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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18:26:39 조회 : 5140         
[복음과 새로운 사회]를 읽고 이름 : 관리자(IP:220.81.176.141)


[복음과 새로운 사회]를 읽고


1992년 7월 14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p 91)

저자 : 스티븐 모트,  번역 : 이문장
출판사 : 대장간 (1992년 06월)   |


 [예수께서는 우리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5:16)] p173

 보내주신 신간을 잘 받았습니다. 성심성의껏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뒤의 앙금으로 굳어지는 느낌은 매우 아쉽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아쉬운가하면 저자(스티븐 모트)가 생각을 좀 더 깊이 가져갔으면 하는 저의 바램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신학과 윤리(사회윤리)의 연결이라는 엄청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루면서 사회나 성경에 대해서 심도 있게 보는 눈이 약하다는 평을 저는 내리고 싶습니다. 뭔가 성급한 느낌이 들고(번역을 그렇게 해서인지 모르지만) 뭔가 서두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독자를 무게 있는 저자의 의도하는 뜻까지 접근하는데 있어 조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성경신학 해석에 있어 자기만의 확고한 주장이 미흡한데 원인이 있고 또 그 미약한 해석을 근거로 [교회의 사회개혁의 절감성]을 이끌려고 무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치 작사가와 작곡가 사이에서 작곡을 성경이라 보고 작사를 사회참여라 본다면 작사가가 무리하게 자기 기사에 맞는 곡을 어정쩡하게 접목시키려는 노력에 비유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 저자(스티븐 모트)가 눈앞에 앉아있다고 여기고 성경신학과 그리고 사회철학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 대해 여러 가지 의의를 제기해 보려고 합니다.

 1. 실존하는 악의 세력에서 저자는 악마가 실제로 현 정치세력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교회의 정치참여가 복음을 위한 전쟁이라는 모토 하에 정당화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불법의 세력이란 특정 정치형태로 고정되어져서 투쟁의 상대로 부각시킬 수 있을게 아니라 사회 속에서 눈에 뜨이는 반언약적인 정신을 두고 말합니다.

 저자는 자기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외경에 속하는 묵시문학에서 찾았는데 같은 묵시문학인 정경속의 다니엘에서는 [권세]라는 것을 실존하는 정치권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자의 나라에 적대하는 비인자화된 정신자세의 배후세력을 말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초장부터 비개혁주의적인 해석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기독교윤리란 은혜에 기초한다고만 말하고 있지 은혜가 세상에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끝마무리 되는가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저자가 왜 그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가 하며는, 처음에는 은혜로 나중에는 윤리로 정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윤리라는 게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 하나로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은혜와 윤리를 나누는가 하며는 바울의 [명령법]에 무게를 주기 위해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령법은 이미 구원받은 자 속에는 구원받기 전의 자신의 선한 양심이 들어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섭니다. 즉 어떤 의로운 일이 성도로 통해 나옴으로 구원이 오직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짐을 증명하기 위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고 난 뒤 또 뭔가 해야 되는 게 아니라, 과연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랍게 마무리 되는 것인지 끝까지 보이는데 까지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회운동에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저자도 여러 번 고백했듯이, 성경에는 성도로 하여금 죄악된 사회를 구출하라는 그 어떤 지시도 없습니다. 착한 일로 영광 돌리는 것이 결코 사회개조를 전제로 한 게 아닙니다. 그것 자체로 이미 목적을 다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 사랑

 저자는 기독교 사랑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마는 사랑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내리지는 않고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에 대해서만 기술합니다. 그러니깐 마치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친화력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화목제물도 인간에 대한 존엄성 강조 쪽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저자는 오해하기를 인간의 존재 그 자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대상이 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는 무서운 왜곡입니다. 만약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친히 오실 필요 없이 사랑에 관한 교훈과 훈계로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게 아닙니다. 인간은 전적 부패했으며 전적 무능력합니다. 그 어떤 면으로도 사랑의 상대가 아니라 저주의 상대입니다. 저는 저자가 사회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을 지니고 있는 것에 매우 못마땅합니다. 물론 저자의 측은지심은 납득이 됩니다마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과 충돌되는 사고라는 것을 저자는 수용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세상에 대한 전적 부정입니다. 그 속에 건질만한 것은 완전히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유일한 아들을 보내사 [아들의 나라]를 새롭게 건립하시려고 온 것입니다. 제자들마저 결국에는 떠나고 오직 예수님 홀로 이 일을 추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선택했다]

 선택된 성도들의 처음부터 시종일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들에 대해 감격 감사하는 일입니다. 소위 기독교윤리라고 불리워지는 행위요구도 사실상 몸으로 하는 감사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2장에서는 [영적 예배]라고 한 것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아버지도 영광을 받습니다 (요 17장).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저자는 이 책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왜 저자가 여기에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가 하며는 사회개혁을 통한 영광이라는 비언약적 구상에 몰두해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렇게 해서 사회가 인간들보기에 건전하게 바뀌었다 할지라도 아들 영광과 아버지 영광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자는 보수주의적 성경해석을 일찌감치 내팽개쳤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엄성에서부터 신의 사랑을 추적해 가는 수법은 구속사적이라기 보다는 종교철학적 또는 생명철학에서 시도하는 방법입니다.

