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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5 08:49:09 조회 : 9007         
[욥 세 친구의 신학] 이름 : 이근호(IP:117.55.136.28)


욥의 세 친구의 신론(神論)

2010년 1월 3일  이근호 목사


Ⅰ. 서 론

하늘나라에서의 하나님과 사단과의 다툼이 욥에게 일어난 고난을 계기로 하여 지상까지 번진다.1)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여 모여 들었지만 위로는커녕 신랄한 비난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욥과 욥의 친구들은 각자의 신학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에 들이닥친 시련을 하나님 안목에서 누구 하나 설명해 내지를 못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체계가 실제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한계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욥의 친구들의 충고도 이미 욥도 익히 아는 범위 내의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욥의 친구들은 자꾸만 억지를 부린다. 만약에 자신의 신론에 허점을 자인한다면 이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신앙관까지 욥에게 일어난 사태로 인하여 허물어져야 함을 요구받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보는 것이다. 이로서 욥의 세 친구와 욥과의 경계선을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난다.

비실제적인 신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단지 자신이 그동안 구축해온 신학이요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변호해왔던 신학이라는 이유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 자체가 욥을 분노케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될 어리석음의 표본이다. 욥기는 욥만 드러내는 책이 아니다. 누가 욥을 더욱 힘들게 하느냐를 지상의 차원에서 말해주므로서, 하나님과 사단의 대결구조가  지상에서도 언제든지 형성됨을 보이는 책이다.   

본 논문은, 오늘날 성경을 외면하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정립하고자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한 복음과 얼마나 큰 상충되는 내용이 되는지를 욥의 친구들의 억지를 통해서 확인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욥을 비난하게 된 계기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욥 3;1) 친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이 자기 존재에 대해서 월권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배후의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소위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이 주권사상에서 인간은 자신을 출생에 대해서 저주할 그 어떤 권한이 있음을 갖지 못한다. 칼빈주의에 있어서 자연 자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들지 않는다. 칼빈은 ‘자연’이란 말로 피조물이 피조 당시에 상태를 지니고 있는 그 원래의 창조를 지칭한다. 즉 모든 피조물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원형태를 의미한다. 이때 자연은 물질의 세계, 식물, 동물, 인간의 육체, 또는 인간 삶의 유형, 사회의 우주적 질서, 문화적 정신적 삶들을 뜻하는 현대적 의미의 어떤 뜻과도 관계가 없다. 따라서 자연은 영이나 문화와 대조되는 의미가 아니라, 원창조 상태와 어긋나는 것, 창조의 질서에서 벗어나서 임의적이며 불규칙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은 칼빈에게는 존재이며 규준이라는 의미이다. “자연이 가르치며 일깨운다”는 말은 칼빈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다’, 즉 창조 시부터 세상에 담겨 있는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의지, 이 세상의 신성한 법칙을 가르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빈에게 자연의 법과 창조의 질서를 같은 의미로 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

그렇다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자기 존재 불평을 하나님이 주신 자연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로 그 자체를 죄로 간주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단정 짓는 이유는,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내뱉은 고백의 내용 속에는 빛, 어두움, 해와 달, 별, 악어 등등의 자연물을 자기 출생과 관련지으면서 출생을 저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조치 그 자체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 계수에서 자신이 빠져있기를 원했다. 이것도 곧 욥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자기로 인하여 훼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냥 없는 존재로 취급되기를 원한 것이다. 이러한 욥의 솔직한 괴로움의 표현은 차라리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피조물의 속성의 단면이 된다.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아픔이 있음으로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속성이 새로운 단면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의 아픔의 비명소리를 그들의 주권사상에 준해서 ‘죄’라고 규정한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은 죄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한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고 말한다.(욥 4:7) 그런데 욥이나 욥의 세 친구에 있어서, 난제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해 버린 세계 속에 과연 창세전의 ‘혼돈’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소위 “이 선한 창조 질서 속에서 왜 악은 아직도 활약해야만 하느냐?”하는 것이다. 욥은, 악이 자기에게 들이닥쳤다고 보았고, 욥의 친구들은 욥이 악을 유발자로 보았다. 둘 다 하나님의 선한 품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악한 일을 사주할 리가 없다는 점에서는 생각이 일치한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에게 혐의를 둔다. 욥이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지질렀기에 그 죄를 일깨어주기 위해 그 죄에 대한 징벌을 가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욥 친구들의 견해는, 하늘나라에서 이미 “욥은 의롭다”는 하나님의 판정과 일치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 말을 하시는 이유는, 사단이 이미 지상을 두루 돌아보았기에 사단이 아무리 욥의 잘못을 지적하려 하여도 지적해 낼만한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해서 사단은 ‘욥에게는 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지연책을 구사한다. 즉 장래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서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서 사단에게 의견을 개진하신 이유가 드러난다. 즉 욥을 데리시고 미래의 적용될 계시로서 개시시키려는 것이다. 즉 의로움이 일시적인 의로움으로 그 효과가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 적용될 영원히 ‘유효한 의로움’을 생산해 내시려는 것이다. 즉 욥의 사적인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고난 사건을 유발시키신 것이 아니라 ‘의로움’ 그 자체가 개인의 의로움으로 머물지 않고 구원을 성취시키는 보편적 의로움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욥 주변에 욥의 친구들을 유인시키셨다. 

