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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06:15:48 조회 : 3406         
천지일보에서 보내온 질문시리즈(2)와 저의 답변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성경 상식 질의문

1. 주제별 질문

아래의 내용은 성도들의 바른 믿음과 지식을 위해 참 진리를 알게 하는 질의문입니다. 이는 전국에서 성도들이 종교 담당 기자에게 보내온 내용입니다. 답은 성구(성경)에 입각하여 작성하면 됩니다.

2) 계시록

① 하늘에서 떨어지는 해․달․별은(마 24:29, 계 6:12-14) 왜 떨어지며, 이 해, 달․별은 무엇인가? 무너진 이 교회에 구원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때는 언제인가?

안 떨어져야 정상이라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해와 달과 별이 떨어져야 하는 이유는 용도가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해와 달과 별의 용도는 창세기 1:14에 의하면 낮과 밤의 구획하고 그 날의 반복으로 일자와 연한, 곧 시간을 구성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이미 이 세상이 질적으로 저주받을 대상으로 규정된 이상, 시간도 그리고 세상 유지시설도 철거되어야 마땅하다. 요한계시록에서 해와 달과 별이라는 자연세계의 대표적 피조물을 특별이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이방민족에게는 신의 영원성을 증명해주는 신성한 증거물로서 섬김의 상징물처럼 숭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인간과 주변 환경에 비해서 천체는 영원토록 요동하지 않아서 보다 더 신성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동안 신의 대변자 노릇한 것들은 주님을 실존을 드러내는 용도로 활용되면서 대자연에서 은퇴하게 된다.

교회에는 원래부터 구원은 없다. 왜냐하면 교회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의해서 생겨나는 그리스도 몸과 지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 계속 활동이 되면 그 활동성에 의해서 구원받을 교회는 계속 생성되는 것이지 결코 한 번 교회 되었다고 계속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 모두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원이란 인간이나 교회가 갖는 대상이 아니라 구원작업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관여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제공되는 구원에 과한 소식을 접하면서 잠재되어 있는 비-구원적 요소를 발산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구원을 가진 효과가 아니라 마치 구원을 소지할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해서 그 바탕 위에서 표출되는 비-복음적 요소를 방출하게 되어 있다. 수동적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행위는 긍정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태도가 곧 복음에 반대되는 성격이라고 하나님께서는 규정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이 벌이시는 구원작업에 휘말리게 되어 있다. 부정적으로 참여되는 것이다. 교회란 구원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이 어떤 식으로 훼손되는지를 보여주는 집합소라고 할 수 있다.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종말의 때에 대한 지대한 관심사 같은 것입니다. 종말에는 때를 묻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대(아이온)적으로 다루어지지 인간들이 흔히 일직선상으로 이해하는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② 계시록을 가감하면 천국 못 간다고 했다(계 22:18-19). 천국 못 가도 정통인가, 아니면 이단인가? 계시록을 가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인가?

정통도 천국에 못간다. 이 세상 그 어떤 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간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 한 아담의 후손들은 생명나무 열매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3:24의 원칙은 정확하게 지켜져야 한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계시록에 대해서 과연 가감했는지 아니했는지는 같은 인간들이나 교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한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요 19:30) 따라서 이 완성은 생명나무가 뿜어내는 그 원칙의 본격적인 적용을 실시하게 된다. 창세기 3:22-24에 보면, 생명나무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뿜어낸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곧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아담의 후손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갈 수가 없다. 이 원칙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여전히 뿜어진다. 요한복음 13:37에서 베드로가 목숨까지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요한복음 14:2-3에 보면, ‘처소’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통보하고 계신다.

즉 인간에게 구원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천국 갈 권리가 특정인에게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모두가 이단이다. 정통이라는 것은 교단의 힘을 과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개념으로 동원된 것이다. 교단마다 다 정통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조작이 통합적으로 들통 나는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이다. 그 앞에서 어느 인간도 의인이라고, 정통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사라진다. 이처럼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이 아니고 죄인이기에 나름대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왜곡된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요한계시록 말씀을 왜곡되게 가감한 것도 동일한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즉 인간이 태생이 자기 옳다는 것을 포기 못하면서 살기에 모든 인간은 요한계시록을 대하면서 나름대로 가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원이란 예수님 소관이지 인간이 본인 관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가 이단이다. 정통은 예수님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이름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것이다.

③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선악나무)는 어떤 나무이며, 이 나무 과실은 어떤 것인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에덴동산의 중앙을 차지하면서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위상을 규정짓는 특수한 나무이다. 인간은 이 두 나무를 보면서 자신을 에덴의 주인공으로 여길 수 없다. 도리어 인간마저 생명나무나 선악과나무의 취지를 나타내는데 봉사되어야 할 존재다. 쉽게 말해서 인간을 위하여 두 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나무의 의미를 위하여 인간이 창조되었으며 만약에 인간이 이 나무의 취지를 훼손한다면 인간이 흙으로 환원되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물론 에덴동산에서 추방도 된다.

