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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4 16:59:59 조회 : 294         
신명기 23강(형상과 사랑), 십자가를 아십니까30강(시간의 인격화) 240624 이름 : 이근호(IP:220.89.5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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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80.♡.164.155) 24-06-25 03:35 
대전강의 20240624 주일오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나타남입니다. 그전까지는 눈으로 안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 재림의 취지는, 그동안 줄곧 인간이 승리했다는 겁니다. 인간이 주님에게 계속 승리해온 겁니다.

승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던 취지를 인간들이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필요치 않은 존재에요, 인간세계에서. 인간 자기 생활에서. 예수님은 그다지 소중한 분이 아니고 없어도 되는 분이라는 취지를 끝까지 지속해나가게 되어 있어요. 누가? 인간들이. 인간들이 그러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말씀 안에는 원천이 들어있어요. 처음에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이야기. 인간 쪽에서는 다 잊어버렸죠. 과거지사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 해가지고 지나가니까 잊어버렸는데 주님 쪽에서 안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고 하는 그것을 주님 쪽에서 잊어버리지 않았죠.

주님께서는 원천을 이야기하면서, 악마가 인간세계에 개입했잖아요. 이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인데요. 악마가 개입했던 그 사실에 대해서, 악마도 놀지 않고 쉬지도 않고 악마는 주무시지도 않아요.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해나가고 있는 거예요. 열심히 해나가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한번 악마의 마음이 젖어들었는데 악마 자기가 자기 마음을 취소할 리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이미 자기 사람 된 걸 포기한다든지, 써먹을 대로 써먹었으니까 나는 이제 그만 써먹을래, 이게 아니다 이 말이죠. 악마가 계속해서 자기 취지를 밀어붙이니까 하나님도 거기에 따라서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밀어붙이는데 하나님이 악마가 하는 것에 그냥 방치하고 밀어붙인다는 유일한 증거가 뭐냐 하면 어제 낮 설교에서 첫 번째 나왔던 핵심적 부분인 ‘이스라엘’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아주 특이한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그래서 이스라엘 언급하면서 제가 언급한 게 시편 8편 2절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 힘으로 이긴다는 것. 지금 이 세상에선 마귀가 이겼어요. 마귀가 이겼으니까 인간은 절대로 주님한테 지질 않아요. 항상 이겨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럼 누가 패배한 거예요? 하나님이 패배한 거예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어 어 어? 안 돼, 안 돼. 아악~ 안 돼! 그거 따먹으면 안 되는데…하고, 인간은 으싸! 헤헤거리고 했죠.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한 그 과실을 따먹었다는 말은 잔소리를 따먹은 거예요. 잔소리를. 어디서 우리한테 지적질이야? 그 지적질 자체를 따먹어가지고 이제는 지적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없어진 거예요. 그게 승리에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애들한테 잔소리를 하니까 애들이 두루마리 휴지로 선생님 입을 확 막아버렸다. ‘입 다물라 했죠?’ 하고 입을 막을 때 이건 누가 승리한 거예요? 아동들이 선생님한테 승리한 거죠. 이긴 거예요. 그런데 배후에서 누가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악마가 그런 짓을 시킨 거예요.

그런데 희한하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게 등장했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시편 8편에 의하면 어린아이와 젖먹이임으로 이겼다고 되어있거든요. 권능을 행사해서 이긴 거예요. 대적을 이긴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정신이…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무슨 힘이 있어요?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겐 누가 달려들어도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이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상황이 드디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어나요. 적들하고 마주치니까 적들이 이상하게 패배해요. 이스라엘한테 이방민족들이 패배하는 겁니다. 숫자도 적고 무기도 변변치 않은데 왜 이스라엘이 이기고 적들은 그렇게 패배하느냐?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자체가 오해를 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줬기 때문에 우리를 승리케 했다는 거예요. 이 승리가 주님의 승리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로 자꾸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죠. 들어가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이란 말씀 덩어리. 이스라엘의 특징은 주님이 주신 말씀 안에서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지를 이 이스라엘 덩어리 자체가 두 개를 다 함유하고 포함하고 있다는 거예요.

두 개를 다 포함하고 있어서, 그들은 분명히 승리했으니까-애굽에서 나온 게 승리고 홍해 건넌 게 승리고 적들에게 이겨서 승리죠- 복을 받았잖아요. 이 복이 점차 뭐로 전환되겠습니까? 내부적으로 저주로 전환되는 거예요. 저주로. 그게 제가 언급한 레위기 26장 28절, 29절 보면 앞으로 너희 아버지는 너희 어머니는 너희 자식을 먹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든다. 필히 그렇게 만든다는 거예요. 저주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말씀 안에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전체 인류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민족으로 등장한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을 직접 대면했던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저주받는다는 말은 곧 인간들이 저주받는다는 뜻이에요.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을 하죠. 멸망하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둘로 나뉘어져요. 이걸 다윗 언약이라 했는데 다윗 언약이 되면서 나라, 국가죠, 국가와 말씀과 이게 갈라선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건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거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써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주신 저주와 하나님에 대한 구원이 예수님 안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이 먼저 앞장서서 보여준 거예요.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공통점은 둘 다 언약이 있다는 거예요. 다른 이방민족은 언약이 없어요. 그들은 언약이 없으니까 복이 뭔지 저주가 뭔지 그런 것은 없어요.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잘되고 게으르면 못되고 그뿐이에요.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복이 오고 무조건 저주가 온다는 그 특이성은 이스라엘만이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라엘만이.

그러면 이스라엘은 율법 지키면 될 게 아니냐? 우리 편하게 생각하기를, ‘아니 그들이 율법 지키면 복 받는다며? 그럼 복 받기 위해서 율법 왜 안 지켰어?’ 했는데 그 율법 자체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에요. 율법을 지키려면 어떻게 지키느냐? 관점이 하나님 관점으로 바뀌어져야 지켜져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 자기가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거예요. 나 잘되기를 추구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실컷 율법 지켰는데 와보니까 저주라. 어디서 잘못되었어요, 도대체? 그래서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이 누적되면서 그게 말씀 덩어리로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되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되돌아가고 선악과로 되돌아가서, 분명히 말씀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기대했고 천국을 기대했더니만 결국 지옥을 가게 되는 이 사태, 이 사태가 어느 대목에서 그렇게 된 건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그걸 발견할 수 있어요.

그것은 뭐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자기가 자기 구원을 대처하려고 했던 그것이 잘못이었던 겁니다. 내 구원을 내가 대처해서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이 시도. 내가 말씀 지키면 구원 받겠지. 그럼 말씀 중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 믿으면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것도 포함되어 있겠죠. 어쨌든 간에 말씀은 주어졌고 지키고 안 지키고는 누구 손에 달렸다? 내가 결정하기에 달렸다는 것이 이스라엘 통해서 이미 그것이 실패로 끝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실패니까 구원 받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예수님 안에 저주도 있지만 여기에 뭐도 함축되어 있어요? 복도 함축되어 있어요, 복이. 복이 함축되어 있다고요.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이스라엘에게 준 언약,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공통점이 언약이라 했죠, 언약의 성취자 주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보내서 성취케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성취하실 때는 인간하고 상대하신 게 아닙니다.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 악마와 상대해서 언약을 이뤘던 겁니다.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따라서 악마와 상대하기 때문에 인간들 너희는 여기서 손 떼라. 패스. 너희는 건드리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서 누굴 겨냥하는가? 인간을 통하되 겨냥하는 것은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를 겨냥해서 말씀을 줘버리는 거예요.

악마는 또 비겁해가지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누굴 앞장세우느냐? 인간을 앞장세워버려요. 인간을. 말씀을 주니까 지켜야 된다. 지키면 지킬수록 너는 잘된다. 그런 단체를 제가 뭐라고 했어요? 그런 단체를? 교회. 교회의 특징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에요. 인간과 인간의 만남.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교회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드러내요. 남한테 미움 받기는 싫어요. 그리고 남으로 인해 억울함 당하는 것도 싫어요. 그리고 남한테 인정 못 받는 것도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를 누가 다 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혼자 다 겪었어요.

이게 싫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나를 지켜줘야 좋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인데 나를 안 지켜준다는 것은 나쁜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을 난 선택하지 않겠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테니까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걸 지켜 달라. 이런 주고받는 거래가 형성되는 곳이 교회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악마를 겨냥하는 거예요. 악마를 겨냥하기 때문에 악마를 겨냥할 땐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을 다시 봅시다.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여기서 인간들이 주저 없이 내세우는 게 뭐냐? 우리에게 왕을 달라. 왕을 달라. 이방나라에 다 왕이 있듯이 우리에게 왕을 달라.

왕이라 하는 것은 권위성이에요. 권위성. 하나의 권위성 아래 마음을 하나로 할 때 우리는 힘을 집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안정적인 이스라엘 되고 그 속에서 우리 정서도 마음도 안정을 얻겠다는 거예요.