욥기의 끝 대목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세 친구의 무지와 잘못을 위하여 대신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신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을 위하여 기도하므로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불구덩이 속에서도 무사히 구출되게 하시는 선지자적 구원사역을 보여주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창 19:29/욥 42:8)

이로서 땅의 세계는 개방적인 미래를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므로서 메시아적 구조를 미리 접촉할 수 되었다. 이것은 한시적으로 고정된 창조질서를 시간이라는 활주로에 실리게 하여 먼 메시아의 종말 시대로 이끌리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로서 욥은 선지자로서의 기능을 가졌기에 베드로전서 1:10-11에 나오는 ‘선지자 원칙’에 해당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렇다면 이처럼 ‘개방적 시간관’에 입각하지 못하고 한시적이고 정지된 창조 질서 안에서의 죄관과 욥이 고난을 통해서 보이는 죄관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창조 질서의 고정성을 하나님의 주권 사상으로 이해하는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 죄관을 어떤 의식에서 비롯된 것인가?


2. 죄를 규정하는 의식구조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정의로움과 죄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기준이다. 따라서 욥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욥이 자기 배만 채우고,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한 죄에 대한 징벌 받은 결과라고 보았다. 즉 욥이 가난한 자들 평소에 업신여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욥의 입장을 그 가난한 자의 지경에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욥 20:15-19, 27-29)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욥 22:5-11)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욥의 잘못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욥의 친구들이 기존의 자신들의 인과응보 사상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욥은, 고난이 없는 욥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 가난한 자를 돌보았고 배려했고, 그들의 재산을 탐내거나 탈취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증언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0-17)

이처럼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벌어진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신의 저주라고 여기고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기존에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신학의 틀에 맞추려고 하니 욥에게 벌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욥의 지적처럼 단지 욥 같은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참으로 친구들이 도와주어야 될 가난한 자의 의로운 자는 바로 욥 자신이다 는 것이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욥 26:1-3)

그리고 나를 공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격하는 바가 된다고 욥은 선언한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용 19;2-6)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의 신 관념이 어떤 구조에서 비롯되었기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곧 정의(正義)며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징벌 받을 죄라고 여기는가? 그것은 바로 고대 농경 사회에서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를 하나로 엮어내는 경제 구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 증여를 통해서 신을 해석하는 사회

나카자와 신이치는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라는 저서를 통해서 고대 사회에 있어 사적인 사랑과 경제 구조가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밝혀주었다.3) 로고스란 곧 신의 ‘드러난 계시’로서 세계를 신의 존재와 그 활동성 중심으로 하나로 파악하는 지혜를 뜻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바탕에 이 고대 사회의 경제 구조와 논리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대 사회’란 국가 형태로 나타나기 이전의 씨족이나 부족 같은 혈연 중심의 사회를 뜻한다. 저자는 이런 혈연 중심의 사회를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가족의 사랑 속에 미성숙한 시절을 지내고 어린 소년의 심성 속에서 그 예를 든다.4) 동네 초밥 집을 보면서도 평소에 돈이 없어 먹고 싶은 초밥을 차마 먹지 못하는 어린 소년에게  어느 날 낯선 신사분이 호의를 베푼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다. 소년은 실컷 초밥을 배터지게 먹게 되지만 여전히 소년은 그 신사 양반의 정체도, 이름도 모른다. 이런 경험이 있은 후, 소년의 마음속에는 처음 밀려 왔던 인생체험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확산되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목으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다’는 인상이다.

좋은 일 했다고 우쭐대는 하나님도 아니요, 사랑을 주었다고 독한 착함으로 보상받기를 원하는 그런 하나님도 아니다. 그런데 늘 사랑의 자리에 계시면서 무상으로 베푸시기만 하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미성숙한 심성으로 표출되는 소년의 마음이 바로 고대 사회를 경제적으로 엮어내는 결합력이라고 보고 있다. 관념적인 사랑의 신이 지상에 펼쳐질 때는 ‘순수 증여’의 모습이 된다. 여기서 오늘날의 경제를 움직이는 ‘교환’과 ‘증여’라는 형식이 이 ‘순수증여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봐서 오늘날의 경제 결합력과 고대 사회의 결합력 사이의 차이를 찾아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종류와 엄청난 수량의 상품이 매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상품이 판매자의 손을 떠나서 구매자의 손으로 옮겨가면, 곧바로 그 대가가 지불된다. 이 매매에서 상품의 가치는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의 특성은 무시되고 오로지 다른 질의 상품과는 화폐의 양으로만 등가 교환이 이루어진다. 즉 매매되는 상품에는 전에 그 물건을 소유했던 사람의 인격이나 감정 같은 것은 고려되지 아니한다. 단지 계산 가능한 돈으로 매겨지는 가격만 부각된다. 즉 돈이 이질적인 다양한 상품을 연계하는 공통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증여’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돈의 액수로 매겨지는 가치 말고 인격과 인격의 결합을 목표로 물건이 상대방에게 건네지는 것을 뜻한다. 이 선물 형식을 증여(gift)라고 한다. 예를 들면, 찬한 친구에게 정성이 담긴 선물을 주는 경우, 백화점 같은 곳에서 산 상품을 선물하는 경우라도. 우리는 주의 깊게 가격표를 뗀 다음에 다시 예쁘게 포장해서 상품으로서의 흔적을 가능한 한 제거하려고 한다. 이것은 교화 원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신호다.

