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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2 17:13:10 조회 : 6025         
성막의 신학적 의미 이름 : 관리자(IP:124.59.84.82)


성막의 신학적 의미



2002년 01월 28일 이근호 목사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나와있는 성막의 내용에 가지고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성막의 구조만 설명하고 시간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뭔가 그 구조물들이 담고 있을 듯한 심오한 진리를 유감없이 보여주어야만 하는 의무감을 설교자는 느껴본다. 과연 국가 이스라엘 그 시대에 있어 성막의 가진 의의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그 당시 다른 나라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성막이다. 이 성막은 히브리인들이 자체적인 아이디어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고 난 뒤에 알게 된 방식과 모양대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한 이유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이다. 즉 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 함께 계시는 방식은 성막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성막이 마련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인간들 동행하지 못한다. 도대체 성막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기에 여호와 하나님 모시기에 적합하단 말인가? 성막은,거룩한 인간들만 상대하는 장소이다. 거룩한 제사장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규정지어 놓았다. 이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구원받고 싶고 영생을 얻고 싶다고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다. 오직 거룩한 자로 선택되어야 한다.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 갈때에 여호수아는 산 위까지 동행 할 수 없었다. 부름받은 자는 오직 모세뿐이다. 산 위에서나 산 아래서는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거룩한 하나님에 의해서 뽑혀나온 자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 이러한 선택 원리가 기본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히브리인들을 구원하는데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거룩이라고는 완전히 상실된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주한다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 이 용납이 안되는 상황을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전환시키시려 하는 것이다. 거룩의 자리는 하나님쪽에서 친히 마련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구조물 구석구석에 거룩이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고자 하시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무슨 일을 벌리시려 하는가? 그것은 전쟁 수행이다. 창세기 32:1-2 에 보면 일단의 천사들이 야곱을 찾아온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천사들이 야곱과 관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한 것이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다(창세기 28:15). 야곱은 얼마 안가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되는데 그 시기는 밤에 천사를 만나고 난 후부터이다. 싸움을 해야만하는 사명을 지닌 국가가 야곱 즉 이스라엘 허리로부터 나와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세기 35:11). 실제로 히브리인들이 밤에 애굽을 탈출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불리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애굽기 12:40-41). 그런데 이러한 군대가 탄생 내지는 창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애굽에 대한 최종 승리는 사실상 히브리인들의 작전이나 완력이 아니라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여호와의 심판에 대해서 애굽은 속수무책이었다.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모든 애굽 가정의 맏아들은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의 집에는 이런 재앙이 들어닥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문설주에 발린 피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애굽나라에 재앙을 내리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다(출애굽기 4:22-23). 그런데 이 모세가 이 하나님의 아들의 취지를 모르니 하나님이 모세마저 죽이고자 하셨다. 아내인 십보라가 언른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여 피를 발생시켰다. 그리고하는 말이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처럼 피와 연관되어 태어난다. 할례의 의의를 제대로 보여야 아들이 된다. 할례의 피란, 인간의 가계를 인정하지 않고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람의 핏줄과 무관한 관계에서 생성되기 위해 심판의 피를 흘러야 비로서 생성된다. 그래서 유월절 지나고 난 뒤에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맏아들들은 다시 이스라엘의 가정의 맏아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애굽기 13:1-2). 그런데 이 본문에 보게 되면 "거룩히 구별하여"라는 말이 나온다. 거룩이란 하나님 소유가 되기 위해는 필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이 성사되려면 심판의 피와 연관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피는 기존의 인간 핏줄에서 이탈한 증거로서의 피이다. 이런 자가 거룩하다는 뜻은 기존의 인간 핏줄은 모두 더럽다는 점이 밝혀진다. 이러한 거룩된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 있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싸움이란, 기존의 인간 핏줄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찾아든 것이다. 그 찾아든 장소가 바로 성막이다. 그렇다면 성막의 모든 구조물들은 처음 이스라엘이 성립되던 그 정황을 그 이후도 계속 반복시키시 위한 공간이다. 계속해서 거룩을 유발시켜야만 게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거룩을 계속 유발시킨다는 말은 심판의 피를 계속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희생 제물이 매일 같이 소모된다. 그 제물이 희생되는 현장에서는 심판과 긍휼이 항상 교차해서 일어난다. 이 활동이 제대로 일어나야지만 거룩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계속 아들로서 살아남게 된다. 인간 핏줄에 대한 전면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분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왜 화를 내시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창조 본래의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거짓 형상은 사라져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성이 담긴 인간들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막 안에서는 제사장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제사활동을 위해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다. 제물을 잡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분노가 드러나야 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소유된 아들이 얻게 될 영광도 같이 보여야 한다. 그래야 출애굽 사건을 재현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를 보이는 장소가 성막이다.

