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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7 09:10:29 조회 : 3833         
요한계시록 해석법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요한계시록 해석법

Ⅰ 서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역할은 예수님의 공로를 가로채는 일이다. 요한계시록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런 짐승적인 해석을 도출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을 접하면서 세상은 여지없이 ‘예수님의 공로’를 갈취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야만 ‘짐승의 노예’다운 면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만 새삼스럽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만 노출시킬 뿐이다. 즉 인간이 요한계시록을 해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늘 추궁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새삼 자백할 뿐이다. 이것도 성령 받은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인식이다.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대한다는 것은 곧 ‘언어’를 대하는 일이다. 이 특별한 언어를 마주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소속을 극명하게 드러내게 되는데 아무리 숨기려 하여도 소용없는 이유는 말씀이 인간을 상대로 말씀다운 주도권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건방지게 자신이 말씀을 해석하려 든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짐승적 속성이 노출되는데 바로 그 노출의 환경이 요한계시록이 밝혀 놓은 그 세상이다.

Ⅱ 본론

1. 언어 해석

단어의 의미는 늘 근사치를 나타낸다. 작은 차이만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더 광활한 의미와 연결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게 바로 그 뜻이다.”고 단정 짓게 되면 이는 더 많이 연결된 미지의 의미들을 곧장 부정하는 것이다.

“이게 그것이다.”고 단정 짓는 바로 그 자체를 부정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의미가 바로 말씀을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취지다. 마술사가 손에 공을 넣고 “방금 제가 손에 넣은 것이 무엇입니까?” 물을 때, 답변하는 답변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물건을 내놓는 것과 같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인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하신다.

사람들이 “맞다”고 우기는 것은 본인이 ‘궁금해 하는 기대치’일 뿐이다. 바로 이 의식을 요한계시록에서 십자가 죽음에 근거한 성령의 복음으로 조사에 나서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해서 성경의 단어는 고유적인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근본적 의미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즉 그 자체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설명하는 설명의 양식이 된다.

특히 요한계시록에는 ‘도판 옮기기’가 성행하는데 이는 마치 옷 수선 집에서 행하는 짜깁기 양상과 같다. 구약의 역사적 표현들을 그대로 옮겨놓고 그것을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바는 그 도판 밑에서 작용하는 십자가의 힘이다. 곧 ‘어린 양의 죽음에서 나온 능력’이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는 이 죽음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언어를 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 문제의식→성경→역사(현실) 재구성→주체성

성경학자이든 원어학자이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이 원칙을 따른다. 바로 이러한 절차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제시하는 모든 궁금증이나 문제의식은 결국 자기 주체성 정립을 위한 것이다. 즉 자기 동일성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시도하는 자기 존재감 발산에 해당된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 빼놓고 다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사도 요한 같은 경우는 성령에 충만함을 입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이 말은 아무리 대단한 권위를 발휘한다 할지라도 성령 없이 계시의 본 내용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이 성령감동은 곧 그동안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게끔 했던 모든 역사적 인식이 부정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7에 나오는 말씀(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을 증명해줄 그 어떤 이전의 경험은 그 누구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재림에 대해서 아무도 과거에 체험한 적이 없고, 체험한 적이 없다는 말은 인간이 그 사실을 기억에 담아 둘 수가 없고, 기억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곧 허구요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증명할 길이 없는 법이다. 기껏 증거는 하지만 상대방이 그 말을 곧이들을 그 어떤 바탕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내놓는 의미는 세 가지의 반복에 의해서 구축된다.

첫째 반복: 습관(강도가 굳어짐),

둘째 반복: 기억.

이 두 가지 반복으로 동일성 취득, 곧 자기와 남의 차이를 느낀다. 이것은 인식될 수 있고 포착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반복은 인식론적이 아니라 창조적이다. 차이를 따질 수 없다. 주체가 나서서 인식할 수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데 이로서 첫째, 둘째와는 달리 역사적인 인식과 묵시적인 창조성에서 차이가 난다. 같은 것의 반복에서 반복 없는 차이로 추상화된다(확정적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 세 번째에는 인간들이 미지의 것을 희망하는 종교적 품성이 발휘된다. 미지의 X를 무작정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미지의 X에 대한 온갖 성경에 나오는 묵시적 단어들을 대입해도 그것은 그저 인간들의 비-성경적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여전히 육적이다.

