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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16:01:59 조회 : 5052         
교회자본주의 이름 : 관리자(IP:220.81.176.141)

교회자본주의

1992년 2월 20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2 (p 237)


1. 서 론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세워지며 순전히 하나님의 작품인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 입각해서 바른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구하는 교회와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교회의 개념이 차이가 난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여기에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고 느낀다. 어떻게 수정을 가할 것인가? 어떤 식으로 형태를 변경시켜야 하는가? 수정이 요구되는 교회는 인간적인 생각이 많이 가미가 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가 먼저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서 비추어 볼 때, 인간은 완벽하게 순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순수를 향하여 마음이 이동해야 될 채임은 있다. 순수한 교회상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교회라면 자기네 집단 안에 삽입되어 있는 [인간적인 요소]를 가차 없이 배제해 나가야 한다. 교회 내에서 무엇이 [인간적인 것]이냐 하는 기준은 교회를 단순한 인간들의 생각이 집결되어 이루어진 사회단체의 일환으로 봤을 때 쉽게 허용되는 비성경적 요소가 바로 [인간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인간적인 것]을 파악해서 제거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인간적인 자발적 욕구에 의해 생성된 단체라고 일단 간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인간 만으로의 단체로 규정해 놓고 나면 성경적 요소가 다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 글에서는 인간의 개인이나 집단행위에서 경제적 욕구가 주는 영향력을 살피면서 교회의 세속화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상업화나 기업화의 근원적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2. 본 론

 경제 - 인간의 근원적 욕구에 대해서-

 경제를 흔히 물자의 생산과 분배와 소비와 교환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다. 즉, 경제란 인간의 욕구의 생산(부축임)과 분배와 소비와 교환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발생된 탐심이 인간의 가장 근저(根柢)를 차지한 본성이기 때문이다.

 가장 효율적인 경제는 자기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가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할 때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여기에 반드시 전쟁이 발생한다. 인간은 자기 욕구가 만족되지 않는 경우에는 쉼을 누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쉼이 없다는 말은 어떤 형태라도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잠자는 가운데서도 생각하고 손발이 저리도록 움직인다. 욕구 충족을 위해 부단히 움직인다. 인간이 자기 욕구를 우선시 하여 움직인다고 했을 때,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구와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욕구 절제를 터득하게 되는데 이는 보다 큰 만족을 위하여 현재의 욕구를 잠시 유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제가 보다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체계 있는 경제활동으로 이어진다. 순식간에 자기의 욕구를 모두 발산해 버리면 쉽게 허기져 곧 무방비한 상태로 들어간다. 다시 무일푼으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절약하고 소비를 억제하여 물자를 비축해 두면 이 비축된 물자가 무슨 효과가 있는지를 사려 깊은 사람들이 느끼는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보이는 神(교회)의 간섭이 느슨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교회나 하나님으로 세상을 지배하도록 위임받은 소수 왕족과 귀족들)이라는 인식이 바뀌면서 개인 앞으로 토지가 소유될 수 있음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神의 통제가 유명무실해지면 욕구도 덩달아 神의 영역까지 넘보게 된다. 절대적인 것이 무너지면 또 다른 것이 그 절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같다. 자유의 물결은 인간의 욕망에 제한을 두지 않게 되었고 욕구의 대상도 자기의 생존문제를 넘어서 타인의 욕구를 꺾어 자기에게 예속시키는데 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절대적인 神이 인간을 노예화한 시기가 지나고 인간이 절대적인 자리를 점유하여 다른 인간을 노예화 하는데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타인을 노예로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은 타인의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자신이 많이 소유하면 된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생존을 위한 물자이다. 물자의 축적을 위해 자기의 소비와 허영심과 욕구를 잠시 잠재우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물자의 가치가 급상승했을 때 전보다 더 큰 가치로 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자를 아껴쓰고 절약한다는 것은 분명 인간의 본능과 배치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타인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참고 견뎌야 될 필수적인 품성이 절약정신이다. 만약 이렇게 해서 얻은 가치를 타인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면 일시적이라도 자기의 본능을 위축시키고 제한시키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 절약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것을 정복하기 위해, 자기 물자의 가치 증가를 겨냥해서 절약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발생이다.

