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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7:26:05 조회 : 5776         
[철학과 현대신학과의 연관성] 이름 : 이근호(IP:117.55.136.28)

그 내용은 첨부 파일에 들어있습니다.


철학과 현대신학과의 연관성


Ⅰ. 서 론
 
현대에 와서 현대신학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문제 해결을 위한 신학상의 정립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자긍성의 발로로서 개시되어진다. 강요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보여 주려고 하는 시도는 타인을 의식하고 그 타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져 하는 세계관 때문이다. 세계를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 받아드린다는 것은 세계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더 나아가서 그 공동체를 자기의 목숨과 운명을 맡기는게 된다.

신학도 인간이 하는 작업이다. 현대신학도 인간이 한다. 현대 신학을 평가할 때 그것의 진실됨이 세계라는 주위 공동체에 대한 공헌도로 결정된다면 그것은 항상 비 신학적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근원은 계시에 있지 계시의 대상에 있지아니하기 때문이다. 계시와 무관하게 형성된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지 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비계시적인 철학이 계시에 의해서만 판단받아야 될 신학에 영향을 주어서 형성된 신학을 과연 제대로 된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현대신학은 인류사회에 대한 공헌에 관심을 쏟다보니 철학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옳을 정도로 다른 내용들로 가득 채워졌다. 의도가 순수하고 신앙적이라고 해서 진리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고자하는 그 의도, 그 의도가 과연 계시와 일치되는 정신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 열매로 현대신학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대신학은 어떤 열매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자 했는가? 여기에 두가지 유형이 나온다. 하나는 존재로부터 신학과 또 다른 유형은 변화로부터의 신학이다. 사실 두 방법 다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그래도 이런 철학에 현대 신학자들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개인적으로 뭔가 사회에 공헌을 하는 것이 소박한 자기 포부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신께 대한 봉사의 한 유형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런 신학 행위들은 치밀하게 정돈된 사회에 빈틈없이 먹혀들어 가는 작업을 하기 위해 먼저 적(세상)의 동태를 파악한다. 그것이 현대 철학이다. 이 현대 철학의 취약점과 맹목성을 잘 공격하면 소기의 목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적에게 대한 공격이 논리성을 갖추려면 적의 정체를 낯 뜨겁게 폭로하므로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빼내어 올때와 같이 철학속에 갖혀있는 현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철학적인 맞 상대로서 변신이 요구된다고 믿고들 있다. 그래서 계시가 현대 신학의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현대신학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다. 비록 변명하기를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시의 우월성을 선포하기 위한 수순이라고들 하지만 철학으로 계시가 변명되지 않는다는 상식조차 자주 거론되지 않는 입장에 현대신학이 놓여있다. 그러면 현대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고 그 철학의 철옹성을 파괴하기 위해 신학자들이 존재로부터의 신학과 운동(변화)으로 부터의 신학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 보려는 것이 본론의 취지이다.


Ⅱ. 본 론

1. 현대철학의 핵심

철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지성으로 모든 궁극적인 것을 규명해 볼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즉 위로부터의 철학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철학이 있는데 이 두가지 접근 방법은 끊임없이 대립, 통합, 조화 되면서 철학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아예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무관심한 쪽으로 철학의 양태가 흘러가지만 어쨋든 그 궁극적인 것에 무관심하다는 그 자체가 아래로부터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하여튼 철학의 내용이 되지 않는 개념은 없을 정도로 세계의 모든 것이 철학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것이 살면서 계속 주위에 눈길을 돌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역시 궁극적인 것을 규명하자는데 있다. 비록 현대에 와서 궁극적인 것에 모른체 하지만 그 모른체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설명은 못하는 입장이다. 즉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말자고 구태여 설득해야 할 정도는 인간의 실존 모두를 설명하기위해 그 이유를 해명해주어야 한다. 흔히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고대 철학인들 만의 주체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 존재에서 운동이 나오며 또 그 운동이 모두다 동일하지 않고 변화무쌍한가에 대해서아직도 철학에서 미궁에 빠져있다. 이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경의로운 일로 받아드려진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변화하지 않고 늘 한가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절대적이고 영원히 불변적인 것을 탐구해야겠다는 의지는 사실 상 그렇게 탐구하고자하는 그 본인이 이미 영원 불변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처지에서나 나올 말이다. 만약 판단하고자 하는 자신 마저 흔들린다면 비록 절대자를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받아드릴 자신이 없기에 진리곁을 스쳐지날갈 수 있다.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하지만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드리기까지는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표상의 수납도 진리라서 수용한 것이아니라 다른 방법의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일단 인간을 신으로 고정시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철학까지 인간의 철학사는 공연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 존재와 운동간의 상관성을 파 해치기 위해서 각가지 모델과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존재와 운동은 서로 상반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다른 개념을 도입해서 사슬을 만들려고 했다. 최초로 시도된 것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 혹은 질료와 형상과의 관계로 고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속성의 차이를 모두 이런 식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보편성 정립에 무리가 있게 되었다. 뭔가 복잡해 진다는 것은 점점 해결책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포기하고 대신 상징과 유비라는 방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비슷한 속성끼리의 대비라는 것은 이미 존재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우나마 해석이 그럴 듯 하지만 미래 예측도에 있어서는 떨어지는 것이다. 즉 존재의 유비란 인간의 창의성을 속박하는데서 탁월한 논리체계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창의를 향한 자유성에 정명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포부를 정치적 지배사상에 붙들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해서 지금보다 더 발전된 삶을 구가하고자 하는 본능은(발전이 아니라 사실은 또 다른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 사물의 속성가운데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찾는데부터 시작된다. 모든 사물속에 있는 보편적 법칙을 찾아서 그 법칙에 따라 미래를 결정지을려고 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바로 기존 궁극적인 것에서부터 세상운동의 해명이 아니라 그런 기존 사상을 배제하고 운동가운데서 보편성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의심스러운 것은 제하고 의심스러울 것 없는 것만 남기고 그 토대위에 모든 것을 새로 정립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확고부동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 바로 생각하는 인간 바로 그 자체였다. 진리란 인간의 탐구노력에 의해서 모두 다 새옷을 입혀주어야 했다. 외부에서 들었던 경험과 그 감각된 경험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 체계화 될 때 세계의 진리는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인간의 탐구노력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행여나 인간에게서 나간 확고한 진리가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는 일은 없을까? 전에는 교회에서 말한 신이 인간을 지배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가 단순히 기계의 움직임네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도 그 기계의 일부가 되어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발생된다. 인간이라는 궁극적 존재와 결정된 자연법칙이라는 존재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운동이 해명이라는 것과 동시에 자연이 신으로 등극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그 요지부동한 운동성에 인간의 자유가 제한받게 되었다. 여기서 인간은 또다시 반동한다. 자연에게 가버린 영광을 반납받기 위해 그동안 인간 바깓에서 절대를 찾는 것을 지양하고 인간내부의 진리체계를 재조정해서 객관과 주관 모두를 상대화시키고 절대적인 것은 유보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앞일을 미리 점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히 보편타당한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되고만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을 절대정신으로 승화시켜 객관과 주관을 통합하는 절대정신을 인류발전의 동기로 내세우기도 한다. 어쨋든 일단 인간이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시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정신과 인간의 자유와의 싸움은 새로이 시작이 된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정신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면 거기서 무슨 발전의지가 표출되겠는가? 여기서 인간자체를 절대화 시키는 시도 자체를 공박하는 의견이 대두된다. 인간 자체를 절대화하는 시도의 부작용은 거기서 나온 결과와 결국 투쟁을 하는 모순에 빠지니 아예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믿지않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오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은 논리의 사슬을 이끌어 내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궁극적인 실제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오성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해명해 보려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규명해 보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역사를 움직이는 동기가 될 때 인간의 자유성은 최고조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이성과 자연 어느것이 궁극적 존재의 자리에 앉는가 하는 싸움이 끝나고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운동 그 자체에서 인간과 세계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궁극적인 존재탐구는 철학에서 거부된 것이다. 인간이 존재나 본질을 탐구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상황속에서 무상하게 변화하는 그 자체의 실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궁극적인 것을 염원하는 그 본능을 책망하는 주장과 더불어 다만 모르고 있다는 그 점을 인정하자는 철학운동이 이루어져 갔다.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신뢰하면서 사용하는 언어도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으며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비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신뢰할만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보는 것에 철학은 힘을 쓰기 시작했다. 모든 현상은 그야말로 실재가 아니라 현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자기 절대성을 포기함과 동시에 자연과학의 절대성도 유동적이다. 자연의 법칙이든 인간의 실존이든 간에 모두가 시간이 주는 변화 때문에 변화된다. 그러니 변화한다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진리인 셈이다. 변화가 궁극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 변화가 크게 보여지는 것이 사회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홀로 규정될 수 없고 역사와 사회라는 공간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규명된다. 나의 충동과 욕망이 그 자체로서는 허무하고 부조리하다. 그러나 사회를 위해서는 그렇게 허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계속적인 변화가 촉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것은 역사이며 또한 인간 공동체인 사회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만이 계속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어디로 가는 변화인지를 모른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위로부터의 철학이 이성에 대한 불신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철학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존재하는 것은 아뭇것도 없이 다만 실존하는 것만 남은 것이다. 이와 같이 동시에 종교도 같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세계는 이제 허무하다고 울고 있는 아이들에게 줄 사탕도 없게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울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 한 번 잡은 보물을 좀처럼 빼앗기지 않을려고 한다. 자기 내부에서 쉴새없이 궁극적인 것을 염원하는 본능과 싸우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은 갈등하고 있다. 무한을 향한 집념과 또 그 무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본능으로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욕구와 자기 만족이라는, 상호모순되는 두 성질이 서로 서로 죄악이라고 비방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계속 피곤해 한다.