이를 놓고 볼 때에 이 두 나무에 인간이 손대므로 서 그 뒤틀려진 관계 속에서 인간존재가 처해 있는 의미가 드러나는데 그 비밀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약속으로 구체화된다. 창세기 3:15의 약속은 이러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즉 죄라는 것은 인간의 단독범행이 될 수 없고 숨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주체들이 이미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참여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이 대목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여자의 후손’은 곧 예수님을 언급한다. (계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리고 뱀의 후손은 이 ‘여자의 후손’으로 심판받게 될 ‘만국’이다.

그렇다면 생명나무나 선악과나무, 이 두 나무는 인간을 다루는 창조주의 두 속성과 관련 있다. 이 두 원칙을 가지고 창조주는 세상만사를 다루어오고 계신 것이다. 위반하면 저주요, 저주받은 자에게는 생명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시고자 하나님에 의해서 심겨진 나무다.

이 두 나무는 창세기 3:15의 약속이 진천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의 창조 작업을 통해 그 취지를 흘러나오는데 선악과나무는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취지를 나타내고 생명나무나 언약의 성취를 통해서 나타난다. 결국 요한계시록 22:2에서 생명나무는 언약의 완성체인 천국에 나타나서 그 영원성을 발산하게 되고 선악과는 인간과 더불어 사라졌다. 더 이상 피조나무를 통한 취지는 소용없기 때문이다.

④ 땅의 임금들이 음녀와 함께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다고 하셨다. 음녀와 땅에 거하는 자들은 누구이며, 음행의 포도주는 무엇인가? 지금 누가 이것을 먹고 있는가?

음녀란 예수님 십자가 지신 이후에 다시금 규정받은 이 인간 세상 전체를 말하고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자들은 이 세상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은 말한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걸고 있는 모든 자들은 성령님이 말씀하신 그 소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 8:24-25에 보면,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즉 세계평화를 운운하고 세계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음녀다.

그동안 교회사에서 보면, ‘국가 종교’에서 ‘종교 국가’로 전환되면 자신들을 구심점으로 세계 정복및 세상 통합을 시도하는데 이런 시도가 바로 천주교이며 개신교들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것은 가장 이상적(理想的) 조직체를 천국의 대용으로 보고 싶어하는 대중들의 여망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사상적 규합을 시도하고 세를 과시하려고 한다. 즉 초라한 것은 하나님의 일의 실패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유혹하는 마지막 유혹과 동일한 취지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바로 음행의 포도주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8-10)

원래 구약에서 음녀란 남편을 버리고 다른 신을 찾아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했는데 이 음녀같은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전 세계에 다 퍼지게 되자, 음녀라고 규정한 그 언약적 차원도 동반해서 전 세계와 확대하면서 규정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 전 세계는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조직적이며 의도적으로 음녀의 본색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게 된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 피를 아는 자만이 진정한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녀란 진정한 신부를 드러내기 위해 배경으로 작용해야만 하는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즉 음녀는 제발 음녀다워야 한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세상 권력과 영광에 늘 취해서 움직이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진정 성도는 십자가의 희생만을 감사하는 자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⑤ 일곱 번째 나팔에 변화되어 죽을 것이 죽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않는 것은 육인가, 영인가?

인간들은 자신의 구조를 따지면서 육+영(영혼)이라는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철학적이다. 성경에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것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인간들의 오고가는 그 언어 속에서도 죄가 담겨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며 따라서 그들의 언어를 같이 사용하시면서 그들이 짐작하고 있는 그 의미로서는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식으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용하신다. .

인간의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속에는 근원적인 ‘구원욕망’이 발동되고 있다. 곧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영원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서 영생을 맛보겠다는 집념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기 3:22에서 단호하게 차단시키는 의지를 나타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상 방문은 이러한 하나님 쪽의 의사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영생나무 과실을 먹을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탐내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제사를 통해서 (요즈음 식으로는 예배를 통해서) 신과 화해에 나선다. 이로서 가인은 자신의 행위가 죄악된 행위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한다. 자신이 하는 행위는 자기가 보기에 뭐든지 정당한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변명거리로 작용할지는 모르지만 육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거부당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므로 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살해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유도하셨고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할 수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죽음이 중요하다. 스스로 죽는 것은 소용없다.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결부된 그 죽음에 합류된 죽음이어야말로 육에서 영으로 전환되는 혜택을 받게 된다. 바로 그 희생의 노선을 따라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마태복음 23:35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영이란 육을 충분히 육이라고 규정하는 식으로만 드러난다. 따라서 육에서 추구하는 그 영마저 육의 일부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육이 영을 추구하는 것도 역시 죄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노선이 어떤 특징이 외부에 나타내는 지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곧 세상을 악하다고 하시면서 스스로 희생당하는 일생을 보내시겠다는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한복음 7:7)

그 당시 유대인들도 육으로 죽어 영으로 나타날 것을 고대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 악하다고 단정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는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나고 악함으로 결론나가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과 활동은 세상 자체가 악함을 증거하기 위함이요 그 증거로 인하여 예수님 스스로 죽는 일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이 죽음만이 영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성도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기에 성도가 기대하는 영은 영이 아니다. 예수님의 지배성이 곧 영이다.

