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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15:57:16 조회 : 5480         
성경은 이것을 고발한다 이름 : 관리자(IP:220.81.176.141)

성경은 이것을 고발한다

- 창세기 편 (1) -

1992년 11월 11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p 248)


 성경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나무래고 꾸중하기 위해서 주신 책입니다.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나무래고 꾸중하기 까지는 자기 생각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무심코 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면 그 피해 받은 사람이 그 사람을 나무래고 꾸중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만원 버스 속에서 자기는 무심코 서있는데 남의 발 위에 안정하게 서 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발을 밟힌 사람이 아야! 라고 소리 칠 때, 비로소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아야!] 소리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신음이 들어있고 그것이 눈물로서 배겨나오고 또 한숨과 분노로서 비쳐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당장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멸하지 않는 것일까요? 계속 성경을 통해서 아야! 소리만 연발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며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아는 마음씨] 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 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과 유사한 모습으로 특별나게 창조되었다는데 착안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른 짐승들은 몰라요.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아예 기대조차 걸지 않아요. 그러나 인간에게 만큼은 [그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흙덩어리로서의 사람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찾아보고자 해서 하나님의 자신의 피해를 인간 세상에 성경으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가 있을까요?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변해서 죽음의 형상, 저주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은 인간의 부족한 점과 인간의 한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 어떠한 인간들의 울부짖음과 종교적 재능의 발휘도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자기의 종교적 능력을 자랑하는데는 효과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고난과 고통을 제대로 아는데는 철저하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사실 꾸밈없이 말해서,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다 종교적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국가의 성립이 그러합니다. 국가란, 신의 전지전능성을 흉내 내어 인간들이 모여 힘을 합치면 안 될 일이 없음을 과시하기 위한 노력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보다 넓게, 보다 높게, 보다 크게 무한대를 향하여 진군하고 전진하고 확산되고 발전, 성장시키기 위해서 인간들은 같은 동지의식에 한데 모여든 것이 국가입니다.

 여기에는, 약한 자 병든 자 무능한자 지력(智力)이 떨어지는 자 이런 자들은 보다 강한 자, 보다 강한 자, 보다 건장한자, 보다 가진 자, 보다 유식한자에게 지배를 받아서 단순적 노예로서 종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이 능률적으로 보다 빠른 시간 내에 목표에 도달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생되는데 전쟁이란 강한 나라 보다 편하게 풍부하게 살기 위해서 약한 나라를 침범하는데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보다 선하게 보다 착하게 보다 아름답게 보다 화목하게 라는 정신은 인류발전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유약한 사고방식이라고 취급당했습니다. 단 선하고 착한 것도 오직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 전쟁에서 신의 도움을 받아낼 수 있는 몸짓이라고 간주될 때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유 없는 착함이라든지 이유 없는 선함이란 백해무익한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라는 것도 자기 생명과 자기 자존심에 장애가 된다고 여길 때면 가차 없이 보류하고 맙니다. 예를 들면, 독재국가 밑에서 월급을 타먹고 사는 간신배들은,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놔두고 볼 때에는 그야말로 양심적이고 도덕적이고 누구보다도 이웃과 민족을 걱정하고 나라사랑하고 자기를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요 보람인줄을 알 정도로 배운 만큼 배운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자기에게 이러한 양심적인 행위가 손실이라고 느끼고 또 가족들에게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를 준다고 느껴서 자기와 자기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남과 남의 가족의 눈에 피눈물 나는 일을 서슴없이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정말 이때는 용기 있게 행동합니다. 결국 나부터 살아야 남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는 정신상태가 그 인간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동안 점잖은 체 한 것은 껍데기였고 가증스러운 연기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타인과의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봐도 개선될 여지는 없습니다. 똑같은 현상이 이 지구가 타버릴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스스로 이 사회에서 약하고 가난하다고 느끼면서 굴욕적인 생을 버텨내던 자가 어느 날 자기가 남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위치에 오르면 과거의 서러움을 복수라도 하듯이 자기도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게 인간입니다. 자기가 많이 어려울 때 욕했던 사람 못지않게 자기는 더욱더 악랄한 사람으로 변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인간가 전부를 나무래고 공격하기 위해 하나님은 최저의 인간으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파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순간에도 그들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상처받는 자로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활동의 중심센타입니다. 그곳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과시로 나날을 보내는데 이곳 교회에서는 자기반성과 회개로서 일관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랑거리를 서로들 들고와서 전시하는데 비해서 이곳에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들을 들고와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손한 시간을 가집니다.