자! 여기서 현대신학은 무슨 공헌을 하고 있느냐?  궁극적인 존재로 돌아오는 부탁을 했기 때문에 현대인은 현대신학이 시키는대로 궁극적인 존재로 돌아와서 자기만족이라는 속성을 메꾸어 주었다. 갈들이 해결되었는가? 천만에! 문제가 더욱 더 악화되었다. 자기가 선택한 그 궁극적 존재에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킨 운동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발전의 충동은 엉뚱한데서 찾게된다. 이것이 스스로 죄 의식으로 작용해서 갈등성은 더욱 심화된다. 욕심을 버리라는 궁극적 존재의 명령으로 인해 탐심이 자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탐심을 덮을 수 있는 양심적 죄의식이라는 혹이 하나 더 자라나게 되어 나중에는 정신 분열증 증세까지 이어질 수 있다. 궁극적 존재의 지시는 인간을 더욱 더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윤리를 향한 탐심을 하나 더 길러냄으로 허무의 균형을 깨뜨리게 된다. 여기에 대해 현대신학은 어떤 해결책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변화를 원하는 인간에게 변화가 종식된 존재가 들어왔을 때 그 변화를 위한 충동은 어디서 흡수해 주는가? 궁극적 존재를 향한 새로운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사이비한 종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무슨 변화든지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욕심과 자기 만족의 연속인 갈 등을 맞이하게 되는데 궁극적 존재의 개입으로 이 변화는 유한에서 유한으로 왔더 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에서 무한으로 왔다 갔다 한다. 만약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무한이라는 것은 진정한 자기 완결적인 무한이 아니라 유한의 연장 선상에 있는 무한이므로 드디어 유한에 불과하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궁극적 존재라고 여겼던 것에 대한 신뢰도가 사라지면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신은 믿는다는 변명만 늘어 놓는 불신자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자! 어째서 현대신학은 이런 결정적인 취약점을 지니게 되는가?

2. 현대신학이 보여주고 있는 철학적 경향

철학이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규명하려고 애쓰다가 인간이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궁극적 존재와 사물의 변화를 탐구하는 근거로서 소위 인식론 정립에 관심이 모아진다. 인식론이란 어떤식으로 인간 외부의 것을 아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론이란 일단 인간쪽의 입장에서 볼 때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져 진다든지 보인다든지 들린다든지 느껴진다든지 하는게 있어야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궁극적 진리나 보편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에 철학적 방법이 들어갈 여지가 생겨난다.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구체적 대상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 대상은 뭔가 잡혀야되고 존재하고 있다는 흔적이라도 지상에 떨어져 있어야 한다. 아뭇것도 없는 것을 상상해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느껴지지않고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사물로 구체화 되지 않는 그 배후의 궁극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때와 동일한 마음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것은 상상의 세계가 될 수가 있으면 환상의 일종일 수가 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증빙되지 않고 순전히 신앙인 개인의 주관에 달린 문제이다. 객관을 갖고 있다면 신앙으로 신앙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증빙되는 정보로 신앙이 이루어지니 어떤 면에서 신앙의 객관성이 보장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앙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신앙의 주관성과 객관성 이 모두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왔다. 특히 그리스도론에 있어 인식론으로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성립시켰고 존재론으로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제정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모순점이나 대립되는 점을 상호 보완하고 보상하는 쪽으로 해결을 하려고 했다.

철학에 있어서도 서로 충돌로 야기 시킨바가 있는 존재와 운동 또는 궁극적 존재와 인간, 궁극적 존재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사이의 갈등이 신학에서도 필연적으로 야기된다. 어떤이는 궁극적 실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경겅한 자만이 할 수 있고 중생받은 자만이 정리할 수 있는 신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또 어떤이는 궁극적인 신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비단 기독교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방종교의 한결같은 출발이기 때문에 기독교만의 고유의 계시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미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일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도 또 존재와 인식 때문에 둘로 나뉘어진다. 옛날 실제로 이 땅에 사셨던 나사렛 청년으로의 예수로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주의 자리에 등극해서 하나님 우편에 계서 천하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서 출발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만약 주 그리스도로 출발하면 인식론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로부터 출발하면 역사적인 문헌이나 고고학의 도움으로 그 당시의 상황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고 그속에서 구체적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를 재구성하게 된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 된) 바로 그분을 아는 순간 구원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된다.(요한일서 1:1)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를 보았고 알았고 설교를 들었고 피부로 접촉했지만  보편적인 믿음이 형성되지 못했다. 따라서 공통적인 믿음의 원리는 다른곳에서 나와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만이 하나님이 보낸 자(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6:65)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선별행위는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체계있게 정리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 의사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을 향한 염원과 자유가 하나님의 선별 의사에 의해 눌리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한다든지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심사와 계획과 활동을 예측하는 것에 관한 지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계시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방종교를 비롯해서 고대의 무수한정치지도자들 까지 자기만이 받은 고유한 신의 계시를 거론하는 혼란스러운 게시 풍토를 염두에 두고 보면 무엇이 게시냐 하는 것까지 우리 인간들의 손에 맡겨져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이 계시냐 아니냐 하는 것 까지 계시로 주어져야 되는 입장에 있다면 계시 판별에 관한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 하늘에서 이 땅을 방문해야 될 것 같다. 그런데 신의 이름으로 이 따에 등장한 인물이 어디 한 두명인가? 일단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유일한 인물로 취급하고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요한복음 3:13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라는 분만이 계시 결정권자이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특별한 책을 남긴 일이 없다. 다만 그분 본인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말씀은 자기의 활동을 통해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되면 계시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든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9)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계시의 혼란이 야기된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계시인가 아니면 그 역사적 인물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지향한 구약 성경이나 신약성경이 계시냐 하는 문제이다. 만약 성경이 계시라고 한다면 예수라는 분은 오직 성경의 범주안에서만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실제 인물로서의 예수가 계시라면 성경이란 예수님을 소개하는 역사 문헌의 일종으로 전환되고 성경을 포함한 역사에 실제로 발생한 일들이 계시의 범주를 형성하고 예수는 그 속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라 또 다른 문헌들이 어디서 뛰어나와 기존의 예수상에 치명적인 반박을 가하게 될 지 모를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자체를 계시라고 한다면 성경의 역사성이 사라지고 성경의 초월성만 부각되기 때문에 그 초월성을 증명할 역사적 근거가 마땅치 않는 상태에서 무리한 전제로 도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누가 뭐래도 성경은 하루 아침에 돌발상태에 의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인류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들을 제치고 독보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엄청난 비약을 허용해 주는 셈이 되며 이 성경에 대한 특혜는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적용시킨 맹목적 특혜이기 때문에 그런 특혜에 개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마저 세상사람들로부터 공정성이 결여된 종잡을 수 없는 신이라고 욕을 얻어 먹게 하는 이론이 된다. 일점 일획이라도 오류가 없을뿐더러 다른 계시는 일체 계시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성경 자기완결식 폐쇄주의 계시관을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신의 사랑을 구원의 기초로 하는 계시로 잡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비록 확실한 것을 계속해서 추적하는 과정에는 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해도 인류가 구원 받는데 하등 지장이 없는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모른데서 아는데로 나아가는 것은 계시 자체를 성립시켜 주지 못하는 발상이다. 계시 불인정 사고는 계시 불필요 사고와 연류되어서 나오는데 이것은 게시의 요청 자체가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기존에 대한 부정은 기존 세계의 죽음을 뜻하며 존재 근거를 말살하고 저주하고 심판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신의 적대행위이다. 신으로부터 원수 취급받는데서 오는 괴리감은 이미 신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에게 더욱 반발심만 가중시켜 줄 뿐이다.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는 이런 인간의 반발심에 합세해서 현대신학이 거짓된 신학을 살포하고 있다. 인간편에 서서 인간의 마음을 달래주면서도 동시에 신에 대한 최대한 예우를 해 주겠다는 심보는 그 자체로서 이미 사탄이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원래 모습을 갖춘 상태에서의 존재만을 수납하시고 좋아하신다. 이것을 도외시한 그 어떤 비 본래적 존재에게는 가차없는 심판과 저주만이 따라 붙는다.(창세기 6:5-7) 심판을 하나의 에피소드나 아찔했던 지난 날의 이야기로만 돌리는 것은 차라리 편하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전면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거론하지 않는 신학, 그 심판의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구원의 생명과실을 소개하려는 저의는 현대신학의 한계인 동시에 현대교회의 한계이다. 계시를 버리고 유사계시로 동원시킨 병든 이성과 양심의 가르침을 따라 정립된 신학이 어찌 인류의 복음이 될 수 있는가? 하루 속히 자기 완결적 계시인 성경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1) 존재로부터의 신학의 문제점

대체로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부터의 신학은 기독교를 이방종교와 무신론자들로부터 고유성을 유지시키는 변호책으로 많이 거론 되었다.

