가면서 이만큼이라도 살림 이루고 이만큼이라고 살만큼 산 것은 네가 고생한 네가 노력하고 힘든 대가잖아. 그걸 어떻게 다 버리느냐고. 마귀가 교회 목사를 통해서 그렇게 외치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 불러가면서 지킬 수 있는 것은 너를 지키는 것은 너밖에 없어. 너의 믿음으로 지키고 너의 사랑으로 지키고 너의 기도로 지키면 주께서 너를 지켜주시리라. 시편에 나오는 말 있잖아요. 그게 다 예수님 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십자가는 그게 너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나 보고 이야기한 거라는 거예요. 신약에 와서.

구약성경에 있는 주께서 친히 지키신다는 말은 나부터 하는 이야기고 이스라엘은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되는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기존의 이스라엘은 무효! 전부 다 무효, 콜드게임, 끝났어요. 5회 말 10:0으로 이기고 있는 비 확 와서 5회 말까지 모든 게임 말소, 다 말소하는 거예요. 말소라는 게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말소하는 것이다. 주님과 계약 맺기 위해서 인간과 맺은 모든 계약은 말소가 되는 거예요. 옛 언약을 폐기처분되는 겁니다. 나 너와 상대 안 한다는,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주님과 상대해요.

자, 다시 정리해봅시다. 율법은 누가 이뤘다? 예수님이 이뤘다. 이루신 방식은 뭐냐? 피다. 예수님의 죽음, 살과 피를 통해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겁니다. 고점을 좀 더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착하지요. 하나님은 착하지요. 착한 사람과 착한 사람 계약하는데 거기서 피가 나올 일이 없지요. 그렇잖아요.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이 계약하는데 갑자기 피하고 뭐 자해하고 이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계약했는데 왜 피가 등장하느냐? 그것은 율법 안에 취지가 있어요. 무슨 취지냐 하면 바로 절단하는 취지가 있어요. 율법 안에는 거룩하지 않은 것을 전부 다 내쫓는 기능이 있어요. 율법을 건강원이라는 게 있지요. 건강원이 뭐하는 뎁니까? 약 다려주고 짜주는 곳이죠. 율법을 건강원 압력솥에 집어넣었어요. 나중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피만 질질 나와요. 피 안에 농축돼있는 거예요. 피로 다 이루었으니까.

그러면 율법의 모든 조항, 깔때기라 합시다. 율법을 다 담아요. 십일조 하고 남자는 여자 옷을 입지 말고 채소를 하고 오징어 먹지 말고 돼지고기 먹지 말고 하는 그런 것 있잖아요. 하여튼 모든 걸 다 집어넣어요. 안식일 지키고 이걸 다 집어넣어요. 다 집어넣으면 다른 인간은 못 지키고 예수님만 지킬 수 있거든요. 예수님만 계약자거든요.

예수님께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다 이루었다의 증거로 피가 되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율법이 피가 되어 나왔다면 피를 확장시킨다. 피를 다시 한 번 확장시키면 여기 있는 율법적 취지도 피를 중심으로 다 확장되겠지요. 모든 율법은 거룩하지 않은 , 속된 것을 제거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제거하는 기능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게 최종기준이 되어서 터져 나왔다면 그 모든 것 속에서 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저주받은 자가 돼요. 더러운 자가 되고. 피의 기능 속에.

히브리서 전반기에선 그걸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왜 율법의 완성이 피로 나올 수밖에 없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걸 속죄제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요. 속죄제물이 되려면, 이런 게 어려워요. 진짜 어려운데 너무 어려우니까 글로 써봅시다. 예수님은 착하다. 그래서 의롭다. 이거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식이에요. 이 공식은 하늘나라에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에서는 이게 납득이 되는데 하늘나라엔 통하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은 대신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래서 의롭다. 이런 공식이 의로움의 공식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다 한 의미가 예수님이 우리가 보기에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고 율법 지킨 게 아니란 말이죠. 이건 우리네 잘못된 편견입니다. 예수님 술 드신 것 아시지요. 잠언에 보면 술 먹지 말라 했거든요. 포도주 먹지 말라. 포도주 드셨어요.