그럼 이 왕, 왕을 원할 때 이미 하나님 언약과는 헤어졌어요. 헤어지면서 이 왕을 공격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누굽니까? 선지자. 선지자 등장하면 똑같은 원칙이 작용돼요. 선지자가 이기겠어요, 그 당시 왕이 이기겠습니까? 왕. 왕이 이겨요. 선지자는 죽어요. (선지자는) 계속 죽어나가면서 (인간은) 계속 이겨나가요. 인간에게 희망을 걸고 계속 나갑니다.

쭉쭉 계속 나가면서 그들은 희망적인 메시아까지 나가요. 희망적인 메시아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을 좌절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좌절시켰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에,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이 예수님의 발언이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어요.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예수님 앞에 등장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속성이라 하는 것은 이미 악마가 넣어줬기 때문에 내 속성을 내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마귀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냥 가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을 죽이고 선지자 죽이고 사도 바울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어디까지 죽이는가?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계속 그들은 승리하고 또 승리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재림을 주신 이유가, 너희들이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줬건만 왜 실패를 안 하나 이 말입니다. 하나님 뜻은. 그 많은 실패의 기회를 줬잖아. 그러니까 성도들한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실패의 기회를 성도한텐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도 인간이기 때문에 눈만 뜨면 이걸 생각해요. 목표, 목적, 기대, 희망, 소망. 이거 생각하는 거예요. 계속 이거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이걸 좌절시킨다고요. 이걸 좌절시키니까, 자신들은 목표, 목적이 있어야 자신들은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데, 이 세상 자체가 승리자 그룹이 되어야 되거든요,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데 좌절시키니까 결국 인간에게서 나오는 말은 뭐냐 하면 ‘이러려면 나 성경 안 볼래.’

그럴 때 주의 뜻은 뭡니까? 박수 짝짝짝. 그 마음이 바로 본래 네 마음이다 이 말이죠. 네 마음. 그 마음이에요. 여기서 요약 끝내도 괜찮겠죠? 그 마음이에요. 말씀을 주는 것은 사람들이 절대로 말씀을 안 본다는 것을 발각시키고 노출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 지킨다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죠. 말씀이 와서 우리를 전부다 해리시켜요. 그래서 경상도 사람 외에는 못 알아듣는 말을 했죠. 신기. 신기 알아요? 신기? 도시락 반찬에 해초 있잖아요, 해초. 짭쪼름해서 실 같은 해초. 파래. 옛날엔 파래를 도시락 반찬으로 썼다니까요. 이걸 하나하나 째는 거예요. 찢어서 밥하고 같이 먹어요. 짭쪼름해서. 옛날엔 돈이 없어서 그런 거 먹었어요. 이걸 하나하나씩 찢는 거예요. 쥐포 찢듯이 해리시키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죠. 추억의 책장을 넘기고 거기다 책갈피해서 낙엽 다 집어넣는 거. 말씀이 뭐냐? 뒤돌아보면서 하나하나 째는 겁니다. 이런 것도 네가 선악과 따먹은 결과야. 이것도 선악과 따먹은 결과야. 말씀은 원천이니까 그걸 하나하나 다 째는 겁니다.

째버리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해리, 해체시키면서 우리가 예수의 증인돼요. 나의 구원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어제 결론이었습니다. 나의 구원의 증인, 나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 구원의 증인. 이겁니다.
 김혜근(IP:211.♡.135.13) 24-06-25 05:30 
대전-신명기(23강)신10:12(형상과 사랑)20240624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10장 12절부터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이렇게 시작하죠. 오늘 강의 시작은 천국의 조건입니다.

<천국의 조건> 조건은 인간이 정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정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정합니다. 이 조건에 대해서 하나님도 구애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조건에 맞추어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이 조건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게, 제안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 조건에 대해서 낯설어요. 상당히 낯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낯설지 않아요.

왜냐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천국의 조건을 설정했기 때문에 낯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천국의 조건을 누가 이루느냐 하면은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이 이 조건을 이루십니다. 조건을 이루려면 조건에 필요한 환경이라는 조건이 또 필요해요. 이 조건이라는 결과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환경 자체가 마련되어야 되거든요.

그 환경으로 끌려 들어온 자들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역사를 구성하는 민족>이에요. 역사인데, 없는 역사예요. 없는 역사를 구성하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시간이죠. 없는 시간을 새로 구성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뭐냐, 장차 구원받을 수 있느냐, 장차 구원받느냐?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 구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서만 나타나지,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이라는 말을 끄집어낼 자격이 없어요.

이걸 뭐라 하냐 하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 천국에는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돼 있어요.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선택받은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그 다음에 뭐라고 하냐 하면, “만민 중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여기서 만민과 이스라엘을 구분합니다. 만민은 아니에요. 만민은 관계자 외에요, 천국에 대해서.  그럼 만민들이 뭘 갖고 있는가? 시간 개념을 갖고 있어요. 지금 구원 받을까, 아니면 죽어서 구원받는가? 나중에 구원받는가? 지금 미리 구원 받았는가? 미리 구원 받았다면 나중에 구원 받을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여러 가지 논리가 등장하는데, 그건 만민들의 아이디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구원이란 것을 생각 안 해요.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한대요. 구원은 하나님의 관심사지, 이스라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구원 때문에 죽을 뻔해요. 맨날 죽어 나가는 거예요.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굴어?” 장이수가 아까 이야기 했다 했죠.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굴어?

자, 범죄도시 1,2,3,4,에서 범죄자 잡는 것은 장이수가 잡아요, 마동석이 잡습니까? 마동석이라는 형사가 잡잖아요. 그런데 형사가 제 일을 하면 되는데, 맨날 누구 찾아와요? 장이수한테 와서 “야, 너 오늘 필요해.” 하면, “왜 자꾸 못살게 굴어?” “안 해? 안하면 이리 와. 벌 줘야 되겠어.” 이러면서.

장이수라는 조연은 자기 나름대로의 일이 있어요. 일이 있는데 마동석은 형사 자기 일을 가지고 왜 자꾸 나한테 찾아 오냐 이 말이죠, 자기 일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꾸 찾아오니까 구원이 자기 일인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그때부터 사달난 겁니다. 자기가 마치 관계자 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한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 이야기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 이야기예요. 예수님은 나중에 신약에 오죠. 지금 우리는 신명기를 보기 때문에 예수님은 빠집니다. 예수님 대신 주의 이름이 들어가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의 특징이 뭐냐? 형상이 없다는 거예요, 형상이 없다.

주의 이름이 형상 없이 이스라엘과 함께,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함께 했다는 말은, 모든 이방민족이 왜 천국과는 관계자 외인가? 그들은 형상을 가진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래요. 형상, 형상이란 말은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형상의 시작은 뭐냐? 거울 보면 누구의 형상이 있죠? 나죠.

그래서 모든 인간들의 우상은 ‘나를 신으로 만드는 중간과정’에 들어갑니다. 나를 신으로, 나를 형상화 시키는 거예요. 형상은 히브리어로 첼렘(צלם)이라고 하는데, 형상은 눈에 보이죠. 보이는데, 본인이 본인의 형상을 보는 것은 거울에 비치는 건데요. 사실은 그런 점이 좀 어려운데, 형상은 내가 보는 게 아니에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상이에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러면 내가 아는 형상은 남들이 나를 보고 평가 내린 것들의 수집이 나의 형상이에요. 누군가 나에 대해서 뭔가 평을 해주고, 너는 이런 사람이라고 해줘야 우리는 그걸 가져다가 내 형상으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어릴 때부터 부모가 아이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아이의 자아의식은 가까운 부모가 이야기하는 대로 자기가 그렇게 억지 부리면서 구성해 나가는 거예요. 상당히 억지에요, 억지. 그래서 친구라는 영화에 보면 담임 선생님이 조폭 아들 붙들고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뭐라 합니까? “너 왜 행동 이렇게 해?” 라고 묻는 게 아니죠.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이렇게 묻죠.

너를 이런 행동을 해도 그걸 잘했다고 하는 느그 아부지가 도대체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에 이런 행동이 용납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너를 규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야. 너를 키워준 네 부모가 규정한 것이 그대로 너의 형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형상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게 없죠.

형상이 뭐냐? 태도, 행위, 마음가짐, 이게 형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 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고 난 뒤에 뭘 만들죠. 신을 만든단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때 70만 이스라엘의 일부라 생각하고, 모세가 말도 안하고 후다닥 산 위로 갔다고 칩시다. 여러분들도 거기에 섞여 있습니다. 각자 제안을 하는 거예요.

여호와라는 신을 우리가 믿고 왔는데, 여호와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각자 의견을 한 번 내보자 할 때, 여러분은 무슨 의견을 내시겠습니까? 어떤 의견을 내겠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 때, 우리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느냐 이 말입니다. 피조세계에서, 가까운 피조세계에서 아이디어를 얻겠죠.