그들과 싸웠던 주된 문제는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이다. 성부신과 성자신과 성령신의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 세분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접근은 그분들 간의 관계나 운동과 작용을 규정하는데 미흡해질 우려가 있었다. 즉 존재에서 다시 운동을 끄집어내는데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존재와 운동을 동시에 해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했다. 그것이 삼위일체이론이다. 삼위일체란 기독교의 신을 규정할 때, 두 개의 다른 시작에서 보자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봐서 기독교의 신은 하나의 본질이다. 그리고 유일신이다. 신이 셋이 아니다. 그 다음에 작용과 관계면에서 보면 각기 독립이 유지되면서 고유의 기능을 하시는 세 인격이 나타난다. 모든 구원에 관한 운동은 이 세분의 고유한 활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로서 기독교는 존재와 운동의 관계를 규멍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 철학을 충분히 압도하는 종교로서 권위성을 유지했다. 본질과 기능과 시작을 하나로 합쳐서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 무한한 신의 이성을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에 여지없이 거부된다. 다만 신의 세계만이 이해되는 신 고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존재의 원천을 따로 이해하고 운동의 이해를 따로 이해해서 이 두 개의 원천의, 결합은 종교적 신비에 맡기게 되면 우선 지식이 아닌 무조건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서는 역시 궁극적으로 일관성 있는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강조점에 따라 교파의 분열이나 교단의 분열이 야기된다. 예를 들면,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의 신비성이 강조되고, 서방교회에서는 성자의 육화의 연장으로서 제도교회가 부각된다. 다같이 하나님을 신봉하면서 그것이 추상적으로 존재론적인 인식의 대상으로만 남고 지상에서의 구원사역의 통일성을 지울 수 있는 기준설정이 쉽지 않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기능을 위력의 존재양식에서 도출시키다보니 특히 성자에 대해서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여부를 해명하기 난처해졌다. 성자의 어느 기능이 어느 속성에 해당되는 부분인가에 혼동이 초해됐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구원론에 있어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존재형태와 성자의 존재형태간에 접촉점이나 구원사역의 창구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양식을 결정하기도 매우 복잡하게 되어버렸다. 즉 유한하고 소멸되는 연약한 인간이 불멸성을 갖고 불사성을 가지려면 불멸적인 존재와 결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어떤 부분이 인간의 유한성과 결합이 되는가? 만약 인성으로 결합하면 예수님의 연약한 육체의 범주내에서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이 가능하다고 하면 유한이 무한과 연결될 수 있다는 근거가 주어져야 하는데 실제로 피조물에게 있어 창조자의 만남은 곧 소멸과 죽음만이 초래할 뿐이니 이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중보자이라고만 해서는 신학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실제로 중보기능이 작용하게 되는 경로를 제시해야 한다. 이 과정에 관여된 세 존재, 즉 신과 중보자와 인간 이 모두를 존재론으로 정립을 하고 그 다음에 그 존재의 특수성에 의해 구원사역을  서술하자니 존재에서 운동이 나옴을 설득할 수 있는 마땅한 철학적 언어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영혼과 육체 둘로 나누어서 설명하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영혼과 예수님의 신성과의 관계가 혼란스럽고 또 예수님이 어떤 행위에 나섰을 때에 그 의지가 신성에서 나온 의지인지 아니면 인성에서 나온 의지인지 분간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문제의 복잡성은 인간에게도 있는데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지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과 육신의 결합관계와 예수님과 인간의 연합관계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해진다. 구원이라는 것이 유한한 인간을 무한한 신성에로의 참여라면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인간이 구원받는 과정이 같은 것인지 검토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과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식으로 행위가 나올 것이며 어떤 식으로 의지가 나올 수 있는지 규명하기 힘들어진다. 의지의 출처는 존재론적 속성의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놓고 구원받은 인간의 윤리를 규정할 때에 상당히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운동에 앞서 존재를 앞장 세우면 신학도 철학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그대로 안게 된다. 신학이 궁극적인 존재를 해명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신비로서 처리하는 것과 같이 실제 역사성에서 이루어진 구원사역도 존재론적으로 시작하면 삼위일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비로만 해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앙의 객관성이 약화되고 무의미한 개념을 동원한 주관성이 부각되고 활개친다. 언어나 개념화라는 것도 객관에 관한 공통적 인식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모두다 주관성을 강조하면 언어라는 것도 주관에 따라 상이한 개념이 되고 만다. 여기서 존재론적 신학의 한계가 있다. 객관성보다 주관성에 강조한 현대신학자도 있다. 소위 “신앙의 유비”이다. 신앙의 유비라는 말은 중세신학의 존재의 유비에 대응해서 나온 주장이다.

존재의 유비란 피조물 속에서 창조물에 관한 모종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거기에 비해 신앙의 유비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고 인간이 그러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포착되는 영역 하에서만 진실이 밝혀진다는 뜻에서 ‘신앙의 유비’이다. 신앙이 무엇이냐 라는 그 자체의 객관성을 상실되고 다만 신앙의 내용이 ‘말씀’이라는 객관성을 갖게 된다. 말씀을 믿는 것은 모두 신앙이 되며 뿐만아니라 존재에서 운동을 그집어내기 위해 ‘스스로 말씀이 되는 말씀’이 되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존재하는 말씀과 운동하는 말씀이 있는 셈이다. 또 여기에 기록된 말씀인 성경까지 덧붙인다. 이렇게 되면 양태론적 삼위일체의 이론이 말씀의 신비로 대용되어 나타난다. 하나이면서도 세가지 형태와 기능을 하게 된다. 그러니 세 기능이 다 모이는 경우에만 말씀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의 기능만으로 계시로 불릴 수 없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와 보이는 존재와 운동 이 세가지를 모두 해명하고 있는게 아니라 모두를 통합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즉 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결과만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궁극적 존재를 개념화 시키는 것이 불가능해보인다. 이것이 현대신학의 한계이다. 그러면 운동으로부터 신학은 모든 구원의 원리를 풀이할 수 있을까?

(2) 운동으로부터의 신학의 문제점

역사는 계시의 밑받침인가? 계시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부스러기는 역사 위에 모두 떨어졌는가? 그래서 계시를 역사적 사견으로 얼마든지 대체해서 나타낼 수 있을까?

계시의 객관성을 보장받기 위해 역사에 대해 관심이 높아갔다. 그러나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인 공간과 시간에서 아무래도 시간해석에 더 치중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왜 시간 속에서 우주만물은 변화하는가? 혹시 그 변화가 계시의 변화와 연관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줄을 이어 등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역사 속에 깔려있는 계시를 찾아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는듯한 발상들이 신학계에 번지지 시작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계시를 찾기 위한 작업에서 골칫거리가 되는 것은 ‘우연’이다. 우연은 계시의 일관성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미래가 이 ‘우연’ 때문에 예측되지 못한다. 역사가 일관성이 있는 계시가 되려면 ‘필연’만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심지어 흔히 우연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도 모두 필연으로 통역되어져야 한다.

우연들을 필연으로 고치는 작업, 이 작업은 정말 대단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또한 변화 속에서 불변을 정립하는 행위이며 운동에서 궁극적 존재의 본질을 파악해내고자 하는 노력이다. 과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얼굴을 내밀고 있을까? 역사를 올바르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탐구자가 역사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그래야 객관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가 역사로부터 영향받는 인물이다. 그래서 역사로부터 이탈하지 못한 존재가 역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과정이 요구된다. 첫째는 역사속에서 역사와 무관한 순수한 인간의 본질을 규명해 내어야 하고, 둘째는 그렇게 분리된 인간만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해서 그 곳에 담겨 있는 계시를 해석할 능력이 있다. 물론 계시를 알고자하는 그 인간조차 역사 속에 계시 발현의 일부가 됨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한다.

우선 인간이 역사를 아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을 조사해 봐야 한다. 여기에 가능하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 있는 인간을 찾으러 왔지 역사밖에 초월해 있는 인간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우정의 만남이 아니라 심판으로 만나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믿으려고 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믿음이라는 행위는 자기 이해를 스스로 파기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가차없이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에 강조를 두는 쪽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수용하지만 구속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구속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더라도 과거를 통해 현재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조립하는 행위하므로 신앙이 설자리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양쪽의 의견이 상반되는 것같이 보인다. 즉 구속사를 주장하는 쪽과 구속사를 인정하지 않는 쪽이 서로 반대의견으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구속사 쪽은 구속사와는 별도로 세속역사를 내세운다. 거기에 반해 구속사를 인정하지 않는 쪽도 수평적인 역사와 수직적인 역사를 들먹인다. 그리고 두 개를 분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분명 역사는 존재하고 있고 또 오직 하나뿐이다. 그런데 현대신학자들은 왜 역사의미를 둘로 나누어야만 이야기가 되는가? 물론 역사를 하나로 해서 구속사와 세속역사를 동일시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있어 역사는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최종 계시로서의 의미가 다른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 역사속에서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실체를 끄집어 내어야 역사속에서의 계시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신학의 구원(구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구출이란 구출되어야 될 상황이 있고 그 다음에 구출되고 난 후에 누노릴 새로운 상황이 있는데 전의 상황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로서의 계시를 설명하면서 구원에 치중을 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구원의 바탕이 되는 현역사 전부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오직 신앙으로 하나님이 가져다주는 제대로 된 세상을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현 역사에서 어떤 가능성이나 가치를 찾아내려고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을 과소평가한 결과로만 보일 뿐이다. 물론 세세상의 모습을 알리는 계시가 곧 처분해야 될 현세계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그 표상과 언어라는 것은 이 역사 속에 이미 들어 있는게 아니다. 이미 들어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역사 전부를 심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계시가 이 저주받은 세계에 떨어지는가? 그 저주받은 세계 속에서는 구원되기 전의 인간도 저주의 대상으로 놓여 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계시할 때는 그들이 뭔가 알고 있고 해석할 능력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배제된다. 분명 그들이 이해하지만 그들의 이해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해도를 능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이 이미 체험하고 이해한 적이 있는 세계를 계시로 준다면 하나님의 세계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가 아니다. 다만 과거 역사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구속사를 반대하는 입장은 인간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자기해석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역사를 알 수 없다는 취지이다. 그래서 인간이 역사를 규명할 위치에 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역사가 무엇인가 보다 묻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결국 역사는 인간학에 머물고 만다. 역사를 알기 전에 인간을 알아야 하고 인간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과 만나면 역사에 대한 중요성보다는 지금, 현재 영원한 실체와 접합하게 된다. 세상의 역사연구는 지나온 것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기는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역사이해란 흔히 미래에 의해서 규정되는 아니라 과거에 억매이고 과거의 연속선상에 있어 뭔가 새로움을 허용치 않는 것이 된다. 거기에 비해 신앙이란 미래를 위해 과거에 억매여 있던 역사와 결별하고 과거에 의해 객관화 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금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미래를 앞당겼다는 뜻에서 비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역사관으로 해서갈 수 없는 영원한 현재에 이미 찬여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아직도 역사운운하는 것은 신앙에서만 확인되는 구원을 역사라고 하는 인간의 자기 이해 속에서 신앙을 찾으려는 불신앙적인 태도일 수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에게 다가온 데서부터 비롯된다. 인간에게는 신앙을 유발시킬 그 어떤 요소도 미리 들어있지 않다. 종말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인간의 만난이란 인간의 역사적 관념이 정지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계는 역사 속에서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를 부인하는 쪽에서는 “인간이 구원받고 난 뒤에도 구속사라는 역사관을 들먹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자체도 인간의 자기이해에 불과하다면 구속사라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을 옛날 역사관 위에 그림을 베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밑그림과 채색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합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속사를 거부하는 입장에 대해 가장 많이 공격하는 부분은 객관성 확보문제이다. 신앙을 거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있어야 하고 복음의 내용이 인간 세계에 대한 부정과 저주와 심판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관성있고 체계적인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과연 신약성경에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신앙인의 눈에만 의미있게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지만 어쨌든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모든 계획은 개인의 구원과 신앙의 근거로만 압축시켜 주장하는 것은 마치 입구만 소개하고 집안으로 인도하지 않는 청지기와 같은 것이라고 구속사를 옹호하는 자들은 주장한다.