 발전이라는 개념이 타인과 더불어 균형 있는 삶의 영위에 근거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한 쪽이 열등한 쪽과 비교하면서 발전이라는 개념을 형성한다고 하면 한쪽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의 희생을 야기시킨다. 신체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열등한 조건을 지닌 사람에게 발전이란 균등한 분배에 있다. 그러나 보다 탁월한 능력 있는 쪽이 결과적으로 월등한 물자를 소유하고 있다면 이것을 발전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흥은 그동안 강제적으로 부의 균형을 유지한 것처럼 보이는 중세의 허세에 정곡을 찌르는 현상이다. 인간의 탐욕이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함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가 역사 전면에 뚜렷하게 등장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정신이 오늘날 교회운영 정신과 얼마나 유사점을 갖고 있는가 살펴보자.


 1) 자본주의가 교회에 끼친 영향

 교회의 설립에도 자금이 필요하다. 돈이 교회로 흘러 들어가지 아니하면 교회는 지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

 모든 세상이 악마의 손에 잡혀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남겨서 이 세상의 유일한 빛으로, 소망으로 행세하기를 원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여기서 교회 특유의 사명의식이 고취되고 교회의 존재 의의가 피어난다.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허용된다고 믿었다. 세상은 현재 악마의 손에 잡혀있으며 사고방식은 비신앙적이고 비진리인 악마의 소리이기 때문에 세상의 비난은 들을 필요도 없다고 한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하나님께 갖다 바치느냐에 달려있다. 이 말은 곧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모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교회에 모아진다면 이 세상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이상나라가 될 것이 뻔하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굴복케 하고, 복종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에 굴복케 해야 되고 교회에 복종케 해야 되고 교회의 말을 듣도록 해야 한다. 마치 백성이 국가에 복종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정치화를 찾아 볼 수 있다. 교회의 제국화는 그 구성과 내용물이 일반 민중들과 친밀한 요소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속국가와의 유사한 점은 교회가 국가를 대신하여, 혹은 국가를 능가하여 민중들이 위압감을 느끼고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교회라는 가시적 제국주의 형태로 드러날 때에야 비로소 교회 본래의 바램의 충족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의 교회 집중화는 곧 힘의 집중화이며 그 힘이란 민중들이 이상적으로 소유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점령하고 집결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사람들이 원하고 갖고 싶은 것을 교회가 나누어 줄때 사람들은 교회에 복종하게 된다.