즉 물건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과 더불어 증여하는 사람의 정이 전달되는 것이다. 이 증여를 받은 사람도 답례를 하기 마련인데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이 답례를 받는 당사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전체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졌지만 상품의 가치가 오고간 것은 아니라 인격과 인결과의 결속이 더욱더 공고히 되는데 이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5)

 그렇다면 순수 증여란 무엇인가? 증여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증여란 선사받은 쪽에서 계속해서 또 다른 이에게 답례를 하므로서 증여의 순환사슬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순환 고리를 통해서 거저 베푸는 사랑과 자비라는 영적인 힘은 이 순환 사슬로서 형성된 내부 영역을 장식하고 그 힘들을 증식시킨다. 이 힘이 바로, 우정, 신뢰, 애정, 위신 같은 것들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을 대변해준다.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날, 밸런타인데이 같은 날에는 이 ‘증여 사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런 증여가 거세되면 교환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증여한 자가 누군지를 전혀 모르는 경우, 혹은 선사받은 것보다 훨씬 큰 답례를 예상 밖으로 받게 되는 경우, 또한 답례의 대상자를 알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증여 이상의 여분의 것을 받음으로 인하여 기존의 인간들끼리의 증여 순환 고리를 이탈된 곳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증여를 접하게 되면 곧 증여 원리 자체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원리와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아낌없이 자신을 선물하는 존재의 실재감을 감지하게 된다. 책임 있는 답례와 답례의 고리 밖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느닷없이 소멸해버리기에 실체를 포착할 수는 없어도 예상 밖의 엄청난 선물을 행함 없이 받을 경우에, 사람들은 이 절대적 사랑의 주체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추상적 신의 존재와 활동을 근거가 되는 장(場)인 동시에 인간들이 미처 다룰 수 없는 순수증여가 발생하고, 발휘되는 이 영역을 가지고 사람들은 대자연으로 인식한다. 6)

고대 사회에서 어떤 이에게 갑작스럽게 재산에 증식이 일어나면, 이것은 순수 증여로 인하여 여분의 선물이기에 그는 그것을 신의 사랑으로 알고 자신의 신의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증여하므로 서 그 가난한 자에게 신의 자비가 전달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웃에 사는 가난한 이는, 그것은 부유한 이웃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공급받은 순수증여라는 인식으로 신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고대 사회는 대자연 안에서 순수 증여를 발생시키는 신의 자비 기능 안에서 통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이가 이 증여의 순환 고리를 이탈하여 사적이 탐욕으로 증여의 책임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소유화를 시켜서 인위적으로 자기에게 흘러들어온 자비의 산물을 독점하고 축적한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전달할 신의 선물을 가로채는 것이 되기에 대자연을 관리하는 신으로부터 징벌을 당하여 그의 재산은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모아져서 ‘신의 계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이고 율법적인 문자 계시’가 없던 시절에 통용되는 정의(正義)관이요 죄(罪)관이요 징벌(懲罰)관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이 신론에 준해서 욥에게 일어난 고난을 해석하려고 덤벼든 것이다.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욥 20:19-29)

문제는 이런 식의 신론과 해석으로는 욥에게 들이닥친 고난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는데 있다. 오히려 욥은 반대 경우의 예를 든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욥 21:7-14)

즉 욥 자신에게 들이닥친 이 고난의 사태는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원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반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축복 받은 이를 마치 저주받은 이로 보이게 하고, 저주받은 이가 마치 축복 받은 이로 보이게 하는 원리가 욥이 받은 고난 속에 담긴 새로운 계시가 된다.7) 이는 장래 오실 메시아의 모습이 이 ‘고난 받는 욥’이 당하는 경우와 같은 경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과 사단의 하늘나라 대결구조가 그대로 땅에서 같은 취지에서 대결구조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가 메시아가 등장하므로 서 본격화되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의도적으로 사람의 지혜를 기피하고 나타난 지혜가 바로 구원의 지혜다.8)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지혜는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한다. 어리석음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사람들 속에 섞인다. 따라서 아무리 구원의 원리가 사람들 안에서 근접하게 나타나도 사람들의 선택의 대상의 배척당한다. 그것은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즉 욥의 경우처럼 계시가 주는 고난의 구조에 휩싸이지 아니하면 납득될 수 없는 계시로 남고자 하는 것이 ‘낯선 하나님’의 전략이다. 이 하나님이 구체화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로서 욥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증명하는 선지자 반열에 속한다.