이렇게 해서 요한계시록을 비롯해서 모든 말씀은 인간들의 성경해석을 반대하거나 저항하거나 전치(轉置)하거나 수정하려는 시도에 의해서 실시된다. 자체적으로 딜레마와 스캔들(거침성)을 품고 나타낸다.

이러한 세상 환경은 예수님이 묵시적 신분으로 오셨다는 점에서 이미 확정되었다. 묵시적 존재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 참여하므로 이 세상적인 인간의 영역은 묵시(짐승)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오직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지탱되는 세상이, 나타난 묵시적 신분자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적을 당하게 된다. 이는 곧 죄의 영역이 인간이 생각한 역사적 범주 밖으로 튀어나가 확장되었다는 의미다.

이 확장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진정한 진리적 의미를 놓친다.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역사적 언어해석이 이 묵시적 언어를 탐사할 수가 없다. 이 확장작업은 줄곧 구약에서부터 해 오시는 방식이다. 즉 구약에서 ‘주의 오른손’이 하시는 기능의 연장이다. 출애굽기 15:6-7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오른 손’이란 하나님 보좌를 세상에서 감추는 방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때는 오로지 ‘오른 손’의 기능으로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오른 손의 역할’은 비로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원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주의 자리’란 ‘하나님의 원수’와 짝을 이루어 그 내막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시110:1-2).”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는 그 어떤 인간도 ‘주’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를 색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원수’와 한통속이 되어 세상을 그대로 꾸려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요한계시록과 여타의 성경을 해석해 왔고, 그 신학에서 짐승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의 몸통이 하나님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검토해 봐야 한다.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짐승이 시킨 일이라는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실제로 신앙 유무를 결정하는 증거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언약의 주체로 보는 성향으로 인해 십자가 피와 대결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악령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봐야 한다. 사람 손에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만이 인간과 관계하시는 진짜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는 하나님은 다 엉터리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말씀은 낚시 바늘이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걸려들게 마련이다. 말씀은 계속해서 세상을 들추어내고 또 들추어낸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으로 자기 가면을 만들고 그 가면을 활용하고 또 활용한다. 주체는 계속 뒤에 숨겨두는데 언제까지 갈 것인지는 본인도 모르다. 하지만 말씀의 계속적인 추적으로 인하여 인간이 끝까지 숨기는 그곳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주한 묵시적 악령이 함께 있다.

이때까지 주님이 벌이시는 말씀 작업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출9:29).”

2. 천지 일보가 질의한 것 다섯 가지

(1) 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생물은 무엇인가?

(2) 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 누구를 말하는가?

(3) 계시록 12장에 ‘해를 입은 여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4) 계시록에 등장하는 ‘7 머리 10 뿔 짐승’은 무엇인가?

(5) 계시록 18장에 만국을 무너뜨릴 ‘음행의 포도주’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상의 다섯 가지를 주식회사 천지일보가 질의해 왔다.