 국가의 권력이란 사실상 민중의 노동과 활동의 결집된 힘이 만드는 것이다. 민중들의 노동과 수고의 결실이란 바로 부의 축적이다. 세속국가는 이 힘을 지도자의 절대권위와 그 권위를 지탱해주는 힘의 상징인 군대에 의해서 유지하려고 했다. 이것 역시 확실히 가(假)종교적이다. 국가권력이 완전한 초월적인 위상을 갖추지 못한데 비해 교회는 형식으로 국가체제를 잡으니 교회는 현세와 내세 모두에 영향을 주는 유일 무일한 권력이 되었다. 그 안에서 움직여지는 모든 경제활동은 이 절대적 권력의 재가를 받고 그 감시 하에서 움직여지는데 이로써 교회는 모든 경제활동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교회가 경제단체의 일원으로서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이상, 다른 경제단체의 견제를 받고 또 경쟁상대가 된다. 각양 물자가 교회를 흘러 들어오고 또 교회로부터 분배될 때, 교회의 처리여한에 따라 국민의 관심도가 달라진다. 교회가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인 단체로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변동에 유력한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란 구제와 사랑을 베푸는 곳인 동시에 물자공급의 완급을 조종할 수 있는 곳도 된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싫든 좋든 이익단체가 되는 것이며 수지타산에 관심을 두는 영업소가 된다. 거기에는 많은 인원이 종사하고 그 종사자들에게 제때에 급료가 지불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새로운 수익단체로서 수도원과 수녀원이 등장하여 다른 경제단체가 앞 다투어 수익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직물상인과 수공업이 등장한 것도 수도원이었다. 생산성이 높은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했고 최초의 맥주양조인도 여기서 나온다. 기술변혁과 신기술의 개발이 수도원에서 용이했던 이유는 그곳에서는 집약적 농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집약적 농업 덕분에 상품생산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즉 최초의 상인집단인 셈이다. 그들은 막강한 지불능력을 과시했고 양질의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러한 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경제적인 면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진보적인 성향도 발생했다. 각양 과학적 사고의 출현과 예술에 대한 관심, 여성의 지위에 대한 향상도 이들의 발상이다. 다른 곳보다 훨씬 삶이 풍요로우니 사람들로부터 [축복받은 계급]이라는 호의에 휩싸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러니 권력층도 이러한 교회와 손잡으려는 것은 당연하다. 고위 귀족계급은 자진해서 헌금 내지는 투자하여 장원 안에 예배당을 건립해준다. 이것은 교회의 사유화이다. 사설교회는 그 교회에 종사하는 주요 직책자들이 직접 간접으로 그 마을의 영주의 영향권에 예속된다. 임명에서 해임까지 영주가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농민들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교회가 떠맡는 대신 영주는 교회를 이용하여 정치적 안정을 얻으려고 한다. 이로써 성직자는 고위 계급의 대우를 누릴 수 있고 그들의 발언도 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주에게 예속된 제도교회와는 달리 수도원과 수녀원의 등장과 발달은 보다 자유스러운 종교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독자적인 운영체계에 눈이 뜨인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이 후대에 와서는 잘 발달된 사유제도의 활용이었다. 독자적인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적인 소비욕구를 억제하고 노동에서 얻은 물자를 한 곳으로 모아야만 했던 것이다. 공동의 이상을 위하여 개인의 권리를 단체에 반납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고 빈민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라는 종교적으로 합법한 목적과 이를 통해 구원을 받으려는 민중들의 종교적 열의와 합치된 결과이다. 수도원과 수녀원의 장점은 부를 계속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데 있다. 바로 독신제도이다. 상속으로 인해 재산이 뿔뿔이 흩어지지도 않고 날이 갈수록 부동산이 모여들기만 하는 것이다. 특히 국가경제는 전쟁을 통해서 축적된 재산마저 허비해야 하지만 수도원은 그럴 필요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단 이교도들의 침략에 대해서는 재산을 투자해서 용병을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민중들의 호응에 부합하여 적당한 선에서 자선을 행사하면 되었다. 아직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 시대에서 부의 축적은 인간의 근원적인 육체노동이 이전 되어서 제공된다. 그 노동하는 자들이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희사했을 때, 교회의 부는 누적이 된다. 수도원이 막강한 자본 창출의 단체로 전환되었을 때, 수도원은 생산단체로부터 수탈 단체로 변질되어 간다. 충분한 부의 축적으로 인해 노동이 이외의 방법으로도 부가 들어오게 되자 그들은 이제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구가한다. 관능적인 건달 생활, 나태, 미식, 육욕 같은 것에 관심을 둔다.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유입되는 자연 생산물은 오래 있으면 부패해진다. 수도원이 자연스럽게 자선단체로 변한 이유는 이렇듯 부패하기 쉬운 잉여 생산물을 달리 처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묘책이 등장했다. 잉여 생산물을 화폐형태로 축적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처음에는 빈민들의 단체로 출발한 수도원이 불쌍한 사람을 멀리하고 대신 재산을 기부하는 사람, 혹은 교단에 물질적인 이익을 제공하는 사람을 신자로 유치하는데 더욱 열성적이 되었다. 여기서 교황이라는 대지주가 등장한다. 그의 업무는 교회재산의 확충에 한정되다시피 한다. 보다 많은 돈이 전 국가를 신자화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황은 죄를 돈으로 환산해서 보상해주는 방책을 도입하기 까지 한다. 소위 면죄부이다. 이것이 사람들 눈에는 얼마나 자비로운 교황으로 보이겠느냐! 죄를 돈으로 환산해서 갚아주는 비법을 찾아내었으니 말이다. 민중들은 자기네들이 바친 헌금으로 자기가 저지르고 싶은 범죄를 미리 묵인해 달라는 식으로 미리 내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교회는 점점 부유해지고, 이 많은 돈으로 권력층에 있는 인사를 교직에 앉힘으로써 부와 권력을 동시에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은 모두 교회로 모아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으로 현 교회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권력의 비충을 가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짓들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보고 있다.