4.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

욥이 살고 있던 우스라는 동네는 ‘에서(에돔)’의 땅이다. 곧 비(非)-이스라엘적이다. 율법 시대 이전에9), 이 비-이스라엘 지역에서 ‘고난 받는 의인’의 설화가 등장해서 결국 이스라엘의 계시 안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이나 언약 해석에 있어 핵심 되는 답이 문제와 더불어 ‘지혜’의 형식으로 제공되어 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과연 구체적인 문자로 전달된 계시 없이도 과연 하나님이 원하는 참다운 인간상이 정립이 가능한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하면, 인간이란 사물을 대하면서 ‘식별(재인식)’과 ‘사유(思惟=생각)’를 구별한다는 것이다. 사유가 필요치 않는 사물은 그저 외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지칭하기만 하는 되는 사물들이다. 예를 들면, ‘저건 손가락이야’, ‘저건 사과야’, ‘저건 집이야’ 등으로 표현되는 판단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다른 사물들이 있다. ‘우연히 맞딱뜨리게 되어’ 숨기고 있는 바를 해석해내야 하는 것, 즉 ‘기호’다. 기호는 관조의 대상의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도록 정신을 자극하는 대상이다.10)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고통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인 욥은 홀로 이전에 알았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과 자신을 재규명 되어야하기에 ‘정체 불명의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폭력은, 사유해야 할 사람의 정신에 상처를 입히는 근원적인 폭력이다. 이로서 사유자는 ‘아픈 사람’이 된다. 환자가 된다.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으로 개시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욥은 난데없이 주어진 고통 속에서 새롭게 사유함을 요구받는 새 인간상으로 등장한다. 궁극적인 심연부터 바깥 피부껍질까지 온통 낯선 고통으로만 꽉 채운 인간으로 새로운 정립되는 존재가 욥이며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인간상이다. 기존의 피부나 기존의 내부 심성으로 조립된 신과 인간관은 고난 받는 욥 앞에서는  기껏 박해자라는 부정적인 역할 밖에 못한다.(욥 12:4/19:3) 즉 친구들의 모든 신학체제는, 욥에게 고난을 주시면서 등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긁혀야 하는 신학’이 된다. 이 욥의 고난은 십자가 복음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된다. 예수님도 이 저주 속으로 친히 들어가서 받아들여야 하셨다.(갈 3:13) 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요(마 3:17) 참 아담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가 참 이스라엘이다.(요 1:47) 이 ‘참 아들’과 ‘참 이스라엘’ 사이를 성사시키고자 개입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언약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의 해답은 이미 율법 이전부터 발생하여 줄곧 이스라엘 역사와 동행했고 그 본질은 언약의 개입과 함께 이스라엘 내부에 ‘지혜’라는 이름으로 관통되고 있었다. 언약이 없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Ⅲ. 결 론

욥의 친구들은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받는다’는 신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을 준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욥의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는 욥과 욥의 세 친구를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욥 35:4-8)

즉 욥이 받은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욥과 세 친구들은 인간들의 선이나 혹은 악행으로 그 계획이 변경되리라고 기대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후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미리 대속의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욥 33:22-28) 즉 엘리후는 욥에게 충고하기를, 욥은 자신의 고난을 근거로 하나님에게 항변할 것이 아니라 ‘준비된 대속물’을 염두에 두고 그 앞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했다는 것이다.(욥 36:18) 그러나 엘리후도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욥 자체가 바로 친구를 살리는 대속물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주권사상’의 한계다.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과 인간을 극단적으로 떼어놓는 존재론적 구조로 배치시키는 것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철거시켜야 될 죄악된 안목임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안에서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즉 참으로 멀고 먼 사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죄인 사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를 기점으로 하여 멀고 먼 하나님을 멀리서 경배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입장인 것을 수용하므로서 죄와 의의 멀어짐을 실감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위대하다”가 하나님의 주되심에 합당한 고백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는 자기 고백이 진정한 복음 앞에서 합당한 고백이다.11)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5-36)



참고 도서

Emil Brunnre· Karl Barth, 김동건 역, 『자연신학』,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Gustavo Gute?rrez, 김수복·성찬성 역, 『욥에 관하여』, 분도출판사, 1996.

Nakazawa Shinichi, 김옥희 역, 『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동아시아, 2005.

Roy B. Zuck, 전광규 역, 『욥기』, 두란노, 2006.

서동욱, 『차이와 타자』, 문학과 지성사, 2008.



각주)-----------------

1) 욥 1:7에서 사단은, 다른 천사들과는 달리 ‘땅 위를 돌아다니다 온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2) 에밀 부르너 Emil Brunner· 칼 바르트 Karl Barth , 김동건 역 『자연신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pp.43-44.

3) Nakazawa Shinichi, 김옥희 역,『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서울: 동아시아, 2005). 

4) 시나 나오야 라는 일본 작자의 소설 『어린 사환의 신(神)』,(1920년)을 주제로 하고 있다.

5) Nakazawa Shinichi, 같은 책, pp.39-43.

6) Nakazawa Shinichi, 같은 책, pp.67-70.

7) 이는 요한복음 9장39-41에 나오는 원리와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8) 고린도전서 1:19-25,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9) 욥이 고난의 시기 이후라도 140년 간 더 산 것은 대략 족장들이 살았던 수명과 일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는 210세를, 아브라함은 175세를, 이삭은 180세를, 야곱은 147세까지 살았다. 로이 죽Roy B. Zuck, 전광규 역, 『욥기』, (서울:두란노, 2006), p 11.

10) 서동욱, 『차이와 타자』,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8), pp.64-65.