예수님의 행적들을 보게 되면 그 당시 안식일 지킬 때 예수님 안식을 안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식일 안 지킨 게 율법을 안식일 지킨 게 돼요. 그건 뭐냐 하면 속죄가 성립되려면 속죄가 뭡니까? 죄가 있다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의롭게 한다고 속죄되는 게 아니고 그 죄에 대해서 담당해야 대신 속죄가 돼야 그게 의가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죄야, 나쁜 거야, 지적한다고 의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우리네 율법에 대한 상식이 완전히 거덜 나야 됩니다. 완전히 다 바꿔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도 좋고 인간도 좋고 이런 논리는 예수님 나라에 하늘나라에 그런 논리는 없어요. 인간은 묻지도 않고 무조건 악해야 돼요. 무조건 나는 악해야 돼요. 나는 ▭다. 뭐다? 나는 악하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합니다, 땡큐, 이게 돼야 돼요. 나는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악해야 돼요. 이걸 견지해야 유지해야 됩니다.

이걸 유지하는 방법은 간단하죠. 예수님이 속죄제물 완성했잖아요. 속죄제물 해볼까, 한 번 노력해볼까, 가 아니라 이미 끝났어요. 속죄제물, 죄 씻는 것은 끝나버렸어요. 끝났다는 걸 뭐로 아느냐? 십자가의 피로 끝나버렸어요. 끝났다는 이게 복음입니다. 끝났어요. 더 이상 추가될 계약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피는 믿되 기도하라, 피는 믿되 헌금하라, 이런 게 남아있지 않아. 피는 믿되 대면예배 드리라, 이런 것 없어요. 피로 끝나버렸어요.

피로 끝나버리고 나머지 확대가 뭐냐 하면 모든 말씀과 상황을 통해서 ‘나는 악하다’에 거기에 동의하라 이 말이에요. 아까 수박 잡쉈지요. 세상에 그런 악한 짓을. ‘나는 악하다’에 동의하고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그럴 때 누가 빛나요? 속죄제물, 율법을 다 이루었다가 빛이 난다니까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나가 되는 거예요. 주인이 바뀌는 거예요. 나였던 것이 나가 아니고 주님 앞에 너가 될 수 있는 것. 그 방법을 주께선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내가 있음에 내가 되려고 한 거예요. 그동안 이스라엘이 그래서 실패한 거예요. 이방인도 마찬가지고.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영원히 나 되고 싶은 절대적인 나를 포기 못하는 겁니다. 그 절대적인 절대를 내가 아니고 주님이 가져가는 거예요. 속죄 제물만이 절대적인 이제는 나가 되고 영원히 계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벌써 나 아닌 분이 살잖아요. 타자, 남, 타자가 내 안에 살잖아요.

타자가 사니까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항상 악한 자가 되는 그 즐거움, 그러니까 주님의 속죄 제물 의롭지요. 속죄 제물이 의니까 의를 위해서 나는 악함으로 이렇게 떨어지지 않아야 돼요. 나의 악함이 돌아다니면 이건 나쁜 놈이고, 악함을 또 자랑하면 안 되고 속죄 제물과 결부된 악함, 이게 뭐냐 하면 계약이 하나님의 언약이 돌아다님, 하나님의 언약체로서 계속 돌아다니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그 다음부터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십자가 다 이루었다 했는데 다 이루었으면 끝났는데 남은 일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의 속죄 제물에 대해서 피의 취지가 드디어 확산됩니다. 왜냐하면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계약은 깔때기로 모아놓고 전 우주로 확산되지요. 확산될 때 여기에서 피에 반대되는 말, 율법은 잘라낼 자를 잘라낸다면 율법이 완성되는 예수님의 피도 잘라내는 기준으로 작용이 되겠지요. 잘라낼 때 어떤 것들이 잘라내는지를 여기서 보는 겁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8장 11절 봅시다. “여자들이 갈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라고 돼있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가짜 뉴스가 되도록 돈으로 매수당해서 이거는 죽은 게 아니고 시체를 훔쳐갔습니다, 라고 거짓 뉴스를 퍼뜨리게 한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일이 십자가 이후에 일어났잖아요. 인간들 보기에. 그러면 그들의 무엇을 겁내는 겁니까? 제가 질문할게요. 예수님의 피를 겁내는 거예요, 부활을 겁내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부활이죠. 그래서 부활을 믿는 자가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부활을 믿는 자가 지옥 가는 이유가 이들과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죽었다가 살아나지 아니하면 나는 안 믿겠다는 거예요. 도마처럼.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걸 믿는 게 아니고 우리는 뭘 믿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 1절처럼 십자가를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되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고 레벨이 어떤 레벨이냐 하면 인간들이 하는 수준과 똑같은 수준이에요. “봤데. 예수님 살아났데.”