구속사와 비구속사학파의 결점은 역사속에서 실존하는 인간을 완벽하게 분석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죄받은 현세계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해명하지 못하고 다만 새세계와 비교해서 폐기되어야만 한다는 연관성을 가질 뿐이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세계가 무엇이냐를 설명하지 못하고 옛세계와 비교해 볼 때, 해명불가능한 세계라는 정도에 그친다. 물론 이 사시에 인간이 놓여있다. 따라서 이 두 세계를 알려면 그 속에서 다리역할하는 인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란 모든 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켜 자기 안에 세계를 건설하고 그 세계관으로 외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이해된다. 인간은 뭔가로부터 탈출하려는 것도 새로운 것이 되려는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주위의 여건을 이용하려는 데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면 그와 같은 충동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또 한계를 느끼는 그 한계내용의 객관성과 또 무엇이 되려는 목표의 객관성은 어디서부터 끌어당긴 것인가? 이는 인간이 인간이기 전에 외부 세계와 연결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외부세계와 인격을 규정한 객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인간이 돌처럼 존재 그 자체로만 규정될 것 같으면 그 속에서 어떤 객관도 주관의 이름으로 대체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록 한계에 처한다 할지라도 어떤 객관성을 규정한 초월의 몸부림을 쉬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주관에서 주관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라 할지라도 어떤 객관으로부터 출발해서 어떤 객관으로 달려가는 주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객관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가 자기 한계를 표현 것밖이라 할지라도 어떤 객관과의 만남에서 주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상황에서 새로운 주관이 주어졌을 때, 그 때의 주관은 어떠한 객관으로 내용을 형성할 것인가? 그 내용이 되는 객관이 따로 있을 게 아닌가? 객관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객관이 순수한 객관으로 작용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새 주관으로 파고 들어왔을 때 그것의 역사적 성격이나 의미는 상실되고 객관적 내용은 오직 자기 자신의 모습만 보인다. 즉 자기를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만을 이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역사 밖으로 빠져 나올 수없고 역사와 무관한 순수한 자신을 분리할 길이 막연해진다. 어쩌면 오히려 이 자체가 인간의 본 모습인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흔히 역사라고 불리는 것은 사건의 나열만 있을 뿐이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놓인 체계적인 흐름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오직 주관화된 객관만이 있기에 보편타당성이 상실되며 어디서 옳다고 검증받을 길이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은 어떤 취지의 행위일까? 물론 고발하며 정죄이며 심판이다. 그러면 어떤 인간이 되라는 말인가? 역사가 더 이상 무의미하고 하나님에 의해 종결됐다면 인간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만을 전하면 정죄받은 인간의 주관이 복음의 객관적 내용이 되는 셈이다. 바로 이러한 심판받은 고백(신앙)의 사건을 체계적으로 연결한 것으로 구속사를 형성해도 문제가 될까? 신앙사건을 한데 모아 일관성있게 해석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신자에게 수긍이 가는 보편타당성 있는 해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검증받은 단계를 거친 사건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거기에 억매일 필요가 없다. 이러한 구속사는 역사에 강조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성이 있는 구원행위에 강조점을 두게 된다. 따라서 역사로서의 객관성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관성에도 억매이지 않는다. 인간의 의한 객관과 주관에 의해 뽑히지도 않고 새로운 계시 영역에 의해서 뽑혀나온 사건과 지혜의 집합들로 구성된 계시의 영역이 요구된다. 그 계시가 무엇인가? 그것이 성경이라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돌멩이는 돌멩이만 계시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인간만 계시한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한다. 예수님은 예수님만이 계시한다. 운동하고 있는 존재에서 발견되는 것은 운동의 의미가 아니라 단지 존재의 의미만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를 이어주고 모든 계시를 통합시켜줄 새로운 계시의 영역이 요구된다. 이것을 성경으로 간주하면 어떨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할 때 성경만이 계시라고 보면 어떨까? 모든 존재자의 불연속성이 성경 안에서 영속성을 갖는다고 하면 어떨까?

(3) 성경신학의 의의

신학이 성경해석학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하여 게시하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이다. 성경 자체에 대해 일체의 비판이나 오류시비가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책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성경을 신성시하는 입장에서도 이단적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자(汝字)주의 또는 문자주의이다. 성경 안에서 세속역사의 의미를 밝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한 눈자해석에 매여있는 유대교나 세대주의자들은(혹은 전천년주의자들) 사실은 성경을 최종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느껴오는 역사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는 자들이다. 이미 확보한 거룩(성경)으로부터 더욱 큰 거룩(교회)쪽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손수 확인해보고 싶은 인간들의 염원이다. 성경문자주의가 크게 세력을 펼치는 것은 인간들의 종교적 염원과 관련있다. 주술가나 무당들에게는 신비스러운 문자는 한자한자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포괄적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문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운명적 역사관이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이며 세대주의이다. 그들의 이러한 탐구와 노력들은 하나님이 언어 속에 숨겨놓은 비밀을 인간이 자기의 계산과 숫자풀이를 통해 찾아내어야지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지식이 구원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심오하고 신기한 놀이로 보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신기한 놀이를 통해서 인간에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성경이 신성화되니 그 신성함에 근거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이 신성해진다. 종교 의식에 동원되는 제사장도 거룩하고 그 공간도 거룩하고 그 시간대도 거룩하고 그 종교조직체가 거룩해진다. 즉 현재 있는 종교조직체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보다 크게, 보다 확산되게(소위 선교운동), 보다 성장되게 조직을 이끌어 나가게 되므로 종교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달성해서 좋고 거기에 찾아든 손님들은 자신들이 벌인 일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응답이 일치되는 신과 함께 있다는 구원의 안정성 확보가 기분좋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경해석은 더욱 간편해진다. 즉 어떤 본문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저 “교회 성장, 교회 확장, 교회 발전, 교회 부흥, 교회 봉사, 교회 헌신”쪽으로 해석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명이라고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미 확인받아 놓았다. 올바른 성경해석과 잘못된 성경해석의 평가를 교회성장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큰 교회가 곧 선(善)이 되는 셈이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신의 거룩한 행위를 경험한다. 이들에게는 주문을 외우고 주술하고자 하는 븐능을 성경문자주의가 만족을 시켜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무지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 정신에 의해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애초부터 성경이 아니라 성경의 도움으로 밝혀지기를 바라는 역사의 예상상황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사는 메시아의 도우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십자가를 최우선적으로 앞장 세우는 사도의 정신과도 맞지 않다.(고린도전서 2:2/갈라디아서 6:14)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인간의 행위 전체에 결쳐 심판하기 위함이다.(로마서 10:1-3)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가증된 것이며 이단적이다. 애초에 성경을 계시 그 자체로 상정한 이유도 주관과 객관이 고발당한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계시로 제고되었음을 전제로 한데서 비롯된다.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입장에 서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자로 성경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갈라디아서 2:20) 이렇게 볼 때 문자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문자주의는 낱말하나 단어하나 문장하나를 해석하는 문학비평의 방법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구원받고 난 뒤의 이성은 정화된 이성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의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발견할 때에 정화된 이성은 하나님께 심판받은 자신의 겸손이 바른 분별력을 제공한다. 선입감없이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한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반견되는 것은 원래 자기의 마음가짐이다. 십자가는 십자가만이 만나게 되어 있다. 십자가 정신이 아닌 자기 염원에 의한 구원의지로 십자가 정신을 파악하려면 참된 본문의 뜻과 어긋난다. 문자로만 해석하는 것은 일반적인 과학적인 문학비평에서나 호응 받을 일이다. 최근의 언어분석 철학에 의해면 그 정당성이 상실된다. 언어분석, 문확비평의 객관성에 주관성이 침범한 것이다. 십자가 정신에 입각한 사람의 이성과 예지는 성경해석에 장애가 되는가? 그 자체는 장애가 되지만 소극적인 측면에서 참된 해석에 공헌을 하게 된다. 바른 성경해석을 했다하자(논리적으로 십자가를 발견했다하자)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예지와 영감과 이성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여길만한 위치까지 내려갔는데 끝나고 보니 하나님이 내 이성과 예지를 꺾어버리고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로서 십자가 정신이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성경해석 과정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십자가 정신은 흘러넘쳐 나오게 된다. 성경 해석이 옳다, 그르다는 평가는 십자가 정신으로 모두 해소된다.  기술적인 면에서 완벽이란 하나님께는 건방지고 십자가 정신에 역행하고 애초부터 성경의 존재의의에 대립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가 십자가 정신인 것처럼 포장될 위험성도 있다. 성경해석을 해놓고 비합리성과 비논리성을 자랑한다면 이것도 십자가 정신에 위배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성과 합리성이 성경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죄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죄성이 개입해야 성경해석을 통해 인간의 회개를 촉발할 수 있는 계시가 된다. 계속적인 합리적인 신학의 추구와 노력이야말로 차라리 겸손의 표상이다. 계속해서 자신을 부인하는 바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영광받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1)


Ⅲ. 결 론

인간이 한 모든 일은 그것이 철학이든지 신학이 되었든지 문제가 있다. 이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오히려 누를 끼치게 된다. 오직 십자가 사건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 이성과 지혜를 통한 모든 본능적인 충동적 결과가 하나님을 욕되게 했고 그 결과로 인류가 저주받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진정한 겸손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성경 신학은 일반적인 역사에 근거를 둔 구속사와 다르다. 성경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를 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세언약”으로 표현된다. 구약을 연구하면서 언약의 본질을 파악하고, 신약을 연구하면서 이미 성취된 언약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약을 통해서 성경이라는 계시의 일관성을 가지도록 권유하고 싶다. 성경의 일관성은 이미 십자가 정신으로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만 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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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IP:124.♡.87.13) 10-01-22 11:55 
철학과 현대신학과의 연관성


Ⅰ. 서 론
 
현대에 와서 현대신학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문제 해결을 위한 신학상의 정립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자긍성의 발로로서 개시되어진다. 강요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보여 주려고 하는 시도는 타인을 의식하고 그 타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져 하는 세계관 때문이다. 세계를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 받아드린다는 것은 세계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더 나아가서 그 공동체를 자기의 목숨과 운명을 맡기는게 된다.