11)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각주)-----------------

'PREACHING' (프리칭)잡지에 실린 논문(2010년 3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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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세 친구의 신론(神論)

2010년 1월 3일  이근호 목사


Ⅰ. 서 론

하늘나라에서의 하나님과 사단과의 다툼이 욥에게 일어난 고난을 계기로 하여 지상까지 번진다.1)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여 모여 들었지만 위로는커녕 신랄한 비난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욥과 욥의 친구들은 각자의 신학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에 들이닥친 시련을 하나님 안목에서 누구 하나 설명해 내지를 못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체계가 실제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한계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욥의 친구들의 충고도 이미 욥도 익히 아는 범위 내의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욥의 친구들은 자꾸만 억지를 부린다. 만약에 자신의 신론에 허점을 자인한다면 이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신앙관까지 욥에게 일어난 사태로 인하여 허물어져야 함을 요구받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끝까지 버텨보는 것이다. 이로서 욥의 세 친구와 욥과의 경계선을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난다.

비실제적인 신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단지 자신이 그동안 구축해온 신학이요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변호해왔던 신학이라는 이유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 자체가 욥을 분노케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될 어리석음의 표본이다. 욥기는 욥만 드러내는 책이 아니다. 누가 욥을 더욱 힘들게 하느냐를 지상의 차원에서 말해주므로서, 하나님과 사단의 대결구조가  지상에서도 언제든지 형성됨을 보이는 책이다.   

본 논문은, 오늘날 성경을 외면하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정립하고자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한 복음과 얼마나 큰 상충되는 내용이 되는지를 욥의 친구들의 억지를 통해서 확인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욥을 비난하게 된 계기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욥 3;1) 친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이 자기 존재에 대해서 월권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배후의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소위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이 주권사상에서 인간은 자신을 출생에 대해서 저주할 그 어떤 권한이 있음을 갖지 못한다. 칼빈주의에 있어서 자연 자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들지 않는다. 칼빈은 ‘자연’이란 말로 피조물이 피조 당시에 상태를 지니고 있는 그 원래의 창조를 지칭한다. 즉 모든 피조물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원형태를 의미한다. 이때 자연은 물질의 세계, 식물, 동물, 인간의 육체, 또는 인간 삶의 유형, 사회의 우주적 질서, 문화적 정신적 삶들을 뜻하는 현대적 의미의 어떤 뜻과도 관계가 없다. 따라서 자연은 영이나 문화와 대조되는 의미가 아니라, 원창조 상태와 어긋나는 것, 창조의 질서에서 벗어나서 임의적이며 불규칙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은 칼빈에게는 존재이며 규준이라는 의미이다. “자연이 가르치며 일깨운다”는 말은 칼빈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다’, 즉 창조 시부터 세상에 담겨 있는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의지, 이 세상의 신성한 법칙을 가르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빈에게 자연의 법과 창조의 질서를 같은 의미로 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

그렇다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자기 존재 불평을 하나님이 주신 자연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로 그 자체를 죄로 간주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단정 짓는 이유는,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내뱉은 고백의 내용 속에는 빛, 어두움, 해와 달, 별, 악어 등등의 자연물을 자기 출생과 관련지으면서 출생을 저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조치 그 자체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 계수에서 자신이 빠져있기를 원했다. 이것도 곧 욥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자기로 인하여 훼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냥 없는 존재로 취급되기를 원한 것이다. 이러한 욥의 솔직한 괴로움의 표현은 차라리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피조물의 속성의 단면이 된다.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아픔이 있음으로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속성이 새로운 단면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의 아픔의 비명소리를 그들의 주권사상에 준해서 ‘죄’라고 규정한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은 죄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한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고 말한다.(욥 4:7) 그런데 욥이나 욥의 세 친구에 있어서, 난제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해 버린 세계 속에 과연 창세전의 ‘혼돈’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소위 “이 선한 창조 질서 속에서 왜 악은 아직도 활약해야만 하느냐?”하는 것이다. 욥은, 악이 자기에게 들이닥쳤다고 보았고, 욥의 친구들은 욥이 악을 유발자로 보았다. 둘 다 하나님의 선한 품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악한 일을 사주할 리가 없다는 점에서는 생각이 일치한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에게 혐의를 둔다. 욥이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지질렀기에 그 죄를 일깨어주기 위해 그 죄에 대한 징벌을 가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욥 친구들의 견해는, 하늘나라에서 이미 “욥은 의롭다”는 하나님의 판정과 일치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 말을 하시는 이유는, 사단이 이미 지상을 두루 돌아보았기에 사단이 아무리 욥의 잘못을 지적하려 하여도 지적해 낼만한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해서 사단은 ‘욥에게는 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지연책을 구사한다. 즉 장래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서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서 사단에게 의견을 개진하신 이유가 드러난다. 즉 욥을 데리시고 미래의 적용될 계시로서 개시시키려는 것이다. 즉 의로움이 일시적인 의로움으로 그 효과가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 적용될 영원히 ‘유효한 의로움’을 생산해 내시려는 것이다. 즉 욥의 사적인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고난 사건을 유발시키신 것이 아니라 ‘의로움’ 그 자체가 개인의 의로움으로 머물지 않고 구원을 성취시키는 보편적 의로움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욥 주변에 욥의 친구들을 유인시키셨다. 