성도의 변화된 몸은 기존의 육도 아니요 영도 아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주어진 낯선 몸이다. 시집도 장가도 갈 필요 없는 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

⑥ 계 1장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이며, 계 2장의 니골라당은 누구인가?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장래인가? 확실한 답을 해주기 바란다.

시간을 표현하는데 있어 세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고 해서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듯,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식으로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정신 안에 ‘시간 의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깥 변화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상식적인 ‘시간’이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 ‘아이온’적인 시간이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세대’라는 번역되는 것인데 인간들이 시간을 느끼도록 (변화가 없는 곳에 인간을 시간감각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사건들을 유발시키기 위한 창고나 집합소 같은 시간개념이다. 그래서 이미 일어났던 사건이나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일어날 사건 같은 것이 그 시간의 창고 같은 세대 안에서 시간적 요소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기’, 혹은 ‘〜되기’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산보하기, 사랑하기, 인간되기, 출생하기, 죽기, 미워하기, 걷기 같이 (영어로 표현하면 to 부정법) 반복하고 늘 반복을 자행하는 그 원형이 모여 있는 사건 자체로서의 시간 환경이 ‘아이온’이다.

세 번째 시간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아이온에 시간을 초월하여 있는 사건의 원형이 지상의 인간들의 시간 의식인 크로노스와 맞닿을 때 그 접점 지점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때’라고 묘사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도서 3:1-8)

예수님도 이 때, 곧 카이로스에 의해서 움직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 죄 많은 인간의 보기에는 크로노스적으로 전개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전체 카이로스요 십자가 사건의 반복과 반복으로 이어지는 단일 사건에 해당된다. 즉 ‘세상이 심판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세상 심판하기’이다.

일곱별 일곱촛대, 그리고 니골라당(복음의 가치를 세상적인 성공 개념으로 바꾸려어 복음이라고 포장하는 시도를 한 집단)같은 개념은 늘 이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반복되는 내용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 곧 천사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물론 일곱 교회란 남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 등장하는 언약적 교회로서 그 안에는 십자가 사건의 취지가 담겨 있다. 즉 아이온적으로 ‘교회되기’를 위하여 잠시 등장했다가 반복적으로 사라져야 할 크로노스적인 무수한 교회들이다.

니골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각각 자신들의 세대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 위하여 비-언약적 요인으로 반복적으로 출몰되어야 될 악의 표징이다. 즉 비-언약적인 인간의 기대에다 십자가 피의 능력을 결합시켜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과 다른 성과를 노리는 입장을 말한다.

⑦ 계 2장의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과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은 무엇이며, 언제, 누가, 누구에게 받는가?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

성경 및 요한계시록의 모든 용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2:2, 7-11에 나온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즉 성령으로 해석, 혹은 성령에 입각한 해석 혹은, 성령이 보는 식으로 말씀보기 같은 것은 모두다 십자가 사건의 확대와 확산을 염두에 둔 해석이 된다. 십자가 사건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성경 해석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살해할 수밖에 동기로서 작용하는 힘이 뿜어내게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그 어떤 용어나 대목을 설명해도 만약에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숨겨진 지혜인 십자가 피 흘리심의 의의만 드러낼 뿐이며 이런 결론에 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성령적인 즉 악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공로를 훼방하려는 해석을 그동안 쭉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만나라는 용어는 출애굽기 16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 이름도 그냥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이것이 무엇인지?” 자체 의구심을 담은 그런 명칭이다. 이로서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는 요소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수시로 반복된다.

그러다가 이 만나가 신명기 3:8에는 ‘떡’이 되고 이 ‘떡’은 매일주시는 말씀의 양식이 된다. 이런 변화를 거쳐 요한복음 6장에 가서는 예수님 자신을 하늘의 만나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

요한계시록 사도 요한에 의해서 써졌기에 요한복음의 단어사용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곧 요한계시록의 만나란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신다. 단 요한복음에서는, 사람이 먹어야 할 떡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는데 이는 아직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모든 것을 최종 정리하고 마무리 짓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강제로 성도되게 하시는 조치 (먹이시는 조치가 아니라)를 취하는데 이는 이미 인간들에 있어 먹으나 안 먹으나 당연히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만천하에 들통 났기 때문이다.