 4. 하나님의 정의

 성경에서 사랑과 정의는 두 개의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연속성을 갖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사실상 대립개념의 시발은 조직신학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두 개의 개념이 어디서 통합되며 어떤 방식으로 극복되는가에 대해서 서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회정의구현 쪽으로 몰아붙이면 모든 게 얼렁뚱땅 그냥 넘어갈 것같이 이야기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사회정의구현으로 대변되는 것같이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애초의 모세언약이 깨어집니다. 모세언약은 제사장 중심언약이지 십계명 중심언약이 아닙니다. 십계명으로 다 통하는 국가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약성경을 봐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 물론 형식적 제사도 아니지만 - 상한심령입니다. 회개하는 심령입니다. 물론 저자는 말하겠지요. 회개해서 그 다음 무얼 할 거냐? 라고 말입니다. 회개하고 난 뒤에 사회정의? 아닙니다. 회개 다음에 또 회개입니다. 이 다음번 회개는 하나님의 지시 따라 실천하는 것 가운데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난 연후의 회개이기에 먼저 회개보다 심도 깊은 회개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회개를 촉구하는데 그 촉구를 유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며 그 법에 의한 회개로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에 더 깊이 접근되는 것입니다. 주위의 가난자와 고아와 과부는 바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르치는 교육자재가 됩니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왜 우리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은총이 요구되느냐를 발견해야 합니다.

 5. 하나님의 통치

 여기서 저자는, 교회가 세상권력과 싸워야 하는 그 정당성을 끄집어내려고 매우 노력하는 흔적을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사회정의이며 그 사회정의를 가로막는 세력이 있다면 교회는 과감하게 반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통치가 제대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어떤 모습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바른 사회제도, 무리 없는 민족주의, 공평한 복지정책, 아름답고 명랑한 생활환경조성, 누구에게는 차별 없이 돌아가는 교육혜택과 의료혜택,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상태를 하나님 나라 언제 가르쳤습니까? 이런 상태는 인간들이 꿈꾸어오던 유토피아이며 글자 그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환각과 환상의 나라를 나라입니다.

 사회개혁론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든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든지 어쨌든 인간 본인들이 이상상태라고 꿈꾸어 오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저자도 이런 낙관론을 우려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완전한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고 해서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애써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p131). 문제는 완전한 사회를 추구하자 안하자가 아니라 도대체 그 유토피아 사회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나라란 [예수의 나라]로서 예수로만 만족하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로만 만족하여 예수와 그 나라를 전하는 것과 예수를 이용해서 전에 인간들이 소원하던 이상나라를 실현하는 것과는 전혀 접촉점을 못 가집니다. 자기가 참여한 세계가 너무 좋아서 남에게 소개하고 참여를 권유하는 것과 사회개혁에 눈독을 들이는 것과는 각기 다른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견해입니다.

 저자는 자꾸만 외경에 나오는 묵시문학을 들먹여서 예수의 나라와 세상나라와의 충돌에 대한 근거로 삼고자하는데 결코 구약정경은 그런 충돌로 나간 것이 아니라 심령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작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6. [새로운 사회의 길]

 이 단락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건전한 종교단체나 사상가나 평화운동단체에서 주장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보다 깊이와 논리전개에 있어 심오성이 얕고 천박스러운데 그 이유가 미국학자들이 실용주의 영향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용주의적인 사회개혁 제안이 독일의 관념론에서 나오는 사회개혁 프로그램에 비해서 질에 있어 현저하게 천박한 것이 특징입니다. 쉽게 써먹을 수 있고 쉽게 납득이 되는 사회개혁책은 조금만 시일이 지나면 못써먹는 낡은 이론으로 곧장 바뀝니다. 시류와 기분에 치우쳐 제시되는 가벼운 이론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과 함께 그러기에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차라리 라즈니쉬나 간디의 사회개혁론이 훨씬 더 오래 갈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자는 기독교정신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과 꼭 기독교 신자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야 대부분의 국민이 명목상으로나마 신자라는 간판이 있으니 성경만 들먹여도 마치 기독교만이 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대만이나 일본같이 최선의 잘 정돈된 사회제도를 이룩한 국가에서 꼭 기독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히려 더 합리성 있고 더 치밀한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있는 것을 봐서도 이 저자의 혼동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철학에서 거론되는 것이 마치 성경에서 나온 것처럼 여기는 저자의 심정은 십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현대 미국사회에 아직도 교회가 사회전반에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소박한 소망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현대신학의 타락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은 저자가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간] 출판사에서 이 책을 펴낸 것이 실수인가? 아닙니다. 충분한 가치가 한권의 책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의 신자들은 예수 믿고 난 뒤에 세상을 마귀의 나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지 이 세상을 떠나서 자기 한 몸만 살아보자는 이기주의적 구원관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도 무관심, 사회도 무관심, 경제도 무관심, 모든 것이 무관심 속에서 점차 예수 믿고 무식쟁이가 되어 가고 있는 이런 판국에 이런 교인들을 계몽하여 사회 계몽에 일익을 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기독교계통의 책이 이런 사회계몽에 관한 책을 내지 않더라면 한국교회의 신자는 세상 책을 마귀 책으로 간주해서 아예 손도 안대로 또 본다 할지라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 것으로 받아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이 있음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사회전반에 관심을 두고 볼 수 있어 사회계몽에 일익을 할 수 있는 품위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저자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흔히 사회개혁론자들의 특징을 보면 성경해석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방면에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해석에서부터 눈을 돌리게 되느냐? 그것은 성경 전체가 어떤 일관성 있는 흐름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강단에 서기가 겁이 난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자기도 뭔가를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 이거야! 하고 하나로 꽉 잡을 수 있는 것을 사회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부분 사회운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명히 저자가 알아야 할 것은 기껏해야 그 주장은 사회철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한 인물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에릭 프롬,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

 첨부파일 : [복음과 새로운 사회]를 읽고.hwp (38.0K), Down: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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