신학도 인간이 하는 작업이다. 현대신학도 인간이 한다. 현대 신학을 평가할 때 그것의 진실됨이 세계라는 주위 공동체에 대한 공헌도로 결정된다면 그것은 항상 비 신학적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근원은 계시에 있지 계시의 대상에 있지아니하기 때문이다. 계시와 무관하게 형성된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지 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비계시적인 철학이 계시에 의해서만 판단받아야 될 신학에 영향을 주어서 형성된 신학을 과연 제대로 된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현대신학은 인류사회에 대한 공헌에 관심을 쏟다보니 철학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옳을 정도로 다른 내용들로 가득 채워졌다. 의도가 순수하고 신앙적이라고 해서 진리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고자하는 그 의도, 그 의도가 과연 계시와 일치되는 정신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 열매로 현대신학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대신학은 어떤 열매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자 했는가? 여기에 두가지 유형이 나온다. 하나는 존재로부터 신학과 또 다른 유형은 변화로부터의 신학이다. 사실 두 방법 다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그래도 이런 철학에 현대 신학자들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개인적으로 뭔가 사회에 공헌을 하는 것이 소박한 자기 포부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신께 대한 봉사의 한 유형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런 신학 행위들은 치밀하게 정돈된 사회에 빈틈없이 먹혀들어 가는 작업을 하기 위해 먼저 적(세상)의 동태를 파악한다. 그것이 현대 철학이다. 이 현대 철학의 취약점과 맹목성을 잘 공격하면 소기의 목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적에게 대한 공격이 논리성을 갖추려면 적의 정체를 낯 뜨겁게 폭로하므로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빼내어 올때와 같이 철학속에 갖혀있는 현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철학적인 맞 상대로서 변신이 요구된다고 믿고들 있다. 그래서 계시가 현대 신학의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현대신학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다. 비록 변명하기를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시의 우월성을 선포하기 위한 수순이라고들 하지만 철학으로 계시가 변명되지 않는다는 상식조차 자주 거론되지 않는 입장에 현대신학이 놓여있다. 그러면 현대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고 그 철학의 철옹성을 파괴하기 위해 신학자들이 존재로부터의 신학과 운동(변화)으로 부터의 신학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 보려는 것이 본론의 취지이다.


Ⅱ. 본론

1. 현대철학의 핵심

철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지성으로 모든 궁극적인 것을 규명해 볼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즉 위로부터의 철학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철학이 있는데 이 두가지 접근 방법은 끊임없이 대립, 통합, 조화 되면서 철학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아예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무관심한 쪽으로 철학의 양태가 흘러가지만 어쨋든 그 궁극적인 것에 무관심하다는 그 자체가 아래로부터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하여튼 철학의 내용이 되지 않는 개념은 없을 정도로 세계의 모든 것이 철학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것이 살면서 계속 주위에 눈길을 돌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역시 궁극적인 것을 규명하자는데 있다. 비록 현대에 와서 궁극적인 것에 모른체 하지만 그 모른체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설명은 못하는 입장이다. 즉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말자고 구태여 설득해야 할 정도는 인간의 실존 모두를 설명하기위해 그 이유를 해명해주어야 한다. 흔히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고대 철학인들 만의 주체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 존재에서 운동이 나오며 또 그 운동이 모두다 동일하지 않고 변화무쌍한가에 대해서아직도 철학에서 미궁에 빠져있다. 이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경의로운 일로 받아드려진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변화하지 않고 늘 한가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절대적이고 영원히 불변적인 것을 탐구해야겠다는 의지는 사실 상 그렇게 탐구하고자하는 그 본인이 이미 영원 불변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처지에서나 나올 말이다. 만약 판단하고자 하는 자신 마저 흔들린다면 비록 절대자를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받아드릴 자신이 없기에 진리곁을 스쳐지날갈 수 있다.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하지만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드리기까지는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표상의 수납도 진리라서 수용한 것이아니라 다른 방법의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일단 인간을 신으로 고정시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철학까지 인간의 철학사는 공연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 존재와 운동간의 상관성을 파 해치기 위해서 각가지 모델과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존재와 운동은 서로 상반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다른 개념을 도입해서 사슬을 만들려고 했다. 최초로 시도된 것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 혹은 질료와 형상과의 관계로 고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속성의 차이를 모두 이런 식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보편성 정립에 무리가 있게 되었다. 뭔가 복잡해 진다는 것은 점점 해결책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포기하고 대신 상징과 유비라는 방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비슷한 속성끼리의 대비라는 것은 이미 존재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우나마 해석이 그럴 듯 하지만 미래 예측도에 있어서는 떨어지는 것이다. 즉 존재의 유비란 인간의 창의성을 속박하는데서 탁월한 논리체계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창의를 향한 자유성에 정명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포부를 정치적 지배사상에 붙들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해서 지금보다 더 발전된 삶을 구가하고자 하는 본능은(발전이 아니라 사실은 또 다른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 사물의 속성가운데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찾는데부터 시작된다. 모든 사물속에 있는 보편적 법칙을 찾아서 그 법칙에 따라 미래를 결정지을려고 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바로 기존 궁극적인 것에서부터 세상운동의 해명이 아니라 그런 기존 사상을 배제하고 운동가운데서 보편성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의심스러운 것은 제하고 의심스러울 것 없는 것만 남기고 그 토대위에 모든 것을 새로 정립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확고부동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 바로 생각하는 인간 바로 그 자체였다. 진리란 인간의 탐구노력에 의해서 모두 다 새옷을 입혀주어야 했다. 외부에서 들었던 경험과 그 감각된 경험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 체계화 될 때 세계의 진리는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인간의 탐구노력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행여나 인간에게서 나간 확고한 진리가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는 일은 없을까? 전에는 교회에서 말한 신이 인간을 지배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가 단순히 기계의 움직임네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도 그 기계의 일부가 되어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발생된다. 인간이라는 궁극적 존재와 결정된 자연법칙이라는 존재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운동이 해명이라는 것과 동시에 자연이 신으로 등극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그 요지부동한 운동성에 인간의 자유가 제한받게 되었다. 여기서 인간은 또다시 반동한다. 자연에게 가버린 영광을 반납받기 위해 그동안 인간 바깓에서 절대를 찾는 것을 지양하고 인간내부의 진리체계를 재조정해서 객관과 주관 모두를 상대화시키고 절대적인 것은 유보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앞일을 미리 점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히 보편타당한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되고만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을 절대정신으로 승화시켜 객관과 주관을 통합하는 절대정신을 인류발전의 동기로 내세우기도 한다. 어쨋든 일단 인간이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시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정신과 인간의 자유와의 싸움은 새로이 시작이 된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정신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면 거기서 무슨 발전의지가 표출되겠는가? 여기서 인간자체를 절대화 시키는 시도 자체를 공박하는 의견이 대두된다. 인간 자체를 절대화하는 시도의 부작용은 거기서 나온 결과와 결국 투쟁을 하는 모순에 빠지니 아예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믿지않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오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은 논리의 사슬을 이끌어 내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궁극적인 실제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오성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해명해 보려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규명해 보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역사를 움직이는 동기가 될 때 인간의 자유성은 최고조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이성과 자연 어느것이 궁극적 존재의 자리에 앉는가 하는 싸움이 끝나고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운동 그 자체에서 인간과 세계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궁극적인 존재탐구는 철학에서 거부된 것이다. 인간이 존재나 본질을 탐구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상황속에서 무상하게 변화하는 그 자체의 실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궁극적인 것을 염원하는 그 본능을 책망하는 주장과 더불어 다만 모르고 있다는 그 점을 인정하자는 철학운동이 이루어져 갔다.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신뢰하면서 사용하는 언어도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으며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비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신뢰할만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보는 것에 철학은 힘을 쓰기 시작했다. 모든 현상은 그야말로 실재가 아니라 현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자기 절대성을 포기함과 동시에 자연과학의 절대성도 유동적이다. 자연의 법칙이든 인간의 실존이든 간에 모두가 시간이 주는 변화 때문에 변화된다. 그러니 변화한다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진리인 셈이다. 변화가 궁극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 변화가 크게 보여지는 것이 사회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홀로 규정될 수 없고 역사와 사회라는 공간속에서 인간의 모습이 규명된다. 나의 충동과 욕망이 그 자체로서는 허무하고 부조리하다. 그러나 사회를 위해서는 그렇게 허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계속적인 변화가 촉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것은 역사이며 또한 인간 공동체인 사회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만이 계속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어디로 가는 변화인지를 모른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위로부터의 철학이 이성에 대한 불신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철학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존재하는 것은 아뭇것도 없이 다만 실존하는 것만 남은 것이다. 이와 같이 동시에 종교도 같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세계는 이제 허무하다고 울고 있는 아이들에게 줄 사탕도 없게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울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 한 번 잡은 보물을 좀처럼 빼앗기지 않을려고 한다. 자기 내부에서 쉴새없이 궁극적인 것을 염원하는 본능과 싸우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은 갈등하고 있다. 무한을 향한 집념과 또 그 무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본능으로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욕구와 자기 만족이라는, 상호모순되는 두 성질이 서로 서로 죄악이라고 비방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계속 피곤해 한다.