흰 돌이나(수 4:5)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시 2:9) 같은 용어 동원은 모두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한다. 구약에서의 선택된 돌이란 이스라엘의 선택을 알리는 물증이지만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완전하게 부정당해야 될 죄인의 대표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부인과 부정을 유발시키고 이 사실을 십자가 죽으심으로 통해 수긍을 할 때, 이것이 바로 참 이스라엘적인 안목에 의해서 비로서 밝혀지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의 용어 사용법이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9-51)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와서 그 사건 자체를 반복시키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 요한계시록 해석은 그 어떤 주장을 내놓아도 다른 복음이다.

구원은 이미 인간이 받고 아니받고로서 적용되는 세대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대는 이미 저주받아야 될 세대인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 폭로되었다. 따라서 만나를 취득한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 피가 이 지상에서 반복적인 저주와 허무를 유발하는 가운데 건질 자만 건져내는 식으로 구원이 성사된다. “이미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롬 8:30)

⑧ 계 3장의 하나님, 거룩한 성, 예수님의 새 이름이 그이 위에 기록된다는 것과(12절)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21절) 무슨 뜻이며, 그는 누구인가?

그는 ‘이기는 자’이다. 이긴 다는 것은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그 전쟁의 성격과 진행과정에 대해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내내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의 투입으로 야기된 전쟁에서나 나올 결과로 ‘이김’이다. 따라서 인간 자신이 이기는 전쟁은 애초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다. 여리고성의 함락이나 다윗의 전쟁 승리는 결코 이스라엘이나 다윗의 이김으로 최종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이름’의 이김이다.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자체가 곧 군대이다.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1)

이 ‘여호와의 군대’는 그 가운에 왕이 계신다.(민 23:21) 물론 그 왕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제사를 통해서 그 분의 ‘세상 다룸의 원칙’을 분명히 알려주신다. 즉 그 누구든지(물론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율법에 저촉이 되는 자들은 다 죽인다는 원칙을 고수하신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하나님에서 살 자는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하게 깨끗한 자만 살아남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싸움의 이스라엘 싸움의 진수는 외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그 왕이신 하나님과의 전쟁양상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언약의 나라인 이스라엘 외에 비-언약의 나라인 우상섬기는 이방나라의 전쟁인 줄 알았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신은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기는 나라로 만들어 줄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내 오해였다. 죄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와의 전쟁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역사를 유발시켜 오신 것이다. 따라서 어느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사수하려는 전쟁이라는 태도를 순간부터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죄는 그 어떤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나 조치에도 인간에게 패배하지 않습는다. 이것이 죄로 인한 사망의 왕노릇이다.(롬 5:14,17)

즉 “이기는 자는 우리 가운데 누구를 두고 말씀하십니까?”라는 묻는 그 질의 자체 속에 이미 자신은 벌써 하나님의 원수로 살고 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국가 멸망을 통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서 원수가 되는데 그 이유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산상설교를 완벽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낼 그 어떤 위인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는 자’로 자처하는 그 자가 곧 적그리스도이다. 신약에 와서 성도는 ‘이기는 자’가 되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패배하도록 성령을 통해서 조치하시기 때문이다. 즉 마태복음 16:24-25의 말씀을 적용시키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게 된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이름을 죽게 그 죽도록 조치하는 능력과 더불어 게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드러내게 되는데 이런 자가 곧 하나님의 우편에 이미 앉아있는 자들이다.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5-7)

⑨ 계 12, 13, 17장의 7머리와 10뿔 가진 짐승은 누구이며, 이들에게서 손과 이마에 표 받은 자는 누구이며, 심판자와 표한 자와 표 받은 자는 정통인가, 이단인가? (이 일이 실제로 있었다.)

‘실제로 있었다’라는 표현 자체가 의미가 죽은 표현이다. 쉽게 예를 들면, 어느 혼자 사는 노인네 마트에서 집에서 삼계탕 해 먹겠다고 생닭을 하나 샀다고 치다. 약 한 달 뒤 자식들이 우연히 그 노인데 집을 방문해보니 그 노인네가 벌써 심장마비로 죽어있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생닭은 이미 썩어서 냄새가 진동한다. 이 말은 곧 지금 현 시점에서 내가 무엇을 알고 어떤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나의 늙음과 더불어 그 사실과 과거적 사실로 같이 퇴색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인간들만이 활동하게 되면 10년 지식이나 20년 지식이 한결 같이 유용하다고 생각되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십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되풀이해서 세상의 품고 있는 새로운 죄들을 유발시켜서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과 거룩성을 알려주신다. 인간들이 간직하고 싶은 성경 지식이나 구원지식은 기껏 썩어져가는 그 인간의 죄를 감추어주고 변명거리로 전락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그 어느 누구도 십자가 앞에서 잘났다, 의롭다, 정당하다, 잘 살았다, 훌륭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성도들이 머리에 썼던 면류관을 예수님의 발에 도로 반납하는 장면이 나온다. (계 4:10)