그런데 주님께서 분명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했잖아요.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게 되면 누가 아직도 유의미 하냐, 의미가 있느냐 하면 내가 눈으로 봤다. 이 눈동자, 나의 눈동자, 니 눈동자 말고 내 눈동자에 어떤 아직도 가치가 작동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내가 봤어. 간증집회하면서 내가 봤어. 내가 주님이 키 훤칠하니 생긴 것 봤어.” “어떻게 생겼는데?” “완전히 제임스 딘 같이 잘 생겼어.”

여전히 예수님 봤다, 라고 하는 그런 나의 체험을 내가 믿게 돼요. 그러면 이거는 거세가 안 된 거예요. 절단이 안 된 겁니다. 십자가 피를 믿는 것은 어떤 경우라고 인간이 볼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방식이에요. 구원받는 방식은, 성령은 부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이야기해요. 왜? 어떤 인간의 모든 체험도 거세해버리니까, 잘라버리니까. 네 눈, 코, 입 전부 다 그 기능이 구원받는데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야 오직 성령만이 자기 사람을 건져낼 수 있기 때문에, 성령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일서를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12, 1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맞지요. 하나님 본 사람 없지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해놓고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성령 봤습니까? 제가 이 말을 인용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 안에 서로 느끼고 있는 어떤 체험 같은 것이 있으면 그거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 맞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러면 그 체험이 진짜 온전한 하나님이 인정한 체험인지 허가가 난 체험인지 마귀가 집어넣은 체험인지를 어떻게 아느냐? 누구 체험이 표준모델이냐, 라는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회가 있는데 교인이 한 오십 명 되는데 어떤 사람이 목사님 교회에 누가 믿음이 좋습니까, 라고 목사한테 물으면 목사가 갑자기 자가기 믿음 좋다, 안 좋다 하는 기준자로서 나설 수밖에 없지요. 나설 수밖에 없을 때 목사와 믿음이 다른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일단 0순위는 나고, 내가 성령 받았고, 내가 믿음 대빵이고, 표준인물은 나고, 내가 믿음 있다 해야 그 사람 믿음 있다, 라는 절차를 계속해서 이어져나갈 게 분명하지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삼서에 나와요. 요한삼서에 보면 어떤 인물이 나오느냐 하면 꼭 스승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 교회에 스승이 되고자. 요한삼서 1장 9절,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이름이 디오드레베, 이름 듣기도 싫다. 듣기도 싫어요, 보기도 싫어요, 이름이.

꼭 으뜸이 돼야 게임에서 자기가 승자가 되니까 이게 사람에게 쾌감을 주잖아요. 산에도 높은 산에 가야 동네 뒷산 가고 올라갔다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히말라야 8000미터 급 14좌 등정 정도 해야 동상에 손가락 다 날아가야 산 좀 탄다, 이야기할 수 있듯이 사람이 어느 집단이든 어느 모임이든 최고가 되고 싶어 서로들 환장을 했어요. 어느 집단도 그래요.

서예하면 서예도사, 동양화의 도사, 당구 치면 당구의 도사, 낚시하면 낚시의 도사, 바다낚시에 나가면 도사, 개 키우면 개 대통령 있지요. 아이 키우면 오은영 교수, 사자머리 교수 있지요. 어떤 분야든 간에 도사들 많아요. 랩 대회 보세요. 랩 하면 도사들 있고요. 노래 대회 나가면 수천 명 모입니다. 임 영웅이 최고 아닙니까. 일등이란 욕망 이런 게 악마한테 다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묻습니까, 왜 물어요? 내가 어떻다는 것을 늘 뭘 통해서 동의 받는다? 사회 나가서 타인들의 확인절차를 거쳐서 받는다. 바로 이렇게 되게 되면 확인해주는 사람 멀쩡히 있어야 되고 확인받는 내가 있어야 되고, 이 자체가 거세당하지 않은 거예요. 이게 바로 잘려야 될 것, 이걸 절단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피를 흘린 겁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은 표준을 준 적이 없어요. 왜냐? 네가 네 신체와 육신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 거룩을 버텨낼 수 있겠어? 예수님 십자가 진 것 흉내 낼 수 있어요. 아야, 아야 하면서 못 박아서 십자가 질질 끌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필리핀에선 매년 하거든요. 필리핀도 하고 스페인도 하고 남미에 가면 줄줄이 천주교 분위기 가면 이런 것 많이 해요. 고난 받는다고 칠레, 페루 다 그런 짓합니다.

