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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18:29:12 조회 : 5022         
한국신학의 이상기류 이름 : 관리자(IP:220.81.176.141)


한국신학의 이상기류

1992년 12월 12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p 308)


 1. 질 나쁜 목회자가 활개 치는 교계

 예수님의 살아생전, 제일 괴로웠던 것은 질 나쁜 종교인들이 교계를 설치는 것이었다.

 커닝하는 신학생, 뻔질나게 이름 내는 목회자, 교회성장을 유일한 생의 보람으로 삼는 출세탐욕주의자들, 이런 자들로 인해 오늘도 예수님은 괴로워하고 있다. 이런 패역한 자들이 제 철을 만나는 것 같다. 가짜들이 이름 있는 모임마다 무게를 잡고 설치고 있으니 제대로 목회하는 자들은 숨기 바쁘다.

 질 나쁜 목회자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이름이나 사진을 공공의 지면이나 장소에서 슬며시 들이미는 것이다. 그것도 천사의 모습처럼 자상한 웃는 얼굴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그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다. 그들의 주된 할 일을 자신을 확고히 하는 작업이다. 많은 시간과 모든 활동이 결국에는 이 일과 다 연계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마귀의 진솔한 모습을 본다. 선한 목자도 위장되어서 나타나는 악마를 본다.

 우리가 그런 목회자를 보고서 [타락]했다고 말들 하지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본질]이 이제야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그들 자신들도 무수하게 자신을 갈고 닦고 하면서 바르게 예수님처럼 살아 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생활의 안정이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확보하고 있는 자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동적으로 오래 유지 될 것 같았다. 고소득이 확보되고 명예와 부러움이 밀려오는 꿈의 자리를 이미 차지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얻고 싶은 것 다 얻어서 이제 더 부러울 것이 없는 입장에서 순교자의 죽음의 길을 억지로 갈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동안 거룩한 종의 행세를 한 것이 다 오늘날 내가 확보한 이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그것을 다 얻은 입장에서 이제 그런 거북스러움에서 좀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고 또 스스로 순교자의 길을 가는 그런 시도가 자기를 세상에서 부각시키는데 너무나 더디고 효력이 별로 없다고 판단되자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본질을 과감하게 드러내 내어놓고 살아간다. 마치 하체가 벌거벗겨진 나부(裸婦)처럼 수치심조차 못 느끼는 정신병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병자들이 기독교와 관계있는 모든 언론매체를 장악하고 있으니 일반 평신도 독자들에게는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보일 것이 뻔하다. 그들에게 한없는 존경심과 권위를 느낄 것이다.

 도대체 한국교회가 이처럼 스스로 자기를 부각시키고 높이는 악마들에 의해서 장악된 가장 큰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신학의 부재에 있다.

 2. 신학의 부재기간에 들이닥친 거짓 신학의 비등

 신학이 계속해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끌지 못하자 이런 공백사태를 기회로 사이비 신학이 활개 치기 시작한다.

 참된 신학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고 그 의의를 높여주는 신학이다. 이는 곧 인간의 탐욕을 정당시 해주는 것이 이 사이비 신학의 핵심이다.

 신학에 있어 인본주의와 탐욕의 정당화는 모든 것이 [보이는 하나님 나라 건설]과 연관 있다. 이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 격이 바로 [교회부흥]이다. [교회부흥]과 [교회성장]의 밑바닥은 항상 사이비 신학이 깔려있다. 이런 동네에서는,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종속체가 아니다. 완전한 하나의 신(神)이 된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계획은 철저히 거부된다. 오직 자기네들 방식에 의해 [교회부흥]과 [교회성장]이 복음을 대체해 들어간다.

 그들은 [교회부흥]과 [교회성장]에 대한 완벽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중들을 상대로 [종교 쇼]를 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교 쇼]에 필요한 종교현상과 종교 심리는 몽땅 성경에 있는 것인 것처럼 대중들을 우롱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종교현상과 종교 심리에 제일 잘 등장하고 써 먹여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명될 때의 현상], [믿음이 들어 올 때의 현상], [중생될 때의 그 사람의 현상], [성화단계의 현상], [칭의될 때의 현상], [영화될 때의 현상] 이 모두에 관한 것을 종교 심리적으로 탐구해서 그 현상 속에 대중들을 끼어 맞추기 위해 온갖 무당 짓을 다해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작업을 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활동, 특히 성령세례라고 사기 치면서 독려시킨다.