그 피조세계가 한 둘입니까? 어디서 얻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손들고 “예, 우리 하나님은 용감합니다.” 그러면 아론이 듣고 ‘첫 번째 요건이 용감하다.’ “또 없습니까?” “자비롭다.” “오케이,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자비롭다.” “튼튼하다.” 어떤 사람은 “귀하다.” 튼튼하다, 귀하다, 용맹하다, 자비롭다, 네 가지 요소를 다 합치면 뭐가 됩니까?

귀하기 때문에 뭐로 만들어야 돼요? 나무로 만들어야 돼요? 아니죠. 금으로 만들죠. 돌진한다, 이건 뭐 거침없는 소지요. 튼튼하다, 소. 그리고, 소는 뭡니까? 인간이 부리는 대로, 하라는 대로 잘 따르잖아요. 자비롭고 어질죠. 그 네 가지의 형상을 조립해서 나온 게 뭐였다? 황소. 그런데 이것이 그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이미 애굽에서 황소를 섬겼어요. 황소를 신으로 섬겼다고요.

왜 애굽에서 사람들이 신을 섬겼느냐 하면, 신을 섬겨야 인간의 말을 듣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인간은 궁금하다. 뭐가? 내가 궁금하다.> 내가 궁금한 거예요. 네가 왜 궁금하냐? <나는 나에게 신>인데, 절대 신이거든요. 나는 나에게 신인데, 최고의 가치가 있어요.

신인데, 이걸 형상화 시킬 때, 신인데 그 신하고 나하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마주해서.  중이 부처상을 만듭니다. 부처상을 만들고 그 부처를 가만히 놔둡니까? 안 그러면 늘 대화합니까? 새벽부터 촛불 켜고 염불하면서 대화하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가 필요한 거예요. 부처가.

원래 싯다르타, 원래 최초의 불교는 그런 거 하지 마라 했거든요. 왜 하지 마라 하나? 나는 내 안의 내면의 나와 대화하면 되지, 그딴 거 필요 없다 했는데, 그건 도가 튼 부처나 가능하지, 이건 쪽수를 모으려니까 이게 쪽수가 안 되는 거예요. 도 닦는 것도 뭐 이게 몇 명 중에 한명도 안 되니까. 교인수가 얼마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면에 있는 내 신을 고상하고, 착하고, 어질고, 위대하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을 뭐 하나 형상화해서 그걸 모양을 만들어서 앞에 놓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대화하기가 무척 쉬워요. 집에서 혼자 앉아서, 누워서 하는 것보다 절에 가서 108배하면서 하는 것이 훨씬 마음에 안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내용을 꽉 압축을 해보면 남는 것은 뭐냐? ‘그래, 내가 신이야.’ 이거에요.

내가 신이라는 그 자기 확인, 자기 증명을 하면서, 그 높고 험한 절에 가서 내려오면서는 룰루랄라 노래 부르면서 내려오는 거예요. 요새는 자가용 타고 내려오지만. 그 불교 하고 기독교 하고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똑같아요. 이게 똑같아요. 천주교에도 묵주 땡기면서, 묵주 없이 기도하면 안 되잖아요.

안방에 보면 마리아상 있잖아요. 마리아상 있는 것하고 없는 것하고 천지차이에요. 촛불은 없어요, 요즘. 화재 나서 아파트 홀랑 다 탈 수가 있다고.  묵주 땡기잖아요. 땡기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기도는 뭐다? 호흡이다. 기도를 하면 숨이 막혀 숨을 못 쉴 정도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 버티기’ 거든요.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예요.

따라서 세상이 나를 안 알아줘도 누구는 알아줘야 돼요? 내가 나를 알아줘야 내가 그나마 하루하루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는 호흡인가? 뒤를 높여서 제가 물었어요. 호흡이라고 말 안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그렇게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형상화 시키는 겁니다.

우상이 형상화되는 방식을,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한 번 적어볼게요. <예언자> 구약의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엄청 많았어요. 선지자 학교 있어가지고, 예언자 양성소가 있어가지고, 엘리야, 엘리사부터 굉장히 많았습니다. 일종의 공무원들이에요. 시험 쳐서 합격하면 나라에서 정기적으로 보너스 나오고, 월급 나와요. 그래서 예언자 되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시인> 그리스에서는 예언하는 사람들이 시인이었어요. 옛날 그리스. 그 시인을 보좌하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주로 <신탁, 점쟁이, 우상숭배, 영매, 점성가, 계시 받은 성자> 계시 받은 성자는 스페인에 많이 있어요. 그래서 스페인이 중세 때부터 관광산업이 발달했어요.

왜냐하면, 동유럽에 있는 사람이 스테판 성자부터 해서 예수님 제자부터 해서 죽은 자들이 스데반 집사도 거기서 죽었다, 처음엔 이렇게 하다가 열 두 제자의 유골을 유명한 교회가 그걸 수입 해다가 각 교회에다 그걸 안치를 해요. 돈 많이 주고 사요.

돈 주고 사게 되면, 그 지역에 있는 체코나 헝가리, 오스트리아의 그 큰 예배당, 성당에 그 지역의 신자들이 이 영험한, 그러니까 절에서 부처의 사리를 분배, 할당 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부터 해서 쫙 해놓으면, 특히 그런 거 하면, 나중에 예배당 짓고 나면 운영비가 빠져요. 귀족들이 그걸 원했다고요.

특히 그 유명한 성자들을 옹립한 이유가 성자들을 옹립해야 성자들을 중심으로 예배당이 계속 세워지는 거예요. 그게 많은 데가 바로 스페인 순례 코스가 됐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스페인이 관광산업 하는 거예요. 거기에 한 번씩 갔다 와야 신앙이 좋아지는 거예요. 지금 이슬람 성지순례 하다가 1200명 죽었는데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 갔다 오는 것처럼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그들이 또 계시를 했거든요. 계사 받은 성자. 그 다음에 <귀신들림, 타로 카드, 위저보드> 위저보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17세기에 나온 널빤지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는 널빤지, 없는데 글씨가 막 나오는 것, 그게 아니고 Yes냐 No냐 써놓고 알아서하는 거예요. 서양에서는 많이 해요.

그 다음에 <교주>신천지 같은 교주, 위저보드는 어디서 많이 하느냐? 심령 대회용,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들이 테이블 하나 놓고 여자 마법사 비슷하게 복장 차려놓고 ‘여기 지금 신이 임하십니다.’ 여자 머리에는 옛날 할머니들 쓰는 것 비슷한 모자 하나 쓰고 ‘신이 여기 임하십니다.’ 하면, 갑자기 진동이 일어나요. 그러면서 덜덜 떠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건 지금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페요테> 페요테는 멕시코 서쪽에, 남미 쪽에서 하는 건데, 마시면 취해버리는 이상한, 사람이 뿅 가게 만드는 음료, 술 같은 거, 최음제 같은 거, 사람이 정신적으로 취해버리는 그런 거. 그러면 뭐가 나오겠어요? 환상이 나오겠죠, 환상.

이것은 바로 사울 왕이 엔돌의 무당한테 갔을 때에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사울왕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왕인데, 정확하게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지금 계속해서 왕인지, 아니면 내가 왕 그만둬야 되는지, 지금 내 위치가, 상황이 어떤지 모를 때는 그냥 하나님께 물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누구를 거쳐서 묻는다는 거예요.

누구를 거쳐서 묻는가? 누구를 거쳤든 그게 아무 소용없이 나는 뭡니까? 나는 내가 궁금한 거예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서 궁금한 게 아니고 내가 신인데, 이미 전제는 깔렸어요. 내가 절대자인데, 내 판단은 옳은데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옳고, 의롭고, 거룩한데, 그리고 정확한데, 과연 그런지를 뒤풀이 하듯이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자들은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귀신 들린 자예요, 인간 자체가.  본인 자체가 귀신 들린 거예요. 귀신 들린 자가 귀신 들린 자를 찾고 있는 거예요. 이런 자들 속에 뭐가 들어 가냐 하면, 이스라엘이 드디어 거기를 통과하는 거예요. 발람 선지자 통과하듯이 그걸 통과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통과 시키는가? 차이점을 보는 거예요.

어떤 차이점? 인간 세계는 본인들이 신이에요.  이걸 보통 우상숭배라 하잖아요. 우상숭배라 하는 것은 이거에요. 바로 <소유욕>입니다. 소유가 있어야 자기 존재성이 구축이 돼요, 소유가 있어야.  내가 어디까지 배웠고, 어느 대학 나왔고, 애는 몇 명이고, 내가 돈은 얼마 있고, 몸은 건강하고.. 뭔가 내게 속한 내 것이란 게 있어야 내 존재가 확립이 된다니까, 내 존재가. 

그러면 내 것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이게 바로 인간의 시간론이에요, 시간론. 인간의 시간론. 과거부터 내가 애쓰고 노력한 게 축적이 되어서 그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되면 지금 나의 존재는 절대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있기까지 고생을 지독스럽게도 많이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우상화>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방 민족이 전부다 나의 우상화가 되지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신명기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한 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냐 하면, “나를 사랑하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돼 있죠. 이 사랑이라는 말의 반대가 뭐냐 하면, 우상숭배예요.