우선 성소 안에는 사람들이 활동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바치고 또한 지시와 명령을 받기 위한 장소이다(출애굽기 30:6/36). 뭘 바치는가? 향을 바치게 되어 있다. 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 향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는 족보에서 끊어진다(출애굽기 30:37-38). 향은 또한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제사장의 옷과 기구에 바르는 기름에 함유하게 되어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보이는 물질이다. 성도 안에서 향단 말고 7 줄기를 갖고 있는 금촛대가 놓여 있다. 이 금촛대는 12떡덩어리와 마주보게 되어 있는데 이 등불은 밤에도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출애굽기 27:21/레위기 24:1-4). 향도 늘 하루 종일 피워져 있어야 한다(출애굽기 30:8)

제사장은 매일 같이 1년된 어린 수양 두마리를 바치게 되어 있는게 아침에 양 한 마리, 저녁에양 한 마리를 바치게 되어 있다(출애굽기 29:39) 여기서도 제물이 탈 때 나오는 향기가 있는데 그 향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그런데 이 제물과 함께 곡식과 포도주도 보조를 맞추어 같이 드려져야 한다.(출애굽기 29:41) 드려지는 장소는 회막문 앞이다. 이 장소는 하나님이 만나고 싶어하는 장소이다(출애굽기 29:42-43). 마찬가지로 성소 안에도 12개의 떡덩어리와 포도주가 항시 진열되어 있다. 금촛대 맞은 편에 놓여 있다. 이렇게해서 성소에는 12개의 떡덩어리와 금촛대와 금향단이 대표적으로 안치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하나님과 인간이 대화가 가능한 장소이다. 향으로 늘 충만되어 있다.

금촛대와 향단은 재질이 금으로 되어 있는데 금이란 물질은 에덴동산에서 제일 먼저 거론되는 땅의 특성이다.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움과 호마노도 있으며"(창세기 2:11). 에덴동산의 고귀성과 정결성은 금이라는 물질로 대변할 수 있다. 금말고 떡과 포도주라는 농산물로 만든 된 것이 있다. 이 12개의 떡덩어리와 포도주는 하나님의 새창조 안의 세계의 모습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향과 빛과 풍성한 곡식, 이러한 세계의 구성은 성소 안에서 집약되어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 새창조 세계와 더불어 계시고 싶어하신다. 12개의 떡덩어리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뜻한다. 그들은 인간이다. 새 땅이 필요한 자들이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생을 영위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떡과 포도주는 땅의 소산물이다.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그것을 생산했다. 이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다(신명기 8:8). 12지파를 제대로 먹이고 마시고 입히신 것은 약속의 열매로서의 12지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감시로 이루어진다. 금촛대의 빛이 항상 진열된 12개의 떡을 비춰주고 있다. 하나의 불빛이 아니다. 원줄기는 하나이지만 촛대는 7개나 된다. 그 7개의 춧불이 하나로 된 원줄기의 속성을 보이면서 빛나고 있다. 7이라는 숫자로 보여질 수는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 활동의 지속성'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7일에 걸쳐서 창조 사역을 수행하셨다. 각기 다른 것들을 창조한 7일이지만 그 7일이 모여야 완성이 된다. 빛으로 시작된 창조행위는 어두운 세계 안에 새로운 질서를 남기셨다. 7일 동안 하신 것이 피조세계 안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안식하신다. 성소라는 공간에서 이 사실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최종 창조의 목표는 야곱에게 한 약속대로 12지파의 탄생이다. 7 촛대는 그 12떡덩어리를 겨냥하는 식으로 빛을 뿜어내고 서 있다. 마주보도록 설치한 것이다(출애굽기 26:35) 이 배치를 향기롭게 하기 위해서 향기를 실내에다 가득 피우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곳에 계시기를 하나님은 원했던 것이다.