자! 여기서 현대신학은 무슨 공헌을 하고 있느냐?  궁극적인 존재로 돌아오는 부탁을 했기 때문에 현대인은 현대신학이 시키는대로 궁극적인 존재로 돌아와서 자기만족이라는 속성을 메꾸어 주었다. 갈들이 해결되었는가? 천만에! 문제가 더욱 더 악화되었다. 자기가 선택한 그 궁극적 존재에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킨 운동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발전의 충동은 엉뚱한데서 찾게된다. 이것이 스스로 죄 의식으로 작용해서 갈등성은 더욱 심화된다. 욕심을 버리라는 궁극적 존재의 명령으로 인해 탐심이 자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탐심을 덮을 수 있는 양심적 죄의식이라는 혹이 하나 더 자라나게 되어 나중에는 정신 분열증 증세까지 이어질 수 있다. 궁극적 존재의 지시는 인간을 더욱 더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윤리를 향한 탐심을 하나 더 길러냄으로 허무의 균형을 깨뜨리게 된다. 여기에 대해 현대신학은 어떤 해결책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변화를 원하는 인간에게 변화가 종식된 존재가 들어왔을 때 그 변화를 위한 충동은 어디서 흡수해 주는가? 궁극적 존재를 향한 새로운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사이비한 종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무슨 변화든지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욕심과 자기 만족의 연속인 갈 등을 맞이하게 되는데 궁극적 존재의 개입으로 이 변화는 유한에서 유한으로 왔더 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에서 무한으로 왔다 갔다 한다. 만약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무한이라는 것은 진정한 자기 완결적인 무한이 아니라 유한의 연장 선상에 있는 무한이므로 드디어 유한에 불과하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궁극적 존재라고 여겼던 것에 대한 신뢰도가 사라지면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신은 믿는다는 변명만 늘어 놓는 불신자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자! 어째서 현대신학은 이런 결정적인 취약점을 지니게 되는가?

2. 현대신학이 보여주고 있는 철학적 경향

철학이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규명하려고 애쓰다가 인간이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궁극적 존재와 사물의 변화를 탐구하는 근거로서 소위 인식론 정립에 관심이 모아진다. 인식론이란 어떤식으로 인간 외부의 것을 아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론이란 일단 인간쪽의 입장에서 볼 때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져 진다든지 보인다든지 들린다든지 느껴진다든지 하는게 있어야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궁극적 진리나 보편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에 철학적 방법이 들어갈 여지가 생겨난다.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구체적 대상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 대상은 뭔가 잡혀야되고 존재하고 있다는 흔적이라도 지상에 떨어져 있어야 한다. 아뭇것도 없는 것을 상상해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느껴지지않고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사물로 구체화 되지 않는 그 배후의 궁극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때와 동일한 마음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것은 상상의 세계가 될 수가 있으면 환상의 일종일 수가 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증빙되지 않고 순전히 신앙인 개인의 주관에 달린 문제이다. 객관을 갖고 있다면 신앙으로 신앙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증빙되는 정보로 신앙이 이루어지니 어떤 면에서 신앙의 객관성이 보장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앙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신앙의 주관성과 객관성 이 모두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왔다. 특히 그리스도론에 있어 인식론으로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성립시켰고 존재론으로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제정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모순점이나 대립되는 점을 상호 보완하고 보상하는 쪽으로 해결을 하려고 했다.

철학에 있어서도 서로 충돌로 야기 시킨바가 있는 존재와 운동 또는 궁극적 존재와 인간, 궁극적 존재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사이의 갈등이 신학에서도 필연적으로 야기된다. 어떤이는 궁극적 실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경겅한 자만이 할 수 있고 중생받은 자만이 정리할 수 있는 신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또 어떤이는 궁극적인 신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비단 기독교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방종교의 한결같은 출발이기 때문에 기독교만의 고유의 계시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미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일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도 또 존재와 인식 때문에 둘로 나뉘어진다. 옛날 실제로 이 땅에 사셨던 나사렛 청년으로의 예수로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주의 자리에 등극해서 하나님 우편에 계서 천하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서 출발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만약 주 그리스도로 출발하면 인식론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로부터 출발하면 역사적인 문헌이나 고고학의 도움으로 그 당시의 상황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고 그속에서 구체적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를 재구성하게 된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 된) 바로 그분을 아는 순간 구원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된다.(요한일서 1:1)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를 보았고 알았고 설교를 들었고 피부로 접촉했지만  보편적인 믿음이 형성되지 못했다. 따라서 공통적인 믿음의 원리는 다른곳에서 나와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만이 하나님이 보낸 자(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6:65)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선별행위는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체계있게 정리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 의사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을 향한 염원과 자유가 하나님의 선별 의사에 의해 눌리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한다든지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심사와 계획과 활동을 예측하는 것에 관한 지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계시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방종교를 비롯해서 고대의 무수한정치지도자들 까지 자기만이 받은 고유한 신의 계시를 거론하는 혼란스러운 게시 풍토를 염두에 두고 보면 무엇이 게시냐 하는 것까지 우리 인간들의 손에 맡겨져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이 계시냐 아니냐 하는 것 까지 계시로 주어져야 되는 입장에 있다면 계시 판별에 관한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 하늘에서 이 땅을 방문해야 될 것 같다. 그런데 신의 이름으로 이 따에 등장한 인물이 어디 한 두명인가? 일단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유일한 인물로 취급하고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요한복음 3:13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라는 분만이 계시 결정권자이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특별한 책을 남긴 일이 없다. 다만 그분 본인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말씀은 자기의 활동을 통해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되면 계시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든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9)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계시의 혼란이 야기된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계시인가 아니면 그 역사적 인물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지향한 구약 성경이나 신약성경이 계시냐 하는 문제이다. 만약 성경이 계시라고 한다면 예수라는 분은 오직 성경의 범주안에서만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실제 인물로서의 예수가 계시라면 성경이란 예수님을 소개하는 역사 문헌의 일종으로 전환되고 성경을 포함한 역사에 실제로 발생한 일들이 계시의 범주를 형성하고 예수는 그 속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라 또 다른 문헌들이 어디서 뛰어나와 기존의 예수상에 치명적인 반박을 가하게 될 지 모를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자체를 계시라고 한다면 성경의 역사성이 사라지고 성경의 초월성만 부각되기 때문에 그 초월성을 증명할 역사적 근거가 마땅치 않는 상태에서 무리한 전제로 도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누가 뭐래도 성경은 하루 아침에 돌발상태에 의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인류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들을 제치고 독보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엄청난 비약을 허용해 주는 셈이 되며 이 성경에 대한 특혜는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적용시킨 맹목적 특혜이기 때문에 그런 특혜에 개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마저 세상사람들로부터 공정성이 결여된 종잡을 수 없는 신이라고 욕을 얻어 먹게 하는 이론이 된다. 일점 일획이라도 오류가 없을뿐더러 다른 계시는 일체 계시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성경 자기완결식 폐쇄주의 계시관을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신의 사랑을 구원의 기초로 하는 계시로 잡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비록 확실한 것을 계속해서 추적하는 과정에는 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해도 인류가 구원 받는데 하등 지장이 없는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모른데서 아는데로 나아가는 것은 계시 자체를 성립시켜 주지 못하는 발상이다. 계시 불인정 사고는 계시 불필요 사고와 연류되어서 나오는데 이것은 게시의 요청 자체가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기존에 대한 부정은 기존 세계의 죽음을 뜻하며 존재 근거를 말살하고 저주하고 심판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신의 적대행위이다. 신으로부터 원수 취급받는데서 오는 괴리감은 이미 신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에게 더욱 반발심만 가중시켜 줄 뿐이다.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는 이런 인간의 반발심에 합세해서 현대신학이 거짓된 신학을 살포하고 있다. 인간편에 서서 인간의 마음을 달래주면서도 동시에 신에 대한 최대한 예우를 해 주겠다는 심보는 그 자체로서 이미 사탄이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원래 모습을 갖춘 상태에서의 존재만을 수납하시고 좋아하신다. 이것을 도외시한 그 어떤 비 본래적 존재에게는 가차없는 심판과 저주만이 따라 붙는다.(창세기 6:5-7) 심판을 하나의 에피소드나 아찔했던 지난 날의 이야기로만 돌리는 것은 차라리 편하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전면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거론하지 않는 신학, 그 심판의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구원의 생명과실을 소개하려는 저의는 현대신학의 한계인 동시에 현대교회의 한계이다. 계시를 버리고 유사계시로 동원시킨 병든 이성과 양심의 가르침을 따라 정립된 신학이 어찌 인류의 복음이 될 수 있는가? 하루 속히 자기 완결적 계시인 성경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1) 존재로부터의 신학의 문제점

대체로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부터의 신학은 기독교를 이방종교와 무신론자들로부터 고유성을 유지시키는 변호책으로 많이 거론 되었다.