 교황을 비롯해서 교회는 그 당시 최고의 자본가로 등장했다. 그런데 토지의 가치가 하락하는 시기가 왔다. 새로운 가치가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무역의 발달로 인한 것이었다. 빈번한 국가 간의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축적해 놓은 물자가 동이 나게 되었다. 많은 농노들이 농노의 위치에서 해방되었고 또한 그들이 농촌에서 일터를 잃어버리자 도시로 몰리게 되었다. 이렇게 유입된 값싼 노동력을 소규모 수공업자들과 무역업자들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멀리 바다건너 식민지를 개척하기도 하고 도시의 빈민굴에서 착취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중상주의 정책을 펴나가 점차 확대되는 식민지 쟁탈전에서 유리한 군사력 확보를 위해 기를 쓰며 노력하게 되었다. 이런 경제 분위기에서 도시 신흥 자본가들의 눈에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부들의 일손에만 의지하는 교회의 경제력이 별거 아닌 것으로 비친다. 이와 함께 교회의 권위도 떨어져 버렸다. 교회가 부와 권력을 얻는 수단으로 그동안 얄팍한 종교적 교리로서 대중들을 옭아 맨 것이 들통 나기 시작한 것이다. 부가 농촌에서 이탈됨과 동시에 교회의 권위로 부터 해방을 시도하였다. 자본주의시대에서 자본의 빈약은 곧 권위의 빈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교회가 적자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질 수 있다는 조짐을 보인 것뿐이다. 그 당시 권력의 주체인 영주들이 이제는 교황의 말을 듣지 않게 되면서 교회는 궁지에 몰린다. 교황에 반대의사를 가진 군주와 영주들에게 교황은 전쟁을 걸어보지만 전비를 대줄 세력도 변변치 못하다. 그러나 영주 쪽에서도 교회의 정치적 기여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농민들의 불만은 곧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온다. 영주들은 종교개혁에 뒷돈을 대어주면서 농민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구교회의 막강한 영향력을 기대하는 국가도 만만치 않다. 결국 종교가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짐으로써 교회는 국가의 시녀로 전락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단체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가 하는 일은 뻔하다. 그동안 교회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자국가를 위하여 충성, 헌신,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처신도 요령이 필요하다. 정치 흐름이 종교의 새기운에 유리한 쪽으로 작용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의 중요성에 눈을 뜬 국왕들이 봉건사회가 무너진 새로운 경제체제에 적응하려고 몸부림이 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이 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돈이 부를 가져온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한 것이다. 지대로 현물에서 화폐지대로 바뀐다. 도시생활이 활기를 띠고 금융, 상업자본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항해술의 발달로 외국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풍부한 물자를 손에 넣기 위해 금과 화폐가 필요했고 그 금은 노동력 착취와 식민지 약탈에서 축적하려고 했다. 이러한 반강제노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전체의 권력을 강점해야 될 필요가 있었다. 잠시 번지던 종교의 개혁 정신은 이러한 자본축적을 위한 절대 권력의 타당성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영국에서의 청교도 운동도 중앙집권에 패배하고 만다. 종교개혁을 처음 시작한 독일의 소국가분립주의도 세계적 경제변혁에 굴복하고 결국에는 절대주의의 승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경제 체제 편성도 언제 뒤바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상업자본주의에서 산업자본주의로 바뀌면서 사회의 고위층이 아니라 중간 계층에 있는 자들 중 유산계급이 등장하면서 국가도 이들 부르주아들의 눈치를 살피는 입장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교회도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들은 자국가의 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적인 경제적 부유함에 비해서 권력이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은 느낌을 지니게 된다. 보다 많은 발언권이 그들에게도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점차 자신들의 힘을 모으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도 새로운 세력권으로 부상하는 이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부의 축적을 비호하고 합법화하는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부의 축적에 대한 종교윤리에 어떤 변화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는 새로운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터 국가의 시녀라는 비난과 함께 압살 당하게 되는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절대주의로 부터  자유주의의 기운이 싹트면서 경제계에도 자유방임 주의적 시장경제가 발달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세금처럼 농민들에게 반드시 부과되는 십일조 제도가 농촌으로 부터 대단히 불만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 절대국가주의의 불만과 동시에 교회에 대한 불만도 같이 형성되어 간다. 왕국의 부를 앞세워 장려되는 중상주의(重商主義)가 난관에 부딪힌 것은 각국의 과도한 보호주의 정책 때문이었고 그로 인하여 소규모 수공업 업체들이 도산하고 상인들의 번영이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자 근본적이고 보다 노골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국가의 간섭을 최대로 줄이는데 있다.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이었던 식민지 착취 전쟁이 이제부터는 자본가 대 자본가의 싸움이 된다. 보다 많은 노예를 색출하여 상품화하고 그 값싼 노동력으로 이윤을 높이며 잉여 상품은 다시 식민지에 고가로 되팔아 넘기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는 식민지 확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너지는 경제구조이기 때문에 식민지를 둘러싼 이해관계로 인해 큰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절대주의 경제체제에서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대해 교회는 무엇이라고 해명하고 또 해석하고 있는가? 