이 질문에서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라는 형식은 말씀의 권위를 안다면 사용하지 말아야 될 형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질의하기 이전부터 줄곧 그대로 실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문 형식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지금 네 생물은 어떤 식으로 일하고 있는가?” “지금 두 증인은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가?” “지금 해(태양)를 입은(뒤집어 쓴) 여인은 어떤 식으로 일하고 계신가?” “지금 7 머리 10 뿔 짐승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지금 음행의 포도주는 어떤 식으로 역사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만약에 ‘무엇인가?’ ‘누군가?’라고 질의한다면 이는 역사 속에 있는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질의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나 개념은 역사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으로 포착되기에 역사적으로 일치성을 갖는 그런 대상은 “없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 그 이유는 그렇게 질의하는 인간 당사자는 본인을 분명히 “있다, 존재 한다”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의자가 속해있는 역사적 환경 속에는 질의 대상이 되는 대상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의자가 그런 식으로 질의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그 역사적 환경 속에 대상이 되는 물체나 사물이 같이 들어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네 생물이 어디 있는가?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저 꽃병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데 이는 역사상에 있다고 느껴지는 질의자와 꽃병은 같은 역사적 존재로 눈에 띄기에 당연한 질의다. 하지만 네 생물은 어디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일곱 머리에 열 뿔의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인가? 어느 열대 우림 지역에 있는 짐승인가? 본 사람이 있는가? 없지 아니한가.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가?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세상 어느 거리에서 뜨거운 태양을 짊어지고 다니는 여인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되지 아니한다.

세계 200개국의 나라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 그런 포도주가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죽는 장소가 소돔도 되고 혹은 예수님이 죽으신 골고다 언덕도 되는 그런 죽음을 죽은 두 증인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있지도 않은 대상을 향하여 ‘무엇인가, 누군가’라고 묻는 것은 그렇게 묻는 본인은 분명이 ‘존재하는 것이 맞고’ 따라서 그런 질의를 하는 것이 정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일방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발생된 일이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 외의 대상에 대해서 ‘무엇이냐, 누구냐’를 묻는가?

차라리 이렇게 질의해야 한다. “십자가 달리신 주님이여, 제가 ‘음행의 포도주’에 대해 묻는 것이 왜 잘못이며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만든 죄악입니까?”라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십자가 달리신 주님, 왜 저의 존재는 존재 자체가 악한 겁니까?”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질의 형식으로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은 숨어있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것으로 역사적이면서도 묵시를 향한 열망으로 분열되어 있는 주체를 해소하려 한다. 그리고 답변을 듣고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 답변을 통해서 또 다시 갈라진 주체에서 쏟아져 나온 질의를 마구 내뱉으면서 끊임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요한계시록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다.

위의 다섯 가지 질문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근원적 의미를 말해주기 위해 보조적으로 봉사하는 의미에 따른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계5:1-3).”

오른 손이 하시는 기능, 바로 이것이 근원적 의미다. 이 의미는 ‘주의 원수’의 등장과 더불어 주의 주되심으로 같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주님과 주님의 원수’간의 사태를 말해주는 보조적 의미들이 다양하게 파생되어 만들어진 십자가 사건의 더미요 뭉치다. 모든 것은 결국 십자가 복음으로 집결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

(1) 네 생물이 지금도 벌이는 일

에스겔 당시의 보좌(성전) 의미로 되돌아가야 한다. 네 생물은 에스겔 1:10에 나오는 도판(圖板)이다. 보좌에서는 창세기 3:15에 근거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하는 모토와 이념과 거기에 합당한 능력들이 쏟아진다. 과거에 있던 그림을 다른 그림과 엮어 계시를 완료시키는 힘은 모두 십자가 죽으심의 능력이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3:19-21).”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74:7).”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시 74:10).”

따라서 십자가를 야기 시킨 그 원수를 색출하고 벌하기 위해 네 생물은 ‘주의 이름’을 모시고 곳곳에서 복음과 비-복음의 대결구조로 몰아세우기 위해 이미 천하를 장악하고 있다. ‘생물’을 ‘천사’라고 표기하는 것은 원래 ‘생물’이라고 표기한 것에 대해 의식되지 못한 여분의 의미연결을 임의로 삭제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살려두어야 한다.

(2) 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 지금도 어떻게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가?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의 기능을 하게 된다. 두 감람나무의 기능이란 이 세상 모든 장소를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어 피 흘린 자리와 이 세상에 10가지 재앙이 떨어진 공간으로 만드는 기능을 하게 된다. 즉 역사적으로 알고 있던 공간을 묵시적 신분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므로서 묵시적 공간으로 전환되었음을 통보하는 일을 하게 된다.