우상숭배에 뭐도 포함돼 있다? 나의 소유도 포함돼 있다. 나의 존재도 포함되지요. 왜? 내가 신이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딱 나와 있어요. 사랑이란, 나를 미워하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것. (요12: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넌 아니야. 너 아니야.” “하나님 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너 아니야. 너는 관계자가 아니라 출입 금지야. 너는 안 돼.” “제가 어떻게 하면 성령 받겠습니까?” “너 아니야.” “어떻게 하면 말씀 지킵니까?” “너 못 지켜. 너 아니야.”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겁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나왔는데, 없다는 말을 더 정확히 하면, 저주 가운데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그게 ‘겨우’입니다. 어디 나오냐 하면, 22절에 나와요. 신명기 10장 22절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하늘의 별 같다는 뭐가 생각나죠? 창세기15장 생각나죠.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미 나이도 많고, 자식 낳을 수 없어요. 자기 부인도 나이가 많았어요. 나이가 많다 정도가 아니고 아예 태가 죽었어요. 로마서 4장에 의하면 태가 죽었어요. 아기를 못 낳는다는 것을 충분히 다 했습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시간은 끝이 났어요.

나는 누구냐? “너 죽은 자야. 너 죽은 자야. 그렇게 궁금해?”  “궁금합니다.”  “너 죽었어.” 이거에요. 내가 죽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언약을 경유해서 하나님께 오도록 하나님 쪽에서 조치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가서 믿게 하는데, ‘믿습니다!’ 한다고 믿음이 아니고, 언약 속에 기어들어올 수 있는가? 이걸 묻는 거예요.

언약 속에 들어오면 믿음이고, 그 언약 속에 못 들어오면 믿음이 아니에요. 이 언약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형상입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 15절에 나와요.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이런 이야기는 이미 인간들이 자기가 우상화 시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형상을 눈에 보이는 식으로 자기 형상을 하나 만들어 놓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그냥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일단 머릿속에 상상해서 이미지를 그려 놓고, 뭐 수염이 났든 안 났든, 키가 몇이든 그런 게 있잖아요.

예수님을 흉측하게 상상하는 사람은 없어요. 대부분 예수님의 형상은 송중기, 그 다음에 우리나라 유명한 이병헌, 현빈 같은 잘생긴 남자, 꿈에라도 한 번 사귀고 싶은 남자, 그런 것들보다 더 잘생긴 모습, 그게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모든 인간의 상상하는 형상은 자기가 너무 마음에 드는 자기하고 해야 그게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뭐냐? 인간은 이미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요. 누구냐? 나는 나를 믿고, 나는 나를 소망하고,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해 놓고 오늘 신명기 10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런데 아까 언급했듯이 하나님 쪽에서 내민 형상은 언약이라 했죠. 그런데, 언약은 그야말로 약속이에요. 형상,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아직 신약이 아니니까, 예수님이 아니니까, <태도, 행위, 활동>으로 바꾸십니다. 형상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요.

이게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형상 나오죠?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완전히 십계명 지키는 것 하고 완전히 상관없죠.

네가 십계명 지키나, 안지키나 상관없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준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태도와 행위와 활동입니다. 그 대상은 있어요, 없어요? 대상은 없어요. 인간 중에는 없어요. 인간 중에는 하나님이 긍휼과 은혜 줄 자가 없습니다. 없는데, 주께서 언약을 가지고 만들어가요.

그러면 그 언약의 대상은 언약 속에 들어있다고 보면 돼요. 하나님의 언약 속에 언약이 들어 있는 거예요. 계란 속에 닭 있죠. 닭이 나오죠. 언약 안에 예수님 들어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주의 이름을 지상에 보내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과 대화하는 그 관계가 언약이에요.

그 이름이 나중에 형상화되기 위해서 차용된, 동원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가만있는데 덤으로 어떤 혜택을 입느냐 하면, 긍휼과 은혜를 입어버려요. 자기 안에 들어있는 그 무엇, 미지의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혜와 긍휼을 그들은 덩달아 받게 된 겁니다.

그것이 약간의 동물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출애굽 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출애굽이 새로운, 이건 참 어려운데..이건 두 번째 시간에 하고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그건 어려운 거고, 그게 여호와의 밤이거든요. 이제는 유월절 날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캘린더 새로 제작해요. 그 날이 첫날이에요.

그러면 시작이 언약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일이 그 전에 출애굽 이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창세기 46장 27절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 신명기에 나왔던 70명이 그 70명입니다.

근데 신명기에서는 앞에 부사로 뭐가 붙었죠? “겨우” 70명이었다. 그러니까, 70명 가지고 뭘 하겠다는 말이냐? 그러나 70명이지만 하나님의 태도와 긍휼과 자비, 그걸 보란 말이죠. 70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으니까 하늘의 별 같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하늘의 별과 같이.

그러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졌으면, 언약이 투입돼서 별과 같이 많아졌으면, 이 70명 자체가 언약의 취지를 잊어버려선 안 되죠.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이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그 태도는 뭐냐?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거예요.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니까 어떻습니까?

이거는 이스라엘이 뭘 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이만큼 된 거죠.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창세기 47장의 요셉까지 이어집니다. 아브라함 동원 시키고, 이삭 동원시키고, 야곱 동원시키고, 요셉 동원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기 형상이 집단화 될 때, 그러한 취지가 계속 살아있는 집단은 어떤 집단인가를 주께서 일을 개시를 한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형상과 대화하고 싶다, 자기 아들과 대화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출4: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자,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 보기에는 윤리, 도덕처럼 들리죠.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런데 그것은 그전의 십계명에 의하면 “우상숭배하지 말라” 와 통하는 거예요. 적어볼게요 <하나님을 사랑하라=우상숭배 하지 말라> 둘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게 뭐에요? 요건 응용문제인데 맞춰보세요. ’이웃을 사랑하라‘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찾아야죠. 이게 뭐냐 하면, <진멸>이에요. 다 죽여 버리는 거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이웃을 다 죽이는 거예요. 이웃만 남기고 다 죽이는 거예요. 관계자 외에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신명기 10장 18절 19절을 보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뭐 되었다?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출애굽의 취지를 잃어버리면,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출애굽은 그 때 유월절 날, 홍해 건너온 날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to be continued 계속 출애굽이 이어지는 거예요. 출애굽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출애굽이 이어진다는 것은 분리, 천국의 관계자와 관계자 외를 계속해서 주께서 지금도 둘을 가름하고 계시는 거예요.

구분하고 계시는 작업이 지금도 쉬지 않는 거예요. 출애굽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구원이냐, 출애굽에서 구원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게.  구원이란, 출애굽하고 같은 말이에요. <출애굽이란, 언약이 없는 자에게 언약을 집어넣는 작업>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게 출애굽이에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은 안에 출렁출렁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출애굽 취지가 들어있는 거예요, 출애굽 취지가.  우리는 내가 우상이었는데, 죽어 마땅한데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내 안에 들어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출렁출렁 들어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풍선에다 물을 반만 넣어보세요. 반 넣고 난 뒤에 풍선 주고받고 하면 뭡니까? 이게 출렁출렁 덜렁덜렁 하면서 주고받죠.

성도가 그런 거예요 성도 안에 출애굽 정신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정말 율법사가 질문할 만 해요.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굽니까?” 라는 질문으로 바뀌었잖아요. 그 바뀐 질문을 한 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요.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씀에 대해서 율법사가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고 한 거예요.

지금 이 율법사의 잘못은 뭐냐 하면, 본인이 우상숭배자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나온 질문입니다. 지금 내가 나+율법을 지키면 나는 구원받는다는 공식을 고집하고 있어요. 이걸 고수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니까. 이거는 너무 당연하니까, 이건 뭐 하자나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위치를 바꿔요.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으로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나오는 이웃은 이렇다 로 답변해요. 이미 율법을 완성한 나에게서 나오는, 이웃을 사랑하라의 완성체인 나가 내놓을 수 있는 이웃은 어떤 태도와 어떤 행위와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나 이 율법사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남들의 평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좋게 평가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질문을 한 거예요. “나 구원 받은 사람 맞죠? 율법 지킨 사람 맞죠, 그쵸?” 그걸 염두에 두고 질문을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위치 조정을 하는 겁니다. 너 말고, 율법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니까, “너 말고, 네가 다룰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내가 할 것이다.” 라고 내놓은 예가 뭐냐, 바로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는 거예요.

강도 만난 사람이 이웃입니까? 아니죠. 이웃이라 하는 것은 그 관계망 자체에서 이웃이 나와야 되죠. 한 쪽은 어떤 역할을 하냐 하면,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역할을 해야 돼요. 그 역할. 또 한 쪽은 뭐냐? 강도 만난 사람 보고 그냥 지나간 두 사람 등장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그냥 내가 강도 만난 사람이다 하면 간단할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해요, 복잡하게. 위치가 바뀌기 때문에. 그럴 때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제사장, 레위인의 바로 그러한 태도, 결정에서 우리가 못 벗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돼요, 염두에 둬야 돼요.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그냥 지나갑니다.