 이러한 더러운 작업들은, 인간의 자체적인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이비 신학이며 물론 그리스도의 공로를 묵사발 만드는 적그리스도적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더러운 신학이 이제는 정통개혁신학을 신학의 중심을 정복하려고 힘을 모아나가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인격에 두지 않고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에 협조하려는 신학자가 소위 보수신학교에서 노골적으로 큰소리치면서 자칭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대환호성을 보내는 수많은 목회자들은 이미 기존 교계에서 형성되어 있다.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활동이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신종 예수무당으로 낙인 받아 왔는데 이제는 자기 교단의 신학의 총본산 되는 신학교에서 까지 그들의 주장을 변호해주는 천만 군사를 얻은 것처럼 든든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탐욕적인 주장만 변호될 뿐 아니라 그 반대급부로 누리는 지금의 부귀영화와 교주같은 자리도 다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인정받게 되니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이제 무슨 작당이든 다 성령세례 주장하고 제2의 축복설 주장하고 [교회성장]이 하나님이 원하는 목표였다고 가르치는 그 신학자에게 돌리면 모든 문제는 다 처리되는 것이다.

 사이비 목회자와 사이비 신학자가 만나서 한바탕 인본주의 굿거리 한마당을 펼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의 구호는 간단하다. 교회부흥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기술 발휘안하면 하나님도 아무 일도 못한다! 바로 이것이다.

 [교회부흥], [교회성장]에 관해서 그들의 주장이 맞다. 그러나 성경에 [교회부흥], [교회성장]을 말한 적이 없다. 오직 교회는 어떤 환경 안에서도 [교회되기]를 원했을 뿐이다. [교회답기], [교회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교회가 전도도 할 수 있고 기도도 할 수 있고 찬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부흥], [교회성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바른 교회는 이 꺼져가는 세대에서 순교자의 모습만 띨 뿐이다.

 3. 총신대 차영배 교수 신학의 큰 오류점

 차교수의 발상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딴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사상 + 인간 행함 = 차영배 교수의 신학

이란 등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자신은 생각하기를 [인간 행함]을 집어넣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극복이요 혁신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 왜 인간의 행함(사실은 종교 테크닉)을 집어넣으려고 생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천국)를 가시화 시키고 싶어서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눈으로 보고 싶다는 본능이 너무 일찍 온 노망증세와 아무리 공부하고 기도해도 확신 있게 정립 안 되는 자신의 불안한 진리체계에 분통을 그런 식으로 폭발해 버린 것이다. 미확신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심리, 이것을 차교수는 그동안 성경과 신학자들의 주장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찾을 수 없다고 믿어지자 서서히 개혁주의 신학의 모토인 [오직 성경중심]에서 이탈하여 기존의 소위 교회라고 간판 걸고 하는 종교사업체에서 뭔가를 찾아 진리체제를 다듬어 나가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종교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왜 인간은 종교에 대해서 생동감을 갖는가? 혹시 그 중의 어떤 것은 성경에서 말한 성령의 제대로 된 사역의 일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이 추측이 옳다고 한다면 성경 말고 교회의 활동에서 어떤 보편 진리를 규합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만 된다면, 성경을 성경만을 통해서 분석 탐구하기 보다는 목회현장에서 발생되는 어떤 생동감 있는 변화에서 어떤 성경 해석, 특히 현대신학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연구에 어떤 아이디어가 제공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곁길로 나가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현상이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리는 무모한 시도인가! 차교수는 한국교회의 침체를 바라보면서 신학자로서 자기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통감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죽어있는 한국교회를 회생시킬 수 있는가? 이는 분명 신학자의 결론이 뭔가 원래 하나님의 뜻에 미흡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하는 자학증세가 차교수로 하여금 성경을 내팽개치게 한 것이다 (여기서 내팽개쳤다는 말은 성경을 인용 안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절대기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교계를 누구보다도 더욱 더 사랑하는 노교수님, 그러나 여기에 차교수의 불신앙이 예리하고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계회복 교계성장이라는 탐욕이 안타깝게도 사랑과 긍휼로 변장해서 나오는 것을 본인은 감 잡지 못한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칼빈주의의 기본 사상을 그는 더 이상 못 견디어 하면서 가출을 그만 해버렸다.