만약 택한 이스라엘이 부실하면 어떻게 하나? 스가랴 4:1-14에 보면 세상을 감시하는 하나님의 눈이 새로운 성전에 등장한다고 되어 있다. 7등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13에 보면, 7촛대 사이를 거니는 분이 계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에 의해서 7촛대는 제 기능을 다하고 그리고 그 성소 안에 12지파의 선택은 온전하다.(요한계시록 7:1-8/12:1/14:1-3)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바로 향단에 담길 향이다.(요한계시록 8:3-5). 이와같이 성소는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헁위로서 책임지고 완성하신다.

성소 앞 마당에 널려 있는 제단과 물두멍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기구들이다.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물두멍에서 두 손과 두 발을 씻지 아니하고 성소에 들어오면 가차없이 즉임을 당하게 되어있다.(출애굽기 30:19-21) 더러운 자가 깨끗게 하지 못한 채로 거룩한 곳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땅으로 함으로 불어오려는 애굽인들에게 내린 그 심판이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재현되는 것이다. 열왕기상 7:23-26를 보면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으면서 이 물두멍에 해당되는 것을 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그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고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만하며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돌아가며 박이 있는데 매 규빗에 열개씩 있어서 바다 주위에 둘렸으니 그 박은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 두 줄로 부어 만들었으며 그 바다를 열 두 소가 받쳤으니 셋은 북을 향하였고 셋은 서를 향하였고 셋은 남을 향하였고 셋은 동을 향하였으며 바다를 그 위에 놓았고 소의 뒤는 다 안으로 두었으며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넓이만하고 그 가는 백합화의 식양으로 잔 가와 같이 만들었으니 그 바다에는 이천 밧을 담겠더라" 바다는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고자 하는 곳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 사이를 구분하고자 하는데 있다. 심판은 시작은 어디서부터 이루어지나? 제단의 늘 꺼지지 않는 불씨는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향단의 불씨로 이어져야 한다(레위기 16:12). 그리고 그 불씨의 간수자는 적절한 자격자이어야 한다. 곧 거룩한 자로 선택된 자에 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향에 담긴 불이 저주를 발한다(민수기 16:4-7,31-40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신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또 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길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써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명하여 붙는 불 가운데서 향로를 취하여다가 그 불을 타처에 쏟으라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사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의 드렸던 놋 향로를 취하여 쳐서 제단을 사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쏜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예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 무리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불이 향로에서 나오고 있다. 이 불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불로서 제단을 태우는 그 불씨임을 뜻한다. 늘 심판의 불씨이다. 레위기 9:22-24에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라고 되어 있다. 제단에 화기를 제공하는 방식이 두 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아론이라는 인간이 불을 지르는 방식과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직접 불로 제물을 태우는 방식이다. 결국 아론이 제물을 태우는 불이 단순한 인위적인 불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을 중거하는 불이다. 그 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납과 아비후가 여호와가 명하지 않는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에게서 나온 불로 타 죽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분향 불은 제단에서 제물을 태우는 그 불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40:34-38에 보면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이 성막에 위에 머물러 있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거룩과 심판을 가지고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것이다. 늘 완전한 심판이 성취되는 장소에만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늘 꺼지지 않아야 한다(레위기 6:9,12-13). 이 하나님의 심판는 피로 속죄하므로서 늘 제대로 성사되도록 하신다.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불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때때로 속죄할찌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출애굽기 30:9-10). 이처럼 성전 자체가 이 세상으로 봐서는 심판이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끔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요한계시록 15:5-8). 모세가 명 받은 성막 안에 천사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출애굽기 25:18-22/26:31-33) 하나님이 이스라엘 내부에 하늘 나라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제단의 불은 곧 하나님 자신이 소멸하는 불이심를 드러내는 것이다.(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며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또 민수기 31:2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다. "무릇 불에 견딜 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게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물은 정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불은 저주요 소멸이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도 불 가운데 받은 것이다(신명기 10:4).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도 엘리야의 모든 기능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열왕기하 1:10,12). 예수님이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셨다(누가복음 12:49). 오순절날 성령이 불의 혀 같은 모양으로 내린 것도 세상에 대한 심판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 땅이 불에 풀어지고 녹아버린다고 했다(베드로후서 3:12). 그리고 마지막 지옥도 불로 이루어져 있다(요한계시록 20:10/21:8/마태복음 5:22/마가복음 9:48-49).