“그 선한 사마리아인 있지 않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인간은 없어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들도 선한 사마리아인을 흉내 낼 수는 있어요. 내가 목산데, “지난 주일에 선한 사마리아인 설교 해놓고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만나게 했구나. 바로 내가 도와줄 이때를 위함이다.” 하면서...이건 뭐를 전제로 한 거예요?

내가 궁금한 거예요, 내가.  우리는 내가 궁금하면 안돼요. 나는 이미 끝났어요. 나는 애기 못 낳아요. 이미 사래에요. 사라도 아니고, 사래에요. 이미 끝났어요. 애기 못 낳아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 형상에 미쳐있는데 뭘 해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주께서는 여기서 주께서 일을 벌여서 긍휼과 은혜를 여기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은혜와 긍휼을 만들어내는 현장, 그 공장, 현장 용도로 우리는 쓰일 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내 배 째세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배 쨌나?” “배 쨌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너에게 습격할 거야. 선한 사마리아인이 습격할 거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상하게 자기에 대해서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특징이. 

심지어 자기 소유까지 줘버려요. 자기 소유가 있어야 존재가 되는데, 소유를 넘겨줬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에 대해서 포기한 거예요. 이거는 자기 미움, 자기가 너무너무 미울 때나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게.  자기 자신이 미울 때. ’나 고만 살래.‘ 이럴 경우에나 가능하다 이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형상, 아까 언약이라 했죠. 언약이 들어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형상이 들어있는 자와 들어있지 않은 자한테, 통해서 주님께서 성도한테 형상을 줌으로써 계속 출애굽의 그 갈라짐, 애굽인이냐, 이스라엘이냐는 그 갈라지는 작업을 계속해서 지금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하고 대화하거나 말을 할 때에, 이러한 모습이 계속 나와요. 다시 한 번 질문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이 뭡니까? 바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진멸당해야 마땅함을, 평소에 뭘 해도 그게 나오면 돼요. 수박 먹을 때도 “진멸 당하게 좀 먹어볼까? 뭐, 진멸당해도 마땅한데 오늘도 뭔들 못해?”

진멸 is 뭔들. 진멸 당해야 마땅한데 뭔들 못해? 그게 뭐 말로 나오는 게 아니고 평소에 행동으로 나오도록 배후의 성령께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사랑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일체 피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일체 해주지 않는 거예요.

“진멸 당할 것이 어디서 이게 배불러 가지고 뭘 달래? 진멸 당할게?” “엄마, 사탕 500원” “진멸 당할 것이!” “엄마 계란 삶아줘” “진멸 당할 게 어디 계란을 삶아 달래?” 애가 삐져 있으니까 “옛다, 계란 삶은 거.” “엄마, 계란 삶았네~” “감사함으로 받아라.”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 아는 그것, 그것은 바로 이웃사랑으로 주어진 주님의 복입니다. 그래서 여기 13절에 ’행복‘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냥 복이에요. “하나님께서 네게 복 준다.” 관계자에게만 복을 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는 사람.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이 세상은 전부 우상 천지다.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과정을 제가 복잡해서 설명을 안했는데, 과정까지 포함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신이 되는 그 과정에 자기 공고히 함의 절차를 반드시 거치게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자폐증 증상을 보이는 겁니다.

계속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요, 계속. 그 안에서는 자기만 있으면 돼요. 자기와의 대화. 모든 대화를 단절하고, 자기 공고화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요? 점점 더 딱딱해지겠죠, 자기가.  자아의 고체화. 자기가 액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니고, 고체화.  딱딱해지는 거예요. 자기가 딱딱해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백화점의 고급 가방이나 옷을 사면서 그걸 실제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눈으로, 좋은 가방 사면서 내가 이 가방을 가질 만 한 자격이 돼. 내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야. 내가 나한테 주는 보너스야. 이런 작업에 들어가요. 이게 오늘날 2,30대에요. 40대는 애 낳아서 안돼요. 애 낳으면 끝났어. 2,30대 결혼 안 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회 전체가 이런 식으로 변화되고 있어요.

자기한테 축하하고, 자기한테 친절하고, 그래서 자기가 점점 더 고정화되는 거예요, 딱딱해지는 거예요. 직장에서 이렇게 못한다 하면 직장 때려치워 버려요. 직장 때려 치우고 뭐 유튜브 한다고 하고 돌아 댕기고, 하여간 자기 세계로 매몰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확인하는 거예요. 나는 뭐든지 내가 판단해서 내가 알아서 하는 거 맞지? 맞지? 본인이 계속 판단하는 거예요. 본인 자체가 이미 신이고, 우상이 된 시대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그들에게 해 줄 상담은 간단해요. “너는 이 상태가 이미 죽은 거다.” 이게 바로 죽은 상태다. 인간은 이미 죽었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너한테 임해야, 네가 되는 게 아니고, 네 속에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 너는 이제는 그 은혜를 증거 하는,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더 이상 나의 증거는 포기되고, ’주님이 나를 살렸다‘를 증거 하는 증인 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하림(IP:180.♡.164.155) 24-06-25 10:49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9강) 시편19:2(시간의 인격화) 20240624b(강의: 이근호 목사)


【십자가와 주일 성수】p.114할 차례입니다. 십자가와 주일 성수, 무슨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죠. ‘십자가’라 하는 것은 사건이고 ‘주일’이라 하는 것은 시간에 관한 것이고요. ‘성수(聖守)’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 관한 건데 이 세 개가 서로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죠. 그래서 이 세 개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락이 있는 겁니다.

‘주일을 성수한다’ 이게 말이 안되는 게요. 주일은 시간에 관한 거죠. 시간을 우리가 성수한다? 시간이 웃겠어요. 무슨 시간이 인간에게 놀아나요. 뭐 우리가 여호수아입니까? ‘해야, 잠시 멈춰줄래?’ 뭐 이게 가능해요? 안되죠. 우리 인간이 시간을 따라가는 거지, 시간이 인간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The sound of silence’ 유명한 노래 있죠(1964년, 미국 2인조 그룹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시편 19편에 나온 것.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이 세상은 만물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거예요. 시편 19편에. 침묵의 소리란 뜻을 가져요. 침묵의 소리. 시편 19편 이왕 나왔으니까 한번 보시면 이래요. 이게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낮과 날과 밤과 하늘과 이 세상의 모든 궁창은 사람이 납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고, 하나님의 활동을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세상 만물이다 이 말이죠. 인간 너 자신의 행동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기 위함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런 행동을 인간이 방해하고 있더라 이 말입니다. 인간은 나름대로의 행동을 하고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고집부리고 있는 거예요. 왜 오늘은 바람이 부냐, 태풍이 오냐, 미세먼지는 많으냐. 인간이 그걸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되는 거예요.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이걸 시각으로 측정하는데 그 시간에 대해서 인간이 놀아날 뿐이지, 어떻게 잘 거기에 적응하려고 애쓸 뿐이지, 시간을 내가 내 손에 휘어잡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의 일종이라 이 말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종이다. 자연의 부분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 이 자연이 무너지면 인간도 같이 무너진다. 같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세상이 끝나면 인간도 같이 끝나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에 종속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자연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자연에 종속되지 않는다. 갈릴리 바다가 막 난리를 치고 열두 제자와 예수님을 잡으려고 넘실댈 때 예수님께서 “잠잠해라! 조용히 해.” 하니까 바람과 바다도 잔잔해졌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 8:26)

온난화 문제도 예수님이 꾸짖으면 온난화가 해결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꾸짖을 마음이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진멸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다 없애버리는 게 사랑이기 때문에 온난화에 대해서 주께서 전혀 손댈 마음이 없습니다.

이처럼 서열화를 분명히 해야 돼요. 계급화. 누가 위에 있고 누가 밑에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돼요. 자연 밑에 인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됩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잖아요. 흙의 운명이라는 거, 그거 뻔하죠. 흙에 속하였으니까 운명도 같이 휩쓸려가는 거예요.

따라서 ‘시간이 인간을 지배한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은 시간 밑에서 그냥 겨우겨우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걸 지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게 바로 안식일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안식일 때문에.

안식일은 시간을 접어요. 시간을 7일 단위로 접은 거예요. 시간이 이렇게 길게 있다면 이걸 일곱 단위로 접기한 거예요. 차곡차곡 메모지 접듯이 접어버린 거예요. 일월화수목금토까지.
1,2,3,4,5,6,7에서 다시
1,2,3,4,5,6,7. 8이 없어요. 다시
1,2,3,4,5,6,7.
이렇게 7일을 정했단 말이죠. 이걸 누가 정했어요? 안식일은 누가 만들었죠?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러니까 ‘시간 위에 숫자 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숫자 위에 하나님 계시다. ‘하나님은 숫자를 통해서 시간을 다스린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에 대해서 인간도 나름대로의 숫자를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 문화에서 숫자, 상형문자, 이렇게 문자가 처음 만들어질 때 숫자나 언어가 만들어진 이유가 남아도는 물자를 계산하기 위해서 언어를 만든 거예요. 소유와 관련되어 있어요.

