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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15:59:21 조회 : 5312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한계와 성경적 문화관 이름 : 관리자(IP:220.81.176.141)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한계와 성경적 문화관


1991년 2월 22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2 (p 26)


1. 서 론

 교회 문을 처음 들어선 사람들에게 맨 처음 정립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의식이다. [나는 누구냐?] 하는 이 문제를 자기만을 쳐다보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세상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 신분인가?] 라는 차등의식을 전제로 해결을 시도한다. 그들은 한결 같이 교회에 입문함으로 자기에게 모종의 변화가 왔다고 여기고 싶어 한다. (물론 진지한 교인에게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 이 변화를 통해 그들은 그동안 자기가 감히 넘어설 수 없었던 그 한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자기 외에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자기의 과거시절과 같이 여전히 남아있고 내가 지금 변화된 시점에 와서 저들을 향해 무슨 소리를 하면 그들은 도리어 어리둥절해 한다는 점을 통해서 파악하려 한다.

 이러한 달라진 자기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어쨌든 위와 같은 일련의 조짐으로 인해 나는 새사람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게 되며 이것이 너와 나를 구별 짓는 확실한 기준으로 삼고 싶어 한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은 변화된 자기가 하는 일을 기준으로 해서 적과 아군을 예리하게 자르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자기가 하는 말이나 일을 이해하는 쪽은 아군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적이 된다.

 포용이 아니라 공격성향이 우선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자기 주체성을 이루는 작업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변화]라는 것은 기존의 것과는 확고한 경계가 있기 때문이요, 그것을 기적적으로 넘었기 때문에 기존의 것과는 어떤 접촉점이나 공통점이 없을 것이라고 아예 단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롭게 자의식이 정립된 자신이 구축하고 싶어 하는 세계관과 기존의 세계관과는 아예 처음부터 같은 사상이 아닐 것이고 또 아니어야만 해야지 앞뒤 논리가 맞아 떨어진다.

 이때부터 소위 거듭났다는 신자는 새로운 세계관을 보다 쉽게 (다 경험하는 수고를 안 하는 대신) 정립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교역자들을 통해 [문화]라는 것을 공부하게 된다.

 [기독교 문화]를 정립하는데 있어 이것저것 연구해보는 것이 아니라 교역자들을 통해서 이것은 아래서 나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하는 호교적 차원과 변증적 차원의 의식화교육에서 정립해 보는 기회를 갖는다. 이것은 교역자들 자신의 신앙적 입지에서도 비롯되지만 새신자 본인에게도 이러한 신나는(?)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변화되었다!] [나는 이제 이쪽 세계에 들어왔으니 저쪽 사람들이 감히 깨닫지 못하는 무엇이 나의 지적 갈증을 만족해 줄 것이다!] 라는 바람을 이미 교육 전에 갖고 있다.

 본인이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점이다.

 진리는 오직 성경에서 도출한다고 주장해 놓고서는 사실은 기존의 교인들의 자기주장을 사후 승인하는 차원에서 전개되는 신학논리는 이제 더 이상 시중서점에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흔히 말하는 [신학은 교회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말을 교회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는 식으로 변개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들을 계몽하고 옳은 길로(성경으로) 인도해야 할 책무가 신학하는 사람이나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 동안 교회내의 열광주의자들의 무절제한 세상부정과 정반대로 교회제도의 보수적 경향에 염증을 느껴서 구실을 붙여 교회 밖에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현실참여를 선동하는 신세대에게 신식(新式)으로 보이기 위해 교회의 소위 [칼빈주의적 문화관]에 관심이 비등하게 되었다. 우리도 사회참여를 건전하게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왠지 교회 부흥의 선전용으로 거론되기에 문을 살며시 열고 고개를 내밀어 보지만 누가 와서 교인을 뺏기라도 하는 날이면 재빨리 꼬리를 감추어 왔었다.

 이런 입지에서 보는 문화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교세의 사회, 정치, 경제 속의 침투 그 이상의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차지하고 정복하고, 다시 공격하고 차지하고 정복하고 평정하는 이러한 침략근성을 거룩한 창세기 1장의 귀절과 관련시켜 [문화신학]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ideology)로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비록 십자군운동이나 중세 때처럼 노골적인 정치장악기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정신세계의 정복을 노리는 것도 정형적인 타락된 침략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지 성령의 열매라고 볼 수 없다.