 참된 교회란 참된 죄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참된 죄를 알 때만 구원되는 은혜에 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죄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은총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자비라든지 긍휼이라든지 용서라는 그런 것에 대해서 무지해서 오히려 모독하는 수가 생깁니다.

 잘못된 부모 사랑이 자식을 배려놓는 것처럼,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이 잘못 이해되면 교인들을 배려놓습니다. 하나님을 얕잡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사로 잊어버리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녁 반찬거리보다 더 쓸모없고 중요하지도 않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녁식탁에 올라오는 배추나 고등어와 같은 것으로 취급될 때, 예수님의 피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영생의 양식임을 부정하는 순간입니다.

 사람에게 육의 양식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어도 괜찮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 있음을 알아야 그것이 제대로 사람들을 살립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죄의 근원은 [나도 어쨋던 이 세상 안에서 살아남아야겠다] 의지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것만 가롯유다처럼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자는 많아도 예수님을 위하여 영생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없습니다. 즉 살고자 노력은 부지런히 하면서 정작 사는 길로 나서기에 주저하고 있는 이상한 현상들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는 영생이라고 거리에 다니면서 외치는 그 자들까지도 말입니다.

 산다는 것은 투쟁이요, 그 투쟁은 또 하루를 배불리 넘기기 위한 방법이라면 생명이라는 것이 사람 손에 달린 것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한 번 보세요. 그분이 이 지상에서 살아간 모습 말입니다.

 그분은 달리 생각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투쟁이요, 그 투쟁은 어찌하든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에 위탁되도록 자기가 자기를 포기하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이 투쟁의 결과로 부활이라는 영생체를 가졌습니다. 자신을 될 수 있는 대로 약하게 가져갔습니다. 그럴 때만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속에서 강하게 일하셨습니다.

 보세요,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이 될려면 죽음 쪽으로 다가서는 법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영생을 찾고자 하니 마치 냉장고 안에서 숯불을 찾는 바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이 이처럼 어두웁고 어리석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예수님께서 참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들어있을 모든 죄는 이곳에서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신약성경은 인간의 죄가 속살까지 파고들어있음을 보이고 회개하여 참 영생이신 예수님을 추종하라고 주신 책입니다.

 이렇듯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일 성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 인간을 고발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부터 고발당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구원도, 희망도 허사입니다. 참된 복음, 즉 기쁜 소식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1. 창세기를 가지고 고발하시는 하나님

 창세기는, 인간이 어떻게 해서 죄의 세계로 떨어지게 되었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더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편안히 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될 책임이 있는 인간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명을 어기게 되자 곧장 세상은 형편없는 저주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자의 명에 따르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던 것인데 이 대원리와 법칙이 붕괴되니 세상은 하나님 보시에 심히 나쁜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낙원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있는 세계를 저주로 몰아넣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드신 그 창조의 세계가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대하여 반발하고들 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없이 살아 보겠노라고 외칩니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이 그들의 대장이 됩니다. 거기에 비해 아담의 둘째 아들인 아벨은 하나님이 하신 뜻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계속 진행되는 인류역사를 통해서 뱀의 세력을 완전히 소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 예배를 받았습니다. 참된 예배란,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드높이고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성의만 표시한 예배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인간들의 종교적 즐거움의 발로이기 때문에 소용없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예배모습을 가지고도 뱀의 후손과 구원의 후손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서 탈락되는 뱀의 후손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관여하는 것을 그냥 놔두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후손을 끊어버리기 위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아벨 편에 서서 더욱 깊숙이 이 세상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의 피를 받고 하나님께 호소했고 하나님은 그 호소를 듣고 그 땅에서 가인을 저주했습니다. 가인은 딴 데로 피신했고 거기서 마음껏 죄악을 범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이란 하나님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사는 세상생활을 말합니다.