이번에 밀을 얼마나 생산했더라? 이번에 과수를 했는데 과일이 몇 개 달렸지? 이걸 기억해야 도둑놈이 훔쳐가도 몇 개 남았는지를 알 수 있잖아요. 남아도는 잉여 물자에 대해서 하나둘씩 카운트하는 거예요. 카운트한다는 말은 물건하고 숫자 하나하나를 대응해서 숫자로 바꾸는 겁니다.

하나하나 숫자로 바꾸어서 남아도는 것은 다른 사람의 또 다른 상품, 제품과 교환하기 위해서 숫자가 그다음부터는 번창하기 시작했죠. 그게 영수증이라는 거예요, 영수증. 최초의 언어는 영수증이에요. 물건 받아놓고 물건 안 줬다고 우기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영수증은 약속입니다.

상인들끼리 영수증 주고받고 할 때 뭘 남겨야 돼요. 그래서 처음 고대 앗수르에서는 이걸 점토로 했어요. 진흙이 많아서. 그런데 이집트에는 점토가 없고 팽팽하고 매끈한 파피루스가 있었기 때문에 글씨가 그림에서 선으로 바뀐 겁니다. 선(線)으로. 언어상 선이 더 발달된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무역하다 보면 무역을 할 때 바다 건너 무역하기 때문에 상선이 필요하죠. 상선을 전문으로 하는 민족이 페니키아라는 거예요. 페니키아에서 현재 영어의 알파벳이 처음 나온 거예요. 그리고 히브리어, 아람어 다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 세계에서의 숫자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간을 7로 숫자화 시켰잖아요. 숫자화 시켜놨다는 말은 이제 인간들이 쓰는 숫자와 하나님의 숫자가 이제는 대결구조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7을 고집하고 인간들은 7을 지켜낼 수 있다고 고집하고. 그게 서로 같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서 가게 문 열기를 바랐던 거예요. (인간이) 7을 만든 숫자의 의미는 빨리 지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내 이익을 챙기려는 그게 급한 거지만, 주님께서 주는 안식일은 7일에 했던 일이 효과가 있을 경우에만 6일 동안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에요.

‘안식일을 제대로 못 지키면 있는 것 다 빼앗아버린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왜 뺐는가?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취지에 안 맞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너 같은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 만든 것은 보기에 심히 좋았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만들지도 않은 게 자꾸 생겨나는 거예요.

빈대, 잡초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또 엉겅퀴. 이것은 왜 등장하느냐 하면 저주의 표시로 이게 등장하는 거예요. 모기, 파리 이런 거. 바이러스, 박테리아 이런 거. 박테리아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RNA 바이러스 이런 거.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고집 부리는 게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내가 양보 못한다. 그게 7입니다.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지를 보겠습니다. 19×19. 옛날에 중국의 순 임금이 바둑이란 게임을 만들었어요. 바둑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들었느냐? 모든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탁자에 판 위에 보드 위에 전부 다 담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구상한 것이 19×19에요. 19줄, 19줄이에요.

바둑판을 해놓고 제일 중심에 10개의 점이 있는데 그중에 중앙에 점이 하나 있어요. 이것을 우주의 중심이라 해서 천원(天元, zenith)이라 해요. 점을 찍었습니다. 이 바둑판에서 일어난 경우의 수는 몇 가지게요?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계산이 되죠.

한 칸, 즉 가로 2줄 세로 2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는 몇 가지겠느냐. 총 8가지에요. 돌이 모서리 여기 하나 있다. 두 개 있다. 세 개 있다. 네 개 있다. 이것도 있지만 순서상 오른쪽 위 모서리에 놓느냐 왼쪽 위 모서리에 놓느냐 하는 경우의 수를 다 합치면 8가지가 돼요. 그래서 이걸 2의 3승이라 해서 2×2×2=8이 되는 겁니다.

19×19는, 2의 19승×2의 (19-1)승해서 이게 경우의 수에요. 그러나 이 경우는 동그라미가 몇 개냐 하면 상상도 못하게 많은 거예요, 이게. 그래서 아무리 많은 바둑판을 둬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거기다 패까지 있어요. 다른 데 한번 두고 놓을 수 있는 패까지 계산하면.

그래서 이세돌과 알파고가 바둑을 했는데 그때는 알파고가 제대로 발달을 안 해가지고 이세돌한테 한 판 졌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알파고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현재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세계 1등이 우리나라 신진서거든요, 신진서는 두 점에 도전합니다. 두 점 놓고 현재 알파고한테 도전해서 때론 이겨요. 그 정도로 인간이 발달하죠.

엄청나게 많은 게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이 열아홉 줄 뿐입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짐작조차 못하죠. 그러니 인간이 자꾸 숫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서 내게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미리 대처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과학이라고 해요, 과학. 인간의 과학.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과학의 끝은 확률이에요. 확률로 만든 과학, 물리학이 바로 양자물리학이라는 거예요. 양자물리학. 말 잘 들어보세요. 우연이 나올 확률은? 이렇게 돼요. 우연은 그냥 우연인데, 우연이 나올 확률을 계산해서 확률이 더 모아지면 통계학이 돼요, 우연이 나올 확률을 계산해서 미리 대처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 인공지능한테 맡기는 거예요, 인공지능한테. 테슬라 같은 차에다 이걸 실어버리는 겁니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차 사고가 적게 날 경우, 이런 걸 대비해서 1단계, 2단계,…5단계까지 하고 시중에 이걸 직접 운행하냐 마냐. 우리나라는 3단계까지 왔는데.

지금 과학이 이걸 하고 있다고요. 인공지능 있는데 아직도 바둑기사가 바둑 두는 것처럼 인간에게 이 세상은 아직까지 할 것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기 부인이 안돼요. 우리가 따라잡을 대로 한번 따라잡아보자.

이 시간 문제에 대해서 시간은 뭐가 쏟아지는가? 보통 밤에 별이 많으면 뭐라고 하느냐? 별이 쏟아진다 해요. 별이 쏟아지는~ 노래 있잖아요. 해변으로 가요. 별이 쏟아진다는 거예요. 이 시간에서 모든 우연들이 쏟아지니까 이걸 붙잡고 연구를 해보자는 거예요. 과학.

이 과학 중에 물리학이 두드러지지만 이 과학을 응용하는 걸 요새 의학에서도 많이 해요. 짜깁기, 편집. 단백질을 여기다 붙여볼까, 저기다 붙여볼까. 병균 바이러스가 설치니까 치료제 개발을 위해서 여기 한번 붙여봤다가… 여기 붙여서 효과보고 저기 붙여서 효과 있는가 관찰하고. 해서 우연히 딱 맞으면 제약회사에서 떼돈 버는 거죠. 약 개발할 때 단백질 아미노산 촉매를 뭐로 쓰느냐 그 연구를 계속 해요.

바이러스 이거는 너무 작은데 우연이에요.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겁니다. 자, 우연을 인간이 다룰 필연으로 바꾼다. 필연이라는 것은 누가 다룬다? 인간이 다룬다. 인간이 다룬다면 이건 인간의 세계에요. 이미 인간이 접수한 세계. 인간이 딱 접수했어요. 마치 나이트클럽 깡패가 접수하듯이 딱 접수한 겁니다.

이렇게 접수하게 되면 이 안에서 인간은 신이 되는 거죠. 인간은 신이 돼요. 신의 맛을 보는 겁니다. 그렇지! 이 맛이지! 신의 맛을 보는 거예요. 정교한 치밀한 인공지능 탑재하고 컴퓨터 계산해서 정확하게 달에 도착, 목성에 도착, 화성에 도착. 실을 바늘구멍 들어가게 하는 그런 정밀함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더 정밀하게 0.01초까지 정밀해야 그 우주선이 목성 표면에 딱 도착할 수 있어요. 그 정도까지 해서 자기가 신이 되는 맛을, 그 쾌감을 즐기는 거예요.

이렇게 우연이 필연이 되게 되면 시간도 우연한 시간에서 필연적으로 미리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미래가 돼요. 내 손에 놀아나는 미래가 된다고요. 미래는 인간이 지금 작업하는 것에 따라서 미래가 확정된다는 것을 목표로 인간은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몇 년 후에 이렇게 되고 몇 년 후에 이렇게 통계적으로 확률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아이디어를 주일 성수에 한번 연결시켜봅시다. 내가 주일을 지키면 구원받을 확률이 높아질까요, 낮아질까요?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일 성수하면. 그러니 인간들은요. 상상을 못했어요. 안식일, 시간이 사람이라는 이 공식(시간=사람)을 그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시간은 우주의 규칙에 관한 것이고 우주의 규칙에 대해 인간은 그 규칙성을 뽑아낼 때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 납득되는 간격이 되어야 시간이 돼요. 시간이 간격이 되려면 이것은 항상 규칙적이어야 돼요. 불규칙하면 안돼요. 규칙적이라는 전제하에, 해와 달은 규칙적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은 그 간격을 캘린더로 정확하게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자연아, 너는 너 할 일 해라. 너의 흐름을 보고 규칙은 우리가 정한다. 수학적으로 그렇게 정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시편 19편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그다음 3절에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언어 없다. 그 다음에 인간 쪽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다. 인간 쪽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소리가 없는 게 아니고 자기들끼리 통하는 소리는 있다.’ 그 뜻이잖아요. 있는데 그게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기 본문에 말씀과.