 이제 본론에서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한 쪽으로 개혁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라고 여기는 기독교철학과 소위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비논리성과 비성경적 속성을 밝히고 개선책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언약적 측면에서 본 문화관을 제시코자 한다.


2. 본 론

 1) 속성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비현실성에 관해서

 하나님의 주권사상의 적용은 교회 안에서의 구원론뿐 아니라 교회 밖의 세상에서도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모토이다.

 세상을 통째로 기독교화(칼빈주의화)시켜 하나님께 갖다 바칠 때 하나님은 세상을 통해 큰 영광을 받을 것이라는 발상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을 개혁하고자(善한 쪽으로)하는 사명을 부여받는 일꾼의 양성소이며 세상은 그들의 일터정도가 아니라 아예 밥이 된다.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노리듯이.

 그래서 교회(이미 선해진 쪽)와 세상(선해져야하는 쪽)으로 날카롭게 구분 되어있다. 이러한 구분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문화에 대한 定義도 이러한 취지에 맞도록 내려진다. 즉 문화란 [인간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한 정신적 물질적 산물]이다. 문화란 성도가 속한 생의 영역인 동시에 활동표적이 된다.

 칼빈주의 문화관은 이렇게 두개의 논리 자재(資材)를 준비했다. 하나는 칼빈주의라는 자재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사상(모든 영역에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져야 마땅하다 ― 교회 내에서만 영광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되고)이고 또 하나의 자재는 문화이다(교회활동의 공격목표 ― 활동영역만이 아니라). 이 둘의 자재로 [칼빈주의적 문화관]이 건립되는 것이다.

 흔히 칼빈주의의 문화관을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한다.

 [우리들은 결코 세상을 악하다고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하게 세상을 만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만을 위해서라고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聖)·속(俗)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칼이 하나 있는데 만약 주부가 사용하면 음식을 만드는데 이용하는 좋은 칼입니다. 그러나 강도가 사용하면 그 칼은 나쁜 칼입니다. 칼이라는 문화는 그 자체로서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닙니다. 다만 누가 쓰기에 따라서 선도되고 악도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라는 문화 그 자체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닙니다. 부부의 성 관계도 마찬가지며 음식에 관한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결코 성도의 감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혁하라고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천국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세상이 악하다는 이유만으로 철수해서는 안 됩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상이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한다 할 것이다.

 본인은 이상의 주장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지극히 정당해 보이는 위의 사상이 과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일치되는가 하는 점이다.

 고상하기 그지없는 우리 칼빈주의자들 끼리는 더할 나위 없이 은혜가 되는 논리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칼빈주의자의 편이라는 선입감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 낸 소위 [칼빈주의적 문화관]도 동의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 본인이 보기에는 성경은 그런 식으로 문화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예를 들어 칼도 선한 사람에 의해 사용될 경우 선한 문화가 된다면 여기에도 두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다.

 (1) 반드시 선하냐?
 (2) 선할 경우가 있느냐?

 반대로 생각해서 악한 사람이 칼을 사용했을 경우도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1) 반드시 악하냐?
 (2) 악할 경우가 있느냐?

 보통 (1) 경우를 주장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선한 사람이 선하게 사용할 경우에만 그 문화는 선한 문화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이 선하게 칼을 사용했을 경우에도 그 칼이 악한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보통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칼 가진 그 자체로서 악한 문화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람이 악하든지 선하다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선하게 쓰면 선한 문화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해버리면 문화와 인간과의 관계가 처음부터 단절되어 버린다. 분명 칼빈주의적 문화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라 외쳤는가? 좋은 문화를 위하여 우리가 나서야 된다고 외치지 않았는가? 만약 좋은 문화가 좋은 인간과 관련성이 없다면 하나님은 분명 성도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교도를 통해서라도 좋은 문화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제에 대해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시도가 소위 [일반 은총론]이다.

 그러나 이 [일반 은총론] 입장에서 문화를 바라본다면 꼭 성도만이 이 세상을 개혁의 일꾼으로 나서야 한다는 당위성이 희박해진다. 다른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얼마든지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도와 그들과 문화적 측면에서 어떤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똑같은 선상에서 출발하게 되는 셈이다.

 한 인간의 변화가 곧 그를 둘러싼 세상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대 원칙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차라리 이렇게 고쳐야 한다.

 일반은총에 의해서 성도냐 비성도냐 관계없이 일반은총을 많이 받아 보다 양심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교회내가 아니라) 보다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해야 한다.