교회는 부를 향한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해 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교회는 자본이란 근면과 절약에 대한 신의 마땅한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팽배한 빈부의 격차와 가난의 보편화에 대해서는, 부한 자 보다 게으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당한 징벌이며 가난의 책임은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릴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사태의 성격상 부자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게으름에 대한 죄로 인해 자연히 형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 특별한 죄를 짓지 아니한 부인과 어린아이들이 이런 형벌을 받는 것이 가혹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 또한 변함없는 자연법칙이라고 신부인 멜더스가 외치고 있다. 가난한 자는 죄인셈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법률은 부자를 부자 되게 하고 가난한 자를 가난한 자 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란 자연의 이치에 가까이 하면 할수록 좋은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선의 가치는 살아있기에 부한 자들이 자선해줌으로써 그들은 영생의 터를 다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상에 가난한 자들을 남겨둔 것은 부지런하여 부자 된 자들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발판으로 제공되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재산을 많이 축적한 자본가들이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 토지에서 농사짓던 자들이 새로운 영주 밑에서 노동자로 착취당하게 될 지경에 놓여있다. 토지는 왕의 소유도 아니고 신의 소유도 아니라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자본의 체제에서 부를 얻기 위해서는 부를 확보할 근거가 마련돼야 하는데 그것마저 자본가들이 확보하고 나면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에는 날이 갈수록 골이 심화되고 뚜렷한 사회계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는 인간의 노동에서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축적에서 발생된다. 교환에 종사하는 사람들 보다 많이 돈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편 생산에 기여한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가 돌아가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는 다른 계층에서 그 여분을 가져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노동의 의미를 육체적 노동에 한정하지 않고 자본의 투자까지 확대해석 할 경우에는 그 상대적 가치저하를 상대적 노동생산성의 가치저하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변동은 사실상 가치가 토지로부터 이탈했기에 발생되는 것이다. 토지로부터의 가치 이탈은 인간의 탐욕과 노력을 자연의 에너지보다 우위에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의 불균형에 권력이 사용될 수 없는 이유는 권력이 개인적인 탐욕마저 조정할 권리가 없다고 여기는 자유 인권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즉 중세에서의 지상의 권력은 신의 대리자로서 불의를 징벌하고 선에 대하여 포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져 왔지만 근세 이후에서는 인간 상호간의 사회적 계약에 의해 인간을 위한 것으로 봉사하는데 그 존재의 의의가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인간 위에 군림하여 인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는 시장에서 결정되고 그가 확보한 자본의 양만큼 주어지게 되었다. 교회도 권위를 유지하려면 그 권위를 유지할만한 자본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정신적이고 종교적 권위란 경제력이 뒷받침 될 때에만 효과가 있다. 그러니 실상은 정신적 권위가 아니라 돈의 권위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타인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 아니면 타인에게 자기 노동을 팔아야 하느냐에 있다. 노동이 곧 돈이요, 돈이 곧 자본으로 변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교회에 올 때도 예배 시간만큼 자기가 희생해야 될 노동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여유가 있고 생계에 쫒기지 않을 만큼의 재력이 있으면 자기 종교시간을 갖는 것이 큰 손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곧 자기의 최소 생계비를 충당할 경우에는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험이며 그야말로 신심(信心)에서 나오는 오기이다. 바로 그들을 향해 목사들은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한다. [당신들이 오늘 교회 참석해서 당하게 된 경제적 피해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축복을 통해서 충분히 넘치도록 보상할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목회자의 이런 축복이 없이는 사실상 참석자에게는 고스란히 남들보다 가만히 앉아서 손해 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보상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신자들의 신앙심에 의해서 심리적으로 해소될 문제이고 비극은 사실상 교회가 그런 비복음적인 발언을 해야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운영될 것이라고 여기는 왜곡된 교회관에 있다. 국가의 시녀 노릇한 교회가 이제는 유산계급이나 아니면 유산계급의 반열을 들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경제의 시녀노릇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제 일종의 서비스업체 중의 하나이다. 타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헌금을 받아 교회경영을 해 나간다. 교회가 일반적인 수익단체의 일원으로 자본주의 시장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이상 교회는 자본주의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도태된다. 자본주의 법칙이란 다름이 아닌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보다 양질의 서비스를 상품으로 개발해 내여야 한다. 더 참신한 상품, 더 간편하고 쉽게 호응이 가는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교회가 제공하는 상품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을 천국에 넣어주는 여행사의 일이다.