‘소리가 있다=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들리지는 않지만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잠언서 8장에 지혜라고 나오지만. 이 세상은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으로 모든 세상을 만들었다.

말씀으로 모든 걸 만들었는데, 인간들은 내가 이해를 하고 내가 납득을 해야 그걸 말이라고 언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한 거예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 쌓는 이야기 나오죠. 바벨탑 쌓을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바벨탑 못 쌓게 하는 방법이 뭐냐? 그들끼리 통하는 언어를 주님께서는 통하지 못하게 하도록 각자 의사소통이 안 되도록 만들었어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이 세상을 통합하는 언어가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인간에게 들리지 않는 언어, 말씀, 언약, 그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그 말씀 듣고 싶어요~ 뭐 우리는 그렇게 하잖아요. 우리도 그 말씀 듣고 싶어요.

그 말씀을 아무나 듣는 게 아니고, 가끔씩 누구한테 와요.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선지자에게 와요. 선지자에게. 열왕기상 22장 15절부터 23절까지 기니까 내가 그걸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에게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를 물었어요.

왕이 물을 때 묻는 대상이 왕이 보기에는 똑같은 그냥 선지자에요. 그러나 묻는 대상을 그들은 잘못 골랐어요. 진짜 선지자와 가짜 선지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물은 거예요. 그럼 가짜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임금님, 이번에 승리하십니다. 잘 물었어요. 나도 해보니까 승리한다는 계시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이거는 뭡니까? 가짜 선지자죠.

400명 선지자 중에서 진짜 선지자는 한 명 들어있었어요. 400명 중에서. 그러니까 이건 400대 1이에요. 말은 쉽지만 운동장에 400명 한번 모아보세요. 자기들끼리 왕왕거리면 1명은 목소리도 안 들립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850대 1이에요. 거의 1000명 가까이 되는 중에 엘리야 말이 먹히지를 않아요.

신기한 것은 진짜 선지자가 하는 그 말은 선지자가 말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고 이미 실현되었다는 그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선지자가 바른 말할 때 겁내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어요. 선지자가 그렇게 남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해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이미 그들은 갇혀있기 때문에. 범인으로 갇혀있어서 빠져나갈 데가 없는 거예요. 왕왕왕거리면서 말해도 그건 전부 다 돌아가는 현실하고 그들의 주장하고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 틀리는 거예요. 비현실이에요. 현실적이 아니고 비현실적이에요.

그럼 선지자가 말해서 말한 대로 되는가? 그것도 거짓 선지자에요.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미 되어진 사실을 그냥 통보, 전달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전도할 때는 전도하지 않는 식으로 전도하라는 말이, 제가 말했지만 그런 식이에요. “그거 뭐 너한테 꼭 알려줘야 돼? 뭐 몰라도 돼. 몰라도 되는데, 꼭 알고 싶어? 그러면 아파트 불 나.” 이런 식으로.

불나게 되어 있어요. 우울증 걸린 여자가 해서 불나게 되어 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러잖아요. 그건 선지자가 어떻게 확률로 때려잡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게 아니에요. 그냥 주께서 알려주는데 미가야 선지자 같은 경우는 “내가 천상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회의상 이미 땅땅땅 결론이 나가지고 ‘이번에 왕을 죽이겠다. 이번 전쟁을 통해 죽이자.’ 결론 났어요. 결론 난 것을 나는 그냥 통보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미가야가 한 영을 봤어요. 영. 영이 무슨 영이냐 하면 악한 영, 악마에요. 악마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저 400명 모든 선지자에게 다 들어가서 그들 마음속에 악한 영인 내가 다 들어가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이 나오도록 내가 조치하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못 빠져나오죠. 왜? 악마가 꽉 쥐고 있으니까. 악마가 들어오겠다는데 ‘들어오지 마세요.’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런 말 할 수가 없어요. 일곱 귀신 들어오는데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파묘하고 묘지 파야 소용없어요. 이미 들어와 있거든요. 이미.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23절에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었다는 거예요.

시편 42편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건 한번 봐야 돼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뜻이 뭐에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고, 주께서 주는 것을 담아내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그게 제 역할입니다.’ 하는 거예요.

여기서 사슴이 시냇물 찾기를 한다고 또 본인을 여리여리한 사슴 모습으로 상상하지 마세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하고 가끔은 이쁜 반점도 있고…이런 거 상상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여기 그냥 목마른 사슴이에요, 목마른 사슴.

제가 젊을 때 본 두꺼운 노래책이 있거든요. 노래책 보면 거기 삽화가 있잖아요. 노래 악보가 있고 위에 작은 삽화가 있는데 삽화에 나온 그림 모두 한결같이 삼각형 머플러를 머리에 쓰고 꼭 저수지 둑 위를 걸어요. 바람은 부는데. 그리고 여자가 바바리를 입었어요. 입었는데 얼굴은 안 보여줘. 머리카락 날리는 것만 보여줘. 그리고 밑에 악보가 쫙 깔려 있어요. 노래하고 삽화하고 어울리는 거죠. 미지의 여자를 생각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니까 사슴이란 말이 들어간 걸 보고 자기 자신을 뭐 아주 멋있게 미화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가지 같은 거라고 보면 돼요. 바가지. 빈 바가지. 텅텅 빈 공백이에요. 공백에서 날마다 주님 것으로 채워지는 그것이 지금 내가 존재의 이유가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채워지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수박이나 먹고 이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말씀을 못 먹어서 갈급한 거예요. 말씀이 양식인데. 말씀이 양식이에요.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대목 보면요. 대학교 간사들, 가스펠송하는 밴드 있잖아요. 이 노래 있죠. 애들 선교단체 하는 데에서 부르는 노래. 이 본문 읽고. 이거 외워야 짜장밥 주거든요. 수련회 가서 이걸 외워야.

여기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그 다음에 뭡니까? “찬송하리로다” 이 대목에서 성도가 하나의 자연물이 됩니다. 해와 달과 별이 돼요. 별 하나가 나 하나인가. 너무 또 낭만적인데… 저 꽃잎이 나인가, 이런 거.

인간 자체가 그야말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한 이유가요. 성도가 자연의 일부라면 성도가 시간의 일부가 됩니다. 성도 자체가 시간의 일부가 돼요. 그럼 시간, 하나님의 시간은 뭐냐? 안식일이거든요. 아까 제가 일부러 이야기를 안 했는데 안식일 특징이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요. 그래서 접는 것이 가능해요. 1,2,3,4,5,6,7 접어버리고 또 1,2,3,4,5,6,7 접어버리죠.

그러면 성도라 하는 것이 시간의 일부라면 늘 접치죠. 접치게 되어 있다고요. 성도가. 성도=시간의 일부다. 이걸 좀 풀이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일부다. 그럼 하나님이 주신 시간은 뭐냐? 하나님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시간이 예수님이거든요. 왜냐하면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이니까. 그럼 예수님의 일부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도가 예수님의 지체, 몸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현재 온 우주에 예수님이 한 활동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예요. 가득 찼다면 우리는 그 가득 찬 일의 일부로서 지금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걸 ‘열매’라고 해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뭘 맺어야 된다? 열매를 맺는다. 또는 ‘추수 때 알곡’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너무나 예속되어 있고 수동적이에요. 일은 주님이 벌여놓고 우리는 주님이 벌인 일의 결과물로 현재 이 공간과 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안식일 준수에요. 안식일 준수. 주일 같은 건 없고요. 안식일 준수에요. 1,2,3,4,5,6,7 할 때 1,2,3,4,5,6일 동안 한 일은 7일에 한 그 일에 대해서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안식일은 언제냐’가 구약이라면 ‘안식일은 누구냐’가 예수님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안식일 때 뭘 하느냐? 민수기 보면 안식일에 주님 앞에 제사를 거나하게 해요. 자, 제사를 또 설명해야 되겠죠. ‘제사란 하나님의 양식’이에요. 음식입니다. 하나님이 드시는 음식이 제사에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제사 안에서 하나님은 식사하십니다.’

그런데 식사할 때 혼자하면 맛이 없잖아요. 식사는 식구끼리 해야 되죠. 제사의 식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포함되죠. 이 아들이 데려온 양자들이 있어요. 그게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이미 완료된 제사에 합류하게 된 사람들이에요.

이걸 가지고 안동 권씨 제사. 거나하게 벌이죠. 회비 모으고 나랏돈으로 문화공보부에서 예산 내려와서 사당 앞에서 하는 거. 안동에 유명한 서원 있죠. 안동 그 근처에 도산서원. 하여튼 그날 되면 문공부에서 와요. 전국에 있는 안동의 유지는 다 오고요. 도산서원에 다 와요. 내가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 권씨 된 게 자랑스러워서.