 교회 밖의 일이라면 아예 기독교라는 표시를 떼어 내어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게 된다.

 더 나아가서 선하다든지 악하다든지의 기준도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기준이나 이교도에서 제시하는 기준이 동일하게 된다. 선악의 기준이 이처럼 동일하다면 기독교와 이교도의 차이점은 그들은 구원받는 방법을 모르거나 거부하고 우리는 단지 구원에 있어 확보해 놓은 것이 있다고 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성경의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육에 속한 자가 성령이 벌려 놓으신 남은 역사(歷史)를 헤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순한 개인의 구원론 차원이 아니라 주(主) 되심은 우주적인 변화를 수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또 달리 돌파구를 열어보자.

 이교도의 모든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선한 문화를 지녔다고 한다면 그 문화가 고유한 선함을 지니게 되느냐 하는 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선한 인간 + 문 화  ⇔ 선한 문화



 선한 인간(성도)에서 나온 창조 작업이 해리되어 따로 존재한 후에 다른 이교도의 작품과 비교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산물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두가 경해가 있을 수 있다.

 (1) 인간의 문화는 그 문화를 창출한 그 존재와 해리되지 않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선한행위냐 아니냐는 선한 행위의 산물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것으로서는 파악이 되지를 않는다.

 이런 논리에 따라 후에 그 문화가 어떻게 악용이 되든 상관없이 선하고 복음적인 문화는 영구히 그 속에 선한 동기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선한 문화는 악한 문화와 대립된 위치에서 고유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의견이다.

 물론 개선할 여지가 없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적 물질적 산물의 처음 동기의 선함이 계속 그 문화 안에서 발견되기에 우리는 그 문화를 선한 문화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한 문화와 구별해서).

 예를 들면, 찬송가, 성격책, 성도가 고안한 유익한 의료기구, 기타 발명품들, 성서(聖書), 획기적인 자연법칙 발견, 신개척지 발견, 성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 성도가 기도로서 기적적으로 고아원을 운영하는 일, 기적적인 예배당 건립, 신학교 운영 같은 것.

 (2) 반면에 그 어떤 것도 따라 떼놓으면 그 자체로서 선하다고 악하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이교도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성도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총을 받았을지라도 선한문화는 그 자체로서 다른 이교도와 똑같이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의 두 의견의 각자 안고 있는 논리상 취약점을 찾아보면, 먼저

 (2)의 논리에 의하면 이교도의 업적이라도 그 문화 자체로서는 반드시 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찬불가나 부처상 같은 것도 그 자체로서는 성도가 보고 부르기에 따라 얼마든지 은혜와 신앙적 감동이 되고 선한 문화가 된다는 논리의 길을 열어준다.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이 상실되고 양심이나 율법이 잘못되게 사용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 자체를 악하다고 하는 주장은 성경적 요인이 되지 못하는 주장이다. (참조 로마서 7: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반면에 (1)의 논리에 의하면 행위의 가치평가가 거의 다 주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일반은총의 입장에서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만인에게 유익한 것이라도 기독교의 입장에서 판단해 볼 때 전도(傳道)에 방해된다는 이유 때문에 선한 문화라고 판정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반대로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타인에게 심한 피해를 주었을 때도 주관적으로 선한 문화로 간주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단 일반은총의 영역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동기가 선했다고 판명된다 할지라도 자기의 실수와 재능부족과 잘못이 그 속에 들어가게 마련인데 완벽하게 선한 동기가 전달되지 않는 문화적 업적도 과연 선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잘못된 기도, 잘못된 설교, 전도나 간증을 했지만 타인이 복음을 제대로 수용했다면 과연 이 결과가 전도자의 선한 행위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참조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놓고 볼 때 칼빈주의 문화관은 그 취지의 거창함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실제에 있어서는 자기 탐욕을 정당화 하는 논거로 전용되고 있다. 즉 주의 일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는 변명의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썽의 소지는 애초부터 칼빈주의 문화관 그 자체에 함유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창안한 신론에 근거한 하나님 옹호주의 때문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칼빈주의적 문화관은 문화관 그 자체보다도 변증의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칼빈주의 주권사상, 또는 예정론 같은 것은 (모든 신학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이론을 배태한 자리를 일단 떴다하면 지나치게 성경보다 더 많은 말을 할 가능성이 있음을 칼빈주의적 문화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인식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옹호하다가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도 함께 옹호해 달라는 용감함이(?)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 하나가 바로 [칼빈주의적 문화관]이다.