욥기의 끝 대목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세 친구의 무지와 잘못을 위하여 대신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신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을 위하여 기도하므로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불구덩이 속에서도 무사히 구출되게 하시는 선지자적 구원사역을 보여주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창 19:29/욥 42:8)

이로서 땅의 세계는 개방적인 미래를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므로서 메시아적 구조를 미리 접촉할 수 되었다. 이것은 한시적으로 고정된 창조질서를 시간이라는 활주로에 실리게 하여 먼 메시아의 종말 시대로 이끌리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로서 욥은 선지자로서의 기능을 가졌기에 베드로전서 1:10-11에 나오는 ‘선지자 원칙’에 해당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렇다면 이처럼 ‘개방적 시간관’에 입각하지 못하고 한시적이고 정지된 창조 질서 안에서의 죄관과 욥이 고난을 통해서 보이는 죄관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창조 질서의 고정성을 하나님의 주권 사상으로 이해하는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그 죄관을 어떤 의식에서 비롯된 것인가?


2. 죄를 규정하는 의식구조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정의로움과 죄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기준이다. 따라서 욥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욥이 자기 배만 채우고,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한 죄에 대한 징벌 받은 결과라고 보았다. 즉 욥이 가난한 자들 평소에 업신여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욥의 입장을 그 가난한 자의 지경에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욥 20:15-19, 27-29)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욥 22:5-11)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욥의 잘못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욥의 친구들이 기존의 자신들의 인과응보 사상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욥은, 고난이 없는 욥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 가난한 자를 돌보았고 배려했고, 그들의 재산을 탐내거나 탈취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증언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0-17)

이처럼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벌어진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신의 저주라고 여기고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기존에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신학의 틀에 맞추려고 하니 욥에게 벌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욥의 지적처럼 단지 욥 같은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참으로 친구들이 도와주어야 될 가난한 자의 의로운 자는 바로 욥 자신이다 는 것이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욥 26:1-3)

그리고 나를 공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격하는 바가 된다고 욥은 선언한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용 19;2-6)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의 신 관념이 어떤 구조에서 비롯되었기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곧 정의(正義)며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징벌 받을 죄라고 여기는가? 그것은 바로 고대 농경 사회에서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를 하나로 엮어내는 경제 구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 증여를 통해서 신을 해석하는 사회

나카자와 신이치는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라는 저서를 통해서 고대 사회에 있어 사적인 사랑과 경제 구조가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밝혀주었다.3) 로고스란 곧 신의 ‘드러난 계시’로서 세계를 신의 존재와 그 활동성 중심으로 하나로 파악하는 지혜를 뜻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바탕에 이 고대 사회의 경제 구조와 논리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대 사회’란 국가 형태로 나타나기 이전의 씨족이나 부족 같은 혈연 중심의 사회를 뜻한다. 저자는 이런 혈연 중심의 사회를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가족의 사랑 속에 미성숙한 시절을 지내고 어린 소년의 심성 속에서 그 예를 든다.4) 동네 초밥 집을 보면서도 평소에 돈이 없어 먹고 싶은 초밥을 차마 먹지 못하는 어린 소년에게  어느 날 낯선 신사분이 호의를 베푼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다. 소년은 실컷 초밥을 배터지게 먹게 되지만 여전히 소년은 그 신사 양반의 정체도, 이름도 모른다. 이런 경험이 있은 후, 소년의 마음속에는 처음 밀려 왔던 인생체험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확산되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목으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다’는 인상이다.

좋은 일 했다고 우쭐대는 하나님도 아니요, 사랑을 주었다고 독한 착함으로 보상받기를 원하는 그런 하나님도 아니다. 그런데 늘 사랑의 자리에 계시면서 무상으로 베푸시기만 하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미성숙한 심성으로 표출되는 소년의 마음이 바로 고대 사회를 경제적으로 엮어내는 결합력이라고 보고 있다. 관념적인 사랑의 신이 지상에 펼쳐질 때는 ‘순수 증여’의 모습이 된다. 여기서 오늘날의 경제를 움직이는 ‘교환’과 ‘증여’라는 형식이 이 ‘순수증여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봐서 오늘날의 경제 결합력과 고대 사회의 결합력 사이의 차이를 찾아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종류와 엄청난 수량의 상품이 매매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상품이 판매자의 손을 떠나서 구매자의 손으로 옮겨가면, 곧바로 그 대가가 지불된다. 이 매매에서 상품의 가치는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의 특성은 무시되고 오로지 다른 질의 상품과는 화폐의 양으로만 등가 교환이 이루어진다. 즉 매매되는 상품에는 전에 그 물건을 소유했던 사람의 인격이나 감정 같은 것은 고려되지 아니한다. 단지 계산 가능한 돈으로 매겨지는 가격만 부각된다. 즉 돈이 이질적인 다양한 상품을 연계하는 공통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증여’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돈의 액수로 매겨지는 가치 말고 인격과 인격의 결합을 목표로 물건이 상대방에게 건네지는 것을 뜻한다. 이 선물 형식을 증여(gift)라고 한다. 예를 들면, 찬한 친구에게 정성이 담긴 선물을 주는 경우, 백화점 같은 곳에서 산 상품을 선물하는 경우라도. 우리는 주의 깊게 가격표를 뗀 다음에 다시 예쁘게 포장해서 상품으로서의 흔적을 가능한 한 제거하려고 한다. 이것은 교화 원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신호다.