그들과 싸웠던 주된 문제는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이다. 성부신과 성자신과 성령신의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 세분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접근은 그분들 간의 관계나 운동과 작용을 규정하는데 미흡해질 우려가 있었다. 즉 존재에서 다시 운동을 끄집어내는데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존재와 운동을 동시에 해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했다. 그것이 삼위일체이론이다. 삼위일체란 기독교의 신을 규정할 때, 두 개의 다른 시작에서 보자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봐서 기독교의 신은 하나의 본질이다. 그리고 유일신이다. 신이 셋이 아니다. 그 다음에 작용과 관계면에서 보면 각기 독립이 유지되면서 고유의 기능을 하시는 세 인격이 나타난다. 모든 구원에 관한 운동은 이 세분의 고유한 활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로서 기독교는 존재와 운동의 관계를 규멍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 철학을 충분히 압도하는 종교로서 권위성을 유지했다. 본질과 기능과 시작을 하나로 합쳐서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 무한한 신의 이성을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에 여지없이 거부된다. 다만 신의 세계만이 이해되는 신 고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존재의 원천을 따로 이해하고 운동의 이해를 따로 이해해서 이 두 개의 원천의, 결합은 종교적 신비에 맡기게 되면 우선 지식이 아닌 무조건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서는 역시 궁극적으로 일관성 있는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강조점에 따라 교파의 분열이나 교단의 분열이 야기된다. 예를 들면,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의 신비성이 강조되고, 서방교회에서는 성자의 육화의 연장으로서 제도교회가 부각된다. 다같이 하나님을 신봉하면서 그것이 추상적으로 존재론적인 인식의 대상으로만 남고 지상에서의 구원사역의 통일성을 지울 수 있는 기준설정이 쉽지 않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기능을 위력의 존재양식에서 도출시키다보니 특히 성자에 대해서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여부를 해명하기 난처해졌다. 성자의 어느 기능이 어느 속성에 해당되는 부분인가에 혼동이 초해됐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구원론에 있어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존재형태와 성자의 존재형태간에 접촉점이나 구원사역의 창구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양식을 결정하기도 매우 복잡하게 되어버렸다. 즉 유한하고 소멸되는 연약한 인간이 불멸성을 갖고 불사성을 가지려면 불멸적인 존재와 결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어떤 부분이 인간의 유한성과 결합이 되는가? 만약 인성으로 결합하면 예수님의 연약한 육체의 범주내에서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이 가능하다고 하면 유한이 무한과 연결될 수 있다는 근거가 주어져야 하는데 실제로 피조물에게 있어 창조자의 만남은 곧 소멸과 죽음만이 초래할 뿐이니 이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중보자이라고만 해서는 신학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실제로 중보기능이 작용하게 되는 경로를 제시해야 한다. 이 과정에 관여된 세 존재, 즉 신과 중보자와 인간 이 모두를 존재론으로 정립을 하고 그 다음에 그 존재의 특수성에 의해 구원사역을  서술하자니 존재에서 운동이 나옴을 설득할 수 있는 마땅한 철학적 언어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영혼과 육체 둘로 나누어서 설명하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영혼과 예수님의 신성과의 관계가 혼란스럽고 또 예수님이 어떤 행위에 나섰을 때에 그 의지가 신성에서 나온 의지인지 아니면 인성에서 나온 의지인지 분간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문제의 복잡성은 인간에게도 있는데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지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과 육신의 결합관계와 예수님과 인간의 연합관계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해진다. 구원이라는 것이 유한한 인간을 무한한 신성에로의 참여라면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인간이 구원받는 과정이 같은 것인지 검토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과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식으로 행위가 나올 것이며 어떤 식으로 의지가 나올 수 있는지 규명하기 힘들어진다. 의지의 출처는 존재론적 속성의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놓고 구원받은 인간의 윤리를 규정할 때에 상당히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운동에 앞서 존재를 앞장 세우면 신학도 철학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그대로 안게 된다. 신학이 궁극적인 존재를 해명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신비로서 처리하는 것과 같이 실제 역사성에서 이루어진 구원사역도 존재론적으로 시작하면 삼위일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비로만 해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앙의 객관성이 약화되고 무의미한 개념을 동원한 주관성이 부각되고 활개친다. 언어나 개념화라는 것도 객관에 관한 공통적 인식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모두다 주관성을 강조하면 언어라는 것도 주관에 따라 상이한 개념이 되고 만다. 여기서 존재론적 신학의 한계가 있다. 객관성보다 주관성에 강조한 현대신학자도 있다. 소위 “신앙의 유비”이다. 신앙의 유비라는 말은 중세신학의 존재의 유비에 대응해서 나온 주장이다.

존재의 유비란 피조물 속에서 창조물에 관한 모종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거기에 비해 신앙의 유비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고 인간이 그러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포착되는 영역 하에서만 진실이 밝혀진다는 뜻에서 ‘신앙의 유비’이다. 신앙이 무엇이냐 라는 그 자체의 객관성을 상실되고 다만 신앙의 내용이 ‘말씀’이라는 객관성을 갖게 된다. 말씀을 믿는 것은 모두 신앙이 되며 뿐만아니라 존재에서 운동을 그집어내기 위해 ‘스스로 말씀이 되는 말씀’이 되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존재하는 말씀과 운동하는 말씀이 있는 셈이다. 또 여기에 기록된 말씀인 성경까지 덧붙인다. 이렇게 되면 양태론적 삼위일체의 이론이 말씀의 신비로 대용되어 나타난다. 하나이면서도 세가지 형태와 기능을 하게 된다. 그러니 세 기능이 다 모이는 경우에만 말씀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의 기능만으로 계시로 불릴 수 없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와 보이는 존재와 운동 이 세가지를 모두 해명하고 있는게 아니라 모두를 통합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즉 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결과만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궁극적 존재를 개념화 시키는 것이 불가능해보인다. 이것이 현대신학의 한계이다. 그러면 운동으로부터 신학은 모든 구원의 원리를 풀이할 수 있을까?

(2) 운동으로부터의 신학의 문제점

역사는 계시의 밑받침인가? 계시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부스러기는 역사 위에 모두 떨어졌는가? 그래서 계시를 역사적 사견으로 얼마든지 대체해서 나타낼 수 있을까?

계시의 객관성을 보장받기 위해 역사에 대해 관심이 높아갔다. 그러나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인 공간과 시간에서 아무래도 시간해석에 더 치중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왜 시간 속에서 우주만물은 변화하는가? 혹시 그 변화가 계시의 변화와 연관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줄을 이어 등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역사 속에 깔려있는 계시를 찾아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는듯한 발상들이 신학계에 번지지 시작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계시를 찾기 위한 작업에서 골칫거리가 되는 것은 ‘우연’이다. 우연은 계시의 일관성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미래가 이 ‘우연’ 때문에 예측되지 못한다. 역사가 일관성이 있는 계시가 되려면 ‘필연’만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심지어 흔히 우연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도 모두 필연으로 통역되어져야 한다.

우연들을 필연으로 고치는 작업, 이 작업은 정말 대단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또한 변화 속에서 불변을 정립하는 행위이며 운동에서 궁극적 존재의 본질을 파악해내고자 하는 노력이다. 과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얼굴을 내밀고 있을까? 역사를 올바르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탐구자가 역사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그래야 객관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가 역사로부터 영향받는 인물이다. 그래서 역사로부터 이탈하지 못한 존재가 역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과정이 요구된다. 첫째는 역사속에서 역사와 무관한 순수한 인간의 본질을 규명해 내어야 하고, 둘째는 그렇게 분리된 인간만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해서 그 곳에 담겨 있는 계시를 해석할 능력이 있다. 물론 계시를 알고자하는 그 인간조차 역사 속에 계시 발현의 일부가 됨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한다.

우선 인간이 역사를 아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을 조사해 봐야 한다. 여기에 가능하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 있는 인간을 찾으러 왔지 역사밖에 초월해 있는 인간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우정의 만남이 아니라 심판으로 만나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믿으려고 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믿음이라는 행위는 자기 이해를 스스로 파기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가차없이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에 강조를 두는 쪽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수용하지만 구속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구속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더라도 과거를 통해 현재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조립하는 행위하므로 신앙이 설자리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양쪽의 의견이 상반되는 것같이 보인다. 즉 구속사를 주장하는 쪽과 구속사를 인정하지 않는 쪽이 서로 반대의견으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구속사 쪽은 구속사와는 별도로 세속역사를 내세운다. 거기에 반해 구속사를 인정하지 않는 쪽도 수평적인 역사와 수직적인 역사를 들먹인다. 그리고 두 개를 분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분명 역사는 존재하고 있고 또 오직 하나뿐이다. 그런데 현대신학자들은 왜 역사의미를 둘로 나누어야만 이야기가 되는가? 물론 역사를 하나로 해서 구속사와 세속역사를 동일시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있어 역사는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최종 계시로서의 의미가 다른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 역사속에서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실체를 끄집어 내어야 역사속에서의 계시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신학의 구원(구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구출이란 구출되어야 될 상황이 있고 그 다음에 구출되고 난 후에 누노릴 새로운 상황이 있는데 전의 상황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로서의 계시를 설명하면서 구원에 치중을 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구원의 바탕이 되는 현역사 전부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오직 신앙으로 하나님이 가져다주는 제대로 된 세상을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현 역사에서 어떤 가능성이나 가치를 찾아내려고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을 과소평가한 결과로만 보일 뿐이다. 물론 세세상의 모습을 알리는 계시가 곧 처분해야 될 현세계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그 표상과 언어라는 것은 이 역사 속에 이미 들어 있는게 아니다. 이미 들어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역사 전부를 심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계시가 이 저주받은 세계에 떨어지는가? 그 저주받은 세계 속에서는 구원되기 전의 인간도 저주의 대상으로 놓여 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계시할 때는 그들이 뭔가 알고 있고 해석할 능력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배제된다. 분명 그들이 이해하지만 그들의 이해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해도를 능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이 이미 체험하고 이해한 적이 있는 세계를 계시로 준다면 하나님의 세계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가 아니다. 다만 과거 역사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구속사를 반대하는 입장은 인간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자기해석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역사를 알 수 없다는 취지이다. 그래서 인간이 역사를 규명할 위치에 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역사가 무엇인가 보다 묻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결국 역사는 인간학에 머물고 만다. 역사를 알기 전에 인간을 알아야 하고 인간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과 만나면 역사에 대한 중요성보다는 지금, 현재 영원한 실체와 접합하게 된다. 세상의 역사연구는 지나온 것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기는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역사이해란 흔히 미래에 의해서 규정되는 아니라 과거에 억매이고 과거의 연속선상에 있어 뭔가 새로움을 허용치 않는 것이 된다. 거기에 비해 신앙이란 미래를 위해 과거에 억매여 있던 역사와 결별하고 과거에 의해 객관화 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금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미래를 앞당겼다는 뜻에서 비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역사관으로 해서갈 수 없는 영원한 현재에 이미 찬여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아직도 역사운운하는 것은 신앙에서만 확인되는 구원을 역사라고 하는 인간의 자기 이해 속에서 신앙을 찾으려는 불신앙적인 태도일 수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에게 다가온 데서부터 비롯된다. 인간에게는 신앙을 유발시킬 그 어떤 요소도 미리 들어있지 않다. 종말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면 인간의 만난이란 인간의 역사적 관념이 정지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계는 역사 속에서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를 부인하는 쪽에서는 “인간이 구원받고 난 뒤에도 구속사라는 역사관을 들먹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자체도 인간의 자기이해에 불과하다면 구속사라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을 옛날 역사관 위에 그림을 베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밑그림과 채색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합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속사를 거부하는 입장에 대해 가장 많이 공격하는 부분은 객관성 확보문제이다. 신앙을 거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있어야 하고 복음의 내용이 인간 세계에 대한 부정과 저주와 심판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관성있고 체계적인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과연 신약성경에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신앙인의 눈에만 의미있게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지만 어쨌든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모든 계획은 개인의 구원과 신앙의 근거로만 압축시켜 주장하는 것은 마치 입구만 소개하고 집안으로 인도하지 않는 청지기와 같은 것이라고 구속사를 옹호하는 자들은 주장한다.