참으로 실제로 있는 것은, 실제가 뭔지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 죄악뿐이다. 자신도 변하고 시대도 변하면 그때그때마다 짐승은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의 주시 하에 본연의 활동을 벌리게 되어 있다. 짐승은 항상 인간에 대해서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시고 거기에 대해서 오로지 성도들만 그 와중에 예수님만의 승리를 의지하는 식으로 그 성도로 하여금 천국에서 자신이 쓴 면류관마저 포기하게 하신다. 이것이 십자가와 더불어 사는 성도의 자기 부인이요 자기 부정이요 자기 포기이다. 따라서 성도는 생을 살면서 마음껏 짐승에게 유린당해야 한다.

성도와 비성도의 차이점이라면 비-성도는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할 생각을 갖고 있지만 성도는 이미 예수님께 속한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주되심과 십자가 피흘리심의 취지를 위하여 일부러 자기 백성을 고난 속에 둔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다면 짐승의 정체는 이 와중에서 매일같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실적을 통해서 마치 예수님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유도하는 바로 그 세력이 짐승이다. 마태복음 4장 광야에서 예수님도 동일한 시험을 악마로부터 이미 받은 적이 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도 마찬가지로 그 코스를 밟을 수밖에 없다.

짐승으로부터 인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도장 받은 사람 빼놓고 전부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예수님으로부터도 인받지 못하고 짐승으로부터도 인받지 않은 중립지역은 전혀 없다.

짐승으로부터 인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능력이 담겨있지 못해서 항상 힘이 센 쪽으로 자기 목숨을 담보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늘 미완성적으로 사는 자들이다. 이들이 짐승의 밥이다. 반면에 성령은 오직 십자가의 완성을 성도 안에 담아둔다. 따라서 짐승은 안다. 누가 성령 받은 자인지를 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 19:15)

그래서 성도를 향하여 비-복음적인 안목으로 남은 공격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을 미워하는 교회, 국가, 학교, 가정, 교단, 군대, 직장, 병원, 사업장, 농장, 어장, 광산, 가게 그리고 친목단체들 이 모두가 짐승이 배태해낸 사업장이다. 지금도 세상 모든 처소에서 짐승의 활동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계속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⑩ 겔 3장의 계시의 주인은 예수님이었다. 계 1:1-3의 계시 전달 과정은 어떠하며, 종들은 누구인가? 계시 전달 과정을 성구에 입각하여 설명해 주기 바란다고 질의(요청)가 왔다. 답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사도 요한에게 주었고 사도 요한은 그것을 글로 썼어 성령 안에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믿어지도록 역사하는 것이 계시전달의 순서이다. 따라서 아무리 아는 자국 글씨로 번역되어 있더라도 성령이 찾아와서 가르치지 아니하면 그들을 통해서는 오해만 일어날 뿐이다.

사도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성령의 사역이 주도권을 쥐고 활동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말씀을 접하게 되면 그냥 무감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성령 받은 자를 핍박하는 식으로 태도를 보이게 된다. 왜 그래야하느냐 하며는 계시 전달 주변에 십자가 희생과 고난의 의의가 계속해서 발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28-29에 보면, “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되어 있다. 성도가 받는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곧 멸망되어야 될 자들이 분명히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즉 말씀을 성령께서 관장에서 성도를 다루게 되면 구원받는 자의 출현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히 저주받아야 될 자들이 출몰하게 만드는 효과를 그리스도의 계시 자체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말씀이 단순히 인간의 해석여부를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분류시키고 기어서 성도 만드는 작업을 친히 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계시를 인간이 해석하기 이전에 이미 계시 자체가 인간을 해석하기 위한 용도로 사도 요한이나 종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사도 요한이나 종이 말씀을 해석하라는 말이 아니라 종들의 출몰 자체가 이미 계시의 내용이 전 세상을 대상으로 하여 풀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성도란 계시를 받아 쥐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반대로 ‘쥠’을 당하고 있는 존재이다. 계시대로 성도는 움직이게 되어 있다. 단지 성도는 그 점을 증거할 뿐이다. 성도는 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복음을 위하여 일어나야만 해야 할 것들이 줄기차게 연쇄적으로 일어날 뿐인 것을! 따라서 성도가 증거할 것은 그 원천의 사건, 곧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났다는 이 사실 뿐이다. 그것을 빙자해서 개인이 성공할 생각은 말아야 한다.