이처럼 이스라엘의 성막은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성을 그대로 지상에 담아놓았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스라엘이 이 심판을 이기는 것은 날마다 드리는 어린 양의 희생의 피뿐이다. 바로 유월절의 재현을 실시하는 것이다.

국가 이스라엘이 대대로 이 정신이 이어지려면 계속해서 유월절의 취지가 반복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죽음이 거론되어야 하고 자신들을 죽이는 하나님의 행위가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 정당함을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남게 된다. 그래서 레위기가 보여주는 희생 제사 제도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에서 모두 다 죽임과 살림의 다 보여진다.

1.제사 지내는 장소로 보여지는 심판과 긍휼

2.제사 지내는 제물로 보여지는 심판과 긍휼

3.제사 지내는 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지는 심판과 긍휼


1.제사 지내는 장소

하나님은 그 장소를 인간들이 범죄한 증거물 위에다 정하셨다. 홍해를 건너오면서 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계속했다. 그들은 속된 것으로부터 거룩에로의 인도하심에 익숙하지 못했고 그들이 진정 염려하는 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즉 그들에게는 [거룩] 보다도 [생존]이 앞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땅에서 젖은 품성인 동시에 본연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구원이 결코 생존에 대한 더 나은 확보가 우선이 아니라 [거룩된 국가]가 우선임을 알려 주기 위하여 모세를 처음 부른 시내산까지 그들을 데리고 올라 오셨다. 그리고 거기서 십계명을 주어서 자신들이 얼마나 거룩과 거리가 먼 위치에 있음을 알려주고 마땅히 그들이 멸망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애굽적이었고 종교도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 세계에서 따온 형상을 신의 모습으로 여기면서 경배했다. 그 때문에 모세는 십계명을 산에서 가지고 내려오다가 깨어 버렸다. 이것은 계약의 파기를 뜻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본 모세와(민수기 12:8)하나님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여 새로 십계명 판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증거판]이라 명명된다. 즉 백성들의 범죄를 증거하는 증거판이다.(출 34:29) 그리고 그 돌판이 있는 곳은 증거궤가 되고 (출 40:3,5) 그것을 덮는 성막은 증거막이 된다.(출 38:21) 그리고 그 증거궤 뚜껑이 바로 백성의 죄를 씻어 주는 속죄소가 된다.(출 31:7) 이 이상 더 자비로운 처리가 또 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긍휼이요 사랑의 진수이다.

하나님은 고정적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기 위한 공간을 이스라엘에게 제공하시겠다고 했다. 그곳이 소위 [택하신 곳] 이다.(신명기 12:5,11,14,26,/ 16:2,6/17:8/18:6) 이 공간을 위해 하나님은 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다윗이 약속의 땅을 모두 점령하고 그 최종 점령지에 법궤를 안치시킨 이유가 여기 있다. 여호와 전쟁은 목표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극대화되는 공간 확보를 목표로 시행되었다. 이것이 또한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이요 안시과 창조의 회복이다. 만약 국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제대로 긍휼과 자비를 표출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될 것이다. 정작 싸움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하게 된다. 前에 이스라엘에게 붙여 주었던 그 적들이 이제는 반대로 이방 나라에다 이스라엘을 붙일 것이다.(예레미야 애가 2:7/ 에스겔 7:21/11:9) 그러나 반면에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불쌍히 여겨 용서하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 의 자리가 보여주는 심판과 긍휼의 원칙은 화산처럼 쉴새 없이 약속의 땅에서 폭파될 것이다.


2. 제사 드리는 제물에서 비쳐지는 심판과 긍휼

레위기 제물은, 제사장이 먹어서 제사장의 신체 안으로 흡수되는 제물이 있고 제사장이 먹을 수 없는 제물이 있다. 예를 들면 소제물의 남은 가루는 제사장의 몫이 된다.(2:10) 또 속제물로 드려지는 곡식 가루도 남는 것은 제사장이 먹는다.(5:13/6:18) 그리고 피와 분리되지 않는 채 바쳐지는 동물성 속죄 제물도 제사장이 먹을 수 있다.(6:2,6,20) 그리고 속건제에서 내장을 제외한 모든 근육질 고기도 역시 제사장이 먹는다. (7:6) 또 화목죄의 고기도 영원히 제사장의 소득이 되어 먹을 수 있다.(7:34,36)