 물론 그분과 일반 질 나쁜 목회자하고는 취지에 있어서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즉 일반 목회자는 자신의 출세욕과 자기능력과시와 자기 번영욕과 생존 보장을 위해서 교회부흥을 들먹이지만 차교수는 생존에 대해서는 고정급여가 신학교에서 나오기 때문에 정말 순수한 정신에서 교계 걱정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질 나쁜 목회자를 만약 신학교수를 하게 하면 그 분들도 차교수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모습을 드러낼 터이니 [순수한 걱정]은 사실상 별다른 것이 아니다. 생의 여유에서 오는 일종의 [권태]라고 할까?

 차교수는 자신의 이러한 불안을 신학 작업에다 토해놓으면서 타인들에게는 마치 개혁주의 노선에서 이탈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바빙크를 희생 제물로 이용했다. 물론 바빙크 주장 가운데 자기가 써먹을 것을 고르지만, 내가 공격받으면 바빙크와 함께 넘어지겠다는 것이다.

 차교수신학의 대명제는, 성령이 활동하시면 뭔가 이 역사 속에 남기는데 그 흔적은 이성과 직관과 감각으로 알 수 있기에 그것이 신학으로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꼭 그런 식으로 신학을 시작해야 되느냐 하는 것은 차교수의 심적 불안에서 야기된 것이다. 그러니 차교수는 모든 것을, 예수를 믿으면서도 확신 없는 교인이나 목회자의 입장의 대표가 되며 그들의 불안을 완벽하게 신학이라는 표제 아래 담아둔 작업을 하신 분이다. 교회가 커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즉, 보고야 믿겠다는 것이다.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임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행위가 바로 차교수의 몸부림이다.

 아무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칼빈이라는 인물이 뭔가 미흡한 작업을 한 사람으로 새길 것이다. 물론 여기에 비해 질 나쁜 목회자들은 더 나아간 주장인, [칼빈식으로 목회해서 어느 세월에 교회성장 시키랴?]라는 것보다는 덜 노골적 인지는 모르겠다.

 차교수가 성령에 관해서 관심 갖는 것은, 삼위일체 신학의 마무리 작업을 위한 것이다. 차교수는 심각한 오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성령에게도 영광과 찬양을 드릴 때, 삼위일체 신학이 완성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왜 성부와 성자 일변도로 신학이 전개되느냐 하는 것이다. 성령을 삼위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소외 시키는 것이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침체한 이유가 바로 성령을 제대로 대접 못해서 야기된 사태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차교수는 성경위주가 아니라 철학체제 위주로 삐끗 잘못된 길을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3이란 숫자가 짐이 되었다. 차교수는 하나님의 유일 무일한 계시인 성경의 의사(意思)보다 완벽하고 균형 잡힌 철학체계가 정립되기를 원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미확정된 신학체계해명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해서, 성경은 성령께서는 오직 성부와 성자에게만 영광돌리기를 그분께서 원하고 계신다. 성령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이러한 겸손을 우리는 받아드려야 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자기 신격화를 구체화 하는 행위에서 나온다. 차교수는 이 철학이라는 논리체계를 가지고 과잉충성을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행함 속에서도 뭔가 거룩된 것이 나오리라고 여긴다. 그것도 단지 [보이는 하나님 나라 구현] (교회건설)을 위해서 말이다.

 [중생된 이성] = [완벽한 이성] 으로 풀이하려고 애쓴다.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된 이성] = [자기 죄악을 비로소 알게 되는 이성] 이라는 진리를 거부하려고 한다.

 삼위일체의 형성은 교회사를 통해서 복음을 철학적인 방법으로 방어하기 위한 철학체계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기능으로 사용될 수 없고 소극적으로 이단을 색출하는데 요구된다. 그런데 차교수는 변호하고 방어하는 그런 소극적 기능밖에 못하는 삼위일체 이론을 신학의 중심에다 놓으려고 하니 이는 곧 철학이 성경을 밀어내고 안방 차지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신학의 중심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성경의 언약사상이어야 한다. 그 언약사상 속에서 결코 인간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끊임없이 훼방한 훼방꾼이라는 평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경건치 않은 자 죄인된 자 원수된 자를 위해서 자기 아들의 희생을 통해 자기 위를 세우신다. 그래서 언약은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무능력과 죄악]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이다. 자 이것이 만약 옳은 이야기라 한다면 우리는 차교수같이 아직도 인간의 행함에 기대를 거는 비신앙적이고 비언약적인 주장을 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택한 자에게 무슨 사랑을 베풀었는가?] 여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신학자, 목회자, 교인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심지어 성령의 하나님마저 이것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교수는 철학의 심보를 따라 인간 쪽에서 어떻게 하면 하늘까지 도달하겠느냐는 인본주의 종교를 주장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국교회를 피폐시키고 있는가 말이다!