⑪ 계 10장의 계시를 받은 자는 한 사람이다. 성도들은 누구를 통해 계시를 받아야 하나?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들이 이 계시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인가, 안 하는 것인가?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 성경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성령께서 임의대로 하신다. 고린도후서 3:3, 7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글을 누가 썼든, 누가 읽었던, 누가 읽어주든 상관없이 오직 성령이 임해야지만 계시를 접할 수가 있다. 이 말은 성령님이 필히 오시도록 인간쪽에서 조절이나 조정이 가능치 않다는 말이다. 애초부터 모든 게 불가능한 일이다. 손톱이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것도 인간 입장에서 볼 때에 불가능한 일이다. 손톱이 내 몸에 붙어있다고 해서 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불가능함 속에서 지내고 있다. 몸통 자체도 불가사의한 몸통이다. 그런데 인간은 터무니없게도 이 불가능함 속에서 자신의 가능함의 증거를 얻고자 억지를 부린다. 그냥 불가능함에 맡기지 않고 기어이 가능함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로서 허구가 발생한다. 태어났다는 사실과 아직 살고 있다는 사실과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가능함의 결과다.

성도가 사는 것은 자기 가능성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즉 "오늘도 불가능한 하나님의 기적을 늘 맛보면서 존재합니다"를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가능성을 저주해야 한다. 어차피 가능한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게 불가능함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사도 이후에는 추가적으로 성경계시를 추가시킬 위인은 이 세상에 더 이상은 없다. 이제부터 말씀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여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믿게 하신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 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성도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말씀의 운동력까지 제공할 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한 사실이다. 말씀 스스로 움직이기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인간 본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즉 사람이 깨닫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깨닫지 못하기 하기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된 자는 오로지 자신의 성경 지식으로 구원되었다고 소리를 못하게 막아버리시는 것이다.

⑫ 계 7장에 인 맞은 12지파가 있다. 이들은 누구이며, 이단인가, 정통인가? 이 12지파에 소속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이 되는가?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이다. 정통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될 뿐이다. 죄인이 의인 취급받는 것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이단이니 정통이니 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영으로 인 맞고 보니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이단으로 살아오기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근본적으로 이단이면서도 신학과 교리로 둘둘 말아가며 정통인 것처럼 위장해서 이단으로 멀리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성령이 오면 비로소 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으로 인하여 지금도 날마다 이단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속성을 품고 있지만 성령께서 날마다 자신을 죽임으로서 날마다 새롭게 성도되게 하시는 작업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12지파란, 야곱에게 주어진 ‘야곱언약’의 반복적 적용상태를 두고 말한다. 야곱 언약의 핵심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야곱에게 있어 이미 죽은 자식에 불과한 요셉의 형식으로 적용되어 성사시킨다는 말이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 37:35)

그런데 이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에게는 야곱 언약에 의해서 제공된 임무가 있었고 이 임무는 야곱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숨겨진 비밀 같은 것이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이로서 야곱 언약은 야곱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야곱에게 있어 ‘죽은 자’에 해당되는 분의 혜택이 야곱에게 돌아감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곧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언약 본연의 원리에 야곱이 나중에 알게 된다.(창 25:23) 그래서 손자를 축복하면서 손을 어긋맞게 하면서 안수한다.(창48:17) 언약의 원리 속에 이미 십자가의 ‘세상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원리가 들어있어 작동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약시대의 12지파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 새언약의 혜택을 고백하는 자들을 말한다. 새언약, 곧 십자가 피의 의미를 아는 자가 12지파에 그들만 구원받니다.

⑬ 만국을 무너지게 한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는(계 18:3) 무엇이며, 계시록의 바벨론은 어느 나라인가? 선장들이 무역한 상품은 무엇인가?

호세아 4:11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원래 포도주는 ‘약속의 땅이 제공하는 하나님의 축복물'라고 할 수 있다. 제사라는 모세율법에 준해서 반복되는 희생의 효과가 가나안 땅에서 사는 자기 백성에서 젖과 꿀과 포도주를 제공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주변의 이방민족을 본받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곧 자신이 속한 나라를 자신이 사수하겠다는 비-언약적 사고방식의 주입으로 인한 결과이다. 그러니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희생마저 나를 위한 조치라고 오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중요한 요소를 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축복의 증거물이 곧 저주를 퍼붓는 증거물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의 곧 저주와 심판의 하나님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은 말이다. 행운이라고 여긴 것이 불행이었다.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마태복음 7장 끝부분에 나온다. 당연히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망한다. 그런데 이 집들의 공통점은 둘 다 평소에 기초 부분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겉만 비교하면서 성공, 실패를 따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는 기초에 신경 쓰기보다는 힘 쌓기에 모두들 열중한다. 모든 기도와 교회 봉사나 충성들이 남들에게 보일만한 자랑거리를 채울 만한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내겠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다. 인생에 기초에 대해서 아무도 안 알아주는 세상에서 반석 위에 산다고 부러워해 줄 위인들은 주변에서 없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 악인들이 당연히 의인의 회중을 들지 못하고 탈락하게 마련이다. 이는 평소에 생활의식이 자신을 스스로 탈락하게 만든 것이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4-6)