(3) 해를 입은 여자는 지금도 무슨 일을 하는가?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구성(창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뱀에 의해서 더럽혀진 음녀와 대비되는 시원적 의미를 품고 있다. ‘해를 입었다’는 것은 모든 창조물에 대한 창조의 능력이 본래의 근원적 의미가 그리스도를 낳는 여인의 모습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능력과 권한이 다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요 이스라엘을 위한 창조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침을 훼방하는 것들과의 싸움판이 이루지게 한다. 이처럼 영적 전쟁과 투쟁이란 시원적 의미를 품고 싸우는 싸움이다.

(4) 계시록에 등장하는 7머리 10뿔 짐승은 무슨 역할을 이 시대에 하게 되는가?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슥1:18-19).”

예수님의 증인을 모두 순교자로 만들기 위해,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현실임을 말하기 위해서 모든 국가는 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구약의 예언된 바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가담되기 위한 구체적 제국이 다니엘 7장에 나온다. 로마다.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7-8절).”

이 짐승은 다니엘 7:9부터 나오는 영원한 보좌와 대비되는 지상의 짐승 제국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바벨론으로부터 시작된 짐승의 실체가 인자(人子)되는 다니엘을 건드림으로 그 실체는 참된 인자로 오신 메시아와 궁극적인 대결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마감이 된다. 역사란 이 묵시적 내용을 세상 끝날까지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성질을 담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최종적으로 바벨론 제국을 대표해서 로마가 관여하므로 세상 만국은 십자가 죽으심 앞에서 그 성격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앞으로의 모든 만국은 제 2의, 제 3의 로마 역할을 하게 된다. 반면에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증거하는 성령 받은 자들은 계속 나타나면서 순교자로 묵시적 임무를 다하면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뿔이란 구약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위한 기능을 발휘하는 지도자, 곧 왕이다. 일곱 머리란 로마의 일곱 언덕을 말하고 열 뿔이란 초대 교회 성도들을 핍박한 대표자 10왕을 의미한다.

이처럼 로마는 바벨론 나라의 역할과 연계하면서 지나온 세월을 설명하는 최종 해석자로서의 모델이 된다. 하지만 이 나라를 ‘로마’로 표기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짐승은 짐승으로 되돌아가야 비로소 복음적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상 대중들은 자꾸만 복음보다는 힘을 얻고자 하기에 새로운 지도자를 찾지만 그들 간의 어떠한 경쟁에서도 악마의 종으로서 성도를 핍박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인간은 국가와 왕으로서 신과 그 나라에 대한 욕망이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집착을 대체한다. 짐승이란 일종의 병마개 같은 것이다. 지극히 차분하고 정돈된 장벽. 그 자체로서 치밀한 통일성 있는 체제를 인수받는다. 사회적인 규약과 규율을 드러난다.

거기에 비해 그리스도는 산만하고 비-체제적이다. 즉 짐승의 체제를 닮지 않는다. 세상이 전반적으로 짐승에 의해 접수되므로 성도의 구성은 일체의 세상적인 요소로 엮어지지 않는다. 모든 게 우연적이고 돌발적이다. 즉 머리와 뿔이 없다.

(5) 계시록 18장에 만국을 무너뜨린 음행의 포도주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분노의 술잔에 담긴 것이 저주를 부어주는 포도주이다. 분노란 이미 전쟁 중이라는 뜻이다. 분노 없는 전쟁은 없다. 분노와 분노의 마주침은 곧 심판 진행을 뜻한다. 이 세상은 이미 주님이 주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음녀란 주인의 것으로부터 이탈된 이방나라를 뜻한다.

남자와 여자로 인하여 성립되는 육적인 생육의 방식이 묵시적으로는 묵시 세계의 얼룩으로 장식 된다. 혼란스러운 영적 전쟁이 표면에는 얼룩으로 드러나는데 곧 성의 타락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벌은 범죄에 의해 초래된 손상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징벌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의 기괴한 반복이다.