즉 물건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과 더불어 증여하는 사람의 정이 전달되는 것이다. 이 증여를 받은 사람도 답례를 하기 마련인데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이 답례를 받는 당사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전체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졌지만 상품의 가치가 오고간 것은 아니라 인격과 인결과의 결속이 더욱더 공고히 되는데 이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5)

 그렇다면 순수 증여란 무엇인가? 증여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증여란 선사받은 쪽에서 계속해서 또 다른 이에게 답례를 하므로서 증여의 순환사슬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순환 고리를 통해서 거저 베푸는 사랑과 자비라는 영적인 힘은 이 순환 사슬로서 형성된 내부 영역을 장식하고 그 힘들을 증식시킨다. 이 힘이 바로, 우정, 신뢰, 애정, 위신 같은 것들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을 대변해준다.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날, 밸런타인데이 같은 날에는 이 ‘증여 사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런 증여가 거세되면 교환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증여한 자가 누군지를 전혀 모르는 경우, 혹은 선사받은 것보다 훨씬 큰 답례를 예상 밖으로 받게 되는 경우, 또한 답례의 대상자를 알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증여 이상의 여분의 것을 받음으로 인하여 기존의 인간들끼리의 증여 순환 고리를 이탈된 곳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증여를 접하게 되면 곧 증여 원리 자체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원리와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아낌없이 자신을 선물하는 존재의 실재감을 감지하게 된다. 책임 있는 답례와 답례의 고리 밖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느닷없이 소멸해버리기에 실체를 포착할 수는 없어도 예상 밖의 엄청난 선물을 행함 없이 받을 경우에, 사람들은 이 절대적 사랑의 주체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추상적 신의 존재와 활동을 근거가 되는 장(場)인 동시에 인간들이 미처 다룰 수 없는 순수증여가 발생하고, 발휘되는 이 영역을 가지고 사람들은 대자연으로 인식한다. 6)

고대 사회에서 어떤 이에게 갑작스럽게 재산에 증식이 일어나면, 이것은 순수 증여로 인하여 여분의 선물이기에 그는 그것을 신의 사랑으로 알고 자신의 신의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증여하므로 서 그 가난한 자에게 신의 자비가 전달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웃에 사는 가난한 이는, 그것은 부유한 이웃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공급받은 순수증여라는 인식으로 신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고대 사회는 대자연 안에서 순수 증여를 발생시키는 신의 자비 기능 안에서 통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이가 이 증여의 순환 고리를 이탈하여 사적이 탐욕으로 증여의 책임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소유화를 시켜서 인위적으로 자기에게 흘러들어온 자비의 산물을 독점하고 축적한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전달할 신의 선물을 가로채는 것이 되기에 대자연을 관리하는 신으로부터 징벌을 당하여 그의 재산은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모아져서 ‘신의 계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이고 율법적인 문자 계시’가 없던 시절에 통용되는 정의(正義)관이요 죄(罪)관이요 징벌(懲罰)관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이 신론에 준해서 욥에게 일어난 고난을 해석하려고 덤벼든 것이다.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욥 20:19-29)

문제는 이런 식의 신론과 해석으로는 욥에게 들이닥친 고난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는데 있다. 오히려 욥은 반대 경우의 예를 든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욥 21:7-14)

즉 욥 자신에게 들이닥친 이 고난의 사태는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원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반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축복 받은 이를 마치 저주받은 이로 보이게 하고, 저주받은 이가 마치 축복 받은 이로 보이게 하는 원리가 욥이 받은 고난 속에 담긴 새로운 계시가 된다.7) 이는 장래 오실 메시아의 모습이 이 ‘고난 받는 욥’이 당하는 경우와 같은 경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과 사단의 하늘나라 대결구조가 그대로 땅에서 같은 취지에서 대결구조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가 메시아가 등장하므로 서 본격화되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의도적으로 사람의 지혜를 기피하고 나타난 지혜가 바로 구원의 지혜다.8)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지혜는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한다. 어리석음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사람들 속에 섞인다. 따라서 아무리 구원의 원리가 사람들 안에서 근접하게 나타나도 사람들의 선택의 대상의 배척당한다. 그것은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즉 욥의 경우처럼 계시가 주는 고난의 구조에 휩싸이지 아니하면 납득될 수 없는 계시로 남고자 하는 것이 ‘낯선 하나님’의 전략이다. 이 하나님이 구체화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로서 욥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증명하는 선지자 반열에 속한다.