십자가 복음만이 성령께서 적용시키는 이 와중에서 세상은 자신만을 위한 축복의 장으로 전환하기 위한 신의 희생물을 얻기에 급급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호세아 예언대로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음행했다”는 판정을 내리시면서 가차 없이 저주를 퍼부으신 것처럼 이제는 그 언약적 적용을 복음이 전파된 모든 영역까지 확대시켜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의 총 영역을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상인들이 배에 선적한 상품들은 구약 당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마음 빼앗게 만든, 즉 하나님의 희생에서 눈 돌려서 다른 것으로 즐거움을 얻고자 하게 만든 유혹적인 물품들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다양하고 새로운 유혹거리가 나오기에 계속 항목이 늘어날 수가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⑭ ‘용의 7머리와 10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 666’은 각각 무엇인가?

용의 머리와 10뿔은, 다니엘서에서 다니엘, 곧 인자의 나라에 속한 백성과 대결구조를 가졌던 그 바벨론제국의 연장에서 출몰되어야 했던 제국이다.(단 7:7) 이 제국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제국과 더불어 다니엘에게 내려준 계시가 어떤 식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어서 진정 ‘인자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등장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용의 지배하에 있기에 자신을 지배한 정체는 지배 받는 입장에서는 알 길이 막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열 뿔 가진 제국, 곧 짐승의 정체는 인자의 나라의 실체, 곧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7:16)고 언명하시면서 그러면서도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성도에게 안겨 주신 나라, 곧 아들의 나라(골 1:13)를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는 식으로 그 짐승의 나라의 기능을 복음의 배경으로 새롭게 사용하시는 것이다. 항상 뱀의 후손의 정체는 여자의 후손과 병행하므로서 그 실제적 실체가 기능적으로 노출되게 되어 있다. (창 3:15)

그렇다면 그 인자의 나라에 속한 아들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살게 된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을 의지하고 스스로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세상 힘에 의지하지 않기에, 기존의 세상 권력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모든 이로부터 미움과 밉상을 받는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이 상호 다른 두 부류를 숫자로 표기했다. 짐승의 숫자는 666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6백6십6명밖에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모두 666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불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의 운명은 결코 달라지지 않고 영원히 저주의 불 속으로 달려가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대적으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의 운명도 이미 결정 났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라고 언급하므로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이 땅을 살면서 반드시 보여주게 되는 임무가 있는데 바로 그것은 짐승은 결코 어린양의 죽음을 이해하는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오로지 짐승에게 경배만 해야 하는 운명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666이런 숫자로 된 이름을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의 이름으로 삼으신 것은 언약의 완성인 ‘7’(7일만 천지를 창조를 완성했으니까요)의 완성차원에 아무리 해도 참여하지 못할 결정 난 운명이라는 것을 세 번씩이나 6을 덧붙여서 강조하기 위함이다.

‘666’이라는 것은 ‘7’이 가지는 창조적 표현을 위하여 이바지한다. 7인, 7나팔, 7대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모든 것이 창조의 완성도를 품은 차원에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완전성 속에는 완전성에 포함되지 말아야 할 것을 창조의 완전성을 위하여 축출해서 뽑아내어서 배제시키는 그런 기능도 함께 진행된다. 이것이 심판의 핵심인 분류 작업이다. 1, 2, 3, 4, 5, 6, 이걸 다 통합해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7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의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룬다 할 때는 구원 받는 자, 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바깥에 차버리고 배제하는 그 작업마저 ‘7’이라는 숫자로 묘사되는 창조 작업의 일환이 되는 것이다. 숫자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존재성을 대변한다.

⑮ 계 2, 3장의 이긴 자에게 약속된 것들이 있다. 이것은 누구와 싸워 이겨야 받게 되는가? 이긴 자와 약속한 것이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 이겨야 하는 이유를 성경(성구)에 입각하여 답하기 바란다.

이긴 자는 인간들 가운데는 없다. 단지 이기신 자 ‘안’에서 그 이김의 혜택을 입을 뿐이다. 이러한 구원방식은 이미 구약 때부터 실시되어 왔다. 노아는 완전한 자가 아니다. 하지만 완전한 방주가 그와 그에게 속한 자들을 구원해 내었는데 이는 구원의 공로를 구원받은 자의 공로로 되돌리지 않겠다는 언약 원칙을 지상에 앞으로 깔아두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로서 노아는 방주에 동승했던 깨끗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서 번제로 드린다. 이런 조치는 장차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방식으로 구원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진정 이 세대에서 이긴 자는 부활의 첫열매 뿐이다.(고전 15:20) 이 첫열매는 시간상 첫 번째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유일한 승리 사건으로서의 첫열매이다. 부활의 그 다음 열매는 첫열매 사건의 언약적 효력에 입각해서 주어지게 된다. 그 혜택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복음으로 죽게 되는 자들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즉 죽게 된 것이 승리이다.