 이왕 가는 천국을 보다 더 안락하고 안전하게 모실 여행사가 되기 위해 적지 않는 판촉과 선전이 요구된다. 고객이 많이 확보되면 돈이 교회로 몰린다. 교회는 이 돈으로 보다 더 나은 상품과 선전에 투자 할 수 있다. 다른 교회보다 더 훌륭한 시설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객들이 마음속에 안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전도의 사명 같은 것도 역시 돈이 있음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데 그것은 전도나 선교 대리인을 돈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가 투자한 교회의 이름으로 선교나 전도를 할 수 있으면 곧 그 자신의 임무가 완성될 것으로 믿고 싶어 한다. 바로 이런 점까지 교회 운영자는 신경을 써서 챙겨주어야 한다.

 교회나 종교단체에 막대한 자금이 몰리는 것은 사회 혼란기나 정신체계나 윤리체계가 무너질 때 마다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회는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본능적 불안 심리를 위한 치료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가 안정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종교로 몰리지 않을 때는, 교회가 사회불안을 조장 한다든지 위기의식과 종말적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존립 이유가 사라지는 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장사해서 남긴 이득으로 사치나 하고 사리사욕을 취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에게 있어 방탕과 사치행락 이상으로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이름과 능력을 널리 과시하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사업가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사업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명의의 사업체가 다른 경쟁업체 보다 번성하여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명예와 관련 되어 있기에 끊임없이 투자하고 또 욕심을 낸다. 곧 자기 세계의 확장이다. 교회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내가 소속된 교회가 크다는 것은 곧 자기가 다른 이들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이상을 실현시켜 준다. 교회가 돈을 모으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자기실현의 탐욕 때문이다. 즉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돈의 힘으로 눈에 보이는 영광으로 전환 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은 현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탐욕을 정당화해주는 기조사상으로서 제 구실을 하고 있다.

 국가란 범세계적으로 볼 때에 하나의 업소에 불과하다. 좋은 상품을 준비하지 못한 국가는 언젠가는 남의 나라의 빚에 눌려 살게 된다. 천연자원에 희망을 걸고 무역을 하던 국가는 부가가치의 낙후로 인하여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첨단 기술과 정보가 부가가치가 높은 이 시대에는 고품위의 기술과 정보의 계발을 위해 막대한 자본이 쏠린다. 한 국가가 가치를 생산하고 부를 더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술 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점에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동안 실효성 없는 축복남발로 교인들을 속여 왔는데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보증이 없자 교회는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위기란 운영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자본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부동산을 임대 한다는지 헌금으로 주식에 투자한다든지 사채놀이를 한다든지 또는 학교나 병원이나 기업을 운영해서 수익을 맞출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창안한 신흥종교 단체들이 늘어간다. 그러나 교인들 개개인이 사업가로 종사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경영수환에 있어 타 업체에 뒤지지 마련이다. 문제는 헌금의 계속적인 유입이다. 이는 교회가 하는 일에 동정을 받으면 되는데 동정도 돈 있는 자들에게 라야 돈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기부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사업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잘잘못을 변호하고 널리 전파하는 선전매체 역할을 해야 한다. 또 빈민자들에게 구제를 해야 죽어서 좋은데 갈 수 있다는 양심의 소리를 대신하여 빈민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도울 필요도 있다. 이래서 서로 이해가 상충되는 두 집단의 변호자로 행세하게 되는데 이것이 교회로서는 처신하기가 힘든 일이다.

 품꾼에게 제대로 줄 품삯을 주지 않고 재물을 쌓아둔 부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해야 하고 (야고보서5장), 또 한편으로 그 저주의 대상으로부터 헌금을 거둬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자체의 존립에 문제가 발생한다. 여당한테 돈 받아가면서 야당 노릇하는 정당 꼴이 된 것이다. 선한 일에 앞장 서야 될 교회가 선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가진 자의 횡포에 반기를 들 수 없는 난처한 입장에 놓여있다. 그렇다고 선한 일을 포기하면 헌금이 들어오지 않는다. 교회는 선한 일을 대행하는 서비스 업체이고 또한 사람들을 천국으로 모셔갈 여행사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돈의 노예가 되어 꼼짝 달싹 못하는 오늘날 교회의 현 모습이다.


2). 자본주의가 개인과 세상과 끼친 영향

 인간의 열심은 곧 자연에 대한 공격을 의미한다. 보다 열심히 산다는 것, 보다 빠른 시간 내에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자연스러운 힘이 자연에 가해진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기술과 산업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무리하고 과도한 힘들이 앞 다투어 자연을 향하여 집중하게 되었다.