 이러한 문화시각은 교인들의 구체적인 생활적용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를 문화 활동으로 해결하라고 짐 지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일이 수 없는 경우와 거기에 맞는 행동지침을 제정하는 것은 유대교 꼴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렇다 고해서 그냥 방치하자니 자신들의 야망이 인도하는 대로 구실을 달아 정당화하는 것이 또한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천면을 무시하고 구언의 원리만 믿으라고 하자니 교조주의로 빠져 실천적 힘을 상실한 죽은 칼빈주의가 될까봐 자못 염려스러워 진다.

 위와 같은 것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루터교 쪽의 문화관을 의식하여 그것을 반박하여 세상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는 칼빈주의 나름대로의 멋진 면을 나타내고자 노력해서 성경을 이용한 실책이 다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은 문화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점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2) 성경에서의 문화의 위상

 문화를 인간행위의 산물로 파악하고 문화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성경적으로 문화를 보는 시각은 저만치 외면당한다.

 인간 중심으로 문화를 파악하느냐, 하나님 중심으로 파악하느냐, 성경의 개념을 가져왔느냐, 안가져왔느냐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외로 문화에 대한 일반의 궁금증에 호응하느냐 아니면 그들의 호기심을 무시하느냐와 달려있다. 질문 자체를 공박하는 것이 성경적인 문화관의 출발지점이다.

 인간들이 아직도 자기행위의 산물인 문화에 대하여 무슨 의미를 주고 무슨 가치가 있을 거라고 여기며 하나님의 공정한 평가를 고대하는 태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뭔가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관심밖에 있다. 하나님에게 관심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 (창조 때의 모든 피조물들, 참조 로마서 8:18-22).

 그런 뜻에서 문화에 대한 가치논쟁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성경에도 분명 문화가 존재해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가 있어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인간들이 보는 문화관(칼빈주의적 문화관을 포함해서)과 하나님이 보는 문화관의 차이점은 인간들은 문화 그 자체로도 어떤 의미가 있지 않느냐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문화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문화]를 부정하는 것이요 [문화의 의미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가 하나님의 일의 대상이나 목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칼빈주의적 문화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이다. 즉 [인간문화]에서 [하나님 문화]로 전환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창세기 1장을 통해 밝히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지 하나님이 하늘에게 직접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일은 인간이 하지만 그것이 [인간문화]가 아니라 [하나님 문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관심사는 [인간을 통해서]라든지 [인간으로 말미암아]로 [하나님 문화]가 이루어진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문화]를 고발하는 데서 [하나님 문화]의 실체가 비로소 역사 속에 나타난다. 즉 인간행위, 인간문화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 하나님 사역의 주된 과정이요 절차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문화들을 긍정을 하던 부정을 하던 하나님의 뜻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문화]에 대한 부정 자체가 또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문화에 대한 지나친 관심 앞에서 하나님은 어떤 위상을 갖느냐 하는 것이 성경에서 문화가 어떤 위상을 갖느냐를 파악하는데 숨통을 트이게 한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은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나타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느냐를 따지지 않으신다. 거룩하라는 명령은 문화를 가지고 거룩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되어라 는 말씀이다. 여기서 [인간]이 되어라 는 말은 참된 문화사명 준수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죄라는 것이 문화기능의 상실이나 저하가 아니라 (가인 후손의 문화 활동이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을 두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관심 두는 바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문화란, 그 관계회복의 장(場)이 된다. 이것이 성경에서의 문화위상이다.

 그렇다면 문화란 보통 아는 것처럼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중립인가?

 그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을 고려해서 언급되어야 한다.

 (1) 하나님은 인간을 파악할 때 문화를 통해서 하신다.
 (2) 악이라든지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에만 적용되지 비인격적인 문화는 그 대상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상의 전제를 가지고 성경에 접근해 보면 문화란 이스라엘이라는 인격을 점검하기 위한 통로 구실을 하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정죄는 문화 자체의 문제 이전에 그 문화의 주인공 되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음을 언급하시는 것이다.

 문화가 인격과 연합되었기에 그 문화가 그 사회를 말해준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문화가 얼마만큼의 상처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그 문화가 현재 누구 관할 속에 있는가를 추적하여 밝혀주는 좋은 자료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다 (꼭 연합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아니라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실체는 밝혀진다).