살아야 될 자들이 이긴 자(예수님)와 약속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과제로 살아야 될 자를 일방적으로 살려놓고서는 오로지 “예수님 덕분입니다”를 고백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놓고야 마는 일이다. 자신이 지은 상대적인 죄에 대해서 고맙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죄를 접하고서는 하나님의 의가 결코 나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안다.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은 창세기 2장에서의 이름을 지어준 주체를 위하여 지음 받은 대상으로서 지배받는 입장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담은 또 하나의 이름을 짓게 된다. 그 이름은 여자이다. 이 여자라는 이름은 남자를 염두에 둔 이름이다. 즉 인간의 대표인 남자를 위한 배필로서 등장한 것이 여자이다. 그래서 여자의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람에게는 분명 지배하는 머리가 있지만 특히 여자에게는 머리가 남자이다. 결코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린도전서 11:3, 7). 이러한 서열은 이름 짓기에서 드러난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짓고 거명함으로써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의 대표자는 남자가 된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한다.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도 여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직접 주어졌다. 이처럼 이름을 지음 받은 쪽은 이름을 준 쪽의 역할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 죽음이 찾아오면서 죽음의 원인규명에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나서게 된다. 즉 죄의 배후에는 누구 있었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되는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골 1:15) 이 예수님은 구약 때부터 ‘주의 이름’으로 행세하시면서 새로운 이름으로 전쟁을 유발하시고 임하셨다. 여기에 대적하는 적이 바로 창세기 3:15의 약속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으로 적인 뱀의 후손이다. 이로서 악마는 ‘주의 이름’으로 벌리는 전쟁의 상대자로서만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이 명백하다.

⑯ 약속한 계시록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 천주교와 개신교가 거의 계시록을 가감하고 있는데 거기에 구원이 있겠는가?

구원이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구원이 얻는 곳이라는 판정과 더불어 무너져 내려 폐기처분되어야 될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신교나 천주교도 같이 무너져 내릴 세상적인 문화현상일 뿐이다. 인간의 문화란 실은 자본이 뒷받침되어 유지된다. 인간 세계에서의 통용되는 잉여 자본은 정신활동을 위해 최종적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힘의 방향성이 결국에는 신과 접촉하여 신의 나라를 가시화하기 위한 바벨탑 쌓는 그 본성을 발휘하는데 있다. 역사적으로 천주교나 개신교도 이런 시도를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진리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예수를 산업화하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교회가 제공하므로서 인간의 노동에서 나오는 잉여물을 획득하고 축적하여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도 일종의 자본가로서 행세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세상은 돈을 원한다. 신자들의 헌금으로 축적된 소위 ‘신께 바치는 신성한 돈’이라도 세상은 어디까지 그냥 힘의 축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고 굴복하는 것을 교회나 세상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품위나 교회의 품위나 모두 돈이 결정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진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돈 힘에 고개 숙인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다. 돈 되는 하나님을 찾아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고 교회는 바로 그 자본을 미끼로 하여 운영한다. “우리 교회 나오시면 갖가지 혜택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영어학습과 노인네들의 여가 선용과 복지를 우리 교회가 책임지겠습니다. 가족간의 불화 해소를 위한 상담이나 취업을 위한 여건도 충분합니다. 공짜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대학생들에게는 ‘선교’라는 미명하에 실시되는 해외 언어연수를 보낼 것이고, 혼기가 찬 젊은이들의 결혼이나 새로 가게를 오픈했다면 단골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여건도 우리교회에서 충분히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영업 사원들의 판매 실적도 우리 교회 각 기관에 참여하여 활동하시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자녀들의 교육과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우리 교회는 예배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헌금이 그만큼 귀하게 쓰여진다는 이 의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경영방침만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교회다.

하지만 구원이란 오직 십자가 사건 안에서 반복적으로 주어질 뿐입니다. “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성경은 구원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으로서 필연적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오직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이점에 대해서 오해해서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처럼 인간의 생존욕구를 ‘축복’ 혹은 ‘구원의 능력’이라는 기대와 맞아떨어져서 ‘예수 산업’을 통해서 구원 자체가 상품화되면 그 영업으로 인하여 여유자금이 모이게 될 것이고 그것은 권력화의 모습을 띠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그 짐승의 모습이다. 요한계시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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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IP:119.♡.93.55) 13-08-1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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