 축적된 물자가 가치의 재창조를 위하여 제공될 때는 필히 과거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이 생산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하는 것이다. 분량 적으로 많지 않을 경우라도 품질 면에서 보다 나은 물품이여야 한다. 편리하다는 말은 그 만큼 힘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고 힘이 들지 않으면서도 일을 많이 처리한다는 말은 그 무엇이 대신 힘을 쓰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산업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의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 과정을 대신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인간들은 자연이 천년만년 유지하고 서서히 소비해야 될 것을 미리 앞당겨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좋게 말하는 윤리적 평가 하에서 말이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인간들은 자연이 무한한 가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실상 그렇지 않다. 자연의 힘은 한정되어 있어 쓰면 쓸수록 줄어든다. 하나님이 준 자연을 소비하는 것 가지고 비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본주의라는 정신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망쳐지는 게 문제다. 또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온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로 몰아넣고 있을게 문제이다. 소위 경제전쟁 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기술과 정보 안에는 인간사회를 원만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유산을 해체하는 이기주의가 담겨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판단에만 국한했고 경제적 평가가 모든 평가 위에 점한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효용 가치가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본 축적의 기여도로 결정되고, 기계가 미처 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 할 수 있는 부품의 한 역할로서 그나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니 결코 인간을 위한 경제구조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돈을 위해 인간이 동원되는 경제구조이다. 인간을 위해서 자본을 축적하던 소박한 시절은 지나가고 맹목적 자본축적의 경쟁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장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낸다는 식의 이상이 있는 절약이 아니라 모으는 그 자체를 위해서 사는 시대가 되었다. 왜 돈을 버느냐고 묻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돈을 위해 돈 버는 것이다. 장래의 행복이라는 약속은 항상 그 다음 미래를 위해서 연속적으로 유보된다.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절약하고 절제하던 그 재물은 계속되는 자본전쟁의 전비로 사용하기 위해 비축된다. 이미 시작한 자본의 축적을 위해 싸운다. 인간의 복리증진과 전혀 상관없다. 인간을 위한 조직이 변하여 조직을 위해 인간이 살아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지구상에 태어난 모든 아기들도 예외 없이 이 싸움의 싸움꾼으로 징집된다. 소위 산업전사이다. 가정을 비롯해서 모든 혈연단체마저 경제단체의 식으로 재정비되고 가족회의도 사업숙의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의 행복은 욕구의 달성에 있는데 그 욕구가 타의적 욕구로 대체되면서 부단한 간섭과 영향을 입게 된다. 일시적인 소박한 꿈이 행복이라면 그 행복도 언제 어떤 계기에 의해서 부서질지 모른다. 개인이 유명무실해지고 국가가 상사(上司)가 되면서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행복이라는 것도 국가 단위로 획일적이다. 모두가 국가의 자본축적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정보와 기술에 있어 상업성을 구비해야 하고 막대한 자본이 동원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본이 빈약한 나라에 정보와 기술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다. 결국 자본은 정보와 기술이 뛰어난 국가에 집약 될 수밖에 없는데 소위 선진국을 지향하는 국가에서는 선진기술과 정보를 따라잡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므로 자연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황폐화가 가속화 된다. 이렇게 해서 이론상으로는 어느 시점이 되면 모든 국가가 기술과 산업의 평준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고 하지만 선진 국가에서는 이러한 사태에 이르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자원과 무기의 확보가 장래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는 인간세계를 더욱 더 파괴시킨다. 인간나라는 어디를 향하든 곧 한계에 부딪힌다. 성경에서 예시한 [그 나라와 의]는 인간나라와 대조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는 곧 인간나라의 부재를 요구한다.

 각자의 탐욕들을 조절하므로 써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부족하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 흩어진 가치들을 재편성하고자 할 때 무한을 향한 목마름으로 인해 현재의 가치는 빛을 잃는 수가 많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사는 방법에만 몰두했을 때 주어지는 결과는 사는 방법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며 살아있기 때문에 날마다 자기 삶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삶에 짓눌린 생에 있어서는 사는 방법과 목적조차도 자의로 결정짓지 못하고 끌려 다니게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자본주의적 방식에 의해서 살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살아있는 자기 생애마저 그 방법이 개입되고 부터 손상되었다. 참된 생이 본유적으로 갖는 참된 목표를 누가 중간에서 앗아 갔는가! 따라서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있어 삶의 상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접목시켜 성취해 보려는 유혹을 역사에 등장한 교회들은 받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왜곡된 지향점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지될 줄 모른다.

 선교에 대한 과도한 탐욕이 교회라는 단체 안에서 계속 피어나고 있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필요악처럼 유입되고 있다. 다음의 글은 어느 기독교단체의 광고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땅에 한국성서유니온이 설립된 지 어느덧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 특히 매일성경 독자들의 기도와 도움으로 저희 성서유니온 사역이 국내외적으로 많은 성장이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초창기 사역의 어려움 가운데서, 이제는 한국 교회가 나름대로 성서유니온의 사역을 이해하고 계속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성서유니온은 그동안 사역을 해오면서 자체 건물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건물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사역의 확장과 함께 점차 살림의 규모도 늘어나고, 특히 사람들의 훈련을 위한 공간의 어려움을 늘 느껴왔습니다.