 이 세상에 인간이 어디 있는가? 오직 죄인밖에 없는데!

 신(神)과 인간, 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따로 철학의 도움으로 변증신학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중세 때까지 해왔다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종교개혁이 요구된다. 언약 안에서 하나로 해명되어야 되는 것이다.

 차교수는 구속사적 개념인 [중생]을 인간개념까지 적용시켜 보려고 했다. 그래서 끄집어 낸 아이디어가 바로 [중생]을 늘려 잡는 것이다. 즉 물렁물렁한 씹다버린 껌을 길게 늘이게 되면 늘이기 전에는 점(點)으로 보이던 것이 선(線)이 되는 것처럼 중생이라는 순간을 길게 잡으면 중생에 시작되는 시점이 있고 끝나는 시점이 따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좁은 개념으로 보지 말고 넓은 개념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개혁주의라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한 얄팍한 수법인가!

 차교수의 이런 중생의 물질화 착상은 곧 시간개념의 물질화적 발상으로서 어떤 철학에서도 용인되지 못하는 개념혼란으로 받아드려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차교수의 성령의 물질화적 인식은 그의 [성령의 빗물질화주장]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은 저수지의 물이 아니란다. 그러니 어디 고였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학에 의해서 지금도 성부가 성자로부터 계속해서 오신다는 것이다. 그는 힘주어 강변하기를 성령이 저수지에 못물 고이듯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교수는 반대말의 개념조차 여기서 혼동을 일으킨다. [성령의 오심]의 반대의견이 어디 장소나 공간문제로 해명될 수 있는가! 카이퍼의 저수지 이야기가 실제로 성령을 특정 공간에 묶어들려는 발상에서 나왔다고 믿는가? 그냥 어떤 비유로 말했다면 차교수의 반박은 지금 쓸데없는 트집을 잡은 것에 불과하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직접 오신다는 주장은 지금 성령의 논쟁과 하등 상관없는 강변에 불과하다. 그러니 오늘날 교인들이 성령 충만 받기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자는 그 주장을 하기 위해 성령의 공간문제를 꼭 들먹일 필요가 있었는가 말이다. 뭔가 핀트가 빗나가도 보통 빗나간 게 아니다.

 차교수는 생각하기를, 오늘날 한국교회가 침체되어 있는 것은 교인들이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요,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예정론에 의해서 이미 성령세례 받아 중생해서 이미 구원받았기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필요 없다는 기계적 구원관 때문에 생겨났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차교수는 대안을 제시하기를 제2축복설을 주장하고 성령세례는 반복적이다 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운동이 이어져 교회가 살아난다면 성령세례를 새롭게 조명한 자신의 신학적 노력에 자부심을 갖는다는 포부가 깔려있다.

 여기서 우리는 차교수의 치명적인 신학상의 부실을 발견하게 된다.

 차교수는 어쨌든 이 1000만 명이나 된다는 한국교회 교인 수에 애착을 갖고 있다. 일단 그들을 신자로 간주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차교수는 하나님 나라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천만 명 되는 교인들이 신자이긴 하지만 기도 안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신자들인가! 기계적 예정론 식으로 신앙생활해도 과연 신자인가?

 차교수는 성경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남은 자] 사상을 이 시점에서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음이 드러난다. 많은 숫자니깐 어쨌든 아니다 하기에 아깝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신학자나 목회자가 해야 될 일은 오직 택한 자만 확인하고 건지는데 있음을 차교수는 무시하고 있다. 많은 숫자가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믿고 싶어 하는 심리가 차교수에게 있다고 충분히 오해 살만하다.

 기도 안하는 자들은 아예 애초부터 신자가 아니라고 왜 용감하게 차교수는 외칠 줄 모르는가! 많은 사이비 목회자들이여, 지금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수천 명의 교인들이 다음 주 당장 한명도 교회 안 나와도 나는 진리를 외치겠다는 그런 순교자의 정신이 어디 갔는가! 애초부터 없었으면 목회자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원수는 종교이다. 종교를 내세우는 교인은 추방하고 나의 종교성이 나를 죽였다고 자백하는 자들에게만 목회하자.

 신학의 이상기류, 그것은 종교현상이 복음을 대신해서 활개 칠 때, 그것을 긍정해 주기 위해 생겨나는 인본주의적 철학체계이다.

 한국교회는 바로 여기에 와 있다.

 첨부파일 : 한국신학의 이상기류.hwp (38.5K), Down: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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