 죽은 아벨의 핏줄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하에 계속 이어졌는데 그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는 것은,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다시 죽음이 없는, 죄가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입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아담에게 한 약속을 믿고 영생의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세상은 인간들 천지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던 자들도 죄악에 유혹을 받아서 같이 타락했습니다. 힘 있는 거인들이나 영웅 취급받고 대장 노릇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힘센 자가 하나님처럼 군림하는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이 더 이상 저주받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유일무일 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노아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와 새로운 약속을 맺었습니다. 물이 온 육지에 넘침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약속이었는데 그 심판 속에서도 구원의 약속도 잊지 않았습니다. 방주 안에서 구원받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의 말이라면 기를 쓰고 반발하고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고 힘 있는 영웅만 좋아하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노아를 통해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그 당시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침울했겠습니까? 그러나 약속은 사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홍수전 7일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 속에 들어가기를 명하셨고 방주의 문을 닫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방주를 제외하는 모든 지역에 멸망이 찾아왔습니다.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던 모든 일상적인 행위들이 중단이 되었습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잘난 영웅들도 살아지고 부러움이 대상이었던 건장한 거인들도 물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노아하고 맺은 약속을 얕잡아보던 패들도 그 건방진 말씨와 태도도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천지에는 땅을 정화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파도만 넘실거리고 그리고 그 가운데 점처럼 떠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의 결실인 방주뿐이었습니다. 그 방주속의 8명의 식구가 지금 이 지구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인간의 선조들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나와서 제일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란 형식을 제대로 갖추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계기에 준해서 보여주는 제사였습니다. 속된 짐승을 마다하고 정결한 새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정결한 것의 희생에 의해서 더러운 것이 무사히 구원받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약속정신을 구현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시고 응답을 내리시기를 [내가 다시는 이 세상에 물로서는 심판을 내리지 않는데 그 이유가 인간들이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은 날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오직 정결한 것의 희생제물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이 땅을 다스리는 원칙은 하나님이 제시한 희생제물의 은총을 모르는 인간은 저주받고 아는 인간은 번창한다는 원칙하에 다스려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이후에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 함과 그 아들인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지 못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어놓고 주무시는데 그것을 담요로 덮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부끄러움 것을 공개했습니다. 이는 땅의 원리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 함의 후예들은 역사가 끝날 때까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처음 구원의 약속을 하실 때 그들 부부의 부끄러운 점을 거져주었던 그 행위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 지상에서 그 정신이 확대되기를 바래서 그들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인류의 역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인물과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자들과의 전쟁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자체적으로 힘을 축적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과 땀과 노력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투지로 그들은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사냥을 뛰어나게 잘한다든지, 힘이 장사라든지 지략에 특출 라서 거대한 건축공사를 거뜬히 해낸다든지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높임을 받으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6:15).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역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 9). 세상은 분명 영웅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성취시켜 줄 걸출한 인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곤 합니다. 세상은 살아있는 神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살아있는 神은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이 찾고 또 만들어낼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을 거부하는 몸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이 싫다] 라는 극단의 표현방식이 바로 바벨탑을 건립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담합을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언어를 다르게 하여 온 만방에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니 언어가 비록 민족마다 나라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근본 목표만큼은 여전히 바벨탑 건립정신으로 모아집니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나라이든 神의 은혜에 도전하는 정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여러 영역으로 흩어지게 해놓으시고 그 속에서 진정한 바른 국가를 건설하시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나라입니다. 인간의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게 아니라 약속의 인물인 아브라함의 이름만이 이 지상에 창대케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물론 이 국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만 받고 유지되고 존속되는 국가입니다.