심지어 <미나리>라는 윤여정이 상 받은 영화에 보면 어떤 신앙심이 아주 신실한 사람이 기존 교회는 더럽다고 안 가고 일요일에 뭐하느냐 하면 십자가 지고 그 먼 길을 차 안 타고 끌고 가는 그 장면 나와요. 40년 전에 미국남부의 종교적인 풍토를 그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흉내 낸다고 구원되는 것 없습니다. 모방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뭐냐 하면 19절 봅시다. 오늘로서 마태복음 끝내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바로 여기에 대해서 반대되는 쪽이 뭐냐 하면 아까 봤던 그들이 돈을 주고 예수님이 부활을 안 하고 시체를 제자들이 훔쳤다는 그쪽이에요. 그러니까 시체를 제자들이 훔쳤든 돈을 주고 군병들이 빼돌렸다는 소문이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뭐만 유효합니까? 인간으로서 모방할 수 없고 재편할 수 없는 것, 그것도 그때 한 번 있었던 그 일, 뭡니까?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그걸로 계약 쪽 났어요. 계약 끝났어요. 쪽 나는 게 아니고 계약 완성됐습니다. 계약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 끝 날까지 그 피와 대비가 되고 대적이 되는 피를 반대하는 요소들이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많아지겠습니까, 사그라지겠습니까? 더욱 더 융성하겠지요. 교회를 통해서, 아니 교회 바깥을 통해서. 성령 받지 않은 자들이 그걸 성령 받은 걸 대체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계속 끄집어내겠지요.

그 이야기가 바로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로마서에 나옵니다.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바로 딱 핵심적인 것, 오직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음인데 그 믿음이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이 나온다. 예수님에서 나온 그 믿음만이 우리를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이야기했거든요. 그 말은 인간세계에선 하나마나입니다. 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나는 악하다’를 통해서 나를 근원적으로 악하게 하신 분과 결속되게 성령께서 작용하죠. 성령께선 오직 십자가 피 흘린 이유가 속죄, 죄를 씻어주는 죄가 있는 곳에(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피가 있음으로써 그래서 계약이 성사되기 위해서 필요한 죄, 그 죄로 우리는 그 역할을 맡아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바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겁니다. 언제까지? 이 세상에 자기 역할이 마감될 그때까지 주께서 하셨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그 이야기를 할 때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붙들고 하시는 겁니다. 모든 권세를 주었으니까. 이로서 마태복음 끝났는데 끝난 입장에서 마태복음 1장을 다시 봅시다. 보기 전에 아까 중요한 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부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설을 푸는 것은 계약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뭐 봤다니 뭐 해 같이 빛난다니 아무 의미 없어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은 자기는 부활을 자랑한 게 아니고 뭘 자랑했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한 거예요. 부활을 자랑한 게 아니에요. 삼층천에 올라갔어도 부활을 자랑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만나도 만난 걸 자랑한 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자랑한 거예요. 만약에 부활을 자랑하면 자기 체험을 자랑한 거기 때문에 이거는 자기가 악한 게 아니잖아요. 갑자기 부활을 체험한 괜찮은 사람 됐잖아요. 그러면 계약과 결속이 안 되지요. 자기 자신에 의미를 줘버리면 이거는 거세돼야 되는 당사자니까요.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마태복음 1장에 이렇게 시작했어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세계라 하는 것은 그의 족보란 뜻이에요. 결국 마태복음 1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마지막에 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 형식으로 우리와 함께 있는데 1장 1절에 보니까 처음부터 안 보이는 분으로 오신 게 아니고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분으로 인간 자체로 오셨는데 끝에 보니까 안 보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오류가 있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보이는 분으로 해서 보이지 않게 됐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를 문제 삼아야 돼요? 보이는 나에게 문제 삼아야 될 이유가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내내 그 말씀을 통해서 이래서 나에게 문제가 있구나. 나라는 정신세계와 육체에 문제가 있구나. 그걸 가지고 마태복음 1장부터 다시 보시면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태복음을 보면서 실제로 하나님이 다녀갔음을 새롭게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 때문에 다녀갔는지는 바로 하나님의 계약을 이루기 위해서 다녀갔고 그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음을 이제는 기쁜 소식으로 복음으로 우리 내내 간직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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