그런데 제사장도 먹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피와 기름과 내장과 그리고 피와 분리된 고기와 번제에 쓰여진 제물은 제사장도 못 먹게 되어 있다.(4:12/1:9,13/3:17) 기름은 하늘로 올라가는 향기로운 향기로서 오직 하나님 만이 맡을 수 있는 요소이다.(3:3-5/4:26) 거기에 비해 제물의 피는 지상에 있는 제단에 뿌리는데 소비된다.(3:2/4:7,25) 피는 제단과 성막을 거룩하게 하는데 소모된다.(출애굽기 29:10-21/30:10) 제단과 기구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데는 특별히 식물에서 추출한 향유가 사용된다.(출애굽기 40:8-16/30:22-29)

이상의 규칙을 조사해 볼 때, 제물은 대체로 피,기름,내장은 근육질과 분리되어 다루어진다. 그리고 분리된 근육질이 제사장의 식사로 제공됨으로 제사장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제사장들이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 안에 거룩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생명은 피에 들어 있다.(창세기 9:4/ 레위기 17:10-11)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피가 제단에서 소멸됨으로 그 생명(피) 덕분에 거룩이 제공되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제공되는 거룩이란 희생 제물의 생명 위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 희생 제물의 살점에 참여한 자에게는 공동의 거룩과 의를 갖게 된다. 마치 처음 유월절날, 문지방에 발려진 그 양의 고기를 집안에 모여 있는 자들이 나누어 먹어서 양의 죽음과 자신의 장자의 죽음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는 동물이나 인간을 피와 살 이렇게 이원화하는데 피는 생명이고 살점은 같은 흙에서 유래되었기에 일체화를 표현하기에 가능한 구조로 거론하고 있다.)

희생 제물의 살점으로 연명하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같은 희생 제물과의 일체성을 항상 확인 시켜 주는 생활 태도와 양식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희생 제물의 외형적 거룩이 드러난다.


3. 제사장에 나타나는 심판과 긍휼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이 필요하다. 직접 제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다. 제사장은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어떻게 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는가? 그것은 희생 제물 때문이다. 희생 제물의 피와 기름이 제사장의 옷과 몸에 직접 바르게 되어 있다. 제단도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된다.(출애굽기 29:19-25/레위기 9:9,12,18) 피란 생명을 뜻한다. 피는 생명과 일체이다.(레위기 17:10-14)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를 입어 거룩하게(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희생 제물 자체의 거룩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거룩한 사람에 의해서 희생 제물이 무사히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백성들의 신체나 옷에 희생 제물의 피가 묻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 없다고 간주하는 것은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정리되어야 한다.

첫째, 백성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꼭 거룩한 인물인 제사장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제사장 자신의 죄를 씻는 제사장은 누구인가?

둘째, 백성들이 제사장처럼 직접 옷이나 신체의 일부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거룩한 백성이 된다면 왜 제사장도 같은 백성의 일원으로서 직접 신체에 피를 묻히고 옷에 묻혀야 거룩한 사람이 되는가?

위의 두 가지 물음을 동시에 해결되려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야 한다. 레위기 19:18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원수를 갚지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즉 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에 의와 용서와 거룩이 전달되는 원리는,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원칙이다. 제사장이 직접 희생 제물과 일체가 되어야 하고 또 희생 제물로 가치 있을 만큼 완벽한 義를 소유하고 있다면 이 제사장 언약 지배체제 하에서는 모든 백성에게 동일한 의와 거룩이 돌아간다. 레위기 20:26에 보면,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여기서 거룩이란 이스라엘이 타민족과 차이나는 본질을 뜻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이방 신들과 차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다른 민족과 차이나게 구별하였다. 이 선택의 원리가 이스라엘 전체에 거룩이 돌아가는 근본적인 근거이다.

완벽하게 거룩한 어떤 인물이 직접 희생 제물로서 자신을 제공하되 그 인물이 백성을 대표할 만한 사람일 때, 위에서 언급한 문제는 간단하게 정리되는데 제사장의 신체에 직접 피를 묻히는 것은 그 제사장이 바로 희생 제물의 인격화임을 보여주고, 그분이 백성을 대표로 했기 때문에 다른 백성들에게 직접 신체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직까지 동물 희생 제물이 직접 사람의 제물로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인간 제사장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한계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백성들 중에 뽑혀 나온 그 어떤 아론 반열의 제사장도 완벽한 의인이 못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제사장들도 성소에 들어갈 때는 백성들의 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해서도 희생 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러니 희생 제물의 인격화가 아직 요원한 것이다.(히브리서 8:26-27, 5: 3/ 레위기 4: 3)