이게 천국의 요건이에요. 예수님과 한 패밀리, 가족이 되는 거예요. 가족이. 거기서 주님이 식사를 한다니까요. 그 제사 연기를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는 뜻으로 나누어질 때 그게 화목이에요. 화목. 야야 먹어, 먹어. 내가 먹으라 했잖아. 마음껏 먹어. 그게 화목제에요. 하나님이 주신 제사가 마무리되었다는 증거로서 거기에 같이 참여해서 제물을 하나씩 뜯어먹는 그 모임. 화목제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주께서 죽으심으로 화목제를 이루셨다고 했어요 (3:25). 요한일서에도 나와 있죠. 4장 10절에 화목제물. 화목제물이 되었어요. 그냥 먹어. 내가 준다니까. 내가 주는 것은 영생의 떡이요. 먹어, 먹어. 그게 바로 하나님이 계획한 거예요. 그날이 언제라고요? 1,2,3,4,5,6,7.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의 절기는 안식일입니다. 모든 절기는 노동을 쉬어야 돼요. 모든 일을 쉬는 겁니다.

그러면 1,2,3,4,5,6일 동안 하는 건 뭐냐? 주님께서 그 안식일에 기쁘다는 효과로서 자기 백성을 세상에 보내죠. 옛날에는 농사지었으니까 농사일을 하게 합니다. 농사일을 하게 되면 거기에 수확물이 있을 거잖아요. 그거 들고 또 오는 거예요. 안식일 되면 오는 겁니다. 이게 다 주님 은혜고 주님 덕분입니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안식일의 확장, 안식일 제도의 확장으로 뭐가 이루어지는가? 그다음부터 모든 언약 속에 그게 다 녹아들어가 있는 거예요. 율법 안에 들어갔죠. 창세기에 있는 안식일이 율법의 안식일로 되죠. 십계명 제4계명에 들어가잖아요.

그리고 다윗언약에 성전 생기죠. 성전 속에 안식일을 정기화시키죠. 매일같이 안식일을 정기화시키는 겁니다. 물론 그땐 안식일이 있었죠. 그리고 에스겔 새 성전에서는 안식일에 왕이 특별히 거기에 참여해서 그때는 제사장 주도하는 게 아니라 임금님 주도로 새 성전 짓는 안식일 그날이 올 것이다, 라고 해요.

그날에 안식일이 새 성전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그 성전에서 ‘드디어 성전의 제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기뻐하세요!’ 하면서 나오는 게 있어요. 성전 문에서. 흘러나오는 게 있어요. 성전의 물이 나와요. 성전에서 물이 나와요. 처음에는 얕지만 점점 더 깊어지죠. 이건 스스로 헤엄친다기 보다도 그 물에 잠긴다는 의미가 있어서 헤엄을 못 쳐요. 너무 깊어서.

그러니까 성전이라는 것은 시간의 공간화. 어렵게 이야기해서 시간이 공간적으로 묶였다고 볼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보이는 공간으로 응축되었다. 함축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시간의 공간화, 공간의 인물화. 인물화 된 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내가 성전의 주인공이다. 안식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예수님으로 마감됩니다.

요한복음 7장 한번 봅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꼭 거짓말하는 느낌이 들어서…이게 맞는데. 요한복음 7장 37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여기서 시간이 개입됩니다.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안 받아요?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한 때, 두 때, 반 때 저촉을 받고 사흘이라는 기간 다 저촉 받아요. 하지만 십자가의 영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십자가 지시면 성령이 그 다음부턴 계속해서 생수 넘치듯이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거예요. 누구한테? 나의 가족에게.

선악과는 훼손되었고 남아 있는 게 생명나무잖아요. 생명나무를 생명의 떡으로 제공하기 위해서 불이라는 것을 타넘고 주께서 이 땅에 오셨다 이 말이죠. 우리 쪽에서는 못 가요. 주님께서 불을 타넘고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으시는데 그 안에서 주님께서 안식이라는 것을 다 이루면 성사하게 되면 주님의 가족이 되고 가족이 되었다는 뜻으로 그 사람 속에서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성령을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이 존재는 소유 때문에 말썽이에요. 뭐 성령이고 십자가고 전부 다 지가 소유하려고 해요. 소유하는 게 아니고 갖고 노는 거라니까요. 성령이 나오고 복음이 나오는 것이지, 복음을 갖는 게 아니에요. 복음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한테 전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뭐 있어야 전도를 하지, 자기 것이 없는데 뭘 전도를 해요. 그러나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때는 성령께서 그렇게 말씀이 터져 나오도록 그 현장을 주선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선교, 전도를 할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결과적으로 ‘아, 그걸 전도라 하는구나.’ ‘이걸 선교라 하는구나.’하고 결과적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주께서 사용하시니까요.

그러니까 선도, 전교를 하고 난 뒤에 누가 놀래느냐 하면 전도 받은 사람이 놀라는 게 아니고 본인이 놀라죠. 앞으로 나 시키지 마세요. 그렇게 못합니다. 앞으로는 못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질겁할 거예요. 하다보니까 주께서 그런 일을 시켰지, 두 번 다시 하라 하면 다시는 그 일을 못하죠. 그러니까 또 시키는 거죠.

여기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시간이 인간이 되고 인간 속에서 시간이 나오는 거예요. 뒤에 시간은 뭐냐? 다 이루었다가 되죠. 드디어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어요. 오늘이 뭐 2024년 그게 의미가 없다고요. 이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진 지 2000년 지났는데.” “이틀인데? 이틀밖에 안됐는데.”

위에처럼 말하면 이해하기 곤란하니까 시간을 이렇게 하면 이해하기 쉬워요. 시간1이 인간 속에 왔잖아요. 그러면 시간1 말고 인간 속에 온 시간2는 위로 올라가요. 위로 올라가서 먹구름처럼 밑의 시간까지 전체 다 덮어버려요. 전체 시간이. 아래쪽부터해서 위쪽까지 다 덮어버린다고요. 캠핑카 있죠. 캠핑카 위에 뚜껑 비슷한 게 있어서 앞까지 다 덮잖아요. 운전대까지 다 덮잖아요. 다 덮어버리죠.

그러니까 위에서 보면 앞뒤가 없어요. 옛날에도 다 이루었고 지금도 다 이루었고 앞으로도 그냥 다 이루어진 거예요. 이걸 to부정사로 이야기해서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른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에베소서 2장 6절과 7절, 8절을 보면 이미 너희를 하늘 우편에 앉히셨느니라.

이건 캠핑카 지붕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캠핑카 지붕에서. 캠핑카 지붕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차가 있는데 차바퀴가 있고 운전대 있다면 지붕 위에 실려 있는 캠핑도구 있잖아요. 어딜 가도 이게 쏟아져요. 나중에 도착하면 쏟아질 거예요. 그걸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다 이루었음을 짊어지고 가는 거예요, 성도는.

다만 그럼 앞으로 뭐하면 됩니까? 우리는 시간에 예속되어 있다니까요. 주님께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뭐합니까’ 라는 그것을 우리가 할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걸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아침에 눈만 뜨면 계획 잡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스케줄 잡는 것부터 시작하죠.

그러면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스케줄 잡으라 해. 목표 잡고 기대 잡으면 하루 종일 위에서 쏟아져서 그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무의미한 게 우리 쪽에서 만들어져야 무의미가 의미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계획 세우고 열심히 스케줄 짜세요.

이게 계획대로 되어도 의미가 없고요. 안 돼도 의미가 없어요. 시어머니가 요양병원 가면 얼마나 좋겠노. 가니 뭐합니까. 가도 뭐 지금은 좋다 싶지만, 나중엔 아니죠. 그럼 지금 뭐야. 그때가 또 그립네. 뭔가 어떤… 이땐 진짜 탕수육 먹으면 좋겠다. 탕수육 먹고 난 뒤에는 아이, 뭐야 이거. 삼만 사천 원 이거 돈이 아깝다.

사람은 늘 그래요. 시작할 때 계획 잡고 욕망 채웠다고 생각하지만 지나보면 그게 무의미해요. 무의미함을 아는 것은 이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간에 예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있기 때문에 다만 남은 육신가지고 어떻게 주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이 더러운 인간을 어떤 식으로 구원했는가, 더러운 짓, 자기밖에 모르는 우상숭배 짓이 어떤 게 아직도 남아있는가 하는 그 점을 계속해서 지금 주님과 한 가족이 되어가지고 같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선교를 보이는 우리 이름으로 전도를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주의 증인으로서의 삶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참 우리가 시간과 해와 달은 알고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그래놓고 우리는 해와 달보다 우리가 우수하다고 자부했습니다. 바보같이 엉터리같이 우리 자신만 몰랐던 그 일을 자연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십자가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사오니 어디를 가도 주와 함께 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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