 또한 사무실을 자주 옮겨 다니므로 인해 독자 여러분들도 많은 불편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저희 성서유니온에서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자체 건물의 필요를 인식하고 기도해 오던 중,

-중 략-

 그런데 지난 일 년 동안 회관 건립을 공동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건이 순조롭게 풀려가지 않음에 따라 이 일을 추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알고 지난 1월 11일 성서유니온 전국이사회에서 깊은 숙의 끝에 더 이상 공동 추진하지 않기를 결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제 성서유니온은 앞으로 독자적으로 회관 건립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현재 회관 건립에 대한 뚜렷한 목표는 세우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 하시는 데 따라서 대지를 먼저 구입하든지, 혹 뜻하지 않는 방법으로 대지가 마련되어 건물을 짓든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너무 서두르지 않고 회관을 마련해 가려고 합니다.

 이 같은 성서유니온의 취지를 십분 이해하시고 성서유니온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독자 여러분들의 계속적인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성서유니온이 하나님의 나라와 한국 교회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감당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 단체는 교회의 타락을 방지하고 교인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오직 말씀에 입각해서 살기를 부르짖고 또 많은 돈을 들여 큰 예배당을 짓는 것은 교회 타락의 원인으로 보고 상당히 부정적으로 비평해온 단체로 알고 있다. 큰 예배당을 건립하는 대개의 교회가 처음에는 이와 같은 취지에 입각해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 단체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위의 광고 문장에서 [성서유니온]이라는 말이 들어간 자리에 그동안 그들이 비난했던 교회 이름을 넣어서 읽어 보면 그것이 이 교회들의 설립 취지가 된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큰 예배당을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큰 예배당을 건립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가 현재 상황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자본주의라는 말은 자본주의의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생각하고 운영한다는 말이다. 왜 그러면 교회가 이런 자본주의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을 결론으로 적어본다.


3. 결 론

 1) 기독교에 대한 이해 부족

 현재의 기독교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종교 단체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홀로 주인이 되셔서 운영해 나가는 세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방해를 받는다든지 실패한다든지 이루어질 수 없다든지 중단된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그 어느 누구로 부터도 저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로마서 8:35-3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실패를 운운하는 것은 자기네들의 종교집단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교만 위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를 자기네 집단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이 하나님 나라를 포획하여 포로처럼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부족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는 방법은 곧 순교요 죽음이다. 물론 세상적으로 봐서는 명백한 실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에서는 그 실패가 대성공인 것이다.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 그대로이고, 사도들이 갔던 그 길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유일 무일의 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비치듯이 땅에서 고난당하고 핍박당하는 그들이 곧 하늘나라에서 왕이라는 신분을 지닌 자들이요, 천사와 함께 찬송할 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이름이 살고 자기 집단의 이름이 과시되는 것에 보람을 걸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계획된 일이 제대로 안되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자기들이 마귀에게 진 줄을 모르고 하나님 나라가 마귀에게 진 것처럼 오인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죽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성공의 유무를 하나님 나라의 성공의 유무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 나라에 돈이 필요하다는 선입감이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실현되는 상태이다. 따라서 돈이 없어도 하나의 인격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돈이 있어야 기도가 가능한가! 죽으러 가는 마당에 좋은 회관의 존재가 필수적인가? 죽임이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상실된 상태를 두고 말한다. 있는 것도 버려야 될 입장에 놓은 자들이 다시 모은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4) 전도나 선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

 전도란 말씀만으로 족한 인물을 찾아내는 작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들을 찾아내는데 그 작업과정이 또한 이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라고 외치면서 많은 재물을 축적한다면 자가당착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을 받는 자의 눈에 복음의 내용과 일치함을 보여야 제대로 복음을 전한 것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내용상 세상 나라와 유사점이 없다. 이 세상을 버리고, 포기한 사람에게 더 좋은 복음의 세상이 기다린다.


 5)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하나님의 대한 신뢰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 나라는 파괴된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과 돈과 권력이 낮도록 유혹하는 것이 사단이다. 이 세상 모든 세세한 일이 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연관 있다고 생각한다면 죽든지 살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우리들은 하나님의 소식만 말고, 행위로 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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