Ⅲ. 결론

역사의 재구성은 자신을 필히 구원받은 자로 규정할 때나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필히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이 보편적인 성경 해석으로 뒷받침이 가능한가?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경험을 만들어내는 비-경험적 실체를 표현할 때, 인간의 모든 의미는 거부당해야만 하는 의미에 해당된다. 십자가 사건은 그런 식으로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를 생각하는 순간이 짐승으로부터 진압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모든 해석은 표현된 단어 형식을 깨거나 분석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도리어 인간 세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 이해도가 부정적으로 평가받도록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 18:38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없다. 예수님은 사전에 답변을 내놓았다. 요한복음 18:37에서 “나는 곧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려 왔노라.” 이렇게 미리 답변을 제시하므로서 그 답변에 맞는 질의에서 인간은 이미 배제시켜버렸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질의해야 될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언해놓으시고 벌이신 일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마치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는 질의를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사람들이 자꾸만 질의하는 것은 자체적인 평화를 구축해서 자신의 신상을 좋게 하려는 생존 본능에서 나온 구원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주되심, 곧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금지조치가 이 땅에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마태복음 10:34-39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되어 있다.

이미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 세상을 구축해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부활하신 주님이 등장할 때, 인간은 그 주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사도행전 9:4-5에 보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나 구절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의하는 것 자체가 주님에 대한 핍박이요 모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은 인간이 처리할 수 없고 인간들이 벗어날 수 없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여된 또 다른 실체에 의해서 진행된 사태에 인간들이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을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간들의 사회에서 사용하는 공통된 인식과 소통의 장으로 표현될 때 사람들의 본연의 패역함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모든 인간들이 관여되었음을 하늘나라에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어이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태도가 하늘나라에 대해서 공격하는 하나님의 원수와 같은 패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순간이기도 한다. 따라서 계시록뿐 아니라 모든 성경 한 단어 한 단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수임을 유발시키는 계기를 조성한다.

질의할 자격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질의하게 만든다. 그래야 우리가 전적으로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이 공식화되기 때문이다. 즉 구원받고자 하는 자제할 수 없는 본능이 하나님의 모든 금지 조치에 대항하는 악마의 본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두 증인이 알려주는 사항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고집하고, 십자가 죽음 사건을 애써 외면하고 그것을 우회하여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바탕을 자꾸만 종교본능으로 생산해 내는 자들, 바로 이것이 저주받아야 될 인간이다.

십자가 대체용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자아성에 대한 끈질긴 집념이다. “내가 알았습니다. 내가 행했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사랑했습니다. 내가 소망했습니다. 그러니 나를 천국에 넣어주세요!”라는 집념 말이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전면적인 차단을 감행한다. 이것이 새언약의 위력이요 효과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

상징? 신화? 아니다! 일상적인 용어들이기에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도로 인간들에게 살해당했음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일상의 생활 말고 요한계시록에 맞는 특별한 행위를 따로 구상할 하등의 필요가 없다.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을 접하는 순간 인간들은 상상을 하게 되는데 뭘 상상하던 그것 모두는 인간들의 곡해와 오류의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잡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 어떤 개선된 종교 단체나 개혁에 개혁을 반복해도 교회라는 이름의 조직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제 2, 제 3의 자기를 신봉하기 위한 우상체이며 십자가 사건을 대체하는 대체용으로 등장할 더러운 자랑질에 불과하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능하다. 그것만이 구원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이다.

‘신기함’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은 결코 신기한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 단지 우리들이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 하는데, 그 이유는 평범한 일은 자신이 행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한 일은 일상 깊숙이 박혀있는 사소한 성냄이나 분노, 미움 같은 것들조차 우리 인간이 이겨내지 못하고 있음을 통해서 밝혀진다. 즉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은 우리들이 전혀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성경 말씀을 놓고 인간과 성령이 경쟁하신다. 성령께서는 이미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의 입술에서 얼마나 더러운 해석들이 나오는지를 지켜보고 계신다. 인간은 역사적 의미를 차리면서 우회로를 통해서 자작극을 만든다.

-교회마다 자작극으로 넘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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