4.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

욥이 살고 있던 우스라는 동네는 ‘에서(에돔)’의 땅이다. 곧 비(非)-이스라엘적이다. 율법 시대 이전에9), 이 비-이스라엘 지역에서 ‘고난 받는 의인’의 설화가 등장해서 결국 이스라엘의 계시 안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이나 언약 해석에 있어 핵심 되는 답이 문제와 더불어 ‘지혜’의 형식으로 제공되어 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과연 구체적인 문자로 전달된 계시 없이도 과연 하나님이 원하는 참다운 인간상이 정립이 가능한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하면, 인간이란 사물을 대하면서 ‘식별(재인식)’과 ‘사유(思惟=생각)’를 구별한다는 것이다. 사유가 필요치 않는 사물은 그저 외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지칭하기만 하는 되는 사물들이다. 예를 들면, ‘저건 손가락이야’, ‘저건 사과야’, ‘저건 집이야’ 등으로 표현되는 판단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다른 사물들이 있다. ‘우연히 맞딱뜨리게 되어’ 숨기고 있는 바를 해석해내야 하는 것, 즉 ‘기호’다. 기호는 관조의 대상의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도록 정신을 자극하는 대상이다.10)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고통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인 욥은 홀로 이전에 알았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과 자신을 재규명 되어야하기에 ‘정체 불명의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폭력은, 사유해야 할 사람의 정신에 상처를 입히는 근원적인 폭력이다. 이로서 사유자는 ‘아픈 사람’이 된다. 환자가 된다.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으로 개시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욥은 난데없이 주어진 고통 속에서 새롭게 사유함을 요구받는 새 인간상으로 등장한다. 궁극적인 심연부터 바깥 피부껍질까지 온통 낯선 고통으로만 꽉 채운 인간으로 새로운 정립되는 존재가 욥이며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인간상이다. 기존의 피부나 기존의 내부 심성으로 조립된 신과 인간관은 고난 받는 욥 앞에서는  기껏 박해자라는 부정적인 역할 밖에 못한다.(욥 12:4/19:3) 즉 친구들의 모든 신학체제는, 욥에게 고난을 주시면서 등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긁혀야 하는 신학’이 된다. 이 욥의 고난은 십자가 복음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된다. 예수님도 이 저주 속으로 친히 들어가서 받아들여야 하셨다.(갈 3:13) 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요(마 3:17) 참 아담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가 참 이스라엘이다.(요 1:47) 이 ‘참 아들’과 ‘참 이스라엘’ 사이를 성사시키고자 개입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언약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의 해답은 이미 율법 이전부터 발생하여 줄곧 이스라엘 역사와 동행했고 그 본질은 언약의 개입과 함께 이스라엘 내부에 ‘지혜’라는 이름으로 관통되고 있었다. 언약이 없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Ⅲ. 결 론

욥의 친구들은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받는다’는 신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을 준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욥의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는 욥과 욥의 세 친구를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욥 35:4-8)

즉 욥이 받은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욥과 세 친구들은 인간들의 선이나 혹은 악행으로 그 계획이 변경되리라고 기대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후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미리 대속의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욥 33:22-28) 즉 엘리후는 욥에게 충고하기를, 욥은 자신의 고난을 근거로 하나님에게 항변할 것이 아니라 ‘준비된 대속물’을 염두에 두고 그 앞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했다는 것이다.(욥 36:18) 그러나 엘리후도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욥 자체가 바로 친구를 살리는 대속물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주권사상’의 한계다.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과 인간을 극단적으로 떼어놓는 존재론적 구조로 배치시키는 것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철거시켜야 될 죄악된 안목임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안에서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즉 참으로 멀고 먼 사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죄인 사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를 기점으로 하여 멀고 먼 하나님을 멀리서 경배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입장인 것을 수용하므로서 죄와 의의 멀어짐을 실감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위대하다”가 하나님의 주되심에 합당한 고백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는 자기 고백이 진정한 복음 앞에서 합당한 고백이다.11)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5-36)



참고 도서

Emil Brunnre· Karl Barth, 김동건 역, 『자연신학』,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Gustavo Gute?rrez, 김수복·성찬성 역, 『욥에 관하여』, 분도출판사, 1996.

Nakazawa Shinichi, 김옥희 역, 『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동아시아, 2005.

Roy B. Zuck, 전광규 역, 『욥기』, 두란노, 2006.

서동욱, 『차이와 타자』, 문학과 지성사, 2008.



각주)-----------------

1) 욥 1:7에서 사단은, 다른 천사들과는 달리 ‘땅 위를 돌아다니다 온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2) 에밀 부르너 Emil Brunner· 칼 바르트 Karl Barth , 김동건 역 『자연신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pp.43-44.

3) Nakazawa Shinichi, 김옥희 역,『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서울: 동아시아, 2005). 

4) 시나 나오야 라는 일본 작자의 소설 『어린 사환의 신(神)』,(1920년)을 주제로 하고 있다.

5) Nakazawa Shinichi, 같은 책, pp.39-43.

6) Nakazawa Shinichi, 같은 책, pp.67-70.

7) 이는 요한복음 9장39-41에 나오는 원리와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8) 고린도전서 1:19-25,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9) 욥이 고난의 시기 이후라도 140년 간 더 산 것은 대략 족장들이 살았던 수명과 일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는 210세를, 아브라함은 175세를, 이삭은 180세를, 야곱은 147세까지 살았다. 로이 죽Roy B. Zuck, 전광규 역, 『욥기』, (서울:두란노, 2006), p 11.

10) 서동욱, 『차이와 타자』,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8), pp.64-65.

11)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각주)-----------------

'PREACHING' (프리칭)잡지에 실린 논문(2010년 3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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