 만약 연합되어 있다고 본다면 문화변경이 인격변화의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문화변경을 통한 인격변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인격변화를 하나님은 바로 호소하신다. 다만 그 증거물로 그들이 남긴 문화를 사용할 뿐이다.

 이상의 말을 종합해 보면 문화란 인간이 저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성경에서 위상을 지니지 문화발전 그 자체에 어떤 관심도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가 선하다니 악하다니 하는 말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또 문화가 선도 악도 아니다 는 말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항상 관계되는 인격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문화개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격변화를 요구한다. 그 인격의 선, 악 판단은 문화를 인용하여 추궁하지만 인격변화 요구에는 문화는 아무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만약 칼빈주의적 문화관이 주장하는 대로 선한 문화를 이룩한 것처럼 보였다하자. 그 문화를 하나님께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하시겠는가? 다음과 같이 답변하실 것이다.

 [나는 네가 행한 그 문화 속에서 난 다음과 같은 죄들을 밝혀냈다!]

 우리들은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고 누가 봐서라도 선하다고 판정 받을 만한 작업 속에서라도 자신의 죄악을 발견해야 한다. [나는 이래서 나의 행함으로 구원 못 받을 죄인이구나!] 문화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만약 자기가 행한 문화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한다면 그 문화가 선한 문화라든가 악한 문화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문화 속에서 자신의 죄악의 실체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문화를 악한 문화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인간이 악하다고 선언하신다. 만약 그것이 악한 문화이면 예수님은 악을 입고 오신 분이 되고 만다.

 다만 그 문화는 피곤한 문화일 뿐이다.


3. 결 론

 문화를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쓰는 경우를 봐서 좋다 나쁘다 를 결정하자는 의견이다. 그전까지는 옳다, 그르다 의 판단을 유보해 두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서 나온 그 어느 것도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모든 행위와 사상들은 죄 가운데서 만들어져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들은 목적에 있어 ‘스스로 신’이 되는 행위로서 방출된다. 하나님은 의도와 마음가짐에 주목한다.  ‘스스로 신’이 되는 행위 중의 일부가 종교성이며 이 종교성을 밑그림으로 하여 차단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창세기 3:24) 돌파하기 위한 조치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저지를 무시하자는 시도이다. 이것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들의 생래적 본성이다. 인간들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과학이 그러하고 기술개발이 그러하다.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들이 어찌 선한 문화로 평가 되고 후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창조 과학 회의 연구 업적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우회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하다. 환경 보호론도 마찬가지이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오로지 하나 뿐이고 또 그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인데 ….

 문화는 어떤 경우에서도 인간 곁에서 떨어지지 아니한다.

 인간들은 욕심을 발동시켜 자기 주변에 있는 문화를 변화시켜 하나님께 자랑하고 싶어졌다. 각 나라의 문화와 풍습은 자존심들의 덩어리이며 문화의 다양성이란, 거짓 신개념의 다양함이다.

 칼빈주의적 문화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욕심을 다음과 같은 신학적 변명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죄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사람 되었다. 이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손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사람을 만들어준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악한 자의 손에서 더럽혀진 세계를 우리를 통해서 개선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제 새 사람들이고 또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물론 기도를 통해서라도 말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 도와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믿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 내에만 갇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의인되었다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의인이다. [예수 안에서]의 의인이란 말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는 기대를 걸지 않고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들을 성령의 감독과 복종시키심 하에 살게 하겠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의인이란 자기 뜻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분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의인의 삶은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정과 욕심을 버리고 주님께 헌신하는데 있다. 무슨 일을 시키든 불평해서는 안 된다. 나를 통해서 했으니 자동적으로 나에게도 뭔가 가치 있는 것처럼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 없는 순간은 없는 것이다.

 성도에게 문화는 하나님의 용서 쪽으로 유도하는 은혜의 場이다.

 문화는 그 자체가 고통을 지녔지만 고난을 무릅쓰고 하나님은 그 거친 문화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악인에게는 계속해서 죄악을 폭로하는 증거물로서 제공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문화를 보고 핑계치 못할 것이다.

 문화의 의의는 저주받은 문화를 우리들의 본래의 죄성을 보이는 증거로서 드러내는데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발견한 문화의 위상이다.

 첨부파일 : 칼빈주의적 문화관의 한계와 성경적 문화관.hwp (64.0K), Down: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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