구속사와 비구속사학파의 결점은 역사속에서 실존하는 인간을 완벽하게 분석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죄받은 현세계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해명하지 못하고 다만 새세계와 비교해서 폐기되어야만 한다는 연관성을 가질 뿐이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세계가 무엇이냐를 설명하지 못하고 옛세계와 비교해 볼 때, 해명불가능한 세계라는 정도에 그친다. 물론 이 사시에 인간이 놓여있다. 따라서 이 두 세계를 알려면 그 속에서 다리역할하는 인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란 모든 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켜 자기 안에 세계를 건설하고 그 세계관으로 외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이해된다. 인간은 뭔가로부터 탈출하려는 것도 새로운 것이 되려는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주위의 여건을 이용하려는 데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면 그와 같은 충동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또 한계를 느끼는 그 한계내용의 객관성과 또 무엇이 되려는 목표의 객관성은 어디서부터 끌어당긴 것인가? 이는 인간이 인간이기 전에 외부 세계와 연결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외부세계와 인격을 규정한 객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인간이 돌처럼 존재 그 자체로만 규정될 것 같으면 그 속에서 어떤 객관도 주관의 이름으로 대체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록 한계에 처한다 할지라도 어떤 객관성을 규정한 초월의 몸부림을 쉬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주관에서 주관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라 할지라도 어떤 객관으로부터 출발해서 어떤 객관으로 달려가는 주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객관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가 자기 한계를 표현 것밖이라 할지라도 어떤 객관과의 만남에서 주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상황에서 새로운 주관이 주어졌을 때, 그 때의 주관은 어떠한 객관으로 내용을 형성할 것인가? 그 내용이 되는 객관이 따로 있을 게 아닌가? 객관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객관이 순수한 객관으로 작용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새 주관으로 파고 들어왔을 때 그것의 역사적 성격이나 의미는 상실되고 객관적 내용은 오직 자기 자신의 모습만 보인다. 즉 자기를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만을 이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역사 밖으로 빠져 나올 수없고 역사와 무관한 순수한 자신을 분리할 길이 막연해진다. 어쩌면 오히려 이 자체가 인간의 본 모습인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흔히 역사라고 불리는 것은 사건의 나열만 있을 뿐이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놓인 체계적인 흐름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오직 주관화된 객관만이 있기에 보편타당성이 상실되며 어디서 옳다고 검증받을 길이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은 어떤 취지의 행위일까? 물론 고발하며 정죄이며 심판이다. 그러면 어떤 인간이 되라는 말인가? 역사가 더 이상 무의미하고 하나님에 의해 종결됐다면 인간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만을 전하면 정죄받은 인간의 주관이 복음의 객관적 내용이 되는 셈이다. 바로 이러한 심판받은 고백(신앙)의 사건을 체계적으로 연결한 것으로 구속사를 형성해도 문제가 될까? 신앙사건을 한데 모아 일관성있게 해석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신자에게 수긍이 가는 보편타당성 있는 해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검증받은 단계를 거친 사건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거기에 억매일 필요가 없다. 이러한 구속사는 역사에 강조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성이 있는 구원행위에 강조점을 두게 된다. 따라서 역사로서의 객관성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관성에도 억매이지 않는다. 인간의 의한 객관과 주관에 의해 뽑히지도 않고 새로운 계시 영역에 의해서 뽑혀나온 사건과 지혜의 집합들로 구성된 계시의 영역이 요구된다. 그 계시가 무엇인가? 그것이 성경이라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돌멩이는 돌멩이만 계시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인간만 계시한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한다. 예수님은 예수님만이 계시한다. 운동하고 있는 존재에서 발견되는 것은 운동의 의미가 아니라 단지 존재의 의미만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를 이어주고 모든 계시를 통합시켜줄 새로운 계시의 영역이 요구된다. 이것을 성경으로 간주하면 어떨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할 때 성경만이 계시라고 보면 어떨까? 모든 존재자의 불연속성이 성경 안에서 영속성을 갖는다고 하면 어떨까?

(3) 성경신학의 의의

신학이 성경해석학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하여 게시하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이다. 성경 자체에 대해 일체의 비판이나 오류시비가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책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성경을 신성시하는 입장에서도 이단적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자(汝字)주의 또는 문자주의이다. 성경 안에서 세속역사의 의미를 밝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한 눈자해석에 매여있는 유대교나 세대주의자들은(혹은 전천년주의자들) 사실은 성경을 최종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느껴오는 역사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는 자들이다. 이미 확보한 거룩(성경)으로부터 더욱 큰 거룩(교회)쪽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손수 확인해보고 싶은 인간들의 염원이다. 성경문자주의가 크게 세력을 펼치는 것은 인간들의 종교적 염원과 관련있다. 주술가나 무당들에게는 신비스러운 문자는 한자한자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포괄적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문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운명적 역사관이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이며 세대주의이다. 그들의 이러한 탐구와 노력들은 하나님이 언어 속에 숨겨놓은 비밀을 인간이 자기의 계산과 숫자풀이를 통해 찾아내어야지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지식이 구원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심오하고 신기한 놀이로 보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신기한 놀이를 통해서 인간에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성경이 신성화되니 그 신성함에 근거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이 신성해진다. 종교 의식에 동원되는 제사장도 거룩하고 그 공간도 거룩하고 그 시간대도 거룩하고 그 종교조직체가 거룩해진다. 즉 현재 있는 종교조직체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보다 크게, 보다 확산되게(소위 선교운동), 보다 성장되게 조직을 이끌어 나가게 되므로 종교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달성해서 좋고 거기에 찾아든 손님들은 자신들이 벌인 일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응답이 일치되는 신과 함께 있다는 구원의 안정성 확보가 기분좋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경해석은 더욱 간편해진다. 즉 어떤 본문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저 “교회 성장, 교회 확장, 교회 발전, 교회 부흥, 교회 봉사, 교회 헌신”쪽으로 해석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명이라고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미 확인받아 놓았다. 올바른 성경해석과 잘못된 성경해석의 평가를 교회성장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큰 교회가 곧 선(善)이 되는 셈이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신의 거룩한 행위를 경험한다. 이들에게는 주문을 외우고 주술하고자 하는 븐능을 성경문자주의가 만족을 시켜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무지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 정신에 의해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애초부터 성경이 아니라 성경의 도움으로 밝혀지기를 바라는 역사의 예상상황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사는 메시아의 도우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십자가를 최우선적으로 앞장 세우는 사도의 정신과도 맞지 않다.(고린도전서 2:2/갈라디아서 6:14)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인간의 행위 전체에 결쳐 심판하기 위함이다.(로마서 10:1-3)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가증된 것이며 이단적이다. 애초에 성경을 계시 그 자체로 상정한 이유도 주관과 객관이 고발당한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계시로 제고되었음을 전제로 한데서 비롯된다.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입장에 서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자로 성경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갈라디아서 2:20) 이렇게 볼 때 문자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문자주의는 낱말하나 단어하나 문장하나를 해석하는 문학비평의 방법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구원받고 난 뒤의 이성은 정화된 이성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의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발견할 때에 정화된 이성은 하나님께 심판받은 자신의 겸손이 바른 분별력을 제공한다. 선입감없이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한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반견되는 것은 원래 자기의 마음가짐이다. 십자가는 십자가만이 만나게 되어 있다. 십자가 정신이 아닌 자기 염원에 의한 구원의지로 십자가 정신을 파악하려면 참된 본문의 뜻과 어긋난다. 문자로만 해석하는 것은 일반적인 과학적인 문학비평에서나 호응 받을 일이다. 최근의 언어분석 철학에 의해면 그 정당성이 상실된다. 언어분석, 문확비평의 객관성에 주관성이 침범한 것이다. 십자가 정신에 입각한 사람의 이성과 예지는 성경해석에 장애가 되는가? 그 자체는 장애가 되지만 소극적인 측면에서 참된 해석에 공헌을 하게 된다. 바른 성경해석을 했다하자(논리적으로 십자가를 발견했다하자)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예지와 영감과 이성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여길만한 위치까지 내려갔는데 끝나고 보니 하나님이 내 이성과 예지를 꺾어버리고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로서 십자가 정신이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성경해석 과정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십자가 정신은 흘러넘쳐 나오게 된다. 성경 해석이 옳다, 그르다는 평가는 십자가 정신으로 모두 해소된다.  기술적인 면에서 완벽이란 하나님께는 건방지고 십자가 정신에 역행하고 애초부터 성경의 존재의의에 대립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가 십자가 정신인 것처럼 포장될 위험성도 있다. 성경해석을 해놓고 비합리성과 비논리성을 자랑한다면 이것도 십자가 정신에 위배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성과 합리성이 성경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죄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죄성이 개입해야 성경해석을 통해 인간의 회개를 촉발할 수 있는 계시가 된다. 계속적인 합리적인 신학의 추구와 노력이야말로 차라리 겸손의 표상이다. 계속해서 자신을 부인하는 바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영광받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1)


Ⅲ. 결 론

인간이 한 모든 일은 그것이 철학이든지 신학이 되었든지 문제가 있다. 이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오히려 누를 끼치게 된다. 오직 십자가 사건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 이성과 지혜를 통한 모든 본능적인 충동적 결과가 하나님을 욕되게 했고 그 결과로 인류가 저주받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진정한 겸손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성경 신학은 일반적인 역사에 근거를 둔 구속사와 다르다. 성경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를 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세언약”으로 표현된다. 구약을 연구하면서 언약의 본질을 파악하고, 신약을 연구하면서 이미 성취된 언약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약을 통해서 성경이라는 계시의 일관성을 가지도록 권유하고 싶다. 성경의 일관성은 이미 십자가 정신으로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만 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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