 세상나라는 제각기 神들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神들은 아벨이나 노아나 셈의 계통을 따르는 神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약속의 하나님은 인간들의 근원적인 본능과 상충되는 神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하고 섬기고자 하는 神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무한자로서의 神입니다. 인간들이 땅에서 성의를 표하기만 하면 군말 없이 축복을 내려주는 神들입니다. 자신들의 현재 누리고 있는 재물들을 유지, 번창해주고 이웃에 접한 타국가나 적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神들이기에 극히 이기주의적 神들입니다. 또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남의 나라를 공격하더라도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神들입니다. 자연의 재앙과 불길한 징조로부터 벗어나서 안정된 가운데서 정기적인 풍년과 풍요와 후손의 확산을 보장해주고 나아가서는 자기국가의 번영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개인적인 윤리나 도덕이나 양심이라는 것도 그 국가의 이익과 안녕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인정받는 윤리와 도덕이 됩니다. 이 말은 곧 자국가가 섬기는 신의 심기(心氣)에 저촉되지 않는 경우에만 훌륭한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한 국가의 왕이라는 존재는 그 국가를 번창시켜주고 확대 시켜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자국이 섬기는 神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神의 마음에 들도록 흡족한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 역할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니 인류의 역사란 자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끊임없이 타국가와 전쟁을 쉬지 않는 전쟁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여시에 각자의 욕망과 욕망이 만나고 각자의 투자와 투지가 만납니다. 용서라든지 자비라든지 긍휼이라든지 하는 것을 내세우는 것은 곧 패배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도 자기국가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위라면 무능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전쟁을 벌이고 힘센 국가는 더 힘을 축적해서 승리의 상태를 될 수 있는 대로 영원무궁한데 까지 끌고 갈려고 쉴 새 없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비단 국가단위에뿐 아니라 소소한 사회단체까지 이런 현상이 쉬지 않고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파끼리 생존을 가름하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정신은 어디 갔는지 빠져버리고 그 빈자리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7귀신이 되돌아와서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간판만이 교회이지 사실 그 안에는 마귀의 전당이 되고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숫자를 으스대면서 자랑하는 심보 배후에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함과 가나안의 후예들은, 힘이 곧 진리라고 믿고 살며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 인간들이 단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함 후손의 땅인 바벨이라는 지역에 바벨탑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계정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정신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할 것입니다. 이러한 배도적인 인간단합정신을 깨뜨리기 위해서 한 국가를 세웠으니 그 국가가 바로 약속의 국가(언약의 국가)인 아브라함의 국가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국가 안에는 지금까지 거론한 모든 죄악적인 세계정신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섬김 받기 보다는 섬겨야 생존할 수 있는 국가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 자체가 하나님의 희생정신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물은 그 나라에서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노력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 국가는 철저히 기존의 세상국가와는 배타적입니다. 배타적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적대국가로 존재합니다. 이 두 국가 사이에서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미리 알려드립니다 마는 국가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이 양보와 타협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왕 자신의 정치능력에 기초해서 국가를 지키고 번창하려고 했기에 망한 나라가 바로 국가 이스라엘입니다. 앞으로 국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나라도 이런 망하게 되고 오직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만 우뚝 남을 것입니다.

 국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될 선결문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약속을 어긋나게 존재하면 그들 자신부터가 하나님의 적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자손들은 매일같이 자신 속에서 폭발해 터지는 자기의 욕망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욕심의 열매가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덮어 씌여진 나라인 약속의 나라를 지상에 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역으로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분쇄하는 식으로 나라를 만들어 갑니다. 이 작업을 위해 맨 처음 뽑힌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자기 고향에서 우상이나 만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 어떤 요건이 못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깐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이 고스란히 그 아브라함 후손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소위 자기에게 주어진다는 가나안 민족의 땅까지는 일단 도착을 했습니다. 물론 자기에게는 [만국에게 복을 안겨줄 복의 근원이다] 라는 자부심을 한껏 포함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찾아오자 아브라함은 얼른 약속의 땅이 아닌 곳으로 피신하고 맙니다. 어쨌든 자기는 살아남아야 된다는 본능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도 수월하게 살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그 지역을 통괄하는 왕이 자기 부인에게 탐을 내고 있었습니다. 만약 자기 아내를 내놓지 아니하면 왕이 자기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힘이란 어디에서는 그 원위가 유감없이 발휘된다고 아브라함은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살겠다] 라는 방법이었습니다. 자기는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찌되었던 살아남아야겠고 이런 처지에서는 자신의 요령에 의해서 처신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별없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아무 이유 없이 새로운 궁녀를 맞이하려고 했던 애굽왕 바로에게 해악이 돌아간 것입니다. 애굽 왕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진실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분별없는 행동으로 인해 애굽 왕에게 재앙이 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약속을 내려준 그 하나님이 지역을 초월한 진정한 神이신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능가해서라도 반드시 자신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인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태도를 가졌습니다. 조카 롯을 보고 하는 말이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제 조금씩 이해해 나가게 됩니다. 그 이해와 믿음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복의 근원으로서 자리를 잡아나간다는 뜻합니다.
 첨부파일 : 성경은 이것을 고발한다.hwp (51.0K), Down: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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