희생 제물에 모든 주도권이 가 있는 제사 제도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중에서 거룩한 인물이 나타나 거룩한 희생 제물과 일치되어야 하나님의 거룩은 온전히 이스라엘에 구현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온전한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하나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왕이 지상의 인물이 되어 이스라엘에 나타날 때 그분이 바로 희생 제물과 일치를 이룰 분이 된다. 올바른 왕이 제사장이 되는 경우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개입되며 그럴 때 거룩은 완성되고 이것이 하늘나라이다.(마태복음 5:17-20)

레위기에서, 제사장으로 지목된 자에게 하나님은 이런 차원에서 다른 백성들과 구별되기를 요구했었다. 그 거룩의 기준은 처음 창조시의 죽음과 상관없는 모습을 취하기를 당부하셨다. 그래서 제사장은 시체를 가까이해서는 안되고 또 불구자나 이미 몸을 더럽힌 여인과 혼인할 수 없게 된다.(레위기 21장 참조) 처음 창조 때, 창조 활동의 완성을 [안식]으로 표현했는데 레위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율법의 완성을 [안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죄 없는 상태가 바로 [말씀]대로 시행되는 경우이며 이런 경우에만 [안식]이 된다. 그래서 모든 제사일은 [안식일]이다. 그 [안식]의 절정은 [희년제도]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 자리를 찾고 제 모습을 찾아 들어가는 모든, 그 사회가 바로 하나님이 원했던 말씀대로의 안식 상태이고 그럴 때만 땅은 회복된다. 만약에 이런 율법이 시행되지 아니하면 땅은 비율법적인 것을 토해 내고, 죄악을 토해 내었기에 거룩한 상태로서 안식을 회복하는 것이다.(레위기 26장)

제사장에 있어서 희생 제물은 두 단계를 거쳐서 죽여야 한다. 하나는 제사장의 죄를 위하여 먼저 죽어야 된다. 이것을 보고 백성들은 자신들 전부가 죄인 됨을 감지하고 그 희생 제물의 죽음에서 심판을 느낀다.(제사장을 위한 제사나 백성들 전체의 제사는 동일하게 숫 송아지가 희생 제물로 등장된다. 레위기 4:3,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희생 제물을 부여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기어이 세워 나간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해하게 된다.

제사에 쓰여지는 인물이나 기구를 거룩케 하는 그 근원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그것은 모든 희생 제물의 피로 씻어 거룩해 진다. 예를 들면, 제사장이 될 사람은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쪽 손가락과 발가락에 피를 발라야 한다. 그리고 옷과 제단에도 뿌려야 한다.(출 29:19-21) 피란 그 희생 제물의 생명이다. 그러니 제사장의 몸과 옷과 제단에 뿌려진 피는 희생 제물의 생명이 뿌려진 것이다. 희생 제물의 생명 덕으로 제사장과 제사 기구들은 하나님 앞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기 본유의 목숨과 전에 인식되던 의미는 상실되어야 한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도 죽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온 이스라엘의 백성 전부에게도 희망 사항이다. 거룩하다는 인정을 받아 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제사장의 거룩이 자기의 본성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물의 생명에 근거한다고 봤을 때, 그 거룩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지게 된다. 희생 제물을 일단 거룩한 제사장에게 바치면 그 제물은 다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된다. 만약 그 제물이 제대로 열납되면 그 백성도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거룩]이란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이나 희생 제물에서 유발된다. 이것은 희생 제물이 거룩하다는 말이다.

제사장의 삶이 성소를 중심으로한 거룩을 지키고 유지하고 방어하는데 치중하는 것은, 이스라엘 내의 거룩이란 희생 제사가 드려지는 그 공간에 한정됨을 말해 주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국가 이스라엘이 전쟁 활동에 나서는 것은 제사장의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세 및 장로 그리고 그 수하에 있는 지도자급에 있는 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소극적으로 거룩을 유지하는 것은 제사장의 할 일이다. 이미 거룩이 국가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잡고 있고 그리고 제사장이 그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이다.(출 19:6)

따라서 희생 제물은 정결한 창조의 그 모습으로 세상의 죄악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로 개입된 것이고 그 목표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안식]의 때를 겨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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